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0–1871

파리 코뮌

패전과 포위 속에서 태어난 파리의 노동자 정부는 무엇을 시도했고, 왜 72일 만에 학살로 끝났는가?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제2제정이 무너지고 파리가 넉 달 동안 포위된 뒤, 왕당파 다수의 국민의회와 무장한 파리 국민방위군이 충돌했다. 1871년 3월 18일 몽마르트르의 대포를 둘러싼 대치에서 정부가 베르사유로 물러나자 파리는 선거로 코뮌을 세웠다. 코뮌은 정교분리, 집세 면제, 노동자 협동조합 같은 법령을 내놓았지만, 5월 21~28일 「피의 주간」에 정부군에게 진압되었다.

제국의 패전과 포위된 파리

1870년 7월 나폴레옹 3세의 제2제정은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했지만, 9월 2일 스당에서 황제가 10만 명의 군대와 함께 항복했다. 9월 4일 파리 군중이 입법원에 몰려들자 공화파 의원들은 시청에서 공화국을 선포하고 트로쉬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국민방위정부를 세웠다. 1 2 3

9월 19~20일 독일군이 파리를 에워싸면서 넉 달의 포위가 시작되었다. 정규군 대부분이 포로가 되거나 메스에 갇혀 있었으므로, 도시 방어는 무장한 시민군인 국민방위군이 맡았다. 하루 1.5프랑의 수당은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 가족의 생계가 되었고, 노동자 구역의 대대들은 장교를 스스로 뽑았다. 겨울이 되자 시민들은 말과 개, 동물원의 코끼리까지 먹어야 했다. 4) 5) 6

정부가 강화를 모색한다는 의심은 두 차례 봉기로 터졌다. 10월 31일 메스 항복 소식에 블랑키와 플루랑스가 이끈 대대들이 시청을 점거했다가 물러났고, 1871년 1월 22일 시청 앞 시위에는 기동대가 발포했다. 1월 18일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국이 선포된 뒤, 1월 28일 정부는 휴전에 서명하고 파리의 요새를 넘겼다. 4) 7 6

보르도 의회와 3월 18일

1871년 2월 8일 휴전 조건에 따라 치른 총선에서 농촌은 강화를 약속한 왕당파를 대거 뽑았고, 파리는 공화파와 급진파를 뽑았다. 보르도에 모인 국민의회는 아돌프 티에르를 행정 수반으로 세웠다. 의회는 포위 중 유예되었던 어음과 집세의 지급을 되살리고 국민방위군 수당을 끊는 법을 통과시킨 뒤, 파리가 아닌 베르사유로 옮겨 가기로 했다. 8 9 6

파리의 국민방위군은 무장해제되지 않았고, 2월 중순부터 대대 대표들이 중앙위원회를 꾸려 「국민방위군 공화 연맹」을 만들었다. 시민의 모금으로 사들인 대포는 독일군이 입성하기 전에 몽마르트르와 벨빌 같은 노동자 구역으로 옮겨졌다. 티에르에게 이 대포는 국가 권위의 상징이었다. 6 5)

3월 18일 새벽 정규군이 몽마르트르 언덕의 대포를 끌어내려 했으나 말이 제때 오지 않았고, 모여든 여성과 주민, 방위군에 둘러싸인 병사들은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군중과 섞였다. 르콩트 장군과 클레망 토마 장군이 그날 오후 처형되었다. 티에르는 정부와 군대, 관청을 베르사유로 철수시켰고, 그날 밤 중앙위원회가 시청을 차지했다. 루이즈 미셸은 이날 아침 언덕에서 사람들을 깨운 이들 가운데 있었다. 6 9 10

