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민테른의 인민전선 전환
사회민주주의를 「사회파시즘」이라 부르던 코민테른은 왜, 어떻게 반파시즘 인민전선으로 돌아섰고, 그 전환은 어디서 멈추었는가?
1928년부터 사회민주주의를 주적으로 삼던 코민테른은 1933년 나치 집권과 1934년 프랑스·오스트리아의 반파시즘 투쟁을 겪은 뒤 노선을 바꾸기 시작했다. 1935년 7~8월 제7차 세계대회에서 디미트로프는 파시즘을 금융자본의 공개적 테러 독재로 규정하고, 사회주의자와 중간층까지 아우르는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새 전술로 제시했다. 이 노선은 프랑스·스페인의 인민전선 정부와 중국의 항일 통일전선으로 이어졌지만, 대숙청과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 속에서 무너졌다.
「계급 대 계급」과 사회파시즘론
1928년 여름 코민테른 제6차 세계대회는 자본주의의 상대적 안정기가 끝나고 「제3시기」가 시작되었다고 선언했다. 자본주의가 마지막 위기에 들어서 새로운 혁명적 고양과 제국주의 전쟁이 다가온다는 전망이었고, 사회민주주의는 공산주의자의 주적으로 규정되었다. 1929년 7월 제10차 집행위원회 확대 전원회의는 사회민주주의가 노동계급의 우익 정당에서 부르주아지의 한 날개로, 곧 「파시즘의 온건한 날개」로 변했다는 사회파시즘론을 공식화했다. 이 논리는 스탈린이 1924년 연설에서 파시즘과 사회민주주의는 서로를 부정하지 않고 보충하며 「대척점이 아니라 쌍둥이」라고 한 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 2 3
이 노선은 사회민주주의 지도부와의 어떤 통일전선도 배제하고, 공산주의자가 독자적으로 노동계급의 지도권을 다투는 「계급 대 계급」 전략을 요구했다. 코민테른은 독자적인 「적색」 노조나 기존 노조 안의 혁명적 반대파를 만들라고 촉구했지만, 이 정책은 공산주의자를 조직 노동자 다수에게서 고립시켰고 영국과 체코슬로바키아 등에서 당원과 영향력이 줄었다. 독일에서는 적대가 양쪽에서 깊어졌다. 1929년 사민당 정부가 지휘하던 베를린 경찰이 공산당의 노동절 시위대에 발포했고, 공산당의 적색전선투사동맹은 금지되었다. 에른스트 텔만의 공산당은 사민당을 주공격 대상으로 삼았고, 1931년 프로이센에서는 사민당 주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주민 투표에 나치와 함께 나섰다. 3 2
1933년 1월 히틀러가 집권하자 공산당과 사민당은 함께 금지되었고 텔만을 비롯한 수천 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코민테른의 공식 노선은 곧바로 바뀌지 않았다. 1933년 12월 제13차 확대 전원회의는 나치의 승리를 사민당의 책임으로 돌리고 사회파시즘론을 재확인했다. 1934년 1월 망명 사민당 집행부가 「프라하 선언」으로 나치에 맞선 혁명적 단결을 호소했을 때도 코민테른은 5월의 호소문에서 사회민주주의를 「파시즘의 동맹자」라고 비난했다. 2 3
1934년: 아래로부터의 단결과 디미트로프
전환의 계기는 1934년 2월에 왔다. 프랑스에서는 극우 연맹의 2월 6일 폭동 뒤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 노동자들이 공동의 파시즘 위협에 맞서 함께 행동하면서 아래로부터 단결의 흐름이 생겼다. 같은 달 12일부터 15일까지 오스트리아에서는 사회민주당의 공화국수호동맹이 돌푸스 정부에 맞서 무장 봉기했다가 진압되었다. 불가리아 공산주의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는 이 두 사건을 보고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의 공동 행동을 적대해 온 코민테른의 태도가 잘못되었다고 확신했다. 3 4 5
