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1921

5·4 운동과 중국공산당의 창당

신문화운동의 「과학과 민주」는 어떻게 마르크스주의와 정당 창건으로 이어졌는가?

1915년 『신청년』이 연 신문화운동은 유교와 낡은 문체를 공격했고, 1919년 5월 4일 베르사유의 산둥 결정에 항의한 학생 시위가 전국의 파업으로 번졌다. 러시아 혁명의 충격 속에 리다자오·천두슈가 마르크스주의로 옮겨 갔고,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다.

공화국의 환멸과 《신청년》의 창간

1915년은 신해혁명이 남긴 공화국에 대한 환멸이 가장 깊어진 해였다. 1월 일본이 21개조 요구를 내밀었고, 반년 뒤에는 위안스카이가 황제가 되려 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일본 유학생 사이에서는 반대 운동이 일었고, 와세다대학에 있던 리다자오는 21개조에 항의하는 유학생들의 지도자가 되어 베이징 정부에 보내는 긴 격문을 썼다. 제2혁명이 실패한 뒤 일본으로 망명했던 천두슈는 정치에서 물러날 생각까지 했으나, 문제가 정치 제도가 아니라 그 밑의 문화와 가치에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1 2 3

1915년 9월 15일 천두슈는 상하이에서 《청년잡지》를 창간했다. 출판사 군익서사가 원고료와 편집비로 매달 200위안을 대기로 했다. 창간호의 「경고청년(敬告青年)」은 청년에게 노예적이지 말고 자주적이며, 보수적이지 말고 진보적이며, 물러서지 말고 진취적이며, 쇄국적이지 말고 세계적이며, 허식적이지 말고 실리적이며, 공상적이지 말고 과학적이 되라는 여섯 가지 요구를 내놓았다. 이듬해 9월 상하이 기독교청년회(YMCA)가 이름이 자기들 잡지와 비슷하다고 항의하자 잡지는 《신청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새로운」이라는 말은 잡지의 주장과 맞아떨어졌다. 4 3

잡지는 공자의 윤리가 전제정치의 토대라고 공격했다. 유교 윤리가 개인을 가족과 군주에 묶어 두는 한 공화국은 이름뿐이라는 것이었다. 「공자 선생」 대신 「덕 선생(德先生, 민주)」과 「새 선생(賽先生, 과학)」이 구호가 되었고, 천두슈는 이 두 선생만이 중국을 정치·도덕·학문·사상의 어둠에서 구할 수 있다고 썼다. 미신과 종교도 낙후의 원인으로 비판받았다. 위안스카이 정권이 공자 제례를 되살리고 유교의 가치를 법에 넣으려는 움직임이 이어지던 때였으므로, 반유교는 곧 복고에 맞서는 정치였다. 3 5 1 6 4

베이징대학과 문학혁명

1916년 프랑스에서 돌아온 차이위안페이는 이듬해 베이징대학 총장이 되었다. 신해혁명 뒤 첫 교육총장을 지냈고 무정부주의에 공감하던 그의 베이징대에는 천두슈·리다자오·후스부터 철학자 량수밍과 사학자 구제강까지 성향이 다른 학자들이 모였다. 1917년 1월 천두슈가 문과대학장으로 초빙되면서 《신청년》의 본거지도 베이징으로 옮겨 갔다. 1918년 1월부터 리다자오가 편집진에 합류했고, 2월에는 차이위안페이의 초빙으로 베이징대 도서관장이 되었다. 제6권은 천두슈·첸쉬안퉁·가오이한·후스·리다자오·선인모가 돌아가며 편집했으니, 안후이 출신 문인들의 지방 잡지가 베이징대 교수들의 전국 잡지로 바뀐 것이다. 7 4 2 1

미국에서 존 듀이에게 배우던 후스는 1917년 1월 《신청년》에 「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芻議)」를 실어 작가들이 지킬 여덟 가지 원칙을 내놓고 문어 대신 구어인 백화문으로 쓰자고 제안했다. 천두슈는 이를 「문학혁명」으로 밀어붙였다. 1918년 4월 후스는 「국어의 문학, 문학의 국어」를 내건 글로 수천 년 동안 학자들을 묶어 둔 문언은 죽은 언어이고 백화는 살아 있는 언어라고 주장했다. 「내 손으로 내 입의 말을 쓴다(我手寫我口)」는 구호 아래 백화문은 몇 년 안에 교과서와 신문의 문체가 되었고, 이 언어 혁명은 뒤에 대중 정당이 글을 모르던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길을 열었다. 8 4 5

1918년 5월 루쉰은 《신청년》에 「광인일기」를 발표했다. 고골의 같은 제목 소설에서 착상한 이 작품은 유교 경전이 사람들을 길들여 서로 잡아먹게 한다고 의심해 가는 한 선비의 기록으로, 낡은 사회를 식인의 역사로 고발했다. 루쉰은 이어 「공을기」와 「약」을 같은 잡지에 실었다. 오랫동안 첫 백화 소설로 꼽혔지만, 1917년 미국 유학생 계간지에 실린 천헝저의 「하루(一日)」가 한 해 먼저라는 점이 지금은 지적된다. 《신청년》은 정조 문제, 자유 연애와 혼인, 여성 교육도 다루었고, 「새로운 여성」의 이미지는 중매혼과 가부장제에 맞서는 운동의 상징이 되었다. 4 6 5

