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국가와 혁명』

인물블라디미르 레닌, 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카를 카우츠키,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안톤 판네쿠크,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 아우구스트 베벨, 빌헬름 브라케, 요제프 바이데마이어,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미하일 바쿠닌, 페르디난트 라살레, 에밀 반데르벨데, 카를 레기엔, 미하일 투간-바라놉스키, 이라클리 체레텔리, 빅토르 체르노프,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마트베이 스코벨레프, 알렉산드르 포트레소프, 표트르 크로폿킨, 막스 슈티르너, 알렉상드르 밀랑, 장 조레스, 필리프 샤이데만,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라데크, 시드니 웹, 비어트리스 웹, 필리포 투라티, 쥘 게드, 마르셀 상바, 아서 헨더슨,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표트르 스트루베,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 나폴레옹 3세, 프란츠 메링, 니콜라이 미하일롭스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용어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의 사멸, 국가기구의 분쇄,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와 높은 단계, 프랑스 내전 (마르크스), 고타강령 비판, 에르푸르트 강령,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아나키즘, 수정주의, 제2인터내셔널, 멘셰비키, 사회혁명당, 소비에트, 보나파르티즘, 블랑키즘, 페이비언 협회, 반사회주의자법, 러시아 임시정부, 제국주의 전쟁, 독일 사회민주당 (SPD) 학습레닌: 국가와 혁명 · 1장 계급사회와 국가, 2장 국가와 혁명. 1848~1851년의 경험, 3장 국가 기계를 분쇄하라: 파리 코뮌의 경험, 4장 엥겔스의 보충 설명, 5장 국가 사멸의 경제적 기초, 6장 기회주의자들의 마르크스주의 속류화, 사회주의의 분기 · 14장 혁명을 지지하면서도 볼셰비키와 다를 수 있을까?

초판 서문

국가 문제는 지금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정치적으로나 특별한 중요성을 띠고 있다. 제국주의 전쟁은 독점자본주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바뀌는 과정을 엄청나게 앞당기고 첨예하게 만들었다. 자본가들의 전능한 연합체와 점점 더 긴밀하게 융합하는 국가가 근로 대중을 억압하는 일은 그 괴물 같은 정도가 날로 더해 간다. 선진국들은 — 우리는 그 나라들의 “후방”을 말하고 있다 — 노동자들을 가두는 군사 징역 감옥으로 바뀌고 있다. 질질 끄는 전쟁이 낳은 전대미문의 참상과 재난은 대중의 처지를 견딜 수 없게 만들고, 그들의 분노를 키운다. 국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눈에 띄게 무르익고 있다. 이 혁명이 국가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문제가 실천적 의의를 띠게 된다.

수십 년 동안 비교적 평화롭게 발전하는 사이에 쌓인 기회주의의 요소들이 전 세계 공식 사회주의 정당들 안에 사회배외주의라는 지배적 조류를 만들어 냈다. 이 조류(러시아의 플레하노프, 포트레소프, 브레시콥스카야, 루바노비치, 그리고 조금 가려진 형태로는 체레텔리 씨, 체르노프 씨 일당, 독일의 샤이데만, 레기엔, 다비트 등, 프랑스와 벨기에의 르노델, 게드, 반데르벨데, 영국의 하인드먼과 페이비언주의자들 등등)는 말로는 사회주의, 실제로는 배외주의로서, “사회주의의 지도자들”이 “자국” 민족 부르주아지의 이익뿐 아니라 바로 “자국” 국가의 이익에 비굴하게 하인처럼 순응한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른바 강대국 대다수가 오래전부터 작고 약한 민족들을 여럿 착취하고 예속시켜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제국주의 전쟁은 바로 이런 종류의 노획물을 나누고 다시 나누려는 전쟁이다. 근로 대중을 부르주아지 일반의 영향, 특히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의 영향에서 해방하기 위한 투쟁은 “국가”에 관한 기회주의적 편견과 싸우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먼저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학설을 살펴보되, 이 학설에서 잊혔거나 기회주의적으로 왜곡된 측면들을 특히 자세히 다룬다. 다음으로 이 왜곡의 주된 대표자인 카를 카우츠키를 따로 분석한다. 그는 제2인터내셔널(1889~1914년)의 가장 이름난 지도자였으며, 이번 전쟁 중에 그토록 비참하게 파산했다. 끝으로 1905년, 특히 1917년 러시아 혁명들이 준 경험의 주요 결론을 정리한다. 1917년 혁명은 지금(1917년 8월 초) 그 발전의 첫 시기를 마무리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혁명 전체는 제국주의 전쟁이 불러일으키는 사회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들의 사슬을 이루는 고리 하나로서만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 혁명이 국가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문제는 실천적·정치적 의의를 띨 뿐 아니라, 대중이 가까운 장래에 자본의 굴레에서 스스로를 해방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대중에게 밝혀 주는 문제로서 가장 절박한 시사적 의의도 띠게 된다.

지은이

1917년 8월

제2판 서문

이번 제2판은 거의 고치지 않고 찍는다. 제2장에 제3절을 덧붙였을 뿐이다.

지은이

모스크바

1918년 12월 17일

제1장 계급사회와 국가

1. 국가 — 계급 대립의 화해 불가능성의 산물

마르크스의 학설은 지금, 피억압 계급의 해방 투쟁 속에서 혁명적 사상가와 지도자들의 학설이 역사에서 여러 번 겪은 일을 겪고 있다. 위대한 혁명가들이 살아 있는 동안 억압하는 계급들은 그들을 끊임없이 박해했고, 그들의 학설을 가장 야만적인 악의와 가장 광포한 증오로, 가장 막무가내인 거짓과 중상의 공세로 맞았다. 그들이 죽은 뒤에는 그들을 해롭지 않은 성상으로 바꾸려는, 말하자면 그들을 성인으로 떠받들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피억압 계급을 “위로”하고 우롱하려고 그들의 이름에 어느 정도 영예를 안겨 주면서, 혁명적 학설의 내용은 거세하고 그 혁명적 칼날은 무디게 하며 그 학설을 속되게 만든다. 지금 부르주아지와 노동운동 안의 기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주의를 이렇게 “손질”하는 데서 의견이 일치한다. 그들은 학설의 혁명적 측면, 그 혁명적 영혼을 잊고, 밀어내고, 왜곡한다. 부르주아지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 또는 받아들일 수 있을 듯이 보이는 것을 앞세우고 찬양한다. 사회배외주의자들은 요즘 모두 “마르크스주의자”다. 농담이 아니다! 그리고 어제까지 마르크스주의 박멸의 전문가였던 독일 부르주아 학자들이 “민족적·독일적” 마르크스에 대해 점점 더 자주 이야기한다. 이 마르크스가 약탈 전쟁을 치르기에 알맞게 그토록 훌륭하게 조직된 노동자 단체들을 길러 냈다는 것이다!

이런 사정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왜곡이 전대미문으로 널리 퍼진 상황에서, 우리의 과제는 무엇보다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의 참된 학설을 복원하는 데 있다. 그러려면 마르크스와 엥겔스 자신의 저작에서 긴 인용문을 잔뜩 끌어와야 한다. 물론 긴 인용문은 서술을 무겁게 만들고, 대중적으로 읽히는 데는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없이 해 나가기란 전혀 불가능하다. 국가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 저작의 모든 대목, 적어도 결정적인 대목은 모두 반드시 되도록 온전한 형태로 인용해야 한다. 그래야 독자가 과학적 사회주의 창시자들의 견해 전체와 그 견해의 발전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고, 또 지금 지배적인 “카우츠키주의”가 그 견해를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문서로 증명하고 눈앞에 보여 줄 수 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가장 널리 읽힌 저작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부터 시작하자. 이 책은 1894년 슈투트가르트에서 이미 제6판이 나왔다. 우리는 인용문을 독일어 원문에서 옮겨야 한다. 러시아어 번역본은 많기는 하지만 대부분 완전하지 않거나 몹시 부실하게 옮겨졌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자신의 역사적 분석을 결산하며 이렇게 말한다. “국가는 결코 밖에서 사회에 강요된 힘이 아니다. 국가는 또한 헤겔이 주장하듯 ‘인륜적 이념의 현실’, ‘이성의 형상이자 현실’도 아니다. 국가는 일정한 발전 단계에 이른 사회의 산물이다. 국가는 이 사회가 자기 자신과의 해결할 수 없는 모순에 휘말렸고, 스스로는 벗어날 힘이 없는 화해할 수 없는 대립물들로 쪼개졌다는 고백이다. 그리고 이 대립물들, 곧 경제적 이해가 서로 충돌하는 계급들이 쓸데없는 투쟁 속에서 서로를, 그리고 사회를 집어삼키지 않게 하려면, 겉보기에 사회 위에 서서 충돌을 누그러뜨리고 그것을 ‘질서’의 테두리 안에 붙들어 둘 힘이 필요해졌다. 사회에서 생겨났으면서도 사회 위에 자신을 세우고 점점 더 사회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이 힘이 바로 국가다.” (독일어 제6판 177~178쪽)

여기에는 국가의 역사적 역할과 의의라는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사상이 아주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국가는 계급 대립의 화해 불가능성의 산물이자 표현이다. 국가는 계급 대립이 객관적으로 화해할 수 없는 곳에서, 그런 때에, 그런 정도만큼 생겨난다. 거꾸로 말하면, 국가가 존재한다는 것은 계급 대립이 화해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왜곡은 바로 이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지점에서 시작되며, 두 개의 주된 노선을 따라 나아간다.

한편으로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 특히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은 — 반박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에 밀려, 계급 대립과 계급투쟁이 있는 곳에만 국가가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 국가가 계급들을 화해시키는 기관이 되도록 마르크스를 “손본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계급들의 화해가 가능하다면 국가는 생겨날 수도, 유지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소시민적이고 속물적인 교수와 평론가들에게서는 — 걸핏하면 마르크스를 호의적으로 끌어대면서! — 국가가 바로 계급들을 화해시킨다는 결론이 나온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국가는 계급 지배의 기관이고,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기관이며, 계급들의 충돌을 누그러뜨리면서 이 억압을 합법화하고 공고히 하는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소부르주아 정치가들의 생각으로는 질서란 바로 계급들의 화해이지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억압이 아니다. 충돌을 누그러뜨린다는 것은 화해시킨다는 뜻이지, 피억압 계급에게서 억압자를 타도하기 위한 투쟁의 일정한 수단과 방법을 빼앗는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17년 혁명에서 국가의 의의와 역할이라는 문제가 그 모든 장대함 속에서 실천적으로, 즉각적 행동의 문제로서, 그것도 대중적 규모의 행동의 문제로서 제기되었을 때, 사회혁명당원(사회주의자-혁명가)과 멘셰비키는 모두 — 하나같이 단번에 통째로 “국가”에 의한 계급 “화해”라는 소부르주아 이론으로 굴러떨어졌다. 이 두 당 정치가들의 무수한 결의문과 논설은 이 소시민적이고 속물적인 “화해” 이론에 속속들이 젖어 있다. 국가가 자기 적수(자기와 대립하는 계급)와 화해할 수 없는 특정 계급의 지배 기관이라는 것, 이것을 소부르주아 민주주의는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국가에 대한 태도는 우리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가 전혀 사회주의자가 아니라(우리 볼셰비키는 늘 이것을 증명해 왔다) 사회주의에 가까운 말투를 쓰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라는 것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 주는 표지 가운데 하나다.

다른 한편으로, “카우츠키주의”의 마르크스주의 왜곡은 훨씬 더 교묘하다. “이론적으로는” 국가가 계급 지배의 기관이라는 것도, 계급 대립이 화해할 수 없다는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점은 놓치거나 흐릿하게 만든다. 국가가 계급 대립의 화해 불가능성의 산물이라면, 국가가 사회 위에 서서 “점점 더 사회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힘이라면, 피억압 계급의 해방은 폭력혁명 없이는 불가능할 뿐 아니라, 지배계급이 만들어 냈고 이 “소외”가 구현되어 있는 국가권력 기구를 파괴하지 않고서도 불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론적으로 자명한 이 결론을 마르크스는, 뒤에서 보겠지만, 혁명의 과제에 대한 구체적·역사적 분석에 근거하여 더없이 명확하게 끌어냈다. 그리고 바로 이 결론을 카우츠키는 — 우리는 이것을 앞으로의 서술에서 자세히 보여 줄 것이다 — …“잊었고” 왜곡했다.

2.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부대, 감옥 등

엥겔스는 이어서 말한다. “…낡은 씨족적(부족 또는 씨족) 조직과 비교할 때 국가를 구별 짓는 첫째 특징은 국가의 신민을 지역 단위로 나눈다는 점이다…”

우리에게 이 구분은 “자연스러워” 보이지만, 그것은 혈족이나 씨족에 따른 낡은 조직과 오랫동안 투쟁한 대가였다.

“…둘째 특징은 공적 권력의 설치다. 이 권력은 더는 무장력으로서 스스로를 조직하는 주민과 직접 일치하지 않는다. 이 특수한 공적 권력이 필요한 까닭은, 사회가 계급들로 분열된 뒤로는 주민의 자발적 무장 조직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이 공적 권력은 모든 국가에 존재한다. 그것은 무장한 사람들만이 아니라 물질적 부속물, 곧 감옥과 온갖 종류의 강제 기관으로도 이루어지는데, 이런 것들은 씨족(부족) 사회 체제에서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엥겔스는 국가라고 불리는 그 “힘”, 곧 사회에서 생겨났으면서도 사회 위에 자신을 세우고 점점 더 사회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힘의 개념을 펼쳐 보인다. 이 힘은 주로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감옥 따위를 마음대로 쓰는,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부대로 이루어진다.

우리가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부대를 말할 권리가 있는 것은, 모든 국가에 고유한 공적 권력이 무장한 주민, 곧 주민의 “자발적 무장 조직”과 “직접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위대한 혁명적 사상가가 그렇듯이, 엥겔스는 바로 지배적인 속인 근성의 눈에 가장 주목할 가치가 없어 보이는 것, 가장 익숙한 것, 단단할 뿐 아니라 화석이 되었다고 할 만한 편견으로 신성시되는 것에 의식 있는 노동자들의 주의를 돌리려고 애쓴다. 상비군과 경찰은 국가권력이 쓰는 힘의 주된 도구다. 그러나 — 어떻게 달리 될 수 있겠는가?

엥겔스가 말을 건넨 19세기 말 유럽인 절대다수는 위대한 혁명을 하나도 겪어 보지 못했고 가까이서 보지도 못했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달리 될 수가 없다. 그들은 도대체 “주민의 자발적 무장 조직”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부대(경찰, 상비군), 사회 위에 세워지고 사회로부터 자신을 소외시키는 부대가 왜 필요해졌느냐는 물음에 서유럽과 러시아의 속물은 스펜서나 미하일롭스키에게서 빌려 온 몇 마디 문구로, 사회생활이 복잡해졌다느니 기능이 분화했다느니 하는 핑계로 대답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핑계는 “과학적”으로 보이며, 속인을 훌륭하게 잠재운다. 가장 중요하고 근본적인 것, 곧 사회가 화해할 수 없이 적대하는 계급들로 분열되었다는 사실을 흐려 버리기 때문이다.

이 분열이 없다면, “‘주민의 자발적 무장 조직’은 몽둥이를 집어 드는 원숭이 무리나 원시인, 또는 씨족 사회로 결합된 사람들의 원시적 조직과는 그 복잡성과 기술 수준 등에서 다르겠지만” 그런 조직은 가능할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한 까닭은, 문명사회가 서로 적대하는, 그것도 화해할 수 없이 적대하는 계급들로 쪼개져 있어서 그 계급들이 “자발적으로” 무장하면 그들 사이에 무장 투쟁이 벌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국가가 형성되고, 특수한 권력, 곧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부대가 만들어진다. 그리고 모든 혁명은 국가기구를 파괴하면서, 지배계급이 자기에게 봉사하는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부대를 어떻게 되살리려 애쓰는지, 피억압 계급이 착취자가 아니라 피착취자에게 봉사할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새로운 조직을 어떻게 만들어 내려 애쓰는지를 우리 눈앞에 보여 준다.

엥겔스는 위의 논의에서, 모든 위대한 혁명이 실천적으로, 눈에 보이게, 그것도 대중 행동의 규모로 우리 앞에 제기하는 바로 그 문제를 이론적으로 제기한다. 곧 무장한 사람들의 “특수한” 부대와 “주민의 자발적 무장 조직”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문제다. 우리는 이 문제가 유럽과 러시아 혁명들의 경험으로 어떻게 구체적으로 예증되는지 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엥겔스의 서술로 돌아가자.

그는 때로는, 예컨대 북아메리카의 몇몇 곳에서는 이 공적 권력이 약하다고 지적한다(이것은 자본주의 사회로서는 드문 예외에 관한 이야기이며, 제국주의 이전 시기 북아메리카에서 자유로운 이주민이 우세했던 지역에 관한 이야기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 공적 권력은 강해진다.

“…공적 권력은 국가 내부의 계급 대립이 첨예해질수록, 그리고 서로 맞닿은 국가들이 커지고 인구가 많아질수록 강해진다. 오늘날의 유럽만 보아도 그렇다. 여기서는 계급투쟁과 정복 경쟁이 공적 권력을 너무 높이 끌어올려, 그것이 사회 전체는 물론 국가마저 집어삼킬 지경이 되었다…”

이 글은 늦어도 지난 세기 90년대 초에 쓰였다. 엥겔스의 마지막 서문은 1891년 6월 16일로 되어 있다. 그때는 제국주의로의 전환이 — 트러스트의 완전한 지배라는 의미에서도, 최대 은행들의 전능이라는 의미에서도, 대대적인 식민정책이라는 의미에서도, 그 밖의 의미에서도 — 프랑스에서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고, 북아메리카와 독일에서는 더 미약했다. 그 뒤로 “정복 경쟁”은 거대한 걸음을 내디뎠다. 더구나 20세기의 두 번째 10년이 시작될 무렵 지구는 이 “경쟁하는 정복자들”, 곧 거대한 약탈 강국들 사이에서 마침내 다 나뉘고 말았다. 그 뒤로 육해군 군비는 엄청나게 늘었고, 영국이냐 독일이냐 하는 세계 지배를 놓고, 노획물 분배를 놓고 벌어진 1914~1917년의 약탈 전쟁은 약탈적 국가권력이 사회의 모든 힘을 “집어삼키는” 일을 완전한 파국 직전까지 몰고 왔다.

엥겔스는 이미 1891년에 “정복 경쟁”을 강대국 대외 정책의 가장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로 지적할 줄 알았다. 그런데 사회배외주의의 악당들은, 바로 이 경쟁이 몇 배나 첨예해져 제국주의 전쟁을 낳은 1914~1917년에, “자국” 부르주아지의 약탈적 이익을 옹호하는 짓을 “조국 방위”니 “공화국과 혁명의 수호”니 하는 문구로 가리고 있다!

3. 국가 — 피억압 계급 착취의 도구

사회 위에 서 있는 특수한 공적 권력을 유지하려면 조세와 국채가 필요하다.

엥겔스는 이렇게 쓴다. “…공적 권력과 조세 징수권을 쥔 관리들은 사회의 기관으로서 사회 위에 선다. 씨족(부족) 사회의 기관들이 누리던 자유롭고 자발적인 존경은 그들에게 더는 충분하지 않다. 설령 그들이 그런 존경을 얻을 수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관리의 신성함과 불가침성에 관한 특별법이 만들어진다. “가장 보잘것없는 경찰관”이 씨족 대표들보다 더 많은 “권위”를 지닌다. 그러나 문명국가의 군 최고 지휘관조차, 사회로부터 “몽둥이로 얻어 낸 것이 아닌 존경”을 받는 씨족 장로를 부러워할 만하다.

여기서는 국가권력의 기관으로서 관리들이 누리는 특권적 지위의 문제가 제기되어 있다. 무엇이 그들을 사회 위에 세우는가 하는 것이 기본 문제로 제시되어 있다. 우리는 이 이론적 문제가 1871년 파리 코뮌에서 어떻게 실천적으로 해결되었고, 1912년 카우츠키에게서 어떻게 반동적으로 흐려졌는지 보게 될 것이다.

“…국가는 계급 대립을 억제할 필요에서 생겨났지만, 동시에 이 계급들의 충돌 한가운데서 생겨났기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가장 강력한 계급,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계급의 국가다. 이 계급은 국가의 도움으로 정치적으로도 지배하는 계급이 되며, 그리하여 피억압 계급을 억누르고 착취할 새로운 수단을 얻는다…” 고대 국가와 봉건 국가가 노예와 농노를 착취하는 기관이었을 뿐 아니라, “근대의 대의제 국가도 자본이 임금노동을 착취하는 도구다. 그러나 예외적으로, 서로 싸우는 계급들이 힘의 균형에 이르러 국가권력이 겉보기에는 중재자로서 한동안 두 계급에 대해 어느 정도 자립성을 얻는 시기가 있다…” 17세기와 18세기의 절대왕정, 프랑스 제1제정과 제2제정의 보나파르트주의,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그러했다.

덧붙이자면, 공화국 러시아에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를 박해하는 쪽으로 돌아선 뒤의 케렌스키 정부도 그러하다. 그 시점에 소비에트는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의 지도 탓에 이미 무력해졌고, 부르주아지는 아직 소비에트를 곧바로 해산할 만큼 강하지 못하다.

엥겔스는 계속해서 말한다. 민주공화국에서는 “부는 자기 권력을 간접적으로, 그러나 그만큼 더 확실하게 행사한다”. 곧 첫째로 “관리의 직접 매수”(미국)를 통해, 둘째로 “정부와 증권거래소의 동맹”(프랑스와 미국)을 통해서다.

지금은 제국주의와 은행의 지배가 이 두 가지 방법, 곧 어떤 민주공화국에서든 부의 전능을 지키고 관철하는 두 방법을 비범한 기예의 경지로 “발전시켰다”. 이를테면 러시아 민주공화국의 첫 몇 달 동안, 말하자면 “사회주의자”인 사회혁명당원 및 멘셰비키와 부르주아지가 연립정부에서 혼례를 올린 밀월 기간에 팔친스키 씨는 자본가들과 그들의 약탈, 군수 납품에서 그들이 국고를 터는 짓을 억제할 온갖 조치를 사보타주했다. 그 뒤 내각에서 물러난 팔친스키 씨는(물론 그와 똑같은 다른 팔친스키가 그 자리를 이었다) 자본가들에게서 연봉 12만 루블짜리 자리를 “상”으로 받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직접 매수인가, 간접 매수인가? 정부와 신디케이트의 동맹인가, 아니면 “그저” 우호 관계인가? 체르노프와 체레텔리, 압크센티예프와 스코벨레프 같은 이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가? — 그들은 국고를 털어먹는 백만장자들의 “직접적” 동맹자인가, 아니면 간접적 동맹자일 뿐인가?

민주공화국에서 “부”의 전능이 더 확실한 것은 그것이 자본주의의 나쁜 정치적 외피에 의존하지 않기 때문이다. 민주공화국은 자본주의가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정치적 외피다. 그래서 자본은 (팔친스키, 체르노프, 체레텔리 일당을 통해) 이 가장 좋은 외피를 장악하고 나면 자기 권력을 아주 단단하고 아주 확실하게 다져 놓기 때문에,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에서는 인물이 바뀌든 기관이 바뀌든 정당이 바뀌든 어떤 교체도 이 권력을 흔들지 못한다.

또 하나 지적해 두어야 할 것은 엥겔스가 보통선거권을 부르주아지의 지배 도구라고 더없이 분명하게 부른다는 점이다. 그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의 오랜 경험을 분명히 염두에 두면서, 보통선거권은

“노동계급의 성숙도를 재는 척도다. 오늘날의 국가에서 그것은 그 이상을 줄 수 없으며, 결코 주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우리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 같은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친형제인 서유럽의 모든 사회배외주의자와 기회주의자들은 바로 보통선거권에서 “그 이상”을 기대한다. 그들은 보통선거권이 “오늘날의 국가에서” 근로자 다수의 의지를 실제로 드러내고 그 의지의 실현을 보장할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스스로 품고 인민에게도 불어넣는다.

여기서 우리는 이 그릇된 생각을 지적하고, 엥겔스의 아주 명료하고 정확하며 구체적인 언명이 “공식”(곧 기회주의적) 사회주의 정당들의 선전과 선동에서 걸음마다 왜곡되고 있다는 것을 가리키는 데 그칠 수밖에 없다. 엥겔스가 여기서 내던져 버리는 그 생각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지는 “오늘날의”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견해를 앞으로 서술하면서 자세히 밝힐 것이다.

엥겔스는 자신의 가장 대중적인 저작에서 자기 견해를 다음과 같이 총괄한다.

“이처럼 국가는 영원한 옛날부터 존재한 것이 아니다. 국가 없이 지낸 사회, 국가와 국가권력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던 사회들이 있었다. 사회의 계급 분열과 필연적으로 결부된 경제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국가는 이 분열 때문에 필연이 되었다. 우리는 지금 빠른 걸음으로 생산 발전의 한 단계에 다가가고 있다. 그 단계에서는 이 계급들의 존재가 필연이기를 그쳤을 뿐 아니라 생산에 직접적 장애가 된다. 계급들은 과거에 불가피하게 생겨났던 것처럼 불가피하게 사라질 것이다. 계급이 사라지면 국가도 불가피하게 사라진다. 생산자들의 자유롭고 평등한 연합에 기초해 생산을 새롭게 조직하는 사회는 국가 기계 전체를 그때 그것이 있어야 할 진짜 자리, 곧 물레와 청동 도끼 옆의 고대 유물 박물관으로 보낼 것이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의 선전·선동 문헌에서 이 인용문을 만나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이 인용문이 나오는 경우에도 대개는 마치 성상 앞에 절하듯, 곧 엥겔스에게 공식적으로 경의를 표하려고 끌어올 뿐이다. 이 “국가 기계 전체를 고대 유물 박물관으로 보내는 일”이 얼마나 넓고 깊은 규모의 혁명을 전제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려는 시도는 전혀 없다. 엥겔스가 무엇을 국가 기계라고 부르는지 이해하는 모습조차 대개는 보이지 않는다.

4. 국가의 “사멸”과 폭력혁명

국가의 “사멸”에 관한 엥겔스의 말은 아주 널리 알려져 있고, 아주 자주 인용되며, 마르크스주의를 기회주의에 맞게 위조하는 흔한 수법의 요점이 무엇인지 아주 뚜렷하게 보여 준다. 그래서 이 말을 자세히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이 나오는 논의 전체를 인용하자.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생산수단을 우선 국가 소유로 바꾼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는 프롤레타리아트로서의 자기 자신을 폐기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모든 계급 차이와 계급 대립을 폐기하며, 그와 함께 국가로서의 국가도 폐기한다. 지금까지 존재했고 지금도 존재하는, 계급 대립 속에서 움직이는 사회에는 국가가 필요했다. 곧 착취계급이 자기의 외적 생산조건을 유지하기 위한 조직, 따라서 특히 피착취 계급을 주어진 생산양식이 규정하는 억압 조건(노예제, 농노제, 임금노동) 속에 폭력으로 붙잡아 두기 위한 조직이 필요했다. 국가는 사회 전체의 공식 대표자였고, 눈에 보이는 단체로 사회가 집약된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그러했던 것은, 오직 그 시대에 홀로 사회 전체를 대표하던 계급의 국가였던 한에서였다. 국가는 고대에는 노예 소유자인 국가 시민들의 국가였고, 중세에는 봉건 귀족의 국가였으며, 우리 시대에는 부르주아지의 국가다. 국가가 마침내 실제로 사회 전체의 대표자가 될 때, 국가는 스스로를 쓸모없게 만든다. 억압 속에 붙잡아 두어야 할 사회계급이 하나도 없게 될 때부터, 계급 지배와 함께, 그리고 지금의 생산의 무정부 상태가 낳는 개별적 생존 투쟁과 함께, 이 투쟁에서 비롯하는 충돌과 과잉(극단)이 사라질 때부터 — 그때부터는 억압할 것이 없을 것이며, 억압을 위한 특수한 권력, 곧 국가도 필요 없을 것이다. 국가가 실제로 사회 전체의 대표자로서 등장하는 첫 행위 — 사회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것 — 는 동시에 국가로서의 국가가 하는 마지막 자립적 행위다. 그때 사회관계에 대한 국가권력의 개입은 한 영역에서 또 한 영역으로 차례차례 쓸모없게 되고 저절로 잠든다. 사람에 대한 통치 대신 사물의 관리와 생산과정의 지도가 들어선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사멸한다. 이것을 기준으로 ‘자유로운 인민국가’라는 문구를 평가해야 한다. 이 문구는 한동안 선동상의 존재 이유가 있었지만, 결국 과학적으로는 성립할 수 없다. 이것을 기준으로 이른바 무정부주의자들의 요구, 곧 국가를 오늘에서 내일 사이에 폐지하라는 요구도 평가해야 한다.” (『반뒤링』. 『오이겐 뒤링 씨의 과학 전복』, 독일어 제3판 301~303쪽)

틀릴 걱정 없이 말할 수 있는데, 엥겔스의 이 놀랍도록 사상이 풍부한 논의에서 오늘날 사회주의 정당들 안의 사회주의 사상이 실제로 제 것으로 삼은 것은, 마르크스에 따르면 국가는 무정부주의 학설이 말하는 국가 “폐지”와 달리 “사멸한다”는 것뿐이다. 마르크스주의를 이렇게 잘라 내는 것은 그것을 기회주의로 끌어내리는 일이다. 이런 “해석”으로는 느리고 고르고 점진적인 변화, 비약도 폭풍도 없는 상태, 혁명이 없는 상태에 대한 흐릿한 관념밖에 남지 않기 때문이다. 흔하고 널리 퍼진,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대중적인 이해에서 국가의 “사멸”이란 틀림없이 혁명을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흐려 버리는 것을 뜻한다.

