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1945

혁명의 물결과 세계대전 333명

10월 혁명 뒤 유럽과 아시아로 번진 혁명의 물결, 코민테른 시대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전간기 각국의 정치가, 파시즘과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의 지도자와 지휘관들.

제임스 마틴 스태그

James Martin Stagg
학술·연구 영국 스코틀랜드 1900–1975 ○ 자연사

전쟁의 결정을 바꾼 기상학자

1944년 6월 4일 밤, 스태그는 폭풍 뒤 6월 6일 새벽까지 이어질 짧은 호전을 예보했다.

제임스 스태그는 영국 기상청 출신의 스코틀랜드 기상학자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기상 자문을 맡았다. 그는 해상 관측, 정찰 비행, 암호 해독 자료를 종합해 군사작전에 필요한 예보를 만들었고, 기상학을 지휘부의 작전 판단과 연결했다. 1944년 6월 4일 폭풍 뒤 6월 6일의 짧은 호전 가능성을 제시해 노르망디 상륙의 실행 조건을 판단하게 했으며, 이는 완벽한 날씨가 아니라 감수 가능한 위험을 과학적으로 규정한 결정이었다. 전후에도 기상청에서 일하며 자신의 경험을 『오버로드 예보』로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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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에든버러대학교에서 우등 문학석사 취득
  • 1924영국 기상청 조수
  • 1932–1933영국 북극 캐나다 탐험대 지휘
  • 1939큐 천문대 감독관
  • 1943–1945연합군 최고사령부 작전 오버로드 수석 기상장교
  • 1944영국 공군 지원예비역 소장 대우의 그룹 대령
  • 1945–1960전후 영국 기상청 근무, 1960년 서비스국장 퇴임
  • 1971『오버로드 예보』 출간

루이지 론고

Luigi Longo

스페인 내전과 레지스탕스의 지휘관 '갈로', 코민포름의 자아비판을 겪고 톨리아티의 뒤를 이은 PCI 사무총장

1964년 톨리아티의 뒤를 이어 PCI 사무총장이 되었을 때, 론고는 '나는 두목이 아니라 서기다'라고 선언했다.

1921년 리보르노 대회에서 이탈리아 공산당(PCI) 창당에 참여했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갈로'라는 이름으로 국제여단 총감독으로 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중 가리발디 여단을 지휘하며 이탈리아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전후 PCI 부서기로 톨리아티를 보좌했다. 1947년 코민포름 창립 회의(슈클라르스카 포렝바)에 에우제니오 레알레와 함께 PCI 대표로 참석해 프랑스 공산당과 함께 격렬한 자아비판을 받았으며, 이후 PCI의 노선을 강경 투쟁으로 전환시켰다. 1964년 톨리아티 사후 사무총장이 되어 '이탈리아식 사회주의' 노선과 모스크바에 대한 자율성을 추구했고, 1968년 프라하의 봄을 지지하며 소련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정식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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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리보르노 대회에서 PCI 창당 참여
  • 1936–1939국제여단 총감독 (스페인 내전), 별명 '갈로'
  • 1943–1945가리발디 여단 총사령관, CVL 부사령관
  • 1945–1964PCI 부서기
  • 1947.09코민포름 창립 회의 PCI 대표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 1964–1972PCI 사무총장
  • 1972–1980PCI 명예 의장

카를 프리드리히 오토 볼프

Karl Friedrich Otto Wolff

나치 SS의 고위 조정자이자 전쟁 말기의 협상 대표

1945년 3월 8일, 볼프는 스위스에서 앨런 덜레스와 북이탈리아 항복 조건을 논의했다.

카를 볼프는 나치 독일의 고위 SS 장교로,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참모장을 지내며 정권의 핵심 의사결정과 범죄에 접근했다. 이탈리아 점령기에 최고 SS·경찰 지도자로서 유대인 검거와 강제노동, 저항운동 탄압을 관할했고, 그 책임을 전후 협상 참여로 지울 수는 없었다. 1945년 스위스에서 미국 OSS의 앨런 덜레스와 비밀 협상인 작전 선라이즈를 진행해 북이탈리아 독일군의 조기 항복을 이끌었지만, 그 영향력과 동기는 제한적으로 평가된다. 전후에는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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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독일 제국군 제115 보병연대 장교 후보생, 서부전선 복무
  • 1931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과 SS 가입
  • 1935–1943SS 국가 지도자 개인참모장
  • 1943–1944이탈리아 최고 SS·경찰 지도자
  • 1944–1945이탈리아 주둔 독일군 전권대장
  • 1945작전 선라이즈 독일 측 협상 대표, 북이탈리아 항복 관여
  • 1964–1969뮌헨 법원에서 유대인 30만 명 살해 방조죄로 15년형, 1969년 석방

오자키 호쓰미

尾崎秀実
보안·정보·치안 소속 미확정 일본 일본 1901–1944 ✕ 처형

고노에 총리의 브레인이자 모스크바를 구한 일본인 간첩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훌륭하게 죽고 싶다.

