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국가

유고슬라비아

시민권 20 · 민족·국가 20 · 사건 4

역사 국가·지역의 영역은 현재 후계 국가 또는 행정구역을 합친 근사 표시이며, 당시의 정확한 국경선이 아닙니다.

시민권 인물 20전체보기

이반 리바르

Ivan Ribar
비소련 혁명가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계 유고슬라브인 1881–1968 ○ 자연사

왕국의 의회주의에서 해방전선으로 건너간 정치가

1943년 제2차 AVNOJ 회의를 주재해 신유고슬라비아의 수립 결정을 이끌었다.

이반 리바르는 크로아티아계 변호사이자 유고슬라브주의 정치가로, 왕국의 의회정치와 반파시스트 해방운동을 잇는 제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1920년 제헌의회 의장으로서 통일 뒤 국가의 헌정 질서를 다루었고, 독재기에는 공산주의 피고인들을 변호했다. 전쟁 중에는 AVNOJ 의장으로 민족해방운동의 대표성을 조직했으며, 전후에는 공화국의 집단적 국가원수인 연방 국민의회 상임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두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그의 경력은 서로 다른 정치 전통이 해방과 국가 재건의 국면에서 결합한 과정을 보여준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크로아티아 진보민주당 창립에 참여, 변호사 활동 시작
  • 1918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민평의회 중앙위원
  • 1919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 임시 국민대표부 부의장
  • 1920–1922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 제헌의회 및 국민의회 의장
  • 1942–1945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 반파시스트 평의회(AVNOJ) 의장
  • 1945–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국민의회 상임위원회 의장, 집단적 국가원수
  • 1960정치 활동에서 은퇴

두샨 시모비치

Душан Симовић
외국 정치가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계 1882–1962 ○ 자연사

쿠데타와 패전 사이에 선 군인 총리

1918년 11월 자그레브에서 시모비치는 '압도적 다수가 유고슬라비아 연대의 사상에 사로잡혔다'고 보고했고, 이탈리아의 류블랴나 점거 시도를 세르비아군이 먼저 입성하게 함으로써 저지했다.

두샨 시모비치는 왕국 유고슬라비아의 공군 장군 출신으로,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를 이끌어 삼국동맹 가입에 반대하는 군중의 환호 속에 총리가 된 군인 정치가였다. 그러나 집권 뒤에도 독일의 침공을 막으려 삼국동맹을 공식 폐기하지 못했고, 침공으로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다 1942년 물러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00베오그라드 육군사관학교 졸업, 포병 소위
  • 1912–1918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살로니카 전선 제7보병연대 지휘
  • 1918자그레브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민평의회 주재 세르비아 정부·최고사령부 대표
  • 1936–1938유고슬라비아 왕립 공군 사령관
  • 1938–1940유고슬라비아 왕립군 총참모장, 독일 침공 저항 주장 뒤 사임
  • 1941.3–1942.13월 27일 쿠데타 뒤 유고슬라비아 왕국 총리 겸 총참모장
  • 1941–1942런던 유고슬라비아 망명정부 수반
  • 1945–1946베오그라드 귀환, 미하일로비치 재판 증인

누리야 포즈데라츠

Nurija Pozderac
비소련 혁명가 유고슬라비아 보스니아계 유고슬라비아인 1892–1943 ✕ 전사

다민족 저항 연합을 대표한 보스니아 정치가

1941년 여름 우스타샤 지도자 크바테르니크가 카진으로 찾아와 협력을 권하자, 포즈데라츠는 그와의 면담 자체를 단호히 거부했다.

누리야 포즈데라츠는 카진 지역의 교사 출신 보스니아 무슬림 정치가로, 우스타샤 정권의 협력 요구를 거부하고 세르비아인과 유대인 박해에 맞섰다. 아내 데블레타와 함께 수십 명의 유대인 피란민을 구했고, 1942년 아브노이 부의장으로 선출되며 민족적으로 다원적인 해방전선의 대표 인물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0s–1930s카진 지역 교사
  • 1935유고슬라비아 왕국 의회 의원
  • 1941우스타샤 협력 거부, 민족해방운동 참여
  • 1942카진 민족해방위원회 의장
  • 1942아브노이 집행위원회 부의장
  • 1943네레트바·수체스카 전투 참가
  • 1944국민해방훈장 추서

이반 슈바시치

Ivan Šubašić
외국 정치가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계 1892–1955 ○ 자연사

왕정과 민족해방 세력 사이의 타협 정치가

그는 1944년 11월 베오그라드 협상에서 연립정부와 섭정을 받아들이면서도 군주제 문제를 전후로 넘겼다.

