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에 이로운 것은 모든 기업에도 이로워야 한다」 — 1962년 《프라우다》 논문의 핵심 명제
소련의 경제학자. 1962년 9월 《프라우다》에 발표한 논문 「계획, 이윤, 프리미엄」으로 전연방 경제 토론을 촉발하여 1965년 코시긴 개혁의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이윤 지표를 기업 평가의 핵심으로 삼고 '사회에 이로운 것이 개별 기업에도 이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0년대 소련 최초의 기계식 회계 스테이션을 창설했고, 1938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었다가 1939년 말 복권되었다. 아내 레기나 고로비츠는 피아니스트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누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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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볼린현 슬라부타에서 산림영지 관리인의 아들로 출생
1920키예프대학교 법학부 졸업
1923–1929우크라이나 노동연구소 실습생, 할키우 공장에 소련 최초 기계식 회계 스테이션 창설
알렉세이 스네고프는 초기 소비에트 당 사업을 거친 구볼셰비키였지만, 대숙청의 조작된 혐의로 15년 넘게 굴라크에 갇혔다. 1954년 석방과 복권 뒤 그는 수감 경험을 바탕으로 니키타 흐루쇼프와 아나스타스 미코얀에게 스탈린 체제의 폭력과 재활 문제를 알리는 자문자가 되었다. 올가 샤투노프스카야와 함께 희생자들의 복권을 추진하고 제20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개인숭배를 비판하도록 흐루쇼프를 설득했다. 이후에도 더 깊은 탈스탈린화를 주장하다가 감시와 비판을 받았으며, 1967년 잠시 당에서 제명되었다가 복권되었다.
흐루쇼프 비밀연설을 수만 부 찍어내 당의 통제 밖으로 퍼뜨린 바르샤바 당위원회 개혁파 제1서기
1956년 3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휴식 시간, 흐루쇼프에게 스탈린의 반유대주의를 따져 묻자 흐루쇼프는 손을 떨며 스탈린이 소련 유대인에 대한 포그롬을 계획하고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바르샤바 유대인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공산청년운동에 가담했고, 국제레닌학교에서 수학한 후 폴란드 지하당 활동과 소련 체류를 오갔다. 1938년 NKVD에 체포되어 콜리마 수용소에서 8년을 보낸 뒤 1945년 폴란드로 돌아와 선전·언론·농업 부문에서 스탈린주의 노선을 집행했다. 1955년 바르샤바 당위원회 제1서기가 된 후 제20차 당대회를 계기로 개혁파로 전환, 당원들이 비밀연설을 학습하도록 제안하고 1만 5천여 부의 비공식 인쇄본을 찍어내 연설문이 폐쇄된 당 문서에서 세계적 문서가 되는 결정적 통로를 열었다. 폴란드 10월 후 고무우카와 충돌해 1957년 해임되고 1968년 반유대 캠페인으로 축출되었으며, 이후 반체제 운동을 지지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프라하의 봄에서 내무장관으로 보안기관 개혁을 시도했으나 KGB의 내부 교란으로 좌절된 인물
1968년 8월 침공 당일, 파벨이 해임한 부하 샬고비치는 KGB와 함께 두브체크를 체포했고, 내무부는 장관의 손을 떠났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했고, 1948년 쿠데타에서는 민병대를 지휘했다. 내무차관으로 공포정치에 가담했으나 1951년 체포되어 슬란스키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고문과 25년형을 받았고, 1955년 무죄 석방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내무장관으로 복귀해 국가보안대(StB) 개혁을 추진하고 KGB 연락장교 6명의 존재를 폭로했으나, 부하인 빌리암 샬고비치가 KGB와 공모해 침공 당일 두브체크 체포를 지원하면서 개혁은 무너졌다.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앞에 선 크리겔은 이렇게 말했다: '쏘든지 시베리아로 보내든지, 나는 서명하지 않겠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KSČ 상임간부회 위원 겸 민족전선 의장으로 개혁을 이끌었다.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당일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연행되었고, 26명의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인 중 유일하게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을 거부했다. 이후 당에서 축출되고 의사 면허도 박탈당했으나, 1977년 헌장 77에 최초 서명하며 생애 마지막까지 반체제 인사로 남았다.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 후 귀국한 스므르콥스키는 동료 지도자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국민 앞에 나서 말했다. 브레즈네프가 그의 연설만을 문제 삼았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공산주의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에서 두브체크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맹이었다. 나치 점령기 체코민족평의회 부의장으로 프라하 봉기를 이끌었고, 1948년 2월 쿠데타에서 인민민병대를 지휘했으며, 1951년 슬란스키 사건 연루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1963년 복권되어 1968년 국민의회 의장이 되었다. 1968년 1월 『루데 프라보』 인터뷰로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고, 8월 침공 후 모스크바로 끌려가 의정서 서명을 강요당했으며, 귀환 후 후사크에 의해 축출되어 감시 속에 사망했다.
1956년 11월 4일, 나지 임레와 함께 소련의 공격을 규탄하는 성명을 작성한 뒤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도나트 페렌츠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과 농업정책에 참여한 정치가이자 농업경제 연구자였다. 전후 토지개혁과 집단화 추진에 관여했지만, 1951년 숙청 재판으로 투옥된 뒤 복권되어 당 노선과 국가 폭력의 긴장을 직접 겪었다. 1956년 나지 임레를 지지하며 혁명을 해석하고 소련의 군사 개입을 비판한 그는 나지 임레 재판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60년 석방되었다. 이후 농업경제를 연구하고 1980년대 민주 야당의 대화를 조직했으며, 1989년 법적으로 복권되었다.
지리 하예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프라하의 봄 개혁과 그 좌절을 모두 경험했다. 1968년 소련 주도의 침공을 유엔에서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한 뒤 관직과 공산당 지위를 잃었고, 국제적 약속이 국내 권력보다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는 1977년 바츨라프 하벨, 얀 파토치카와 함께 샤르타 77의 첫 대변인이 되어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인권 조항을 시민적 책임의 근거로 제시했다.
1956년 7월 17일, 그는 수사에서 파업 노동자와 ‘말썽꾼, 범죄자, 도발자’를 구별하겠다고 밝혔다.