오자키 호쓰미는 아사히 신문 기자이자 공산주의자로, 리하르트 조르게의 도쿄 첩보망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본인 정보원이었다. 그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브레인으로서 내각의 최고위급 기밀에 접근할 수 있었고, 1941년 9월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고 남방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결정적 정보를 조르게에게 전달해 모스크바 전투의 향방을 바꾸었다. 1941년 10월 체포되어 전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국가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사형 집행 전 감옥에서 아내와 딸에게 보낸 편지는 『사랑은 별비처럼』으로 출간되어 전후 일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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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1927아사히 신문 기자
  • 1928–1932아사히 신문 상하이 특파원
  • 1930상하이에서 리하르트 조르게와 접촉
  • 1934–1941조르게 도쿄 첩보망의 핵심 정보원
  • 1937–1941쇼와연구회 연구원, 고노에 내각 자문
  • 1938–1941고노에 총리 '조찬회' 멤버
  • 1941.10조르게 사건으로 체포
  • 1944.11.7스가모 구치소에서 교수형

야쿠프 베르만

Jakub Berman
정치·당 지도 폴란드 폴란드 폴란드계 1901–1984 ○ 자연사

폴란드 스탈린주의 권력의 이론가

베르만은 테레사 토란스카에게 “구세대 공산주의자들에게 당에 복무하는 것은 단지 목표가 아니라 삶의 내적 필요였다”고 말했다.

야쿠프 베르만은 전후 폴란드에서 이념·문화 정책과 국가보안기구를 감독한 공산주의 지도자였다. 그는 볼레스와프 비에루트, 힐라리 민츠와 함께 1948년 이후 정권의 핵심 삼두체제를 이루었고, 사회주의 건설과 정치적 억압이 결합된 체제를 운영했다. 1956년 비에루트 사망 뒤 권력에서 밀려났으며, 이듬해 당에서 제명되어 스탈린주의 청산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책임을 일부 인정하면서도 공산주의 대의에 대한 충성을 끝까지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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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폴란드 공산당 입당, 지식인 담당 활동
  • 1939–1941소련 점령지에서 폴란드어 공산주의 언론 편집
  • 1941–1944코민테른 국제레닌학교 강사
  • 1944–1948폴란드 노동자당 정치국원, 국가보안·정무 감독
  • 1948–1956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정치국원, 이념·문화·보안 담당
  • 1956정치국·중앙위원회에서 사임
  • 1957폴란드 통일노동자당에서 제명
  • 1958–1969『책과 지식』 출판사 편집자
학술·연구 트리니다드 토바고 트리니다드 토바고 1901–1989 ○ 자연사

아이티 혁명을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으로 되살린 트리니다드 출신 트로츠키주의자이자 범아프리카주의 지식인

“크리켓만 아는 자들이 크리켓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 『비욘드 어 바운더리』 서문, 키플링을 뒤집으며

트리니다드 출신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블랙 자코뱅』으로 아이티 혁명을 해방사로 재구성했으며, 트로츠키와 흑인 자기결정권을 논쟁했다.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을 발전시키고 크리켓으로 제국을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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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트리니다드 터너푸나에서 교사 로버트 알렉산더 제임스와 이다 엘리자베스의 장남으로 출생
  • 1910–1918퀸스 로열 칼리지(QRC) 장학생으로 입학, 졸업 후 동교에서 영문학과 역사 교사로 근무 (에릭 윌리엄스 제자)
  • 1932영국 랭커셔로 이주, 『맨체스터 가디언』 크리켓 기자로 활동하며 반식민 저술 시작
  • 1934–1936ILP 가입 및 트로츠키주의 그룹 활동, 희곡 『투생 루베르튀르』 상연, 첫 소설 『민티 앨리』 출간
  • 1937–1938『세계혁명』(코민테른사) 및 『블랙 자코뱅』 출간 — 트로츠키·오웰·E.H. 카의 찬사
  • 1938–1939SWP 초청으로 미국 순회 강연,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트로츠키와 '흑인 문제' 논쟁
  • 1941–1951두나옙스카야와 존슨-포레스트 경향 결성,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정립, 『변증법 노트』 집필
  • 1953미국에서 추방, 엘리스섬 구금 중 멜빌 연구서 『선원들, 배신자들, 난파자들』 집필
  • 1957–1960가나 독립 축하 방문, 은크루마 혁명 연구 집필; 트리니다드에서 PNM 기관지 『더 네이션』 편집장
  • 1963『비욘드 어 바운더리』 출간 — 크리켓을 통해 식민지 사회와 계급·인종을 분석한 자전적 명저
  • 1970–1980워싱턴 D.C. 연방시립대학 강사, 앨리슨 & 버즈비에서 저작 선집 4권 출간
  • 1989런던 브릭스턴에서 흉부 감염으로 88세로 사망, 트리니다드 터너푸나 묘지에 안장

