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국가적 배경

리투아니아

21 명

해당 인물

표도르 아로노비치 로트시테인

Фёдор Аронович Ротштейн
외교 소련 리투아니아 1871–1953 ○ 자연사

30년 영국 망명 끝에 소비에트 최초의 페르시아 대사가 된 볼셰비키 역사가

레닌은 1920년 7월 로트시테인에게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러시아로 오는 문제에 대해 나는 양면적인 생각이다. 당신은 런던에서의 활동에 대단히 중요하다. 추방당하게 내버려두라 ― 감히 그럴 용기가 있는지 두고 보자."

30년간 영국에서 활동한 볼셰비키 망명가. 1921년 초대 주페르시아 소비에트 대사로 차르의 불평등조약을 폐기했고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를 설립했다. 영국 노동운동과 제국주의를 연구한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891정치적 이유로 러시아 제국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
  • 1895–1911사회민주연맹(SDF) 가입, 1901–1906년 집행위원
  • 1901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RSDLP) 가입, 볼셰비키 파벌 지지
  • 1911–1920영국사회당(BSP) 좌파 지도자, 반전 입장 견지; 《The Call》 기고
  • 1914–1918영국 외무성 및 전쟁성에서 러시아어 통번역관으로 근무
  • 1920영국 공산당(CPGB) 창립 기여, 소비에트 러시아로 귀국
  • 1921–1923주페르시아 RSFSR 전권대표, 소련-이란 조약 체결
  • 1923–1930외무인민위원부 collegium 위원, 《국제생활》 책임편집자
  • 1924–1925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IMKhMP) 초대 소장
  • 1927–1945《대소비에트백과사전》 제1판 주필진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45–1946레닌 훈장(1945), 노동적기훈장(1946) 수훈

아론 알렉산드로비치 솔츠

Аро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Сольц
국가보안 기관 소련 리투아니아 1872–1945 ○ 정신병원 사망

당의 양심이라 불린 볼셰비키 원로, 대숙청기에 검찰총장과 맞선 법률가

「나는 뜨리포노프를 30년 동안 진짜 볼셰비키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너는 멘셰비키로 알고 있다!」 — 1938년, 체포된 동료를 변호하며 비신스키에게 던진 말.

1898년 입당한 볼셰비키 법률가. 중앙통제위원회에서 당 윤리 체계를 설계해 '당의 양심'으로 불렸다. 1937년 비신스키의 조작 사건을 공개 비판한 뒤 정신병원에 강제 수용되어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8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РСДРП) 입당
  • 1903–1905예까쩨리노슬라브 지하인쇄소 조직 혐의로 체포, 6년형 선고 후 조기 석방
  • 1905–1917뚜멘·뚜린스크·나름에서 유형 생활; 첫 비합법 신문 『뚜멘스끼 라보치』 발행
  • 1917모스크바 당위원회 위원, 『사회민주주의자』『쁘라브다』 편집진
  • 1920–1934중앙통제위원회(ЦКК) 위원 및 상임위원 (1923–1934); 당 윤리·징계 제도 구축
  • 1921–1934러시아·소련 대법원 판사, 노동농민감찰원 법률부장
  • 1935–1938.2소련 부검사 (비신스키 산하), 대법원 법률합의체 의장
  • 1938.2–1945비신스키 비판 후 강제 정신병원 격리; 말년에 민족박물관 기록보관원

아브람 모이세예비치 데보린

Абрам Моисеевич Деборин
이념 · 선전 소련 리투아니아 1881–1963 ○ 자연사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창설자,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정되다

