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71 명

소속 인물

임레 너지

Nagy Imre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 1896–1958 ✕ 처형

13일의 총리

1958년 6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을 거부하며 말했다. "유일한 위안은 언젠가 헝가리 민족과 국제 노동계급이 나에 대한 이 중대한 혐의를 벗겨 주리라는 확신이다."

스탈린 사후 헝가리 '새 노선'을 주도한 개혁 공산주의자. 1956년 봉기 때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중립·바르샤바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소련에 체포돼 58년 처형, 89년 재매장은 체제 전환의 상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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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21러시아군 포로, 적군 가담, 볼셰비키 입당
  • 1930–44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농업 연구
  • 1945–46농업장관, 토지개혁 집행
  • 1953–55총리, 「새 노선」: 수용소 해산, 농민 부담 경감
  • 1955실각·출당
  • 1956.10–11봉기의 총리, 다당제·중립 선언
  • 1958/1989비밀 재판 후 처형, 1989년 영웅광장 재매장

옙세이 그리고리예비치 리베르만

Евсей Григорьевич Либерман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 1897–1981 ○ 심장마비

1965년 경제 개혁의 이론적 촉매

「사회에 이로운 것은 모든 기업에도 이로워야 한다」 — 1962년 《프라우다》 논문의 핵심 명제

소련의 경제학자. 1962년 9월 《프라우다》에 발표한 논문 「계획, 이윤, 프리미엄」으로 전연방 경제 토론을 촉발하여 1965년 코시긴 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윤 지표를 기업 평가의 핵심으로 삼고 '사회에 이로운 것이 개별 기업에도 이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소련 최초의 기계식 회계 스테이션을 창설했고, 1938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1939년 말 복권되었다. 아내 레기나 고로비츠는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누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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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볼린현 슬라부타에서 산림영지 관리인의 아들로 출생
  • 1920키예프대학교 법학부 졸업
  • 1923–1929우크라이나 노동연구소 실습생, 할키우 공장에 소련 최초 기계식 회계 스테이션 창설
  • 1930–1941하리코프 공학경제연구소 기계제조업 조직·계획 주임
  • 1938–1939NKVD에 간첩·테러 혐의로 체포, 15년형 선고 후 1939년 말 복권
  • 1941–1943키르기스 SSR 재무부 근무
  • 1947–1962하리코프 공학경제연구소 교수, 기계제조업 경제·계획 연구실 창설
  • 1956경제학 박사 (논문: 사회주의 기업의 수익성 제고 방안)
  • 1962《프라우다》에 「계획, 이윤, 프리미엄」 발표 — 전연방 개혁 논쟁 촉발
  • 1962–1981하리코프대학교 통계·회계학과 교수
  • 1981할키우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알렉세이 블라디미로비치 스네고프

Алексей Владимирович Снегов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계 1898–1989 ○ 자연사

굴라크 생존자로서 탈스탈린화를 밀어붙인 구볼셰비키

미코얀이 소치행을 권했지만, 스네고프는 당원증을 돌려받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고 버텼다.

알렉세이 스네고프는 초기 소비에트 당 사업을 거친 구볼셰비키였지만, 대숙청의 조작된 혐의로 15년 넘게 굴라크에 갇혔다. 1954년 석방과 복권 뒤 그는 수감 경험을 바탕으로 니키타 흐루쇼프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스탈린 체제의 폭력과 재활 문제를 알리는 자문자가 되었다. 올가 샤투노프스카야와 함께 희생자들의 복권을 추진하고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개인숭배를 비판하도록 흐루쇼프를 설득했다. 이후에도 더 깊은 탈스탈린화를 주장하다가 감시와 비판을 받았으며, 1967년 잠시 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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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볼셰비키파 가입
  • 1918–1921빈니차·포돌리아 지하 당조직과 포돌리아 губер니아 당위원회 책임서기
  • 193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31–1937자캅카스·이르쿠츠크·첼랴빈스크·차파옙스크·무르만스크의 당·정치 부문 간부
  • 1937–1954대숙청으로 체포되어 굴라크와 유형지에서 15년 이상 복역
  • 1954–1960석방·복권 후 내무부 굴라크 정치부장
  • 1956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 비판과 희생자 복권을 촉구
  • 1967잠시 당에서 제명되었으나 곧 복권

알렉세이 마트베예비치 루먄체프

Алексей Матвеевич Румянцев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 1905–1993 ○ 자연사

흐루쇼프의 경제 토론을 연 정치경제학자, 소련 사회학의 제도적 창립자

「모든 사회구성체는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났는데, 사회주의 구성체만은 조직화된 대중행동으로 생겨났다. 우리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 연구소 간부 회의에서 (V.A. 야도프 회고)

흐루쇼프 해빙기의 경제학자. 1962년 리베르만 논문을 프라우다에 실어 경제개혁 논쟁을 촉발했고, 소련 최초 사회학 연구소를 창립했다. 코무니스트·프라우다 주필을 지냈으나 자유주의 성향으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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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하리코프 국민경제연구소 졸업
  • 1925–1943우크라이나 SSR 농업·법무인민위원부 근무 후 하리코프대학·기계제조연구소 정치경제학 교수
  • 1940경제학 후보학위 취득, 지도교수 오스트로비탸노프, 심사 셰필로프
  • 1943–1949하리코프 주 당위원회 서기 — 흐루쇼프의 우크라이나 당 조직에서 활동
  • 1950–1952우크라이나 SSR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사회과학부 책임자
  • 1952–1955중앙위 경제·역사과학부장, 과학·문화부장
  • 1955–1958『콤무니스트』 주필 — 흐루쇼프 해빙기의 당 이론지
  • 1958–1964『평화와 사회주의의 문제들』(프라하) 주필 — 유럽공산주의 네트워크의 중심지
  • 1962흐루쇼프 후원으로 리베르만 논문을 『프라우다』에 게재 — 경제개혁 논의 촉발
  • 1964–1965『프라우다』 주필 — 솔제니친 게재 시도 후 해임
  • 1965–1967과학아카데미 경제학부 학술서기
  • 1967–1971과학아카데미 부원장 겸 ИКСИ 소장 — 소련 사회학의 제도화
  • 1972ИКСИ의 '지나친 자유주의'로 부원장·소장직 사임, 연구소 재편
  • 1971–1993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회 위원, 『정치경제학』 교과서 편집

스테판 스타셰프스키

Stefan Staszewski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 1906–1989 ○ 자연사

흐루쇼프 비밀연설을 수만 부 찍어내 당의 통제 밖으로 퍼뜨린 바르샤바 당위원회 개혁파 제1서기

1956년 3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휴식 시간, 흐루쇼프에게 스탈린의 반유대주의를 따져 묻자 흐루쇼프는 손을 떨며 스탈린이 소련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바르샤바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공산청년운동에 가담했고,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한 후 폴란드 지하당 활동과 소련 체류를 오갔다. 1938년 NKVD에 체포되어 콜리마 수용소에서 8년을 보낸 뒤 1945년 폴란드로 돌아와 선전·언론·농업 부문에서 스탈린주의 노선을 집행했다. 1955년 바르샤바 당위원회 제1서기가 된 후 제20차 당대회를 계기로 개혁파로 전환, 당원들이 비밀연설을 학습하도록 제안하고 1만 5천여 부의 비공식 인쇄본을 찍어내 연설문이 폐쇄된 당 문서에서 세계적 문서가 되는 결정적 통로를 열었다. 폴란드 10월 후 고무우카와 충돌해 1957년 해임되고 1968년 반유대 캠페인으로 축출되었으며, 이후 반체제 운동을 지지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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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청년공산주의동맹(KZMP) 가입
  • 1926–1929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 1930–1932폴란드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국 활동
  • 1938–1945NKVD에 체포, 콜리마 강제수용소 8년형
  • 1945–1948카토비체주 선전비서, 『트리부나 로보트니차』 편집장
  • 1948–1954PZPR 중앙위원회 출판·언론부장
  • 1955–1957PZPR 바르샤바 위원회 제1서기
  • 1957–1958폴란드 통신사(PAP) 사장
  • 1968반유대 캠페인으로 PZPR에서 축출

요세프 파벨

Josef Pavel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08–1973 ○ 사망, StB 감시 속에서

프라하의 봄에서 내무장관으로 보안기관 개혁을 시도했으나 KGB의 내부 교란으로 좌절된 인물

1968년 8월 침공 당일, 파벨이 해임한 부하 샬고비치는 KGB와 함께 두브체크를 체포했고, 내무부는 장관의 손을 떠났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했고, 1948년 쿠데타에서는 민병대를 지휘했다. 내무차관으로 공포정치에 가담했으나 1951년 체포되어 슬란스키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고문과 25년형을 받았고, 1955년 무죄 석방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내무장관으로 복귀해 국가보안대(StB) 개혁을 추진하고 KGB 연락장교 6명의 존재를 폭로했으나, 부하인 빌리암 샬고비치가 KGB와 공모해 침공 당일 두브체크 체포를 지원하면서 개혁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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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35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료
  • 1937–1939스페인 내전 참전 (디미트로프 대대 지휘)
  • 1947KSČ 중앙위 방위·보안부문 비서장
  • 1948인민민병대 주참모장, 내무차관
  • 1951–1955체포·고문, 1953년 25년형 선고, 1955년 무죄 석방
  • 1968.4–8체코슬로바키아 내무장관
  • 1968–1973강제 퇴임 후 KSČ 제명, StB 감시 속에 사망

프란티셰크 크리겔

František Kriegel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1908–1979 ○ 당 제명 · 의사면허 박탈 1969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을 거부한 유일한 프라하의 봄 지도자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앞에 선 크리겔은 이렇게 말했다: '쏘든지 시베리아로 보내든지, 나는 서명하지 않겠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KSČ 상임간부회 위원 겸 민족전선 의장으로 개혁을 이끌었다.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당일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연행되었고, 26명의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인 중 유일하게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을 거부했다. 이후 당에서 축출되고 의사 면허도 박탈당했으나, 1977년 헌장 77에 최초 서명하며 생애 마지막까지 반체제 인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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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KSČ 입당
  • 1936–39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군의관
  • 1940–45중국-버마 전선 군의관
  • 1949–52보건부 차관
  • 1964–68국민의회 의원 → KSČ 중앙위원
  • 1968.4–8민족전선 의장 겸 KSČ 상임간부회 위원
  • 1968.8모스크바 의정서 서명 거부
  • 1969–77당 제명·의사면허 박탈, 이후 헌장 77 최초 서명

요세프 스므르콥스키

Josef Smrkovský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911–1974 ○ 감시 속 사망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프라하의 봄 최고 개혁파가 된 사람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 후 귀국한 스므르콥스키는 동료 지도자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국민 앞에 나서 말했다. 브레즈네프가 그의 연설만을 문제 삼았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공산주의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에서 두브체크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맹이었다. 나치 점령기 체코민족평의회 부의장으로 프라하 봉기를 이끌었고, 1948년 2월 쿠데타에서 인민민병대를 지휘했으며, 1951년 슬란스키 사건 연루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1963년 복권되어 1968년 국민의회 의장이 되었다. 1968년 1월 『루데 프라보』 인터뷰로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고, 8월 침공 후 모스크바로 끌려가 의정서 서명을 강요당했으며, 귀환 후 후사크에 의해 축출되어 감시 속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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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KSČ 입당, 붉은노조 청년서기
  • 1944–45지하 중앙위원, 체코민족평의회 부의장으로 프라하 봉기 주도
  • 1946–48국민의회 의원, 인민민병대 부사령관으로 2월 쿠데타 지원
  • 1951–55슬란스키 사건 연루, 종신형 → 1955년 석방
  • 1955–63JZD 파블로비체 의장으로 복무
  • 1963–67복권, 중앙위원 → 임업·수자원부 장관
  • 1968.4–1969.1국민의회 의장, 두브체크의 핵심 개혁 동맹
  • 1968.8–1970모스크바 연행, 의정서 서명 → 후사크에 의해 축출·제명

페렌츠 도나트

Donáth Ferenc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인 1913–1986 ○ 사후 복권, 1989년

혁명과 개혁을 잇고 독재의 상처를 짊어진 정치가

1956년 11월 4일, 나지 임레와 함께 소련의 공격을 규탄하는 성명을 작성한 뒤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도나트 페렌츠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과 농업정책에 참여한 정치가이자 농업경제 연구자였다. 전후 토지개혁과 집단화 추진에 관여했지만, 1951년 숙청 재판으로 투옥된 뒤 복권되어 당 노선과 국가 폭력의 긴장을 직접 겪었다. 1956년 나지 임레를 지지하며 혁명을 해석하고 소련의 군사 개입을 비판한 그는 나지 임레 재판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60년 석방되었다. 이후 농업경제를 연구하고 1980년대 민주 야당의 대화를 조직했으며, 1989년 법적으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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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헝가리 공산당 입당, 지하 활동
  • 1937–19393월 전선 조직 참여, 국민농민당 창립 참여
  • 1945–1948국가토지정착위원회 부위원장, 농업부 정치차관
  • 1948–1951헝가리 노동인민당 중앙위원회 사무국·농촌부문 지도
  • 1951–1954숙청 재판으로 15년형, 1954년 복권·석방
  • 1956나지 임레 주변 개혁파,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임시집행위원
  • 1958–1960나지 임레 재판에서 12년형, 1960년 특별사면 석방
  • 1976–1985협동조합 연구자, 민주 야당 연대와 모노르 회의 조직
  • 1989나지 임레 재판 판결 무효화로 사후 복권

지리 하예크

Jiří Hájek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13–1993 ○ 자연사

국제법의 언어를 시민권 투쟁으로 돌린 외교관

1968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침공을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했다.