중국일본프랑스전쟁과 산둥 문제

산둥 문제의 뿌리는 1898년 독일이 자오저우만과 칭다오를 99년 동안 조차한 데 있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일본이 칭다오를 점령했고, 1915년 위안스카이는 21개조 가운데 13개조를 받아들여 일본의 독일 권익 승계를 사실상 인정했다. 영국과 프랑스도 일본에 이를 약속했다. 중국은 1917년 8월 14일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했고, 영국과 프랑스를 위해 일한 중국인 노동자는 약 14만 명에 이르렀다. 전승국이 된 중국은 산둥이 돌아오리라 기대했다. 9 10 5

그러나 베이징 정부 스스로 그 기대를 허물었다. 1917년 1월부터 1918년 9월까지 일본 데라우치 마사타케 내각은 밀사 니시하라 가메조를 통해 돤치루이에게 모두 1억 4,500만 엔에 이르는 여덟 차례의 차관을 주었고, 그 대가로 자오저우만 조차지와 산둥 철도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확인받았다. 1918년 돤 정부가 맺은 「중일 공동방적 군사협정」이 신문에 새어 나가자 학생들이 항의 시위에 나섰는데, 이것이 5·4의 예행연습이었다. 같은 해 말 돤은 산둥의 이양을 비밀리에 재확인하고 일본의 돈을 받았다. 11 5 9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루쩡샹이 이끄는 대표단이 갔다. 대표단은 외국의 치외법권 같은 특권 폐지, 21개조 취소, 산둥 반환을 요구했다. 젊은 외교관 구웨이쥔은 공자가 태어난 산둥을 내줄 수 없는 것은 기독교도가 예루살렘을 내줄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호소했고, 량치차오는 민간 대표단을 이끌고 가서 국내로 보고를 보냈다. 미국의 윌슨은 민족자결을 말했지만, 독일을 벌하는 데 몰두한 클레망소와 로이드 조지 앞에서 이를 밀어붙이지 못했다. 4월 30일 열강은 산둥의 독일 권익을 일본에 넘기기로 했고, 이것이 베르사유 조약 제156조가 되었다. 5 9 12 13 14

1919년 5월 4일과 6월의 상하이

소식이 전해지자 5월 3일 밤 베이징대 학생 천여 명이 법과 강당에 모여 이튿날 톈안먼에서 시위하기로 결의했다. 5월 4일 오전 베이징 13개 학교의 학생 대표가 모여 산둥 이양 반대, 베이징 학생연합회 결성, 오후 시위 등 다섯 가지를 결의했고, 오후 1시 무렵 3천여 명(영어권 서술은 4천 명 이상)의 학생이 톈안먼 앞에 모였다. 그들은 「밖으로 국권을 다투고 안으로 국적(國賊)을 몰아내자」 「21개조를 취소하라」 「칭다오를 돌려 달라」고 외쳤다. 같은 해 3월 조선의 3·1 운동은 중국 지식인들에게 제국주의에 맞선 대중 저항의 본보기로 받아들여졌다. 14 5 15

공사관 구역인 둥자오민샹으로 들어가지 못해 분노한 시위대는 오후 4시 반 무렵 자오자러우에 있는 교통총장 차오루린의 집으로 몰려갔다. 차오는 1915년 21개조 조약에 서명한 인물이었다. 학생들은 담을 넘어 들어가 집에 숨어 있던 주일 공사 장쭝샹을 심하게 때리고 집에 불을 질렀다. 이것이 「자오자러우 방화」다. 경찰과 보병 순찰대가 출동해 학생 32명을 붙잡았다. 리다자오의 도서관 사무실은 학생 운동의 기획 본부 노릇을 했고, 베이징대 학생 장궈타오는 이때 가장 이름난 학생 지도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4 16 2 17

5월 5일 베이징의 학생들이 동맹 휴학에 들어갔고, 6일에는 상하이 푸단대학에 학생들이 모였다. 대총통 쉬스창은 질서 회복을 명령했으나 운동은 전국으로 번졌다. 6월 3일 베이징 경찰이 거리 연설을 하던 학생을 천 명 가까이 잡아들이자, 이번에는 상하이의 상인과 노동자가 일어섰다. 상점이 문을 닫고 공장과 부두의 노동자들이 파업하면서 운동의 중심은 베이징에서 상하이로, 주력은 학생에서 노동자로 옮겨 갔다. 상하이의 총파업은 경제를 거의 마비시켰고, 상인들은 정부가 굽히지 않으면 세금을 내지 않겠다고 했다. 천두슈는 6월 11일 전단을 뿌리다 체포되어 83일 동안 갇혔다. 5 14 3