첫째. 이 논의 맨 앞에서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장악하면서 “그렇게 함으로써 국가로서의 국가를 폐기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해 보는 것은 “관례가 아니다”. 보통은 이것을 아예 무시하거나 엥겔스의 “헤겔주의적 약점” 같은 것으로 여긴다. 실제로 이 말에는 가장 위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 가운데 하나인 1871년 파리 코뮌의 경험이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적당한 곳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다. 실제로 엥겔스는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의한 부르주아지의 국가의 “폐기”를 말하고 있으며, 사멸에 관한 말은 사회주의 혁명 뒤에 남는 프롤레타리아 국가 조직의 잔재에 관한 것이다. 엥겔스에 따르면 부르주아 국가는 “사멸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 “폐기된다”. 이 혁명 뒤에 사멸하는 것은 프롤레타리아 국가 또는 반(半)국가다.

둘째. 국가는 “억압을 위한 특수한 권력”이다. 엥겔스의 이 훌륭하고 더없이 깊은 정의는 여기서 아주 분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정의에서 다음이 나온다. 부르주아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한 줌의 부자가 수백만 근로자를 억압하기 위한 “특수한 권력”은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를 억압하기 위한 “특수한 권력”(프롤레타리아트 독재)으로 바뀌어야 한다. 바로 이것이 “국가로서의 국가의 폐기”다. 바로 이것이 사회의 이름으로 생산수단을 소유하는 “행위”다. 그리고 하나의(부르주아적) “특수한 권력”이 다른(프롤레타리아적) “특수한 권력”으로 이렇게 바뀌는 일이 결코 “사멸”의 형태로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은 저절로 분명하다.

셋째. 엥겔스는 “사멸”에 대해, 그리고 그보다 더 생생하고 다채롭게 “잠들기”에 대해, “사회 전체의 이름으로 국가가 생산수단을 소유한” 뒤의 시기, 곧 사회주의 혁명 뒤의 시기와 관련해서 아주 분명하고 명확하게 말한다.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이 시기 “국가”의 정치형태는 가장 완전한 민주주의다. 그러나 뻔뻔스럽게 마르크스주의를 왜곡하는 기회주의자들 가운데 누구도, 그렇다면 엥겔스가 여기서 말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잠들기”와 “사멸”이라는 데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이것은 얼핏 매우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민주주의도 역시 국가이며, 따라서 국가가 사라질 때 민주주의도 사라진다는 것을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만 그렇다. 부르주아 국가는 혁명만이 “폐기할” 수 있다. 국가 일반, 곧 가장 완전한 민주주의는 “사멸할” 수밖에 없다.

넷째. 엥겔스는 “국가는 사멸한다”는 유명한 명제를 내세우고 나서 곧바로, 이 명제가 기회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 양쪽을 겨냥한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이때 엥겔스는 “국가의 사멸”이라는 명제에서 끌어낸 결론 가운데 기회주의자들을 겨냥한 결론을 맨 앞에 둔다.

장담하건대, 국가의 “사멸”에 대해 읽었거나 들은 사람 1만 명 가운데 9,990명은 엥겔스가 이 명제에서 끌어낸 결론을 무정부주의자들만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전혀 모르거나 기억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머지 열 명 가운데 아마 아홉은 “자유로운 인민국가”가 무엇인지, 이 구호를 공격하는 것이 왜 기회주의자들을 공격하는 것인지 모른다. 역사는 이렇게 쓰인다! 위대한 혁명적 학설을 지배적인 속인 근성에 맞게 위조하는 일은 이렇게 눈에 띄지 않게 일어난다. 무정부주의자들을 겨냥한 결론은 수천 번 되풀이되고 속되게 다루어지며 가장 단순한 꼴로 머리에 박혀 편견처럼 단단해졌다. 그런데 기회주의자들을 겨냥한 결론은 흐려지고 “잊혔다”!

“자유로운 인민국가”는 70년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강령상 요구이자 유행하는 구호였다. 이 구호에는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소시민적으로 과장되게 묘사한 것 말고는 아무런 정치적 내용이 없다. 이 구호가 합법적으로 민주공화국을 암시하는 한에서, 엥겔스는 선동의 관점에서 이 구호를 “한동안” “정당화할” 용의가 있었다. 그러나 이 구호는 기회주의적이었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미화했을 뿐 아니라, 모든 국가 일반에 대한 사회주의적 비판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본주의 아래에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가장 좋은 국가형태로서 민주공화국을 지지한다. 그러나 가장 민주적인 부르주아 공화국에서도 임금 노예제가 인민의 운명이라는 것을 잊을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 나아가, 모든 국가는 피억압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특수한 권력”이다. 그러므로 모든 국가는 자유롭지도 않고 인민적이지도 않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70년대에 당 동지들에게 이것을 여러 번 설명했다.

다섯째. 모두가 국가의 사멸에 관한 논의를 기억하는 바로 그 엥겔스의 저작에 폭력혁명의 의의에 관한 논의가 있다. 엥겔스에게서 폭력혁명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폭력혁명에 대한 진정한 찬가가 된다. 이것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 오늘날 사회주의 정당들에서는 이 사상의 의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물론 생각하는 것조차 관례가 아니며, 대중 속에서 하는 일상적 선전과 선동에서 이 사상은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 사상은 국가의 “사멸”과 떼려야 뗄 수 없게 하나의 짜임새 있는 전체로 이어져 있다.

엥겔스의 그 논의는 이렇다.

“…폭력이 역사에서 또 다른 역할”(악의 실행자라는 역할 말고도), “곧 혁명적 역할을 한다는 것, 마르크스의 말대로 폭력은 새 사회를 잉태한 모든 낡은 사회의 산파라는 것, 폭력은 사회운동이 자기 길을 내고 굳고 죽은 정치형태를 부수는 도구라는 것 — 이 모든 것에 대해 뒤링 씨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는 착취 경제를 뒤엎으려면 어쩌면 폭력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한숨과 신음 속에서야 겨우 인정한다 — 유감스럽게도, 보시다시피! 폭력을 쓰면 무엇이든 쓰는 사람을 타락시킨다나. 승리한 모든 혁명이 그 결과로 가져온 높은 도덕적·사상적 고양이 있었는데도 이런 말을 한다! 그것도 독일에서 이런 말을 한다. 독일에서는 인민에게 강요될 수도 있는 폭력적 충돌이, 30년 전쟁의 굴욕 이래 민족의식에 스며든 노예근성을 씻어 낸다는 이점만은 적어도 가졌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이 흐리멍덩하고 맥 빠지고 무기력한 성직자의 사고가 역사가 아는 가장 혁명적인 당에 감히 자기를 권하려 든단 말인가?” (독일어 제3판 193쪽, 제2편 제4장 끝)

엥겔스가 1878년부터 1894년까지, 곧 죽을 때까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끈질기게 내놓은 폭력혁명에 대한 이 찬가를 국가 “사멸” 이론과 어떻게 한 학설 안에 결합할 수 있는가?

보통은 절충주의의 도움을 받아 둘을 결합한다. 곧 이 논의 저 논의를 제멋대로(또는 권력자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사상 없이 또는 궤변적으로 골라내는 것이다. 이때 백 번 가운데 아흔아홉 번은, 아니 그보다 더 자주 바로 “사멸”이 앞에 나선다. 변증법이 절충주의로 바뀐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를 다루는 오늘날 공식 사회민주주의 문헌에서 가장 흔하고 가장 널리 퍼진 현상이다. 이런 바꿔치기는 물론 새로운 일이 아니며, 고전 그리스 철학의 역사에서조차 볼 수 있었다. 마르크스주의를 기회주의에 맞게 위조할 때, 절충주의를 변증법으로 위조하는 것은 대중을 가장 쉽게 속인다. 그것은 겉보기 만족을 주고, 과정의 모든 측면, 발전의 모든 경향, 서로 모순되는 모든 영향 따위를 고려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사회 발전 과정에 대한 어떤 온전하고 혁명적인 이해도 주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위에서 말했고 앞으로의 서술에서 더 자세히 보여 줄 터인데, 폭력혁명의 불가피성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학설은 부르주아 국가에 관한 것이다. 부르주아 국가는 “사멸”의 방식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국가(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바뀔 수 없으며, 일반적으로는 폭력혁명에 의해서만 바뀔 수 있다. 엥겔스가 폭력혁명에 바친 찬가, 마르크스가 여러 번 한 선언과 완전히 일치하는 이 찬가는 — (폭력혁명의 불가피성을 자랑스럽고 공공연하게 선언한 『철학의 빈곤』과 『공산당 선언』의 마지막 부분을 떠올려 보라. 거의 30년 뒤인 1875년의 『고타강령 비판』을 떠올려 보라. 마르크스는 거기서 이 강령의 기회주의를 가차 없이 채찍질한다) — 이 찬가는 결코 “열광”도 아니고, 결코 웅변조의 말도, 논쟁적인 객기도 아니다. 대중을 폭력혁명에 대한 이런 견해, 바로 이런 견해로 체계적으로 교육할 필요성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학설 전체의 밑바탕에 놓여 있다. 지금 지배적인 사회배외주의 조류와 카우츠키주의 조류가 두 사람의 학설을 배반한 것은, 이 두 조류가 다 같이 이런 선전, 이런 선동을 잊어버렸다는 데서 특히 뚜렷하게 드러난다.

부르주아 국가를 프롤레타리아 국가로 바꾸는 일은 폭력혁명 없이는 불가능하다.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폐기, 곧 모든 국가의 폐기는 “사멸”의 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개개의 혁명적 정세를 연구하고 개개의 혁명이 준 경험의 교훈을 분석하면서 이 견해를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발전시켰다. 이제 우리는 그들 학설의 이 부분,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중요한 이 부분으로 넘어간다.

제2장 국가와 혁명. 1848~1851년의 경험

1. 혁명 전야

성숙한 마르크스주의의 첫 저작인 『철학의 빈곤』과 『공산당 선언』은 바로 1848년 혁명 전야에 나왔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 저작들에는 마르크스주의의 일반적 기초에 대한 서술과 함께 당시의 구체적인 혁명적 정세도 어느 정도 반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저작들의 저자들이 국가에 대해 말하는 것을, 그들이 1848~1851년의 경험에서 끌어낸 결론 바로 앞에서 살펴보는 편이 아마 더 적절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철학의 빈곤』에서 이렇게 쓴다. “…노동계급은 발전 과정에서 낡은 부르주아 사회 대신 계급과 계급 대립을 배제하는 연합체를 세울 것이다. 그러면 본래 의미의 정치권력은 더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권력이야말로 부르주아 사회 안의 계급 대립의 공식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1885년 독일어판 182쪽)

계급이 폐기된 뒤 국가가 사라진다는 사상을 이렇게 일반적으로 서술한 것을, 몇 달 뒤, 곧 1847년 11월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쓴 『공산당 선언』의 서술과 견주어 보는 것은 교훈적이다.

“…프롤레타리아트 발전의 가장 일반적인 단계들을 서술하면서, 우리는 현존 사회 안에서 다소 감추어진 채 벌어지는 내전을 추적했다. 그것이 공공연한 혁명으로 터져 나오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를 폭력으로 타도함으로써 자기 지배를 세우는 지점까지 추적했다…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바꾸는 것”(글자 그대로는 ‘끌어올리는 것’)“, 곧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임을 우리는 이미 위에서 보았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의 정치적 지배를 이용해 부르주아지에게서 모든 자본을 차례차례 빼앗고, 모든 생산도구를 국가, 곧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에 집중하며, 생산력의 총량을 되도록 빨리 늘릴 것이다.” (1908년 독일어 제7판 31쪽과 37쪽)

여기서 우리는 국가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가장 훌륭하고 가장 중요한 사상 가운데 하나, 곧 “프롤레타리아트 독재”(파리 코뮌 뒤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쓰기 시작한 표현대로 하면)라는 사상이 정식화된 것을 본다. 그리고 국가에 대한 더없이 흥미로운 정의도 보는데, 이 정의 역시 마르크스주의의 “잊힌 말들” 가운데 하나다. “국가, 곧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

국가에 대한 이 정의는 공식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지배적인 선전·선동 문헌에서 한 번도 해설된 적이 없다. 그뿐이 아니다. 이 정의는 그야말로 잊혔다. 개량주의와는 전혀 화해할 수 없고, “민주주의의 평화적 발전”에 관한 흔한 기회주의적 편견과 속물적 환상의 뺨을 후려치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국가가 필요하다 — 모든 기회주의자, 사회배외주의자, 카우츠키주의자가 이것이 마르크스의 학설이라고 장담하며 이 말을 되풀이한다. 그러면서 다음 두 가지를 덧붙이기를 “잊는다”. 첫째로, 마르크스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필요한 것은 사멸하는 국가, 곧 곧바로 사멸하기 시작하고 사멸하지 않을 수 없게 짜인 국가뿐이다. 둘째로, 근로자에게 필요한 “국가”는 “곧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다.

국가는 힘의 특수한 조직이며, 어떤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폭력의 조직이다. 그렇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어떤 계급을 억압해야 하는가? 물론 착취계급, 곧 부르주아지뿐이다. 근로자에게 국가가 필요한 것은 오직 착취자들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이 억압을 지도하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끝까지 혁명적인 유일한 계급이며,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투쟁에서, 부르주아지를 완전히 몰아내는 일에서 모든 근로자와 피착취자를 단결시킬 수 있는 유일한 계급이기 때문이다.

착취계급에게 정치적 지배가 필요한 것은 착취를 유지하기 위해서, 곧 인민의 압도적 다수에 맞서 보잘것없는 소수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서다. 피착취 계급에게 정치적 지배가 필요한 것은 모든 착취를 완전히 폐기하기 위해서, 곧 오늘날의 노예 소유자들, 즉 지주와 자본가라는 보잘것없는 소수에 맞서 인민의 압도적 다수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서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 계급투쟁을 계급 협조의 몽상으로 바꿔치기한 이 사이비 사회주의자들은 사회주의적 변혁도 몽상적으로 그렸다. 착취계급의 지배를 타도하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과제를 깨달은 다수에게 소수가 평화롭게 복종하는 것으로서 그렸다. 이 소부르주아 유토피아는 계급을 초월한 국가를 인정하는 것과 떼려야 뗄 수 없이 이어져 있었고, 실천에서는 근로 계급들의 이익을 배반하는 데로 이어졌다. 예를 들어 1848년과 1871년 프랑스 혁명들의 역사가 이것을 보여 주었고,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에서 부르주아 내각에 “사회주의자”가 참여한 경험이 이것을 보여 주었다.

마르크스는 평생 이 소부르주아 사회주의와 싸웠다. 이 사회주의를 지금 러시아에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 당이 되살려 놓았다.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의 학설을 정치권력에 관한 학설, 국가에 관한 학설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관철했다.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타도할 수 있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뿐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특수한 계급으로서, 그 경제적 존재 조건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이런 타도에 대비시키고 그것을 해낼 가능성과 힘을 주기 때문이다. 부르주아지는 농민층과 모든 소부르주아 계층을 쪼개고 흩어 놓는 반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결속시키고 단결시키고 조직한다. 대규모 생산에서 맡는 경제적 역할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만이 모든 근로·피착취 대중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부르주아지는 이 대중을 프롤레타리아 못지않게, 아니 흔히 그보다 더 심하게 착취하고 억누르고 짓밟지만, 이 대중은 자기 해방을 위해 독자적으로 투쟁할 능력이 없다.

마르크스가 국가와 사회주의 혁명 문제에 적용한 계급투쟁 학설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 곧 그 독재를 인정하는 데로 이어진다. 다시 말해 누구와도 나누지 않고 대중의 무장력에 직접 의거하는 권력을 인정하는 데로 이어진다. 부르주아지의 타도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계급으로 바뀌어야만 실현될 수 있다. 이 지배계급은 부르주아지의 불가피하고 필사적인 저항을 억압하고, 새로운 경제 체제를 위해 모든 근로·피착취 대중을 조직할 수 있는 계급이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국가권력, 곧 힘의 중앙집권적 조직, 폭력의 조직이 필요하다. 착취자들의 저항을 억압하기 위해서도, 그리고 사회주의 경제를 “정비하는” 일에서 거대한 주민 대중, 곧 농민층, 소부르주아지, 반(半)프롤레타리아를 지도하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마르크스주의는 노동자 당을 교육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트의 전위를 교육한다. 이 전위는 권력을 잡고 사회주의를 향해 인민 전체를 이끌며, 새 체제를 지휘하고 조직하며, 부르주아지 없이, 부르주아지에 맞서 자기 사회생활을 꾸리는 일에서 모든 근로자와 피착취자의 교사이자 지도자이자 영도자가 될 수 있다. 반대로 지금 지배적인 기회주의는 노동자 당을 대중에게서 떨어져 나간, 보수가 더 나은 노동자들의 대표자로 길러 낸다. 이들은 자본주의 아래서 그럭저럭 “자리를 잡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팔아넘긴다. 곧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인민의 혁명적 지도자 역할을 포기한다.

“국가, 곧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 — 마르크스의 이 이론은 역사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하는 혁명적 역할에 관한 그의 학설 전체와 떼려야 뗄 수 없게 이어져 있다. 이 역할의 완성이 프롤레타리아 독재,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지배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특수한 폭력 조직으로서 국가가 필요하다면, 여기서 저절로 다음과 같은 결론이 떠오른다. 부르주아지가 자기를 위해 만들어 놓은 국가 기계를 먼저 폐기하지 않고, 파괴하지 않고서 그런 조직을 만들어 내는 것을 과연 생각할 수 있겠는가? 『공산당 선언』은 바로 이 결론 코앞까지 다가가며, 마르크스는 1848~1851년 혁명의 경험을 결산하면서 이 결론을 말한다.

2. 혁명의 결산

우리가 관심을 두는 국가 문제에 대해 마르크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다음과 같이 논하며 1848~1851년 혁명을 결산한다.

“…그러나 혁명은 철저하다. 혁명은 아직 연옥을 지나는 여행길에 있다. 혁명은 자기 일을 체계적으로 해 나간다. 1851년 12월 2일까지”(루이 보나파르트가 쿠데타를 일으킨 날) “혁명은 준비 작업의 절반을 마쳤고, 이제 나머지 절반을 마치고 있다. 혁명은 먼저 의회 권력을 완성한다. 그것을 뒤엎을 수 있기 위해서다. 이것을 이룬 지금, 혁명은 집행권력을 완성하고, 그것을 가장 순수한 표현으로 환원하고, 고립시키고, 유일한 대상으로서 자기와 맞세운다. 그것에 맞서 파괴의 모든 힘을 집중하기 위해서다”(강조는 인용자). “그리고 혁명이 예비 작업의 이 두 번째 절반을 마칠 때, 유럽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하며 말할 것이다. 잘 팠다, 늙은 두더지야!

거대한 관료적·군사적 조직과 복잡하고 인위적인 국가 기계를 갖추고, 50만 명의 군대 옆에 또 50만 명의 관리 군단을 거느린 이 집행권력, 그물처럼 프랑스 사회의 온몸을 휘감고 그 모든 숨구멍을 틀어막는 이 무시무시한 기생 유기체는 전제군주정 시대, 봉건제가 쇠퇴하던 때에 생겨났으며, 이 유기체는 그 쇠퇴를 앞당기는 데 한몫했다.” 제1차 프랑스 혁명은 중앙집권화를 발전시켰지만 “동시에 통치 권력의 범위와 속성과 하수인의 수를 넓혔다. 나폴레옹이 이 국가 기계를 완성했다.” 정통 왕정과 7월 왕정은 “더 큰 분업 말고는 새로운 것을 아무것도 보태지 않았다… …마침내 의회공화국은 혁명에 맞서는 투쟁에서 탄압 조치와 함께 통치 권력의 수단과 중앙집권화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든 변혁은 이 기계를 분쇄하는 대신 완성했다”(강조는 인용자). “번갈아 가며 지배권을 놓고 싸운 정당들은 이 거대한 국가 건물을 장악하는 것을 자기 승리의 주된 전리품으로 여겼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제4판, 함부르크, 1907년, 98~99쪽)

이 훌륭한 논의에서 마르크스주의는 『공산당 선언』에 비해 거대한 걸음을 내디딘다. 거기서는 국가 문제가 아직 지극히 추상적으로, 가장 일반적인 개념과 표현으로 제기된다. 여기서는 문제가 구체적으로 제기되고, 아주 정확하고 명확하며 실천적으로 손에 잡히는 결론이 내려진다. 지금까지의 모든 혁명은 국가 기계를 완성했지만, 그것을 부수어야, 분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결론이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학설에서 주된 것, 근본적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근본적인 것을 지배적인 공식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은 완전히 잊어버렸을 뿐 아니라,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이름난 이론가 카우츠키는 (뒤에서 보겠지만) 노골적으로 왜곡했다.

『공산당 선언』에는 역사의 일반적 결산이 담겨 있다. 이 결산은 국가를 계급 지배의 기관으로 보게 만들며, 다음과 같은 필연적 결론에 이르게 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먼저 정치권력을 쟁취하지 않고서는, 정치적 지배를 얻지 않고서는, 국가를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로 바꾸지 않고서는 부르주아지를 타도할 수 없다. 그리고 이 프롤레타리아 국가는 승리한 직후부터 사멸하기 시작할 것이다. 계급 대립이 없는 사회에서는 국가가 필요하지도 않고 가능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부르주아 국가가 프롤레타리아 국가로 바뀌는 이 교체가 역사 발전의 관점에서 볼 때 도대체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제기되지 않는다.

마르크스가 1852년에 제기하고 해결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다.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자기 철학에 충실하게, 마르크스는 혁명의 위대한 해들, 곧 1848~1851년의 역사적 경험을 토대로 삼는다. 마르크스의 학설은 여기서도, 언제나처럼, 깊은 철학적 세계관과 풍부한 역사 지식에 비추어 이루어진 경험의 총괄이다.

국가 문제가 구체적으로 제기된다. 부르주아 국가, 곧 부르주아지의 지배에 필요한 국가 기계는 역사적으로 어떻게 생겨났는가? 부르주아 혁명들이 진행되는 동안, 그리고 피억압 계급들의 독자적 행동 앞에서 그 기계는 어떻게 바뀌고 어떻게 진화했는가? 이 국가 기계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과제는 무엇인가?

부르주아 사회에 고유한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은 절대주의가 몰락하던 시대에 생겨났다. 이 국가 기계를 가장 잘 특징짓는 두 기관은 관리 집단과 상비군이다. 이 기관들이 수천 가닥의 실로 바로 부르주아지와 이어져 있다는 것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에서 여러 번 이야기된다. 노동자 한 사람 한 사람의 경험이 이 연관을 더없이 생생하고 인상 깊게 설명해 준다. 노동계급은 이 연관을 제 몸으로 겪으며 알아 간다. 그래서 노동계급은 이 연관이 불가피하다는 과학을 그토록 쉽게 파악하고 그토록 굳게 제 것으로 삼는다.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은 이 과학을 무지하고 경박하게 부정하거나, 아니면 더 경박하게 “일반적으로”는 인정하면서 그에 맞는 실천적 결론을 끌어내기를 잊는다.

관리 집단과 상비군, 이것은 부르주아 사회의 몸에 붙은 “기생충”이다. 이 사회를 찢어 놓는 내적 모순이 낳은 기생충이지만, 어디까지나 생명의 숨구멍을 “틀어막는” 기생충이다. 지금 공식 사회민주주의에서 지배적인 카우츠키주의적 기회주의는 국가를 기생 유기체로 보는 견해가 무정부주의만의 특별하고 독점적인 소유물이라고 여긴다. 물론 마르크스주의의 이런 왜곡은 제국주의 전쟁에 “조국 방위”라는 개념을 갖다 대어 그 전쟁을 정당화하고 미화함으로써 사회주의를 전대미문의 치욕으로 끌어내린 속물들에게 더없이 유리하다. 그러나 그래도 이것은 틀림없는 왜곡이다.

봉건제가 몰락한 뒤로 유럽이 수없이 겪은 모든 부르주아 혁명을 거치며 이 관리·군사 기구는 발전하고 완성되고 강화된다. 특히 소부르주아지가 대부르주아지 편으로 끌려가 상당 부분 대부르주아지에게 종속되는 것은 바로 이 기구를 통해서다. 이 기구는 농민층 상층과 소수공업자, 상인 등에게 비교적 편하고 조용하고 명예로운 자리를 주며, 이 자리는 그 주인을 인민 위에 세운다. 1917년 2월 27일 뒤 반년 동안 러시아에서 일어난 일을 보라. 전에는 주로 흑백단에게 돌아가던 관리 자리가 카데트, 멘셰비키, 사회혁명당원의 전리품이 되었다. 진지한 개혁은 사실상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고, 개혁을 “헌법제정의회까지” 미루려 애썼다. 그리고 헌법제정의회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슬금슬금 미루려 애썼다! 그러나 전리품을 나누는 일, 장관, 차관, 총독 따위의 감투를 차지하는 일은 미루지 않았고, 어떤 헌법제정의회도 기다리지 않았다! 정부 구성을 이리저리 짜맞추는 놀음은 사실상 이 “전리품”을 나누고 다시 나누는 일의 표현일 뿐이었으며, 이 분배와 재분배는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전국에서, 중앙과 지방의 모든 행정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1917년 2월 27일~8월 27일 반년 동안의 결산, 객관적 결산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개혁은 미뤄졌고, 관리 감투의 분배는 이루어졌으며, 분배의 “실수”는 몇 차례의 재분배로 바로잡혔다.

그러나 여러 부르주아 정당과 소부르주아 정당 사이에서(러시아의 예를 들면 카데트, 사회혁명당원, 멘셰비키 사이에서) 관리 기구의 “재분배”가 많이 일어날수록, 피억압 계급들과 그 선두에 선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들이 부르주아 사회 전체와 화해할 수 없이 적대한다는 것을 더 분명히 깨닫게 된다. 그래서 모든 부르주아 정당은, 가장 민주적인 정당과 “혁명적 민주주의” 정당까지 포함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고 탄압 기구, 곧 바로 그 국가 기계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사태의 진행은 혁명이 국가권력에 맞서 “파괴의 모든 힘을 집중하도록” 강제하며, 국가 기계를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파괴하고 폐기하는 것을 과제로 삼도록 강제한다.

이렇게 과제를 제기하게 만든 것은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실제의 사태 발전, 1848~1851년의 살아 있는 경험이었다. 마르크스가 역사적 경험이라는 사실적 토대를 얼마나 엄격하게 고수하는지는, 1852년에 그가 폐기되어야 할 이 국가 기계를 무엇으로 대신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아직 구체적으로 제기하지 않는다는 데서 알 수 있다. 그때는 경험이 아직 이런 문제를 위한 재료를 주지 못했다. 역사는 이 문제를 나중에, 1871년에야 의제로 올렸다. 1852년에는 자연사적 관찰의 정확성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이것뿐이었다. 곧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국가권력에 맞서 “파괴의 모든 힘을 집중하는” 과제, 국가 기계를 “분쇄하는” 과제에 다가섰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물음이 생길 수 있다. 마르크스의 경험과 관찰과 결론을 일반화하는 것, 그것을 1848~1851년 3년 동안의 프랑스 역사보다 더 넓은 범위로 옮기는 것이 옳은가? 이 문제를 따져 보기 위해 먼저 엥겔스의 지적 하나를 떠올리고, 그다음 사실 자료로 넘어가자.

엥겔스는 『브뤼메르 18일』 제3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프랑스는 역사적 계급투쟁이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 매번 결정적 종결까지 치달은 나라다. 이 계급투쟁이 그 안에서 움직였고 그 결과가 그 안에서 표현되었던 정치형태들, 바뀌어 가는 그 정치형태들도 프랑스에서 가장 뚜렷한 윤곽으로 주조되었다. 중세에는 봉건제의 중심지였고 르네상스 이래로는 획일적 신분제 군주정의 모범국이었던 프랑스는 대혁명 때 봉건제를 쳐부수고, 다른 어떤 유럽 나라도 따르지 못할 고전적 명료성으로 부르주아지의 순수한 지배를 세웠다. 그리고 머리를 쳐드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하는 부르주아지에 맞서 벌이는 투쟁도 여기서는 다른 나라들이 알지 못하는 첨예한 형태로 나타난다.” (1907년판 4쪽)

이 마지막 지적은 낡은 것이 되었다. 1871년부터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투쟁에 휴지기가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휴지기가 아무리 길다 하더라도, 다가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에서 프랑스가 계급투쟁을 결정적 종결까지 밀고 가는 고전적인 나라로서 자기를 드러낼 가능성은 조금도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선진국들의 역사를 대략 훑어보자. 그러면 더 느리게, 더 다양한 모습으로, 훨씬 더 넓은 무대에서 바로 같은 과정이 일어났음을 보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는 공화제 나라들(프랑스, 미국, 스위스)에서도 군주제 나라들(영국, 어느 정도는 독일, 이탈리아, 스칸디나비아 나라들 등)에서도 “의회 권력”이 다듬어졌다. 다른 한편으로는 부르주아 체제의 기초는 그대로 둔 채, 관리 감투라는 “전리품”을 나누고 또 나누는 여러 부르주아 정당과 소부르주아 정당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끝으로 “집행권력”, 곧 그 관리·군사 기구가 완성되고 강화되었다.