지리 하예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프라하의 봄 개혁과 그 좌절을 모두 경험했다. 1968년 소련 주도의 침공을 유엔에서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한 뒤 관직과 공산당 지위를 잃었고, 국제적 약속이 국내 권력보다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는 1977년 바츨라프 하벨, 얀 파토치카와 함께 샤르타 77의 첫 대변인이 되어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인권 조항을 시민적 책임의 근거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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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5나치 독일에 투옥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 의원·노동운동 간부
  • 1950–1953정치·경제과학대학 총장
  • 1955–1958영국 주재 대사
  • 1958–1965외무차관·유엔 주재 대표
  • 1965–1968교육부 장관·외무부 장관
  • 1977–1979샤르타 77 첫 대변인
  • 1988–1990체코슬로바키아 헬싱키위원회 창립자·의장

마리안 리비츠키

Marian Rybicki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계 1915–1987 ○ 자연사

노동자 봉기 앞에서 질서를 세운 법률 관료

1956년 7월 17일, 그는 수사에서 파업 노동자와 ‘말썽꾼, 범죄자, 도발자’를 구별하겠다고 밝혔다.

마리안 리비츠키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법률가이자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당과 국가의 법률·행정 기구를 오가며 전후 체제의 제도화를 담당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 뒤 그는 검찰총장으로서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와 ‘말썽꾼, 범죄자, 도발자’를 가르는 ‘두 흐름’ 논리를 공개적으로 제시했다. 이 구분은 국가가 노동자의 경제적 요구와 형사적 책임을 분리해 다루려 한 방식이었지만, 뒤이은 수사와 재판의 틀도 규정했다. 이후 법무장관과 법학 연구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국가의 법과 통치 문제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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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바르샤바대학교 법학 과정 졸업
  • 1945–1947국가민족회의 의장단 법률부 근무
  • 1947–1948폴란드 사회당 중앙집행위원회와 서기국 참여
  • 1948–1954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조직국 위원
  • 1952–1956국가평의회 초대 서기
  • 1956–1957폴란드 인민공화국 검찰총장
  • 1957–1965법무장관
  • 1965–1983폴란드 과학아카데미 국가·법 연구소 법학 교수 및 전국민족통일전선 서기

게저 로손치

Losonczy Géza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인 1917–1957 ○ 옥사, 사후 복권

개혁 공산주의 언론인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이 공격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로손치 게저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에서 출발해 당국의 억압과 교조주의를 비판한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나지 임레의 개혁파와 함께 다당제와 민중운동의 문제를 둘러싼 격변에 개입했고, 1956년 혁명 정부에서 국가장관으로 활동했다. 소련의 개입 뒤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며 단식하다가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나지 임레 집단에 대한 국가 탄압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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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36학생 잡지 「토바브」 편집
  • 1939–1941헝가리 공산당 가입 및 네프서바 기자
  • 1945–1949「서버드 네프」 국내정치부장
  • 1949–1951레바이 요제프 문화교육부 차관급 보좌관
  • 1951–1954정치 재판으로 수감
  • 1954–1956「머저르 넴제트」 기자, 페퇴피 서클 조직자
  • 1956-10–1956-11나지 임레 제2·제3 정부 국가장관
  • 1957나지 임레 재판 피고 예정, 수감 중 단식 사망

미클로시 기메시

Gimes Miklós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 1917–1958 ✕ 교수형

너지 임레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진 개혁파 언론인

《머저르 서버처그》 창간호에서 '오직 이 길로만 우리는 독립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헝가리를 세울 수 있다'고 썼다.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헝가리 언론인으로, 불법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종전 후 당 기관지 《사바드 네프》의 기자가 되었고, 초기에는 라코시 체제에 충실한 논객이었다. 슬란스키 재판과 모스크바 의사 사건을 목격하며 신념이 흔들렸고, 1955년 라이크 라슬로의 복권을 요구했다가 당에서 제명되었다. 1956년 혁명 당시 너지 임레 측근 중 가장 급진적인 인물로 《머저르 서버처그》를 창간·편집했으며, 소련군 개입 후에도 카다르 정권을 거부하고 지하 신문과 민주독립운동을 이끌다 체포되어 너지, 말레테르와 함께 사형당했다. 1989년 복권되어 같은 날 엄숙히 재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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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불법 공산주의 운동 가담, 노동봉사대 소집
  • 1944노동봉사대 탈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합류
  • 1945–1954《사바드 네프》 기자
  • 1954취리히·빈·파리 특파원
  • 1955라이크 복권 요구로 MDP 제명, 코르비나 출판사 번역가
  • 1956 summerMDP 재입당, 너지 임레 측근
  • Oct–Nov 1956《머저르 서버처그》 창간·편집
  • Nov–Dec 1956민주독립운동 결성, 지하신문 발행, 12월 5일 체포

요제프 실라지

Szilágyi József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 1917–1958 ✕ 교수형 (.4.24)

법정 침묵으로 사건이 분리되어 너지보다 두 달 먼저 교수형에 처해진 혁명가

1958년 4월 법정 최후 진술: "10월이 다른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해도, 헝가리 민중은 사회주의라는 옷을 입은 폭정도 용납하지 않으며 자유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데브레첸 출신의 공산주의 법률가로, 1949년 라이크 라슬로 재판의 근거를 의심했다가 모든 당직에서 해임된 후 너지 임레의 개혁파에 합류했다. 1956년 혁명기에는 너지의 개인 비서 겸 총리 비서실장으로 활동했으며, 11월 4일 소련군 진압 후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루마니아로 끌려갔다. 1년 넘게 취조에 협력하지 않고 단식 투쟁을 벌여 너지 재판에서 분리 심리되었고, 1958년 4월 24일 너지보다 두 달 먼저 교수형에 처해졌다. 1989년 6월 16일 영웅광장에서 너지·말레테르 등과 함께 재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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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39불법 공산당 입당, 데브레첸대학 법학박사
  • 1940–44체포되어 3년형 선고, 1944년 석방 후 지하 활동
  • 1945–46데브레첸 경찰서장, 국가경찰본부 조직
  • 1947–49당 중앙 군사·치안부서장, 중앙통제위원
  • 1949라이크 재판 의문 제기로 해임
  • 1953–56너지 개혁파 합류, 1956년 초 출당
  • 1956.10–11너지 개인 비서 겸 총리 비서실장
  • 1958분리 재판 후 사형, 4월 24일 교수형

팔 말레테르

Maléter Pál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인 1917–1958 ✕ 처형, 1989년 복권

협상과 무장 저항 사이에 선 군인

“가야 합니다. 목숨을 잃더라도 나라가 제 도움을 요구합니다.”

말레테르 팔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포로이자 반나치 투쟁을 거친 헝가리 장교로, 전후 공산당에 가입했다. 1956년 혁명에서 그는 킬리안 병영에 파견된 뒤 저항 세력과 휴전하고 병영 방어에 합류했으며, 군인과 시민 무장세력 사이의 조정에 관여했다. 너지 임레 정부의 국방장관이 된 그는 소련군과 철수 협상을 시도하다 체포되었고, 1958년 너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1989년 그는 복권되어 혁명의 순교자로 재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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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군 입대
  • 1940루도비카 사관학교 생도
  • 1944–1945소련군 포로, 반독일 유격대원
  • 1945임시정부 경비대대 지휘관, 헝가리 공산당 입당
  • 1956.10대령, 킬리안 병영 방어 지휘
  • 1956.11너지 임레 정부 국방장관, 소장
  • 1956.11.3퇴역 협상 대표, 퇴켈에서 체포
  • 1958처형
  • 1989복권, 추서 및 재매장
  • 1956.10.23라디오 방송국 건물에 파견된 기갑부대 지휘
  • 1956.10.25킬리안 병영 구원을 위해 전차부대 지휘
  • 1956.10.29–31무장세력과 휴전·협상, 국민위병 조직 논의 참여

빅토르 블라디미로비치 데멘체프

Виктор Владимирович Деменцев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계 1918–2010 ○ 자연사

국가재정의 경고자

1985년 4월 4일, 데멘체프는 보드카 생산 축소가 1986년 40억 루블, 1990년에는 150억에서 160억 루블의 예산 손실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빅토르 데멘체프는 지방 재정기관에서 출발해 소련 재무 행정의 고위 관료로 성장한 경제 관리자였다. 그는 알코올 판매 수입에 기대던 국가재정의 구조적 긴장을 드러내며,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의 급격한 생산 축소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경고는 재정 수입 감소뿐 아니라 밀주와 설탕 부족이라는 정책 부작용을 함께 계산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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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9치타·캄차카 지역 회계·재정 담당
  • 1944–1947캄차카주 통제·감사기관 감사관
  • 1949–1962고르노알타이·야로슬라블주 재정 책임자, 집행위 부의장
  • 1962–1965러시아공화국 재무부 국가수입관리국장·차관
  • 1965–1973소련 재무부 차관
  • 1973–1986소련 재무부 제1차관
  • 1986–1987소련 국가은행 이사회 의장

오타 시크

Ota Šik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19–2004 → 1968년 망명, 스위스 사망

계획과 시장 사이의 '제3의 길'을 설계한 체코슬로바키아 경제학자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시크는 안토닌 노보트니의 사임을 최초로 공개 요구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혁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보다 20년 앞서서.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 경제 개혁의 설계자였다. 1964년 저서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시장 메커니즘을 접목하는 신경제모델을 제시했고,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에서 노보트니 체제를 공개 비판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68년 두브체크 내각에서 부총리로 개혁을 주도했으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스위스에서 '제3의 길'을 이론화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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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공산당 입당, 대독 저항운동 참가
  • 1940~1945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수감
  • 1961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 1962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68.04~1968.12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 겸 경제개혁 조정관
  • 1970~1990스위스 장크트갈렌대학교 경제학 교수
  • 1990바츨라프 하벨 대통령 경제 고문

알렉산드르 두브체크

Alexander Dubček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 슬로바키아 1921–1992 ↓ 실각 1969

인간의 얼굴을 꿈꾸다 산림청으로 보내진 사람

1968년 8월 21일 새벽, 소련군 장교들이 두브체크의 사무실로 들이닥쳐 전화선을 끊고 수갑을 채웠다. 한 장교가 말했다: '필요하다면 체코인 백만 명을 죽여서라도 반혁명을 끝장낼 것이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슬로바키아 개혁공산주의자. 소련에서 소년기를 보내고 1968년 검열 폐지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추진했으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후 실각해 산림청 직원으로 15년을 보냈다. 1989년 하벨과 함께 발코니에 다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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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38소련 이주 노동자 가정에서 성장
  • 1944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참가
  • 1963–68슬로바키아 당 제1서기
  • 1968.1체코슬로바키아 당 제1서기: 프라하의 봄
  • 1968.8모스크바로 연행, 의정서 서명 강요
  • 1969–70해임, 터키 대사를 거쳐 산림청으로
  • 1989.12연방의회 의장으로 복귀

