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건

소련 · 사건 66

1917.10–1918.01

10월 혁명

1917년 가을 코르닐로프 반란이 좌절된 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가 다수파가 되었고, 트로츠키가 이끄는 군사혁명위원회가 수도 수비대의 충성을 확보했다. 11월 7일(구력 10월 25일)의 봉기는 페트로그라드에서 거의 유혈 없이 수도를 장악했으며, 같은 날 밤 개회한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권력 이양을 승인했다. 대회는 즉시 평화에 관한 법령과 토지에 관한 법령을 채택하고, 레닌을 수반으로 하는 인민위원회의(소브나르콤)를 구성했다.

1917.12–1918.11

브레스트 강화와 독일의 동방 점령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는 군대가 사라진 소비에트 러시아가 독일과 맺은 강요된 평화였다. 1917년 12월 시작된 협상에서 혁명전쟁, 「전쟁도 강화도 아니다」, 즉시 강화의 세 노선이 당을 갈랐고, 1918년 2월 독일의 공세 뒤 레닌은 사임을 내걸고 3월 3일의 조약 수용을 관철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발트·핀란드에 대한 권한과 인구의 3분의 1을 내주었고,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헤트만 정권을 세우고 핀란드 내전에 파병하며 발트에 자국 우산 아래의 공국들을 구상했다. 11월 독일의 패전으로 조약은 폐기되었지만, 정전협정 12조로 발트에 남은 독일군과 붉은 군대, 각국 민족정부, 백군이 마주한 공백은 이듬해 국경 지대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1917–1921

우크라이나 혁명과 전쟁

1917년 3월 키예프에 세워진 중앙라다는 연방 러시아 안의 자치에서 출발해 1918년 1월 독립을 선언했지만, 그 뒤 4년 동안 키예프의 주인은 열 번 넘게 바뀌었다. 소비에트군, 독일 점령군과 헤트만 스코로파츠키, 빈니첸코와 페틀류라의 디렉토리아, 데니킨의 백군, 폴란드군이 차례로 도시를 차지했고, 그 사이에서 흐리호리우와 마흐노의 농민군은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 전쟁을 벌였다. 1,500건 안팎의 포그롬으로 유대인 수만 명이 살해되었다. 1920년 바르샤바 협정과 1921년 리가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독립전쟁은 끝났고,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형식적 국가 지위와 볼셰비키 중앙의 실질적 통제라는 모순이 남았다.

1918–1922

내전과 열강의 개입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소비에트 공화국은 백군 장군들과 십여 개 열강의 개입군에 포위된 채 생존을 건 전쟁을 치렀다. 트로츠키가 조직한 붉은 군대는 500만 명 규모로 성장해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 브란겔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했고, 노동자와 농민 다수는 지주와 구체제의 복귀보다 소비에트 권력을 선택했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참혹했다. 전쟁과 기근, 전염병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양측 모두가 자행한 테러와 전시의 비상 통치는 이후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8.11–1920.10

발트 독립전쟁과 국경의 강화

1918년 11월 독일이 무너진 뒤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신생 정부는 붉은 군대, 러시아 백군, 독일 자유군단이라는 세 세력 사이에서 국가를 만들어야 했다. 영국 함대의 지원과 핀란드 의용군, 토지개혁으로 농민을 얻은 에스토니아는 1919년 초 붉은 군대를 밀어냈고, 자국 땅에서 출발한 유데니치의 북서군이 페트로그라드 앞에서 무너지자 이를 무장해제한 뒤 1920년 2월 타르투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첫 독립 승인 조약을 맺었다. 라트비아는 스투치카의 소비에트 정부, 폰 데어 골츠의 독일군과 니에드라의 친독 정부, 베르몬트-아발로프의 리가 공격을 차례로 이겨 냈고, 리투아니아는 리트벨을 물리쳤지만 폴란드에 빌뉴스를 잃었다. 1920년 한 해에 맺어진 타르투·모스크바·리가·타르투(핀란드) 조약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북서 국경을 그렸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분쟁은 남았다.

