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에 맞서 볼셰비키 혁명과 민족해방을 접목시킨 조선 공산주의의 선구자
임종 직전 "나는 조선의 혁명이 성공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죽소. 동무들은 반드시 고려소비에트공화국을 성립하시오"라는 유언을 남겼다.
대한제국 장교에서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로 전향하여 조선 민족해방운동에 마르크스주의를 최초로 접목시킨 공산주의 선구자. 1918년 한인사회당을 창당하고, 임시정부 국무총리로 무장독립노선을 추진했으며, 이승만과 결별 후 고려공산당(상하이파)을 이끌며 민족해방과 계급혁명의 결합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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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5–1902한성무관학교 졸업, 육군 참령·강화도 진위대장
- 1906–1911신민회 조직, 보창학교 설립, 105인 사건 투옥
- 1913–1917연해주·북간도 망명, 대전무관학교 설립 및 독립군 양성
- 1918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 창당, 위원장
- 1919–1921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총리
- 1921고려공산당(상하이파) 창당
- 1922–1935코민테른 연락, MOPR 원동지역 한인 책임자
고당 조만식, 반탁으로 1946년 북부 정치무대에서 사라진 조선민주당 당수
1945년 12월 30일 조만식은 소련군사령부의 압력 속에서도 반탁 결의문을 채택했고,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감금되었다. 이 시기를 분수령으로 그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북부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고 김일성 등 좌익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조만식(曺晩植, 호 고당, 1883~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의 교육자·개신교 장로·언론인·정치인이다. 1913년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오산학교 교사(1915년 교장),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산정현교회 장로,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일제에 대해서는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노선으로 항일운동을 폈다. 해방 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이어 평남 건준과 평남 조공을 통합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좌우합작 기구) 위원장이 되었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당수가 되었고 12월 30일 반탁 결의문을 채택했다.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감금되었고 2월 최용건이 당을 장악했다. 이후 사망은 확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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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3~1915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오산학교 교사가 되어 1915년 교장이 되었으며 민족교육에 종사
- 1920~30년대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산정현교회 장로로 기독교·사회운동을 조직하고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 평양지회장, 조선일보 사장을 지냄
- 1945.8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이어 좌우합작 기구인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음
- 1945.10~11토지개혁·소작제 7·3제 논쟁으로 입장이 드러나 우파 위원들이 위원회를 떠나 월남했고, 11월 24일 명칭에서 '정치'가 빠지며 위원회가 좌파 기구로 바뀜
- 1945.11.3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선출되어 반탁 노선을 폄
- 1945.12.30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에서 신탁통치를 절대 찬성할 수 없다는 반탁 결의문을 채택
- 1946.1.5소련군사령부에 의해 고려호텔에 감금되어 정치무대에서 제거됨
- 1946.2최용건이 당을 장악하고 2월 24일 제1차 당대회에서 당수로 선출됨
- 1948~1950재판 없이 구금이 이어졌고 교환 협상은 결렬됨. 행방이 확인되지 않으며 사망은 전언·추정으로 시점·경위가 확정되지 않음
러시아 혁명에 투신한 최초의 조선인 공산주의자
1918년 9월 16일, 아타만 칼미코프의 백군에게 끌려나가 총살당하기 직전 그녀의 마지막 외침: '자유와 독립을 조선에!'
시베리아 한인 이주민의 딸로 태어나 1916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최초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다. 레닌의 지시로 극동에 파견되어 하바롭스크 소비에트 외무인민위원을 지내고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당했으며, 조선인 적위대를 조직해 백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1918년 33세로 처형당한, 러시아 혁명과 조선 독립운동을 잇는 상징적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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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7하바롭스크 볼셰비키 지부 서기 겸 극동 인민위원회 외무인민위원
- 1918.4한인사회당(이후 조선공산당의 전신) 공동 창당
- 1918.6–8조선인 적위대 및 국제 적위대 조직, 백군·일본군에 맞서 전투
- 1918.9.4백군과 일본군에 체포됨
- 1918.9.16하바롭스크에서 백군 코사크에 의해 처형됨
레닌·쑨원과 만나고 좌우합작을 택한, 분단 직전 조선의 마지막 통일주의자
“혁명가는 침상에서 죽는 법이 없다. 나는 거리에서 죽을 것이다.” 수차례 테러를 겪으며 자식들에게 남긴 말. 1947년 7월 19일, 혜화동 로터리에서 백의사의 총에 쓰러졌다.