올드르지흐 체르니크

Oldřich Černík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 체코 1921–1994 ○ 교통사고 후 사망

프라하의 봄을 이끈 광부 출신 기술관료 총리

1968년 7월, 「2000개의 말」 선언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체르니크는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선언은 결코 반혁명의 표현이 아니라 당의 한 분파의 의견일 뿐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공산주의 총리(1968~1970). 광산 노동자 출신 기술관료로, 연료·에너지 장관과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8년 4월 행동강령을 채택한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총리로 임명되었다. 두브체크와 함께 프라하의 봄을 이끌었고, 8월 침공 후 소련에 연행되어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다. 귀국 후 개혁 지속을 약속했으나, 후사크 체제 아래 1970년 해임·제명되고 20년간 연구소 부소장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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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오스트라바 광산 노동자 가정에서 출생, 선반공으로 일함
  • 1945~49KSČ 입당, 오스트라바 고등광산학교 졸업
  • 1956~60KSČ 중앙위원회 서기
  • 1960~63연료·에너지 장관
  • 1963~68부총리 겸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 1968.4~70.1체코슬로바키아 총리: 행동강령, 프라하의 봄, 모스크바 의정서
  • 1970~71해임, KSČ 제명
  • 1970~89프라하 연구소 경제 부소장

샨도르 코파치

Kopácsi Sándor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인 1922–2001 ○ 자연사 · 1963년 사면

국가의 명령과 민중을 향한 총부리 사이에서 멈춘 경찰 수장

1956년 10월 23일, 그는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코파치 샨도르는 금속 노동자와 반나치 저항 활동가 출신의 헝가리 경찰 지휘관으로, 국가기구 안에서 개혁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부다페스트 경찰청장으로서 1956년 10월 23일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고, 봉기 세력과 협력하며 국가근위대 부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체포되어 나지 임레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63년 사면으로 석방되었고, 훗날 회고록으로 혁명의 내부 경험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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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모칸 반나치 저항운동 참가
  • 1945헝가리 공산당 입당, 경찰관이 됨
  • 1949내무부 수용소 업무 담당 국장
  • 1952–1956부다페스트 경찰청장
  • 1956국가근위대 부사령관
  • 1958나지 임레 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 1963사면으로 석방
  • 1975–2001캐나다 망명과 회고록 집필

게오르기 아르카디예비치 아르바토프

Георгий Аркадьевич Арбатов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 1923–2010 ○ 자연사

데탕트를 설계한 소련 최고의 미국 전문가, 아카뎀고로도크가 아닌 아르바트 거리에 연구소를 세우다

「우리의 진정한 비밀무기는 당신들에게서 적을 빼앗는 것이다」 — 아르바토프가 캘리포니아 대학교에서 냉전 종식을 설명하며, 1988년 12월

브레즈네프부터 고르바초프까지 소련 지도자들의 대미 외교정책을 설계한 최고의 미국 전문가. 1967년 미국·캐나다연구소(ISKAN)를 창설해 28년간 이끌며 SALT와 데탕트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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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4근위박격포대대 정찰대장, 포대장, 연대 참모차장보 — 칼리닌·보로네시·제1·2우크라이나 전선군, 드네프르 도하
  • 1949–1960외국문학출판사 편집자, 《보프로시 필로소피》 부장, 《노보예 브레먀》 부장, 《콤무니스트》 자문역
  • 1960–1963《세계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 논설위원 (프라하)
  • 1962–1964IMEMO 분야장, 이념투쟁 연구
  • 1964–1967CPSU 중앙위 국제부 자문그룹장, 브레즈네프 외교정책 자문
  • 1967–1995소련과학원 미국·캐나다연구소(ISKAN) 창설 소장, 아카데미크(1974)
  • 1971–1991중앙감사위원 → 중앙위 후보위원 → 중앙위 위원,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 1995–2010ISKAN 명예소장, 러시아과학원 고문, 회고록 《체제》 《나의 시대》 집필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

Wojciech Jaruzelski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 1923–2014 ○ 자연사

계엄령과 원탁회의 사이의 폴란드 지도자

1989년 원탁회의는 억압적 통치의 책임과 평화적 체제 이행이 한 인물의 경력 안에서 충돌한 사례다.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군인·공산당 지도자다. 1981년 계엄령을 선포해 연대노조를 탄압했으나, 1989년에는 야권과의 원탁회의 및 부분 자유선거를 받아들여 체제 전환의 협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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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1계엄령 선포
  • 1981–1989폴란드 통일노동당 제1서기
  • 1989원탁회의·부분 자유선거 수용
  • 1989–1990전환기 폴란드 대통령

레죄 니에르시

Nyers Rezső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인 1923–2018 ○ 자연사

사회주의 체제의 시장개혁을 밀어붙인 당 지도자

1989년 모스크바 협상에서 그는 당의 목표를 “민주적 사회주의, 자치, 의회 민주주의, 경제 민주주의”라고 제시했다.

니에르시 레죄는 헝가리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권 개혁 정치가로, 계획경제를 사회적 통제와 경제적 효율성의 결합으로 바꾸려 했다. 그는 1968년 신경제메커니즘을 이끈 뒤 정통파의 반발로 영향력을 잃었지만, 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안고 1989년 정치 전환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1989년 6월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의장으로 선출되어 집단 지도체제를 이끌었고, 10월 창당된 헝가리 사회당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 그의 경력은 사회주의를 민주화하고 시장기제를 도입하려 한 시도가 당의 해체와 다당제 전환으로 이어진 역사적 긴장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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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헝가리 사회민주당 입당
  • 1956식품산업부 장관
  • 1960–1962재무부 장관
  • 1968신경제메커니즘 개혁 설계
  • 1974–1981헝가리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고문
  • 1987–1988국회 개혁위원회 위원장, 국무상
  • 1989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의장, 헝가리 사회당 초대 의장

게오르기 호스로예비치 샤흐나자로프

Георгий Хосроевич Шахназаров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아르메니아 1924–2001 ○ 자연사

소련 정치학의 창시자, 페레스트로이카 정치개혁의 두뇌

고르바초프도, 나도, 우리 모두 이중사고자였다. 머릿속에서 진실과 선전을 끊임없이 저울질해야 했다. 반체제냐 굴종이냐, 그게 선택지였다」

바쿠 출신 아르메니아계 정치학자·법학박사. 소련 정치학회를 창립해 17년간 이끌며 사회주의 민주주의 이론을 개척했고, 소비에트 사회 내 이익집단의 다원성을 인정한 초기 이론가 중 한 명이었다. 고르바초프 보좌관으로서 당 독점 폐지·경선 도입·대통령제 전환의 헌법개혁을 설계했으며, 퇴임 후 회고록 『자유의 대가』를 집필하고 SF 작가 '게오르기 샤흐'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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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포병대 화기소대장·포대정찰반장, 쾨니히스베르크·세바스토폴·민스크 해방전 참전
  • 1949–1952아제르바이잔 국립대 법학부 졸업, 소련 과학아카데미 법학연구소 대학원
  • 1952–1960정치출판사(Politizdat) 편집자
  • 1960–1964『정치자습』·『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근무
  • 1964–1988중앙위 사회주의국가부 자문관 → 부부장 → 제1부부장 (동독·폴란드·체코·쿠바 담당)
  • 1969법학박사: 논문 「사회주의 민주주의: 문제와 전망」
  • 1973–1990소련 정치학회 회장, 국제정치학회(IPSA) 부회장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연방최고회의 대의원
  • 1988–1991고르바초프 보좌관 → 소련 대통령 고문: 정치개혁·헌법개정 설계
  • 1990–1991인민대의원, 최고회의 헌법입법소위원회 위원장
  • 1992–2001고르바초프 재단 글로벌문제센터 소장

미에치스와프 프란치셰크 라코프스키

Mieczysław Franciszek Rakowski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 1926–2008 ○ 암으로 사망

1989년 선거에서 국민이 거부한 폴란드의 마지막 공산당 총리

1983년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연대노조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바웬사가 '수상, 폴란드인끼리 이야기합시다'라고 하자 라코프스키는 '박사와 박사로서 이야기합시다'라고 답했다.

폴란드 통일노동당(PZPR)의 개혁파 정치인이자 『폴리티카』 주간의 편집장을 24년간 맡은 언론인이다. 1988년 10월 총리가 되어 원탁회의와 경제개혁(일명 빌체크법)을 추진했으나, 1989년 6월 4일 선거에서 전국명부에 올랐음에도 50%를 넘지 못해 낙선하며 체제의 민낯을 드러낸 인물이 되었다. 선거 참패 후 PZPR의 마지막 제1서기가 되어 1990년 1월 당 해산을 주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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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폴리티카』 편집장
  • 1972–1989세임 의원
  • 1981–1985야루젤스키 내각 부총리
  • 1988–1989폴란드 인민공화국 총리
  • 19896월 4일 선거에서 전국명부 낙선
  • 1989–1990PZPR 마지막 제1서기, 당 해산 주재
  • 1990–2008『지시』 월간지 편집장, 회고록 집필

타데우시 마조비에츠키

Tadeusz Mazowiecki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 1927–2013 ○ 자연사

동구권 최초의 비공산 총리가 된 연대노조의 가톨릭 지식인

우리는 최근 과거의 역사를 굵은 선으로 가른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 위기에서 폴란드를 구하기 위해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만 책임질 것이다.

가톨릭 평신도 지식인으로 1958년 독립 월간지 《비엥치》를 창간·주재하고,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즈나크' 가톨릭 의원단 소속으로 의회에서 양심적 반대를 실천한 폴란드의 정치인이다. 1980년 그단스크 파업에서 연대노조 고문단을 이끌고 《티고드니크 솔리다르노시치》 초대 편집장을 맡았으며, 계엄령 아래 1년간 억류된 뒤 1989년 원탁회의 협상의 핵심 설계자로 활동했다. 1989년 8월 24일 동구권 최초의 비공산당 총리로 취임해 발체로비치 계획을 통한 급진적 시장 개혁을 단행했고, '굵은 선'으로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했으며, 1990년 대선에서 바웬사에 패배한 뒤 민주연합을 창당해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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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81《비엥치》 창간·편집장
  • 1961–1971'즈나크' 의원단 소속 의원
  • 1980그단스크 파업 연대노조 고문단장
  • 1981《티고드니크 솔리다르노시치》 초대 편집장
  • 1981–1982계엄령 아래 억류
  • 1989원탁회의 협상 핵심 인물
  • 1989–1991폴란드 총리
  • 1992–1995유고전범조사 유엔 특별보고관

타티야나 이바노브나 자슬랍스카야

Татьяна Ивановна Заславская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 1927–2013 ○ 자연사

소비에트 경제사회학의 창시자,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적 뇌관

「소비에트 경제학자로서 국가로부터 높은 봉급을 받는 11명의 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나는 경제와 사회의 상태에 대해 인민 앞에 개인적으로 책임을 진다고 생각한다」 — 1983년

물리학도에서 경제학으로 전향한 키이우 출신 학자.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농촌사회를 연구하며 소비에트 경제사회학을 개척했고, 1983년 계획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진단한 내부 보고서를 작성했다. KGB가 압수했으나 서방으로 유출되어 『노보시비르스크 선언』으로 불리며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적 토양이 되었다. 소비에트 사회학 협회 회장, VTsIOM 초대 소장, 인민대의원으로 사하로프·옐친과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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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50모스크바대 물리학과 3년 수료 후 경제학부 우등 졸업
  • 1950–63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농업 부문 연구, 1956년 кандидат 학위
  • 1963–87노보시비르스크 IEiOPP, 1967년 사회문제 부서장, 경제사회학 학파 창립
  • 1968 / 1981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이어 정회원(당시 여성 학자 5명 중 한 명)
  • 1983「노보시비르스크 선언」: 계획경제의 구조적 모순과 사회적 경직을 진단
  • 1986–91소비에트 사회학 협회 회장
  • 1988–92VTsIOM(전연방 여론연구센터) 창립 소장
  • 1989–91인민대의원, 사하로프·옐친과 지역간 대의원 그룹에서 활동

스타니스와프 카니아

Stanisław Kania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인 1927–2020 ○ 자연사 · 2012년 무죄

타협을 모색하다 당권을 잃은 당 지도자

1981년 10월, 당 중앙위원회는 카니아를 물러나게 하고 야루젤스키를 제1서기로 선출했다.