코뮌의 선출과 구성

중앙위원회는 권력을 쥐지 않고 선거에 넘겼다. 3월 26일 유권자 48만 5천 명 가운데 23만 3천 명이 투표해 인구 2만 명당 한 명씩 92명을 뽑았다. 부유한 7·8구는 기권이 70%를 넘었고, 노동자 구역인 20구는 투표율이 76%였다. 온건 공화파 등 당선자 일부가 취임을 거부해 실제 의원은 60여 명이었다. 3월 28일 시청 앞에서 코뮌 성립이 선포되었다. 6 11

의원 가운데 노동자가 33명이었다. 블랑키파, 들레클뤼즈 같은 자코뱅계 「독립 혁명가」, 인터내셔널 회원인 프루동주의자와 바를랭·프랑켈이 섞여 있었다. 블랑키 자신은 3월 17일 체포되어 옥중에서 당선되었다. 코뮌에는 대통령도 시장도 총사령관도 없었고, 아홉 개 위원회가 집행위원회에 보고했으며, 의원은 선거구에 책임을 지고 소환될 수 있었다. 징병제를 폐지하고 건강한 남성 시민 전원을 국민방위군으로 삼았다. 6 12

4월 19일 「프랑스 인민에게 보내는 선언」은 코뮌이 요구하는 것이 프랑스 모든 코뮌의 자치이며, 국가는 자율적인 코뮌들의 자유로운 연합이어야 한다고 밝혔다. 파리가 프랑스를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라 중앙집권을 해체하려 한다는 이 연방주의 강령은 프루동주의의 영향을 보여 준다. 13 6

노동과 일상을 바꾼 법령

두 달 남짓한 기간에 실제로 시행된 법령은 많지 않았지만 방향은 분명했다. 코뮌은 포위 기간의 집세를 면제하고, 전당포에 맡긴 20프랑 이하의 공구와 살림살이를 무상으로 돌려주게 했다. 제빵 노동자의 야간 노동과 고용주가 임금에서 떼는 벌금을 금지했고, 전사한 방위군의 혼인하지 않은 동반자와 자녀에게도 연금을 주었다. 6 14

4월 16일 법령은 주인이 버리고 떠난 작업장을 조사해 노동자 협동조합이 운영하게 했다. 이 일을 맡은 노동·교환위원회의 대표는 헝가리 출신 금세공인이자 인터내셔널 회원 레오 프랑켈이었고, 제본공 외젠 바를랭은 재정을 맡았다. 옛 소유주의 보상 청구권은 인정되었으므로 수용은 아니었지만, 노동자의 자주관리를 공공 정책으로 삼은 첫 시도였다. 6 15 16

4월 2일 코뮌은 교회와 국가를 분리하고 종교 예산을 폐지했으며 교회 재산을 국유화했다. 학교에서 종교 교육을 없애는 세속 교육이 추진되었다. 마르크스는 코뮌이 공무원의 봉급을 노동자 임금 수준으로 묶고 상비군을 무장한 인민으로 대체한 것을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라고 평했다. 17 6 12

여성과 예술가

여성은 투표권도 의석도 없었지만 3월 18일부터 코뮌의 중심에 있었다. 4월 11일 러시아 출신 인터내셔널 회원 엘리자베트 드미트리예프와 제본공 나탈리 르멜은 「파리 방위와 부상자 간호를 위한 여성 연합」을 세웠다. 연합은 구마다 위원회를 두고 여성 노동자의 협동 작업장을 조직하려 했으며, 여성 노동자에게 코뮌 방위에 나서라고 호소했다. 18 19 6

교사 루이즈 미셸은 몽마르트르 감시위원회에서 활동하고 방위군 대대와 함께 싸웠으며, 구급 활동을 조직했다. 여성들은 클럽에서 연설하고 무료 학교를 열었으며, 피의 주간에는 바리케이드를 지켰다. 베르사유 측 언론은 이들을 건물에 불을 지르는 「석유 방화녀」로 그렸지만, 이 혐의는 대부분 입증되지 않았다. 10 6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는 예술가 연맹을 이끌며 미술관과 예술가의 자치를 요구했고, 6구에서 코뮌 의원으로 뽑혔다. 코뮌은 4월 12일 방돔 광장의 나폴레옹 기념 원주를 「야만의 기념물」로 규정해 철거를 결의했고, 5월 16일 원주가 군중 앞에서 쓰러졌다. 쿠르베는 뒤에 이 철거의 책임을 지고 재건 비용을 물어야 했다. 20 21 6

