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05–1922.10

시베리아와 극동의 내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에서 블라디보스토크 입성까지, 우랄 동쪽의 내전은 왜 4년 넘게 이어졌고 일본의 출병과 극동공화국은 어떤 역할을 했나?

1918년 5월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반란으로 시베리아의 소비에트 권력이 무너진 뒤, 우랄 동쪽은 옴스크 정부와 콜차크, 아타만 세묘노프·칼미코프의 테러, 일본·미국 등 연합국의 출병, 그리고 마을마다 일어난 파르티잔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콜차크가 몰락한 뒤에도 일본군이 남은 극동에서는 완충국 극동공화국이 세워졌고, 내전은 1922년 10월 블라디보스토크 입성으로 끝났다.

러시아1918년 초: 첸트로시비리와 극동 인민위원회의

10월 혁명 무렵 시베리아의 소비에트들은 이르쿠츠크에서 제1차 전시베리아 소비에트 대회를 열고, 이 대회에서 시베리아와 극동 전역의 소비에트를 이끌 중앙집행위원회, 곧 첸트로시비리를 세웠다. 대회에는 튜멘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70개 소비에트를 대표하는 대의원 약 185명이 모였고, 첸트로시비리 의장은 볼셰비키 보리스 슈먀츠키가 맡았다. 1917년 12월 이르쿠츠크에서는 사관생도와 카자크, 장교, 학생들이 소비에트에 맞서 봉기했다. 크라스노야르스크에서 온 적위대를 이끈 세르게이 라조는 시가전 끝에 한때 포로가 되었지만, 12월 29일 휴전 뒤 며칠 만에 이르쿠츠크의 소비에트 권력이 회복되었다. 1918년 2월 16일 이르쿠츠크에서 열린 제2차 전시베리아 소비에트 대회에서는 대의원 202명 가운데 볼셰비키가 123명, 좌파 사회혁명당이 53명이었고, 우파 사회혁명당은 7명으로 줄었다. 대회는 시베리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이름으로, 소브나르콤이 독일과 맺을 강화에 구속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첸트로시비리 스스로 인정했듯 각지 소비에트는 제각기 움직이며 상급 기관의 지시를 자주 어겼다. 1 2

극동에서는 1917년 7월 말 미국에서 돌아와 볼셰비키에 합류한 알렉산드르 크라스노쇼코프가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이끌었다. 그는 하바롭스크에 세워진 극동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었고, 1918년 여름 약 넉 달 동안 극동 전역을 장악했다. 하바롭스크 소비에트의 외무 인민위원은 조선인 볼셰비키 알렉산드라 킴이었다. 그녀는 1918년 봄 이동휘 등과 함께 한인사회당을 세우고 조선인 적위대를 조직했다. 그러나 이 권력은 얇았다. 1918년 1월 일본 전함들이 블라디보스토크항에 들어왔고, 자바이칼에서는 아타만 그리고리 세묘노프가 만주 쪽에서 국경을 넘나들며 공격해 왔다. 첸트로시비리는 봄에 라조를 사령관으로 하는 다우리야(자바이칼) 전선을 만들어 세묘노프와 싸우게 하고, 5월 8일 그를 인민의 적으로 선포했다. 아무르주의 블라고베셴스크에서는 3월에 아타만 이반 가모프의 반란이 진압되었는데, 영어 문헌이 인용하는 테플랴코프의 연구에 따르면 적위대가 도시를 차지한 뒤 주민 천여 명이 죽었다. 첸트로시비리와 하바롭스크의 인민위원회의는 끝내 손발을 맞추지 못했고, 첸트로시비리는 극동 쪽의 「분리주의」를 비판했다. 3 4 5 1 6 7

시베리아에서 소비에트에 맞선 정치 세력은 백군 장교만이 아니었다. 시베리아 자치를 주장하는 지역주의자와 사회혁명당이 1918년 1월 말 톰스크에 시베리아 지역 두마를 소집하려 하자, 톰스크를 장악한 첸트로시비리 쪽 볼셰비키는 1월 25~26일 밤 대의원들을 체포하고 두마 해산을 결정했다. 체포를 피한 대의원들은 사회혁명당원 표트르 데르베르를 수반으로 하는 시베리아 임시정부를 세웠다. 이 정부는 3월 하얼빈으로 옮겨 갔다가 6월에야 블라디보스토크에 자리를 잡았고, 떠나기 전 서시베리아에 사회혁명당원 네 명으로 이루어진 지하 서시베리아 위원부를 남겨 두었다. 1918년 4월 5일 첸트로시비리는 외국의 개입에 항의하며 시베리아에 계엄을 선포하고 혁명 참모부를 세웠으며, 옴스크·이르쿠츠크·프리아무르 군관구를 하나로 묶은 군사 위원부와 시베리아 체카를 만들었다. 그러나 소비에트들이 가진 무장력은 적위대와 국제주의자 부대, 그리고 막 편성되기 시작한 붉은 군대 부대가 전부였다. 그들이 마주한 것은 철도를 따라 길게 늘어선, 4만~5만 명으로 추산되는 무장 부대였다. 8 9 1

러시아체코슬로바키아군단의 반란과 시베리아의 정부들 (1918년 5~11월)

1918년 5월 첼랴빈스크에서 시작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과 볼셰비키의 충돌은 상위 사건에서 다루었다. 시베리아에서 그 결과는 빨랐다. 5월 25일 트로츠키의 무장 해제 명령이 떨어진 무렵 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는 라돌라 가이다가 봉기를 조직했고, 군단은 마리인스크, 니즈네우딘스크, 칸스크 같은 철도 도시를 차례로 차지했다. 이르쿠츠크에서도 5월 26일 첸트로시비리가 인노켄티옙스카야역에 도착하는 군단 열차를 무장 해제하기로 결정하자 역에서 전투가 벌어져 50명이 죽었다. 이튿날 첸트로시비리 대표단이 강화를 맺었지만 싸움은 6월에 다시 번졌다. 6월 6일 옴스크가 백군에게 넘어갔고, 6월 말에는 미하일 디테릭스가 이끄는 군단 부대가 블라디보스토크의 볼셰비키 행정부를 무너뜨렸다. 군단은 7월 6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연합국 보호령으로 선포하고, 서쪽에서 싸우는 동료들을 도우러 철도를 되짚어 갔다. 영어 문헌에 따르면 8월 무렵 우랄의 전선에서는 붉은 군대 약 6만 5천 명이 군단과 반볼셰비키 러시아군 약 5만 명과 맞서고 있었다. 10 11 12 1 9

