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1939

스페인 내전

스페인에서 전쟁과 혁명은 왜 하나로 묶이지 못했고, 소련의 개입은 그 관계를 어떻게 바꿨는가?

1936년 7월 군부의 반란은 정부가 아니라 노동조합의 무장으로 저지됐고, 그 자리에서 카탈루냐와 아라곤의 공장과 토지가 노동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혁명이 함께 일어났다.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한 불개입 협정이 합법 정부의 무기 구입을 막는 사이 독일과 이탈리아는 반란군을 무장시켰고, 공화국에 무기를 판 나라는 사실상 소련과 멕시코뿐이었다. 소련의 개입은 공화국을 버티게 했지만 「먼저 전쟁에서 이겨야 혁명도 있다」는 노선과 「혁명을 멈추면 싸울 이유도 사라진다」는 노선의 충돌을 함께 키웠고,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그 대립이 시가전으로 터졌다.

전쟁이 먼저인가, 혁명이 먼저인가

1936년 7월의 반란을 막아낸 것은 정부군이 아니라 무기를 손에 넣은 노동조합원들이었고, 그 사실이 이후 3년의 모든 대립을 낳았다. 반란이 저지된 지역에서 국가는 사실상 해체됐다. 카탈루냐에서는 CNT와 FAI가 세운 반파시즘민병대중앙위원회가 실질적인 정부였고 바르셀로나의 공장과 전차, 전화 회사가 노동조합 관리로 넘어갔으며, 아라곤에서는 농민들이 토지를 집단화했다.

여기서 두 노선이 갈렸다. 스페인공산당과 소련 고문단은 민병대를 정규군으로 바꾸고 무너진 국가 기구를 다시 세워야 전쟁을 이길 수 있다고 봤다. 집단화된 공장은 군수 생산에 맞게 중앙에서 통제해야 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원조를 바라려면 혁명을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반대편의 CNT와 POUM은 혁명을 멈추는 순간 노동자들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 알 수 없게 되고, 그러면 전쟁도 진다고 답했다.

두 노선이 스스로를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당대의 글로 직접 읽을 수 있다. 스페인공산당 서기장 호세 디아스는 1937년 2월 발렌시아 강연 「전쟁에서 이기려면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농민과 소상인을 적으로 돌리지 말고 통일된 지휘 아래 정규군을 세우자고 했고, 「오늘은 전쟁에서 이기고 내일은 인민이 결정한다」는 순서를 분명히 했다. 트로츠키는 같은 해 12월 「스페인의 교훈 — 마지막 경고」에서 바로 그 순서가 패배의 순서라고 반박했다.

어느 쪽도 순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민병대는 용감했지만 전선을 지키고 대규모 공세를 조직할 능력이 없었고, 거꾸로 인민군이 강해질수록 사람들이 1936년 여름에 얻었다고 믿은 것들은 하나씩 사라졌다.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이 대립은 끝내 시가전이 됐다.

무기보다 먼저 온 것들

소련이 스페인에 처음 보낸 것은 무기가 아니라 카메라였다. 8월 8일 《프라우다》의 콜초프가 도착했고 곧이어 《이즈베스티야》의 에렌부르크가 합류했으며, 중앙위원회가 8월 17일에 파견을 의결한 촬영기사 로만 카르멘과 보리스 마카세예프는 23일 국경을 넘어 그 자리에서 필름을 돌리기 시작했다. 첫 필름이 모스크바에서 상영된 것이 9월 4일이니, 첫 무기가 카르타헤나에 닿기 꼭 한 달 전이다. 뉴스영화 연작 「스페인 사건에 관하여」는 스무 편까지 이어졌다.

무기가 오기 시작한 1936년 10월 16일에는 스탈린과 스페인공산당이 같은 날 전보를 주고받았다. 스탈린은 스페인의 해방이 「스페인인들만의 사적인 일이 아니라 모든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인류의 공동 과업」이라 했고, 디아스는 소련 인민의 연대가 전사들에게 새 힘을 준다고 답했다. 개입이 공개적으로 어떤 언어를 입었는지가 이 두 장에 남아 있다.

소련 안에서도 8월 3일부터 모금 운동이 벌어졌다. 붉은광장에 12만 명이 모였고 전쟁 기간 2억 7,400만 루블이 걷혔으며, 밀가루와 설탕과 통조림을 실은 구호선이 가을에만 다섯 척 떠났다. 오랫동안 이 운동은 노동자들의 자발적인 발의로 이야기됐지만, 공개된 1936년 9월 20일 정치국 의정서는 어느 공장에서 언제 집회를 열고 일당의 4분의 1을 걷으며 어느 신문 1면에 무엇을 실을지까지 열두 항목으로 지시하고 있었다.

반대 방향의 흐름도 있었다. 공화국 구역에서는 「차파예프」와 「우리는 크론시타트 출신」 같은 소련 영화가 상영돼 전쟁 중 가장 많이 본 영화가 됐고, 게르니카 폭격 뒤에는 스페인 아이들 약 3,000명이 소련으로 갔다. 소련은 이들을 위해 스물두 곳의 「아동의 집」을 열고 아이 둘에 어른 하나꼴로 인력을 붙였는데, 당시 소련 아이들이 받던 것보다 훨씬 나은 대우였다. 다만 교육은 스페인어로 진행되는 소비에트 교육이었고, 1939년 공화국이 무너지자 이 아이들은 돌아갈 곳을 잃었다.

작전 X」와 그 계산서

9월 14일 정보총국장 우리츠키와 NKVD슬루츠키가 작전 계획을 국방인민위원 보로실로프에게 올렸고, 26일 보로실로프가 소치에 있던 스탈린에게 전화로 승인을 받았으며, 29일 중앙위원회가 이를 의결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무상 원조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모든 수송은 스페인 정부가 낸 요청서에 대응했고 품목마다 값이 매겨졌으며, 스탈린은 올라온 목록을 붉은 연필로 직접 그어 가며 깎았다.

물량이 적지는 않았다. 예순여섯 차례의 수송으로 항공기 648대, 전차 347대, 포 1,186문, 소총 약 50만 정이 들어왔고 모두 60만 톤에 이르렀다. 질도 처음에는 좋았다. T-26 전차는 1936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전차였고 국민진영은 노획한 T-26에 현상금을 걸었으며, I-15와 I-16 전투기는 독일이 메서슈미트를 보내기 전까지 하늘을 장악했다. 문제는 소총과 포였다. 여덟 나라에서 온 열 종류, 여섯 구경이 뒤섞였고 그중 4분의 1가량은 1880년대에 만든 물건이라 탄약 보급 자체가 악몽이었다.

