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중국

시민권 23 · 민족·국가 25 · 사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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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인물 23전체보기

쭤린 위팅 장

张作霖
외국 정치가 중국 중국인 1875–1928 ✕ 암살

만주를 지배한 군벌 정치가

1928년 6월 4일, 베이징에서 돌아오던 그의 열차가 황고둔에서 폭발했다.

장쭤린은 청 말의 군인에서 출발해 중국 군벌시대 동북 지역의 독자적 권력자로 성장한 중국 정치가였다. 그는 봉천군벌을 이끌며 만주를 사실상 자치적으로 통치했고, 군사력과 산업·재정 정비를 결합해 자신의 기반을 강화했다. 일본의 지원과 만주 이권을 둘러싼 협력은 그의 권력을 키웠지만, 동시에 일본군과 충돌할 여지도 남겼다. 국민당의 북벌로 베이징에서 철수하던 중 관동군 장교들이 설치한 폭탄에 중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이 황고둔 사건은 일본군의 독단적 만주 개입이 심화되는 전조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4–1895청군 기병으로 청일전쟁 참전
  • 1905봉천성 정규군 연대 지휘관
  • 1916봉천성 군무독판
  • 1918동삼성 순열사, 만주 군정 장악
  • 1924베이징 장악, 중화민국 군사독재자
  • 1927–1928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
  • 1928황고둔 사건으로 관동군에 암살됨

천두슈

陈独秀
비소련 혁명가 중국 중국 1879–1942 ○ 자연사

《신청년》으로 중국을 깨우고 공산당을 창당해 6년간 이끈 혁명가

“과학과 민주주의, 오직 이 두 분을 우리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 — 《신청년》

중국 공산당의 주요 창립자이자 초대 총서기(1921–1927). 《신청년》으로 신문화운동을 주도했으며, 국공합작 붕괴 후 코민테른에 의해 해임·제명된 뒤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6과거에 합격해 수재(秀才)가 되다
  • 1901–1908일본 유학 중 반청 혁명운동 참여 — 와세다대학에서 서양 사상 수학
  • 1915상하이에서 《신청년》(新青年) 창간 — 신문화운동의 기관지
  • 1917–1919베이징대학 문과 학장 — 5·4운동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
  • 1920상하이 마르크스주의 소조 결성 — 보이틴스키와 접촉
  • 1921–1927중국 공산당 초대 총서기 — 제1차 국공합작과 북벌기 당을 지도
  • 1927'우익 기회주의'로 비판받고 코민테른에 의해 해임·제명
  • 1929–1931트로츠키주의로 전향 — 중국 트로츠키주의 통일회의 지도자
  • 1932–1937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5년간 수감

주더

朱德
비소련 혁명가 중국 중국 1886–1976 ○ 자연사

중국 홍군과 인민해방군을 창건한 총사령관, 10대 원수 중 제1인자

암살자들이 권총을 겨누자 "쏘지 마시오. 나는 그냥 취사병이오"라고 말해 살아남았고, 병사들은 그를 '취사반장'이라 불렀다.

중국 공산혁명의 군사적 승리를 이끈 총사령관이다. 1928년 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해 '주-마오 군대'를 형성했고, 게릴라전을 전략 차원으로 끌어올려 대장정·항일전쟁·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부주석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으며, 1955년 10대 원수 중 첫 번째로 임명되었다. 군벌 장군에서 아편을 끊고 공산주의자로 거듭난 그의 삶은 중국 혁명의 궤적을 가장 완전하게 체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1윈난군관학교 졸업, 신해혁명 참가
  • 1922베를린에서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공산당 입당
  • 1927난창 봉기 공동 지휘 — 인민해방군의 기원
  • 1928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 — '주-마오' 제4홍군
  • 1930중국 홍군 총사령관, 1~4차 포위섬멸전 승리
  • 1934–1935대장정에서 홍군 총사령관
  • 1937–1945팔로군 총사령관, 백단대전 지휘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10대 원수 중 제1위

장제스

蔣介石
외국 정치가 중국 중국계 1887–1975 ○ 자연사

항일전쟁과 반공 통치를 함께 이끈 국민당 지도자

1937년 소련과 조약을 맺은 뒤에도 그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일본과 공산당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1920년대 북벌을 이끌어 난립한 중국을 국민정부 아래 통합했다. 그는 공산당과의 내전을 우선시했지만, 1936년 서안사변 뒤 일본에 맞선 제2차 국공합작을 받아들였고 1937년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바탕으로 무기와 항공기 지원을 확보했다. 항일전쟁에서 중국의 저항을 지휘한 뒤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정부를 옮겼으며, 그곳에서 장기간의 계엄과 권위주의 통치를 구축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8중국동맹회 가입
  • 1924–1927황푸군관학교 교장
  • 1926–1928국민혁명군 총사령관, 북벌 지휘
  • 1928–1931국민정부 주석, 행정원장
  • 1937–1945중국 전구 항일전쟁 최고지휘관
  • 1948–1975중화민국 총통
  • 1950–1975대만에서 국민정부 통치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25전체보기