스타니스와프 카니아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지도자로서 당의 통제와 사회적 요구 사이의 균열을 관리하려 했다. 1980년 8월 파업과 연대자유노조의 등장 뒤 그는 노조 및 가톨릭 세력과 대화를 모색했지만, 당 내부의 불신과 경제 위기는 타협의 공간을 좁혔다. 소련 지도부의 압박 속에서 1981년 10월 제1서기직에서 물러났고, 곧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뒤를 이었다. 1981년 계엄령 도입 책임으로 기소됐으나 2012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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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폴란드 노동자당 입당
  • 1948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창립대회 대표
  • 1968–1971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
  • 1971–1980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75–1981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정치국원
  • 1980–1981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2–1985폴란드 국가평의회 위원

빅토르 아타나시에 스턴쿨레스쿠

Victor Atanasie Stănculescu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루마니아 루마니아 1928–2016 ○ 살인죄 15년형, 2014년 가석방

혁명의 아침에 편을 바꿔 독재자를 무너뜨린 장군

12월 22일 아침, 그는 절친한 군의관에게 부탁해 멀쩡한 왼쪽 다리에 깁스를 감고 혁명 진압에서 빠지려 했다.

루마니아 공산군 포병장교 출신으로 1986년 국방차관에 올랐다. 1989년 12월 22일 차우셰스쿠로부터 국방장관에 임명된 직후 군에 병영 복귀 명령을 내려 혁명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었고, 12월 25일 차우셰스쿠 부부의 즉결재판과 처형을 조직·집행했다. 혁명 후 국방장관과 국가경제장관을 지냈으나, 티미쇼아라 유혈 진압 책임으로 2008년 살인죄가 확정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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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시비우 포병장교학교 졸업
  • 1952–1981포병·군수 참모, 대령까지 승진
  • 1981–1986국방차관
  • 1986–1989국방제1차관
  • 1989.12.17–20티미쇼아라 봉기 진압 지휘차 파견
  • 1989.12.22국방장관 임명 직후 「명령 38호」로 군 병영 복귀, 혁명 합류
  • 1989.12.25차우셰스쿠 부부 즉결재판·처형 조직
  • 1990–1991국가경제장관 → 국방장관

아르놀드 뤼텔

Arnold Rüütel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1928–2024 ○ 자연사

소비에트 체제 안에서 주권 선언을 밀어붙여 에스토니아를 제국 밖으로 이끈 농학자

루키야노프가 '반헌법적 행위'로 10년형을 경고하자, 뤼텔은 버티며 말했다. '우리는 최고회의를 소집해 독립 선언을 표결에 부칠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주권 선언'이 아닌 '독립 선언'이라고 말해 버렸다고 그는 훗날 회고했다.

에스토니아 사레마 섬 출신의 농업경제학자로, 소비에트 체제 안에서 에스토니아 농업아카데미 총장과 공산당 간부를 거쳐 1983년 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이 되었다. 1988년 11월 16일 모스크바의 투옥 위협을 무릅쓰고 주권 선언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소련 해체의 첫 균열을 냈고, 1990년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소련 통치의 불법성을 선언하고 독립 회복 이행기를 이끌었다. 1991년 독립 후 2001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6년까지 재임하며 NATO와 EU 가입을 성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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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0사레마 집행위원회 농업부문 수석 농학자
  • 1955–1957타르투 농업기계화학교 교사
  • 1957–1963수의학·축산연구소 실험농장 주임 수의사 겸 농장장
  • 1963–1969타르투 기준국영농장장
  • 1969–1977에스토니아 농업아카데미 총장
  • 1977–1979에스토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 담당 서기
  • 1979–1983에스토니아 S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83–1990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1990–1992에스토니아 최고회의 의장
  • 2001–2006에스토니아 공화국 대통령

이반 티모페예비치 프롤로프

Иван Тимофеевич Фролов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 1929–1999 ○ 자연사

페레스트로이카의 철학적 기초를 놓은 마르크스주의 인문학자: 유전학에서 인간학까지

「나는 '당의 과학'이라는 개념 자체를 비판한다. 정치는 과학의 철학적 해석에만 관여할 뿐, 과학 자체를 평가할 수 없다」 — 『유전학과 변증법』, 1968년

리센코주의를 철학적으로 무너뜨린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고르바초프의 보좌관으로 페레스트로이카에 '진정한 휴머니즘'을 제시했으며, 생명윤리와 인간 종합연구를 개척했다. 프라우다 주필과 정치국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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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모스크바대 철학부 졸업 (은메달)
  • 1958철학 후보박사 — 「결정론과 목적론」
  • 1965–68CPSU 중앙위 이념담당 서기 보좌관
  • 1966철학 박사 — 「생물학 방법론의 문제들」
  • 1968–77『철학의 제문제』 주필, 1968년 『유전학과 변증법』 출간
  • 1976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이어 정회원
  • 1986–87『콤무니스트』 주필, TV 「철학 대화」 진행
  • 1987–89고르바초프 서기장의 과학·교육·문화 보좌관
  • 1989–91『프라우다』 주필
  • 1989–90CPSU 중앙위 서기
  • 1990–91CPSU 중앙위 정치국원
  • 1991–99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인간연구소 창설·소장

즈데녜크 믈리나르시

Zdeněk Mlynář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30–1997 ○ 자연사

사회주의를 민주화하려 한 개혁 공산주의자

즈데녜크 믈리나르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법률가로, 사회주의를 민주적 통제와 시민의 능동성에 결합하려 했다.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중앙위원회 서기로 일하며 알렉산데르 두브체크 주변의 개혁 지도부에 참여했고, 행동강령을 만든 정치·법률 연구팀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의 침공 뒤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고 곧 개혁 노선의 한계와 점령의 현실에 부딪혀 당과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헌장 77에 서명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정치학자이자 프라하의 봄을 성찰한 저술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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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5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에서 수학
  • 1955–1956프라하 검찰총국에서 근무
  • 1956–1968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국가·법 연구소 연구자
  • 1967–1968공산당 정치체계 개혁 연구팀 및 행동강령 작성 참여
  • 1968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프레지디엄 위원
  • 1970공산당에서 제명, 국립박물관에서 곤충학 연구
  • 1977–1997헌장 77 서명 뒤 오스트리아 망명, 인스브루크대학교 정치학 교수

레오니트 이바노비치 아발킨

Леонид Иванович Абалкин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 1930–2011 ○ 자연사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의 수석 경제 이론가, 급진파와 보수파 사이의 '규제된 시장' 설계자

「우리가 금융 전선에서 승리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승리할 것이다」 — 아발킨이 자주 인용한 레닌의 말

모스크바 출신 정치경제학자. 1986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이 되어 페레스트로이카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했고, 1989년 경제개혁 국가위원장 겸 부총리로 기용되었다. 핵심 구상인 '규제된 시장경제'는 국가 통제 아래 단계적 시장화를 주장했으며, 샤탈린의 500일 계획이 제안한 충격요법과 대비되었다. 1990년 여름 최고회의의 공식 노선으로 채택되었으나 고르바초프의 절충에 실망해 1991년 초 사임했다. 해체 후 『경제의 제문제』 편집장으로 러시아 사회경제 사상을 정립하고 옐친식 급진 자유화에 맞서 중국식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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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8칼리닌그라드주 구세프 농업기술학교 교사·교무부원장
  • 1958–1966모스크바 국립경제연구소 대학원 → 플레하노프 경제대학 조교·부교수·교수
  • 1966–1976플레하노프 경제대학 정치경제학 주임교수
  • 1976–1985CPSU 중앙위 사회과학아카데미 정치경제학 주임교수
  • 1984 / 1987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이어 정회원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1기)
  • 1989–1990경제개혁 국가위원회 위원장 겸 소련 부총리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5–12소련 대통령 고문
  • 1991–2005과학아카데미·러시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2기)
  • 1992–2011『경제의 제문제』(Voprosy Ekonomiki) 편집장

엔델 테오도로비치 리프마

Endel Teodorovich Lippmaa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인 1930–2015 ○ 사망

인산염 광산 계획을 내부에서 막아낸 에스토니아 과학자

TV 토론에 서류 가방을 들고 나와 상대가 반박할 때마다 해당 문서를 꺼내 사실을 입증하곤 했다.

에스토니아의 물리화학자이자 정치인. 탈린공과대학에서 유혈암 기술을 전공한 뒤 소련권 최초로 NMR 분광계를 자체 제작하며 고체 고분해능 핵자기공명 분야의 선구자가 되었다. 에스토니아 과학아카데미 회원 시절 1987년 인산염 광산 계획의 환경·인구적 위험을 보고서로 폭로해 '인산염 전쟁'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고, 소련 인민대의원으로서 독소불가침조약 비밀의정서를 발굴·공개해 발트 병합의 법적 근거를 무너뜨렸으며, 독립 회복 후 두 차례 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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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탈린공과대학 졸업, 유혈암 기술 전공
  • 1956화학 박사 학위 취득
  • 1969소련 화학물리연구소에서 물리·수학 박사 학위 취득
  • 1972에스토니아 과학아카데미 회원 선출
  • 1975에스토니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아카데미크), 2014년까지 이사회 위원
  • 1980화학·생물물리연구소 설립 및 소장 취임
  • 1989–1991소련 인민대의원, 독소조약 비밀의정서 폭로
  • 1990–1991에스토니아 공화국 동방문제 장관
  • 1995–1996에스토니아 공화국 유럽문제 장관
  • 1996–1999리에기코구(국회) 의원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루마니아 루마니아 1930–2025 ○ 노환으로 사망

차우셰스쿠의 후계자에서 그의 처형을 명한 혁명 지도자

'부끄러운 일이지만 필요했다': 즉결재판과 처형에 대해 훗날 일리에스쿠가 내린 평가.