군단이 철도를 쥐자 시베리아의 소비에트 권력은 버티지 못했다. 6월 13일에는 니즈네우딘스크에서 칸스크까지의 선로가 이미 군단 손에 있었고, 첸트로시비리는 7월 11일 이르쿠츠크를 버리고 베르흐네우딘스크로 물러났다. 가이다는 이르쿠츠크에 이어 치타까지 진격했다. 군단이 바이칼호 남단의 터널 지대에서 볼셰비키 부대를 깨뜨린 것이 8월 말이었고, 그 뒤 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 쪽으로 계속 나아갔다. 첸트로시비리는 8월 16일 치타로, 다시 바깥으로 쫓겨났다. 8월 28일 우룰가역에서 열린 당·소비에트·군 간부 회의는 시베리아 인민위원회의를 해산하고, 조직된 전선의 싸움을 그만두는 대신 합법·비합법의 모든 방법으로 싸우기로 결정했다. 국제주의자 부대는 무기와 물자를 받아 숲으로 들어갔다. 극동에서도 하바롭스크가 9월 5일 아타만 칼미코프에게 넘어가면서 크라스노쇼코프의 인민위원회의가 무너졌다. 그는 타이가를 건너 붉은 군대 지역으로 가려다 사마라 부근에서 붙잡혀 이르쿠츠크 감옥으로 보내졌고, 1919년 12월에야 풀려났다. 라조는 지하로 들어가 블라디보스토크의 지하 당 위원회에서 일했다. 1 13 10 14 3 2

소비에트가 물러난 자리를 두고는 반볼셰비키 정부들이 다투었다. 옴스크에서는 6월 내내 협상이 이어진 끝에 6월 30일 표트르 볼로고츠키를 의장으로 하는 새 각료회의, 곧 옴스크의 시베리아 임시정부가 출범했다. 한 러시아 장군은 이를 「평화롭게 이루어진 쿠데타」라고 불렀다. 사회혁명당 색채가 짙은 데르베르 정부를 군대가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데르베르 정부는 6월 29일 「시베리아 자치 임시정부」로 이름을 바꾸고 자신이 시베리아의 중앙 권력이라고 선언했지만, 군사력과 지지는 옴스크에 있었다. 옴스크 정부는 7월 4일 「시베리아의 국가적 독립에 관한」 선언을 채택했고, 볼가의 코무치와는 관세 전쟁과 경계 분쟁을 벌였다. 군단의 압력도 작용한 가운데 9월 8~23일 우파에서 국가 회의가 열려 5인 디렉토리아, 곧 전러시아 임시정부가 세워졌다. 디렉토리아는 10월 옴스크로 옮겼지만 행정은 각료 14명 중 10명이 옛 시베리아 정부 출신인 각료회의에 기댔다. 11월 18일 옴스크 쿠데타로 니콜라이 압크센티예프와 블라디미르 젠지노프가 체포되고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최고 통치자가 된 과정은 상위 사건에서 다루었다. 9 15 8 16

러시아콜차크의 후방: 아타만과 철도

옴스크 정권의 권위는 바이칼호 동쪽에서 거의 통하지 않았다. 자바이칼 카자크 출신 그리고리 세묘노프는 1918년 1월 만저우리를 거점으로 자바이칼을 침공했다가 밀려났지만, 영국 외무부가 조건 없이 매달 1만 파운드를 주기로 하고 프랑스도 자금을 댔으며 일본은 그의 사령부에 정보 장교를 두었다. 영국 보조금이 끊길 무렵 그는 사실상 일본의 꼭두각시가 되어 있었다. 8월 자바이칼을 장악한 세묘노프 부대는 9월 6일 치타를 점령하면서 주민 348명을 학살했고, 치타가 그의 수도가 되었다. 그의 영역은 바이칼호 부근 베르흐네우딘스크에서 실카강과 스레텐스크, 만저우리까지 뻗었다. 콜차크가 최고 통치자가 되자 세묘노프는 복종을 거부했다. 콜차크는 군대를 보내 그를 제거하려 했지만 일본군의 보호 때문에 단념했고, 1919년 10월에는 오히려 그를 자바이칼 지역 총사령관으로 인정했다. 세묘노프는 화물이 무엇이든, 누구를 위한 것이든 열차를 세워 돈을 뜯어낸 「노상강도」로 묘사되었다. 그의 부하이던 로만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가 다우리야역에 만든 요새는 처형된 이들의 뼈가 쌓인 「고문 센터」로 알려졌다. 17 18

우수리 카자크의 아타만 이반 칼미코프는 1918년 9월 5일 하바롭스크를 점령하고 하바롭스크 수비대장이 되었다. 러시아어 문헌에 따르면 그해 9월 하바롭스크에서는 재판 없는 대량 총살이 여러 차례 있었고, 11월에도 약 20명이 같은 식으로 죽었다. 9월 4일 백군과 일본군에게 체포된 알렉산드라 킴도 칼미코프의 카자크들에게 총살되었다. 칼미코프 부대의 약탈과 살인, 강간은 백군 안에서도 분노를 샀고 콜차크 자신도 그중 하나였다. 그의 부대는 국제 적십자 대표인 스웨덴인과 노르웨이인을 살해하고 아무르강의 중국 포함을 포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1920년 2월 고립된 칼미코프는 하바롭스크 국립은행 지점의 금 622킬로그램을 일본군 사령부에 몰래 넘긴 뒤 중국 땅으로 달아났고, 중국 당국에 붙잡혀 있다가 9월 탈주하던 중 사살되었다. 피해 규모는 출처마다 다르다. 영어 문헌은 미 육군 정보부가 세묘노프에게 한 해 동안 3만 명을 처형한 책임이 있다고 추산했다고 쓰고, 러시아어 문헌은 윌리엄 그레이브스의 보고서가 4만 명이라고 했다고 쓴다. 트로이츠코사프스크 감옥에서는 1919년 12월 24일부터 1920년 1월 10일 사이에 약 1,500명이 살해되었다. 14 19 5 17 20

