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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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헬름 피크

Wilhelm Pieck
동독 국가기관 공산주의 동독 독일 1876–1960 ○ 자연사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동독 국가원수까지, 독일 공산주의의 전 생애를 살아낸 유일한 생존 창립자

1919년 1월 15일 밤, 피크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끌려갔다. 그는 동지들의 마지막 신문에 입회한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마부의 아들로 가구공을 거쳐 1895년 사민당에 입당,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좌파로 성장했다. 1차대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에 회부되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KPD 창립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유일하게 생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1921)과 상임위원(1931)을 거쳐, 나치 집권 후 모스크바에서 KPD 망명 지도부를 이끌며 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전후 귀국해 사민당과의 합당으로 SED를 창출했고, 1949년 동독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망까지 국가 원수직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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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5징집 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 회부, 암스테르담 망명
  • 1918–1919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중앙위원
  • 1921코민테른(IC) 집행위원회 위원, 프로이센 란트타크 의원
  • 1928–1933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1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
  • 1934–1946KPD 의장 (망명 지도부)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43자유독일 국가위원회(NKFD) 공동 설립
  • 1946–1950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공동의장
  • 1949–1960독일민주공화국(GDR) 대통령

어니스트 베빈

Ernest Bevin

노동조합에서 전후 외교로 나아간 현실주의자

1946년 모스크바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공세가 이어지자 그는 "이제 지긋지긋하다"고 외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니스트 베빈은 가난한 노동자에서 영국 최대 노동조합의 지도자로 성장한 노동운동가이자 노동당 정치가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노동력 동원을 조직한 경험은 전후 영국의 외교와 유럽 재건을 노동과 국가 역량의 문제로 보게 했다. 외무장관으로서 그는 조르주 비도와 함께 마셜의 하버드 연설에 대한 유럽의 대응을 조직하고, 영국의 안보와 서유럽 협력을 미국의 원조 및 대서양 동맹과 결합했다. 동시에 그의 강한 반공주의와 제국적 이해관계는 전후 질서의 국제주의가 해방과 지배를 함께 품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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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브리스틀 항만·부두·강변 노동자노조 브리스틀 지부 서기
  • 1914항만·부두·강변 노동자노조 전국 조직가
  • 1922–1940운수·일반노동자노조 초대 전국서기장
  • 1940–1945전시 연립정부 노동·국민역무부 장관
  • 1945–1951애틀리 내각 외무장관
  • 1947조르주 비도와 유럽경제협력위원회 조직, 마셜 원조 대응 주도
  • 1949북대서양조약기구 창설에 기여

여운형

여운형

레닌·쑨원과 만나고 좌우합작을 택한, 분단 직전 조선의 마지막 통일주의자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 수차례 테러를 겪으며 자식들에게 남긴 말.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백의사의 총에 쓰러졌다.

1918년 신한청년당을 결성,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을 주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창립에 참여하고, 1922년 모스크바에서 레닌·트로츠키와 면담했으며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했다. 1945년 8월 총독부로부터 평화적 치안권 이양을 받아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이 되었다. 1946~47년 김규식과 좌우합작운동을 이끌며 통일정부를 추진했으나, 극우단체 백의사에 암살당했다. 남북 모두가 공식 추모한 유일한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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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 결성, 당수 취임
  • 19192·8독립선언 주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 1920–1922고려공산당 상하이파 입당; 모스크바 원동피압박민족대회 참석, 레닌·트로츠키 면담
  • 1925–1929쑨원 권유로 중국국민당 입당, 국공합작 참여
  • 1933–1936조선중앙일보 사장; 조선체육회 회장
  • 1944비밀결사 건국동맹 결성, 전국 조직화
  • 1945.08–09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
  • 1946–1947좌우합작운동 전개, 근로인민당 위원장

오메르 니샤니

Omer Nishani
공산주의 알바니아 알바니아 1887–1954 사인 미확정

알바니아의 의사·정치인, 인민공화국의 공식 첫 국가수반

제헌의회는 1946년 1월 11일 개회해 같은 날 인민공화국을 선포했고, 3월 16일 인민의회로 전환되었다. 다른 기록은 선출 1월 10·12일(저신뢰 계보), 퇴임 7월 31일로 적는다.

