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11월 혁명
제정을 무너뜨린 노동자·병사 평의회는 왜 사회주의 공화국이 아니라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귀결되었는가?
1918년 11월 킬 수병 봉기가 전국의 노동자·병사 평의회로 번져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SPD의 에베르트는 최고사령부와 손잡고 평의회를 국민의회 선거로 이끌었고, 1919년 1월 봉기와 3월 투쟁,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은 자유군단에게 진압되었다. 그 과정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되었고, 8월 바이마르 헌법이 발효되었다.
패전과 킬 수병 봉기
1918년 가을 독일군의 패배가 분명해지자, 10월 초 자유주의 성향의 막스 폰 바덴 공이 재상이 되어 사회민주당(SPD)을 처음으로 내각에 들이고 연합국에 휴전을 요청했다. 10월 28일의 헌법 개정으로 제국은 의회에 책임지는 입헌군주제가 되었다. 개혁은 위에서 이루어졌고, 전쟁에 지친 병사와 노동자는 아직 움직이기 전이었다. 1 2 3
그러나 해군 지휘부는 10월 24일 정부 몰래 영국 함대와의 마지막 결전을 명령했다. 휴전을 코앞에 두고 목숨을 버릴 생각이 없던 빌헬름스하펜의 수병들이 출항을 거부했고, 해군은 작전을 취소한 뒤 수백 명을 체포했다. 11월 3일 킬에서 동료의 석방을 요구하며 행진하던 수병과 노동자에게 군이 발포해 최소 9명이 죽었다. 이튿날 노동자는 총파업에 들어갔고, 진압에 나선 병사들까지 합류하면서 킬은 노동자·병사 평의회의 손에 들어갔다. 4 2
평의회의 확산과 11월 9일
베를린 정부는 SPD의 구스타프 노스케를 킬에 보내 사면을 약속하게 했지만, 수병들은 이미 이웃 도시로 흩어져 봉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11월 7일까지 뤼베크·브레멘·함부르크에서 쾰른과 뮌헨까지 평의회가 권력을 잡았다. 뮌헨에서는 독립사회민주당(USPD)의 쿠르트 아이스너가 11월 8일 바이에른 인민국을 선포했고, 월말까지 모든 연방 군주가 피 흘림 없이 물러났다. 평의회는 대부분 SPD·USPD 당원으로 채워졌고, 군 지휘부의 권한은 빼앗았지만 사유재산과 관료 조직은 건드리지 않았다. 2 4 5
SPD 지도자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막스 공에게 「황제가 퇴위하지 않으면 사회혁명은 피할 수 없다.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죄악처럼 증오한다」고 말했다. 11월 9일 베를린 거리가 시위대로 가득 차자 막스 공은 권한 없이 황제의 퇴위를 발표하고 재상직을 에베르트에게 넘겼다. 같은 날 오후 필리프 샤이데만이 제국의회 창문에서 공화국을 선포했고, 몇 시간 뒤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왕궁 발코니에서 「자유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했다. 빌헬름 2세는 이튿날 네덜란드로 망명했다. 2 6 7
인민대표평의회와 에베르트–그뢰너 협약
11월 9일 밤 리하르트 뮐러와 에밀 바르트가 이끄는 베를린 대공장의 혁명적 직장위원들이 제국의회를 점거하고 이튿날 평의회 선거를 소집했다. 11월 10일 SPD의 에베르트·샤이데만·란즈베르크와 USPD의 후고 하제·디트만·바르트가 동수로 참여한 인민대표평의회가 구성되었고, 부슈 서커스장에 모인 베를린 평의회가 이를 승인했다. 대베를린 노동자·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가 형식상 최고 기관이었으나 실권은 에베르트 정부에 있었다. 2 8 9)
같은 날 밤 에베르트는 비밀 전화선으로 최고사령부의 빌헬름 그뢰너 장군과 합의했다. 군은 새 정부를 지지하고, 정부는 장교단의 지휘 체계를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뢰너는 회고록에 「옛 프로이센주의의 가장 좋고 강한 요소가 새 독일을 위해 구제되었다」고 썼다. 11월 11일 에르츠베르거가 콩피에뉴에서 휴전 협정에 서명해 전쟁이 끝났다. 10 2 3