베르사유와의 전쟁과 내부의 분열

4월 2일 베르사유군이 쿠르브부아를 공격하며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튿날 방위군 2만 7천 명이 세 갈래로 베르사유를 향해 나섰지만 몽발레리앵 요새의 포격에 무너졌고, 지휘관 플루랑스와 뒤발은 포로가 된 뒤 살해되었다. 코뮌은 4월 5일 인질 법령으로 응수했다. 베르사유가 포로를 처형하면 인질을 세 배로 처형한다는 이 법령에 따라 파리 대주교 다르부아가 붙잡혔고, 코뮌은 그를 블랑키와 맞바꾸자고 제안했지만 티에르는 거절했다. 6 22 23

군사 상황이 나빠지자 5월 1일 코뮌은 1793년의 이름을 딴 공안위원회를 세우기로 했다. 블랑키파와 자코뱅파의 「다수파」는 전쟁을 위한 권력 집중을 주장했고, 바를랭·프랑켈·쿠르베·발레스 등 인터내셔널 계열의 「소수파」는 독재라며 반대 성명을 냈다. 방위군 지휘권은 클뤼즈레, 로셀을 거쳐 5월 11일 민간인 들레클뤼즈에게 넘어갔다. 24) 6 25

파리는 고립되어 있었다. 3월 하순 리옹·마르세유·생테티엔·툴루즈 등에서 선포된 코뮌은 며칠 만에 진압되었고, 마르세유는 4월 4일 포격 끝에 함락되었다. 5월 10일 프랑크푸르트 조약으로 알자스와 로렌 일부를 넘기고 50억 프랑의 배상을 약속한 베르사유 정부는 독일이 풀어 준 포로로 마크마옹 원수 휘하의 군대를 다시 채웠다. 티에르는 파리 탈환에 15만 명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26 27 28) 6

피의 주간

1871년 5월 21일 일요일, 베르사유군은 비어 있던 서쪽 성벽의 생클루 문으로 파리에 들어왔다. 중앙의 지휘는 무너졌고 방위군은 제 구역의 바리케이드로 흩어졌다. 5월 23일 몽마르트르가 함락되었고, 폴란드 망명 장교 야로스와프 동브로프스키가 그 부근에서 치명상을 입었다. 퇴각하던 코뮌 측은 튀일리 궁과 시청, 재무부 등 권력의 상징에 불을 질렀다. 29 30 6

정규군은 무기를 들었거나 손에 화약 흔적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포로를 즉결 처형했다. 이에 맞서 5월 24일 라로케트 감옥에서 다르부아 대주교 등 인질 여섯 명이, 26일 악소 거리에서 사제와 헌병 등 약 50명이 코뮌 측에게 살해되었다. 5월 25일 들레클뤼즈는 샤토도 광장의 바리케이드 위로 걸어 올라가 총에 맞았다. 29 23 25

마지막 저항은 벨빌과 페르라셰즈 묘지에서 끝났다. 5월 28일 묘지 동쪽 벽 앞에서 코뮌 전사 147명이 총살되었고, 이 「코뮌 전사의 벽」은 뒤에 노동운동의 추모지가 되었다. 같은 날 바를랭은 붙잡혀 몽마르트르로 끌려가 구타당한 뒤 총살되었다. 티에르는 지방 관청에 「땅이 그들의 시체로 덮여 있다」며 이 광경이 교훈이 되기를 바란다고 알렸다. 31 16 32

