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07.04–11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와 미르바흐 암살

볼셰비키의 유일한 연립 상대였던 좌파 사회혁명당은 왜 1918년 7월 독일 대사를 암살했나? 체카 의장 제르진스키는 어떻게 자기 부대의 인질이 되었고, 라트비아 소총병은 어떻게 하루 만에 봉기를 끝냈나? 이 사건은 정권을 빼앗으려는 봉기였나, 강화를 깨려는 무장 시위였나, 아니면 볼셰비키의 함정이었나?

브레스트 강화와 농촌 곡물 징발에 맞선 좌파 사회혁명당은 제5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패하자 1918년 7월 6일 체카 요원 블륨킨과 안드레예프를 보내 독일 대사 미르바흐를 암살했다. 포포프의 체카 전투부대는 제르진스키를 인질로 잡고 전신국을 차지했으나 크렘린으로 움직이지 않았고, 7월 7일 라트비아 소총병의 포격에 무너졌다. 독일은 전쟁을 재개하지 않았고, 좌파 사회혁명당은 소비에트에서 쫓겨나 볼셰비키의 동등한 상대는 사라졌다.

볼셰비키의 유일한 연립 상대는 왜 1년도 안 되어 등을 돌렸나?

10월 혁명 직후 소비에트 정부에는 볼셰비키만 있지 않았다. 사회혁명당에서 갈라져 나온 좌파 사회혁명당은 1917년 12월 인민위원회의에 들어가 농업, 국가재산, 사법, 우편·전신, 지방자치 인민위원부를 맡았다. 사회혁명당은 러시아 농민을 대표한다고 자부해 온 정당이었고, 그 좌파는 전쟁에 반대하고 소비에트 권력을 지지한 흐름이었다. 볼셰비키가 도시 노동자에게 기대었다면 이 당은 농촌과 잇는 다리였다. 두 당의 첫 결렬 지점은 전쟁이었다. 1918년 3월 소비에트 대회가 독일과 맺은 브레스트 강화를 비준하자 좌파 사회혁명당은 항의의 뜻으로 인민위원회의를 떠났다. 다만 이것은 완전한 결별이 아니었다. 당원들은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위원부 참사회, 군사 기관에 그대로 남았고, 특히 체카에서는 뱌체슬라프 알렉산드로비치가 제르진스키의 부의장으로 일하고 있었다. 이 어중간한 자리가 7월의 사건을 가능하게 했다. 1 2 3

브레스트 강화는 이 당에게 국제 혁명의 포기였다. 독일군은 조약 뒤에도 우크라이나를 점령해 헤트만 정권을 세웠고, 핀란드에서는 적군을 무너뜨리는 데 힘을 보탰다. 좌파 사회혁명당의 세르게이 므스티슬랍스키는 「전쟁이 아니라 봉기다」라는 구호로 점령지 민중이 독일군에 맞서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국가 대 국가의 전쟁을 할 군대는 없어도 게릴라 항전과 봉기는 가능하며, 그것이 독일 병사들에게 혁명을 옮길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뜻밖에도 당의 얼굴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는 처음에 이 흐름의 반대편에 있었다. 그는 4월 당대회에서 강화는 「궁핍과 굶주림, 싸우기를 원치 않는 민중의 뜻이 서명한 것」이라고 동지들을 설득하려 했다. 그러나 그는 5~6월 사이에 입장을 바꾸어 볼셰비키와의 마지막 연결 고리에서 가장 격렬한 비판자로 돌아섰다. 무엇이 그를 바꾸었는지는 농촌 정책을 보아야 이해된다. 4 2 5 6

1918년 봄 도시는 굶주리고 있었고, 농민은 정해진 싼값에 곡물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정부는 5월 식량인민위원부에 비상 권한을 주는 식량 독재를 선포했고, 무장한 징발대를 농촌으로 보냈다. 6월 11일에는 콤베디(빈농위원회)를 세워 농촌의 빈농을 곡물 수집의 협력자로 삼았다. 콤베디는 곡물을 찾아내는 기구인 동시에, 좌파 사회혁명당이 강했던 농촌 소비에트를 밀어내는 기구이기도 했다. 좌파 사회혁명당도 곡물 국가 독점 자체를 버리자고 한 것은 아니었고, 곡물을 공산품과 교환하되 지방 소비에트가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 정책은 도시와 농촌을 전쟁으로 몰아넣고 있었다. 스피리도노바가 의장인 중앙집행위원회 농민부에는 농촌의 항의가 쏟아졌다. 2 6 7