「저는 미코얀에게, 25년 동안 그것이 무엇인지 이해하려 애썼지만 결국 이해하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이 무엇인지 묻는 미코얀에게 답하며 (1956년 면담, 네크리치 회고록)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제도화를 이끈 철학자. 기계론자 논쟁에서 변증법 진영을 승리로 이끌었으나, 1931년 '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으로 규탄받았다. 흐루쇼프 해빙기까지 살아남아 저작 복간을 목격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7–190316세에 마르크스주의 비밀서클 가입, 1903년 경찰 탄압으로 해외 탈출
  • 1903–1908볼셰비키 가담(1903) → 멘셰비키 전향(1907), 베른대학 철학과 졸업(1908), 플레하노프의 제자
  • 1908–1916마하주의·경험비판론 비판, 『변증법적 유물론 입문』 출간(1916), 철학에서 레닌과 접근
  • 1921–1926적색교수양성소 철학부장(1921), 『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편집위원(1922~),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과학부소장(1924~)
  • 1926–1931『마르크스주의 기치 아래』 주필, 공산아카데미 철학부장, 철학연구소 초대 소장(1929),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29)
  • 1931「멘셰비키화하는 관념론」 규탄 — 주필·소장직 박탈, 스탈린주의 철학 전환의 상징
  • 1935–1963과학아카데미 연구직 복귀, 사회과학부·역사철학부 아카데미서기(1937~1941), 1956년 미코얀 면담 후 저작 복간

오시프 아로노비치 퍄트니츠키

Осип Аронович Пятницкий
코민테른 소련 리투아니아 1882–1938 ✕ 처형

코민테른 지하 배달부에서 기구의 등뼈로, 그리고 기구에 먹혔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니콜라이 예조프에게 NKVD 비상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이 상정되자, 퍄트니츠키는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당 전체를 총살하게 될 것입니다." 회의장은 침묵에 잠겼고, 그는 6월 25일 전원회의에서 축출되었다.

가난한 유대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독학으로 글을 깨친 구(舊) 볼셰비키. 『이스크라』의 비밀 국제 배송망을 구축한 지하운동의 명수에서, 12년간 코민테른 서기로 각국 공산당의 연락·재정·간부를 총괄하는 국제기구의 실무 등뼈로 성장했다. 193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NKVD의 비상권한 부여에 공개 반대했고, 한 달 뒤 체포되어 1년간 고문 끝에 이듬해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상세 이력 보기
  • 1898–1902『이스크라』 비밀 배송망 구축, '프레이다크'로 활동
  • 1903–1908볼셰비키 합류, 오데사·모스크바 위원회 활동, 1905년 혁명 참여
  • 1914–1917체포되어 예니세이스크주 유형, 2월 혁명 후 모스크바 복귀
  • 1917모스크바 당위원회·전투당센터 구성원, 철도노선 적위대 지휘
  • 1921–1923코민테른 집행위원회(ИККИ) 위원
  • 1923–1935코민테른 서기 — 연락·재정·간부 배치 총괄
  • 1935–1937볼셰비키당 중앙위원회 행정정치부장
  • 1937.06중앙위 전원회의에서 NKVD 비상권한 반대, 축출·체포

이오시프 미하일로비치 바레이키스

Иосиф Михайлович Варейкис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리투아니아 1894–1938 ✕ 처형 · 복권 1956

집단화와 대숙청의 지역당 보스, 스탈린에게 '간첩이 너무 많다'는 핀잔을 듣다

1937년 9월, 극동지방에서 철도 노동자만 500명을 간첩으로 색출해 총살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하자, 스탈린은 이렇게 물었다. '바레이키스 동지, 당신 구역에는 왜 그렇게 간첩이 많은 겁니까?'

리투아니아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공장에서 선반공으로 일하며 1913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내전기에는 심비르스크 방어를 지휘하고 좌파 에스에르 봉기 진압에 참여했으며, 1920년대 중앙위 출판부장을 거쳐 중앙검은토지주·보로네시·스탈린그라드·극동지방의 제1서기를 차례로 맡았다. 집단화 과정에서 오스트로고시스크 봉기를 직접 진압하고, 트로이카를 통해 수만 명을 유죄판결했다. 1937년 극동지방에서 한인 17만 명의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를 집행하고 수백 명의 '일본 간첩'을 적발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했으나, 그해 10월 자신이 체포되어 1938년 총살되었다. 1956년 복권.

