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축국 편의 헝가리: 빈 중재에서 돈강까지
독일 덕에 잃은 땅을 되찾은 헝가리는 왜 원하지 않던 전쟁에 깊이 빠져들었고, 빠져나가려던 시도는 왜 독일의 점령으로 끝났는가?
1938~1941년 헝가리는 두 차례의 빈 중재와 루테니아·유고슬라비아 점령으로 트리아농 조약에서 잃은 땅의 일부를 되찾았고, 그 대가로 삼국동맹에 가입하고 세 차례의 유대인법을 만들었다. 1941년 텔레키가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항의해 자살한 뒤 바르도시 정부는 커셔 폭격을 구실로 소련에 선전포고했고, 카미야네츠포딜스키 추방과 노비사드 학살, 유대인 노동봉사가 뒤따랐다. 1943년 1월 돈강에서 제2군이 무너지자 칼러이 정부는 서방 연합국과 비밀 휴전을 맺으려 했다. 이를 알아챈 히틀러는 1944년 3월 헝가리 점령을 결정했다.
우경화와 제1·2차 유대인법 (1938–1939)
대공황과 트리아농 조약의 상처 속에서 헝가리 정치는 1930년대 내내 오른쪽으로 기울었다. 1934년 독일과의 무역협정으로 경제가 독일에 묶였고, 1935년 살러시 페렌츠가 세운 극우 정당은 뒤에 화살십자당이 되었다. 1938년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의 군비 제한을 공개적으로 거부했다. 굄뵈시의 후임 총리 더라니 칼만은 나치와 국내 반유대주의자를 함께 달래려고 제1차 유대인법을 내놓았고, 법은 1938년 5월 통과되어 사무직 전문직과 상공업에서 유대인의 비율을 20%로 제한했다. 1 2
1938년 5월 더라니가 물러나자 호르티는 국립은행 총재 출신의 임레디 벨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처음에 영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던 임레디는 3월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을 보고 그해 가을부터 외교를 독일·이탈리아 쪽으로 돌렸다. 그는 「기적의 혁명」을 내걸고 의회에서 벗어난 독재적 개편을 주장했으며, 1938년 12월 더 가혹한 제2차 유대인법안을 제출했다. 1939년 2월 베틀렌 이슈트반 등 정적들이 그의 외가 쪽 유대계 조상을 밝혀내자 임레디는 자신의 유대인 정책에 걸려 사임했다. 3 4 1
후임 텔레키 팔 정부는 1939년 5월 제2차 유대인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은 처음으로 유대인을 인종으로 정의해 조부모 가운데 둘 이상이 유대인으로 태어난 사람을 유대인으로 보았고,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의 지위도 바꾸었다. 전문직과 배우 직업의 유대인 비율은 6%, 민간 기업의 고용은 12%로 제한되었고 공직 취업과 신문 편집이 금지되었다. 약 25만 명의 헝가리 유대인이 생계를 잃었고, 많은 유대인이 투표권을 잃었다. 1 5 2
빈 중재와 영토 확장 (1938–1940)
1938년 9월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약해지자 헝가리는 헝가리인이 사는 남부 슬로바키아와 남부 루테니아를 요구했다. 10월 초 비정규 「누더기 근위대」가 국경을 넘어 들어갔고 협상은 교착되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와 치아노는 11월 2일 빈 벨베데레 궁에서 제1차 빈 중재를 내려 약 1만 1900㎢, 인구 약 87만 명(86.5%가 헝가리인)의 땅을 헝가리에 넘겼고, 헝가리군은 11월 5~10일 이 지역에 들어갔다. 