이것이 자본주의 국가 일반의 최근 진화 전체에 공통된 특징이라는 데는 아무런 의심도 없다. 1848~1851년 3년 동안 프랑스는 자본주의 세계 전체에 고유한 바로 그 발전 과정을 빠르고 날카롭고 응축된 형태로 보여 주었다.

특히 제국주의, 곧 은행자본의 시대, 거대한 자본주의적 독점체의 시대, 독점자본주의가 국가독점자본주의로 성장 전화하는 시대는, 군주제 나라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공화제 나라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탄압이 강화되는 것과 맞물려 “국가 기계”가 비상하게 강화되고 그 관리·군사 기구가 전대미문으로 불어났음을 보여 준다.

이제 세계사는 틀림없이 1852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넓은 규모로, 국가 기계의 “파괴”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모든 힘을 집중하는” 데로 이끌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 기계를 무엇으로 대신할 것인가, 이에 대해서는 파리 코뮌이 가장 교훈적인 재료를 주었다.

3. 1852년 마르크스의 문제 제기

1907년 메링은 잡지 《노이에 차이트》(XXV, 2, 164)에 1852년 3월 5일 마르크스가 바이데마이어에게 보낸 편지의 발췌를 실었다. 이 편지에는 다른 이야기들과 함께 다음과 같은 훌륭한 논의가 들어 있다.

“나로 말하면, 현대 사회에서 계급들의 존재를 발견한 공로도, 계급들 사이의 투쟁을 발견한 공로도 나에게 있지 않다. 부르주아 역사가들은 나보다 훨씬 앞서 이 계급투쟁의 역사적 발전을 서술했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은 계급들의 경제적 해부를 서술했다. 내가 새로 한 일은 다음을 증명한 것이었다. 1) 계급들의 존재는 생산의 일정한 역사적 발전 단계(historische Entwicklungsphasen der Produktion)와만 결부되어 있다는 것, 2) 계급투쟁은 필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이어진다는 것, 3) 이 독재 자체는 모든 계급의 폐기와 계급 없는 사회로 넘어가는 이행일 뿐이라는 것…”

이 말에서 마르크스는 놀랄 만큼 두드러지게 두 가지를 표현해 냈다. 첫째, 그의 학설이 부르주아지의 가장 선진적이고 가장 심오한 사상가들의 학설과 주로, 근본적으로 어디서 다른가. 둘째, 국가에 관한 그의 학설의 요체가 무엇인가.

마르크스 학설에서 주된 것은 계급투쟁이다. 이렇게들 아주 자주 말하고 쓴다. 그러나 이것은 옳지 않다. 그리고 이 옳지 않은 생각에서 걸핏하면 마르크스주의의 기회주의적 왜곡, 부르주아지가 받아들일 수 있게 마르크스주의를 위조하는 일이 생겨난다. 계급투쟁 학설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부르주아지가, 그것도 마르크스 이전에 만들어 낸 것이며, 일반적으로 말해 부르주아지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계급투쟁만 인정하는 사람은 아직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 그런 사람은 아직 부르주아적 사고와 부르주아 정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사람으로 드러날 수도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계급투쟁 학설로 한정하는 것은 마르크스주의를 잘라 내고 왜곡하는 것이며, 부르주아지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계급투쟁의 인정을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인정으로까지 넓히는 사람만이 마르크스주의자다. 바로 여기에 마르크스주의자와 흔해 빠진 소부르주아(그리고 대부르주아)의 가장 깊은 차이가 있다. 마르크스주의를 실제로 이해하고 인정하는지는 바로 이 시금석으로 시험해야 한다. 그러니 유럽의 역사가 노동계급을 이 문제 앞으로 실천적으로 데려갔을 때, 모든 기회주의자와 개량주의자뿐 아니라 모든 “카우츠키주의자”(개량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사이에서 흔들리는 사람들)마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부정하는 가련한 속물이자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로 드러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1918년 8월, 곧 이 책 초판보다 훨씬 뒤에 나온 카우츠키의 소책자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마르크스주의를 속물적으로 왜곡하고, 말로는 위선적으로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비열하게 마르크스주의를 버린 본보기다(내 소책자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페트로그라드·모스크바, 1918년 참조).

그 주된 대표자인 전(前) 마르크스주의자 카우츠키에게서 보듯이, 현대 기회주의는 앞에서 인용한 마르크스의 부르주아적 입장 규정에 고스란히 들어맞는다. 이 기회주의는 계급투쟁을 인정하는 영역을 부르주아적 관계의 영역에 한정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영역 안에서, 그 테두리 안에서라면 교양 있는 자유주의자 가운데 누구도 계급투쟁을 “원칙적으로” 인정하기를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기회주의는 계급투쟁의 인정을 바로 가장 중요한 것에까지, 곧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시기,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고 완전히 폐기하는 시기에까지 밀고 나가지 않는다. 실제로 이 시기는 불가피하게 전례 없이 격렬한 계급투쟁, 전례 없이 첨예한 형태의 계급투쟁의 시기이며, 따라서 이 시기의 국가도 불가피하게 새로운 방식으로 민주적이고(프롤레타리아와 무산자 일반을 위해) 새로운 방식으로 독재적인(부르주아지에 맞서) 국가여야 한다.

다음으로. 마르크스의 국가 학설의 본질은, 한 계급의 독재가 모든 계급사회 일반에 필요할 뿐 아니라, 부르주아지를 타도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필요할 뿐 아니라, 자본주의와 “계급 없는 사회”, 곧 공산주의를 갈라놓는 역사적 시기 전체에도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한 사람만이 제 것으로 삼은 것이다. 부르주아 국가의 형태는 지극히 다양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다. 이 국가들은 모두 이런 식으로든 저런 식으로든, 그러나 결국에는 반드시 부르주아지의 독재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물론 정치형태의 엄청난 풍부함과 다양성을 낳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그 본질은 불가피하게 하나일 것이다. 곧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다.

제3장 국가와 혁명. 1871년 파리 코뮌의 경험. 마르크스의 분석

1. 코뮌 전사들의 시도는 어떤 점에서 영웅적인가?

알려져 있듯이, 코뮌이 일어나기 몇 달 전인 1870년 가을에 마르크스는 파리 노동자들에게 경고하면서, 정부를 타도하려는 시도는 절망에서 나온 어리석은 짓이 될 것이라고 논증했다. 그러나 1871년 3월 노동자들에게 결전이 강요되었고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였을 때, 봉기가 사실이 되었을 때, 마르크스는 불길한 징조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열렬하게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환영했다. 마르크스는 “때 이른” 운동을 현학적으로 비난하는 데 매달리지 않았다. 슬프게도 이름난 러시아의 마르크스주의 배교자 플레하노프는 그렇게 했다. 그는 1905년 11월에는 노동자와 농민의 투쟁을 북돋우는 투로 글을 쓰더니, 1905년 12월 뒤에는 자유주의자처럼 “무기를 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외쳤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그의 표현대로 “하늘을 습격한” 코뮌 전사들의 영웅적 행위에 감탄하기만 한 것이 아니다. 그는 비록 목표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이 대중적 혁명운동에서 엄청나게 중요한 역사적 경험을 보았다. 세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일정한 전진, 수백 개의 강령과 논의보다 더 중요한 실천적 전진을 보았다. 이 경험을 분석하고, 거기서 전술의 교훈을 끌어내고, 그것에 근거해 자기 이론을 재검토하는 것 — 마르크스는 자기 과제를 이렇게 설정했다.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 대해 필요하다고 여긴 유일한 “수정”은 파리 코뮌 전사들의 혁명적 경험에 근거해 이루어졌다.

『공산당 선언』의 새 독일어판에 붙인 마지막 서문은 두 저자가 함께 서명한 것으로, 1872년 6월 24일로 되어 있다. 이 서문에서 저자들, 곧 카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의 강령이 “지금은 군데군데 낡았다”고 말한다.

그들은 이어서 말한다. “…특히 코뮌은 ‘노동계급은 기성 국가 기계를 그저 장악해서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가동할 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이 인용문에서 두 번째 따옴표 안의 말은 저자들이 마르크스의 저작 『프랑스 내전』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처럼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파리 코뮌의 기본적이고 주된 교훈 하나를 너무나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여겨, 그것을 『공산당 선언』에 대한 본질적 수정으로 집어넣었다.

더없이 특징적인 것은 바로 이 본질적 수정이 기회주의자들에 의해 왜곡되었다는 점이다. 『공산당 선언』 독자의 10분의 9, 아니 100분의 99까지는 아마 그 뜻을 모를 것이다. 이 왜곡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왜곡들을 따로 다루는 장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겠다. 지금은 우리가 인용한 마르크스의 유명한 말을 흔히 통속적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마르크스가 여기서 권력 장악과 대비되는 느린 발전이라는 생각 따위를 강조한다는 식이라는 점만 지적해 두면 충분하다.

실제로는 바로 그 반대다. 마르크스의 생각은 노동계급이 “기성 국가 기계”를 단순히 장악하는 데 그칠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쇄해야, 부숴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1871년 4월 12일, 곧 바로 코뮌 시기에 마르크스는 쿠겔만에게 이렇게 썼다.

“…내 『브뤼메르 18일』의 마지막 장을 들여다보면, 프랑스 혁명의 다음 시도는 지금까지처럼 관료적·군사적 기계를 한 손에서 다른 손으로 넘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분쇄하는 것이라고 내가 선언했음을 알게 될 걸세.” (강조는 마르크스의 것이다. 원문에는 zerbrechen이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대륙에서 일어나는 모든 진정한 인민혁명의 전제 조건이네. 우리의 영웅적인 파리 동지들의 시도도 바로 이것이라네.” (《노이에 차이트》 제20년차 제1권, 1901~1902년, 709쪽)

(마르크스가 쿠겔만에게 보낸 편지들은 러시아어로 적어도 두 판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내가 편집하고 서문을 붙였다.)

“관료적·군사적 국가 기계를 분쇄한다”는 이 말에는, 국가에 대해 혁명 속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는 과제라는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주된 교훈이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그런데 바로 이 교훈이 지배적인 카우츠키주의적 마르크스주의 “해석”에 의해 완전히 잊혔을 뿐 아니라 노골적으로 왜곡되었다!

마르크스가 『브뤼메르 18일』을 끌어댄 데 대해 말하자면, 우리는 앞에서 해당 대목을 온전히 인용했다.

위에 인용한 마르크스의 논의에서 특히 두 대목을 짚어 볼 만하다. 첫째, 그는 자기 결론을 대륙에 한정한다. 1871년에는 이것이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그때 영국은 아직 순수하게 자본주의적이면서도 군벌이 없고 관료제도 상당 부분 없는 나라의 본보기였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영국을 제외했다. 영국에서는 혁명, 그것도 인민혁명이 “기성 국가 기계”의 파괴라는 전제 조건 없이 가능해 보였고, 그때는 실제로 가능했다.

지금 1917년, 첫 번째 거대한 제국주의 전쟁의 시대에 마르크스의 이 한정은 효력을 잃는다. 군벌과 관료주의가 없다는 의미의 앵글로색슨적 “자유”를 — 전 세계를 통틀어 — 가장 크게, 그리고 마지막까지 대표하던 영국과 미국도, 모든 것을 자기 아래 굴복시키고 모든 것을 짓누르는 관료적·군사적 기관들의 전 유럽적인 더럽고 피비린내 나는 늪에 완전히 굴러떨어졌다. 지금은 영국에서도 미국에서도 “모든 진정한 인민혁명의 전제 조건”은 “기성”(그곳에서 1914~1917년에 “유럽적”, 전 제국주의적 완성도로 만들어진) “국가 기계”의 분쇄, 파괴다.

둘째, 관료적·군사적 국가 기계의 파괴가 “모든 진정한 인민혁명의 전제 조건”이라는 마르크스의 더없이 깊은 지적은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이 “인민”혁명이라는 개념은 마르크스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이상해 보인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자로 여겨지고 싶어 하는 스트루베의 추종자들, 곧 러시아의 플레하노프파와 멘셰비키는 마르크스의 이런 표현을 “말실수”라고 선언할지도 모른다. 그들은 마르크스주의를 너무나 빈약한 자유주의적 왜곡으로 끌어내린 나머지,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대립 말고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으며, 그나마 이 대립도 더없이 생기 없게 이해한다.

20세기의 혁명들을 예로 들어 보면, 포르투갈 혁명과 터키 혁명은 물론 부르주아 혁명으로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둘 가운데 어느 것도 “인민”혁명은 아니다. 두 혁명 어느 쪽에서도 인민 대중, 그 압도적 다수가 자기 자신의 경제적·정치적 요구를 들고 능동적으로, 자립적으로 눈에 띄게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1905~1907년 러시아 부르주아 혁명은, 포르투갈 혁명과 터키 혁명에 때때로 돌아간 것 같은 “눈부신” 성공은 없었지만, 의심할 여지 없이 “진정한 인민”혁명이었다. 인민 대중, 그 다수, 억압과 착취에 짓눌린 가장 깊은 사회적 “밑바닥”이 자립적으로 일어섰고, 혁명의 전 과정에 자기 요구의 흔적을, 파괴되어 가는 낡은 사회 대신 새 사회를 자기 방식으로 건설하려는 자기 시도의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1871년 유럽 대륙에서는 어느 나라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가 인민의 다수를 이루지 못했다. 실제로 다수를 운동에 끌어들이는 “인민”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을 함께 포괄할 때에만 그런 혁명이 될 수 있었다. 그때는 이 두 계급이 “인민”을 이루었다. 두 계급은 “관료적·군사적 국가 기계”가 그들을 억압하고 짓누르고 착취한다는 점에서 하나로 묶여 있다. 이 기계를 분쇄하는 것, 그것을 부숴 버리는 것 — 이것이 “인민”, 그 다수, 곧 노동자와 농민 다수의 진정한 이익이며, 이것이 가장 가난한 농민과 프롤레타리아의 자유로운 동맹의 “전제 조건”이다. 그리고 이런 동맹 없이는 민주주의가 굳건할 수 없고 사회주의적 개조도 불가능하다.

알려져 있듯이 파리 코뮌은 바로 이런 동맹을 향해 길을 뚫고 나아가고 있었으나, 안팎의 여러 원인 때문에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진정한 인민혁명”을 말하면서, 소부르주아지의 특성을 조금도 잊지 않으면서도(그는 이에 대해 많이, 자주 말했다), 1871년 유럽 대륙 대부분 나라의 실제 계급 관계를 더없이 엄밀하게 고려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그는 국가 기계의 “분쇄”가 노동자와 농민 모두의 이익이 요구하는 일이며, 그것이 그들을 하나로 묶고, 그들 앞에 “기생충”을 제거하고 그것을 무언가 새로운 것으로 대체한다는 공동의 과제를 놓는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정확히 무엇으로 대체하는가?

2. 분쇄된 국가 기계를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

이 물음에 마르크스는 1847년 『공산당 선언』에서 아직 완전히 추상적인 답을 주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과제는 가리키지만 그 해결 방법은 가리키지 않는 답이었다.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조직하는 것”,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것”으로 대체한다는 것 — 이것이 『공산당 선언』의 답이었다.

마르크스는 유토피아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지배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이 조직이 어떤 구체적 형태를 띠게 될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이 조직이 가장 완전하고 일관된 “민주주의의 쟁취”와 결합될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을 대중운동의 경험에서 기다렸다.

코뮌의 경험이 아무리 작았다 해도, 마르크스는 『프랑스 내전』에서 그것을 더없이 주의 깊게 분석한다. 이 저작의 가장 중요한 대목들을 인용하자.

19세기에는 중세에서 유래한 “상비군, 경찰, 관료제, 성직자, 재판관 신분이라는 어디에나 있는 기관들을 갖춘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이 발전했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 적대가 발전함에 따라 “국가권력은 점점 더 노동을 억압하기 위한 공적 권력의 성격, 계급 지배 기계의 성격을 띠어 갔다. 계급투쟁의 일정한 전진을 뜻하는 혁명이 있을 때마다 국가권력의 순전히 억압적인 성격은 점점 더 공공연하게 겉으로 드러난다”. 1848~1849년 혁명 뒤에 국가권력은 “노동에 맞선 자본의 전쟁의 국민적 무기”가 된다. 제2제정은 이것을 굳힌다.

“제정의 정반대가 코뮌이었다.” “코뮌은” “계급 지배의 군주제적 형태뿐 아니라 계급 지배 자체를 제거해야 했던 그런 공화국”의 “일정한 형태였다…”

이 프롤레타리아적, 사회주의적 공화국의 “일정한” 형태는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코뮌이 만들기 시작한 국가는 어떤 것이었는가?

“…코뮌의 첫 번째 포고는 상비군을 폐기하고 그것을 무장한 인민으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이 요구는 지금 사회주의 정당이라고 불리고 싶어 하는 모든 정당의 강령에 들어 있다. 그러나 그들의 강령이 얼마나 값어치가 있는지는 우리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의 행동이 가장 잘 보여 준다. 그들은 바로 2월 27일 혁명 뒤에 이 요구를 실행하기를 실제로 거부했다!

“…코뮌은 파리 여러 구에서 보통선거권으로 뽑힌 시 의원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책임을 졌고 언제든 소환될 수 있었다. 그들의 다수는 말할 것도 없이 노동자이거나 노동계급의 공인된 대표자였다…

…지금까지 중앙정부의 도구였던 경찰은 곧바로 모든 정치적 기능을 빼앗기고, 언제든 소환될 수 있는 코뮌의 책임 있는 기관으로 바뀌었다… 다른 모든 행정 부문의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코뮌 의원들부터 시작해 위에서 아래까지 공무는 노동자의 임금을 받고 수행되어야 했다. 고위 국가 관리들에게 주던 모든 특권과 교제비는 이 관직들과 함께 사라졌다… 옛 정부의 물질적 권력의 도구인 상비군과 경찰을 없앤 뒤, 코뮌은 곧바로 정신적 억압의 도구, 곧 사제들의 힘을 분쇄하는 일에 착수했다… 재판관들은 겉보기의 독립성을 잃었다… 그들은 앞으로 공개적으로 선출되고, 책임을 지며, 소환될 수 있어야 했다…”

이처럼 코뮌은 분쇄된 국가 기계를 겉보기에는 “단지” 더 완전한 민주주의로 대체한 것 같다. 상비군의 폐기, 모든 공직자의 완전한 선출제와 소환제가 그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 “단지”는 어떤 기관들을 원칙적으로 다른 종류의 기관들로 바꾸는 거대한 대체를 뜻한다. 여기서 바로 “양의 질로의 전화”의 한 사례를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한 가장 완전하고 일관되게 실행된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국가(=특정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특수한 권력)에서 더는 본래 의미의 국가가 아닌 어떤 것으로 바뀐다.

부르주아지와 그 저항을 억압하는 일은 여전히 필요하다. 코뮌에는 이 일이 특히 필요했고, 코뮌이 패배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이 일을 충분히 단호하게 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그러나 여기서 억압하는 기관은 이미 주민의 다수이지, 노예제에서도 농노제에서도 임금 노예제에서도 언제나 그랬듯이 소수가 아니다. 그리고 인민 다수가 스스로 자기 억압자들을 억압하는 이상, 억압을 위한 “특수한 권력”은 이제 필요 없다! 이런 의미에서 국가는 사멸하기 시작한다. 특권적 소수의 특수한 기관들(특권적 관리 집단, 상비군 지휘부) 대신 다수 자신이 이 일을 직접 수행할 수 있다. 그리고 국가권력의 기능 수행 자체가 전 인민적인 것이 될수록 이 권력의 필요성은 그만큼 줄어든다.

이 점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마르크스가 강조하는 코뮌의 조치, 곧 모든 교제비와 관리들의 모든 금전적 특권을 폐지하고 국가의 모든 공직자의 보수를 “노동자의 임금” 수준으로 낮춘 조치다. 바로 여기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억압자의 민주주의에서 피억압 계급의 민주주의로, 특정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특수한 권력”으로서의 국가에서 인민 다수, 곧 노동자와 농민의 전체 권력에 의한 억압자 억압으로의 전환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 특히 뚜렷하고 — 국가 문제에서는 아마 가장 중요한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의 교훈이 가장 많이 잊혔다! 대중적인 해설서들에서는 —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은데 — 이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마치 시대에 뒤떨어진 “순진함”에 대해서처럼 이에 대해서는 입을 다무는 것이 “관례”다. 꼭 기독교도들이 국교의 지위를 얻고 나서, 민주적·혁명적 정신을 지녔던 초기 기독교의 “순진함”을 “잊어버린” 것과 같다.

고위 국가 관리들의 보수를 낮추는 것은 “그저” 순진하고 원시적인 민주주의의 요구처럼 보인다. 최신 기회주의의 “창시자” 가운데 하나인 전 사회민주주의자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은 “원시적” 민주주의에 대한 속된 부르주아적 조롱을 되풀이하는 연습을 여러 번 했다. 모든 기회주의자처럼, 지금의 카우츠키주의자들처럼, 그는 다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첫째,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원시적” 민주주의로의 어느 정도의 “복귀” 없이는 불가능하다(그러지 않고서 어떻게 주민 다수가, 나아가 주민 전체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국가 기능을 수행하는 데로 넘어갈 수 있겠는가?). 둘째, 자본주의와 자본주의 문화를 토대로 한 “원시적 민주주의”는 원시시대나 자본주의 이전 시대의 원시적 민주주의와 같지 않다. 자본주의 문화는 대규모 생산, 공장, 철도, 우편, 전화 따위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 토대 위에서 낡은 “국가권력”의 기능 가운데 압도적 다수는 아주 단순해졌고, 등록, 기록, 점검이라는 아주 간단한 작업으로 환원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이 기능들은 글을 아는 모든 사람이 충분히 해낼 수 있게 될 것이고, 보통의 “노동자의 임금”을 받고 충분히 수행할 수 있게 될 것이며, 이 기능들에서 특권적이고 “상전 노릇 하는” 것의 그림자를 모조리 걷어 낼 수 있다(또 걷어 내야 한다).

모든 공직자를 예외 없이 완전한 선출제로 뽑고 언제든 소환할 수 있게 하는 것, 그들의 봉급을 보통의 “노동자의 임금”으로 낮추는 것, 이런 단순하고 “자명한” 민주주의적 조치들은 노동자와 농민 다수의 이익을 완전히 하나로 묶는 동시에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 이어지는 다리 구실을 한다. 이 조치들은 사회의 국가적, 순전히 정치적인 개조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물론 이 조치들은 실행되고 있거나 준비되고 있는 “수탈자의 수탈”, 곧 생산수단에 대한 자본주의적 사적 소유를 사회적 소유로 옮기는 일과 결부될 때에만 온전한 의미와 의의를 얻는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코뮌은 가장 큰 두 지출 항목인 군대와 관리 집단을 폐기함으로써 모든 부르주아 혁명의 구호인 값싼 정부를 진실로 만들었다.”

농민층에서는, 소부르주아지의 다른 층에서와 마찬가지로, 극소수만이 부르주아적 의미에서 “위로 올라가고” “출세한다”. 곧 유복한 사람, 부르주아가 되거나, 안정되고 특권적인 관리가 된다. 농민층이 있는 모든 자본주의 나라(그리고 그런 자본주의 나라가 대다수다)에서 농민층의 압도적 다수는 정부에게 억압받으며 정부의 타도를 갈망하고, “값싼” 정부를 갈망한다.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뿐이며, 프롤레타리아트는 이것을 실현하면서 동시에 국가의 사회주의적 개조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간다.

3. 의회주의의 폐기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코뮌은 의회식 단체가 아니라 일하는 단체, 곧 입법과 법 집행을 동시에 하는 단체여야 했다…

…지배계급의 어느 구성원이 의회에서 인민을 대표하고 억압할지(ver- und zertreten)를 3년이나 6년에 한 번 결정하는 대신에, 보통선거권은 코뮌들로 조직된 인민에게 봉사하여 그들이 자기 사업을 위해 노동자, 감독, 회계원을 찾아내게 해야 했다. 개인적 선거권이 다른 모든 고용주에게 이 목적으로 봉사하듯이.”

1871년에 나온 의회주의에 대한 이 놀라운 비판도 지금은 사회배외주의와 기회주의의 지배 덕분에 마르크스주의의 “잊힌 말들”에 속한다. 직업적인 장관과 의원들,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배신자들, 오늘날의 “실무형” 사회주의자들은 의회주의 비판을 송두리째 무정부주의자들에게 넘겨주었고, 이 놀랍도록 현명한 근거에서 의회주의에 대한 모든 비판을 “무정부주의”라고 선언했다!! “선진” 의회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샤이데만, 다비트, 레기엔, 상바, 르노델, 헨더슨, 반데르벨데, 스타우닝, 브란팅, 비솔라티 일당 같은 “사회주의자들”을 보고 역겨움을 느끼면서, 무정부주의적 생디칼리슴이 기회주의의 친형제였는데도 점점 더 자주 그쪽에 공감을 보낸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 혁명적 변증법은 결코 플레하노프, 카우츠키 등이 만들어 버린 것 같은 공허한 유행 문구, 장신구가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부르주아 의회주의라는 “돼지우리”조차, 특히 혁명적 정세가 분명히 없을 때조차 이용할 줄 모른다는 이유로 무정부주의와 가차 없이 결별할 줄 알았다 —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의회주의에 대한 진정으로 혁명적·프롤레타리아적인 비판을 할 줄도 알았다.

지배계급의 어느 구성원이 의회에서 인민을 억압하고 짓밟을지를 몇 해에 한 번 결정하는 것 — 이것이 의회식 입헌군주제에서만이 아니라 가장 민주적인 공화국에서도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진짜 본질이다.

그러나 국가 문제를 제기한다면, 의회주의를 국가 기관의 하나로 보고 이 영역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는 과제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의회주의에서 벗어날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의회주의 없이 어떻게 해 나갈 수 있는가?

거듭거듭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코뮌 연구에 근거한 마르크스의 교훈은 너무나 잊혀서, 오늘날의 “사회민주주의자”(오늘날의 사회주의 배신자라고 읽으라)는 무정부주의적 비판이나 반동적 비판 말고 다른 의회주의 비판은 그야말로 이해하지 못한다.

의회주의에서 벗어날 출구는 물론 대의 기관과 선출제를 폐기하는 데 있지 않고, 대의 기관을 수다 가게에서 “일하는” 기관으로 바꾸는 데 있다. “코뮌은 의회식 기관이 아니라 일하는 기관, 입법과 법 집행을 동시에 하는 기관이어야 했다.”

“의회식이 아니라 일하는” 기관이라는 이 말은 오늘날의 의원들과 사회민주주의의 의회 “애완견들”의 정곡을 찌른다! 미국에서 스위스까지, 프랑스에서 영국, 노르웨이 등까지 어느 의회 국가든 보라. 진짜 “국가” 일은 무대 뒤에서 이루어지고, 부처와 관청과 참모부가 수행한다. 의회에서는 “서민”을 속이려는 특별한 목적으로 수다만 떤다. 이것은 너무나 사실이어서, 부르주아 민주공화국인 러시아 공화국에서조차 진짜 의회를 미처 만들기도 전에 의회주의의 이 모든 죄악이 곧바로 드러났다. 스코벨레프와 체레텔리, 체르노프와 압크센티예프 같은 썩은 속물 근성의 영웅들은 소비에트마저 가장 추잡한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본을 따서 더럽혔고, 그것을 공허한 수다 가게로 바꾸어 놓았다. 소비에트에서 “사회주의자” 장관 나리들은 남을 쉽게 믿는 농사꾼들을 미사여구와 결의문으로 속인다. 정부에서는 끝없는 카드리유가 벌어진다. 한편으로는 수입 좋고 명예로운 자리라는 “파이 곁에”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를 되도록 많이 차례로 앉히기 위해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민의 “주의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다. 그리고 관청과 참모부에서는 “국가” 일을 “한다”!

집권당인 “사회주의자-혁명가”당의 기관지 《인민의 대의》는 최근 사설에서 — “모두”가 정치적 매춘에 종사하는 “상류 사회” 사람들 특유의 비할 데 없는 솔직함으로 — “사회주의자”(이런 말을 써서 미안하다!)의 차지가 된 부처들에서조차 관리 기구 전체가 본질적으로 예전 그대로 남아 있고 예전 방식대로 돌아가며 혁명적 시도를 아주 “자유롭게” 사보타주한다고 털어놓았다! 이런 고백이 없더라도,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가 정부에 참여한 실제 역사가 이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여기서 특징적인 것은 다만, 카데트와 장관 자리를 함께하면서 체르노프, 루사노프, 젠지노프 나리들을 비롯한 《인민의 대의》 편집자들이 염치를 너무나 잃은 나머지, “자기네” 부처에서는 모든 것이 예전 그대로라는 것을 사소한 일인 양 얼굴도 붉히지 않고 공공연히 이야기하기를 꺼리지 않는다는 점뿐이다!! 시골 이바누시카들을 속이기 위한 혁명적·민주적 문구, 자본가들을 “흡족하게 하기” 위한 관료적 사무 지연 — 이것이 “정직한” 연립의 본질이다.

