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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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여시 이반

Héjjas Iván
헝가리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 1890–1950 ○ 망명 중 병사

케치케메트 일대의 장교 부대를 이끌고 오르고바니 학살과 이자크 포그롬을 저지른 백색테러 지휘관

케치케메트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항공대의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했다. 1919년 세게드에서 호르티의 참모장에게 케치케메트 일대의 「질서 회복」을 위임받아 도나우강·티서강 사이 지역의 사실상 군정관이 되었다. 그의 부대는 사람들을 오르고바니 숲으로 끌고 가 고문하고 처형했으며 이자크에서 포그롬을 일으켰고, 희생자의 약 3분의 1이 유대인이었다. 1921년 카를 왕의 복귀를 지지하지 않은 공으로 호르티의 사면을 받았고 1927~1931년 국회의원을 지냈다. 전후 궐석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50년 스페인 비고에서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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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복무, 전투기 조종사
  • 1919케치케메트 일대 장교 부대 지휘
  • 1919오르고바니 학살 · 이자크 포그롬
  • 1921서헝가리 봉기
  • 1927–1931국회의원
  • 1944–1950망명, 궐석 사형 선고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Friedrich Paulus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90–1957 ○ 자연사

명령과 현실 사이에서 무너진 야전사령관

“한 독일 야전원수가 생포된 전례는 아직 없다”는 승진 통보 뒤, 파울루스는 자살하지 않고 항복했다.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방군의 참모 장교이자 장군으로, 소련 침공 계획 수립에도 관여했다. 제6군 사령관으로 스탈린그라드 공격을 지휘했으나, 소련군의 포위 뒤 히틀러의 사수 명령과 군대의 붕괴 사이에 갇혔다. 그는 1943년 1월 31일 항복했고, 포로 생활 중 나치 체제를 비판하며 반나치 독일 장교 조직에 참여했다. 전후 동독에서 군사사를 연구했지만, 그의 경력은 침략전쟁 수행과 뒤늦은 결별이 함께 남긴 책임의 문제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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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독일 제국군 제111보병연대 장교 후보생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 장교
  • 1935–1939기갑부대 사령부 참모장, 제10군 참모장
  • 1939–1940제10군, 이후 제6군 참모장
  • 1940–1941독일 육군 총참모부 작전 병참 담당 차장
  • 1942–1943독일 국방군 제6군 사령관
  • 1943상급대장, 1월 30일 야전원수로 승진
  • 1954–1957동독 군사사 연구 및 강의

에리크 하인리히스

Axel Erik Heinrichs
핀란드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핀란드 핀란드계 1890–1965 ○ 자연사

전쟁과 외교의 경계에 선 핀란드 장군

1941년 한여름,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사상 최대인 10만 병력의 카렐리야군을 하인리히스에게 맡겨 스비르 강과 오네가 호수 방면 공세를 맡겼다.

에리크 하인리히스는 핀란드의 군인으로, 만네르헤임과 가까이 일하며 전쟁 지휘와 군사참모 업무를 함께 맡았다. 겨울전쟁에서 카렐리야 지협 방어를 지휘한 그는 1941년 독일과의 군사 협력을 조율한 뒤 카렐리야군 사령관으로 공세를 이끌었다. 전후에는 무기 은닉 사건의 여파로 군 경력을 마쳤지만, 1948년 모스크바 협상과 만네르헤임 전기 집필에 참여하며 군사 전문가이자 저술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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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8독일에서 핀란드 엽병으로 군사훈련과 동부전선 전투에 참여
  • 1918핀란드 내전에서 제7 엽병대대 지휘
  • 1931–1938제1사단 사령관
  • 1939–1940겨울전쟁에서 제3군단과 카렐리야 지협군 지휘
  • 1940–1941핀란드 육군 총참모장, 1941년 독일과의 군사 협의에 참여
  • 1941–1942카렐리야군 사령관으로 동카렐리야 공세 지휘
  • 1942–1944총참모장으로 전쟁 수행과 독일군 연락 담당
  • 1945핀란드 국방군 총사령관, 무기 은닉 사건 뒤 사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Dwight D. Eisenhower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890–1969 ○ 자연사

