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건

소련 · 사건 66

1945.02–08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휴양지 얄타에서 스탈린·루스벨트·처칠이, 7월과 8월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스탈린·트루먼·애틀리가 마주 앉아 전후 세계의 틀을 짰다. 얄타에서는 독일의 분할 점령과 배상, 폴란드의 국경과 정부 구성, 해방된 유럽에 관한 선언, 안보리 거부권을 포함한 유엔 창설 방안이 합의되었고, 소련은 남사할린·쿠릴의 확보를 조건으로 대일 참전을 약속했다. 포츠담에서는 독일의 비무장화·탈나치화 원칙과 폴란드의 서부 국경 실무가 다루어졌다. 회담장 밖에서는 이미 다른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트루먼이 「신형 무기」를 넌지시 알렸을 때 스탈린은 무표정했다. 정보망을 통해 원폭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5.08

소련의 대일 참전과 만주 작전

만주 전략공세작전은 1945년 8월 9일부터 9월 2일까지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 최후의 대규모 지상 작전이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독일 항복 2-3개월 후 대일 참전을 약속하고 남사할린·쿠릴열도·여순항 조차권을 확보하는 비밀의정서에 서명했다. 소련은 4월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5월부터 8월까지 유럽에서 극동으로 40만 이상의 병력과 2천여 대의 전차를 이동시켰다. 8월 8일 몰로토프가 선전포고를 통보했고, 바실렙스키가 지휘하는 150만 병력이 서·동·북 삼면에서 동시에 진입했다. 관동군은 70만 이상이었으나 정예 병력은 태평양으로 빠져나갔고, 소련군의 기갑 우세와 작전술 앞에 열흘 만에 조직적 저항을 상실했다. 약 60만 명의 일본군이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1944–1949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1944년 여름부터 붉은군대가 진주한 폴란드·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와 소련 점령지구 독일, 그리고 자력으로 해방을 이룬 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알바니아에서는 공산당이 참여하는 연립정부가 세워졌다. 각국은 토지개혁과 기간산업 국유화를 거쳤고, 1945~46년의 선거는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처럼 결과가 갈린 곳도, 폴란드와 루마니아처럼 공식 집계와 후대에 공개된 기록이 어긋나는 곳도 있었다. 1947년에 연립의 다른 정당들이 해체·분열·재판을 거쳐 밀려났고, 1946~48년에 각국 사회민주당이 공산당과 통합되었다. 같은 시기 「인민민주주의」는 소비에트와 다른 「새로운 길」로 설명되다가 1948년 12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형태」로 재정의되었다. 1949년까지 각국은 헌법과 단일 명부 선거로 새 체제를 확정했고, 당 안에서는 재판과 숙청이 시작되었다.

1944–1948

폴란드: 루블린 위원회에서 통일노동자당까지

1944년 7월 소련이 후원한 폴란드민족해방위원회가 루블린에 들어서면서 폴란드에는 런던 망명정부와 루블린의 두 정부가 생겼다. 얄타 합의에 따라 1945년 6월 국민통일임시정부가 세워져 미코와이치크가 부총리로 귀국했고, 미국과 영국이 이를 승인했다. 토지개혁과 기간산업 국유화는 연립의 여러 당이 함께 통과시켰다. 공안부와 소련 내무인민위원부는 국내군 후신의 지하조직을 상대했고, 1945년과 1947년 두 차례 사면이 있었다. 1946년 6월 국민투표와 1947년 1월 총선의 공식 결과는 정부 진영의 압승이었으나, 1989년 이후 공개된 집계는 다른 수치를 보여 준다. 미코와이치크는 1947년 10월 폴란드를 떠났다. 고무우카의 「폴란드의 길」은 1948년 9월 「우익 민족주의 편향」으로 비판되어 그가 해임되었고, 12월 노동자당과 사회당이 통합해 폴란드통일노동자당이 세워졌다.