상세 이력 보기
  • 191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8.01–1918.06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공화국 인민위원 · 당 지역위 서기
  • 1918.06–1920.08심비르스크 현당위원회 위원장
  • 1920–1921비텝스크 현집행위원회 위원장 · 식량인민위원
  • 1921–1923바쿠 소비에트 부의장
  • 1923.08–1924.02키예프 현당위원회 책임서기
  • 1924.02–1924.10투르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책임서기
  • 1924–1930전연방공산당 중앙위 후보위원
  • 1924.10–1926.01중앙위 출판부장 · 『몰로다야 그바르디야』 편집장
  • 1926.01–1928.04사라토프 현당위원회 서기
  • 1928.08–1934.06중앙검은토지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30–1937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
  • 1934.06–1935.03보로네시 주당위원회 제1서기
  • 1935.03–1936.12스탈린그라드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
  • 1937.01–1937.10극동 변경당위원회 제1서기
  • 1937.10체포
  • 1938.07.29사형선고 후 총살 (코무나르카)

이에로님 페트로비치 우보레비치

Иероним Петрович Уборевич
군사 · 국방 소련 리투아니아 1896–1937 ✕ 처형

23세에 육군을 지휘한 천재 지휘관, 붉은 군대 기계화의 설계자

주코프 원수의 평가: "그는 작전술을 완벽히 체득한 진정한 소련 군사령관이었다. 완전한 의미에서 군인이었다."

리투아니아 농민 가정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포병장교로 참전했다. 23세에 14군 사령관이 되어 남북전쟁에서 데니킨군을 격파하고 하리코프·오데사를 점령했으며,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으로 블라디보스토크를 해방했다. 독일 연수에서 기계화전 교리를 흡수하여 투하쳅스키·야키르와 함께 붉은 군대의 기술 현대화를 주도했고, 벨라루스 군관구에서 1936년 대규모 기동훈련을 지휘했다. 1937년 「투하체프스키 사건」으로 체포되어 하루 만에 총살되었고 1957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6–17제국군 포병 장교, 중위 계급
  • 1918–1918소총사단장, 북부전선
  • 1919–2014군 사령관 — 데니킨군 격파, 하리코프·오데사 점령
  • 1921–22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블라디보스토크 입성
  • 1925–28북캅카스·모스크바 군관구 사령관
  • 1929–31적군 무장부장, 부국방인민위원
  • 1931–37벨라루스 군관구 사령관, 1936년 기동훈련 지휘
  • 1935제1급 군사령관 칭호 수여

보리스 이그나티예비치 아르바토프

Борис Игнатьевич Арватов
이론가 소련 리투아니아 1896–1940 ✕ 자살

아방가르드의 생쥐스트, 생산예술의 이론가

「예술 밖으로 뛰어내려야 비로소 예술을 이해할 수 있다」 — 나탄 알트만에 관한 책(1924)의 마지막 주석에서, 아르바토프는 형식 분석에서 사회적 사실로의 자신의 방법론적 도약을 이 한 문장으로 정식화했다.

프롤레트쿨트 이론가이자 ЛЕФ 공동 창립자. 예술을 산업과 융합하는 '생산예술'을 주창하며 구성주의 미학의 기초를 놓았다. 전시 뇌진탕 후유증으로 1920년대 말 창작을 중단했고 1940년 자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2바르샤바에서 문학 활동 시작
  • 1917사회혁명당원, 툴라 현 위원회 부의장, 제1차 소비에트 대회 및 제헌의회 대의원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폴란드 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복무
  • 1920–1923프롤레트쿨트 이론가, ИНХУК 연구원, ЛЕФ 공동 창립과 잡지 활동
  • 1923–1926『예술과 계급』(1923), 『예술과 생산』(1926) 출간; 형식-사회학적 방법 정식화와 생산예술론 전개
  • 1927–1930『사회학적 시학』(1928), 『선동 및 생산 예술에 관하여』(1930) 출간; 뇌진탕 후유증 악화로 활동 위축
  • 1940오랜 투병 끝에 모스크바에서 자살

