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국가적 배경

그루지야

38 명

해당 인물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

Сергей Юльевич Витте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그루지야 1849–1915 ○ 자연사

차르가 미워한 구원투수

1888년, 측근들 앞에서 "화물 기관차 두 대로 황실 열차를 끌면 위험하다"고 직언했다. 며칠 후 보르키 탈선 사고. 알렉산드르 3세는 그를 국철 책임자로 발탁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금본위제를 주도한 제국 근대화의 설계자. 1905년 일본과 강화를 맺고 10월 선언을 받아냈으나, 차르는 위기를 넘겨준 그를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 한직에서 회고록을 쓰다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2–1903재무장관, 금본위제, 시베리아 횡단철도, 공업화 드라이브
  • 1905.9포츠머스에서 일본과의 강화 협상 타결
  • 1905.10초대 총리, 10월 선언 기초
  • 1906.4해임, 이후 국가평의회 한직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치헤이제

Николай Семёнович Чхеидзе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그루지야 1864–1926 ✕ 자살 · 파리

이중권력 시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혁명적 수호주의의 얼굴

「인민과의 직접적 소통을 잃자 그는 저항력을 상실했다. 거대한 떡갈나무도 폭풍에 뽑혀 자양분을 공급하던 흙에서 분리되면 시든다. 치헤이제도 그렇게 갔다」 — 이라클리 체레텔리, 1926년 장례식에서

그루지야 귀족 출신 멘셰비키. 『공산당 선언』을 그루지야어로 처음 옮겼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이중권력을 주재했으나 10월혁명에 반대했고, 그루지야 독립을 이끌며 파리 망명정부 수반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0년대메사메다시 가입, 『공산당 선언』 그루지야어 초역
  • 1898–1907바투미 시의회 의원·시 병원 감독관, RSDLP 입당(1898), 멘셰비키(1903~)
  • 1907–173·4대 두마 의원(티플리스 현), 멘셰비키 원내대표
  • 1917.2–9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VTsIK 의장(6월~)
  • 1918–21자캅카스 세임 의장, 그루지야 제헌의회 의장, 독립선언 서명
  • 1919파리 강화회의 그루지야 대표
  • 1921–26프랑스 망명, 그루지야 망명정부 수반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마르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Марр
이론가 소비에트 그루지야 1865–1934 ○ 뇌졸중으로 사망

제국 학술원 출신으로 유일하게 공산당에 입당해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한 야페트 이론의 창시자

'언어학의 세계 규모적 정립' — 마르가 자신의 이론을 일컫던 표현이다. 그에게 모든 언어는 네 원시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언어는 계급적 상부구조였다.

그루지야 쿠타이시에서 태어난 마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카프카스 언어·고고학으로 명성을 쌓아 1912년 제국 학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혁명 후 언어를 계급적 상부구조로 보며 모든 언어가 네 원시음(sal, ber, yon, rosh)에서 비롯되었다는 '야페트 이론'을 주창, 1930년 공산당 입당과 함께 학술원 부원장이 되어 사망 시까지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했다. 그의 유사과학적 이론은 1950년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문제」로 공식 폐기되었으며, 그 행로는 혁명기 과학과 권력의 길항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상세 이력 보기
  • 1888페테르부르크 대학 동양학부 졸업 및 강사
  • 1912제국 학술원 정회원
  • 1921야페트 연구소(후일 언어·사고 연구소) 설립
  • 1926–1930레닌그라드 공공도서관 관장
  • 1930공산당 입당 (제국 학술원 출신 최초·유일)
  • 1930–1934소련 학술원 부원장

필리프 이에세예비치 마하라제

ფილიპე იესეს ძე მახარაძე
이론가 소련 그루지야 1868–1941 ○ 자연사

그루지야를 온건하게 소비에트화하려다 스탈린에게 쫓겨난 볼셰비키 원로

「그루지야에서 소비에트 권력의 수립은 외국 점령의 외양을 띠었다, 나라 안에는 혁명에 가담할 준비가 된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21년 12월, 모스크바 중앙위원회 보고

그루지야 구리아 출신으로 트빌리시 신학교와 바르샤바 수의학연구소에서 수학했다. 1891년 사회민주주의에 합류해 멘셰비키 우세 지역에서 드문 볼셰비키 지도자로 활동했고, 1921년 2월 혁명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반대파에 대한 온건 노선과 그루지야 주권 유지를 주장하다 7월 스탈린에게 해임되고 므디바니로 교체되었다. 이 사건은 1922년 '그루지야 사건'의 직접적 전사이며, 이후 고스플란·인민위원회·최고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대숙청을 생존한 몇 안 되는 구볼셰비키 원로로 1941년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1사회민주주의 운동에 합류
  • 1903캅카스 연합위원회 RSDLP 위원, 1905년 혁명 참여
  • 1907–1915자캅카스에서 볼셰비키 지하운동 지도
  • 1917『캅카스 노동자』 편집자, RSDLP(b) 캅카스 지역위원회 위원
  • 1918–1920멘셰비키 정부하 그루지야에서 지하활동
  • 1921.2–7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 온건 노선으로 스탈린에게 해임
  • 1922–1938그루지야 중앙집행위 의장, 인민위원회 의장, 자캅카스 고스플란 의장, 자캅카스 중앙집행위 의장
  • 1938–1941그루지야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소련 최고소비에트 부의장

폴리카르프 구르게노비치 므디바니

Поликарп Гургенович Мдивани
좌익 반대파 소련 그루지야 1877–1937 ✕ 처형

레닌의 마지막 싸움에서 스탈린의 중앙집권화에 맞선 그루지야 공산주의자

「나를 총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사지를 찢겨야 한다! 11군을 이곳으로 끌어들인 것은 나였다. 나는 내 민족을 배신했고, 스탈린과 베리야라는 이 변종들이 그루지야를 노예로 만들고 레닌의 당을 무릎 꿇리는 것을 도왔다」 — 1937년 NKVD 재판에서

그루지야 귀족 출신으로 1903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캅카스 혁명운동과 내전에서 활동했다. 1922년 그루지야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의장으로서 스탈린의 '자치화' 계획에 반대하며 그루지야 공화국의 연방 내 주권을 주장했고, 이 갈등은 레닌이 스탈린과 오르조니키제를 비판하며 므디바니 측을 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1923년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8년 출당·유배 후 복당했으나 대숙청 와중인 1937년 총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3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캅카스에서 혁명활동
  • 1918–1919제11군 혁명군사위원회 위원
  • 1920북페르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 임무 수행
  • 1921주터키 RSFSR 전권대표, 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
  • 1922그루지야 소비에트 인민위원회 의장, 자캅카스 연방 동의회 의장 — '그루지야 사건'에서 스탈린에 반대
  • 1923좌익 반대파 합류, 소비에트 최고경제회의 양보위원회 위원
  • 1924–1928소비에트 연방 주프랑스 무역대표
  • 1928–1931반대파 활동으로 출당·유배, 1931년 복당 신청 후 복권
  • 1931–1936그루지야 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경공업인민위원·인민위원회 제1부의장
  • 1937체포, '트로츠키주의 첩보-파괴 센터' 혐의로 사형, 7월 10일 총살

이오시프 비사리오노비치 스탈린

Иосиф Виссарионович Сталин
당 최고 지도자 소련 그루지야 1878–1953 ○ 자연사

「조용한 실무가」로 보였던 사람

1941년 6월 22일 새벽, 주코프가 독일 침공을 알렸을 때 스탈린은 창백한 얼굴로 빈 파이프를 쥐고 있었다. 몰로토프가 선전포고를 전하자 그는 말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 길고 무거운 침묵.

