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1945

혁명의 물결과 세계대전 333명

10월 혁명 뒤 유럽과 아시아로 번진 혁명의 물결, 코민테른 시대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전간기 각국의 정치가, 파시즘과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의 지도자와 지휘관들.

돌로레스 이바루리

Dolores Ibárruri
정치·당 지도 스페인 공산당 스페인 스페인 1895–1989 ○ 자연사

“그들은 통과하지 못하리라!”: 파시스트 군대의 마드리드 진입을 저지한 반파시즘의 목소리

“침략의 파시즘이 스페인에서 저지르는 범죄를 계속 방치한다면, 파시즘은 유럽의 다른 민족들에게도 밀어닥칠 것입니다. 스페인 인민은 무릎 꿇고 사느니 차라리 서서 죽기를 택합니다.” — 파리 지지집회 연설, 1936년 9월 3일

스페인공산당(PCE)의 상징적 지도자로, 내전 중 "¡No pasarán!"을 외쳐 반파시즘 투쟁의 얼굴이 되었다. 망명 중 프랑코 독재에 저항했으며, 1968년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공개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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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스페인 사회노동당(PSOE) 입당
  • 1918『엘 미네로 비스카이노』에 첫 기사 게재, 필명 '파시오나리아' 사용 시작
  • 1922통일 스페인공산당(PCE) 창립 참여
  • 1930PCE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
  • 1933반파시스트 여성연합 창설 의장
  • 1935코민테른 제7차 대회 — 집행위원회 후보위원 선출
  • 1936.2아스투리아스 지역구 코르테스 의원 당선
  • 1936.7라디오 연설 “¡No pasarán!” — 파시스트 군대의 마드리드 진입 저지 호소
  • 1937코르테스 부의장 선출
  • 1939–1942소련 망명 — 코민테른 활동 지속
  • 1941–1963단파방송 '독립 스페인 라디오'(라디오 피레나이카) 지휘
  • 1942–1960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
  • 1945국제민주여성연맹(WIDF) 공동 창립, 부의장
  • 1960–1989PCE 의장
  • 1968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개입 공개 반대
  • 1977프랑코 사후 귀국 — 41년 만에 다시 코르테스 의원 당선

부에나벤투라 두루티

Buenaventura Durruti

바르셀로나에서 반란군을 꺾고 자기 이름의 종대를 이끈 아나키스트 금속노동자

1936년 바르셀로나에서 캐나다 기자 피에르 반 파선에게 한 말로 전해진다. 「우리는 폐허가 조금도 두렵지 않다. 우리는 이 땅을 물려받게 될 것이다. 부르주아지가 자기 세계를 부수고 물러갈지 몰라도,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이 가슴속에 품고 있다.」 널리 인용되지만 이 인터뷰의 정확한 문구를 두고는 논쟁이 있다.

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난 금속공. 1917년 총파업으로 해고된 뒤 프랑스로 달아나 아나키즘을 받아들였고, 로스 솔리다리오스와 로스 에란테스에서 은행 「수용」과 국왕 암살 시도를 거치며 유럽과 라틴아메리카의 감옥을 전전했다. 1936년 7월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을 함락시켜 카탈루냐에서 군부 반란을 무너뜨렸고, 이 전투에서 오랜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를 잃었다. 곧 6천 명 규모의 두루티 종대를 꾸려 아라곤 전선으로 나가면서 해방 지역에서 토지와 공장의 집단화를 밀어붙였다. 11월 마드리드 방어에 합류했다가 19일 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숨졌으며, 총알의 출처를 두고는 적의 사격, 아군의 오발, 그의 자동소총 오작동이라는 설이 지금도 갈린다. 바르셀로나 장례 행렬에는 수십만 명이 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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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레온의 철도 노동자 집안에서 여덟 남매 중 둘째로 출생
  • 1913–1917금속노조(UGT) 가입, 1917년 총파업 참여로 북부철도에서 해고되고 프랑스로 도피
  • 1918–1919망명지에서 아나키즘을 받아들이고 귀국해 CNT 가입
  • 1920–1922로스 후스티시에로스 결성, 알폰소 13세 암살 계획이 발각되어 사라고사로 피신
  • 1922–1923아스카소·가르시아 올리베르와 로스 솔리다리오스 조직, 히혼 스페인은행 「수용」
  • 1924–1926쿠바·멕시코·칠레·아르헨티나를 도는 「수용」 원정, 파리에서 체포되어 라상테 감옥 수감
  • 1927–1931석방 후 벨기에 체류,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맹(FAI) 활동; 제2공화국 선포와 함께 바르셀로나 귀환
  • 1931–1936친화그룹 「노소트로스」 결성, 잦은 체포와 유형 속에 CNT 좌파의 얼굴이 됨
  • 1936.07.19–20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들을 이끌고 아타라사나스 병영 함락, 동지 프란시스코 아스카소 전사
  • 1936.07–11두루티 종대를 편성해 아라곤 전선으로, 해방 지역의 토지·공장 집단화 추진
  • 1936.11.14종대 일부를 이끌고 마드리드 방어전에 합류
  • 1936.11.19–20카사데캄포 전선에서 총상을 입고 이튿날 사망, 총알의 출처는 지금도 논쟁
  • 1936.11.22바르셀로나 장례, 수십만 명이 운구를 따름

분열을 넘어 노동자 통합을 추구한 혁명가

1936년 체포된 뒤 마우린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감옥에 갇혀 있었고, POUM은 그의 부재 속에서 안드레우 닌의 지도 아래 놓였다.