코시체(헝가리어 커셔)도 이때 헝가리 땅이 되었다. 1 6 4 7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가 해체되자 15일 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가 아우후스틴 볼로신을 대통령으로 독립을 선언했지만, 히틀러의 승인을 받은 헝가리군은 3월 14~18일 나머지 루테니아를 점령해 저항을 꺾고 폴란드와의 옛 국경을 되찾았다. 헝가리는 독일의 보호국이 된 티소의 슬로바키아는 승인했지만, 3월 23일 국경 분쟁을 이유로 동부 슬로바키아를 공격했다. 31일까지 이어진 「작은 전쟁」으로 헝가리는 동쪽 끝 띠 모양의 땅 1697㎢를 더 얻었다. 8 6 7 1
1940년 6월 루마니아가 소련의 최후통첩에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를 내주자 헝가리는 트란실바니아 요구를 밀어붙였다. 8월 협상이 결렬되고 양국 군대가 국경에 집결하자 독일과 이탈리아가 다시 중재에 나섰고, 8월 30일 리벤트로프와 치아노는 제2차 빈 중재로 북부 트란실바니아 4만 3492㎢를 헝가리에 넘겼다. 주민 구성은 다툼거리였다. 1930년 루마니아 인구조사는 헝가리인 38%, 루마니아인 49%로, 1941년 헝가리 인구조사는 헝가리인 53.5%, 루마니아인 39.1%로 셌다. 9월 진주 과정에서 헝가리군은 이프와 트레즈네아 마을에서 루마니아 주민을 학살했다. 9 1
삼국동맹, 「영원한 우호」, 텔레키의 자살 (1940–1941)
1940년 9월 독일·이탈리아·일본이 삼국동맹을 맺자 베를린 주재 대사 스토여이 되메는 루마니아보다 먼저 가입해야 한다고 재촉했고, 호르티는 헝가리가 첫 번째 신규 가입국이 되기를 바랐다. 헝가리는 1940년 11월 20일 독일의 압력 속에 텔레키 총리의 서명으로 삼국동맹에 가입했다. 같은 해 12월 텔레키는 섭정 파벨 공의 유고슬라비아와 「영원한 우호」 조약을 맺었다. 텔레키는 독일과 협력해 영토를 되찾으면서도 전쟁에는 휘말리지 않으려 했고, 1939년 폴란드 침공 때도 헝가리가 폴란드를 칠 수 없다고 히틀러에게 썼다. 10 1 11
1941년 3월 27일 베오그라드 쿠데타로 유고슬라비아가 삼국동맹 가입을 뒤집자 히틀러는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헝가리의 참여를 요구하며 영토를 약속했고, 호르티는 곧바로 받아들였다. 국방장관 버르터 카로이와 참모총장 베르트 헨리크는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다그쳤다. 4월 3일 런던의 헝가리 공사는 영국이 독일군 통과를 허용하면 단교하고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하면 선전포고하겠다고 경고했다고 알려 왔다. 그날 자정 무렵 독일군이 헝가리로 들어오기 시작했다는 소식으로 보이는 전화를 받은 텔레키는 밤사이 권총으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는 「우리는 비겁함 때문에 약속을 깼다… 악당들과 동맹을 맺었다… 나는 당신을 막지 못했다. 내 죄다」라고 적혀 있었다. 11 1
후임 총리는 외무장관 바르도시 라슬로였다. 독일이 4월 6일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고 10일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선포되자, 헝가리 정부는 유고슬라비아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구실로 11일 국경을 넘었다. 헝가리군은 바치카·바라냐·메지무르예·프레크무리예를 차지했고, 이 1만 1417㎢의 「남부 회복 지역」은 1941년 12월 정식으로 병합되었다. 영국 외무장관 이든은 우호조약을 맺은 지 몇 달 만에 유고슬라비아를 공격한 것이 헝가리 명예의 「영원한 수치」로 남으리라고 말했다. 12 1 13