히로히토

裕仁
군주·왕실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 1901–1989 ○ 자연사

제국의 전쟁과 전후 전환을 통과한 천황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 1945년 항복 조서의 구절

히로히토는 1926년부터 1989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제124대 천황으로, 제국 헌법의 군주와 전후 헌법의 상징천황을 모두 경험했다. 그는 일본의 대외 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승인한 국가 체제의 정점에 있었으며, 전쟁 수행과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의 범위는 지금도 논쟁적이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소련의 대일 참전 뒤 교착된 최고전쟁지도회의에 개입해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고 항복 방송을 했다. 전후에는 천황의 신격화를 부정하고 상징적 국가원수로 남았으며, 해양생물학 연구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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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도쿄에서 출생
  • 1916황태자로 책봉
  • 1921–1926섭정
  • 1926–1945일본 제124대 천황, 제국 헌법상 대권 행사
  • 1941대미·대영·대 네덜란드 개전 결정 승인
  • 1945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고 항복 방송
  • 1947–1989일본국 헌법상 상징천황
  • 1989도쿄에서 사망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인 1902–1947 ✕ 추락사

자유 프랑스의 기갑 지휘관

1941년 쿠프라에서 그는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에 프랑스 국기가 휘날릴 때까지 무기를 내려놓지 않겠다고 서약하게 했다.

필리프 르클레르 드 오트클로크는 1940년 패전 뒤 드골의 자유 프랑스에 합류해 식민지 군대와 망명군을 하나의 전투력으로 묶은 프랑스 장군이다. 그는 쿠프라에서 스트라스부르까지 이어지는 목표를 제시했고, 아프리카 전역에서 단련한 기동전을 제2기갑사단에 이식했다. 1944년 8월에는 연합군의 파리 우회 구상에 맞서 수도로 진격해 프랑스군과 레지스탕스가 주도하는 해방을 실현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는 군사적 승리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음을 인식했지만, 1947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해 그 판단을 끝까지 펼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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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졸업
  • 1925–1939기병 장교, 모로코 복무 및 전쟁대학 수료
  • 1940자유 프랑스 합류, 드골의 지휘 아래 아프리카 파견
  • 1940–1943카메룬·차드 군사 지휘관, 쿠프라·페잔 전역 지휘
  • 1943–1945제2기갑사단 지휘, 노르망디·파리·스트라스부르 해방전 참가
  • 1945–1946극동 프랑스 원정군 사령관, 일본 항복식 프랑스 대표
  • 1946–1947북아프리카 육군 감찰관
군사·지휘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 1902–1961 ✕ 라오스에서 실종

국경 방침서로 할힌골 사건을 일으킨 관동군 참모

다나카 류키치 장군은 전후 증언에서 '대미 전쟁을 가장 단호하게 주장한 단 한 사람이 쓰지 마사노부였다'고 밝혔다.

관동군 작전참모였던 쓰지 마사노부는 스스로 작성한 국경 방침서로 1939년 할힌골 사건을 일으켜, 아래로부터의 월권(게코쿠조)으로 소련과의 국경전쟁을 밀어붙였다. 할힌골 패배 뒤에는 소련의 화력을 목격한 경험을 근거로 대소전을 반대하면서도, 도리어 대미 개전의 가장 강경한 주창자가 되었다. 말레이 작전 입안자이자 바탄 죽음의 행진·숙칭 학살의 주모자였던 그는 전범 재판을 피해 도주했다가 귀국해 중의원 의원으로 재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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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통제파(도세이하) 활동, 황도파 쿠데타 저지
  • 1937–1939관동군 작전참모
  • 1939.04「국경 방침서」 작성, 할힌골 사건 유발
  • 1941참모본부 작전과, 대미 개전 주창
  • 1941–1942말레이 공세 입안, 싱가포르 함락, 숙칭 학살
  • 1942바탄 죽음의 행진, 과달카날 공세
  • 1952중의원 의원 당선(재선)

