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전쟁
러시아 정착민의 타슈켄트 소비에트에서 1924년의 민족 경계 획정까지, 투르키스탄·카자흐 초원·부하라·히바의 혁명은 누구의 혁명이었고, 붉은 군대는 왜 페르시아의 길란까지 나아갔나?
1917년 타슈켄트에서 권력을 잡은 소비에트는 러시아인 정착민과 철도 노동자의 정권이었고, 무슬림이 세운 코칸트 자치국을 1918년 2월 학살로 무너뜨렸다. 바스마치 봉기, 알라시 오르다의 선택, 영국과 백군에 막힌 고립을 거친 뒤 프룬제의 군대가 1920년 히바와 부하라를 인민소비에트공화국으로 바꾸었고, 같은 해 카스피 함대는 페르시아 길란에 상륙했다. 1924년 소련은 이 지역을 민족별 공화국으로 다시 나누었다.

1917년: 타슈켄트 소비에트와 정착민의 권력
19세기 후반 러시아 제국은 투르키스탄을 정복해 사실상의 식민지로 다스렸다. 원주민은 「이민족(이노로드치)」으로 분류되어 러시아인과 다른 법적 지위에 놓였고, 제국 인구의 10% 가까이를 차지하면서도 435석의 국가두마에 대표를 한 명도 보내지 못했다. 1906~1912년 스톨리핀 개혁 시기에는 최대 50만 농가가 러시아 중부에서 카자흐 초원과 중앙아시아로 옮겨 와 토지를 차지했다. 1916년 6월 차르 정부가 19~43세 무슬림 남성을 전선 후방의 노역에 징발하자 7월 호젠트에서 시작된 저항이 페르가나·세미레치예·카자흐 초원으로 번졌다. 반란과 진압 과정에서 정착민과 원주민 사이에 학살이 서로 벌어졌고, 진압으로 직간접적으로 죽은 사람은 약 10만~50만 명으로 추산되며, 수십만 명의 키르기스인과 카자흐인이 중국으로 달아났다. 키르기스 역사학에서는 키르기스인의 최대 40%가 이때와 그 직후에 죽었다고 본다. 러시아 국가는 10월 혁명 때까지 일부 지역의 질서를 회복하지 못했고, 이 경험은 뒤이은 혁명기에 원주민이 러시아인 권력을 바라보는 눈을 결정지었다. 1 2 3
2월 혁명 뒤 투르키스탄의 무슬림 지식인들은 1917년 3월 자디드(개혁파)가 중심이 된 「슈로이 이슬로미야」(무슬림 평의회)를 세웠고, 이슬람 율법(샤리아)을 앞세운 보수적 울라마는 「울라모 자미야티」로 갈라져 나왔다. 그러나 타슈켄트에서 실제 힘을 쥔 것은 러시아인 철도 노동자와 병사로 이루어진 타슈켄트 노동자·병사 소비에트였다. 소비에트는 러시아 임시정부의 지방 기구와 맞서다가 11월 무장봉기를 일으켜 11월 14일(구력 11월 1일) 타슈켄트를 장악했다. 같은 시기에 열린 제3차 투르키스탄 지방 소비에트 대회는 소브나르콤을 세웠지만 원주민의 자치 요구는 다루지 않았다. 동시에 열린 무슬림 대회가 연립정부를 제안하자 투르키스탄 소브나르콤 의장 표도르 콜레소프는 「현 시점에서 무슬림을 최고 권력 기관에 들이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거절했고, 14명의 인민위원 가운데 원주민은 한 명도 없었다. 러시아어 출처는 이 결정을 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비판하며 원주민 대표를 넣으라고 요구했다고 적는다. 인구의 압도적 다수인 무슬림에게 혁명 권력은 차르 시대 식민 질서의 연장처럼 보였다. 2 4 5 6 3
코칸트 자치국과 1918년 2월의 학살
타슈켄트 소브나르콤의 거부에 맞서 무슬림 운동은 소비에트의 손이 닿지 않던 페르가나 계곡의 상업 중심지 코칸트에서 제4차 임시 전체 무슬림 지방 대회를 열었다. 약 200~250명의 대의원은 1917년 12월 10일(구력 11월 27일) 투르키스탄을 「연방 민주 러시아 공화국과 결합한 영토 자치체」로 선포했다. 이것이 투르키스탄 자치국, 흔히 코칸트 자치국이라 불리는 정부다. 54석의 임시 인민회의와 12명으로 이루어진 자치국 정부를 두었고, 첫 총리는 카자흐인 무하메잔 티니슈파예프, 대외 관계 책임자는 무스타파 쇼카이였다. 정부는 1918년 3월 20일 보통·직접·평등·비밀 선거로 의회를 소집하되 의석의 3분의 2는 무슬림에게, 3분의 1은 비무슬림에게 보장하겠다고 밝혔다. 자치국은 원주민 다수의 지지를 받아 나망간·사마르칸트 등지에서 수천 명 규모의 집회가 열렸고, 타슈켄트 집회에는 6만 명이 모였다. 무함마드 탄신일(구력 12월 13일) 타슈켄트 집회에서 일부 군중이 신시가지로 들어가 수감자 석방을 시도하자 병사들이 발포해 여러 명이 죽었고, 풀려난 수감자들은 즉결 처형되었다. 자치국을 인정해 달라는 호소에 민족 인민위원 이오시프 스탈린은 힘이 있다면 타슈켄트 인민위원부를 「무력으로 해산하라」고 답했다. 2 4 7
자치국은 통치할 수단이 거의 없었다. 세금을 걷지 못해 차입금 300만 루블과 기부금에 기댔는데, 소비에트군이 국립은행 코칸트 지점에서 자치국 계좌를 포함해 800만 루블을 압수하자 내분이 깊어졌고, 1월 초(구력 12월) 티니슈파예프가 물러나 쇼카이가 총리가 되었다. 국민군은 약 2,000명에 장교도 훈련된 병사도 없었고, 코칸트 민병대장 에르가시의 무장대에 의지했다. 쇼카이는 오렌부르크로 가서 알렉산드르 두토프와 동남 동맹 가입을 논의했지만 카자크 중심 국가 구상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그만두었고, 알라시 자치국은 결정을 제헌의회 뒤로 미뤘으며, 부하라 에미르는 사절을 만나 주지도 않았다. 1월 중순 제4차 지방 소비에트 대회는 자치국을 불법화하고 구성원 체포를 결의했다. 1월에 두토프의 철도 봉쇄가 풀려 무기가 들어오자 군사력의 격차는 결정적으로 벌어졌다. 자치국 안에서는 자디드 정부와 보수파의 갈등이 커져, 2월 18일 에르가시가 쇼카이 정부를 무너뜨리고 권력을 잡았다. 2 4 8