코뮌은 부르주아 사회의 매수되고 썩어 빠진 의회주의를, 판단과 토론의 자유가 기만으로 타락하지 않는 기관들로 대체한다. 의원들이 스스로 일하고, 스스로 자기 법을 집행하고, 그 결과가 현실에서 어떻게 되는지 스스로 점검하고, 자기 선거인들 앞에서 스스로 직접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의 기관은 남는다. 그러나 특수한 체계로서의, 입법 노동과 집행 노동의 분업으로서의, 의원들의 특권적 지위로서의 의회주의는 여기에 없다. 우리는 대의 기관 없는 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조차 상상할 수 없다. 그러나 의회주의 없는 민주주의는 상상할 수 있고 또 상상해야 한다.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비판이 우리에게 빈말이 아니라면, 부르주아지의 지배를 타도하려는 열망이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 샤이데만과 레기엔, 상바와 반데르벨데 같은 자들에게서처럼 노동자의 표를 낚기 위한 “선거용” 문구가 아니라 우리의 진지하고 진심 어린 열망이라면 말이다.

아주 교훈적인 것은, 코뮌에도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에도 필요한 그런 관리 집단의 기능을 말하면서 마르크스가 비교 대상으로 “다른 모든 고용주”의 고용인들, 곧 “노동자, 감독, 회계원”을 둔 보통의 자본주의 기업을 든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에게는 “새” 사회를 지어내거나 공상해 낸다는 의미의 유토피아주의가 조금도 없다. 아니, 그는 새 사회가 낡은 사회에서 태어나는 것, 낡은 사회에서 새 사회로 넘어가는 이행 형태들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연구한다. 그는 대중적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실제 경험을 가져와 거기서 실천적 교훈을 끌어내려고 애쓴다. 그는 코뮌에게서 “배운다”. 모든 위대한 혁명적 사상가가 피억압 계급의 위대한 운동의 경험에서 배우기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 운동을 결코 현학적인 “훈계”(“무기를 들지 말았어야 했다”는 플레하노프식 훈계나 “계급은 스스로 자제해야 한다”는 체레텔리식 훈계 같은 것)로 대하지 않았듯이.

관리 집단을 단번에, 모든 곳에서, 완전히 폐기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유토피아다. 그러나 낡은 관리 기계를 단번에 분쇄하고, 모든 관리 집단을 점차 없애 나갈 수 있게 하는 새 기계를 곧바로 건설하기 시작하는 것, 이것은 유토피아가 아니다. 이것은 코뮌의 경험이며,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직접적이고 당면한 과제다.

자본주의는 “국가” 행정의 기능을 단순하게 만들고, “상전 노릇”을 내던지고 모든 일을 프롤레타리아(지배계급으로서의)의 조직으로 귀착시킬 수 있게 한다. 이 조직이 사회 전체의 이름으로 “노동자, 감독, 회계원”을 고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유토피아주의자가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단번에 모든 행정, 모든 복종 없이 지낼 수 있을지 “꿈꾸지” 않는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과제를 이해하지 못한 데서 나온 이런 무정부주의적 꿈은 마르크스주의와 근본적으로 거리가 멀며, 실제로는 사람들이 달라질 때까지 사회주의 혁명을 미루는 구실을 할 뿐이다. 아니, 우리는 지금 그대로의 사람들, 곧 복종 없이, 통제 없이, “감독과 회계원” 없이는 지낼 수 없는 사람들과 함께 사회주의 혁명을 하려 한다.

그러나 복종해야 할 대상은 모든 피착취자와 근로자의 무장한 전위, 곧 프롤레타리아트다. 국가 관리들 특유의 “상전 노릇”은 “감독과 회계원”의 단순한 기능, 곧 지금도 도시민 일반의 발달 수준에 충분히 맞고 “노동자의 임금”을 받고 충분히 수행할 수 있는 기능으로 곧바로, 오늘에서 내일 사이에 대체하기 시작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자본주의가 이미 만들어 놓은 것에서 출발하여 대규모 생산을 조직하자. 우리 노동자들 자신이 자기 노동 경험에 의지하여, 무장한 노동자들의 국가권력이 뒷받침하는 가장 엄격한 철의 규율을 세우자. 국가 관리들을 우리가 맡긴 일을 수행하는 단순한 집행자, 곧 책임을 지고 소환될 수 있으며 보수를 적게 받는 “감독과 회계원”(물론 온갖 종류, 유형, 등급의 기술자들과 함께)의 역할로 끌어내리자 — 이것이 우리의 프롤레타리아적 과제이며,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수행할 때 바로 이것에서부터 시작할 수 있고 또 시작해야 한다. 대규모 생산을 토대로 한 이런 시작은 저절로 모든 관리 집단의 점진적 “사멸”로 이어지고, 이런 질서 — 따옴표 없는 질서, 임금 노예제와 닮지 않은 질서 — 를 점차 만들어 나가게 된다. 그 질서에서는 점점 더 단순해지는 감독과 회계 보고의 기능을 모든 사람이 차례로 수행하게 되고, 그 기능은 이어서 습관이 되며, 마침내 특수한 계층 사람들의 특수한 기능으로서는 떨어져 나갈 것이다.

지난 세기 70년대의 한 재치 있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는 우편을 사회주의 경제의 본보기라고 불렀다. 아주 옳은 말이다. 지금 우편은 국가자본주의적 독점의 유형으로 조직된 경제다. 제국주의는 모든 트러스트를 점차 이런 유형의 조직으로 바꾸어 간다. 일에 파묻히고 굶주리는 “평범한” 근로자들 위에는 여기서도 똑같은 부르주아 관료제가 서 있다. 그러나 사회적 경영의 메커니즘은 여기에 이미 마련되어 있다. 자본가들을 타도하고, 무장한 노동자들의 철의 손으로 이 착취자들의 저항을 분쇄하고, 현대 국가의 관료 기계를 분쇄하라. 그러면 우리 앞에는 “기생충”에서 해방된, 기술적으로 고도로 갖추어진 메커니즘이 있다. 단결한 노동자들 자신이 기술자, 감독, 회계원을 고용하고, 그들 모두의 노동에 대해, 모든 “국가” 관리 일반에게 하듯이 노동자의 임금을 지불하면서 이 메커니즘을 충분히 가동할 수 있다. 이것이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과제, 모든 트러스트에 대해 곧바로 실행할 수 있는 과제, 근로자들을 착취에서 해방하는 과제, 코뮌이 (특히 국가 건설 분야에서) 이미 실천적으로 시작한 경험을 고려하는 과제다.

모든 국민경제를 우편처럼 조직하여, 기술자, 감독, 회계원이 모든 공직자와 마찬가지로 무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통제와 지도 아래 “노동자의 임금”보다 많지 않은 봉급을 받게 하는 것 — 이것이 우리의 당면 목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국가, 바로 이런 경제적 토대 위의 국가다. 의회주의의 폐기와 대의 기관의 보존이 가져다줄 것이 바로 이것이며, 근로 계급들을 부르주아지에 의한 이 기관들의 매춘화에서 해방할 것이 바로 이것이다.

4. 국민 통일의 조직

“…코뮌이 더 다듬을 시간을 갖지 못한 전국 조직의 짧은 개요에는, 코뮌이… 가장 작은 마을의 정치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아주 분명히 적혀 있다”… 코뮌들은 또 파리에 보낼 “전국 대표단”도 선출하게 되어 있었다.

“…그때도 여전히 중앙정부에 남게 될 소수의, 그러나 매우 중요한 기능은 폐지되어서는 안 되었고 — 그렇게 주장하는 것은 의식적인 위조였다 — 코뮌의, 곧 엄격히 책임을 지는 관리들에게 넘겨져야 했다…

…국민의 통일은 폐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코뮌 제도를 통해 조직되어야 했다. 국민의 통일은, 이 통일의 화신으로 자처하면서도 국민에게서 독립하여 국민 위에 서려 했던 국가권력을 폐기함으로써 현실이 되어야 했다. 실제로 이 국가권력은 국민의 몸에 붙은 기생적 혹에 지나지 않았다… 과제는 낡은 정부 권력의 순전히 억압적인 기관들을 잘라 내고, 그 정당한 기능들은 사회 위에 서겠다고 나서는 권력에게서 빼앗아 사회의 책임 있는 봉사자들에게 넘기는 데 있었다.”

현대 사회민주주의의 기회주의자들이 마르크스의 이 논의를 얼마나 이해하지 못했는지 — 어쩌면 이해하려 들지 않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 는 배교자 베른슈타인의, 헤로스트라토스처럼 악명을 떨친 책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주의의 과제』가 가장 잘 보여 준다. 바로 위에 인용한 마르크스의 말을 두고 베른슈타인은, 이 강령이 “그 정치적 내용에서 모든 본질적 특징에 걸쳐 프루동의 연방주의와 아주 큰 유사성을 보인다… 마르크스와 ‘소부르주아’ 프루동 사이에 다른 모든 차이가 있음에도(베른슈타인은 ‘소부르주아’라는 말을 따옴표 안에 넣는데, 그의 생각으로는 이 따옴표가 반어적이어야 한다) 이 점들에서 두 사람의 사고 과정은 더할 나위 없이 가깝다”고 썼다. 물론 지방자치체의 의의는 커지고 있다고 베른슈타인은 이어서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마르크스와 프루동이 생각하는 것처럼 현대 국가들을 그렇게 철폐(Auflösung — 글자 그대로는 해산, 용해)하고 그 조직을 그렇게 완전히 변경(Umwandlung — 전복)하는 것 — 곧 주나 지방 의회의 대표들로 국민의회를 구성하고, 이 주나 지방 의회는 다시 코뮌들의 대표들로 구성되어, 국민 대표 기관의 예전 형태 전체가 완전히 사라지게 하는 것 — 이 민주주의의 첫째 과제인지는 의심스럽다”(베른슈타인, 『전제』, 1899년 독일어판 134쪽과 136쪽).

이것은 그야말로 괴물 같은 일이다. “기생충인 국가권력의 폐기”에 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프루동의 연방주의와 뒤섞다니! 그러나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여기서 말하는 것이 중앙집권제에 맞선 연방주의가 전혀 아니라, 모든 부르주아 나라에 존재하는 낡은 부르주아 국가 기계의 분쇄라는 것은 기회주의자의 머리에 떠오르지조차 않기 때문이다.

기회주의자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자기 주위에서, 소시민적 속물 근성과 “개량주의적” 정체의 환경에서 보는 것, 바로 “지방자치체”뿐이다! 기회주의자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에 대해 생각하는 법조차 잊어버렸다.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점에서는 아무도 베른슈타인과 논쟁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이 베른슈타인을 반박했다. 특히 러시아 문헌에서는 플레하노프가, 유럽 문헌에서는 카우츠키가 그랬다. 그러나 둘 가운데 누구도 베른슈타인의 이 마르크스 왜곡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기회주의자는 혁명적으로 사고하고 혁명에 대해 숙고하는 법을 너무나 잊어버려서, 마르크스에게 “연방주의”를 덮어씌우며 그를 무정부주의의 창시자 프루동과 혼동한다. 그런데 정통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고 싶어 하고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학설을 지키고 싶어 하는 카우츠키와 플레하노프는 이에 대해 침묵한다! 여기에 마르크스주의와 무정부주의의 차이에 관한 견해를 극도로 속류화하는 일의 뿌리 가운데 하나가 있다. 이런 속류화는 카우츠키주의자에게도 기회주의자에게도 공통된 것이며, 우리는 이에 대해 앞으로 더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위에 인용한, 코뮌의 경험에 관한 마르크스의 논의에는 연방주의의 흔적조차 없다. 마르크스는 기회주의자 베른슈타인이 보지 못하는 바로 그 점에서 프루동과 일치한다. 마르크스는 베른슈타인이 둘의 유사성을 보는 바로 그 점에서 프루동과 갈라선다.

마르크스가 프루동과 일치하는 것은 두 사람 모두 현대 국가 기계의 “분쇄”를 지지한다는 점이다. 마르크스주의와 무정부주의(프루동과도, 바쿠닌과도)의 이 유사성을 기회주의자들도 카우츠키주의자들도 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이 이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떠났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바로 연방주의 문제에서 프루동과도 바쿠닌과도 갈라선다(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말할 것도 없다). 연방주의는 무정부주의의 소부르주아적 견해에서 원칙적으로 흘러나온다. 마르크스는 중앙집권주의자다. 그리고 위에 인용한 그의 논의에는 중앙집권제에서 벗어난 데가 조금도 없다. 국가에 대한 소시민적 “미신적 믿음”으로 가득 찬 사람들만이 부르주아 국가 기계의 폐기를 중앙집권제의 폐기로 여길 수 있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트와 가장 가난한 농민층이 국가권력을 손에 쥐고, 코뮌별로 아주 자유롭게 조직되고, 자본에 타격을 가하고 자본가들의 저항을 파괴하고 철도, 공장, 토지 따위의 사적 소유를 국민 전체, 사회 전체에 넘기는 데서 모든 코뮌의 행동을 하나로 묶는다면, 그것은 중앙집권제가 아니겠는가? 그것은 가장 일관된 민주적 중앙집권제가 아니겠는가? 그것도 프롤레타리아적 중앙집권제가 아니겠는가?

베른슈타인의 머리에는, 자발적인 중앙집권제, 코뮌들이 하나의 국민으로 자발적으로 결합하는 것, 부르주아 지배와 부르주아 국가 기계를 파괴하는 일에서 프롤레타리아 코뮌들이 자발적으로 융합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생각이 아예 떠오를 수가 없다. 모든 속물과 마찬가지로 베른슈타인에게 중앙집권제란 오직 위에서부터, 오직 관리 집단과 군벌만이 강요하고 유지할 수 있는 무엇으로 그려진다.

마르크스는 마치 자기 견해가 왜곡될 가능성을 내다보기라도 한 듯이, 코뮌이 국민의 통일을 폐기하고 중앙 권력을 폐지하려 했다는 비난이 의식적인 위조라는 점을 일부러 강조한다. 마르크스는 의식적이고 민주적이며 프롤레타리아적인 중앙집권제를 부르주아적이고 군사적이며 관료적인 중앙집권제와 맞세우려고 “국민의 통일을 조직한다”는 표현을 일부러 쓴다.

그러나… 듣지 않으려는 자는 어떤 귀머거리보다 더 나쁘다. 그리고 현대 사회민주주의의 기회주의자들은 바로 국가권력의 폐기에 대해, 기생충을 잘라 내는 일에 대해 듣고 싶어 하지 않는다.

5. 기생충인 국가의 폐기

우리는 이미 마르크스의 해당 발언을 인용했는데, 이것을 보충해야 한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썼다. “…새로운 역사적 창조물이 흔히 겪는 운명은, 새 기관들이 조금이라도 닮은 낡은, 심지어 이미 수명을 다한 사회생활 형태들의 닮은꼴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현대 국가권력을 분쇄하는(bricht — 깨부순다) 이 새로운 코뮌도 중세 코뮌의 부활로… 작은 국가들의 연합으로(몽테스키외, 지롱드파)… 과도한 중앙집권화에 맞선 낡은 투쟁의 과장된 형태로 여겨졌다…

…코뮌 제도는, 지금까지 사회를 먹고 살며 사회의 자유로운 움직임을 가로막는 기생적 혹인 ‘국가’가 삼켜 온 모든 힘을 사회라는 몸에 돌려주었을 것이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프랑스의 부흥이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코뮌 제도는 농촌 생산자들을 각 지방 중심 도시들의 정신적 지도 아래 두었을 것이고, 거기서 도시 노동자들이라는 모습으로 그들 이익의 자연스러운 대표자를 그들에게 보장했을 것이다. 코뮌의 존재 자체가 지방자치를 당연한 것으로 가져왔지만, 그것은 더 이상 이제 쓸모없어지는 국가권력에 대한 평형추로서의 지방자치가 아니었다.”

“기생적 혹”이었던 “국가권력의 폐기”, 그것을 “잘라 내는 것”, 그것을 “파괴하는 것”, “국가권력은 이제 쓸모없어진다” — 마르크스는 코뮌의 경험을 평가하고 분석하면서 국가에 대해 이런 표현으로 말했다.

이 모든 것은 거의 반세기 전에 쓰였다. 그런데 지금은 왜곡되지 않은 마르크스주의를 광범한 대중의 의식에 전하려면 마치 발굴 작업이라도 해야 할 형편이다. 마르크스가 겪은 마지막 위대한 혁명을 관찰하여 끌어낸 결론들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의 다음 위대한 혁명들의 때가 다가왔을 때 잊혔다.

“…코뮌이 불러일으킨 해석의 다양함과 코뮌에서 자기 표현을 찾은 이해관계의 다양함은, 이전의 모든 정부 형태가 본질적으로 억압적이었던 데 반해 코뮌은 더없이 유연한 정치형태였음을 증명한다. 코뮌의 진짜 비밀은 이것이었다. 코뮌은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였고, 생산하는 계급이 전유하는 계급에 맞서 싸운 투쟁의 결과였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이루어질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였다…

이 마지막 조건이 없었다면 코뮌 제도는 불가능한 것이자 기만이었을 것이다…”

유토피아주의자들은 사회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이루어져야 할 정치형태를 “발견하는” 일에 몰두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정치형태 문제 일반을 외면했다. 현대 사회민주주의의 기회주의자들은 의회제 민주주의 국가라는 부르주아적 정치형태를 넘어설 수 없는 한계로 받아들였고, 이 “본보기” 앞에 기도하느라 이마를 찧었으며, 이 형태들을 분쇄하려는 모든 지향을 무정부주의라고 선언했다.

마르크스는 사회주의와 정치투쟁의 역사 전체에서, 국가는 사라질 수밖에 없으며 국가가 사라지는 이행 형태(국가에서 비국가로의 이행)는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프롤레타리아트”가 될 것이라는 결론을 끌어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이 미래의 정치형태를 발견하는 일에는 나서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 역사를 정확히 관찰하고 분석하는 데, 그리고 1851년이 이끌어 낸 결론, 곧 일이 부르주아 국가 기계의 파괴로 다가가고 있다는 결론에 그쳤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중적 혁명운동이 터져 나왔을 때, 마르크스는 이 운동이 실패했는데도, 짧게 끝났고 눈에 띄게 약했는데도, 이 운동이 어떤 형태를 발견했는지 연구하기 시작했다.

코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마침내 발견한” 형태, 노동의 경제적 해방이 이루어질 수 있는 형태다.

코뮌은 부르주아 국가 기계를 분쇄하려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첫 시도이며, 분쇄된 것을 대체할 수 있고 또 대체해야 하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형태다.

우리는 앞으로의 서술에서 1905년과 1917년의 러시아 혁명들이 다른 정세에서, 다른 조건 아래 코뮌의 사업을 이어 가며 마르크스의 천재적인 역사적 분석을 확증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제4장 계속. 엥겔스의 보충 설명

마르크스는 코뮌 경험의 의의라는 문제에서 기본적인 것을 내놓았다. 엥겔스는 같은 주제로 여러 번 되돌아가 마르크스의 분석과 결론을 설명했는데, 때로는 문제의 다른 측면들을 아주 힘 있고 뚜렷하게 비추었기 때문에 이 설명들을 따로 자세히 다루지 않을 수 없다.

1. 『주택 문제』

엥겔스는 주택 문제에 관한 저작(1872년)에서 이미 코뮌의 경험을 고려하면서, 국가에 대한 혁명의 과제를 여러 번 다룬다. 흥미로운 것은 이 구체적인 주제에서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지금의 국가와 닮은 특징 — 두 경우 모두 국가를 말할 근거가 되는 특징 — 이,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특징, 곧 국가의 폐기로 넘어가는 이행이 눈에 보이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주택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오늘날의 사회에서 이 문제는 다른 모든 사회문제와 똑같이, 곧 수요와 공급을 경제적으로 차츰 맞추어 가는 방식으로 해결된다. 그런데 이것은 끊임없이 문제를 새로 낳는 해결, 곧 아무런 해결도 되지 못하는 해결이다. 사회혁명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는 때와 장소의 사정에 달려 있을 뿐 아니라, 훨씬 더 멀리 나아가는 문제들과도 이어져 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도시와 농촌의 대립을 폐기하는 문제다. 우리는 미래 사회 체제에 관한 유토피아적 체계를 짓는 일을 하지 않으므로, 이 문제를 붙들고 있는 것은 쓸데없는 일 이상일 것이다. 확실한 것은 하나다. 지금도 대도시에는 주거용 건물이 넉넉해서, 이 건물들을 합리적으로 쓰기만 하면 실제 주거 궁핍을 곧바로 덜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지금의 소유자들을 수용하고, 집 없는 노동자나 지금 너무 비좁은 집에 사는 노동자를 이 집들에 들여야만 실현할 수 있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쟁취하자마자, 공익이 요구하는 이런 조치는 오늘날의 국가가 하는 다른 수용이나 주택 징발만큼이나 쉽게 실행될 것이다.” (1887년 독일어판 22쪽)

여기서는 국가권력 형태의 변화는 다루지 않고 그 활동 내용만 다룬다. 수용과 주택 징발은 지금의 국가의 명령으로도 이루어진다. 프롤레타리아 국가도 형식적인 면에서는 주택을 징발하고 집을 수용하라고 “명령할” 것이다. 그러나 낡은 집행 기구, 곧 부르주아지와 얽힌 관리 집단이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명령을 실행하는 데는 그야말로 쓸모없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근로 인민이 모든 노동 도구, 모든 산업을 실제로 장악하는 것은 프루동주의적 ‘매입’과 정반대라는 점을 확인해 두어야 한다. 매입에서는 개별 노동자가 주택, 농민의 땅뙈기, 노동 도구의 소유자가 된다. 반면 실제 장악에서는 ‘근로 인민’이 집, 공장, 노동 도구의 공동 소유자로 남는다. 이 집, 공장 등을 개인이나 조합이 비용을 치르지 않고 쓰게 하는 일은, 적어도 이행기에는 거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토지 소유의 폐기는 지대의 폐기를 전제하지 않으며, 형태는 바뀌더라도 지대를 사회에 넘기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근로 인민이 모든 노동 도구를 실제로 장악한다고 해서 임대차의 유지가 결코 배제되지는 않는다.” (68쪽)

이 논의에서 건드린 문제, 곧 국가 사멸의 경제적 기초라는 문제는 다음 장에서 살펴보겠다. 엥겔스는 프롤레타리아 국가가 “적어도 이행기에는” 주택을 무상으로 나누어 주는 일이 “거의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아주 조심스럽게 표현한다. 전 인민의 것인 주택을 개별 가족에게 돈을 받고 빌려주려면 그 돈을 거두어야 하고, 일정한 통제도 있어야 하며, 주택 분배에 이런저런 기준도 정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일정한 형태의 국가를 필요로 하지만, 공직자들이 특별히 특권적인 지위를 누리는 특수한 군사·관료 기구는 결코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고 주택을 무상으로 내줄 수 있는 상태로 넘어가는 일은 국가의 완전한 “사멸”과 결부되어 있다.

엥겔스는 블랑키주의자들이 코뮌 뒤에, 코뮌 경험의 영향을 받아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적 입장으로 넘어온 일을 이야기하면서, 지나가는 말로 이 입장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한다.

“…계급 폐지, 그리고 계급과 함께 국가 폐지로 넘어가는 이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적 행동과 그 독재가 필요하다…” (55쪽)

글자 하나하나를 트집 잡는 비평 애호가나 부르주아 “마르크스주의 박멸자”라면 아마 이 “국가 폐지”의 인정과, 앞에서 인용한 『반뒤링』의 대목에서 이런 정식을 무정부주의적이라고 부정한 것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볼 것이다. 기회주의자들이 엥겔스마저 “무정부주의자”로 분류한다 해도 놀랍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사회배외주의자들이 국제주의자들을 무정부주의라고 비난하는 일이 점점 더 흔해지고 있다.

계급 폐지와 함께 국가 폐지도 일어나리라는 것, 마르크스주의는 늘 이렇게 가르쳤다. 『반뒤링』에서 “국가의 사멸”을 말한 널리 알려진 대목은 무정부주의자들이 국가 폐지를 주장한다는 것 자체를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를 “오늘에서 내일 사이에” 폐지할 수 있는 것처럼 설교한다는 것을 비난한다.

지금 지배적인 “사회민주주의” 교리가 국가 폐기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와 무정부주의의 관계를 완전히 왜곡하고 있으므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무정부주의자들과 벌인 한 논쟁을 떠올려 보는 것이 특히 유익하다.

2. 무정부주의자들과의 논쟁

이 논쟁은 1873년의 일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이탈리아의 한 사회주의 논문집에 프루동주의자, 곧 “자치주의자” 또는 “반권위주의자”를 반박하는 글을 실었다. 이 글들은 1913년에야 독일어로 번역되어 《노이에 차이트》에 실렸다.

마르크스는 정치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자들을 비웃으며 이렇게 썼다. “…노동계급의 정치투쟁이 혁명적 형태를 띤다면,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지의 독재 대신 자신들의 혁명적 독재를 세운다면, 그들은 원칙을 모독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셈이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비참하고 조잡한 그날그날의 필요를 채우려고,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분쇄하려고, 무기를 내려놓고 국가를 폐지하는 대신 국가에 혁명적이고 일시적인 형태를 주기 때문이다…” (《노이에 차이트》, 1913~1914년, 제32년차, 제1권, 40쪽)

마르크스가 무정부주의자들을 반박하면서 오로지 반대한 것은 바로 이런 국가 “폐지”였다! 국가가 계급의 소멸과 함께 사라지리라는 것, 또는 계급의 폐지와 함께 폐지되리라는 것에 반대한 것이 결코 아니다. 노동자들이 무기 사용을, 조직된 폭력을, 곧 국가를 포기하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그 국가는 “부르주아지의 저항을 분쇄한다”는 목적에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 무정부주의와 벌인 자기 투쟁의 참뜻이 왜곡되지 않도록 —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필요한 국가의 “혁명적이고 일시적인 형태”를 일부러 강조한다.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국가는 한동안만 필요하다. 우리는 목표로서의 국가 폐지라는 문제에서 무정부주의자들과 조금도 갈라서지 않는다.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계급을 폐기하려면 피억압 계급의 일시적 독재가 필요하듯이, 이 목표에 이르려면 국가권력의 도구, 수단, 방법을 착취자들에게 맞서 일시적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무정부주의자들에 맞서 문제를 가장 날카롭고 가장 분명하게 제기한다. 노동자들은 자본가의 멍에를 벗어 던지면서 “무기를 내려놓아야” 하는가, 아니면 자본가의 저항을 분쇄하려고 그 무기를 자본가에게 겨누어야 하는가? 그런데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 맞서 무기를 체계적으로 쓰는 것, 이것이 국가의 “일시적 형태”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사회민주주의자라면 저마다 스스로 물어보라. 자신은 무정부주의자들과 논쟁하면서 국가 문제를 이렇게 제기했는가? 제2인터내셔널 공식 사회주의 정당들의 압도적 다수는 이 문제를 이렇게 제기했는가?

엥겔스는 같은 생각을 훨씬 더 자세하고 대중적으로 서술한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스스로를 “반권위주의자”라고 부른, 곧 모든 권위, 모든 복종, 모든 권력을 부정한 프루동주의자들의 뒤죽박죽인 생각을 비웃는다. 공장, 철도, 먼바다의 배를 보라 — 엥겔스는 말한다 — 기계 사용과 많은 사람의 계획적 협업에 바탕을 둔 이 복잡한 기술적 시설들 가운데 어느 것도 일정한 복종 없이는, 따라서 일정한 권위나 권력 없이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엥겔스는 이렇게 쓴다. “…내가 가장 지독한 반권위주의자들에게 이런 논거를 내밀면, 그들은 내게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그것은 맞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우리가 대표들에게 주는 권위가 아니라 일정한 위임이다.’ 이 사람들은 어떤 것의 이름을 바꾸면 그것 자체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엥겔스는 이렇게 권위와 자치가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 그것들이 적용되는 범위는 사회 발전의 단계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 그것들을 절대적인 것으로 여기는 것은 어리석다는 것을 보여 주고, 기계와 대규모 생산이 적용되는 범위가 점점 넓어진다는 것을 덧붙인 다음, 권위에 관한 일반적인 논의에서 국가 문제로 넘어간다.

그는 이렇게 쓴다. “…자치주의자들이 미래의 사회조직은 생산 조건이 불가피하게 정하는 한계 안에서만 권위를 허용하리라는 것만 말하려 했다면, 그들과 합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권위를 필요하게 만드는 모든 사실에 눈을 감고, 낱말을 상대로 열을 올려 싸운다.

반권위주의자들은 왜 정치적 권위, 곧 국가에 반대해 외치는 데 그치지 않는가? 모든 사회주의자는 다가올 사회혁명의 결과로 국가가, 그리고 국가와 함께 정치적 권위도 사라지리라는 데, 곧 사회적 기능이 정치적 성격을 잃고 사회적 이익을 돌보는 단순한 행정적 기능으로 바뀌리라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반권위주의자들은 정치적 국가를 낳은 사회관계가 폐지되기도 전에 정치적 국가를 단번에 폐지하라고 요구한다. 그들은 사회혁명의 첫 행위가 권위의 폐지여야 한다고 요구한다.

이 양반들은 혁명을 한 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가? 혁명은 틀림없이 있을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권위적인 것이다. 혁명은 주민의 한 부분이 소총, 총검, 대포, 곧 더없이 권위적인 수단으로 다른 부분에 자기 의지를 강요하는 행위다. 그리고 승리한 당은 자기 무기가 반동가들에게 불어넣는 두려움으로 자기 지배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다. 파리 코뮌이 부르주아지에 맞서 무장한 인민의 권위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과연 하루라도 더 버틸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우리는 코뮌이 이 권위를 너무 적게 썼다고 나무랄 권리가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둘 중 하나다. 반권위주의자들이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스스로 모른다면, 그들은 혼란만 퍼뜨리는 것이다. 알고 있다면, 그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대의를 배반하는 것이다. 어느 경우든 그들은 반동에만 봉사한다.” (39쪽)

이 논의에서는 국가가 사멸할 때 정치와 경제가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주제(이 주제는 다음 장에서 다룬다)와 관련해 살펴보아야 할 문제들을 건드리고 있다. 사회적 기능이 정치적 기능에서 단순한 행정적 기능으로 바뀌는 문제, 그리고 “정치적 국가”의 문제가 그것이다. 특히 오해를 부르기 쉬운 이 마지막 표현은 국가 사멸의 과정을 가리킨다. 사멸하는 국가는 그 사멸의 일정한 단계에서 비정치적 국가라고 부를 수 있다.