1918년 신한청년당을 결성, 3·1운동의 도화선이 된 2·8독립선언을 주도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창립에 참여하고, 1922년 모스크바에서 레닌·트로츠키와 면담했으며 쑨원의 권유로 중국국민당에 가입했다. 1945년 8월 총독부로부터 평화적 치안권 이양을 받아내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이 되었다. 1946~47년 김규식과 좌우합작운동을 이끌며 통일정부를 추진했으나, 극우단체 백의사에 암살당했다. 남북 모두가 공식 추모한 유일한 정치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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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상하이에서 신한청년당 결성, 당수 취임
- 19192·8독립선언 주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차장
- 1920–1922고려공산당 상하이파 입당; 모스크바 원동피압박민족대회 참석, 레닌·트로츠키 면담
- 1925–1929쑨원 권유로 중국국민당 입당, 국공합작 참여
- 1933–1936조선중앙일보 사장; 조선체육회 회장
- 1944비밀결사 건국동맹 결성, 전국 조직화
- 1945.8–9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
- 1946–1947좌우합작운동 전개, 근로인민당 위원장
일제하 조선 독립과 중국 혁명을 오가며 싸운 국제주의 사회주의자, 《아리랑》의 주인공
“나는 죽어서도 조선의 독립과 내가 평생 믿어온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것을 보고 싶소.” — 옌안에서 님 웨일즈에게 남긴 말
일제하 조선 독립운동과 중국 혁명을 오가며 싸운 국제주의 사회주의자다. 옌안에서 미국 언론인 님 웨일즈에게 스물두 차례 인터뷰를 남겨 《아리랑》(1941)의 생생한 증언을 남겼고, 1938년 간첩 누명으로 처형되었다가 1983년 중국 공산당에 의해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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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3·1운동 참가, 일본 경찰에 3일간 구금
- 1921일본 도쿄 유학 후 중국으로 이동
- 1922중국 공산당 입당
- 1923공산청년동맹 가입, 잡지 《혁명》 간행
- 1925–1927황포군관학교·중산대학 수학, 광저우 봉기 참전
- 1936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 창설,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출
- 1937옌안 항일군정대학 강사, 님 웨일즈와 인터뷰
- 1938캉성 보안기관에 체포, 간첩 누명으로 처형
조선로동당 창립 핵심 조직자이자 초기 '소련파'의 지도자
1948년 3월 제2차 당대회에서 허가이는 돌연 연단에 올라 이미 사과한 간부들을 향해 "잘못을 인정하지 않은 사과는 공허한 말일 뿐"이라고 질타했고, 이 발언은 당내 규율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소비에트 고려인 혁명가로, 1945년 소련 점령 당국의 파견을 받아 평양에 도착한 후 조선로동당 창립의 핵심 조직자로 활동했다. 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겸 제2부위원장으로서 소련식 간부당 노선을 추진했으며, 한국전쟁 중 60만 당원 중 45만 명을 검증·제명하는 대대적 당 정비를 주도했다. 대중당을 구상한 김일성과 당 조직 노선을 둘러싸고 충돌해 1951년 실각했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초기 '소련파'의 부상과 몰락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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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2극동지역 콤소몰 서기
- 1937당에서 숙청·제명,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 1939당적 회복, 우즈베키스탄에서 당 간부로 복귀
- 1946북조선로동당 정치위원회 위원, 조직국장
- 1948북조선로동당 부위원장 겸 검열위원장
- 1949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제1비서 겸 제2부위원장
- 1951김일성과 충돌 후 전직 해임, 부수상으로 좌천
평남건준 선전부장을 지낸 언론인
1945년 평양에서 평남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으로 활동했으며, 소련군 제25군 진주 후 이 위원회가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재편되는 과정에 참여했다. 그가 소련 군정과 직접 접촉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한재덕(韓載德, 1911–1970)은 평안남도 성천 출신의 언론인이다. 일제 강점기 조선중앙일보 도쿄 특파원과 평양매일신문 기자로 일했고, 1933년 시인 임화와 함께 문예지 집단을 냈다가 폐간당했다. 1945년 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의 선전부장을 맡았으며, 이 위원회가 소련군의 요구로 평남인민정치위원회로 재편될 때 참여했다. 같은 해 평양민보 편집국장을 지냈고, 1946년 조선공산당에 입당해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과 민주조선 주필을 맡았다. 조선중앙통신 국내보도부장을 지낸 뒤 1953년 일본에 파견되었고, 1959년 대한민국으로 넘어가 공산권문제연구소에서 반공 연구자·저술가로 활동하다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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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시인 임화와 함께 문예지 집단 간행
- 일제 강점기조선중앙일보 도쿄 특파원, 평양매일신문 기자
- 1945평안남도 건국준비위원회 선전부장, 평양민보 편집국장
- 1946조선공산당 입당,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서기장, 민주조선 주필
- 1953조선중앙통신 국내보도부장을 지낸 뒤 일본에 파견
- 1959대한민국으로 넘어가 공산권문제연구소에서 활동
소련에서 온 고려인 장군, 판문점에서 정전협정에 서명하다
1953년 7월 27일 판문점, 남일 대장과 해리슨 중장은 서로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18부의 정전협정문에 서명했다. 3년 전쟁을 멈춘 10분, 그는 조선의 얼굴이었다.
