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일본

시민권 24 · 민족·국가 25 · 사건 4

국경은 현재 세계를 기준으로 표시합니다.

시민권 인물 24전체보기

가타야마 센

片山潜
비소련 혁명가 일본 일본 1859–1933 ○ 자연사

플레하노프와 악수한 일본 공산주의의 아버지, 코민테른의 동아시아 전략가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 의장이 러일전쟁 중인 양국 대표 — 플레하노프와 가타야마 — 가 부의장으로 함께 선출되었음을 알리자, 두 사람은 일어나 말없이 손을 굳게 잡았다. 회의장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일본 공산주의의 아버지. 오카야마 출신으로 미국 유학 후 일본 최초의 노조와 사회민주당을 창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동아시아 반제국주의 전략을 입안했으며, 모스크바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4–1896미국 유학, 그리넬 칼리지·예일 신학부 졸업, 기독교·사회주의 전향
  • 1896–1901귀국, 철공조합·『노동세계』 창간, 사회민주당 창당
  • 1904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플레하노프와 반전 악수
  • 1911–1912도쿄 시가전차 파업 주도, 9개월 투옥
  • 1914–1921미국 망명, CPUSA 가입, 일본인 노동자 공산 그룹 조직
  • 1921–1922멕시코 경유 소비에트 러시아, 일본공산당 창립 주도
  • 1922–1933코민테른 집행위원·상임간부회, 반제·반전 국제회의

스즈키 간타로

鈴木貫太郎
외국 정치가 일본 일본 1868–1948 ○ 자연사

항복 결정을 조율한 해군 출신 총리

1945년 8월 10일, 그는 교착한 회의에서 “이제 제가 어전에 나아가 성의를 여쭙고, 그 뜻으로 회의의 결정을 삼고자 합니다”라고 제안했다.

스즈키 간타로는 일본 해군 대장 출신 정치가로, 천황의 시종장과 추밀원 의장을 거쳐 전쟁 말기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는 군부의 전쟁 수행 노선을 받들었지만, 1945년 내각과 최고전쟁지도회의의 대립을 관리하며 전쟁을 끝낼 통로를 열었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 참전 뒤에도 이른바 ‘Big Six’의 교착은 계속되었고, 스즈키는 천황 주재 회의에서 결정을 천황의 재가에 맡기는 절차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했지만, 그 과정은 침략전쟁의 책임과 군부의 저항을 지운 것이 아니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4–1887해군병학교 입교 및 졸업
  • 1904–1905제4구축대 사령, 일본해 해전 참전
  • 1914–1917해군차관
  • 1924–1925연합함대 사령장관, 해군군령부장
  • 1929–1936천황 시종장 겸 추밀고문관
  • 1944–1945추밀원 의장
  • 1945-04–1945-08일본 내각총리대신, 항복 결정 주도
  • 1945-12–1946-06추밀원 의장, 공직 추방으로 사임

아라키 사다오

荒木貞夫
반혁명 세력 일본 일본인 1877–1966 ○ 전범 유죄 · 1955년 석방

황도파의 군국주의 지도자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총리가 해군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되자, 육군대신 아라키는 이들을 '억누를 수 없는 애국자'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아라키 사다오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군이자 황도파의 대표적 지도자로,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와 대외 팽창을 결합한 군국주의를 주장했다. 1931년 만주사변 뒤 육군대신이 되어 관동군의 기정사실을 정부의 정책으로 굳히는 데 기여했고, 소련 극동을 겨냥한 북진론도 지지했다. 그러나 그가 후원한 청년 장교 세력은 통제에서 벗어나 2·26 사건으로 폭발했고, 사건 뒤 현역에서 물러났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55년 석방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7육군사관학교 졸업, 임관
  • 1907육군대학 수석 졸업
  • 1915–1918러시아군 종군무관, 시베리아 출병 참가
  • 1924–1925헌병사령관
  • 1928–1930육군대학 교장
  • 1931–1934육군대신, 관동군의 만주 점령과 만주국 승인을 추진
  • 1938–1939문부대신, 황도교육과 전시 동원 추진
  • 1946–1955극동국제군사재판 유죄 판결, 복역 후 석방

히로타 고키

廣田弘毅
외국 정치가 일본 일본인 1878–1948 ✕ 처형

군부의 압력 속에서 외교와 책임 사이에 선 정치가

1945년 6월, 그는 말리크에게 다가갔지만 소련은 회담을 늦추며 대일전 준비 시간을 벌었다.

