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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이 수행한 활동과 그 활동에서의 소속을 함께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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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행정 인물 328명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비치 프로토포포프

Александр Дмитриевич Протопопов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6–1918 ✕ 처형

라스푸틴에 기대 제국을 내부에서 무너뜨린 최후의 내무장관

1917년 2월 26일, 시노드 부총장이 페트로그라드의 소요를 묻자 프로토포포프는 답했다: '걱정 마십시오. 러시아에 혁명이 일어난다 해도 50년은 더 있어야 합니다.'

프로토포포프는 섬유 재벌이자 10월당 두마 의원으로, 알렉산드라 황후와 라스푸틴의 후원으로 관료 경력 없이 제국 최후의 내무장관(1916–1917)에 임명되었다. 진행성 매독으로 인한 환각 속에서도 혁명의 위협을 부정하고 페트로그라드 식량 위기에 무능했으며, 각료와 총리의 거듭된 사임 요구를 무시했다. 2월혁명 중 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해 임시정부에 체포되었고, 1918년 10월 체카에 의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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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0월당 소속으로 제3대 국가두마 의원 당선
  • 1912제4대 국가두마 의원 재선
  • 1914–1916제4대 국가두마 부의장
  • 1916.4–6두마 대표단장으로 연합국 방문, 스톡홀름에서 독일 측과 비밀 접촉
  • 1916.9–1917.2러시아 제국 내무장관
  • 1917.2.28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하여 체포됨
  • 1917–1918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타간카 교도소 수감
  • 1918.10.27체카에 의해 모스크바에서 처형됨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Józef Piłsudski

사회주의자로 출발해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고,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의 서진을 꺾은 뒤 쿠데타로 권위주의 체제를 세운 군인 정치가

패배하고도 굴하지 않는 것이 승리요, 승리하고서 월계관 위에 주저앉는 것이 패배다.

1867년 12월 5일 주우프 manor(오늘날 리투아니아 잘라바스, 당시 러시아 제국 빌나 현)에서 슈лях타 귀족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가문의 민족 성격은 폴란드인 또는 폴란드화한 리투아니아인으로 갈려 서술된다. 오스트리아 편에 폴란드 군단을 일으키고 마그데부르크에 갇혔으며, 1918년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어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를 꺾었다. 1926년 5월 쿠데타 이후 사나차 체제의 실권자로 통치하며 브레스트 재판과 베레자 카르투스카로 반대파를 가두었고, 1932년 소련과 불가침조약을 맺은 뒤 1935년 5월 12일 바르샤바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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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92알렉산드르 3세 암살 모의 연루로 시베리아 유형
  • 1892–1908폴란드 사회당(PPS) 지도자, 기관지 『로보트니크』 발행인
  • 1908–1914전투단과 소총병 연맹 조직, 갈리치아에서 군사 간부 양성
  • 1914–1917폴란드 군단 제1여단장(오스트리아-헝가리군 소속)
  • 1917–1918독일에 대한 충성 선서 거부로 마그데부르크 요새 수감
  • 1918.11–1922.12국가원수(나첼니크 파인스트바)
  • 1919–19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폴란드군 총사령관
  • 1926.55월 쿠데타로 재집권
  • 1926–1935사나차 체제의 실권자, 국방장관 겸 두 차례 총리
  • 1932소련-폴란드 불가침조약 체결

니콜라이 2세

Николай II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러시아 1868–1918 ✕ 처형

전제(專制)를 신이 맡긴 의무로 믿은 마지막 차르

1917년 3월 2일 밤, 퇴위 조서에 서명한 니콜라이 2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새벽 1시에 무거운 마음으로 프스코프를 떠났다. 주위는 온통 배신과 비겁함과 속임수뿐이다!"

1905년 군중에게 발포한 뒤에도, 1915년 총사령관을 자임해 패전의 책임을 스스로 뒤집어쓴 뒤에도, 그는 물려받은 전제를 한 치도 내줄 수 없는 신탁으로 믿었다. 1917년 2월 쏠 군대가 사라지자 300년 왕조는 일주일 만에 끝났고, 이듬해 7월 예카테린부르크의 지하실에서 가족과 함께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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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차르 즉위
  • 1904–05러일전쟁 패배, 1905년 혁명
  • 1906기본법 공포, 제한된 두마 체제 출범
  • 1915총사령관을 자임하고 전선으로, 패전 책임이 왕좌로 직결
  • 1917.3퇴위
  • 1918.7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

체렌도르지 발링 발링기인

Балингийн Балин Цэрэндорж
정부·행정 몽골 국가기관 몽골 몽골 1868–1928 ○ 재임 중 병사

몽골 인민공화국 초대 총리, 구체제의 외교관

1924년 9월 23일 총리 체렌도르지가 의장을 맡은 헌법 기초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같은 해 11월 26일 첫 대후랄이 6장 50조의 헌법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헌법은 몽골 최초로 공화정을 규정했다.