1944–1948

루마니아: 8월 23일에서 인민공화국까지

1944년 8월 23일 국왕 미하이 1세가 이온 안토네스쿠를 체포하고 연합국 측으로 돌아서면서 루마니아는 전쟁의 반대편에 섰다. 9월 12일 모스크바 휴전협정으로 소련군 사령부가 이끄는 연합국 통제위원회가 들어섰고, 서너테스쿠와 러데스쿠의 연립정부는 공산당이 주도한 민족민주전선의 요구와 부딪혔다. 1945년 2월 말 소련 외무부차관 비신스키가 부쿠레슈티에 와서 정부 교체를 요구했고, 3월 6일 페트루 그로자 정부가 세워져 토지개혁을 공포했다. 국왕은 8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법령 서명을 거부했으나 모스크바 외무장관 회의 뒤 야당 각료 두 명이 추가되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1946년 11월 19일 총선의 공식 결과는 정부 블록 69.8%였고, 후대에 공개된 당 내부 문서는 다른 수치를 남겼다. 1947년 평화조약 발효 뒤 국민농민당이 해산되고 마니우가 재판을 받았으며, 12월 30일 국왕이 퇴위해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948년 2월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이 루마니아노동자당으로 합쳤다.

1944–1949

불가리아: 조국전선에서 코스토프 재판까지

1944년 9월 5일 소련이 불가리아에 선전포고하고 8일 국경을 넘자, 9일 새벽 공산당·농민동맹·즈베노·사회민주당의 조국전선이 소피아에서 정권을 잡았다. 인민재판소는 1945년 2월 1일 섭정과 장관들을 처형했고, 불가리아군은 붉은군대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에서 싸웠다. 농민동맹은 1945년 페트코프의 야당과 조국전선 잔류파로 갈라졌고, 1946년 국민투표로 왕정이 폐지된 뒤 10월 대국민의회 선거에서 공산당이 과반, 야당이 28%를 얻었다. 1947년 페트코프가 국회에서 체포되어 9월 처형되었고, 12월 디미트로프 헌법과 국유화법이 통과되었다. 1948년 사회민주당이 공산당에 합쳐졌으며, 디미트로프는 12월 제5차 당대회에서 인민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형태로 규정했다. 1949년 디미트로프가 죽고 부총리 코스토프가 재판을 받아 처형되었다.

1944–1949

헝가리: 소농당의 승리에서 러이크 재판까지

1944년 12월 데브레첸의 임시국민의회에서 출발한 헝가리의 전후 정치는 1945년 11월 4일 총선에서 소농당이 57%를 얻은 데서 시작한다. 연합국 통제위원회 위원장 보로실로프의 요구로 4당 연립이 유지되었고, 내무부는 공산당이 맡았다. 1946년 3월 좌익블록이 소농당 의원 축출을 요구했고, 1947년 2월 소련군이 소농당 사무총장 코바치 벨러를 체포했으며, 5월 총리 너지 페렌츠가 국외에서 사임했다. 8월 31일 「푸른 투표용지」 선거에서 공산당은 22.3%로 제1당이 되었다. 1948년 6월 사회민주당이 공산당과 통합했고, 12월 민드센티 추기경이 체포되었다. 1949년 5월 단일 명부 선거와 8월 20일 헌법으로 인민공화국이 세워졌고, 9월 전 내무장관 러이크 라슬로가 재판을 받아 10월 처형되었다.

1947–1948

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

1947년 미국이 유럽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을 내놓자, 소련은 그것을 미국 자본에 유럽을 종속시키려는 시도로 규정했다. 몰로토프는 파리 회담에서 협상을 결렬시켰고, 스탈린은 동유럽 국가들이 원조를 받는 것을 막았다. 즈다노프의 「두 진영」 선언과 코민포름 창설로 세계는 냉전의 두 블록으로 굳어졌다.