1919–1921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무너진 세 제국의 국경 지대에서 부활한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벌인 전쟁이다. 선전포고 없이 1919년 2월 벨로루시에서 시작된 충돌은, 1920년 4월 피우수트스키가 페틀류라와 손잡고 키예프로 진공하면서 전면전이 되었다. 부됸니의 기병과 투하쳅스키의 7월 공세로 전세를 뒤집은 붉은군대는 혁명의 수출을 내걸고 바르샤바까지 진격했으나, 8월 바르샤바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했다. 1921년 3월 리가 조약은 커즌선보다 훨씬 동쪽에 국경을 그어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를 분할했고, 이 국경은 1939년까지 유지되었다. 바르샤바 앞에서의 패배는 총검에 의한 혁명 수출 시도의 사실상 마지막이 되었고, 소비에트 국가를 일국에서의 건설이라는 길로 돌려세웠다.

1921.03

크론시타트 봉기

크론시타트 봉기는 1921년 3월 1일부터 18일까지 발트 함대의 본거지 크론시타트 요새에서 수병, 병사, 시민들이 볼셰비키 정권에 맞서 일으킨 무장 봉기이다. 러시아 내전이 사실상 종결된 후에도 전시공산주의 아래 곡물 강제징발, 배급 삭감, 정치적 탄압이 계속되자, 크론시타트의 수병들은 소비에트 재선거, 언론·집회의 자유, 정치범 석방, 농민의 토지 자유 처분권 등을 요구하는 〈페트로파블롭스크 결의〉를 채택하고 임시혁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협상을 거부하고 봉기를 반혁명적 음모로 규정했으며, 3월 7일과 16일 두 차례의 공세 끝에 3월 18일 요새를 진압했다. 약 8,000명의 봉기 참가자가 얼어붙은 핀란드만을 건너 핀란드로 탈출했고, 포로가 된 2,100여 명은 즉결 처형되었다.

1921–1922

1921~1922년 대기근

1921~1922년 대기근은 제1차 세계대전·혁명·내전으로 황폐해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1921년 봄 극심한 가뭄이 덮치면서 시작되어 1922년까지 이어진 대규모 기아 참사다. 전시공산주의의 곡물 강제 징발로 농민의 파종 여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가뭄이 볼가·우랄·우크라이나·크림·바시키르·타타르·카자흐 등 35개 구베르니야를 강타했고, 철도 마비는 구호 물자 수송을 가로막았다. 총인구 약 9천만 명 중 최소 2천8백만 명이 굶주렸고 약 500만 명이 아사와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해외 원조를 받아들이고 교회 재산을 몰수했으며, 미국 구호청(ARA)이 2만1천여 개 급식소에서 매일 1천만 명 이상을 먹이며 가장 큰 구호를 제공했다. 이 경험은 전시공산주의 폐기와 신경제정책(NEP) 도입을 결정적으로 밀어붙였다.

1922.12

소련의 결성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야·자캅카스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대등한 자격으로 연방조약을 맺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했다. 공화국들을 러시아 연방에 편입하려던 자치화안은 레닌의 개입으로 폐기되었고, 탈퇴권을 명시한 대등한 공화국들의 연방이라는 원칙이 채택되었다. 뒤이은 코레니자치야(토착화) 정책은 민족 언어와 민족 간부를 국가가 체계적으로 육성한, 당대 세계에 전례가 없는 민족정책이었다.

1921–1928

신경제정책(네프)

내전에서 승리했으나 경제 붕괴와 크론시타트 반란까지 겪은 1921년 봄, 당은 식량할당징발을 현물세로 바꾸고 시장과 소경영을 허용하는 신경제정책으로 전환했다. 레닌이 전략적 후퇴라 부른 이 전환은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 곧 스미치카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네프 아래에서 경제는 전전 수준을 회복했고, 1920년대의 문화적 개화가 꽃피었다.