디미트로프는 1933년 9월부터 12월까지 라이프치히 제국최고법원에서 열린 제국의회 방화 재판에서 변호인을 거절하고 스스로를 변론하며 괴링을 비롯한 나치 고발자들과 맞섰다. 12월 23일 그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받고 소련으로 추방되었다. 1934년 2월 28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에게 스탈린은 사회민주주의자를 「사회파시스트」로 비난하는 관행을 끝내고 유럽 파시즘에 맞선 통일전선 전술을 펴도록 권했다. 그해 5월 『프라우다』는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의 협력을 호의적으로 논평하며 새 노선을 처음으로 공식 시사했다. 6 7 8
1934년 내내 모스크바에서는 긴 논쟁이 이어졌다. 디미트로프와 드미트리 마누일스키, 오토 쿠시넨은 새 노선을 밀었고, 빌헬름 크노린과 쿤 벨러, 솔로몬 로조프스키 같은 강경파는 기존 교리에서 벗어나는 데 반대했다. 스탈린은 처음에 결정을 미루다가 결국 조심스럽게 새 방향을 승인했다. 그사이 각국에서 먼저 움직임이 일어났다. 1934년 7월 모리스 토레즈의 프랑스 공산당은 사회당과 「통일 행동 협정」을 맺었고, 10월에는 급진당까지 포함하는 더 넓은 「인민연합」을 제안했다. 3
집단안보와 코민테른 노선
1930년대 초 막심 리트비노프의 외무인민위원부는 국제 군축 합의를 추구했지만, 1933년 1월 나치 집권과 그해 10월 독일의 제네바 군축 회의 탈퇴로 이 구상은 막다른 길에 이르렀다. 소련은 1934년 9월 국제연맹에 가입해 파시즘의 침략에 맞선 공동 저항, 곧 집단안보를 내세웠다. 1935년 5월 2일 파리에서 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이 맺어졌고, 5월 16일에는 체코슬로바키아와도 조약을 맺었다. 이어 모스크바를 방문한 프랑스 외무장관 피에르 라발과 스탈린·몰로토프·리트비노프의 공동 성명은 프랑스가 안보에 걸맞은 군사력을 유지할 권리를 인정했다. 4 3 9
대회 준비는 순탄하지 않았다. 1934년 말 집행위원회가 꾸린 결의 초안 위원회는 「일반 민주주의적 반파시즘」 방향을 주장하는 쪽과, 파시즘과의 투쟁은 부르주아지 타도와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강경파로 갈렸고, 1935년 3월 8일 대회 개막은 7월 말로 미뤄졌다. 이 전환을 무엇이 결정했는지는 해석이 갈린다. 영어 위키백과의 제7차 대회 항목은 결국 소련 외교의 필요가 방향을 정했다고 서술한다. 코민테른 항목은 프랑스의 반파시즘 단결 같은 각국 요인, 코민테른 내부의 역학, 소련의 집단안보 외교가 서로 맞물린 「삼중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한다. 4 3
1935년 7~8월 제7차 세계대회
제7차 세계대회는 1935년 7월 25일 저녁 모스크바 노동조합회관 「기둥의 방」에서 열려 8월 20일까지 이어졌다. 대표 513명 가운데 371명이 표결권을 가졌고, 65개 가맹 정당과 19개 동조 정당이 참석했다. 스탈린은 대회에 나오지 않았지만 그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우레 같은 박수」가 터졌다. 둘째 날 독일 공산당의 빌헬름 피크는 집행위원회 활동 보고에서 1928년의 「계급 대 계급」 전술을 옹호하면서도 「일정한 수의 종파주의적 오류」가 있었음을 인정했다. 그는 공산당의 통일전선 제안을 사민당이 거부했다고 주장하면서, 이제 사회주의 노동자들이 공산주의자와의 통일전선으로 돌아서는 새 시대가 열렸다고 말했다. 4 10
8월 2일 디미트로프는 노동계급의 단결을 위한 보고에서 권력을 잡은 파시즘을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쇼비니즘적이며 가장 제국주의적인 금융 자본 분자들의 공개적인 테러리즘적 독재」로 규정했다. 그는 파시즘의 집권이 한 부르주아 정부가 다른 정부로 바뀌는 일이 아니라 부르주아 민주주의라는 국가 형태가 공개적 테러 독재로 대체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파시즘과 「사회파시즘」의 구별을 흐리던 이전 노선과 달리, 이 차이를 무시하면 가장 넓은 근로 대중을 동원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4 11 12