알바니아의 의사·정치인. 1887년 2월 5일 오스만 제국 지로카스트라에서 태어나 이스탄불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1924년 조구 암살 시도로 2주간 수감되고 판 놀리의 6월 혁명을 지지했으며, 1925년 망명지에서 반조구 KONARE를 함께 세웠다. 1939년 이탈리아 침공 후 점령정부 국가평의회에 참여했다가 이를 실책으로 여기고 민족해방운동에 합류해 1944년 페르메트 회의에서 반파시즘 민족해방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1946년 제헌의회 의장이 되었고 인민의회 상임간부회 의장으로 1953년까지 공식 국가수반을 지냈으나, 실제 권력은 노동당 제1서기 엔베르 호자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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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20알바니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14년 지로카스트라 대대과 블로러에서 근무하고 빈에 파견되었으며, 1915~1918년 발시 시의, 1920년 티라나 병원 의사
  • 1923–1924두러스 시의사
  • 1924조구 암살 시도로 2주간 수감, 판 놀리의 6월 혁명 지지 후 망명, 궐석 재판에서 사형 선고
  • 1925–1932반조구 KONARE 공동 창립에 참여, 제네바에서 기관지 《리리아 콤베타레》 운영(1926년부터 주필)
  • 1933–1939그리스 잔테에서 정치 망명, 1939년 이탈리아 침공 후 귀국
  • 1940–1943점령정부 국가평의회 위원(1944년 1월 13일까지 명부에 남음), 1943년 8월 전선 합류; 이후 민족해방운동 참여
  • 1943.09민족해방 총평의회 상임위원회 의장
  • 1944.05페르메트 회의에서 반파시즘 민족해방평의회 의장(외교 담당)
  • 1944.10–1946호자 의장의 민족해방 반파시즘 위원회에서 외무장관(사료에 따라 1946년 2월 9일 또는 3월 22일까지)
  • 1946–1954지로카스트라 대의원(1945년 12월 2일·1950년 5월 28일 선거)
  • 1946.01–1953제헌의회 의장, 인민의회 전환 후 상임간부회 의장으로 공식 국가수반(영어 위키백과는 제헌의회 의장, ShtetiWeb은 1월 12일 선출·7월 31일까지로 기록)
  • 1952–1953동생 베심 니샤니가 인민정부에 대한 선전 혐의로 체포되고(1952년 10월 1일 체포·8개월 예심구금) 부인과 결별; 1953년 우익지 보도는 부인의 강제퇴거·가택연금과 니샤니의 사실상 포로 상태를 전함
  • 1953.07공식적으로는 7월 24일 건강을 이유로 사임을 요청하고 8월 1일 하지 레시가 후임했으며, 호자가 강제로 사임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야코프 카이저

Jakob Kaiser

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 대표였다가 군정청에 밀려나 서독 전독일문제 장관이 된 정치가

바이에른 함멜부르크의 제본공 출신으로 가톨릭 노동조합 운동을 이끌었고, 중앙당 소속으로 1933년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나치에 맞선 저항운동에 가담해 1938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었고, 1944년 7월 20일 암살 기도 뒤 숨어 지냈다. 전후 소련 점령지구에서 기독교민주연합을 함께 세우고 레머와 함께 대표를 맡았으며,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주장했다. 공산당을 비판한 끝에 1947년 12월 레머와 함께 소련 군정청에 의해 대표직에서 물러났고, 서베를린으로 옮겼다. 아데나워의 서방 통합에 맞서 중립 통일 독일을 바랐고, 1949~1957년 전독일문제 장관을 지냈다. 1961년 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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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중앙당 제국의회 의원
  • 1938게슈타포에 체포
  • 1945–1947소련 점령지구 기독교민주연합 공동대표
  • 1947소련 군정청에 의해 해임
  • 1949–1957서독 전독일문제 장관

에리히 그니프케

Erich Gniffke
독일 사회민주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95–1964 ○ 심장마비

동독 사회민주당을 재건하고 통합에 서명했으나 1948년 사회주의통일당을 탈당해 서쪽으로 간 조직가

엘빙의 조선소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13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사무직 노조 간부로 브라운슈바이크에서 그로테볼과 함께 일했다. 나치 시기 사회민주당 저항 모임에 가담해 1938년 그로테볼과 함께 투옥되었다. 1945년 5월 그로테볼과 함께 베를린에서 사회민주당을 재건해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고, 공산당과의 합의와 통합 선언에 사회민주당 쪽 첫 서명자로 이름을 올렸다. 1946년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서기국원에 뽑혔으나 당의 스탈린화 속에 고립되었고, 1948년 9월 모든 직책에서 물러났다. 10월 「새로운 형태의 당」이 전체주의 독재로 이어질 것이라는 탈당 편지를 쓰고 서쪽으로 도피했다. 1964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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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사회민주당 입당
  • 1938그로테볼과 함께 투옥
  • 1945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46사회주의통일당 중앙서기국원
  • 1948모든 직책에서 물러나고 탈당, 서쪽으로 도피