정부는 굴복했다. 차오루린·장쭝샹·루쭝위가 파면되자 상하이의 총파업은 6월 12일에 끝났다. 6월 28일 파리의 중국 대표단은 베르사유 조약 서명을 거부했다. 일본은 여전히 산둥을 쥐고 있었으므로 승리는 상징적이었지만, 노동자 계급이 처음으로 정치 무대에 나선 것이었다. 운동은 지방으로 퍼졌다. 창사에서는 마오쩌둥이 허수형·덩중샤 등과 후난 학생연합회를 만들고 7월 주간지 《상강평론》을 창간해 「민중의 대연합」을 외쳤으며, 윌슨을 「뜨거운 솥 위의 개미」라 비웃었다. 톈진에서는 저우언라이가 학생연합회 회보를 맡고 9월 각오사를 세웠다. 14 5 18 19

중국러시아「문제와 주의」: 마르크스주의의 수용

러시아 혁명을 가장 먼저 반긴 중국 지식인은 리다자오였다. 천두슈 등이 1917년 2월 혁명을 연합국의 승리로 환영할 때 그는 서구 민주주의를 의심했고, 1918년 7월 10월 혁명을 프랑스 혁명의 좁은 애국주의를 넘는 새 인도주의와 국제주의로 평가했다. 1918년 11월의 「볼셰비즘의 승리」에서는 러시아 혁명이 세계적 계급 전쟁의 시작이며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시대가 끝나 간다고 선언했다. 그해 말 그는 베이징대에 첫 마르크스주의 연구 모임을 만들었고, 그 모임이 열린 도서관 사무실은 「붉은 방」이라 불렸다. 1918~1919년 겨울 그 도서관의 조수가 마오쩌둥이었다. 2 18 20

1919년 2월 리다자오는 「청년과 농촌」 연작에서 중국은 농업 국가이고 노동 계급 대부분이 농민이므로 그들이 해방되지 않으면 민족 전체가 해방될 수 없다며, 도시의 청년 지식인에게 농촌으로 가라고 호소했다. 러시아 나로드니키를 본뜬 이 호소는 뒤에 농민을 혁명의 주력으로 보는 사고의 씨앗이 되었다. 5월 1일, 5·4 사흘 전에 나온 《신청년》의 마르크스주의 특집호는 리다자오가 편집했고, 그가 쓴 긴 글 「나의 마르크스주의관」은 당시 중국어로 나온 가장 체계적인 마르크스주의 소개였다. 그는 계급투쟁론에 끌렸지만 유물사관의 경제 결정론에는 유보를 두었다. 2 4

5·4 이후 운동은 갈라졌다. 1919년 7월 후스는 《매주평론》에 「문제를 더 많이 연구하고 주의를 덜 말하자」는 글을 실어, 어떤 주의도 가설일 뿐 교조가 될 수 없으며 사회 문제는 하나씩 점진적으로 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다자오는 정치 구조 전체의 「근본적 해결」 없이는 개별 문제도 풀 수 없고, 대중 운동에는 공동의 방향을 줄 「주의」가 필요하다고 맞섰다. 듀이의 실용주의를 따른 후스는 개혁의 길로, 리다자오와 천두슈는 혁명의 길로 갔다. 같은 잡지에서 출발한 두 사람이 정반대로 간 것은 이 시기의 성격을 압축한다. 2 8 1

러시아는 열강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1919년 7월 25일 소비에트 러시아의 외무인민위원 대리 레프 카라한은 제정 러시아가 중국에서 빼앗은 영토와 치외법권, 이권, 의화단 배상금의 러시아 몫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에 서명했다. 이 「카라한 선언」은 1920년 3월 말에서 4월 초에 중국에 알려져 열광적인 환영을 받았고, 베르사유의 열강과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다만 중국 정부가 받은 문본에는 중동 철도를 무상으로 돌려준다는 구절이 있었으나 소련은 뒤에 그것이 정식 문본이 아니라고 했고, 이 문제는 오랜 논쟁거리가 되었다. 같은 해 천두슈는 마르크스주의로 돌아섰고, 상하이에서 그를 만난 마오쩌둥은 깊은 인상을 받았다. 21 22 3 18

중국러시아보이틴스키와 공산주의 소조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는 시베리아에 코민테른 극동국을 세웠고, 이곳에서 스물일곱 살의 그리고리 보이틴스키를 중국에 보냈다. 미국과 캐나다에서 노동자로 살며 미국 사회당에 들었다가 1918년 귀국해 볼셰비키가 된 그는 1920년 4월 기자로 위장해 베이징에 와서 리다자오를 만났고, 리다자오의 소개로 상하이의 천두슈를 만났다. 통역과 길잡이는 양밍자이가 맡았다. 보이틴스키 일행은 러시아인들이 상하이에서 내던 신문사에 코민테른 동아시아 서기처를 차렸고, 『공산당 선언』 같은 선전물의 번역과 보급에 돈을 댔다. 23 2

1920년 6월 천두슈는 자기 집에서 당 조직을 꾸리기로 했고, 8월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가 정식으로 생겼다. 공식 이름은 그냥 「공산당」이었고 천두슈가 서기, 리한쥔·리다·천왕다오·사오리쯔·선옌빙·저우포하이·양밍자이 등이 성원이었다. 국민당의 다이지타오도 처음에 함께했다가 물러났다. 9월 1일호부터 《신청년》은 공공연히 공산주의를 지지했고, 11월에는 비밀 기관지 《공산당》 월간이 나왔고, 프롤레타리아 정당을 조직해 자본가와 싸우고 정권을 잡는다는 목표를 밝힌 첫 선언문도 작성되었다. 소조는 노동자 주간지 《노동계》를 내고 공장 지대에 노동자 야학을 열었으며, 8월에는 사회주의청년단을, 이어 외국어학사를 세워 류사오치·런비스 같은 청년들을 모스크바 동방대학으로 보냈다. 24 4 25 23