1923–1927

레닌 사후 권력투쟁과 좌익 반대파

레닌 사후 권력투쟁은 1923년 가을, 병상의 레닌을 대신해 당을 움직이던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 삼두체제에 맞서 트로츠키와 46인 진술서 서명자들이 당내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시작되었다. 1924년 1월 레닌이 사망한 뒤, 삼두체제는 트로츠키의 「10월의 교훈」을 빌미로 그를 군사 인민위원직에서 해임했고, 이어 스탈린이 내놓은 '일국 사회주의' 노선을 두고 지노비예프·카메네프와 결별하면서 삼두체제는 붕괴했다. 1926년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카메네프는 '통합 반대파'를 결성했으나 스탈린-부하린 동맹에 연이어 패배했고, 1927년 11월 7일 혁명 10주년 시위에서 독자적인 구호를 내걸었다가 강제 해산당한 뒤 당에서 제명되었다. 1927년 12월 제15차 당대회는 좌익 반대파의 입장을 당적과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75명의 활동가를 추방함으로써 스탈린의 단독 승리로 막을 내렸다.

1928–1937

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

1928년부터 1937년까지 두 차례의 5개년 계획은 농민의 나라를 산업 강국으로 바꾼 세계사적 전환이었다. 곡물 조달 위기에서 출발한 집단화와 초고속 공업화는 마그니토고르스크와 드네프로스트로이 같은 거대 건설, 대중 문맹 퇴치 운동, 여성의 공장과 대학 진출을 낳았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는 농촌에 격변을 불러왔고, 1932–1933년에는 과도한 조달과 흉작이 겹친 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시기의 성취와 희생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역사로 남았다.

1932–1933

홀로도모르와 집단화 기근

홀로도모르는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인위적 기근으로, 약 390만 명이 아사한 재앙이다. 직접적 원인은 스탈린 지도부가 강제 집단화와 가속화된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우크라이나에 설정한 감당할 수 없는 곡물 공출 할당량이었다. 1931년 수확량이 급감했음에도 공출 목표는 오히려 유지되었고, 1932년 가을부터는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 같은 크렘린 특사들이 직접 파견되어 곡물을 샅샅이 수탈했다. 공출에 실패한 마을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경제 봉쇄를 당했고, 1933년 1월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우크라이나와 쿠반의 국경을 봉쇄해 굶주린 농민들이 식량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했다. 기근은 소련 전체 곡창지대를 덮쳤지만 우크라이나에서 희생이 가장 컸으며, 소비에트 당국은 1987년 말까지 기근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1936–1939

스페인 내전

1936년 7월 군부의 반란은 정부가 아니라 노동조합의 무장으로 저지됐고, 그 자리에서 카탈루냐와 아라곤의 공장과 토지가 노동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혁명이 함께 일어났다.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한 불개입 협정이 합법 정부의 무기 구입을 막는 사이 독일과 이탈리아는 반란군을 무장시켰고, 공화국에 무기를 판 나라는 사실상 소련과 멕시코뿐이었다. 소련의 개입은 공화국을 버티게 했지만 「먼저 전쟁에서 이겨야 혁명도 있다」는 노선과 「혁명을 멈추면 싸울 이유도 사라진다」는 노선의 충돌을 함께 키웠고,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그 대립이 시가전으로 터졌다.

1937–1938

대숙청

1937–38년의 대숙청은 NKVD·당 조직·검찰이 결합해 대규모 체포와 처형을 수행한 국가폭력이었다. 그것은 단일 명령이 아니라 할당량, 작전명령, 자백 강요, 지방의 경쟁과 공포가 서로 증폭한 과정이었다.

