перестройка · 1985–1991

페레스트로이카

Perestroika

1985년 고르바초프가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한 후 추진한 정치·경제 개혁 정책으로, 문자 그대로 '재건' 또는 '구조 개편'을 뜻한다. 국영기업법(1987)과 협동조합법(1988)을 통해 기업 자율성과 사적 경제활동을 허용했고, 정치적으로는 복수후보제 선거와 인민대의원회의를 도입했으며 외교에서는 '신사고' 노선으로 냉전 종식을 이끌었다. 경제난 심화와 민족 갈등 폭발, 보수파의 저항 속에 통제를 잃으면서 1991년 소련 해체로 이어졌다.

상세

무엇을 하려던 개혁이었나?

페레스트로이카는 재건, 구조 개편을 뜻하는 러시아어다. 1985년 3월 고르바초프가 서기장에 취임했을 때 출발점이 된 진단은 경제 성장률의 장기 둔화였다. 다만 첫해의 처방은 아직 온건했다. 가속화(우스코레니예)라는 표어 아래 노동 규율을 다잡고 기계공업 투자를 늘리고 반알코올 캠페인을 벌이는, 체제의 구조에는 손대지 않는 안드로포프식 조치들이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와 악화되는 경제 지표가 이 접근의 한계를 드러냈다.

1987년부터 개혁의 성격이 바뀐다. 1월 중앙위 총회가 간부 제도와 민주화를, 6월 총회가 경제 운영 체계의 근본 개편을 의제에 올리면서, 문제의 원인을 개별 부문의 관리가 아니라 경제 체계와 정치 제도 자체에서 찾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페레스트로이카라는 말이 이 전환 전체를 가리키는 이름이 되었다. 고르바초프 자신의 정식화에서 이것은 사회주의의 포기가 아니라 갱신이었다. 「더 많은 사회주의, 더 많은 민주주의」라는 구호가 말하듯, 그는 스탈린 시대에 왜곡되기 이전의 사회주의적 잠재력을 되살린다는 논리로 개혁을 정당화했고, 레닌신경제정책이 그 역사적 전거로 자주 소환되었다.

경제에서는 무엇이 바뀌었나?

1987년 국영기업법은 기업의 자율성과 독립채산제(호즈라스촛), 노동 집단에 의한 관리자 선출을 도입했다. 1988년 협동조합법은 스탈린 이후 처음으로 사실상의 사영 기업 활동을 합법화했고, 서비스업과 소매, 무역에서 협동조합 부문이 빠르게 자랐다. 외국 자본과의 합작 기업도 허용되었다.

문제는 부분 개혁의 정합성이었다. 기업은 산출과 임금에 대한 결정권을 얻었지만 가격은 여전히 통제되고 공급은 배정되었다. 그 결과 임금 상승과 물자 부족이 동시에 진행되었다. 돈은 늘어나는데 살 물건이 없는 화폐 과잉이 쌓였고, 재정은 반알코올 캠페인의 세수 손실과 1986년 유가 폭락, 체르노빌 수습 비용까지 겹쳐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었다. 1990년과 1991년에는 배급표가 재등장했다. 시장 이행의 속도와 순서를 둘러싼 논쟁이 이 시기의 정책 결정을 지배했으며, 500일 계획을 포함한 여러 안이 채택과 철회를 반복하다 끝내 어느 것도 일관되게 실행되지 못했다.

정치는 왜 함께 개혁했나?

고르바초프의 판단으로는, 경제 개혁이 진척되지 않는 근본 원인이 당·국가 기구의 저항에 있었다. 관료 기구를 우회해 개혁의 사회적 기반을 만들려면 민주화가 필요하다는 논리였다. 1988년 제19차 당협의회는 권력을 당 기구에서 선출된 소비에트로 옮기는 정치개혁을 결의했고, 1989년 소련 역사상 첫 경쟁 선거로 인민대의원대회가 구성되었으며, 1990년에는 헌법 6조의 당 지도 조항이 삭제되고 대통령제가 도입되었다.

이 순서는 훗날 격렬한 논쟁거리가 된다. 경제가 성과를 내기 전에 정치의 문을 연 결과, 개혁으로 생겨난 새 정치 공간을 개혁 정부가 아니라 그 비판자들, 곧 급진 민주파와 공화국 민족운동이 차지했기 때문이다.

왜 통제를 잃었는가?

1989년부터 세 개의 위기가 한꺼번에 닥쳤다. 경제는 나빠졌고, 글라스노스트와 경쟁 선거가 열어 준 공간에서 발트 3국을 필두로 민족운동이 정치 주체로 등장했으며, 당은 옐친의 급진파와 리가초프의 보수파로 갈라져 갔다. 1990년 여름 러시아공화국까지 주권을 선언하면서 연방 중앙의 권위는 급속히 무너졌다. 개혁의 설계자는 어느새 양쪽 모두에게 공격받는 중간에 서 있었다.

1991년 8월, 개혁을 되돌리려던 보수파의 쿠데타는 사흘 만에 실패했지만 연방 국가의 권위를 최종적으로 무너뜨렸고, 12월 소련은 해체되었다. 체제를 살리려던 개혁이 체제의 종말로 귀결된 것이다.

어떻게 평가되는가?

해석은 크게 갈린다. 첫째, 체제 자체가 개혁 불가능했다는 해석이다. 코트킨 등은 계획경제와 일당제, 이념이 서로를 지탱하는 구조여서 어느 하나를 풀면 전체가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고 본다. 둘째, 개혁의 순서와 전술이 문제였다는 해석이다. 경제 개혁이 일관되지 못했고 정치 개혁보다 늦었다는 것으로, 시장을 먼저 열고 정치 통제를 유지한 중국의 경로가 흔히 대조 사례로 소환된다. 셋째, 브라운처럼 민주화의 성취 자체를 성공으로 보는 해석이다. 이 관점에서 소련 해체는 페레스트로이카의 실패가 아니라 민족 문제라는 별개 요인의 폭발이며, 평화적 민주화와 냉전 종식이야말로 개혁의 유산이다.

고르바초프 자신은 페레스트로이카를 미완의 혁명으로 불렀고, 개혁 말고 다른 길은 없었다고 끝까지 주장했다. 러시아의 대중적 기억 속에서 이 말은 자유의 시작과 상실의 시작이라는 두 얼굴로 남아 있으며, 그 간극 자체가 이 개혁의 역사적 크기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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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Archie Brown, The Gorbachev Factor (1996)
  2. Chris Miller, The Struggle to Save the Soviet Economy: Mikhail Gorbachev and the Collapse of the USSR (2016)
  3. Stephen Kotkin, Armageddon Averted: The Soviet Collapse, 1970–2000 (2001)
  4. Mikhail Gorbachev, Perestroika: New Thinking for Our Country and the World (1987)
  5. William Taubman, Gorbachev: His Life and Times (2017)
  6. Yegor Gaidar, Collapse of an Empire: Lessons for Modern Russia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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