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약진과 대기근
「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는다」는 운동은 어떻게 평시 최대의 기근이 되었는가?
1958년 마오는 소련 모델을 넘어 대중 동원으로 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도약시키겠다며 「세 개의 붉은 깃발」 아래 인민공사·공공식당·토법 고로·수리 건설을 밀어붙였다. 반우파 투쟁 뒤 비판이 막힌 가운데 부풀려진 수확 보고에 맞춘 징수와 수출, 공공식당의 낭비가 겹쳐 1959~1961년 대기근이 일어났고, 사망자 추산은 1,500만~4,500만 명 이상으로 갈린다. 1959년 루산 회의에서 펑더화이의 비판이 「반당」으로 몰리며 반우경 운동이 기근을 악화시켰고, 1960년 말 신양 사건이 드러난 뒤에야 조정이 시작되어 1962년 7천인 대회에서 지도부는 후퇴를 인정했다.

소련 모델을 넘어서
1957년은 건국 뒤 경제가 가장 순조로웠던 해로 꼽힌다. 제1차 5개년 계획이 끝났고 재정은 흑자였으며 공농업 생산은 전년보다 10% 늘었다. 그러나 이 성과는 소련식 모델, 곧 중공업 우선과 전문가 지배, 농촌에서 잉여를 걷어 도시 공업을 키우는 방식에 기대고 있었다. 세금과 국가 의무수매가 1957년 수확의 30%를 가져갔고 농촌에는 여유가 거의 없었다. 1956년 호구제가 시행되어 농민은 허가 없이 현 밖으로 옮겨 갈 수 없었고, 복지는 도시 노동자에게 먼저 돌아갔다. 마오쩌둥은 「10대 관계를 논함」에서 농업과 경공업, 지방의 주도권을 강조하며 소련을 그대로 따르지 않겠다고 했고, 반우파 투쟁으로 비판 세력을 침묵시킨 뒤 더 빠른 길을 찾았다. 1 2
그 길을 막아선 것이 1956년의 「반모진(反冒進)」이었다. 1955년 말부터 지표를 층층이 높이는 「모진(무모한 전진)」 바람이 불자 저우언라이·천윈·리셴녠은 1956년 6월 기본 건설 투자를 줄이고 계획을 고쳐 균형을 되찾으려 했다. 마오는 이미 1955년 「많이, 빨리, 좋게, 절약하며(多快好省)」를 내세웠고, 이를 우경 보수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 삼았다. 반우파 투쟁 중에 장시뤄 같은 당 밖 인사가 마오와 당을 「공명을 좋아하고 성과에 급급하다」고 비판한 것도 「우파의 진공」으로 몰렸다. 1957년 11월 13일 《인민일보》 사설은 합작화를 이룬 농촌에서 「생산 전선의 대약진」이 가능하고 필요하다며 처음으로 「대약진」이라는 말을 썼다. 1 2 3
같은 달 마오는 10월 혁명 40주년 기념 회의에 참석하러 모스크바에 갔다. 흐루쇼프가 평화적 경쟁으로 15년 안에 미국을 따라잡고 앞지르겠다고 하자, 마오는 18일 회의에서 중국은 5년 뒤 강철 1천만~1,500만 톤을 생산하고 15년 뒤 영국을 따라잡거나 넘어서겠다고 응수했다. 12월 2일 류사오치가 공회 대회에서 이 목표를 국내에 처음 공표했다. 1957~1958년 겨울 화베이 평원에서는 농민 수천만 명이 수리 공사에 동원되었고, 마오는 여기서 자본과 기술이 모자란 나라가 노동력의 대동원으로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국가 투자 없이 농민이 스스로를 먹이면서 도시에 곡물과 원료, 심지어 강철까지 대는 것이 대약진의 기본 구상이었다. 4 1 2
난닝에서 총노선까지
1958년 초 마오는 잇따른 회의로 반모진을 청산했다. 1월 11~22일 난닝 중앙공작회의에서 그는 반모진이 대다수 부장과 성위원회 서기, 6억 인민과 떨어진 것이라 비판하며 “어떤 동지들은 우파와 5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했다. 저우언라이와 류사오치는 반모진의 책임을 반성했고, 저우는 6월 총리직 사직을 청하기까지 했다. 회의는 「공작방법 60조」를 정리했다. 3월 청두 회의에서 마오는 10년 남짓이면 영국을, 20년 남짓이면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야금공업부장 왕허서우가 1962년 강철 1,500만 톤과 10년 안의 영국 추월을 「비교적 현실적인 구상」이라 보고하자 마오는 다른 부처에 그를 배우라고 했다. 5 1 2
5월 5~23일 제8차 당대회 제2차 회의는 「온 힘을 다해, 높은 곳을 향해, 많이·빨리·좋게·절약하며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사회주의 건설 총노선을 채택했다. 회의는 또 과도기 내내 프롤레타리아와 부르주아,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두 길의 투쟁이 주요 모순이라는 마오의 1957년 판단을 확인해, 1956년 8대 1차 회의가 내린 결론을 뒤집었다. 국가계획위원회 주임 리푸춘은 1962년 강철 3천만 톤, 7년 안의 영국 추월과 15년 안의 미국 추월을 제시했고, 2차 5개년 계획의 강철 목표는 1,200만 톤에서 3천만 톤으로, 곡물 목표는 5천억 근에서 7천억 근으로 올라갔다. 마오는 “7년이면 영국을 따라잡고 다시 8년이나 10년이면 미국을 따라잡는다”고 썼다. 1 2 6