1948–1949

베를린 봉쇄와 공수

베를린 봉쇄(1948년 6월 24일–1949년 5월 12일)는 소련이 서방 연합국이 장악한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철도·도로·수로를 차단한 냉전 최초의 대규모 대치였다. 직접적 발단은 1948년 6월 서방이 독일 서부 점령지구에 도이치마르크를 도입하면서 소련 점령지구와의 경제적 분리가 확정된 데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베를린을 봉쇄하면 서방이 통화 개혁을 철회하거나 서베를린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계산했으나, 해리 S. 트루먼 행정부는 철수하지 않고 베를린 공수 작전으로 맞섰다. 미군과 영국 공군은 15개월 동안 27만 8,000회 이상의 비행으로 233만 톤의 식량·석탄·연료를 서베를린에 수송했고, 절정기에는 30초마다 한 대의 수송기가 베를린에 착륙했다. 동시에 서방의 대응봉쇄로 동독 지역은 석탄과 강재 부족에 시달렸다.

1948–1955

티토-스탈린 결별

티토-스탈린 결별은 1948년 6월 코민포름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제명하면서 사회주의 진영에 처음으로 공개 균열이 생긴 사건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군이 아니라 자국 파르티잔의 힘으로 해방과 혁명을 이뤘고, 그만큼 모스크바의 지시에 덜 매여 있었다. 발칸 연방 구상과 그리스 내전 지원을 둘러싼 마찰, 유고슬라비아 내 소련 고문단과 정보망에 대한 반발이 쌓이자, 스탈린은 서한 논쟁과 코민포름 결의로 티토 지도부의 굴복을 요구했다. 결의는 유고슬라비아 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이탈해 민족주의의 길로 갔다고 선고했지만, 예상과 달리 유고슬라비아 당은 지도부를 중심으로 뭉쳐 버텼다. 소련과 동유럽의 경제 봉쇄, 국경 도발, 침공 준비설 속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서방의 원조를 받아들였고,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독자 모델을 만들기 시작했다.

1949–1950

레닌그라드 사건

레닌그라드 사건은 900일 봉쇄를 견뎌 낸 도시의 당·국가 간부들이 전후에 숙청된 사건이다. 즈다노프가 1948년 사망하자 말렌코프와 베리야는 그의 레닌그라드 인맥을 겨냥했고, 아바쿠모프의 국가보안부(MGB)가 조작된 혐의로 수백 명을 체포했다. 계획경제를 이끈 보즈네센스키와 당 서기 쿠즈네초프를 비롯한 핵심 인물들이 1950년 처형됐다.

1943–1949

소련 원자폭탄 개발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은 1943년 쿠르차토프를 책임자로 한 제2연구소에서 시작해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의 RDS-1 실험으로 결실을 맺은 사업이다. 전쟁 중에는 자원이 전선에 묶여 소규모 연구에 그쳤으나,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 국가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 베리야를 수반으로 하는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내무인민위원부의 조직·노동력·자원 동원 능력이 통째로 투입됐다. 사업은 두 축으로 굴러갔다. 클라우스 푹스를 비롯한 정보원이 넘긴 맨해튼 계획 설계 자료가 방향을 확인해 주었고, 쿠르차토프·하리톤·젤도비치·플료로프의 자체 연구가 그것을 소련의 산업 조건에서 실제로 만들 수 있는 물건으로 옮겼다. 우라늄 채굴과 폐쇄도시 건설에는 굴라크 수용자와 강제 노동이 대규모로 동원됐다.

1952–1953

의사들의 음모

의사들의 음모는 크렘린 의료진(주로 유대인)이 소련 지도자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조작된 혐의로 1953년 1월 공표된 사건이다. 그것은 스탈린 말기 반유대 캠페인과 국가보안부의 고문 수사가 결합한 결과였으며, 즈다노프와 셰르바코프의 죽음이 그 구실로 이용됐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자 사건은 곧 조작으로 발표되고 체포된 의사들은 석방됐다.