11월 12일 인민대표평의회는 계엄과 검열을 풀고 정치범을 사면했으며, 결사·집회·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20세 이상 모든 남녀의 보통선거와 8시간 노동제를 약속했다. 여성 참정권이 처음으로 약속된 것이다. 제정기의 관료·법원·학교는 거의 그대로 남았다. 2 8
사회화의 좌절과 평의회 대회
USPD의 요구로 카를 카우츠키와 루돌프 힐퍼딩 등이 참여한 사회화위원회가 꾸려졌지만, 석탄 산업 국유화를 검토하다 1919년 4월 아무 성과 없이 해산했다. 그사이 11월 15일 노조 지도자 카를 레기엔과 중공업계의 후고 슈티네스는 노조를 교섭 상대로 인정하고 8시간 노동제와 사업장 노동자위원회를 두는 협정을 맺었다. 노조는 오랜 요구를 얻었지만, 사기업을 인정함으로써 생산수단의 사회화는 더 멀어졌다. 2 11
12월 6일 무장 학생과 병사들이 에베르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려는 쿠데타를 시도했고, 같은 날 근위 연대가 스파르타쿠스단 시위에 발포해 16명이 죽었다. 12월 10일 에베르트는 귀환 부대를 맞으며 「어떤 적도 여러분을 이기지 못했다」고 연설해 뒷날 「등 뒤의 칼」 신화의 빌미가 되었다. 12월 16일 베를린에서 열린 전국 노동자·병사 평의회 대회는 평의회에 전권을 주자는 스파르타쿠스단·USPD의 동의를 부결하고, 1919년 1월 19일 국민의회 선거를 결정했다. 대회는 계급장 폐지와 장교 선출 등 군 민주화를 담은 「함부르크 조항」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으나 최고사령부의 반대로 시행되지 않았다. 2 12
크리스마스 위기와 공산당 창당
킬에서 올라와 정부 청사를 지키던 인민해군사단이 좌파 쪽으로 기울자 정부는 12월 23일 부대 축소와 급여 중단을 명령했다. 수병들이 총리 청사를 점거하고 SPD의 오토 벨스를 인질로 잡자, 에베르트는 비밀 전화선으로 최고사령부와 연락해 24일 아침 왕궁 마구간을 공격하게 했다. 무장 노동자들이 수병 편에 서면서 정부군은 56명을 잃고 물러났다. USPD는 12월 29일 항의하며 정부에서 탈퇴했고, 그 자리에 들어온 노스케는 국내의 적을 상대할 자유군단을 키우기 시작했다. 13 2 14
12월 30일부터 스파르타쿠스단과 좌파 사회주의자들이 모여 독일 공산당(KPD)을 창당했다. 창당 강령이 된 로자 룩셈부르크의 「스파르타쿠스단은 무엇을 원하는가」는 「독일 전체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대다수가 분명하고 명확하게 원하지 않는 한」 결코 권력을 잡지 않겠다고 밝혔다. 룩셈부르크는 국민의회 선거 참여를 제안했지만, 대회는 62 대 23으로 선거 거부를 결의했다. 혁명적 직장위원들은 새 당에 합류하지 않고 USPD에 남았다. 15 16 17 2
1월 봉기와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살해
1919년 1월 4일 프로이센 정부가 USPD 소속 베를린 경찰청장 에밀 아이히호른을 해임하자, 이튿날 수십만 명이 거리로 나왔고 일부는 기차역과 SPD 기관지 『포어베르츠』 사옥 등 신문사 구역을 점거했다. 53명의 임시혁명위원회는 정부 타도를 선언했지만 방향을 제시하지 못했다. 리프크네히트는 무장 봉기를 지지했고, 룩셈부르크와 요기헤스, 라데크는 시기상조라고 보았다. 인민해군사단조차 중립을 선언했다. 2 18
1월 8일 정부는 「폭력에는 폭력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고 선언했다. 11일 자유군단이 중화기로 『포어베르츠』 건물을 탈환했고, 항복 협상을 하러 나온 여섯 명을 즉결 처형했다. 12일까지 봉기는 끝났고 사망자는 156명으로 추산된다. 룩셈부르크는 14일 「베를린에 질서가 섰다」에서 「너희의 질서는 모래 위에 세워졌다」고 썼고, 리프크네히트의 마지막 글은 「그럼에도 불구하고!」였다. 2 19 20
1월 15일 저녁 두 사람은 빌머스도르프의 은신처에서 붙잡혀 근위기병소총사단에 넘겨졌다. 참모 장교 발데마르 파프스트의 명령으로 둘은 개머리판으로 구타당한 뒤 머리에 총을 맞았고, 룩셈부르크의 시신은 란트베어 운하에 버려져 7월 1일에야 발견되었다. 가해자들은 대부분 처벌받지 않았다. 파프스트는 1962년 노스케와 에베르트가 자신의 행동을 승인했다고 주장했으나 확인된 적은 없다. 2 21 22
