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건

소련 · 사건 66

1965–1970

코시긴 개혁

1965년 총리 코시긴은 기업의 자율성과 이윤·수익성 지표를 확대하는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경제학자 리베르만의 제안에서 출발한 이 개혁은 계획경제의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이 개혁의 위험성을 부각시키고 브레즈네프와 보수파가 제동을 걸면서 개혁은 흐지부지됐다.

1968

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두브체크가 이끈 개혁운동이다. 검열 완화, 표현과 이동의 자유 확대, 경제 개혁을 내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소련은 이를 진영 이탈로 규정하고, 1968년 8월 바르샤바조약 5개국 군대를 동원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다.

1969–1979

데탕트와 전략무기제한협상

데탕트(데탕트)와 전략무기제한협상(SALT)은 1969년부터 1979년까지 미국과 소련이 냉전의 긴장을 낮추고 핵무기 증강을 통제하려 한 10년간의 노력이다. 1960년대 후반 소련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서 미국과의 전략적 균형에 도달하면서, 양측은 무한정한 군비경쟁보다 제한이 더 안전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닉슨과 브레즈네프가 1972년 모스크바에서 서명한 SALT I은 탄도미사일 방어체제(ABM)를 제한하는 조약과 공격용 미사일 발사대 숫자를 동결하는 잠정협정으로 이어졌다. 뒤이은 SALT II 협상은 블라디보스토크 합의(1974년)를 거쳐 1979년 빈에서 카터와 브레즈네프의 서명으로 정점에 도달했으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미국 상원 비준이 무산되며 데탕트는 종말을 맞았다.

1975

헬싱키 협정

헬싱키 협정(1975년 8월 1일)은 유럽 33개국과 미국, 캐나다 등 35개국이 핀란드 헬싱키에서 서명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최종의정서'이다. 소련은 1954년부터 유럽 전후 국경의 공식 승인을 목표로 유럽안보회의를 추진해 왔고, 1970년대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서방이 마침내 응했다. 1972년 사전 협의, 1973~1975년 제네바 실무 협상을 거쳐 35개국 정상이 헬싱키에 모였다. 최종의정서는 정치·군사(제1바스켓), 경제·과학(제2바스켓), 인권·인도적 협력(제3바스켓) 등 세 갈래로 구성되었다. 브레즈네프는 국경 불가침 원칙을 관철시켰다고 판단했으나, 제3바스켓의 인권 조항은 소련과 동구권 내 반체제 인사들에게 정부가 스스로 서명한 약속을 근거로 활동할 발판을 제공했다.

1979–1989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79년 12월, 소련은 흔들리는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지키기 위해 군사 개입을 결정했다.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우스티노프·그로미코가 주도한 이 결정은 짧은 안정화 작전으로 기획됐으나, 무자헤딘의 저항과 미국·파키스탄의 지원 속에서 10년에 걸친 소모전이 됐다.

1980–1981

폴란드 연대노조와 계엄

1980년 여름, 식료품 가격 인상에 맞선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파업은 21개 요구를 내건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으로 발전했고, 8월 31일 정부와의 협약을 통해 동구권 최초의 공인 독립노조인 '연대'(Solidarność)가 탄생했다. 1,000만 명이 가입한 연대노조는 16개월 동안 단순한 노동조합을 넘어 자치공화국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이 되었으나, 소련의 압박과 경제 파탄 속에서 당 제1서기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1981년 12월 13일 계엄을 선포하고 군사평의회를 세워 연대를 불법화했다. 수만 명의 군경이 통신망을 차단하고 지도부를 구금했으며, 부이크 탄광에서는 특수진압대가 파업 광부 9명을 사살했다.

1983

1983년의 위기

1983년의 위기는 1981년 소련이 미국의 핵 선제공격 탐지를 위해 개시한 사상 최대 평시 정보작전 RYaN에서 시작되어, 1983년 11월 NATO의 핵전쟁 지휘통제 훈련 Able Archer 83에서 정점에 달한 냉전 최고의 긴장 국면이다. 페르싱 II 미사일의 서유럽 배치, KAL 007기 격추, 페트로프 중령의 조기경보 오경보 대처, 레이건 행정부의 심리전과 함대 훈련이 겹치며 소련 지도부는 NATO 훈련이 실제 선제공격을 위장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소련은 동독과 폴란드에서 항공기에 핵탄두를 탑재하고 전투태세를 상향했으며, 1990년 미 대통령 외국정보자문위원회는 '소련군 일부가 Able Archer를 엄호로 한 NATO 공격을 선제하거나 역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1985–1991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1985년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침체한 경제와 경직된 정치를 되살리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내걸었다. 야코블레프가 설계한 글라스노스트는 검열을 풀고 과거의 범죄를 드러냈으며, 셰바르드나제의 외교는 냉전을 끝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개혁은 보수파와 급진파 사이에서 통제를 잃어 갔다.

1985–1988

반알코올 캠페인

고르바초프 지도부가 집권 두 달 만에 시작한 첫 대규모 사회 개혁이었다. 1985년 5월 「음주와 알코올 중독 퇴치 조치」가 공포되면서 보드카 생산이 감축되고 판매 시간이 제한되었으며 주류 가격이 크게 올랐다. 정치국에서는 리가초프와 솔로멘체프가 캠페인을 가장 강경하게 밀어붙였고, 실적 경쟁 속에 몰도바·크림·그루지야의 포도밭까지 갈려 나갔다.

1986

체르노빌 참사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4호기가 폭발해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유럽으로 퍼졌다. 초기에 사고를 축소·은폐한 관성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한 새 지도부의 시험대가 됐다. 리시코프가 이끄는 정부위원회가 수습에 나섰고, 수십만 명의 「청산인」이 피폭을 무릅쓰고 동원됐다.