1917년에는 조연이었고 1924년에는 위험해 보이지 않는 서기장이었다. 그 「실무」, 곧 인사권이 권력의 본체임을 라이벌들은 너무 늦게 알았다. 집단화와 공업화, 대숙청과 굴라크, 그리고 전쟁의 승리가 모두 한 장부에 적혀 있다. 1953년 뇌일혈로 쓰러졌을 때, 곁의 누구도 감히 먼저 의사를 부르지 못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2–17지하활동, 체포·유형을 거듭하다 1917년 프라우다로
  • 1913논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발표
  • 1917–22민족인민위원, 내전기 차리친 전선
  • 1922서기장 취임, 인사권 장악
  • 1924강연집 《레닌주의의 기초》 출간
  • 1928–33대전환, 집단화·5개년 계획
  • 1936–38대숙청
  • 1941–45국가방위위원회 의장·최고사령관
  • 1945–53전후 재건과 냉전, 1953년 3월 사망
  • 1952《소련 사회주의의 경제문제》 출간

이라클리 게오르기예비치 체레텔리

ირაკლი წერეთელი
비소련 혁명가 그루지야 그루지야 1881–1959 ○ 자연사 · 뉴욕

1917년 혁명적 수호주의의 설계자, '그런 정당이 있습니다'의 상대역

1917년 6월 4일, 제1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체레텔리가 "권력을 우리 손에 달라고 말하는 정당은 러시아에 없다"고 선언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레닌이 "그런 정당이 있습니다!"라고 응수했다.

그루지야 출신 멘셰비키 지도자. 1917년 혁명적 수호주의를 주창하고 임시정부 내무장관을 지냈다. 레닌의 유명한 '그런 정당이 있습니다!' 반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며, 10월혁명 후 그루지야 독립에 참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0–1902모스크바대 법학부 입학, 학생운동 지도자로 체포·시베리아 유형
  • 1903–1906RSDLP 입당, 멘셰비키파 합류. 주간지 『크발리』 주필. 베를린 수학 후 1906년 귀국
  • 1907제2두마 의원(쿠타이시 현), 사회민주당 원내대표. 두마 해산 후 5년 강제노동형, 시베리아 유형
  • 1915–1917.2시베리아 치머발트주의 주도, 『시베리아 잡지』 편집. 이르쿠츠크 혁명위원회 참여
  • 1917.3–9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혁명적 수호주의 노선 주도
  • 1917.5–8임시정부 체신장관(5~7월), 내무장관 겸임(7~8월)
  • 1918–1921그루지야 독립선언 서명, 제헌의회 의원, 파리 강화회의 대표
  • 1921–1959프랑스 망명, 제2인터내셔널 집행위원. 1940년 미국 이주, 1959년 뉴욕에서 사망

아르샤코비치 카모

Симон Аршакович Тер-Петросян
비소련 혁명가 소련 그루지야 1882–1922 ✕ 교통사고

볼셰비키의 전설적 무장약탈자, 광기를 연기해 사형을 네 번 피한 혁명가

레닌이 그를 평했다: 「완전히 예외적인 충성심, 용기, 그리고 에너지를 지닌 사람」. 막심 고리키는 그를 「혁명의 예술가」라 불렀다.

본명 시몬 테르-페트로샨. 고리 출신으로 스탈린과 어린 시절부터 인연을 맺었고, 그에게 러시아어를 배우며 마르크스주의에 눈떴다. 1907년 티플리스 은행 마차 습격을 지휘해 25만 루블을 볼셰비키 금고에 쥐여준 조직자였다. 베를린에서 체포되어 독일 정신과 의사들조차 속인 치밀한 광기 연기로 사형을 면했고, 티플리스 정신병원 탈출 후 파리에서 레닌의 환대를 받았다. 내전기에는 캅카스 지하조직을 재건했으나, 그 모든 파괴적 용기는 평화로운 일상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1922년 티플리스 거리에서 자전거를 타다 트럭에 치여 생을 마감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1–03RSDLP 입당, 티플리스 위원회 청년조직 지도, 지하인쇄소 조직
  • 1903–05첫 체포 후 탈옥, 1905년 혁명 참가, 무기 밀반입
  • 1907티플리스 은행마차 습격 지휘 — 34만 루블 탈취, 레닌에게 전달
  • 1907–11베를린 체포, 3년간 광기 연기로 사형 면함, 티플리스 정신병원 탈출
  • 1912–17코조리 습격 실패 후 체포, 4건 사형선고 → 로마노프 300주년 사면으로 20년형
  • 1918–20캅카스·남러시아 볼셰비키 지하조직 재건, 바쿠 봉기 준비
  • 1920–22참모아카데미 수학, 대외무역·그루지야 재무인민위원부 근무

세르고 콘스탄티노비치 오르조니키제

Серго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Орджоникидзе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그루지야 1886–1937 ✕ 자살

대전환의 공업 사령관, 스스로 방아쇠를 당기다

1936년 10월 27일, 50세 생일. 퍄티고르스크에서 그의 공적을 기리는 성대한 축하회가 열렸으나, 그는 참석을 거부했다. 바로 그날 친형 파풀리아의 체포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아내 지나이다만 홀로 빈 의석을 지켰다.

1903년 입당한 볼셰비키 원로, 1912년부터 중앙위원. 내전기 캅카스 소비에트화를 지휘했고, 1930년 정치국 정위원으로 승격했다. 스탈린의 오랜 그루지야 동지로서 중공업인민위원(1932~37)에 임명되어 제1·2차 5개년계획을 진두지휘: 마그니토고르스크와 쿠즈네츠크 제철소,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우랄 중기계 공장 등 소비에트 산업화의 골격을 세웠다. 그러나 1936년 대숙청이 자신이 발탁한 공장장들과 친형 파풀리아를 집어삼키자 스탈린과 공개 충돌했고, 1937년 2월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당국은 심장마비라고 발표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중앙위원 선출
  • 1921캅카스 소비에트화 지휘, 「그루지야 사건」 논란
  • 1926–30중앙통제위원회 의장
  • 1930–32국민경제최고회의 의장
  • 1932–37중공업인민위원: 5개년 계획의 공업 총괄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콥스키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яковский
작가·예술가 소련 그루지야 1893–1930 ✕ 자살