엥겔스의 이 논의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번에도 무정부주의자들에 맞서 문제를 제기하는 방식이다. 엥겔스의 제자이기를 바라는 사회민주주의자들은 1873년 이래 무정부주의자들과 수백만 번 논쟁했지만, 바로 마르크스주의자가 논쟁할 수 있고 논쟁해야 하는 방식으로는 논쟁하지 않았다. 국가 폐지에 관한 무정부주의적 관념은 혼란스럽고 비혁명적이다 — 엥겔스는 문제를 이렇게 제기했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바로 혁명을, 그 발생과 발전에서, 그리고 폭력, 권위, 권력, 국가에 대한 혁명의 특수한 과제에서 보려 하지 않는다.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하는 흔한 무정부주의 비판은 더없이 순수한 소시민적 속물근성으로 떨어졌다. “우리는 국가를 인정하는데 무정부주의자들은 인정하지 않는다나!” 물론 이런 속물스러운 말은 조금이라도 생각할 줄 아는 혁명적 노동자들을 등 돌리게 할 수밖에 없다. 엥겔스는 다르게 말한다. 그는 모든 사회주의자가 사회주의 혁명의 결과로 국가가 사라진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강조한다. 그러고 나서 그는 혁명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한다. 바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기회주의 때문에 보통 비켜 가면서, 말하자면 무정부주의자들만의 “연구 과제”로 남겨 두는 그 문제다. 그리고 엥겔스는 이 문제를 제기하면서 정면으로 달려든다. 코뮌은 국가의, 곧 지배계급으로 조직된 무장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권력을 더 많이 썼어야 하지 않았는가?

지배적인 공식 사회민주주의는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맡을 구체적 과제라는 문제를 보통 속물의 비웃음 한마디로, 잘해야 “두고 보면 알겠지” 하는 궤변적 얼버무림으로 넘겨 버렸다. 그래서 무정부주의자들은 이런 사회민주주의를 두고 노동자를 혁명적으로 교육하는 자기 과제를 배반한다고 말할 권리를 얻었다. 엥겔스는 가장 최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경험을, 바로 은행에 대해서도 국가에 대해서도 프롤레타리아트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가장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데 쓴다.

3. 베벨에게 보낸 편지

국가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논의는 아니더라도 가장 주목할 만한 논의 가운데 하나는 엥겔스가 1875년 3월 18~28일에 베벨에게 보낸 편지의 다음 대목이다. 덧붙여 말하자면, 우리가 아는 한 이 편지는 베벨이 1911년에 펴낸 회고록(『나의 생애에서』) 제2권에 처음 실렸다. 편지를 쓰고 부친 지 36년 뒤였다.

엥겔스는 마르크스가 브라케에게 보낸 유명한 편지에서 비판한 바로 그 고타강령 초안을 비판하면서, 특히 국가 문제를 다루어 베벨에게 다음과 같이 썼다.

“…자유로운 인민국가가 자유로운 국가로 바뀌었다. 이 말의 문법적 뜻대로라면 자유로운 국가란 국가가 자기 시민들에 대해 자유로운 국가, 곧 전제적 정부를 가진 국가다. 국가에 관한 이런 수다는 모두 내던져야 할 것이다. 특히 이미 본래 의미의 국가가 아니었던 코뮌 뒤에는 더욱 그렇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인민국가’를 질리도록 들이대며 우리를 공격해 왔다. 마르크스가 프루동을 반박한 저작, 그리고 그 뒤의 『공산당 선언』이 이미, 사회주의 사회체제가 들어서면 국가는 저절로 해체되고(sich auflöst) 사라진다고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국가는 투쟁에서, 혁명에서 적들을 폭력으로 억압하려고 쓸 수밖에 없는 일시적 기관일 뿐이므로, 자유로운 인민국가를 말하는 것은 순전한 허튼소리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국가를 필요로 하는 동안,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적들을 억압하기 위해 국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자유를 말할 수 있게 되면 국가로서의 국가는 존재하기를 그친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서나 국가라는 낱말 대신 ‘공동체’(Gemeinwesen)라는 낱말을 쓰자고 제안하고 싶다. 이것은 프랑스어 ‘코뮌’에 해당하는 훌륭한 옛 독일어 낱말이다.” (독일어 원본 321~322쪽)

이 편지가 당 강령에 관한 것이라는 점, 그것도 마르크스가 겨우 몇 주 뒤의 날짜가 적힌 편지(1875년 5월 5일 자 마르크스의 편지)에서 비판한 바로 그 강령에 관한 것이라는 점, 그리고 엥겔스가 그때 마르크스와 함께 런던에 살고 있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마지막 문장에서 “우리”라고 말할 때, 엥겔스는 틀림없이 자신과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독일 노동자당 지도자에게 “국가”라는 낱말을 강령에서 빼고 “공동체”라는 낱말로 바꾸자고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기회주의자들의 편의에 맞게 위조된 “마르크스주의”의 우두머리들에게 이런 강령 수정을 제안한다면, 그들은 “무정부주의”라며 얼마나 울부짖겠는가!

울부짖으라지. 그 덕에 부르주아지에게 칭찬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일을 할 것이다. 우리 당 강령을 개정할 때는 진리에 더 가까이 가기 위해, 마르크스주의를 왜곡에서 씻어 내어 복원하기 위해, 노동계급의 해방 투쟁을 더 올바르게 이끌기 위해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조언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볼셰비키 가운데 엥겔스와 마르크스의 조언에 반대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어려움이 있다면 아마 용어뿐일 것이다. 독일어에는 “공동체”를 뜻하는 낱말이 둘 있는데, 엥겔스는 그 가운데 개별 공동체가 아니라 공동체들의 총체, 공동체들의 체계를 뜻하는 낱말을 골랐다. 러시아어에는 그런 낱말이 없으니, 아마 프랑스어 “코뮌”을 골라야 할 것이다. 이 낱말 역시 나름의 불편함이 있지만 말이다.

“코뮌은 이미 본래 의미의 국가가 아니었다.” 이것이 이론적으로 가장 중요한 엥겔스의 주장이다. 위에서 서술한 것을 보면 이 주장은 충분히 이해된다. 코뮌은 국가이기를 그쳐 가고 있었다. 코뮌이 억압해야 했던 것은 주민 다수가 아니라 소수(착취자)였기 때문이다. 코뮌은 부르주아 국가 기계를 분쇄했다. 억압을 위한 특수한 권력 대신 주민 자신이 무대에 나섰다. 이 모든 것은 본래 의미의 국가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리고 코뮌이 굳건히 자리 잡았다면, 코뮌 안에서 국가의 흔적은 저절로 “사멸했을” 것이다. 코뮌은 국가의 기관들을 “폐지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기관들은 할 일이 없어지는 만큼 기능을 멈추었을 것이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인민국가’를 들이대며 우리를 공격한다.” 엥겔스는 이렇게 말하면서 무엇보다 바쿠닌과, 그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퍼부은 공격을 염두에 둔다. 엥겔스는 “인민국가”가 “자유로운 인민국가”와 똑같이 허튼소리이고 사회주의에서 똑같이 벗어난 것인 한에서 이 공격이 옳다고 인정한다. 엥겔스는 무정부주의자들에 맞선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투쟁을 바로잡으려 한다. 이 투쟁을 원칙적으로 올바르게 만들고, “국가”에 관한 기회주의적 편견을 씻어 내려 한다. 아아! 엥겔스의 편지는 36년 동안 묻혀 있었다. 우리는 이 편지가 발표된 뒤에도 카우츠키가 엥겔스가 경고한 바로 그 오류를 사실상 끈질기게 되풀이한다는 것을 아래에서 보게 될 것이다.

베벨은 1875년 9월 21일 자 편지로 엥겔스에게 답했다. 거기서 그는 무엇보다 강령 초안에 대한 엥겔스의 판단에 “전적으로 동의한다”고, 그리고 자신은 리프크네히트가 너무 양보한다고 나무랐다고 썼다(베벨 회고록 독일어판 제2권 334쪽). 그러나 베벨의 소책자 『우리의 목표』를 보면, 거기서 우리는 국가에 관한 전혀 그릇된 논의를 만나게 된다.

“국가는 계급 지배에 기초한 국가에서 인민국가로 바뀌어야 한다.” (독일어판 『우리의 목표』, 1886년, 14쪽)

베벨 소책자의 제9판(아홉 번째 판이다!)에 이렇게 찍혀 있다! 국가에 관한 기회주의적 논의를 이토록 끈질기게 되풀이했으니,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그것에 흠뻑 물든 것도 놀랍지 않다. 더구나 엥겔스의 혁명적 설명은 묻혀 있었고, 생활환경 전체가 오랫동안 혁명을 “잊게 만들고” 있었으니 더욱 그렇다.

4. 에르푸르트 강령 초안 비판

엥겔스가 1891년 6월 29일 카우츠키에게 보냈고 10년 뒤에야 《노이에 차이트》에 발표된 에르푸르트 강령 초안 비판은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주의 학설을 검토할 때 지나칠 수 없다. 이 비판은 주로 바로 국가 체제 문제에서 사회민주주의가 보인 기회주의적 견해를 비판하는 데 바쳐져 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길에 지적해 두자면, 엥겔스는 경제 문제에서도 놀랍도록 귀중한 지적을 하나 한다. 이 지적은 그가 바로 최신 자본주의의 변화를 얼마나 주의 깊고 사려 깊게 지켜보았는지, 그래서 우리 시대, 곧 제국주의 시대의 과제를 어느 정도 미리 내다볼 수 있었는지를 보여 준다. 그 지적은 이렇다. 강령 초안이 자본주의의 특징을 나타내려고 쓴 “계획성의 결여”(Planlosigkeit)라는 말을 두고 엥겔스는 이렇게 쓴다.

“…주식회사에서 산업 부문 전체를 지배하고 독점하는 트러스트로 넘어가면, 거기서는 사적 생산뿐 아니라 계획성의 결여도 끝난다.” (《노이에 차이트》, 제20년차, 제1권, 1901~1902년, 8쪽)

여기에는 최신 자본주의, 곧 제국주의에 대한 이론적 평가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 곧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주의로 바뀐다는 것이 담겨 있다. 이 마지막 점은 강조해 두어야 한다. 독점자본주의나 국가독점자본주의는 더는 자본주의가 아니며 이미 “국가사회주의” 따위로 부를 수 있다는 부르주아 개량주의적 주장이 가장 널리 퍼진 오류이기 때문이다. 물론 트러스트는 완전한 계획성을 가져다주지 않았고, 지금도 가져다주지 않으며, 가져다줄 수도 없다. 그러나 트러스트가 계획성을 가져다주는 한, 자본의 거물들이 국민적 규모에서, 심지어 국제적 규모에서 생산 규모를 미리 계산하는 한, 그들이 생산을 계획적으로 조절하는 한, 우리는 그래도 여전히 자본주의 아래에 있다. 새로운 단계에 이르렀다고는 해도 틀림없이 자본주의 아래에 있다. 이런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에 “가깝다”는 것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진정한 대표자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이 가깝고, 쉽고, 실현 가능하며, 시급하다는 논거가 되어야 한다. 모든 개량주의자가 하듯이 이 혁명을 부정하는 것을 너그럽게 봐주고 자본주의에 분칠을 하는 것을 옹호하는 논거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러나 국가 문제로 돌아가자. 엥겔스는 여기서 특히 귀중한 지적을 세 가지 한다. 첫째는 공화국 문제에 관한 것이고, 둘째는 민족 문제와 국가 체제의 관계에 관한 것이며, 셋째는 지방자치에 관한 것이다.

공화국에 대해 말하자면, 엥겔스는 이것을 에르푸르트 강령 초안 비판의 중심으로 삼았다. 그리고 에르푸르트 강령이 국제 사회민주주의 전체에서 어떤 의의를 얻었는지, 그것이 어떻게 제2인터내셔널 전체의 본보기가 되었는지를 떠올려 보면, 엥겔스가 여기서 제2인터내셔널 전체의 기회주의를 비판하고 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것이다.

엥겔스는 이렇게 쓴다. “초안의 정치적 요구에는 큰 결함이 있다. 초안에는 본래 말해야 했던 것이 없다(강조는 엥겔스).”

이어서 엥겔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독일 헌법은 사실 1850년의 가장 반동적인 헌법을 본뜬 것이고, 제국의회는 빌헬름 리프크네히트가 말했듯이 “절대주의의 무화과 잎”일 뿐이며, 소국들과 독일 소국 연합을 합법화하는 헌법을 바탕으로 “모든 노동 도구를 공동 소유로 바꾸는 일”을 실현하려는 것은 “명백한 허튼소리”라는 것이다.

“이 주제를 건드리는 것은 위험하다.” 엥겔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그는 독일에서 공화국 요구를 강령에 합법적으로 내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엥겔스는 “모두”가 만족하는 이 명백한 고려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다. 엥겔스는 이어서 말한다. “그런데도 어떻게든 일을 진척시켜야 한다. 그것이 얼마나 필요한지는 바로 지금 사회민주주의 언론의 상당 부분에 번지고 있는(einreißende) 기회주의가 보여 준다. 사회주의자 탄압법이 되살아날까 두려워서, 또는 이 법이 지배하던 시기에 나온 몇몇 성급한 발언을 떠올리면서, 사람들은 이제 당이 독일의 지금의 합법 질서가 당의 모든 요구를 평화적으로 실현하기에 충분하다고 인정하기를 바란다…”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예외법이 되살아날까 두려워서 행동했다는 이 기본 사실을 엥겔스는 맨 앞에 내세우고, 거리낌 없이 그것을 기회주의라고 부른다. 그리고 바로 독일에 공화국과 자유가 없기 때문에 “평화적” 길에 대한 꿈은 전혀 터무니없다고 선언한다. 엥겔스는 자기 손을 묶지 않을 만큼 충분히 조심스럽다. 그는 공화국이 있거나 자유가 아주 큰 나라에서는 사회주의로 평화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는 있다”(그저 “생각해 볼 수”만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독일에 대해서는 이렇게 되풀이한다.

“…정부가 거의 전능하고 제국의회와 다른 모든 대의 기관이 실제 권력을 갖지 못한 독일에서 — 이런 독일에서 이와 비슷한 것을, 그것도 아무 필요도 없이 선포하는 것은 절대주의에서 무화과 잎을 벗겨 내고 스스로 그 알몸을 가리는 노릇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 지적들을 “서랍 속에” 처박아 둔 독일 사회민주당의 공식 지도자들은 압도적 다수가 절대주의의 알몸을 가려 주는 자들이 되고 말았다.

“…이런 정책은 결국 당을 그릇된 길로 이끌 수밖에 없다.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정치 문제를 앞세우고, 그렇게 함으로써 가장 가까운 구체적 문제들을 가려 버린다. 그런데 이 구체적 문제들은 첫 번째 큰 사건이 일어나자마자, 첫 번째 정치 위기가 닥치자마자 저절로 의제에 오른다. 결정적인 순간에 당이 갑자기 속수무책이 되고, 결정적인 문제들에서 당 안에 불명확함과 불일치가 지배하게 되는 것 말고 여기서 무엇이 나오겠는가? 이 문제들을 한 번도 논의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날그날의 순간적 이익 때문에 크고 근본적인 고려를 이렇게 잊는 것, 이후의 결과는 따지지 않은 채 순간적 성공을 이렇게 좇고 그것을 위해 싸우는 것, 운동의 미래를 이렇게 현재의 제물로 바치는 것 — 이것은 어쩌면 “정직한” 동기에서 비롯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회주의이며 기회주의로 남는다. 그리고 “정직한” 기회주의는 아마 다른 어떤 기회주의보다 위험할 것이다…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당과 노동계급이 민주공화국 같은 정치형태 아래에서만 지배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민주공화국은 위대한 프랑스 혁명이 이미 보여 주었듯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의 특수한 형태이기도 하다…”

엥겔스는 여기서 마르크스의 모든 저작을 붉은 실처럼 꿰뚫고 있는 기본 사상, 곧 민주공화국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 가는 가장 가까운 접근로라는 사상을 특히 뚜렷한 형태로 되풀이한다. 이런 공화국은 자본의 지배를, 따라서 대중의 억압과 계급투쟁을 조금도 없애지 않지만, 이 투쟁을 불가피하게 넓히고 펼치고 드러내고 첨예하게 만든다. 그래서 피억압 대중의 근본 이익을 채울 가능성이 생기기만 하면, 그 가능성은 반드시, 그리고 오로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속에서, 곧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대중을 지도하는 데서 실현된다. 이것 역시 제2인터내셔널 전체에게는 마르크스주의의 “잊힌 말”이다. 그리고 이것을 잊었다는 사실은 1917년 러시아 혁명 첫 반년 동안 멘셰비키 당이 걸어온 역사가 유난히 뚜렷하게 드러냈다.

엥겔스는 주민의 민족 구성과 관련된 연방제 공화국 문제에 대해 이렇게 썼다.

“지금의 독일 자리에 무엇이 들어서야 하는가?”(반동적인 군주제 헌법과, 그에 못지않게 반동적인 소국 분할을 지닌 독일 말이다. 이 분할은 “프로이센 근성”의 특성을 독일 전체 속에 녹여 없애는 대신 영구화한다.) “내 생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는 단일하고 불가분한 공화국 형태만 쓸 수 있다. 연방제 공화국은 미국의 거대한 영토에서는 지금도 대체로 필요하다. 미국 동부에서는 이미 장애가 되어 가고 있지만 말이다. 연방제 공화국은 두 섬에 네 민족이 살고, 의회는 하나인데도 세 가지 입법 체계가 나란히 존재하는 영국에서는 한 걸음 전진일 것이다. 작은 스위스에서는 그것이 이미 오래전에 장애가 되었다. 그곳에서 연방제 공화국을 아직 참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스위스가 유럽 국가 체계에서 순전히 수동적인 구성원의 역할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독일로서는 연방주의적으로 스위스처럼 되는 것이 엄청난 후퇴일 것이다. 연방국가를 완전한 단일국가와 구별 짓는 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연방에 들어 있는 개별 국가가 저마다 따로 민법과 형법을 갖고 따로 사법제도를 갖는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인민원과 나란히 각국 대표들로 이루어진 원이 있어서, 거기서는 각 칸톤이 크든 작든 칸톤 그 자체로서 표결한다는 점이다.” 독일에서 연방국가는 완전한 단일국가로 넘어가는 이행이며, 1866년과 1870년의 “위로부터의 혁명”을 되돌릴 것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운동”으로 보완해야 한다.

엥겔스는 국가형태 문제에 무관심하기는커녕, 오히려 바로 이행 형태들을 아주 꼼꼼하게 분석하려 애쓴다. 개별 경우마다 구체적·역사적 특성에 따라, 주어진 이행 형태가 무엇에서 무엇으로 넘어가는 이행인지를 가늠하기 위해서다.

엥겔스는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프롤레타리아트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관점에서 민주적 중앙집권제, 단일하고 불가분한 공화국을 옹호한다. 그는 연방제 공화국을 예외이자 발전의 장애로 보거나, 군주제에서 중앙집권적 공화국으로 넘어가는 이행으로, 일정한 특수 조건 아래에서의 “한 걸음 전진”으로 본다. 그리고 이 특수 조건 가운데 민족 문제가 앞에 나선다.

엥겔스에게도 마르크스에게도, 그들이 소국들의 반동성과, 일정한 구체적 경우에 이 반동성을 민족 문제로 가리는 것을 가차 없이 비판했는데도, 민족 문제를 무시해 버리려는 경향은 어디에도 그림자조차 없다. 네덜란드와 폴란드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국” 소국들의 소시민적이고 편협한 민족주의에 맞서는 더없이 정당한 투쟁에서 출발하면서도, 흔히 바로 이런 경향에 빠지는 잘못을 저지른다.

영국에서조차, 곧 지리적 조건도, 언어의 공통성도, 수백 년의 역사도 영국의 개별 작은 지역들의 민족 문제를 “끝장낸” 듯 보이는 영국에서조차, 엥겔스는 민족 문제가 아직 해소되지 않았다는 분명한 사실을 고려하고, 그래서 연방제 공화국을 “한 걸음 전진”으로 인정한다. 물론 여기에는 연방제 공화국의 결함을 비판하는 일도, 단일하고 중앙집권적·민주적인 공화국을 위해 가장 단호하게 선전하고 투쟁하는 일도 포기한다는 기색은 조금도 없다.

그러나 엥겔스는 민주적 중앙집권제를, 부르주아 이데올로그와, 무정부주의자를 포함한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이 이 개념을 쓰는 관료적 의미로는 결코 이해하지 않는다. 엥겔스에게 중앙집권제는 폭넓은 지방자치를 조금도 배제하지 않는다. 이런 지방자치는 “코뮌”과 지역들이 자발적으로 국가의 통일을 지키는 가운데, 모든 관료주의와 위로부터의 모든 “명령”을 무조건 없앤다.

엥겔스는 국가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강령적 견해를 펼치면서 이렇게 쓴다. “…따라서 단일 공화국이다. 그러나 지금의 프랑스 공화국과 같은 의미에서가 아니다. 지금의 프랑스 공화국은 1798년에 세워진 제국에서 황제만 뺀 것에 지나지 않는다. 1792년부터 1798년까지 프랑스의 모든 도(데파르트망), 모든 공동체(Gemeinde)는 미국식의 완전한 자치를 누렸다. 우리도 이것을 가져야 한다. 자치를 어떻게 조직해야 하는지, 관료제 없이 어떻게 해 나갈 수 있는지는 미국과 프랑스 제1공화국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증명했으며, 지금은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와 그 밖의 영국 식민지들이 또 보여 주고 있다. 그리고 이런 주(지역) 자치와 공동체 자치는 이를테면 스위스 연방주의보다 훨씬 더 자유로운 제도다. 스위스에서는 칸톤이 분트에 대해서는”(곧 연방국가 전체에 대해서는) “아주 독립적인 것이 사실이지만, 군(베치르크)에 대해서도, 공동체에 대해서도 독립적이다. 칸톤 정부들은 군수(슈타트할터)와 지사를 임명하는데, 이런 일은 영어권 나라들에는 전혀 없으며, 우리도 앞으로 프로이센의 란트라트와 레기룽스라트처럼 단호하게 없애야 한다.”(감독관, 경찰서장, 지사, 곧 일반적으로 위에서 임명되는 관리들을 말한다.) 엥겔스는 이에 맞추어 자치에 관한 강령 조항을 다음과 같이 정식화하자고 제안한다. “주”(현이나 지역), “군, 공동체에서 보통선거권으로 선출된 관리들을 통한 완전한 자치. 국가가 임명하는 모든 지방 당국과 주 당국의 폐지.”

케렌스키와 그 밖의 “사회주의자” 장관들의 정부가 폐간한 《프라우다》(1917년 5월 28일 자 제68호)에서 나는 이미, 이 조항에서 — 물론 이 조항 하나에서만은 결코 아니지만 — 이른바 혁명적인 이른바 민주주의 세력의 이른바 사회주의자 대표들이 민주주의 원칙에서 얼마나 터무니없이 벗어났는지 지적한 적이 있다.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와 “연립”으로 스스로를 묶은 사람들이 이 지적에 귀를 막고 있었던 것은 당연하다.

엥겔스가 사실을 손에 들고, 가장 정확한 예를 들어, 특히 소부르주아 민주주의 진영에 아주 널리 퍼진 편견, 곧 연방제 공화국이 중앙집권적 공화국보다 반드시 더 많은 자유를 뜻한다는 편견을 반박한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이것은 틀렸다. 1792~1798년의 중앙집권적 프랑스 공화국과 연방주의적 스위스 공화국에 관해 엥겔스가 드는 사실들이 이것을 반박한다. 정말로 민주적인 중앙집권적 공화국이 연방주의적 공화국보다 더 많은 자유를 주었다. 달리 말하면, 역사에 알려진 가장 큰 지방적·지역적 자유 등을 준 것은 연방제 공화국이 아니라 중앙집권적 공화국이었다.

이 사실에, 그리고 연방제 공화국과 중앙집권적 공화국, 지방자치에 관한 문제 전체에, 우리 당의 선전과 선동은 충분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지금도 기울이지 않고 있다.

5.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에 붙인 1891년 서문

엥겔스는 『프랑스 내전』 제3판 서문에서 — 이 서문은 1891년 3월 18일로 날짜가 적혀 있고 처음에는 《노이에 차이트》에 실렸다 — 국가에 대한 태도와 관련된 문제들에 대해 흥미로운 촌평을 곁들이면서, 코뮌의 교훈을 놀랍도록 뚜렷하게 요약한다. 이 요약은 지은이와 코뮌 사이에 놓인 20년 동안의 모든 경험으로 깊어졌고, 특히 독일에 퍼진 “국가에 대한 미신적 믿음”을 겨냥한 것이어서, 지금 다루는 문제에 관한 마르크스주의의 마지막 말이라고 불러도 마땅하다.

엥겔스는 프랑스에서는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노동자들이 무장했다고 지적한다. “그러므로 국가의 키를 쥔 부르주아들에게 첫째 계명은 노동자들의 무장 해제였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쟁취한 혁명마다 그 뒤에 새로운 투쟁이 벌어지고, 그 투쟁은 노동자들의 패배로 끝난다…”

부르주아 혁명들의 경험을 요약한 이 말은 간결한 만큼이나 표현력이 있다. 문제의 핵심이 — 무엇보다 국가 문제에서도(피억압 계급에게 무기가 있는가?) — 여기서 훌륭하게 포착되어 있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의 영향 아래 있는 교수들도,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도 가장 자주 비켜 가는 것이 바로 이 핵심이다. 1917년 러시아 혁명에서 부르주아 혁명의 이 비밀을 누설하는 영광(카베냐크의 영광)은 “멘셰비키”이자 “나도 마르크스주의자”인 체레텔리에게 돌아갔다. 6월 11일의 “역사적” 연설에서 체레텔리는 페테르부르크 노동자들을 무장 해제하려는 부르주아지의 결의를 무심코 털어놓았다. 물론 그는 이 결정을 자기 결정으로도, 일반적인 “국가적” 필요로도 내세웠다!

6월 11일 체레텔리의 역사적 연설은 물론, 1917년 혁명을 연구하는 모든 역사가에게 체레텔리 씨가 이끈 사회혁명당원과 멘셰비키의 블록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 맞서 부르주아지 편으로 넘어간 과정을 보여 주는 가장 뚜렷한 예증 가운데 하나가 될 것이다.

역시 국가 문제와 관련된 엥겔스의 또 다른 촌평은 종교에 관한 것이다. 알다시피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썩어 가며 점점 더 기회주의적이 될수록 “종교는 사적인 일이라고 선언한다”는 유명한 정식을 속물적으로 곡해하는 쪽으로 더 자주 굴러떨어졌다. 곧 이 정식을, 마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에게도 종교 문제는 사적인 일인 것처럼 해석했다!!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강령을 이렇게 완전히 배반하는 것에 맞서 엥겔스가 들고일어났다. 그는 1891년에는 자기 당에서 기회주의의 가장 미약한 싹만을 보았고, 그래서 아주 조심스럽게 표현했다.

“코뮌에는 거의 노동자나 공인된 노동자 대표만 앉아 있었으므로, 그에 걸맞게 코뮌의 결정도 단호하게 프롤레타리아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 결정들은 공화주의 부르주아지가 오로지 비열한 비겁함 때문에 포기했던 개혁, 노동계급의 자유로운 활동에 꼭 필요한 기초를 이루는 개혁을 포고했다. 국가에 대해서 종교는 그저 사적인 일이라는 원칙을 실행한 것이 그런 예다. 아니면 코뮌은 노동계급의 이익에 곧바로 들어맞으며, 부분적으로는 낡은 사회질서에 깊이 파고드는 결정을 내렸다…”

엥겔스가 “국가에 대해서”라는 말을 강조한 것은 일부러 한 일이다. 그는 이로써 독일 기회주의의 정곡을 찔렀다. 독일 기회주의는 종교를 당에 대해서 사적인 일이라고 선언했고, 그렇게 하여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당을 더없이 속된 “자유사상가” 속물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이런 속물들은 어느 종파에도 속하지 않는 상태는 허용할 용의가 있지만, 인민을 바보로 만드는 종교라는 아편에 맞서는 당의 투쟁이라는 과제는 거부했다.

1914년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수치스럽게 파산한 뿌리를 더듬는 미래의 역사가는 이 문제에 관해 흥미로운 자료를 적잖이 찾아낼 것이다. 당의 사상적 지도자 카우츠키가 논설에서 한, 기회주의에 문을 활짝 열어 주는 얼버무림부터 1913년 교회 탈퇴 운동(Los-von-Kirche-Bewegung)에 대한 당의 태도에 이르기까지 말이다.

그러나 엥겔스가 코뮌 20년 뒤에 투쟁하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코뮌의 교훈을 어떻게 정리해 주었는지로 넘어가자.