호아킨 마우린은 스페인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노동운동가로, 카탈루냐에서 대중적 혁명정당의 길을 모색했다. 그는 노동자농민블록을 이끌며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노선과 결별했고, 1935년 안드레우 닌과 함께 POUM을 창설해 초대 총서기가 되었다. 1936년 군사봉기 때 국민파 지역에 갇혀 체포된 뒤 내전 전 기간을 감옥에서 보냈으며, 그의 부재 속에서 닌이 당을 이끌었다. 석방과 망명 뒤에는 뉴욕에서 문필과 통신 사업으로 활동하며 스페인 혁명의 경험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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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20레리다에서 교사로 일하며 CNT에 가입
  • 1920–1922레리다 CNT 서기, 《루차 소시알》 편집자
  • 1921–1922CNT 전국 서기국 임시 서기
  • 1924–1930카탈루냐발레아르 공산주의연맹 조직자
  • 1931–1935노동자농민블록 서기장
  • 1935–1936POUM 공동 창립자, 초대 총서기
  • 1936인민전선 후보로 바르셀로나 하원의원
  • 1949–1973뉴욕 아메리칸 리터러리 에이전시 설립자·작가

라자니 팔메 더트

Rajani Palme Dutt
정치·당 지도 영국 공산당 영국 인도 1896–1974 ○ 자연사

CPGB 창립 당원이자 반세기 수석 이론가, 마르크스주의 인도사 서술의 개척자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 후 더트는 말했다. '스탈린이라는 태양에도 당연히 약간의 흑점은 있다.' 소련 체제가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고 바로잡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덧붙였다.

영국 공산당 창립 당원으로 반세기 동안 수석 이론가를 지낸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 1934년 《파시즘과 사회혁명》에서 파시즘을 독점자본주의 위기의 극단적 형태로 분석했고, 1940년 《인도 투데이》로 마르크스주의 인도사 서술을 개척했으며, 1939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후 반전 노선을 둘러싸고 해리 폴릿을 대신해 총서기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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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CPGB 창립 당원
  • 1921–1974《Labour Monthly》 창간 · 53년간 편집장
  • 1923–1965CPGB 집행위원회 위원
  • 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ECCI) 부위원
  • 1925–1935코민테른 대표(벨기에·스웨덴) · 인도 공산당 지도
  • 1936–1938《Daily Worker》 편집장
  • 1939–1941CPGB 총서기
  • 1943–1965CPGB 집행위원회 부의장 · 부총재

마크 W. 클라크

Mark W. Clark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계 1896–1984 ○ 자연사

전쟁의 성과와 민간인 피해 사이에 선 연합군 지휘관

1953년 7월 27일, 마크 W. 클라크는 판문점 정전협정에 유엔군사령부 대표로 서명했다.

마크 W. 클라크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지휘한 미국 육군 장성으로, 연합전의 참모 역량과 현장 지휘를 함께 보여 준 인물이다. 이탈리아 전선에서 로마 점령과 독일군 항복을 이끌었지만, 라피도강 작전과 몬테카시노 폭격을 둘러싸고 작전 판단과 민간 유산이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한국전쟁 말기 유엔군사령관으로서 공세와 정전협상을 병행했고,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에 유엔군 측 대표로 서명했다. 그의 경력은 미국의 군사적 우위 추구가 연합 지휘체계와 전쟁의 파괴성을 어떻게 함께 드러냈는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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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미 육군 보병 소위
  • 1942북아프리카 연합군 작전 부사령관
  • 1943–1944미 제5군 사령관, 이탈리아 전선
  • 1944–1945제15군집단 사령관, 이탈리아
  • 1945–1947오스트리아 미군 점령군 총사령관
  • 1947–1949미 제6군 사령관
  • 1949–1952미 육군 야전군 사령관
  • 1952–1953유엔군사령부·극동군사령부 총사령관

요제프 괴벨스

Joseph Goebbels
이념·선전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97–1945 ✕ 자살

나치당 선전 책임자이자 선전장관으로 반유대주의와 독재를 선전했다.