나즘 히크메트

Nâzım Hikmet
문학·예술 튀르키예 튀르키예 1902–1963 ○ 자연사

28년형을 시로 살아낸 터키 혁명시인, 모더니즘과 공산주의를 결합한 20세기 문학의 거인

“내 나라의 푸른 하늘 아래 평범한 마을 공동묘지의 플라타너스 나무 밑에 묻어다오” — 모스크바 유언, 1963년

오스만 살로니카 출신의 나즘 히크메트는 1921년 소련에서 마야콥스키와 레닌을 만나 평생의 공산주의자가 되었고, 터키로 돌아와 자유시를 도입하며 문학 혁신을 일으켰다. 《835행》에서 16,000행 대서사시 《내 조국의 인간 풍경》에 이르기까지, 민중의 삶과 독립전쟁을 노래한 방대한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군사법정의 28년형으로 12년간 수감되었고 피카소·사르트르·로브슨의 국제 석방운동을 촉발했다. 1951년 소련 탈출 후 13년간 세계평화운동과 반식민주의에 헌신했으며, 시는 5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유네스코는 2002년을 '나즘 히크메트의 해'로 선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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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첫 시 〈조국의 비명(Feryad-ı Vatan)〉 발표
  • 1918이스탄불 해군사관학교 졸업, 해군 장교 복무
  • 1921터키 독립전쟁 참가 위해 아나톨리아로 이동, 무스타파 케말과 만남
  • 1922–1924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에서 수학, 볼셰비키당 입당
  • 1924–1925터키 귀환, 잡지 《아이든르크(Aydınlık)》 편집 — 불법 터키공산당 기관지
  • 1929첫 자유시집 《835행》 출간 — 터키 시의 혁명
  • 1933–1935《밤에 온 전보》로 첫 투옥, 부르사 교도소에서 《셰이흐 베드레딘 서사시》 집필
  • 1938–1950군사반란 선동 혐의로 28년형 선고, 4개 도시 교도소에서 12년 복역
  • 1939–1960옥중에서 대서사시 《내 조국의 인간 풍경》 16,000행 집필
  • 1950국제 석방운동과 단식투쟁 끝에 사면 — 국제평화상 수상
  • 1951–1963소련 망명 — 세계평화평의회 상임위원, 반식민주의·반전 활동
  • 1963.6.3모스크바 페레델키노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뱅상 앙리 바디

Vincent Badie
정부·행정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902–1989 ○ 자연사

공화국을 지키려 한 급진사회주의자

“공화국 만세, 그래도!”

뱅상 바디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급진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지방 행정과 의회에서 활동하며 참전군인과 공화국의 권리를 옹호했다. 1940년 7월 그는 헌법 개정 자체에는 열려 있었지만 페탱에게 권력을 넘겨 공화국을 없애는 데는 반대했고, 이를 밝힌 27인 동의안의 발의를 시도한 뒤 전권 부여에 반대표를 던졌다. 비시 당국의 시장직 정지 뒤 레지스탕스에 참여했으며 체포되어 다하우로 deport되었다. 전후에는 다시 의원과 참전군인 담당 장관을 지냈지만 식민 지배와 프랑스의 해외 주둔을 옹호하는 한계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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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몽펠리에 변호사단 변호사
  • 1931–1938에로주 몽펠리에·지냐크 선거구 도의원
  • 1936–1942에로주 하원의원
  • 1938–1941, 1944–1971폴랑 시장
  • 1945임시 자문회의 의원
  • 1946–1958제4공화국 국민의회 의원
  • 1955–1956, 1958참전군인·전쟁 피해자 담당 장관
  • 1957–1958급진사회주의 의원단 의장

훌리오 안토니오 메야

Julio Antonio Mella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쿠바 쿠바 1903–1929 ✕ 암살

25세에 암살된 쿠바 공산당의 학생 창립자, 반제국주의 순교자

1928년 12월, 멕시코시티의 격렬한 당 회의에서 비탈리가 메야에게 소리쳤다 — "잊지 마라: 인터내셔널에서 나가는 길은 둘뿐이다, 제명되거나 죽거나!" 한 달 후 메야는 거리에서 암살당했다.

쿠바 공산당을 공동 창립한 학생운동 지도자로, 아바나 대학에서 반제국주의 학생투쟁을 조직하고 카를로스 발리뇨와 함께 1925년 쿠바 최초의 마르크스-레닌주의 정당을 세웠다. 마차도 독재에 쫓겨 멕시코로 망명한 후에도 혁명운동을 이어가다 1929년 25세의 나이로 암살당했으며, 쿠바 혁명 좌파의 상징적 순교자로 카스트로 세대에게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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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아바나 대학 법학부 입학 — FEU 공동 창립, 서기 역임
  • 1923FEU 회장 취임 — 제1차 전국학생대회 주최, 호세 마르티 인민대학 설립
  • 1924아바나 공산주의 그룹 가입, 반제국주의 동맹 쿠바 지부 결성
  • 1925카를로스 발리뇨와 함께 쿠바 공산당 창당 — 중앙위원; 체포 후 18일 단식투쟁
  • 1926대학 제적, 당에서 2년간 제명 — 온두라스·과테말라 거쳐 멕시코시티로 망명
  • 1926–1927쿠바 혁명적 망명자 협회(ANERC) 창립 — 『쿠바 리브레』 등에 기고
  • 1927브뤼셀 식민지 억압 반대 세계대회 참석 — 모스크바에서 국제노조인터내셔널 4차 대회 참관
  • 19291월 10일 멕시코시티에서 귀가 중 총격 암살 — 향년 25세