혁명의 확성기이자 풍자자

1930년 1월 21일, 레닌 추도식이 열린 볼쇼이 극장에서 마야콥스키는 장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3부를 낭독했다. 정부 관람석에 앉은 스탈린은 시인을 향해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 석 달 뒤 마야콥스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러시아 미래주의의 가장 큰 목소리였던 그는 혁명 뒤 ROSTA 포스터와 장시로 새 체제의 언어를 빚었다. 관료주의를 겨눈 후기 풍자는 문단과 국가의 냉대를 받았고 1930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2–1915러시아 미래주의 운동과 『바지를 입은 구름』
  • 1917–1921혁명시와 ROSTA 창문 선전포스터 제작
  • 1923LEF 창간과 전위예술 활동
  • 1924장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발표
  • 1925–1926멕시코·쿠바·미국 여행과 미국시 연작
  • 1929–1930희곡 『빈대』·『목욕탕』과 자살

네스토르 아폴로노비치 라코바

Нестор Аполлонович Лакоба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그루지야 1893–1936 ✕ 독살

스탈린의 절친에서 베리야의 첫 희생자로: 압하지야의 붉은 군주

스탈린이 라코바에게 했다는 말 — '나는 코바, 너는 라코바.' 1936년 12월 27일 밤, 베리야의 저택에서 저녁 식사 후 극심한 구토와 함께 의식을 잃었다. 운전기사는 그가 마지막으로 '베리야가 나를 죽였다'고 속삭였다고 증언한다.

압하지야 볼셰비키 지도자로, 1922년부터 1936년까지 압하지야를 통치하며 농업과 흑해 휴양지 개발을 추진했다. 스탈린의 절친이었으나 베리야에게 독살되었고, 사후 복권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1티플리스 신학교에서 혁명 선동으로 제적, 바투미에서 RSDLP(b) 입당
  • 1917–18압하지야 농민 무장대 '키아라즈' 조직, 수후미 군사혁명위 부의장
  • 1920–21바투미 지하 볼셰비키 조직 지도, RSFSR-터키 모스크바 조약 협상 참여
  • 1922–30압하지야 SSR 인민위원평의회 의장
  • 1930–36압하지야 ASSR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샬바 오타로비치 체레텔리

Шалва Отарович Церетели
국가보안 기관 소련 그루지야 1894–1955 ✕ 처형

제정군 장교 출신의 공작 요원

1939년 7월 8일, 모스크바에서 츠할투보로 향하는 NKVD 경호 특별열차 안에서 주중 소련 전권대표 보프쿤-루가네츠를 망치로 살해하고 그의 아내를 교살했다. 시신은 산으로 옮겨져 교통사고로 위장되었다.

그루지야 체레텔리 공작 가문의 후손으로, 제정군 장교와 포로 생활을 거쳐 1921년 그루지야 체카에 들어갔다. 귀족 출신이었지만 베리야의 가장 신뢰받는 은밀 공작 요원이 되어 납치와 암살을 전담했다. 대숙청기 NKVD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앉았고, 1939년부터 자캅카스 국경경비대를 지휘했다. 그해 7월 주중 소련 대사 부부를 열차 안에서 살해한 뒤 교통사고로 위장한 사건의 직접 실행자로 기록된다. 전쟁 중에는 그루지야 제1부내무인민위원을 지냈다. 베리야 몰락 후 1953년 체포되어 1955년 총살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914–1915제정 러시아군 소위, 포로
  • 1937–1938그루지야 민병대 책임자, NKVD 특별 트로이카 위원
  • 1939–1941자캅카스 국경경비대 관리국장
  • 1941–1946그루지야 제1부내무인민위원
  • 1946–1953그루지야 부국가보안장관, 국경경비대 지휘 겸임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비사리온 로미나제 비사리오노비치 (베소)

Виссарион Виссарионович Ломинадзе
좌익 반대파 소련 그루지야 1897–1935 ✕ 자살

광주 봉기의 코민테른 설계자, 스탈린 집단화에 맞선 첫 당내 반대파

1930년 제16차 당대회 연단에서 그는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를 정면으로 비판했다. 연설을 마치자 강당은 침묵—박수는 터지지 않았다.

그루지야 출신 볼셰비키로, 코민테른 시절 중국 혁명에 깊이 개입했다. 1927년 8·7 긴급회의를 주재해 천두슈를 경질하고 마오쩌둥을 정치국으로 끌어올렸으며, 광저우 봉기를 승인했다. 중국의 '아시아적 생산양식'을 근거로 자본주의 단계를 건너뛸 수 있다는 이론을 폈다. 1930년 시르초프와 함께 스탈린의 강제 집단화에 맞선 첫 당내 반대파를 결성했다가 좌천되었고, 1935년 체포 위협 속에 자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7페트로그라드 군사조직에서 활동, 쿠타이시 당비서
  • 1918–20트빌리시·바쿠 위원회, 아제르바이잔 당 중앙위 간부
  • 1921–22크론슈타트 반란 진압 참여,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구 당 조직자
  • 1922–2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25–29코민테른 청년인터내셔널 서기, 1927년 중국 대표로 8·7 긴급회의 및 광저우 봉기 주도
  • 1930자캅카스 당 제1서기, 시르초프와 함께 '좌우 블록' 결성 — 중앙위원에서 해임
  • 1933–35마그니토고르스크 시당 서기

블라디미르 게오르기예비치 데카노조프

Владимир Георгиевич Деканоз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그루지야 1898–1953 ✕ 처형

리투아니아 병합을 연출하고 베를린에서 선전포고를 받은 자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리벤트로프가 데카노조프를 불러 대소 선전포고를 낭독했다. 데카노조프는 침착히 듣고 '히틀러와 스탈린이 직접 만났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답했다.

바쿠 출신의 그루지야인으로, 베리야의 최측근이자 NKVD 대외정보·방첩을 동시에 지휘하며 대숙청 후반기 숙정을 주도했다. 1940년 리투아니아 전권대표로 파견되어 한 달 만에 소비에트 병합을 연출했고, 베를린 대사로 부임해 1941년 6월 리벤트로프로부터 독일의 선전포고를 직접 받았다. 전후에는 라디오방송위원회 등 한직으로 밀려났다가 1953년 베리야 체포 직후 내무장관으로 잠시 복귀했으나, 곧 '베리야 일당'으로 함께 체포·처형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1931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 체카·GPU 근무
  • 1936–1938그루지야 식품공업인민위원, 이어 고스플란 의장
  • 1938–1939NKVD 국가보안총국 제5부장(대외정보)
  • 1939–1947외무 부인민위원(부장관)
  • 1940리투아니아 주재 전권대표, 병합 감독
  • 1940–1941독일 주재 소련 대사
  • 1953그루지야 내무장관
  • 1953체포, 재판과 처형