1868년 헤를렌 바얀울란에서 제브춘담바 후툭투의 대샤비 속민으로 태어났다. 몽골어·만주어·중국어·러시아어를 익혀 1885~1911년 허레 만주 행정청의 서기와 통역관으로 일했고, 1911년 독립 후 외무부에 들어가 1913~1915년 차관, 1915~1919년 수석장관을 지냈다. 1919년 중국 점령기에 자치 철회 문서에 서명했고, 1921년 혁명 후 인민정부의 외무차관이 되었다. 1923년 총리로 임명되어 1924년 헌법 기초위원회를 이끌고 인민공화국 초대 총리가 되었다. 1926년 이후 소련의 통제가 강화되자 사유재산 폐지와 불교 탄압에 저항했으며, 1928년 재임 중 병사했다. 사망일은 2월 13일설과 11월 13일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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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1890허레 만주 행정청 서기
  • 1890–1904러시아 영사관 통역학교 교사
  • 1904–1911허레 만주부 중국어 통역관(6품)
  • 1913–1915자치 몽골 외무차관
  • 1915–1919외무부 수석장관
  • 1923–1928몽골 총리(1924년부터 인민공화국 총리)

스즈키 간타로

鈴木貫太郎
정부·행정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 1868–1948 ○ 자연사

항복 결정을 조율한 해군 출신 총리

1945년 8월 10일, 그는 교착한 회의에서 “이제 제가 어전에 나아가 성의를 여쭙고, 그 뜻으로 회의의 결정을 삼고자 합니다”라고 제안했다.

스즈키 간타로는 일본 해군 대장 출신 정치가로, 천황의 시종장과 추밀원 의장을 거쳐 전쟁 말기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는 군부의 전쟁 수행 노선을 받들었지만, 1945년 내각과 최고전쟁지도회의의 대립을 관리하며 전쟁을 끝낼 통로를 열었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 참전 뒤에도 이른바 ‘Big Six’의 교착은 계속되었고, 스즈키는 천황 주재 회의에서 결정을 천황의 재가에 맡기는 절차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했지만, 그 과정은 침략전쟁의 책임과 군부의 저항을 지운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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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4–1887해군병학교 입교 및 졸업
  • 1904–1905제4구축대 사령, 일본해 해전 참전
  • 1914–1917해군차관
  • 1924–1925연합함대 사령장관, 해군군령부장
  • 1929–1936천황 시종장 겸 추밀고문관
  • 1944–1945추밀원 의장
  • 1945-04–1945-08일본 내각총리대신, 항복 결정 주도
  • 1945-12–1946-06추밀원 의장, 공직 추방으로 사임

얀 퇴니손

Jaan Tõnisson
정부·행정 에스토니아 국가기관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1868–1941? 실종 · 사망 추정

타르투 강화를 체결한 에스토니아 총리, 「포스티메스」의 발행인

1940년 6월 소련의 점령이 닥치자 그는 페츠 대통령에게 상징적으로라도 무장 저항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포스티메스」를 이끈 에스토니아 자유주의 민족운동의 대표로 1919~1920년 총리를 지내며 타르투 강화를 체결했다. 1934년 페츠의 권위주의 체제에 반대해 밀려났고 1940년 소련 점령 뒤 체포되어 실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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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포스티메스」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민족운동의 기관지로 키움
  • 1906러시아 제1두마 의원, 비보르크 호소 서명
  • 1917에스토니아 임시지방의회(마패브) 의원
  • 1919–1920총리로 타르투 강화 조약 체결
  • 1923–1925리가코구 의장
  • 1927–1928국가원로
  • 1931–1932외무장관
  • 1933국가원로(마지막 정부)

보그드 칸

Богд хаан
정부·행정 몽골 국가기관 몽골 몽골 (티베트 출생) 1869–1924 ○ 자연사

티베트 출신 환생 라마로 즉위한 마지막 몽골 대칸

제후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민중은 그를 사랑했다.