루드비크 스보보다

Ludvík Svoboda
체코슬로바키아 국가기관 공산주의 체코 체코 1895–1979 ○ 자연사

두 차례 세계대전을 치른 국민영웅에서 프라하의 봄의 뜻밖의 보루가 된 군인 대통령

1968년 8월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가 '노동자-농민 정부'를 세우라 요구하자, 스보보다는 둡체크와 개혁파 지도부를 석방하지 않으면 내 머리에 총알을 박겠다고 응수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서 탈영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 합류한 1차대전 참전자로, 2차대전에서는 소련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해 동부전선을 누비며 국민영웅으로 떠올랐다. 1948년 국방장관으로서 '군대는 인민을 향해 진군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며 공산당의 2월 쿠데타를 방조했으나, 곧 숙청당해 1950년대를 수감과 은둔으로 보냈다. 1968년 3월 둡체크의 추천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프라하의 봄 개혁에 동의했고, 8월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직후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앞에서 권총 자살을 위협하며 납치된 개혁파 지도부의 석방을 이끌어냈다. 이후 정상화 국면에서 신문 검열에 협력하고 둡체크 교체를 방조하는 등 소극적 순응으로 일관하다 1975년 헌법 조항으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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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20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즈보로프·바흐마치 전투, 시베리아 철수
  • 1921–1939체코슬로바키아군 장교; 뮌헨 위기 당시 대대장
  • 1939–1945폴란드·소련에서 체코슬로바키아군 편성; 제1군단장으로 키예프·두클라 해방
  • 1945–1950체코슬로바키아 국방장관
  • 1950–1951부총리 겸 체육위원장으로 전보
  • 1951–1954숙청: 체포·수감 후 석방, 고향 협동조합에서 노동
  • 1954–1959클레멘트 고트발트 군사대학 총장
  • 1968–1975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너지 임레

Nagy Imre

13일의 총리

1958년 6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을 거부하며 말했다. "유일한 위안은 언젠가 헝가리 민족과 국제 노동계급이 나에 대한 이 중대한 혐의를 벗겨 주리라는 확신이다."

헝가리의 공산주의자.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로 볼셰비키에 가담했고, 모스크바 망명기에 농업 문제 전문가가 되었다. 1945년 농업장관으로 토지개혁을 집행했으나 1948~49년 집단화 속도를 두고 라코시·게뢰와 맞섰다가 밀려났다. 1953년 7월 총리가 되어 '새 노선'으로 투자 축소, 개인 농가 보장, 억류수용소 폐쇄를 추진했으나 1955년 해임되었다. 1956년 혁명 때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중립을 선언했고, 1958년 비공개 재판 뒤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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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1러시아군 포로, 적군 가담, 볼셰비키 입당
  • 1930–1944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농업 연구
  • 1945–1946농업장관, 토지개혁 집행
  • 1953–1955총리, 「새 노선」: 수용소 해산, 농민 부담 경감
  • 1955실각·출당
  • 1956.10–11봉기의 총리, 다당제·중립 선언
  • 1958비밀 재판 후 처형
  • 1989영웅광장 재매장

바실레 루카

Vasile Luca
루마니아 국가기관 공산주의 루마니아 헝가리계 1898–1963 ○ 옥사

「모스크바파」의 재무장관, 1952년 화폐개혁을 빌미로 숙청되어 아이우드 감옥에서 죽은 세케이 헝가리인 공산주의자

195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까지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화폐개혁의 「과오」는 루카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그를 변호하려 한 파우케르와 제오르제스쿠는 석 달 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길을 밟았다.

트란실바니아 세케이 지방의 헝가리인 가정에서 루커 라슬로로 태어나 철도 공장 노동자로 일했고, 1919년 헝가리 혁명 뒤 루마니아 노동운동에 들어가 1920년대 초 공산당에 가입했다.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며, 1940년 체르너우치 감옥에 있다가 소련군의 북부 부코비나 점령으로 풀려나 소련 시민이 되었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으로 뽑혔다. 전쟁 중 모스크바에서 아나 파우케르와 함께 망명 루마니아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고, 1944년 귀국해 정치국원·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1947년 11월부터 재무장관으로서 화폐 안정화와 국유화 재정을 맡았으나, 1952년 1월 화폐개혁의 실행 오류가 빌미가 되어 3월 초 전원회의에서 「우편향」으로 규탄되고 8월 체포되었다. 1954년 10월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63년 아이우드 감옥에서 죽었다. 1968년 차우셰스쿠 지도부의 당 전원회의가 그를 사후 복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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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루마니아 노동운동 참여
  • 1920년대–1940공산당 입당, 여러 차례 투옥
  • 1940체르너우치 감옥 석방, 소련 시민·우크라이나 최고회의 대의원
  • 1944귀국, 정치국원·중앙위 서기
  • 1947–1952재무장관
  • 1952「우편향」 규탄, 해임·체포
  • 1954사형 선고, 종신형 감형
  • 1963아이우드 감옥에서 사망
  • 1968사후 복권

알렉산데르 자바츠키

Aleksander Zawadzki
폴란드 국가기관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계 1899–1964 ○ 자연사

전후 폴란드 국가기구를 이끈 공산주의자

1956년 3월 비에루트의 장례식에서 “비에루트는 죽었지만 단결된 우리 당은 살아 있다”고 말했다. 같은 달 제6차 전원회의는 오하프를 제1서기로 선출했고, 고무우카가 제1서기가 된 것은 1956년 10월 제8차 전원회의였다.