루마니아 공산당 엘리트 출신으로, 1989년 12월 혁명의 와중에 민족구국전선(FSN)을 이끌며 차우셰스쿠 체제를 종식시켰다. 차우셰스쿠 부부의 즉결재판과 처형을 승인했으며, 1990년 85% 득표로 루마니아 최초의 자유선거 대통령이 되었다. 광부를 동원해 반대 시위를 진압한 미네리아드 사태로 평판에 금이 갔고, 훗날 혁명기 살상에 대한 반인도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세 차례 대통령을 지내며 NATO 가입과 EU 가입 협상을 완료했으나, 혁명인가 쿠데타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그를 끝까지 따라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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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루마니아 공산당 입당
  • 1965–1971공산당 중앙위원·선전부장·청년장관
  • 1971차우셰스쿠와 대립하며 지방으로 좌천
  • 1984–1989중앙위에서 제명, 기술출판사 국장
  • 1989.12민족구국전선(FSN) 창설·지도, 임시 대통령
  • 1990–1996루마니아 대통령 (제1·2기)
  • 2000–2004루마니아 대통령 (제3기)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1931–2024 ○ 사망

1988년 6월 니카라과에서 소환되어 에스토니아 주권 선언을 이끈 공산당 제1서기

「우리 대의원들은 에스토니아가 소련 내에서 주권적이고 평등한 구성원으로 남기를 바라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1988년 11월 주권 선언 직후

에스토니아 히우마섬 출신으로 1950년대부터 콤소몰과 당 기구에서 경력을 쌓아 1970년대에는 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까지 올랐다. 에스토니아 민족주의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1980년 모스크바에 의해 외교직으로 밀려나 베네수엘라와 니카라과 대사를 지냈다. 1988년 6월 16일 강경파 카를 바이노의 후임으로 소환되어 에스토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인민전선과 협력하며 그해 11월 에스토니아의 주권 선언을 이끌었다. 1991년 8월 에스토니아 독립 회복 선언에 찬성표를 던졌고, 독립 후에는 에스토니아 민주노동당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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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5콤소몰 각급 기관 근무; 타르투국립대학교 졸업(1955)
  • 1955–1961에스토니아 레닌주의청년공산주의자동맹(ELKNÜ)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61–1971에스토니아공산당 탈린시위원회 제1서기
  • 1963–1967에스토니아 SSR 제6기 최고회의 의장
  • 1971–1980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0–1988소련 대사, 베네수엘라(1980–1986) 및 니카라과(1986–1988)
  • 1988–1990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2–1995에스토니아 민주노동당 의장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1932–2010 ○ 자연사

당을 모스크바에서 분리해 낸, 독립 리투아니아의 첫 대통령이 된 공산주의자

1990년 1월 고르바초프가 빌뉴스까지 날아와 당의 분리를 되돌리라고 압박했을 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정은 당대회가 내렸고, 그것을 되돌릴 권한은 자신에게도 없다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경제 관리자 출신으로 1988년 사유디스의 지지 속에 리투아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12월 당을 소련공산당에서 분리하는 결정을 이끌었다. 연방 공화국의 집권당이 모스크바와 결별한 첫 사례였다. 독립 후인 1993년 첫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옛 공산당원이 선거로 집권할 수 있음을 보였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하면서 나토·유럽연합 가입의 길을 열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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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67리투아니아 SSR 건설자재공업부 장관
  • 1967–1977리투아니아 SSR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의장
  • 1977–1987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8–1989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독립 리투아니아공산당(소련공산당에서 분리) 제1서기
  • 1990리투아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1993–1998리투아니아 공화국 대통령
  • 2001–2006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 1932–2013 ○ 지병으로 사망

1989년 철의 장막을 절단한 헝가리 외무장관이자 개혁 총리

1989년 6월 27일, 호른과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알로이스 모크는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볼트커터로 철조망을 함께 끊으며 '철의 장막'에 첫 구멍을 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개혁파 외교관료에서 민주화 이후 총리까지 역임한 정치가로, 1989년 외무장관으로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알로이스 모크와 함께 절단하며 '철의 장막' 붕괴의 상징적 순간을 연출했다. 동독 난민들의 서독 탈출을 위한 헝가리 국경 개방을 주도하여 독일 통일의 물꼬를 텄고, 이는 1989년 동유럽 혁명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1994년 총선에서 헝가리 사회당을 압승으로 이끌어 총리가 되었고, 보크로시 긴축 개혁으로 시장경제 전환의 틀을 다졌다. 그의 정치 인생은 1956년 혁명 진압 부대 복무라는 깊은 그림자와 1989년 국경 개방의 역사적 공로 사이에서, 20세기 헝가리 좌파의 모순을 온몸으로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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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9재무부 근무
  • 1959–1969외무부 외교관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주재)
  • 1969–1983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 국제부 근무, 1983년 국제부장
  • 1985–1989외무부 차관(국무장관)
  • 1989–1990외무장관: 철의 장막 개방, 소련군 철수 협정 체결
  • 1990–1994헝가리 사회당 대표, 국회 외교위원장
  • 1994–1998헝가리 총리: 보크로시 긴축 개혁 단행

아르놀트 바실리예비치 보일루코프

Арнольд Васильевич Войлуков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계 1932–2016 ○ 자연사

개혁의 이면을 증언한 소비에트 은행가

그는 1991년 개혁의 발상이 국가보안위원회와 크류치코프에게서 나왔다고 회고했다.

아르놀트 보일루코프는 소련 국립은행의 고위 은행가로, 말년 소비에트 금융 운영의 내부를 경험했다. 그는 1991년 1월 화폐개혁을 집행한 기관의 책임자였을 뿐 아니라, 훗날 그 구상이 재무부나 발렌틴 파블로프가 아니라 국가보안위원회와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에게서 나왔다고 회고한 증언자로 중요하다. 그의 회고는 개혁을 둘러싼 제도 간 긴장과, 비밀리에 추진된 조치가 대중의 신뢰를 훼손한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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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모스크바 금융대학 졸업
  • 1955–1960년대국립은행 지역 기관에서 근무
  • 1960년대–1970년대크라스노야르스크 변강 국립은행 현금유통·출납업무 부장
  • 1980년대소련 국립은행 중앙기구 고위 간부
  • 1990–1991소련 국립은행 이사회 부의장
  • 1992–1994러시아 중앙은행 제1부총재

임레 포츠거이

Pozsgay Imre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 1933–2016 ○ 사망

1956년을 '민중봉기'라 부르고 자기 당의 정통을 무너뜨린 개혁 정치국원

서베를린에서 동독의 '반파시스트 방어벽'은 '치욕'이라며 철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MSZMP) 정치국원이자 개혁파의 이념적 후견자였다. 1989년 1월 28일 라디오에서 1956년 혁명을 '민중봉기'라 규정해 당의 정통성을 스스로 무너뜨렸고, 5월 서베를린에서는 베를린 장벽을 '치욕'이라 부르며 동독 체제를 비판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함께 범유럽 피크닉을 후원해 철의 장막에 첫 균열을 냈고, 이후 헝가리 사회당 부의장을 거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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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헝가리 노동인민당 입당
  • 1957–1969바치-키슈쿤주 당위 선전선동부장·서기
  • 1976–1980문화부 장관
  • 1980–1982교육부 장관
  • 1982–1988애국인민전선 사무총장
  • 1988–1989MSZMP 정치국원 겸 국가장관
  • 1989.011956년 혁명을 '민중봉기'로 규정
  • 1990헝가리 사회당 부의장·대통령 후보; 낙선

스타니슬라프 세르게예비치 샤탈린

Станислав Сергеевич Шаталин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 1934–1997 ○ 자연사

500일 계획의 설계자, 소련 계획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려 한 급진 개혁파 경제학자

지금 문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어떤 -이즘을 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 나라와 국민을 구하는 것입니다 — 1990년 당 중앙위원회 플레넘에서

레닌그라드 근교 출생. 칸토로비치의 제자로 투입산출모형과 최적계획 이론을 발전시켰고, 1987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9년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옐친의 합의로 작업반을 이끌어 500일 내 시장경제 전환을 구상한 '500일 계획'을 작성, 아발킨의 점진적 노선과 정면 대립했다. 연방 차원에서 채택되지 못했으나 러시아 공화국에서 부분 시행되었고, 제자 가이다르의 1992년 충격요법의 지적 토대가 되었다. 해체 후 '개혁' 재단을 이끌고 통합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명예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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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59재무부 산하 재정연구소 경제연구원
  • 1959–1965고스플란 산하 경제연구소(NIEI) 연구원
  • 1965–1976중앙경제수학연구소(TsEMI) 부소장·부문장
  • 1970–1983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수리경제분석학 주임교수
  • 1974 / 1987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이어 정회원
  • 1976–1986전연방체계연구소 수석연구원, MIPT 일반경제학 강의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과학기술진보경제예측연구소 연구원
  • 1989.12경제개혁 국가위원회 위원
  • 1989–1996과학아카데미·러시아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
  • 1990500일 계획 작업반장, 소련 대통령자문위원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통합민주당 창당 조직위원장, '개혁' 국제재단 이사장
  • 1991.6러시아 대통령선거 옐친 신임인

유리 니콜라예비치 아파나시예프

Юрий Николаевич Афанасьев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 1934–2015 ○ 자연사

보수파를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라 칭한 역사가

1989년 5월 27일, 제1차 인민대표회의 연단에서 보수파 의원들을 향해: "여기 계신 분들은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탈린-브레즈네프식 최고회의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1989년 제1차 소련 인민대표회의에서 보수파를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라고 규정한 역사가. 프랑스 아날학파 연구자로 출발해 모스크바 역사·기록연구소 학장(1986-1991)을 거치며 소련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주도했고, 사하로프·옐친과 함께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으로 민주개혁을 이끌었다. 1991년에는 러시아국립인문대학(RSUH)을 설립해 당 고등학교 건물에 독립적 인문학 공간을 열었고, 이후 옐친과 푸틴의 권위주의를 공개 비판하며 마지막까지 체제와 거리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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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66크라스노야르스크 수력발전소 콤소몰 서기
  • 1972–81고등콤소몰학교 교수·부총장
  • 1983–86『콤무니스트』 역사부문 편집위원
  • 1986–91모스크바 역사·기록연구소 총장; 탈스탈린화 주도
  • 1989–93소련 인민대표;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
  • 1990–92'민주 러시아' 공동 창립자·공동의장; 1990년 탈당
  • 1991–2003러시아국립인문대학(RSUH) 설립자·총장

페터르 믈라데노프

Петър Младенов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불가리아 불가리아 1936–2000 ○ 자연사

지프코프 이후 불가리아 전환을 연 외교관 출신 지도자

1989년 지프코프 교체 뒤의 협상은 불가리아에서 공산당 지배가 해체되는 출발점이었다.

오랫동안 불가리아의 외교를 맡은 공산당 지도자다. 1989년 10월 변화 요구를 공개한 뒤 토도르 지프코프 축출 후 당 총서기가 되었고, 야권과의 협상 및 다당제 전환 초기의 국가원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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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1989불가리아 외무장관
  • 1989–1990불가리아 공산당 총서기
  • 1989–1990전환기 국가원수·대통령

아나톨리 알렉산드로비치 솝차크

Анатол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бчак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러시아 러시아 1937–2000 ○ 심장마비

제헌회의 의장을 맡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초대 민선 시장

「볼로댜, 청동으로 굳어지지 말게」 — 푸틴에게 남긴 마지막 말, 2000년 2월

아나톨리 솝차크는 법학자이자 민주개혁가로서, 제헌회의 의장으로 1993년 러시아 연방 헌법 제정을 공동 주도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초대 민선 시장(1991–1996)을 지냈다. 레닌그라드 국립대 법학 교수 시절 블라디미르 푸틴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가르친 그는,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안드레이 사하로프·보리스 옐친과 함께 지역간의원그룹 공동의장을 맡았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군 지휘관을 설득해 병력 투입을 막고 궁전광장에 20만 시민을 결집시키며 저항을 조직했다. 부패 혐의로 1997년 파리로 망명했으나, 총리가 된 푸틴의 도움으로 1999년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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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1990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
  • 1989–1990지역간의원그룹 공동의장 (사하로프·옐친과 함께)
  • 1990–1991레닌그라드 시의회 의장
  • 1991–1996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 1993제헌회의 의장 (러시아 연방 헌법 공동 초안)
  • 1997–1999파리 망명

아불파즈 가디르굴루 오글루 엘치베이

Əbülfəz Qədirqulu oğlu Elçibəy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 1938–2000 ○ 자연사

범투르크주의를 내건 아제르바이잔 최초의 민선 대통령

1992년 앙카라를 방문한 자리에서 "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병사입니다"라고 말했다.

아제르바이잔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소련 해체 후 첫 민선 대통령. 아랍어 문헌학자로 출발해 1970년대 반소비에트 활동으로 1년 6개월을 복역했으며, 1989년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을 이끌며 민족주의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다. 1990년 1월 13일 국방위원회를 조직해 바쿠의 반아르메니아 포그롬과 '검은 1월'로 이어지는 민족위기의 한복판에 섰고,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구소련 공화국 중 최초의 반공산주의 민선 지도자가 되었다. 임기 내내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과 경제난에 시달리다 1993년 6월 러시아가 배후에 있던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권력을 승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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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바쿠 국립대학교 동양학부 아랍어문학과 졸업
  • 1963–1964이집트에서 통역사로 근무
  • 1969–1974바쿠 국립대학교 역사학 강사 → 반소비에트 활동으로 체포(1975), 1년 6개월 복역
  • 1976–1992아제르바이잔 과학아카데미 필사본연구소 연구원
  • 1989–1992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 의장
  • 1990.01국방위원회 조직, 의장 취임 (바쿠)
  • 1992–1993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대통령
  • 1997–2000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당 당수 (야당)

즈비아드 콘스탄티노비치 감사후르디아

ზვიად კონსტანტინეს ძე გამსახურდია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조지아 그루지야 1939–1993 ✕ 의문의 총상 사망

반체제 인권운동가에서 그루지야의 첫 민선 대통령이 된 민족주의자

“나는 평생 반대파였고 정부와 싸워 왔다. 이제 내가 정부다.” 1990년 새로 선출된 최고회의 의장이 된 뒤 가진 인터뷰에서.