총노선은 대약진, 인민공사와 함께 「세 개의 붉은 깃발(三面紅旗)」로 불리며 비판할 수 없는 성역이 되었다. 마오는 이것을 소련의 길과 다른 중국의 길이라 보았다. 대약진의 원리는 「두 다리로 걷기」, 곧 중공업과 경공업, 도시와 농촌, 대규모와 소규모, 근대 기술과 토착 기술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것이었고, 기술 전문가 대신 대중의 혁명적 열의와 옌안 시절의 방식, 곧 대중 동원과 평등화, 관료주의 공격, 물질적 제약의 무시에 기대는 것이었다. 지방에서 성공한 실험을 전국의 본보기로 퍼뜨리는 「점으로 면을 이끌기」가 동원의 방법이 되었다. 회의 직후 각 분야에서 「과장의 바람(浮誇風)」이 불기 시작했다. 7 2 1
「인민공사는 좋다」
1955년 마오가 합작화 가속을 요구한 뒤 농촌은 5~15가구의 호조조, 20~40가구의 초급사, 100~300가구의 고급사를 거쳐 왔다. 1958년 봄 허난 수이핑현의 차야산에서 고급사들을 합쳐 큰 사를 만들자는 제안이 나왔고, 4월 첫 실험 공사가 섰다. 여기서 처음으로 사유 텃밭이 완전히 없어지고 공동 부엌이 들어섰다. 8월 마오는 “인민공사라는 이름이 좋다. 노동자·농민·병사·학생·상인을 다 포함하고, 생산과 생활과 정권을 함께 관리한다”고 말했고, 시찰지에서 한 「인민공사는 좋다」는 말이 신문에 실려 전국으로 퍼졌다. 마오는 공사가 크고 공적이어서 인민공사라고 설명했다. 2 1 8
8월 17~30일 베이다이허 정치국 확대회의는 농촌에 인민공사를 세우기로 결의했다. 공사화의 속도는 마오가 말한 시범의 범위와 「내년 봄까지」라는 일정을 훨씬 넘어섰다. 연말까지 고급사 74만 개가 인민공사 약 2만 6천 개로 합쳐졌고, 1억 2천만 가구, 농민의 99% 이상이 공사에 들어갔다. 공사 하나는 평균 5,200가구, 2만 4천 명에 이르렀다. 공사는 생산과 행정, 민병, 교육, 의료를 하나로 묶었고, 임금과 화폐 대신 노동 점수를 썼다. 16~60세 농민은 모두 민병에 편성되었고 노동은 군대식으로 조직되었다. 일부 지방은 「공산주의로 뛰어 들어간다」고 선언했다. 9 10 8 2
공사의 상징은 공공식당이었다. 집집의 부엌이 없어지고 솥과 탁자까지 공사 부엌에 바쳐졌으며, 식당은 노동 점수와 관계없이 원하는 사람에게 「배불리 먹는」 공급제를 실시했다. 가사와 육아, 세탁을 공동화해 여성을 집 밖의 노동으로 이끌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러나 1958년 가을의 낙관 속에서 많은 식당이 몇 달 만에 한 해치 식량을 먹어 치웠고, 공사 단위의 「평균주의와 무상 징발(一平二調)」, 곧 「공산풍」은 생산대와 농가의 재산을 마음대로 옮겨 갔다. 흐루쇼프는 중국의 인민공사를 소련이 1920년대에 버린 코뮌에 견주며 잘못된 실천이라 했고, 미코얀은 미국에서 그런 공사는 유인 체계 없이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11 8 1 12
강철 원수와 「위성」
베이다이허 회의는 1958년 강철 생산을 1957년의 두 배인 1,070만 톤으로 정했다. 연초 계획은 624만 8천 톤이었다. 「강철을 고리로 삼는다」, 「강철 원수가 장막에 오른다」는 구호 아래 가을에 9천만 명이 산에 올라 광석을 캐고 숲을 베어 흙으로 만든 「토법 고로」를 땠다. 9월 안후이 성위원회 서기 쩡시성이 마오 앞에서 토법 고로로 녹인 강철 덩어리를 보여 주자 마오는 전국에 이 방식을 권했다. 농가는 솥과 농기구까지 녹여 넣었다. 목표는 숫자로는 채워졌으나 1958년 발표된 강철 1,108만 톤 가운데 합격품은 800만 톤이었고, 300만 톤 넘게 쓸 수 없었다. 국가통계국은 토법 제강의 손실을 50억 위안으로 추산했다. 13 1 14 15 2
농업에서는 「위성 발사」가 벌어졌다. 6월 8일 《인민일보》는 허난 수이핑의 위성 농업사가 밀 5무에서 무당 2,105근을 거두었다고 보도했고, 이후 보도는 경쟁적으로 부풀어 9월 광둥 롄현의 벼 무당 6만 437근에 이르렀다. 다른 밭의 벼를 옮겨 심어 시찰단에 보이거나 같은 광주리를 여러 번 다는 속임수가 쓰였다. 8월 4일 허베이 쉬수이현을 찾은 마오는 “식량이 남으면 어떻게 하나, 하루 다섯 끼를 먹어도 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1957년 쉬수이의 무당 수확은 138근이었다. 《인민일보》는 「사람이 대담한 만큼 땅이 많이 낸다」는 제목을 달았고, 물리학자 첸쉐썬은 태양 에너지로 계산하면 무당 수확이 지금의 20배도 가능하다는 글을 썼다. 1 16 17