제철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23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한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사단장급 장군이다. 1925년과 1936년 두 차례 체포되어 감옥에서 보냈고, 1939년 이후 소련에서 폴란드 애국자 동맹과 폴란드 노동자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소련 편성 폴란드군의 정치장교를 맡았다. 전후 실레지아 주지사와 각료회의 부의장을 거쳐 1952년 11월 20일 국가평의회 의장에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재임했고, 주지사 시절에는 소련의 인력·설비 반출 중단을 추진했다. 1956년 3월 제6차 전원회의에서 제1서기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오하프가 선출되었고, 이후 당내 강경파인 나톨린 계열로 분류되었다. 1964년 8월 7일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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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9폴란드 공산당 활동가, 투옥
  • 1943–1945소련 편성 폴란드군 정치장교, 정치교육 담당 부사령관
  • 1944–1948폴란드 노동자당 정치국 위원
  • 1945–1948실레지아-돔브로바 주지사
  • 1948–1954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위원
  • 1949–1952각료회의 부의장
  • 1952–1964폴란드 국가평의회 의장

스레텐 주요비치

Сретен Жујовић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 1899–1976 ○ 자연사

티토와 결별한 당내 스탈린 지지자

1948년 4월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그는 티토의 대소련 답신에 반대했다.

스레텐 주요비치는 세르비아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이자 노동운동 조직가로, 제1차 세계대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쳤다. 그는 전쟁기 파르티잔 봉기를 조직하고 최고사령부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뒤 재무장관을 맡았다.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충돌에서 그는 소비에트 노선을 지지한 유일한 반대자로 중앙위원회 회의에 나섰고, 그 선택으로 당과 공직에서 축출되어 구금되었다. 1950년 자기비판 뒤 석방되고 훗날 당에 복귀했지만, 그의 경력은 혁명적 국제주의와 유고슬라비아의 자율성 사이의 균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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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4귀국 후 노동운동·노동조합 활동
  • 1924–1933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당 조직 활동
  • 1938–1940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41–1944세르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참모 활동
  • 1945–1947유고슬라비아 연방 재무장관
  • 1948티토·스탈린 분열에서 인포르비로 노선 지지
  • 1948–1950가택연금과 수감, 자기비판 뒤 석방
  • 1950–1971당 복귀, 《보르바》·경제연구기관 간부

최용건

최용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가기관 공산주의 조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1900–1976 ○ 병사

만주 항일투쟁을 이끌고 조선인민군 초대 총사령관을 지낸 국가원수

1955년 12월 박헌영 간첩 사건 재판장을 맡은 최용건은 박헌영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선처 요청을 거절했다.

운남군관학교와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과 제7군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으며, 김일성·김책과 함께 만주파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1945년 귀국 후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을 공산주의 노선으로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최고위 현장 사령관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명목상 국가원수를 역임하며 김일성 체제의 대외적 얼굴로 활약했다. 1976년 사망 시 국장이 집행되었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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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4운남군관학교 졸업
  • 1925–1927황푸군관학교 교관
  • 1936–1940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제7군장
  • 1942–1945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여단 부참모장
  • 1946–1955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48–1957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 1957–1972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1972–197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밀라다 호라코바

Milada Horáková
반체제 인사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901–1950 ✕ 처형

나치와 공산당 모두에 맞서다 1950년 조작된 반역 재판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체코의 여성 정치가

여성 권리 운동가이자 반나치 저항 활동가였던 호라코바는 전후 의원으로 활동하다 1948년 사임했다. 1949년 체포되어 조작된 반역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0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프라하 출신의 법률가로, 전간기 여성 권리 운동에 앞장섰다. 독일 점령기 지하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가 1940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테레진과 독일의 감옥을 거쳤고, 1945년 4월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전후 국민사회당 의원이 되었고 1947년 여성 잡지 『블라스타』를 창간했다. 1948년 2월 쿠데타 직후 항의의 뜻으로 의원직을 내놓았지만 망명하지 않고 프라하에서 활동을 이어 갔다. 1949년 9월 체포되어 고문을 동반한 신문 끝에 음모·반역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50년 6월 27일 판크라츠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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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프라하 시의회 복지부서 책임자가 되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사회당에 가입했다.
  • 1945독일 점령기 저항 활동으로 수감된 뒤 연합군에 의해 석방되어 프라하로 돌아왔고, 국민사회당에 재가입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 19482월 공산당 장악 뒤 의원직에서 사임했다.
  • 19499월 27일 불법 정치 모임과 관련해 체포되었다.
  • 1950반역·간첩 혐의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6월 27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에리히 올렌하우어