그루지야의 문학자이자 반체제 운동가로, 유명 작가 콘스탄틴 감사후르디아의 아들이며 1977년 메라브 코스타바와 함께 그루지야 헬싱키 그룹을 결성해 소련의 인권 탄압을 국제사회에 고발했고 수차례 투옥되었다. 1989년 4월 독립위원회 공동 지도자로서 트빌리시에서 수만 명의 평화 시위와 단식 투쟁을 조직했고, 소련군의 유혈 진압은 그루지야 독립 여론을 결정적으로 급진화시켰다. 1990년 원탁-자유그루지야 연합을 이끌어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압승했고 1991년 5월 87% 득표로 그루지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취임 7개월 만에 무장 쿠데타로 축출되어 체첸으로 망명했으며 1993년 12월 서부 그루지야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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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지하 청년 조직 '고르가슬리아니' 창립
  • 1963–1977트빌리시 국립대학 영문학 강사, 그루지야 과학아카데미 문학연구소 연구원
  • 1977–1979그루지야 헬싱키 그룹 공동 창립, 체포·수감 후 공개 '참회'로 감형
  • 1988–1990성 일리아 의인회 공동 의장, 독립위원회 공동 지도자
  • 1990–1991그루지야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91–1992그루지야 공화국 대통령

로무알다스 오졸라스

Romualdas Ozolas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인 1939–2015 ○ 암으로 사망

200만 서명으로 소련군 철수를 요구한 사유디스의 철학자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사회주의가 무엇으로 되는지' 보기로 결심했다. 몇 년 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리투아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치가로, 빌뉴스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문화잡지 『쿨투로스 바라이』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1973년 리투아니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를 계기로 1988년 사유디스 창립에 참여했고, 독립운동의 이론가로서 200만 명 서명 운동을 주도해 주둔 소련군 철수를 요구했다.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대중운동과 함께 '발트의 길'을 기획한 3국 조정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독립 후 부총리(1990~1991)로 란츠베르기스-프룬스키에네 내각의 실무를 떠받쳤다. 이후 중도연합을 창당해 세이마스 의원(1992~2000)을 지냈고, 유럽연합 가입을 주권 제약으로 간주해 끝까지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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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1962빌뉴스대학 철학 전공
  • 1965–1968『쿨투로스 바라이』 편집자
  • 1973–1989빌뉴스대학 철학 강사
  • 1988–1990사유디스 창립 멤버·평의회 의원
  • 1989–1990소련 인민대표대회 대의원
  • 1990–1991리투아니아 공화국 부총리
  • 1992–2000세이마스(의회) 의원
  • 1993–2000리투아니아 중도연합 당수

알렉세이 이바노비치 카잔니크

Алексей Иванович Казанник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우크라이나 1941–2019 ○ 지병으로 사망

옐친에게 의석을 양보한 날 선 양심의 법학자

훗날 카잔니크는 그 결정을 이렇게 돌아봤다: "모스크바에서 옐친에게 투표한 사람은 550만 명, 나에게는 170만 명이었다. 옐친이 최고회의 첫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카자흐스탄의 건설 노동자와 소련 공병대 복무를 거쳐 이르쿠츠크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법학자로, 1975년부터 옴스크대학에서 환경법과 국가법을 가르쳤다. 1989년 소련 인민대의원으로 당선되었고, 5월 29일 제1차 대회에서 옐친이 최고회의 의원 선출에 실패하자 자신의 당선 자리를 옐친에게 양보해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1993년 옐친에 의해 러시아 검찰총장에 임명되었으나, 1994년 2월 국가두마의 사면 결의를 헌법에 따라 집행했다는 이유로 대통령 측의 압력을 받고 사임하며 원칙을 지켰다. 이후 옴스크주 부지사(1996–2003)를 지내고 모교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쓰다 201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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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카자흐 SSR 테미르타우에서 목수로 노동
  • 1960–63소련군 공병대 복무
  • 1963–75이르쿠츠크대학 법학부 졸업, 대학원, 조교, 전임강사
  • 1975–91옴스크대학 부교수(환경법·국가법)
  • 1989–91소련 인민대의원; 지역간대의원그룹 회원
  • 1993–94러시아 검찰총장
  • 1996–2003옴스크주 부지사
  • 2003–19옴스크대학 교수; 옴스크법학연구소 제1부소장(2003–07)

카지미에라 다누테 프룬스키에네

Kazimira Danutė Prunskienė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인 1943–2026 ○ 뇌졸중으로 사망

실용주의 노선으로 독립을 협상하려 했으나, 사퇴로 군사옵션의 마지막 장애물이 사라졌다

그녀는 각료들 앞에서 울며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끝장이다."

리투아니아의 첫 독립 후 총리(1990~1991)로, 소련 붕괴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10개월을 이끌었다. 사유디스 창립 멤버로 리투아니아 SSR 부총리를 거쳐 총리에 올랐으며, 부시·대처·콜 등 서방 정상을 만나 '호박색 숙녀'라는 별명을 얻고 신생국의 외교적 존재감을 세웠다. 의장 란츠베르기스의 강경 노선과 달리 실용주의자였으나, 1991년 1월 8일 고르바초프에게 군사행동 불가 보장을 요청했다 거부당하고 다음 날 사퇴했다. 닷새 뒤 소련군이 빌뉴스에서 민간인 14명을 살해했고, 그녀는 2004년 대선 결선에서 아담쿠스에게 근소하게 패한 뒤 농업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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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86빌뉴스대학 산업경제학 강사·부교수
  • 1986–1988리투아니아 SSR 농업경제연구소 부소장
  • 1989–1990리투아니아 SSR 각료회의 부의장
  • 1990.03–1991.01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
  • 1995–1998리투아니아 여성당 당수
  • 1996–2004세이마스(의회) 의원
  • 2004–2008농업장관

겐나디 예두아르도비치 부르불리스

Геннадий Эдуардович Бурбулис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 1945–2022 ○ 자연사

벨라베자에서 소련의 사망선고 문장을 던진 철학자

벨라베자 숲에서 샤슈케비치와 크랍추크를 향해: "소련이 국제법의 주체로서 소멸된다는 문장 하나에 동의하시겠습니까?"

옐친의 최측근이자 소련 해체의 지적 설계자. 우랄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가르치던 교수 출신으로, 1991년 9월 가이다르 그룹이 쓴 '부르불리스 메모란덤'을 옐친에게 전해 러시아의 경제적 독립 노선을 결정지었다. 그해 12월 벨라베자에서 샤슈케비치와 크랍추크에게 "소련이 국제법 주체로서 소멸된다는 문장 하나에 동의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고, 그 문장으로 시작된 합의문에 옐친과 함께 서명했다. 1992년 개혁에 쏟아진 비난의 번개 막대가 되어 물러난 뒤 의원과 상원의원으로 조용히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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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83우랄 공대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 강의
  • 1987–89스베르들롭스크 정치토론클럽 '토론 연단' 창립
  • 1989–90소련 인민대의원, 지역 간 대의원 그룹 참여
  • 1990–91옐친 대선 선거본부장
  • 1991.7–92.5RSFSR 국가서기, 러시아 제1부총리
  • 1991.12벨라베자 합의 공동 서명
  • 1993–99국가두마 의원(1·2기)
  • 2000–07노브고로드 부지사, 연방평의회 의원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샤셰노크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Шашенок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우크라이나 1951–1986 ✕ 사고 당일 사망

원전 시운전과 사고 대응을 맡은 기술자

동료들이 무너진 계측실에서 그를 끌어냈지만, 그는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오전 6시 프리피야티 병원에서 숨졌다.

블라디미르 샤셰노크는 원자력발전소의 계측·자동화 설비를 조정하고 시험하던 기술자였다. 체르노빌 4호기 시험에 참여하던 중 폭발로 척추와 갈비뼈가 부러지고 중화상과 방사선 화상을 입었으며, 동료들에게 구조되어 프리피야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는 사고 당일 숨진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발전소의 기술 노동이 재난의 최전선에 놓였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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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코노토프 산업기술학교 졸업
  • 1970–1980산업·원자력 설비 분야 기술 업무
  • 1980–1984체르노빌 원전 계측·자동화 조정 및 시험 기술자
  • 1984–1986스몰렌스크아톰에네르고날라드카 소속 조정·시험 기술자
  • 1986체르노빌 4호기 시험 지원 중 사고로 사망

알리나 피엔코프스카

Alina Pienkowska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 1952–2002 ○ 자연사

정권이 파업 종료를 선언한 순간 노동자들을 붙잡아 연대 파업으로 전환시킨 조선소 간호사

"당신은 그들을 배신했어요. 이제 당국이 우리를 빈대처럼 짓밟을 겁니다."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한 순간 그에게 한 말.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간호사로 일하며 1978년 자유해안노조(WZZ) 창립에 참여하고 지하신문 『해안의 노동자』에 노동안전과 직업병에 관한 글을 기고한 폴란드의 반체제 노동운동가이다. 1980년 8월 16일, 경영진이 임금인상을 약속하자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했지만, 피엔코프스카는 안나 발렌티노비치와 함께 조선소 정문을 막아서서 동조 파업에 들어간 다른 공장 노동자들을 버릴 수 없다고 호소하며 파업을 연대로 전환시켰다. 이 개입으로 공장간파업위원회(MKS)가 결성되었고, 그녀는 21개 요구 중 의료개혁을 담은 16번 요구의 초안을 썼으며 8월 31일 그단스크 협정의 서명자 중 한 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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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자유해안노조(WZZ) 창립 참여, 『해안의 노동자』 편집
  • 1980.08.14–16조선소 파업: 외부 연락 담당, 파업 연장에 결정적 역할
  • 1980.08.17–31MKS 상임위원, 21개 요구 공동 초안·그단스크 협정 서명
  • 1980–1981NSZZ 연대노조 보건의료 전국부문위원장
  • 1981.12–1982.07계엄령으로 체포·억류
  • 1982–1989지하 연대노조 활동, 억압 피해자 구호
  • 1991–1993폴란드 상원의원(그단스크)
  • 1998–2002그단스크 시의원

예고르 티무로비치 가이다르

Егор Тимурович Гайдар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러시아 1956–2009 ○ 심장발작으로 사망

충격요법의 설계자: 계획경제를 해체하고 러시아 자본주의의 초석을 놓은 경제학자

1993년 10월 3일 밤 TV 생방송: "이 시간에 경찰과 보안군에만 의존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모스크바 시민 여러분, 모소베트 앞으로 모여 주십시오." — 수천 명이 거리로 나섰다.

소련 작가 아르카디 가이다르와 파벨 바조프의 손자. 모스크바국립대 졸업 후 《콤무니스트》와 《프라우다》 경제편집자로 시장개혁을 주장했다. 1991년 11월 옐친 정부 부총리 겸 경제재무장관으로 들어가 1992년 1월 2일 가격자유화와 민영화를 단행, 계획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는 충격요법을 설계했다. 1992년 6~12월 총리 대행, 1993년 헌정위기 때 TV로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설 것을 호소했다. 기근과 국가 붕괴를 막았다는 평가와 국민 저축을 쓸어갔다는 비판이 교차하는,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첨예한 정책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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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1987전연방체계연구소(VNIISI)·과학아카데미 예측연구소 연구원
  • 1987–1990《콤무니스트》 경제정책 담당 편집자
  • 1990《프라우다》 경제부장, 경제정책연구소 설립·소장
  • 1991.11–1992.3러시아 부총리 겸 경제재무장관, 재무장관
  • 1992.3–12제1부총리; 6~12월 총리 대행
  • 1993.9–1994.1제1부총리 겸 경제장관 대행: 10월 위기 TV 호소
  • 1993–1995국가두마 의원, '러시아의 선택' 원내대표
  • 1994–2001'러시아 민주선택' 당대표, SPF 공동대표(2000)
  • 1999–2003국가두마 의원, 조세·예산법안 주도
  • 1992–2009경제정책연구소(현 가이다르 연구소) 소장

가브릴 하리토노비치 포포프

Гавриил Харитонович Попов

쿠데타를 미리 경고한 모스크바 첫 민선 시장

1991년 6월 20일, 포포프는 미국 대사 잭 매틀록을 은밀히 만나 파블로프 총리, 야조프 국방장관, 크류치코프 KGB 의장이 쿠데타를 준비 중이라고 경고했다. 매틀록은 이를 옐친고르바초프에게 전달했고, 두 달 뒤 8월 쿠데타가 실제로 터졌다.

