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주의
Marxism
마르크스주의는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9세기 중엽에 세운 사회 이론과, 그것을 이어받은 사상·운동을 함께 가리키는 이름이다. 독일 고전철학과 영국 정치경제학, 프랑스 사회주의를 비판적으로 소화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과 계급투쟁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사적 유물론, 잉여가치론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분석, 노동계급이 정치권력을 쥐고 계급 없는 사회로 나아간다는 정치 강령을 하나로 묶었다. 1848년 『공산당 선언』과 1867년 『자본』이 대표 저작이다. 제2인터내셔널의 사회민주당들이 이를 강령의 토대로 삼았고, 20세기에는 레닌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 사회민주주의, 트로츠키주의, 좌익 공산주의, 서구 마르크스주의 같은 서로 대립하는 갈래들이 저마다 그 계승을 주장했다.
상세
이름의 내력
‘마르크스주의’는 처음에 어느 정당이나 집단이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니라 바깥에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1850년대에 빌헬름 바이틀링의 지지자들이 ‘마르크스파’라는 말을 썼고, 국제노동자협회(제1인터내셔널) 안에서 바쿠닌 지지자들이 상대편을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르면서 이 말이 퍼졌다. ‘마르크스주의’라는 낱말 자체는 1880년대부터 확인되며, 1882년에 나온 폴 브루스의 소책자 『마르크스주의와 인터내셔널』이 그 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자신들의 이론을 ‘과학적 사회주의’라고 불러 공상적 사회주의나 아나키즘과 구별하려 했다. 1870년대 말 쥘 게드와 폴 라파르그 주변의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하자, 엥겔스가 전한 바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엥겔스는 1888년판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에서 마르크스 없이는 이 이론이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을 것이므로 그의 이름을 지니는 것이 마땅하다고 덧붙였다. 뒤에 생긴 ‘변증법적 유물론’, ‘사적 유물론’, ‘과학적 공산주의’, ‘마르크스-레닌주의’ 같은 말도 ‘마르크스주의’라는 이름을 밀어내지 못했다.
이론의 골격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의 세 가지 원천과 세 가지 구성 부분」에서 그 원천을 독일 고전철학, 영국 정치경제학, 프랑스 공상적 사회주의로 정리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을 철학의 정점으로 보면서도 관념론을 버리고 유물론을 택했고, 이를 인간 사회의 인식으로 넓혀 사적 유물론을 세웠다. 사적 유물론에 따르면 생산력은 발전하다가 기존의 생산관계와 모순에 빠지고, 생산관계는 생산력의 ‘족쇄’가 된다. 사회는 원시공동체와 노예제, 봉건제, 자본주의를 거쳐 왔으며, 자본주의를 넘어선 뒤에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온다.
1867년에 나온 『자본』은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중요한 저작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스미스와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을 이어받되 노동력과 잉여가치를 독립된 범주로 세워, 자본이 임금노동자가 만든 잉여가치로 불어나는 메커니즘을 분석했다. 정치 이론의 중심에는 노동계급의 정치적 지배, 곧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거쳐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를 폐지한다는 구상이 있다. 계급 대립이 사라지면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불필요해져 ‘사멸’한다고 보았다. 1871년 파리 코뮌을 겪은 뒤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의 한 서문에서 “노동계급은 기성 국가기구를 그대로 장악해 자기 목적에 쓸 수 없다”는 것을 코뮌이 증명했다고 썼다.
공산주의자동맹에서 제2인터내셔널까지
1847년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바이틀링이 세운 의인동맹에 가입했고, 두 차례 대회를 거쳐 이 단체는 빌헬름 볼프도 함께한 개편 끝에 공산주의자동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마르크스가 지은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가 동맹의 표어가 되었다. 동맹의 위임으로 쓴 『공산당 선언』은 1848년 2월에 출간되었지만, 1848~1849년 혁명의 경과에는 아직 이렇다 할 영향을 주지 못했다. 혁명이 패배한 뒤 두 사람은 반자본주의 혁명이 가깝다는 기대를 고쳐, 선거권이 넓어지는 조건에서 노동자가 벌이는 일상의 투쟁을 더 중시하게 되었다. 동맹 시절부터 마르크스와 가까웠던 요제프 바이데마이어는 미국으로 건너가 언론인이자 마르크스주의 혁명가로 활동했다.