Erich Ollenhauer

망명 사회민주당 간부로 돌아와 슈마허의 뒤를 이어 서독 사회민주당을 이끈 야당 지도자

마그데부르크에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나 1918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사회주의 노동자 청년단을 이끌었다. 1933년 5월 당 집행부와 함께 프라하로 망명해 망명 사회민주당(소파데)을 꾸렸고, 파리와 리스본을 거쳐 런던에서 전쟁을 보냈다. 1946년 2월 귀국해 하노버의 슈마허 사무소에서 일했고, 그해 부의장이 되어 당 조직과 국제 관계를 맡았다. 1952년 슈마허가 죽자 당 의장, 원내대표, 야당 지도자가 되었다. 1953년과 1957년 총리 후보로 아데나워에게 졌고, 1959년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한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뒷받침했다. 1963년 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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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사회민주당 입당
  • 1928사회주의 노동자 청년단 의장
  • 1933프라하로 망명, 망명 사회민주당 집행부
  • 1946사회민주당 부의장
  • 1952–1963사회민주당 의장, 연방의회 야당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01–1986 ○ 자연사

개혁의 순간마다 검열과 권력에 맞선 시인

1968년 9월 침공을 비판하며 그는 프라하에 들어온 첫 전차와 마지막 전차를 비교해 말했다.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시인이자 기자로, 프라하의 노동계급 문화와 아방가르드 시를 연결한 작가였다. 그는 1929년 공산당의 관료화와 스탈린주의적 전환에 항의해 당을 떠났지만 좌파적 사회 감각을 버리지 않았다. 1948년 이후 작가 탄압을 조사한 위원회를 이끌었고, 1968년 작가대회에서 검열 폐지와 문화적 개방을 뒷받침했으며, 침공 뒤에도 공개적으로 저항했다. 198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정상화 체제에서는 작품과 공적 발언이 제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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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첫 시집 『눈물의 도시』 출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22–1929데베치실 창립에 참여, 공산주의 언론과 아방가르드 잡지 편집
  • 1929「일곱 작가 선언」 서명 뒤 공산당에서 제명
  • 1930–1948사회민주주의·노동조합 언론에서 기자와 문화 편집자로 활동
  • 1949–1956언론을 떠나 전업 작가가 되었고, 출판 제한을 겪음
  • 1956작가대회에서 불편한 작가들에 대한 문화정책을 비판
  • 1968–1970체코슬로바키아 작가연맹 의장, 뒤이어 체코 작가연맹 의장
  • 1984노벨 문학상 수상

블라디미르 클레멘티스

Vladimír Clementis
체코슬로바키아 국가기관 공산주의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1902–1952 ✕ 처형

얀 마사리크의 뒤를 이어 외무장관이 되었다가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처형된 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

외무차관으로 마셜 플랜 거부를 지지했고, 1948년 쿠데타 뒤 외무장관이 되어 체코슬로바키아의 대이스라엘 항공 지원을 조직했다. 1950년 축출된 뒤 체포되어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처형되었다.

슬로바키아 티소베츠 출신의 법률가로, 전간기 슬로바키아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준 문화·정치 잡지 『다우』를 함께 편집한 좌파 지식인이었다. 공산당 의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3월 얀 마사리크가 숨진 뒤 외무장관이 되어 1950년까지 재임했다. 「티토주의」와 「민족주의 편향」 혐의로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3일 처형되었다. 뒷날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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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가입해 변호사로 활동하고 슬로바키아에서 공산주의 조직을 꾸렸다.
  • 1935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소속으로 국민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 1945외무부 국무차관이 되었다.
  • 1948–1950외무장관으로 재임하며 쿠데타 조직에 참여했고 대이스라엘 항공 지원을 마련했다.
  • 1950「편향주의」 혐의 속에 사임을 강요당한 뒤 체포되었다.
  • 1952슬란스키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 1963사후 복권되었다.