히로타 고키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 출신 정치가로, 국제협조를 표방하면서도 중국 침략과 군부의 대외정책에 제동을 걸지 못한 인물이다. 외무상과 총리를 거치며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되살리고 방공협정을 추진해 민간정부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데 관여했다. 1945년 6월에는 소련의 야코프 말리크 대사와 접촉해 전쟁 종결을 위한 중재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소련은 이미 대일 참전을 준비하며 회담을 지연시켰다. 도쿄 재판에서 전쟁범죄 유죄 판결을 받아 1948년 문관으로는 유일하게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 책임과 형량은 지금도 논쟁적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외무성 입성, 외교관 시험 수석 합격
  • 1923–1926외무성 유럽미주국장
  • 1927–1930주네덜란드 공사
  • 1930–1932주 소련 대사
  • 1933–1936외무상, 사이토·오카다 내각
  • 1936–1937내각총리대신, 외무상 겸임
  • 1937–1938제1차 고노에 내각 외무상
  • 1945말리크 대사와 접촉, 소련 중재 타진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25전체보기

가타야마 센

片山潜
비소련 혁명가 일본 일본 1859–1933 ○ 자연사

플레하노프와 악수한 일본 공산주의의 아버지, 코민테른의 동아시아 전략가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 의장이 러일전쟁 중인 양국 대표 — 플레하노프와 가타야마 — 가 부의장으로 함께 선출되었음을 알리자, 두 사람은 일어나 말없이 손을 굳게 잡았다. 회의장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일본 공산주의의 아버지. 오카야마 출신으로 미국 유학 후 일본 최초의 노조와 사회민주당을 창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동아시아 반제국주의 전략을 입안했으며, 모스크바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4–1896미국 유학, 그리넬 칼리지·예일 신학부 졸업, 기독교·사회주의 전향
  • 1896–1901귀국, 철공조합·『노동세계』 창간, 사회민주당 창당
  • 1904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플레하노프와 반전 악수
  • 1911–1912도쿄 시가전차 파업 주도, 9개월 투옥
  • 1914–1921미국 망명, CPUSA 가입, 일본인 노동자 공산 그룹 조직
  • 1921–1922멕시코 경유 소비에트 러시아, 일본공산당 창립 주도
  • 1922–1933코민테른 집행위원·상임간부회, 반제·반전 국제회의

스즈키 간타로

鈴木貫太郎
외국 정치가 일본 일본 1868–1948 ○ 자연사

항복 결정을 조율한 해군 출신 총리

1945년 8월 10일, 그는 교착한 회의에서 “이제 제가 어전에 나아가 성의를 여쭙고, 그 뜻으로 회의의 결정을 삼고자 합니다”라고 제안했다.

스즈키 간타로는 일본 해군 대장 출신 정치가로, 천황의 시종장과 추밀원 의장을 거쳐 전쟁 말기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는 군부의 전쟁 수행 노선을 받들었지만, 1945년 내각과 최고전쟁지도회의의 대립을 관리하며 전쟁을 끝낼 통로를 열었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 참전 뒤에도 이른바 ‘Big Six’의 교착은 계속되었고, 스즈키는 천황 주재 회의에서 결정을 천황의 재가에 맡기는 절차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했지만, 그 과정은 침략전쟁의 책임과 군부의 저항을 지운 것이 아니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4–1887해군병학교 입교 및 졸업
  • 1904–1905제4구축대 사령, 일본해 해전 참전
  • 1914–1917해군차관
  • 1924–1925연합함대 사령장관, 해군군령부장
  • 1929–1936천황 시종장 겸 추밀고문관
  • 1944–1945추밀원 의장
  • 1945-04–1945-08일본 내각총리대신, 항복 결정 주도
  • 1945-12–1946-06추밀원 의장, 공직 추방으로 사임

아라키 사다오

荒木貞夫
반혁명 세력 일본 일본인 1877–1966 ○ 전범 유죄 · 1955년 석방

황도파의 군국주의 지도자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총리가 해군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되자, 육군대신 아라키는 이들을 '억누를 수 없는 애국자'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아라키 사다오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군이자 황도파의 대표적 지도자로,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와 대외 팽창을 결합한 군국주의를 주장했다. 1931년 만주사변 뒤 육군대신이 되어 관동군의 기정사실을 정부의 정책으로 굳히는 데 기여했고, 소련 극동을 겨냥한 북진론도 지지했다. 그러나 그가 후원한 청년 장교 세력은 통제에서 벗어나 2·26 사건으로 폭발했고, 사건 뒤 현역에서 물러났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55년 석방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7육군사관학교 졸업, 임관
  • 1907육군대학 수석 졸업
  • 1915–1918러시아군 종군무관, 시베리아 출병 참가
  • 1924–1925헌병사령관
  • 1928–1930육군대학 교장
  • 1931–1934육군대신, 관동군의 만주 점령과 만주국 승인을 추진
  • 1938–1939문부대신, 황도교육과 전시 동원 추진
  • 1946–1955극동국제군사재판 유죄 판결, 복역 후 석방

히로타 고키

廣田弘毅
외국 정치가 일본 일본인 1878–1948 ✕ 처형

군부의 압력 속에서 외교와 책임 사이에 선 정치가

1945년 6월, 그는 말리크에게 다가갔지만 소련은 회담을 늦추며 대일전 준비 시간을 벌었다.