티베트 라싸 출신의 제8대 젭춘담바 쿠툭투로, 달라이 라마·판첸 라마 다음가는 몽골 불교의 최고 환생 성직자였다. 1911년 청이 무너지자 몽골 귀족들이 그를 '보그드 칸'으로 즉위시켜 신정 국가를 세웠다. 1919년 중국이 자치를 폐지하며 권력을 잃었다가 1921년 인민혁명 뒤 제한군주로 복위했고, 1924년 5월 후두암으로 죽어 몽골의 군주제를 끝냈다. 17세기 말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외몽골의 대칸으로, 격동 속에서 종교적 카리스마로 몽골인들을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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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우르가(이흐 후레) 도착, 몽골 불교 수장으로 승인
  • 191112월 29일 보그드 칸으로 즉위
  • 1919중국의 자치 폐지로 권력 상실
  • 1921인민혁명 후 제한군주로 복위
  • 1924후두암으로 사망, 군주제 종식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Francisco Largo Caballero
정부·행정 스페인 공화파 스페인 스페인 1869–1946 ○ 병사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린 UGT의 노동자 지도자, 혁명과 전쟁 사이에서 무너진 공화국 총리

1936년 11월, 라르고 카바예로는 CNT 지도자 네 명을 각료로 임명했다. 국가의 폐지를 강령으로 삼아 온 아나키스트들이 국가의 장관석에 앉은 것이다. 그중 보건장관 페데리카 몬세니는 스페인 역사상 첫 여성 각료였다.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으로 일하다 노동조합 지도자가 된 사람. 노동총동맹(UGT)을 이끌며 1917년 8월 총파업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에서는 국가참사원에 들어가 조직을 지켰는데 이 선택은 평생 논쟁으로 남았다. 제2공화국 노동장관으로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밀어붙였고, 1934년 아스투리아스 봉기 전후로 급격히 좌경화해 지지자들에게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렸다. 1936년 9월 총리 겸 전쟁장관이 되어 11월에는 CNT 지도자 넷을 입각시켜 아나키스트를 처음으로 정부에 앉혔으나, 인민군 재건과 혁명의 속도를 놓고 공산당·소련 고문단과 계속 부딪쳤다. 1937년 5월 사태 뒤 POUM 금지 요구를 거부하다 각료들이 이탈하면서 물러났고, 망명지 프랑스에서 게슈타포에 붙잡혀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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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9마드리드의 가난한 집에서 출생,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이 됨
  • 1890–1894건설노동자 파업을 계기로 노동총동맹(UGT) 활동 시작, 1894년 PSOE 입당
  • 19178월 총파업 지도로 종신형 선고, 이듬해 하원의원 당선과 함께 석방
  • 1924–1930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 국가참사원 노동 참사관, UGT 조직을 유지한 대가로 오랜 논쟁을 남김
  • 1925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사후 PSOE와 UGT의 최고 지도자로
  • 1931–1933제2공화국 노동장관,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한 노동 입법 추진
  • 1934–1935「스페인의 레닌」으로 불릴 만큼 좌경화, 10월 아스투리아스 봉기 실패로 수감됐다 무죄 석방
  • 1936.09.04총리 겸 전쟁장관 취임
  • 1936.11CNT 각료 네 명을 입각시키고 정부를 발렌시아로 이전
  • 1937.05.175월 사태 뒤 POUM 금지를 거부하다 총리직에서 물러남
  • 1937–1938UGT 지도부에서도 밀려남
  • 1939공화국 패배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
  • 1943–1945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수감, 해방으로 생환
  • 1946.03.23파리에서 사망, 1978년 유해가 마드리드로 돌아옴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Vittorio Emanuele III

파시즘과 왕정의 책임 사이에 선 군주

1943년 7월 25일, 그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체포하게 한 뒤 바돌리오를 새 정부 수반으로 임명했다.

이탈리아 국왕으로서 자유주의 헌정의 쇠퇴, 파시스트 국가의 성립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그는 무솔리니의 권력 장악과 식민 전쟁, 인종법, 참전을 승인해 왕정의 책임을 키웠지만, 1943년 7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임명해 체제 전환의 헌정 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9월 휴전 뒤 로마를 떠난 그의 선택은 군과 국가를 혼란에 빠뜨렸고, 전후 왕정의 정당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1946년 퇴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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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이탈리아 육군 장교로 복무 시작
  • 1900이탈리아 국왕 즉위
  • 1915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국왕
  • 1922무솔리니에게 정부 구성을 위임
  • 1936에티오피아 황제 선포
  • 1940추축국 편으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 1943무솔리니 해임, 바돌리오 정부 임명
  • 1946퇴위하고 이집트로 망명

나리만 나자프 오글루 나리마노프

Нариман Наджаф оглы Нариманов
정부·행정 소련 아제르바이잔 1870–1925 ○ 심장마비

계몽 문학에서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수장으로

1906년 교사 대회에서 석유왕 타기예프가 장학금을 들먹이며 입을 막으려 하자, 나리마노프는 즉석에서 장학금을 포기하며 말했다. "비열한 금속 때문에 침묵하지 않겠다. 동지들이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되려 피를 흘리는 이때에."