마오가 권한 농법은 피해를 키웠다. 소련의 리센코와 그 동료 말체프의 이론에 기댄 「밀식」은 같은 종의 씨앗은 서로 경쟁하지 않는다며 모를 서너 배로 빽빽이 심게 했고, 「심경」은 1~2자 깊이로 땅을 파게 했다. 안후이에서는 밀식으로 무당 400근이던 수확이 200근 아래로 떨어졌다. 1958년 12월에는 이런 원칙을 묶은 「농업 8자 헌법」이 전국에 내려갔다. 쥐·파리·모기·참새를 없애는 「사해(四害) 제거」 운동은 참새를 대량으로 잡아 해충이 들끓게 했고, 1960년에야 참새가 빈대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노동력이 강철과 수리 공사에 끌려가는 동안, 날씨가 좋아 풍작이던 1958년 가을 곡식의 10%가량이 거두어지지 못한 채 밭에서 썩었다. 17 2 18 19 1
첫 조정과 꺾이지 않은 고지표
1958년 겨울부터 일부 문제가 위에도 보이기 시작했다. 11월 제1차 정저우 회의와 우창의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마오는 공산풍과 고지표, 과장의 바람을 문제 삼았다. 그는 「15년 사회주의 건설 강요 40조」 초안의 숫자를 두고 근거가 부족하니 2년 미뤄 두고 밖에 알리지 말라며 “헛된 이름을 좇다 실제 화를 입지 말라”고 했다. 11~12월 우창의 8기 6중전회는 1959년 강철 목표를 3천만 톤에서 1,800만~2천만 톤으로 낮추고 공사의 분배를 손보았다. 그러나 1958년 곡물 생산을 7,500억 근으로 본 베이다이허의 추정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실제 1958년 생산은 4천억 근(2억 톤)이었다. 1 17
부풀려진 수확은 징발의 근거가 되었다. 1959년 3월 상하이 회의는 감산의 조짐에도 1958년 기준에 따라 전국에서 곡물 1,350억 근을 징수하기로 했다. 1959년 생산은 11% 줄었는데 징수량은 14.7% 늘었고, 농민 1인당 남는 곡물은 1957년의 250근에서 174근으로 떨어졌다. 곡물 순수출은 1958년 270만 톤에서 1959년 420만 톤으로 늘었다. 마오는 4월 29일 「당내 통신」에서 지난해 무당 300근이던 땅이 100~200근 더 거두면 잘한 것이고 800근, 1천 근, 1,200근을 말하는 것은 “허풍일 뿐”이라며 상급의 지표를 무시하고 현실 가능성만 보라고 썼지만, 이 편지는 안후이처럼 아예 아래로 전달되지 않은 곳도 있었다. 그달 27일 마오는 국가주석에서 물러나고 류사오치가 뒤를 이었다. 1 15 2
지방 간부들은 양쪽에서 압력을 받았다. 상급은 목표 달성을 성과로 쳤고, 반우파 투쟁 이후 낮은 숫자를 보고하는 것은 「우경」이 될 위험이 있었다. 통계 보고 체계는 1957년 통계 전문가에게서 당 간부에게로 넘어가 정치적 고려가 정확성을 앞섰고, 국가통계국장 쉐무차오가 1958년 “상급이 원하는 대로 숫자를 준다”고 했다는 말도 전한다. 회의에 참석한 이들은 생산 수치가 실제의 10배까지 부풀려졌다고 회고했다. 마오를 만날 기회 같은 영예를 두고 경쟁이 붙을수록 과장은 커졌고, 국가는 그 수치에 맞춰 생산대가 감당할 수 없는 곡물을 사들였다. 1958년 한 해에만 비농업 국가 고용이 2,100만 명 늘었고, 배급을 받는 도시 인구가 1960년까지 3,124만 명 불어난 것도 농촌의 부담을 키웠다. 2 17 20
루산: 비판이 「반당」이 되다
1959년 7월 2일 장시 루산에서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는 대약진의 과열을 식히고 실무 문제를 풀려는 자리였다. 마오도 처음에는 뒷마당 제강을 「큰 재난」이라 부르며 공사화를 서두른 자신을 비판했다. 봄에 동유럽과 소련을 돌며 흐루쇼프 등에게 대약진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던 국방부장 펑더화이는 조별 토론에서 “대약진의 잘못에는 마오 주석을 포함해 모두 책임이 있다”고 말했고, 7월 14일 마오에게 사신을 보냈다. 편지는 마오의 「위대한 성과」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과장의 바람, 쓸모없는 강철을 낸 토법 고로, 공사 민병을 비판하고, 제강이 「득도 있고 실도 있었다」며 잘못의 원인을 「소자산계급의 광열성」에서 찾았다. 21 22 1