1920년 9~10월에는 베이징에서 리다자오가 덩중샤·장궈타오 등과 같은 조직을 세웠다. 「남쪽의 천두슈, 북쪽의 리다자오(南陳北李)」라는 말이 이때 생겼다. 창사에서는 마오쩌둥과 허수형이, 우한에서는 둥비우와 천탄추가, 지난에서는 왕진메이와 덩언밍이, 광저우에서도 소조가 생겼고, 일본 유학생과 프랑스의 근공검학생 사이에도 모임이 있었다. 프랑스에는 1919년 이후 수천 명의 학생 노동자가 건너갔는데, 차이허썬의 편지는 마오쩌둥이 볼셰비키 노선으로 기우는 데 큰 역할을 했고 저우언라이·리리싼·덩샤오핑도 그곳에서 정치에 눈떴다. 취추바이는 베이징 《신보》의 특파원으로 모스크바에 가서 혁명 뒤의 러시아를 전했다. 2 26 27 28 29 30 31

보이틴스키의 역할을 얼마나 크게 볼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그를 공산당 창건의 「설계자」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중국공산당 당사 연구기관은 리다자오와 천두슈가 그가 오기 전부터 당 창건을 논의했다고 본다. 이시카와 요시히로는 보이틴스키가 오기 전에 두 사람이 전국 정당 결성을 논의했다고 확언할 수 없다고 했고, 이츠하크 시초르는 당 창건의 생각은 이미 떠돌고 있었으나 실제 행동은 그의 도착 뒤에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 이시카와의 말대로 이 문제는 공산당이 소련의 「혁명 수출」의 산물이냐 중국인 자신의 혁명 운동의 산물이냐는 질문과 닿아 있다. 보이틴스키 자신은 1921년 초 중국을 떠났다. 23

1921년 7월: 제1차 전국대표대회

1921년 6월 초 이르쿠츠크의 코민테른 극동국이 보낸 블라디미르 네이만(가명 니콜스키)과 레닌이 보낸 네덜란드인 헹크 스네블릿(가명 마링)이 상하이에 도착했다. 마링은 인도네시아에서 공산당 결성을 이끈 경험이 있었고, 1920년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서 집행위원으로 뽑혔다. 두 사람은 상하이 소조를 이끌던 리다에게 전국 대회를 열자고 재촉했다. 리다와 리한쥔은 각지 소조에 편지를 보내 두 명씩 대표를 보내라고 했다. 대회의 비용과 창당 첫 몇 달의 활동비는 코민테른이 댔다. 27 32 33 24

7월 23일 프랑스 조계의 한 스쿠먼(石庫門) 주택에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가 열렸다. 대표는 13명이었고 당원은 57명이었다. 상하이의 리다·리한쥔, 베이징의 장궈타오·류런징, 창사의 마오쩌둥·허수형, 우한의 둥비우·천탄추, 지난의 왕진메이·덩언밍, 광저우의 천궁보, 일본 유학생 대표 저우포하이, 그리고 천두슈의 개인 대리인 바오후이썽이다. 창당을 이끈 천두슈와 리다자오는 둘 다 오지 못했다. 장궈타오가 회의를 주재했고, 니콜스키는 적색 노동조합 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의 목표를 연설했다. 7월 30일 밤 프랑스 조계 경찰이 회의장을 수색하자 대표들은 저장성 자싱으로 옮겨 남호에 빌린 유람선 위에서 대회를 마쳤다. 27 17 32 20

대회는 「중국공산당 제1차 강령」을 채택했다. 강령은 당의 이름을 중국공산당으로 하고 자본가 계급의 정권을 타도하며 자본주의와 사유재산제를 없애고 코민테른에 가입한다는 목표를 밝혔다. 대회는 천두슈를 결석한 채로 서기로, 장궈타오를 조직, 리다를 선전 책임자로 뽑았다. 이 강령의 원문은 오래 전해지지 않다가 1957년 소련이 넘겨준 코민테른 문서 가운데 러시아어 번역으로 확인되었다. 대회 날짜도 오래 불분명해 개막일이 7월 23일로 공식 확정된 것은 1981년이었고, 폐막일은 지금도 7월 31일부터 8월 5일까지 여섯 가지 설이 있다. 공산당은 7월 1일을 창당 기념일로 지켜 왔다. 27 34 20

13명의 대표 가운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선포식에 선 사람은 마오쩌둥과 둥비우 둘뿐이었다. 일곱 명은 당을 떠났고 한 명은 병사했으며 세 명은 혁명 중에 죽었다. 당을 떠난 사람들 가운데 천궁보와 저우포하이는 뒤에 국민당을 거쳐 난징의 친일 괴뢰 정권의 요인이 되었고, 장궈타오는 1938년 당을 떠났다. 창당의 핵심이던 리다자오는 1927년 장쭤린에게 처형되었고, 천두슈는 1929년 당에서 쫓겨나 트로츠키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50여 명에서 시작한 당이 어떤 길을 걸었는지가 이 명단에 압축되어 있다. 27 35 2 20 17 3 36 37