1950–1953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진으로 시작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멎은 전쟁이다. 김일성은 1949년부터 여러 차례 무력 통일 승인을 요청했고,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판단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힘의 균형이 바뀌었다는 계산 위에서 1950년 봄 이를 승인하되 소련군의 직접 참전은 배제했다. 미국이 유엔군을 조직해 개입하고 인천상륙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중국이 인민지원군을 보냈고, 전선은 1951년 여름부터 38도선 부근에서 굳었다. 소련의 참여는 무기·고문단과, 만주 기지에서 미그-15로 싸운 조종사들에 한정됐으며 이들의 존재는 양측 모두 오래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1953

베리야의 몰락

스탈린 사후 베리야는 제1부총리이자 내무부(MVD) 수장으로 사면·탈스탈린화·대외 완화 등 개혁을 주도하며 강력해졌다. 그의 야심과 보안기구 장악을 두려워한 흐루쇼프·말렌코프·몰로토프 등 간부단은 1953년 6월 주코프 휘하 군 장교들의 도움으로 그를 체포했다. 베리야는 12월 재판 뒤 측근들과 함께 처형됐다.

1955

바르샤바 조약 기구 창설

바르샤바 조약 기구(공식 명칭: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는 1955년 5월 14일 소련과 동유럽 7개 사회주의 국가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서명한 집단방위동맹이다. 직접적 방아쇠는 서독의 재무장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확정한 1954년 10월 파리 협정이었다. 소련은 1954년 11월 모스크바 회의에서 동맹의 실무 준비에 착수했고, 서독이 나토에 정식 가입한 지 나흘 뒤인 5월 14일 조약을 서명했다. 조약 전문은 서독의 재무장이 평화적 국가들의 안전보장에 위협이 된다고 명시했으며, 제4조는 유럽에서 회원국에 대한 무력공격 시 모든 수단을 동원한 즉각 지원을 규정했다. 이반 코네프 원수가 통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정치협의위원회가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조약은 실질보다는 외관이 앞선 동맹이었다. 소련은 이미 양자조약과 주둔군을 통해 동유럽을 장악하고 있었고,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 새 기구를 나토와 맞교환할 수 있는 유럽 집단안보체제 협상의 지렛대로 구상했다.

1956.02

제20차 당대회와 비밀연설

1956년 2월 14일부터 25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다. 공개 회기에서는 자본주의와의 평화공존, 전쟁은 불가피하지 않다는 명제,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나라마다 다를 수 있다는 노선이 제시됐다. 대회 마지막 날 비공개 회의에서 흐루쇼프는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를 낭독했다. 포스펠로프 위원회가 정리한 자료에 근거해, 1930년대 후반 당 간부와 군 지휘부에 가해진 대량 체포와 처형, 자백을 얻기 위한 고문, 전쟁 초기의 판단 착오, 민족 강제이주를 스탈린 개인의 책임으로 지목한 문서였다. 비판의 틀은 「개인숭배」에 한정됐다. 당의 노선과 체제 자체, 그리고 연설을 듣던 이들을 포함한 지도부의 공동 책임은 다뤄지지 않았다.

1956.06

포즈난 봉기

포즈난 봉기는 1956년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업도시 포즈난에서 노동자들이 스탈린주의 체제에 맞서 일으킨 무장 봉기이다. 발단은 포즈난 최대 공장인 ZISPO(옛 체겔스키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바르샤바 중앙정부가 임금 인상과 과도한 세금 환급 약속을 하루 만에 번복하자, 6월 28일 아침 수만 명이 거리로 나섰고 곧 10만 명 규모의 시위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경제적 요구를 내걸었으나 당국이 대화를 거부하면서 시위대는 당 위원회, 보안국 청사, 감옥을 점거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국방장관이 파견한 스타니스와프 포프와프스키 장군이 전차 400여 대와 병력 1만 명을 동원해 30일까지 봉기를 진압했으며, 최소 57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1956

헝가리 혁명

1956년 헝가리 혁명은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연 탈스탈린화의 기대 속에서 스탈린주의 체제에 맞서 터진 봉기였다. 10월 부다페스트의 학생·노동자 시위가 전국적 항쟁으로 번지자 개혁파 너지 임레가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와 바르샤바조약 탈퇴, 중립을 선언했다. 소련 지도부는 이를 진영의 붕괴로 보고 11월 대규모 군사 개입으로 봉기를 진압했다.