쭤린 위팅 장

张作霖
외국 정치가 중국 중국인 1875–1928 ✕ 암살

만주를 지배한 군벌 정치가

1928년 6월 4일, 베이징에서 돌아오던 그의 열차가 황고둔에서 폭발했다.

장쭤린은 청 말의 군인에서 출발해 중국 군벌시대 동북 지역의 독자적 권력자로 성장한 중국 정치가였다. 그는 봉천군벌을 이끌며 만주를 사실상 자치적으로 통치했고, 군사력과 산업·재정 정비를 결합해 자신의 기반을 강화했다. 일본의 지원과 만주 이권을 둘러싼 협력은 그의 권력을 키웠지만, 동시에 일본군과 충돌할 여지도 남겼다. 국민당의 북벌로 베이징에서 철수하던 중 관동군 장교들이 설치한 폭탄에 중상을 입고 사망했으며, 이 황고둔 사건은 일본군의 독단적 만주 개입이 심화되는 전조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4–1895청군 기병으로 청일전쟁 참전
  • 1905봉천성 정규군 연대 지휘관
  • 1916봉천성 군무독판
  • 1918동삼성 순열사, 만주 군정 장악
  • 1924베이징 장악, 중화민국 군사독재자
  • 1927–1928중화민국 육해군 대원수
  • 1928황고둔 사건으로 관동군에 암살됨

천두슈

陈独秀
비소련 혁명가 중국 중국 1879–1942 ○ 자연사

《신청년》으로 중국을 깨우고 공산당을 창당해 6년간 이끈 혁명가

“과학과 민주주의, 오직 이 두 분을 우리 선생으로 모셔야 한다.” — 《신청년》

중국 공산당의 주요 창립자이자 초대 총서기(1921–1927). 《신청년》으로 신문화운동을 주도했으며, 국공합작 붕괴 후 코민테른에 의해 해임·제명된 뒤 트로츠키주의로 전향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6과거에 합격해 수재(秀才)가 되다
  • 1901–1908일본 유학 중 반청 혁명운동 참여 — 와세다대학에서 서양 사상 수학
  • 1915상하이에서 《신청년》(新青年) 창간 — 신문화운동의 기관지
  • 1917–1919베이징대학 문과 학장 — 5·4운동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
  • 1920상하이 마르크스주의 소조 결성 — 보이틴스키와 접촉
  • 1921–1927중국 공산당 초대 총서기 — 제1차 국공합작과 북벌기 당을 지도
  • 1927'우익 기회주의'로 비판받고 코민테른에 의해 해임·제명
  • 1929–1931트로츠키주의로 전향 — 중국 트로츠키주의 통일회의 지도자
  • 1932–1937국민당 정부에 체포되어 5년간 수감

주더

朱德
비소련 혁명가 중국 중국 1886–1976 ○ 자연사

중국 홍군과 인민해방군을 창건한 총사령관, 10대 원수 중 제1인자

암살자들이 권총을 겨누자 "쏘지 마시오. 나는 그냥 취사병이오"라고 말해 살아남았고, 병사들은 그를 '취사반장'이라 불렀다.

중국 공산혁명의 군사적 승리를 이끈 총사령관이다. 1928년 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해 '주-마오 군대'를 형성했고, 게릴라전을 전략 차원으로 끌어올려 대장정·항일전쟁·국공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후 부주석과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지냈으며, 1955년 10대 원수 중 첫 번째로 임명되었다. 군벌 장군에서 아편을 끊고 공산주의자로 거듭난 그의 삶은 중국 혁명의 궤적을 가장 완전하게 체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1윈난군관학교 졸업, 신해혁명 참가
  • 1922베를린에서 저우언라이의 추천으로 공산당 입당
  • 1927난창 봉기 공동 지휘 — 인민해방군의 기원
  • 1928징강산에서 마오쩌둥과 합류 — '주-마오' 제4홍군
  • 1930중국 홍군 총사령관, 1~4차 포위섬멸전 승리
  • 1934–1935대장정에서 홍군 총사령관
  • 1937–1945팔로군 총사령관, 백단대전 지휘
  • 1955중화인민공화국 원수, 10대 원수 중 제1위