세묜 그리고리예비치 피린

Семён Григорьевич Фирин
국가보안 기관 소련 리투아니아 1898–1937 ✕ 처형

‘개조’ 선전을 만든 드미트라크 수용소장

1937년 4월 30일, 피린이 연출한 모스크바-볼가 운하 개통 축제 — 깃발과 오케스트라, 죄수들이 그린 지도자 초상화로 빛났다. 한 달 뒤인 5월 28일 체포, 그해 8월 총살.

적군 정보장교 출신의 굴라크 수용소장. 1932년 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부소장을 거쳐 드미트라크(Dmitlag)를 이끌며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을 총괄했다. 죄수 노동을 '개조'라는 이름의 선전으로 포장해 캠프를 전시장으로 만들었고, 1934년 막심 고리키, 아베르바흐와 함께 찬양 문집 『벨로모르』를 공동 편집했다. 생산성이 낮은 죄수의 배급을 깎는 한편 '개조'를 설파한 모순적 인물. 야고다 측근으로 1937년 체포되어 총살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년대적군 정보기관 요원(그리스·터키·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 1932–1933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부소장
  • 1933–1937드미트라크 수용소장(모스크바-볼가 운하)
  • 1937체포와 처형

솔로몬 라파일로비치 밀시테인

Соломон Рафаилович Мильштейн
국가보안 기관 소련 리투아니아 1899–1955 ✕ 처형

강제이주의 열차를 조직한 수송총국장

1941년 10월, 밀시테인은 베리야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전쟁 발발 이후 특별부가 지연·탈주 군인 65만 7천여 명을 억류했고 그중 1만 201명을 총살했으며 "3,321명은 부대 앞에서 총살"되었다고 적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 그루지야에서 당 경력을 쌓은 뒤, 1939년 NKVD 수송총국장에 올라 스탈린 시대 강제이주의 철도 기구를 운영했다. 그의 총국은 폴란드인, 카라차이인, 칼미크인, 체첸인, 잉구시인 등 전체 민족 집단의 추방 열차를 편성하고 움직였다. 이 공로로 전투공로훈장인 수보로프 훈장 2급을 받았으나 소비에트 국가는 1962년 이를 취소했다. 1953년 베리야의 체포 직후 함께 체포되어 별도 재판으로 1955년 총살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년대–1938그루지야 당 사업, 트빌리시 시당 서기 등
  • 1938–1939NKVD 수사부 부부장
  • 1939–1941NKVD 수송총국장
  • 1941–1942NKVD 특별부관리국 제1부국장
  • 1942–1943NKVD 수송국장
  • 1943–1947NKGB·MGB 제3관리국장(수송)
  • 1951–1953MVD 굴라크 부수장
  • 1953우크라이나 내무 제1부장관
  • 1953–1955체포, 별도 재판과 처형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리투아니아 1899–1980 ○ 자연사

리투아니아 소비에트화의 얼굴

1939년 10월 빌뉴스 반환 경축식에서 팔레츠키스는 연단에 올라 스메토나 대통령의 퇴진을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그 발언으로 강제노동수용소에 수감된 그는 불과 8개월 뒤 소련의 후원 아래 리투아니아의 새 지도자가 되어 돌아왔다.