라브렌티 파블로비치 베리야

Лаврентий Павлович Берия
국가보안 기관 소련 그루지야 1899–1953 ✕ 처형

개혁안을 든 비밀경찰 총수

1949년 8월 29일 새벽, 카자흐 초원. 베리야는 참호에서 카운트다운을 지켜보았다. 섬광이 초원을 삼키고 버섯구름이 솟아오르자 그는 쿠르차토프에게 달려가 껴안았다. 몇 분 후 "미국인들이 사기꾼이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며 서방 스파이의 방사능 낙진 샘플 채취 차단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스탈린의 마지막 비밀경찰 총수이자 원폭 계획의 감독자 — 그리고 스탈린이 죽자 가장 급진적인 개혁안을 쏟아 낸 사람. 예조프의 대숙청을 마무리 짓고 NKVD를 장악했으며, 1944년 체첸·잉구시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집행했다. 전후에는 특별위원회 의장으로 소련 핵무기 개발을 총괄해 1949년 첫 핵실험을 성공시켰다. 스탈린 사후 제1부총리로서 대대적 사면, 동서독 통일 중립화 제안, 민족 간부 우대 등 급진 개혁안을 쏟아냈다. 동료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의 개혁이 아니라 그의 서류함이었다. 1953년 6월 정치국 회의 도중 주코프 원수의 장교들에게 체포되어 12월 총살 — 소련 최고 권력투쟁의 마지막 처형이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31캅카스 체카·GPU
  • 1931–38그루지야 당 제1서기
  • 1938–45내무인민위원, 예조프 숙청 마무리와 굴라크 관리, 1944년 민족 강제이주 집행
  • 1945–53원폭 계획 총괄(특별위원회 의장)
  • 1953.3–6제1부총리, 사면·복권 등 개혁안 연발
  • 1953.6/12체포, 처형

압크센티 나리키예비치 라파바

Авксентий Нарикиевич Рапава
국가보안 기관 소련 그루지야 1899–1955 ✕ 처형

십 년간 그루지야 경찰기구를 운영한 자

1951년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된 라파바는 자신이 10년간 지휘했던 내부감옥에 갇혀 160일간 잠을 빼앗겼고, 얼음처럼 찬 독방에 수갑을 찬 채 벌거벗겨진 채 버려졌다 — 그가 수하들에게 지시했던 바로 그 고문 수법이었다.

밍그렐리아 출신으로 1920년대 체카에 들어가 1938년부터 10년간 그루지야 NKVD와 국가보안부를 이끌며 대숙청 시기 공화국 보안기구의 핵심 책임자로 활약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서 전간기 그루지야 공안 체제를 구축했으나, 1951년 스탈린의 '밍그렐리아 사건'에 연루됐다가 스탈린 사후 풀려났고, 베리야 몰락 직후인 1953년 7월 재체포되어 1955년 공개 재판 끝에 총살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930–1931아자리야 GPU 책임자
  • 1931–1933그루지야 GPU 부의장
  • 1936–1937자캅카스·그루지야 부내무인민위원
  • 1937–1938압하지야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이어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38–1943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 1943–1948그루지야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48–1951그루지야 법무장관
  • 1953그루지야 국가통제장관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라브렌티 포미치 차나바

Лаврентий Фомич Цанава
국가보안 기관 소련 그루지야 1900–1955 ○ 재판 없이 옥중 사망

‘두 번째 라브렌티’, 미호엘스 살해의 감독자

1948년 1월 12일 밤, 미호엘스와 골루보프는 민스크 외곽 차나바의 다차로 유인되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트럭에 깔려 즉사했고, 시신은 인적이 드문 거리에 버려졌다.

베리야의 측근으로 1938년부터 1951년까지 벨로루시 국가보안 책임자로 군림하며, 병합된 서부 벨로루시의 소비에트화와 대규모 추방을 지휘했다. 전쟁 중 파르티잔운동 중앙참모부 부장으로 전선 특별부도 관장했다. 가장 악명 높은 행위는 1948년 1월 자신의 민스크 다차에서 스탈린의 지시로 배우 솔로몬 미호엘스를 살해한 일이다. 1951년 소련 MGB 부장관까지 승진했으나 이듬해 실각했고, 1953년 베리야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 없이 부티르카 감옥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8–1941벨로루시 내무인민위원
  • 1941벨로루시 국가보안인민위원
  • 1941–1943벨로루시 NKVD, 서부·중부전선 특별부장
  • 1942–1943파르티잔운동 중앙참모부 부장
  • 1943–1951벨로루시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51–1952소련 국가보안 부장관, 제2총국장(방첩)
  • 1953–1955체포, 재판 없이 옥중 사망

그리고리 아르테모비치 아루티노프

Григорий Артемьевич Арутинов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그루지야 1900–1957 ○ 심장마비

16년간 스탈린 시대 아르메니아를 이끌며 산업 건설과 문화 부흥을 주도한 '그리고리 건설자'

요양 제안을 거절하며: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치료받으면 우리 제르무크는 누가 짓나?' 진흙 속을 걸으며 직접 부지를 정한 끝에 제르무크는 아르메니아 대표 온천도시가 되었다.

1937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발탁돼 16년간 공화국을 이끌며 중공업·도시계획과 '다비드 사순스키' 서사시 기념 등 문화 부흥을 주도했다. 1953년 해임 후 국영농장에서 생을 마감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1–1922그루지야 공산당 테라비 현위원회 선전부장 · 서기
  • 1922–1924모스크바 마르크스 국민경제연구소 수학 (중퇴)
  • 1927–1930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촌 담당
  • 1931–193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조직부장 · 서기국원
  • 1934–1937트빌리시 시당위원회 서기 (제1서기 → 제2서기)
  • 1937–1953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41–1945자캅카스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 1953–1955예레반 근교 국영농장(소프호스) 의장

세르고 아르세니예비치 고글리제

Сергей Арсеньевич Гоглидзе
국가보안 기관 소련 그루지야 1901–1953 ✕ 처형

그루지야 대숙청의 실무 총괄에서 극동의 총독으로

동독에서 소콜롭스키 원수의 사무실로 소환된 고글리제는, 뒤따라 들어온 두 장교가 권총을 겨누자 체포되었다. '그의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고 목격자가 기록했다. 베리야 측근들의 몰락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루지야 출신 국경경비대 정치장교로, 캅카스에서 베리야의 눈에 띄어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이 되었고 NKVD 트로이카를 주재하며 대숙청을 실무 총괄했다. 베리야의 후원으로 레닌그라드 NKVD에서 예조프 잔당을 정리했고, 1941년 새로 병합된 베사라비아에서 3만 명 이상의 추방을 감독했다. 이후 10년을 소비에트 극동의 보안 총수로 보냈다. 1951년 중앙에 복귀해 MGB 제1부장관과 군 방첩 책임자를 지냈고 '의사들의 음모' 수사를 감독했다. 1953년 7월 동독에서 체포되어 베리야와 함께 재판받고 총살됐다. 복권되지 않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34–1938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그루지야 NKVD 트로이카 의장
  • 1938–1941레닌그라드주 NKVD 관리국장
  • 1941몰다비아 주재 NKVD 전권대표
  • 1941–1951하바롭스크변경주 NKVD·MGB 책임자, 극동 MGB 전권대표
  • 1951–1952국가보안 제1부장관
  • 1951–1952우즈베크 국가보안장관
  • 1952–1953MGB 제3총국장(군 방첩), 국가보안 제1부장관
  • 1953구금, 재판과 처형

그리고리 테오필로비치 카라나제

Григорий Теофилович Каранадзе
국가보안 기관 소련 그루지야 1902–1970 ○ 자연사

숙청을 넘기고 살아남은 그루지야 내무장관

1952년 4월 베리야를 겨냥한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되었다가 스탈린 사후 베리야의 손으로 풀려났다. 이듬해 베리야가 실각하자 측근들은 대부분 총살당했지만, 카라나제는 해임에 그치고 1970년 자연사했다.