커셔 폭격과 대소련 참전 (1941)
1941년 6월 22일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히틀러는 헝가리에 참전을 요청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르트와 버르터는 참전하면 히틀러가 트리아농으로 잃은 땅 전부를 돌려줄 것이고 전쟁은 6주면 끝난다고 주장했다. 6월 23일 몰로토프는 헝가리 공사에게 헝가리가 중립을 지키면 루마니아에 대한 헝가리의 요구를 반대하지 않겠다고 전했지만, 바르도시는 이 전보를 각료회의에 알리지 않았다. 6월 26일 정체불명의 비행기가 커셔(코시체)를 폭격했다. 14 1
헝가리 군부는 터지지 않은 폭탄 하나가 소련제라며 소련의 소행으로 단정했다. 호르티는 보복을 명령했고, 바르도시는 6월 27일 의회에 나가 헝가리와 소련 사이에 전쟁 상태가 존재한다고 선언했다. 선전포고에 의회의 동의를 받도록 한 헌법 절차는 지켜지지 않았다. 범인은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호르티는 회고록에서 독일의 조작이라고 주장했고, 체코슬로바키아·슬로바키아·루마니아 비행기설도 나왔다. 역사가 롬시치 이그나츠는 프레쇼우를 노린 소련 폭격기의 오폭이 가장 그럴듯하다고 보면서, 지도부가 폭격을 위협으로 본 것은 「그렇게 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썼다. 12 14
7월 1일 헝가리의 카르파티아 집단이 독일 제17군 휘하로 소련 우크라이나에 들어갔고, 그 기동군단은 8월 우만 포위전에 참가했다. 1941년 말 영국은 헝가리군이 소련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선전포고하겠다고 통첩했고 12월 6일 전쟁 상태가 시작되었다. 진주만 공격 뒤 바르도시는 미국과 단교했고, 12월 15일 미국과도 전쟁 상태에 있다고 발표했다. 반년 사이에 헝가리는 유고슬라비아·소련·영국·미국과 전쟁을 하는 나라가 되었다. 1 12
카미야네츠포딜스키, 노비사드, 노동봉사 (1941–1942)
참전 직후 외국인 관리 당국은 「부적합한 외국인」 유대인을 추방하기로 했다. 대상은 주로 폴란드·러시아 출신과 서유럽 난민이었지만, 시민권을 증명하지 못한 헝가리 유대인도 끌려갔고 카르파티아 지역에서는 공동체 전체가 추방되기도 했다. 바르도시는 7월 12일 추방 명령에 서명했다. 화물열차로 쾨뢰시메죄까지 실려 간 유대인은 옛 국경 너머 독일군에 넘겨졌고, 8월 10일까지 약 1만 4000명, 그달 하순 4000명이 더 보내졌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추방된 사람을 2만 명 이상으로 본다. 15 16 2 12
이들은 콜로미야에서 카미야네츠포딜스키까지 걸어서 끌려갔고, 8월 27~28일(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26~28일) 프리드리히 예켈른 휘하의 친위대·경찰 부대와 현지 우크라이나 협력자들이 추방자와 현지 유대인을 쏘아 죽였다. 예켈른의 보고에 따르면 희생자는 2만 3600명이었고 그 가운데 약 1만 6000명이 헝가리에서 추방된 사람이었다(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카미야네츠포딜스키로 끌려간 추방자를 1만 4000~1만 6000명으로 본다). 「최종 해결」의 첫 대규모 학살 가운데 하나였다. 부다페스트 주재 미국 공사 허버트 펠이 거듭 항의했지만 바르도시는 학살이 없다고 거짓말했다. 바르도시 정부는 1941년 8월 유대인과 비유대인의 결혼과 성관계를 금지한 제3차 유대인법을 공포했다. 15 16 2 12