게다가 물량은 앞쪽에 몰려 있었다. 항공기 648대 중 496대, 전차 347대 중 322대가 첫 열 달에 도착했고 1937년 4월부터는 눈에 띄게 줄었다. 대금은 공화국이 국립은행의 금 준비 510톤을 오데사로 실어 보내 치렀다. 스페인 금 준비의 4분의 3, 당시 가치로 5억 1,800만 달러였다. 소련은 루블 환율을 자기에게 유리하게 조작해 최소 5,100만 달러, 평균 4분의 1이 넘는 값을 더 받아냈다. 다만 금이 바닥난 1938년부터는 7,000만 달러와 8,500만 달러의 차관을 새로 내주었고 그중 1억 2,000만 달러가량을 끝내 회수하지 못했으니, 이 거래 전체로 소련이 이윤을 남겼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것이 최근의 계산이다.

스페인에 간 소련 사람들

전쟁 당시에는 스페인에 소련군이 3만 명, 8만 명 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문서고가 열린 뒤의 숫자는 전혀 다르다. 전 기간에 걸쳐 파견된 소련 군인은 2,100여 명이었고, 파견 기간이 대개 반년을 넘지 않아 한 시점에 머문 인원은 600명에서 800명 사이였다. 같은 시기 프랑코 쪽에 선 독일과 이탈리아 병력은 8만 명이 넘었다.

이 적은 인원이 감당해야 할 일은 컸다. 조종사가 770명으로 가장 많았고 전차병이 351명이었으며, 1936년 11월 마드리드 상공을 지킨 것도 1937년 3월 과달라하라에서 이탈리아 군단을 무너뜨린 것도 이들이었다. 그러나 통역은 204명뿐이었다. 해군 고문 쿠즈네초프는 손짓으로 공화국 함대를 지휘했고 전차학교는 수신호로 가르쳤으며, 무관 고레프는 「스페인어 없이는 일을 시작할 생각조차 할 수 없다」고 적었다. 손실도 작지 않아 전사 125명에 실종 43명이었고, 전차병의 손실률이 15퍼센트로 가장 높았다.

돌아온 뒤가 더 위험했다. 대숙청과 겹치면서 스페인 파견자는 「외국과 접촉한 자」로 분류됐고, 수석 군사고문 베르진과 시테른, 두 대사, 총영사 안토노프-옵세옌코, 특파원 콜초프가 처형됐다. 그러나 흔히 이야기되는 것처럼 전원이 죽은 것은 아니다. 파블로프와 쿠즈네초프, 보로노프, 말리놉스키, 메레츠코프, 로딤체프처럼 스페인에서 얻은 경험을 발판 삼아 독소전쟁의 지휘부에 오른 사람도 그만큼 많았다.

비어 있던 대사관

1917년 이래 소련과 스페인은 영사조차 주고받은 적이 없었으므로 1936년의 대사 교환은 양쪽 모두에게 처음이었다. 8월 21일 정치국이 임명한 로젠베르크가 27일 마드리드에 닿았고, 아사냐 대통령은 그 신임장 제정을 자기 임기 최대의 사건 가운데 하나라고 불렀다. 공화국이 보낸 마르셀리노 파스쿠아는 10월 7일 모스크바에서 라디오 전국 중계와 크렘린 오찬으로 맞아졌는데, 1930년대에 그만한 대접을 받은 외국인은 없었다.

그런데 반년 만에 모든 것이 뒤집혔다. 1937년 2월 2일 크렘린에서 스탈린은 파스쿠아에게 두 사람을 「덜 눈에 띄는 사람」으로 바꾸겠다고 말했고, 같은 자리에서 아사냐가 제안한 우호조약을 물리치며 스페인이 영국의 원조를 얻으려면 소련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권했다. 실책에 대한 문책이라기보다 영국과 프랑스를 의식한 계산이었던 셈이다. 후임 대사 가이키스마저 석 달 만에 소환되어 숙청되면서 소련은 종전까지 다시 대사를 임명하지 않았고, 공화국도 1938년 3월 파스쿠아가 파리로 옮겨 간 뒤 후임을 내지 않았다. 무기와 금이 오가는 3년 동안 양쪽 대사관은 사실상 비어 있었다.

남은 논쟁

프랑코는 1939년 4월 1일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36년의 독재를 열었다. 50만 명 가까운 공화파가 피레네를 넘었고, 프랑스 해변의 철조망 수용소에서 몇 년을 보낸 이들도 적지 않았다. 스페인 안에 남은 사람들은 숙청과 감시의 일상 속으로 들어갔다. 이것이 전쟁이 확정한 사실이다.

확정되지 않은 것은 공화국이 왜 졌는가, 그리고 질 수밖에 없었는가다. 이 질문을 둘러싼 역사학의 대립은 냉전기에 이미 틀이 잡혔으나, 1991년 소련 문서고가 열리고 2000년대 스페인에서 역사적 기억 회복 운동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장으로 접어들었다.

가장 큰 틀의 대립은 전쟁의 성격을 두고 벌어진다. 영국의 헬렌 그레이엄과 폴 프레스턴, 스페인의 앙헬 비냐스로 대표되는 쪽은 스페인 내전을 유럽 민주주의가 파시즘에 맞선 첫 전장으로 읽는다. 이들은 영국과 프랑스의 불개입이 없었다면, 그리고 독일과 이탈리아가 반란군을 무장시키지 않았다면 전쟁의 결과는 달랐을 것이라고 본다. 공화국은 민주 정부였고, 그 정부를 외면한 서구 열강의 선택이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라는 것이다.