요제프 괴벨스는 나치당 선전 책임자로서 1926년부터 베를린 당 조직을 이끌고, 1930년 당 선전 책임자가 되었다. 1933년 히틀러가 선전장관으로 임명한 뒤 언론·영화·라디오·문화계를 나치 이념에 맞춰 통제하고, 반유대주의 선전과 유대인 박해를 부추겼다. 1938년 11월 포그롬의 주요 선동자였으며, 전쟁 말기에는 총력전을 선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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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45나치당 베를린 대관구 지도자
  • 1930–1945나치당 선전 책임자
  • 1933–1945국민계몽선전부 장관
  • 1944–1945총력전 전권위원

탄 말라카

Tan Malaka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아버지, 마르크스주의와 이슬람을 접목한 혁명 이론가

“모스크바에 앉아 인도네시아 혁명을 지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들은 식민주의자들과 다를 바 없다.” — 1926년 봉기 승인을 구하러 마닐라로 온 알리민에게

인도네시아 공산당 초기 의장이자 『공화국을 향하여』의 저자. 마르크스주의와 이슬람의 연대를 주장해 코민테른과 결별했고, 해방 후 완전 독립 노선으로 신생 공화국의 방향을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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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포트 더 콕 사범학교 졸업, 다툭(datuk) 족장 칭호 수여
  • 1913–1919네덜란드 유학, 러시아혁명에 감화되어 마르크스주의로 전향
  • 1919–1920델리 차 농장 노동자 자녀 교사 — 『가난한 자들의 땅』 집필
  • 1921.6사레카트 이슬람 학교(세콜라 탄 말라카) 설립, 세마랑과 반둥으로 확산
  • 1921.12인도네시아 공산당(PKI) 의장 취임 — 세마운 후임
  • 1922네덜란드 당국에 체포되어 네덜란드로 추방 — CPN 하원 후보 출마
  • 1922–1923코민테른 제4차 대회 참석 — 범이슬람주의와 공산주의 연대 주장
  • 1923–1925코민테른 동방부 대리인 — 광저우에서 『인도네시아 공화국을 향하여』 집필
  • 1925–1927마닐라 체류, 1926년 PKI 봉기를 반대했으나 저지 실패
  • 1927방콕에서 인도네시아 공화당(PARI) 결성 — 코민테른과 결별
  • 1927–1942중국·싱가포르·필리핀 등지에서 가명으로 지하활동 — 『마딜록』 집필
  • 1945–1946인도네시아 귀환, 투쟁연맹 결성 — 스자르르 내각 퇴진 견인
  • 1946–1948체포·구금 — 수감 중 자서전 『감옥에서 감옥으로』 집필
  • 1949.2.21동자바 블림빙에서 공화국군에 체포되어 총살

파보 탈벨라

Paavo Talvela
군사·지휘 핀란드 국가기관 핀란드 핀란드인 1897–1973 ○ 자연사

만네르헤임의 베를린 밀사로 핀란드와 독일의 군사 협력을 매듭지은 예거 장군

1944년 휴전 후 힘러가 핀란드 무장 저항을 이끌어 달라고 요청하자, 탈벨라는 '만네르헤임 원수의 명령이 있을 경우에만' 응하겠다고 답했다.

핀란드 예거 운동으로 군에 입문한 탈벨라는 겨울전쟁에서 톨바얘르비 전투의 첫 승리를 지휘하며 장군으로 급부상했다. 1940년 가을 만네르헤임의 개인 대리인으로 베를린에 파견되어 독일 참모본부와 핀란드군의 비밀 군사 협력을 협상했고, 이는 계속전쟁으로 이어지는 결정적 고리가 되었다. 전후 사업가와 헬싱키 시의원으로 활동했으며, 두 번째 만네르헤임 십자장 수훈자로서 1966년 보병대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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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예거 지원병, 제27프로이센 예거대대
  • 1918백군 대대장, 핀란드 내전; 소령
  • 1919–1922아우누스 원정군 총사령관; 비에나 원정군 대대장
  • 1926–1927사보 예거연대장
  • 1939.12–1940.04탈벨라 전단장(톨바얘르비 승리), 이어 제3군단장; 소장
  • 1940.09만네르헤임의 개인 대리인으로 베를린 파견, 독일-핀란드 군사 협력 협상
  • 1941.06–1942.01제6군단장, 카렐리야군; 만네르헤임 십자장 수훈(1941.8.3)
  • 1942–1944독일 최고사령부 주재 핀란드군 대표; 중장; 1944년 아우누스 전단 사령관