노르망디 상륙을 지휘하고 군산복합체를 경고한 5성 장군 대통령

이런 종류의 일에 뛰어들 때는 단 하나만 명심해야 하네. 반드시 성공해야 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지휘한 5성 장군 출신의 제34대 미국 대통령이다. 재임 중 냉전 봉쇄정책을 추진하며 이란·과테말라 쿠데타를 지원했고, 1960년 3월 카스트로 전복을 위한 CIA 비밀공작을 승인했다. 피그스만 침공 실패 후 케네디에게 '이런 일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고 조언했으며, 소련의 대응을 두려워해 개입을 숨기려는 발상은 오히려 상대를 대담하게 만들 뿐이라고 경고했다. 퇴임사에서는 '군산복합체'의 위험을 경고하며 미국 민주주의에 대한 성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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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웨스트포인트 졸업
  • 1942–1945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 (제2차 세계대전)
  • 1945미국 점령 독일 군정장관
  • 1945–1948미국 육군 참모총장
  • 1948–1953컬럼비아 대학교 총장
  • 1951–1952NATO 연합군 최고사령관
  • 1953–1961제34대 미국 대통령

예브헨 미하일로비치 코노발레츠

Євген Михайлович Коновалець

시치 소총병을 이끌고 UVO와 OUN을 조직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도자

1938년 5월 23일 로테르담. 신뢰하던 연락원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건넨 우크라이나식 초콜릿 상자 안에는 모스크바에서 제작한 시한폭탄이 들어 있었다.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 자시키우 출신의 우크라이나 군인·정치가.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가 된 뒤 1917년 키이우에서 시치 소총병을 조직했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의 핵심 지휘관으로 싸웠다. 독립전쟁 패배 후 망명지에서 우크라이나 군사조직(UVO)을 이끌었으며, 1929년 빈에서 여러 민족주의 단체를 통합해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을 창설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유럽과 북미의 망명 조직을 연결하고 국제연맹에 우크라이나 문제를 제기하려 했으나, 1938년 로테르담에서 OUN에 침투한 NKVD 요원 파벨 수도플라토프가 건넨 폭탄으로 암살되었다. 1929년 리투아니아 시민권과 여권을 받아 망명 활동의 법적 기반을 마련했지만, 그의 민족적·정치적 정체성과 운동의 목표는 일관되게 우크라이나 독립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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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복무, 마키우카 전투 뒤 러시아군 포로
  • 1917–1920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 시치 소총병 조직·지휘
  • 1920–1929우크라이나 군사조직(UVO) 창립·지도
  • 1929–1938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 초대 지도자
  • 1938.05로테르담에서 파벨 수도플라토프의 폭탄 공작으로 암살

미국을 알았던 이오지마 방어 지휘관

미국은 세계의 대국이므로 일본은 가능한 한 이 나라와 싸움을 피해야 한다고 가족에게 말했다.

구리바야시 다다미치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외교관으로, 미국의 산업력과 군사력을 직접 관찰한 드문 일본군 고위 지휘관이었다. 그는 이오지마에서 해안의 결전을 피하고 지하호와 종심 방어를 결합해 압도적 전력에 맞서는 소모전을 설계했다. 그 방어는 일본의 패배를 막지 못했지만 미국군의 상륙과 섬 점령에 큰 비용을 부과했으며, 동시에 병사들에게 만세 돌격과 무의미한 자결을 강요하지 않으려는 지휘 원칙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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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육군사관학교 졸업, 기병 소위
  • 1923육군대학교 졸업, 성적 2위
  • 1927–1930미국 주재 무관보, 하버드에서 수학
  • 1931–1933캐나다 주재 무관
  • 1941–1943제23군 참모장, 홍콩 전투에 참전
  • 1943–1944근위 제2사단장
  • 1944–1945제109사단장, 오가사와라 병단장, 이오지마 수비 지휘
  • 1945이오지마 전투에서 전사, 사후 육군 대장 추서