6월에는 정치적 갈등이 겹쳤다. 6월 14일 중앙집행위원회는 우파·중도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를 쫓아내고 각급 소비에트에도 같은 조치를 권했다. 좌파 사회혁명당의 블라디미르 카렐린은 소비에트 대회만이 위원회 구성을 바꿀 수 있다며 이 결정이 불법이라고 했다. 6월 22일에는 발트 함대를 얼음 속에서 구해 낸 함대 지휘관 알렉세이 샤스트니가 혁명재판소의 판결로 총살되었다. 좌파 사회혁명당 간부회 위원들은 판결 취소를 요구했지만 다수결로 밀렸다. 사형제에 평생 맞서 온 이 당에게 이것은 쓰라린 일이었다. 7월 초의 충돌은 이렇게 전쟁, 곡물, 소비에트 민주주의, 사형이라는 네 갈래 불만이 한꺼번에 터진 것이었다. 2 8 4

왜 대회장의 표결 대신 대사 암살을 택했나?

결정은 대회가 열리기 전에 나왔다. 6월 24일 스피리도노바가 주재한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는 브레스트 조약이 만든 「숨 돌릴 틈」을 끝내야 한다며 독일 제국주의의 대표적 인물들을 겨냥한 테러를 조직하기로 결의했다. 이를 맡을 뷰로에는 스피리도노바와 일리야 마요로프 등이 뽑혔다. 다만 이 결의에는 구체적인 이름이 없었고 시기는 다음 회의에서 정하기로 되어 있었다. 6월 28일부터 7월 1일까지 열린 제3차 당대회는 정부의 식량 정책을 도시와 농촌 사이의 파멸적 전선을 만드는 것이라고 비난하고, 「러시아와 세계 혁명에 파멸적인 브레스트 조약을 혁명적 방법으로 파기한다」고 결의해 실행을 중앙위원회에 맡겼다. 그래도 당은 먼저 합법적인 길을 시도했다. 지방의 곡물 투쟁으로 지지가 늘고 있었으므로 당원들은 제5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다수를 차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7 9 10 2 4

7월 4일 저녁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제5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자 그 기대는 무너졌다. 좌파 사회혁명당의 대의원은 352~353명(약 30%), 볼셰비키는 745~773명이었다. 당원들은 도시 2만 5천 명당 1명, 농촌 12만 5천 명당 1명인 대표 비율을 문제 삼았고, 볼셰비키가 자격이 의심스러운 대의원으로 다수를 만들어 냈다고 비난했다. 분위기는 험악했다. 5일 보리스 캄코프는 징발대와 빈농위원회를 농촌에서 쓸어내겠다고 외쳤고, 스피리도노바는 볼셰비키를 「혁명의 배신자」이자 케렌스키 정부 정책의 계승자라 불렀다. 인민위원회의 보고에 나선 레닌의 연설은 「미르바흐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라는 야유로 끊겼다. 정부 불신임과 브레스트 조약 폐기, 대독 선전포고를 요구한 좌파 사회혁명당의 제안은 부결되었고, 당원들은 대회장을 떠났다. 2 4 7 10

누가 언제 암살 명령을 내렸는지는 아직도 분명하지 않다. 블륨킨은 1919년 진술에서 7월 4일 저녁 「중앙위원 한 사람」이 불러 미르바흐를 죽이기로 했다고 말했다고 했다(그 사람을 프로시얀으로 보는 역사가들이 있다). 이후에는 스피리도노바가 중앙위원회 이름으로 지시했다고도 했고, 스피리도노바 자신도 1937년 NKVD에 보낸 편지에서 암살을 지휘했다고 썼다. 그러나 6월 24일과 7월 6일 사이에 중앙위원회가 따로 모인 기록이 없어, 당 전체의 결정이 아니라 지도부 일부가 진행했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날짜에 대해서 리처드 파이프스는 7월 6일이 볼셰비키에 가장 충실한 라트비아 부대의 명절(야니 축일)이라는 점도 고려되었다고 본다. 대회에 나온 대의원 대부분과 체카 부의장 알렉산드로비치까지 무엇이 준비되는지 몰랐다는 것이 영어권 연구의 설명이다. 10 11 7 4 2

7월 6일 오후 독일 대사관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나?