병합된 바치카에서는 1941년 하반기 소규모 무장 저항이 일어났다. 1942년 1월 초 파르티잔과의 교전을 구실로 참모총장 솜버테이이 페렌츠가 징벌 작전을 명령했다. 마침 카이텔이 헝가리군 전체의 동부전선 파견을 요구하러 부다페스트에 와 있었고, 바르도시는 점령지에 군대가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다. 1월 6일 추루그에서 시작된 습격은 20~23일 노비사드(우이비데크)에서 절정에 이르렀다.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 페렌츠의 부대는 영하 29도의 날씨에 주민을 도나우강 강변으로 끌고 가 기관총으로 쏘고 얼음을 깨 시신을 던졌다. 희생자는 연구에 따라 약 3300명에서 4116명이며, 대부분 세르비아인과 유대인이었다. 13 17) 2
유대인 남성은 정규군 대신 노동봉사(munkaszolgálat)로 징집되었다. 1939년 국방법에 근거해 텔레키 정부가 만든 이 제도는 처음에는 「믿을 수 없는」 자들의 비무장 노동이었지만, 1941년 봄부터 유대인을 따로 분리해 제복 대신 표식 완장을 채우는 반유대주의 제도로 바뀌었다. 1941년 여름부터 수만 명이 우크라이나 전선 근처로 보내져 지뢰 제거와 중노동에 내몰렸고, 굶주림과 감독관의 학대로 많은 사람이 죽었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약 10만 명이 동원되어 1944년 3월 이전에 2만 5000~4만 2000명이 죽었다고 추산한다. 18 19 2
돈강의 제2군 (1942–1943)
모스크바 앞에서 실패한 독일은 1941년 말 동맹국에 더 많은 병력을 요구했다. 히틀러는 1941년 12월 말 호르티·무솔리니·안토네스쿠에게 편지를 보냈고, 1942년 1월 카이텔이 부다페스트에 왔다. 그 결과 야니 구스타브가 지휘하는 제2군이 동부전선으로 갔다. 20만 9000명 규모의 제2군은 4월 11일 남부 집단군에 배속되어 4월 17일부터 6월 27일까지 822편의 열차로 이동했다. 나라의 「현대적」 장비를 거의 다 모았는데도 기동 수단과 대전차 무기가 모자랐고, 독일이 약속한 장비는 오지 않았다. 20 21) 22
1942년 여름 청색 작전에서 제2군은 보로네시 부근 돈강까지 진출했다. 강 서안에 남은 우리우·코로토야크·슈추치예의 소련 교두보를 없애려는 공격은 거듭 실패했고, 1942년 한 해의 손실은 사상자와 실종자를 합쳐 3만 3763명이었다. 겨울이 오자 보급이 무너져 방한복·식량·연료가 바닥났고, 독일 부대가 스탈린그라드로 빠져나가면서 제2군이 지켜야 할 전선은 점점 넓어졌다. 1942년 12월 27일 참모본부는 히틀러의 요구에 따라 돈강 진지의 무조건 사수를 명령했다. 21) 20 22
1943년 1월 12일 필리프 골리코프의 보로네시 전선군이 우리우 교두보에서 오스트로고시스크-로소시 작전을 시작했다. 영하 30도 아래의 추위 속에 전선은 여러 곳에서 뚫렸고, B 집단군 사령관 바이흐스는 예비대 투입을 거부했다. 독일군은 후퇴를 금지했고, 야니는 이 명령을 고수하다 1월 17일에야 철수를 허락했다. 포위된 부대들은 무너지거나 얼어 죽었다. 제2군은 약 19만 명의 병력과 1만 7000명의 유대인 노동봉사자 가운데 약 10만 명이 죽고 3만 5000명이 다치고 6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는 추산이 있으며, 헝가리 쪽 연구는 손실을 10만~12만 명으로 본다. 20 21) 23 22
1월 24일 야니는 「제2 헝가리군은 명예를 잃었다…」로 시작하는 군령을 내려 병사들을 비겁하다고 비난하고 가혹한 징계를 명령했다. 이 명령은 큰 분노를 샀고, 호르티의 지시로 3월에 철회되었다. 살아남은 병사들은 5월 말까지 귀국했고 야니는 8월 지휘권에서 물러났다. 1943년 2월 스탈린그라드의 독일 제6군도 항복했다. 제2군은 더는 전투 부대로 기능하지 못했고, 독일군은 남은 부대를 전선에서 뺐다. 20 22 21) 1
지하 공산당과 반독일 야당 (1940–1943)
