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내가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당시 카멘니 다리 근처 정부 청사(지금의 세라피모비치 거리)에 살고 있었다. 그의 서재 책상 옆 바닥에는 조가 흩어져 있었고, 작은 병아리들이 그것을 쪼아 먹고 있었다. 내 놀란 표정에 그가 말했다. "젊은 생명을 바라보는 건 즐거운 일이지." — 보리스 우를라니스의 회고록에서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나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수학하다 혁명운동에 뛰어들었다. 1897년 예니세이 유형지에서 레닌과 함께 지냈고, 이후 「이스크라」의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10월 혁명 후 계몽인민위원부에서 학교 개혁을 주도했고, 1921년 당 역사 연구를 제도화한 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의 창립자 중 한 명이 되었다. 만년에는 역사박물관과 혁명박물관 관장을 지냈으며, 레닌의 망명 시절을 생생하게 기록한 회고록 『전환점에서』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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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1891페테르부르크 대학 수학, 학생 혁명서클 조직, 1890년 제적, 키예프 대학 외부시험으로 졸업
1895–1897「노동계급 해방을 위한 투쟁동맹」 활동, 체포·투옥 후 예니세이 유형 — 레닌과 동일 지역
1900–1905「이스크라」 대리인, 프스코프에서 신문 배포 조직, 망명 중 제네바에서 당 서고·기록보관소 설립
1918–1920계몽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학교개혁 부장 — 통일노동학교 규정 초안 작성, 리트비노비치에 실험적 학교-코뮌 설립
1919–1920투르케스탄 공화국 계몽부인민위원 대리, 타슈켄트에서 교원 양성과 첫 공화국 교육대회 조직
1921–1924이스트파르트(당 역사 위원회) 공동 창립자이자 부의장 — 당 역사의 제도적 연구 기반 구축
1922년 12월 30일, 제1차 전연방 소비에트 대회의 개회를 선언했다 — 소련이라는 국가의 탄생을 공식화한 순간이었다.
1898년 입당한 구볼셰비키.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으로 모스크바대학에서 제적된 후 파리에서 전기공학을 배우고 벨기에 노동당에서 활동했다. 이스크라 요원으로 세 혁명을 관통했고, 10월 혁명기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이자 모소베트 의장을 지냈다. KOMZET 위원장으로 유대인 자치주 비로비잔 실험을, 북방위원회 위원장으로 북방 소수민족 정책을 설계했다.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지하 활동 시절 스스로 택한 암호명 '데몬(Демон)'은 레르몬토프의 시를 암호표로 삼았다는 설과 함께 평생 그녀의 혁명적 인격을 상징하는 별칭으로 남았다.
이스크라 대리인 출신의 볼셰비키 핵심 조직가로, 1903년 중앙위원회에 협력되고 1905년·1917년 모스크바 봉기를 지도했다. 내전기 제8군·제13군 정치부장으로 복무하며 여성 최초로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0-21년 크림 지방 당 서기 시절 조직한 적색 테러는 오늘날까지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다. 1939년 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라 이 직위의 유일한 여성이 되었고, 스탈린 시기 숙청을 피한 극소수 구볼셰비키 여성 가운데 하나로 1947년 사망했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첫날, 크레스틴스키는 피고석에서 일어나 '나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며, 반소비에트 블록의 구성원도 아니었다'고 선언했다. 대숙청기 세 재판 전체에서 법정 자백을 거부한 유일한 순간이었다.
차르 시절 변호사 출신의 볼셰비키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혁명을 이끌고 최초의 정치국원이 되었다. 스베르들로프 사후 1919년부터 2년간 책임서기로서 당을 이끌었으나,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를 지지하며 레닌과 충돌해 실각했다. 이후 소련 최대의 외교무대인 주독 전권대표로 9년간 활약했고, 대숙청기 모스크바 재판에서 유일하게 법정 자백을 거부한 피고로 기록되었다.
미국인 KMT 지지자들이 쑨원에게 '보로딘이 가명이며 본명은 그루젠베르크라는 걸 아십니까' 하고 경고하자, 쑨원은 이렇게 답했다. '압니다. 라파예트요.'
쑨원의 정치고문이자 제1차 국공합작을 설계한 코민테른의 지구적 요원.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6세에 분트에, 1903년 볼셰비키에 가담했으며, 1905년 혁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시카고에서 망명 러시아인 학교를 운영했다. 1919년 멕시코 초대 소비에트 영사로 멕시코공산당 창립을 도왔고, 1923년부터 광저우에서 국민당을 레닌주의 전위정당으로 개조하고 황포군관학교를 설립했다. 그가 성사시킨 국공합작은 중국공산당이 대중정당으로 성장할 발판이 되었으나, 1927년 장제스의 숙청으로 와해되었다.