교사이자 의사, 작가였던 나리마노프는 바쿠에 공공 독서실을 열고 아제르바이잔 사실주의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남겼다. 1905년 훔메트에 합류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이끈 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이 되었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했지만 중앙집권적 민족정책과 충돌했으며, 1925년 사망 후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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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보르찰리현 키질-아질리 마을 교사
  • 1891–1902바쿠 사립 김나지움 교사, '나리마노프 독서실' 설립·운영 (1894)
  • 1895–1899희곡 「무지」(1895), 소설 「바하두르와 소나」(1896), 비극 「나디르 샤」(1899) 발표, 고골의 「검찰관」 번역·공연 (1896)
  • 1905무슬림 사회민주주의 조직 '훔메트' 가입
  • 1908노보로시스크 대학 의학부 졸업, 의사 면허 취득
  • 1909–1914체포되어 아스트라한으로 5년 유배, 그곳에서 의사·연극인·민중대학 평의회 의장으로 활동
  • 1917바쿠 볼셰비키 위원회 위원, 신문 「훔메트」 편집자
  • 1918바쿠 인민위원회 도시경제 담당 인민위원
  • 1919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부 근동부장
  • 1920–1922아제르바이잔 혁명위원회 의장 겸 인민위원회의 의장, 외무인민위원 겸임 (1920–1921)
  • 1922자카프카스 SFSR 연방평의회 의장 (3월~12월), 제노바 국제회의 소비에트 대표단 참가
  • 1922–1925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 국가원수 중 1인
  • 1923–1925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

Juho Kusti Paasikivi
정부·행정 핀란드 국가기관 핀란드 핀란드인 1870–1956 ○ 자연사

겨울전쟁 직전 모스크바 협상에서 스탈린과 마주 앉은 핀란드의 현실주의 외교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다: 스탈린에게서 빌려와 평생의 외교 원칙으로 삼은 말.

러시아 제국의 대공국 시절부터 시작해 핀란드 독립·내전·겨울전쟁·계속전쟁·냉전을 모두 통과한 정치가다. 독립 직후인 1918년 첫 총리를 지내며 친독일·군주제 노선을 밀었고, 1920년 타르투 조약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했다. 1939년 가을 스톡홀름 주재 공사에서 소환되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몰로토프와 직접 협상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전쟁이 터지자 무임소장관으로 평화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1946년 대통령에 오른 뒤로는 '현실 인정이 지혜의 시작'이라며 소련과의 지정학적 공존을 추구했고, 이 파시키비 독트린은 냉전기 핀란드 외교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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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3핀란드 의회 의원 (핀란드당)
  • 1908–1909원로원 재무분과장
  • 1918.5–11핀란드 총리
  • 1914–1934KOP 은행 총재
  • 1936–1939주스웨덴 공사
  • 1940–1941주모스크바 공사
  • 1944–1946핀란드 총리
  • 1946–1956핀란드 대통령

이오아니스 메탁사스

Ιωάννης Μεταξάς
정부·행정 그리스 국가기관 그리스 그리스인 1871–1941 ○ 자연사

왕정과 반공을 앞세운 8월 4일 독재자

“그렇다면 전쟁이다.”

그리스의 군인 출신 정치가로, 왕정과 반의회주의를 결합한 권위주의적 국가 질서를 추구했다. 1936년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의 지지로 의회를 정지하고 8월 4일 체제를 세워 정당과 파업을 금지하고 좌파를 탄압했다. 동시에 국가 개입과 청년 조직을 통해 사회를 동원하려 했으며, 그의 체제는 파시즘과 권위주의적 보수 독재의 성격을 함께 지닌 것으로 논쟁되어 왔다. 1940년 이탈리아의 최후통첩을 거부해 전쟁을 이끌었지만, 1941년 독일 침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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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그리스 육군 공병 소위
  • 1899–1903베를린 전쟁대학 유학
  • 1910–1912육군장관 겸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부관
  • 1912–1913발칸 전쟁 작전참모 및 런던 회의 군사고문
  • 1922–1936자유사상당 창당 및 국회의원
  • 1926–1928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 내각 교통장관
  • 1932–1933파나기스 찰다리스 내무장관
  • 1936–1941그리스 총리, 8월 4일 체제 지도자
문학·예술 소속 미확정 라트비아 라트비아 1871–1942 ○ 사망

1919년 친독 라트비아 정부를 이끈 목사이자 작가

"민족의 운명을 가르는 것은 영리한 연설이나 조약이 아니라 힘이다"는 1924년 반역 재판 석상에서 남긴 말이다.

