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레하노프와 악수한 일본 공산주의의 아버지, 코민테른의 동아시아 전략가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 의장이 러일전쟁 중인 양국 대표 — 플레하노프와 가타야마 — 가 부의장으로 함께 선출되었음을 알리자, 두 사람은 일어나 말없이 손을 굳게 잡았다. 회의장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일본 공산주의의 아버지. 오카야마 출신으로 미국 유학 후 일본 최초의 노조와 사회민주당을 창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동아시아 반제국주의 전략을 입안했으며, 모스크바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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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1896미국 유학, 그리넬 칼리지·예일 신학부 졸업, 기독교·사회주의 전향
- 1896–1901귀국, 철공조합·『노동세계』 창간, 사회민주당 창당
- 1904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플레하노프와 반전 악수
- 1911–1912도쿄 시가전차 파업 주도, 9개월 투옥
- 1914–1921미국 망명, CPUSA 가입, 일본인 노동자 공산 그룹 조직
- 1921–1922멕시코 경유 소비에트 러시아, 일본공산당 창립 주도
- 1922–1933코민테른 집행위원·상임간부회, 반제·반전 국제회의
항복 결정을 조율한 해군 출신 총리
1945년 8월 10일, 그는 교착한 회의에서 “이제 제가 어전에 나아가 성의를 여쭙고, 그 뜻으로 회의의 결정을 삼고자 합니다”라고 제안했다.
스즈키 간타로는 일본 해군 대장 출신 정치가로, 천황의 시종장과 추밀원 의장을 거쳐 전쟁 말기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는 군부의 전쟁 수행 노선을 받들었지만, 1945년 내각과 최고전쟁지도회의의 대립을 관리하며 전쟁을 끝낼 통로를 열었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 참전 뒤에도 이른바 ‘Big Six’의 교착은 계속되었고, 스즈키는 천황 주재 회의에서 결정을 천황의 재가에 맡기는 절차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했지만, 그 과정은 침략전쟁의 책임과 군부의 저항을 지운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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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4–1887해군병학교 입교 및 졸업
- 1904–1905제4구축대 사령, 일본해 해전 참전
- 1914–1917해군차관
- 1924–1925연합함대 사령장관, 해군군령부장
- 1929–1936천황 시종장 겸 추밀고문관
- 1944–1945추밀원 의장
- 1945-04–1945-08일본 내각총리대신, 항복 결정 주도
- 1945-12–1946-06추밀원 의장, 공직 추방으로 사임
황도파의 군국주의 지도자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총리가 해군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되자, 육군대신 아라키는 이들을 '억누를 수 없는 애국자'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아라키 사다오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군이자 황도파의 대표적 지도자로,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와 대외 팽창을 결합한 군국주의를 주장했다. 1931년 만주사변 뒤 육군대신이 되어 관동군의 기정사실을 정부의 정책으로 굳히는 데 기여했고, 소련 극동을 겨냥한 북진론도 지지했다. 그러나 그가 후원한 청년 장교 세력은 통제에서 벗어나 2·26 사건으로 폭발했고, 사건 뒤 현역에서 물러났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55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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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7육군사관학교 졸업, 임관
- 1907육군대학 수석 졸업
- 1915–1918러시아군 종군무관, 시베리아 출병 참가
- 1924–1925헌병사령관
- 1928–1930육군대학 교장
- 1931–1934육군대신, 관동군의 만주 점령과 만주국 승인을 추진
- 1938–1939문부대신, 황도교육과 전시 동원 추진
- 1946–1955극동국제군사재판 유죄 판결, 복역 후 석방
군부의 압력 속에서 외교와 책임 사이에 선 정치가
1945년 6월, 그는 말리크에게 다가갔지만 소련은 회담을 늦추며 대일전 준비 시간을 벌었다.
히로타 고키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 출신 정치가로, 국제협조를 표방하면서도 중국 침략과 군부의 대외정책에 제동을 걸지 못한 인물이다. 외무상과 총리를 거치며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되살리고 방공협정을 추진해 민간정부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데 관여했다. 1945년 6월에는 소련의 야코프 말리크 대사와 접촉해 전쟁 종결을 위한 중재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소련은 이미 대일 참전을 준비하며 회담을 지연시켰다. 도쿄 재판에서 전쟁범죄 유죄 판결을 받아 1948년 문관으로는 유일하게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 책임과 형량은 지금도 논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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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6외무성 입성, 외교관 시험 수석 합격
- 1923–1926외무성 유럽미주국장
- 1927–1930주네덜란드 공사
- 1930–1932주 소련 대사
- 1933–1936외무상, 사이토·오카다 내각
- 1936–1937내각총리대신, 외무상 겸임
- 1937–1938제1차 고노에 내각 외무상
- 1945말리크 대사와 접촉, 소련 중재 타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