마오는 7월 17일 편지를 인쇄해 회의에 돌렸고, 외교부 제1부부장 장원톈은 대약진의 경제적 오류를 조목조목 지적하는 긴 발언을 했다. 총참모장 황커청과 후난성 당 서기를 지낸 저우샤오저우도 펑더화이 쪽에 섰다. 7월 23일 마오는 반격했다. 그는 당 안팎에서 협공을 받고 있다고 하며, 공사와 식당에 열성인 빈농·하중농을 「소자산계급의 광열」이라 부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열 가지 일 가운데 아홉이 나쁘다고 신문에 다 실리면 우리는 망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는 농촌으로 가서 농민을 이끌고 정부를 뒤엎겠다. 해방군이 따르지 않으면 홍군을 찾아 다시 해방군을 조직하겠다”고 말했다. 저우언라이를 비롯해 누구도 펑을 지지하지 않았다. 23 21 24 1
8월 2~16일의 8기 8중전회는 「펑더화이를 우두머리로 한 반당 집단」에 관한 결의를 채택해 펑더화이·황커청·장원톈·저우샤오저우를 모든 직책에서 몰아냈다. 마오는 그들이 「우파와 30킬로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했고, 이 다툼을 지난 10년 사회주의 혁명 속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생사를 건 투쟁의 연장이라 규정했다. 펑을 변호하지 않은 마오의 비서 리루이는 당적을 잃고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루산 회의 도중인 7월 18일 흐루쇼프가 폴란드에서 인민공사를 공개 비판한 일도 겹쳐, 마오는 펑더화이가 「조국 몰래 외국과 결탁했다」고까지 말했다. 9월 린뱌오가 국방부장이 되어 군에서 펑의 지지자를 걸러 냈다. 회의 뒤 전국에서 「반우경」 운동이 벌어져 300만 명이 넘는 간부와 당원이 「우경 기회주의자」로 비판받거나 처분을 받았다. 공공식당을 해산하라고 지시했던 안후이 부성장 장카이판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21 25 26 27 28 29 17 1
루산은 대약진의 진로를 바꾸었다. 고지표를 거두려던 1959년 상반기의 조정은 멈추었고, 누구도 「찬물을 끼얹지」 못하는 분위기 속에 과장과 강제 징수가 되살아났다. 반우경의 칼날은 굶주림을 보고하는 간부를 「작은 펑더화이」로 몰았다. 루산 회의는 건국 뒤 처음으로 지도부의 정책 이견이 공개 충돌로 번진 사건이었고, 지도부 안에서도 펑이 부당하게 다루어졌고 당의 규범이 깨졌다는 인식을 남겼다. 마오는 1962년 7천인 대회에서 루산이 본래 일을 논하려던 자리였는데 펑이 뛰어들어 판이 엉망이 되었다고 회고했다. 1965년 『해서파관』 비판이 펑더화이 사건의 은유로 읽힌 것도 이 때문이다. 21 17 22
기근: 신양과 안후이
1959년 곡물 생산은 1958년의 2억 톤에서 1억 7천만 톤으로, 1960년에는 1억 4,350만 톤으로 떨어졌다. 1960년 생산은 1957년보다 26% 넘게 적었고 면화는 35%, 유료 작물은 절반 넘게, 돼지는 56% 줄어 1951년 수준으로 돌아갔다. 그런데도 국가는 징수를 줄이지 않았고, 1960년에도 곡물 272만 톤을 수출하며 소련에 진 빚 19억 7,300만 위안을 갚았다. 1960년 국가 창고에 500억 근이 있으리라던 중앙의 믿음과 달리 실제로는 127억 근뿐이었다. 굶주림은 거의 농촌에 몰렸다. 도시는 줄어든 배급이라도 받았지만 호구제에 묶인 농민은 마을을 떠날 수 없었고, 지주·부농·우파 같은 「흑분자」는 식량 배분에서 맨 뒤로 밀렸다. 17 1 30 2
가장 참혹한 곳 가운데 하나가 허난성 신양 지구였다. 허난 성위원회 제1서기 우즈푸는 1958년 실제 281억 근이던 성의 곡물 생산을 702억 근으로, 1959년 210억 근을 450억 근으로 내세웠고, 루산에서 돌아와 「작은 펑더화이」를 잡아내라고 지시했다. 1959년 신양의 실제 생산은 20억 근 남짓이었으나 지구는 50억 근으로 보고했고, 성은 9억 근의 징수를 맡겼다. 민병이 집집을 뒤져 「감춘 곡식」을 찾았고 농민을 묶고 매달고 때렸다. 1959년 10월부터 1960년 4월 사이 굶어 죽는 사람이 쏟아졌다. 지구는 길목마다 초소를 세워 피란민을 막고, 구원을 청하는 편지를 우체국에서 압수했다. 사람들은 곡물 창고 문 앞에서 죽어 갔다. 31 32 17
소식은 1960년 2월 내무부 처장의 시찰과 구스현의 전보를 통해 국무원 비서장 시중쉰에게, 다시 중앙감찰위원회 서기 둥비우에게 전해졌다. 10월 중앙조직부와 감찰위원회의 조사 보고를 리푸춘이 마오에게 올렸고, 마오는 류사오치·저우언라이에게 즉시 대책을 논의하라고 했다. 1961년 1월 지구의 마지막 보고는 1959년 11월부터 1960년 10월까지 총인구 808만 명 가운데 107만 명, 13.2%가 죽었다고 했다. 지구가 성에 보고한 숫자는 38만 명, 지방지는 48만 3천 명이었다. 마오는 신양 사건을 「공산당 간판을 단 국민당의 계급 보복」이라 규정했고, 당은 「민주혁명 보충 수업」으로 간부를 대거 갈아 치웠다. 지구 서기 루셴원은 징역 3년을 받았고 우즈푸는 세 차례 자기비판으로 끝났다. 31 32 6