2월 중순 자치국 측 무장대가 코칸트의 후다야르 칸 궁전과 코칸트 소비에트 본부를 점거하자, 타슈켄트 소비에트는 계엄을 선포하고 콘스탄틴 오시포프가 이끄는 부대를 보냈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대포를 실은 열차 11편이 도착했고, 아르메니아 다슈나크 무장대도 함께 싸웠다. 협상이 깨진 뒤 소비에트군은 궁전을 포격했고, 2월 19일 에르가시가 항복 최후통첩을 거부하자 도시를 대대적으로 포격했다. 불이 번지며 조직적 저항이 무너졌고, 2월 22일 구시가지 대표단이 무장 해제와 소비에트 권력 인정에 동의했다. 함락 뒤 도시는 약탈당했고 주민이 대량 학살되었다. 희생자 수는 영어 출처 사이에서도 엇갈려 투르키스탄 자치국 문서는 1만 명 이상, 바스마치 운동 문서는 최대 2만 5천 명으로 적는다. 소비에트 정부는 이 지역의 식량을 징발해 기근을 불렀고, 자치국 지지자는 즉결 처형되거나 체포되었으며, 1918년 5월 울라모 자미야티 타슈켄트 지부는 해산되었다. 4월 30일 제5차 지방 소비에트 대회는 투르키스탄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지만, 그것은 자치국 지지자들이 원한 민족 자치가 아니었다. 2 4 3 5


포위된 투르키스탄 소비에트 공화국, 1918–1919
1918년 4월 30일 선포된 투르키스탄 소비에트 공화국은 러시아 연방의 자치 공화국을 자처했지만, 영어 출처의 표현대로 처음에는 몇몇 철도 분기점만 장악했다. 여름이 되자 오렌부르크 카자크와 내전의 전선들이 공화국을 러시아에서 잘라 냈다. 6월 모스크바가 7천만 루블과 차리친의 곡물 115량을 보낸 것이 한동안 마지막 큰 지원이었다. 원주민은 1920년 여름까지 징병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에 붉은 군대는 1918년 여름 약 8천 명, 1919년 봄 약 2만 명에 그쳤고, 1918년 말에는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전쟁포로 출신 국제주의자 약 2,500명이 전선에 섰다. 면화 파종 면적은 1915년 52만 3천 데샤티나에서 1918년 8만 데샤티나로 줄었고, 시르다리야·사마르칸트·페르가나주의 전체 파종 면적도 1년 사이 46% 줄었다. 1918년 12월 27일 투르키스탄 중앙집행위원회는 공화국을 「군사 진영」으로 선포했다. 1919년 1월 22일 동부전선 부대가 오렌부르크를 점령해 봉쇄가 잠시 뚫리자 모스크바는 군수품과 곡물 200만 푸드를 보냈고 투르키스탄은 면화 350량을 보냈지만, 4월 두토프의 부대가 다시 철도를 끊어 악튜빈스크 전선이 생겼다. 9 5 10
서쪽 트랜스카스피아에서도 반란이 일어났다. 1918년 6월 아슈하바드 소비에트가 무기 소지자 조사를 강행하자 이틀 동안 소요가 벌어졌고, 타슈켄트에서 파견된 프롤로프는 청원하러 온 철도 노동자 대표 다섯 명을 직접 쏘아 죽였다가 키질아르바트에서 무장한 노동자들에게 사살되었다. 7월 11~12일 아슈하바드의 철도 노동자들이 봉기해 사회혁명당원 표도르 푼티코프를 수반으로 하는 사회혁명당·멘셰비키 정부, 곧 트랜스카스피아 정부를 세웠다. 차르주이 근처에서 패한 이 정부는 마슈하드의 영국 사절단에 도움을 청해 8월 19일 윌프리드 말레슨 장군과 협정을 맺었다. 영국령 인도군은 바이람알리와 카아카에서 싸웠고, 10월 14일 두샤크 전투에서 볼셰비키군을 물리친 뒤 메르브까지 밀어붙였다. 바쿠 인민위원 26인이 9월 20일 이 정부 아래서 처형된 일은 「자캅카스의 혁명과 전쟁」에서 다룬다. 정부는 경제 기반이 없어 영국의 자금에 기댔고, 1919년 1월 노동자 소요 속에 물러나 영국 장교가 고른 위원회로 교체되었다. 이후 데니킨의 남러시아군이 이 전선을 넘겨받았고, 영국군이 1919년 봄 철수하자 붉은 군대가 7월 9일 아슈하바드를, 1920년 2월 트랜스카스피아 전역을 차지했다. 11 12 13
가장 큰 위기는 타슈켄트 안에서 터졌다. 반볼셰비키 지하조직 「투르키스탄 군사조직」이 1918년 가을 적발된 뒤 남은 공모자들은 「5인 위원회」를 꾸렸고, 투르키스탄 공화국 군사 인민위원 콘스탄틴 오시포프를 끌어들였다. 1919년 1월 18일 저녁 봉기가 시작되자 상황을 알아보러 온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보톤체프, 타슈켄트 소비에트 의장 슈밀로프, 투르키스탄 체카 의장 포멘코 등은 오시포프의 명령으로 곧바로 총살되었고, 이틀 사이 열 명이 더 죽어 공화국 지도부가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철도 공작창 노동자들이 무기고를 지켰고, 헝가리인 국제주의자가 주축이던 요새의 사령관인 좌파 사회혁명당원 이반 벨로프가 반란군 본부를 곡사포로 포격했다. 1월 20일 반란은 실패했고, 오시포프는 투르키스탄의 금 보유고를 가지고 침켄트를 거쳐 산으로 달아났다. 그는 페르가나의 바스마치 지도자 마다민 벡에게 합류했다가 부하라로 넘어갔고, 그 뒤 행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1월 21일 세워진 임시 혁명군사평의회는 러시아 소브나르콤에 도움을 청했다. 14 5
카자흐 초원: 알라시 오르다의 선택
카자흐 지식인들은 1905년부터 입헌민주당(카데트)과 함께 활동했고, 1917년 여름 카데트에서 갈라져 나와 알라시 당을 만들었다. 알리칸 부케이하노프는 1917년 3월 러시아 임시정부의 투르가이주 위원으로 임명되었던 인물이다. 그해 4월 그와 아흐메트 바이투르시노프 등이 오렌부르크에서 소집한 전체 카자흐 대회는 옛 정권이 빼앗은 땅을 원주민에게 돌려주고 새 정착민을 내보내며, 학교를 원주민 손에 넘기고 1916년의 징발을 끝내라고 요구했다. 10월 혁명 뒤 1917년 12월 18~26일(구력 12월 5~13일) 오렌부르크에서 열린 제2차 전체 카자흐 대회는 카자흐 자치국 알라시를 세우기로 하고 25명의 알라시 오르다 인민회의를 두었는데, 이 가운데 10석은 러시아인 등 비카자흐인 몫이었다. 의장은 부케이하노프, 수도는 세미팔라틴스크였다. 자치를 즉시 선포하자던 도스무하메도프 형제의 안은 33 대 40으로 졌다. 알라시 지도자들은 볼셰비키를 경계하면서도 처음에는 접촉을 이어 가, 도스무하메도프 형제는 레닌과 스탈린을 만났다. 그러나 1918년 봄 초원에서는 서로 다른 권력이 맞서며 무질서와 폭력이 퍼졌고, 지도자들은 붉은 군대를 피해 숨어야 했다. 15 16 17