1957

반당 그룹 사건

1957년 6월, 몰로토프·말렌코프·카가노비치를 비롯한 주석단 다수파는 비밀연설과 개혁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위협한 흐루쇼프를 제1서기직에서 몰아내려 했다. 흐루쇼프는 문제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로 넘겼고, 주코프의 도움으로 소집된 중앙위원들이 그를 지지했다. 다수파는 「반당 그룹」으로 규정되어 패배했다.

1957–1965

소련 우주 계획

1957년 스푸트니크 1호에서 1965년 레오노프의 우주 유영까지,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최초의 유인 비행, 최초의 여성 우주인, 최초의 우주 유영이라는 우주 시대의 첫 관문들을 모두 먼저 통과했다. 치올콥스키가 남긴 이론, 코롤료프의 OKB-1 설계국, 그리고 무상 대중 기술교육과 계획경제가 집중시킨 자원이 이 도약을 떠받쳤다. 그것은 한 세대 전까지 농업국이었던 나라가 이룬 세계사적 성취였다.

1956–1969

중소분열

중소분열은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이 1950년대 후반부터 이념 논쟁을 거쳐 1960년대에 국가 관계 파탄으로, 1969년에는 국경 무력 충돌로까지 간 과정이다. 발단은 제20차 당대회였다. 중국공산당은 스탈린 격하와 평화공존 노선을 수정주의로 규정하고, 제국주의와의 타협이자 혁명 포기라고 비판했다. 여기에 국가 이익의 충돌이 겹쳤다. 소련은 중국의 핵무기 개발 지원을 1959년 중단했고, 1958년 대만해협 위기와 중국-인도 국경분쟁에서 중국이 기대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1960년 소련이 기술고문 1,300여 명을 일시에 철수시키면서 경제 협력의 축이 끊겼다. 논쟁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 전체로 번져 각국 공산당이 노선을 골라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1961

베를린 장벽 건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8월 13일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을 둘러싸며 쌓은 156km의 경계 요새 시설이다. 1949년부터 1961년까지 350만 명의 동독 시민이 서독으로 탈출했으며, 그중 상당수가 베를린의 개방된 구역 경계를 통해 빠져나갔다. 숙련 노동자와 지식인의 대규모 유출로 동독 경제가 붕괴 직전에 이르자, 발터 울브리히트 동독 지도자는 니키타 흐루쇼프를 설득하여 경계 봉쇄를 승인받았다. 1961년 8월 3~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조약 회의에서 공식 합의가 이루어졌고, 8월 12일 밤부터 13일 새벽 사이 약 2만 5천 명의 동독 군경 병력이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철조망으로 차단했다. 서방 3국은 베를린의 4개국 공동관리 지위를 직접 침해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사적 대응을 피했고,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장벽은 전쟁보다 훨씬 낫다"고 결론지었다. 콘크리트 장벽은 이후 28년간 냉전의 상징이 되었고, 최소 140명이 장벽을 넘다 사망했다.

1962

쿠바 미사일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면서 미국과 정면충돌한 13일간의 대치다. 미국의 쿠바 침공 위협과 튀르키예에 배치된 미국 미사일에 대응해, 흐루쇼프는 혁명 쿠바를 지키고 전략적 균형을 맞추려 미사일을 들여보냈다. 미국이 이를 정찰기로 포착해 해상 봉쇄로 맞서면서 세계는 핵전쟁의 문턱에 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