리투아니아의 소비에트화 과정에서 지도자가 되었고, 이후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지냈다. 발트 공화국 대표제의 상징적 인물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s–1930s리투아니아 좌파 언론인·정치인으로 활동
  • 1940소련의 리투아니아 병합 과정에서 인민정부 수반이 됨
  • 1940–1967리투아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간부회 의장, 공화국의 공식 얼굴
  • 1966–1970민족소비에트 의장, 발트 공화국 대표제의 상징
  • 1970 이후명예직과 회고의 영역으로 물러남

미하일 파블로비치 시레이데르

Михаил Павлович Шрейдер
국가보안 기관 소련 리투아니아 1902–1978 ○ 자연사 · 복권 1950년대

대숙청기 NKVD의 내부 증언자

1938년 초 노보시비르스크에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형사 요원들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와 호송에 동원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와 한 달 내내 충돌한 끝에 그는 전출되었고, 넉 달 뒤에는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919년부터 체카에서 일한 고참 요원으로, 1935년부터 이바노보주 밀리치야(경찰) 국장을 지냈고 1938년 2월 카자흐 SSR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밀리치야 총국장이 되었다. 그 직전 노보시비르스크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밀리치야 인력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 업무에 동원하라는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의 요구를 거부해 한 달 만에 자리에서 밀려났다. 1938년 6월 알마아타에서 체포되어 여러 나라의 간첩이라는 자백을 강요당했으나 아홉 달 넘게 버텼고, 고문 끝에는 자신이 만주국 황제 푸이의 사생아라는 식의 일부러 터무니없는 진술서를 써서 수사의 조작성을 기록에 남겼다. 1940년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2년 풀려나 사병으로 참전했으며, 1950년대 중반 복권되었다. 만년에 쓴 회고록 「NKVD 내부에서: 체키스트의 수기」(1995년 사후 출간)는 지휘부급 생존자가 대숙청기 NKVD 내부를 증언한 보기 드문 기록으로, 역사가들이 널리 인용한다.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리투아니아 1903–1974 ○ 자연사

소련 리투아니아를 34년간 통치한 공산주의자

1949~50년, 모스크바가 리투아니아의 구세대 공산주의자들을 숙청하려 하자 스니에치쿠스는 스탈린에게 직접 맞섰다. 리투아니아는 구시대 공산주의자 단 한 명도 체포되지 않은 유일한 공화국이 되었다.

34년간 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를 지낸 소련 최장수 공화국 지도자다. 지하운동 출신으로 소비에트화를 주도했으나, 이후 모스크바 간섭을 완충하며 리투아니아어와 문화 공간을 지켜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0–1921리투아니아 공산당 알리투스 지하위원회 책임자
  • 1921–1925스몰렌스크에서 리투아니아 공산당 출판국 근무
  • 1925–1926, 1933–1936코민테른 집행위 내 리투아니아 공산당 대표부 근무
  • 1927–1930리투아니아 공산당 중앙위 서기 (지하), 선전·조직 담당
  • 1936–1939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 (비합법, 카우나스)
  • 1940.6–1940.8리투아니아 국가보안국장
  • 1940–1974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 (34년)
  • 1942–1944리투아니아 파르티잔 운동 참모장

이사크 콘스탄티노비치 키코인

Исаак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Кико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리투아니아 1908–1984 ○ 자연사

소련 원자폭탄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의 과학 책임자

“과학자라는 것은 직함도 직장도 아닙니다. 연구실에 들어서면서 과학자가 되는 것이 아니에요. 과학자라는 것은 끊임없는, 때로는 괴로운, 때로는 아름다운 상태입니다.” — 1984년 사망 직전 콤소몰 상 시상식 연설.

소련의 실험물리학자. 1933년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에서 광자기 효과(키코인-노스코프 효과)를 발견했고, 액체 금속의 홀 효과와 초전도체의 자이로자기 비율을 선구적으로 측정했다. 1943년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제2연구소에 합류해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과학 책임자를 맡았으며, 특별위원회 기술평의회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2연구소에서 단 둘만 이름을 올렸다. 종전 후 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1960–1984)을 지내며, 수학자 콜모고로프와 《크반트》를 창간했고 형 아브람과 집필한 물리 교과서는 소련 표준이 되었다. 연구실에 사해문서 영인본을 꽂아둘 만큼 유대 전통과 히브리어에 정통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연구원
  • 1933M. M. 노스코프와 함께 반도체 광자기 효과(키코인-노스코프 효과) 발견
  • 1935우랄 물리기술연구소 전기현상부장, 스베르들롭스크 이주
  • 1936물리수학 박사 학위 취득
  • 1937–1944우랄 공업대학 일반물리학 주임교수
  • 1942대전류 측정 장치 발명으로 스탈린상 3급 수상
  • 1943제2연구소 합류, 우라늄 동위원소 분리 과학 책임자, 특별위원회 기술평의회 위원
  • 1950원자력연구소(IAE) 부장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 1960–1984쿠르차토프 원자력연구소 부소장
  • 1969물리·수학 대중과학잡지 《크반트》 공동 창간, 초대 편집장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비에트 연방 리투아니아 1927–2016 ○ 자연사