3월 투쟁과 평의회 공화국들
11월에 기대한 사회화와 평의회 인정이 이루어지지 않자 1919년 1~3월 상부 슐레지엔, 루르, 작센과 튀링겐에서 총파업이 이어졌다. 베를린에서는 3월 4일 USPD와 KPD가 부른 총파업이 시가전으로 번졌고, 9일 노스케는 무기를 든 자를 발견 즉시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16일까지 최소 1,200명이 죽었다. 요기헤스는 3월 10일 감옥에서 살해되었다. 1월 10일 선포된 브레멘 평의회 공화국은 2월 4일 정부군과 자유군단에 진압되었다. 23 2 24 25
바이에른에서는 1월 선거에서 참패한 아이스너가 사임하러 의회로 가던 2월 21일 극우 청년 장교 아르코발라이 백작에게 암살되었다. 4월 6~7일 밤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소식에 고무된 독립사회민주당원과 아나키스트들이 에른스트 톨러를 앞세워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을 선포했고, 호프만 정부는 밤베르크로 피했다. KPD 의장 파울 레비는 이를 「혁명적 모험주의」라 비판했지만, 13일 KPD가 권력을 잡아 오이겐 레비네가 이끌었다. 26 27 2
레비네 정부는 붉은 군대를 조직하고 공장을 노동자 관리에 넘겼지만, 식량 부족이 심해졌다. 4월 말 붉은 군대 측이 인질들을 처형했고, 5월 1~3일 국방군과 자유군단이 뮌헨을 점령했다. 이 진압에서 약 600명이 죽었다. 레비네는 군사 법정에서 「우리 공산주의자는 모두 휴가 중인 죽은 사람들이다」라고 말했고, 6월 5일 슈타델하임 감옥에서 총살되었다. 27 28 2
바이마르 국민의회와 헌법
1919년 1월 19일 여성이 처음으로 투표한 국민의회 선거에서 SPD가 약 38%로 제1당이 되어 가톨릭 중앙당, 독일민주당과 「바이마르 연정」을 꾸렸다. USPD는 7.6%에 그쳤고 KPD는 참여하지 않았다. 혼란한 베를린을 피해 2월 6일 바이마르에서 개원한 의회는 11일 에베르트를 임시 대통령으로, 13일 샤이데만을 총리로 뽑았다. 29 30 2
샤이데만은 베르사유 조약 조건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사임했지만, 의회는 연합국의 압박 속에 6월 조약 수락을 결의했고 6월 28일 조약이 서명되었다. 7월 31일 의회는 새 헌법을 262 대 75로 채택했고, 에베르트가 8월 11일 서명해 14일 발효되었다. 헌법은 기본권 목록과 의회 책임 내각을 두었지만, 대통령에게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긴급명령을 내릴 수 있는 제48조의 권한을 주었다. 6 31 32
혁명의 결과와 해석
혁명은 제정을 무너뜨리고 여성 참정권, 8시간 노동제, 의회 민주주의를 남겼지만, 군과 관료, 사법부, 대기업은 거의 그대로 살아남았다. 공화국을 지키려 불러낸 자유군단은 1920년 카프 폭동으로 공화국 자체를 겨누었고, 그 대원들 상당수는 뒤에 나치 운동으로 흘러갔다.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살해와 노스케의 진압은 SPD와 공산주의자 사이에 메울 수 없는 골을 남겼다. 2 33 14
해석은 오래 갈렸다. 서독의 다수 역사가는 당시 선택지가 의회 민주주의와 볼셰비키식 독재뿐이었다고 보고 에베르트의 선택을 옹호했지만, 1960년대 이후 연구는 평의회 운동의 온건한 다수와 민주적 개혁의 여지를 재평가했다. 직장위원 지도자 리하르트 뮐러는 1920년대에 세 권짜리 혁명사를 썼고, 피에르 브루에는 1971년 『독일 혁명 1917~1923』에서 이를 유럽 혁명의 좌절이라는 시각으로 다시 서술했다. 2 9) 34
결과
제정이 끝나고 여성 참정권과 8시간 노동제, 의회 민주주의를 갖춘 바이마르 공화국이 섰다. 그러나 군·관료·사법부는 그대로 남았고, 자유군단은 뒤에 공화국을 겨누었다.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분열은 되돌릴 수 없게 되었다.
연표와 지도
- 1918.10.03막스 폰 바덴 내각
자유주의 성향의 재상이 SPD를 입각시키고 휴전을 요청했다.
- 11918.10.29빌헬름스하펜 수병 항명
마지막 출격 명령에 수병들이 출항을 거부했다.
- 21918.11.03킬의 발포와 봉기
수병 행진에 발포해 최소 9명이 죽었고, 이튿날 평의회가 도시를 장악했다.