헝가리 공산당(KMP)은 1919년 이후 불법이었고, 1932년 셜러이 임레와 퓌르시트 샨도르가 처형된 뒤 약해져 1936년 코민테른이 해산시켰다. 1924년부터 갇혀 있던 라코시 마차시는 1940년 10월 가석방되어, 1849년 러시아군이 빼앗아 간 헝가리 혁명군 군기와 교환되는 형식으로 소련에 갔다. 독일의 소련 침공 뒤 공산당은 비공산 세력과 함께 반독일 전선을 만들려 했다. 쇤헤르츠 졸탄이 이끈 독립위원회는 1941년 10월 6일 버차니 영원의 등불 앞과 11월 1일 코슈트·탄치치의 묘 앞에서 시위를 열었고, 사회민주당 기관지 『네프서버』의 1941년 성탄 특집호에는 버이치질린스키 엔드레가 전쟁 이탈과 토지개혁, 보통선거를 위한 「독립전선」을 호소하는 글을 썼다. 24 25 26 27
1942년 2월 1일 지하 기관지 『서버드 네프』가 창간되어 로저 페렌츠가 편집을 맡았다. 1942년 5~6월과 7월의 대량 검거로 공산당 지도부는 무너졌다. 로저는 6월 1일 체포되어 2주 뒤 경찰 구금 중 석연치 않게 숨졌고, 7월 6일 체포된 쇤헤르츠는 참모본부 특별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0월 9일 처형되었다. 1943년 1월 다시 검거가 이어진 뒤 카다르 야노시가 지도부를 맡았다. 같은 해 코민테른이 해산되자 카다르는 경찰을 따돌리려고 당을 해산한 것처럼 꾸며 「평화당」으로 재건했는데, 모스크바의 라코시 등은 이를 비난했다. 평화당은 칼러이의 퇴진과 단독 강화, 화살십자당 해산을 요구했다. 28) 26 29 30) 24
의회 안의 반대는 소수였다. 버이치질린스키는 노비사드 학살을 앞두고 바르도시에게 경고했고, 학살 뒤에는 의회에서 이를 「국가가 조직한 포그롬」이라 부르며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다. 1943년 1월 학살 1주기에 다시 발언하려 하자 화살십자당과 헝가리 쇄신당 의원들이 「반역」이라고 외치며 그를 막았다. 국방부는 1942년 내내 그가 군의 명예를 더럽힌다며 기소를 경고했다. 사회민주당은 전쟁 중 점점 활동이 어려워졌고, 1944년 독일 점령과 함께 불법화되었다. 27 31
칼러이의 「시소 정책」과 마르가레테 작전의 결정 (1942–1944)
1942년 3월 호르티는 바르도시를 물러나게 하고 베틀렌 계열의 보수파 칼러이 미클로시를 총리로 앉혔다. 칼러이는 첫 연설에서 대소련 전쟁을 「우리의 전쟁」이라 부르고 사회민주당을 단속해 유대계 당원 수백 명을 노동봉사로 보냈지만, 뒤로는 연합국과 접촉했다. 독일이 헝가리 유대인의 강제 이송을 거듭 요구하자 칼러이와 호르티는 유대인 문제는 국내 문제이며 이송은 경제를 무너뜨린다며 거부했다. 그래서 1944년 3월까지 수십만 명의 유대인이 살아남았지만, 차별법과 노동봉사는 계속되었다. 앞뒤로 오가는 그의 정책은 「칼러이 투스텝」, 「칼러이 시소」라 불렸다. 32 2 1
돈강의 참패 뒤인 1943년 1월 말 베틀렌, 수좌대주교 세레디, 대법원장은 호르티에게 동부전선의 병력 철수와 노비사드 책임자 처벌을 건의했다. 2월 기자 프레이 언드라시가 이스탄불에서 영국 측과 접촉했고, 4월 칼러이는 로마에서 무솔리니에게 헝가리·이탈리아·핀란드의 「추축 안의 추축」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했다. 4월 클레스하임 회담에서 히틀러는 헝가리의 평화 타진을 알고 있다며 경고했다. 칼러이 정부는 의회에서 임레디의 헝가리 쇄신당과 화살십자당의 공격을 받았고, 1943년 5월 호르티는 의회를 정회했다. 32 33)