시프리아노 메라

Cipriano Mera Sanz
군사·지휘 스페인 공화파 스페인 스페인 1897–1975 ○ 사망

카사도의 마드리드 쿠데타를 공산군의 반격에서 구한 아나키스트 제4군단장

「군복을 입는다는 생각에 소름이 끼쳤지만 다른 선택이 없었다. 이제부터 내 행동이 내 성실함을 증명할 것이다」

마드리드 출신의 벽돌공으로 CNT 건설노조를 이끌다 내전 직전 투옥되었고, 반란 발발과 함께 풀려나 과달라하라·쿠엥카에서 봉기를 진압하는 종대를 조직했다. 제14사단을 거쳐 제4군단장이 된 그는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이탈리아 지원군단을 격퇴하며 공화국 진영에서 손꼽힌 아나키스트 지휘관이 되었다. 1939년 3월 네그린 정부의 공산당 의존에 반발해 카사도의 쿠데타를 지지했고, 공산군이 마드리드를 장악해 가던 순간 메라의 제4군단 예비대가 시내로 진입해 3일 만에 저항을 분쇄함으로써 전쟁의 종결 경로를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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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CNT 마드리드 건설노조 서기
  • 1936.07민병 종대 조직, 과달라하라·쿠엥카 탈환
  • 1936.11–1937제14사단장
  • 1937–1939제4군단장
  • 1939.03카사도 쿠데타 지지, 마드리드에서 공산군 저항 분쇄
  • 1939–1942오랑·카사블랑카 망명 후 비시정권에 의해 스페인 송환
  • 1946–1975출소 후 프랑스 재망명, 파리에서 벽돌공으로 일함

샤를 티용

Charles Tillon

노동운동에서 무장 레지스탕스로 나아간 공산주의자

“수와 단결이 우리 힘이 될 것이다.”

금속노동자와 노동조합 활동가로 출발한 샤를 티용은 1919년 해군 mutiny에 참여한 뒤 프랑스 공산당과 CGTU의 지도자로 성장했다. 그는 1940년 독일 점령에 맞선 민족해방과 노동계급의 단결을 호소했고, 1941년부터 공산주의 무장조직을 통합해 프랑스 유격대·의용군(FTP)을 이끌었다. 해방 뒤에는 장관과 의원으로 국가 재건에 참여했지만, 당 지도부와의 갈등으로 1952년 권력에서 밀려났고 1970년 공산당에서 제명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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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1프랑스 해군 기관병, 1919년 군함 게생의 반란 주도, 군사형무소 수감
  • 1921–1931프랑스 공산당 가입, CGTU 일드빌렌 지역·낭트 노동조합 지도자
  • 1931–1936CGTU 전국 지도부,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및 정치국 후보위원
  • 1936–1940하원의원, 스페인 공화파 피난 지원 활동
  • 1940–1944공산당 비밀 지도부, 국민군사위원회와 FTP 창설·최고사령관
  • 1944–1947공군·군수·재건부 장관, 오베르빌리에 시장 및 의원
  • 1952–1970공산당 지도부에서 축출, 1957년 복권, 1970년 제명

자크 도리오

Jacques Doriot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프랑스 프랑스 1898–1945 ✕ 기총소사로 사망

인민전선을 가장 먼저 요구하고 파시스트로 끝난 생드니의 공산주의자

1934년 4월 그는 코민테른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요구했다. 6월에 제명되었고, 7월에 당은 그가 요구한 바로 그 협정에 서명했다

생드니의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스물여섯에 하원의원이 되고 코민테른 집행위원까지 오른 프랑스공산당의 젊은 지도자. 리프 전쟁 반대 선동으로 투옥되었고 1927년에는 코민테른 특사로 중국에 파견되었으며, 1931년부터 생드니 시장을 지냈다. 1934년 2월의 위기 직후 그는 당론에 앞서 사회당과의 즉각적 공동행동을 공개로 요구했고, 모스크바의 소환을 거부해 6월 27일 제명되었다. 한 달 뒤 당은 그가 요구한 것과 같은 통일행동협정에 서명했지만 그는 이미 밖에 있었다. 1936년 프랑스인민당(PPF)을 세워 파시즘 쪽으로 옮겨 갔고, 1941년 반볼셰비키 프랑스의용군단에 참여해 독일군복을 입고 동부전선에서 싸웠으며, 1945년 2월 독일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기총소사를 맞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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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우아즈 브렐에서 노동자 집안에 출생
  • 1915–1922생드니의 금속노동자, 공산주의 청년운동에 투신
  • 1923–1924공산주의청년인터내셔널 지도부, 1924년 하원의원 당선
  • 1925리프 전쟁 반대 선동으로 투옥
  • 1927코민테른 특사로 중국 파견
  • 1931–1937생드니 시장
  • 1934.02–06사회당과의 공동행동 공개 요구, 모스크바 소환 거부, 6월 27일 제명
  • 1936프랑스인민당(PPF) 창당
  • 1941–1944반볼셰비키 프랑스의용군단 참여, 독일군복으로 동부전선 종군
  • 1945.02독일에서 연합군 항공기의 기총소사로 사망
문학·예술 독일 독일 1898–1956 ○ 심장마비