마리안 리비츠키는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법률가이자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당과 국가의 법률·행정 기구를 오가며 전후 체제의 제도화를 담당했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 뒤 그는 검찰총장으로서 파업에 참여한 노동자와 ‘말썽꾼, 범죄자, 도발자’를 가르는 ‘두 흐름’ 논리를 공개적으로 제시했다. 이 구분은 국가가 노동자의 경제적 요구와 형사적 책임을 분리해 다루려 한 방식이었지만, 뒤이은 수사와 재판의 틀도 규정했다. 이후 법무장관과 법학 연구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국가의 법과 통치 문제에 관여했다.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이 공격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로손치 게저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에서 출발해 당국의 억압과 교조주의를 비판한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나지 임레의 개혁파와 함께 다당제와 민중운동의 문제를 둘러싼 격변에 개입했고, 1956년 혁명 정부에서 국가장관으로 활동했다. 소련의 개입 뒤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며 단식하다가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나지 임레 집단에 대한 국가 탄압의 일부였다.
《머저르 서버처그》 창간호에서 '오직 이 길로만 우리는 독립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헝가리를 세울 수 있다'고 썼다.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헝가리 언론인으로, 불법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종전 후 당 기관지 《사바드 네프》의 기자가 되었고, 초기에는 라코시 체제에 충실한 논객이었다. 슬란스키 재판과 모스크바 의사 사건을 목격하며 신념이 흔들렸고, 1955년 라이크 라슬로의 복권을 요구했다가 당에서 제명되었다. 1956년 혁명 당시 너지 임레 측근 중 가장 급진적인 인물로 《머저르 서버처그》를 창간·편집했으며, 소련군 개입 후에도 카다르 정권을 거부하고 지하 신문과 민주독립운동을 이끌다 체포되어 너지, 말레테르와 함께 사형당했다. 1989년 복권되어 같은 날 엄숙히 재매장되었다.
1958년 4월 법정 최후 진술: "10월이 다른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해도, 헝가리 민중은 사회주의라는 옷을 입은 폭정도 용납하지 않으며 자유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데브레첸 출신의 공산주의 법률가로, 1949년 라이크 라슬로 재판의 근거를 의심했다가 모든 당직에서 해임된 후 너지 임레의 개혁파에 합류했다. 1956년 혁명기에는 너지의 개인 비서 겸 총리 비서실장으로 활동했으며, 11월 4일 소련군 진압 후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루마니아로 끌려갔다. 1년 넘게 취조에 협력하지 않고 단식 투쟁을 벌여 너지 재판에서 분리 심리되었고, 1958년 4월 24일 너지보다 두 달 먼저 교수형에 처해졌다. 1989년 6월 16일 영웅광장에서 너지·말레테르 등과 함께 재매장되었다.
말레테르 팔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포로이자 반나치 투쟁을 거친 헝가리 장교로, 전후 공산당에 가입했다. 1956년 혁명에서 그는 킬리안 병영에 파견된 뒤 저항 세력과 휴전하고 병영 방어에 합류했으며, 군인과 시민 무장세력 사이의 조정에 관여했다. 너지 임레 정부의 국방장관이 된 그는 소련군과 철수 협상을 시도하다 체포되었고, 1958년 너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1989년 그는 복권되어 혁명의 순교자로 재매장되었다.
1985년 4월 4일, 데멘체프는 보드카 생산 축소가 1986년 40억 루블, 1990년에는 150억에서 160억 루블의 예산 손실을 낳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빅토르 데멘체프는 지방 재정기관에서 출발해 소련 재무 행정의 고위 관료로 성장한 경제 관리자였다. 그는 알코올 판매 수입에 기대던 국가재정의 구조적 긴장을 드러내며,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의 급격한 생산 축소에 공개적으로 이의를 제기했다. 그의 경고는 재정 수입 감소뿐 아니라 밀주와 설탕 부족이라는 정책 부작용을 함께 계산한 것이었다.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시크는 안토닌 노보트니의 사임을 최초로 공개 요구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혁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보다 20년 앞서서.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 경제 개혁의 설계자였다. 1964년 저서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시장 메커니즘을 접목하는 신경제모델을 제시했고,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에서 노보트니 체제를 공개 비판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68년 두브체크 내각에서 부총리로 개혁을 주도했으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스위스에서 '제3의 길'을 이론화하며 생을 마감했다.
1968년 7월, 「2000개의 말」 선언을 둘러싼 논란 속에서 체르니크는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선언은 결코 반혁명의 표현이 아니라 당의 한 분파의 의견일 뿐이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공산주의 총리(1968~1970). 광산 노동자 출신 기술관료로, 연료·에너지 장관과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을 거쳐 1968년 4월 행동강령을 채택한 당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총리로 임명되었다. 두브체크와 함께 프라하의 봄을 이끌었고, 8월 침공 후 소련에 연행되어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다. 귀국 후 개혁 지속을 약속했으나, 후사크 체제 아래 1970년 해임·제명되고 20년간 연구소 부소장으로 밀려났다.
코파치 샨도르는 금속 노동자와 반나치 저항 활동가 출신의 헝가리 경찰 지휘관으로, 국가기구 안에서 개혁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부다페스트 경찰청장으로서 1956년 10월 23일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고, 봉기 세력과 협력하며 국가근위대 부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체포되어 나지 임레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63년 사면으로 석방되었고, 훗날 회고록으로 혁명의 내부 경험을 증언했다.
1989년 모스크바 협상에서 그는 당의 목표를 “민주적 사회주의, 자치, 의회 민주주의, 경제 민주주의”라고 제시했다.
니에르시 레죄는 헝가리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권 개혁 정치가로, 계획경제를 사회적 통제와 경제적 효율성의 결합으로 바꾸려 했다. 그는 1968년 신경제메커니즘을 이끈 뒤 정통파의 반발로 영향력을 잃었지만, 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안고 1989년 정치 전환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1989년 6월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의장으로 선출되어 집단 지도체제를 이끌었고, 10월 창당된 헝가리 사회당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 그의 경력은 사회주의를 민주화하고 시장기제를 도입하려 한 시도가 당의 해체와 다당제 전환으로 이어진 역사적 긴장을 보여 준다.