1985–1989

신사고 외교와 냉전의 종식

고르바초프는 핵전쟁에는 승자가 없으며 안보는 상대를 위협해서가 아니라 상대와 함께 얻는 것이라는 「신사고」를 내걸고 소련 외교를 다시 짰다. 28년간 외무장관이던 그로미코가 물러나고 셰바르드나제가 그 자리에 앉았다.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을 거쳐 1987년 중거리핵전력조약(INF)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이 통째로 폐기되었고, 1988년 12월 유엔 연설에서 고르바초프는 일방 감군 50만과 「선택의 자유」를 선언했다. 1989년 2월에는 아프가니스탄 철군이 끝났다.

1988–1990

제19차 당협의회와 최초의 경쟁 선거

1988년 6월 제19차 전연방 당협의회에서 고르바초프는 권력을 당 기구에서 선출된 소비에트로 옮기는 정치 개혁을 통과시켰다. 회의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 논쟁의 무대가 되었고, 리가초프가 옐친에게 던진 「보리스, 자네가 틀렸네」라는 말은 온 나라의 유행어가 되었다. 1989년 3월 인민대의원 선거는 소련 역사상 첫 경쟁 선거였다. 지역 당 간부 수십 명이 무명의 도전자에게 패했고, 2년 전 실각했던 옐친은 모스크바 전역구에서 89%를 얻어 부활했다.

1988–1991

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

1988년 숨가이트 포그롬에서 1991년 빌뉴스 유혈사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은 페레스트로이카 아래에서 소련의 민족질서와 중앙권력이 함께 무너져 가는 과정이다. 네 사건의 성격은 같지 않다. 숨가이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를 계기로 터진 반아르메니아 포그롬이자 국가의 치안 실패였고, 1989년 트빌리시는 비무장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군사적 진압이었으며, 1990년 바쿠는 민족폭력과 중앙권력 붕괴가 겹친 자리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군사개입이었고, 1991년 빌뉴스는 독립을 선언한 연방공화국의 주권기관에 대한 강제력 행사였다. 그러나 하나의 공통된 위기를 보여 준다. 중앙정부는 민족 간 폭력으로부터 주민을 지키지 못하면서도, 공화국의 정치적 이탈에는 반복해서 군사력을 썼다.

1987–1991

발트 독립운동과 「발트의 길」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1940년 독소불가침조약의 비밀의정서에 따라 소련에 병합된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고, 글라스노스트가 열리자 그 기억이 곧 정치가 되었다. 1987년 8월 탈린의 히르베파르크 집회가 비밀의정서를 처음 공개적으로 규탄했고, 1988년에는 세 공화국 모두에서 인민전선(에스토니아의 라흐바린네, 라트비아 인민전선, 리투아니아의 사유디스)이 결성되었다. 합창 축제의 전통 위에서 자란 이 대중운동은 「노래 혁명」이라 불렸다. 1988년 11월 에스토니아가 첫 주권 선언을 냈고, 1989년 8월 23일 조약 체결 50주년에는 200만 명이 세 나라의 수도를 잇는 600킬로미터의 인간 사슬 「발트의 길」을 만들었다. 그해 12월 인민대의원대회는 비밀의정서의 존재를 인정하고 무효를 선언했다. 병합의 법적 근거가 소련 스스로의 손으로 부정된 것이다.

1989

1989년 동유럽 혁명

1989년, 동유럽 전역에서 공산당 일당 체제가 잇따라 무너졌다. 헝가리는 국경을 열었고, 폴란드는 원탁회의로 자유선거에 이르렀으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루마니아에서는 차우셰스쿠가 처형됐다. 결정적 차이는 고르바초프가 1956년·1968년과 달리 무력 개입을 포기한 데 있었다.

1987–1991

경제 개혁 논쟁과 500일 계획

1987년 국영기업법과 1988년 협동조합법으로 시작된 경제 개혁은 계획도 시장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를 낳았다. 기업은 임금을 올릴 자유를 얻었지만 가격은 묶여 있었고, 돈은 늘고 물건은 줄면서 재정 적자와 상점의 빈 진열대가 함께 커졌다. 1989년 여름에는 쿠즈바스와 돈바스의 광부 수십만 명이 파업에 나서 비누 한 장까지 요구 목록에 올렸다. 1990년 여름 샤탈린과 야블린스키가 500일 만에 시장경제로 이행한다는 「500일 계획」을 내놓았고 옐친의 러시아공화국이 이를 지지했지만, 고르바초프는 리시코프 정부의 온건안과의 절충을 택했다.

1991

노보오가료보 협상과 신연방조약

1991년 3월 국민투표에서 연방 유지가 76%의 찬성을 얻자, 고르바초프는 이를 마지막 정치적 자본으로 삼았다. 4월 23일 그는 모스크바 교외 노보오가료보 별장에서 러시아의 옐친을 포함한 9개 공화국 정상과 「9+1 성명」을 발표하고, 소련을 주권 공화국들의 자발적 연방으로 재편하는 신연방조약 협상을 시작했다. 발트 3국과 그루지야 등 6개 공화국은 처음부터 불참했다. 여름 내내 세금 징수권과 연방·공화국 권한을 놓고 밀고 당긴 끝에 조약안이 만들어졌고, 서명일은 8월 20일로 잡혔다. 7월 말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의 심야 회동은 서명 뒤 크류치코프·파블로프 등 강경파를 교체하기로 합의했는데, 이 대화는 KGB의 도청으로 당사자들에게 그대로 새어 들어갔다.

1991

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

1991년 8월,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으려는 보수 강경파가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크류치코프·야조프·파블로프 등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옐친이 전차 위에 올라 저항하고 시민이 결집하면서 사흘 만에 무너졌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연방의 해체를 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