소련공산당 정치국에 오른 유일한 리투아니아인, 1월 사태로 수감된 마지막 모스크바파 서기장

2000년 아담쿠스 대통령이 사면을 제안하자 그는 거절했다: 「나는 조국 앞에 아무 죄도 없다.」

리투아니아 알리투스 출신으로 1942년부터 노동자로 일하며 공산당 기구에서 성장했고, 1989년 리투아니아공산당 분열 이후 모스크바파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의 제1서기가 되었다. 1990년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에 맞서 연방 유지를 주장했으며, 1991년 1월 고르바초프에게 군대 투입을 요청하고 「국가구원위원회」를 이끌어 소련군의 빌뉴스 텔레비전 탑 진압 작전에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작전에서 민간인 14명이 사망했고, 1994년 민스크에서 체포되어 1999년 반국가조직 활동과 살인 방조 혐의로 12년형을 선고받았다. 아담쿠스 대통령의 사면 제안을 거부하며 '조국 앞에 죄가 없다'고 답했고, 2006년 1월 13일 만기 출소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2–1944우드무르티야에서 목수·선반공
  • 1944–1955콤소몰·공산당 기구 활동, 빌뉴스 사범대학 졸업
  • 1963–1976당역사연구소 선임연구원, 빌뉴스 공과대학 교수
  • 1976–1990빌뉴스 사범대학 과학공산주의 교수
  • 1990–1991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1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 1991–1994벨라루스로 도피
  • 1994–2006체포 후 12년형, 2006년 1월 만기 출소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1932–2010 ○ 자연사

당을 모스크바에서 분리해 낸, 독립 리투아니아의 첫 대통령이 된 공산주의자

1990년 1월 고르바초프가 빌뉴스까지 날아와 당의 분리를 되돌리라고 압박했을 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정은 당대회가 내렸고, 그것을 되돌릴 권한은 자신에게도 없다는 것이었다.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경제 관리자 출신으로 1988년 사유디스의 지지 속에 리투아니아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고, 1989년 12월 당을 소련공산당에서 분리하는 결정을 이끌었다. 연방 공화국의 집권당이 모스크바와 결별한 첫 사례였다. 독립 후인 1993년 첫 직선 대통령에 당선되어 옛 공산당원이 선거로 집권할 수 있음을 보였고, 러시아와의 관계를 관리하면서 나토·유럽연합 가입의 길을 열었다. 2001년부터 2006년까지는 총리를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65–1967리투아니아 SSR 건설자재공업부 장관
  • 1967–1977리투아니아 SSR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의장
  • 1977–1987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8–1989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독립 리투아니아공산당(소련공산당에서 분리) 제1서기
  • 1990리투아니아 SSR 최고회의 간부회 의장
  • 1993–1998리투아니아 공화국 대통령
  • 2001–2006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

로무알다스 오졸라스

Romualdas Ozolas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인 1939–2015 ○ 암으로 사망