베리야의 그루지야 출신 측근으로, 크림·다게스탄 내무인민위원을 거쳐 그루지야 내무장관(1943~1952)을 지냈다.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됐다가 스탈린 사후 복권되었고, 베리야 측근 중 유일하게 처형을 면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5–1937트빌리시·시그나기 지구당 제1서기
  • 1938–1941크림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42–1943다게스탄 자치공화국 내무인민위원
  • 1943–1952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52–1953‘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 이후 복권
  • 1953그루지야 내무 부장관
  • 1957–1970그루지야 각료회의 국가산림위원회 부의장

스테판 솔로모노비치 마물로프

Степан Соломонович Мамул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그루지야 1902–1976 ○ 십오 년형 복역 뒤 자연사

NKVD 서기국을 쥔 문서의 관문

1938년 12월 베리야의 부름으로 트빌리시에서 모스크바로 올라왔다. 한 달 뒤 NKVD 서기국 제1부국장에 임명되어, 14년간 비밀경찰의 모든 문서가 그의 책상을 통과했다.

베리야 측근 당 관료. NKVD 서기국장으로 문서 흐름 전체를 통제했고, 내무 부장관으로 수용소 체계를 관장했다. 베리야 숙청 후 별도 재판으로 15년형을 살고 1968년 석방됐다.

상세 이력 보기
  • 1923–1938압하지야·그루지야·카자흐스탄 당 사업, 트빌리시 시당 서기
  • 1939–1946NKVD·MVD 서기국장
  • 1946–1953내무 부장관(수용소·보급 관장)
  • 1953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부장
  • 1953–1968체포, 십오 년형 복역

바실 파블로비치 므자바나제

Васил Павлович Мжаванадзе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그루지야 1902–1988 ○ 실각 1972 · 자연사

19년 집권한 그루지야의 보스, 그림자 경제의 대부

1965년 6월, 므자바나제는 스탈린의 고향 고리에 있는 박물관을 다시 열게 하면서 스탈린의 이 말을 인용했다: "우리 당은 검증된 사람에게만 문이 열리는 요새다."

흐루쇼프가 키예프 군관구에서 알아본 군사정치위원 출신으로, 1953년 베리야 체포 직후 그루지야 당 제1서기로 발탁되어 베리야의 후견망을 일소하고 19년간 공화국을 통치했다. 1957년 정치국 후보위원에 올랐고, 농업-공업 분리 개혁에는 은밀히 저항했으며, 1964년 흐루쇼프 축출 음모를 사전에 통보받은 소수 고위 간부 중 한 명이었다. 스탈린 격하에 제동을 걸어 1965년 고리 박물관을 재개관시켰고, 그의 장기 집권 아래 그루지야는 부패와 지하경제가 번성하는 '그루지야 모델'로 자리잡았다. 1972년 자신이 임명했던 내무장관 셰바르드나제가 수집한 비리 자료로 실각했고, 이후 모스크바에서 연금 생활을 하다 1988년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5–24공장 노동자
  • 1924–37붉은 군대 복무, 1927년 입당
  • 1937–41군사정치위원,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 1941–45대조국전쟁: 레닌그라드 전선·여러 야전군 군사평의회 위원
  • 1945–53키예프·프리카르파티예 군관구 군사평의회 위원
  • 1953–72그루지야 당 중앙위 제1서기
  • 1957–72CPSU 정치국(상임위) 후보위원
  • 1972.9부패 혐의로 해임, 연금 생활

사르디온 니콜라예비치 나다라야

Сардион Николаевич Надарая
국가보안 기관 소련 그루지야 1903–1982 ○ 십 년형 복역 뒤 자연사

베리야의 경호를 맡은 내부감옥 책임자

1937년, 나다라야는 전 그루지야 중앙위원회 서기 삼손 마물리야를 심문 탁자에 묶어 일주일 넘게 구타한 끝에 오르조니키제에 대한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1955년 재판에서 스스로 실토한 내용이다.

그루지야 서부 세피에티 마을 출신으로, 1937년 대숙청 정점에서 그루지야 NKVD 내부감옥을 운영하며 수감자 구타와 허위 사망진단서 작성에 관여했다. 1939년 베리야의 개인 경호 부책임자가 되어 모스크바로 올라갔고, 1953년 경호 책임자에 올랐다.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트빌리시 공개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여섯 고위 피고와 달리 처형을 면했다. 1965년 모르도바 수용소에서 석방되었고 198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7–1938그루지야 NKVD 내부감옥 부책임자, 이어 책임자
  • 1939–1946베리야 개인 경호 부책임자
  • 1946–1952MGB 경호총국 장교
  • 1952–1953MGB 제41 경호대 부책임자
  • 1953베리야 개인 경호 책임자
  • 1953–1965체포, 십 년형 복역

보그단 자하로비치 코불로프

Богдан Захарович Кобул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그루지야 1904–1953 ✕ 처형

베리야의 가장 가까운 부관이자 카틴·민족이주의 집행자

메르쿨로프는 회고했다 — "베리야는 밤늦은 업무를 마친 뒤 언제나 코불로프만 데리고 집이나 다차로 향했다." 루뱐카의 그 누구보다 코불로프는 베리야의 사적인 영역에 속한 인물이었다.

아르메니아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베리야의 손에 발탁된 뒤 스탈린 공포정치의 핵심 설계자가 되었다. NKVD 수사국장(1938–1939)으로서 대숙청의 심문과 처형을 지휘했고, 1940년 카틴 학살을 집행한 '3인조'의 일원이었다. 전시에는 NKVD·NKGB 차석으로서 체첸·인구시·크림 타타르 등 민족 전체의 강제이주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으며, 베리야의 개인적 고문 전문가로도 악명 높았다. 스탈린 사후 베리야와 함께 제1내무차관으로 복귀했으나 1953년 6월 체포되어 12월 베리야 등과 함께 총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2–1931그루지야 체카·GPU에서 하급 보안 요원으로 근무
  • 1931–1937베리야에게 발탁되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에서 활동, NKVD로 승계
  • 1937–1938그루지야 NKVD 차석, 대숙청기 현장 숙청 책임
  • 1938–1939NKVD 수사국장 — 예조프 사건과 주요 정치사건 수사 총괄
  • 1939–1941NKVD 경제총국장, 카틴 학살 집행 3인조 참여
  • 1941–1945NKVD·NKGB 부인민위원(차석) — 체첸·인구시·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 작전 지휘
  • 1953.3–1953.6소련 내무부 제1차관, 베리야의 측근으로 복귀
  • 1953.6–1953.12베리야와 함께 체포, 사형 선고 후 총살

니콜라이 막시모비치 루하제

Николай Максимович Рухадзе
국가보안 기관 소련 그루지야 1905–1955 ✕ 처형

밍그렐리아 사건을 몰아붙이다 스스로 무너진 자

1930년대 말 가그라 NKVD 지구부장으로서 심문 중 구타를 일상화하며 공공연히 말했다: "때리지 않는 자야말로 인민의 적이다!"