서사극과 '낯설게 하기'로 연극을 계급투쟁의 무기로 만든 마르크스주의 극작가

내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을 때, 나는 비로소 내 희곡들을 이해했다 — 마르크스야말로 내 희곡의 유일한 관객이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마르크스주의 극작가이자 서사극의 창시자였다. 1920년대 후반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한 후, 감정적 몰입을 거부하고 관객의 비판적 성찰을 이끌어내는 '낯설게 하기'와 변증법적 연극론을 정립했으며, 《서푼짜리 오페라》·《억척어멈과 그 자식들》·《사천의 선인》 같은 작품들로 자본주의와 전쟁을 무대 위에서 해부했다. 1933년 나치를 피해 스칸디나비아와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1947년 HUAC 조사 후 유럽으로 돌아와 1949년 동베를린에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베를리너 앙상블을 창립해 전후 세계 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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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밤의 북소리』로 클라이스트 상 수상
  • 1924베를린으로 이주, 도이체스 극장 연극부 조수
  • 1928『서푼짜리 오페라』 초연, 1920년대 베를린 최대 흥행작
  • 1933나치 독일을 떠나 15년간의 망명 시작
  • 1947할리우드에서 HUAC에 증언, 다음날 미국을 떠남
  • 1949헬레네 바이겔과 동베를린에 베를리너 앙상블 창립
  • 1954스탈린 평화상 수상

김원봉

김원봉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조선민족 1898–1958 ↓ 사망

의열단 창설자로서 조선의용대·광복군을 거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에 이른 무장투쟁가

베이징에서 김익상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 '자유는 우리의 힘과 피로 얻어지는 것이오. … 우리가 먼저 피를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김익상은 그 자리에서 의열단에 가입했고, 수주 뒤 조선총독부 청사에 폭탄을 던졌다.

의열단을 조직해 6년간 일본 식민통치 기관에 대한 폭탄 투척과 요인 암살을 지휘한 무정부주의적 독립운동가. 이후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창당해 연합전선을 모색했으며, 조선의용대를 이끌고 광복군 부사령관 겸 군무부장으로 임시정부에 합류했다. 해방 후 좌우합작에 힘쓰다 여운형 암살로 남한 내 입지가 무너지자 1948년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잔류해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역임했으며, 1958년 숙청당했다. 의열투쟁에서 통일전선 정치로, 다시 분단 후 조선 내각까지, 조선 혁명 진영 전체를 가로지른 유일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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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의열단 창설, 단장(의백) 취임
  • 1926황푸군관학교 제4기 입학
  • 1935조선민족혁명당 창당
  • 1938조선의용대 편성, 대장 취임
  • 1944임시정부 군무부장, 광복군 부사령관
  • 1948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검열상
  • 1952내각 노동상
  • 1957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폴 리로이 로브슨

Paul Leroy Robeson
문학·예술 미국 미국 1898–1976 ○ 자연사

'올 맨 리버'를 투쟁의 찬가로 바꾼 예술가

1937년 스페인 내전을 계기로 〈올 맨 리버〉의 체념적 가사를 바꿔 불렀다: "하지만 나는 계속 웃는다 / 우는 대신에 / 나는 계속 싸워야 한다 / 죽는 그날까지." 웨일스에서 "예술가는 편을 들어야 한다. 나는 선택했다.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고 선언했다.

세계적 베이스-바리톤이자 배우로 〈올 맨 리버〉와 《오셀로》로 정상의 예술가에 오르면서도, 그 예술을 흑인 해방운동과 국제 반식민주의 투쟁에 바친 사회주의자. 스페인 공화파와 1949년 파리 평화대회를 지지한 뒤 소련 지지를 철회하지 않아 매카시 시대 여권 박탈과 블랙리스트를 겪었지만, 1958년 대법원 판결로 여권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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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9러트거스대학, 미식축구 올아메리칸 2회, 졸업생 대표
  • 1919–1923컬럼비아 로스쿨, NFL 선수 활동
  • 1924–1928《황제 존스》 등 주연, 할렘 르네상스 스타로 부상
  • 1928–1939런던 《쇼 보트》로 세계적 명성, 《오셀로》(1930)로 영국 첫 흑인 오셀로
  • 1934첫 소련 방문 — "처음으로 흑인이 아니라 한 인간이다"
  • 1937–1939스페인 공화파 지지, 국제여단 방문, 아프리카문제위원회 활동
  • 1943–1945브로드웨이 《오셀로》 — 백인 출연진과 첫 흑인 오셀로, 296회 공연
  • 1949파리 평화대회 연설 후 피크스킬 폭동, 블랙리스트 시작
  • 1950–1958여권 박탈, HUAC 조사, 《프리덤》 창간, 스탈린 평화상(1952)
  • 1958대법원 판결로 여권 회복, 《Here I Stand》 출간
  • 1958–1960유럽·소련·호주·뉴질랜드 순회공연, 《오셀로》 출연
  • 1961–1963건강 악화, 동베를린 부흐 클리닉에서 회복
  • 1963–1976은둔 생활, 필라델피아에서 뇌졸중 합병증으로 사망