엥겔스가 맨 앞에 내세운 교훈은 다음과 같다.

“…나폴레옹이 1798년에 만들었고, 그 뒤로 새 정부마다 바람직한 도구로 넘겨받아 적들에게 맞서 써 온 예전 중앙집권적 정부의 억압 권력, 곧 군대, 정치경찰, 관료제, 바로 이 권력이 파리에서 무너졌듯이 프랑스 어디에서나 무너져야 했다.

코뮌은 처음부터 다음을 인정해야 했다. 노동계급은 지배권을 쥐고 나면 낡은 국가 기계를 가지고 계속 살림을 꾸려 갈 수 없다는 것, 노동계급은 이제 막 쟁취한 지배권을 다시 잃지 않으려면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자기에게 맞서 쓰이던 낡은 억압 기계를 모두 없애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대의원과 관리들을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언제든 교체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들에게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엥겔스는 군주제에서만이 아니라 민주공화국에서도 국가는 여전히 국가로 남는다는 것, 곧 공직자들, “사회의 봉사자들”, 사회의 기관들을 사회 위에 선 주인으로 바꾸어 놓는다는 근본적인 특징을 그대로 지닌다는 것을 거듭거듭 강조한다.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국가에서 피할 수 없었던 일, 곧 국가와 국가 기관이 사회의 봉사자에서 사회의 주인으로 바뀌는 일에 맞서 코뮌은 틀림없는 두 가지 수단을 썼다. 첫째, 코뮌은 행정, 사법, 국민 교육의 모든 직위에 보통선거권으로 뽑힌 사람들을 앉혔고, 그와 함께 선거인들의 결정에 따라 언제든 이 선출된 사람들을 소환할 권리를 도입했다. 둘째, 코뮌은 높은 공직자든 낮은 공직자든 모든 공직자에게 다른 노동자들이 받는 만큼의 보수만 지급했다. 코뮌이 지급한 가장 높은 봉급은 6,000프랑이었다. 이렇게 하여 자리 사냥과 출세주의를 막는 확실한 장애물이 만들어졌다. 코뮌이 그 밖에도 대의 기관 대의원들에게 도입한 명령적 위임과는 상관없이 말이다…”

엥겔스는 여기서 흥미로운 경계에 다가선다. 한편으로는 일관된 민주주의가 사회주의로 바뀌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관된 민주주의가 사회주의를 요구하는 경계다. 국가를 폐기하려면 국가 업무의 기능을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나아가 주민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해낼 수 있고 감당할 수 있는 단순한 통제와 계산 작업으로 바꾸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출세주의를 완전히 없애려면, 국가 업무의 “명예로운” 그러나 수입은 없는 자리가, 가장 자유롭다는 모든 자본주의 나라에서 늘 그렇듯이 은행이나 주식회사의 수입 많은 자리로 뛰어넘어 가는 디딤돌 노릇을 할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엥겔스는 이를테면 민족자결권 문제에서 어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저지르는 오류, 곧 민족자결권은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불가능하고 사회주의 아래에서는 쓸데없다는 식의 오류를 저지르지 않는다. 겉으로는 재치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릇된 이런 논의는 어떤 민주주의 제도에 대해서도, 관리들의 적은 봉급에 대해서도 되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끝까지 일관된 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불가능하고, 사회주의 아래에서는 모든 민주주의가 사멸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궤변이다. 머리카락이 한 올 줄어들면 대머리가 되느냐는 그 옛날의 농담과 비슷한 궤변이다.

민주주의를 끝까지 발전시키는 일, 그런 발전의 형태를 찾아내는 일, 그 형태를 실천으로 시험하는 일 따위, 이 모든 것은 사회혁명을 위한 투쟁을 이루는 과제 가운데 하나다. 따로 떼어 놓고 보면 어떤 민주주의도 사회주의를 가져다주지 않는다. 그러나 삶에서 민주주의는 결코 “따로 떼어” 있지 않고 “함께 묶여”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는 경제에도 영향을 미치고, 경제의 변혁을 밀어붙이며, 또 경제 발전의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역사의 변증법이다.

엥겔스는 이어서 말한다.

“…낡은 국가권력의 이런 폭파(Sprengung)와, 이것을 새롭고 참으로 민주적인 권력으로 바꾸어 놓은 일은 『프랑스 내전』 제3절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 교체의 몇몇 특징을 다시 한번 짧게 다룰 필요가 있었다. 바로 독일에서 국가에 대한 미신적 믿음이 철학에서 부르주아지의 일반 의식으로, 심지어 많은 노동자의 의식으로까지 옮아갔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국가는 ‘이념의 실현’이며, 철학의 언어로 옮기면 지상의 하느님 나라다. 국가는 영원한 진리와 정의가 실현되거나 실현되어야 하는 마당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국가와, 국가와 관계있는 모든 것에 대한 미신적 숭배가 나온다. 이런 미신적 숭배는, 사람들이 어려서부터 사회 전체에 공통된 일과 이익은 예전 방식으로, 곧 국가와 수입 좋은 자리를 상으로 받은 국가 관리들을 통해서밖에는 처리하고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지기 때문에 그만큼 더 쉽게 뿌리내린다. 사람들은 세습 군주제에 대한 믿음을 떨쳐 버리고 민주공화국 지지자가 되면 비상하게 대담한 전진을 한 걸음 내디뎠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실제로 국가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기계일 뿐이며, 이 점은 민주공화국에서도 군주제에서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다. 그리고 국가는 잘해야, 계급 지배를 위한 투쟁에서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유산으로 물려지는 악이다.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코뮌과 마찬가지로 이 악의 가장 나쁜 측면들을 곧바로 잘라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적 조건 속에서 자란 세대가 국가 제도라는 이 잡동사니를 모두 내다 버릴 수 있게 될 때까지 말이다.”

엥겔스는 독일인들에게, 군주제가 공화국으로 바뀌는 것을 계기로 국가 일반의 문제에 관한 사회주의의 기초를 잊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의 경고는 이제, 자기들의 “연립” 실천에서 국가에 대한 미신적 믿음과 미신적 숭배를 드러낸 체레텔리와 체르노프 같은 양반들에게 주는 직접적인 교훈처럼 읽힌다!

두 가지만 더 지적해 두자. 1) 엥겔스가 민주공화국에서도 국가는 군주제에서보다 “조금도 덜하지 않게”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기 위한 기계”로 남는다고 말한다고 해서, 몇몇 무정부주의자가 “가르치듯이” 억압의 형태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더 넓고, 더 자유롭고, 더 공공연한 계급투쟁과 계급 억압의 형태는 계급 일반을 폐기하기 위한 투쟁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짐을 엄청나게 덜어 준다.

2) 국가 제도라는 이 잡동사니를 모두 완전히 내다 버릴 수 있는 것이 왜 새로운 세대뿐인가 하는 문제는 민주주의의 극복 문제와 이어져 있다. 이제 이 문제로 넘어가자.

6. 민주주의의 극복에 관한 엥겔스의 견해

엥겔스는 “사회민주주의자”라는 명칭이 과학적으로 옳지 않다는 문제와 관련해 이 점을 말해야 했다.

엥겔스는 1870년대에 여러 주제로 쓴, 주로 “국제적” 내용을 담은 자기 글들을 모아 펴낸 책(『《폴크스슈타트》에서 가려 뽑은 국제 문제 논설』(Internationales aus dem ‘Volksstaat’))의 서문에서 — 1894년 1월 3일로 날짜가 적힌, 곧 엥겔스가 죽기 1년 반 전에 쓴 서문에서 — 모든 글에서 “사회민주주의자”가 아니라 “공산주의자”라는 낱말을 쓰고 있다고 썼다. 그때는 프랑스의 프루동주의자들, 독일의 라살레주의자들이 스스로를 사회민주주의자라고 불렀기 때문이다.

엥겔스는 이어서 말한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와 나로서는 바로 우리의 관점을 나타내는 데 이처럼 늘었다 줄었다 하는 표현을 쓴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사정이 다르며, 이 낱말(‘사회민주주의자’)은 아마 그런대로 통할 수 있을 것이다(mag passieren). 경제 강령이 그저 사회주의 일반이 아니라 곧바로 공산주의적인 당, 정치적 최종 목표가 국가 전체의, 따라서 민주주의의 극복이기도 한 당에게는 이 낱말이 여전히 부정확하지만(unpassend, 걸맞지 않지만) 말이다. 그러나 현실의(강조는 엥겔스) 정당들의 이름이 그 당에 꼭 들어맞는 일은 결코 없다. 당은 발전하고 이름은 남는다.”

변증법가 엥겔스는 만년에도 변증법에 충실하다. 마르크스와 나에게는 과학적으로 정확한 훌륭한 당명이 있었지만, 현실의 당, 곧 대중적 프롤레타리아 당은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 지금(19세기 말)은 현실의 당이 있지만 그 이름은 과학적으로 틀렸다. 괜찮다, 당이 발전하기만 한다면, 당명이 과학적으로 부정확하다는 것을 당이 모르지 않고 그것이 당이 올바른 방향으로 발전하는 데 방해가 되지 않기만 한다면 “통할 것이다”!

어쩌면 어떤 익살꾼은 우리 볼셰비키도 엥겔스식으로 위로하려 들지 모른다. 우리에게는 현실의 당이 있고, 그 당은 훌륭하게 발전하고 있다. 1903년 브뤼셀-런던 대회에서 우리가 다수파였다는 순전히 우연한 사정 말고는 아무것도 나타내지 않는 “볼셰비키”처럼 무의미하고 흉한 낱말도 “통할 것이다”… 공화주의자들과 “혁명적” 소시민 민주주의 세력이 7월과 8월에 우리 당을 박해한 일이 “볼셰비키”라는 낱말을 전 인민이 우러러보는 이름으로 만든 지금, 게다가 그 박해가 우리 당이 현실의 발전에서 내디딘 아주 거대한 역사적 전진을 뚜렷이 보여 준 지금이라면, 어쩌면 나도 우리 당의 이름을 바꾸자는 4월의 내 제안을 망설였을지 모른다. 어쩌면 나는 동지들에게 “타협”을 제안했을지도 모른다. 공산당이라고 이름을 짓고, 괄호 안에 볼셰비키라는 낱말을 남겨 두자고…

그러나 당명 문제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문제보다 비할 바 없이 덜 중요하다.

국가에 관한 흔한 논의에서는 엥겔스가 여기서 경고하는, 그리고 우리가 앞의 서술에서 지나가며 지적한 오류가 늘 저질러진다. 곧 국가의 폐기는 민주주의의 폐기이기도 하다는 것, 국가의 사멸은 민주주의의 사멸이라는 것을 늘 잊는다.

얼핏 보면 이런 주장은 아주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어 보인다. 어쩌면 누군가는 우리가 소수가 다수에 복종한다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체제가 도래하기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냐고 걱정할지도 모른다. 민주주의란 바로 이 원칙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아니다. 민주주의는 소수가 다수에 복종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소수가 다수에 복종하는 것을 인정하는 국가, 곧 한 계급이 다른 계급에, 주민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에 체계적으로 폭력을 가하기 위한 조직이다.

우리는 국가의 폐기, 곧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모든 폭력, 사람에 대한 모든 폭력 일반의 폐기를 최종 목표로 삼는다. 우리는 소수가 다수에 복종한다는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사회질서가 도래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추구하면서 우리는 사회주의가 공산주의로 자라나리라는 것, 그와 함께 사람에 대한 폭력 일반의 필요, 곧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주민의 한 부분이 다른 부분에 복종할 필요가 모두 사라져 가리라는 것을 확신한다. 사람들은 폭력 없이, 복종 없이 사회생활의 기본 조건을 지키는 데 익숙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엥겔스가 새로운 세대, 곧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적 조건 속에서 자라서 국가 제도라는 이 잡동사니를 모두 완전히 내다 버릴 수 있게 될” 세대를 말하는 것은 바로 이 습관이라는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모든 국가 제도, 민주공화제 국가 제도까지 포함한 모든 국가 제도를 말이다.

이것을 설명하려면 국가 사멸의 경제적 기초라는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제5장 국가 사멸의 경제적 기초

이 문제를 가장 자세하게 해명한 것은 마르크스의 『고타강령 비판』이다(1875년 5월 5일 브라케에게 보낸 편지로, 1891년에야 《노이에 차이트》 제9년차 제1권에 실렸고, 러시아어로는 단행본으로 나왔다). 라살레주의 비판으로 이루어진 이 훌륭한 저작의 논쟁적 부분은, 말하자면 그 긍정적 부분, 곧 공산주의의 발전과 국가의 사멸 사이의 연관에 대한 분석을 가려 버렸다.

1. 마르크스의 문제 제기

1875년 5월 5일 마르크스가 브라케에게 보낸 편지와, 앞에서 살펴본 1875년 3월 28일 엥겔스가 베벨에게 보낸 편지를 겉핥기로 비교하면, 마르크스가 엥겔스보다 훨씬 더 “국가주의자”이고 두 저술가의 국가관 사이의 차이가 아주 큰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엥겔스는 베벨에게 국가에 관한 수다를 아예 집어치우고, 국가라는 낱말을 강령에서 완전히 내쫓고 “공동체”라는 낱말로 바꾸자고 제안한다. 엥겔스는 코뮌이 이미 본래 의미의 국가가 아니었다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의 미래 국가 제도”까지 말한다. 다시 말해 공산주의에서도 국가가 필요하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근본적으로 틀린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국가와 국가의 사멸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견해는 완전히 일치하며, 앞에 든 마르크스의 표현은 바로 이 사멸해 가는 국가 제도를 가리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래의 “사멸” 시점을 정한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사멸은 누가 보아도 오래 걸리는 과정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사이의 겉보기 차이는 그들이 다룬 주제, 그들이 추구한 과제가 달랐다는 데서 설명된다. 엥겔스는 국가에 관해 떠도는(그리고 라살레도 적잖이 공유하던) 편견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를 베벨에게 눈에 보이게, 날카롭게, 굵은 선으로 보여 주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마르크스는 이 문제를 지나가는 길에 건드릴 뿐이고, 다른 주제, 곧 공산주의 사회의 발전에 관심을 둔다.

마르크스의 이론 전체는 발전의 이론을 — 가장 일관되고, 완전하고, 깊이 숙고되고, 내용이 풍부한 형태로 — 현대 자본주의에 적용한 것이다. 그러니 마르크스에게 이 이론을 자본주의의 다가오는 붕괴에도, 미래 공산주의의 미래 발전에도 적용하는 문제가 생긴 것은 당연하다.

그러면 어떤 근거에 기대어 미래 공산주의의 미래 발전이라는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가?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에서 나오고,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에서 발전해 나오며, 자본주의가 낳은 사회적 힘이 활동한 결과라는 사실에 기대어서다. 마르크스에게는 유토피아를 지어내려는 시도, 알 수 없는 것을 두고 쓸데없이 점치려는 시도가 그림자만큼도 없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문제를, 이를테면 어떤 새로운 생물학적 변종이 이러이러하게 생겨났고 이러이러한 일정한 방향으로 변해 간다는 것을 알 때 자연과학자가 그 변종의 발전 문제를 제기하듯이 제기한다.

마르크스는 무엇보다 먼저, 고타강령이 국가와 사회의 관계 문제에 끌어들이는 혼란을 쓸어 낸다.

“…오늘날의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다.” 마르크스는 이렇게 쓴다. “이 사회는 모든 문명국에 존재하며, 중세의 혼합물에서 얼마쯤 벗어나 있고, 나라마다의 역사적 발전의 특수성에 따라 얼마쯤 변형되어 있으며, 얼마쯤 발전해 있다. 그와 반대로 ‘오늘날의 국가’는 국경을 넘을 때마다 바뀐다. 그것은 프로이센-독일 제국에서와 스위스에서가 전혀 다르고, 영국에서와 미국에서가 전혀 다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국가’는 허구다.

그렇지만 여러 문명국의 여러 국가는 그 형태가 갖가지로 다른데도, 모두 자본주의적으로 얼마쯤 더 또는 덜 발전한 현대 부르주아 사회의 토대 위에 서 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므로 그것들에는 몇 가지 공통된 본질적 특징이 있다. 이런 뜻에서, 그 지금의 뿌리인 부르주아 사회가 사멸할 미래와 대비하여 ‘오늘날의 국가 제도’를 말할 수 있다.

그러면 문제는 이렇게 제기된다. 공산주의 사회에서 국가 제도는 어떤 변화를 겪을 것인가? 다시 말해, 그때에는 지금의 국가 기능과 비슷한 어떤 사회적 기능이 남을 것인가? 이 물음에는 과학적으로만 답할 수 있다. ‘인민’이라는 낱말을 ‘국가’라는 낱말과 몇천 번을 이어 붙여도 그 해결에는 털끝만큼도 다가가지 못한다…”

이렇게 “인민국가”에 관한 온갖 이야기를 비웃은 뒤 마르크스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에 과학적으로 답하려면 과학적으로 확고하게 확인된 자료만 다룰 수 있다고 경고하는 듯하다.

발전 이론 전체가, 과학 전체가 아주 정확하게 확인한 첫째 사실은 — 그리고 유토피아주의자들이 잊었고, 사회주의 혁명을 두려워하는 오늘날의 기회주의자들이 잊고 있는 사실은 — 역사적으로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는 특수한 시기 또는 특수한 국면이 틀림없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마르크스는 이어 말한다. “전자에서 후자로의 혁명적 변혁의 시기가 놓여 있다. 이 시기에는 정치적 이행기도 대응하며, 이 시기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 말고는 다른 아무것도 될 수 없다…”

마르크스에게서 이 결론은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하는 역할에 대한 분석, 이 사회의 발전에 관한 자료,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대립하는 이해의 화해 불가능성에 기초한다.

예전에는 문제가 이렇게 제기되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자기 해방을 이루려면 부르주아지를 타도하고, 정치권력을 쟁취하고, 자신의 혁명적 독재를 세워야 한다.

이제는 문제가 조금 다르게 제기된다. 공산주의를 향해 발전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산주의 사회로 넘어가는 것은 “정치적 이행기” 없이는 불가능하며, 이 시기의 국가는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 독재는 민주주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우리는 『공산당 선언』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계급으로 끌어올리는 것”과 “민주주의의 쟁취”라는 두 개념을 그냥 나란히 놓는다는 것을 보았다. 앞에서 서술한 모든 것에 기초하면,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하면서 민주주의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더 정확하게 규정할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그 사회가 가장 유리하게 발전한다는 조건 아래서, 민주공화국에서 얼마쯤 완전한 민주주의를 갖는다. 그러나 이 민주주의는 언제나 자본주의적 착취의 좁은 테두리에 짓눌려 있고, 그래서 언제나 사실상 소수를 위한 민주주의, 유산계급만을 위한, 부자만을 위한 민주주의로 남는다.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는 언제나 고대 그리스 공화국들의 자유와 대체로 같은 것으로 남는다. 노예 소유자를 위한 자유 말이다. 오늘날의 임금노예들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조건 때문에 궁핍과 빈곤에 너무나 짓눌려 있어서 “민주주의 따위에 마음 쓸 겨를이 없고”, “정치 따위에 마음 쓸 겨를이 없다”. 그래서 사건이 보통의 평화로운 흐름을 따를 때 주민 다수는 사회·정치 생활에 참여하는 데서 밀려나 있다.

이 주장이 옳다는 것은 아마 독일이 가장 뚜렷하게 확인해 줄 것이다. 바로 이 나라에서는 헌법적 합법성이 거의 반세기(1871~1914) 동안 놀라울 만큼 오래, 안정되게 유지되었고, 그동안 사회민주주의는 다른 나라들보다 훨씬 많은 일을 해내어 “합법성을 이용”했으며, 세상 어디에도 없을 만큼 높은 비율의 노동자를 정당으로 조직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지금까지 관찰된 것 가운데 가장 높은, 정치적으로 의식 있고 활동적인 임금노예의 비율은 얼마인가? 수백만 임금노동자 가운데 사회민주당 당원이 100만 명이다! 1,500만 명 가운데 노동조합 조직원이 300만 명이다!

극소수를 위한 민주주의, 부자를 위한 민주주의 — 이것이 자본주의 사회의 민주주의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메커니즘을 가까이 들여다보면, 선거권의 “사소한”, 사소하다고들 하는 세부(거주 요건, 여성 배제 등)에서도, 대의 기관의 운영 기술에서도, 집회의 권리에 대한 사실상의 장애(공공건물은 “거지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에서도, 일간 신문의 순전히 자본주의적인 조직에서도, 그 밖의 모든 것에서도 — 어디서나, 어느 곳에서나 민주주의의 제한에 또 제한을 보게 된다.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이 제한, 예외, 배제, 장애는 사소해 보인다. 특히 스스로 궁핍을 겪어 본 적이 없고 피억압 계급의 대중적 삶을 가까이 접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의 눈에는 그렇다(그리고 부르주아 평론가와 정치가의 열에 아홉은, 백에 아흔아홉까지는 아니라 해도,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러나 이 제한들을 모두 합치면, 그것은 빈민을 정치에서, 민주주의에 적극 참여하는 데서 배제하고 밀어낸다.

마르크스는 코뮌의 경험을 분석하면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이 본질을 훌륭하게 포착했다. 피억압자들은 몇 년에 한 번씩, 억압하는 계급의 대표자 가운데 정확히 누가 의회에서 자기들을 대표하고 짓밟을지를 결정하도록 허락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 피할 수 없이 좁고, 몰래 빈민을 밀어내며, 그래서 속속들이 위선적이고 거짓된 민주주의 — 로부터의 전진은 자유주의 교수들과 소부르주아 기회주의자들이 그리듯이 “점점 더 큰 민주주의로” 단순하게, 곧게, 순탄하게 나아가지 않는다. 그렇지 않다. 전진, 곧 공산주의로의 전진은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거쳐 나아가며, 달리는 나아갈 수 없다. 착취자인 자본가들의 저항을 꺾을 자가 달리 없고, 다른 길로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곧 피억압자의 전위를 억압자를 진압하기 위한 지배계급으로 조직하는 것은 그저 민주주의를 넓히는 데 그칠 수 없다. 민주주의는 엄청나게 넓어져 처음으로 빈민을 위한 민주주의, 인민을 위한 민주주의가 되고, 부자 나리들을 위한 민주주의이기를 그친다. 이러한 확대와 함께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억압자, 착취자, 자본가에 대해서는 자유에 일련의 예외를 둔다. 인류를 임금노예제에서 해방하려면 우리는 그들을 진압해야 하고, 그들의 저항을 힘으로 꺾어야 한다. 진압이 있는 곳에는 폭력이 있고, 자유가 없고, 민주주의가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엥겔스는 베벨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것을 훌륭하게 표현했다. 독자도 기억하겠지만, 그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적들을 진압하기 위해 국가를 필요로 하며, 자유를 말할 수 있게 되면 국가는 없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민의 거대한 다수를 위한 민주주의, 그리고 인민의 착취자와 억압자를 힘으로 진압하는 것, 곧 그들을 민주주의에서 배제하는 것 —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할 때 민주주의가 겪는 변화다.

공산주의 사회에서만, 곧 자본가들의 저항이 이미 완전히 꺾이고, 자본가들이 사라지고, 계급이 없어졌을 때(다시 말해 사회적 생산수단에 대한 관계에 따라 사회 구성원 사이에 차이가 생기지 않을 때) — 그때에만 “국가가 사라지고 자유를 말할 수 있다”. 그때에만 참으로 완전한, 참으로 아무런 예외도 없는 민주주의가 가능해지고 실현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만 민주주의는 사멸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까닭은 단순하다. 자본주의적 노예제에서, 자본주의적 착취의 헤아릴 수 없는 공포와 야만과 부조리와 비열함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수백 년 전부터 알려져 있고 수천 년 동안 모든 습자 교본에서 되풀이되어 온 공동생활의 기본 규칙을 지키는 데 차츰 익숙해질 것이다. 폭력 없이, 강제 없이, 복종 없이, 국가라고 불리는 강제를 위한 특수한 기구 없이 그 규칙을 지키는 데 익숙해질 것이다.

“국가가 사멸한다”는 표현은 아주 잘 고른 것이다. 이 표현은 과정의 점진성과 자연발생성을 함께 가리키기 때문이다. 오직 습관만이 그런 작용을 할 수 있고, 틀림없이 할 것이다. 착취가 없다면, 분노를 일으키고 항의와 봉기를 부르며 진압의 필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사람들이 자기에게 필요한 공동생활의 규칙을 지키는 데 얼마나 쉽게 익숙해지는지를 우리는 주위에서 수백만 번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는 잘려 나간, 초라한, 가짜 민주주의, 부자만을 위한, 소수만을 위한 민주주의를 갖는다. 프롤레타리아트 독재, 곧 공산주의로의 이행기는 처음으로 인민을 위한, 다수를 위한 민주주의를 줄 것이며, 그와 나란히 소수, 곧 착취자를 필요한 만큼 진압할 것이다. 오직 공산주의만이 참으로 완전한 민주주의를 줄 수 있으며, 민주주의는 완전해질수록 더 빨리 필요 없게 되어 저절로 사멸할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에서 우리는 본래 의미의 국가, 곧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그것도 소수가 다수를 진압하기 위한 특수한 기계를 갖는다. 착취자 소수가 피착취자 다수를 체계적으로 진압하는 것 같은 일이 성공하려면 극도의 흉포함, 짐승 같은 진압이 필요하고 피의 바다가 필요하다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인류는 노예제, 농노제, 임금 고용의 상태에서 바로 그 피의 바다를 헤치며 자기 길을 걸어간다.

다음으로,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이행할 때 진압은 아직 필요하지만, 이제는 피착취자 다수가 착취자 소수를 진압하는 것이다. 특수한 기구, 진압을 위한 특수한 기계, 곧 “국가”는 아직 필요하지만, 이것은 이미 이행적 국가이며 이미 본래 의미의 국가가 아니다. 어제의 임금노예 다수가 착취자 소수를 진압하는 것은 비교적 쉽고 단순하며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노예, 농노, 임금노동자의 봉기를 진압하는 것보다 피를 훨씬 적게 흘리게 하고 인류에게 훨씬 값싸게 먹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진압은 주민의 압도적 다수에게 민주주의를 넓히는 일과 양립하며, 그래서 진압을 위한 특수한 기계의 필요는 사라지기 시작한다. 착취자들은 물론 그런 과제를 수행할 아주 복잡한 기계 없이는 인민을 진압할 수 없다. 그러나 인민은 아주 단순한 “기계”로도, 거의 “기계” 없이도, 특수한 기구 없이도, 무장한 대중의 조직만으로 착취자를 진압할 수 있다(미리 말해 두자면,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같은 것으로).

끝으로, 오직 공산주의만이 국가를 완전히 필요 없게 만든다. 진압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이 없다”는 것은 계급이라는 의미에서, 주민 가운데 특정 부분과 벌이는 체계적 투쟁이라는 의미에서다. 우리는 유토피아주의자가 아니며, 개별 인물들의 일탈 행위가 일어날 수 있고 불가피하다는 것도, 그런 일탈 행위를 진압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첫째, 그러려면 특수한 기계, 특수한 진압 기구가 필요 없다. 그 일은 무장한 인민 자신이 할 것이며, 오늘날의 사회에서도 문명인들이 모인 아무 무리나 싸우는 사람들을 떼어 놓거나 여성에게 폭력이 가해지지 않게 막는 것과 같은 단순함과 손쉬움으로 할 것이다. 그리고 둘째, 우리는 공동생활의 규칙을 어기는 일탈 행위의 근본적인 사회적 원인이 대중에 대한 착취, 대중의 궁핍과 빈곤이라는 것을 안다. 이 주된 원인이 제거되면 일탈 행위는 반드시 “사멸하기” 시작할 것이다. 얼마나 빨리, 어떤 점진적 과정을 거쳐 그렇게 될지 우리는 모르지만, 그것들이 사멸하리라는 것은 안다. 그것들이 사멸하면 국가도 사멸할 것이다.

마르크스는 유토피아에 빠지지 않고, 이 미래에 관해 지금 규정할 수 있는 것을 더 자세히 규정했다. 곧 공산주의 사회의 낮은 단계와 더 높은 단계(계단, 국면)의 구별이다.

3. 공산주의 사회의 첫째 단계

『고타강령 비판』에서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아래서 노동자가 “감소되지 않은” 또는 “완전한 노동 생산물”을 받는다는 라살레의 생각을 자세히 반박한다. 마르크스는 사회 전체의 사회적 노동 전체에서 예비 기금, 생산 확대를 위한 기금, “닳은” 기계의 보전 등을 빼야 하고, 다음으로 소비수단에서 관리 비용, 학교, 병원, 양로원 등을 위한 기금을 빼야 한다는 것을 보여 준다.

라살레의 흐릿하고 막연한 일반적 문구(“완전한 노동 생산물을 노동자에게”) 대신에, 마르크스는 사회주의 사회가 정확히 어떻게 살림을 꾸려 갈 수밖에 없을지를 냉정하게 계산해 보인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가 없을 그런 사회의 생활 조건을 구체적으로 분석하는 데로 나아가며,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다루는 것은”(노동자당 강령을 검토할 때) “그 자신의 기초 위에서 발전한 공산주의 사회가 아니라,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 막 나오는 공산주의 사회다. 따라서 이 사회는 모든 면에서, 경제적으로,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자기가 그 태내에서 나온 낡은 사회의 모반을 아직 지니고 있다.”

자본주의의 태내에서 이제 막 세상에 나온, 모든 면에서 낡은 사회의 모반을 지니고 있는 바로 이 공산주의 사회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의 “첫째” 단계 또는 낮은 단계라고 부른다.