갈레아초 치아노

Galeazzo Ciano

파시즘의 외교관이자 내부 붕괴의 증인

1943년 7월 25일, 치아노는 장인 무솔리니의 축출을 뜻하는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갈레아초 치아노는 무솔리니의 사위이자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핵심 외교관으로, 정권의 팽창과 독일 의존을 추진하면서도 전쟁의 파국이 다가오자 그 노선에서 이탈했다. 그는 에티오피아 전쟁과 알바니아 침공, 그리스 공격을 지지했으며 외무장관 재임 중 외교 기록과 일기를 남겼다. 1943년 7월 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디노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해 무솔리니 축출에 가담했지만, 자신의 특권적 지위가 보존될 것이라는 계산은 빗나갔다. 독일로 달아났다가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에 넘겨진 그는 베로나 재판 뒤 처형되었고, 그의 일기는 파시즘 내부의 책임과 붕괴를 보여 주는 중요한 사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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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법학 학위 취득 뒤 외교관으로 전환
  • 1935–1936언론·선전 장관, 에티오피아 전쟁에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
  • 1936–1943이탈리아 왕국 외무장관
  • 1939독일과의 강철 조약 체결에 참여
  • 1943.02–07바티칸 주재 대사
  • 1943.07파시스트 대평의회에서 그란디 결의안에 찬성
  • 1944.01베로나 재판 뒤 총살

조지 오웰

George Orwell
문학·예술 영국 영국 1903–1950 ○ 결핵

POUM 민병대에서 총상을 안고 돌아와 전체주의의 언어를 해부한 민주적 사회주의자

『카탈루냐 찬가』, 1936년 12월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첫인상: 「내가 노동계급이 안장에 올라앉은 도시에 있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 버마 제국경찰 5년과 파리·런던 밑바닥 생활의 르포로 작가가 되었고, 1936년 12월 스페인으로 건너가 영국 독립노동당(ILP)의 소개로 POUM 민병대에 들어가 아라곤 전선에서 넉 달을 보내다 우에스카에서 목에 저격 총상을 입었다. 요양 중 겪은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시가전과 뒤이은 POUM 불법화는 그를 소련식 공산주의와 완전히 갈라서게 했고, 그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자」로 수배되어 아내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그 경험을 적은 『카탈루냐 찬가』는 출간 반년 동안 683부밖에 팔리지 않았다. 오웰은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했으며, 『동물농장』과 『1984』는 혁명이 새로운 지배로 굳는 과정과 그것을 떠받치는 언어를 해부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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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영국령 인도 모티하리에서 식민지 아편국 관리의 아들 에릭 아서 블레어로 출생
  • 1917–1921이튼 칼리지 장학생
  • 1922–1927인도 제국경찰로 버마 근무, 제국 통치에 대한 환멸 끝에 사직
  • 1928–1932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접시닦이·교사·서점 점원
  • 1933『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출간,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
  • 1936잉글랜드 북부 탄광지대 취재로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집필, 에일린 오쇼너시와 결혼
  • 1936.12바르셀로나 도착, 독립노동당(ILP)의 소개로 POUM 민병대 입대
  • 1937.01–05아라곤 전선 알쿠비에레·우에스카 복무, 5월 우에스카에서 목에 저격 총상
  • 1937.05휴가 중 바르셀로나 5월 사태를 겪으며 POUM 건물을 경비
  • 1937.06POUM 불법화 후 수배되어 아내와 함께 프랑스로 탈출
  • 1938『카탈루냐 찬가』 출간, 반년간 683부 판매
  • 1941–1943BBC 동방부에서 인도 대상 방송 제작
  • 1945『동물농장』 출간
  • 1949『1984』 출간
  • 1950.01.21런던의 병원에서 결핵으로 사망

김책

김책

만주 항일유격대에서 김일성과 함께 싸운 조선의 혁명군사 지도자

김일성 주석이 생전에 쓰던 금고 안에는 오직 한 장의 사진만이 보관되어 있었다.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금고를 열자, 그 안에는 김책과 함께 찍은 낡은 사진 한 장만이 남아 있었다.