「고르바초프도, 나도, 우리 모두 이중사고자였다. 머릿속에서 진실과 선전을 끊임없이 저울질해야 했다. 반체제냐 굴종이냐, 그게 선택지였다」
바쿠 출신 아르메니아계 정치학자·법학박사. 소련 정치학회를 창립해 17년간 이끌며 사회주의 민주주의 이론을 개척했고, 소비에트 사회 내 이익집단의 다원성을 인정한 초기 이론가 중 한 명이었다. 고르바초프 보좌관으로서 당 독점 폐지·경선 도입·대통령제 전환의 헌법개혁을 설계했으며, 퇴임 후 회고록 『자유의 대가』를 집필하고 SF 작가 '게오르기 샤흐'로도 활동했다.
1983년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연대노조 노동자들에게 둘러싸여, 바웬사가 '수상, 폴란드인끼리 이야기합시다'라고 하자 라코프스키는 '박사와 박사로서 이야기합시다'라고 답했다.
폴란드 통일노동당(PZPR)의 개혁파 정치인이자 『폴리티카』 주간의 편집장을 24년간 맡은 언론인이다. 1988년 10월 총리가 되어 원탁회의와 경제개혁(일명 빌체크법)을 추진했으나, 1989년 6월 4일 선거에서 전국명부에 올랐음에도 50%를 넘지 못해 낙선하며 체제의 민낯을 드러낸 인물이 되었다. 선거 참패 후 PZPR의 마지막 제1서기가 되어 1990년 1월 당 해산을 주재했다.
우리는 최근 과거의 역사를 굵은 선으로 가른다. 우리는 지금부터 이 위기에서 폴란드를 구하기 위해 우리가 한 일에 대해서만 책임질 것이다.
가톨릭 평신도 지식인으로 1958년 독립 월간지 《비엥치》를 창간·주재하고, 1961년부터 1971년까지 '즈나크' 가톨릭 의원단 소속으로 의회에서 양심적 반대를 실천한 폴란드의 정치인이다. 1980년 그단스크 파업에서 연대노조 고문단을 이끌고 《티고드니크 솔리다르노시치》 초대 편집장을 맡았으며, 계엄령 아래 1년간 억류된 뒤 1989년 원탁회의 협상의 핵심 설계자로 활동했다. 1989년 8월 24일 동구권 최초의 비공산당 총리로 취임해 발체로비치 계획을 통한 급진적 시장 개혁을 단행했고, '굵은 선'으로 과거와의 단절을 선언했으며, 1990년 대선에서 바웬사에 패배한 뒤 민주연합을 창당해 이끌었다.
「소비에트 경제학자로서 국가로부터 높은 봉급을 받는 11명의 학자 중 한 사람으로서, 나는 경제와 사회의 상태에 대해 인민 앞에 개인적으로 책임을 진다고 생각한다」 — 1983년
물리학도에서 경제학으로 전향한 키이우 출신 학자. 노보시비르스크에서 농촌사회를 연구하며 소비에트 경제사회학을 개척했고, 1983년 계획경제의 구조적 모순을 진단한 내부 보고서를 작성했다. KGB가 압수했으나 서방으로 유출되어 『노보시비르스크 선언』으로 불리며 페레스트로이카의 지적 토양이 되었다. 소비에트 사회학 협회 회장, VTsIOM 초대 소장, 인민대의원으로 사하로프·옐친과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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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3–50모스크바대 물리학과 3년 수료 후 경제학부 우등 졸업
1950–63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농업 부문 연구, 1956년 кандидат 학위
1963–87노보시비르스크 IEiOPP, 1967년 사회문제 부서장, 경제사회학 학파 창립
1981년 10월, 당 중앙위원회는 카니아를 물러나게 하고 야루젤스키를 제1서기로 선출했다.
스타니스와프 카니아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지도자로서 당의 통제와 사회적 요구 사이의 균열을 관리하려 했다. 1980년 8월 파업과 연대자유노조의 등장 뒤 그는 노조 및 가톨릭 세력과 대화를 모색했지만, 당 내부의 불신과 경제 위기는 타협의 공간을 좁혔다. 소련 지도부의 압박 속에서 1981년 10월 제1서기직에서 물러났고, 곧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가 뒤를 이었다. 1981년 계엄령 도입 책임으로 기소됐으나 2012년 무죄를 선고받았다.
12월 22일 아침, 그는 절친한 군의관에게 부탁해 멀쩡한 왼쪽 다리에 깁스를 감고 혁명 진압에서 빠지려 했다.
루마니아 공산군 포병장교 출신으로 1986년 국방차관에 올랐다. 1989년 12월 22일 차우셰스쿠로부터 국방장관에 임명된 직후 군에 병영 복귀 명령을 내려 혁명의 흐름을 결정적으로 바꾸었고, 12월 25일 차우셰스쿠 부부의 즉결재판과 처형을 조직·집행했다. 혁명 후 국방장관과 국가경제장관을 지냈으나, 티미쇼아라 유혈 진압 책임으로 2008년 살인죄가 확정되어 15년형을 선고받았다.
루키야노프가 '반헌법적 행위'로 10년형을 경고하자, 뤼텔은 버티며 말했다. '우리는 최고회의를 소집해 독립 선언을 표결에 부칠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주권 선언'이 아닌 '독립 선언'이라고 말해 버렸다고 그는 훗날 회고했다.
에스토니아 사레마 섬 출신의 농업경제학자로, 소비에트 체제 안에서 에스토니아 농업아카데미 총장과 공산당 간부를 거쳐 1983년 에스토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이 되었다. 1988년 11월 16일 모스크바의 투옥 위협을 무릅쓰고 주권 선언을 의회에서 통과시켜 소련 해체의 첫 균열을 냈고, 1990년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소련 통치의 불법성을 선언하고 독립 회복 이행기를 이끌었다. 1991년 독립 후 2001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2006년까지 재임하며 NATO와 EU 가입을 성사시켰다.