피해는 지방 지도자의 열성에 따라 갈렸다. 안후이의 쩡시성은 마오의 신임을 등에 업고 수리 공사를 밀어붙이며 기근을 감추었고, 반대한 부성장 장카이판을 「펑더화이 반당 집단」으로 몰았다. 관방의 『안후이성지·인구지』가 인정한 사망자는 407만 명이고, 1959~1961년 안후이의 사망률은 18%로 추산된다. 「하늘의 곳간」이라던 쓰촨에서는 성위원회 서기 리징취안이 중앙의 징수와 외부 지원 요구를 그대로 따랐고, 충칭을 포함한 쓰촨 지역의 사망률은 13~15%에 이르렀으며 관방 통계로도 800만 명 넘게 죽었다. 반면 장시 지도부는 일부 대약진 정책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피해를 줄였다. 펑시저의 분석으로는 간쑤·쓰촨·구이저우·후난·광시·안후이가 가장 큰 타격을 입었고, 도시의 사망률 증가는 농촌의 절반 정도였다. 15 17 33 34 2
기근은 굶주림만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 양지성의 조사는 진짜 수확을 보고하거나 경보를 울리거나 남은 식량을 내놓지 않거나 달아나려 하거나 구걸하거나 먹을 것을 훔친 이들이 맞아 죽은 사례를 기록했다. 대약진기 사망자의 7%가량이 고문이나 즉결 처형으로 죽었다는 추산이 있고, 투쟁대회의 구타는 굶주린 몸에 치명적이었다. 나무껍질과 흙을 먹었고, 구스현에서만 관방 기록에 남은 식인 사례가 200건이었다. 출생도 급감해 출생률은 1958년 2.9%에서 1960년 2.1%로 떨어졌고 사망률은 1.2%에서 2.5%로 올랐다. 1960년과 1961년 중국 인구는 600년 동안 세 번째로 줄었다. 1960년 11월 고위 간부에게만 식품과 생필품을 대는 특별 공급 제도가 전국에 만들어졌다. 2 20 31 17

후퇴: 12조에서 조사 연구의 해까지
1960년 여름 위기가 겹쳤다. 7월 16일 소련 정부는 중국에서 일하는 전문가를 모두 불러들이겠다고 통보했고, 7월 28일부터 9월 1일 사이에 철수가 끝나 여러 공업 사업이 멈추었다. 7~8월 베이다이허 공작회의는 기본 건설을 줄이고 농업을 지키기로 했고, 9월 30일 국가계획위원회의 1961년 계획 보고에서 「조정·공고·충실·제고」라는 여덟 자 방침이 처음 나왔다. 4월 상하이 방직 공장이 면화가 없어 멈추었고, 주장 삼각주에서는 많은 사람이 홍콩으로 달아났다. 굶어 죽는 사람이 있다는 보고가 잇따르자 10월부터 마오는 고기를 끊었고, 저우언라이도 자신의 곡물 배급을 줄였다. 1 17 12
11월 저우언라이가 기초한 「농촌 인민공사의 당면 정책에 관한 긴급 지시 서한」(12조)은 공산풍을 바로잡으라며 처음으로 농민의 작은 사유 텃밭과 가정 부업을 허용하고, 생산대를 기본으로 하는 소유와 농촌 시장을 되살렸다. 곡물의 긴급 수송과 수입, 징수량 대폭 감축, 곡물 가격 인상이 이어졌다. 1961년 1월 14~18일의 8기 9중전회는 여덟 자 방침을 공식 채택했고, 이로써 대약진은 사실상 끝났다고 평가된다. 다만 마오는 같은 회의에서 전국 정권의 3분의 1이 공산당 손에 있지 않다며 지주·부농의 복벽과 「평화적 변화」를 원인으로 들고 농촌의 사회주의 교육을 주장했다. 1961~1963년 중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캐나다에서 대량의 곡물을 사들여 도시에 대고 농촌의 징수 부담을 덜었다. 31 1 2 17
마오는 1961년을 「조사 연구의 해」로 선언하고 비서들을 농촌에 보냈다. 비서 톈자잉은 후난 조사에서 대약진의 논리 자체에 의문을 던지는 보고를 올렸다. 류사오치는 4~5월 고향 후난의 마을에서 44일을 지낸 뒤 농민들이 기근을 「3할은 천재, 7할은 인재」라 한다고 전했고, 5월 31일 중앙공작회의에서 대다수 지방에서는 공작의 결점과 잘못이 주된 원인이라고 말했다. 덩샤오핑도 같은 날 이에 동의했다. 「농촌 인민공사 공작 조례」(60조)에 따라 공사의 크기는 3분의 1로 줄고 기본 회계 단위는 생산대로 내려갔다. 1961년 안후이의 쩡시성은 「책임전(責任田)」을 성 전체에 퍼뜨려, 36개 현 조사에서 생산이 평균 38.9% 늘었다. 35 17 1 8 36
7천인 대회와 「계급투쟁을 잊지 말라」
1962년 1월 11일부터 2월 7일까지 베이징에서 중앙과 성·지구·현, 주요 기업과 군의 간부 7,118명이 모인 확대 중앙공작회의가 열렸다. 보고 초안 위원회에서 펑전은 “마오 주석도 잘못이 없는 것이 아니다. 3~5년 과도 문제와 식당은 주석이 승인한 것”이라며 마오의 1%, 1‰의 잘못이라도 검토하지 않으면 당에 나쁜 영향을 남길 것이라 했다. 저우언라이는 잘못된 자료를 올린 실무자의 책임이라며 마오를 감쌌다. 1월 27일 류사오치는 세 시간 남짓한 보고에서 1959~1961년 농업이 증산이 아니라 크게 감산했고 1961년 공업 생산도 40% 넘게 줄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하며, 후난 농민의 말대로 「3할은 천재, 7할은 인재」라고 했다. 37 38 1 39