발터 모델

Walter Model

히틀러의 소방수라 불리며 동부전선의 위기를 진압한 방어전의 명수

눈보라를 뚫고 동프로이센으로 날아간 모델은 히틀러 앞에서 단안경 너머로 노려보며 물었다. 「총통 각하, 9군을 지휘하는 것이 각하십니까, 나입니까.」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장교로 두각을 나타낸 발터 모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국방군 최고의 방어전 지휘관으로 명성을 떨쳤다. 르제프 돌출부의 9군 사령관으로서 소련군의 여러 대공세를 격퇴해 '방어의 사자'라는 별명을 얻었고, 히틀러에게는 어디든 급파할 수 있는 '소방수'로 신임을 받았다. 1943년 4월 27일 모델은 항공정찰 사진을 제시하며 쿠르스크 돌출부에 구축된 소련군의 종심 방어선 앞에서 성채 작전이 실패할 것이라고 경고한 최초의 고위 지휘관이었으나 공세는 강행되었고, 북부 공격축을 지휘한 그의 9군은 12km조차 돌파하지 못했다. 전쟁 말기 루르 포위망에서 집단 항복을 거부하고 육군 집단을 해산한 뒤 숲에서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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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52보병연대 사관후보생
  • 1917최고사령부 작전과 참모장교
  • 1935육군총국 제8부(기술) 부장
  • 1940제3기갑사단장
  • 1942제9군 사령관, 르제프 방어전
  • 1943성채 작전 북부 공격 지휘
  • 1944중부집단군 사령관 → B집단군 사령관
  • 1945루르 포위망 포위, 군 해산 후 자결

임레디 벨러

Imrédy Béla

외교를 독일 쪽으로 돌리고 제2차 유대인법을 낸 뒤 유대계 조상이 드러나 물러난 총리

부다페스트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재무부에서 일한 경제 전문가로, 1932년 굄뵈시 내각의 재무장관, 1935년 국립은행 총재가 되었다. 1938년 5월 총리가 되어 그해 가을부터 외교를 독일·이탈리아 쪽으로 돌렸고, 그의 재임 중 제1차 빈 중재로 남부 슬로바키아가 헝가리에 돌아왔다. 독재적 개편과 제2차 유대인법을 추진했으나 1939년 2월 정적들이 그의 유대계 조상을 밝혀내 사임했다. 1940년 친파시스트 정당 헝가리 쇄신당을 세웠고, 1944년 독일 점령 뒤 스토여이 내각의 장관을 지냈다. 1946년 인민재판소의 사형 선고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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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2헝가리 국립은행 이사
  • 1932–1935굄뵈시 내각 재무장관
  • 1935–1938헝가리 국립은행 총재
  • 1938–1939총리, 제2차 유대인법 제출
  • 1940–1944헝가리 쇄신당 창립·당수
  • 1944스토여이 내각 경제 담당 장관

헬무트 바이들링

Helmuth Weidling

붕괴하는 제국의 마지막 베를린 방위 지휘관

“저항을 즉시 중지하라. 베를린의 민간인과 부상자들이 겪는 고통을 매 시간 연장할 뿐이다.”

헬무트 바이들링은 제국군에서 출발해 국방군 포병 장교와 군단 지휘관으로 올라선 독일 장군이었다. 동부전선에서의 지휘는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과 점령 체계에 연루되었고, 그의 군단은 오자리치 강제수용소 사건과 관련해 전후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되었다. 1945년 4월 23일 베를린 방위구역 사령관이 된 그는 히틀러의 항복 금지 명령 아래 도시 방어를 지휘했으며, 5월 2일 바실리 추이코프와 협상해 주둔군의 저항 중지 명령을 내렸다. 소련 포로가 된 뒤 전쟁범죄로 25년형을 선고받고 1955년 수감 중 사망했으며, 러시아 검찰은 1996년 그를 복권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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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8프로이센군 포병 및 비행선 부대 장교
  • 1919–1938국가방위군 포병 장교, 연대 지휘관
  • 1939–1941폴란드·프랑스 전역 및 동부전선 포병 지휘
  • 1942–1943제86보병사단 사단장
  • 1943–1945제41기갑군단 사령관
  • 1945.04제56기갑군단 사령관, 오데르 전선과 베를린 전투
  • 1945.04.23–1945.05.02베를린 방위구역 사령관, 주둔군 항복 명령
  • 1952–1955소련 수감 중 전쟁범죄 유죄 판결, 복역

나폴레온 제르바스

Ναπολέων Ζέρβας
반혁명 세력 그리스 그리스인 1891–1957

점령기 저항과 반공 정치 사이의 군인 지도자

1942년 11월, 그는 영국 공작대와 ELAS의 아리스 벨루히오티스 부대가 합류한 고르고포타모스 작전에 자기 병력을 투입했다.