암살자는 체카 사람이었다. 야코프 블륨킨은 스무 살도 안 된 오데사 출신 좌파 사회혁명당원으로, 그 6월 당의 결정으로 체카에 들어가 국제 첩보 대응 분과를 맡고 독일 대사관을 감시했다. 니콜라이 안드레예프는 같은 분과의 사진사였다. 구실로 삼은 것은 체카가 쥐고 있던 「대사의 친척」 로베르트 미르바흐 사건이었는데, 먼 친척이라는 설명 자체가 블륨킨이 만들어 낸 것에 가까웠다. 두 사람은 대사와 직접 관련된 일로 협상할 권한을 준다는 체카 신임장을 들고 갔다. 제르진스키의 서명은 위조였고 도장은 알렉산드로비치가 찍어 주었다. 알렉산드로비치가 무엇을 알고 찍었는지는 자료마다 설명이 다르다. 그는 차량 배차 쪽지도 써 주었고, 두 사람은 체카 수병이 모는 차에 권총과 폭탄을 숨긴 서류 가방을 싣고 데네주니 골목 5번지의 대사관으로 갔다. 11 10 4 3

빌헬름 폰 미르바흐는 처음에는 나오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참사관 쿠르트 리츨러와 통역 뮐러를 데리고 응접실에 나왔다. 그는 이 일을 조약에 따른 외교 경로로 처리하겠다고 답했다. 오후 3시 조금 전, 블륨킨이 권총을 뽑아 세 사람에게 쏘았으나 모두 빗나갔다. 리츨러와 뮐러가 몸을 숙이는 사이 미르바흐는 옆방으로 달아나다 뒤에서 총을 맞아 쓰러졌고, 폭탄이 터져 유리창이 부서졌다. 치명상을 입힌 사람은 대부분의 기록이 안드레예프로 적는다. 다만 뒷날 블륨킨은 스스로 「내가 미르바흐를 죽였다」고 자랑하고 다녔고, 안드레예프 쪽 소문을 굳이 부인했다. 미르바흐는 15시 15분 무렵 죽었다. 암살자들은 창문으로 뛰어내려 담을 넘다 블륨킨이 다리를 다쳤다. 현장에는 자기 이름이 적힌 신임장이 든 서류 가방과 모자가 남았고, 목격자 두 명도 살아 있어 범인은 그날 바로 밝혀졌다. 12 4 11 10

미르바흐가 표적이 된 것은 그가 브레스트 강화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그는 강화 협상에 참여한 뒤 1918년 4월부터 모스크바에서 대사로 일했다. 독일어권 연구에 인용되는 전보에 따르면 그는 5~6월 베를린에 볼셰비키 정부를 유지할 자금을 요청하면서, 6월 25일 편지로는 「우리는 중환자의 침상 곁에 있다」며 이 정부의 앞날을 비관하고 다른 세력도 준비해 두라고 건의했다. 좌파 사회혁명당의 눈에 그는 「처형자」였다. 또한 대사관은 6월 중순부터 위협을 받고 있었다. 소식을 들은 레닌은 스베르들로프와 함께 오후 5시 무렵 대사관으로 가 사과했다. 독일 쪽 기록은 그 사과가 「개의 코처럼 차가웠다」고 적었다. 미국 총영사 드위트 풀이 그날 저녁 본국으로 보낸 전보에는 범인이 차로 와서 창문으로 폭탄을 던졌다고 되어 있어, 혼란 속 소문이 어떻게 퍼졌는지도 보여 준다. 12 13 2 14

제르진스키는 왜 인질이 되었고, 봉기 측은 무엇을 했나?

범인들이 달아난 곳은 체카 자신의 부대였다. 체카 전투부대는 발트 함대 수병 드미트리 포포프가 지휘했고, 대원은 대부분 핀란드인과 수병이었으며 트료흐스뱌티텔스키 골목의 모로조프 저택에 본부를 두었다. 대사관 소식을 듣고 체카 의장 펠릭스 제르진스키는 직접 체카 요원 몇 명만 데리고 본부로 가서 블륨킨을 내놓으라고 요구했고, 문을 부수며 수색했다. 그는 뜻밖에 거기 모여 있던 중앙위원들과 마주쳤다. 제르진스키는 프로시얀과 카렐린에게 체포를 선언하고 포포프를 그 자리에서 쏘겠다고 위협했으나 곧 제 부하인 알렉산드로비치에게 무장을 해제당했다. 알렉산드로비치는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그대들을 체포한다」고 말했다. 저녁에 그를 대신하러 나선 마르틴 라치스도 루뱐카 체카 건물에서 붙잡혔다. 경비대가 포포프 부대원들이었기 때문이다.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 표트르 스미도비치를 포함해 볼셰비키 간부 27명이 인질이 되었고, 대의원 니콜라이 아벨만은 차를 빼앗기다 죽었다. 2 4 3 15 6