체코 군단 봉기 뒤 1918년 여름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대부분이 반볼셰비키 세력의 손에 들어가자 알라시 오르다는 백군 쪽으로 기울었다. 6월 11일 자치국 영역 안의 소비에트 법령을 모두 무효로 선언했고, 서부 지부는 사마라의 제헌의회 의원위원회(코무치)와, 동부 지부는 옴스크의 시베리아 정부와, 투르가이 지부는 두토프와 교섭했다. 코무치는 9월 초 알라시 자치를 공식 인정하고 300만 루블을 내주었지만, 시베리아 정부는 민족 자치를 인정하지 않았다. 알라시 오르다는 러시아 장교 교관 아래 카자흐 기병을 훈련했고, 1918년 6월 볼셰비키가 떠난 세미팔라틴스크에 300~500명의 카자흐 기병대가 들어왔다. 군사평의회는 2만 6천 명 규모의 기병 군단을 요청했지만 시베리아 정부는 기병 연대 하나만 허락했고, 오렌부르크 카자크 정부가 두 개 연대, 코무치가 서부 지부의 2천 명 규모 인민군 자금을 대는 데 그쳤다. 11월 4일 우파 디렉토리야가 관할 지역의 모든 자치를 폐지했고, 곧 권력을 잡은 알렉산드르 콜차크는 민족 자치에 단호히 반대했다. 1919년 2월 옴스크 회의에서 부케이하노프는 「우리는 서구주의자다. 문화는 러시아를 통해 얻을 수 있다」며 분리주의 의혹을 부인했지만 아무 결정도 얻지 못했다. 16 15
백군의 냉대 속에 알라시 지도자들은 1919년 봄부터 소비에트 정부와 교섭을 시작했다. 1919년 3월 투르가이에서 카자흐인 부대가 바이투르시노프와 부케이하노프 지지자들에게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게 했고, 아흐메트 바이투르시노프는 직접 교섭에 나서 다른 알라시 인사들에게 백군과 협력을 끊으라고 설득했다. 서부 지부도 비밀 교섭 끝에 중립으로 돌아서, 백군 공세의 힘을 약화시켰다. 러시아 소브나르콤은 1919년 7월 10일 키르기스(카자흐) 지방 혁명위원회를 세웠고, 여름에 붉은 군대 동부전선이 반격하면서 오늘날 카자흐스탄 전역이 볼셰비키의 통제에 들어갔다. 12월 10일 서부 지부가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했고 동부 지부의 부케이하노프도 뒤따랐다. 그러나 사면 약속에도 알라시 오르다는 1920년 3월 초 폐지되었다. 1920년 8월 26일 오렌부르크를 수도로 하는 키르기스 자치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세워졌는데, 당시 「키르기스」는 카자흐인을 가리켰다. 알라시 지도자들은 여러 공직을 맡았지만 1930년대에 대부분 처형되었고, 부케이하노프도 1937년 총살되었다. 16 18 19 17


바스마치 운동의 시작: 페르가나, 1918–1920
「바스마치」는 우즈베크어로 「강도」라는 뜻으로, 소비에트 측이 저항 세력을 범죄자로 그리려고 붙인 이름이다. 참여자들은 스스로를 무자헤딘이라 불렀다. 뿌리는 깊었다. 러시아 지배 아래 페르가나 계곡은 면화 단작 지대가 되었고, 빚을 진 농민과 땅 없는 농촌 무산자가 늘어났으며, 1916년 반란은 첫 대규모 반러시아 봉기였다. 코칸트 학살과 면화·식량을 숨겼다는 의심을 받은 페르가나 농민들의 처형은 무슬림 주민을 격분시켰다. 에르가시는 「이슬람 군대 최고 지도자」를 자처하며 싸움을 이어 갔고, 타슈켄트의 국유화로 경제가 무너지고 곡물이 끊겨 기근이 닥치자 사람들이 대거 합류했다. 영어 출처는 1918년 말 분산된 무장대가 모두 약 2만 명이었다고 하고, 러시아어 출처는 에르가시의 부대만 11월에 2만 5천 명에 이르렀으며 그 밖에도 40개 가까운 무장대가 있었다고 적는다. 옛 마르길란의 민병대장 출신 마다민 벡은 에르가시의 지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독자 세력을 키워, 1919년에는 큰 도시와 철도를 뺀 계곡 대부분을 장악했다. 3 20 21
바스마치의 공격을 막으려고 러시아인 정착민들은 1919년 봄 퇴역 대령 콘스탄틴 몬스트로프가 지휘하는 약 2만 명의 페르가나 농민군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볼셰비키와 함께 바스마치와 싸웠지만, 체카와 곡물 징발에 대한 반감이 커지면서 1919년 8월 말 마다민 벡과 동맹을 맺었다. 두 세력은 오시를 점령하고 9월 안디잔을 공격했으나 카잔 연대 등 증원군에 패했다. 10월 22일 마다민 벡을 수반, 몬스트로프를 부수반으로 하는 「페르가나 임시정부」가 세워져 러시아인·무슬림 공동 국가를 구상했지만, 이슬람적 성격을 둘러싼 갈등으로 동맹은 곧 깨졌다. 몬스트로프는 1920년 1월 17일 볼셰비키에 투항했고, 2월 잇단 패배 끝에 포위된 마다민 벡도 3월 6일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3월 20일 페르가나의 축하 행진에는 투르키스탄 전선 사령관 미하일 프룬제가 참석했다. 마다민 벡은 다른 쿠르바시들을 설득하러 갔다가 1920년 5월 쿠르시르마트와 할호자의 부대에 붙잡혀 살해되었다. 1920년 여름 소비에트 정부가 식량 징발과 무슬림 징병을 재개하자 쿠르시르마트가 「이슬람 군대」를 모아 다시 봉기했다. 22 3 20 21