이반 슈바시치는 크로아티아계 유고슬라비아 정치가이자 변호사로, 전쟁 전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초대 수반을 지냈다. 망명 왕정과 티토가 이끄는 민족해방운동의 세력 균형이 바뀌자 그는 양측을 잇는 비공산주의 협상 대표가 되었다. 그는 1944년 티토와 협상해 아브노이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연립정부와 섭정을 구상했지만, 군주제의 존속 여부는 전후 결정으로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18–1921유고슬라비아 의용군 복무 후 법학 공부
  • 1920년대브르보브스코에서 변호사 개업
  • 1938유고슬라비아 국민의회 의원, 크로아티아 농민당
  • 1939–1941크로아티아 바노비나 초대 수반
  • 1944.06–11유고슬라비아 왕정 망명정부 총리
  • 1944.06비스 협정에서 티토와 협상
  • 1944.11베오그라드 협정 초안에 서명, 연립정부와 섭정 구상
  • 1945티토 정부 외무장관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20전체보기

이반 리바르

Ivan Ribar
비소련 혁명가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계 유고슬라브인 1881–1968 ○ 자연사

왕국의 의회주의에서 해방전선으로 건너간 정치가

1943년 제2차 AVNOJ 회의를 주재해 신유고슬라비아의 수립 결정을 이끌었다.

이반 리바르는 크로아티아계 변호사이자 유고슬라브주의 정치가로, 왕국의 의회정치와 반파시스트 해방운동을 잇는 제도적 인물이었다. 그는 1920년 제헌의회 의장으로서 통일 뒤 국가의 헌정 질서를 다루었고, 독재기에는 공산주의 피고인들을 변호했다. 전쟁 중에는 AVNOJ 의장으로 민족해방운동의 대표성을 조직했으며, 전후에는 공화국의 집단적 국가원수인 연방 국민의회 상임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두 아들을 전쟁에서 잃은 그의 경력은 서로 다른 정치 전통이 해방과 국가 재건의 국면에서 결합한 과정을 보여준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크로아티아 진보민주당 창립에 참여, 변호사 활동 시작
  • 1918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민평의회 중앙위원
  • 1919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 임시 국민대표부 부의장
  • 1920–1922세르비아인·크로아티아인·슬로베니아인 왕국 제헌의회 및 국민의회 의장
  • 1942–1945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 반파시스트 평의회(AVNOJ) 의장
  • 1945–1953유고슬라비아 연방 국민의회 상임위원회 의장, 집단적 국가원수
  • 1960정치 활동에서 은퇴

두샨 시모비치

Душан Симовић
외국 정치가 유고슬라비아 세르비아계 1882–1962 ○ 자연사

쿠데타와 패전 사이에 선 군인 총리

1918년 11월 자그레브에서 시모비치는 '압도적 다수가 유고슬라비아 연대의 사상에 사로잡혔다'고 보고했고, 이탈리아의 류블랴나 점거 시도를 세르비아군이 먼저 입성하게 함으로써 저지했다.

두샨 시모비치는 왕국 유고슬라비아의 공군 장군 출신으로,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를 이끌어 삼국동맹 가입에 반대하는 군중의 환호 속에 총리가 된 군인 정치가였다. 그러나 집권 뒤에도 독일의 침공을 막으려 삼국동맹을 공식 폐기하지 못했고, 침공으로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다 1942년 물러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00베오그라드 육군사관학교 졸업, 포병 소위
  • 1912–1918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살로니카 전선 제7보병연대 지휘
  • 1918자그레브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세르비아 국민평의회 주재 세르비아 정부·최고사령부 대표
  • 1936–1938유고슬라비아 왕립 공군 사령관
  • 1938–1940유고슬라비아 왕립군 총참모장, 독일 침공 저항 주장 뒤 사임
  • 1941.3–1942.13월 27일 쿠데타 뒤 유고슬라비아 왕국 총리 겸 총참모장
  • 1941–1942런던 유고슬라비아 망명정부 수반
  • 1945–1946베오그라드 귀환, 미하일로비치 재판 증인

누리야 포즈데라츠

Nurija Pozderac
비소련 혁명가 유고슬라비아 보스니아계 유고슬라비아인 1892–1943 ✕ 전사

다민족 저항 연합을 대표한 보스니아 정치가

1941년 여름 우스타샤 지도자 크바테르니크가 카진으로 찾아와 협력을 권하자, 포즈데라츠는 그와의 면담 자체를 단호히 거부했다.

누리야 포즈데라츠는 카진 지역의 교사 출신 보스니아 무슬림 정치가로, 우스타샤 정권의 협력 요구를 거부하고 세르비아인과 유대인 박해에 맞섰다. 아내 데블레타와 함께 수십 명의 유대인 피란민을 구했고, 1942년 아브노이 부의장으로 선출되며 민족적으로 다원적인 해방전선의 대표 인물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0s–1930s카진 지역 교사
  • 1935유고슬라비아 왕국 의회 의원
  • 1941우스타샤 협력 거부, 민족해방운동 참여
  • 1942카진 민족해방위원회 의장
  • 1942아브노이 집행위원회 부의장
  • 1943네레트바·수체스카 전투 참가
  • 1944국민해방훈장 추서

이반 슈바시치

Ivan Šubašić
외국 정치가 유고슬라비아 크로아티아계 1892–1955 ○ 자연사

왕정과 민족해방 세력 사이의 타협 정치가

그는 1944년 11월 베오그라드 협상에서 연립정부와 섭정을 받아들이면서도 군주제 문제를 전후로 넘겼다.