포포프 부대는 도시에서 가장 위험한 무장력이었다. 병력은 자료에 따라 500여 명에서 800명, 최대 1,800명까지 다르게 적히고, 대포 8문과 기관총 수십 정, 장갑차를 가졌다. 그럼에도 이들은 크렘린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일부 수병이 체카와 중앙 우체국, 중앙 전신국을 차지하고 호소문을 내보냈을 뿐이다. 호소문은 「처형자 미르바흐가 죽었다」며 노동자와 적군 병사에게 독일의 첩자들과 맞서라고 촉구했다. 프로시얀이 이끈 무리가 전신국을 지키러 온 라트비아 소총병 두 중대를 무장 해제하고 보낸 전보에는 좌파 사회혁명당이 권력을 잡았다는 표현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포포프는 체포된 라트비아 연대 위원회 의장에게 「우리는 소비에트 권력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타협적 패거리에 반대한다」고 말했고, 봉기 측은 크렘린 출입증을 갖고도 레닌도 볼셰비키 대의원도 체포하지 않았다. 2 4 15 10 16

스피리도노바는 그 사이 볼쇼이 극장으로 돌아갔다. 대의원들에게 사실을 직접 알리고 대회를 움직이려는 생각이었다. 그는 「러시아 인민은 미르바흐에게서 해방되었다」고 선언하고 탁자 위로 올라가 「들어라, 대지여!」라고 외쳤다고 전한다. 이미 늦었다. 대회 쪽에서 볼셰비키 분파를 모은다며 볼셰비키를 내보낸 뒤 야코프 페테르스 등이 문에서 신분증을 검사했고, 약 450명의 좌파 사회혁명당 대의원이 극장 안에 갇혔다. 대부분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몰랐다. 어둠 속에서 그들은 연설을 하고 「인터내셔널」을 불렀다. 포포프는 「마루샤(스피리도노바)를 위해서라면 크렘린 절반이라도 날려 버리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이튿날 아침 레프 카메네프가 와서 이들은 이제 분파가 아니라 반란을 일으킨 당의 당원이라고 통보했다. 2 4 10 7

라트비아 소총병은 어떻게 하루 만에 봉기를 끝냈나?

볼셰비키 지도부도 처음에는 자신이 없었다. 레닌은 체카 전체가 반기를 들었다고 여겼고, 소식을 듣고는 「창백해진 정도가 아니라 하얗게 질렸다」고 본치-브루예비치는 회고했다. 모스크바 수비대의 다른 부대들은 봉기 측으로 넘어가거나 중립을 지켰고, 트로츠키의 명령을 따른 것은 소수뿐이었다. 믿을 만한 것은 라트비아 소총병이었으나, 그들을 이끄는 제국군 대령 출신 이오아킴 바체티스조차 믿을 수 없었다. 레닌은 정치위원 네 명을 붙여서야 그의 봉사를 받겠다고 했고, 트로츠키는 그가 넘어가지 않았는지 네 번이나 물었다. 그날 라트비아인들은 호딘카 벌판에서 명절을 쇠고 있었다. 바체티스는 그들을 불러들여 약 3,300명을 모았다. 지휘는 레닌, 트로츠키, 스베르들로프, 포드보이스키, 무랄로프로 이루어진 비상 5인이 맡았다. 이들은 각 구역에 통행증 없는 수상한 사람을 체포할 순찰대를 세우고, 전화국 경비를 교체했으며, 대의원들을 공장으로 보냈다. 2 4 17

새벽 2시로 잡았던 공격은 병력이 제때 오지 않아 미뤄졌고, 밤새 쏟아진 폭우와 아침 안개도 발을 묶었다. 7월 7일 오전 라트비아 포대가 대포를 약 200걸음 앞까지 끌어다 놓고 협상을 시도했으나 결렬되었다. 에두아르트 베르진의 포대는 11시 30분 무렵 모로조프 저택을 직접 포격했다. 건물 안에 제르진스키와 인질들이 있는 것을 알면서 쏜 것이었고, 트로츠키는 나중에 포격이 「이례적으로 정확했다」고 대회에 보고했다. 첫 포탄으로 본부가 무너지고 지휘가 끊겼다. 중앙위원들은 곧 건물을 떠났고, 포포프와 유리 사블린이 부대를 이끌고 로고지스카야 쪽으로 빠져나갔다. 오후 2시 무렵 모든 것이 끝났다. 약 400명이 붙잡혔고 인질들은 풀려났다. 레닌은 바로 다음 날 신문 대담에서 봉기가 러시아를 전쟁 직전까지 몰고 갔다고 주장하며 「악마들, 결국 우리를 전쟁으로 몰았구나」라는 노파의 말을 인용했다. 4 10 15 2 3 6 16