사망자 수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정부군 공식 보고는 4~5월 전사자를 877명으로 집계했다. 코뮌 측은 리사가레가 말한 2만 명에서, 묘지 기록을 다시 조사한 로버트 톰스의 6천~7천 명(2012), 이를 반박한 미셸 오댕의 1만~1만 5천 명 이상(2021)까지 추정이 엇갈린다. 어느 쪽이든 짧은 기간에 한 도시에서 벌어진 학살로는 19세기 유럽에서 유례가 드물었다. 6 29 33

재판, 유형, 사면

군은 4만 3,522명을 포로로 잡았고, 그 가운데 여성이 1,054명이었다. 절반 이상은 곧 풀려났지만 약 1만 5천 명이 군사 법정에 섰고, 사형 선고 가운데 25명이 실제로 총살되었다. 유형 선고를 받은 이들은 대부분 뉴칼레도니아로 보내졌고, 루이즈 미셸도 1873년 그곳에 도착했다. 체포를 피한 수천 명은 잉글랜드와 벨기에, 스위스로 망명했다. 6 10

티에르는 1871년 8월 대통령이 되었고, 1873년 그를 이은 마크마옹은 왕정복고를 노리는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다. 같은 해 국민의회는 몽마르트르 언덕에 사크레쾨르 대성당을 짓기로 의결했는데, 이는 패전과 코뮌에 대한 속죄를 뜻했다. 1879년 부분 사면과 1880년 7월 11일 전면 사면으로 유형수와 망명자가 돌아왔다. 9 34 35 6

코뮌의 해석과 기억

마르크스는 4월 12일 쿠겔만에게 파리 사람들이 「하늘을 향해 돌격했다」고 썼고, 코뮌이 무너진 직후인 5월 30일 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이름으로 『프랑스 내전』을 발표했다. 그는 코뮌을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로 보고, 노동계급은 기존 국가기구를 그대로 넘겨받아 쓸 수 없다고 결론지었다. 1891년 엥겔스는 이 책의 서문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어떤 것인지 알고 싶다면 파리 코뮌을 보라」고 썼다. 36 37 12 38

해석은 곧 갈라졌다. 바쿠닌은 코뮌을 국가 자체의 부정으로 읽었고, 이 대립은 1872년 인터내셔널의 분열로 이어졌다. 독일 제국의회에서 베벨은 코뮌을 앞으로 올 싸움의 「전초전」이라 불렀다. 레닌은 1908년 「코뮌의 교훈」에서 코뮌이 베르사유로 진격하지 않고 프랑스 은행을 접수하지 않은 것을 실패의 원인으로 꼽았고, 1917년 『국가와 혁명』에서 코뮌을 소비에트 국가의 원형으로 삼았다. 39 40 41 42

코뮌 의원이던 외젠 포티에는 1871년 6월 숨어 지내며 「인터내셔널가」의 가사를 썼고, 1888년 피에르 드제이테르의 곡이 붙어 세계 노동운동의 노래가 되었다. 바리케이드에서 싸운 프로스페르올리비에 리사가레는 1876년 망명지에서 『1871년 파리 코뮌의 역사』를 펴내, 참여자의 증언으로 베르사유 측의 서사에 맞섰다. 43 44 33 45

결과

피의 주간에 수천에서 1만 명이 넘는 코뮌 가담자가 죽었고 4만 3천여 명이 포로가 되었다. 뉴칼레도니아 유형과 망명이 이어졌으며, 1880년 전면 사면으로 생존자들이 돌아왔다. 마르크스·엥겔스·레닌은 코뮌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첫 형태로 해석했고, 「인터내셔널가」와 코뮌 전사의 벽은 노동운동의 기억이 되었다.

연표와 지도

파리 시청 베르사유 리옹 마르세유 12 런던 7 프랑크푸르트 1 스당 5 몽마르트르 8 방돔 광장 10 샤토도 광장 11 페르라셰즈 묘지 2 파리 시청 9 생클루 문 3 베르사유 궁전 4 보르도 6 마르세유 13 누메아 (뉴칼레도니아)
  1. 1870.07.19프랑스독일
    프랑스, 프로이센에 선전포고

    제2제정이 에스파냐 왕위 계승 문제를 빌미로 전쟁에 나섰다.