라트비아 문학의 대표적 소설가이자 루터교 목사로 1919년 5월 리예파야 쿠데타 뒤 폰 데어 골츠가 뒷받침한 친독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체시스 전투 뒤 정권이 무너져 독일로 피했고 1924년 귀국해 국가반역죄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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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9도르파트(타르투) 대학 신학부 수학
  • 1903–1906체시스에서 잡지 《아우스트룸스》 편집·발행
  • 1906–1918마티시·칼스나바·비에탈바 교구 루터교 목사
  • 1917라트비아 농민연합 창립 참여, 이사
  • 1919.05–06친독 임시정부 수반(총리)
  • 1924국가반역죄 유죄 판결, 대통령 사면 뒤 추방
  • 1926–1930동프로이센 알트슈타트 독일 교구 목사

파벨 니콜라예비치 페레베르제프

Павел Николаевич Переверзев
정부·행정 러시아 임시정부 러시아 러시아인 1871–1944 ○ 자연사

혁명의 위기에서 법과 정치의 경계를 넘은 법률가

1917년 7월 4일, 그는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겨냥한 반역 혐의 자료의 언론 공개를 승인했다.

파벨 페레베르제프는 제정 러시아의 정치사건을 변호한 법률가로, 혁명기에는 법무 행정과 임시정부의 질서를 맡았다. 그는 1917년 7월 볼셰비키와 독일의 연계를 주장하는 자료를 언론에 공개해 정치적 탄압의 분위기를 키웠고, 자료의 신뢰성과 해석은 이후에도 논쟁으로 남았다. 공개가 정부와 조율되지 않았다는 비판 속에 사임한 뒤 내전과 망명을 거쳐 프랑스에서 러시아 이민 변호사 조직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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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상트페테르부르크대학교 법학부 졸업
  • 1901선서 변호사로 활동 시작
  • 1915제4차 국가두마 볼셰비키 의원들의 변호인
  • 1917.03페트로그라드 사법재판소 검찰관
  • 1917.05–07임시정부 법무장관
  • 1920–1921콘스탄티노폴리스와 튀니스에서 망명 생활
  • 1927–1944프랑스 러시아 이민 변호사 조직에서 활동
정부·행정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인 1871–1950 ○ 자연사

제3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 1940년 권력 이양에 서명한 국가원수

1940년 6월 16일 레이노 내각이 물러난 뒤 그는 페탱을 정부 수반으로 지명했고, 페탱은 다음 날 휴전을 요청했다. 그는 7월 10일 헌법법에 서명했고 다음 날 페탱이 국가원수가 되었다.

광산공학을 전공한 프랑스의 중도우파 공화주의 정치가로, 1900년 뫼르테모젤에서 29세에 하원의원이 되었고 1906년부터 26년간 뫼르테모젤주의회 의장을 지냈다. 1911~1914년 식민지 장관, 1913년 전쟁 장관, 1917~1919년 봉쇄·해방 지역 장관을 지냈고 1920년 상원에 들어가 1931년 상원의장이 되었다. 1932년 폴 두메르 암살 후 제3공화국 마지막 대통령에 선출되었고 1939년 재선되었으나 직접적 권한은 좁았다. 1940년 6월 16일 페탱을 지명했고 7월 10일 569대 80으로 통과된 헌법법에 서명했으며 다음 날 페탱이 국가원수가 되었다. 사임하지 않았고 1943년 독일군에 체포되었다. 1950년 3월 6일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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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01광산공병, 베술·낭시
  • 1900–1920하원의원, 브리에
  • 1911–1914식민지 장관, 1913년 전쟁 장관
  • 1917–1919봉쇄·해방 지역 장관
  • 1920–1931상원의원, 상원 부의장·의장
  • 1932–1940프랑스 대통령, 제3공화국 마지막 대통령
  • 19407월 10일 헌법법 공포, 사임 없이 권력 이양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로마노바

Александра Фёдоровна Романова
정부·행정 러시아 제국 러시아 독일 1872–1918 ✕ 처형

라스푸틴에 의존해 제정 말기 정치를 좌우한 마지막 황후

남편의 퇴위 소식을 듣고 알렉산드라는 단 한마디만 남겼다. "신이시여, 이것이 러시아를 구하게 하소서!"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로 태어나 1894년 러시아 황후가 된 알렉산드라는, 신이 내린 전제군주권을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다는 신앙으로 니콜라이 2세를 움직였다. 혈우병을 앓는 황태자 알렉세이를 구하기 위해 그리고리 라스푸틴에게 의존했고, 제1차 세계대전 중 니콜라이 2세가 총사령관으로 전선에 나간 사이 라스푸틴의 조언을 받아들여 각료를 거듭 교체하며 내정을 좌우했다. 독일계 출신이라는 의심과 라스푸틴 스캔들로 민중의 분노를 샀고, 전제정치 고수와 개혁 거부로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을 앞당겼다. 1918년 7월 17일 예카테린부르크의 이파티예프 하우스 지하실에서 남편과 다섯 자녀와 함께 볼셰비키에 의해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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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니콜라이 2세와 결혼, 러시아 황후
  • 1904황태자 알렉세이 출산
  • 1905라스푸틴과 첫 만남
  • 1915–17니콜라이 2세 부재 중 라스푸틴과 함께 내정 통제
  • 1917.3가택연금
  • 1918.7예카테린부르크에서 가족과 함께 처형