봉기는 모스크바 밖으로 번지지 못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는 대부분의 좌파 사회혁명당 조직이 모스크바 소식도 모른 채 무장 해제되었다. 싸움이 벌어진 곳은 옛 황실 시종 학교뿐이었다. 여기서 젊은 수비병 350~380명이 7월 7일 저녁 포격을 받고 약 150명이 항복했다. 비텝스크, 블라디미르, 오르샤 등지에서도 무장 부대가 해산되었다. 같은 날 야로슬라블에서 일어난 야로슬라블 봉기는 사빈코프 계열의 반볼셰비키 무장 봉기로 이 사건과 별개였지만, 그날 오후 레닌의 얼마 안 되는 병력이 그쪽으로 이동해 모스크바가 더 위태로워졌다. 4 2

봉기 뒤 소비에트 정권은 어떻게 달라졌나?

처벌은 빨랐으나 범위는 뜻밖에 좁았다. 얼굴을 바꾸고 쿠르스크 역으로 달아나던 알렉산드로비치가 붙잡혀, 「나는 중앙위원회의 결정대로 했을 뿐이며 심문에 답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7월 8일 포포프 부대 체카 요원 12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정부는 200명을 총살했다고 발표했지만 실제 처형은 이 13명이었다. 대의원들은 대부분 풀려났고, 스피리도노바 등 13명이 크렘린으로 옮겨졌다가 다시 줄었다. 체카는 달라졌다. 제르진스키는 암살 사건의 증인이 되어 7월 7일 의장에서 물러났고, 페테르스가 공산당원만으로 위원회를 새로 짰다. 제르진스키는 8월 22일 돌아왔다. 체카 안에서 볼셰비키가 아닌 당과 권력을 나누던 시대는 그렇게 끝났다. 3 2 4 18 13

정치적 결과는 더 컸다. 7월 9일 속개된 대회에서 트로츠키는 체포 상황과 진압을 보고했고, 7월 10일 대회는 암살이 무장 봉기로 권력을 넘기려는 음모의 일부였다고 결의했다. 그날 대회는 첫 소비에트 헌법도 채택했다. 결의는 당 자체를 금지하지 않고 중앙위원회의 「모험」을 지지하는 자를 소비에트에서 내쫓으라고 했을 뿐이지만, 내무 인민위원 그리고리 페트롭스키는 태도와 상관없이 지방 소비에트에서 모두 내쫓으라고 지시했다. 당 기관지 《즈나먀 트루다》와 《골로스 트루도보고 크레스티얀스트바》는 폐간되었다. 연말의 34개 군 소비에트에서 좌파 사회혁명당 대의원은 805명 중 160명만 남았다. 약 200명의 대의원은 당의 정책에 반대한다며 대회로 돌아갔고, 8~9월에는 나로드니키 공산당과 혁명적 공산주의당이 떨어져 나왔다. 일당 체제가 완성된 것은 더 뒤의 일이지만, 1918년 7월 뒤 소비에트 정부에 볼셰비키의 동등한 상대는 다시 없었다. 2 4 6 19 20 21

곧이어 군대에서 또 다른 사건이 터졌다. 동부전선 사령관인 좌파 사회혁명당원 미하일 무라비요프는 7월 10일 약 1천 명을 증기선에 태우고 카잔에서 심비르스크로 가 미하일 투하쳅스키 등을 체포하고,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그를 「인민의 적」으로 선언했으나 그 호소문이 나왔을 때 그는 이미 죽어 있었다. 7월 11일 그는 주 집행위원회 회의장에서 체포에 저항하다 죽었다(스스로 쏘았다는 기록도 있다). 이 무라비요프 반란이 중앙위원회의 지시인지는 확인되지 않으며, 대부분의 연구자는 모스크바 소식을 듣고 체포를 두려워한 그 자신의 판단으로 본다. 22 2