200만 서명으로 소련군 철수를 요구한 사유디스의 철학자

오랜 망설임 끝에 나는 '사회주의가 무엇으로 되는지' 보기로 결심했다. 몇 년 뒤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리투아니아의 철학자이자 정치가로, 빌뉴스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며 문화잡지 『쿨투로스 바라이』의 편집자로 활동했다. 1973년 리투아니아 공산당에 입당했으나 페레스트로이카를 계기로 1988년 사유디스 창립에 참여했고, 독립운동의 이론가로서 200만 명 서명 운동을 주도해 주둔 소련군 철수를 요구했다. 에스토니아·라트비아 대중운동과 함께 '발트의 길'을 기획한 3국 조정의 핵심 인물이었으며, 독립 후 부총리(1990~1991)로 란츠베르기스-프룬스키에네 내각의 실무를 떠받쳤다. 이후 중도연합을 창당해 세이마스 의원(1992~2000)을 지냈고, 유럽연합 가입을 주권 제약으로 간주해 끝까지 반대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7–1962빌뉴스대학 철학 전공
  • 1965–1968『쿨투로스 바라이』 편집자
  • 1973–1989빌뉴스대학 철학 강사
  • 1988–1990사유디스 창립 멤버·평의회 의원
  • 1989–1990소련 인민대표대회 대의원
  • 1990–1991리투아니아 공화국 부총리
  • 1992–2000세이마스(의회) 의원
  • 1993–2000리투아니아 중도연합 당수
이념 · 선전 소비에트 연방 리투아니아 1940–2022 ○ 자연사

빌뉴스 1월 사태에서 국가구원위원회를 선포한 모스크바파 리투아니아공산당 이념서기

1991년 1월 13일 소련군 BMP 확성기에서 그의 육성이 흘러나왔다: 「리투아니아 형제들이여, 인민에게 맞섰던 민족주의·분리주의 정부는 전복되었다!」

리투아니아 남부 농가 출신으로 빌뉴스대학과 레닌그라드 고등당학교를 마친 뒤, 20년간 당 역사연구소에서 학자로 일하며 종교·무신론을 연구했다. 1990년 친모스크바 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이념부장이 되어 리투아니아 독립에 격렬히 반대했고, 1991년 1월 11일 '리투아니아 국가구원위원회' 창설을 발표해 소련군 작전의 정치적 명분을 제공했다. 1999년 반국가조직 활동과 폭력적 정권 전복 선동으로 8년형을 선고받았고, 출소 후 러시아로 이주해 사망할 때까지 소련 체제를 옹호하는 저술을 계속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62소련공산당 입당
  • 1970–1990리투아니아공산당 중앙위원회 산하 당역사연구소 연구원
  • 1990–1991리투아니아공산당(CPSU 강령파) 중앙위원회 이념부장
  • 1994–2002반국가 활동 혐의로 수감 (8년형)
  • 2002–2012러시아국립사회대학 교수, 공산당연합-CPSU 평의회 부의장

카지미에라 다누테 프룬스키에네

Kazimira Danutė Prunskienė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인 1943–2026 ○ 뇌졸중으로 사망

실용주의 노선으로 독립을 협상하려 했으나, 사퇴로 군사옵션의 마지막 장애물이 사라졌다

그녀는 각료들 앞에서 울며 말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것 같다. 우리는 끝장이다."

리투아니아의 첫 독립 후 총리(1990~1991)로, 소련 붕괴 과정에서 가장 극적인 10개월을 이끌었다. 사유디스 창립 멤버로 리투아니아 SSR 부총리를 거쳐 총리에 올랐으며, 부시·대처·콜 등 서방 정상을 만나 '호박색 숙녀'라는 별명을 얻고 신생국의 외교적 존재감을 세웠다. 의장 란츠베르기스의 강경 노선과 달리 실용주의자였으나, 1991년 1월 8일 고르바초프에게 군사행동 불가 보장을 요청했다 거부당하고 다음 날 사퇴했다. 닷새 뒤 소련군이 빌뉴스에서 민간인 14명을 살해했고, 그녀는 2004년 대선 결선에서 아담쿠스에게 근소하게 패한 뒤 농업장관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65–1986빌뉴스대학 산업경제학 강사·부교수
  • 1986–1988리투아니아 SSR 농업경제연구소 부소장
  • 1989–1990리투아니아 SSR 각료회의 부의장
  • 1990.03–1991.01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
  • 1995–1998리투아니아 여성당 당수
  • 1996–2004세이마스(의회) 의원
  • 2004–2008농업장관