그리스 육군 장교 출신인 나폴레온 제르바스는 1941년 국민공화그리스동맹(EDES)을 세우고 점령에 맞선 비공산주의 저항을 이끌었다. 그는 1942년 고르고포타모스 철교 폭파작전에서 영국 특수작전집행부, ELAS와 협력했지만, 곧 영국의 지원과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립을 중시하며 공화주의에서 왕정 지지로 선회했다. 해방 뒤에는 우익 정치인과 공공질서 행정가로 활동하며 저항운동의 군사적 권위를 내전기의 국가 탄압과 결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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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4지원병으로 입대해 발칸전쟁에 참전하고 하사관학교를 졸업했다.
  • 1916–1920국방운동에 가담해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복무하고 소령으로 진급했다.
  • 1925–1926판갈로스 정권 아래 아테네 수비대 사령관과 공화국수비대 대대장을 지냈다.
  • 1941베니젤로스파 장교들과 국민공화그리스동맹(EDES)을 창립했다.
  • 1942–1944EOEA를 조직해 에피루스에서 무장 저항을 지휘하고 고르고포타모스 작전에 참여했다.
  • 1946–1947국회의원이 되어 막시모스 내각에서 무임소 장관과 공공질서 장관을 맡았다.
  • 1950–1951소포클리스 베니젤로스 내각에서 공공사업 장관을 지냈다.

카를 되니츠

Karl Dönitz

나치 독일 해군의 잠수함 전력을 지휘하고 히틀러 사후 국가원수를 지냈다.

되니츠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해군 잠수함 전력을 지휘했고, 1943년 1월 대제독으로 승진해 해군 총사령관이 됐다. 잠수함 손실이 커진 1943년 5월 이후에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출격을 명령했다. 히틀러가 자살한 뒤 유언에 따라 국가원수로 지명됐으며, 1945년 5월 7일 요들에게 독일 항복문서에 서명하도록 명령했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평화에 반한 죄와 전쟁법 위반으로 유죄 판결을 받아 10년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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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독일 해군 총사령관에 취임
  • 1945히틀러 사후 국가원수가 되어 독일 항복을 지시

햘마르 프리돌프 실라스부오

Hjalmar Fridolf Siilasvuo
핀란드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핀란드 핀란드인 1892–1947 ○ 자연사

수오무살미에서 두 개 소련 사단을 모티 전술로 궤멸시킨 핀란드의 예거 중장

사단도 채 갖춰지기 전이었다: 실라스부오는 완편되지 않은 제9사단으로 소련 163사단을 연말까지 격파했고, 이어 라테 도로에서 44사단을 포위해 모티 더미로 만들었다.

헬싱키 출신의 예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로 건너가 프로이센 예거대대에서 훈련받고 핀란드 내전에서 백군 중대장으로 싸웠다. 겨울전쟁 당시 대령으로 제9사단을 지휘, 수오무살미와 라테 도로에서 소련 제163·제44 사단을 모티 전술로 포위·궤멸시켜 오울루를 향한 소련의 핀란드 분단 계획을 무너뜨렸다. 이 전공으로 소장에 오르고 베스트셀러 『수오무살미 전투』를 썼으나, 모든 공을 자신에게 돌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계속전쟁과 라플란드 전쟁에서 제3군단장으로 북부 전선과 독일군 축출을 지휘했으며, 1944년 만네르헤임 십자훈장을 받고 54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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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8독일 제27프로이센 예거대대 훈련, 동부전선 참전
  • 1918핀란드 내전 백군 중대장, 탐페레·비푸리 전투
  • 1934–1939북포흐얀마 군관구 사령관, 오울루 시의원
  • 1939–1940제9사단장, 수오무살미·라테 도로에서 소련 2개 사단 격멸
  • 1941–1942제3군단장, 북부 핀란드-소련 전선 지휘
  • 1944카렐리야 지협 제3군단장, 부오크시 방어전
  • 1944–1945라플란드 전쟁 핀란드군 총괄 지휘관, 독일군 축출
  • 1944–1947제1사단장; 1947년 사망

라돌라 가이다

Radola Gajda

군단의 승리를 백군 정치로 확장한 장군

예카테린부르크 점령 직후, 가이다는 로마노프 일가가 며칠 전 살해된 바로 그 이파티예프 가옥에 자신의 사령부를 차렸다.