노동운동과 「2·7」의 교훈

창당 직후인 1921년 8월 11일 당은 상하이에 중국 노동조합 서기부를 세웠다. 첫 노동운동 지도 기구로, 장궈타오가 주임을 맡고 기관지 《노동주보》를 냈다. 서기부는 10월 영미연초공사 노동자 9천여 명의 파업을 이끌었고 베이징(덩중샤)·우한·창사(마오쩌둥)·광저우·지난에 분부를 두었다. 1922년 5월 1일에는 광저우에서 제1차 전국노동대회를 열어 덩중샤를 서기로 뽑았다. 1922년 1월부터 1923년 2월까지 13개월 동안 전국에서 크고 작은 파업이 100차례 넘게 일어나 30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 공산당은 이를 「첫 노동운동 고조」라 부른다. 38 17 26 39

그 첫 큰 싸움인 1922년 1월 12일의 홍콩 선원 파업은 공산당이 이끈 것이 아니었다. 지도한 중화해원공업연합총회는 쑨원이 이름을 지어 준 단체로 회장과 부회장이 모두 국민당원이었고, 지도자 쑤자오정도 동맹회 출신으로 1925년에야 공산당에 들어갔다. 파업 참가자는 3만 명을 넘었고, 홍콩 정부가 노조를 불법화하고 3월 3일 걸어서 광저우로 돌아가던 노동자들에게 발포한 사태를 거쳐, 52일 만에 선주들이 15~30% 인상에 굴복했다. 서기부는 이를 지원했고, 그 시기 광둥에 있던 마링은 국민당이 노동운동을 이끄는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40 41 42 43

공산당이 직접 이끈 승리는 1922년 9월 장시 안위안의 탄광과 철도에서 나왔다. 창당 직후 리리싼과 마오쩌둥이 안위안을 찾았고 리리싼이 남아 당 지부와 노동자 구락부를 세웠다. 광산 당국이 밀린 임금을 주지 않고 구락부를 해산하려 하자, 9월 12일 밤부터 리리싼을 총지휘, 류사오치를 구락부 전권 대표로 약 1만 7천 명의 광부와 철도 노동자가 17개 조항의 요구를 내걸고 파업했다. 「이전에는 소와 말이었으나 이제는 사람이 되겠다」는 구호 아래 버틴 끝에 18일 당국은 13개 조항의 협약에 서명했다. 안위안 구락부는 1925년 무력으로 해산되었지만, 그 노동자들은 뒤에 북벌군과 추수 봉기에 들어갔다. 44 30

1923년 2월 징한 철도(베이징~한커우) 노동자들은 정저우에서 철도 총공회를 세우려 했다. 철도 국장의 요청을 받은 직례파 군벌 우페이푸가 대회를 금지하자, 총공회는 2월 4일 전 노선 파업에 들어갔다. 2월 7일 우페이푸와 차오쿤의 군대가 한커우 장안 등지에서 노동자들을 습격해 장안 분회 위원장 린샹첸과 총공회 법률 고문 스양을 죽였다. 죽은 사람은 35명(우페이푸 쪽 기록을 따른 영어권 서술)에서 52명(중국 쪽 「52열사」)으로 전하고, 백여 명이 다치고 수천 명이 쫓겨나거나 피신했다. 노동자들은 9일 복직했다. 이 「2·7 참사」는 북중국의 노동 기반을 무너뜨렸고, 노동자만의 힘으로는 군벌을 이길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다. 리다자오는 이 뒤로 농민에게 눈을 돌렸다. 39 45 2

중국러시아국공합작으로 가는 길

1922년 7월 상하이 공동조계에서 열린 제2차 대회는 당원 195명을 대표한 12명이 참석해 첫 당 규약을 채택했다. 대회는 코민테른의 「21개 가입 조건」을 받아들여 당을 코민테른의 중국 지부로 만들었고, 「민주주의적 연합전선」 결의로 국민당 등 민주파와 손잡을 수 있다고 했으나 당의 독립성을 강조했다. 천두슈가 총서기로, 장궈타오·차이허썬·덩중샤·가오쥔위가 중앙집행위원으로 뽑혔고, 차이허썬이 편집하는 첫 공개 중앙 기관지 《향도》 주보를 내기로 했다. 상샹징위는 당의 여성운동을 맡았다. 46 29

코민테른의 노선은 이미 1920년 제2차 대회에서 정해져 있었다. 레닌은 민족·식민지 문제 위원회 보고에서, 후진국의 민족운동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운동일 수밖에 없으며 공산주의자는 이를 「민족혁명 운동」이라 부르고 지지해야 한다고 했다. 이 대회의 식민지 위원회에 참여한 마링은 1921년 12월 구이린에서 쑨원을 만났고, 국민당이 이끈 홍콩 선원 파업을 본 뒤 공산당원이 국민당에 들어가야 한다고 확신했다. 1922년 8월 29~30일 항저우 시후에서 열린 특별회의에서 그는 공산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라는 코민테른의 뜻을 전했다. 천두슈·리다자오·장궈타오·차이허썬·가오쥔위는 모두 반대했으나, 마링이 코민테른의 규율에 따를 것이냐고 묻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천두슈는 회고했다. 통역은 장타이레이였다. 47 43 33