해리 헤이우드

Harry Haywood
정치·당 지도 미국 공산당 미국 미국 1898–1985 ○ 자연사

코민테른 '흑인 벨트' 테제의 설계자: 남부 흑인은 자결권을 가진 억압된 네이션이다

“흑인 문제는 근본적으로 억압된 네이션의 문제이며 완전한 자결권을 가진다.” — 『흑인 해방』(1948)

전 노예의 아들로 급진화된 미국 공산주의자. 코민테른에서 남부 흑인 자결권 테제를 수립했고, CPUSA 정치국원과 스페인 내전 정치위원을 지냈다. 탈스탈린화 반대로 제명된 후 마오주의 운동의 핵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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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제1차 세계대전 — 미 육군 제8연대(흑인연대) 복무, 프랑스 전선 참전
  • 1922–1925아프리카 혈맹단 → 청년공산주의동맹 → 미국공산당 입당
  • 1926–1930모스크바 유학 — 동방노력자공산대학·국제레닌학교, 코민테른 흑인문제 결의 초안
  • 1931–1938CPUSA 정치국원 겸 흑인부장 — 스코츠보로 구명운동, 남부 소작인조합 조직
  • 1937스페인 내전 —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 연대 정치위원, 브루네테 전투
  • 1943–1945제2차 세계대전 — 미국 상선대 복무
  • 1948『흑인 해방』 출간 — 남부 흑인 해방을 미완의 민주혁명 과제로 이론화
  • 1959반수정주의와 흑인 자결권 고수로 CPUSA에서 제명
  • 1964–1978신공산주의 운동 — 10월동맹/CPML 중앙위원, 『블랙 볼셰비키』 출간
정치·당 지도 브라질 공산당 브라질 브라질 1898–1990 ○ 자연사

희망의 기사: 2만 5천 km를 행군한 브라질 혁명가

많은 사람들이 내가 미쳤다고 생각한다. 대개 나이가 들면 제정신을 찾는다. 젊을 때는 혁명가였다가 결혼하고 가족을 부양하며 정착하지. 그러나 나는 이 나이에 이르도록 아직 제정신이 들지 않았다. — 1984년 인터뷰에서

브라질 혁명가·정치인. 1925~1927년 '프레스테스 종대'를 이끌고 내륙 2만 5천 km를 행군해 '희망의 기사'라 불렸다. 1935년 코민테른 집행위원, ANL 봉기 지도 후 9년간 수감. 1943년부터 37년간 브라질 공산당 사무총장으로 노동운동과 반독재 투쟁을 지휘했고 쿠데타 후 망명 중에도 당을 이끌었다. 유럽공산주의 전환을 거부해 축출됐으나 끝까지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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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7프레스테스 종대 참모장 — 14개 주 25,000km 행군
  • 1931–1934소련 망명, 엔지니어로 활동하며 마르크스주의 연구
  • 1934브라질 공산당 입당
  • 1935ANL 명예의장 · 코민테른 집행위원 · 무장봉기 지도
  • 1936–1945수감; 1943년 PCB 사무총장으로 선출
  • 1945–1948연방 상원의원; 1947년 당 불법화 후 지하활동
  • 1943–1980브라질 공산당 사무총장 (37년간)
  • 1971–1979군사독재 아래 소련 망명; 1979년 사면으로 귀국

장 피에르 물랭

Jean Moulin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프랑스 프랑스인 1899–1943 ✕ 고문 후 사망

분열된 레지스탕스를 묶은 공화주의자

그는 독일군의 허위 서명 강요에 맞서 명예를 훼손하느니 자결을 택하려 했다.

장 물랭은 프랑스의 고위 관료이자 공화주의자로, 나치 점령에 맞선 국내 레지스탕스를 자유 프랑스와 연결한 조직가였다. 그는 샤를 드골의 위임을 받아 경쟁하던 저항운동들을 조정하고, 정치세력과 노동조합까지 포괄하는 국민저항위원회를 세웠다. 그의 통합 작업은 독립성을 지키려는 여러 세력의 긴장 속에서 진행되었으며, 1943년 체포와 고문으로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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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사부아 현 지사 비서실장
  • 1925–1930알베르빌 군 부지사
  • 1936인민전선 항공부 장관 비서실장
  • 1937–1939아베롱 현 지사
  • 1939–1940외르에루아르 현 지사
  • 1941–1943드골의 국내 레지스탕스 대표
  • 1943국가레지스탕스평의회 초대 의장

안드리야 헤브란그

Andrija Hebrang
정치·당 지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 1899–1949 ✕ 옥중 실종 · 사망 처리

혁명적 민족정치와 당 중앙집권 사이에 선 지도자

1948년 소련과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베오그라드의 감옥에서 사라졌다.