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학장을 지낸 경제학자로, 『경제문제』 편집장 시절 소련 체제를 '명령-행정 체제'로 명명하며 페레스트로이카의 이론적 기초를 닦았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당선되어 사하로프, 옐친과 함께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으로 민주개혁 진영을 이끌었고, 1990년 모스크바 시의회 의장을 거쳐 1991년 6월 모스크바 최초의 민선 시장에 올랐다. 시장으로서 무상 주택 사유화와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으며, 같은 해 6월 20일 미국 대사 잭 매틀록에게 파블로프·야조프·크류치코프의 쿠데타 음모를 비밀리에 경고했다. 1992년 6월 가이다르식 급진 개혁에 반대하며 시장직에서 물러난 후, 국제대학교 총장으로 학계에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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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 1960–61모스크바국립대 콤소몰 서기
  • 1959–71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대학원 → 강사 → 관리학 연구실장
  • 1971–88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관리학 주임교수
  • 1978–80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학장
  • 1988–90『경제문제』 편집장; '명령-행정 체제' 개념 도입
  • 1989–90소련 인민대표회의 의원;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
  • 1990–91모스크바 시의회 의장
  • 1991–92모스크바 시장(최초의 민선); 무상 주택 사유화, 프레펙투라제 도입
  • 1991–2015국제대학교 총장

그리고리 알렉세예비치 야블린스키

Григорий Алексеевич Явлинский

500일 계획의 설계자: 계획경제에서 시장으로의 급진적 이행을 설계한 페레스트로이카 경제학자

1970년대 탄광 연구 중 갱도 붕괴로 동료 넷과 함께 얼음물에 열 시간 갇혔다. 구조되었으나 셋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야블린스키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가 구출되었지만, 다섯 중 셋이 병원에서 죽었다」

리보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정치인.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탄광 노동 연구를 거쳐 1989년 레오니트 아발킨의 부름으로 소련 각료회의 통합경제국장이 되었다. 1990년 미하일 자도르노프, 알렉세이 미하일로프와 함께 500일 계획을 작성하여 2년 내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로드맵을 제시했고, RSFSR 부총리 겸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고르바초프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대안 계획과 절충하며 500일 계획이 무산되자 1990년 10월 사임했고, 이후 독자 싱크탱크 EPICenter를 설립했으며 1993년 야블로코를 창당해 러시아 자유주의 야당의 한 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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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6–1980전소 석탄공업관리연구소(VNIUUgol) 연구원
  • 1980–1989노동·사회문제 국가위원회 중공업 부문장 → 종합부문 부장 → 사회발전·인구국장
  • 1989–1990소련 각료회의 통합경제국장
  • 1990.7–11RSF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위원장
  • 1991.8–12소련 국민경제 운영관리위원회 부의장 (부총리급)
  • 1991.10–12소련 대통령 직속 정치자문위원회 위원
  • 1990–1993EPICenter 경제·정치연구소 설립자 겸 소장
  • 1993–2008야블로코당 창당자 겸 당수

다이니스 이반스

Dainis Īvāns

다우가바 강을 구하고 라트비아 인민전선을 이끈 언론인

「다우가바를 지키는 것은 독립 라트비아를 지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다우가프발스 HES 반대 투쟁이 우리 혁명의 시작이었다.」

라트비아의 언론인·정치인. 1986년 동료 아르투르스 스닙스와 함께 『문학과 예술』지에 실은 기사로 다우가프바 수력발전소 건설 반대 여론을 촉발했고, 3만 명의 서명을 모은 캠페인은 1987년 소련 각료회의가 공사를 중단시키는 성과로 이어졌다. 1988년 10월 라트비아 인민전선 창립대회에서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어, 환경운동에서 시작된 대중 동원을 독립 회복이라는 정치적 목표로 전환시켰다. 1990년 최고회의 부의장을 지내고 1992년 사임한 뒤 언론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사회민주노동당 당수를 거쳐 리가 시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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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9언론 활동 시작, 연극·문학 비평
  • 1986「다우가바의 운명을 생각하며」 발표, 다우가프발스 HES 반대 캠페인 촉발. 올해의 언론인 선정
  • 1988–1990라트비아 인민전선 의장
  • 1990–1992라트비아 최고회의 부의장
  • 1992–1998『네아트카리가 치냐』 등에서 논설위원·문화부장
  • 2002–2005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 당수
  • 2001–2009리가 시의원

레셰크 발체로비치

Leszek Balcerowicz

폴란드 충격요법의 설계자이자 체제전환의 상징

쓸모없어 보이는 취미를 추구함으로써 기회의 창에 대비해야 한다.

폴란드 충격요법의 설계자. 1989년 마조비에츠키 내각의 재무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되어 '발체로비치 계획'을 주도했고, 초인플레이션을 진압하고 가격 자유화와 통화 태환을 단행하며 동구권 최초의 급진적 시장 개혁을 실행했다. 개혁은 폴란드를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로 전환시켰으나 20%의 GDP 하락과 대량 실업을 동반했고, '발체로비치는 물러가라'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격렬한 사회적 반발을 낳으며 1989년 체제전환의 약속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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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0SGH 바르샤바 경제대학 졸업
  • 1978–1980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연구원, 비공식 개혁팀 주도
  • 1980년대연대노조 경제 고문
  • 1989–1991부총리 겸 재무장관, 발체로비치 계획 실행
  • 1995–2000자유연합당 당수
  • 1997–2000부총리 겸 재무장관(2차)
  • 2001–2007폴란드 국립은행 총재
  • 2007–현재시민개발포럼(FOR) 창립·이사장

레흐 바웬사

Lech Wałęsa

전기공에서 대통령이 된 연대노조의 지도자

누군가 내게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지도자가 될 거라고 말했다면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은하계 전체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단스크 조선소의 전기공으로, 1980년 파업을 이끌어 독립 자주 노조 '연대'를 결성하고 공산 정부와의 그단스크 협정을 이끌어냈다. 계엄령 아래 투옥되었고 198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89년 원탁회의의 비공식 야권 대표로서 폴란드의 평화적 체제 전환을 협상했다. 1990년 폴란드 최초의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시장경제로의 이행과 소련군 철수를 주도했으나, 1995년 재선에 실패하며 정치에서 물러났다. 한 노동운동가의 성공은 소비에트 블록 전체에 균열을 낸 신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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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0그단스크 조선소 파업 주도·연대노조 결성
  • 1980–1981연대노조 위원장
  • 1983노벨 평화상 수상
  • 1989원탁회의 야권 대표·부분 자유선거 승리
  • 1990–1995폴란드 대통령
  • 1995대선 패배·정치 은퇴

마리우 라우리스틴

Marju Lauristin

소련 체제 안에서 자라 발트 독립운동의 지적 기둥이 된 사회학자

1988년 10월 라흐바린네 창립대회에서 사회학자 라우리스틴은 사비사르와 함께 연단에 서서 독립운동의 지적 초석을 놓았다.

마리우 라우리스틴은 에스토니아 공산당 고위 간부의 딸로 탈린에서 태어나 타르투 대학에서 언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1980년 「40인 서한」에 서명하여 에스토니아의 언어와 문화를 질식시키는 러시아화 정책에 공개 저항했고, 이 경험은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 진로를 결정지었다. 1988년 에드가 사비사르와 함께 라흐바린네를 공동 창립하고 그 창립대회를 조직했으며, 라흐바린네의 지적 리더십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독립 회복 후에는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냈고, 타르투 대학 교수로서 탈사회주의 전환의 사회학을 연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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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타르투 대학 졸업 (언론학·사회학)
  • 1976모스크바 대학에서 언론학 박사 학위 취득
  • 1980「40인 서한」 서명
  • 1988라흐바린네 공동 창립, 제1기 지도부
  • 1989–1990소련 인민대의원
  • 1990–1992에스토니아 최고회의 부의장; 헌법제정회의 위원
  • 1990–1995에스토니아 사회민주당 초대 의장
  • 1992–1994에스토니아 사회부 장관
  • 2003–2021타르투 대학 사회커뮤니케이션 교수
  • 2014–2017유럽의회 의원

미클로시 네메트

Németh Miklós

국경 개방으로 1989년의 문을 연 헝가리 개혁 총리

헝가리 국경 개방은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지는 동유럽 연쇄를 가속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당의 경제정책가로 성장해 1988년 말 헝가리 인민공화국의 마지막 총리가 되었다. 개혁파 지도부의 일원으로 경제·정치 전환을 추진했고, 1989년 동독 주민의 오스트리아 국경 통과를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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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1990헝가리 인민공화국 마지막 총리
  • 1989동독 주민의 오스트리아 국경 통과 허용
  • 1989–1990다당제 전환기 정부 운영

보그단 보루세비치

Bogdan Borusewicz

1980년 그단스크 파업 계획을 입안하고 MKS를 공동 설립한 연대노조의 설계자

레닌 조선소에서, 레닌의 이론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접어 버렸다.

1980년 8월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파업의 실질적 설계자로, 파업 계획을 입안하고 21개 요구를 분류·우선순위화했으며 공장간파업위원회(MKS)를 공동 창립한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역사가이다. 1981년 12월 계엄 선포 후 4년 넘게 지하에 숨어 불법화된 연대노조의 지하 조직망을 재건했고, 여성으로 변장해 딸의 세례식에 참석할 정도로 철저히 은신했다. 1986년 체포되었다가 사면으로 풀려났고, 공산정권 붕괴 후 국회의원·상원의장·내무차관을 거쳐 2010년에는 몇 시간 동안 폴란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 독특한 이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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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시위 전단 배포로 체포·3년형 선고, 1969년 사면
  • 1977–1978자유해안노조(WZZ) 공동 조직
  • 1980.08그단스크 조선소 파업 계획 입안·MKS 공동 창립
  • 1981–1986계엄령 아래 지하활동, 임시연대조정위원회 위원
  • 1991–2001폴란드 하원의원(3선)
  • 1997–2000내무행정차관(경찰 담당)
  • 2005–2015폴란드 상원의장(3선)
  • 2010.07.08대통령 권한대행(수 시간)

공산당 서기 출신으로 라트비아 독립을 이끈 최고회의 의장

1991년 1월 14일, 쿠즈민 장군이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낸 최후통첩은 단순했다. 라트비아가 채택한 법률들을 철회하라. 고르부노우스는 철회하지 않았고, 일주일 뒤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라트비아 동부 루자 인근 필다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건설기술학교를 마치고 리가 공과대학과 모스크바 사회과학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이념 담당)까지 올랐으나, 1988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의 출범을 지지하며 개혁파로 전환했고, 1990년 5월 4일 소련을 점령국으로 규정하고 독립 이행기를 개시한 최고회의 회기를 주재했다.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시기 쿠즈민 장군의 최후통첩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1월 21일 모스크바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와 사태를 논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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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5기술자(니크라체 국영농장), 리가 농업공학연구소 직원, 소련군 복무
  • 1970–1974리가 공과대학 선임강사, 키로프 구 콤소몰 제1서기
  • 1974–1988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여러 직책, 최종 이념 담당 서기
  • 1988–1990라트비아 소비에트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 1990–1993라트비아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독립 회복 후 국가원수 대행
  • 1993–1995제5대 사에이마(국회) 의장
  • 1995–2002부총리, 환경보호지역개발장관, 교통장관 역임