런던 아르코스 사무소 급습 이튿날, 로젠골츠는 7쪽 분량의 항의각서를 영국 정부에 제출하며 증거를 요구했지만, 이틀 뒤 영국 내각은 지하 암실에서 압수한 문서를 공개하며 단교를 선언했다.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내전에서 정치위원으로 활약하고 공군 총책임자로 소련 공군을 조직했으며, 이후 런던 주재 대리대사로 아르코스 사건과 영소 단교를 맞았다. 1930년부터 1937년까지 대외무역인민위원으로서 첫 5개년 계획 시기 소련의 수출입을 지휘했으며, 동시에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한 좌익 반대파 출신으로 스탈린 체제로 편입된 복잡한 궤적을 남겼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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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716세에 볼셰비키 입당, 제4차 당대회 대의원으로 선출; 보험대리인으로 일하며 지하활동
1917모스크바 소비에트 집행위원,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10월 무장봉기 참여
1918–1920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제8군·제5군 정치위원, 체크트란 창설
1922–1924공군 총책임자 — 독일군과 비밀 군사협상 주도
1925–1927런던 주재 소련 대리대사; 아르코스 급습·영소 단교에 직면
1927–1930중앙통제위원회 위원·상임위원, 노농감찰인민위원부에서 근무
1930–1937대외무역인민위원 — 5개년 계획 시기 수출입 총괄, 오르조니키제와 설비 수입 갈등
1937–1938해임 후 국가비축관리국장으로 전출, 체포,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사형 선고
프랑스 경찰 제복을 입은 그들은 거리에서 쿠테포프를 멈춰 세우고 심문을 구실로 차에 태웠다. 쿠테포프는 저항했고, 몸싸움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세레브랸스키가 내게 말했다. — 파벨 수도플라토프, 『특수임무』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23년 OGPU에 영입되어 팔레스타인에 첫 소련 스파이망을 구축했고, 유럽 전역에서 200명 이상을 포섭했다. 1930년 파리에서 프랑스 경찰로 위장해 백군 지도자 쿠테포프 장군을 납치·살해했으며, 트로츠키 아들의 기록보관소 탈취와 스페인 공화파 군용기 밀반입을 지휘했다. 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로 활약했으나 1938년 베리야에게 체포되어 아바쿠모프의 고문으로 거짓 자백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1년 수도플라토프의 요청으로 사면되어 전시 정보전에 복귀했고, 1953년 베리야 사건에 연루되어 재체포된 후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문 중 사망했다. 1971년 복권.
10년간 벨라루스 공업화를 진두지휘한 정부수반, 아카데미 숙청에 서명하고 같은 심판대에 서다
1937년 6월 21일 민스크 NKVD 5층 심문실에서 '폴란드 간첩' 혐의를 받던 골로데트는 심문 도중 창밖으로 몸을 던졌다 — 공식 발표는 자살, 비공식 증언은 구타 살해 후 위장.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일곱 살부터 목동과 광부로 일했고,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적위대를 조직했다. 1927년부터 10년간 벨라루스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공업화와 집단화를 주도하며 공화국을 농업 중심에서 공업 중심으로 재편했고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30년 과학아카데미에서 주요 학자들을 '혁명의 적'으로 추방하는 결의에 직접 서명했다. 1937년 6월 체포되어 민스크 NKVD 5층 심문실에서 투신 사망했으며, 비공식 자료들은 구타 살해 후 자살로 위장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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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15크리보이로크 광산에서 선로 수리공, 자물쇠공, 전기기사로 노동
1917남서부전선 병사위원회에서 볼셰비키 혁명 선전 활동
1918–1921RCP(b) 입당, 적위대 조직 및 독일군·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과 교전; 노보집코프현 소비에트 활동
1921–1924고르키현 집행위원회 의장, 도적 진압 트로이카 의장
1925–1927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1927–1937벨라루스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 공업화·집단화 주도
1930전연방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벨라루스 과학아카데미 학자 6인 추방 결의 서명
1938년 11월, 예조프가 NKVD를 잃은 지 며칠 만에 비서실장 샤피로가 체포되었다 — 대숙청의 모든 수치를 관리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자기 상관을 겨눈 조서의 진술자가 되었다.