1943년 7월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하고 무솔리니가 실각하자 협상이 빨라졌다. 9월 9일 이스탄불 앞 마르마라해의 요트에서 영국 대사 내치불휴거슨과 헝가리 외교관 베레시 라슬로는 연합군이 헝가리 국경에 도착하면 헝가리군이 항복한다는 비밀 예비 휴전에 서명했다. 칼러이는 무조건 항복 조항에 반대했지만, 헝가리 영사와 리스본 공사가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전했다. 칼러이는 노비사드 학살 책임자들을 1943년 12월 군사재판에 넘겼으나, 유죄 판결을 받은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 등은 1944년 1월 독일로 달아났다. 32 33) 13
1943년 9월 이탈리아가 연합국과 휴전하자 히틀러는 국방군 최고사령부에 헝가리 점령 계획(마르가레테 1)과 루마니아 점령 계획(마르가레테 2)을 세우게 했고, 카이텔은 9월 30일 준비가 끝났다고 보고했다. 11월부터 영국 대사관의 시종 엘리에사 바즈나가 빼돌린 문서로 베레시의 비밀 휴전 내용도 베를린에 알려졌다. 1944년 초 붉은군대가 카르파티아산맥 기슭에 다가가자 히틀러는 루마니아 석유가 지나는 헝가리가 동맹에서 이탈할 것을 걱정했다. 괴벨스는 3월 4일 일기에 「배신은 벌받아야 한다」고 썼고, 히틀러가 헝가리의 유대인 70만 명을 놓치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적었다. 33) 32
히틀러는 3월 7일 마르가레테 1 작전을 발동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헝가리를 루마니아·크로아티아·슬로바키아에 나눠 주는 군사적 해결을 생각했지만, 친위대 장교 빌헬름 회틀은 호르티를 섭정 자리에 남겨 두어야 철도 파괴 같은 저항 없이 헝가리 국가 기구 전체의 협력을 얻을 수 있다고 건의했고, 히틀러는 먼저 이 정치적 해결을 시도하기로 했다. 3월 12일 독일군에 주요 시설 장악 명령이 내려졌고, 힘러는 아이히만에게 헝가리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할 준비를 지시했다. 호르티는 클레스하임으로 불려 갔고, 3월 19일 독일군이 헝가리에 들어왔다. 33) 2
결과
되찾은 땅은 전후 모두 반환되었고, 독일 점령 전에 이미 카미야네츠포딜스키 학살, 노비사드 학살, 노동봉사로 수만 명의 유대인이 죽었고 돈강에서는 병사 약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1944년 3월 19일 독일 점령으로 헝가리 유대인의 대량 이송과 학살이 시작되었다.
연표와 지도
- 1938.05.29제1차 유대인법
전문직과 상공업의 유대인 비율을 20%로 제한했다.
- 11938.11.02제1차 빈 중재
독일과 이탈리아가 남부 슬로바키아와 남부 루테니아를 헝가리에 넘겼다.
- 1939.02임레디 사임
정적들이 유대계 조상을 밝혀내자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 21939.03.14카르파티아 우크라이나 점령
헝가리군이 18일까지 나머지 루테니아를 점령했다.
- 1939.03.23슬로바키아와의 「작은 전쟁」
31일까지 싸워 동부 슬로바키아의 띠 모양 땅을 얻었다.
- 1939.05.05제2차 유대인법
유대인을 인종으로 정의하고 비율 제한을 6%로 낮췄다.
- 1940.08.30제2차 빈 중재
북부 트란실바니아가 루마니아에서 헝가리로 넘어갔다.
- 1940.10.30라코시 석방
1849년의 군기와 교환되는 형식으로 소련으로 떠났다.
- 1940.11.20삼국동맹 가입
헝가리가 창설국 다음 첫 가입국이 되었다.
- 31941.04.03텔레키의 자살
유고슬라비아 침공 참여에 항의하며 목숨을 끊었다.
- 1941.04.11유고슬라비아 침공
헝가리군이 바치카 등을 점령해 12월에 병합했다.
- 41941.06.26커셔 폭격
정체불명의 비행기가 커셔를 폭격했고 이튿날 헝가리가 소련에 선전포고했다.
- 51941.08.27카미야네츠포딜스키 학살
헝가리에서 추방된 유대인을 포함해 2만 3600명이 학살되었다.