1920년대 만주에서 조선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을 거치며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했고, 1930년대 동북항일연군에서 김일성·최용건과 함께 '만주파 3인방'으로 불리며 유격전을 지휘했다. 1945년 귀국 후 김일성의 최측근으로서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과 김일성 추대 운동을 주도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부수상 겸 산업상으로 취임해 전후 산업 기반 복구를 진두지휘했다. 한국전쟁 발발 후 전선사령관으로 인민군을 지휘했으며, 1951년 1월 전시 중 과로로 사망했다. 사후 그의 이름은 김책시·김책공업종합대학·김책제철소에 붙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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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조선공산당 입당, 간도공산당 사건으로 체포·투옥
  • 1930중국공산당 입당, 동경성구위 서기
  • 1933–1940동북항일연군 제3군 제4사 정치부 주임, 북만임시성위 서기
  • 1942–1945소련 극동 제88국제여단 제3영 정치위원
  • 1945–1946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창설 주도, 평양학원 초대 원장
  • 1946–1948북조선인민위원회 부위원장, 북조선로동당 정치위원
  • 1948–1951내각 부수상 겸 산업상, 민족보위성 부상 겸직
  • 1950–1951한국전쟁 조선인민군 전선사령관

하인츠 라이네파르트

Heinz Reinefarth
군사·지휘 소속 미확정 독일 독일계 1903–1979 ○ 자연사

바르샤바 봉기의 학살을 지휘한 SS 장군

라이네파르트는 바르샤바 봉기 진압 보고에서 “죽일 탄약보다 포로가 더 많다”고 썼다.

하인츠 라이네파르트는 나치당과 SS에 가입해 법률가에서 독일 점령전쟁의 지휘관으로 전환한 인물이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에서 그는 전투부대와 경찰·보안 병력을 묶은 전투단을 지휘했고, 8월 5일 볼라 공격과 민간인 집단살해의 현장 지휘 구조에 핵심적으로 관여했다. 전후 폴란드의 송환 요구에도 기소와 유죄 판결을 피한 그는 서독에서 시장과 주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그의 경력은 전쟁범죄 지휘 책임과 전후 사회의 면책이 한 인물 안에서 이어진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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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예나에서 법학을 마치고 법률가로 일하기 시작했다.
  • 1932나치당과 SS에 가입했다.
  • 1942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에서 SS 민정 행정감찰관을 맡았다.
  • 1944바르테란트 SS·경찰고등지도자가 되었다.
  • 1944-08바르샤바 봉기 진압 전투단을 지휘했다.
  • 1945퀴스트린 요새 사령관을 맡았고 미군에 체포되었다.
  • 1951–1964베스터란트 시장을 지냈다.
  • 1962–1967슐레스비히홀슈타인 주 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보안·정보·치안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904–1942 ✕ 암살 공격 부상으로 사망

친위대 정보·경찰기관 수장으로 홀로코스트 실행을 지휘한 나치 관리다.

1942년 반제 회의에서 하이드리히는 유럽 유대인 살해를 위해 독일 국가기관들의 협력을 조율했다.

하이드리히는 1931년 친위대에 들어가 국가보안부(SD)를 조직하고 이끌었으며, 1936년에는 게슈타포와 형사경찰을 포괄한 보안경찰을 지휘했다. 1939년 제국보안본부(RSHA)가 설치되자 수장이 되어 보안경찰과 SD를 통합 지휘했고, 유대인과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나치의 박해와 살해 정책을 실행하는 핵심 기관을 이끌었다. 1941년 총독 대리로 임명된 보헤미아·모라비아에서 저항 세력을 처형하고 유대인 게토화와 강제이송을 추진했다. 1942년 1월 반제 회의를 주재해 유럽 유대인 살해를 위한 부처 간 협력을 조율했으며, 5월 체코 저항요원의 공격으로 부상한 뒤 6월 4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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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1942친위대 국가보안부(SD) 수장
  • 1936–1942보안경찰 수장, 1936–1939년 보안경찰 수석사무국장
  • 1939–1942제국보안본부(RSHA) 수장
  • 1941–1942보헤미아·모라비아 총독 대리

김무정

金武亭

대장정을 완주한 유일한 조선인, 팔로군 포병사령관에서 조선의용군 총사령을 지낸 연안파 군사지도자

30여 명의 조선인이 대장정에 나섰으나 오직 무정만이 살아남아 옌안에 도착했다.

중국공산당에 1925년 입당하여 대장정에 참가한 유일한 조선인으로, 팔로군 포병사령관까지 올랐다. 화북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을 조직해 총사령을 맡으며 연안파의 핵심 군사지도자가 되었다. 해방 후 북조선으로 돌아와 조선인민군 포병사령관 겸 제2군단장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으나, 김일성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 1950년 12월 패전 책임과 살인 혐의로 숙청되었다. 그의 몰락은 연안파 제거의 신호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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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중국공산당 입당
  • 1934–1935중국 홍군 대장정 참가
  • 1937–1940팔로군 포병사령관
  • 1942조선의용군 총사령
  • 1946북조선로동당 제2비서
  • 1948민족보위성 부상 겸 제2지휘소 사령관
  • 1950조선인민군 제2군단장
교육 알바니아 알바니아 알바니아 1904–1960 ↓ 수감 중 사망

반파시스트 저항에서 전후 야당 운동으로

1945년, 저항운동의 동료들이 권력을 굳히는 동안 선거법이 야당의 출마 준비를 가로막는다고 비판했다.