페르가나의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마다민 벡 대신 지도자가 된 쿠르시르마트(시르 무함마드 벡)는 1920년 여름 여러 무장대를 「이슬람 군대」로 묶어 안디잔·잘랄아바드·오시·코칸트·나망간 일대에서 공세를 폈다. 프룬제가 병력을 부하라 원정으로 돌리자 바스마치는 다시 힘을 모았고, 연말에는 운동이 새로 크게 번졌다. 1920년 가을 투르키스탄 전선은 그리고리 소콜니코프의 지휘 아래 페르가나 계곡에서 세 차례 소탕 작전을 벌여 무장대를 계곡 가장자리 산골짜기로 몰아냈고, 전선 참모부 보고는 일부 무장대가 「당분간」 농민으로 돌아갔다고 적었다. 1921년 4월까지 큰 무장대 대부분이 격파되었다. 소비에트 측은 둥간인 마가자 마산치가 만든 둥간 기병 연대처럼 무슬림 부대도 바스마치와의 싸움에 투입했다. 한편 사마르칸트주에서는 1918년 11월 무슬림 반군과 성직자가 독립을 선언했고, 자라프샨강 상류 마치 지방의 기병 9천 명과 보병 4천 명이 1919년 가을 판자켄트와 우라튜베·호젠트 지역까지 장악했다. 붉은 군대가 이 지역을 되찾은 것은 1923년 3월이었다. 20 23 3

프룬제와 투르크코미시야: 모스크바의 귀환과 무슬림 공산주의자
콜차크의 패배는 투르키스탄의 상황을 바꿨다. 1919년 8월 동부전선 남부 집단군이 투르키스탄 전선으로 개편되었고, 8월 15일 미하일 프룬제가 사령관이 되었다. 투르키스탄 전선은 콜차크의 남부군을 격파한 뒤 9월 13일 투르키스탄 공화국 군대와 만나 모스크바와의 연결을 회복했다. 정치적 통제를 맡은 것은 투르키스탄 위원회(투르크코미시야)였다. 1919년 2월 샬바 엘리아바를 의장으로 만들어졌지만 콜차크의 진격으로 사마라와 오렌부르크에 묶여 있다가, 10월부터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소브나르콤·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권한을 위임받아 사실상 이 지역의 최고 권력으로 활동했다. 발레리안 쿠이비셰프가 부의장이자 투르키스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들어갔다. 위원회는 1920년 1월 투르키스탄 공산당 창설에 직접 관여했고, 1920년 3월 얀 루주타크를 의장으로 투르키스탄 소브나르콤을 되살렸다. 1920년 2~12월 투르크코미시야 앞으로만 생필품 614량이 도착했고, 투르키스탄은 면화·양모를 중앙에 보냈다. 위원회는 1920년 8월 해산되었고, 그 당 지도 기능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 투르키스탄 뷰로가 이어받았다. 23 24 25 26 5
모스크바가 원주민을 정권에 끌어들이기로 하면서 무슬림 공산주의자들이 전면에 나섰다. 1916년 반란에 참여했던 카자흐인 투라르 리스쿨로프는 1919년 투르키스탄 공산당 무슬림 뷰로 의장, 1920년 1월 투르키스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그는 투르키스탄의 튀르크어계 민족이 역사 속에서 갈라졌을 뿐 하나의 민족이라고 보고, 공화국을 「튀르크 공화국」으로, 당을 러시아 공산당과 분리된 「튀르크 공산당」으로 바꾸고 비무슬림 부대를 철수시키자고 주장했다.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1920년 3월 8일 결정에서 당명과 「러시아 연방 투르키스탄 자치 공화국」 지위를 재확인하고 국방·대외 관계·철도·재정을 연방 정부 몫으로 남겼다. 5월 리스쿨로프 등의 대표단이 모스크바에서 견해를 밝혔으나 당의 민족 정책에 어긋난다며 거부되었고, 영어 출처에 따르면 블라디미르 레닌이 직접 그를 불러 구상을 버리게 했다. 7월 리스쿨로프는 의장직에서 물러났고, 9월 제9차 투르키스탄 소비에트 대회는 「민족 일탈파」를 규탄했다. 1923년 6월에는 스탈린이 그를 「범튀르크주의」와 미르사이드 술탄-갈리예프 지지로 비난했다. 27 28 5
모스크바의 귀환은 전시 공산주의 정책의 도입이기도 했다. 투르키스탄 중앙집행위원회는 1919년 6월 4일에야 곡물 독점 법령을 채택했지만 준비 부족과 부농의 저항으로 시행하지 못했고, 1920년 2월 유럽계 주민 마을에 식량 징발대와 빈농위원회를 만들고 정착민 농민 전체에 징발량을 할당했다. 1920년 가을부터 징발은 원주민에게까지 확대되었고, 이를 돕는 「무슬림 감찰대」 등에 주로 현지 민족 출신 약 8,500명이 동원되었다. 러시아어 출처는 중앙과 달리 잉여 곡물 일부는 시장에서 팔 수 있었다고 적는다. 1920년에는 봉건 영주의 토지를 노동 농민에게 나누어 주기 시작했고, 1919년 말부터 1921년 3월까지 각지의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대신 혁명위원회가 권력을 행사했다. 원주민은 1920년 여름까지 징병 대상이 아니었으나, 이후 무슬림 징병과 식량 징발이 재개되자 페르가나에서 반란이 다시 타올랐다. 영어 출처는 1919년 6월 25일 곡물 독점이 사실상 농민 약탈이었고 일부 지역에 기근을 불렀다는 역사가 코텔니코프의 평가를 인용한다. 5 3