비타우타스 란츠베르기스

Vytautas Landsbergis
리투아니아 독립운동 지도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1932–

제국에서 걸어 나간 첫 나라를 이끈 음악학자

1990년 3월 11일 밤, 독립 회복법이 반대 없이 가결되자 의장석의 그가 선언했다. 리투아니아는 다시 독립국가라고. 소련에서 걸어 나간 첫 공화국이었고, 크렘린이 받은 첫 탈퇴 통보였다.

리투아니아의 음악학자로 화가이자 작곡가 추를료니스 연구의 권위자였다. 1988년 개혁운동 사유디스의 창립에 참여해 의장이 되었고, 1990년 3월 11일 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으로서 독립 회복법을 통과시켜 소련에서 이탈을 선언한 첫 공화국의 국가수반이 되었다. 모스크바의 경제 봉쇄와 1991년 1월의 유혈 진압 시도를 버텨 내며 독립을 지켰고, 이후 세이마스(국회) 의장과 유럽의회 의원을 지내며 리투아니아 우파의 원로로 남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55리투아니아 음악원(현 리투아니아 음악연극아카데미) 졸업
  • 1978–1990리투아니아 음악원 및 빌뉴스 사범대학 교수
  • 1988–1990사유디스 평의회 의장
  • 1989–1990소련 인민대표대회 대의원
  • 1990–1992리투아니아 최고회의 의장 (국가원수)
  • 1993–2003조국동맹(보수당) 당수
  • 1996–2000리투아니아 세이마스(국회) 의장
  • 2004–2014유럽의회 의원

아이나스 라사스

Ainius Lašas
연구자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인 현대 ○ 현대 학자로 활동

발트 정치와 국제관계를 연구한 리투아니아 학자

아이나스 라사스는 리투아니아의 정치학자이자 발트 지역 정치와 국제관계를 연구한 학자다. 그는 2007년 논문에서 1991년 1월 빌뉴스와 리가의 유혈 진압을 둘러싼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무지 주장을 재검토하고, 이를 반박하는 정황 증거를 제시했다. 그의 연구는 소비에트 해체기의 민족문제와 권력 책임을 문서와 정치적 맥락 속에서 추적한다.

상세 이력 보기
  • 2000년대리투아니아 정치학자
  • 2007「피의 일요일」 저자, Journal of Baltic Studies
  • 2008발트해 지역 안보 협력 연구 공저자
  • 2000년대~현재발트 정치·국제관계 연구

알베르타스 시메나스

Albertas Šimėnas
외국 정치가 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인 1950– ○ 생존

독립 회복기의 경제학자 정치가

알베르타스 시메나스는 경제학자로 활동하다 리투아니아 독립 회복 운동에 참여한 정치가이자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의 서명자였다. 그는 1991년 1월 소련군이 빌뉴스의 핵심 시설을 포위한 시기에 정부를 이끌었고, 3일 뒤 실종 상태에서 게디미나스 바그노리우스에게 총리직이 넘어갔다. 이후 경제장관과 국회의원으로 일하며 독립국가의 경제 개혁과 제도 정비에 관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0리투아니아 파필리아이에서 출생
  • 1972–1984국가계획위원회 산하 연구기관 경제학자
  • 1984–1989빌뉴스 공학건설대 경제학 강사, 1989년 부교수
  • 1990–1992최고회의 의원, 3월 11일 독립 회복 법률 서명자
  • 1991리투아니아 공화국 총리
  • 1991–1992경제장관
  • 1996–2000리투아니아 공화국 세이마스 의원, 경제위원회 위원장
  • 2000–2016리투아니아 철도 개발담당 이사 및 부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