조지 패드모어

George Padmore
미국 공산당 공산주의 트리니다드 토바고 트리니다드 토바고 1903–1959 ○ 자연사

코민테른 흑인국장에서 범아프리카 독립운동의 설계자로, 제국 질서와 결별한 혁명적 저널리스트

「판-아프리카주의냐 공산주의냐?」 — 냉전의 이분법을 거부하며, 아프리카 해방은 그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주장한 마지막 저작의 제목

트리니다드 출신 범아프리카주의 이론가이자 저널리스트. 1929년 모스크바에서 프로핀테른 흑인국장으로 임명되어 식민지 노동자 조직화를 이끌었으나, 소련이 식민지 해방보다 열강 외교를 우선하자 1934년 결별했다. 런던에서 국제아프리카서비스국(IASB)을 이끌며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를 조직, 전후 탈식민화 의제를 설정했다. 콰메 은크루마의 최측근 조언자로서 가나 독립과 아프리카 연합 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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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트리니다드 아로우카에서 출생 — 본명 맬컴 아이번 메러디스 너스
  • 1924–1927미국 유학, 피스크·하워드 대학 — CPUSA 입당(1927)
  • 1929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에 보고 — 프로핀테른 흑인국장 임명, 모스크바 시소비에트 대의원
  • 1930함부르크에서 흑인노동자국제노동조합위원회(ITUCNW) 조직, 월간 『니그로 워커』 편집
  • 1933–1934나치 집권 후 추방 — 소련의 식민지 정책 전환에 반발하여 코민테른과 결별, 1934년 제명
  • 1934–1945런던 정착 — IASB 의장, 1945년 맨체스터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 1947–1957은크루마의 조언자, 『가나 혁명』(1953) 출간 — 가나 독립운동 지원
  • 1957–1959가나로 이주, 은크루마의 아프리카문제 고문 — 1959년 런던에서 사망, 유해는 가나 크리스천스보르 성에 안장
폴란드 통일노동당 공산주의 폴란드 폴란드 1906–1989 ○ 사망

흐루쇼프 비밀연설을 전사회적으로 확산시킨 1956년 폴란드 해빙기의 과도기적 제1서기

1956년 10월, 흐루쇼프가 군사개입을 위협하자 오하프는 폴란드군을 바르샤바 방어태세에 배치하며 맞섰고, '이 상황에서 고무우카가 국가를 이끌 최선의 선택'이라고 소련 지도부에 말했다.

크라쿠프 출신의 폴란드 공산주의자로, 1929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해 사나치아 정권하에서 6년 반을 정치범으로 복역했다. 1943년 소련에서 베를링군 정치위원으로 활약한 후 폴란드 노동자당 중앙위원, 공공행정부 장관, 국방차관, 정치국원을 지냈다. 1956년 3월 비에루트 사망 후 제1서기가 되어 흐루쇼프 비밀연설의 폴란드어 번역본을 전국 당 조직과 공공집회를 통해 유포했고, 수천 부가 바르샤바 시장에서 팔릴 정도로 확산시켜 비밀연설의 전세계적 유출을 촉발했다. 포즈난 봉기 진압을 승인했으나 10월에는 소련의 군사개입 위협에 맞서 폴란드의 주권을 지켰고, 이후 고무우카에게 권력을 넘긴 후 1968년 반유대 캠페인에 항의하며 모든 공직에서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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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폴란드 공산당(KPP) 입당
  • 1939바르샤바 방어전 참전 후 소련으로 이동
  • 1943베를링군 제1사단 정치위원, 레니노 전투 참전
  • 1944–1946PPR 중앙위원, 공공행정부 장관
  • 1949–1950국방차관 겸 군 정치총국장
  • 1956.03–10PZPR 제1서기, 흐루쇼프 비밀연설 대량 유포 결정
  • 1964–1968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
  • 1968반유대 캠페인에 항의해 전직 사퇴

허가이

Алексей Хегай
조선로동당 공산주의 소비에트 고려인 1908–1953 ✕ 숙청 후 의문사

조선로동당 창립 핵심 조직자이자 초기 '소련파'의 지도자

1948년 3월 제2차 당대회에서 허가이는 돌연 연단에 올라 이미 사과한 간부들을 향해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사과는 공허한 말일 뿐"이라고 질타했고, 이 발언은 당내 규율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소비에트 고려인 혁명가로, 1945년 소련 점령 당국의 파견을 받아 평양에 도착한 후 조선로동당 창립의 핵심 조직자로 활동했다. 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겸 제2부위원장으로서 소련식 간부당 노선을 추진했으며, 한국전쟁 중 60만 당원 중 45만 명을 검증·제명하는 대대적 당 정비를 주도했다. 대중당을 구상한 김일성과 당 조직 노선을 둘러싸고 충돌해 1951년 실각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소련파'의 부상과 몰락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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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2극동지역 콤소몰 서기
  • 1937당에서 숙청·제명,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 1939당적 회복, 우즈베키스탄에서 당 간부로 복귀
  • 1946북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위원, 조직국장
  • 1948북조선로동당 부위원장 겸 검열위원장
  • 1949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겸 제2부위원장
  • 1951김일성과 충돌 후 전직 해임, 부수상으로 좌천
루마니아 국가기관 공산주의 루마니아 루마니아 1908–1976 ○ 사망

세쿠리타테를 세운 첫 공산당 내무장관, 파우케르·루카를 「비호」했다는 죄목으로 1952년 함께 숙청되다

1952년 5월 전원회의는 제오르제스쿠에게 우편향에 「화해적 태도」를 보였다는 죄를 물어 정치국과 내무장관 자리에서 밀어냈다. 세쿠리타테를 만든 사람이 이듬해 2월 그 세쿠리타테에 체포되었다.