미콜라 올렉시요비치 스크리프니크

Микола Олексійович Скрипник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872–1933 ✕ 자살

우크라이나화의 설계자, 스스로 총구를 겨눈 문화혁명가

1918년 봄, 스탈린이 우크라이나 측에 "정부와 공화국 놀음을 그만두라"고 요구하자, 스크리프니크가 속한 우크라이나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비서국은 전보로 반박했다: "우리 행동의 근원은 인민위원의 태도가 아니라 우크라이나 노동대중의 의지다."

1872년 1월 13일(구력 25일) 예카테리노슬라프 현 바흐무트 군 야시누바타 마을에서 철도 전신 기사인 아버지와 젬스트보 병원 조산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1917년 12월 레닌의 지시로 우크라이나에 파견되어 초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인 인민비서국 의장을 맡았으며, 1918년 7월부터 1919년 1월까지 체카 반혁명투쟁국 국장을 지냈다. 1927년부터 1933년 2월까지 우크라이나 계몽인민위원으로서 우크라이나화를 이끌었고, 1929년 6월 29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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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0사회민주주의 서클에서 활동 시작, 마르크스주의 문헌 독학
  • 1900–1917페테르부르크 기술원 입학, 이스크라·프라우다 등 당 기관지 편집, 15차례 체포·7차례 유형, 6차례 탈옥
  • 1917.3–1917.12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서기, 10월 봉기 때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7.12–1918.4레닌 지시로 우크라이나 파견, 초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 인민비서국 의장
  • 1918.7–1919.1체카 전연방 위원회 위원 겸 반혁명투쟁국 국장, 1918년 12월부터 1919년 1월까지 비밀정치국 국장
  • 1919.1–1919.5우크라이나 국가통제인민위원 겸 최고사회주의검열 위원장
  • 1927–1933.2우크라이나 계몽인민위원, 우크라이나화 정책·철자법 개혁·과학원·백과사전 총괄
  • 1933.2–1933.7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 의장으로 좌천

레옹 블룸

Léon Blum
정부·행정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72–1950 ○ 심장질환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남긴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

「집권하는 동안 나는 집무실을 거의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밖에 나가 파리 교외를 지나며 고물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2인승 자전거의 행렬을, 맞춰 입은 스웨터 차림의 노동자 부부들을 보았을 때, 그래도 내가 어렵고 어두운 삶들에 일종의 갠 하늘을, 한 줄기 트임을 들여놓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리옴 재판 진술, 1942년 3월

드레퓌스 사건으로 정치에 들어와 1920년 투르 대회에서 다수파의 코민테른 가입에 맞서 사회당(SFIO)의 「낡은 집」을 지킨 지도자. 1936년 인민전선 정부의 총리로 마티뇽 협정을 중재하고 2주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입법했으며,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이자 최초의 유대인 총리로서 극우의 표적이 되었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반대한 80인 중 한 명으로 비시 정권의 리옴 재판에서 피고석을 인민전선 변호의 연단으로 바꾸었고, 부헨발트 억류에서 살아 돌아와 1946년 말 과도정부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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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906국사원 법관이자 문예비평가,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조레스를 따라 사회주의 운동에 입문
  • 1914–1919전시 사회당 각료 비서실장, 종전 후 하원의원 당선
  • 1920.12투르 대회에서 다수파의 코민테른 가입에 맞서 「낡은 집」 사수 연설
  • 1921–1936SFIO 재건, 『르 포퓔레르』 주필, 원내 지도자
  • 1936.02왕당파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에게 폭행당해 중상
  • 1936.06–1937.06인민전선 정부 총리, 마티뇽 협정·유급휴가·주 40시간제
  • 1938.03–04제2차 블룸 내각, 상원의 벽에 다시 막혀 한 달 만에 붕괴
  • 1940.07비시에서 페탱 전권 위임에 반대표를 던진 80인 중 한 명
  • 1942–1945리옴 재판에서 인민전선을 변호, 이후 부헨발트 인근 특별수용소 억류
  • 1946.12–1947.01과도정부 총리, 전후 재건과 미국 차관 교섭(블룸-번스 협정)
  • 1950.03주이앙조자스에서 사망