그루지야 보안기관에서 성장한 루하제는 1937년 압하지야 가그라 NKVD 지구부장으로서 '간이 수사' 방식의 대규모 체포를 지휘했다. 전쟁기에는 자캅카스 전선 특별부장과 스메르시 방첩 책임자를 거쳐, 1948년 그루지야 국가보안장관에 올랐다. 이 자리에서 베리야 파벌을 겨냥한 조작 사건인 '밍그렐리아 사건'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망 수개월 전인 1952년 11월 스스로 체포되었고, 1955년 역설적으로 베리야 집단 일원으로 재판받아 총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7–1938압하지야 가그라 지구 NKVD 부장
  • 1939–1941그루지야 NKVD 수사과장
  • 1941–1943그루지야 부내무인민위원, 자캅카스전선 특별부장
  • 1943–1945자캅카스전선·군관구 스메르시 방첩 책임자
  • 1948–1952그루지야 국가보안장관
  • 1952–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아마야크 자하로비치 코불로프

Амаяк Захарович Кобул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그루지야 1906–1955 ✕ 처형

나치의 역정보를 모스크바로 흘려보낸 베를린 레지덴트

베를린에서 코불로프가 심은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게슈타포가 조종하는 이중간첩이었다. 그의 보고는 NKVD 정보분석관을 건너뛰고 베리야를 거쳐 스탈린의 책상에 직행했고, "독일의 침공 위험은 없다"는 확신을 강화시켰다.

보그단 코불로프의 동생으로, 형과 베리야의 후원에 힘입어 NKVD에서 출세했다. 1938년 서른둘에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대행, 이듬해 베를린 NKVD 레지덴트로 파견되었으나 독일어도 작전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주력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독일이 심은 이중간첩으로, 1940~1941년 나치의 역정보가 코불로프를 통해 모스크바로 흘러들어갔다. 전쟁기에는 우즈베키스탄 보안 총수, 전후에는 포로관리총국과 굴라크 부수장을 지냈으며, 1953년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총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7–1938가그라 시 NKVD 부장, 이어 압하지야 자치공화국 NKVD
  • 1938–1939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대행
  • 1939–1941베를린 주재 대사관 참사관, NKVD 합법 레지덴트
  • 1941–1945우즈베크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내무인민위원
  • 1945–1951포로·억류자 관리총국 부국장, 이어 제1부국장
  • 1951–1953포로관리국장 겸 굴라크 제1부수장
  • 1953–1955체포, 별도 재판과 처형

미하일 포르피리예비치 게오르가제

Михаил Порфирьевич Георгадзе
국가원수 소비에트 그루지야 1912–1982 ○ 자연사

네 국가원수 아래 25년간 모든 소비에트 법령에 공동 서명한 제도적 닻

1982년 11월 23일, 브레즈네프 사망 13일 만에 최고회의 회의장에 참석했다가 자리에서 쓰러져 사망했다. 25년의 행정적 연속성이 한 순간에 끊어졌다.

소비에트 최고회의 상무회 서기(1957–1982)로서 흐루쇼프와 브레즈네프 시대 네 명의 국가원수 아래 모든 법령에 공동 서명한 행정 중심축이다. 그루지야 농민 가정 출신으로 농업 공학을 전공했고, 조국전쟁에서 중상을 입었다. 그루지야 공산당 제2서기와 각료회의 제1부의장을 거쳐 모스크바로 올라가 25년간 최고회의 상무회의 제도적 연속성을 체현했다. 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1961–1982)로서 당과 국가 기구 사이의 조용하지만 필수적인 고리였다.

상세 이력 보기
  • 1941–1951소련 농업부, 기술자에서 부서장까지 승진
  • 1941–1942위대한 조국전쟁 참전, 중상으로 퇴역, 적성훈장 수훈
  • 1951–1953그루지야 SSR 농업차관
  • 1953–1954그루지야 SSR 농업장관
  • 1954–1956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2서기
  • 1956–1957그루지야 SSR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7–1982소련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서기
  • 1961–1982CPSU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알렉산드르 다비도비치 나디라제

Александр Давидович Надирадзе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그루지야 1914–1987 ○ 심장마비

소련 이동식 ICBM 전력의 창시자, 그루지야 태생의 비밀 설계자

1987년 12월, 고르바초프레이건이 INF 조약으로 그의 Pioneer 728기 폐기를 결정했을 때 나디라제는 세상을 떠난 지 석 달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설계한 Topol은 소련보다 오래 살아남아 지금도 러시아 핵전력의 중심에 서 있다.

그루지야 고리 출신의 로켓 공학자. 모스크바 열기술연구소(MITT)에서 세계 최초의 고체연료 이동식 ICBM 전력을 창시해 RT-21 Temp-2S(SS-16), RSD-10 Pioneer(SS-20), RT-2PM Topol(SS-25)을 설계했다. 그의 Topol은 INF 조약으로 Pioneer가 폐기된 뒤에도 살아남아 오늘날 러시아 핵억지력의 근간이며 Topol-M, RS-24 Yars로 계보가 이어진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1976, 1982)과 레닌상(1966)을 수훈했고 198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36–41TsAGI에서 항공기 착륙장치 연구, Tu-2 개발 참여
  • 1941–45대전차탄 개발, 로켓 설계로 전환
  • 1945–53OKB 수석설계자: 소련 최초 기상로켓 MR-1, 유도폭탄 '차이카'
  • 1958–61NII-1 수석설계자, 고체연료 전술미사일 Temp-S
  • 1961–76MITT 소장 겸 수석설계자: Temp-2S(SS-16), Pioneer(SS-20) 실전 배치
  • 1976–82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Pioneer-UTTH,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77–87Topol(SS-25) 설계, 국가상 수상, 심장마비로 사망

바실리 이오시포비치 스탈린

Василий Иосифович Сталин
작가·예술가 소련 그루지야 1921–1962 ○ 알코올 중독 · 사망

공군 중장이자 소련 아이스하키의 창시자, 지도자의 아들

1953년 3월 아버지의 장례식에 술에 취해 나타난 바실리는 '그들이 아버지를 독살했다'고 외쳤다.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체포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차남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전투기 조종사로서 27회의 전투 출격을 수행하고 공군 중장까지 올랐다. 1948년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1952년까지 재임했으며, 24세에 소련군 최연소 소장이 되는 등 급속한 승진은 부계의 후원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한 '지도자의 아들'을 넘어, 소련 아이스하키 연맹 초대 회장으로서 VVS 모스크바 팀을 창단하고 아나톨리 타라소프를 초대 감독으로 영입하는 등 소련 하키의 제도적 기반을 다진 스포츠 행정가이기도 했다. 1953년 아버지의 사망 직후 반소비에트 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8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에서 가명으로 복역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0카친 군사항공학교 졸업, 공군 소위 임관
  • 1941–1942제16전투항공연대에서 복무, 전투 출격 수행
  • 1943제32근위전투항공연대 연대장
  • 1944–1945제3근위전투항공사단 · 제286전투항공사단 사단장
  • 1946항공 소장 진급, 제1근위전투항공군단장
  • 1948–1952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 항공 중장 진급(1949)
  • 1953체포, 반소비에트 선동 혐의로 8년형 선고
  • 1960–1962석방 후 재수감, 카잔으로 유배,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

텡기즈 예브게니예비치 아불라제

თენგიზ ევგენის ძე აბულაძე
작가·예술가 소비에트 그루지야 1924–1994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의 문화적 신호탄을 쏘아올린 그루지야의 영화감독

「참회」가 봉쇄되었을 때 아불라제는 필름이 파기될까 두려워 유일한 비디오 사본을 자신의 침대 밑에 보관했다.