러시아 극동에서 태어난 고려인으로, 1937년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로 옮겨갔으며 소련군 장교로 스탈린그라드 전투와 베를린 공방전에 참전했다. 1946년 조선 북부로 파견되어 김일성의 측근으로 부상했고, 한국전쟁 발발 후 인민군 총참모장을 맡았다. 1951년부터 2년간 판문점 휴전회담 공산측 수석대표로서 협상을 이끌었고 1953년 7월 27일 조선인민군 대표로 정전협정에 서명해 전 세계에 조선의 얼굴로 알려졌다. 전후 외무상·부수상을 지내며 소련파 고려인 동료들이 숙청되는 와중에도 살아남았으나, 1976년 원인 불명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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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1946소련에서 교사·교육 공무원으로 근무, 소련군 대위로 독소전 참전
- 1946–1950조선 북부 파견, 교육성 부상까지 승진
- 1950–1953조선인민군 총참모장, 휴전회담 공산측 수석대표
- 19537월 27일 정전협정 조선인민군 측 서명
- 1953–1959외무상
- 1957–1976내각 부수상
- 1966–1972철도상·국가건설위원회 위원장
- 1972–1976정무원 부총리·국가경공업위원회 위원장
조선 보안기구의 창설자이자 정치탄압의 집행자
도착 시점은 러시아어 위키백과·란코프가 1946년(란코프는 9월), 영어 위키백과가 1945년 10월로 갈린다. 1947년에는 이미 국가보위(정치경찰) 부서장이었고, 란코프는 그가 조선 국가보위의 최초 책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러시아 제국 출신 고려인으로, 출생지는 문서로 확정되지 않았고 출생 연도도 출처에 따라 1912~1914년으로 갈린다. 소련 내무인민위원회와 정보기관에서 일했고, 도착 시점은 러시아어 위키백과와 란코프가 1946년, 영어 위키백과는 1945년 10월로 적는다. 1947년 이미 국가보위(정치경찰) 부서장이었고 1948년 9월 내무성 부상 겸 정치보위국장이 되었으나, 란코프에 따르면 이후 다시는 정치경찰을 장악하지 못했다. 사회안전상(1951년 3월/5월설)과 내무상(1960년 11월까지)을 지냈고, 러시아어 위키백과는 그를 탄압 체계의 조직자이자 명령에 순종한 집행자로 함께 서술한다. 소련파였으나 충성으로 숙청을 피해 1992년 7월 18일 중앙재판소 소장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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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7–1944카자흐스탄 강제이주 후 크질오르다에서 검사, 1942~1944년 크질오르다·탈디쿠르간 검찰 근무(러시아어 위키백과). 1940년 당 입당. 란코프는 1946년 이전 행적이 문서로 확인되지 않는다고 본다
- 1947북조선인민위원회 내무국 국가보위(정치경찰) 부서장(란코프). 영어 위키백과는 1947년 5월 내무국 총국장으로 적으나, 1948년 이후 내무성 산하 국(局) 체제와 어긋나 단정하기 어렵다
- 1948최고인민회의 대의원(러시아 위키백과)
- 1948년 9월–1951년 2/3월내무성 부상 겸 정치보위국장(영어 위키백과). 란코프에 따르면 이후 다시는 정치경찰을 장악하지 못했다
- 1951년 3월/5월–1952년사회안전상(정치보위국이 사회안전성으로 개편). 3월설은 영어 위키백과·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5월설은 영어 위키백과 사회안전성 문서
- 1952년 10월–1960년 11월내무상(사회안전성이 내무성으로 개편)
- 1956년 8월8월 종파사건 때 내무상으로서 경찰을 동원해 평양을 감시하고 '종파주의자' 수사를 지도(영어 위키백과). 같은 사건 문서에는 당시 그가 해외에 있었다는 기술도 병존한다
- 1956–1980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1956년 4월 선출, 1970년 11월·1980년 10월 재선)
- 1960년 11월–1972년중앙재판소 부소장, 1966년 11월부터 당 연락국 정보 책임자
- 1972년 12월–1992년중앙재판소 소장(1982년·1986년 재임명, 사망 시까지 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