히바와 부하라: 두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옛 보호국 히바 칸국에서는 투르크멘 부족 지도자 주나이드 칸이 1918년 1월 칸의 군 총사령관에 임명된 뒤 1,600명 규모의 기병을 거느린 실력자가 되었다. 그는 1918년 아스판디야르 칸을 죽이고(시점은 출처에 따라 봄에서 10월까지 엇갈린다) 칸의 숙부 사이드 압둘라를 이름뿐인 칸으로 앉혀 실권을 쥐었다. 주나이드의 독재에 맞선 청년히바인들은 그에게 반대하는 투르크멘 지도자들과 손잡고 투르크코미시야에 도움을 청했고, 위원회는 군사 원정을 승인했다. 붉은 군대는 1919년 12월 25일 아무다리야를 건넜고, 1920년 1월 22~23일 주나이드의 근거지 베디르켄트를 점령했다. 위원회 대표 스칼로프의 설득으로 2월 2일 사이드 압둘라는 퇴위 선언문에 서명했다. 스칼로프는 히바가 러시아 「날개 아래서」 살 것이라는 전 칸의 말을 전하며 실권은 러시아 대표부가 쥘 것이라고 보고했다. 4월 26일 제1차 호레즘 쿠릴타이가 호레즘 인민소비에트공화국을 선포하고, 토지·생산수단의 사유를 인정하는 헌법을 채택했다. 9월 13일 러시아와의 조약은 호레즘의 완전한 독립을 인정했지만, 그해가 가기 전 소비에트 측이 청년히바인 정부를 몰아내 민족주의자들은 주나이드에게 합류했다. 20 29 30 31 3
부하라에서는 1909년 비밀결사로 출발한 자디드 계열의 청년부하라인이 개혁을 꾀했다. 1918년 3월 이들이 부하라 인민이 혁명을 기다린다고 알리자, 콜레소프가 직접 부대를 이끌고 성문 앞에서 에미르 사이드 알림 칸에게 권력 이양을 요구했다. 러시아 측 기록에 따르면 에미르는 볼셰비키 대표단을 죽이고 성전을 선포했으며, 부하라와 주변에서 수천 명의 러시아인이 살해되고 청년부하라인 다수가 처형되었다. 타슈켄트로 달아나 궐석 사형을 선고받은 파이줄라 호자예프는 훗날 자신들이 성직자의 영향력과 구체제의 힘을 얕보았던 「순진한」 사람들이었다고 인정했다. 이후 2년 동안 양측은 휴전의 겉모습 아래 결전을 준비했다. 에미르는 1920년 2월 동원령을 내렸고, 그의 궁정에는 옛 차르군 장교와 백군 출신이 몸을 의탁했다. 그해 3월만 해도 프룬제는 에미르에게 소비에트 러시아가 부하라의 영토 보전에 「최대한의 관심」을 갖는다고 말했지만, 1920년 8월 3일 볼셰비키와 청년부하라인은 공동 행동에 합의했고, 8월 16일 차르주이에서 열린 부하라 공산당 제4차 대회는 에미르 타도를 결의했다. 32 33 34 6 35
8월 말 차르주이에서 청년부하라인과 부하라 공산주의자가 봉기했고, 붉은 군대는 이를 「형제적 혁명 원조」로 내세워 8월 29일 부하라 작전을 시작했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투르키스탄 전선은 보병 6~7천, 기병 2,300~2,690, 장갑차 8대, 장갑열차 5편, 항공기 11대를 동원했고, 에미르의 정규군은 약 1만 6천 명에 지방 영주들의 비정규군이 2만 7천 명을 넘었다. 처음 이틀 공격이 성벽 앞에서 막히자 8월 31일 지휘는 제1군 사령관 게오르기 지노비예프에게 통합되었고, 152mm 요새포 등 중포가 성벽 가까이 끌어올려졌다. 도시에 쏟아진 포탄은 1만 2천 발로, 러시아어 출처는 화학탄도 적지 않았다고 적는다. 9월 1일 카르시 문을 돌파한 붉은 군대는 도시를 장악했고, 9월 2일 프룬제는 레닌에게 「붉은 깃발이 레기스탄 위에 휘날린다」고 타전했다. 에미르는 이미 8월 30~31일 밤 약 1,000명의 호위와 함께 동부 부하라로 빠져나간 뒤였다. 아르크 성채는 포격과 공습으로 폐허가 되었고 수백 명의 민간인이 죽었다. 10월 8일 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이 선포되어 호자예프가 인민나지르(장관)회의 의장이 되었다. 35 36 32 34
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은 소비에트 용어로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가는 과도기인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였다. 1921년 9월 헌법은 러시아 헌법과 달리 토지와 생산수단의 사유를 인정하고 비프롤레타리아에게도 선거권을 주었으며, 제26조는 어떤 법도 이슬람의 기본 원칙에 어긋날 수 없다고 정했다. 마을이 대표를 뽑는 악사칼 제도도 남았다. 우즈베크어를 국가어로 삼아 엘리트의 언어인 페르시아어를 대신하게 했고, 교육 나지르 압두라우프 피트라트는 많은 학생을 독일 등 유럽 대학으로 보냈다. 국기에는 낫과 망치에 초승달이 더해졌다. 공화국 선포 2주 뒤 공산당원은 1만 4천 명으로 불어났지만, 잇단 제명으로 1922년에는 1천 명으로 줄었다. 1922년 7월 7일 호자예프는 바스마치의 암살 시도를 피했다. 1923년부터 모스크바는 부하라 정부를 「부르주아 민족주의」로 비난하며 압박을 높였고, 정부와 당에서 대규모 숙청이 벌어졌다. 호레즘도 1923년 10월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되어 소련에 들어갔다. 32 34 31

페르시아 길란 소비에트 공화국, 1920–1921
카스피해 남쪽 페르시아 길란주에서는 1914년부터 라슈트 출신의 입헌혁명 참가자 미르자 쿠착 칸이 숲(장갈)을 근거지로 한 정글리 운동을 이끌어 왔다. 1918년 6월 만질에서 영국군과 비체라호프의 카자크에 패한 뒤 8월 영국과 협정을 맺기도 했지만, 1919년 3월 영국군이 지주와 성직자의 지지 속에 라슈트에 들어오자 다시 맞섰다. 이 무렵 운동 안에서는 에흐산올라 칸 같은 공산주의자와 쿠착 칸 같은 비마르크스주의 이슬람 사회주의자가 따로 조직을 꾸리고 있었다. 1920년 봄 남러시아에서 패한 백군 카스피 함대는 영국군이 장악한 엔젤리항에 들어가 억류되어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이 소비에트화된 직후인 5월 17일 표도르 라스콜니코프가 지휘하고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가 동행한 볼가-카스피 함대가 바쿠를 떠났고, 5월 18일 엔젤리 앞바다에서 영국군 철수와 군수품 인도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 약 2,000명의 상륙대가 도시 동쪽 도로를 끊고 기병대가 서쪽을 막자 영국군은 최후통첩을 받아들이고 라슈트로 물러났다. 소비에트 측은 함정 23척과 수상비행기 4대, 대포 50문을 되찾았다. 5월 23일 외무 인민위원 게오르기 치체린은 이란 정부에 이 작전이 소비에트 정부도 모르게 이루어졌다고 해명했다. 37 38 39 40 41