그레이브스는 훗날 이렇게 증언했다. 「세묘노프와 칼미코프의 병사들은 일본군의 보호 아래 들짐승처럼 나라를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했고, 일본이 원했다면 이 살인은 어느 날이든 멈출 수 있었다. … 동시베리아에서 반볼셰비키가 한 사람을 죽일 때마다 볼셰비키는 백 명을 죽였다고 세상은 믿지만, 실은 그 반대였다고 말해도 안전하다.」 콜차크가 1920년 1월 4일 극동의 군권을 세묘노프에게 넘겼을 때에도 실권은 블라디보스토크의 세르게이 로자노프, 하바롭스크의 칼미코프, 블라고베셴스크의 아무르 아타만에게 나뉘어 있었고, 이들 모두 일본의 돈과 병력에 기댔다. 이 지역을 하나로 묶은 것은 시베리아 횡단 철도였다. 1919년 미국 철도 기술자 존 프랭크 스티븐스가 동청 철도와 시베리아 철도의 관리·운영을 맡은 연합국 기술위원회를 이끌었는데, 동청 철도가 일본 손에 넘어가는 것을 막는 것도 그 역할이었다. 연합국 철도 협정에 따라 미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수리스크까지와 베르흐네우딘스크 부근 구간을 지켰고, 1919년 1월 27일 군단 사령관 얀 시로비는 노보니콜라옙스크와 이르쿠츠크 사이의 선로를 체코슬로바키아 작전 구역으로 선언했다. 14 21 22 10

일본미국영국연합국 개입: 일본과 미국, 그리고 영국

극동 개입의 첫 신호는 경쟁이었다. 영국이 일본과 상의 없이 미국에 블라디보스토크 공동 개입을 타진하고 홍콩의 순양함 서퍽을 보내자,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리는 해군에 먼저 도착하라고 명령했다. 전함 이와미는 1918년 1월 12일 서퍽보다 이틀 앞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닿았다. 무장한 무리가 일본인 상점을 약탈하고 주인을 죽이자 일본은 해병을 상륙시켰다. 일본 육군 참모본부는 1918년 2월 「시베리아 계획 위원회」를 만들어 제정 붕괴를 시베리아를 떼어 내 완충국을 세울 기회로 보았다. 7월 우드로 윌슨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구출을 명분으로 일본에 2만 5천 명 규모 국제 연합군의 일부로 7천 명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데라우치 내각은 의회의 격론 끝에 1만 2천 명을 보내되 일본의 단독 지휘를 받게 하기로 했다. 그러나 실제 파병은 그 몇 배였다. 8월 말까지 1만 8천 명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하고 6천 명이 만주를 거쳐 만저우리로 갔으며, 11월 초까지 7만 명이 넘었다. 8월 18일 오타니 기쿠조 장군이 연합군 전체의 지휘를 맡았다. 6 13

다른 나라들의 병력은 훨씬 작았다. 1918년 8월 3일 노동조합 지도자이자 자유당 의원인 존 워드 중령의 영국 미들섹스 연대 대대가 연합군 지상군으로는 처음 블라디보스토크에 상륙했고, 영국은 모두 1,800명을 두 대대로 보내고 앨프리드 녹스 장군의 군사 사절단 500명을 따로 두었다. 프랑스는 인도차이나의 식민지 연대 500명을, 캐나다는 4,192명을 보냈다. 캐나다군 수송선은 프랑스계 병사 중심의 두 중대가 빅토리아에서 반란을 일으켜 출항이 늦어졌고, 대부분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다 1919년 6월 5일까지 모두 돌아갔다. 중국·이탈리아·폴란드·세르비아·루마니아 부대도 왔다. 우수리 전선에서는 8월 23~25일 두홉스카야 전투에서 일본군 지휘를 받는 연합군이 영국 장갑열차의 지원 속에 볼셰비키 장갑열차 다섯 대를 공격해 그곳의 조직적 저항을 끝냈다. 일본군 전사자는 600명이었다. 영국·프랑스·이탈리아 부대가 군단과 함께 우랄 쪽으로 간 반면, 일본군은 바이칼호 서쪽으로 가기를 거부했다. 11월까지 일본군은 연해주의 모든 항구와 치타 동쪽 시베리아의 주요 도시를 차지했다. 13 23

미국 시베리아 원정군은 윌리엄 그레이브스 소장이 지휘했고 병력은 출처에 따라 7,950명에서 8,763명이었다. 첫 3천 명은 8월 15~21일 블라디보스토크에 내렸고 그레이브스는 9월 초에 도착했다. 그는 자신의 임무가 미국이 보낸 물자를 지키고 군단의 철수를 돕는 것일 뿐 볼셰비키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내정 불간섭」과 「완전 중립」을 내세워 콜차크 쪽과 붉은 파르티잔을 똑같이 대했고, 미군 구역에서는 수찬 탄광 노동자들의 집회를 막지 않았다. 영국의 워드는 미국이 중립 지대에서 볼셰비키를 「보호」해 그들이 습격 기지를 두게 했다고 비난했고, 세묘노프는 그레이브스가 붉은 쪽을 돕는다고 했다. 그레이브스는 일본이 바이칼 동쪽 아무르 지역을 병합하려 한다고 의심했고, 미군이 바이칼 동쪽에 남은 것도 일본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미일 마찰은 실제 충돌 직전까지 갔다. 철도역 예브게니옙카에서는 미군 보초가 일본 병사를 찔러 양측이 총을 겨눴고, 1919년 10월 이만에서는 로자노프 부대가 붙잡은 미군 상병이 칼미코프 사령부에서 채찍질을 당했다. 일본이 시베리아에서 노린 것은 백군의 서진보다 가까운 러시아·중국 영토의 상업적 지배였다는 평가도 있다. 24 25 22 13 26

러시아파르티잔 전쟁과 옴스크 정권의 붕괴

콜차크 정권의 징발과 동원, 처벌은 시베리아 농촌을 봉기로 몰았다. 1918년 12월 3일 정부는 「최고 통치자의 체제와 통치를 지키기 위해」 형법을 고쳐 사형과 군법회의 처벌을 넓혔다. 예니세이 지역에서 세르게이 로자노프 장군은 「주민이 무기를 들고 군대를 맞는 마을은 불태우고 성인 남자는 예외 없이 총살하라」고 명령했다. 영어 문헌에 인용된 멘셰비키 기관지는 야전 군법회의와 토벌대에 농민 4천 명이 희생되었다고 주장했다. 저항은 1918년 12월에 시작되었다. 12월 2일 크라스노야르스크군 스테프노바제이 읍에서 지하 조직이 읍사무소를 장악하고 혁명위원회를 세웠고, 같은 달 칸스크군 타세예보에서는 바실리 야코벤코가 봉기를 이끌었다. 타세예보 파르티잔 공화국은 1919년 1월부터 군사혁명 참모부를 두었고 병력이 최대 1만 5천 명에 이르렀다. 아친스크에서는 4개의 성 게오르기 십자 훈장을 받은 전 이등대위 표트르 셰틴킨이 1919년 1월 5일 무장 행동을 시작했다. 그는 4월 알렉산드르 크랍첸코의 부대와 합쳐 파르티잔군 참모장이 되었고, 이 군대는 타이가를 700킬로미터 남하해 9월 13일 미누신스크를 차지했다. 11월에는 병력이 1만 8천 명에 이르렀다. 27 28 29 30 31 32