부쿠레슈티 근교 키틸라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인쇄공으로 일했고, 1929년 루마니아 공산당에 들어가 인쇄 노조에서 활동했다. 1941년 체포되어 10년형을 받고 카란세베시 감옥에서 게오르기우데지와 함께 복역했으며, 1944년 8월 석방되어 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45년 3월 그로자 정부의 내무장관에 올라 1952년까지 경찰과 보안기관을 장악했고, 1946년 총선의 조작, 1947년 마니우 등 국민농민당 지도부의 체포와 재판, 1948년 세쿠리타테 창설과 무장 저항의 진압을 지휘했다. 당내에서는 아나 파우케르·바실레 루카와 가까워 「모스크바파」의 세 번째 인물로 꼽혔고, 1952년 5월 전원회의에서 우편향에 「화해적 태도」를 보였다는 죄목으로 정치국과 내무장관 자리에서 제거되었다. 1953년 2월 체포되어 재판 없이 1956년 풀려났고 당적을 잃은 뒤 인쇄소 책임자로 일했다. 1968년 차우셰스쿠 지도부가 데지 시대 숙청을 재심하면서 복권되었고 1976년 부쿠레슈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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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루마니아 공산당 입당, 인쇄 노조 활동
  • 1941–1944체포, 10년형, 카란세베시 감옥 복역
  • 1944석방, 중앙위원회 서기
  • 1945–1952내무장관
  • 1948세쿠리타테 창설 지휘
  • 1952정치국·내무장관 해임
  • 1953–1956체포, 재판 없이 석방, 당적 박탈
  • 1968복권

라야 두나옙스카야

Raya Dunayevskaya

트로츠키의 비서에서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의 창시자로

“트로츠키와 결별한 후에야 내 진정한 발전이 시작되었다.” — 1980년대 인터뷰에서

러시아 제국 출신 유대계 이주민. 트로츠키의 비서로 출발했으나 소련 문제로 결별, C.L.R. 제임스와 국가자본주의론을 정립했다. 이후 마르크스주의 휴머니즘을 창시하고 뉴스 앤 레터스 위원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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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가족과 함께 미국 시카고로 이주
  • 1928트로츠키주의 옹호로 미국공산당 청년 조직에서 제명
  • 1929보스턴의 독립 트로츠키주의 그룹(코니코프 지도)에 합류
  • 1937–1938멕시코에서 트로츠키의 러시아어 비서 겸 속기사
  • 1939소련의 성격 문제로 트로츠키와 결별
  • 1940SWP 분열 참여 → 노동자당(WP) 결성
  • 1941–1943C.L.R. 제임스와 존슨-포레스트 경향 결성,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정립
  • 1947SWP로 복귀
  • 1951한국전쟁 반대, SWP 재탈퇴, 코레스폰던스 출판위원회 결성
  • 1953헤겔 『정신현상학』 연구 — '철학적 계기'로서의 절대자 해석 제시
  • 1955C.L.R. 제임스와 결별, 뉴스 앤 레터스 위원회 창설
  • 1958『마르크스주의와 자유』 출간 (마르쿠제 서문)
  • 1973『철학과 혁명』 출간
  • 1982『로자 룩셈부르크, 여성해방, 마르크스의 혁명 철학』 출간
  • 1987시카고에서 77세로 사망

카를루스 마리겔라

Carlos Marighella
브라질 공산당 공산주의 브라질 브라질 1911–1969 ✕ 사살

하원의원에서 도시 게릴라 이론가로: 브라질 군사독재 최대의 적

“나는 두려워할 시간이 없었다” — 마리겔라의 묘비명

브라질 공산당 하원의원 출신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로, 1964년 군사 쿠데타 이후 평화적 저항을 거부하고 도시 게릴라전 이론가이자 실천가가 되었다. 자신이 창설한 민족해방행동(ALN)을 이끌며 《도시 게릴라 소교본》으로 세계 혁명 운동에 영향을 미쳤으나, 1969년 상파울루에서 경찰의 매복 작전으로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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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중재자 주라시 마갈량이스 비판 시로 첫 체포·투옥
  • 1934공과대학 중퇴, 브라질 공산당(PCB) 입당
  • 1936–1945반복적 체포·투옥 — 1939–1945년 장기 구금
  • 1946–1948PCB 소속 연방 하원의원 — 당 불법화로 의석 상실
  • 1953–1954중국 공산당 초청으로 중국 혁명 시찰
  • 1967무장 투쟁 노선 갈등으로 PCB에서 축출
  • 1968.02민족해방행동(ALN) 창설
  • 1969.06《도시 게릴라 소교본》 집필
  • 1969.11상파울루에서 DOPS의 매복 작전으로 사살