  2. 11870.09.02프랑스독일
    스당 항복

    나폴레옹 3세가 군대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

  3. 21870.09.04프랑스
    공화국 선포

    파리 시청에서 국민방위정부가 수립되었다.

  4. 1870.09.19프랑스독일
    파리 포위 시작

    독일군이 파리를 에워쌌고 국민방위군이 도시를 지켰다.

  5. 1870.10.31프랑스
    시청 점거 봉기

    메스 항복 소식에 블랑키파 대대들이 시청을 점거했다가 물러났다.

  6. 31871.01.18독일프랑스
    독일 제국 선포

    베르사유 궁전 거울의 방에서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가 되었다.

  7. 1871.01.28프랑스독일
    휴전과 파리 항복

    정부가 휴전에 서명하고 파리의 요새를 넘겼다.

  8. 41871.02.08프랑스
    국민의회 선거

    농촌은 왕당파를, 파리는 공화파·급진파를 뽑았다. 의회는 티에르를 행정 수반으로 세웠다.

  9. 51871.03.18프랑스
    몽마르트르의 대포

    대포를 빼앗으려던 정규군이 군중과 섞였고, 티에르는 정부를 베르사유로 철수시켰다.

  10. 1871.03.26프랑스
    코뮌 선거

    23만 3천 명이 투표해 92명의 의원을 뽑았고, 28일 코뮌 성립이 선포되었다.

  11. 1871.04.02프랑스
    정교분리 법령과 내전 개시

    코뮌이 교회와 국가를 분리했고, 베르사유군이 쿠르브부아를 공격했다.

  12. 61871.04.04프랑스
    마르세유 코뮌 함락

    지방 코뮌 가운데 가장 오래 버틴 마르세유가 포격 끝에 진압되었다.

  13. 1871.04.11프랑스
    여성 연합 창립

    드미트리예프와 르멜이 파리 방위와 부상자 간호를 위한 여성 연합을 세웠다.

  14. 1871.04.16프랑스
    버려진 작업장 법령

    주인이 떠난 작업장을 노동자 협동조합이 운영하게 했다.

  15. 1871.04.19프랑스
    프랑스 인민에게 보내는 선언

    자치 코뮌들의 자유로운 연합을 강령으로 밝혔다.

  16. 1871.05.01프랑스
    공안위원회 설치

    권력 집중을 둘러싸고 다수파와 소수파가 갈라졌다.

  17. 71871.05.10프랑스독일
    프랑크푸르트 조약

    알자스와 로렌 일부를 넘기고 50억 프랑의 배상을 약속했다.

  18. 81871.05.16프랑스
    방돔 원주 철거

    나폴레옹의 전승 기념 원주가 군중 앞에서 쓰러졌다.

  19. 91871.05.21프랑스
    피의 주간 시작

    베르사유군이 생클루 문으로 파리에 들어왔다.

  20. 101871.05.25프랑스
    들레클뤼즈 전사

    전쟁 대표 들레클뤼즈가 샤토도 광장의 바리케이드에서 쓰러졌다.

  21. 111871.05.28프랑스
    페르라셰즈의 마지막 총살

    코뮌 전사 147명이 묘지 동쪽 벽 앞에서 총살되었다.

  22. 121871.05.30영국
    『프랑스 내전』

    마르크스가 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이름으로 코뮌을 옹호했다.

  23. 131873프랑스
    뉴칼레도니아 유형

    루이즈 미셸 등 유형 선고를 받은 코뮌 가담자들이 태평양의 유형지로 보내졌다.

  24. 1880.07.11프랑스
    전면 사면

    남은 유형수와 궐석 판결자들이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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