알타이의 초원에서는 성 게오르기 십자 훈장을 받은 농민 출신 전신병 예핌 마몬토프가 파르티잔을 이끌었다. 그는 1918년 9월 시베리아 임시정부에 맞선 초르니돌 농민 봉기를 도우러 나섰다가 숨어 지냈고, 1919년 봄부터 슬라브고로드군 남부에서 기병 부대를 이끌었다. 콜차크가 알타이 전체를 포함한 서시베리아 18개 군을 작전 지역으로 선포하고 토벌대를 보내자, 1919년 10월 7일 우티치예 마을에 모인 지휘관들은 부대를 합쳐 서시베리아 농민 붉은 군대를 만들고 마몬토프를 총사령관으로 뽑았다. 이 군대의 규모는 영어 문헌이 2만 5천 명, 러시아어 문헌이 1919년 말 25개 연대 약 5만 명이라고 쓴다. 파르티잔은 12월 6~7일 바르나울 공격에 실패했지만 거의 포위된 백군은 12월 10일 밤 도시를 버렸다. 영어 문헌에 따르면 1919년 가을 시베리아 파르티잔 약 10만 명이 붉은 군대가 오기도 전에 넓은 지역을 장악했고, 1920년 2월에는 약 2만 명이 아무르주를 차지했다. 정규군이 들어온 뒤 파르티잔 부대는 해산되거나 붉은 군대에 편입되었다. 크랍첸코와 셰틴킨의 부대는 1920년 1월 제5군의 예니세이 소총 사단이 되었다. 33 34 27 32

1919년 가을 전선이 무너지자 후방도 갈라졌다. 군단은 콜차크 쪽 군의 행태를 고발하는 각서를 11월 15일 연합국 대표들에게 냈고, 이틀 뒤 가이다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콜차크에 맞서 봉기했다가 실패했다. 그레이브스는 이 음모에서 사회혁명당 지하 조직과 군단 사이의 연락을 맡았다고 러시아어 문헌은 쓴다. 이르쿠츠크에서는 11월 12일 시베리아 젬스트보와 시 두마 회의가 사회혁명당·멘셰비키·젬스트보·농민 단체로 이루어진 정치센터를 뽑았다. 정치센터는 콜차크 정권 타도와 공산주의자의 승리 저지, 동시베리아와 극동의 민주적 완충국 수립을 내걸었고, 봉기를 일으켜 1920년 1월 5일까지 이르쿠츠크를 장악했다. 블라디미르 카펠의 군대가 시베리아 대빙원 행군으로 다가오는 가운데, 군단은 동쪽으로 가는 길을 얻는 대가로 콜차크를 정치센터에 넘겼다. 정치센터는 1월 23일 볼셰비키 군사혁명위원회에 권력을 넘겼고, 콜차크는 2월 7일 총살되었다. 같은 날 군단은 쿠틴에서 제5군과 휴전해 블라디보스토크까지의 통행을 보장받는 대신 남은 금괴를 이르쿠츠크 당국에 남겼다. 27 22 35 11 36

마지막 단계도 시베리아의 겨울만큼 잔혹했다. 1919년 12월 세묘노프가 이르쿠츠크로 보낸 부대는 인질 31명을 잡아 바이칼호의 쇄빙선으로 끌고 가, 1월 5일 나무망치로 한 사람씩 때려 죽이고 물에 던졌다. 카펠의 군대와 그 가족 약 3만 명은 크라스노야르스크 봉기를 피해 얼어붙은 바이칼호를 건너 치타로 향했고, 카펠은 동상과 폐렴으로 1월 26일 죽었다. 쫓아온 제5군은 겐리흐 에이헤가 지휘했다. 그러나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일본과의 충돌을 피하려고 이르쿠츠크 너머로 진격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마지막 군단 열차는 3월 1일 이르쿠츠크를 지났고, 군단원들은 1920년 9월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36차례 배로 떠났다. 함께 떠난 사람은 병사 5만 6,455명과 장교 3,004명을 포함해 6만 7,739명이었고, 러시아에서 전사한 군단원은 4,112명이었다. 콜차크 정부 각료들을 재판한 1920년 5월의 시베리아 특별 혁명재판소에는 셰틴킨과 마몬토프가 재판관으로 참여했다. 17 36 11 30 33

러시아일본극동공화국과 일본: 1920년

이르쿠츠크 감옥에서 풀려난 크라스노쇼코프는 1920년 1월 전선을 넘어 톰스크의 붉은 군대 사령부로 가서 레닌을 설득했다. 연합군이 체면을 잃지 않고 철수할 수 있도록 극동에 완충국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비슷한 제안은 정치센터에서도 나왔고, 러시아어 문헌은 이반 스미르노프와 크라스노쇼코프를 구상자로 든다. 레닌과 모스크바 지도부는 당원 약 4천 명이 직접 권력을 잡을 수 있다는 현지 공산당원들의 반대를 물리쳤다. 일본군 약 7만 명과 미군이 있는 곳에서 소비에트 권력 선포는 도발이 될 수 있었고, 서쪽에서는 폴란드와의 전쟁이 다가오고 있었다. 2월 18일 정치국은 완충국을 승인했고, 모스크바는 극동공화국을 「동쪽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곧 숨 돌릴 틈으로 보았다. 4월 6일 베르흐네우딘스크의 제헌 대회가 극동공화국을 선포했다. 크라스노쇼코프는 헌법을 먼저 영어로 쓴 뒤 러시아어로 옮겼고 정부 수반 겸 외무장관이 되었다. 그러나 다당제 민주공화국이라는 겉모습과 달리 공화국은 처음부터 모스크바의 재정·외교·군사 지원에 기댔고, 공산당의 극동국이 이를 이끌었다. 3 37 38