라돌라 가이다는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에서 부상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지휘관이자 전간기 체코슬로바키아의 장군·정치가였다. 1918년 군단의 동부집단을 이끌며 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철도선을 장악하고, 중립과 무장투쟁 사이의 논쟁에서 전투를 밀어붙였다. 이후 콜차크의 백군에 합류했으나 지휘권을 잃고, 귀국 뒤 군 참모총장 대행과 파시스트 국민공동체 지도자를 거쳤다. 그의 군사적 반볼셰비즘은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에서 파시즘으로 변형되었지만, 나치 점령기에는 저항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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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1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복무
  • 1915–1916몬테네그로군 장교
  • 1917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중대·연대 지휘관
  • 1918군단 동부집단 사령관, 이르쿠츠크·예카테린부르크 점령 지휘
  • 1918–1919콜차크 백군 시베리아군 사령관
  • 1922–1926체코슬로바키아군 사단장, 총참모장 대행
  • 1927–1939파시스트 국민공동체 지도자, 국회의원

프란시스코 프랑코

Francisco Franco

군부 반란을 승리로 이끌고 36년간 스페인을 지배한 총통

1939년 4월 1일의 마지막 전황 보고, 그가 직접 서명했다. 「오늘, 붉은 군대가 포로가 되고 무장이 해제됨으로써 국민군은 최후의 군사 목표에 도달했다. 전쟁은 끝났다.」 그리고 36년의 독재가 시작됐다.

모로코 식민지 전쟁에서 경력을 쌓아 서른셋에 유럽 최연소 장군이 된 직업군인. 1934년 아프리카군을 동원해 아스투리아스 광부 봉기를 진압하면서 우파에게 「질서의 회복자」로 각인됐고, 1936년 7월 군부 반란에 합류해 카나리아 제도에서 모로코로 날아가 독일·이탈리아 수송기의 힘을 빌려 아프리카군을 본토로 실어 날랐다. 그해 10월 반란 진영의 총사령관 겸 국가수반이 되었고, 1937년 통합령으로 팔랑헤와 카를로스파를 하나의 「국민운동」으로 묶어 개인 지배를 굳혔다. 1939년 승리 뒤에는 정치책임법을 앞세운 대규모 처형과 투옥이 이어져 수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2차대전에서는 비교전을 표방하면서 동부전선에 청색사단을 보냈고, 1953년 미국과의 마드리드 협정과 정교협약으로 전후의 고립에서 벗어났다. 1959년 안정화 계획 이후의 고도성장은 체제를 지탱한 또 하나의 기둥이었으며, 1969년 후안 카를로스를 후계자로 지명한 뒤 1975년 사망과 함께 체제도 해체 과정에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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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갈리시아 페롤의 해군 집안에서 출생
  • 1907–1910톨레도 보병사관학교 수학
  • 1912–1926모로코 식민지 전쟁 참전, 스페인 외인부대 부사령관을 거쳐 서른셋에 준장
  • 1928–1931사라고사 육군사관학교 교장, 제2공화국 수립과 함께 해임
  • 1934.10아프리카군을 동원해 아스투리아스 광부 봉기를 진압
  • 1935–1936참모총장에 올랐다가 인민전선 정부에서 카나리아 제도로 좌천
  • 1936.07.18–19군부 반란에 합류, 전세기 드래건래피드로 모로코로 이동해 아프리카군 공수를 조직
  • 1936.10.01부르고스에서 반란 진영의 총사령관 겸 국가수반으로 선포됨
  • 1937.04.19통합령으로 팔랑헤와 카를로스파를 단일 「국민운동」으로 통합
  • 1939.04.01전쟁 종료 선포, 정치책임법에 따른 대규모 처형·투옥 개시
  • 1940–1943앙다예에서 히틀러와 회담하고 비교전을 표방하면서 동부전선에 청색사단 파병
  • 1953–1955미국과 마드리드 협정, 교황청과 정교협약 체결; 1955년 유엔 가입으로 고립 탈출
  • 1959안정화 계획으로 자립경제 노선을 접고 고도성장기에 진입
  • 1969–1973후안 카를로스를 후계자로 지명, 1973년 총리 카레로 블랑코가 ETA에 암살됨
  • 1975.11.20마드리드에서 사망, 전몰자의 계곡에 안장됐다가 2019년 이장

하일레 셀라시에 1세

ቀዳማዊ ኃይለ ሥላሴ
에티오피아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에티오피아 에티오피아 1892–1975 ✕ 폐위 후 데르그에 피살