안드리야 헤브란그는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 혁명가이자 크로아티아 공산당의 전시 지도자로, 점령에 맞선 조직과 해방지대의 정치 건설을 이끌었다. 전후에는 경제 재건과 중공업 중심의 발전 계획을 주도하며 티토에 이어 유고슬라비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의 자치적 정치 표현과 경제 노선을 둘러싼 긴장은 티토와의 충돌로 이어졌다. 1948년 유고슬라비아와 소련의 결별 뒤 그는 소비에트 정보망과 연계된 인물로 지목되어 당에서 축출되고 체포되었으며, 1949년 감옥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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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 1925–1928자그레브 지방 당 조직 활동
  • 1941–1944크로아티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서기
  • 1943–1944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정치국원
  • 1944–1946국가반파시스트평의회와 산업·무역 행정 담당
  • 1946–1948경제위원회 의장, 계획위원회 의장
  • 1948당에서 축출, 가택연금과 체포
  • 1949베오그라드 감옥에서 실종, 사망 처리

미하우 칼레츠키

Michał Kalecki
학술·연구 폴란드 폴란드 1899–1970 ○ 자연사

케인스보다 먼저 유효수요 원리를 정식화한 마르크스주의 거시경제학자

칼레츠키는 1943년 논문에서 이렇게 썼다: "공장 내 '규율'과 '정치적 안정'은 기업 지도자들이 이윤보다 더 높이 평가하는 가치다. 그들의 계급적 본능은 지속적인 완전고용이 자신들의 관점에서 건전하지 않다고 말해준다."

케인스보다 앞서 유효수요 원리를 정식화한 폴란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이윤·투자·소득분배를 계급 분석으로 설명하는 독자적 거시경제학을 구축했고, 사회주의 폴란드에서 계획경제 성장 이론을 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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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1936바르샤바 경기순환·물가연구소 연구원
  • 1933「경기순환 이론 시론」 발표 — 유효수요 원리를 케인스보다 먼저 정식화
  • 1936–1945영국 이주; LSE, 케임브리지, 옥스퍼드 통계연구소에서 연구
  • 1943「완전고용의 정치적 측면」 발표 — 자본가 계급의 정치적 저항을 예측
  • 1946–1954유엔 사무국 경제개발부 차장 (뉴욕); 매카시즘 압력으로 사임
  • 1955–1968폴란드 각료회의 경제고문,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바르샤바 대학 교수
  • 1957폴란드 과학아카데미 회원 선출
  • 1968반유대주의 숙청에 항의하여 공직 사임

코초 타슈코

Koço Tashko
외교·국제활동 알바니아 알바니아 알바니아인 1899–1984 숙청 · 억류 · 수감, 사망

알바니아 공산주의 운동가·외교관

1946년 1월 11일 제헌의회 회의에서 그는 20인 위임검증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첫 회의를 폐회했고, 같은 날 정오 두 번째 회의에서 의회는 알바니아를 인민공화국으로 선포했다.

알바니아 공산주의 운동가·외교관. 이집트 파이윰에서 민족운동 집안의 아들로 태어나 베이루트와 하버드를 거쳐 1923~24년 뉴욕 영사, 모스크바 코민테른 학교에서 교직을 맡았다. 1938년 알바니아로 파견되어 1941년 창당에 참여했고, 1943년 민족해방총평의회 서기, 1945년 제헌의회 서기를 지냈다. 1946~47년 모스크바 대사, 외무부 차관, 1954~55년 소피아 대사를 거쳐 당 통제·감사위원장을 맡았으나, 1960년 수정주의 공격 속에 숙청되어 8년 억류와 10년 부렐 형무소 생활 끝에 1980년 석방되었고 1984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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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4뉴욕 주재 알바니아 영사
  • 1920년대 말모스크바 코민테른 학교에서 영미부문 교직
  • 1938알바니아로 파견
  • 1941알바니아 공산당 창당 참여
  • 1943민족해방총평의회 서기
  • 1945제헌의회 서기
  • 1946–1947모스크바 주재 대사
  • 1954–1955소피아 주재 대사
  • 1955–1960당 통제·감사위원장
  • 1960숙청: 당 제명, 억류와 수감
  • 1969–1980부렐 형무소 수감, 당시 최고령 수감자

레오 라그랑주

Léo Lagrange

노동자의 첫 휴가를 설계한 여가·스포츠 차관

「우리의 단순하고 인간적인 목표는 프랑스의 청년 대중이 스포츠에서 기쁨과 건강을 찾게 하고, 노동자들의 여가를 조직해 그들이 되찾은 삶의 기쁨과 존엄을 누리게 하는 것이다」, 차관 취임 라디오 연설, 1936년 6월 10일