미국의 스탠리 페인과 스페인의 피오 모아 같은 수정주의자들은 정반대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1936년 7월 이전에 이미 공화국이 혁명적 좌파에 점령당해 민주주의로 기능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며, 전쟁을 혁명과 반혁명의 충돌로 본다. 프랑코의 승리는 불가피했을 뿐 아니라, 스페인이 소비에트 위성국이 되는 것을 막았다는 논리다. 이 노선은 프랑코 정권이 생산한 서사를 학술의 옷으로 갈아입힌 것이라는 반론과 함께, 스페인 보수 진영의 준공식 역사관으로 자리 잡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소련 문서고가 공개되면서 양쪽 모두 수정해야 할 지점이 생겼다. 다니엘 코왈스키의 연구는 「작전 X」가 규모 면에서 독일과 이탈리아의 지원에 훨씬 못 미쳤고, 작전 자체도 야심은 컸으나 실행은 실패에 가까웠음을 보여 주었다. 소련이 공화국을 배신했다는 냉전기의 서사나, 소련이 공화국을 구했다는 반대편의 서사 모두 지나치게 단순하다는 것이다. 한편 로널드 라도시가 엮은 『배신당한 스페인』은 코민테른이 처음부터 스페인공산당과 공화국의 주요 결정을 통제했음을 문서로 입증했고, 이 점은 그레이엄과 프레스턴 같은 자유주의 역사가들도 예전보다 더 무겁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스페인 안에서 논쟁은 학계를 넘어 정치의 한복판에 있다. 2007년 제정된 역사적 기억법은 프랑코 시절의 강제실종 피해자 발굴과 재판 기록 무효화를 법제화했지만, 우파는 「상처를 다시 열 필요가 있느냐」며 반대한다. 비냐스는 스페인 우파가 내전을 둘러싼 진실과 대면하기를 여전히 거부하고 있으며, 그래서 90년이 지난 지금도 내전은 끝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 주장이 맞는지 아닌지는 역사가가 아니라 스페인 시민들이 앞으로 증명할 몫이다.

길이 막히고, 사람이 사라지다

1937년 여름, 소련의 무기 수송을 지탱해 온 흑해-지중해 항로가 사실상 폐쇄됐다. 8월 30일 소련 화물선 티미랴제프호가 알제 앞바다에서, 9월 1일 블라고예프호가 그리스 스키로스섬 근해에서 이탈리아 잠수함의 어뢰에 격침된 것이다. 두 배 모두 비무장 상선이었지만, 이탈리아는 이미 지중해 서부에서 공화국으로 향하는 선박을 무차별 공격하고 있었다. 스탈린은 소련 국적 선박을 지중해 직항로에 더 이상 투입하지 말라고 지시했고, 무장 화물을 실은 공화국 선박조차 위험하다고 판단해 남쪽 길을 포기했다. 9월 니옹 회의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이탈리아 잠수함 공격에 대응하기 위해 지중해 순찰대를 편성하기로 합의했지만, 이미 소련은 수송로를 북쪽으로 돌린 뒤였다.

북쪽 항로는 무르만스크나 레닌그라드에서 출발해 발트해와 북해를 거쳐 프랑스 항구로 가는 길이었다. 그러나 이 길도 처음부터 순탄하지 않았다. 프랑스 당국은 무기 환적을 의도적으로 지연시켰고, 소련 대사 마이스키는 「프랑스 관료 기구 전체의 믿기 어려운 부패」라고 불렀다. 뇌물을 주어도 통관이 빨라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고, 1937년 12월 프랑스가 압수한 소련제 항공기 33대는 이듬해 9월에야 풀려났다. 설상가상으로 1938년 6월 프랑스가 국경을 다시 닫으면서, 마지막 선단 일곱 척에 실린 무기는 끝내 카탈루냐 전선에 닿지 못했다. 스탈린이 보로실로프에게 보낸 결의문은 짧았다: 「무기 수송을 포기하라. 스탈린.」

같은 시기 모스크바에서는 스페인에서 돌아온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었다. 대숙청의 절정기였던 1937-1938년, 예조프의 NKVD는 「외국과 접촉한 자」를 기본 용의자로 분류했고, 스페인 파견 경력은 그 자체로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수석 군사고문 얀 베르진은 1937년 6월 소환되어 1938년 7월 총살됐다. 후임 그리고리 시테른도 1938년 소환되어 1941년 처형됐다. 첫 대사 마르셀 로젠베르크는 1937년 2월 소환돼 1938년 3월 총살됐고, 후임 레온 가이키스도 부임 석 달 만에 소환되어 숙청됐다. 바르셀로나 총영사 안토노프-옵세옌코, 무역대표 아르투르 스타솁스키, 군사고문 블라디미르 고레프, 《프라우다》 특파원 미하일 콜초프: 이들은 모두 1937-1940년 사이에 처형됐다. NKVD 스페인 총책임자 알렉산드르 오를로프만이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1938년 7월 가족과 함께 서방으로 도주해 목숨을 건졌다.

바로 그 무렵, 공화국은 마지막 대공세를 준비하고 있었다. 1938년 4월 국민군이 지중해 연안 비나로스에 도달하면서 공화국 영토는 둘로 갈라졌고, 카탈루냐는 고립됐다. 총리 후안 네그린과 참모총장 비센테 로호는 발렌시아로 진격하는 프랑코 군대의 주의를 돌리고 유럽에 공화국이 아직 살아 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에브로강 도하를 승인했다. 7월 25일 새벽, 후안 모데스토가 지휘하는 8만 명의 에브로군이 나룻배와 부교를 타고 강을 건넜다. 초반 사흘 동안 800제곱킬로미터를 탈환하고 포로 4,000명을 잡았으나, 간데사 마을 앞에서 공세가 멈췄다. 프랑코는 댐 수문을 열어 부교를 떠내려 보냈고, 콘도르 군단과 이탈리아 항공대는 다리를 주간 폭격했으며 공화국 공병은 매일 밤 다리를 복구해야 했다. 전차 22대와 포문 몇 문만이 강을 건널 수 있었다. 이후 넉 달은 제1차 세계대전식 소모전이었다. 국민군 쪽에서 하루 500문의 포가 13,000발 이상을 퍼붓고 200대의 항공기가 10,000파운드의 폭탄을 투하했다. 8월의 기온은 섭씨 37도까지 올랐고, 식수 부족 속에 부상자는 밤에만 작은 배로 후송됐다.

이 전투 와중인 1938년 9월 21일, 네그린은 제네바 국제연맹에서 국제여단의 일방적 철수를 발표했다. 불개입위원회가 외국인 의용병 철수를 거듭 요구해 온 데 대한 정치적 제스처였지만, 프랑코 쪽에 5만 명의 이탈리아인과 독일인이 붙어 있는 상황에서 공화국만 1만여 명의 외국인 전투원을 포기하는 비대칭적 결정이었다. 10월 28일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고별 행진에서 돌로레스 이바루리는 13,000명의 국제여단 대원들을 향해 「그대들은 역사이고 전설이다」라고 연설했다. 열흘 뒤인 11월 16일, 에브로강 전투는 공화국군이 강 건너 출발선으로 밀려나며 끝났다. 인민군 사상자는 41,000명을 넘었고, 「카탈루냐군」은 전투 부대로서 소멸했다.