- 1941.12.06영국과의 전쟁
영국의 통첩 시한이 지나 전쟁 상태가 되었고 15일 미국과도 전쟁 상태를 발표했다.
- 61942.01.20노비사드 학살
헝가리군이 23일까지 세르비아인과 유대인 수천 명을 죽였다.
- 1942.03.09칼러이 내각
호르티가 바르도시를 물러나게 하고 칼러이를 총리에 앉혔다.
- 1942.10.09쇤헤르츠 처형
공산당 지하 지도자가 군사 특별재판 끝에 처형되었다.
- 71943.01.12돈강 전선 붕괴
소련의 오스트로고시스크-로소시 작전으로 제2군이 무너졌다.
- 81943.09.09이스탄불 비밀 휴전
베레시가 영국 대사와 예비 휴전에 서명했다.
- 1944.03.07마르가레테 작전 발동 결정
히틀러가 헝가리 점령 작전의 발동을 결정했다.
관련 인물 23명
지도부5
삼국동맹 가입과 유고슬라비아·소련 참전을 승인했고, 1942년 칼러이를 앉혀 전쟁 이탈을 모색했다.
총리(1938–1939)임레디 벨러1891–1946외교를 독일 쪽으로 돌리고 제2차 유대인법을 제출했다가 유대계 조상이 드러나 물러났다.
총리(1939–1941)텔레키 팔1879–1941제2차 유대인법과 노동봉사제를 도입하고 삼국동맹에 서명했으나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항의해 자살했다.
총리(1941–1942)바르도시 라슬로1890–1946커셔 폭격 뒤 소련에 선전포고하고 유대인 추방과 제3차 유대인법을 밀어붙였다.
총리(1942–1944)칼러이 미클로시1887–1967유대인 이송 요구를 거부하며 서방 연합국과 비밀 휴전을 추진했다.
참여10
영토를 대가로 헝가리를 전쟁에 끌어들였고 1944년 3월 헝가리 점령을 결정했다.
독일 외무장관요아힘 폰 리벤트로프1893–1946치아노와 함께 두 차례 빈 중재를 내렸다.
이탈리아 외무장관갈레아초 치아노1903–1944리벤트로프와 함께 두 차례 빈 중재를 내렸다.
이탈리아 총리베니토 무솔리니1883–19451943년 4월 칼러이가 제안한 「추축 안의 추축」을 거절했다.
루마니아 지도자이온 안토네스쿠1882–19461941년 말 호르티·무솔리니와 함께 히틀러에게서 동부전선 증원 요구 편지를 받았다.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빌헬름 카이텔1882–19461942년 1월 부다페스트에 와 헝가리군의 동부전선 투입을 요구했고, 마르가레테 계획을 준비했다.
B 집단군 사령관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1881–19541943년 1월 소련 공세 초기에 헝가리군을 도울 예비대 투입을 거부했다.
소련 외무인민위원뱌체슬라프 몰로토프1890–19861941년 6월 23일 헝가리가 중립을 지키면 루마니아에 대한 요구를 지지하겠다고 전했다.
영국 외무장관앤서니 이든1897–1977유고슬라비아 침공을 헝가리의 「영원한 수치」라 부르고 단교와 선전포고를 경고했다.
전 총리, 보수파 원로베틀렌 이슈트반1874–1946임레디의 유대계 조상을 밝혀냈고 1943년 1월 동부전선 철수를 호르티에게 건의했다.
반대 · 저항5
오스트로고시스크-로소시 작전으로 헝가리 제2군을 무너뜨렸다.
공산당 지하 지도자쇤헤르츠 졸탄1905–1942독립위원회를 이끌어 반전 시위를 조직했고 1942년 처형되었다.
『서버드 네프』 편집인로저 페렌츠1906–1942지하 기관지를 창간해 편집하다 1942년 체포되어 구금 중 숨졌다.
공산당 지하 지도자카다르 야노시1912–19891943년 지도부를 맡아 공산당을 평화당으로 바꾸었다.
공산당 지하 지도부원페테르 가보르1906–19931943년 대량 검거 뒤 카다르와 함께 새 지도부를 이루었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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