슈코더르 출신의 알바니아 교육자·정치인. 파리에서 문학을 공부하고 반파시스트 저항에 참여했으며, 1944년 10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교육장관을 지냈다. 전후 선거법과 야당 활동 제한에 반대하다 1946년 체포되어 수감 중 사망했다. 생몰연도는 AIDSSH의 1960년설을 따르며, 사망지·형량의 이견은 아래에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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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민족해방전선 참여
  • 1944–1945교육장관
  • 1945선거법 비판·민주연합 야당 운동
  • 1946체포·투옥

솔리 주커먼

Solly Zuckerman
학술·연구 영국 남아프리카공화국 1904–1993 ○ 자연사

과학을 전쟁정책의 실험실로 옮긴 자문가

시칠리아 철도 폭격 분석에서 그는 기관차와 수리시설을 끊어야 철도망 전체가 멈춘다는 결론을 끌어냈다.

솔리 주커먼은 영국의 동물학자이자 공무원으로, 과학적 관찰과 실험을 정부 정책에 결합한 운용연구의 선구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폭격 효과를 조사하고 지중해 전선의 경험을 분석해, 노르망디 상륙을 앞두고 프랑스 철도망을 마비시키는 교통계획을 설계했다. 이 계획은 독일군 증원을 늦추는 데 기여했지만 프랑스 민간인 피해와 폭격의 효과를 둘러싼 논쟁도 남겼다. 전후에는 영국 최초의 정부 수석과학고문으로 과학과 국가정책의 관계를 제도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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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케이프타운대학교에서 동물학 학위 취득
  • 1928–1932런던동물학회 해부학 연구자
  • 1934–1945옥스퍼드대학교 해부학 교수
  • 1943–1945영국 폭격조사단 과학국장, 연합군 공군 자문가
  • 1946–1968버밍엄대학교 해부학 교수
  • 1960–1966국방부 수석과학고문
  • 1964–1971영국 정부 최초의 수석과학고문
  • 1977–1984런던동물학회 회장
  • 1971버넘소프의 주커먼 남작으로 종신귀족 서임

김산

김산

일제하 조선 독립과 중국 혁명을 오가며 싸운 국제주의 사회주의자, 《아리랑》의 주인공

“나는 죽어서도 조선의 독립과 내가 평생 믿어온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고 싶소.” — 옌안에서 님 웨일즈에게 남긴 말

일제하 조선 독립운동과 중국 혁명을 오가며 싸운 국제주의 사회주의자다. 옌안에서 미국 언론인 님 웨일즈에게 스물두 차례 인터뷰를 남겨 《아리랑》(1941)의 생생한 증언을 남겼고, 1938년 간첩 누명으로 처형되었다가 1983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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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3·1운동 참가, 일본 경찰에 3일간 구금
  • 1921일본 도쿄 유학 후 중국으로 이동
  • 1922중국 공산당 입당
  • 1923공산청년동맹 가입, 잡지 《혁명》 간행
  • 1925–1927황포군관학교·중산대학 수학, 광저우 봉기 참전
  • 1936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 창설,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출
  • 1937옌안 항일군정대학 강사, 님 웨일즈와 인터뷰
  • 1938캉성 보안기관에 체포, 간첩 누명으로 처형

점령에 맞선 민중전쟁의 조직가

1942년 도므니스타에서 그는 소수의 산악 유격대를 이끌고 ELAS의 출현을 선언했다.

본명 아타나시오스 클라라스인 아리스 벨루히오티스는 그리스 공산당 활동가로서 점령기 그리스의 민족해방전선 EAM과 그 군사조직 ELAS를 연결한 핵심 조직가였다. 그는 1942년 루멜리 산악지대에서 소수의 유격대를 꾸려 ELAS의 초기 기반을 세웠고, 규율과 대중정치를 결합해 저항을 전국적 힘으로 키웠다. 고르고포타모스 교량 폭파 같은 연합작전은 점령에 맞선 무장투쟁의 가능성을 보여 주었지만, EAM-ELAS의 우세는 다른 저항세력 및 영국과의 충돌도 심화시켰다. 바르키자 협정 뒤 무장해제를 거부한 그는 당 지도부와 결별하고 1945년 고립된 채 죽었으며, 이후 그리스 공산주의 운동에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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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좌익·반군국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그리스 공산당에 가입
  • 1930년대 초공산주의 신문 《리조스파스티스》 편집진으로 활동
  • 1936–1941메타자스 독재 아래 투옥과 강제 전향 선언을 겪음
  • 1942년 1월KKE의 파견으로 루멜리에서 유격전 준비를 시작
  • 1942년 6월도므니스타에서 ELAS의 창설과 산악 유격대 활동을 공개
  • 1942년 11월고르고포타모스 교량 폭파작전에 참여
  • 1944년 10월해방 뒤 중부 그리스와 펠로폰네소스에서 ELAS 작전을 지휘
  • 1945년바르키자 협정 뒤 무장투쟁을 계속하다 전사