재판은 11월 27일 혁명재판소에서 열렸다. 피고 14명 가운데 법정에 나온 사람은 스피리도노바와 사블린뿐이었다. 포포프는 「근로자의 적」으로 법 밖에 두어 잡히는 대로 총살하게 했고, 프로시얀, 캄코프, 카렐린, 블륨킨, 안드레예프, 마요로프 등 11명에게 강제 노동을 포함한 징역 3년, 스피리도노바와 사블린에게는 혁명 공로를 참작해 징역 1년을 선고했다. 둘은 곧 사면되었다. 같은 여름 야로슬라블 진압에서 수백 명이 총살된 것과 대비되는 이 관대함을 두고 뒷날 추측이 쏟아졌다. 그러나 동맹의 대가는 결국 치러졌다. 포포프는 마흐노 군에 들어갔다가 1921년 체카에 총살되었다. 스피리도노바는 체포와 유배를 거듭했고 1941년 9월 메드베데프 숲에서 마요로프와 함께 총살되었으며, 캄코프, 카렐린, 사블린은 대숙청 때 처형되었다. 당을 떠나 볼셰비키에 합류한 안드레이 콜레가예프도 대숙청의 총살을 피하지 못했다. 2 4 15 9 23 1 10

독일은 왜 전쟁을 다시 시작하지 않았나?

좌파 사회혁명당의 구상은 대사가 죽으면 독일이 공격해 오고, 그러면 볼셰비키도 전쟁에 나서고 민중이 일어나리라는 것이었다. 첫 고리부터 끊겼다. 7월 14일 참사관 리츨러는 대사관 경비를 구실로 무장 대대를 모스크바에 넣겠다고 요구했다. 그것은 사실상 인민위원회의를 독일군 아래 두는 것이었다. 레닌은 「외국 군대에 의한 점령의 시작」이라며 거부했다. 전쟁 위기는 그러나 잠깐이었다. 서부전선에서 제2차 마른 전투가 시작되어 독일의 관심이 그쪽으로 쏠렸고, 결국 적위대 1천 명이 사복 차림 비무장 독일군 300명과 함께 대사관을 지키는 선에서 타협했다. 베를린에서 보면 볼셰비키를 쓰러뜨리면 다음 정권이 더 적대적일 수 있었으므로, 대사의 죽음보다 조약의 유지가 더 중요했다. 4 2 10

좌파 사회혁명당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7월 30일 당원 보리스 돈스코이가 키예프에서 독일군 사령관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을 폭탄으로 암살했고, 이 사건은 대사 암살보다 더 큰 전쟁 위협이 되지 못했다. 독일은 다시 항의만 했다. 8월 27일에는 소비에트 정부가 베를린에서 더 무거운 추가 조약에 서명했다. 민중의 봉기도 오지 않았다. 농촌의 불만은 진짜였고 이후의 농민 봉기로 이어졌지만, 모스크바 부대의 움직임과 이어지지 못했다. 좌파 공산주의자들과의 연대도 없었다. 조약을 끝낸 것은 암살이 아니라 독일의 패전이었다. 11월의 정전과 함께 소비에트 정부는 브레스트 조약을 무효로 선언했다. 2 4 24

이것은 봉기였나, 무장 시위였나, 함정이었나?

이 사건의 이름 자체가 논쟁거리다. 제5차 대회의 결의는 암살이 권력을 넘기려는 음모의 일부였다고 규정했고, 레닌은 「범죄적 모험주의자, 히스테릭한 지식인」이 민중의 뜻을 짓밟았다고 말했다. 이 평가는 소비에트 역사학의 틀이 되어 「좌파 사회혁명당 반란」은 정권 탈취 기도로 서술되었다. 이것은 소련 공식 견해만이 아니다. E. H. 카는 암살 뒤의 행동을 모스크바와 지방에서 권력을 잡으려는 시도로 보았고, 니콜라 베르트도 쿠데타 기도로 평가했다. 2013년 러시아의 A. V. 메드베데프도 전신국 점거와 전보를 근거로 정권 전복 시도로 판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로시얀의 전보에 있는 「권력을 잡았다」는 말이 이 해석의 가장 강한 근거다. 6 16 4

당사자들은 달리 말했다. 스피리도노바는 「세계를 향해 혁명의 질식에 항의하는 국제적 의의의 테러 행위」를 했을 뿐이고 나머지는 볼셰비키의 보복에 맞선 자기방어였다고 썼다. 캄코프는 「무장 시위」라고 했고, 1921년의 포포프도 「자기방어」였다고 진술했다. 대부분의 서방 연구도 이쪽으로 기운다. 리처드 파이프스는 계획이 권력 탈취를 전혀 예정하지 않았다고 보았고, 공개되지 않은 자료까지 살핀 알렉산더 라비노비치는 프로시얀의 전신국 점거를 뺀 모든 행동이 정권 탈취가 아니라 레닌 정부의 정책을 바꾸려는 목적에 맞는다고 결론지었다. 오를란도 파이지스는 그들이 「혁명을 놀이처럼 했다」고 비꼬며, 동지 시테인베르크의 말대로 정부 전복이 애초 목적이 아니었기에 패배했다고 썼다. 러시아의 야로슬라프 레온티예프도 「압박이나 일종의 협박은 있어도 봉기나 반란은 아니었다」고 본다. 6 2 4 7

