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유주의
Neoliberalism
1970년대 이후 자본이 이윤율 저하 위기에 대응해 노동계급에 대한 총체적 반격으로 전환한 정치경제 체제이자 축적 전략이다. 시장 자유화, 민영화, 규제 완화, 노동 유연화, 금융화, 공공 지출 축소를 핵심 정책으로 하며, 국가는 복지에서 철수하는 대신 시장 규율과 사유재산권을 강제하는 '작고도 강한 정부'로 재편되었다. 마르크스주의 분석에서는 자본의 계급 권력을 복원하기 위한 계급적 프로젝트로 이해된다. 다만 학술적 용례에서 단일한 정의는 확립되어 있지 않고, 신자유주의라는 명칭 자체를 둘러싼 논쟁도 계속되고 있다.
상세
정의와 명칭을 둘러싼 논쟁
신자유주의는 1970년대부터 부각한 자본의 세계화 흐름에 기반한 경제적 자유주의 사상으로, 복지국가의 국가개입 증대에 맞서 경제적 자유방임주의 원리를 현대적으로 되살리려는 지향을 가진다. 이른바 '워싱턴 합의'가 대표하는 정책 묶음에는 감세, 민영화, 규제 완화, 탈정치화, 노동시장 유연화, 경제 세계화, 자유무역, 통화주의, 긴축과 정부 지출 삭감이 포함된다.
그러나 이 용어는 경합하는 정의들을 가지며, 학술 연구에서 명시적으로 정의되지 않은 채 쓰이는 경우가 많다. 148편의 학술 논문을 검토한 연구는 신자유주의가 이데올로기, 경제이론, 발전이론, 경제개혁 정책 등 여러 의미로 거의 정의 없이 사용된다고 지적했다. 블록과 서머스는 이를 신자유주의라 부를지 자유방임주의라 부를지, 혹은 '자유시장 이데올로기'라 부를지를 둘러싼 논쟁으로 정리했고, 매케스니는 '장갑을 벗은 자본주의', 코츠코는 완전한 삶의 방식 자체를 목표로 하는 정치신학으로 규정했다. 《신자유주의 핸드북》은 특정성의 결여가 분석적 능력을 떨어뜨린다고 경고하며, 스테드먼 존스는 지나치게 포괄적인 약칭으로 쓰인다고 비판했다.
역사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을 붙인 사건은 파리에서 열린 1938년 8월 월터 리프먼 콜로키움으로, 대공황 이후 고전적 자유주의의 쇠퇴에 대응해 리프먼, 하이에크, 미제스, 뢰프케, 뤼스토, 루지에 등 25인의 자유주의 지식인이 모였다. 콜로키움은 가격기구의 우선성, 자유기업, 경쟁 체제, 강하고 공정한 국가를 신자유주의의 구성 요소로 규정했으나, 국가의 역할을 둘러싸고 뤼스토·리프먼의 강한 국가 감독론과 미제스·하이에크의 장벽 철폐론 사이에 깊은 이견이 있었다. 이 시도는 대체로 효과를 내지 못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 잊혔으나 1947년 설립된 몽펠르랭 학회의 전신이 되었다. 학회의 창립 회원에는 하이에크, 프리드먼, 칼 포퍼, 조지 스티글러, 미제스가 있었고, 붕괴한 자유방임주의와 뉴딜적 자유주의·사회민주주의 모두에 대한 대안을 모색했다.
1950~60년대 대부분의 학자는 신자유주의를 사회적 시장경제와 그 이론가들(오이켄, 뢰프케, 뤼스토, 뮐러아르마크)로 이해했고, 이때 신자유주의자란 국가개입을 수반하는 현대적 경제정책을 옹호하는 입장을 뜻해 미제스류의 자유방임 진영과 충돌했다. 프리드먼의 1951년 글 제목도 '신자유주의와 그 전망'이었다.