근대화와 반파시즘의 상징이었지만 토지의 질서는 건드리지 않은 마지막 황제

그는 1936년 국제연맹 연단에서 '신과 역사는 여러분의 심판을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솔로몬 왕조의 후예인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에티오피아를 근대화하고 국제연맹 연설로 반파시즘의 상징이 된 20세기의 군주였다. 섭정 시절부터 개혁을 이끌어 1931년 헌법과 노예제 폐지를 단행했고, 이탈리아로부터의 망명을 거쳐 1941년 영국군과 함께 귀환해 제정을 회복했다. 그러나 북부의 리스트·구울트 토지와 남부의 토지수여제를 그대로 둔 채 귀족·교회와 타협한 근대화는 농민의 소작 굴레를 풀지 못했고, 1972년 웰로 기근으로 민심이 이탈했다. 1974년 9월 데르그에 폐위된 그는 이듬해 3월 자신의 토지제도를 폐지한 국유화가 내려진 직후인 8월, 군부의 명령으로 목졸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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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섭정 겸 황태자, 사실상의 실권자
  • 1917레울-라스(공작) 서임
  • 1928네구스(왕) 즉위
  • 1930황제(만민의 왕) 대관
  • 1936–1941이탈리아 점령기에 영국으로 망명
  • 1941귀환, 제정 복원
  • 1963아프리카통일기구(OAU) 창설 주재, 초대 의장
  • 19749월 데르그에 폐위

에드워드 맬러리 알몬드

Edward Mallory Almond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 1892–1979 ○ 자연사

공세적 지휘와 인종주의가 얽힌 미군 장성

“중국인 세탁부대 따위가 우리를 막게 두지 마라.”

에드워드 알몬드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친 미국 육군 장성으로, 공격적 지휘관이라는 명성과 인종주의적 편견이 함께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흑인 병사들로 구성된 제92보병사단을 지휘했으며, 사단의 전투 성과를 병사들의 인종적 능력 탓으로 돌려 군의 흑인 전투부대 운용에 반대했다. 한국전쟁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총장으로서 인천상륙 뒤 창설된 X군단을 지휘했고, 인천과 서울 탈환에 기여했다. 그러나 동북부 진격에서 병력을 넓게 분산하고 중국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해 X군단의 위기를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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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버지니아 군사학교 졸업
  • 1918제4사단 제12기관총대대 지휘, 프랑스 전선 참전
  • 1942–1945제92보병사단 사단장, 이탈리아 전선 지휘
  • 1946–1949도쿄 극동사령부 인사참모, 이어 맥아더의 참모총장
  • 1950–1951X군단 사령관, 인천상륙과 동북부 작전 지휘
  • 1951–1953육군전쟁대학 교장, 1953년 퇴역

드라자 미하일로비치

Драгољуб Михаиловић

왕정 복고를 지향한 세르비아 민족주의 군 지휘관

1941년 티토와의 협상에서 그는 총봉기가 시기상조라며 거부했고, 두 저항운동의 결별은 곧 무장 충돌로 이어졌다.

드라자 미하일로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군 장교로서 제2차 세계대전 뒤 왕정과 세르비아 민족주의 질서를 회복하려 한 체트니크 운동을 이끌었다. 그는 1941년 라브나 고라에서 점령군에 맞선 조직을 세웠지만, 전면 봉기보다 전후 권력 장악을 준비하는 전략을 택하며 티토의 파르티잔과 충돌했다. 체트니크 일부와 그의 지휘망은 추축국 및 협력 세력과 협력했고, 이러한 선택은 다민족 유고슬라비아에서 운동의 기반을 약화시키며 연합국의 지지를 파르티잔으로 옮기는 데 영향을 주었다. 전후 그는 반역과 전쟁범죄로 처형되었고, 세르비아 대법원은 2015년 재판이 정치적으로 동기화되었다고 보아 판결을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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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3세르비아군 사관후보생, 발칸 전쟁 참전
  • 1914–1918세르비아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35–1936불가리아 주재 군사 attaché
  • 1936–1939체코슬로바키아 주재 군사 attaché, 참모 장교
  • 1941유고슬라비아 제2군 참모장 대리
  • 1941–1945유고슬라비아 국내군 체트니크 지휘관
  • 1946반역·전쟁범죄 재판, 처형