그루지야 출신의 소련 영화감독. 1955년 레조 치헤이제와 공동 연출한 데뷔작 「마그다나의 당나귀」로 칸 단편상을 수상했고, 「기도」(1967)·「소망의 나무」(1976)·「참회」(1984)로 이어지는 삼부작을 완성했다. 1984년 완성 후 2년간 봉쇄되었던 「참회」는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 속에서 공개되어 스탈린 시기 테러를 우화적으로 고발한 최초의 소련 영화가 되었고, 그 공개 자체가 글라스노스트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문화적 신호탄이었다. 1987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소련 인민대의원(1989~1991)을 지냈다.

상세 이력 보기
  • 1943트빌리시 연극학교 입학, 1946년 졸업
  • 1953VGIK 졸업, 그루지야필름 입사
  • 1955「마그다나의 당나귀」 공동 연출, 칸영화제 단편상(1956)
  • 1967삼부작 첫 영화 「기도」 완성
  • 1976「소망의 나무」 완성, 트빌리시 연극학교 교수
  • 1984「참회」 완성, 2년간 상영 금지
  • 1986「참회」 공개, 글라스노스트의 상징이 되다
  • 1989소련 인민대의원 선출

조레스 알렉산드로비치 메드베데프

Жоре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едведев
이론가 소련 그루지야 1925–2018 ○ 런던에서 자연사

스탈린의 유대인 추방 계획을 기록 부재로 반박한 반체제 생물학자

1970년 정신병원 석방 후: "어떤 정직하고 원칙 있는 학자도 그러한 근거로 정신병원 무기한 수용이라는 탄압이 가능하다면 자신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다."

소련의 생물학자이자 반체제 역사가. 트빌리시에서 태어나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노화의 분자생물학적 기전을 연구했다. 1962년 리센코의 유사과학을 폭로한 사미즈다트 원고 「생물학과 개인숭배」를 집필했고, 이는 1969년 《리센코의 흥망》으로 미국에서 출간되며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다. 1970년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사하로프·솔제니친 등의 항의로 석방되었고, 1973년 런던 체류 중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며, 말년의 저작 《스탈린과 유대인 문제》(2003)에서는 의사들의 음모 사건이 유대인 추방 계획으로 이어지려 했다는 통설을 기록 부재로 반박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5트빌리시(티플리스) 출생, 프랑스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
  • 1943붉은 군대 징집, 타만 반도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제대
  • 1950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졸업, 식물생리학 후보학위 취득
  • 1962사미즈다트 「생물학과 개인숭배」로 티미랴제프 아카데미에서 해고
  • 1963–1969오브닌스크 의학방사선연구소 분자방사선생물학 연구실장
  • 1970강제 정신병원 수용, 국내외 학자·작가들의 항의로 3주 만에 석방
  • 1973런던 국립의학연구소 초청 연구 중 소련 시민권 박탈, 영국 망명
  • 1990–1992소련 시민권 회복, 체르노빌 출입금지구역 방사선생물학 조사 참여

로이 알렉산드로비치 메드베데프

Ро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едведев
이론가 소련 그루지야 1925–2026 ○ 자연사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심판한 역사가

《역사의 심판대에》 서문에서: "나는 젊은 시절의 신념과 이상을 결코 배반한 적이 없다. 그것이 아버지의 영향이며, 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생각은 물론 변했지만, 깊은 확신 없이는 이 책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소련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공산주의자 출판인. 1960년대부터 반체제 운동에 참여하며 사미즈다트 저널 《정치일기》를 편집했고, 20년 가까이 집필한 대작 《역사의 심판대에》에서 스탈린주의의 기원과 결과를 방대한 사료로 분석했다. 이 책으로 1969년 제명되었으나 사회주의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고, 1989년 복당 후 인민대표·최고회의 의원·중앙위원을 지냈다. 평생 35권 이상의 저작을 남기며 사회주의 내부에서의 자기비판적 역사학을 개척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25트빌리시(티플리스) 출생, 인도 공산주의자 M. N. 로이의 이름을 따서 명명
  • 1946–1951레닌그라드대 철학부 우등 졸업, 콤소몰 서기 활동
  • 1958교육학 후보학위 취득 (모스크바 국립사범대)
  • 1960s사미즈다트 저널 《정치일기》 편집, 반체제 운동 참여
  • 1969《역사의 심판대에》 집필로 공산당 제명
  • 1970사하로프·투르친과 브레즈네프 지도부에 개방서한 발표
  • 1989–1991소련 인민대표·최고회의 의원, 복당 후 중앙위원
  • 1991–2002러시아연방 노동자사회당 공동의장

제르멘 미하일로비치 그비시아니

Джермен Михайлович Гвишиани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그루지야 1928–2003 ○ 자연사

소련 계획과학과 서구 시스템 분석을 연결한 철학자

그의 이름 '제르멘'은 아버지가 근무했던 국가정치보안부(OGPU)의 두 수장 — 펠릭스 제르진스키뱌체슬라프 멘진스키 — 의 이름 첫 음절을 조합한 것이다.

소련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 경영 이론가. 알렉세이 코시긴의 사위로, 1965년부터 1985년까지 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부의장을 지내며 소련의 과학기술 정책을 조율했다. 로마 클럽 회원이자 오스트리아 국제응용시스템분석연구소(IIASA)의 공동 설립자로서, 냉전기 소련 계획과학과 서구 시스템 분석 사이의 드문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 1976년 전연방시스템연구소(VNIISI)를 설립하여 소장을 맡았으며, 이 연구소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 속에서 시장 지향적 개혁 아이디어를 배양하여 페레스트로이카 시대 경제 논쟁의 산실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51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 1951–1955소련 해군 복무
  • 1955–1965국가신기술위원회(이후 GKNT) 근무
  • 1965–1985국가과학기술위원회(GKNT) 부의장
  • 1976–1992전연방시스템연구소(VNIISI) 소장
  • 1985–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부의장
  • 197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예두아르트 암브로시예비치 셰바르드나제

ედუარდ შევარდნაძე
외교 그루지야 그루지야 1928–2014 ○ 자연사

냉전을 끝낸 외무장관, 내전의 대통령으로

1990년 12월 20일, 셰바르드나제는 인민대표대회 연단에서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 나는 사임한다. 이것이 나의 항의다”라고 선언하고 외무장관직에서 물러났다. 8개월 뒤 8월 쿠데타가 그의 경고를 현실로 만들었다.