쿠착 칸은 공화국을 자신이 이끌고 소비에트 측이 내정에 직접 개입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협력에 동의했다. 6월 4일 라슈트를 점령한 정글리 운동은 6월 5일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고, 외무 위원은 세예드 자파르 피셰바리였다. 그러나 공화국은 가난한 농민에게 토지를 분배하지 않았고, 바쿠의 「아달라트」당에서 나온 페르시아 공산당 및 쿠착 칸의 부관으로 공산주의자가 된 에흐산올라 칸과 쿠착 칸 사이의 갈등이 곧 터졌다. 쿠착 칸은 라슈트를 떠났고, 정글리 운동 문서에 따르면 7월 31일 그를 몰아내는 정변이 일어났다. 체카가 보낸 야코프 블륨킨은 정변을 부추기고 페르시아 붉은 군대 참모장을 맡았다. 이름뿐인 에흐산올라 칸 정부 아래 실권은 소비에트 위원 아부코프에게 있었고, 반종교 선전과 부유층 재산 징수 같은 급진 정책은 중간층과 성직자를 등 돌리게 했다. 8월 테헤란을 목표로 한 공세는 이란군에 격퇴되었다. 42 40 41 43
모스크바의 계산은 곧 바뀌었다. 1920년 9월 러시아 정부는 이란에서의 군사 작전을 접고 샤 정부와 교섭하기로 했고, 1921년 2월 26일 모스크바에서 치체린과 레프 카라한이 이란 대표와 소련-페르시아 우호 조약에 서명했다. 조약은 투르크멘차이 조약 등 제정 러시아의 옛 조약을 폐기하고 카스피해 항행권을 동등하게 하는 한편, 제3국이 이란을 반소 기지로 쓰면 러시아군이 진입할 수 있게 했다. 같은 달 레자 칸이 테헤란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테헤란 주재 소비에트 대사 표도르 로트시테인은 쿠착 칸과 서신을 주고받으며 철수를 설득했고, 카즈빈으로 향하던 에흐산올라 칸 부대의 소비에트 장교들에게 명령을 따르지 말라고 전했다. 붉은 군대는 1921년 4월부터 철수해 9월 8일 완전히 떠났다. 다시 정부를 이끌던 쿠착 칸은 9월 29일 정변을 일으켜 공산당 지도자 헤이다르 칸 아무오글루를 죽였고, 내분 속에 정부군이 라슈트를 점령했다. 쿠착 칸은 산으로 달아나다 12월 2일 얼어 죽었고, 잘린 그의 머리는 라슈트에 내걸렸다. 철수의 원인을 두고 코스로 샤케리는 세계 혁명보다 국가 보전을 앞세운 소비에트의 정책 전환을, 카이한 네자드는 공산주의자와 비공산주의자의 내분이 먼저였다고 본다. 41 44 42 39 40

엔베르 파샤, 바스마치의 쇠퇴와 1924년 경계 획정
부하라 함락은 동부 부하라에서 새 바스마치 전쟁을 불렀다. 사이드 알림 칸은 두샨베를 거쳐 아프가니스탄 카불로 망명해 운동을 지휘했고, 로카이 부족 출신 이브라힘 벡이 에미르의 이름으로 싸웠다. 1922년에는 히사르에서 서파미르까지 동부 부하라 대부분이 바스마치의 손에 있었다. 여기에 오스만 제국의 전 육군 장관 엔베르 파샤가 나타났다. 그는 1920년 8월 모스크바로 와서 볼셰비키 지도자들과 교류했고, 9월 바쿠 동방 민족 대회에 참석했다. 1921년 11월 소비에트 측의 신임을 얻어 부하라로 파견되었지만 곧 반란 지도자들과 접촉해 바스마치 편으로 넘어갔다. 그는 무장대를 독일식 지휘 구조로 묶어 한때 최고 사령관 자리에 올랐고, 「이슬람 전군 총사령관」이라 새긴 금 인장을 썼다. 그러나 이브라힘 벡은 그를 의심해 한때 체포했고, 에미르도 1922년 상반기 관계를 끊었다. 1922년 5월 엔베르가 평화 제안을 거부하고 붉은 군대의 15일 내 철수를 요구하자, 6월 카프룬 전투에서 붉은 군대가 바스마치를 격파했다. 8월 4일 그는 발주안 또는 두샨베 근처에서 멜쿠모프의 기병대와 싸우다 전사했는데, 정확한 경위는 기록마다 다르다. 32 45 46 3 47
소비에트 정부는 압도적 군사력과 함께 양보를 썼다. 샤리아 법정과 쿠란 학교, 와크프(종교 기진 토지)를 되살렸고, 무슬림 농민 의용 민병 「붉은 막대」를 만들었으며, 이 지역 붉은 군대의 15~25%가 무슬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내전을 겪은 정규군에 항공 지원까지 더해지자 운동은 무너져 갔다. 엔베르의 후계자 셀림 파샤는 1923년 아프가니스탄으로 달아났고, 1923년 7~8월 대공세로 바스마치는 가름에서 밀려났다. 페르가나의 쿠르시르마트는 영국 정보에 따르면 한때 5~6천 명을 거느렸으나 2천 명 정도로 줄어 1923년 초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났고, 1924년 상반기에는 계곡에 무장대가 남지 않았다. 타지크 지역에서는 20만 명이 피란해 경작지의 3분의 2가 버려졌다. 영어 출처는 바스마치가 진정한 해방 운동도 민족주의 운동도 아니고 러시아 지배를 몰아내려는 일시적 부족 연합이었으며, 엔베르의 조급한 반정규전이 회복할 수 없는 손실을 남겼다고 평가한다. 호레즘에서는 이슬람 성직자의 지지를 얻어 병력을 9천 명까지 늘린 주나이드 칸이 1923년 말 다시 봉기해 1924년 1월 히바와 노보우르겐치를 포위했고, 붉은 군대는 1924년 말에야 그를 결정적으로 몰아냈다. 이브라힘 벡은 1926년 아프가니스탄으로 물러난 뒤에도 국경 습격을 이어 가다 1931년 처형되었다. 3 20 48 47