재무인민위원부와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당 중앙위 기구를 거친 경제 관료 출신으로, 1937년 1월 예조프를 따라 NKVD에 들어가 비서실 부실장·실장과 제9특별부장을 지냈고, 1938년부터는 작전 기록·등록·통계를 총괄하는 제1특별부장을 맡았다. 대숙청의 문서와 수치가 그의 손을 거쳐 예조프의 책상에 올랐고, 그 공로로 적성훈장과 명예 체키스트 휘장을 받았다.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1월 13일 체포되어 옛 상관에게 불리한 진술을 남기고 1940년 2월 군사법정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1917년 4월 3일 밤, 레닌의 귀국을 맞은 핀란드역 집회에서 불과 서너 걸음 떨어진 자리에 앉아 이렇게 적었다: 「지하 볼셰비키 시절 우리가 얼마나 레닌을 보고 듣고 싶어 했던가. 마침내 그 꿈이 이루어졌다.」
스탈린 시대 내내 당 기구의 중추를 이룬 조직가. 13세에 모스크바 식당의 주방 소년으로 일을 시작했고, 노동자 야학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접한 뒤 1914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정치국원(1932–1952)을 20년간 지내며 조직국을 실질적으로 운영했고, 중앙위 서기로서 대숙청 시기 지방 당 조직을 숙청하기 위해 가장 빈번히 파견된 인물이었다. 철도·농업 인민위원을 겸임하며 경제 부처도 두루 거쳤고, 전시에는 군수 수송과 부상병 구호를 총괄했으며, 1952년 청각 장애를 이유로 정치국에서 물러난 뒤에도 1962년까지 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일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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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볼셰비키 입당, 페트로그라드 위원회에서 활동
191710월 혁명 참여,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
1920–22전러시아 중앙노조평의회 서기,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부하린 노선 지지
1922–27철도노조 중앙위원장
1924–25중앙위원회 서기 (1기)
1928–30북캅카스 지방당 제1서기, 집단화 추진
1930–31중앙통제위원회 의장 겸 노농감독인민위원, 집단화 특별위 주재
1931–35교통인민위원, 철도 근대화 추진
1932–52정치국 정위원 (1926년부터 후보위원), 20년간 최고 지도부
1935–46중앙위 서기 (2기), 조직국 실질적 운영자 — 대숙청 시기 가장 자주 지방에 파견되어 당 조직을 교체
스페인 공화국의 금을 모스크바로 실어 보내고 POUM을 부순 NKVD 총고문, 그리고 스탈린에게서 달아난 망명자
1938년 7월, 안트베르펜에 정박한 소련 선박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은 오를로프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캐나다행 배에 올랐다. 그리고 예조프와 스탈린 앞으로 편지를 남겼다. 자신과 모스크바에 있는 노모를 건드리지 않는 한, 자신이 아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15년 동안 침묵했다.
본명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 내전기 적군과 국경경비대를 거쳐 1926년부터 대외정보부(INO)에서 파리·베를린·빈·런던의 비합법 거점을 맡았고, 1936년 9월 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연락관으로 마드리드에 도착해 이듬해 스페인 NKVD 총책임자가 되었다. 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 510톤을 소련으로 실어 보낸 작전과, POUM을 반역 조직으로 몰아 서기장 안드레우 닌을 납치·살해한 작전이 그의 이름에 남았다. 1938년 7월 소환 명령이 곧 처형을 뜻한다고 판단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달아났고, 스탈린이 죽은 뒤인 1953년 『스탈린 범죄의 비사』를 펴내 대숙청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을 남겼다. 다만 자신을 장성급으로 소개하고 케임브리지 조직 포섭을 자기 공으로 돌린 진술들은 문서고가 열린 뒤 상당 부분 과장으로 평가되며, 그의 실제 계급은 국가보안소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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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보브루이스크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으로 출생
1916–1921모스크바 대학 법학 중퇴 후 제정 육군 징집, 이어 적군과 내전기 정보·유격 임무
1921–1924법학 복귀, 크릴렌코 아래 최고혁명재판소 근무
1924.05국가정치보안부(OGPU) 입직
1926–1930대외정보부(INO) 파리·베를린 파견, 통상대표부 위장 근무
1933–1935빈·코펜하겐·런던 비합법 거점 지휘 (영국에서는 윌리엄 골딘 명의)
1936.09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NKVD 연락관으로 마드리드 부임
1936.10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의 소련 이송 작전 수행, 레닌 훈장 수훈
1937스페인 NKVD 총책임자: POUM 탄압과 안드레우 닌 납치·살해 지휘, 유격전 훈련학교 운영
김나지움 시절 고멜 상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를 보고 소년 파벨은 숨이 멎는 듯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다락방으로 올라가 모형 비행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새가 아니라 사람이 하늘을 날고 있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투폴레프의 제자로 항공에 입문한 소련의 항공기 설계자. 1939년 수호이 설계국(OKB-51)을 창립해 Su-2 경폭격기를 전력화했고, 스탈린의 총애를 잃어 1949년 설계국이 해체되는 시련을 겪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재건된 OKB에서 Su-7 전폭기(1960년대 소련 전술항공의 주력), Su-9·Su-15 요격기, 가변익 Su-17·Su-24 등 냉전기 소련 공군의 중추 기종들을 연이어 배출했다. 기술적 예측력으로 동시대 설계자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그가 마지막으로 착수한 Su-27은 세계 최상급 전투기로 완성되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레닌상·스탈린상을 수상했고 1958년부터 1974년까지 소련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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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1920모스크바 공과대학 입학, 징집으로 중단 → 포병 장교, 제대
1921–1925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MVTU) 복학, 투폴레프 지도하에 졸업
1925–1938TsAGI·투폴레프 설계국 — I-4, ANT-25, ANT-37bis 설계 참여
1939–1949수호이 설계국(OKB) 창립 — Su-2, Su-6(스탈린상), Su-9 제트기
1929년 12월, 야코블레프는 전체 농지의 '최소 3분의 1'을 1930년 봄까지 집단화하자고 제안했다. 스탈린은 지나치게 신중하다며 기각했고, 야코블레프는 그대로 물러서 상향된 강행 일정을 충실히 집행했다.