연해주에서는 다른 길이 시도되었다. 1920년 1월 31일 블라디보스토크 봉기로 콜차크의 대리인 로자노프가 쫓겨나고 연해주 젬스트보 정부가 들어섰는데, 이 연립 정부에서는 볼셰비키 세르게이 라조와 표트르 니키포로프가 주도권을 쥐었다. 라조는 루스키섬의 사관학교 생도들 앞에 홀로 무기 없이 나서 연설해 그들을 봉기 편으로 돌렸다. 일본군은 2월 4일 중립을 선언했지만, 블라디보스토크 정부가 볼셰비키 손에 들어가고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하려 하자 4월 4~5일 연해주 전역에서 혁명 세력을 기습했다. 라조는 4~5일 밤 일본군에게 체포되었고, 5월 말 동료 루츠키, 시비르체프와 함께 백군 카자크에게 넘겨져 죽었다. 기관차 화실에서 산 채로 불태워졌다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지만, 최근 러시아 극동사 연구는 이를 전설로 보고 그가 다른 이름으로 에게르셸드에서 총살된 뒤 불태워졌다는 기록을 든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흩어진 파르티잔은 한동안 반격하지 못했고, 블라디보스토크를 중심으로 완충국을 세우려던 계획은 무너졌다. 미군 마지막 부대는 이미 4월 1일 떠났고, 일본은 이제 홀로 남은 점령국이었다. 2 38 7 24

아무르강 하구의 금광 도시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에서는 이 시기 최악의 비극이 벌어졌다. 1920년 1월 아나키스트 야코프 트랴피친이 이끄는 수천 명의 파르티잔이 도시를 포위했다. 도시에는 일본 수비대 350명, 일본 민간인 약 450명, 백군 약 300명이 있었다. 2월 28일 휴전으로 파르티잔이 입성한 뒤 주민 체포와 처형이 시작되었고, 3월 12일 일본군이 기습하자 나흘간의 전투 끝에 일본 수비대가 전멸하고 영사관도 불탔다. 파르티잔도 최대 500명이 죽었다. 5월 하순 일본 원군이 다가오자 트랴피친의 본부는 남은 일본인 포로 129명과 수감자들을 처형하고 주민을 타이가로 끌고 간 뒤 도시를 불태웠다. 러시아어 문헌에 따르면 주거용 건물 1,165채 가운데 35채만 남았다. 희생자 수는 엇갈린다. 일본 대표는 워싱턴 회의에서 일본인 700명 이상이 죽었다고 했고, 영어 문헌이 인용하는 사할린 당국의 추산은 굶주림을 포함해 지역 전체에서 1만~1만 5천 명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트랴피친은 7월 케르비에서 파르티잔 법정에 서서 총살되었다. 일본은 이 사건을 이유로 북사할린을 점령했는데, 러시아어 문헌은 점령이 5월의 처형보다 앞선 4월 22일에 시작되었다고 지적한다. 39 7 37

그래도 완충국 구상은 목적을 이루었다. 일본군 사령부는 5월 11일 극동공화국을 인정했고, 소비에트 러시아도 곧 승인했다. 공고타역에서 5월 24일부터 열린 협상 끝에 7월 15일 일본 원정군과 극동공화국은 베르흐네우딘스크와 치타 사이에 중립 지대를 두는 공고타 협정을 맺었다. 파르티잔의 끊임없는 압박을 받던 일본군은 이로써 체면을 잃지 않고 자바이칼에서 물러날 수 있었고, 10월 15일 철수를 마쳤다. 후원자를 잃은 세묘노프의 「러시아 동부 변경」은 에이헤의 제5군과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파르티잔의 공세에 무너졌다. 10월 22일 인민혁명군과 파르티잔이 치타에 들어갔고 세묘노프는 비행기로 만주에 달아났다. 같은 무렵 일본군이 하바롭스크에서도 철수했다. 10월 28일부터 11월 11일까지 치타에서 열린 회의에서 서·동 자바이칼, 아무르, 연해주, 사할린의 다섯 지역 정부 대표들이 통합을 확정하고 수도를 치타로 옮겼다. 1921년 1월 9일 선거로 뽑힌 제헌의회는 4월 27일 미국 헌법과 닮은 헌법을 채택했다. 다수는 공산당 92석과 그 편에 선 농민 다수파 183석이었다. 3 38 37 17

러시아몽골1921년: 블라디보스토크의 「검은 완충국」과 운게른

1921년 5월 26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일본군의 묵인과 보호 아래 백군 쿠데타가 일어났다. 쿠데타의 주력은 시베리아 대빙원 행군에서 살아남은 카펠의 옛 부대, 이른바 카펠레프치였다. 볼셰비키 바실리 안토노프가 이끌던 연해주 젬스트보 정부가 쓰러지고, 비사회주의 단체 대회가 스피리돈 메르쿨로프를 수반으로 하는 프리아무르 임시정부를 뽑았다. 그와 형제 니콜라이 메르쿨로프는 블라디보스토크의 사업가이자 옛 국가 두마 의원으로, 정권의 중심이었다. 소비에트 쪽은 이를 「검은 완충국」이라 불렀다. 곧 콜차크가 후계자로 지명했던 세묘노프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 총사령관을 자처했지만 일본이 그를 지지하지 않아 실패했고, 카펠레프치와 세묘노프 쪽은 서로를 경멸했다. 세묘노프는 9월까지 러시아 땅을 완전히 떠났다. 8월부터 11월까지 다롄에서 열린 극동공화국과 일본의 협상은 일본이 내민 17개 요구 때문에 결렬되었다. 그 요구에는 요새와 함대의 무장 해제, 아무르·우수리강 자유 항행, 북사할린 80년 조차, 「공산주의 체제」 포기가 들어 있었다. 37 38 40 41 17