이동휘

이동휘

일제에 맞서 볼셰비키 혁명과 민족해방을 접목시킨 조선 공산주의의 선구자

임종 직전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소.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한제국 장교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전향하여 조선 민족해방운동에 마르크스주의를 최초로 접목시킨 공산주의 선구자. 1918년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무장독립노선을 추진했으며, 이승만과 결별 후 고려공산당(상하이파)을 이끌며 민족해방과 계급혁명의 결합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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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02한성무관학교 졸업, 육군 참령·강화도 진위대장
  • 1906–1911신민회 조직, 보창학교 설립, 105인 사건 투옥
  • 1913–1917연해주·북간도 망명, 대전무관학교 설립 및 독립군 양성
  • 1918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창당, 위원장
  • 1919–1921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 1921고려공산당(상하이파) 창당
  • 1922–1935코민테른 연락, MOPR 원동지역 한인 책임자

퀴외스티 칼리오

Kyösti Kallio
정부·행정 핀란드 국가기관 핀란드 핀란드인 1873–1940 ○ 자연사

농민 개혁과 전시 타협의 대통령

“이 괴물 같은 조약에 서명하는 손이여, 썩어라.”

퀴외스티 칼리오는 핀란드 농민정당의 지도자로서 토지개혁과 의회정치를 추진한 정치가였다. 그는 네 차례 총리와 여러 차례 의회 의장을 지냈고, 1922년 토지 없는 농민의 정착을 지원한 이른바 칼리오 법을 이끌었다. 대통령으로서 겨울전쟁을 이끌며 영토 양보에 저항했지만, 1940년 3월 모스크바 평화조약을 받아들여야 했다. 조약 서명을 두고 남긴 저주는 그해 여름 오른팔 마비로 현실의 아이러니가 되었고, 건강 악화로 사임한 뒤 같은 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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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06핀란드 의회 신분제 의회 농민계급 대표
  • 1907–1937핀란드 의회 의원, 농민연합 지도자
  • 1917–1922농업 담당 장관, 독립 상원과 정부에서 재임
  • 1922칼리오 법으로 불린 토지 정착 개혁 추진
  • 1922–1924, 1925–1926, 1929–1930, 1936–1937핀란드 총리 네 차례
  • 1920–1936핀란드 의회 의장, 여러 회기 재임
  • 1937–1940핀란드 대통령, 겨울전쟁과 모스크바 평화조약 시기

크리스티안 게오르기예비치 라콥스키

Христиан Георгиевич Раковский

발칸 혁명가에서 우크라이나 수반으로: 반대파 이론가가 된 외교관

「우리의 불행은 책임 있는 자리를 맡았고, 권력이 우리 머리를 돌게 했다는 데 있다」, 1938년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

불가리아 민족 출신으로 루마니아 시민권을 지닌 범유럽적 혁명가였고, 발칸 사회민주주의 연맹을 창설했다. 1919–1923년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내며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를 세웠고, 주영·주프랑스 소비에트 대사를 지냈다. 스탈린의 민족 정책과 당 관료화를 비판한 좌익 반대파의 이론가로 1927년 제명되었고, 1934년 스탈린에게 오류를 인정하고 1935년 복당했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고 1941년 9월 11일 오룔에서 총살되었으며, 1988년 2월 4일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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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6제네바·베를린·몽펠리에에서 의학 수학, 유럽 사회주의 운동 참여
  • 1910루마니아 사회민주당 재건 및 발칸 사회민주주의 연맹 창설 주도, 제1서기
  • 1919–1923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외무·내무인민위원
  • 1919–1927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 1919–1920년 조직국 위원
  • 1923–1927소비에트 연방 주영·주프랑스 전권대표
  • 1927–1935좌익 반대파 지도자로 당 제명 및 유배 (아스트라한·사라토프·바르나울)
  • 1934–19371934년 스탈린에게 오류 인정, 1935년 11월 복당, 보건인민위원부 학술연구소 관리국장
  • 1937–19411936년 재제명, 1937년 1월 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 20년형, 1941년 9월 11일 오룔에서 총살

파울로 페트로비치 스코로파츠키

Павло Петрович Скоропадський

독일 점령 하 우크라이나국의 마지막 헤트만

1918년 4월 29일 키예프에서 전우크라이나 지주대회가 만장일치로 '헤트만 만세!'를 외치며 파울로 스코로파츠키를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으로 추대했다.