합작을 가장 열렬히 지지한 사람은 리다자오였다. 그는 1922년 가을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들어간 첫 공산당원이 되었다. 1923년 쑨원은 소련 대표 아돌프 이오페와 공동 선언을 내 중국에는 소비에트 제도가 맞지 않는다는 데 합의하는 대신 소련의 원조를 얻었다. 1923년 6월 광저우에서 열린 제3차 대회에는 당원 420명을 대표해 약 40명이 모였고, 공산당원이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가입하되 당 조직은 유지하고 넓힌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마오쩌둥은 이 대회에서 농민 문제를 강조했고 중앙국 비서가 되었다. 대회를 마친 대표들은 황화강 열사묘 앞에서 「인터내셔널가」를 불렀다. 국공합작의 이후 경과는 「제1차 국공합작」 사건이 다룬다. 2 48 49

평가: 5·4의 두 계보

5·4는 이후 거의 모든 중국 정치 세력이 자기 것이라 주장하는 사건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1939년 5·4 20주년에 쓴 글에서 5·4 운동이 제국주의와 봉건주의에 반대하는 중국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새로운 단계」였고, 노동자 계급·학생 대중·신흥 민족부르주아지로 이루어진 강력한 진영이 나타났다는 점에서 신해혁명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갔다고 썼다. 「신민주주의론」(1940)은 5·4에서 공산당 창당까지를 신민주주의 혁명의 첫 시기로 놓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5월 4일을 청년절로, 타이완은 문예절로 기념한다. 국민당의 장제스는 5·4의 반전통주의가 청년의 도덕을 망쳤다고 비판했고, 국민당 정권은 신생활 운동으로 유교를 되살렸다. 50 51 5

역사가들의 평가도 갈린다. 정통 해석은 신문화운동을 봉건 사상과의 혁명적 단절이자 공산당 지도자들의 못자리로 보았다. 그러나 근래 중국과 서구의 역사가들은 그 변화가 청 말 개혁 이래 몇 세대에 걸친 뿌리를 가졌고 전통과의 날카로운 단절이 아니었다고 본다. 또 운동이 자유주의·무정부주의·실용주의·마르크스주의가 공존한 열린 공간이었으며, 1920년대 중반의 반제 민족주의와 정당 정치가 그 다원성을 닫았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왕궁우는 5·4가 뒤에 문화대혁명의 선구로 여겨지기도 했다고 지적했고, 벤저민 슈워츠는 민족주의가 별개의 이념이라기보다 5·4 세대 모두의 「공통된 기질」이었다고 했다. 1 5

수치도 출처마다 다르다. 5월 4일 시위 학생은 3천여 명(중국 쪽 서술)에서 4천 명 이상(영어권 서술)으로, 6월 3일의 체포자는 천 명 가까이로 전한다. 창당 대회 무렵의 당원은 57명이 통설이지만 「50여 명」으로도 쓰인다. 2·7 참사의 사망자는 35명에서 52명이다. 대회 날짜도 7월 23일 개막인데 공산당은 7월 1일을 기념한다. 이런 차이는 5·4와 창당이 모두 뒷날의 정치 속에서 다시 쓰인 사건이라는 점을 보여 준다. 1989년 5월 4일에도 베이징의 학생 약 10만 명이 5·4 70주년을 기념해 거리로 나섰다. 14 5 27 34 39 45 52

사회주의 운동에 5·4가 남긴 것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백화문과 「과학과 민주」는 지식층의 공통 언어가 되었고 대중에게 다가갈 수단을 주었다. 둘째, 베르사유의 배신은 서구 자유민주주의의 매력을 크게 떨어뜨리고 러시아 혁명을 새로운 본보기로 만들었다. 폴 프렌치의 말대로 베르사유 조약의 중국에서의 유일한 승자는 공산주의였다. 셋째, 6월의 상하이와 2·7은 노동자 계급이 정치 무대에 나섰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그 힘만으로는 군벌과 제국주의를 이길 수 없다는 것도 보여 주었다. 리다자오가 농민에게서, 코민테른이 국민당과의 합작에서 답을 찾은 것은 이 경험에서 나왔다. 5 2 39

결과

백화문과 「과학·민주」는 지식층의 공통 언어가 되었고, 운동은 자유주의(후스)와 마르크스주의(천두슈·리다자오)로 갈라졌다. 창당 당시 50여 명이던 공산당은 코민테른의 「당내 합작」 지시에 따라 국민당과 손잡는 길로 들어섰다.