1938–1941

소련-일본 국경 전쟁과 중립조약

소련-일본 국경 전쟁은 1938년 하산 호 전투와 1939년 할힌골 전투를 중심으로 소련·몽골과 일본·만주국 사이에서 벌어진 무력 충돌이다. 발단은 만주국과 소련·몽골 사이의 경계선 해석 차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관동군 내 북진론 세력이 소련의 군사력을 시험하려는 의도가 컸다. 하산 호에서는 일본군이 분쟁 지역을 일시 점령했으나 소련의 반격에 밀려 철수했고, 할힌골에서는 게오르기 주코프가 5만 7천의 병력과 500여 대의 전차를 동원해 1939년 8월 20일부터 31일까지 일본군 제23사단을 포위 섬멸했다. 이 패배로 일본 육군 내 북진론은 치명상을 입었고, 1941년 4월 13일 소련-일본 중립조약이 체결되었다. 그해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일본은 중립조약을 존중해 참전하지 않았으며, 대신 남쪽으로 진로를 돌려 진주만 공격으로 이어졌다.

1939.08–1940.08

독소 불가침조약과 동유럽 분할

독소 불가침조약은 1939년 8월 23일 밤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소련 외무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서명한 조약으로, 공개된 불가침 조항과 함께 동유럽에서의 세력 범위를 나누는 비밀 추가 의정서를 담고 있었다. 영국·프랑스와의 집단안보 협상이 폴란드의 소련군 통과 거부로 교착된 상황에서, 스탈린은 독일과의 협정을 선택했다. 조약 체결 1주일 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9월 17일 소련도 폴란드 동부로 진격했다. 9월 28일 양국은 독소 우호 및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폴란드 분할을 확정했고, 비밀 의정서를 개정해 리투아니아를 소련 세력권으로 넘기는 대가로 루블린과 바르샤바 일부를 독일 측에 양보했다. 이 조약은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파기될 때까지 소련의 발트 3국 합병, 핀란드 겨울전쟁, 베사라비아 점령의 발판이 되었다.

1939.11–1940.03

겨울전쟁

겨울전쟁은 1939년 11월 30일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해 1940년 3월 모스크바 강화조약으로 끝난 105일간의 소련-핀란드 전쟁이다. 독소불가침조약의 비밀의정서로 핀란드를 자국 세력권에 넣은 소련은 레닌그라드 방위를 이유로 카렐리야 지협의 국경 이동과 항코 반도 조차를 요구했고, 핀란드가 거부하자 마이닐라 포격 사건을 구실로 공격했다. 병력과 장비는 압도적이었으나 대숙청으로 지휘부가 무너진 붉은 군대는 겨울 삼림전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수오무살미에서 사단째 포위·궤멸당하며 만네르헤임 선 앞에 멈춰 섰다.

1941–1945

대조국전쟁

1941년 6월 나치 독일의 기습 침공으로 시작된 대조국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상전이었다. 소련은 개전 첫 해의 파국적 손실을 딛고 공업 기반을 통째로 동쪽으로 옮겨 재무장했으며,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에서 전세를 뒤집고 1945년 베를린까지 진격해 나치 독일을 무너뜨렸다. 독일 국방군 지상 전투력의 약 80%가 동부전선에서 소모되었고, 파시즘 격파의 압도적 부담을 짊어진 것은 다민족 소비에트 인민이었다.

1941–1944

레닌그라드 봉쇄

레닌그라드 봉쇄는 1941년 9월 8일부터 1944년 1월 27일까지 독일군과 핀란드군이 소련의 레닌그라드를 육상에서 포위하고 포격과 폭격을 가한 사건이다. 독일의 바르바로사 작전은 도시를 점령해 발트해의 산업 및 해군 거점을 제거하려 했고, 핀란드군의 진격은 북쪽에서 도시와 교통로를 압박했다. 레닌그라드 전선, 발트 함대, 도시 당 조직과 주민들은 급히 방어선을 세우고 생산과 전투를 계속했지만, 식량과 연료가 고갈되어 1941~1942년 겨울 대규모 아사와 질병이 발생했다. 라도가호의 수운과 겨울철 빙상 도로가 유일한 생명선이 되었으며, 소련군은 1943년 1월 18일 포위망에 육상 통로를 열고 1944년 1월 레닌그라드-노브고로드 작전으로 독일군을 도시에서 밀어냈다.