에브로에서 패배한 군대와 모스크바로 돌아가 총살된 고문들 사이에는 하나의 공통된 역설이 놓여 있었다. 공화국을 살리기 위해 온 사람들은 조국에서 「스페인과 접촉한 자」라는 이유로 사라졌고, 공화국이 마지막으로 의지한 공세는 국제적 지원이 이미 끊긴 뒤에야 시작됐다.

항복도, 탈출도 허락되지 않다

에브로 전투에서 인민군이 꺾이자 카탈루냐 전선은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다. 1938년 12월 23일 프랑코군 30만 명이 세그레강을 건너 공세를 시작했고, 맞서는 공화국군 22만 명 가운데 총을 쥔 병사는 절반도 되지 않았다. 사라비아 장군은 카탈루냐 전체에 소총이 17,000정뿐이라고 보고했다. 소련은 항공기 250대와 전차 250대를 보냈으나 선적이 보르도에 닿은 것은 1월 15일이었고, 국경을 넘은 것은 그중 극히 일부였다. 바르셀로나 시민의 하루 배급량은 렌틸콩 100그램까지 떨어져 있었다. 1월 26일 바르셀로나가 함락됐다.

이때부터 네그린 총리와 나머지 공화국 지도부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균열이 벌어졌다. 네그린은 「저항하는 것이 곧 이기는 것이다(Resistir es vencer)」라는 구호 아래 버티면 유럽에서 곧 터질 대전쟁이 영국과 프랑스를 개입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2월 9일 프랑코군이 프랑스 국경까지 진출했을 때, 공화국 대통령 아사냐와 참모총장 로호는 프랑스로 건너가 돌아오기를 거부했다. 2월 13일 프랑코는 1934년 10월로 소급해 공화국 지지자 모두를 처벌 대상으로 삼는 「정치적 책임법」을 공포했고, 2월 27일 영국과 프랑스는 프랑코 정권을 정식 승인했다. 아사냐는 다음 날 사임했다. 네그린이 협상 카드로 내놓을 수 있는 것은 이미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네그린이 중부 전선에서 계속 싸우겠다고 하자, 3월 5일 중부군 사령관 세히스문도 카사도 대령이 쿠데타를 일으켰다. 카사도는 네그린 정부가 공산당에 종속된 독재라고 규정하고, 사회당의 훌리안 베스테이로와 CNT의 시프리아노 메라의 지지를 받아 「국방평의회」를 세웠다. 카사도는 프랑코 진영에 심어둔 제5열 첩보원 호세 센다뇨로부터 항복해도 장교들의 신변은 보장된다는 약속을 받았다고 믿었다. 쿠데타 직후 마드리드에서는 공산당 계열 3개 군단이 반격해 일주일간 공화국 진영 안에서 내전이 벌어졌고, 2,000명 가까이 숨졌다. 메라의 제4군단이 진입하면서 카사도 쪽이 승리했지만, 네그린과 공산당 지도부는 이미 프랑스로 떠난 뒤였다.

카사도가 프랑코에게 내놓은 조건은 정치적 보복 금지와 탈출 희망자에게 25일의 유예를 달라는 것이었다. 프랑코의 답변은 3월 16일 단 한 줄이었다: 무조건 항복만 받겠다. 3월 23일 카사도의 사절이 부르고스로 날아갔을 때도 국방평의회가 받은 것은 즉각적인 백기 게양 요구뿐이었다. 3월 26일 프랑코군은 모든 전선에서 진격을 시작했고 저항은 없었다. 3월 28일 마드리드가 함락됐다. 카사도는 발렌시아로 달아났고, 알리칸테 항구에는 배를 타지 못한 피란민 15,000명이 갇혔다. 영국 화물선 스탠브룩호의 선장 아치볼드 딕슨이 프랑코의 해상 봉쇄를 뚫고 2,638명을 오랑으로 실어냈지만,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3월 31일 이탈리아군이 먼저 알리칸테에 입성했을 때 감바라 장군은 정치적 피란민의 철수를 허용하려 했으나, 곧 도착한 프랑코군이 관할권을 빼앗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가 되느니 자살했다.

피레네를 넘은 40만 명 이상의 피란민들은 프랑스 정부가 아르젤레스, 구르스, 리베잘트 등 해변에 급조한 유자철망 수용소에 갇혔다. 위생 시설도 취사 시설도 없이 모래밭에 방치된 채 첫 6개월 동안 영양실조와 이질로 14,672명이 숨졌다. 4월 1일 프랑코는 전쟁 종료를 선언했다. 카사도는 영국 군함으로 탈출했고, 베스테이로는 마드리드에 남았다가 체포돼 1940년 감옥에서 죽었다.

역사가들도 끝내지 못한 싸움

스페인 내전은 끝난 지 90년 가까이 됐지만, 그 역사를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또 하나의 전선이 열려 있다. 이 전선의 축은 단순하다: 공화국은 왜 졌는가, 그리고 그 패배에서 소련의 개입은 어떤 몫이었는가.

전후 첫 종합서를 쓴 영국의 휴 토머스(1961)는 공산당의 중앙집권화 노선이 전쟁 수행에 필요했다고 보면서도 POUM 탄압을 "비열한 일"로 기록했다. 미국의 게이브리얼 잭슨(1965)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POUM을 "비현실적인 낭만주의자들"로 평가절하하며 네그린 노선을 사실상 옹호했다. 이 '자유주의 학파'에 맞서, 전쟁 당시 스페인에서 취재한 미국인 저널리스트 버넷 볼로튼은 평생에 걸쳐 방대한 1차 자료를 모아 『스페인 내전: 혁명과 반혁명』(1991)을 완성했다. 그의 결론은 단호했다: 공산당은 처음부터 인민전선을 소비에트식 정권으로 가는 과도기로 보았고, 혁명의 진압은 승리를 위한 부산물이 아니라 목적 그 자체였다.

볼로튼의 문제 제기는 1990년대 소련 문서고 개방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이를 토대로 한 로널드 라도시 등의 『배신당한 스페인』(2001)은 NKVD 문서를 들어 스탈린이 스페인에 인민공화국을 세우려 했다고 주장했고, 스탠리 페인의 『스페인 내전, 소련, 그리고 공산주의』(2004)는 소련의 목표가 처음부터 혁명적이었다는 논지를 더 체계화했다. 그러나 정작 모스크바 문서고를 가장 깊이 파고든 앙헬 비냐스는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그가 추적한 금 장부와 대금 결제 기록에 따르면, 공화국이 모스크바에 맡긴 510톤의 금은 1938년 초 무기 대금으로 완전히 소진됐으며, 스탈린이 '금을 훔쳤다'는 프랑코 정권의 신화는 허구라는 것이다. 비냐스의 연구는 또한 소련의 스페인 개입 규모가 냉전기의 통념보다 훨씬 작았음을 입증했다.