연표와 지도

베이징 톈안먼 베르사유 칭다오 상하이 프랑스 조계 자싱 남호 한커우 장안 창사 안위안 광저우 7 베르사유 3 베이징대학 5 베이징대학 6 베이징대학 8 베이징대학 9 톈안먼 1 베이징 4 베이징 10 베이징 13 보이틴스키 · 베이징 → 상하이 11 상하이 14 상하이 16 상하이 18 상하이 2 상하이 15 상하이 프랑스 조계 21 한커우 장안 19 항저우 시후 12 창사 20 안위안 22 광저우 17 홍콩 보이틴스키13
  1. 11915.01.18중국일본
    21개조 요구

    일본이 위안스카이에게 21개조 요구를 내밀었다. 위안이 대부분을 받아들이자 일본 유학생과 국내 지식인의 반일 여론이 끓어올랐다.

  2. 21915.09중국
    《청년잡지》(《신청년》) 창간

    천두슈가 상하이에서 창간해 「과학과 민주」를 내걸고 유교 윤리를 공격했다.

  3. 1917.01중국
    후스의 「문학개량추의」

    백화문으로 글을 쓰자는 제안이 『신청년』에 실려 문학혁명이 시작되었다.

  4. 31917.01중국
    천두슈의 베이징대 부임

    차이위안페이 총장의 초빙으로 천두슈가 문과대학장이 되었고 《신청년》도 베이징으로 옮겨 왔다.

  5. 41917.08.14중국
    중국의 대독 선전포고

    돤치루이 정부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선전포고했다. 영국·프랑스를 위해 일한 중국인 노동자는 약 14만 명에 이르렀다.

  6. 1918.05중국
    루쉰의 「광인일기」

    백화 단편소설의 이정표가 된 작품이 「식인」의 예교를 고발했다.

  7. 51918.11중국
    리다자오의 「볼셰비즘의 승리」

    베이징대 도서관장 리다자오가 러시아 혁명을 세계사의 새 시대로 환영했다.

  8. 61919.02중국
    리다자오의 「청년과 농촌」

    리다자오가 농민이 해방되지 않으면 민족도 해방될 수 없다며 청년 지식인에게 농촌으로 가라고 호소했다.

  9. 71919.04.30중국일본
    베르사유의 산둥 결정

    강화회의가 독일의 산둥 권익을 중국이 아니라 일본에 넘기기로 했다.

  10. 81919.05.01중국
    《신청년》 마르크스주의 특집호

    리다자오가 편집한 특집호에 그의 「나의 마르크스주의관」이 실렸다. 당시 가장 체계적인 마르크스주의 소개였다.

  11. 91919.05.04중국
    톈안먼의 학생 시위

    13개 대학 3천여 명이 시위했고 친일 관료 차오루린의 집이 불탔다. 32명이 체포되었다.

  12. 101919.06.03중국
    6·3 대체포

    베이징 경찰이 거리 연설을 하던 학생을 천 명 가까이 잡아들였다. 이를 계기로 상하이의 상인과 노동자가 일어섰다.

  13. 111919.06.05중국
    상하이 총파업

    노동자·상인이 파업과 철시에 나서면서 운동은 학생 시위를 넘어섰다. 정부는 관료 3명을 파면하고 조약 서명을 거부했다.

  14. 1919.06.28중국프랑스
    베르사유 조약 서명 거부

    여론의 압력 속에 파리의 중국 대표단이 베르사유 조약에 서명하지 않았다.

  15. 121919.07중국
    「문제와 주의」 논쟁과 《상강평론》

    후스가 《매주평론》에서 「문제를 더 연구하고 주의를 덜 말하자」고 하자 리다자오가 반박했다. 같은 달 마오쩌둥은 창사에서 《상강평론》을 창간했다.

  16. 1919.07.25중국러시아
    카라한 선언

    소비에트 러시아의 카라한이 제정 러시아가 중국에서 얻은 특권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1920년 봄 중국에 알려져 큰 환영을 받았다.

  17. 131920.04중국
    보이틴스키의 방문

    코민테른 극동국의 보이틴스키가 리다자오·천두슈를 만나 공산주의 소조 결성을 도왔다.

  18. 141920.08중국
    상하이 공산주의 소조 결성

    보이틴스키의 도움으로 천두슈를 서기로 한 「공산당」이 생겼고, 같은 달 사회주의청년단도 세워졌다.

  19. 151921.07.23중국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13명의 대표와 마링·니콜스키가 모였고, 경찰 수색을 피해 자싱 남호의 배 위에서 폐회했다.

  20. 161921.08.11중국
    노동조합 서기부 설립

    창당 직후 당이 상하이에 첫 노동운동 지도 기구를 세웠다. 장궈타오가 주임을 맡았다.

  21. 171922.01.12중국
    홍콩 선원 파업

    국민당 계열의 해원공회가 이끈 파업에 3만 명 넘게 참가했고, 52일 만에 선주들이 임금 인상에 굴복했다.

  22. 181922.07.16중국
    제2차 전국대표대회

    당원 195명을 대표한 12명이 첫 당 규약을 채택하고 코민테른 가입 조건을 받아들였다.

  23. 191922.08.29중국
    시후 회의

    마링이 공산당원의 개인 자격 국민당 가입을 요구했고, 반대하던 중앙위원들이 코민테른 규율에 따라 받아들였다.

  24. 201922.09.14중국
    안위안 탄광 파업

    리리싼·류사오치가 이끈 약 1만 7천 명의 광부와 철도 노동자가 파업해 나흘 만에 협약을 얻어 냈다.