헤르만 괴링

Hermann Göring

나치 국가의 전쟁과 약탈을 조직한 공군 원수

1940년 8월, 런던과 민간 도시로 공습을 돌린 결정은 RAF에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헤르만 괴링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기 조종사에서 나치 독일의 핵심 권력자이자 공군 최고지휘관으로 변신했다. 그는 프로이센 경찰과 게슈타포 창설, 재무장과 전시경제 동원을 주도하며 독재와 침략전쟁의 국가기구를 세우는 데 기여했다. 1940년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그는 루프트바페의 역량을 과대평가했고, 공군기지와 전투기 방어망을 압박하던 작전을 영국 도시 폭격으로 돌리는 데 관여해 RAF가 회복할 시간을 주었다. 전쟁 뒤 뉘른베르크에서 주요 전쟁범죄자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집행 전날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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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제1전투비행단 지휘관
  • 1923돌격대 최고지휘관
  • 1932–1945제국의회 의장
  • 1933–1945프로이센주 총리
  • 1935–1945공군 최고사령관
  • 1936–19454개년 계획 전권위원
  • 1940–1945제국원수

로널드 스코비

Ronald MacKenzie Scobie
영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영국 영국계 1893–1969 ○ 자연사

아테네 전투를 지휘한 영국 장군

1944년 12월 1일, 스코비는 ELAS에 무장을 해제하라고 명령했다.

로널드 스코비는 제1·2차 세계대전에 복무한 영국 육군 장군으로, 토브루크와 몰타를 거쳐 제3군단을 지휘했다. 그는 1944년 해방 직후 그리스에서 영국의 군사 개입을 대표하는 지휘관이 되었다. 12월 1일 ELAS 무장해제 명령은 국민해방전선과 영국·그리스 정부 세력의 충돌을 촉발했고, 스코비는 아테네 전투에서 영국군 작전을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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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왕립공병대 장교, 서부전선 복무
  • 1920–1924울리치 왕립육군사관학교 생도중대 장교
  • 1939전쟁청 동원국 부국장
  • 1941제70보병사단장, 토브루크 요새 지휘
  • 1942몰타 주둔군 사령관
  • 1943–1944중동 총사령부 참모총장, 제3군단장
  • 1944–1946그리스 주둔 영국군 사령관
  • 1947육군 퇴역

앨런 덜레스

Allen Dulles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계 1893–1969 ○ 자연사

비밀전쟁을 제도화한 미국 정보 관료

1945년 북이탈리아 항복 협상은 전쟁을 앞당겼지만, 소련 대표와 이탈리아 파르티잔을 배제한 채 진행됐다.

앨런 덜레스는 미국의 외교관·변호사이자 정보기관 지도자로, 제2차 세계대전의 비밀협상과 냉전의 은밀한 개입을 하나의 경력으로 연결했다. OSS 베른 지국장으로 독일군의 북이탈리아 항복을 협상한 작전 선라이즈를 추진했지만, 그 과정은 소련과의 연합 전선 및 이탈리아 파르티잔의 전후 주권 문제를 낳았다. 뒤이어 CIA를 이끌며 이란과 과테말라의 정권 전복, 쿠바 피그스만 침공 같은 비밀공작을 감독해 미국 정보국가의 범위와 책임을 확대했다. 실패한 쿠바 침공 뒤 사임하면서도, 그의 유산은 정보 수집과 제국적 개입이 결합한 냉전 정치의 전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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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6미 국무부 외교관, 유럽·근동 담당
  • 1927–1944외교·군축 협상 법률고문, 외교협회 간사·회장
  • 1942–1945OSS 베른 지국장, 작전 선라이즈 협상 담당
  • 1945OSS 베를린 지국장
  • 1951–1953CIA 계획 담당 부국장, 중앙정보국 부국장
  • 1953–1961중앙정보국장
  • 1963–1964케네디 암살 진상조사 워런위원회 위원

콘스탄티노스 마니아다키스

Κωνσταντίνος Μανιαδάκης
그리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그리스 그리스계 1893–1972 ○ 자연사

독재정권의 공안기구 설계자

경찰은 1940년 가짜 KKE 지도부와 위조 《리조스파스티스》를 내세워 당원들을 혼란에 빠뜨리려 했다.

그리스 육군 장교 출신인 콘스탄티노스 마니아다키스는 이오아니스 메탁사스의 4·8월 독재에서 공안과 반공 탄압을 조직한 핵심 관료였다. 그는 아시팔리아의 정보망과 고문, 섬 강제추방을 결합해 그리스 공산당(KKE)의 공개 활동과 지도부를 무력화했다. 1940년에는 경찰이 통제하는 가짜 KKE 지도부와 위조된 《리조스파스티스》를 만들어 당원들을 혼란시키려 했다. 해방 뒤에도 반공주의를 정치 자산으로 삼아 의원이 되었고, 독재 시기의 책임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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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육군사관학교 졸업, 공병 소위
  • 1919–1922소아시아 원정 참전
  • 1923레오나르도풀로스·가르갈리디스 운동 참여로 전역
  • 1929중령으로 군을 사임
  • 1936–1941메탁사스 정권 공안차관, 국가보안 체계 조직
  • 1941코리시스·추데로스 정부의 공안차관 및 내무장관
  • 1941–1949아르헨티나 주재 그리스 공관 감독관
  • 1950–1964우익 정당 소속 국회의원