생산수단은 이미 개인들의 사적 소유에서 벗어났다. 생산수단은 사회 전체에 속한다. 사회의 각 구성원은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일정한 몫을 수행하고, 이러이러한 양의 노동을 했다는 증서를 사회에서 받는다. 이 증서로 그는 소비수단을 쌓아 둔 사회의 창고에서 그에 해당하는 양의 생산물을 받는다. 그러므로 각 노동자는 사회적 기금으로 가는 노동량을 공제하고 나면 자기가 사회에 준 만큼을 사회에서 받는다.

“평등”이 지배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라살레가 이런 사회 질서(보통 사회주의라고 불리고, 마르크스에게서는 공산주의의 첫째 단계라는 이름을 가진 것)를 염두에 두고 이것이 “공정한 분배”이며 “평등한 노동 생산물에 대한 각자의 평등한 권리”라고 말할 때, 라살레는 잘못 생각하는 것이며, 마르크스는 그의 잘못을 해명한다.

마르크스는 말한다. 여기에 “평등한 권리”가 실제로 있지만, 이것은 아직 “부르주아적 권리”이며, 모든 권리가 그렇듯이 불평등을 전제한다. 모든 권리는 실제로는 똑같지 않고 서로 평등하지 않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척도를 적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등한 권리”는 평등의 침해이자 불공정이다. 실제로 각자는 다른 사람과 같은 몫의 사회적 노동을 하고 나서 — 사회적 생산물의 같은 몫을(앞에서 말한 공제를 하고) 받는다.

그런데 개인들은 평등하지 않다. 어떤 사람은 더 강하고 어떤 사람은 더 약하다. 어떤 사람은 결혼했고 어떤 사람은 하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은 아이가 많고 어떤 사람은 적다, 등등.

“…그러므로 같은 노동을 하고” 마르크스는 결론짓는다. “따라서 사회적 소비 기금에 같은 몫으로 참여해도, 실제로 한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받고, 다른 사람보다 더 부유해지는 등의 일이 생긴다. 이 모든 것을 피하려면 권리는 평등하기보다는 오히려 불평등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공산주의의 첫째 단계는 아직 공정과 평등을 줄 수 없다. 부의 차이, 그것도 불공정한 차이는 남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는 불가능해질 것이다. 공장, 기계, 토지 같은 생산수단을 사적 소유로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평등”과 “공정” 일반에 관한 라살레의 소부르주아적으로 흐릿한 문구를 깨부수면서 공산주의 사회의 발전 과정을 보여 준다. 이 사회는 처음에는 생산수단을 개인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불공정”만 폐기하는 데 그칠 수밖에 없고, (필요에 따라서가 아니라) “노동에 따라” 소비수단을 분배하는 데 있는 그다음 불공정까지 곧바로 폐기할 수는 없다.

속류 경제학자들은, 부르주아 교수들도, “우리의” 투간-바라놉스키도 포함해서, 사회주의자들이 인간의 불평등을 잊고 이 불평등을 폐기하기를 “꿈꾼다”고 늘 비난한다. 보다시피 이런 비난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그 나리들의 극단적 무지를 증명할 뿐이다.

마르크스는 사람들 사이의 피할 수 없는 불평등을 아주 정확하게 고려할 뿐 아니라, 생산수단이 사회 전체의 공동 소유로 넘어가는 것만으로는(보통 쓰는 말로 “사회주의”) 분배의 결함과 “부르주아적 권리”의 불평등이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도 고려한다. 생산물이 “노동에 따라” 나누어지는 한, “부르주아적 권리”는 계속 지배한다.

“…그러나 이 결함은” 마르크스는 이어 말한다. “오랜 산고 끝에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제 막 나온 모습 그대로의 공산주의 사회의 첫째 단계에서는 피할 수 없다. 권리는 결코 사회의 경제 구조와 그것이 조건 짓는 사회의 문화 발전보다 높을 수 없다…”

이렇게 공산주의 사회의 첫째 단계(보통 사회주의라고 부르는)에서 “부르주아적 권리”는 완전히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일부만, 이미 이루어진 경제적 변혁의 정도만큼만, 곧 생산수단에 대해서만 폐지된다. “부르주아적 권리”는 생산수단을 개인들의 사적 소유로 인정한다. 사회주의는 생산수단을 공동 소유로 만든다. 그만큼 — 그리고 그만큼만 — “부르주아적 권리”는 떨어져 나간다.

그러나 부르주아적 권리는 그 다른 부분에서는 여전히 남는다. 사회 구성원 사이에 생산물을 분배하고 노동을 배분하는 조정자(결정자)로서 남는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 이 사회주의 원칙은 이미 실현되었다. “같은 양의 노동에 같은 양의 생산물” — 이 사회주의 원칙도 이미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 공산주의가 아니며, 이것은 불평등한 사람들에게 불평등한(사실상 불평등한) 양의 노동에 대해 같은 양의 생산물을 주는 “부르주아적 권리”를 아직 제거하지 못한다.

마르크스는 이것이 “결함”이지만 공산주의의 첫째 단계에서는 피할 수 없다고 말한다. 유토피아주의에 빠지지 않고서는, 자본주의를 타도한 사람들이 곧바로 아무런 권리 규범 없이 사회를 위해 일하는 법을 배운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자본주의의 폐지는 그런 변화의 경제적 전제를 곧바로 주지 않는다.

그리고 “부르주아적 권리” 말고는 다른 규범이 없다. 그런 한에서, 생산수단의 공동 소유를 지키면서 노동의 평등과 생산물 분배의 평등을 지킬 국가가 아직 필요하다.

국가는 사멸해 간다. 자본가가 이미 없고, 계급이 이미 없으며, 따라서 어떤 계급도 진압할 수 없는 한에서.

그러나 국가는 아직 완전히 사멸하지 않았다. 사실상의 불평등을 신성시하는 “부르주아적 권리”를 지키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국가가 완전히 사멸하려면 완전한 공산주의가 필요하다.

4.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

마르크스는 이어 말한다.

“…공산주의 사회의 더 높은 단계에서, 곧 분업 아래 개인들을 예속시키는 종속이 사라진 뒤에, 그와 함께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도 사라진 뒤에, 노동이 삶의 수단일 뿐 아니라 그 자체가 삶의 첫째 욕구가 된 뒤에, 개인들의 전면적 발전과 더불어 생산력도 자라나 사회적 부의 모든 샘이 넘치도록 흘러나오게 된 뒤에 — 그때에야 비로소 부르주아적 권리의 좁은 지평을 완전히 넘어설 수 있고, 사회는 자기 깃발에 이렇게 쓸 수 있다.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이제야 우리는 엥겔스가 “자유”와 “국가”라는 낱말을 이어 붙이는 어리석음을 가차 없이 비웃었을 때 그 지적이 얼마나 옳았는지를 온전히 평가할 수 있다. 국가가 있는 한 자유는 없다. 자유가 있을 때는 국가가 없을 것이다.

국가가 완전히 사멸하는 경제적 기초는 공산주의가 아주 높이 발전하여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이 사라지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사회적 불평등의 가장 중요한 원천 가운데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며, 더구나 그것은 생산수단을 사회적 소유로 넘기는 것만으로는, 자본가를 수탈하는 것만으로는 곧바로 제거할 수 없는 원천이다.

이 수탈은 생산력을 거대하게 발전시킬 가능성을 줄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가 지금 이미 이 발전을 얼마나 믿기 어려울 만큼 가로막고 있는지, 이미 도달한 현대 기술을 바탕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앞으로 밀고 나아갈 수 있는지를 보면, 우리는 자본가의 수탈이 인간 사회의 생산력을 반드시 거대하게 발전시키리라고 완전한 확신을 가지고 말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이 발전이 얼마나 빨리 더 나아갈지, 얼마나 빨리 분업과의 결별에,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대립의 폐기에, 노동이 “삶의 첫째 욕구”로 바뀌는 데에 이를지, 이것을 우리는 모르며 알 수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의 불가피한 사멸에 관해서만 말할 권리가 있다. 이 과정이 오래 걸린다는 것, 그것이 공산주의의 더 높은 단계가 발전하는 속도에 달려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사멸의 시기나 구체적 형태에 관한 문제는 완전히 열어 둔 채로 말이다. 그런 문제를 풀 자료가 없기 때문이다.

국가는 사회가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라는 규칙을 실현할 때, 다시 말해 사람들이 공동생활의 기본 규칙을 지키는 데 아주 익숙해지고 그들의 노동이 아주 생산적이 되어 자발적으로 능력에 따라 일하게 될 때 완전히 사멸할 수 있다. 샤일록처럼 매정하게, 남보다 30분이라도 더 일하지는 않았는지, 남보다 보수를 덜 받지는 않는지 따지게 만드는 “부르주아적 권리의 좁은 지평” — 이 좁은 지평은 그때에는 넘어서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생산물을 분배하면서 각자가 받는 생산물의 양을 사회가 정해 줄 필요가 없을 것이다. 누구나 “필요에 따라” 자유롭게 가져갈 것이다.

부르주아적 관점에서는 이런 사회 구조를 “순전한 유토피아”라고 선언하고, 사회주의자들이 개별 시민의 노동을 전혀 통제하지 않으면서 누구에게나 송로버섯이든 자동차든 피아노든 얼마든지 사회에서 받을 권리를 약속한다고 이죽거리기 쉽다. 대다수 부르주아 “학자”들은 지금까지도 이런 이죽거림으로 얼버무리는데, 그로써 그들은 자기 무지와, 자본주의를 위한 사리사욕에 찬 변호를 함께 드러낸다.

무지라는 것은, 공산주의 발전의 더 높은 단계가 오리라고 “약속”하겠다는 생각은 어떤 사회주의자의 머리에도 떠오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위대한 사회주의자들은 그 단계가 오리라고 예견했지만, 그 예견은 지금과 같은 노동생산성을 전제하지 않으며, 포먈롭스키의 신학생들처럼 사회적 부의 창고를 “괜히” 망가뜨리고 불가능한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지금과 같은 속물을 전제하지도 않는다.

“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가 올 때까지 사회주의자들은 노동의 척도와 소비의 척도를 사회가, 그리고 국가가 가장 엄격하게 통제할 것을 요구한다. 다만 이 통제는 자본가의 수탈에서, 자본가에 대한 노동자의 통제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관리들의 국가가 아니라 무장한 노동자의 국가가 수행해야 한다.

부르주아 이데올로그들(그리고 체레텔리, 체르노프 나리들 일당 같은 그들의 졸개들)이 자본주의를 사리사욕으로 변호하는 방식은 바로, 먼 미래에 관한 논쟁과 이야기로 오늘의 정치의 절박하고 시급한 문제를 바꿔치기하는 데 있다. 그 문제란 자본가의 수탈, 모든 시민을 하나의 거대한 “신디케이트”, 곧 국가 전체의 노동자와 직원으로 바꾸는 것, 그리고 이 신디케이트 전체의 모든 일을 참으로 민주적인 국가,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국가에 완전히 종속시키는 것이다.

사실 학식 있는 교수가, 그 뒤를 따라 속물이, 또 그 뒤를 따라 체레텔리와 체르노프 나리들이 무모한 유토피아에 관해, 볼셰비키의 선동적 약속에 관해, 사회주의 “도입”의 불가능성에 관해 말할 때, 그들이 염두에 두는 것은 바로 공산주의의 더 높은 시기 또는 단계다. 그런데 그것을 “도입”하겠다고 약속한 사람은커녕 그럴 생각을 한 사람조차 없다. 그것은 애초에 “도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과학적 차이라는 문제에 이르렀다. 앞에서 인용한 엥겔스의 논의, 곧 “사회민주주의자”라는 이름이 옳지 않다는 논의에서 엥겔스가 건드렸던 문제다. 공산주의의 첫째 또는 낮은 단계와 더 높은 단계 사이의 정치적 차이는 시간이 지나면 아마 엄청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자본주의 아래서 그 차이를 따지는 것은 우스운 일이고, 그것을 전면에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기껏해야 일부 무정부주의자들뿐일 것이다(크로폿킨 같은 자들, 그라브, 코르넬리선과 그 밖의 무정부주의 “스타들”이 “플레하노프식으로” 사회배외주의자로, 또는 명예와 양심을 지킨 몇 안 되는 무정부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 게의 표현대로 참호 무정부주의자로 탈바꿈한 뒤에도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아직 무정부주의자 가운데 남아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과학적 차이는 분명하다. 보통 사회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회의 “첫째” 단계 또는 낮은 단계라고 불렀다. 생산수단이 공동 소유가 되는 만큼 여기에도 “공산주의”라는 말을 쓸 수 있다. 이것이 완전한 공산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말이다. 마르크스의 해명이 갖는 위대한 의의는, 그가 여기서도 유물론적 변증법, 곧 발전에 관한 학설을 일관되게 적용하여 공산주의를 자본주의에서 발전해 나오는 무엇으로 본다는 데 있다. 스콜라적으로 꾸며 낸, “지어낸” 정의와 낱말을 둘러싼 쓸데없는 논쟁(무엇이 사회주의이고 무엇이 공산주의인가) 대신에, 마르크스는 공산주의의 경제적 성숙의 계단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분석한다.

첫째 단계에서, 곧 그 첫 계단에서 공산주의는 경제적으로 완전히 성숙할 수도, 자본주의의 전통이나 흔적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다. 그래서 공산주의의 첫째 단계에서 “부르주아적 권리의 좁은 지평”이 보존된다는 흥미로운 현상이 생긴다. 소비 생산물의 분배에 관한 부르주아적 권리는 물론 부르주아 국가도 반드시 전제한다. 권리 규범을 지키도록 강제할 수 있는 기구가 없다면 권리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공산주의 아래서는 일정 기간 부르주아적 권리뿐 아니라 부르주아 국가까지 — 부르주아지 없이! — 남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것은 역설처럼, 또는 그저 변증법적 말장난처럼 보일 수도 있다. 마르크스주의의 아주 깊은 내용을 공부하려고 털끝만큼도 애쓰지 않은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를 두고 흔히 비난하는 그런 말장난 말이다.

그러나 실제로 삶은 자연에서나 사회에서나 새것 속에 남은 낡은 것의 찌꺼기를 걸음마다 보여 준다. 그리고 마르크스는 “부르주아적” 권리 한 조각을 공산주의에 제멋대로 끼워 넣은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태내에서 나오는 사회에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피할 수 없는 것을 취한 것이다.

민주주의는 자기 해방을 위해 자본가에 맞서 싸우는 노동자계급의 투쟁에서 엄청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결코 넘어가지 못할 한계가 아니라,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 가는 길 위의 한 국면일 뿐이다.

민주주의는 평등을 뜻한다. 평등을 계급의 폐기라는 뜻으로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평등을 위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과 평등이라는 구호가 얼마나 큰 의의를 갖는지는 분명하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형식적 평등만을 뜻한다. 그리고 생산수단의 소유에 관한 모든 사회 구성원의 평등, 곧 노동의 평등, 임금의 평등이 실현되자마자, 인류 앞에는 더 나아가는 문제, 곧 형식적 평등에서 사실상의 평등으로, 다시 말해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라는 규칙의 실현으로 나아가는 문제가 피할 수 없이 나설 것이다. 어떤 국면들을 거쳐, 어떤 실천적 조치들을 통해 인류가 이 더 높은 목표로 나아갈지 우리는 모르며 알 수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회주의를 무언가 죽은, 굳어 버린, 한 번에 영원히 주어진 것으로 여기는 통상적인 부르주아적 관념이 얼마나 끝없이 거짓된지를 똑똑히 깨닫는 것이다. 실제로는 사회주의와 함께 비로소, 사회생활과 개인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빠르고 진정한, 참으로 대중적인 전진, 주민 다수가, 그다음에는 주민 전체가 참여하는 전진이 시작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국가의 한 형태, 국가의 변종 가운데 하나다. 따라서 그것은 다른 모든 국가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폭력을 조직적, 체계적으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한 측면이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민주주의는 시민 사이의 평등, 곧 국가의 구조를 정하고 국가를 운영하는 데 대한 모두의 평등한 권리를 형식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이것은 다시 이런 사정과 연결되어 있다. 민주주의는 그 발전의 일정한 단계에서, 첫째로 자본주의에 맞서는 혁명적 계급인 프롤레타리아트를 단결시킨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적인, 설령 공화주의적-부르주아적이라 해도 부르주아적인 국가 기계, 곧 상비군, 경찰, 관리 집단을 분쇄하고, 산산이 부수고, 지상에서 쓸어 없애고, 그것들을 더 민주적이지만 여전히 국가 기계인 것으로, 곧 인민 전원이 민병에 참여하는 쪽으로 넘어가는 무장한 노동자 대중으로 바꿀 수 있게 해 준다.

여기서 “양이 질로 바뀐다”. 이런 정도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사회의 테두리를 벗어나는 것, 사회의 사회주의적 개조가 시작되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 정말로 모두가 국가 운영에 참여한다면 자본주의는 더는 버틸 수 없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발전은 다시 정말로 “모두가” 국가 운영에 참여할 수 있게 하는 전제를 만들어 낸다. 그런 전제로는, 가장 앞선 자본주의 나라 몇몇에서 이미 이루어진 전 국민의 문자 해득, 그리고 우편, 철도, 대공장, 대규모 상업, 은행업 따위의 거대하고 복잡하며 사회화된 기구가 수백만 노동자를 “훈련하고 규율을 잡아 주는” 것이 있다.

이런 경제적 전제가 있으면, 자본가와 관리를 타도하고, 생산과 분배를 통제하는 일과 노동과 생산물을 계산하는 일에서 그들을 무장한 노동자로, 전원이 무장한 인민으로 대신하는 데로 오늘 당장이라도, 하루아침에 넘어가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 (통제와 계산의 문제를 엔지니어, 농학자 등 과학 교육을 받은 인력의 문제와 혼동해서는 안 된다. 이 양반들은 오늘은 자본가에게 복종하며 일하고, 내일은 무장한 노동자에게 복종하며 더 잘 일할 것이다.)

계산과 통제 — 이것이 공산주의 사회의 첫째 단계를 “정비”하고 올바르게 작동시키는 데 필요한 주된 것이다. 여기서 모든 시민은 국가, 곧 무장한 노동자들에게 고용된 직원이 된다. 모든 시민이 하나의 전 인민적·국가적 “신디케이트”의 직원과 노동자가 된다. 요점은 그들이 노동의 척도를 올바르게 지키며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받는 것이다. 이것을 계산하고 이것을 통제하는 일은 자본주의가 극도로 단순하게 만들어 놓았다.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 산수의 네 가지 셈을 아는 것, 그에 맞는 영수증을 떼어 주는 일처럼, 글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아주 단순한 작업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인민의 다수가 이런 계산을, 자본가(이제 직원이 된)와 자본주의적 버릇을 간직한 지식인 나리들에 대한 이런 통제를 스스로, 어디서나 해 나가기 시작하면, 그때 이 통제는 참으로 보편적이고, 전반적이며, 전 인민적인 것이 되고, 그때는 그것을 어떻게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빠져나갈 곳이 아무 데도 없을” 것이다.

사회 전체가 노동의 평등과 보수의 평등을 갖춘 하나의 사무소, 하나의 공장이 될 것이다.

그러나 자본가를 이기고 착취자를 타도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 전체로 넓힐 이 “공장” 규율은 결코 우리의 이상도, 우리의 최종 목표도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착취의 비열함과 추악함을 사회에서 근본적으로 쓸어 내기 위해, 그리고 더 나아간 전진을 위해 필요한 한 계단일 뿐이다.

사회 구성원 모두가, 또는 적어도 그 압도적 다수가 스스로 국가를 운영하는 법을 배우고, 이 일을 스스로 손에 쥐고, 극소수의 자본가와, 자본주의적 버릇을 지키려는 나리들과, 자본주의에 깊이 타락한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를 “정비”한 그 순간부터 — 그 순간부터 온갖 운영 일반의 필요가 사라지기 시작한다. 민주주의가 완전할수록 그것이 필요 없게 되는 순간은 가까워진다. 무장한 노동자들로 이루어지고 “이미 본래 의미의 국가가 아닌” “국가”가 민주적일수록 모든 국가는 더 빨리 사멸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모두가 운영하는 법을 배우고, 실제로 사회적 생산을 스스로 운영하며, 놀고먹는 자, 귀족 도련님, 사기꾼 따위 “자본주의 전통의 수호자들”을 스스로 계산하고 통제할 때, 이 전 인민적 계산과 통제를 피하는 일은 반드시 믿기 어려울 만큼 어렵고 아주 드문 예외가 될 것이며, 아마도 아주 신속하고 엄중한 처벌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이다(무장한 노동자들은 현실 생활의 사람들이지 감상적인 지식인 나리들이 아니며, 자기들을 우습게 보는 짓을 좀처럼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 공동생활의 복잡하지 않은 기본 규칙을 지켜야 할 필요는 아주 빨리 습관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공산주의 사회의 첫째 단계에서 더 높은 단계로 넘어가는 문, 그와 함께 국가의 완전한 사멸로 넘어가는 문이 활짝 열릴 것이다.

제6장 기회주의자들의 마르크스주의 속류화

국가가 사회혁명에 대해, 사회혁명이 국가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문제는, 혁명 문제 일반과 마찬가지로, 제2인터내셔널(1889~1914년)의 가장 저명한 이론가와 평론가들의 관심을 아주 조금밖에 끌지 못했다. 그러나 1914년 제2인터내셔널을 파산으로 이끈 기회주의의 점진적 성장 과정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이 문제에 바싹 다가섰을 때조차 그것을 비켜 가려고 애썼거나 아예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말해,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국가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문제에서의 얼버무림, 기회주의에 유리하고 기회주의를 길러 준 이 얼버무림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왜곡과 완전한 속류화가 흘러나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슬픈 과정을 간략하게나마 특징짓기 위해, 가장 저명한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인 플레하노프와 카우츠키를 살펴보자.

1. 무정부주의자들과 플레하노프의 논쟁

플레하노프는 무정부주의가 사회주의에 대해 어떤 관계에 있느냐는 문제에 소책자 한 권을 따로 바쳤다. 1894년 독일어로 나온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다.

플레하노프는 무정부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가장 현실적이고 절박하며 정치적으로 가장 본질적인 것, 곧 혁명이 국가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문제와 국가 문제 일반을 완전히 비켜 가면서 이 주제를 다루는 재주를 부렸다! 그의 소책자는 두 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역사·문헌적 부분으로, 슈티르너, 프루동 등의 사상사에 관한 귀중한 자료를 담고 있다. 다른 하나는 속물적인 부분으로, 무정부주의자는 강도와 구별할 수 없다는 주제를 놓고 조잡하게 늘어놓은 논의다.

이 두 주제의 조합은 몹시 우스꽝스러우며, 러시아에서 혁명 전야와 혁명기 동안 플레하노프가 한 활동 전체를 더없이 잘 보여 준다. 플레하노프는 1905~1917년에 바로 그런 모습, 곧 반은 교조주의자이고 반은 속물이며 정치에서는 부르주아지의 꽁무니를 따라간 사람의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무정부주의자들과 논쟁하면서 혁명이 국가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관한 자기들의 견해를 누구보다 꼼꼼하게 밝힌 것을 보았다. 엥겔스는 1891년 마르크스의 『고타강령 비판』을 펴내면서 이렇게 썼다. “우리(곧 엥겔스와 마르크스)는 그때 바쿠닌과 그의 무정부주의자들과의 투쟁이 한창이었다. (제1)인터내셔널 헤이그 대회가 끝난 지 겨우 2년이 지났을 때였다.”

무정부주의자들은 바로 파리 코뮌을, 말하자면 “자기들의 것”, 자기들의 학설을 확인해 주는 것이라고 선언하려 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코뮌의 교훈도, 마르크스가 이 교훈을 분석한 것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낡은 국가 기계를 분쇄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것을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 이런 구체적·정치적 문제들에 대해 무정부주의는 진리에 대충이라도 가까운 것을 아무것도 내놓지 못했다.

그러나 국가 문제 전체를 비켜 가고 코뮌 전후의 마르크스주의 발전 전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채 “무정부주의와 사회주의”를 논한다는 것은 피할 수 없이 기회주의로 굴러떨어진다는 뜻이었다. 기회주의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바로 우리가 방금 지적한 두 문제가 아예 제기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미 기회주의의 승리다.

2. 기회주의자들과 카우츠키의 논쟁

카우츠키의 저작은 틀림없이 다른 어느 나라 문헌보다 러시아 문헌에 비할 수 없이 많이 번역되었다. 일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카우츠키는 독일에서보다 러시아에서 더 많이 읽힌다고 농담하는 것도 괜한 일이 아니다(덧붙여 말하자면, 이 농담에는 그것을 퍼뜨린 사람들이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깊은 역사적 내용이 있다. 곧 러시아 노동자들은 1905년 세계 최고의 사회민주주의 문헌 가운데서도 최고의 저작들을 유례없이 강하게, 전대미문으로 요구했고, 다른 나라에서는 들어 보지 못했을 만큼 많은 번역과 출판물을 얻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이웃한 더 선진적인 나라의 거대한 경험을, 말하자면 빠른 속도로 우리 프롤레타리아 운동의 젊은 토양에 옮겨 심었다).

우리나라에서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주의를 대중적으로 해설한 것 말고도, 기회주의자들, 그리고 그 우두머리인 베른슈타인과 벌인 논쟁으로 특히 유명하다. 그러나 1914~1915년의 가장 큰 위기 동안 카우츠키가 어떻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수치스러운 혼란과 사회배외주의 옹호로 굴러떨어졌는지를 추적하려는 사람이라면 지나칠 수 없는 사실 하나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그것은 바로, 카우츠키가 프랑스(밀랑과 조레스)와 독일(베른슈타인)의 가장 저명한 기회주의 대표자들에 맞서 나서기 전에 아주 크게 동요했다는 사실이다. 1901~1902년 슈투트가르트에서 나오며 혁명적 프롤레타리아의 견해를 옹호한 마르크스주의 잡지 《자랴》(새벽)는 카우츠키와 논쟁하지 않을 수 없었고, 1900년 파리 국제사회주의대회에서 그가 내놓은 결의안, 어중간하고 얼버무리며 기회주의자들과 타협하는 그 결의안을 “고무” 결의안이라고 불러야 했다. 독일 문헌에는 카우츠키가 베른슈타인을 치러 나서기 전에도 그에 못지않게 동요했음을 드러내는 그의 편지들이 실렸다.

그러나 그보다 비할 수 없이 더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사정이다. 카우츠키가 최근 마르크스주의를 배반한 역사를 연구하는 지금 우리는, 기회주의자들과 벌인 그의 논쟁 자체에서도, 그가 문제를 제기하고 다루는 방식에서도, 바로 국가 문제에서 기회주의 쪽으로 체계적으로 기울어 있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기회주의에 반대한 카우츠키의 첫 주요 저작, 그의 책 『베른슈타인과 사회민주주의 강령』을 보자.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을 자세히 반박한다. 그러나 특징적인 것은 이것이다.

베른슈타인은 헤로스트라토스처럼 악명을 떨친 『사회주의의 전제』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블랑키주의”라고 비난한다(이 비난은 그 뒤로 러시아의 기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 부르주아들이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자인 볼셰비키를 겨냥해 수천 번 되풀이했다). 이때 베른슈타인은 특히 마르크스의 『프랑스 내전』을 붙들고, 코뮌의 교훈에 대한 마르크스의 관점을 프루동의 관점과 동일시하려 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아주 서툰 시도다. 베른슈타인이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 1872년 서문에서 강조한 결론, 곧 “노동계급은 기성 국가 기계를 그냥 손에 넣어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움직일 수는 없다”는 결론이다.

베른슈타인은 이 경구가 몹시 “마음에 들어서” 자기 책에서 세 번 넘게 되풀이하며, 그것을 더없이 왜곡된 기회주의적 의미로 풀이한다.

우리가 보았듯이, 마르크스가 하려는 말은 노동계급이 국가 기계 전체를 분쇄하고, 깨부수고, 폭파해야(Sprengung, 폭파 — 엥겔스가 쓴 표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베른슈타인에게서는 마르크스가 이 말로 노동계급에게 권력을 장악할 때 지나치게 혁명적이 되지 말라고 경고한 것처럼 된다.

마르크스의 사상을 이보다 더 거칠고 흉하게 왜곡하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그러면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 소동을 지극히 상세하게 반박하면서 어떻게 했는가?

그는 이 점에서 기회주의가 마르크스주의를 얼마나 깊이 왜곡했는지 따져 보기를 피했다. 그는 위에 인용한 마르크스의 『내전』에 붙인 엥겔스 서문의 대목을 끌어오고는,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계급은 기성 국가 기계를 그냥 장악할 수는 없지만 일반적으로는 장악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것이 전부다. 베른슈타인이 마르크스의 실제 사상과 정반대되는 것을 마르크스에게 덮어씌웠다는 것, 마르크스가 1852년부터 국가 기계를 “분쇄”하는 것을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과제로 내세웠다는 것, 이에 대해 카우츠키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그 결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과제라는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기회주의를 가르는 가장 본질적인 차이가 카우츠키에게서는 흐릿해지고 말았다!