마지막 단계는 국경선이었다. 민족별 경계 획정은 1920년부터 거론되었고, 1924년 2월 25일 볼셰비키 지도부는 중앙아시아에서 이를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우즈베크·투르크멘·카자흐 소위원회가 빠르게 작업했고, 4월에는 부하라와 호레즘 공화국도 해체하기로 했다. 현지 공산당들은 공개적으로 반대했고, 특히 호레즘 공산당은 7월 압력에 밀려 자기 공화국의 해체에 표를 던져야 했다. 부하라는 9월 19일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꾼 지 한 달여 만에 사라졌다. 1924년 10월 27일 투르키스탄 자치 공화국과 부하라·호레즘은 우즈베크 SSR, 투르크멘 SSR, 우즈베크 SSR 안의 타지크 자치 공화국, 러시아 연방의 카라키르기스 자치주와 카라칼파크 자치주로 나뉘었고, 시르다리야주의 상당 부분과 제티수주의 절반은 키르기스(카자흐) 자치 공화국에 넘어갔다. 영어 출처는 투르키스탄을 하나로 지키려는 리스쿨로프 등과 작은 단위로 나누려는 호자예프·아크말 이크라모프 쪽이 맞섰고 후자가 이겼다고 쓰지만, 호자예프는 1938년 재판에서 넷으로의 분할에 반대했다고 「자백」했다. 그는 1924년 12월 우즈베크 혁명위원회 의장이 되어 새 공화국 정부를 이끌었다. 19 5 9 32 31 34


평가: 반식민 혁명인가, 러시아 지배의 연속인가
소비에트 역사학은 이 시기를 「중앙아시아 인민의 소비에트 권력을 위한 투쟁」으로 서술했다. 바스마치는 영국과 미국의 지원을 받고 이슬람 근본주의에 이끌린 반혁명 강도 집단으로, 1920년 히바와 부하라의 변혁은 인민 혁명에 대한 형제적 원조로 그려졌다. 소련 해체 뒤 중앙아시아 각국에서는 평가가 뒤집혀, 바스마치는 신앙을 지킨 민족 해방 운동으로, 지도자들은 민족 영웅으로 재평가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의 라자보프는 코칸트 자치국과 자디드, 바스마치를 하나의 독립운동으로 보자고 제안했고, 망명 역사가 바이미르자 하이트도 같은 시각이었다. 반면 옥스퍼드의 알렉산더 모리슨은 페르가나 바스마치에게 뚜렷한 정치 목표가 없었고 이브라힘 벡은 에미르의 이름을 빌려 수르한다리야 일대에 개인 영지를 세우는 데 몰두했다며, 단일한 「투르키스탄」 정체성이 대중 저항의 동기였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마리 베니그센-브록섭은 바스마치가 정치 강령도 해방된 투르키스탄 구상도 없었고, 위협받고 몰락한 농촌 공동체가 전통적 가치와 생활 방식을 지키려 한 싸움이었으며, 투르크소브나르콤의 반무슬림 정책이 봉기를 키웠다고 정리했다. 20 3 47
혁명 권력 자체를 두고도 시각이 갈린다. 원주민을 배제한 콜레소프의 소브나르콤, 코칸트의 파괴, 러시아인 정착민 중심의 볼셰비즘은 영어 출처의 표현대로 차르 지배와 소비에트 지배를 같은 것으로 보이게 했다. 러시아어 출처조차 부하라 작전을 「소비에트 러시아의 군사적 침략」이 부하라의 독립에 결정타를 가한 사건으로 적는다. 다른 한편 모스크바의 개입은 1919년 이후 원주민 간부를 끌어들이고 정착민의 「대국 쇼비니즘」을 비판했으며, 부하라 헌법은 이슬람 원칙과 사유재산을 인정했고, 1920년대 토착화 정책 아래 많은 중앙아시아인이 공화국의 요직에 올랐다. 1924년 경계 획정은 흔히 분할 통치로 비판되지만, 영어 출처는 민족이 뒤섞인 페르가나 같은 지역에서 민족 구성과 경제 단위를 함께 고려하려다 복잡한 경계와 소수민족이 생겼고, 이 선들이 국제 국경이 될 것이라고는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리스쿨로프는 1930년 당 대회에서 중앙아시아가 아직 차르 식민 정책의 흔적을 안고 있다고 말했다. 그와 호자예프는 1938년, 부케이하노프는 1937년 처형되었고, 무스타파 쇼카이는 프랑스 망명지에서 투르키스탄 민족주의를 이어 갔다. 3 35 5 32 19 28 7
결과
부하라 에미르와 히바 칸은 1920년 쫓겨났고, 바스마치 운동은 엔베르 파샤가 1922년 전사한 뒤 쇠퇴했다. 길란 공화국은 1921년 소련-페르시아 조약에 따라 붉은 군대가 철수한 뒤 무너졌다. 1924년 10월 민족 경계 획정으로 우즈베크·투르크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등이 세워졌다.
연표와 지도
- 11917.11.14타슈켄트 소비에트의 권력 장악
러시아인 노동자·병사 중심의 타슈켄트 소비에트가 무장봉기로 도시를 장악했다. 뒤이은 소브나르콤에는 원주민이 한 명도 없었다.
- 21917.12.10코칸트 자치국 선포
코칸트의 무슬림 대회가 연방 러시아 안의 투르키스탄 자치를 선포했다. 총리는 티니슈파예프, 곧 무스타파 쇼카이로 바뀌었다.
- 31917.12.18–12.26알라시 오르다 수립
오렌부르크의 제2차 전체 카자흐 대회가 알라시 자치를 결의하고 알리칸 부케이하노프를 의장으로 선출했다.
- 41918.02.19–02.22코칸트 함락과 학살
타슈켄트 소비에트군이 코칸트를 포격·점령했다. 이어진 약탈과 학살의 희생자는 출처에 따라 1만~2만 5천 명이다.
- 51918.03콜레소프의 부하라 공격 실패
콜레소프가 청년부하라인과 함께 에미르 타도를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수천 명의 러시아인이 살해되고 청년부하라인 다수가 처형되었다.
- 1918.04.30투르키스탄 소비에트 공화국 선포
제5차 지방 소비에트 대회가 러시아 연방 안의 자치 공화국을 선포했다.
- 61918.07.11–07.12아슈하바드 봉기
철도 노동자들이 볼셰비키를 몰아내고 사회혁명당·멘셰비키의 트랜스카스피아 정부를 세웠다. 8월 영국 말레슨 사절단과 협정을 맺었다.
- 1918.10.14두샤크 전투
영국령 인도군과 트랜스카스피아군이 볼셰비키군을 물리치고 메르브 방면으로 밀어냈다.