변호사 출신의 사회당 하원의원으로, 블룸 정부가 세계 최초로 만든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직을 맡았다. 국철 40% 할인 「인민 티켓」과 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으로 1936년 여름 60만 명의 생애 첫 유급휴가를 조직했고, 여가 정책을 노동자에게 존엄을 돌려주는 일로 정의했다. 1939년 동원을 자원해 1940년 6월 9일 엔 강 전선에서 포탄에 맞아 전사했다. 오늘날 프랑스 전역의 수천 개 경기장과 체육관이 그의 이름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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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32노르 출신, 파리에서 변호사
  • 1932–1940사회당 하원의원
  • 1936.06세계 첫 여가·스포츠 담당 차관
  • 1936「인민 티켓」으로 60만 명의 생애 첫 휴가 조직
  • 1936–1938유스호스텔 확충, 대중 스포츠 자격증(BSP) 창설
  • 1939–1940동원 자원, 1940년 6월 9일 엔 전선에서 전사

하인리히 힘러

Heinrich Himmler

나치 인종국가의 핵심 설계자

1943년 10월 포젠에서 그는 친위대 장교들에게, 시체 백 구에서 천 구를 견디며 '품위 있는 자'로 남은 것이 '기록되지도, 기록될 수도 없는 영광의 장'이라고 말했다.

하인리히 힘러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와 경찰 체계를 확장해 인종주의적 지배와 대량학살을 관료적으로 조직한 핵심 지도자였다. 그는 강제수용소와 절멸정책, 점령지의 학살 부대를 통솔하며 유대인과 여러 집단에 대한 집단살해를 실행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에는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을 살해·추방하는 독일의 보복 작전을 승인하고 지시했다. 전쟁 말기 서방과의 독자적인 협상을 시도하다 히틀러에게 해임됐고, 영국군에 체포된 뒤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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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독일 국가사회주의 노동자당에 가입하고 뮌헨 폭동에 가담했다.
  • 1925친위대에 가입했다.
  • 1929–1945제국지도자 친위대로서 친위대를 지휘했다.
  • 1936–1945독일 경찰장으로서 경찰과 정치탄압 기구를 장악했다.
  • 1943–1945내무장관을 겸임했다.
  • 1944바르샤바 봉기에 대한 도시 파괴와 주민 학살·추방 작전을 지시했다.
  • 1945서방과의 독자 협상 시도로 해임되고 체포 뒤 자살했다.

모리스 토레즈

Maurice Thorez

광부의 아들에서 34년간 프랑스 공산당을 이끈 인민전선의 설계자

「프랑스 국민은 결코 소련과 싸우지 않을 것이다」 — NATO 가입을 앞둔 1949년 2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뉴욕 타임스』 1949년 2월 23일 보도)

탄광 소년 노동자 출신으로 34년간 프랑스 공산당을 이끈 정치인(1930–1964). 1936년 인민전선을 설계했고 전후 '프랑스식 사회주의로의 길'로 유로코뮤니즘의 선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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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2세에 탄광 노동자로 일하기 시작
  • 1919–1920사회당(SFIO) 입당 → 투르 대회에서 공산당 창립 참여
  • 1930–1964프랑스 공산당 서기장 — 34년간 당을 이끎
  • 1936인민전선 결성 주도, 블룸 정부의 사회개혁 뒷받침
  • 1939–1944프랑스군 탈영 후 소련 망명, PCF 레지스탕스 지도
  • 1945–1947드골 정부 국무장관 → 부총리(1946–1947)
  • 1950–1953뇌졸중으로 소련에서 치료, 자크 뒤클로가 당 대행
  • 1964서기장 사임 후 명예 의장, 흑해 유람선에서 사망

오토 브라운

Otto Braun
군사·지휘 코민테른 독일 독일 1900–1974 ○ 자연사

「리더」, 대장정에 동행한 유일한 서양인이자 쭌이 회의에서 책임을 추궁당한 코민테른 군사고문

코민테른 요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리더'라는 이름을 썼고 대장정에 동행한 거의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1935년 쭌이 회의에서 보구와 함께 지휘직에서 해임되었으며, 동독이 리더의 정체를 공식 밝힌 것은 1964년이었다.

뮌헨 출신 독일 공산당원으로 1928년 탈옥해 소련에 가 프룬제 군사아카데미에서 배웠다. 1932년 코민테른의 군사고문으로 상하이에 왔고 1933년 장시 소비에트에 들어가 보구와 함께 진지전 방어를 지휘했으나 제5차 포위토벌에 패했다. 대장정에서 1935년 쭌이 회의는 그와 보구의 군사 지도를 비판하고 마오를 앞세웠다. 1939년 모스크바로 돌아갔고 전후 동독에서 번역가·교수로 살며 1973년 회고록 『중국 기록』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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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9코민테른 파견 중국 군사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