카우츠키는 베른슈타인에 “반대하여” 이렇게 썼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문제의 해결은 아주 안심하고 미래에 맡겨 두어도 된다.”(독일어판 172쪽)

이것은 베른슈타인에 반대하는 논쟁이 아니라 사실상 그에게 하는 양보이며, 기회주의에 진지를 내주는 것이다. 기회주의자들에게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과제에 관한 모든 근본 문제를 “아주 안심하고 미래에 맡겨 두는” 것 말고는 당분간 더 필요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1852년부터 1891년까지 40년 동안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국가 기계를 분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카우츠키는 1899년, 이 점에서 기회주의자들이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배반한 것을 눈앞에 두고, 이 기계를 분쇄해야 하느냐는 문제를 분쇄의 구체적 형태라는 문제로 바꿔치기하고는, 구체적 형태를 우리가 미리 알 수는 없다는 “논란의 여지 없는”(그리고 열매 없는) 속물적 진리의 그늘로 피신한다!!

프롤레타리아 당이 노동계급을 혁명에 대비시켜야 한다는 과제를 대하는 태도에서, 마르크스와 카우츠키 사이에는 심연이 놓여 있다.

다음으로, 역시 상당 부분 기회주의의 오류를 반박하는 데 바친, 카우츠키의 더 성숙한 저작을 보자. 그의 소책자 『사회 혁명』이다. 지은이는 여기서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체제”라는 문제를 특별한 주제로 삼았다. 지은이는 아주 귀중한 것을 많이 내놓았지만, 바로 국가 문제는 비켜 갔다. 소책자는 어디서나 국가권력의 쟁취를 이야기할 뿐이다. 곧 국가 기계를 파괴하지 않고도 권력을 쟁취하는 것을 허용하는 만큼 기회주의자들에게 양보하는 정식이 선택되었다. 마르크스가 1872년에 『공산당 선언』의 강령에서 “낡았다”고 선언한 바로 그것이 1902년 카우츠키에게서 되살아난다.

소책자에는 「사회 혁명의 형태와 무기」에 바친 특별한 절이 있다. 여기서는 대중적 정치 파업도, 내전도, “관료제와 군대 같은 현대 대국가의 권력 도구”도 이야기하지만, 코뮌이 이미 노동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엥겔스가 특히 독일 사회주의자들에게 국가에 대한 “미신적 숭배”를 경계하라고 한 것은 분명 괜한 일이 아니었다.

카우츠키는 문제를 이렇게 서술한다. 승리한 프롤레타리아트는 “민주주의 강령을 실현할 것”이라고 하고는 그 조항들을 늘어놓는다.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로 대체한다는 문제에서 1871년이 무엇을 새로 주었는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없다. 카우츠키는 “묵직하게” 들리는 이런 진부한 말로 때운다.

“지금의 질서 아래서 우리가 지배권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혁명 자체가 오래 걸리고 깊이 파고드는 투쟁을 전제하며, 이 투쟁은 지금 우리의 정치적·사회적 구조를 이미 바꾸어 놓을 것이다.”

이것이 “자명하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말이 귀리를 먹는다는 것, 볼가강이 카스피해로 흐른다는 것이 진리인 것과 마찬가지다. 아쉬운 것은 다만 “깊이 파고드는” 투쟁에 관한 공허하고 부풀린 문구로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절박한 문제를 비켜 간다는 점이다. 이전의 비프롤레타리아 혁명들과 달리 그 혁명의 “깊이”가 국가에 대해, 민주주의에 대해 도대체 무엇으로 표현되느냐는 문제 말이다.

이 문제를 비켜 가면서, 카우츠키는 말로는 기회주의에 무시무시한 전쟁을 선포하면서도 실제로는 이 가장 본질적인 지점에서 기회주의에 양보한다. 그는 “혁명의 이념”의 의의를 강조하거나(노동자들에게 혁명의 구체적 교훈을 선전하기를 두려워한다면 이 “이념”이 무슨 큰 값어치가 있겠는가?), “무엇보다 혁명적 이상주의”라고 말하거나, 영국 노동자들이 지금은 “소부르주아보다 나을 것이 거의 없다”고 선언한다.

카우츠키는 이렇게 쓴다.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 가장 다양한 기업 형태가 나란히 존재할 수 있다. 관료적(??), 노동조합적, 협동조합적, 개인적 형태가 그것이다.” … “예를 들어 철도처럼 관료적(??) 조직 없이는 해 나갈 수 없는 기업들이 있다. 여기서 민주적 조직은 이런 모습을 띨 수 있다. 노동자들이 대의원을 뽑고, 대의원들은 일종의 의회 같은 것을 이루며, 이 의회가 작업 규정을 정하고 관료적 기구의 운영을 감독한다. 다른 기업들은 노동조합에 맡길 수 있고, 또 다른 기업들은 협동조합 원칙에 따라 조직할 수 있다.”(러시아어 번역본 148쪽과 115쪽, 1903년 제네바판)

이 논의는 그릇되었다. 70년대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코뮌의 교훈을 예로 들어 설명한 것에 비하면 한 걸음 후퇴한 것이다.

꼭 필요하다는 “관료적” 조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철도는 대규모 기계제 공업의 모든 기업, 곧 어느 공장, 큰 상점, 대자본주의적 농업 기업과도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런 기업에서는 모두 기술이 가장 엄격한 규율을, 그리고 각자가 자기에게 할당된 몫의 일을 해낼 때 최대한의 정확성을 무조건 요구한다. 그러지 않으면 일 전체가 멈추거나 기계나 제품이 망가질 위험이 있다. 그런 기업에서는 모두 노동자들이 물론 “대의원을 뽑고, 대의원들은 일종의 의회 같은 것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핵심은 바로, 이 “일종의 의회 같은 것”이 부르주아 의회 제도라는 의미의 의회는 아닐 것이라는 데 있다. 핵심은 바로, 이 “일종의 의회 같은 것”이, 생각이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카우츠키가 상상하듯이 “규정을 정하고 관료적 기구의 운영을 감독하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 사회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대의원들로 이루어진 “일종의 의회 같은 것”은 물론 “규정을 정하고” “기구”의 “운영을 감독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기구는 “관료적”이지 않을 것이다. 노동자들은 정치권력을 쟁취한 뒤 낡은 관료적 기구를 분쇄하고, 그것을 밑바닥까지 부수고,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을 것이며, 그것을 바로 그 노동자와 직원들로 이루어진 새 기구로 대체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관료로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해,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자세히 분석한 조치들이 곧바로 취해질 것이다. 1) 선출제뿐 아니라 언제든 소환할 수 있게 하는 것, 2) 보수를 노동자 임금보다 높지 않게 하는 것, 3) 모두가 통제와 감독의 기능을 수행하고, 모두가 한동안 “관료”가 되며, 그렇기 때문에 아무도 “관료”가 될 수 없게 하는 데로 곧바로 넘어가는 것.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의 말을 전혀 곰곰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 “코뮌은 의회적 단체가 아니라 일하는 단체였으며, 법을 만드는 동시에 집행하는 단체였다.”

카우츠키는 부르주아 의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 사이의 차이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부르주아 의회주의는 (인민을 위한 것이 아닌) 민주주의를 (인민에 반하는) 관료주의와 결합한다.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는 관료주의를 뿌리째 잘라 내는 조치를 곧바로 취할 것이고, 그 조치를 끝까지, 곧 관료주의를 완전히 폐기하고 인민을 위한 민주주의를 완전히 도입하는 데까지 밀고 나갈 수 있을 것이다.

카우츠키는 여기서 국가에 대한 바로 그 “미신적 숭배”, 관료주의에 대한 “미신적 믿음”을 드러냈다.

기회주의자들에 반대한 카우츠키의 마지막이자 가장 훌륭한 저작, 그의 소책자 『권력에의 길』로 넘어가자(이 책은 러시아어로 나오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가 반동의 절정에 있던 1909년에 나왔기 때문이다). 이 소책자는 큰 진전이다. 1899년 베른슈타인에 반대한 소책자처럼 혁명 강령 일반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1902년 소책자 『사회 혁명』처럼 사회혁명이 닥쳐올 시기와 상관없이 그 과제를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혁명의 시대”가 다가오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구체적 조건들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계급 대립 일반의 첨예화와, 이 점에서 특히 큰 의의를 지니는 제국주의를 분명하게 지적한다. 서유럽에서 “1789~1871년의 혁명기”가 지난 뒤, 1905년부터 동방에서 비슷한 시기가 시작된다. 세계전쟁이 위협적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더는 시기상조의 혁명을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혁명기에 들어섰다.” “혁명의 시대가 시작된다.”

이런 선언들은 아주 분명하다. 카우츠키의 이 소책자는 독일 사회민주주의가 제국주의 전쟁 전에 무엇이 되겠다고 약속했는지, 그리고 전쟁이 터지자 (카우츠키 자신을 포함해) 얼마나 낮게 떨어졌는지를 견주어 보는 잣대가 되어야 한다. 카우츠키는 지금 다루는 소책자에서 이렇게 썼다. “지금의 정세는 사람들이 우리(곧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실제보다 더 온건하다고 여기기 쉽다는 위험을 안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독일 사회민주당은 보였던 것보다 비할 수 없이 더 온건하고 기회주의적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만큼 더 특징적인 것은, 이미 시작된 혁명의 시대에 대해 카우츠키가 이토록 분명하게 선언하면서도, 그 자신의 말에 따르면 바로 “정치 혁명”이라는 문제를 분석하는 데 바친 소책자에서 또다시 국가 문제를 완전히 비켜 갔다는 점이다.

이렇게 문제를 비켜 가고, 침묵하고, 얼버무린 것이 쌓여서 기회주의로의 완전한 이행이 불가피하게 생겨났다. 우리는 이제 그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는 카우츠키라는 인물을 통해 마치 이렇게 선언하는 것 같았다. 나는 혁명적 견해를 지킨다(1899년). 나는 특히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혁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정한다(1902년). 나는 새로운 혁명의 시대가 다가왔음을 인정한다(1909년). 그러나 국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과제라는 문제가 제기되면, 나는 그래도 마르크스가 이미 1852년에 말한 것을 거슬러 뒷걸음질한다(1912년).

바로 이렇게 판네쿠크와 카우츠키의 논쟁에서 문제가 정면으로 제기되었다.

3. 판네쿠크와 카우츠키의 논쟁

판네쿠크는 “좌파 급진” 조류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카우츠키에 맞섰다. 이 조류에는 로자 룩셈부르크, 카를 라데크 등이 속해 있었고, 이 조류는 혁명적 전술을 옹호하면서,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주의와 기회주의 사이에서 무원칙하게 흔들리는 “중앙파” 입장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확신으로 뭉쳐 있었다. 이 견해가 옳았다는 것은 전쟁이 충분히 증명했다. 전쟁 때 “중앙파”(마르크스주의라고 잘못 불리는) 조류, 곧 “카우츠키주의”는 그 역겨운 빈곤함을 남김없이 드러냈다.

판네쿠크는 국가 문제를 건드린 논문 「대중 행동과 혁명」(《노이에 차이트》, 1912, 제30년 제2권)에서 카우츠키의 입장을 “수동적 급진주의”, “무위의 기다림 이론”이라고 규정했다. “카우츠키는 혁명의 과정을 보려 하지 않는다.”(616쪽) 판네쿠크는 문제를 이렇게 제기하면서, 국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과제라는, 우리가 관심을 두는 주제에 다가갔다.

그는 이렇게 썼다. “프롤레타리아트의 투쟁은 단순히 국가권력을 둘러싸고 부르주아지에 맞서는 투쟁이 아니라 국가권력에 맞서는 투쟁이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내용은 국가의 권력 도구를 폐기하고 그것을 프롤레타리아트의 권력 도구로 밀어내는(말 그대로는 해체, Auflösung) 것이다… 투쟁은 그 최종 결과로서 국가 조직의 완전한 파괴가 이루어질 때에야 비로소 끝난다. 다수자의 조직은 지배하는 소수자의 조직을 폐기함으로써 자기의 우월성을 증명한다.”(548쪽)

판네쿠크가 자기 생각을 담아낸 정식에는 아주 큰 결함이 있다. 그러나 생각 자체는 그래도 분명하며, 카우츠키가 그것을 어떻게 반박했는지가 흥미롭다.

그는 이렇게 썼다. “지금까지 사회민주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의 대립은, 전자는 국가권력을 쟁취하려 했고 후자는 그것을 파괴하려 했다는 데 있었다. 판네쿠크는 둘 다 원한다.”(724쪽)

판네쿠크의 서술이 불명확하고 구체성이 모자란다면(여기서 다루는 주제와 관계없는 그의 논문의 다른 결함들은 말하지 않겠다), 카우츠키는 판네쿠크가 짚어 낸 바로 그 원칙적 핵심을 붙들었고, 바로 그 근본적인 원칙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입장을 통째로 버리고 완전히 기회주의로 넘어갔다. 그는 사회민주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의 차이를 완전히 그릇되게 규정했고, 마르크스주의를 결정적으로 왜곡하고 속류화했다.

마르크스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1) 전자는 국가의 완전한 폐기를 목표로 삼으면서도, 이 목표는 사회주의 혁명이 계급들을 폐기한 뒤에야, 국가의 사멸로 이어지는 사회주의 수립의 결과로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인정한다. 후자는 그런 폐기가 실현될 수 있는 조건을 이해하지 못한 채 오늘에서 내일 사이에 국가를 완전히 폐기하기를 바란다. (2) 전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정치권력을 쟁취한 뒤 낡은 국가 기계를 완전히 파괴하고, 그것을 코뮌 유형에 따라 무장한 노동자들의 조직으로 이루어진 새 기계로 대체해야 한다고 인정한다. 후자는 국가 기계의 파괴를 옹호하면서도, 프롤레타리아트가 그것을 무엇으로 대체할지, 혁명 권력을 어떻게 쓸지에 대해서는 아주 흐릿하게 생각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은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이용하는 것, 곧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마저 부정한다. (3) 전자는 현대 국가를 이용해 프롤레타리아트를 혁명에 대비시킬 것을 요구한다. 무정부주의자들은 이것을 부정한다.

이 논쟁에서 카우츠키에 맞서 마르크스주의를 대표하는 것은 바로 판네쿠크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낡은 국가기구를 새로운 손에 넘긴다는 의미에서 국가권력을 그냥 쟁취할 수는 없으며, 이 기구를 분쇄하고 부수어 새 기구로 대체해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 바로 마르크스였기 때문이다.

카우츠키는 마르크스주의를 떠나 기회주의자들에게로 간다. 그에게서는 기회주의자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바로 이 국가 기계의 파괴가 완전히 사라지고, “쟁취”를 다수의 단순한 획득으로 해석할 수 있는 빠져나갈 구멍이 그들에게 남겨지기 때문이다.

카우츠키는 자신의 마르크스주의 왜곡을 가리려고 경전 구절만 외는 사람처럼 행동한다. 그는 마르크스 자신의 “인용문”을 내민다. 1850년 마르크스는 “국가권력의 손에 힘을 단호하게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썼다. 그러고는 카우츠키가 의기양양하게 묻는다. 판네쿠크는 “중앙집권제”를 파괴하려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이미 그냥 요술이다. 중앙집권제 대신 연방제를 내세우는 견해를 두고 마르크스주의와 프루동주의를 동일시한 베른슈타인의 수법과 닮은 요술이다.

카우츠키가 가져온 “인용문”은 뜬금없다. 중앙집권제는 낡은 국가 기계로도, 새 국가 기계로도 가능하다. 노동자들이 자발적으로 자기들의 무장력을 통합한다면 그것은 중앙집권제일 것이다. 그러나 그 중앙집권제는 중앙집권적 국가기구, 곧 상비군, 경찰, 관료제의 “완전한 파괴” 위에 서 있을 것이다. 카우츠키는 코뮌에 관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너무나 잘 알려진 논의를 비켜 가고 문제와 관계없는 인용문을 끌어내면서 완전히 사기꾼처럼 행동한다.

카우츠키는 이어서 말한다. “…어쩌면 판네쿠크는 관리들의 국가 기능을 폐기하려는 것일까? 그러나 우리는 국가 행정은 말할 것도 없고 당 조직과 노동조합 조직에서도 관리 없이 해 나가지 못한다. 우리 강령은 국가 관리의 폐기가 아니라 인민에 의한 관리 선출을 요구한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미래 국가’에서 행정기구가 어떤 모습을 띨 것이냐가 아니라, 우리의 정치 투쟁이 국가권력을 우리가 쟁취하기도 전에(카우츠키의 강조) 폐기하느냐(말 그대로는 해체하느냐, auflöst)다. 어떤 부처가 그 관리들과 함께 폐기될 수 있겠는가?” 교육부, 법무부, 재무부, 국방부가 열거된다. “아니다, 지금의 어느 부처도 정부에 맞선 우리의 정치 투쟁으로 제거되지 않을 것이다… 오해를 피하려고 되풀이하겠다. 문제는 승리한 사회민주주의가 ‘미래 국가’에 어떤 형태를 줄 것이냐가 아니라, 우리의 반대 활동이 지금의 국가를 어떻게 바꾸느냐다.”(725쪽)

이것은 명백한 속임수다. 판네쿠크는 바로 혁명에 관해 문제를 제기했다. 이것은 그의 논문 제목에도, 인용한 대목들에도 분명히 쓰여 있다. 카우츠키는 “반대 활동”의 문제로 건너뛰면서 바로 혁명적 관점을 기회주의적 관점으로 바꿔치기한다. 그에게서는 이렇게 된다. 지금은 반대 활동을 하고, 권력을 쟁취한 뒤에 따로 이야기하자. 혁명은 사라진다! 이것이 바로 기회주의자들이 바라던 것이다.

문제는 반대 활동도, 정치 투쟁 일반도 아니고 바로 혁명이다. 혁명은 프롤레타리아트가 “행정기구”와 국가기구 전체를 파괴하고, 그것을 무장한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새 기구로 대체하는 데 있다. 카우츠키는 “부처”에 대한 “미신적 숭배”를 드러낸다. 그런데 왜 부처들은, 이를테면 전권을 쥐고 모든 권력을 가진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아래 둔 전문가 위원회로 대체될 수 없는가?

문제의 핵심은 “부처”가 남느냐, “전문가 위원회”나 그 밖의 어떤 기관이 생기느냐에 있지 않다.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낡은 국가 기계(수천 가닥의 실로 부르주아지와 이어져 있고 판에 박힌 관행과 타성에 속속들이 젖어 있는)가 유지되느냐, 아니면 그것이 파괴되고 새 기계로 대체되느냐에 있다. 혁명은 새로운 계급이 낡은 국가 기계를 이용해 명령하고 다스리는 데 있어서는 안 되며, 이 계급이 그 기계를 분쇄하고 새로운 기계를 이용해 명령하고 다스리는 데 있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이 기본 사상을 카우츠키는 흐릿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관리에 관한 그의 물음은 그가 코뮌의 교훈과 마르크스의 학설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우리는 당 조직과 노동조합 조직에서도 관리 없이 해 나가지 못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아래서, 부르주아지가 지배하는 동안에는 관리 없이 해 나가지 못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억압당하고, 근로 대중은 자본주의에 예속되어 있다. 자본주의 아래서 민주주의는 임금 노예제, 대중의 궁핍과 빈곤이라는 환경 전체 때문에 좁혀지고, 짓눌리고, 잘려 나가고, 불구가 된다. 그 때문에, 오직 그 때문에, 우리의 정치 조직과 노동조합 조직에서 공직자들은 자본주의라는 환경 때문에 타락하며(더 정확히 말하면 타락하는 경향이 있으며), 관료로, 곧 대중에게서 떨어져 나와 대중 위에 서 있는 특권적 인물로 바뀌는 경향을 보인다.

바로 이것이 관료주의의 본질이다. 그리고 자본가들이 수탈되지 않는 한, 부르주아지가 타도되지 않는 한, 그때까지는 프롤레타리아 공직자들조차 어느 정도 “관료화”되는 것은 피할 수 없다.

카우츠키에게서는 이렇게 된다. 선출된 공직자들이 남는다면, 사회주의 아래서도 관리가 남고 관료제가 남는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틀렸다. 마르크스는 바로 코뮌을 예로 들어, 사회주의 아래서 공직자들은 “관료”이기를, “관리”이기를 그만둔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선출제에 더하여 언제든 소환할 수 있게 하고, 거기에 더해 보수를 노동자 평균 수준으로 낮추고, 또 거기에 더해 의회 제도를 “일하는, 곧 법을 만들고 그것을 실행에 옮기는” 기관으로 대체하는 것에 비례하여 그만두는 것이다.

사실 판네쿠크에 맞선 카우츠키의 논증 전체, 특히 우리가 노동조합 조직에서도 당 조직에서도 관리 없이 해 나가지 못한다는 카우츠키의 훌륭한 논거는, 카우츠키가 마르크스주의 일반에 반대한 베른슈타인의 낡은 “논거”를 되풀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베른슈타인은 자신의 배교적 저서 『사회주의의 전제』에서 “원시적” 민주주의의 사상, 그가 “교조적 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것, 곧 명령적 위임, 보수를 받지 않는 공직자, 무력한 중앙 대의 기관 등과 싸운다. 이 “원시적” 민주주의가 쓸모없다는 증거로 베른슈타인은 웹 부부가 해석한 영국 노동조합의 경험을 끌어댄다. 노동조합들은 70년 동안, 그것도 “완전한 자유 속에서”(독일어판 137쪽) 발전했다는데, 그러면서 바로 원시적 민주주의가 쓸모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보통의 민주주의, 곧 관료주의와 결합된 의회주의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노동조합들은 “완전한 자유 속에서”가 아니라 완전한 자본주의적 노예 상태 속에서 발전했다. 그런 상태에서는 물론 판치는 악, 폭력, 불의, 빈민을 “상층” 행정의 일에서 배제하는 것 등에 일련의 양보를 하지 “않고는 해 나갈 수 없다”. 사회주의 아래서는 “원시적” 민주주의의 많은 것이 불가피하게 되살아날 것이다. 문명사회의 역사에서 처음으로 주민 대중이 투표와 선거뿐 아니라 일상적 행정에도 자주적으로 참여하는 데까지 올라설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아래서는 모두가 차례로 다스릴 것이고, 아무도 다스리지 않는 데 금방 익숙해질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 천재적인 비판적·분석적 지성으로 코뮌의 실천적 조치들에서 전환을 보았다. 기회주의자들은 비겁함 때문에, 부르주아지와 돌이킬 수 없이 결별하기 싫어서 이 전환을 두려워하고 인정하려 하지 않으며, 무정부주의자들은 성급함 때문에, 또는 대중적 사회 변혁의 조건 일반을 이해하지 못해서 이 전환을 보려 하지 않는다. “낡은 국가 기계를 파괴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필요가 없다. 부처와 관리 없이 우리가 어떻게 해 나가겠는가.” 기회주의자는 이렇게 따진다. 그는 속물근성에 속속들이 젖어 있고, 사실상 혁명을, 혁명의 창조력을 믿지 않을 뿐 아니라 혁명을 죽도록 두려워한다(우리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원들이 그것을 두려워하듯이).

“오직 낡은 국가 기계의 파괴만 생각해야 한다. 이전 프롤레타리아 혁명들의 구체적 교훈을 파고들 것도, 파괴되는 것을 무엇으로, 어떻게 대체할지 분석할 것도 없다.” 무정부주의자는 이렇게 따진다(물론 무정부주의자 가운데 가장 나은 사람 이야기이지, 크로폿킨 씨네와 그 일당을 따라 부르주아지 꽁무니를 쫓아가는 그런 무정부주의자 이야기가 아니다). 그래서 무정부주의자에게서는 절망의 전술이 나온다. 구체적 과제에 대한 혁명적 작업, 무자비하게 대담하면서도 동시에 대중 운동의 실천적 조건을 헤아리는 혁명적 작업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우리에게 두 오류를 다 피하라고 가르친다. 낡은 국가 기계 전체를 파괴하는 데서 몸을 사리지 않는 대담함을 가르치면서, 동시에 문제를 구체적으로 제기하라고 가르친다. 코뮌은 더 많은 민주주의와 관료주의 근절을 위한 위의 조치들을 실행하면서, 몇 주 만에 바로 이런 방식으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국가 기계를 건설하기 시작할 수 있었다. 코뮌 전사들에게서 혁명적 대담함을 배우자. 그들의 실천적 조치들에서 실천적으로 절박하고 당장 가능한 조치들의 윤곽을 보자. 그러면 이 길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관료주의의 완전한 파괴에 이를 것이다.

이런 파괴의 가능성은 다음과 같은 것으로 보장된다. 사회주의는 노동일을 줄이고, 대중을 새로운 삶으로 끌어올리며, 주민 다수를 예외 없이 모두가 “국가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조건에 놓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국가 일반의 완전한 사멸로 이어진다.

카우츠키는 이어서 말한다. “…대중 파업의 과제는 결코 국가권력을 파괴하는 데 있을 수 없고, 다만 정부가 어떤 특정 문제에서 양보하게 만들거나, 프롤레타리아트에 적대적인 정부를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다가서는(entgegenkommende) 정부로 바꾸는 데 있을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결코, 어떤 조건에서도 이것은”(곧 적대적인 정부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는) “국가권력의 파괴로 이어질 수 없고, 다만 국가권력 내부의 세력 관계에 일정한 이동(Verschiebung)을 가져올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우리 정치 투쟁의 목표는 이때에도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의회에서 다수를 획득함으로써 국가권력을 쟁취하고 의회를 정부의 주인으로 만드는 것이다.”(726, 727, 732쪽)

이것은 이미 더없이 순수하고 더없이 저속한 기회주의이며, 말로는 혁명을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혁명을 포기하는 것이다. 카우츠키의 생각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다가서는 정부”를 넘어서지 못한다. 『공산당 선언』이 “지배계급으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조직”을 선포한 1847년에 비하면 속물근성으로 한 걸음 후퇴한 것이다.

카우츠키는 그가 좋아하는 “통일”을 샤이데만, 플레하노프, 반데르벨데 같은 자들과 이루어야 할 것이다. 이들은 모두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다가서는” 정부를 위해 싸우는 데 동의한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주의를 배반한 이 자들과 갈라설 것이며, 무장한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이 정부가 되도록 낡은 국가 기계 전체의 파괴를 위해 싸울 것이다. 이것은 “크게 다른 두 가지 일”이다.

카우츠키는 레기엔과 다비트, 플레하노프, 포트레소프, 체레텔리, 체르노프 같은 자들과 즐거운 동무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들은 “국가권력 내부의 세력 관계 이동”을 위해, “의회에서 다수를 획득하고 의회가 정부 위에 전권을 쥐도록” 싸우는 데 아무 이견이 없다. 참으로 고귀한 목표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기회주의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고, 모든 것이 부르주아 의회공화국의 테두리 안에 머문다.

그러나 우리는 기회주의자들과 갈라설 것이다. 그리고 자각한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우리와 함께 “세력 관계의 이동”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타도를 위해, 부르주아 의회주의의 파괴를 위해, 코뮌 유형의 민주공화국 또는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 공화국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독재를 위해 싸울 것이다.

국제 사회주의에서 카우츠키보다 오른쪽에 서 있는 것은 이런 조류들이다. 독일의 《사회주의 월보》(레기엔, 다비트, 콜프와 그 밖의 많은 사람, 스칸디나비아인인 스타우닝과 브란팅도 포함된다), 프랑스와 벨기에의 조레스파와 반데르벨데, 이탈리아 당 우파의 투라티, 트레베스와 그 밖의 대표자들, 영국의 페이비언주의자들과 “독립파”(실제로는 늘 자유주의자들에게 의존해 온 “독립노동당”) 등등. 이 신사들은 모두 당의 의회 활동과 언론 활동에서 거대한, 아주 흔히 압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를 대놓고 부정하고 노골적인 기회주의를 실행한다. 이 신사들에게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민주주의와 “모순된다”!! 그들은 사실상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자들과 진지하게 다른 점이 하나도 없다.

이런 사정을 고려하면, 우리는 제2인터내셔널이 그 공식 대표자들의 압도적 다수에서 완전히 기회주의로 굴러떨어졌다고 결론 내릴 권리가 있다. 코뮌의 경험은 잊혔을 뿐 아니라 왜곡되었다. 노동 대중에게 그들이 나서서 낡은 국가 기계를 분쇄하고 그것을 새 기계로 대체하며, 그렇게 하여 자기의 정치적 지배를 사회의 사회주의적 개조의 토대로 바꾸어야 할 때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기는커녕, 대중에게는 그 반대가 주입되었고, “권력 쟁취”는 기회주의에 수천 개의 빠져나갈 구멍이 남도록 그려졌다.

국가들은 제국주의적 경쟁 때문에 군사 기구를 강화하고 군사적 괴물로 바뀌었으며, 영국이냐 독일이냐, 이 금융자본이냐 저 금융자본이냐 누가 세계를 지배할 것인가 하는 다툼을 결판내려고 수백만 명을 몰살하고 있다. 이런 때에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국가에 대해 어떤 관계를 맺느냐는 문제를 왜곡하고 묵살한 것은 거대한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초판 후기

이 소책자는 1917년 8월과 9월에 썼다. 나는 이미 다음 장, 곧 제7장 「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들의 경험」의 계획을 세워 두었다. 그러나 제목 말고는 이 장을 한 줄도 쓰지 못했다. 정치적 위기, 곧 1917년 10월 혁명 전야가 “방해했기” 때문이다. 이런 “방해”는 반가울 따름이다. 그러나 소책자의 둘째 권(「1905년과 1917년 러시아 혁명들의 경험」에 바칠 것)은 아마 오랫동안 미뤄야 할 것 같다. “혁명의 경험”은 그것에 관해 쓰는 것보다 직접 겪어 나가는 편이 더 즐겁고 더 유익하다.

지은이

페트로그라드

1917년 11월 3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