본명 예프스타인. 1913년 볼셰비키 입당, 혁명 후 우크라이나에서 당 활동을 이끌었다. 1923년부터 『농민신문』 편집장을 맡아 농촌 문제 전문가로 부상했고, 1929년 초대 소련 농업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정치국 집단화 위원회를 주도했다. 1930년 1월 5일 포고령을 기초해 주요 곡창지대의 강제 집단화 일정과 '부농 계급 청산' 정책을 설계했으며, 트로핌 리센코를 발탁해 소련 생물학의 반과학적 전환에도 관여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체포된 블라시크는 "나를 체포했다면, 곧 스탈린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한 달 반 뒤 스탈린은 죽었다.
벨라루스 농민 출신으로, 1931년부터 1952년까지 25년간 스탈린의 개인 경호를 책임지며 소련 지도자의 신변 안전과 모든 별장·관저를 총괄했다.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사후 스탈린의 자녀들을 사실상 양육했고, 경호 업무를 넘어 스탈린 가문의 집사 구실까지 했다. 중장까지 진급하고 레닌 훈장 3개와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았으나, 1952년 말 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실각했다. 1955년 유죄 판결로 계급과 훈장을 박탈당했으며, 사후 2000년이 되어서야 러시아 대법원에 의해 무죄가 확정되었다.
에이팅곤은 의식이 있는 메르카데르에게 다가가 물었다. '라몬, 임무를 완수했나?' — '예, 파블로 동지.'
벨라루스 슈클로프 출신 유대인으로, 1917년 사회혁명당에 가담했으나 내전 중 볼셰비키로 전향해 고멜 체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OGPU 외국부 요원으로 중국·터키·서유럽에서 암약했고, 에스파냐 내전기 오를로프의 부관으로 공화국 금 보유분을 소련으로 반출했다. 1940년 수도플라토프와 함께 트로츠키 암살 작전을 설계했으며, 독소전쟁 중에는 제4국 부책임자로서 적 후방의 전략적 기만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종전 후 원자력 첩보 부서를 총괄했으나 1951년 '시온주의 음모'로 체포되어 12년간 복역했고, 석방 후 출판사 편집자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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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19사회혁명당 입당; 모길료프 노동자·협동조합 활동; 1919년 RKP(b) 입당
1920–1924고멜 체카 — 비밀작전부장 대리, 사빈코프 토벌 중 부상; 군사아카데미 동양부 졸업
1925–1930OGPU 외국부 — 중국·터키 암약; 하얼빈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
1930–1936OGPU 특수작전국 — 세레브랸스키 보좌; INO 불법작전부 책임자
1936–1939에스파냐 내전 — NKVD 부주재관 (Kotov 장군); 공화국 금 보유분 소련 반출
1936년 가을, 고레프는 마드리드 방어에서 공화파 민병대를 규율 있는 군대로 재편하는 소련 고문단의 핵심 인물로 활동했다.
블라디미르 고레프는 러시아 내전과 중국 혁명전쟁을 거친 소련 군인이자 군사고문이었다. 1936년 스페인에 파견되어 ‘산초’라는 암호명으로 공화파 군대의 조직과 마드리드 방어를 지원했고, 이후 북부 전선에서도 활동했다. 귀국 뒤 대숙청의 피고가 되어 처형되었으나 1956년 복권되었다.
북조선 소련군정의 실질적 수장, 김일성의 무력통일 구상을 스탈린에게 전달해 개전을 이끌어낸 중개자
안드레이 란코프는 시티코프가 '일본 식민정치인들을 제외한 어떤 외국인보다도 한반도 역사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945~50년 북조선 국가의 실질적 설계자'라고 평가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레닌그라드 콤소몰에서 경력을 쌓고 레닌그라드 주당 제2서기(1938~1945)로 부상한 소련의 군사정치 지도자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여러 전선군 군사평의회 위원으로 복무하고 1944년 상장 계급을 받았으며, 1945년 극동전선군 정치위원으로 북조선에 진입했다. 1945~1948년 북조선 소련군정의 실질적 수장으로서 김일성을 집권시키고 토지개혁을 설계했으며, 1948~1950년 초대 주조선 대사로 김일성의 남침 구상을 스탈린에게 전달해 개전 승인을 이끌어냈다. 전황 역전 후 정보 실패로 1950년 해임·강등되었고, 흐루쇼프 시기 노브고로드·프리모리예 당서기와 주헝가리 대사를 지내고 1964년 사망했다.
1973년 세계 최초의 BMD-1 승무원 탑승 낙하산 강하 시험에서 아들 알렉산드르를 지켜보며, 마르겔로프는 실패 시 자결할 권총을 손에 쥐고 있었다.
바실리 마르겔로프는 소련 공수군(VDV)을 23년간 지휘하며 현대 공수부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군사 지도자다. 1944년 드네프르 강 도하로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받은 정예 장교로, 1954년 VDV 사령관 취임 후 경보병이던 공수군을 중무장 기동타격군으로 탈바꿈시켰다. 그의 주도로 BMD-1 공수장갑차, 중량물 투하 플랫폼, 켄타브르·레악타브르 승무원 탑승 강하 시스템이 개발되고 An-22·Il-76 대형 수송기가 도입되었다. 65세까지 60회 이상 직접 낙하산 강하를 수행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시 VDV 작전을 지휘했다. 퇴역 무렵 VDV는 소련군 최정예 부대로 '바샤 삼촌의 군대'라 불렸다.