- 71919.01.18–01.20오시포프 반란
군사 인민위원 오시포프가 타슈켄트에서 봉기해 공화국 지도자 14명을 죽였으나 노동자와 요새 수비대에 진압되었다.
- 1919.09.13투르키스탄 봉쇄 해제
프룬제의 투르키스탄 전선이 투르키스탄 공화국 군대와 만나 모스크바와의 연결이 회복되었다.
- 1919.10.22페르가나 임시정부
바스마치 지도자 마다민 벡과 러시아인 농민군의 몬스트로프가 공동 정부를 세웠다.
- 1919.12.10알라시 서부 지부의 소비에트 인정
알라시 오르다 서부 지부가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했고 동부 지부도 뒤따랐다. 알라시 오르다는 1920년 3월 폐지되었다.
- 81920.02.02히바 칸의 퇴위
붉은 군대가 주나이드 칸을 몰아낸 뒤 사이드 압둘라 칸이 퇴위했다. 4월 26일 호레즘 인민소비에트공화국이 선포되었다.
- 1920.03.06마다민 벡의 투항
페르가나 바스마치의 지도자 마다민 벡이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했다. 그는 5월 다른 쿠르바시들에게 살해되었다.
- 91920.05.18엔젤리 작전
라스콜니코프의 카스피 함대가 엔젤리에 상륙해 영국군을 물러나게 하고 백군 함정 23척을 되찾았다.
- 101920.06.05길란 소비에트 공화국 선포
라슈트를 점령한 미르자 쿠착 칸의 정글리 운동이 소비에트 측과 손잡고 공화국을 선포했다.
- 1920.08.26키르기스(카자흐) 자치 공화국 수립
오렌부르크를 수도로 하는 카자흐인의 자치 공화국이 러시아 연방 안에 세워졌다.
- 111920.08.29–09.02부하라 작전
프룬제의 붉은 군대가 부하라를 포격·점령했다. 에미르 사이드 알림 칸은 동부 부하라로 달아났다.
- 1920.10.08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선포
파이줄라 호자예프가 인민나지르회의 의장으로 정부를 이끌었다.
- 1921.02.26소련-페르시아 우호 조약
치체린과 카라한이 이란과 조약을 맺었다. 붉은 군대는 9월 8일까지 길란에서 철수했다.
- 1921.11엔베르 파샤의 바스마치 합류
부하라로 파견된 엔베르 파샤가 바스마치 편으로 넘어가 운동을 통합하려 했다.
- 1921.12.02미르자 쿠착 칸의 죽음
공화국 붕괴 뒤 산으로 달아난 쿠착 칸이 얼어 죽었고, 그의 머리가 라슈트에 내걸렸다.
- 1922.08.04엔베르 파샤 전사
엔베르 파샤가 동부 부하라에서 붉은 군대 기병대와 싸우다 죽었다.
- 1924.10.27중앙아시아 민족 경계 획정
투르키스탄·부하라·호레즘이 해체되고 우즈베크·투르크멘 SSR과 타지크·카라키르기스·카라칼파크 자치 단위가 생겼다.
관련 인물 25명
소비에트 세력16명
지도부4
무슬림을 정부에서 배제했고, 1918년 2월 코칸트 자치국을 무너뜨렸으며 3월 부하라 공격에 실패했다.
투르키스탄 전선 사령관미하일 프룬제1885–19251919년 투르키스탄 봉쇄를 뚫었고 1920년 히바·부하라 정복과 페르가나 바스마치 진압을 지휘했다. 부하라 작전 뒤 레닌에게 승전을 타전했다.
투르키스탄 중앙집행위원회 의장투라르 리스쿨로프1894–1938무슬림 뷰로 의장으로서 「튀르크 공화국」과 독자적 「튀르크 공산당」을 주장했다가 1920년 모스크바에 거부당하고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부하라 인민소비에트공화국 정부 수반파이줄라 호자예프1896–1938청년부하라인을 이끌어 1918년 실패 뒤 망명했다가 1920년 부하라 공화국 인민나지르회의 의장이 되었고, 1924년 우즈베크 SSR 정부를 이끌었다.
집행 · 지휘5
1919년 10월~1920년 8월 투르키스탄 위원회 부의장이자 투르키스탄 전선 혁명군사평의회 위원이었고, 1920년 9월부터 부하라 주재 전권대표를 지냈다.
투르키스탄 전선 사령관그리고리 소콜니코프1888–19391920년 9월부터 1921년 3월까지 프룬제의 뒤를 이어 투르키스탄 전선을 지휘하며 페르가나의 바스마치를 상대했다.
제1군 사령관게오르기 지노비예프1887–19341920년 8월 31일 부하라 공격 부대의 지휘를 통합해 성벽 돌파를 이끌었고, 기병대로 에미르를 카르시까지 추격했다.
카스피 함대 사령관표도르 라스콜니코프1892–19391920년 5월 18일 엔젤리 작전을 지휘해 백군 함정을 되찾고 길란 공화국 수립의 길을 열었다.
체카 요원야코프 블륨킨1900–19291920년 길란에 파견되어 쿠착 칸을 몰아낸 정변을 부추기고 페르시아 붉은 군대 참모장을 맡았다.
참여7
코칸트 자치국 승인 요청에 타슈켄트 인민위원부를 무력으로 해산하라고 답했고, 1923년 리스쿨로프를 범튀르크주의로 비난했다.
소브나르콤 의장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1920년 리스쿨로프를 불러 튀르크 공화국 구상을 버리게 했고, 1921년 11월 엔베르 파샤를 부하라로 보냈다.
볼셰비키 지도자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1886–1937라스콜니코프와 함께 엔젤리 작전 계획을 세우고 함대에 동행했다.
테헤란 주재 소비에트 대사표도르 로트시테인1871–1953쿠착 칸에게 철수를 설득하고 에흐산올라 칸 부대의 소비에트 장교들에게 명령을 따르지 말라고 전했다.
외무 인민위원게오르기 치체린1872–1936엔젤리 작전이 정부 몰래 이루어졌다고 해명했고, 1921년 2월 소련-페르시아 우호 조약에 서명했다.
외무 부인민위원레프 카라한1889–19371921년 2월 26일 치체린과 함께 소련-페르시아 우호 조약에 서명했다.
청년부하라인 출신 우즈베크 공산주의자아크말 이크라모프1898–1938영어 출처에 따르면 투르키스탄을 작은 민족 단위로 나누자는 쪽에 서서 1924년 경계 획정을 지지했다.
현지 민족 정부2명
바스마치2명
부하라 에미르국·히바 칸국2명
영국과 백군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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