- 31918.11.08바이에른 인민국 선포
쿠르트 아이스너가 뮌헨에서 왕정 폐지를 선포했다.
- 41918.11.09공화국 선포
샤이데만이 제국의회에서, 리프크네히트가 왕궁에서 각각 공화국을 선포했다.
- 1918.11.10인민대표평의회와 에베르트–그뢰너 협약
SPD·USPD 동수 정부가 서고, 에베르트가 최고사령부와 비밀 합의를 맺었다.
- 51918.11.11콩피에뉴 휴전
에르츠베르거가 휴전 협정에 서명해 전쟁이 끝났다.
- 1918.11.15슈티네스–레기엔 협정
노조 인정과 8시간 노동제를 맞바꾼 노사 협정이 맺어졌다.
- 1918.12.16전국 평의회 대회
평의회 전권안을 부결하고 국민의회 선거를 결정했다.
- 1918.12.24크리스마스 위기
정부군의 인민해군사단 공격이 실패하고 USPD가 정부를 떠났다.
- 1918.12.30독일 공산당 창당
스파르타쿠스단이 좌파 그룹들과 공산당을 세웠다.
- 1919.01.051월 봉기
아이히호른 해임에 항의한 시위가 신문사 구역 점거로 번졌다.
- 1919.01.15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살해
자유군단 장교들이 두 지도자를 붙잡아 살해했다.
- 1919.01.19국민의회 선거
여성이 처음으로 투표했고 SPD가 제1당이 되었다.
- 61919.02.04브레멘 평의회 공화국 진압
정부군과 자유군단이 도시를 점령했다.
- 71919.02.06바이마르 국민의회 개원
의회는 11일 에베르트를 임시 대통령으로 뽑았다.
- 1919.02.21아이스너 암살
바이에른 총리가 극우 장교의 총에 맞았다.
- 1919.03.09베를린 3월 투쟁
노스케가 무장자 즉결 사살을 명령했고 최소 1,200명이 죽었다.
- 1919.04.07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
톨러를 앞세운 평의회 공화국이 선포되고, 13일 레비네의 KPD가 권력을 잡았다.
- 1919.05.03뮌헨 점령
국방군과 자유군단의 진압으로 약 600명이 죽었다.
- 81919.06.28베르사유 조약 서명
국민의회가 연합국의 압박 속에 조약을 수락했다.
- 1919.08.11바이마르 헌법
에베르트가 서명한 헌법이 14일 발효되었다.
관련 인물 21명
SPD 혁명정부5
지도부3
평의회 운동과 공산주의 좌파11
지도부5
11월 9일 제국의회를 점거한 직장위원을 이끌었고 평의회 정권의 형식상 수반이었다.
스파르타쿠스단 · 독일 공산당 창당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공산당 강령을 쓰고 1월 봉기를 시기상조로 보았으나 봉기 뒤 살해되었다.
사회주의 공화국 선포 · 1월 봉기카를 리프크네히트1871–191911월 9일 왕궁에서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했고 1월 봉기를 지지하다 살해되었다.
바이에른 인민국 총리쿠르트 아이스너1867–191911월 8일 뮌헨에서 왕정 폐지를 선포했고 1919년 2월 암살되었다.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 지도자오이겐 레비네1883–1919KPD가 권력을 잡은 평의회 공화국을 이끌었고 진압 뒤 총살되었다.
참여6
1월 봉기를 시기상조로 보았고 1919년 3월 감옥에서 살해되었다.
공산당 창당 대회의 볼셰비키 사절카를 라데크1885–1939창당 대회에 참석하고 1월 봉기에 반대했으며 1919년 2월 체포되었다.
독일 공산당 지도부빌헬름 피크1876–19601월 봉기를 호소했고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살아남았다.
독일 공산당 의장파울 레비1883–1930룩셈부르크 사후 당을 이끌며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을 모험주의로 비판했다.
스파르타쿠스단 창립자프란츠 메링1846–1919공산당 창당을 함께했고 1919년 1월 말 숨졌다.
USPD · 뒤에 독일 공산당클라라 체트킨1857–1933스파르타쿠스단과 함께했고 1919년 공산당에 합류했다.
구체제와 군4
집행 · 지휘2
출처: 자료 1자료 2자료 3자료 4자료 5자료 6자료 7자료 8자료 9자료 10자료 11자료 12자료 13자료 14자료 15자료 16자료 17자료 18자료 19자료 20자료 21자료 22자료 23자료 24자료 25자료 26자료 27자료 28자료 29자료 30자료 31자료 32자료 33자료 34
← 역사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