세 번째 해석은 볼셰비키가 사건을 꾸몄다는 것이다. 게오르기 카트코프가 1961년 제기하고 유리 펠시틴스키가 1985년부터 발전시킨 이 주장은, 처벌이 가벼웠던 점과 제르진스키의 서명, 일당 체제로 얻은 이익을 근거로 제르진스키가 암살을 조직했다고 본다. 펠시틴스키 자신도 처음에는 레닌이 알고 있었다고 했다가, 1990년 글에서는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 일부와 제르진스키, 아마도 부하린과 퍄타코프가 함께한 음모라고 고쳐 말했다. 라즈곤과 오브루츠키 같은 연구자는 이를 반박했다. 비판의 핵심은 당대회 결의와 중앙위원회의 결정, 당사자들의 자백이 분명히 있는데 추정만으로 그것을 지운다는 데 있다. 지금까지 이 주장을 뒷받침할 직접 증거는 나오지 않았다. 이익을 본 자가 곧 음모자인 것은 아니다. 이 사건은 뒷날 다른 방식으로도 이용되었다. 1935년 바체티스는 트로츠키가 연출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1938년 처형되었고, 1938년 부하린 재판에는 카렐린이 증인으로 불려 나와 1918년 부하린과 좌파 사회혁명당이 권력 탈취를 공모했다는 「증언」을 했다. 6 2 4 25 24

영화 《7월 6일》은 이 사건을 어떻게 그렸나?

소련에서 이 사건을 대중에게 가장 널리 알린 작품은 1968년 모스필름 영화 《7월 6일》이다. 미하일 샤트로프의 희곡을 그가 직접 각본으로 옮겼고, 율리 카라시크가 감독했으며 음악은 알프레트 시닛케가 맡았다. 사건 50주년에 맞춘 흑백 영화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카를로비바리 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다. 유리 카유로프가 레닌, 바실리 라노보이가 제르진스키, 알라 데미도바가 스피리도노바를 연기했고, 아르멘 지가르하냔(프로시얀)과 뱌체슬라프 샬레비치(블륨킨), 니콜라이 볼코프(미르바흐), 유리 나자로프(알렉산드로비치) 등이 나온다. 앞서 1953년 영화 《적대의 회오리》도 제르진스키와 이 진압을 다루었다. 17 3 2

영화의 큰 줄기는 기록을 따른다. 볼쇼이 극장의 대회, 제르진스키의 체포, 라치스의 체포, 라트비아 소총병의 투입, 7월 9일 대회의 재개까지 이어지는 구성이다. 그러나 그 틀은 소련의 공식 해석, 곧 좌파 사회혁명당이 볼셰비키에게서 권력을 빼앗으려 했다는 시각이다. 예컨대 영화 줄거리는 7월 6일 중앙위원회 긴급 회의에서 암살이 결정된 것으로 나오는데, 이 글에서 보았듯 블륨킨은 7월 4일에 지시를 받았다고 진술했고 결정 과정은 지금도 불분명하다. 그래서 이 영화는 사건의 기록이면서 소련이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려 했는지를 보여 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17 10 11

결과

봉기는 하루 만에 진압되었고 독일은 전쟁을 재개하지 않았다. 소비에트 대회는 봉기 지지자를 소비에트에서 내쫓기로 결의했고 체카는 공산당원만의 기관이 되었다. 좌파 사회혁명당은 분열해 일부는 볼셰비키에 합류했고, 지도자 대부분은 대숙청과 1941년 메드베데프 숲 처형으로 죽었다. 이것이 정권 탈취 기도였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연표와 지도

모스크바 페트로그라드 야로슬라블 심비르스크 키예프 10 페트로그라드 3 볼쇼이 극장 4 볼쇼이 극장 8 볼쇼이 극장 12 볼쇼이 극장 6 트료흐스뱌티텔스키 골목 모로조프 저택 9 트료흐스뱌티텔스키 골목 모로조프 저택 1 모스크바 2 모스크바 7 모스크바 11 모스크바 14 모스크바 16 모스크바 5 데네주니 골목 5번지 독일 대사관 13 심비르스크 15 키예프
  1. 11918.03.15소련
    좌파 사회혁명당의 반대 속에 브레스트 강화 비준

    제4차 소비에트 대회가 브레스트 강화를 비준했다. 좌파 사회혁명당 인민위원들은 이에 항의해 인민위원회의에서 물러났다.