극동공화국 안에서도 긴장이 있었다. 크라스노쇼코프는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합법화해 연립 정부에 끌어들이고 모스크바로부터의 독립성을 지나치게 강조한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의 지지자였던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에이헤가 먼저 밀려났고, 크라스노쇼코프 자신도 1921년 말 소환되었다. 영어 문헌은 그가 그해 4월 직위에서 물러났으며 결핵이 공식 사유였지만 실제로는 현지 볼셰비키가 그의 지도 방식에 반발했기 때문이라고 쓴다. 6월 28일에는 인민혁명군이 일리야 박의 사할린 연합 파르티잔 부대를 무장 해제하려다 조선인 파르티잔 118명에서 400명이 죽는 아무르 사건이 벌어졌다. 제야강에 빠져 죽은 이가 많았다. 한편 몽골에서는 1920년 8월 세묘노프와 갈라선 운게른이 아시아 기병 사단을 이끌고 1921년 2월 우르가에서 중국군을 몰아냈다. 이 이야기는 몽골 사건에서 다룬다. 운게른은 5~6월 자바이칼의 트로이츠코사프스크로 진격했다가 6월 11~13일 패했고, 7월 18일 약 3천 명으로 다시 소비에트 영토를 습격했지만 주민은 거의 호응하지 않았다. 8월 셰틴킨이 지휘하는 부대가 몽골 귀족에게 사로잡힌 운게른을 넘겨받았고, 그는 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여섯 시간의 재판 끝에 9월 15일 처형되었다. 4 3 38 18 30

1921년 가을 프리아무르 정권은 일본 철수 전에 영역을 넓히려 했다. 빅토린 몰차노프 장군의 백군 반란군은 11월 초 수찬과 아누치노 일대의 파르티잔 근거지를 먼저 쳐서 부대를 흩어 놓았고, 11월 30일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 철도와 우수리강을 따라 북진했다. 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은 두 개 연령대를 제대시키고 새 징집병은 아직 받지 못한 상태였고, 전선에는 보병 약 1,200명과 기병 280명뿐이었다. 백군은 12월 하바롭스크를 점령해 영역을 600베르스타 넓혔다. 하바롭스크에서 물러나던 볼셰비키는 역과 교회, 병원을 폭파하고 체포자 22명을 총살했는데, 극동국 위원 마슬렌니코프조차 「쓸데없는 파괴」라고 썼다. 그러나 백군은 겨울옷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했다. 12월 28일 하바롭스크 서쪽 인역에서 백군 약 1,000명과 기병 500명이 장갑열차의 지원을 받는 인민혁명군에 막혀 300명이 죽었고, 이것이 인민혁명군의 첫 승리였다. 백군은 볼로차옙카로 물러나 진지를 쌓았고, 그 뒤에서는 파르티잔이 철도에서 파괴 공작을 벌이며 백군의 동원과 보급을 방해했다. 42 43 40 7

러시아일본1922년: 볼로차옙카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1921년부터 극동공화국의 군사 책임자였던 바실리 블류헤르는 12월부터 아무르 동쪽 백군 소탕을 직접 지휘했다. 백군은 볼로차옙카역 앞 이윤코란 언덕을 중심으로 아무르강과 툰구스카강 사이 18킬로미터에 참호와 얼음 방벽, 5~6겹 철조망을 둘렀다. 인민혁명군은 공산당원 1천 명과 현지 파르티잔으로 보충되었고, 영어 문헌에 따르면 병사 7,600명, 야포 30문, 경전차 두 대를 갖추었다. 백군은 4,950명에 포 13문이었다. 1922년 2월 10일 영하 30도의 혹한과 깊은 눈 속에서 시작된 첫 공격은 실패했다. 러시아어 문헌에 따르면 인민혁명군은 이날 사망·부상·동상으로 480명을 잃었고 전차 두 대도 모두 잃었다. 병사들은 가위가 모자라 총검과 개머리판으로 철조망을 끊었다. 동부 전선 군사위원회에는 첸트로시비리 시절부터 극동에서 일해 온 파벨 포스티셰프도 있었다. 블류헤르는 하루 동안 부대를 재편해 2월 12일 다시 공격했고, 정오 무렵 언덕을 차지했다. 몰차노프는 퇴각했고 인민혁명군은 2월 13일 또는 14일 하바롭스크에 들어갔다. 3월 21일 인민혁명군은 우수리역까지 진출했으나, 그 남쪽은 일본군이 관할하는 「중립 지대」였다. 44 43 45 42 46

결정적인 변화는 도쿄에서 왔다. 개입의 인적·경제적 비용과 국내 반대, 미국과 영국의 외교적 압력 속에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은 1922년 6월 24일 10월 말까지 러시아 영토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일본의 보호막을 잃게 된 블라디보스토크의 백군은 이틀 뒤 젬스키 소보르 소집 규정을 만들었다. 7월 23일 블라디보스토크 극장에서 열린 소보르에는 약 230명이 모였는데, 공산주의자와 다른 「국제주의」 사회주의자의 참여는 금지되었다. 소보르는 로마노프 왕조에 최고 권력을 넘긴다고 결의하고, 8월 5일 메르쿨로프 정부를 폐지하고 미하일 디테릭스를 임시 독재자로 뽑았다. 디테릭스는 「젬스키 보예보다」라는 고풍스러운 칭호를 쓰고 군대를 「젬스카야 라티」로 바꾸어 불렀다. 그러나 상공회의소와 기업들은 헌금을 거부했고 동원 대상자는 하얼빈과 조선, 시골로 달아났으며, 일본 외교관들은 탄약 제공을 거절했다. 9월 초 하바롭스크를 향한 공세도 실패했다. 1922년 8월 17일 극동공화국 전쟁장관 겸 인민혁명군 총사령관이 된 이에로님 우보레비치는 백군 병사들에게 외국 자본가를 위해 명예를 팔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호소했다. 13 6 40 41 47

10월 4일 인민혁명군은 마지막 대작전인 연해주 작전을 시작했다. 돌격군은 1만 명에 기관총 288정, 포 24문, 장갑열차 3대, 비행기 3대를 갖추었고, 그 뒤에 자바이칼 사단 5천 명과 파르티잔 5천 명이 있었다. 디테릭스 쪽은 보병 1만 2,800명과 기병 2,700명이었지만 병력의 3분의 1까지를 파르티잔과의 싸움에 돌려야 했다. 인민혁명군은 10월 8~9일 스파스크 요새 지대를 강습했고, 10월 14일 모나스티리셰 일대에서 젬스카야 라티의 주력을 깨뜨렸다. 10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 근처에 이르렀을 때 도시에는 아직 일본군 최대 2만 명이 있었다. 일본군이 충돌이 일어나면 철수를 멈추겠다고 위협하자 인민혁명군은 도시에서 몇 베르스타 물러나 기다렸다. 10월 20일 디테릭스와 병사·가족 약 7천 명은 포시예트에서 일본 수송선을 타고 떠났다. 그 사이 한 무리의 시베리아 지역주의자가 「자치 시베리아」 정부를 선포했지만, 손으로 쓴 벽보를 붙인 것 말고는 한 일이 없어 「벽보 정부」라 불렸다. 10월 24일 일본군은 세단카에서 25일 오후 4시까지 블라디보스토크를 비우는 협정에 서명했다. 48 40