  25. 211923.02.07중국
    2·7 참사

    우페이푸의 군대가 징한 철도 파업 노동자를 습격해 린샹첸·스양 등 35~52명을 죽였다.

  26. 221923.06.12중국
    제3차 전국대표대회

    당원 420명을 대표한 약 40명이 공산당원의 개인 자격 국민당 가입을 결의했다.

관련 인물 36명

참여24

백화문 운동의 제창자후스1891–1962

「문학개량추의」로 문학혁명을 열었고 「문제와 주의」 논쟁에서 자유주의 쪽에 섰다.

「광인일기」의 작가루쉰1881–1936

최초의 백화 단편으로 신문화운동의 문학을 대표했다.

창사 대표로 창당 대회 참석마오쩌둥1893–1976

베이징대 도서관 조수로 리다자오 밑에서 일했고 1921년 대회에 참석했다.

5·4 학생 지도자 · 창당 대회 의장장궈타오1897–1979

베이징대 학생회를 이끌었고 1921년 제1차 대회를 주재했다.

코민테른 극동국 대표그리고리 보이틴스키1893–1953

1920년 리다자오·천두슈를 만나 공산주의 소조 결성을 도왔다.

「마링」, 창당 대회의 코민테른 대표헨크 스네블릿1883–1942

제1차 대회에 참석했고 1922년 국민당과의 당내 합작을 지시했다.

모스크바 특파원 출신의 초기 이론가취추바이1899–1935

1920~1922년 모스크바에서 러시아 혁명을 취재하고 돌아와 당의 이론가가 되었다.

톈진 각오사와 파리 지부저우언라이1898–1976

톈진에서 5·4 시위로 투옥되었고 프랑스에서 유럽 지부를 조직했다.

베이징대학 총장차이위안페이1868–1940

천두슈·리다자오·후스를 베이징대에 불러 신문화운동의 거점을 만들었고, 5·4 때 학생 투옥에 항의해 사임했다.

제1차 대회를 소집한 상하이 대표 · 선전 책임자리다1890–1966

마링과 니콜스키의 요청으로 각지 소조를 불러 제1차 대회를 열었고 선전 책임자로 뽑혔으며, 제2차 대회를 주재했다.

제1차 대회 우한 대표둥비우1886–1975

우한 공산주의 조직을 세우고 천탄추와 함께 제1차 대회에 참석했다. 1949년 선포식에도 선 두 대표 가운데 하나다.

베이징 소조 성원 · 노동운동 지도자덩중샤1894–1933

5·4에 참가하고 베이징 공산주의 소조에 들었으며, 노동조합 서기부 베이징 분부와 1922년 전국노동대회를 이끌었다.

신민학회의 이론가 · 《향도》 편집인차이허썬1895–1931

프랑스에서 보낸 편지로 마오쩌둥을 볼셰비키 노선으로 이끌었고, 제2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이 되어 《향도》를 편집했다.

파리 강화회의의 중국 대표구웨이쥔1888–1985

산둥은 중국에 예루살렘과 같다며 반환을 요구했으나 이루지 못했다.

「니콜스키」, 창당 대회의 코민테른 대표블라디미르 네이만1889–1938

마링과 함께 리다에게 대회 소집을 재촉했고 제1차 대회에서 프로핀테른의 목표를 연설했다.

파리 강화회의의 민간 대표단장량치차오1873–1929

민간 대표단을 이끌고 파리에 가서 산둥 결정을 국내에 알리는 보고를 보냈다.

안위안 노동자 구락부 전권 대표류사오치1898–1969

상하이 외국어학사를 거쳐 모스크바에서 배운 뒤 1922년 안위안 파업에서 구락부 대표로 협상했다.

모스크바에 파견된 청년단원런비스1904–1950

상하이 소조의 외국어학사를 거쳐 모스크바 동방대학으로 파견되었다.

프랑스 근공검학생덩샤오핑1904–1997

근공검학 운동으로 프랑스에 건너간 수천 명의 학생 노동자 가운데 하나였다.

코민테른 민족·식민지 테제(1920)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

후진국의 민족운동을 「민족혁명 운동」으로 지지하자는 그의 보고가 코민테른의 국공합작 노선의 바탕이 되었다.

쑨원-이오페 선언(1923)아돌프 이오페1883–1927

쑨원과 공동 선언을 내 소련의 국민당 원조를 열었다. 1922년에는 카라한 선언이 법적 효력이 없다고 했다.

공산당원의 국민당 가입을 받아들인 국민당 지도자쑨원1866–1925

1921년 구이린에서 마링을 만났고, 1922년 공산당원의 개인 자격 가입을 허락했다.

민족자결을 말했으나 산둥 결정을 받아들인 미국 대통령우드로 윌슨1856–1924

파리에서 중국의 요구를 지지했으나 영국·프랑스의 반대 앞에 일본의 산둥 승계를 받아들였고, 중국 지식인들은 이를 배신으로 여겼다.

시후 회의의 통역장타이레이1898–1927

마링의 통역으로 구이린의 쑨원 방문과 1922년 시후 회의에 함께했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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