  2. 1918.06.11소련
    콤베디 설치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가 농촌 빈농위원회(콤베디) 설치를 결정했다.

  3. 1918.06.22소련
    샤스트니 총살

    혁명재판소의 판결로 함대 지휘관 알렉세이 샤스트니가 총살되었다. 좌파 사회혁명당 간부회 위원들의 판결 취소 요구는 부결되었다.

  4. 21918.06.24소련
    중앙위원회, 테러 결의

    스피리도노바가 주재한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가 독일 제국주의 대표들에 대한 테러를 결의하고 이를 맡을 뷰로를 뽑았다.

  5. 31918.07.04소련
    제5차 소비에트 대회 개막

    볼쇼이 극장에서 제5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열렸다. 볼셰비키가 다수를 차지했다.

  6. 41918.07.05소련
    좌파 사회혁명당의 대회 퇴장

    캄코프와 스피리도노바가 곡물 정책과 브레스트 강화를 공격했다. 정부 불신임 제안이 부결되자 좌파 사회혁명당은 대회장을 떠났다.

  7. 51918.07.06소련독일
    미르바흐 암살

    블륨킨과 안드레예프가 체카 신임장을 들고 독일 대사관에 들어가 대사 미르바흐를 총과 폭탄으로 살해했다.

  8. 61918.07.06소련
    제르진스키, 인질이 되다

    제르진스키가 포포프 부대 본부에 찾아가 범인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다 알렉산드로비치에게 무장 해제되어 인질이 되었다. 저녁에는 라치스 등 27명이 붙잡혔다.

  9. 71918.07.06소련
    전신국 점거

    프로시얀의 무리가 중앙 전신국과 우체국을 차지하고 전국에 호소문과 전보를 보냈다.

  10. 81918.07.06소련
    볼쇼이 극장의 대의원 억류

    극장에 나온 스피리도노바를 비롯해 약 450명의 좌파 사회혁명당 대의원이 극장 안에 억류되었다.

  11. 91918.07.07소련
    라트비아 소총병의 포격

    바체티스의 라트비아 소총병이 약 11시 30분부터 포포프 부대 본부를 포격했다. 오후 2시 무렵 봉기 측이 물러나고 인질들이 풀려났다.

  12. 1918.07.07소련
    제르진스키 사임

    제르진스키가 암살 사건의 증인이 되어 체카 의장에서 물러났고 페테르스가 위원회를 새로 짰다.

  13. 101918.07.07소련
    페트로그라드의 무장 해제

    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 부대가 좌파 사회혁명당 조직을 무장 해제하고 옛 황실 시종 학교 건물을 포격해 항복을 받았다.

  14. 111918.07.08소련
    알렉산드로비치 총살

    쿠르스크 역에서 붙잡힌 알렉산드로비치가 포포프 부대 체카 요원 12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15. 121918.07.10소련
    대회 결의와 헌법 채택

    속개된 소비에트 대회가 암살을 권력 탈취 음모로 규정하고 봉기 지지자를 소비에트에서 내쫓기로 결의했다. 같은 날 첫 소비에트 헌법을 채택했다.

  16. 131918.07.10–11소련
    무라비요프 반란

    동부전선 사령관 무라비요프가 심비르스크에서 투하쳅스키 등을 체포하고 독일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는 이튿날 회의장에서 죽었다.

  17. 141918.07.14소련독일
    독일의 대대 주둔 요구

    리츨러가 대사관 경비를 위해 독일군 대대를 모스크바에 들이겠다고 요구했고, 레닌은 이를 거부했다.

  18. 151918.07.30우크라이나독일
    아이히호른 암살

    좌파 사회혁명당원 보리스 돈스코이가 키예프에서 독일군 사령관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을 폭탄으로 암살했다.

  19. 161918.11.27소련
    혁명재판소 판결

    혁명재판소가 피고 14명 가운데 포포프를 법 밖에 두고, 11명에게 징역 3년, 스피리도노바와 사블린에게 징역 1년을 선고했다. 두 사람은 곧 사면되었다.

관련 인물 34명

좌파 사회혁명당13명

볼셰비키 정부·체카·라트비아 소총병14명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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