1922년 10월 25일 오후 4시, 떠나는 일본군의 뒤를 따라 인민혁명군 선두 부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갔다. 반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일본군과 함께 도시를 떠났고, 러시아어 문헌은 미국 관찰자들이 인민혁명군이 질서를 회복했으며 주민들이 반겼다고 보고했다고 전한다. 이튿날 레닌은 극동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에게 전보를 보내, 10월 혁명 5주년을 앞두고 붉은 군대가 「일본 제국주의의 무거운 멍에」를 견딘 러시아 시민들을 근로 대중과 다시 묶었다고 축하했다. 시베리아 개입은 이로써 끝났지만 일본은 북사할린을 1925년 5월까지 점령했다. 극동공화국의 역할도 끝났다. 1922년 가을 공화국 당국은 멘셰비키 조직을 해산하고 사회혁명당원 재판을 열었으며, 10월 27일에는 공화국에 반하는 넓은 범위의 행위에 행정 추방을 허용하는 법을 만들었다. 공화국 정부는 스스로 해산했고, 공화국은 11월 15일 극동주로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인민혁명군은 11월 16일 제5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48 38 37 6

러시아야쿠티야의 마지막 원정과 역사적 평가

블라디보스토크가 넘어간 뒤에도 총성은 북쪽에서 이어졌다. 1921년 9월 야쿠트주 마이스키 지역에서 기병 소위 코로베이니코프가 이끄는 약 200명이 봉기했고, 1922년 3월 추랍차에서 야쿠트 지식인들이 임시 야쿠트 주 인민 행정부와 야쿠트 인민군을 세웠다. 러시아어 문헌은 봉기의 배경으로 볼셰비키가 빚에 묶여 일하던 가난한 이들을 풀어 주고 재산을 나눈 데 대한 부유층의 반발을 든다. 영어 문헌에 따르면 봉기군은 3월 23일 야쿠츠크를 차지하기도 했다. 1922년 8월 30일 아나톨리 페펠랴예프가 이끄는 의용대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 오호츠크해 연안의 아얀에 내렸다. 그 규모는 출처에 따라 약 750명 또는 553명이다. 페펠랴예프는 야쿠츠크와 이르쿠츠크를 차지해 새 시베리아 임시정부를 세우려 했고, 제정의 삼색기 대신 1918년 시베리아 자치의 흰색·초록색 깃발을 들었다. 그러나 10월 말 넬칸에 이르렀을 때 블라디보스토크는 이미 함락되었다. 1923년 2월 이반 스트로트의 부대가 사실시삭에서 그를 막았고, 페펠랴예프는 6월 17일 아얀에서 항복했다. 이것이 내전의 마지막 포위전이었다. 그는 13년 동안 수용소에 있다가 1938년 대숙청 때 처형되었다. 49 50 51

연합국 개입에 대한 평가는 대체로 냉정하다. 미국 문헌은 윌슨의 개입이 모든 기준에서 실패했다고 쓴다. 동부 전선은 되살아나지 않았고 러시아 항구에 쌓인 물자도 지키지 못했으며, 인기 있는 비공산주의 정부도 세우지 못했다. 군단의 철수도 그레이브스의 작은 원정군과는 별 관계가 없었다. 미 육군 참모총장 페이턴 마치는 러시아 원정을 「군사적 범죄」라고 불렀다. 미군은 19개월 동안 189명을 잃었다. 역사가 벤슨 보브릭은 그레이브스를 두고 「이 슬픈 실패 전체에서 그는 아마 유일하게 명예로운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썼다. 반면 러시아어 문헌은 그레이브스가 1922년 세묘노프를 고발했다가 명예훼손 소송에서 졌다는 점도 함께 적는다. 일본에게 시베리아 출병은 더 깊은 상처였다. 사상자는 영어 문헌마다 전투와 질병을 합쳐 약 5천 명, 또는 전사 1,399명과 병사 1,717명으로 다르고, 비용은 9억 엔이 넘었다. 의회는 군부가 파병 규모를 속이고 기밀비를 유용했으며 운게른 같은 인물을 지원했다고 공격했고, 개입은 전시의 단결을 찢어 군과 정부, 군 내부 파벌의 다툼을 불러왔다. 24 25 22 13 6

소비에트와 러시아의 역사 서술에서 1922년 10월 25일은 「극동의 해방」이었다. 소련 시기 연해주는 이날을 축일로 기념했고, 1995년 연해주 의회는 이날을 다시 「연해주의 날이자 외국 간섭군과 백군으로부터 극동을 해방한 날」로 정했다. 극동공화국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러시아어 문헌은 공화국이 법적으로는 독립 민주국가였지만 실제로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꼭두각시 완충국이었다고 쓰는 한편, 시장과 계획을 결합한 그 경제 체제가 한 해 뒤의 네프를 앞질렀다고도 본다. 완충국은 일본과의 직접 전쟁을 피하게 하고 외국군 철수를 이끌어 냈지만, 다당제는 공산당의 목적이 이루어지자 정리되었다. 니콜라옙스크 사건은 오랫동안 각자의 이야기로 남았다. 소련은 트랴피친 개인의 자의적 행동과 일본 포로 처형을 사건의 본질로 보았고, 일본은 전국에 애도를 선포하고 이를 북사할린 점령의 근거로 삼았다. 최근의 여러 연구자는 트랴피친 부대가 수천 명의 러시아 주민을 학살하고 도시를 불태운 것을 이 전쟁에서 유례없는 잔혹 행위로 본다. 세묘노프와 칼미코프의 백색 테러, 파르티잔의 적색 테러, 일본군의 토벌이 겹친 이 지역에서 내전은 다른 어느 전선보다 오래 이어졌다. 48 38 39 7

결과

1922년 10월 25일 인민혁명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가고 일본군이 철수했으며, 11월 극동공화국은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에 병합되었다. 북사할린의 일본군은 1925년에야 물러났고, 마지막 백군 원정은 1923년 6월 야쿠티야에서 항복했다.