정책적 전환은 1970년대의 일련의 경제 위기와 스태그플레이션을 거쳐 이루어졌다. 1973년 위기로 전후 호황이 끝나자 케인스주의를 비롯한 국가자본주의적 형태들은 이윤율을 유지하지 못했고, 지배계급은 민영화, 외주화, 규제 완화, 자본 이동의 자유, 간접세로 수렴했다. 데이비슨은 이를 이데올로기의 공로가 아니라 저항이 성공하지 못한 조건에서 거의 필연적으로 일어난 전환이었다고 본다.
하비는 1978~80년을 결정적 전환점으로 잡는다. 1978년 덩샤오핑의 자유화 조치, 1979년 5월 대처의 집권, 1980년 레이건의 당선이다. 그에 앞서 1970년대 초 경제위기 후 칠레의 피노체트 정권에서 이른바 '신자유주의 국가 형성의 첫 실험이 이루어졌다.
미국에서는 1971년 루이스 파월이 상공회의소에 보낸 비밀 각서가 재계의 조직적 반격을 촉구했고, 이는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 헤리티지 재단, 카토 연구소, 맨해튼 연구소 등 보수·자유지상주의 싱크탱크의 부상에 기여했다. 카터 행정부의 운송·은행·항공 규제 완화와 볼커의 연준 의장 임명, 레이건 행정부의 감세·국방비 증액·금융 규제 완화, 클린턴 행정부의 북미자유무역협정, 상품선물현대화법, 글래스-스티걸법 폐지, 복지 축소가 뒤를 이었다. 거슬은 레이건을 신자유주의 질서의 이데올로기적 설계자로, 클린턴을 그 핵심 조력자로 평가하며, 뉴민주당과 신노동당이 케인스주의에서 신자유주의로 이동했다고 본다.
사례
칠레는 대표적 첫 실험이자 논쟁적 사례다. 1970~73년 알리엔데의 사회주의적 전환 이후 1973년 쿠데타로 수립된 피노체트 군사정권 아래에서 프리드먼과 하버거에게 배운 시카고 보이스가 국영기업의 신속한 민영화, 규제 완화, 무역장벽 축소를 시행하고 1978년부터 노동관계, 연금, 보건, 교육에 경쟁과 개인주의를 이식했다. 인플레이션은 1974년 600%대에서 1979년 50% 미만, 1982년 위기 전에는 10% 미만으로 낮아졌고 성장률도 급등했으나, 임금과 노동계급 복지가 삭감되면서 불평등이 확대되었다. 1982년 침체의 원인과 이 시기의 평가를 두고는 학계가 '칠레의 기적'과 극단적 소득 불평등을 낳은 실패라는 평가로 갈린다.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사례로는 1976년 아르헨티나 군사독재의 마르티네스 데 오스 경제계획(재정 긴축, 임금 동결, 무역 자유화)이 있었고 이후 산업이 쇠퇴하고 빈곤율이 1975년 9%에서 1982년 말 40%로 상승했다. 1989~2001년 카바요의 정책은 공공서비스 민영화, 금융 규제 완화, 자유무역과 노동시장 유연화에 집중했다. 멕시코는 1983년 IMF 차관 조건으로 국영산업 민영화, 통화 평가절하, 무역장벽 축소, 지출 제한을 받아들였고 1988년부터 살리나스가 이를 밀어붙인 뒤 북미자유무역협정이 체결되었다. 브라질은 1980년대 말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해 관세율이 1990년 32%에서 1994년 14%로 낮아지며 수입대체산업화가 끝났다.
페루에서는 후지모리 정권이 선거 공약과 달리 바르가스 요사보다 공격적인 신자유주의 정책을 채택해 300% 증세, 가격 자유화, 250개 국영기업 민영화라는 '충격요법'을 시행했고, 이는 빈민에게 즉각적 고통을 안겼다. 국제통화기금과 세계은행은 구조조정 차관의 조건으로 민영화, 무역 자유화, 강한 사유재산권, 지출 삭감을 요구했다.