이처럼 문서 증거가 쌓였는데도 싸움은 끝나지 않는다. 헬렌 그레이엄(2002)은 같은 소련 문서들을 읽고도 "모스크바는 공화국 진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고 반론한다. 그녀에게 네그린의 국가 재건은 스탈린의 명령이 아니라 불개입으로 고립된 공화국의 유일한 생존 전략이었다. 이에 대해 볼로튼 학파는 "혁명을 짓밟아 놓고 누가 총을 들겠느냐"고 묻고, 그레이엄 학파는 "총이 없으면 혁명도 없다"고 답한다. 2000년대 이후 피오 모아 같은 스페인 내 수정주의자들이 "내전의 일차적 책임은 좌파에게 있다"는 논쟁에 불을 붙이면서 전선은 더 복잡해졌다.

스페인 내전 사료는 지금도 열리고 있다. 러시아 국립군사문서보관소(RGVA)의 「작전 X」 파일, 스페인 국립역사문서보관소의 파스쿠아 대사 개인 문서, 그리고 아직 완전히 공개되지 않은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의 스페인 관련 기록들까지. 확실히 정리된 것은 하나다: 스페인 공화국은 서구 민주국들이 버린 정부였고, 소련은 그 빈자리로 들어가 가격표를 붙인 유일한 강대국이었다. 그 개입의 의도와 효과가 무엇이었는지는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과

공화국은 1939년 4월 1일 패배했고 프랑코의 독재는 36년간 이어졌으며, 50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망명했다. 스페인은 코민테른 인민전선 노선이 실제 전쟁에서 시험받은 유일한 사례였고, 국가와 정규군을 재건하지 않았다면 더 일찍 무너졌으리라는 평가와 집단화된 공장과 농장을 해체하고 혁명 조직을 억누른 대가로 싸울 동기를 잃었다는 평가가 지금도 함께 서 있다. 뒤늦게 열린 소련 문서고는 그 개입이 알려진 것보다 작고 무력했음을 보여 주었는데, 전 기간 파견 인원은 2,100여 명으로 프랑코 쪽에 선 독일과 이탈리아의 8만여 명에 견줄 수 없었다.

연표

  1. 1936.02
    인민전선의 총선 승리

    2월 총선에서 좌파 공화파와 사회당, 공산당이 묶인 인민전선이 근소한 표차로 다수 의석을 얻었다. 새 정부가 1934년 아스투리아스 봉기 수감자를 사면하고 토지개혁을 재개하자, 군 내부와 팔랑헤당은 곧바로 반란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 1936.07.17–18
    군부 반란과 노동자들의 무장

    모로코 주둔군에서 시작된 반란이 본토로 번졌다. 정부가 무기고를 열기까지 총리 한 사람이 사퇴했고, 무기를 손에 넣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CNT·UGT 조합원들이 병영을 제압했다. 반란은 스페인의 절반에서 실패했지만, 그 절반에서 국가의 무력은 이미 노동자 조직의 손에 있었다.

  3. 1936.07–09
    후방의 혁명

    카탈루냐에서는 CNT·FAI가 주도한 반파시즘민병대중앙위원회가 사실상의 권력이 됐고, 바르셀로나의 공장과 전차·전화 회사가 노동조합 관리로 넘어갔다. 아라곤에서는 농민 집단농장과 아라곤 평의회가 세워졌다. 같은 시기 후방에서는 성직자와 우파 인사를 겨냥한 통제되지 않은 처형도 벌어졌다.

  4. 1936.08
    무기보다 먼저 온 카메라

    모스크바가 처음 보낸 사람들은 군인이 아니라 기자와 촬영기사였다. 8월 8일 콜초프가, 곧이어 에렌부르크가 들어왔고 촬영기사 카르멘이 보낸 첫 필름은 9월 4일 모스크바에서 상영됐다. 소련 안에서도 8월 3일 붉은광장 집회를 시작으로 모금 운동이 벌어졌는데, 무기가 움직이기 두 달 전의 일이었다.

  5. 1936.08–09
    불개입 협정

    프랑스가 제안하고 영국이 밀어붙인 불개입 협정으로 27개국이 스페인에 대한 무기 수출을 금지했다. 협정은 합법 정부의 무기 구입만 실질적으로 막았고, 독일과 이탈리아는 서명국이면서도 융커스 수송기로 아프리카군을 해협 너머로 실어 나르며 콘도르 군단과 이탈리아 지원군단을 보냈다.

  6. 1936.08–1937.05
    대사관의 개설과 소멸

    소련과 스페인은 1917년 이래 영사조차 주고받은 적이 없었다. 8월에 로젠베르크가 첫 대사로 마드리드에 닿고 10월에는 파스쿠아가 모스크바에서 유례없는 환대를 받았으나, 1937년 2월 스탈린은 영국의 원조를 얻으려면 거리를 두라며 두 사람을 불러들였다. 후임 대사까지 석 달 만에 숙청되면서 이후 종전까지 양쪽 모두 대사를 두지 않았다.

  7. 1936.09–10
    소련의 결정과 「작전 X」

    9월 말 정치국이 무기 지원을 의결했다. 무상 원조가 아니라 스페인 정부의 요청서에 따라 품목마다 값을 매겨 파는 상업 거래였고, 스탈린은 올라온 목록을 붉은 연필로 직접 깎았다. 「작전 X」라는 암호명 아래 예순여섯 차례의 수송이 조직됐고, 수석 군사고문 얀 베르진과 총영사 안토노프-옵세옌코, NKVD 연락관 오를로프가 함께 갔다.

  8. 1936.10
    공화국의 금이 오데사로 향하다

    공화국은 10월 15일 국립은행의 금 준비를 소련에 맡기기로 하고, 순금 510톤을 오데사로 실어 보냈다. 스페인 금 준비의 4분의 3, 당시 가치로 5억 1,800만 달러였다. 소련은 대금을 셈할 때 환율을 유리하게 조작해 값을 부풀렸고, 금이 바닥난 1938년부터는 차관으로 바꿔 주었으나 공화국은 그 빚을 갚지 못했다.