올리버 P. 스미스

Oliver Prince Smith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계 1893–1977 ○ 자연사

신중함으로 포위된 사단을 구한 해병 지휘관

“후퇴라니, 지옥에나 가라! 우리는 그저 다른 방향으로 공격하는 중이다.”

올리버 P. 스미스는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에서 복무한 미국 해병대 장군으로, 상륙작전 전문성과 신중한 판단으로 알려졌다. 제1해병사단장으로서 1950년 인천 상륙과 서울 진격을 지휘했으며, 이후 장진호에서 중국군에 포위된 병력을 조직적으로 돌파시켰다. 그는 맥아더와 앨먼드의 속도 중심 명령에 맞서 보급선과 철수로를 준비했고, 그 선택은 병력 보존과 작전 지속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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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미 해병대 소위 임관
  • 1934–1936프랑스 육군 고등전쟁학교 수학
  • 1944제5해병연대장, 뉴브리튼 작전 지휘
  • 1944–1945제1해병사단 부사단장, 펠렐리우·오키나와 작전
  • 1950–1951제1해병사단장, 인천·서울·장진호 작전
  • 1953–1955대서양 함대 해병대 사령관
  • 1955대장으로 퇴역

한스 폰 만토이펠-쇠게

Hans Freiherr von Manteuffel-Szoege
반혁명 세력 독일 쿠를란트 발트 독일계 1894–1919 ✕ 전사

리예파야 쿠데타를 이끌고 리가에서 전사한 발트 향토방위군 돌격대장

리가 공격에서 그는 소부대를 이끌고 다우가바 다리를 건너 수백 명의 포로가 갇힌 성채로 돌진했고, 이 돌격에서 쓰러졌으나 부대는 성채에 이르러 포로들을 풀어주었다.

쿠를란트의 발트 독일계 남작으로 1차 대전에서 바이에른군 창기병 장교로 싸웠고, 1919년 발트 향토방위군의 참모 장교 겸 돌격대장이 되었다. 4월 16일 리예파야에서 울마니스 정부를 뒤엎는 쿠데타를 이끌었고, 5월 22일 붉은 군대에서 리가를 탈환하는 공격 중 스물다섯 살에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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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법학 수학
  • 1914바이에른 제2창기병연대에 지원 입대, 서부·동부 전선 참전
  • 1915소위로 진급
  • 1917서부 전선 제18바이에른보병연대 중대장
  • 1919.01발트 향토방위군 돌격대장 취임
  • 1919.04리예파야에서 울마니스 정부 전복 쿠데타 지휘

파리를 넘겨 파괴 명령을 거부한 독일 장군

1944년 8월 25일 그는 파리 주둔군의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디트리히 폰 콜티츠는 제1차 세계대전부터 제2차 세계대전까지 복무한 독일 직업군인으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에서 나치 독일의 전쟁을 수행했다. 그는 1944년 8월 파리 군정관으로서 히틀러의 도시 파괴 명령을 실행하지 않고 프랑스군에 주둔군을 넘겨주어 파리 해방의 조건을 만들었다. 그러나 전후 영국의 도청 기록에는 크림반도에서 유대인 학살을 수행했다고 인정하는 발언이 남아 있어, 파리에서의 불복종이 그의 전쟁 책임을 지우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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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8왕립 작센군 제107보병연대 장교, 서부전선 복무
  • 1919–1939제국방위군 장교, 제16보병연대 제3대대 지휘관
  • 1939–1940제16공수보병연대 지휘관, 폴란드·네덜란드 전역
  • 1941–1942제16보병연대 지휘관, 크림·세바스토폴 전투
  • 1943제11기갑사단 및 제48기갑군단 지휘관, 동부전선
  • 1944제76기갑군단·제84군단 지휘관, 이탈리아·노르망디
  • 1944대파리 Wehrmacht 사령관 겸 파리 군정관, 8월 25일 항복
  • 1944–1947트렌트파크와 미국 포로수용소에 억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