대회는 프롤레타리아 통일전선을 바탕으로 농민과 도시 소부르주아지까지 넓힌 「광범한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새 전술로 승인했다. 공산주의자는 파시즘에 맞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자유를 지키고 민족 독립의 호민관으로 나서야 했고, 결의는 혁명 이전의 일정한 조건에서 인민전선 정부에 참여하는 길도 열어 두며 이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가는 「과도적 형태」가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디미트로프는 이 대회에서 코민테른 서기장으로 선출되었고, 그의 연설은 9월에 『파시즘에 맞선 통일전선』이라는 소책자로 나와 여러 판을 거듭했다. 일곱 번의 세계대회 가운데 이것이 마지막이었다. 3 7 13
그러나 과거와의 단절은 부분적이었다. 볼셰비키 모델의 보편성은 의문에 부쳐지지 않았고, 사회주의자와의 「유기적 통일」 조건은 여전히 거의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엄격했다. 각국 당은 현지 사정에 맞출 여지를 더 얻었지만, 특히 외교 문제에서는 모스크바의 최종 통제가 남았다. 3
식민지·반식민지의 민족 통일전선: 중국
대회와 같은 시기인 1935년 8월 1일, 대장정 중이던 중국공산당 중앙은 「항일 구국을 위해 전체 동포에게 고하는 글」, 곧 「8·1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은 국민당에 내전을 멈추라고 촉구하고, 계급과 당파를 가리지 않고 해외 화교와 소수민족까지 아우르는 항일 민족 통일전선과 「국방 정부」, 「항일 연합군」을 제안했다. 1931년 만주사변 뒤 중국공산당이 즉각적인 무장 항전을 요구한 데 비해, 장제스의 국민정부는 「먼저 안을 평정한 뒤 밖을 물리친다」는 방침으로 군벌과 공산당 토벌을 앞세우고 있었다. 14
다만 이 무렵 코민테른의 직접적 영향력은 이미 줄어들고 있었다. 1935년 1월 쭌이 회의에서 마오쩌둥이 모스크바가 지지하던 지도부를 제치고 두각을 나타냈다.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과 양후청이 장제스를 억류한 시안 사변으로 양측은 싸움을 멈추었고, 1937년 중일전쟁이 전면화하면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코민테른 항목은 제7차 대회의 인민전선 채택과 일본의 팽창 위협이 함께 이 결과를 낳았다고 서술한다. 3 15
인민전선의 시험대: 프랑스와 스페인
프랑스 인민전선은 1936년 5월 3일 총선에서 608석 가운데 386석을 얻었고, 사회당의 레옹 블룸이 총리가 되었다. 공산당은 입각하지 않고 밖에서 정부를 지지했다. 선거 승리 뒤 5~6월 파업과 공장 점거의 물결이 일어나 마티뇽 협정으로 이어졌다. 공산당 당원과 노조 영향력은 크게 늘었지만, 파업은 급진당을 놀라게 했고 프랑스와의 동맹을 바라는 소련 외교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토레즈의 지도부는 「멈출 때를 알아야 한다」, 「인민전선은 혁명이 아니다」라며 파업을 끝내는 쪽으로 움직였다. 코민테른 항목은 이 방침이 프랑스-소련 조약을 지키려는 필요에서 나왔다고 본다. 16) 3
스페인에서는 1936년 1월 마누엘 아사냐가 이끄는 좌파 정당들이 사회노동당과 공산당을 포함한 선거 연합 인민전선을 만들었다. 인민전선은 그해 총선에서 465만 4,116표를 얻어 우파 연합의 450만 3,524표를 근소하게 앞섰다. 7월 프랑코의 군사 쿠데타로 내전이 시작되자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반란군을 지원했다. 코민테른과 소련은 처음에는 영국·프랑스를 자극하지 않으려고 불간섭 정책에 동참했으나, 1936년 9월 마드리드 방어를 위해 국제여단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여단 본부는 알바세테에 있었고, 소련은 무기와 군사 고문을 보냈다. 17) 3 18