  9. 1936.10.29
    세세냐: 소련 전차의 첫 투입

    마드리드 남쪽 세세냐에서 소련제 T-26 전차대가 처음 전투에 들어갔다. 반격은 실패했고 반란군은 화염병으로 전차를 태웠지만, 대량의 전차가 한 전장에 투입된 것은 스페인에서 처음이었다. 전차대를 이끌고 온 세묜 크리보셰인을 비롯해 파블로프, 리차고프, 로딤체프 같은 젊은 지휘관들이 이곳에서 실전 경험을 쌓았다.

  10. 1936.11
    마드리드 방어와 국제여단

    정부가 발렌시아로 옮긴 뒤에도 마드리드는 버텼다. 11월 8일 첫 국제여단이 시내로 들어와 대학도시 전선에 투입됐고, 라디오에서는 이바루리의 「저들은 지나가지 못한다」가 반복됐다. 전쟁 기간 국제여단에는 50여 개국에서 3만 명 이상이 모였으며, 알바세테의 편성 기지는 프랑스 공산당의 앙드레 마르티가 맡았다.

  11. 1937.04.26
    게르니카

    장날의 바스크 소도시 게르니카가 독일 콘도르 군단과 이탈리아 항공대의 3시간여 폭격으로 불탔다. 사망자 수는 지금도 확정되지 않았으나, 방어 시설이 없는 도시를 겨냥한 폭격이라는 사실은 국제 여론을 뒤흔들었고 피카소의 벽화로 남았다.

  12. 1937–1938
    스페인 아이들, 소련으로

    게르니카 폭격 뒤 바스크 정부가 아이들을 국외로 내보내기 시작하면서 약 3,000명이 소련으로 갔다. 소련은 이들을 위해 스물두 곳의 「아동의 집」을 열고 자국 아이들보다 나은 대우를 했다. 그러나 1939년 공화국이 무너지면서 돌아갈 곳이 사라졌고, 독소전쟁이 터지자 아이들은 소련 피란민들과 함께 동쪽으로 소개됐다.

  13. 1937.05.03–08
    바르셀로나 5월 사태

    자치정부 경찰이 CNT가 관리하던 전화국을 접수하려 하자 바르셀로나 전역에서 시가전이 벌어졌다. 한쪽에는 CNT·FAI와 POUM이, 다른 쪽에는 통합사회당(PSUC)과 자치정부 병력이 섰고 닷새 동안 400명 이상이 죽었다. POUM 민병대원으로 휴가차 시내에 있던 조지 오웰은 이 닷새를 『카탈루냐 찬가』에 기록했다.

  14. 1937.05.17
    라르고 카바예로의 퇴진과 네그린 정부

    공산당은 5월 사태의 책임을 물어 POUM 금지를 요구했고, 총리 라르고 카바예로가 이를 거부하자 각료직에서 물러났다. 소련 대금과 무기에 의존하던 정부는 버티지 못했고, 후안 네그린이 총리가 되어 「하나의 전쟁, 하나의 군대, 하나의 지휘」라는 노선 아래 인민군의 중앙집권화를 밀어붙였다.

  15. 1937.06
    POUM 금지와 안드레우 닌의 죽음

    6월 16일 POUM이 불법화되고 지도부가 체포됐다. 서기장 안드레우 닌은 별도로 알칼라데에나레스의 비밀 구금장소로 옮겨져 심문받다 살해됐다. 정부의 공식 설명은 「프랑코 진영으로 달아났다」는 것이었으나, 이 작전은 NKVD 스페인 총책임자 오를로프가 지휘한 것으로 밝혀졌고 바르셀로나 담벼락에는 「닌은 어디 있나?」라는 낙서가 남았다.

  16. 1937.04–1938.06
    줄어드는 원조와 막히는 항로

    소련의 인도량은 1937년 4월부터 줄기 시작해, 전쟁 내내 보낸 항공기 648대 가운데 496대가 이미 첫 열 달에 도착해 있었다. 가을에는 이탈리아 잠수함의 격침으로 흑해 항로를 접고 무르만스크에서 프랑스를 도는 길로 바꿨으나, 프랑스가 1938년 6월 국경을 닫으면서 마지막 선단은 끝내 전선에 닿지 못했다.

  17. 1937–1940
    스페인에서 돌아온 사람들

    대숙청의 절정과 겹치면서, 스페인 파견자들은 「외국과 접촉한 자」로 분류됐다. 수석 군사고문 베르진과 시테른, 두 대사 로젠베르크와 가이키스, 총영사 안토노프-옵세옌코, 특파원 콜초프가 소환되어 처형됐다. 다만 모두가 죽은 것은 아니어서, 파블로프와 쿠즈네초프처럼 스페인의 경험을 발판 삼아 독소전쟁의 지휘부에 오른 이들도 있었다.

  18. 1938.07–11
    에브로 전투와 국제여단의 철수

    7월 25일 인민군은 에브로강을 건너 마지막 대공세에 나섰으나 넉 달의 소모전 끝에 11월 중순 원래 자리로 밀려났다. 그사이 네그린은 9월 국제연맹에서 외국인 의용병의 일방적 철수를 발표했고, 10월 28일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고별 행진에서 이바루리는 「그대들은 역사이고 전설이다」라는 연설로 국제여단을 배웅했다.

  19. 1939.01–04
    카탈루냐의 함락과 전쟁의 끝

    1월 26일 바르셀로나가 함락되고 2월 한 달 동안 4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피레네를 넘어 프랑스로 향했으며, 프랑스는 이들을 해변 수용소에 가두었다. 3월 5일 마드리드에서는 카사도 대령이 네그린 정부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켜 항복 협상을 시도했으나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받아들였고, 4월 1일 전쟁 종료가 선포됐다.

관련 인물 65명

주도 · 집행7

반란군 총사령관 겸 국가수반프란시스코 프랑코1892–1975

아프리카군을 본토로 공수해 반란을 전쟁으로 키웠고, 1939년 승리 뒤 36년의 독재를 열었다

개입을 결정한 소련 지도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

1936년 9월 말 정치국의 무기 지원 결정을 주재했고, 공화국 정부에 혁명의 속도를 늦추라고 권고했다

국방인민위원, 「작전 X」 총괄클리멘트 보로실로프1881–1969

전차·항공기 수송과 군사고문단 인선을 관장했다

NKVD 스페인 총책임자알렉산드르 오를로프1895–1973

금 준비의 소련 이송을 실행했고, POUM 탄압과 안드레우 닌 납치·살해를 지휘했다

NKVD 특수임무반 책임자야코프 세레브랸스키1892–1956

공화파에 보낼 군용기와 무기의 비합법 조달·밀반입을 지휘했다

NKVD 총수, 스페인 작전의 모스크바 지휘부니콜라이 예조프1895–1940

스페인 주재 NKVD는 그의 루뱐카로 보고했고, 국외 「트로츠키주의자」 색출을 앞세운 작전 노선도 그의 기관에서 내려갔다. POUM 탄압과 닌 처형 지시가 모스크바에서 나왔다는 데는 연구자들의 이견이 없다. 임무가 끝나자 그는 그 일을 수행한 파견자들을 소환해 처형했다.