“그는 내 얼굴과 머리를 때리고, 내가 쓰러지자 배를 발로 찼다… 나는 의사가 주사기를 든 것을 보았다. 겁이 나서 바로 두 통의 조서에 서명했다.”
벨라루스계 출신으로 레닌그라드 공장과 당 기구를 거쳐 야로슬라블 주당위 제1서기(1946–1949)까지 오른 당 간부로, 전후 알렉세이 쿠즈네초프가 러시아 공화국 각지에 배치한 지역 간부 중 한 명이었다. 1950년 9월 29~30일 레닌그라드 사건 재판에서 중앙 피고인 6인과 함께 기소되어 사형 대신 1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MGB 수사관들에게 구타당해 허위 자백에 서명했고, 1954년 석방·복권된 후 조용히 살다 1994년 사망했다.
1985년 3월 11일, 정치국. 침묵 끝에 75세의 그로미코가 가장 먼저 일어나 고르바초프의 이름을 불렀다. "미소는 부드럽지만 이빨은 강철." 28년간 '미스터 니에트'로 불리던 그가 페레스트로이카의 문을 직접 열어젖힌 순간이었다.
28년간 외무장관: 얄타에서 쿠바 위기, 데탕트, 헬싱키 협정까지 냉전 외교의 결정적 순간마다 소련을 대표했다. '미스터 니예트'는 안보리 20여 차례 거부권에서 비롯된 별명이었고, 그의 신조는 '10년 협상이 하루 전쟁보다 낫다'였다. 브레즈네프 시대 군축을 주도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1968)와 아프가니스탄(1979) 개입 결정에도 참여했다. 그러나 1985년 3월, 최고참 보수파로서 고르바초프를 추천하며 페레스트로이카의 문을 열었다: '이 사람은 미소가 부드럽지만 이빨은 강철입니다.' 자신이 만든 개혁가가 여는 시대를 지켜보다 죽었다.
1941년 모길료프 포위망 안에서, 야쿠봅스키의 전차대대는 시가로 진입하는 독일 오토바이 부대를 전차로 들이받아 분쇄했다.
벨라루스 농민 가정 출신으로 1932년 적군에 입대했다. 독소전쟁 내내 전차부대를 지휘하며 민스크·모길료프 방어전,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 키예프 해방, 베를린·프라하 공세까지 종전 직전까지 최전선에 서서 소련영웅 칭호를 두 번 받았다. 1967년 국방 제1차관 겸 바르샤바조약군 총사령관·소련원수에 올랐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지휘했으며 사망할 때까지 동유럽 군사동맹의 실무적 최고 지휘관으로 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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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940폴란드 동부 진주·겨울전쟁에 전차중대장으로 참전
1941–1945독소전에서 전차대대장에서 근위전차군단 부사령관까지, 두 차례 소련영웅 수훈
그는 전축 옆에 서서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하이든 소나타의 마지막 화음을 듣고 있었다. 음악이 멈추자 '신성한 작품이군요'라고 중얼거리며 손님들에게 자리를 권했다.
바실리 샤우로는 21년간 브레즈네프 체제 아래서 중앙위 문화부장으로 소련의 문학·영화·미술·음악 검열을 총괄한 인물이다. 비쳅스크 교사 출신으로 중앙위 선전선동국, 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를 거쳐 1965년 모스크바로 발령되어 정체기 문화 정통성의 문지기가 되었다. 공개 석상에 전혀 나서지 않아 '위대한 무언가'라는 별명을 얻었고, 보수적 작가·학계의 지원을 받아 선전부장 대행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를 1973년 중앙위에서 몰아내는 데 성공해 고르바초프 등장까지 이념 개혁을 지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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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42비쳅스크 지역 교사·학교장
1942–1947중앙위 선전선동국 지도원·분과장
1948–1956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기구 → 민스크 주당위 제1서기
1960–1965벨라루스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최고회의 간부회의 의장 (1963–1965)
1971년 9월 3일, 아브라시모프가 베를린 4국 협정에 서명한 뒤 남긴 말: '가시 없는 장미는 없다.' 브란트의 동방정책을 향한 말이자, 냉전 최전선에서 10년 가까이 협상해온 외교관의 솔직한 표현이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소련 직업 외교관이자 당 관료.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정치장교로 복무했고, 전후 벨라루스 각료회의 제1부의장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를 지냈다. 1957년 외교로 전환하여 동독 주재 대사를 두 차례(1962–1971, 1975–1983) 역임하며 냉전기 소련의 대독 정책에서 핵심 역할을 수행했다. 1966년 서베를린 시장 빌리 브란트와 비밀 회담을 가졌고, 1971년 9월 베를린 4국 협정에 소련 대표로 서명했다. 두 번째 동독 임기 중 동독 내정에 적극 개입하여 '통치 대사'라 불렸고, 결국 호네커의 요청으로 1983년 소환되었다. 국가대외관광위원회 의장과 주일 대사를 끝으로 1986년 은퇴했다.