나자티 시드키

نجاتي صدقي

팔레스타인과 스페인의 반파시즘을 연결한 활동가

1936년 스페인에서 프랑코군의 모로코 병사들에게 접근했다. 반파시즘 연대가 북아프리카 식민지 문제와 충돌하는 지점을 직접 경험했다.

팔레스타인의 공산주의 활동가이자 작가·번역가. 예루살렘에서 성장하고 모스크바에서 공부했으며, 1936년 스페인으로 가 공화파를 지원했다. 프랑코군에 속한 모로코 병사들을 상대로 선전 활동을 벌이며 스페인의 반파시즘과 아랍인의 해방 문제를 연결했다. 이후 언론과 문학 번역에 종사했다. 그의 회고록은 아랍인 참가자의 시각에서 스페인 내전을 읽을 수 있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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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예루살렘에서 영국 위임통치 당국 체신부에서 근무하며 유대인 노동자들을 통해 공산주의 운동에 접촉, 팔레스타인 공산당에 입당.
  • 1925–1928팔레스타인 공산당 지도부의 파견으로 모스크바 동방노력자공산대학(KUTV)에서 수학하고 우크라이나 출신 공산주의자와 결혼했다.
  • 1930예루살렘에서 열린 제7차 당대회에서 팔레스타인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고 지하 신문 『일랄-아맘』 편집에 참여했다.
  • 1931–1933영국 당국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야파·아크레 감옥에서 2년형을 복역하고 석방 후 6개월간 경찰 감시를 받았다.
  • 1933–1936코민테른의 파견으로 파리에서 아랍어 월간지 『알-샤르크 알-아라비』를 편집했으나 프랑스 당국의 폐간 조치를 당했다.
  • 1935–1936타슈켄트에서 소련의 민족 문제 경험을 연구한 뒤 1936년 8월 코민테른의 지시로 스페인에 파견되어 프랑코군의 모로코 병사들을 상대로 선전 활동을 벌였다.
  • 1937–1939시리아와 레바논으로 옮겨 다마스쿠스·베이루트의 공산주의 서클에서 활동하며 당 기관지에 글을 썼다. 1939년 8월 독소 불가침 조약을 비판한 이유로 시리아-레바논 공산당에서 제명되었다.
  • 1939–1948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영국 당국이 운영하는 근동방송에서 일하면서 문학 활동에 집중했고, 카이로에서 푸시킨(1945)과 체호프(1947)를 출간했다.
  • 1948–19761948년 팔레스타인인 대이주 이후 방송국을 따라 키프로스 리마솔로 옮겨 1950년까지 살았고, 이후 베이루트에서 언론·번역·문학 비평 활동을 이어갔다.
  • 1976–1979딸이 살던 그리스 아테네로 옮겼고 1979년 그곳에서 사망해 아테네에 안장되었다.

앙리 프르네

Henri Frenay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프랑스 프랑스인 1905–1988 ○ 자연사

비시 지지에서 저항운동으로 이동한 레지스탕스 조직가

“나는 페탱 원수와 이중 역할,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국민혁명을 믿었다.”

앙리 프르네는 프랑스 육군 장교 출신으로, 1940년 패전 뒤 군사적 규율과 애국주의를 지하 저항의 조직 원리로 바꾼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페탱과 국민혁명이 프랑스를 구할 수 있다는 기대를 품었지만, 비시의 협력과 억압을 겪으며 입장을 바꾸었다. 베르티 알브레히트와 함께 국민해방운동을 세우고 지하 신문을 확장해 콩바를 주요 저항운동으로 발전시켰으며, 전후에는 포로·강제이송자·난민의 귀환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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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6생시르 특별군사학교 생도
  • 1935–1938고등전쟁학교 수학, 독일 연구
  • 1939–1940마지노선 제43요새군단 참모장교
  • 1940포로수용소 탈출, 국민해방운동 조직 시작
  • 1941–1943콩바 창립자·지도자, 지하 언론 조직
  • 1943–1945포로·강제이송자·난민 담당 국무위원·장관
  • 1948–1954유럽연방주의자연합 의장
  • 1976회고록 《밤은 끝나리》 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