이반 슈바시치는 크로아티아계 유고슬라비아 정치가이자 변호사로, 전쟁 전 크로아티아 바노비나의 초대 수반을 지냈다. 망명 왕정과 티토가 이끄는 민족해방운동의 세력 균형이 바뀌자 그는 양측을 잇는 비공산주의 협상 대표가 되었다. 그는 1944년 티토와 협상해 아브노이의 결정을 받아들이고 연립정부와 섭정을 구상했지만, 군주제의 존속 여부는 전후 결정으로 남겼다.

상세 이력 보기
  • 1918–1921유고슬라비아 의용군 복무 후 법학 공부
  • 1920년대브르보브스코에서 변호사 개업
  • 1938유고슬라비아 국민의회 의원, 크로아티아 농민당
  • 1939–1941크로아티아 바노비나 초대 수반
  • 1944.06–11유고슬라비아 왕정 망명정부 총리
  • 1944.06비스 협정에서 티토와 협상
  • 1944.11베오그라드 협정 초안에 서명, 연립정부와 섭정 구상
  • 1945티토 정부 외무장관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4전체보기

1941–1945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전쟁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전쟁은 1941년 4월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고 분할한 뒤 1945년까지 벌어진 공산당 주도 무장투쟁이다. 독일의 소련 침공 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점령군과 협력 정권에 맞선 전국 봉기를 조직했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끈 파르티잔은 왕당파 체트니크와 경쟁하면서 게릴라 부대에서 정규군으로 성장했다. 추축국의 대공세, 특히 네레트바와 수테스카에서 살아남은 파르티잔은 1943년 연합국의 지원과 승인을 얻었고, 1944년 소련군과 함께 베오그라드를 해방했다. 1945년 3월 군대는 유고슬라비아군으로 개편되었고, 파르티잔의 승리는 왕정을 대신하는 사회주의 연방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1944–1949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1944년 여름부터 붉은군대가 진주한 폴란드·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와 소련 점령지구 독일, 그리고 자력으로 해방을 이룬 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알바니아에서는 공산당이 참여하는 연립정부가 세워졌다. 각국은 토지개혁과 기간산업 국유화를 거쳤고, 1945~46년의 선거는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처럼 결과가 갈린 곳도, 폴란드와 루마니아처럼 공식 집계와 후대에 공개된 기록이 어긋나는 곳도 있었다. 1947년에 연립의 다른 정당들이 해체·분열·재판을 거쳐 밀려났고, 1946~48년에 각국 사회민주당이 공산당과 통합되었다. 같은 시기 「인민민주주의」는 소비에트와 다른 「새로운 길」로 설명되다가 1948년 12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형태」로 재정의되었다. 1949년까지 각국은 헌법과 단일 명부 선거로 새 체제를 확정했고, 당 안에서는 재판과 숙청이 시작되었다.

1944–1949

불가리아: 조국전선에서 코스토프 재판까지

1944년 9월 5일 소련이 불가리아에 선전포고하고 8일 국경을 넘자, 9일 새벽 공산당·농민동맹·즈베노·사회민주당의 조국전선이 소피아에서 정권을 잡았다. 인민재판소는 1945년 2월 1일 섭정과 장관들을 처형했고, 불가리아군은 붉은군대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에서 싸웠다. 농민동맹은 1945년 페트코프의 야당과 조국전선 잔류파로 갈라졌고, 1946년 국민투표로 왕정이 폐지된 뒤 10월 대국민의회 선거에서 공산당이 과반, 야당이 28%를 얻었다. 1947년 페트코프가 국회에서 체포되어 9월 처형되었고, 12월 디미트로프 헌법과 국유화법이 통과되었다. 1948년 사회민주당이 공산당에 합쳐졌으며, 디미트로프는 12월 제5차 당대회에서 인민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형태로 규정했다. 1949년 디미트로프가 죽고 부총리 코스토프가 재판을 받아 처형되었다.

1948–1955

티토-스탈린 결별

티토-스탈린 결별은 1948년 6월 코민포름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제명하면서 사회주의 진영에 처음으로 공개 균열이 생긴 사건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군이 아니라 자국 파르티잔의 힘으로 해방과 혁명을 이뤘고, 그만큼 모스크바의 지시에 덜 매여 있었다. 발칸 연방 구상과 그리스 내전 지원을 둘러싼 마찰, 유고슬라비아 내 소련 고문단과 정보망에 대한 반발이 쌓이자, 스탈린은 서한 논쟁과 코민포름 결의로 티토 지도부의 굴복을 요구했다. 결의는 유고슬라비아 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이탈해 민족주의의 길로 갔다고 선고했지만, 예상과 달리 유고슬라비아 당은 지도부를 중심으로 뭉쳐 버텼다. 소련과 동유럽의 경제 봉쇄, 국경 도발, 침공 준비설 속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서방의 원조를 받아들였고,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독자 모델을 만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