1949년 8월 29일, 첫 소련 원자폭탄 실험 후 젤도비치가 떠올린 장면: "놀란 것은 풀이었다. 놀라운 정적이 흐르다가 갑자기 풀이 눕는 것이 보였다 — 충격파가 도착한 것이다. 정적과 쓰러진 풀, 그것이 핵폭발의 가장 강렬한 인상이었다."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의 독학형 물리학자. 1939–1941년 하리톤과 우라늄 연쇄반응을 세계 최초로 계산했고, 아르자마스-16 이론부장으로 첫 소련 핵실험과 수소폭탄 계산을 주도했다. 1963년 핵무기 연구를 떠나 천체물리학으로 전환, 효과, 우주 대규모 구조, 블랙홀 증발의 기초를 개척했다. 1955년 '300인의 편지'에 서명, 영국 왕립학회·미국 국립과학원 외국회원.
1964년 10월, 프라하의 소련 대사관. 지먀닌은 모스크바에서 막 돌아와 수화기를 들고 크렘린 쿠데타의 성공을 자랑했다. 상대는 흐루쇼프의 아내 니나였다. '친애하는 레오니트 일리치가 제1서기에 취임했습니다!' 답이 없는 수화기 너머로, 니나는 그 순간 남편의 실각을 알게 되었다.
벨라루스 출신의 당 관료로, 11년간 『프라우다』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 언론의 방향을 통제했다. 1976년 중앙위 서기에 올라 수슬로프의 지휘 아래 과학·교육·문화·체육·매체 전반을 관장하는 이념 제2인자가 되었다. 브레즈네프기 후반 보수적 이념 통제의 핵심 집행자였으며, 고르바초프 집권 2년차인 1987년 퇴진할 때까지 당 선전 기구의 연속성을 체현한 인물이다.
그는 민스크 메트로 아이디어에 매달려 모스크바를 끈질기게 설득했고, 결국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훗날 그가 직접 첫 돌을 놓았다.
고멜의 옛신자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벨라루스어·문학 교사로 출발한 키셀료프는, 1959년부터 거의 20년간 벨라루스 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으로서 전후 복구와 공업화를 주도한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민스크 메트로와 즐로빈 제철소를 모스크바 관료들을 상대로 끈질기게 설득해 관철시켰으며, 1978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승진한 뒤 1980년 마셰로프의 후임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 겸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당 지도부에 복귀했다. 개혁보다 안정적 관리를 중시했으나, 취임 2년여 만에 암으로 사망했다.
스스로 알고 할 줄 아는 것보다, 다른 사람들의 좋은 점을 보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면 자신도 많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수학·물리 교사 출신으로,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벨라루스 파르티잔 운동을 조직하여 1944년 소비에트 연방 영웅이 되었다. 1965년부터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로 15년간 재임하며 민스크 메트로, 대규모 화학공장, 브레스트 요새·하틴 기념관을 추진하여 전후 농업 공화국을 소련의 첨단 산업 거점으로 탈바꿈시켰다. 정치국 후보위원(1966–1980)이자 코시긴 개혁을 지지한 실용적 개혁파였으며, 1980년 교통사고로 사망할 당시 코시긴의 후임 각료회의 의장으로 유력시되었다.
1941년 12월 4일, 독일 전차 부대가 서부전선군 사령부를 포위하기 직전 — 대위 이바놉스키가 지휘하는 27전차대대가 돌파구를 막아 사령부를 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소령으로 시작해 26세에 대령으로 종전한 전차 장교로, 모스크바 방어전부터 동프로이센까지 종군했다. 1972년부터 1980년까지 소련군 독일주둔군(GSFG) 총사령관을 역임하며(역대 최장인 8년간) 바르샤바 조약기구 최정예 전력을 지휘해 냉전기 나토와의 군사적 대치 최전선을 책임졌다. 이후 벨로루시 군관구 사령관을 거쳐 1985년 소련 지상군 총사령관 겸 국방차관에 올라 말년의 재래식 전력 증강을 주도했으며, 같은 해 대조국전쟁과 전후 군사력 건설의 공로로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아우슈비츠 해방 직후, 보론초프가 촬영한 생존자와 수용소의 영상은 현장을 국제적 증거로 바꾸었다.
알렉산드르 보론초프는 소련의 다큐멘터리 영화 촬영기사이자 감독으로, 전쟁의 현장을 기록 영상으로 남긴 인물이다. 1945년 1월 말 제1우크라이나 전선 촬영팀과 함께 해방 직후의 아우슈비츠를 촬영했고, 그 영상은 영화 《아우슈비츠》와 뉘른베르크 재판에 제출된 소련 측 증거에 포함되었다. 전쟁 뒤에는 중앙 다큐멘터리 영화 스튜디오에서 촬영과 연출을 이어 가며 전선 기록을 평시의 국가 영화 제작으로 연결했다.