금 이송 실무 소련 무역대표아르투르 스타솁스키1890–1937

1936년부터 1937년까지 스페인 공화국 주재 소련 무역대표로서 무기 판매 협상과 금 이송을 포함한 X 작전의 재정 실무를 총괄했으며, 모스크바로 소환된 후 대숙청 때 처형되었다.

지도부16

전쟁 첫해의 공화국 총리 겸 전쟁장관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1869–1946

CNT를 정부에 끌어들이고 금 준비 이송을 결정했으나, POUM 금지를 거부하다 1937년 5월 물러났다

재무장관을 거쳐 공화국 총리후안 네그린1892–1956

금 준비를 소련에 맡기는 결정에 서명했고, 5월 사태 뒤 총리로서 인민군의 중앙집권화를 밀어붙였다

스페인공산당(PCE) 서기장호세 디아스1895–1942

「먼저 전쟁에서 이겨야 한다」는 인민전선 노선으로 당을 공화국 진영의 중심 세력으로 키웠다

PCE의 상징적 지도자돌로레스 이바루리1895–1989

「저들은 지나가지 못한다」로 마드리드 방어의 얼굴이 됐고, 1938년 국제여단 고별 연설을 했다

POUM 서기장이자 카탈루냐 자치정부 법무장관안드레우 닌1892–1937

「전쟁과 혁명은 하나」라는 노선으로 반스탈린 좌파를 결집했고, 법무장관으로서 인민재판소를 제도화했다. 1937년 6월 당이 불법화되면서 체포되어 살해됐다.

CNT·FAI 지도자, 두루티 종대 사령관부에나벤투라 두루티1896–1936

바르셀로나에서 반란을 꺾고 아라곤에서 집단화를 밀어붙였으며, 마드리드 방어전에서 전사했다

통합사회주의청년단(JSU) 서기장산티아고 카리요1915–2012

사회주의·공산주의 청년조직 통합을 이끌었고 마드리드 방위평의회에서 공안을 맡았다

코민테른 스페인 대표 「에르콜리」팔미로 톨리아티1893–1964

인민전선 노선의 현장 집행자로 공화국 정부와 PCE 사이를 조율했다

알바세테 국제여단 기지 책임자앙드레 마르티1886–1956

여단 편성과 규율을 맡았고, 그가 집행한 처형들 때문에 「알바세테의 도살자」로 불렸다

소련 수석 군사고문 「그리신 장군」얀 베르진1889–1938

고문단을 총괄했고 1937년 소환되어 이듬해 처형됐다

바르셀로나 주재 소련 총영사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1883–1938

카탈루냐의 혁명 권력과 소련 정책 사이에 섰고, 소환된 뒤 1938년 총살됐다

정보총국(GRU) 수장세묜 우리츠키1895–1938

스페인 초기 정보작전과 해외 첩보망 확장을 모스크바에서 감독했다

소련 외무인민위원막심 리트비노프1876–1951

불개입위원회에서 독일·이탈리아의 협정 위반을 문제 삼으며 집단안보 노선을 폈다

영국공산당 서기장해리 폴릿1890–1960

국제여단 영국 대대의 모집과 지원을 조직했고 여러 차례 전선을 방문했다

내전 내내 공화국의 대통령마누엘 아사냐1880–1940

카탈루냐 함락과 프랑스·영국의 프랑코 승인 이후 1939년 2월 2일 사임했으며, 스페인으로 귀환하지 않아 많은 이에게 도망으로 읽혔다.

에브로 군대 지휘관후안 모데스토1906–1969

1938년 7월부터 11월까지 에브로 공세에서 공화국 최후의 공세를 지휘했다.

참여26

공화국군 주임 군사고문 「그리고로비치」그리고리 시테른1900–1941

1937년부터 고문단을 이끌며 과달라하라 작전을 지도했다

소련 군사고문키릴 메레츠코프1897–1968

과달라하라 전투에서 이탈리아 지원군단을 저지하는 작전에 참여했다

소련 군사고문로디온 말리놉스키1898–1967

프랑스 전선에 이어 두 번째 국외 전쟁을 치렀고, 귀국 후 숙청을 피했다

기관총 교관 「파블리토 대위」알렉산드르 로딤체프1905–1977

마드리드 방어전과 하라마·과달라하라 전투에서 첫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았다

군사고문 「파블로 프리츠」파벨 바토프1897–1985

두 차례 부상을 입으면서 국제여단 부대의 작전을 도왔다

포병 고문 「볼테르」니콜라이 보로노프1899–1968

대규모 화력 집중의 효용을 확인하고 귀국해 적군 포병 체계를 재편했다

소련 전차부대 지휘관세묜 크리보셰인1899–1978

1936년 10월 T-26 전차대를 이끌고 마드리드 전선에 투입됐다

전차여단장 「파블로」드미트리 파블로프1897–1941

스페인의 경험으로 소련영웅이 됐고, 귀국 후 기갑 교리를 주도했다

I-15 전투비행단 지휘관파벨 리차고프1911–1941

스물다섯에 개인 격추 6기를 기록하고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됐다

제1국제폭격비행대 지휘관이반 프로스쿠로프1907–1941

46회 출격으로 소비에트연방영웅이 됐고 귀국 후 정보총국장이 됐다

공화국 해군 수석 고문 「돈 니콜라스 레판토」니콜라이 쿠즈네초프1904–1974

소련 무기를 실은 수송선의 지중해 통과와 하역을 관리했다

카르타헤나 해군기지 고문아르세니 골롭코1906–1962

금 준비가 실려 나간 바로 그 항구에서 공화국 함대를 도왔다

소련 군사고문미하일 슈밀로프1895–1975

보병 부대 편성과 훈련을 맡았다

포병 지원병미트로판 네델린1902–1960

공화파 포병으로 참전한 뒤 겨울전쟁과 독소전쟁을 거쳤다

정보총국(GRU) 파견 요원쿠즈마 데레뱐코1904–1954

비밀 무기지원 통로를 다루는 임무를 맡았다

공화국 공군 주력기의 설계자니콜라이 폴리카르포프1892–1944

그가 설계한 I-15 복엽기와 I-16 단엽기가 공화파 공군의 중추가 됐다

국제여단 대위에리히 밀케1907–2000

독일 망명자로 참전했고, 훗날 동독 국가보안부를 이끌었다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 연대 정치위원해리 헤이우드1898–1985