연표와 지도

블라디보스토크 옴스크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 이르쿠츠크 치타 베르흐네우딘스크 하바롭스크 6 타세예보 19 아얀 3 옴스크 7 미누신스크 8 바르나울 11 니콜라옙스크나아무레 2 이르쿠츠크 9 이르쿠츠크 5 치타 13 치타 12 베르흐네우딘스크 15 트로이츠코사프스크 16 볼로차옙카 4 하바롭스크 1 블라디보스토크 10 블라디보스토크 14 블라디보스토크 17 블라디보스토크 18 블라디보스토크
  1. 11918.01.12일본
    일본 전함 블라디보스토크 입항

    데라우치 내각의 명령으로 전함 이와미가 영국 순양함 서퍽보다 이틀 앞서 블라디보스토크에 닿았다.

  2. 21918.05.26러시아체코슬로바키아
    이르쿠츠크역 전투

    첸트로시비리가 군단 열차를 무장 해제하기로 결정하자 이르쿠츠크역에서 전투가 벌어져 50명이 죽었다.

  3. 31918.06.30러시아
    옴스크의 시베리아 임시정부

    표트르 볼로고츠키를 의장으로 하는 각료회의가 출범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데르베르 정부와 정통성을 다투었다.

  4. 1918.08.03영국일본미국
    연합군 블라디보스토크 상륙

    영국 미들섹스 연대 대대가 연합군 지상군으로는 처음 상륙했다. 8월 8일부터 일본군 대부대가, 15일부터 미군이 뒤따랐다.

  5. 1918.08.28러시아
    우룰가 회의

    당·소비에트·군 간부들이 시베리아 인민위원회의를 해산하고 조직된 전선 대신 지하·파르티잔 투쟁으로 돌아서기로 했다.

  6. 41918.09.05러시아
    칼미코프의 하바롭스크 점령

    우수리 카자크 부대가 하바롭스크를 차지해 극동 인민위원회의가 무너졌다. 9월과 11월 재판 없는 총살이 잇따랐다.

  7. 51918.09.06러시아
    세묘노프의 치타 점령

    세묘노프 부대가 치타를 점령하며 주민 348명을 학살했고, 치타가 그의 수도가 되었다.

  8. 61918.12러시아
    타세예보·스테프노바제이 봉기

    예니세이주 남부에서 농민과 지하 조직이 봉기해 파르티잔 공화국들을 세웠다. 타세예보 공화국 병력은 최대 1만 5천 명이었다.

  9. 71919.09.13러시아
    파르티잔의 미누신스크 점령

    크랍첸코와 셰틴킨의 파르티잔군이 타이가를 700킬로미터 남하해 미누신스크를 차지했다.

  10. 1919.11.17러시아체코슬로바키아
    가이다의 블라디보스토크 봉기

    라돌라 가이다가 콜차크 정권에 맞서 봉기했다가 실패했다. 백군은 군단을 배신자로 비난했다.

  11. 81919.12.10러시아
    백군의 바르나울 철수

    마몬토프의 서시베리아 농민 붉은 군대에 거의 포위된 백군이 밤사이 바르나울을 버렸다.

  12. 91920.01.05러시아
    정치센터의 이르쿠츠크 장악

    사회혁명당·멘셰비키 계열 정치센터의 봉기가 이르쿠츠크를 장악했다. 1월 23일 볼셰비키에게 권력을 넘겼다.

  13. 101920.01.31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봉기

    콜차크의 대리인 로자노프가 쫓겨나고 라조 등 볼셰비키가 주도하는 연해주 젬스트보 정부가 들어섰다.

  14. 111920.03.12–03.15러시아일본
    니콜라옙스크 전투

    일본 수비대의 기습으로 트랴피친의 파르티잔과 싸움이 벌어져 일본 수비대가 전멸했다. 5월 말 포로 처형과 도시 방화가 뒤따랐다.

  15. 1920.04.04–04.05일본러시아
    일본군의 연해주 기습

    일본군이 블라디보스토크 등 연해주의 혁명 세력을 기습했다. 체포된 라조는 5월 말 백군 카자크에게 넘겨져 죽었다.

  16. 121920.04.06러시아
    극동공화국 선포

    베르흐네우딘스크의 제헌 대회가 일본과의 완충국인 극동공화국을 선포했다. 정부 수반은 크라스노쇼코프였다.

  17. 1920.07.15러시아일본
    공고타 협정

    일본 원정군과 극동공화국이 중립 지대를 두기로 하여 일본군이 자바이칼에서 철수할 길이 열렸다.

  18. 131920.10.22러시아
    인민혁명군의 치타 입성

    세묘노프 정권이 무너지고 치타가 극동공화국의 새 수도가 되었다.

  19. 141921.05.26러시아일본
    블라디보스토크 백군 쿠데타

    일본군의 보호 아래 카펠레프치가 젬스트보 정부를 무너뜨리고 메르쿨로프 형제의 프리아무르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20. 151921.06.11–06.13러시아몽골
    운게른의 트로이츠코사프스크 패배

    몽골에서 자바이칼로 진격한 운게른의 아시아 기병 사단이 트로이츠코사프스크를 차지하지 못하고 패했다.

  21. 161922.02.10–02.12러시아
    볼로차옙카 전투

    블류헤르의 인민혁명군이 혹한 속에 백군 진지를 돌파했고, 백군은 하바롭스크를 버리고 남쪽으로 물러났다.

  22. 1922.06.24일본
    일본의 철수 발표

    가토 도모사부로 내각이 10월 말까지 러시아 영토에서 모든 병력을 철수하겠다고 발표했다.

  23. 171922.08.05러시아
    디테릭스의 독재자 선출

    블라디보스토크의 젬스키 소보르가 메르쿨로프 정부를 폐지하고 디테릭스를 임시 독재자로 뽑았다.

  24. 181922.10.25러시아일본
    블라디보스토크 입성

    일본군이 떠난 오후 4시 인민혁명군이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갔다. 11월 15일 극동공화국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25. 191923.06.17러시아
    페펠랴예프의 아얀 항복

    야쿠티야 원정에 나선 페펠랴예프가 오호츠크해 연안 아얀에서 항복했다. 내전의 마지막 포위전이었다.

관련 인물 25명

소비에트 세력·파르티잔12명

백군과 아타만10명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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