소련의 개입은 전쟁의 전환점이었고, 작은 세력이던 스페인 공산당은 당원과 위신이 크게 늘었다. 팔미로 톨리아티 등이 수행한 코민테른의 전략은 서방 민주국가를 멀리하지 않도록 「민주적 의회 공화국」의 외양을 유지하며 모든 혁명적 목표를 군사적 승리에 종속시키는 것이었다. 이는 공산당을 아나키스트 CNT,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정당 POUM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했다.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충돌 뒤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가 물러나고 후안 네그린이 뒤를 이었으며, POUM은 불법화되고 지도자 안드레우 닌은 소련 요원들에게 고문당한 끝에 살해되었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코민테른사를 쓴 페르난도 클라우딘은 이 과정을 「소련 국가 이성을 위한 혁명의 희생」이라고 평가했다. 3 18
대숙청과 노선의 끝
인민전선기는 소련의 대숙청(1936~1938)과 겹쳤고, 숙청은 코민테른을 덮쳤다. 모스크바의 외국 공산주의자와 정치 망명자가 집중적으로 표적이 되었다. 오시프 퍄트니츠키와 쿤 벨러, 빌헬름 크노린 같은 코민테른 지도자들이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퍄트니츠키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동지들에 대한 혐의가 타당한지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었다. 폴란드 공산당은 지도부 거의 전원이 숙청된 뒤 트로츠키주의 등의 혐의를 받고 1938년 8월 16일 코민테른에 의해 해산되었다. 브리기테 슈투더의 연구에 이름이 나오는 코민테른 직원 약 320명 가운데 거의 3분의 1이 폭력적으로 죽었고, 58명이 1945년 이전 스탈린 숙청으로 목숨을 잃었다. 디미트로프와 마누일스키는 숙청에 가담했지만 디미트로프는 일부 개인을 구하려고도 했다. 3 19 20
1939년 8월 23일 날짜로 독소 불가침조약이 맺어지자 코민테른의 노선은 다시 뒤집혔다. 독일의 폴란드 침공 뒤 9월 7일 스탈린을 면담한 디미트로프는 이 전쟁을 교전국 부르주아지 모두가 똑같이 책임져야 할 두 자본주의 국가군 사이의 「제국주의 전쟁」으로 규정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9월 9일 집행위원회 서기국의 테제는 「파시즘」 국가와 「민주주의」 국가의 구분이 예전의 의미를 잃었다며 인민전선 구호를 버리게 했다. 이 방침은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 때까지 이어졌다. 민주사회주의 역사가 G. D. H. 콜은 이를 「반파시즘 신념에 대한 중대한 배신」이라 하면서도 서방 「유화론자」들의 태도에 비추면 「변명의 여지가 없지는 않다」고 보았다. 3 21
코민테른은 1943년 5월 15일 해산되었다. 해산 이유로는 중앙집중적 국제 조직이 각국 노동자 정당의 강화에 방해가 되었다는 점이 제시되었고, 대개는 스탈린이 서방 연합국을 달래려는 몸짓으로 이해된다. 인민전선기의 평가도 갈린다. 냉전기 서방 연구는 코민테른을 소련 외교의 획일적 도구로 그렸고, E. H. 카는 코민테른 지도자와 각국 당의 일정한 자율성을 인정했다. 소련 문서고가 열린 뒤의 연구는 모스크바의 통제를 확인하면서도 코민테른 기구 안의 논쟁과 중앙·지부 관계의 복잡함을 드러냈다. 공산주의자들이 국제여단을 조직하는 등 가장 적극적인 반파시스트였다는 평가와, 그 지원이 소련식 정통을 강요하고 다른 좌파를 억누르는 데도 쓰였다는 평가가 함께 남아 있다. 3
결과
공산당들은 고립에서 벗어나 프랑스·스페인에서 대중정당으로 컸고, 국제여단은 반파시즘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볼셰비키 모델과 모스크바의 외교적 통제는 그대로였고, 스페인에서는 다른 좌파에 대한 탄압이 뒤따랐다. 대숙청은 코민테른 기구를 마비시켰고, 1939년 인민전선 구호는 폐기되었으며, 1943년 코민테른은 해산되었다.