영국과 미국 외의 사례로는 1984년부터 랑게 정부와 더글러스 재무장관의 뉴질랜드 로저노믹스(규제 완화, 관세·보조금 철폐, 1985년 3월 환율 자유변동, 국영기업 개혁과 대량 실직), 1983~96년 호주 노동당 호크·키팅 정부의 '경제 합리주의', 독일의 질서자유주의적 사회적 시장경제, 1980년 이후 일본 자민당의 정책, 이집트의 사다트·무바라크 개혁 등이 있다.
관계
사상적 계보로는 오스트리아 학파(멩거, 뵘바베르크, 비저, 미제스, 하이에크)가 정부 개입 비판을 통해 신자유주의 사상과 연결되며, 시카고 학파는 1970년대 중반까지 통화주의로 케인스주의에 맞서고 이후 새고전파 거시경제학으로 전환했으며 프리드먼, 스티글러, 코즈, 베커와 결부된다. 슬로보디안은 자본의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는 세계적 제도를 옹호한 '제네바 학파'를 제시했다. 볼커의 연준과 칠레 중앙은행은 통화주의와 연결된다.
계급적 분석에서는 하비가 신자유주의를 경제 엘리트의 계급 권력을 확대하려는 기업 자본가 계급의 '계급 프로젝트'로, 뒤메닐과 레비가 상층계급의 권력·소득·부의 복원을 일차적 목표로, 코츠가 노동에 대한 자본의 철저한 지배를 기초로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비판자로는 스티글리츠, 센, 하드슨, 장하준, 폴린, 피케티, 볼프, 촘스키, 하비, 지제크, 코넬 웨스트, 클라인 등이 있다. 금융화, 세계화, 프레카리아트, 대량 수감(와캉의 '켄타우로스 국가'), 우익 포퓰리즘 등이 관련 현상으로 논의된다.
구별
신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와 구별된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시장 질서가 인간 활동의 자생적 결과가 아니라 국가에 의해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보았으며, 시장 대 국가라는 구도 자체가 신화라는 지적이 있다. 데이비슨은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후퇴가 아니라 국가가 하는 일의 변화라고 본다. 실제로 국가는 공공서비스에서 물러나면서 치안과 구금을 확대했다.
이 용어는 1980년대 피노체트 치하 칠레 개혁과 결부되어 학계에 퍼지면서 부정적 함의를 얻었고, 주로 시장 개혁 비판자들이 사용하게 되었다. 지금도 일부에서는 좌파적 멸칭이라는 비판이 제기되는 한편, 거슬은 이를 정당한 용어로 보며 전통적 보수주의와 구별한다. 한국어권 서술에서는 정치적 방법을 통한 타국 시장 개방, 세계무역기구·세계은행·아시아개발은행을 통한 다자간 압력이 강조되며, 비판으로는 경제적 합리주의 맹신, 경제 엘리트주의, 불평등의 사회진화론적 정당화, 민주주의 훼손, 양극화 심화 등이 제기된다.
출처
- 위키백과 (영문) comprehensive overview of neoliberalism as political-economic ideology, its historical origins at the 1938 Colloque Walter Lippmann, its policy content (privatisation, deregulation, liberalisation, austerity), its deployment by Thatcher and Reagan from the late 1970s, and Marxist critiques including David Harvey's characterisation of it as a 'class project'
- 위키백과 (한국어) Korean-language article covering the definition, historical development, economic and political dimensions of neoliberalism, and its manifestations in South Korea from the Kim Young-sam administration onward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Neil Davidson (2016): three meanings of neoliberalism — ideology (1930s origins), strategy (mid-1970s shift of workplace power from labour to capital), and the entire period of capitalism since the 1970s; emphasises that neoliberalism is not about abolishing the state but changing what it does
- newlearningonline.com David Harvey, A Brief History of Neoliberalism (2005): foundational Marxist theorisation defining neoliberalism as a theory of political-economic practices centred on strong private property rights, free markets and free trade, where the state's role is to create and preserve the institutional framework for such practices
- 위키백과 (영문)
- newlearningonline.com
- 위키백과 (한국어)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