1월 30일 마오는 민주집중제를 주제로 연설하며 자기비판을 했다. 그는 대중의 비판을 두려워하는 간부를 꾸짖고 이렇게 말했다. “지난 몇 년 동안의 결점과 잘못에 대해서는 첫째 책임이 중앙에 있고, 중앙에서는 첫째 책임이 나에게 있다.” 그러나 그는 류사오치의 보고를 인용해 지난 4년의 노선은 옳았고 성과가 주된 것이라고 덧붙였고, 「세 개의 붉은 깃발」은 손대지 못하게 했다. 국방부장 린뱌오는 대약진의 실패를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채 마오쩌둥 사상을 앞날의 등불이라 찬양했다. 회의 뒤 마오는 일상 업무에서 한발 물러나 「2선」에 섰고, 경제와 당무는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이 맡았다. 40 38 2
2월 21~23일 중난하이 시러우에서 열린 정치국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천윈은 겉으로 균형을 이룬 예산 뒤에 50억 위안의 적자가 있고 지폐 남발로 물가가 오르고 있다고 밝히며, 앞으로 3~5년을 회복 단계로 삼고 도시 인구를 줄이는 「정병간정」으로 대담하게 후퇴하자고 제안했다. 류사오치·덩샤오핑·천윈·덩쯔후이는 사유 텃밭, 자유 시장, 손익 자기 책임과 농가 생산 도급을 묶은 「삼자일포(三自一包)」를 지지했고, 덩샤오핑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라는 속담을 인용했다. 그러나 마오에게 이것은 집단화를 허무는 일이었다. 8월 베이다이허에서 그는 계급투쟁을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말해야 한다”고 했고, 9월 8기 10중전회는 「계급투쟁을 절대 잊지 말라」를 내걸고 조정의 시기를 닫았다. 마오는 1963년 사회주의 교육운동,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권력의 중심에 돌아왔다. 41 38 42 36 3
평가: 몇 명이 죽었고 누가 책임지는가
사망자 수는 지금도 갈린다. 공식 통계상 1961년 인구는 1959년보다 1,458만 명 적었고, 2011년 『중국공산당 역사』 제2권은 1960년 인구가 전년보다 1천만 명 줄었다고만 인정했다. 연구자들의 초과 사망 추산은 방법과 자료에 따라 크게 다르다. 중국과학원 국정분석 연구소조(1989)는 영양실조 사망 1,500만 명, 장정화(1986)는 1,700만 명, 안슬리 콜은 2,700만 명, 주디스 배니스터(1987)와 배질 애슈턴 등(1984)은 약 3천만 명, 차오수지(2005)는 3,250만 명, 공안부 인구학자 왕웨이즈는 3,300만~3,500만 명, 양지성(2008)은 3,600만 명, 체제개혁연구소의 천이쯔는 4,300만~4,600만 명, 디쾨터(2010)는 4,500만 명을 제시했다. 반대쪽 끝에는 우차 파트나이크의 1,100만 명, 수학자 쑨징셴의 366만 명(또는 250만 명 이하) 같은 낮은 추산이 있다. 신화사 기자 출신 양지성이 지방 당안과 증언으로 쓴 『묘비』(2008)는 홍콩에서 나왔고 대륙에서는 금서다. 그는 태어나지 못한 4천만 명을 더해 인구 손실을 7,600만 명으로 본다. 1 2 17 20 43
추산이 엇갈리는 데는 이유가 있다. 당시 전체 인구조차 5천만~1억 명의 오차 안에서 알려지지 않았고, 통계 체계는 1957년 이후 정치에 무너졌으며, 문화대혁명 때 국가통계국 자료가 대량으로 불탔다. 배급을 계속 받으려고 죽음을 신고하지 않은 가족도 많았고 인구 이동도 셈을 어렵게 했다. 디쾨터는 기존 추산들이 모두 과소 추계라 보고, 적어도 250만 명이 구타·고문·즉결 처형으로 죽었다고 주장한다. 다니엘 부코비치는 그 수치의 근거가 천이쯔의 인터뷰 발언뿐이라 검증할 수 없다고 비판하고, 모보 가오는 반공 쪽은 수치를 최대한 늘리고 혁명에 공감하는 쪽은 최대한 줄이려 한다고 지적한다. 1961년 가을 마오는 몽고메리 원수에게 1960~1961년의 「비정상 사망」이 500만 명을 넘는다고 말했다고 CIA 문서는 전한다. 2 17 43