아담 미흐니크

Adam Michnik

공산 정권과 협상해 평화적 전환을 설계한 반체제 전략가

낙원이 아니라 헌법을 위한 혁명. 반(反)유토피아적 혁명. 유토피아는 단두대와 굴라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가정에서 자랐으나 1968년 위기로 투옥되며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노동자방어위원회(KOR)와 연대노조의 전략가로 활동하고 1989년 원탁회의에 참여했으며, 《가제타 비보르차》 초대 편집장으로서 '당신들의 대통령, 우리의 총리' 구상을 제안해 평화적 권력 이양을 설계했다.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언론인으로 남아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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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반체제 활동으로 투옥
  • 1977노동자방어위원회(KOR) 활동
  • 1980–1989연대노조 고문, 계엄령 기간 재수감
  • 1989원탁회의 협상 참여, 《가제타 비보르차》 초대 편집장
  • 1989.07「당신들의 대통령, 우리의 총리」 구상 제안
  • 1989–1991계약 세임 의원
  • 1989–현재《가제타 비보르차》 편집장

아벨 게제비치 아간베갼

Абел Гезевич Аганбегян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 고문이자 페레스트로이카의 시장개혁 설계사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비에트 사회 전체의 혁명적 쇄신이다. 성장의 가속은 민주화와 글라스노스트에서 분리될 수 없다. (1988)

트빌리시 태생의 아르메니아계 수리경제학자. 노보시비르스크 IEiOPP 소장(1966–1984)으로 시베리아 개발과 BAM의 경제 토대를 설계하고 『EKO』를 창간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 고문이 되어 기업 자율성 확대, 시장 요소 도입, 대외경제 개방이라는 개혁 청사진을 제시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서기(1986–1989)로 활동하며 소비에트 계획경제 안에서 최대한의 변화를 모색했고, 소련 해체 후 국민경제아카데미 총장(1989–2002)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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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61노동·임금 국가위원회에서 경제학자로 근무
  • 1961–1966노보시비르스크 IEiOPP 섹터장, 33세에 소장
  • 1966–1984IEiOPP 소장, BAM 과학위원회 의장, 『EKO』 창간·편집장
  • 1974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64년 통신회원)
  • 1985–1989고르바초프 경제 고문, 생산력연구위원회 의장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 상임위원
  • 1989–2002소련·러시아 정부 산하 국민경제아카데미 총장
  • 2002–현재국민경제아카데미 경제이론·정책 학과장, 저술 활동 지속

알렉산드르 미트로파노비치 오볼렌스키

Александр Митрофанович Оболенский

소련사 최초로 현직 서기장에게 선거 대안을 제시한 엔지니어

1989년 5월 인민대표대회에서 그가 마이크 앞에 섰다. '선례를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고르바초프의 유일 후보에 맞섰고, 대의원 1,415 대 689로 그의 이름은 투표용지에서 제외되었다.

1943년 오룔 출생의 지구물리학 엔지니어로, 콜라반도 극지연구소에서 20년간 근무하며 1987년 최초의 비공식 개혁단체인 페레스트로이카 자발적 지원회를 아파티티에 결성했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으로 당선된 직후 제1차 대회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맞서 최고회의 의장 후보로 자진 출마, 소련사 최초의 현직 서기장 대안 입후보라는 정치적 파열을 일으켰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의회 조사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진상 규명을 주도했으며, 벨로베시 협정을 헌법 위반으로 간주해 끝까지 소련 해체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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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65오룔 공장 선반공, 동독 주둔 소련군 복무
  • 1971레닌그라드 광산대학 지구물리학 전공 졸업
  • 1971–1992콜라 과학센터 극지지구물리연구소 기술자·설계기사
  • 1987–1989페레스트로이카 자발적 지원회(DOSP) 아파티티 결성·의장
  • 1989–1992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 (레닌그라드 농촌 제20선거구)
  • 1990–1994러시아 사회민주당(SDPR) 공동의장·의장
  • 19918월 쿠데타 진상조사 의회위원회 위원장
  • 1993–1996TV·라디오 공사 '보스토크' 사장 겸 편집장, 오룔

알렉산드르 블라디미로비치 루츠코이

Александр Владимирович Руцкой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러시아 러시아 1947– ↓ 1993년 체포, 1994년 사면

옐친과 함께 쿠데타에 맞섰다가 옐친의 탱크에 무너진 러시아 유일의 부통령

1993년 10월 4일 백악관 포격 중 라디오 생방송에서: "비행사들이여, 전투기를 띄워라! 이 갱단은 크렘린에 자리 잡고 있다.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구하라!"

소련의 마지막 영웅 중 한 명이자 러시아의 유일한 부통령. 아프가니스탄에서 Su-25 공격기로 485회 출격하고 두 차례 격추·포로가 된 전투 조종사였으며, 1988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옐친의 러닝메이트로 RSFSR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8월 쿠데타 당일 루키야노프에게 고르바초프 건강검진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으며, 총대주교 알렉시 2세를 설득해 교회의 옐친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반대하며 의회파에 섰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의회에 의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되었다가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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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바르나울 고등군사항공학교 졸업
  • 1980가가린 공군사관학교 졸업
  • 1985–88아프가니스탄: 제378독립공격항공연대장, 제40군 공군 부사령관
  • 1988소련영웅 칭호 수여
  • 1990RSFSR 인민대의원, 최고소비에트 위원
  • 1990소련군 참모본부 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91.7–1993.10RSFSR/러시아연방 부통령
  • 1993.9–10의회에 의해 러시아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 체포
  • 1996–2000쿠르스크 주지사

예지 보로프차크

Jerzy Borowczak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 1957– ○ 정치 활동 계속

자유노조를 시작한 조선소 노동자

“파업을 준비한 지 7일이 지나고, 마침내 이곳 조선소에서 시작해야 할 날이 왔습니다.”

예지 보로프차크는 1980년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자유노조 운동의 문을 연 젊은 노동자였다. 그는 보그단 펠스키와 루트비크 프론지뉴스키와 함께 8월 14일 파업을 시작했고, 안나 발렌티노비치의 복직과 임금 인상, 1970년 희생자 추모비를 요구했다. 계엄령 뒤에도 저항을 이어 가다 수감과 해고를 겪었으며, 1989년 조선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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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그단스크 조선소 건설기술학교 졸업
  • 1979그단스크 조선소 노동자, 해안 자유노조 협력자
  • 1980보그단 펠스키, 루트비크 프론지뉴스키와 8월 파업 시작
  • 1980–1981연대 조선소 지부 창립위원, 부위원장
  • 1981–1982계엄령 저항, 이와바 구금시설 수감
  • 1982–1989해고 뒤 고소공포 작업협동조합에서 근무
  • 1989–1993조선소 복귀, 직장 연대노조 위원장
  • 2000–2023폴란드 하원의원, 그단스크 연대센터 재단 이사

즈지스와프 쿠로프스키

Zdzisław Kurowski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인 1937– ○ 체제 관료로 활동

청년조직 출신의 당 관료

1980년 7월, 그는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와 함께 파업 중인 루블린으로 파견된 정부 대표단에 합류했다.

즈지스와프 쿠로프스키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청년조직에서 성장해 당·국가 기구의 중견 간부가 된 정치가였다. 그는 비아위스토크 지역 당 지도부와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농업·청년·경제 행정을 연결했다. 1980년 루블린 노동자들의 파업이 확산되자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와 함께 정부 대표단으로 파견되어 임금과 생활 조건을 둘러싼 요구를 협상했다. 이후에도 대외경제 관료로 일하며 인민공화국 체제의 관리자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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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56폴란드 청년동맹 활동가
  • 1957–1972농촌청년동맹 중앙위원장
  • 1969–1985폴란드 인민공화국 하원 의원
  • 1972–1975비아위스토크 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75–1980PZPR 중앙위원회 서기국 성원
  • 1977–1980PZPR 중앙위원회 경공업·상업·소비부장
  • 1980PZPR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 1982–1989대외경제 관료, RWPG 및 무역부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폴란드 폴란드계 1935– ○ 자연사

당의 통제와 노동자 협상 사이에 선 개혁파

그는 파업 첫날 국가보안기관의 보고가 믿을 수 없다며 즉시 현장 정보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타데우시 피슈바흐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당료이자 외교관으로, 1975년부터 그단스크 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80년 8월 그는 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반대하며 노동자 대표들과 초기 협상에 나섰고,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가 도착한 뒤에도 정부 측 협상에 관여했다. 그러나 그의 온건한 조정은 독립 노조를 통제하려는 당의 전략과 충돌했고, 계엄 이후 중앙 정치에서 밀려났다. 이후 의회 부의장과 핀란드·라트비아 주재 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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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입당
  • 1964–1968엘블롱크 지구당 위원회 서기
  • 1968–1971트체프 지구당 위원회 서기
  • 1971–1975그단스크 주 당 위원회 서기
  • 1975–1982그단스크 주 당 위원회 제1서기
  • 1976–1985폴란드 인민공화국 의회 의원
  • 1982–1986헬싱키 주재 폴란드 대사관 참사관
  • 2001–2005라트비아 주재 폴란드 대사

하랄트 예거

Harald Jäger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독일민주공화국 동독인 1943– ○ 통일 뒤 해임

국경 통제관에서 장벽 개방의 명령자로

“내 부하들에게 장벽을 열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랄트 예거는 동독 국가보안부에 복무한 국경 통제 장교로, 국가의 여행 통제와 정보활동을 집행했다. 1989년 11월 9일 그는 상관의 명확한 지시를 받지 못한 채 Bornholmer Straße에 몰린 군중과 폭력 위험에 직면했다. 그는 통제 체계의 일부였지만 그날 밤 장벽을 열어 수천 명의 동독 시민이 서베를린으로 건너게 했다. 이후 그는 동독 체제의 내부 모순과 장벽 붕괴의 자유를 함께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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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바우첸에서 출생
  • 1961독일 국경경찰 자원 입대
  • 1964–1989국가보안부 여권통제부대 복무
  • 1976–1981국가보안부 법률고등학교 수학, 법학사 취득
  • 1989Bornholmer Straße 국경통과소 부지휘관
  • 1989.11.09상관의 지시 없이 국경 통과소 장벽 개방 명령
  • 1990국가보안부 해체 과정에서 해임

헤이키 아호넨

Heiki Ahonen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에스토니아인 1956– → 1988년 강제 추방, 이후 귀환

소련 수용소에서 살아나와 발트 독립운동의 첫 공개 집회를 공동 주최한 에스토니아의 전 정치범

히르베파르크 집회가 「의사 표현의 길을 열어젖혔다」고 아호넨은 말했고, 이 역사적 전환을 「쇄빙선 효과」라 불렀다.

헤이키 아호넨은 1956년 에스토니아 페르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NKVD에 처형되고 아버지는 수용소에 갇혔으며 어머니는 시베리아로 추방되어, 가족 중 억압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977년 지하 저항운동에 가담해 사미즈다트를 유통하고 서방 기자들에게 소련의 인권 탄압을 알렸으며, 1983년 반소 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페름 수용소에서 5년을 복역했다. 1987년 초 석방된 그는 8월 탈린 히르베파르크에서 비밀의정서 공개를 요구하는 최초의 공개 대중집회를 공동 조직해 발트 독립운동의 물꼬를 텄고, 이듬해 KGB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10년간 망명 생활을 한 뒤 귀환해 점령박물관 초대 관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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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7–1983지하 저항운동, 사미즈다트 유통, 인권 침해 기록
  • 1983–1987페름 교정노동수용소에서 5년 복역 (반소 선동)
  • 1987.08MRP-AEG 공동 창립, 히르베파르크 집회 공동 조직
  • 1988.01에스토니아 민족독립당(ERSP) 공동 창립
  • 1988–1989스톡홀름, 에스토니아 정치범 지원센터 부의장
  • 1989–1998라디오 자유유럽 에스토니아 편집부장 (뮌헨·프라하)
  • 2003–2012에스토니아 점령박물관(Okupatsioonide Muuseum) 초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