토도르 흐리스토프 지프코프

Тодор Христов Живков
불가리아 국가기관 공산주의 불가리아 불가리아 1911–1998 ○ 자연사

동구권 최장 35년 집권, 소련에 가장 충성한 발칸 지도자

「나를 심판하라. 그러나 빵도 명예도 없이 백성이 남게 될 때가 올 것이다」(1990년 체포 당시)

소피아 근교 프라베츠의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인쇄공으로 일하며 1932년 불가리아 공산당에 입당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파르티잔 '얀코'로 소피아 일대 저항을 조직했고, 1944년 반파시스트 봉기에 참여했다. 전후 체르벤코프의 후원으로 급부상해 1954년 제1서기가 되어 35년간 동구권 최장기 집권했다. 흐루쇼프·브레즈네프와 긴밀히 협력하며 공업화와 생활수준 향상을 이끌었고, 1987년 '7월 구상'으로 제한적 시장개혁을 시도했다. 1984년 투르크계 강제동화 정책으로 큰 논란을 남겼으며, 1989년 11월 당내 쿠데타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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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불가리아 공산당(BCP) 입당, 국영인쇄소 당조직 책임자
  • 1941–1944대독 저항 — 소피아 제3당구역 책임자, 파르티잔 여단 '차브다르' 정치지도원
  • 1945–1949BCP 중앙위 후보위원 → 소피아 시당 제1서기 → 소피아 시장
  • 1950–1954BCP 중앙위 서기, 정치국 후보위원 — 농업·집단화 담당
  • 1954–1989BCP 제1서기(1954–81) → 총서기(1981–89) — 35년간 국가 최고지도자
  • 1962–1971불가리아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총리)
  • 1971–1989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
  • 1989.11.10당내 쿠데타로 전격 해임, 이후 BCP 제명

에메 세제르

Aimé Césaire
프랑스 공산당 공산주의 프랑스 마르티니크 1913–2008 ○ 자연사

네그리튀드 공동 창시자, 식민주의 비판의 선구

「내 차례다. 하나의 등식을 제시하겠다: 식민주의 = 사물화」 『식민주의 담론』(1950)에서 유럽이 나치즘으로 규정한 방법을 이미 식민지 민족에게 써 왔으며 나치즘은 식민주의를 정당화한 문명의 자연적 귀결이라고 논했다.

마르티니크 바스푸앵트에서 세무원의 아들로 태어나 파리에서 상고르·다마스와 함께 네그리튀드 운동을 열었다. 잡지 L'Étudiant noir는 1934~1935년에 창간되었고, 1935년 5~6월호에서 '네그리튀드'가 처음 현재적 의미로 쓰였다. 프란츠 파농을 가르쳤다. 1945년 공산당의 지원으로 당선돼 56년간 포르드프랑스 시장, 47년간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고 1946년 마르티니크를 프랑스 데파르트망으로 만든 법을 통과시켰다. 1956년 10월 24일 『모리스 토레즈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흐루쇼프 보고와 마그레브 탄압을 들어 공산당과 결별했으며, 영어권 서술은 헝가리 혁명 탄압을 탈당 사유로 든다. 1958년 마르티니크 진보당을 창당하고 2001년 정계에서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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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파리에서 L'Étudiant noir 창간, '네그리튀드' 개념 최초 제시
  • 1939『고향으로의 귀환 수첩』(Cahier d'un retour au pays natal) 출간
  • 1941수잔 루시와 함께 Tropiques 창간
  • 1945프랑스 공산당 소속 국민의회 의원 및 포르드프랑스 시장 당선
  • 1946마르티니크의 프랑스 데파르트망 편입 법안 주도
  • 1950『식민주의 담론』(Discours sur le colonialisme) 출간
  • 1956헝가리 봉기 탄압에 항의, 『모리스 토레즈에게 보내는 편지』로 PCF 탈퇴
  • 1958마르티니크 진보당(PPM) 창당
  • 1983–1988마르티니크 지역의회 의장
  • 199347년간의 국민의회 의원직 은퇴
  • 200156년간의 포르드프랑스 시장직 은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