원인과 책임에 대해서도 견해가 갈린다. 중국 정부는 오랫동안 「3년 자연재해」라 불렀고 1981년 6월부터 「3년 곤란 시기」라 고쳐 불렀다. 같은 달의 「역사결의」는 1959~1961년의 어려움이 주로 대약진과 반우경 투쟁의 잘못 때문이며 잇단 자연재해와 소련의 일방적 계약 파기가 겹쳤다고 했고, 펑더화이 비판은 「완전히 잘못」이었다고 인정했지만 사망자 수는 말하지 않았다. 양지성은 기상 기록을 근거로 날씨가 평년과 다르지 않았다고 보고 기근의 원인을 마오의 정책과 전체주의 체제에 돌리며, 기근의 절정에도 공공 창고에 곡물 2,200만 톤이 있었다고 썼다. 하우저 등의 2005년 연구는 초과 사망 1,480만 명 가운데 69%를 국가 정책 탓으로 보았다. 아마르티아 센의 주장처럼 신멍·낸시 첸·피에르 야레드는 전체 생산은 기근을 피하기에 충분했으며 경직된 수매 제도가 사망의 절반 이상을 설명한다고 보았고, 1959~1960년 곡물 순수출만으로도 1,600만 명을 먹일 수 있었다는 계산도 있다. 17 2 20
대약진은 사회주의 운동에 무거운 물음을 남겼다. 그것은 자본도 기술도 없는 가난한 농업국이 대중의 열의와 조직으로 소련식 발전의 대가를 피하면서 단숨에 공업화하려 한 시도였고, 여성의 노동 참여와 농촌 의료, 수리 시설과 트랙터·비료 생산, 다칭 유전처럼 남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비판이 「반당」이 되는 체제에서 아래의 정보는 위로 올라가지 못했고, 위의 숫자는 아래에서 굶주림으로 바뀌었다. 스튜어트 슈람은 대약진 뒤의 기아를 토지개혁과 1차 5개년 계획의 성과와 나란히 놓고 보았고, 모보 가오는 악의보다 거대한 나라를 하나의 방식으로 다스리는 구조의 문제를 지적한다. 대약진의 책임을 둘러싼 지도부의 균열은 문화대혁명의 뿌리가 되었고, 1960년대 초 안후이의 책임전과 「삼자일포」는 1978년 이후 농가생산책임제의 선례가 되었다. 2 44 45 36
결과
류사오치·덩샤오핑의 조정 정책으로 경제는 회복되었으나 마오는 이를 「자본주의의 부활」로 보았고, 대약진의 책임을 둘러싼 지도부의 균열이 문화대혁명의 뿌리가 되었다. 기근의 규모는 1980년대 인구통계로 처음 드러났고 중국에서는 여전히 「3년 자연재해」로 불린다.
연표와 지도
- 1957.11「15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는다」
모스크바에서 마오가 소련의 「미국 추월」에 맞춰 철강 생산에서 영국을 앞서겠다고 선언했다.
- 11957.11.13「대약진」 구호의 등장
《인민일보》 사설이 합작화를 이룬 농촌에서 「생산 전선의 대약진」이 필요하다며 처음으로 대약진을 말했다.
- 21958.01.11–
22 난닝 회의마오가 반모진을 비판하며 “어떤 동지들은 우파와 50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고 했고, 저우언라이·류사오치가 반성했다.
- 31958.03.09–
26 청두 회의마오가 10년 남짓이면 영국을, 20년 남짓이면 미국을 따라잡을 수 있다고 말했다.
- 41958.04첫 인민공사
허난 수이핑현 차야산에서 고급사를 합친 첫 실험 공사가 서고 사유 텃밭이 없어졌다.
- 51958.05제8차 당대회 2차 회의: 총노선 채택
「많이·빨리·좋게·절약하며 사회주의를 건설하자」는 총노선이 채택되고 대약진이 공식화되었다.
- 61958.06.08첫 「위성」 보도
《인민일보》가 수이핑 위성 농업사의 밀 무당 2,105근을 보도하며 과장 경쟁이 시작되었다.
- 71958.08베이다이허 회의: 인민공사와 철강 1,070만 톤
정치국이 인민공사의 전국화와 철강 생산 두 배를 결의했다. 마오는 「인민공사는 좋다」고 말했다.
- 81958.08.04마오의 쉬수이 시찰
곡식이 남으면 어떻게 하느냐며 “하루 다섯 끼를 먹어도 된다”고 했다. 1957년 쉬수이의 실제 수확은 무당 138근이었다.
- 91958.09–
12 뒷마당 용광로와 「위성 밭」9천만 명이 철을 녹였고 신문은 무당 수만 근의 수확을 보도했다. 수확은 밭에 방치되었다.
- 101958.11–
1959.02 첫 조정 시도정저우·우창 회의에서 마오가 「공산풍」의 과잉을 인정하고 목표를 낮췄으나 기본 노선은 유지했다.
- 1958.12공사화 완료
연말까지 고급사 74만 개가 인민공사 약 2만 6천 개로 합쳐져 농가의 99% 이상이 공사에 들어갔다.
- 111959–
1960 신양 사건허난 신양 지구에서 징발과 폭력으로 100만 명 이상이 죽었다. 1960년 말 중앙이 조사에 나섰다.
- 121959.03상하이 회의의 징수 결정
감산의 조짐에도 1958년 기준으로 곡물 1,350억 근을 징수하기로 했다.
- 131959.04.27마오의 국가주석 사임
류사오치가 국가주석을 이었다. 이틀 뒤 마오는 고지표를 「허풍」이라 한 당내 통신을 썼다.
- 141959.07–
08 루산 회의펑더화이의 편지가 「우경 기회주의」로 규정되고 반당집단 숙청과 반우경 운동이 시작되었다.
- 151959.07.14펑더화이의 편지
펑더화이가 마오에게 과장의 바람과 「소자산계급의 광열성」을 지적하는 사신을 보냈다.
- 1960.07소련 전문가 철수
흐루쇼프가 1,390명의 기술자를 철수시켜 공업 사업이 중단되었다.