연표와 지도
- 1928.07제6차 세계대회와 「제3시기」
자본주의의 마지막 위기와 사회민주주의 주적론이 선언되었다.
- 1929.07사회파시즘론 공식화
제10차 확대 전원회의가 사회민주주의를 「파시즘의 온건한 날개」로 규정했다.
- 11933.12.23라이프치히 재판 무죄
제국의회 방화 재판에서 디미트로프가 무죄를 받았다.
- 1934.02.06파리 극우 폭동
뒤이은 공동 행동이 아래로부터의 단결을 낳았다.
- 21934.02.12오스트리아 2월 봉기
사회민주당 수호동맹이 돌푸스 정부에 맞서 싸우다 진압되었다.
- 1934.02.28디미트로프 모스크바 도착
스탈린이 「사회파시스트」 비난을 끝내라고 권했다.
- 1934.07프랑스 통일 행동 협정
공산당과 사회당이 공동 행동에 합의했다.
- 1934.09소련 국제연맹 가입
소련이 집단안보를 내세웠다.
- 1935.05.02프랑스-소련 상호원조조약
파리에서 조약이 맺어졌다.
- 31935.07.25제7차 세계대회 개막
노동조합회관에서 65개 가맹 정당 대표가 모였다.
- 1935.08.018·1 선언
중국공산당이 항일 민족 통일전선을 제안했다.
- 1935.08.02디미트로프 보고
파시즘을 규정하고 반파시즘 인민전선을 제시했다.
- 41936.02스페인 인민전선 총선 승리
근소한 표차로 우파 연합을 눌렀다.
- 51936.05.03프랑스 인민전선 총선 승리
블룸이 총리가 되고 공산당은 밖에서 지지했다.
- 61936.09국제여단 조직
코민테른이 마드리드 방어를 위해 의용군을 모았다.
- 1938.08.16폴란드 공산당 해산
지도부가 숙청된 뒤 코민테른이 당을 해산했다.
- 1939.08.23독소 불가침조약
코민테른이 인민전선 구호를 버렸다.
- 1943.05.15코민테른 해산
집행위원회 상임간부회가 해산을 권고했다.
관련 인물 14명
참여11
제7차 대회에서 집행위 보고를 하고 사회파시즘 테제를 거두어들였다.
집행위원회 서기오토 빌레 쿠시넨1881–19641934년 논쟁에서 새 노선을 지지했다.
집행위원회 상임간부회 위원드미트리 마누일스키1883–1959새 노선을 지지했고, 코민테른 기구의 숙청 집행에도 가담했다.
인민전선 전략의 수행자팔미로 톨리아티1893–1964코민테른 대표로 스페인에서 혁명 목표를 군사적 승리에 종속시키는 전략을 폈다.
코민테른 서기클레멘트 고트발트1896–19531935년부터 서기로 인민전선 노선을 추진했다.
코민테른 서기 · 국제여단 총책임자앙드레 마르티1886–19561935년 서기가 되었고 1936년 알바세테에서 국제여단을 이끌었다.
국제여단 총감독루이지 론고1900–1980「갈로」라는 이름으로 국제여단을 감독했다.
프랑스 공산당 서기장모리스 토레즈1900–1964통일 행동 협정과 인민연합을 이끌고 1936년 파업을 수습했다.
스페인 공산당 서기장호세 디아스1895–1942인민전선 전략으로 당을 공화국 진영의 대중정당으로 키웠다.
미국 공산당 지도자얼 브라우더1891–1973제7차 대회 뒤 당을 반파시즘 연합 노선으로 돌렸다.
외무인민위원 · 집단안보 주창자막심 리트비노프1876–1951국제연맹 가입과 프랑스-소련 조약으로 집단안보를 추구했다.
출처: 자료 1자료 2자료 3자료 4자료 5자료 6자료 7자료 8자료 9자료 10자료 11자료 12자료 13자료 14자료 15자료 16자료 17자료 18자료 19자료 20자료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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