작전 직전 유리 안드로포프가 전화로 말했다. "우리도 원하지 않네. 하지만 해야만 하네." — 1979년 12월 27일, 아민 궁전 습격을 앞두고
소련의 대표적 정보장교로, 1956년 KGB에 입문한 후 동독·중국·미국에서 활동하며 냉전기 소련의 해외정보망을 구축했다. 1979년부터 1991년까지 KGB 제1총국 산하 불법정보국(S국)을 지휘하며 위장 신분으로 침투한 '불법 요원' 네트워크를 총괄했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아민 대통령궁을 43분 만에 제압한 특수작전 '폭풍-333'을 지휘해 소련-아프간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81년 KGB 정예 특수부대 '빔펠'을 창설했다. 1962년 글리니케 다리에서 루돌프 아벨과 프랜시스 게리 파워스의 포로 교환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벨의 '독일인 사촌'으로 위장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1983년 1월 안드로포프가 급서한 키셀료프의 후임으로 그를 긴급 소환했을 때, 슬륀코프는 당 경험 부족을 들어 사양했다. 안드로포프의 답은 짧았다: '오늘날 가장 큰 정치는 경제요. 가서 그 정치를 하시오.'
민스크 트랙터 공장에서 노동자로 시작해 공장장·총감독을 거쳐 벨로루시 공산당 제1서기(1983~1987)와 고르바초프 치하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1987~1990)를 지낸 소비에트 경제 관료 출신 정치인. 벨로루시 당 책임자 시절 농업 생산량을 30% 끌어올리고 적자 농장을 완전 해소해 '당 중앙위 디렉터'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실무형 지도력을 보여주었다. 1987년 중앙위 경제부장으로 발탁되어 페레스트로이카 초기 계획경제에서 시장 지향 개혁으로의 이행을 주도했으나, 정부 수반 니콜라이 리시코프와의 마찰과 건강 악화로 1990년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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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1960민스크 트랙터 공장 보조기사·기사·상급기사·부책임자·책임자·노조위원장
1960–1965민스크 트랙터 예비부품공장 책임자
1965–1972민스크 트랙터 공장장·민스크 트랙터제조 생산연합 총감독
1972–1974민스크 시당위 제1서기
1974–1983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1983–1987벨로루시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87–1990CPSU 중앙위 서기 겸 정치국원; 1987~1988 경제부장, 1988~1990 사회경제정책위원회 위원장
다른 사람들은 자식을 대사관에 두는데, 왜 아들을 알단으로 보냈냐는 질문에 — 「7년 후에 그 현장 학교를 거친, 진짜 지질학자가 되게 하려는 겁니다.」
예브게니 코즐롭스키는 소련 지질학의 '황금기'를 이끈 최장수 지질장관(1975–1989)으로, 재임 기간 소련의 광물자원 기반을 두 배로 확장하고 서시베리아·카스피·중앙아시아에서 대규모 유전과 가스전 개발을 주도했다. 달동 출신으로 부시추조수에서 출발해 극동 솔네치노예 주석광산의 조기 탐사를 성공시켜 레닌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과학기술 혁신을 중시하는 경영자로 성장했다. 그의 지휘 아래 추진된 콜라 초심층 시추는 12,620미터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올랐고, 소련은 400척 규모의 지질탐사선단을 보유하게 되었다.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광물자원 정책의 이론가로 활동하며, 지질학을 국가안보의 기초로 재정립하려는 작업을 마지막까지 이어갔다.
니콜라이 데멘테이는 농업 전문가에서 벨로루시 공산당의 고위 간부와 최고회의 의장으로 올라선 소련·벨라루스 정치가였다. 그는 1990년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국가주권 선언을 주재했지만, 연방을 해체하지 않는 개혁을 지지했다. 1991년 8월 국가비상위원회의 쿠데타를 공개 지지한 뒤 사임하며, 소련 질서의 마지막 국면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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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1962비쳅스크주 당위원회 강사, 비쳅스크 구역 당위원회 제2서기, 비쳅스크 구역 집행위원회 의장
2000년대 러시아의 사회적 양극화를 설명하며 와인잔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잔의 내용물은 안타깝게도 인구의 10퍼센트에 불과한 사람들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잔을 받치고 있는 다리가 나머지 인구입니다.»
조레스 알표로프는 반도체 헤테로구조 물리학의 창시자로, 1968년 세계 최초의 상온 연속발진 반도체 레이저를 실현해 광섬유 통신과 CD 기술의 물리적 토대를 마련한 소련의 응용물리학자이다. 2000년 이 공로로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87년 이오페 물리기술연구소 소장, 1989년 과학아카데미 부총재와 상트페테르부르크 과학센터 의장을 지내며 소련 붕괴 후에도 기초과학의 명맥을 지켰다. 1995년부터 공산당 명단으로 국가두마 의원을 지내며 과학 예산을 옹호했고, 2013년 과학아카데미 개혁에 맞서 싸웠다. 장 조레스의 이름을 딴 그는 평생 공산주의자이면서도 냉전기 광전자공학 경쟁의 한복판에서 국제 과학계를 이끈 인물이었다.
1991년 8월 쿠데타 때, 가택연금 중인 고르바초프와 전화 연결에 성공한 볼스키는 쿠데타파가 퍼뜨린 '고르바초프 건강 이상설'이 거짓임을 세상에 알렸다.