- 161960.10.26마오의 신양 보고 지시
리푸춘이 올린 신양 조사 보고를 받고 마오가 류사오치·저우언라이에게 즉시 대책을 논의하라고 했다.
- 1960.11「12조」 긴급 지시
사유 텃밭과 농촌 시장을 복원하고 생산대 소유를 인정했다. 조정이 시작되었다.
- 171961.019중전회: 「조정·공고·충실·제고」
천윈·리푸춘의 조정 방침이 채택되고 곡물 수입이 시작되었다.
- 181961.04–
05 류사오치의 후난 조사고향 마을에서 44일을 지내고 농민들이 기근을 「3할은 천재, 7할은 인재」라 한다고 전했다.
- 191962.01–
02 7천인 대회류사오치가 「3할은 천재, 7할은 인재」라 말했고 마오는 자아비판을 했다.
- 201962.02.21–
23 시러우 회의천윈이 50억 위안의 숨은 적자를 밝히고 3~5년의 회복 단계를 제안했다.
- 211962.08베이다이허: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마오가 계급투쟁을 해마다, 달마다, 날마다 말해야 한다며 「삼자일포」를 공격했다.
- 221962.0910중전회: 「계급투쟁을 잊지 말자」
마오가 농가 청부제 확산을 자본주의 부활로 규정하고 조정의 종료를 선언했다.
관련 인물 29명
집행 · 지휘9
1958년 운동을 지지했고 1962년 「7할은 인재」라 말해 마오와 갈라졌다.
총서기, 조정 정책의 집행덩샤오핑1904–1997「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발언으로 농가 청부제를 옹호했다.
조정 정책의 설계자천윈1905–19951956년 반모진을 주장했다 비판받았고 1961~1962년 회복 정책을 세웠다.
1958년 자아비판한 총리저우언라이1898–1976반모진으로 비판받은 뒤 대약진을 집행했고 기근 시 곡물 수입을 조직했다.
펑더화이를 대신한 국방부장린뱌오1907–1971루산 뒤 군을 맡아 마오 숭배를 군에 도입했다.
신양 사건을 낳은 허난의 「좌왕」우즈푸1906–1967수확을 부풀리고 루산 뒤 「작은 펑더화이」를 잡아내라고 지시했으며, 신양에서 100만 명 넘게 죽었음을 자기비판으로 인정했다.
쓰촨 대기근의 책임자리징취안1909–1989생산을 부풀리고 중앙의 징수와 외부 지원을 그대로 따라 쓰촨에서 공식 통계로 800만 명 넘게 죽게 했다.
기근을 감추다 「책임전」으로 돌아선 안후이 제1서기쩡시성1904–1968마오의 「당내 통신」을 전하지 않고 반대자를 숙청했으며, 1961년 책임전을 시행했으나 1962년 해임되었다.
강철 3천만 톤 계획을 내놓은 국가계획위원회 주임리푸춘1900–19751958년 7년 안의 영국 추월을 제시했고, 1960년 신양 보고를 마오에게 올렸으며 조정기의 여덟 자 방침을 집행했다.
참여8
『홍기』에서 인민공사와 「공산주의로의 이행」을 이론화했다.
다자이 모델의 지도자천융구이1915–19861964년 이후 「농업은 다자이를 배우자」의 모델이 되었다.
대약진을 의심하는 조사 보고를 올린 마오의 비서톈자잉1922–19661961년 후난 농촌 조사단을 이끌고 대약진의 논리에 의문을 던졌다.
7천인 대회에서 마오의 잘못을 거론한 베이징 시위 서기펑전1902–1997보고 초안 위원회에서 마오의 1%, 1‰의 잘못이라도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1956년 반모진을 이끈 재정부장리셴녠1909–1992저우언라이·천윈과 함께 기본 건설 투자를 줄이려 했다가 1958년 비판받았다.
신양의 참상을 중앙에 올린 국무원 비서장시중쉰1913–20021960년 내무부의 신양 보고를 받아 중앙감찰위원회의 둥비우에게 전했다.
신양 조사를 보낸 중앙감찰위원회 서기둥비우1886–1975조사관을 신양에 보내 확인된 아사자만 70만 명이 넘는다는 보고를 받았다.
밀식·심경 농법의 이론적 원천트로핌 리센코1898–1976그와 동료 말체프의 이론에 기댄 밀식과 심경이 대약진기 수확을 떨어뜨렸다.
반대 · 저항6
1959년 7월 마오에게 보낸 편지로 「반당집단」의 수괴로 몰려 실각했다.
루산에서 펑더화이를 지지한 외교부 부부장장원톈1900–1976대약진의 경제적 오류를 지적하는 연설로 반당집단에 포함되었다.
인민공사를 비판하고 전문가를 철수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1960년 7월 소련 기술자 철수로 공업 계획이 중단되었다.
루산에서 펑더화이를 지지한 총참모장황커청1902–1986대약진과 인민공사를 비판해 「반당 집단」으로 몰리고 모든 직책을 잃었다.
루산에서 펑더화이를 지지한 후난의 지도자저우샤오저우1912–1966「반당 집단」으로 몰려 노동 개조로 보내졌고 1966년 목숨을 끊었다.
루산에서 마오에 맞선 비서리루이1917–2019펑더화이를 고발하기를 거부해 당적을 잃고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뒤에 『루산 회의 실록』을 썼다.
목격 · 기록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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