히로타 고키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 출신 정치가로, 국제협조를 표방하면서도 중국 침략과 군부의 대외정책에 제동을 걸지 못한 인물이다. 외무상과 총리를 거치며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되살리고 방공협정을 추진해 민간정부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데 관여했다. 1945년 6월에는 소련의 야코프 말리크 대사와 접촉해 전쟁 종결을 위한 중재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소련은 이미 대일 참전을 준비하며 회담을 지연시켰다. 도쿄 재판에서 전쟁범죄 유죄 판결을 받아 1948년 문관으로는 유일하게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 책임과 형량은 지금도 논쟁적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외무성 입성, 외교관 시험 수석 합격
  • 1923–1926외무성 유럽미주국장
  • 1927–1930주네덜란드 공사
  • 1930–1932주 소련 대사
  • 1933–1936외무상, 사이토·오카다 내각
  • 1936–1937내각총리대신, 외무상 겸임
  • 1937–1938제1차 고노에 내각 외무상
  • 1945말리크 대사와 접촉, 소련 중재 타진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4전체보기

1918–1922

내전과 열강의 개입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소비에트 공화국은 백군 장군들과 십여 개 열강의 개입군에 포위된 채 생존을 건 전쟁을 치렀다. 트로츠키가 조직한 붉은 군대는 500만 명 규모로 성장해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 브란겔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했고, 노동자와 농민 다수는 지주와 구체제의 복귀보다 소비에트 권력을 선택했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참혹했다. 전쟁과 기근, 전염병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양측 모두가 자행한 테러와 전시의 비상 통치는 이후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38–1941

소련-일본 국경 전쟁과 중립조약

소련-일본 국경 전쟁은 1938년 하산 호 전투와 1939년 할힌골 전투를 중심으로 소련·몽골과 일본·만주국 사이에서 벌어진 무력 충돌이다. 발단은 만주국과 소련·몽골 사이의 경계선 해석 차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관동군 내 북진론 세력이 소련의 군사력을 시험하려는 의도가 컸다. 하산 호에서는 일본군이 분쟁 지역을 일시 점령했으나 소련의 반격에 밀려 철수했고, 할힌골에서는 게오르기 주코프가 5만 7천의 병력과 500여 대의 전차를 동원해 1939년 8월 20일부터 31일까지 일본군 제23사단을 포위 섬멸했다. 이 패배로 일본 육군 내 북진론은 치명상을 입었고, 1941년 4월 13일 소련-일본 중립조약이 체결되었다. 그해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일본은 중립조약을 존중해 참전하지 않았으며, 대신 남쪽으로 진로를 돌려 진주만 공격으로 이어졌다.

1941–1945

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일본 제국이 미국과 영국 세력권을 공격하면서 본격화된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쟁으로, 1937년부터 이어진 중일전쟁과 일본의 자원 및 제국 확장 정책이 배경이었다. 미국의 대일 석유·자재 제재와 중국에서의 충돌 속에서 일본 지도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석유와 동남아 자원을 점령하고 미국의 협상 의지를 꺾으려 했지만, 진주만 공격은 미국을 전면전으로 끌어들였다. 일본은 1942년 초 필리핀, 말라야,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으로 빠르게 팽창했으나 산호해와 미드웨이에서 공세의 한계가 드러났다. 1942년 과달카날부터 연합국은 남서태평양과 중부태평양에서 도약식 공세를 진행했고, 1944년 필리핀 탈환과 마리아나 제도 점령으로 일본 본토를 폭격할 거점을 확보했다. 1945년 봉쇄, 폭격,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대일 참전이 겹치면서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공표했고 9월 2일 도쿄만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1945.08

소련의 대일 참전과 만주 작전

만주 전략공세작전은 1945년 8월 9일부터 9월 2일까지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 최후의 대규모 지상 작전이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독일 항복 2-3개월 후 대일 참전을 약속하고 남사할린·쿠릴열도·여순항 조차권을 확보하는 비밀의정서에 서명했다. 소련은 4월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5월부터 8월까지 유럽에서 극동으로 40만 이상의 병력과 2천여 대의 전차를 이동시켰다. 8월 8일 몰로토프가 선전포고를 통보했고, 바실렙스키가 지휘하는 150만 병력이 서·동·북 삼면에서 동시에 진입했다. 관동군은 70만 이상이었으나 정예 병력은 태평양으로 빠져나갔고, 소련군의 기갑 우세와 작전술 앞에 열흘 만에 조직적 저항을 상실했다. 약 60만 명의 일본군이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