즈데녜크 믈리나르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법률가로, 사회주의를 민주적 통제와 시민의 능동성에 결합하려 했다.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중앙위원회 서기로 일하며 알렉산데르 두브체크 주변의 개혁 지도부에 참여했고, 행동강령을 만든 정치·법률 연구팀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의 침공 뒤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고 곧 개혁 노선의 한계와 점령의 현실에 부딪혀 당과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헌장 77에 서명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정치학자이자 프라하의 봄을 성찰한 저술가로 활동했다.
「우리가 금융 전선에서 승리한다면, 우리는 모든 것을 승리할 것이다」 — 아발킨이 자주 인용한 레닌의 말
모스크바 출신 정치경제학자. 1986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장이 되어 페레스트로이카의 학문적 토대를 마련했고, 1989년 경제개혁 국가위원장 겸 부총리로 기용되었다. 핵심 구상인 '규제된 시장경제'는 국가 통제 아래 단계적 시장화를 주장했으며, 샤탈린의 500일 계획이 제안한 충격요법과 대비되었다. 1990년 여름 최고회의의 공식 노선으로 채택되었으나 고르바초프의 절충에 실망해 1991년 초 사임했다. 해체 후 『경제의 제문제』 편집장으로 러시아 사회경제 사상을 정립하고 옐친식 급진 자유화에 맞서 중국식 모델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TV 토론에 서류 가방을 들고 나와 상대가 반박할 때마다 해당 문서를 꺼내 사실을 입증하곤 했다.
에스토니아의 물리화학자이자 정치인. 탈린공과대학에서 유혈암 기술을 전공한 뒤 소련권 최초로 NMR 분광계를 자체 제작하며 고체 고분해능 핵자기공명 분야의 선구자가 되었다. 에스토니아 과학아카데미 회원 시절 1987년 인산염 광산 계획의 환경·인구적 위험을 보고서로 폭로해 '인산염 전쟁'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고, 소련 인민대의원으로서 독소불가침조약 비밀의정서를 발굴·공개해 발트 병합의 법적 근거를 무너뜨렸으며, 독립 회복 후 두 차례 장관을 지냈다.
루마니아 공산당 엘리트 출신으로, 1989년 12월 혁명의 와중에 민족구국전선(FSN)을 이끌며 차우셰스쿠 체제를 종식시켰다. 차우셰스쿠 부부의 즉결재판과 처형을 승인했으며, 1990년 85% 득표로 루마니아 최초의 자유선거 대통령이 되었다. 광부를 동원해 반대 시위를 진압한 미네리아드 사태로 평판에 금이 갔고, 훗날 혁명기 살상에 대한 반인도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 세 차례 대통령을 지내며 NATO 가입과 EU 가입 협상을 완료했으나, 혁명인가 쿠데타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그를 끝까지 따라다녔다.
「우리 대의원들은 에스토니아가 소련 내에서 주권적이고 평등한 구성원으로 남기를 바라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1988년 11월 주권 선언 직후
에스토니아 히우마섬 출신으로 1950년대부터 콤소몰과 당 기구에서 경력을 쌓아 1970년대에는 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까지 올랐다. 에스토니아 민족주의에 동정적이라는 이유로 1980년 모스크바에 의해 외교직으로 밀려나 베네수엘라와 니카라과 대사를 지냈다. 1988년 6월 16일 강경파 카를 바이노의 후임으로 소환되어 에스토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인민전선과 협력하며 그해 11월 에스토니아의 주권 선언을 이끌었다. 1991년 8월 에스토니아 독립 회복 선언에 찬성표를 던졌고, 독립 후에는 에스토니아 민주노동당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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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1955콤소몰 각급 기관 근무; 타르투국립대학교 졸업(1955)
1955–1961에스토니아 레닌주의청년공산주의자동맹(ELKNÜ)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61–1971에스토니아공산당 탈린시위원회 제1서기
1963–1967에스토니아 SSR 제6기 최고회의 의장
1971–1980에스토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1980–1988소련 대사, 베네수엘라(1980–1986) 및 니카라과(1986–1988)
1990년 1월 고르바초프가 빌뉴스까지 날아와 당의 분리를 되돌리라고 압박했을 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정은 당대회가 내렸고, 그것을 되돌릴 권한은 자신에게도 없다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경제 관리자 출신으로 1988년 사유디스의 지지 속에 리투아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12월 당을 소련공산당에서 분리하는 결정을 이끌었다. 연방 공화국의 집권당이 모스크바와 결별한 첫 사례였다. 독립 후인 1993년 첫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옛 공산당원이 선거로 집권할 수 있음을 보였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하면서 나토·유럽연합 가입의 길을 열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총리를 지냈다.
1989년 6월 27일, 호른과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알로이스 모크는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볼트커터로 철조망을 함께 끊으며 '철의 장막'에 첫 구멍을 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개혁파 외교관료에서 민주화 이후 총리까지 역임한 정치가로, 1989년 외무장관으로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알로이스 모크와 함께 절단하며 '철의 장막' 붕괴의 상징적 순간을 연출했다. 동독 난민들의 서독 탈출을 위한 헝가리 국경 개방을 주도하여 독일 통일의 물꼬를 텄고, 이는 1989년 동유럽 혁명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1994년 총선에서 헝가리 사회당을 압승으로 이끌어 총리가 되었고, 보크로시 긴축 개혁으로 시장경제 전환의 틀을 다졌다. 그의 정치 인생은 1956년 혁명 진압 부대 복무라는 깊은 그림자와 1989년 국경 개방의 역사적 공로 사이에서, 20세기 헝가리 좌파의 모순을 온몸으로 체현했다.