중앙위 기계제작부장,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의 경제 보좌관, 그리고 소련 말기 산업 관료에서 탈소비에트 기업 로비로 이행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러시아 산업가·기업가 연합(RSPP)의 창립자이자 15년간 회장을 맡으며 '붉은 디렉터'들을 조직화된 로비 세력으로 전환시켰고, 이는 러시아 시장경제 이행의 조건을 크게 규정했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 가택연금 중이던 고르바초프와 접촉하여 쿠데타파가 내세운 '건강상 무능' 주장을 공개적으로 반박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특별관리위원장(1988~1990)과 체첸 평화협상 부대표(1995)를 지냈으며, 1986년 체르노빌에서 석 달간 산업 대응을 지휘했다.
고르바초프가 물었다. '국제사회 반응은 생각했나?' 나는 답했다. '옐친이 지금 부시와 통화 중입니다. 부시는 찬성하는 눈치입니다!'
민스크에서 태어난 핵물리학자로, 벨라루스 국립대학 교수이자 라디오전자공학 전문가였다. 1986년 체르노빌 사고 조사위원회에서 소련 당국의 은폐에 맞서 진실 공개를 요구하다 해임되었고, 이 경험이 그를 정치로 이끌었다. 1991년 벨라루스 최고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비스쿨리 사냥 별장에서 옐친·크랍추크와 회동을 주최했으며, 원래 석유·가스 공급 논의로 시작된 자리에서 소련 해체 선언문에 처음으로 서명 의사를 밝혔고, 고르바초프에게 전화를 걸어 소련이 끝났음을 통보했다. 독립 벨라루스의 첫 국가원수였으나 1994년 루카셴코의 부패 의혹 공세로 실각했고, 말년에는 망명하지 않고 민스크에서 루카셴코 정권을 비판하는 야당 원로로 남았다.
「나도, 슈시케비치도, 크랍추크도, 포킨도 그런 문서가 준비되어 서명될 줄은 몰랐다」: 러시아만 벨로베시 협정의 계획을 미리 알고 왔다고 주장한 케비치
벨라루스 폴리테크닉 대학 출신의 기계공학자로, 민스크 공장들에서 경력을 쌓아 벨라루스 공산당과 각료회의 의장(1990) 자리까지 올랐다. 1991년 12월 슈시케비치와 함께 벨로베시 협정에 서명하여 소련 해체의 공동 서명자가 되었고, 훗날 '러시아 대표단만 사전 계획을 가지고 왔으며 우리는 그 문서가 준비될 줄 몰랐다'고 증언하여 회동의 즉흥성과 준비성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1994년 대선에서 루카셴코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했고, 이후 루카셴코의 친러·개헌 노선을 지지하는 의원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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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벨라루스 폴리테크닉 대학 기계공학부 졸업
1958–1973민스크 자동라인 공장 기술자, 작업반장, 부수석기사
1973–1980민스크 키로프 공작기계 공장 수석기사, 공장장, 생산연합 총책임자
1980–1985벨라루스 공산당 민스크 시당 제2서기, 중앙위 부장, 민스크 주당 제2서기
2012년 인터뷰에서 당시 업계 현실을 묻자 이렇게 답했다. '발전 프로그램은 이미 많이 채택되었다. 공작기계 분야만 30개 이상의 정부 문서가 나왔다. 그러나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니콜라이 파니체프는 소련 공작기계·공구공업의 마지막 장관(1986~1991)으로, 벨라루스 농촌 출신 선반공에서 출발해 25년간 레닌그라드 일리치 공작기계공장에서 공장장까지 오른 생산 행정가였다. 장관 시절 CNC 공작기계·유연생산모듈·로봇복합체 등 최신 기술을 도입했으나, 행정명령 체계와 시장 개혁 사이의 모순을 극복하지는 못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러시아 공작기계협회 '스탄코인스트루멘트'를 설립해 업계를 대변했고, 전직 소련·러시아 장관 원로 모임인 공공평의회 의장을 맡았다. 2004년 회고록 『균열』에서 계획경제의 성취와 개혁 실패를 증언했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벨라루스의 작가이자 기자로, 러시아어로 전쟁과 사회적 격변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엮어 집단적 기억의 문학을 만들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아연 소년들》에서 공식 영웅담이 가린 여성과 병사의 경험을 드러냈고, 《체르노빌의 기도》에서는 1986년 재난 뒤 생존자와 유가족, ликвидатор들의 목소리로 기술 재난의 인간적 결과를 기록했다. 그녀의 작업은 사실의 기록과 문학적 구성 사이의 긴장을 감수하면서도 개인의 목소리를 역사 이해의 중심에 놓았으며, 20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콘드라트 테레흐는 소비자협동조합 현장에서 출발해 연방의 소비 유통을 맡은 소련 국가관료였다. 벨라루스의 협동조합과 공화국 정부에서 쌓은 경험은 그를 페레스트로이카 말기의 무역장관으로 이끌었다. 그는 1987년 설탕 부족을 둘러싼 정부 보고에서 생산과 유통의 긴장이 일상적 소비 위기로 드러나는 과정을 기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