1864년 런던에서 국제노동자협회가 창립되었다. 1871년 파리 코뮌에서는 헝가리 출신의 레오 프랑켈이 노동·교환위원회를 이끌었고, 제1인터내셔널 러시아 지부를 세운 사람 가운데 하나인 옐리자베타 드미트리예프는 나탈리 르멜과 함께 여성동맹을 창설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생각을 하나의 일관된 학설로 정리하는 작업은 두 사람이 죽은 뒤 프란츠 메링, 카를 카우츠키, 안토니오 라브리올라, 게오르기 플레하노프의 저작에서 시작되었다. 마르크스주의가 처음으로 실천에 쓰인 곳은 19세기 노동운동,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이었다. 1891년 카우츠키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작성한 에르푸르트 강령은 당을 마르크스주의에 묶었고 유럽 사회주의 정당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1889년 창립된 제2인터내셔널에서는 1900년대 초까지 혁명적 관점이 우세했다. 러시아에서는 1883년 플레하노프와 베라 자술리치 등 옛 나로드니키가 제네바에서 첫 마르크스주의 조직인 노동해방단을 세웠고, 1880년대 후반부터 마르크스주의가 퍼지기 시작했다. 니콜라이 페도세예프는 러시아의 첫 마르크스주의 서클들을 이끌었고, 1890년대에는 표트르 스트루베와 미하일 투간-바라놉스키 등이 합법 출판물에서 러시아는 자본주의가 아니라 그 미발달로 고통받는다는 ‘합법적 마르크스주의’를 폈다.
개량과 혁명으로 갈라지다
1896년부터 독일 사회민주당 안에서 벌어진 수정주의 논쟁에서 베른슈타인은 자본주의를 사회혁명이 아니라 개혁으로 점차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는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의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과 카우츠키를 중심으로 한 ‘마르크스주의 중앙파’의 형성을 거치며 개량주의 날개와 혁명적 날개로 나뉘었다. 세르비아에서는 디미트리예 투초비치가 세르비아 사회민주당 창당에 참여해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이자 이론가로 활동했다.
1914년 8월 4일 독일 사회민주당 의원단이 전쟁공채에 찬성하자, 로자 룩셈부르크는 그날 밤 전쟁에 반대하는 당원들을 베를린 자택으로 불렀다. 프란츠 메링 등이 참석한 이 모임에 이어 레오 요기헤스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도 합류하면서 ‘인터나치오날레 그룹’이 생겼다. 이 그룹은 1916년부터 ‘스파르타쿠스 그룹’으로 불렸고, 1918년 11월 혁명 중에 스파르타쿠스동맹으로 재조직되어 1919년 1월 1일 독일 공산당 창당에 합류했다. 룩셈부르크는 1918년 가을 「러시아 혁명」에서 10월 혁명을 원칙적으로 환영하면서도 볼셰비키의 당 조직과 당내 독재를 비판했고, 이 글은 그가 죽은 지 3년 뒤인 1922년에야 출간되었다.
20세기의 갈래
10월 혁명 뒤 레닌의 제국주의론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사상과 함께 소련의 국가 이념이 되었다. 레닌 자신은 새 조류의 창시자가 아니라 마르크스주의의 옹호자로 자처했지만, 그가 죽은 뒤에는 러시아의 조건에 맞춘 마르크스주의라는 뜻으로 ‘레닌주의’라는 말이 일반화되었고,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론을 축으로 이를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다듬었다. 1945년 뒤 동유럽과 중국·쿠바·베트남 등지의 국가들이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따랐으며, 그것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기본 사상에서 어디까지 도출되는가는 마르크스주의 이론 안에서 가장 논쟁적인 문제의 하나로 꼽힌다. 트로츠키주의는 연속혁명론으로 일국사회주의론을 거부하며 마르크스와 레닌의 진정한 유산을 주장했다. 1920년대 초에는 루카치 죄르지, 카를 코르슈, 안토니오 그람시에게서 레닌의 마르크스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서구 마르크스주의가 나왔고, 같은 무렵 코민테른을 왼쪽에서 비판한 좌익 공산주의가 형성되었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점차 마르크스주의에서 멀어졌다. 서독 사회민주당은 1959년 고데스베르크 강령으로, 스페인 사회노동당은 1979년 펠리페 곤살레스를 대표로 뽑으면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강령적 충성을 거두었다. 1956년 소련 공산당 제20차 대회 이후 마오쩌둥과 엔베르 호자가 흐루쇼프의 노선을 수정주의로 규정하자 여러 나라의 공산당이 소련 지향파와 중국·알바니아 지향의 ‘반수정주의’파로 갈라졌고, 1960년대에는 학생운동과 맞물린 신좌파와 여러 형태의 신마르크스주의가 등장했다. 어느 국제 노선에도 속하지 않은 마르크스주의 조직도 있었다. 스페인의 호아킨 마우린은 노동자농민블록을 거쳐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을 이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