아르놀트 보일루코프는 소련 국립은행의 고위 은행가로, 말년 소비에트 금융 운영의 내부를 경험했다. 그는 1991년 1월 화폐개혁을 집행한 기관의 책임자였을 뿐 아니라, 훗날 그 구상이 재무부나 발렌틴 파블로프가 아니라 국가보안위원회와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에게서 나왔다고 회고한 증언자로 중요하다. 그의 회고는 개혁을 둘러싼 제도 간 긴장과, 비밀리에 추진된 조치가 대중의 신뢰를 훼손한 과정을 보여 준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MSZMP) 정치국원이자 개혁파의 이념적 후견자였다. 1989년 1월 28일 라디오에서 1956년 혁명을 '민중봉기'라 규정해 당의 정통성을 스스로 무너뜨렸고, 5월 서베를린에서는 베를린 장벽을 '치욕'이라 부르며 동독 체제를 비판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함께 범유럽 피크닉을 후원해 철의 장막에 첫 균열을 냈고, 이후 헝가리 사회당 부의장을 거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지금 문제는 사회주의, 공산주의, 어떤 -이즘을 구하는 게 아니라 우리 나라와 국민을 구하는 것입니다 — 1990년 당 중앙위원회 플레넘에서
레닌그라드 근교 출생. 칸토로비치의 제자로 투입산출모형과 최적계획 이론을 발전시켰고, 1987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9년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가 되었다. 1990년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합의로 작업반을 이끌어 500일 내 시장경제 전환을 구상한 '500일 계획'을 작성, 아발킨의 점진적 노선과 정면 대립했다. 연방 차원에서 채택되지 못했으나 러시아 공화국에서 부분 시행되었고, 제자 가이다르의 1992년 충격요법의 지적 토대가 되었다. 해체 후 '개혁' 재단을 이끌고 통합민주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스파르타크 모스크바 명예회장을 지냈다.
1989년 5월 27일, 제1차 인민대표회의 연단에서 보수파 의원들을 향해: "여기 계신 분들은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탈린-브레즈네프식 최고회의를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1989년 제1차 소련 인민대표회의에서 보수파를 '공격적으로 복종하는 다수'라고 규정한 역사가. 프랑스 아날학파 연구자로 출발해 모스크바 역사·기록연구소 학장(1986-1991)을 거치며 소련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주도했고, 사하로프·옐친과 함께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으로 민주개혁을 이끌었다. 1991년에는 러시아국립인문대학(RSUH)을 설립해 당 고등학교 건물에 독립적 인문학 공간을 열었고, 이후 옐친과 푸틴의 권위주의를 공개 비판하며 마지막까지 체제와 거리를 두었다.
아나톨리 솝차크는 법학자이자 민주개혁가로서, 제헌회의 의장으로 1993년 러시아 연방 헌법 제정을 공동 주도하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초대 민선 시장(1991–1996)을 지냈다. 레닌그라드 국립대 법학 교수 시절 블라디미르 푸틴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를 가르친 그는,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안드레이 사하로프·보리스 옐친과 함께 지역간의원그룹 공동의장을 맡았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레닌그라드에서 군 지휘관을 설득해 병력 투입을 막고 궁전광장에 20만 시민을 결집시키며 저항을 조직했다. 부패 혐의로 1997년 파리로 망명했으나, 총리가 된 푸틴의 도움으로 1999년 귀국했다.
1992년 앙카라를 방문한 자리에서 "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병사입니다"라고 말했다.
아제르바이잔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소련 해체 후 첫 민선 대통령. 아랍어 문헌학자로 출발해 1970년대 반소비에트 활동으로 1년 6개월을 복역했으며, 1989년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을 이끌며 민족주의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다. 1990년 1월 13일 국방위원회를 조직해 바쿠의 반아르메니아 포그롬과 '검은 1월'로 이어지는 민족위기의 한복판에 섰고,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구소련 공화국 중 최초의 반공산주의 민선 지도자가 되었다. 임기 내내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과 경제난에 시달리다 1993년 6월 러시아가 배후에 있던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권력을 승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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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바쿠 국립대학교 동양학부 아랍어문학과 졸업
1963–1964이집트에서 통역사로 근무
1969–1974바쿠 국립대학교 역사학 강사 → 반소비에트 활동으로 체포(1975), 1년 6개월 복역
“나는 평생 반대파였고 정부와 싸워 왔다. 이제 내가 정부다.” 1990년 새로 선출된 최고회의 의장이 된 뒤 가진 인터뷰에서.
그루지야의 문학자이자 반체제 운동가로, 유명 작가 콘스탄틴 감사후르디아의 아들이며 1977년 메라브 코스타바와 함께 그루지야 헬싱키 그룹을 결성해 소련의 인권 탄압을 국제사회에 고발했고 수차례 투옥되었다. 1989년 4월 독립위원회 공동 지도자로서 트빌리시에서 수만 명의 평화 시위와 단식 투쟁을 조직했고, 소련군의 유혈 진압은 그루지야 독립 여론을 결정적으로 급진화시켰다. 1990년 원탁-자유그루지야 연합을 이끌어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압승했고 1991년 5월 87% 득표로 그루지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취임 7개월 만에 무장 쿠데타로 축출되어 체첸으로 망명했으며 1993년 12월 서부 그루지야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사회주의가 무엇으로 되는지' 보기로 결심했다. 몇 년 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리투아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치가로, 빌뉴스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문화잡지 『쿨투로스 바라이』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1973년 리투아니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를 계기로 1988년 사유디스 창립에 참여했고, 독립운동의 이론가로서 200만 명 서명 운동을 주도해 주둔 소련군 철수를 요구했다.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대중운동과 함께 '발트의 길'을 기획한 3국 조정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독립 후 부총리(1990~1991)로 란츠베르기스-프룬스키에네 내각의 실무를 떠받쳤다. 이후 중도연합을 창당해 세이마스 의원(1992~2000)을 지냈고, 유럽연합 가입을 주권 제약으로 간주해 끝까지 반대했다.
훗날 카잔니크는 그 결정을 이렇게 돌아봤다: "모스크바에서 옐친에게 투표한 사람은 550만 명, 나에게는 170만 명이었다. 옐친이 최고회의 첫 자리에 앉아야 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카자흐스탄의 건설 노동자와 소련 공병대 복무를 거쳐 이르쿠츠크대학 법학부를 졸업한 법학자로, 1975년부터 옴스크대학에서 환경법과 국가법을 가르쳤다. 1989년 소련 인민대의원으로 당선되었고, 5월 29일 제1차 대회에서 옐친이 최고회의 의원 선출에 실패하자 자신의 당선 자리를 옐친에게 양보해 전국적인 인물이 되었다. 1993년 옐친에 의해 러시아 검찰총장에 임명되었으나, 1994년 2월 국가두마의 사면 결의를 헌법에 따라 집행했다는 이유로 대통령 측의 압력을 받고 사임하며 원칙을 지켰다. 이후 옴스크주 부지사(1996–2003)를 지내고 모교로 돌아가 후학 양성에 힘쓰다 2019년 사망했다.