1941–1945

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일본 제국이 미국과 영국 세력권을 공격하면서 본격화된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쟁으로, 1937년부터 이어진 중일전쟁과 일본의 자원 및 제국 확장 정책이 배경이었다. 미국의 대일 석유·자재 제재와 중국에서의 충돌 속에서 일본 지도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석유와 동남아 자원을 점령하고 미국의 협상 의지를 꺾으려 했지만, 진주만 공격은 미국을 전면전으로 끌어들였다. 일본은 1942년 초 필리핀, 말라야,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으로 빠르게 팽창했으나 산호해와 미드웨이에서 공세의 한계가 드러났다. 1942년 과달카날부터 연합국은 남서태평양과 중부태평양에서 도약식 공세를 진행했고, 1944년 필리핀 탈환과 마리아나 제도 점령으로 일본 본토를 폭격할 거점을 확보했다. 1945년 봉쇄, 폭격,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대일 참전이 겹치면서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공표했고 9월 2일 도쿄만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1942–1943

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2년 7월 17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와 돈강 하류 및 볼가강 주변에서 벌어진 독일·추축국과 소련의 대규모 전투다. 독일은 블라우 작전으로 남부의 석유와 교통로를 장악하려 했고,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별도 목표로 밀어붙이면서 공세가 분산됐다. 독일 제6군과 제4기갑군은 8월 말 도시에 도달해 폐허가 된 시가지를 공격했지만, 바실리 추이코프의 제62군은 볼가강을 건너오는 증원과 근접전으로 버텼다. 소련군은 11월 19일부터 천왕성 작전을 개시해 루마니아군이 지키던 독일군 측면을 북쪽과 남쪽에서 돌파하고 11월 23일 칼라치 부근에서 연결했다. 포위된 독일군은 구출과 공중 보급에 실패한 뒤 1943년 1월부터 항복했고, 2월 2일 전투가 끝났다.

1944.08–10

바르샤바 봉기

바르샤바 봉기는 1944년 8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독일 점령에 맞서 폴란드 국내군이 수도를 해방하고 소련군보다 먼저 폴란드의 주권을 드러내려 한 무장 봉기다. 독일군의 철수와 소련군의 접근, 런던 망명정부와 소련 사이의 국경 및 국가권력 분쟁이 결정을 재촉했다. 국내군은 도시 일부와 행정망을 장악했지만 독일군의 증원과 민간인 학살에 밀렸고, 서방의 공수 지원은 제한적이었다. 소련군은 비스와강 동쪽에 멈춰 있었으며 9월에야 제한적인 지원을 했다. 63일 뒤 국내군은 항복했고, 독일군은 주민을 추방한 뒤 바르샤바를 체계적으로 파괴했다.

1941–1945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전쟁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전쟁은 1941년 4월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고 분할한 뒤 1945년까지 벌어진 공산당 주도 무장투쟁이다. 독일의 소련 침공 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점령군과 협력 정권에 맞선 전국 봉기를 조직했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끈 파르티잔은 왕당파 체트니크와 경쟁하면서 게릴라 부대에서 정규군으로 성장했다. 추축국의 대공세, 특히 네레트바와 수테스카에서 살아남은 파르티잔은 1943년 연합국의 지원과 승인을 얻었고, 1944년 소련군과 함께 베오그라드를 해방했다. 1945년 3월 군대는 유고슬라비아군으로 개편되었고, 파르티잔의 승리는 왕정을 대신하는 사회주의 연방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