장제스

蔣介石
외국 정치가 중국 중국계 1887–1975 ○ 자연사

항일전쟁과 반공 통치를 함께 이끈 국민당 지도자

1937년 소련과 조약을 맺은 뒤에도 그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일본과 공산당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1920년대 북벌을 이끌어 난립한 중국을 국민정부 아래 통합했다. 그는 공산당과의 내전을 우선시했지만, 1936년 서안사변 뒤 일본에 맞선 제2차 국공합작을 받아들였고 1937년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바탕으로 무기와 항공기 지원을 확보했다. 항일전쟁에서 중국의 저항을 지휘한 뒤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정부를 옮겼으며, 그곳에서 장기간의 계엄과 권위주의 통치를 구축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8중국동맹회 가입
  • 1924–1927황푸군관학교 교장
  • 1926–1928국민혁명군 총사령관, 북벌 지휘
  • 1928–1931국민정부 주석, 행정원장
  • 1937–1945중국 전구 항일전쟁 최고지휘관
  • 1948–1975중화민국 총통
  • 1950–1975대만에서 국민정부 통치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4전체보기

1941–1945

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일본 제국이 미국과 영국 세력권을 공격하면서 본격화된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쟁으로, 1937년부터 이어진 중일전쟁과 일본의 자원 및 제국 확장 정책이 배경이었다. 미국의 대일 석유·자재 제재와 중국에서의 충돌 속에서 일본 지도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석유와 동남아 자원을 점령하고 미국의 협상 의지를 꺾으려 했지만, 진주만 공격은 미국을 전면전으로 끌어들였다. 일본은 1942년 초 필리핀, 말라야,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으로 빠르게 팽창했으나 산호해와 미드웨이에서 공세의 한계가 드러났다. 1942년 과달카날부터 연합국은 남서태평양과 중부태평양에서 도약식 공세를 진행했고, 1944년 필리핀 탈환과 마리아나 제도 점령으로 일본 본토를 폭격할 거점을 확보했다. 1945년 봉쇄, 폭격,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대일 참전이 겹치면서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공표했고 9월 2일 도쿄만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1945.08

소련의 대일 참전과 만주 작전

만주 전략공세작전은 1945년 8월 9일부터 9월 2일까지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 최후의 대규모 지상 작전이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독일 항복 2-3개월 후 대일 참전을 약속하고 남사할린·쿠릴열도·여순항 조차권을 확보하는 비밀의정서에 서명했다. 소련은 4월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5월부터 8월까지 유럽에서 극동으로 40만 이상의 병력과 2천여 대의 전차를 이동시켰다. 8월 8일 몰로토프가 선전포고를 통보했고, 바실렙스키가 지휘하는 150만 병력이 서·동·북 삼면에서 동시에 진입했다. 관동군은 70만 이상이었으나 정예 병력은 태평양으로 빠져나갔고, 소련군의 기갑 우세와 작전술 앞에 열흘 만에 조직적 저항을 상실했다. 약 60만 명의 일본군이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1950–1953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진으로 시작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멎은 전쟁이다. 김일성은 1949년부터 여러 차례 무력 통일 승인을 요청했고,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판단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힘의 균형이 바뀌었다는 계산 위에서 1950년 봄 이를 승인하되 소련군의 직접 참전은 배제했다. 미국이 유엔군을 조직해 개입하고 인천상륙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중국이 인민지원군을 보냈고, 전선은 1951년 여름부터 38도선 부근에서 굳었다. 소련의 참여는 무기·고문단과, 만주 기지에서 미그-15로 싸운 조종사들에 한정됐으며 이들의 존재는 양측 모두 오래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1956–1969

중소분열

중소분열은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이 1950년대 후반부터 이념 논쟁을 거쳐 1960년대에 국가 관계 파탄으로, 1969년에는 국경 무력 충돌로까지 간 과정이다. 발단은 제20차 당대회였다. 중국공산당은 스탈린 격하와 평화공존 노선을 수정주의로 규정하고, 제국주의와의 타협이자 혁명 포기라고 비판했다. 여기에 국가 이익의 충돌이 겹쳤다. 소련은 중국의 핵무기 개발 지원을 1959년 중단했고, 1958년 대만해협 위기와 중국-인도 국경분쟁에서 중국이 기대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1960년 소련이 기술고문 1,300여 명을 일시에 철수시키면서 경제 협력의 축이 끊겼다. 논쟁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 전체로 번져 각국 공산당이 노선을 골라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