그녀는 각료들 앞에서 울며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끝장이다."
리투아니아의 첫 독립 후 총리(1990~1991)로, 소련 붕괴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10개월을 이끌었다. 사유디스 창립 멤버로 리투아니아 SSR 부총리를 거쳐 총리에 올랐으며, 부시·대처·콜 등 서방 정상을 만나 '호박색 숙녀'라는 별명을 얻고 신생국의 외교적 존재감을 세웠다. 의장 란츠베르기스의 강경 노선과 달리 실용주의자였으나, 1991년 1월 8일 고르바초프에게 군사행동 불가 보장을 요청했다 거부당하고 다음 날 사퇴했다. 닷새 뒤 소련군이 빌뉴스에서 민간인 14명을 살해했고, 그녀는 2004년 대선 결선에서 아담쿠스에게 근소하게 패한 뒤 농업장관을 지냈다.
벨라베자 숲에서 샤슈케비치와 크랍추크를 향해: "소련이 국제법의 주체로서 소멸된다는 문장 하나에 동의하시겠습니까?"
옐친의 최측근이자 소련 해체의 지적 설계자. 우랄에서 마르크스주의 철학을 가르치던 교수 출신으로, 1991년 9월 가이다르 그룹이 쓴 '부르불리스 메모란덤'을 옐친에게 전해 러시아의 경제적 독립 노선을 결정지었다. 그해 12월 벨라베자에서 샤슈케비치와 크랍추크에게 "소련이 국제법 주체로서 소멸된다는 문장 하나에 동의하시겠습니까?"라고 물었고, 그 문장으로 시작된 합의문에 옐친과 함께 서명했다. 1992년 개혁에 쏟아진 비난의 번개 막대가 되어 물러난 뒤 의원과 상원의원으로 조용히 살았다.
동료들이 무너진 계측실에서 그를 끌어냈지만, 그는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오전 6시 프리피야티 병원에서 숨졌다.
블라디미르 샤셰노크는 원자력발전소의 계측·자동화 설비를 조정하고 시험하던 기술자였다. 체르노빌 4호기 시험에 참여하던 중 폭발로 척추와 갈비뼈가 부러지고 중화상과 방사선 화상을 입었으며, 동료들에게 구조되어 프리피야티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는 사고 당일 숨진 두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발전소의 기술 노동이 재난의 최전선에 놓였음을 보여 준다.
"당신은 그들을 배신했어요. 이제 당국이 우리를 빈대처럼 짓밟을 겁니다."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한 순간 그에게 한 말.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간호사로 일하며 1978년 자유해안노조(WZZ) 창립에 참여하고 지하신문 『해안의 노동자』에 노동안전과 직업병에 관한 글을 기고한 폴란드의 반체제 노동운동가이다. 1980년 8월 16일, 경영진이 임금인상을 약속하자 바웬사가 파업 종료를 선언했지만, 피엔코프스카는 안나 발렌티노비치와 함께 조선소 정문을 막아서서 동조 파업에 들어간 다른 공장 노동자들을 버릴 수 없다고 호소하며 파업을 연대로 전환시켰다. 이 개입으로 공장간파업위원회(MKS)가 결성되었고, 그녀는 21개 요구 중 의료개혁을 담은 16번 요구의 초안을 썼으며 8월 31일 그단스크 협정의 서명자 중 한 명이 되었다.
1993년 10월 3일 밤 TV 생방송: "이 시간에 경찰과 보안군에만 의존할 수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모스크바 시민 여러분, 모소베트 앞으로 모여 주십시오." — 수천 명이 거리로 나섰다.
소련 작가 아르카디 가이다르와 파벨 바조프의 손자. 모스크바국립대 졸업 후 《콤무니스트》와 《프라우다》 경제편집자로 시장개혁을 주장했다. 1991년 11월 옐친 정부 부총리 겸 경제재무장관으로 들어가 1992년 1월 2일 가격자유화와 민영화를 단행, 계획경제를 시장으로 전환하는 충격요법을 설계했다. 1992년 6~12월 총리 대행, 1993년 헌정위기 때 TV로 시민들에게 거리로 나설 것을 호소했다. 기근과 국가 붕괴를 막았다는 평가와 국민 저축을 쓸어갔다는 비판이 교차하는, 러시아 현대사에서 가장 첨예한 정책 유산을 남겼다.
1991년 6월 20일, 포포프는 미국 대사 잭 매틀록을 은밀히 만나 파블로프 총리, 야조프 국방장관, 크류치코프 KGB 의장이 쿠데타를 준비 중이라고 경고했다. 매틀록은 이를 옐친과 고르바초프에게 전달했고, 두 달 뒤 8월 쿠데타가 실제로 터졌다.
모스크바국립대 경제학부 학장을 지낸 경제학자로, 『경제문제』 편집장 시절 소련 체제를 '명령-행정 체제'로 명명하며 페레스트로이카의 이론적 기초를 닦았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당선되어 사하로프, 옐친과 함께 '지역간 의원 그룹' 공동의장으로 민주개혁 진영을 이끌었고, 1990년 모스크바 시의회 의장을 거쳐 1991년 6월 모스크바 최초의 민선 시장에 올랐다. 시장으로서 무상 주택 사유화와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했으며, 같은 해 6월 20일 미국 대사 잭 매틀록에게 파블로프·야조프·크류치코프의 쿠데타 음모를 비밀리에 경고했다. 1992년 6월 가이다르식 급진 개혁에 반대하며 시장직에서 물러난 후, 국제대학교 총장으로 학계에 복귀했다.