브루네테 전투에 참여한 미국 흑인 공산주의자였다

공화파를 후원한 가수폴 로브슨1898–1976

1938년 전선을 찾아 국제여단 앞에서 노래했다

CNT-FAI 런던 대표에마 골드만1869–1940

아나키스트 혁명을 국제적으로 변호하면서도 CNT의 정부 참여에는 비판적이었다

네그린을 전복한 중앙군 사령관세히스문도 카사도1893–1968

1939년 3월 네그린에 맞서 쿠데타를 일으키고 국방평의회를 구성해 프랑코와 평화 협상을 시도했으며, 이는 공화국 진영의 마지막 내부 균열이었다.

카사도 쿠데타에서 공산군을 진압한 제4군단장시프리아노 메라1897–1975

1939년 3월 마드리드에서 카사도의 쿠데타에 맞선 공산군의 저항을 분쇄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CNT의 전쟁 종식 시도에서 핵심 인물이었다.

불개입 정책을 택한 프랑스 총리레옹 블룸1872–1950

처음에는 공화국에 무기를 보내려 했으나 영국의 압력과 연정 내 반대에 밀려 1936년 8월 불개입을 제안했다. 이후 국경을 눈감아 주는 「완화된 불개입」으로 흔들렸다.

POUM 공동 창설자, 초대 총서기호아킨 마우린1896–1973

내전 직후 국민파 지역에 갇혀 체포되어 전쟁 내내 수감되었다.

공화국 인민군 참모총장비센테 로호1894–1966

1939년 1월 네그린에게 전선이 소멸했다고 보고했다. 프랑스로 넘어간 뒤 귀국을 거부했다.

스페인 파견 소련 고문블라디미르 고레프1900–1938

1936~37년 마드리드 주재 무관으로 활동했고, 귀국 후 대숙청에서 처형되었다.

목격 · 증언14

POUM 민병대 의용병이자 5월 사태의 증언자조지 오웰1903–1950

아라곤 전선에서 부상한 뒤 바르셀로나 시가전과 POUM 탄압을 겪고 『카탈루냐 찬가』를 썼다

《프라우다》 특파원미하일 콜초프1898–1940

『스페인 일기』를 남겼고 헤밍웨이 소설 속 카르코프의 모델이 됐으며, 귀국 후 처형됐다

미국인 종군 기자애나 루이즈 스트롱1885–1970

공화국 쪽에서 취재하며 미국 독자에게 전쟁을 전했다

《이즈베스티야》 특파원일리야 에렌부르크1891–1967

1936년 8월부터 스페인에서 타전했고, 이동 영사기를 싣고 북부 전선을 돌며 병사들에게 소련 영화를 틀어 주었다

'불이 꺼지기 전의 전쟁'으로 명명한 역사가헬렌 그레이엄1959–

헬렌 그레이엄은 《The Spanish Republic at War》 등을 저술하며 스페인 내전을 서방 열강에게 버림받은 민주 공화국이 겪은 '불이 꺼지기 전의 전쟁'으로 규정했다.

좌파에 전쟁 책임을 묻는 수정사학자피오 모아1948–

마오주의 게릴라 출신의 논쟁적 역사가로, 우파가 아닌 좌파가 내전 발발의 주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하며 2000년대 이후 수정주의 논쟁을 촉발했다.

내전사를 재편한 문서고 역사가앙헬 비냐스1941–

모스크바 금괴, 나치의 반란 자금 지원, 공화국 외교에 관한 문서고 연구로 내전사 서술을 뒤흔들었고, 왕립아카데미 사전에 맞서는 반론 사전을 주도했다.

제2공화국의 급진화가 내전을 불렀다고 주장한 역사가스탠리 페인1934–

제2공화국 자체의 급진화가 내전을 초래했으며 진짜 갈등은 혁명이었다고 주장해 보수·수정주의적 해석의 축을 형성했다.

개입사를 기밀 문서로 재검토한 역사가대니얼 코왈스키1966–

기밀해제된 소련 문서를 바탕으로 X 작전이 방대한 야심에도 불구하고 작전상 실패였으며 소련의 개입 규모가 알려진 것보다 작았다고 주장해 1991년 이후 역사서술의 수정을 이끌었다.

스페인 내전의 사료 연구자버넷 볼로튼1909–1987

수십 년에 걸쳐 1차 자료로 혁명과 반혁명의 사실을 확립했다.

미국 역사학자이자 해석의 한 축게이브리얼 잭슨1921–2019

1965년 저서로 내전을 객관적으로 종합했고, 역사학계 논쟁의 중심에 섰다.

전체사를 저술한 역사가휴 토머스1931–2017

1961년 저서로 스페인 내전의 세계사적 서사를 확립했다. 공산당 탄압을 인정하면서도 인민전선 전략이 필요했다고 보았다.

급진적 해석의 역사가피에르 브루에1926–2005

1961년 공저에서 스페인 혁명이 스탈린주의에 의해 진압당했다고 주장했다.

스페인 내전 연구자로널드 라도시1937–

소련 문서로 스페인 내전을 분석한 《Spain Betrayed》 공동 편집자였다.

관련 용어

출처: Hugh Thomas, The Spanish Civil War (Penguin, 4th edition 2003)Antony Beevor, The Battle for Spain: The Spanish Civil War 1936-1939 (Weidenfeld & Nicolson, 2006)Helen Graham, The Spanish Republic at War 1936-1939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2)Burnett Bolloten, The Spanish Civil War: Revolution and Counterrevolution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Press, 1991)Daniel Kowalsky, Stalin and the Spanish Civil War (Columbia University Press / Gutenberg-e, 2004), http://www.gutenberg-e.org/kod01/Gerald Howson, Arms for Spain: The Untold Story of the Spanish Civil War (John Murray, 1998)Ronald Radosh, Mary R. Habeck and Grigory Sevostianov (eds.), Spain Betrayed: The Soviet Union in the Spanish Civil War (Yale University Press, 2001)Ángel Viñas, El oro de Moscú: alfa y omega de un mito franquista (Grijalbo, 1979)George Orwell, Homage to Catalonia (Secker & Warburg, 1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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