1958년 콤소몰 대회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난 이후 30년 넘게 그의 가장 가까운 동맹이었다. 1972년 그루지야 당 제1서기가 되어 3만 명을 체포할 정도로 부패와 그림자 경제를 뿌리 뽑으려 했고, 지역 실험장이던 아바샤 경제 개혁을 주도했다. 1985년 외무장관으로 발탁되어 군축·아프간 철군·독일 통일을 5년 만에 협상해냈고, 1990년 12월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와 함께 전격 사임했다. 소련 붕괴 후 고향으로 돌아가 내전과 암살 기도 속에서도 10년 넘게 그루지야를 이끌었고, 2003년 장미혁명으로 평화롭게 물러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65–72그루지야 내무장관
  • 1972–85그루지야 당 제1서기: 부패 단속과 실험적 개혁
  • 1985–90외무장관: 군축, 아프간 철군, 독일 통일 협상
  • 1990.12「독재가 오고 있다」 경고하며 사임
  • 1992–2003그루지야 국가수반, 대통령: 2003년 장미혁명으로 퇴진

메라브 콘스탄티노비치 마마르다슈빌리

Мераб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Мамардашвили
이론가 소련 그루지야 1930–1990 ○ 심장마비

의식을 소리내어 말한 철학자

「영웅적 의식은, 우리가 정확히 사유하지 않을 때 악마가 우리를 가지고 논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정확히 사유하라.」

소비에트 그루지야의 철학자. 마르크스에서 칸트·프루스트로 나아가며 의식과 자유를 비도그마적으로 탐구했다. 모스크바 논리학 서클을 공동 창립했고, 강의로 철학했으며 작업 대부분이 녹음으로 남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49–1954모스크바 국립대 철학과 수학, 졸업
  • 1954–1957모스크바 국립대 철학과 대학원
  • 1958–1961『보프로시 필로소피』 편집자문위원, 철학 후보학위 취득
  • 1961–1966『평화와 사회주의의 제 문제』 비평·서지부장 (프라하)
  • 1966–1974국제노동운동연구소 부문장, 『보프로시 필로소피』 부편집장
  • 1968–1980모스크바 국립대·VGIK·심리학연구소 강의; 철학박사(1970), 교수(1972)
  • 1980–1990그루지야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주임연구원, 트빌리시 국립대 강의

메라브 이바네스 제 코스타바

მერაბ ივანეს ძე კოსტავა
비소련 혁명가 소련 그루지야 1939–1989 ✕ 의문의 교통사고사

독립운동과 인권 투쟁을 함께 이끈 시인

1989년 4월 9일, 그는 트빌리시 독립 시위의 조직자로 체포되었지만 45일 뒤 대중의 압력으로 풀려났다.

메라브 코스타바는 음악가·시인이자 그루지야의 독립과 인권을 위해 싸운 반체제 운동가였다. 그는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와 함께 지하 출판과 헬싱키 인권운동을 조직하며 소비에트 체제의 민족·종교 억압에 맞섰다. 장기간의 수감과 시베리아 유배 뒤 1987년 귀환한 그는 1988년 이후 대중적 독립운동과 트빌리시 시위를 이끌었다. 1989년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했으며, 그루지야는 그를 민족영웅으로 기렸다.

상세 이력 보기
  • 1954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와 청년 지하조직 ‘고르가슬리아니’ 창립
  • 1956–1958반소 활동으로 첫 체포와 구금
  • 1962–1977트빌리시 음악학교 교사, 음악·문학 활동
  • 1973–1976인권수호 이니셔티브 그룹과 그루지야 헬싱키 그룹 창립
  • 1977–1987반소 선전 혐의로 수감·시베리아 유배
  • 1987–1989독립운동 지도, 1989년 4월 9일 트빌리시 시위 조직
  • 1989보리티 인근 교통사고로 사망

즈비아드 콘스탄티노비치 감사후르디아

ზვიად კონსტანტინეს ძე გამსახურდია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조지아 그루지야 1939–1993 ✕ 의문의 총상 사망

반체제 인권운동가에서 그루지야의 첫 민선 대통령이 된 민족주의자

“나는 평생 반대파였고 정부와 싸워 왔다. 이제 내가 정부다.” 1990년 새로 선출된 최고회의 의장이 된 뒤 가진 인터뷰에서.

그루지야의 문학자이자 반체제 운동가로, 유명 작가 콘스탄틴 감사후르디아의 아들이며 1977년 메라브 코스타바와 함께 그루지야 헬싱키 그룹을 결성해 소련의 인권 탄압을 국제사회에 고발했고 수차례 투옥되었다. 1989년 4월 독립위원회 공동 지도자로서 트빌리시에서 수만 명의 평화 시위와 단식 투쟁을 조직했고, 소련군의 유혈 진압은 그루지야 독립 여론을 결정적으로 급진화시켰다. 1990년 원탁-자유그루지야 연합을 이끌어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압승했고 1991년 5월 87% 득표로 그루지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취임 7개월 만에 무장 쿠데타로 축출되어 체첸으로 망명했으며 1993년 12월 서부 그루지야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54지하 청년 조직 '고르가슬리아니' 창립
  • 1963–1977트빌리시 국립대학 영문학 강사, 그루지야 과학아카데미 문학연구소 연구원
  • 1977–1979그루지야 헬싱키 그룹 공동 창립, 체포·수감 후 공개 '참회'로 감형
  • 1988–1990성 일리아 의인회 공동 의장, 독립위원회 공동 지도자
  • 1990–1991그루지야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91–1992그루지야 공화국 대통령

줌베르 일리치 파티아슈빌리

ჯუმბერ ილიას ძე პატიაშვილი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그루지야 1939– ↓ 1989년 4월 해임

트빌리시 비극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

파티아슈빌리는 훗날 이렇게 회고했다. "고르바초프가 전화로 말했다. '즉시 광장을 비워야 한다. 군대가 처리할 것이다.' 나는 그가 작전을 알고 지지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셰바르드나제의 후임으로 1985년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에 올랐으나, 전임자의 개혁 실험을 거의 모두 폐기하고 반대파를 지하로 몰아넣었다. 1989년 4월, 아프하스 자치 문제로 촉발된 독립 요구 시위 앞에서 모스크바에 군대 파견을 요청했고, 4월 8일 공화국 국방위원회를 소집해 시위대 강제 해산을 결정했다. 다음날 새벽 삽과 독가스로 무장한 소련군이 비무장 시민을 덮쳐 21명이 숨졌고, 그 책임을 지고 보름 만에 물러났다. 퇴진 후에도 그루지야 정치에 남아 두 차례 대선에 출마했고, 2003년 장미혁명을 지지했으나 이후 사카슈빌리를 비판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65–1973그루지야 콤소몰 간부,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
  • 1973–1974고리 지구당 제1서기
  • 1974–1985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농업 담당 서기
  • 1985–1989.4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 1989–1991과학생산연합·농업연구소 소장
  • 1995, 2000그루지야 대선 출마, 셰바르드나제에 이어 2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