500일 계획의 설계자: 계획경제에서 시장으로의 급진적 이행을 설계한 페레스트로이카 경제학자
1970년대 탄광 연구 중 갱도 붕괴로 동료 넷과 함께 얼음물에 열 시간 갇혔다. 구조되었으나 셋은 병원에서 사망했다. 야블린스키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가 구출되었지만, 다섯 중 셋이 병원에서 죽었다」
리보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정치인. 플레하노프 국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탄광 노동 연구를 거쳐 1989년 레오니트 아발킨의 부름으로 소련 각료회의 통합경제국장이 되었다. 1990년 미하일 자도르노프, 알렉세이 미하일로프와 함께 500일 계획을 작성하여 2년 내 계획경제를 시장경제로 전환하는 로드맵을 제시했고, RSFSR 부총리 겸 경제개혁 국가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되었다. 고르바초프가 니콜라이 리시코프의 대안 계획과 절충하며 500일 계획이 무산되자 1990년 10월 사임했고, 이후 독자 싱크탱크 EPICenter를 설립했으며 1993년 야블로코를 창당해 러시아 자유주의 야당의 한 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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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1980전소 석탄공업관리연구소(VNIUUgol) 연구원
1980–1989노동·사회문제 국가위원회 중공업 부문장 → 종합부문 부장 → 사회발전·인구국장
「다우가바를 지키는 것은 독립 라트비아를 지키는 것과 같은 뜻이었다. 다우가프발스 HES 반대 투쟁이 우리 혁명의 시작이었다.」
라트비아의 언론인·정치인. 1986년 동료 아르투르스 스닙스와 함께 『문학과 예술』지에 실은 기사로 다우가프바 수력발전소 건설 반대 여론을 촉발했고, 3만 명의 서명을 모은 캠페인은 1987년 소련 각료회의가 공사를 중단시키는 성과로 이어졌다. 1988년 10월 라트비아 인민전선 창립대회에서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어, 환경운동에서 시작된 대중 동원을 독립 회복이라는 정치적 목표로 전환시켰다. 1990년 최고회의 부의장을 지내고 1992년 사임한 뒤 언론으로 돌아갔으며, 이후 사회민주노동당 당수를 거쳐 리가 시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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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언론 활동 시작, 연극·문학 비평
1986「다우가바의 운명을 생각하며」 발표, 다우가프발스 HES 반대 캠페인 촉발. 올해의 언론인 선정
폴란드 충격요법의 설계자. 1989년 마조비에츠키 내각의 재무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되어 '발체로비치 계획'을 주도했고, 초인플레이션을 진압하고 가격 자유화와 통화 태환을 단행하며 동구권 최초의 급진적 시장 개혁을 실행했다. 개혁은 폴란드를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로 전환시켰으나 20%의 GDP 하락과 대량 실업을 동반했고, '발체로비치는 물러가라'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격렬한 사회적 반발을 낳으며 1989년 체제전환의 약속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누군가 내게 공산주의를 무너뜨리는 지도자가 될 거라고 말했다면 결코 믿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은하계 전체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그단스크 조선소의 전기공으로, 1980년 파업을 이끌어 독립 자주 노조 '연대'를 결성하고 공산 정부와의 그단스크 협정을 이끌어냈다. 계엄령 아래 투옥되었고 1983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으며, 1989년 원탁회의의 비공식 야권 대표로서 폴란드의 평화적 체제 전환을 협상했다. 1990년 폴란드 최초의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시장경제로의 이행과 소련군 철수를 주도했으나, 1995년 재선에 실패하며 정치에서 물러났다. 한 노동운동가의 성공은 소비에트 블록 전체에 균열을 낸 신호였다.
1988년 10월 라흐바린네 창립대회에서 사회학자 라우리스틴은 사비사르와 함께 연단에 서서 독립운동의 지적 초석을 놓았다.
마리우 라우리스틴은 에스토니아 공산당 고위 간부의 딸로 탈린에서 태어나 타르투 대학에서 언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1980년 「40인 서한」에 서명하여 에스토니아의 언어와 문화를 질식시키는 러시아화 정책에 공개 저항했고, 이 경험은 지식인으로서의 정치적 진로를 결정지었다. 1988년 에드가 사비사르와 함께 라흐바린네를 공동 창립하고 그 창립대회를 조직했으며, 라흐바린네의 지적 리더십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독립 회복 후에는 초대 사회부 장관을 지냈고, 타르투 대학 교수로서 탈사회주의 전환의 사회학을 연구했다.
레닌 조선소에서, 레닌의 이론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접어 버렸다.
1980년 8월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파업의 실질적 설계자로, 파업 계획을 입안하고 21개 요구를 분류·우선순위화했으며 공장간파업위원회(MKS)를 공동 창립한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역사가이다. 1981년 12월 계엄 선포 후 4년 넘게 지하에 숨어 불법화된 연대노조의 지하 조직망을 재건했고, 여성으로 변장해 딸의 세례식에 참석할 정도로 철저히 은신했다. 1986년 체포되었다가 사면으로 풀려났고, 공산정권 붕괴 후 국회의원·상원의장·내무차관을 거쳐 2010년에는 몇 시간 동안 폴란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 독특한 이력을 남겼다.
1991년 1월 14일, 쿠즈민 장군이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낸 최후통첩은 단순했다. 라트비아가 채택한 법률들을 철회하라. 고르부노우스는 철회하지 않았고, 일주일 뒤 모스크바로 날아갔다.
라트비아 동부 루자 인근 필다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건설기술학교를 마치고 리가 공과대학과 모스크바 사회과학아카데미를 졸업했다. 라트비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이념 담당)까지 올랐으나, 1988년 라트비아 인민전선의 출범을 지지하며 개혁파로 전환했고, 1990년 5월 4일 소련을 점령국으로 규정하고 독립 이행기를 개시한 최고회의 회기를 주재했다. 1991년 1월 바리케이드 시기 쿠즈민 장군의 최후통첩에도 물러서지 않았고, 1월 21일 모스크바로 날아가 고르바초프와 사태를 논의했다.