코사크 헤트만 가문의 후예이자 제정 러시아 군단장으로 1차 세계대전을 치른 귀족 장군. 1918년 4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독일군의 후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중앙라다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국의 헤트만으로 즉위했다. 8개월간의 집권기 동안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와 국립대학을 세우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나, 대지주 중심의 토지 정책과 독일 점령군의 곡물 강제 징발이 농민의 광범한 저항을 불렀다. 1918년 11월 독일 패전과 함께 페틀류라가 이끈 반헤트만 봉기에 밀려 퇴위했고, 이후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나치 협력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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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근위 기병연대 장교 임관
  • 1904–1905러일전쟁에서 코사크 부대 지휘, 훈장 수훈
  • 1912소장 승진, 니콜라이 2세의 시종무관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병사단 지휘, 중장 승진
  • 1917제34군단장, 우크라이나화하여 제1우크라이나군단으로 개편
  • 1917.10자유코사크 총사령관(오타만)으로 선출
  • 1918.04–12우크라이나국 헤트만
  • 1919–1945독일 망명, 헤트만 운동 지도

이반오에 보노미

Ivanoe Bonomi

파시즘과 왕정 사이에서 타협을 조직한 개혁 정치가

1943년 6월 그는 국왕에게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바돌리오를 임명하며 독일과의 동맹을 끊으라고 비밀리에 요구했다.

이반오에 보노미는 사회주의 개혁파에서 출발해 이탈리아 자유주의 의회정치의 핵심 인물로 이동한 정치가였다. 파시즘의 부상기에 충분히 단호하게 저항하지 못했고 무솔리니 정부를 지지한 전력이 있었지만, 1942년부터 반파시스트 세력을 다시 연결하며 정권 교체를 모색했다. 그는 1943년 국왕에게 무솔리니 해임과 피에트로 바돌리오 기용을 비밀리에 요구했고, 9월에는 6개 정당으로 구성된 민족해방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이후 왕정과 저항운동, 연합국 사이의 타협을 이끌며 전후 이탈리아의 제도적 이행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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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이탈리아 사회주의 노동자당에 가입
  • 1909사회주의자로 하원의원에 당선
  • 1912이탈리아 개혁사회당 창당에 참여
  • 1916–1919보셀리·올란도 내각 공공사업장관
  • 1921–1922이탈리아 왕국 총리
  • 1942–1943지하 반파시스트 신문과 야권 연락망 조직
  • 1943–1944민족해방위원회 의장
  • 1944–1945해방기 이탈리아 정부 총리
  • 1948–1951공화국 초대 상원의장

블라디미르 드미트리예비치 본치-브루예비치

Владимир Дмитриевич Бонч-Бруевич
정부·행정 소련 국가기관 소련 러시아 1873–1955 ○ 자연사

소비에트 정부 기구를 설계하고 종교적 반대자들을 연구한 혁명가

1917년 10월, 스몰니에서 물러난 레닌을 자기 아파트에 재웠다. 현관문에 사슬과 자물쇠를 모두 채우고 장전한 리볼버 두 정을 곁에 둔 채, 그는 레닌이 잠들었는지 확인하려고 밤새 소파에서 졸았다. 그러나 레닌은 자는 척하던 그를 피해 살며시 일어나 책상에 앉았고, 날이 샐 무렵 유명한 토지에 관한 포고령 초고를 주머니에서 꺼내 낭독했다. 본치-브루예비치는 "사회주의 혁명의 첫날을 축하합니다"라는 인사로 아침을 열었다.

레닌의 사실상 개인비서이자 초대 인민위원회 사무국장(1917~20)으로서 소비에트 행정기구의 기초를 닦았다. 러시아 종파운동의 민족지학자로서 1919년 양심적 병역거부를 합법화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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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1892콘스탄티노프 측량학교 입학, 학생운동으로 제적 후 쿠르스크 측량학교 졸업
  • 1895–1903RSDLP 입당, 모스크바 노동자동맹 활동, 1896년 스위스 망명, 「이스크라」 협력, 두호보르 교도 캐나다 이주 조직
  • 1903–1905RSDLP 중앙위원회 원정대 책임자(제네바), 당 중앙기록보관소 설립 참여
  • 1905–1912러시아 귀환, 「노바야 지즌」·「나샤 미슬」 편집, 1908년부터 출판사 「지즌 이 즈나니예」 경영, 1912년 「프라우다」 편집위원
  • 1917.3–10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스몰니-타브리다 구역 사령관
  • 1917–1920인민위원회의 사무국장(우프라블랴유쉬치 델라미) — 소비에트 행정기구 구축, 수도를 모스크바로 이전 집행
  • 1919종교적 신념에 따른 병역 면제에 관한 법령 초안 주도
  • 1920–1929과학·저술 활동 전념, 모스크바 근교 실험 국영농장 「레스니예 폴랴니」 운영
  • 1933–1945국립문학박물관 창설·초대 관장
  • 1945–1955소련 과학아카데미 종교·무신론사 박물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