낙원이 아니라 헌법을 위한 혁명. 반(反)유토피아적 혁명. 유토피아는 단두대와 굴라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가정에서 자랐으나 1968년 위기로 투옥되며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노동자방어위원회(KOR)와 연대노조의 전략가로 활동하고 1989년 원탁회의에 참여했으며, 《가제타 비보르차》 초대 편집장으로서 '당신들의 대통령, 우리의 총리' 구상을 제안해 평화적 권력 이양을 설계했다.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언론인으로 남아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했다.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비에트 사회 전체의 혁명적 쇄신이다. 성장의 가속은 민주화와 글라스노스트에서 분리될 수 없다. (1988)
트빌리시 태생의 아르메니아계 수리경제학자. 노보시비르스크 IEiOPP 소장(1966–1984)으로 시베리아 개발과 BAM의 경제 토대를 설계하고 『EKO』를 창간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 고문이 되어 기업 자율성 확대, 시장 요소 도입, 대외경제 개방이라는 개혁 청사진을 제시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서기(1986–1989)로 활동하며 소비에트 계획경제 안에서 최대한의 변화를 모색했고, 소련 해체 후 국민경제아카데미 총장(1989–2002)을 지냈다.
1989년 5월 인민대표대회에서 그가 마이크 앞에 섰다. '선례를 남기기 위해서'라고 말하며 고르바초프의 유일 후보에 맞섰고, 대의원 1,415 대 689로 그의 이름은 투표용지에서 제외되었다.
1943년 오룔 출생의 지구물리학 엔지니어로, 콜라반도 극지연구소에서 20년간 근무하며 1987년 최초의 비공식 개혁단체인 페레스트로이카 자발적 지원회를 아파티티에 결성했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대회 의원으로 당선된 직후 제1차 대회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에 맞서 최고회의 의장 후보로 자진 출마, 소련사 최초의 현직 서기장 대안 입후보라는 정치적 파열을 일으켰다. 1991년 8월 쿠데타 직후 의회 조사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진상 규명을 주도했으며, 벨로베시 협정을 헌법 위반으로 간주해 끝까지 소련 해체에 반대했다.
1993년 10월 4일 백악관 포격 중 라디오 생방송에서: "비행사들이여, 전투기를 띄워라! 이 갱단은 크렘린에 자리 잡고 있다.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구하라!"
소련의 마지막 영웅 중 한 명이자 러시아의 유일한 부통령. 아프가니스탄에서 Su-25 공격기로 485회 출격하고 두 차례 격추·포로가 된 전투 조종사였으며, 1988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옐친의 러닝메이트로 RSFSR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8월 쿠데타 당일 루키야노프에게 고르바초프 건강검진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으며, 총대주교 알렉시 2세를 설득해 교회의 옐친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반대하며 의회파에 섰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의회에 의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되었다가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예지 보로프차크는 1980년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자유노조 운동의 문을 연 젊은 노동자였다. 그는 보그단 펠스키와 루트비크 프론지뉴스키와 함께 8월 14일 파업을 시작했고, 안나 발렌티노비치의 복직과 임금 인상, 1970년 희생자 추모비를 요구했다. 계엄령 뒤에도 저항을 이어 가다 수감과 해고를 겪었으며, 1989년 조선소로 돌아왔다.
1980년 7월, 그는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와 함께 파업 중인 루블린으로 파견된 정부 대표단에 합류했다.
즈지스와프 쿠로프스키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청년조직에서 성장해 당·국가 기구의 중견 간부가 된 정치가였다. 그는 비아위스토크 지역 당 지도부와 중앙위원회에서 활동하며 농업·청년·경제 행정을 연결했다. 1980년 루블린 노동자들의 파업이 확산되자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와 함께 정부 대표단으로 파견되어 임금과 생활 조건을 둘러싼 요구를 협상했다. 이후에도 대외경제 관료로 일하며 인민공화국 체제의 관리자로 남았다.
그는 파업 첫날 국가보안기관의 보고가 믿을 수 없다며 즉시 현장 정보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타데우시 피슈바흐는 폴란드 통일노동자당의 당료이자 외교관으로, 1975년부터 그단스크 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80년 8월 그는 파업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데 반대하며 노동자 대표들과 초기 협상에 나섰고, 미에치스와프 야기엘스키가 도착한 뒤에도 정부 측 협상에 관여했다. 그러나 그의 온건한 조정은 독립 노조를 통제하려는 당의 전략과 충돌했고, 계엄 이후 중앙 정치에서 밀려났다. 이후 의회 부의장과 핀란드·라트비아 주재 대사를 지냈다.
하랄트 예거는 동독 국가보안부에 복무한 국경 통제 장교로, 국가의 여행 통제와 정보활동을 집행했다. 1989년 11월 9일 그는 상관의 명확한 지시를 받지 못한 채 Bornholmer Straße에 몰린 군중과 폭력 위험에 직면했다. 그는 통제 체계의 일부였지만 그날 밤 장벽을 열어 수천 명의 동독 시민이 서베를린으로 건너게 했다. 이후 그는 동독 체제의 내부 모순과 장벽 붕괴의 자유를 함께 인정했다.
소련 수용소에서 살아나와 발트 독립운동의 첫 공개 집회를 공동 주최한 에스토니아의 전 정치범
히르베파르크 집회가 「의사 표현의 길을 열어젖혔다」고 아호넨은 말했고, 이 역사적 전환을 「쇄빙선 효과」라 불렀다.
헤이키 아호넨은 1956년 에스토니아 페르누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NKVD에 처형되고 아버지는 수용소에 갇혔으며 어머니는 시베리아로 추방되어, 가족 중 억압받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1977년 지하 저항운동에 가담해 사미즈다트를 유통하고 서방 기자들에게 소련의 인권 탄압을 알렸으며, 1983년 반소 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페름 수용소에서 5년을 복역했다. 1987년 초 석방된 그는 8월 탈린 히르베파르크에서 비밀의정서 공개를 요구하는 최초의 공개 대중집회를 공동 조직해 발트 독립운동의 물꼬를 텄고, 이듬해 KGB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10년간 망명 생활을 한 뒤 귀환해 점령박물관 초대 관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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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1983지하 저항운동, 사미즈다트 유통, 인권 침해 기록
1983–1987페름 교정노동수용소에서 5년 복역 (반소 선동)
1987.08MRP-AEG 공동 창립, 히르베파르크 집회 공동 조직
1988.01에스토니아 민족독립당(ERSP) 공동 창립
1988–1989스톡홀름, 에스토니아 정치범 지원센터 부의장
1989–1998라디오 자유유럽 에스토니아 편집부장 (뮌헨·프라하)
2003–2012에스토니아 점령박물관(Okupatsioonide Muuseum) 초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