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중국

사건 24 · 소속 인물 173 · 출신 인물 151

알제리안도라앤티가 바부다오스트레일리아바하마바레인방글라데시바베이도스벨리즈베냉부탄볼리비아보츠와나브루나이부룬디캄보디아카메룬캐나다카보베르데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차드콜롬비아코모로코스타리카키프로스덴마크지부티도미니카도미니카 공화국에콰도르이집트적도 기니에리트리아에스와티니에티오피아피지가봉감비아과테말라기니아이티온두라스아이슬란드이란이라크코트디부아르자메이카요르단케냐키리바시코소보쿠웨이트라오스레바논레소토라이베리아리비아리히텐슈타인룩셈부르크마다가스카르말라위말레이시아몰디브말리몰타마셜 제도모리타니모리셔스멕시코미크로네시아모나코몽골모로코미얀마나미비아나우루네팔뉴질랜드니제르나이지리아북마케도니아노르웨이오만파키스탄팔라우팔레스타인파나마파푸아뉴기니파라과이필리핀카타르콩고-브라자빌르완다세인트키츠 네비스세인트루시아세인트빈센트그레나딘사모아산마리노상투메 프린시페사우디아라비아세네갈세이셸시에라리온싱가포르솔로몬 제도소말리아남수단스리랑카수단수리남스웨덴시리아대만태국동티모르토고통가튀니지투발루우간다아랍에미리트우루과이바누아투바티칸 시국베네수엘라예멘잠비아짐바브웨러시아우크라이나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벨라루스카자흐스탄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폴란드핀란드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프랑스이탈리아영국미국중국네덜란드벨기에불가리아쿠바스페인루마니아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몬테네그로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스위스체코우즈베키스탄몰도바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일본인도튀르키예그리스아르헨티나칠레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한민국베트남알바니아앙골라부르키나파소콩고민주공화국가나기니비사우인도네시아모잠비크페루트리니다드 토바고포르투갈브라질엘살바도르그레나다가이아나니카라과남아프리카 공화국탄자니아아일랜드슬로바키아마르티니크이스라엘아프가니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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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변천

  1. 1911 몽골몽골독립
  2. 1919 몽골몽골병합
  3. 1921 몽골몽골독립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24전체보기

  1. 1911–1916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탄생1911년 10월 우창의 신군 봉기가 각 성의 독립 선언으로 번져 청 왕조가 무너지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 섰다.
  2. 1914–19181차 세계대전1914–1918년 협상국과 동맹국이 벌인 세계전쟁.
  3. 1915–19215·4 운동과 중국공산당의 창당1915년 『신청년』이 연 신문화운동은 유교와 낡은 문체를 공격했고, 1919년 5월 4일 베르사유의 산둥 결정에 항의한…
  4. 1918–19231차 세계대전의 여파: 강화 조약과 혁명의 물결1918년 가을 불가리아·오스만·오스트리아-헝가리·독일이 차례로 휴전하면서 호엔촐레른·합스부르크 왕조가 무너지고…
  5. 1924–1927제1차 국공합작과 북벌, 1927년의 파국소련의 원조와 코민테른의 지시로 공산당원이 국민당에 가입한 국공합작은 황푸군관학교와 북벌로 군벌 중국을 흔들었다.
  6. 1927–1936징강산에서 옌안까지: 소비에트 근거지와 대장정1927년의 학살 뒤 마오와 주더는 징강산에서 홍군과 농촌 근거지를 세웠고, 1931년 루이진에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이 섰다.
  7. 1934–1939코민테른의 인민전선 전환1928년부터 사회민주주의를 주적으로 삼던 코민테른은 1933년 나치 집권과 1934년 프랑스·오스트리아의 반파시즘 투쟁을…
  8. 1937–1945중일전쟁과 제2차 국공합작1937년 7월 루거우차오 사건으로 시작된 전면전에서 일본군은 연안 도시와 철도를 점령했고 국민정부는 충칭으로 물러났다.
  9. 1941–1945태평양 전쟁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일본 제국이 미국과 영국 세력권을 공격하면서 본격화된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10. 1945–1949국공내전일본 항복 뒤 충칭 회담과 마셜의 중재는 두 당의 무장 경쟁을 막지 못했다.
  11. 1945–19548월 혁명과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일본이 항복한 1945년 8월 베트민은 8월 혁명으로 권력을 잡고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했다.
  12. 1945.08소련의 대일 참전과 만주 작전만주 전략공세작전은 1945년 8월 9일부터 9월 2일까지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 최후의 대규모 지상 작전이었다.
  13. 1949중화인민공화국 수립1949년 3월 시바이포의 7기 2중전회는 당 사업의 중심을 도시로 옮기고 신민주주의 국가의 경제·정치 방침을 정했다.
  14. 1949–1956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 개조로건국 초기 공산당은 토지개혁·반혁명 진압·항미원조·삼반오반으로 권력을 다졌고, 1950년 중소조약과 소련 원조로 제1차…
  15. 1950–1953한국전쟁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진으로 시작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멎은 전쟁이다.
  16. 1953–1956스탈린 사후 동유럽의 위기, 1953–1956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자 말렌코프·베리야·흐루쇼프의 집단지도부는 동독과 헝가리 지도자를 모스크바로 불러 강행 공업화와…
  17. 1955–1975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1954년 제네바 협정이 약속한 통일 선거가 무산되자,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는…
  18. 1956–1957백화제방에서 반우파 투쟁으로흐루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헝가리 혁명 뒤 마오는 「백화제방·백가쟁명」과 「인민 내부 모순」론을 내세워 당 밖의 비판으로…
  19. 1956–1969중소분열중소분열은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이 1950년대 후반부터 이념 논쟁을 거쳐 1960년대에 국가 관계 파탄으로, 1969년에는…
  20. 1958–1962대약진과 대기근1958년 마오는 소련 모델을 넘어 대중 동원으로 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도약시키겠다며 「세 개의 붉은 깃발」 아래…
  21. 1966–1976문화대혁명대약진 운동의 실패로 밀려난 마오는 1966년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치자며 학생 홍위병을 동원해…
  22. 1976–1992개혁개방: 덩샤오핑 시대4인방 체포 뒤 화궈펑의 「양개범시」와 덩샤오핑의 「실사구시」가 맞섰고, 1978년 12월 11기 3중전회는 당의 중심을…
  23. 1978–1979중월전쟁1975년 통일 뒤 베트남은 소련과 동맹하고 화교를 추방했으며, 1978년 말 중국의 동맹인 크메르루주의 캄보디아를 침공했다.
  24. 19891989년 톈안먼 시위와 6·4 진압후야오방의 죽음을 계기로 시작된 1989년 봄의 시위는 부패 척결·표현의 자유·자치 조직의 인정을 요구하는 학생·노동자·시민…

정당·세력·조직 10

이 나라에 속했던 인물 173전체보기

장쉰

張勳
북양정부·군벌 왕정·왕당파 중국 중국 1854–1923 ○ 자연사

변발을 끝내 자르지 않은 청 충신 장군, 1917년 푸이를 복위시킨 「변발 장군」

장시 펑신 출신으로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서태후의 호위를 맡았고, 위안스카이 밑에서 북양군 장군이 되었다. 1911년 난징에서 청을 위해 혁명군과 싸웠으며, 공화국의 장군이 된 뒤에도 청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변발을 자르지 않았다. 1913년 제2혁명 때 국민당군에게서 난징을 빼앗고 부하들의 약탈을 내버려 두었는데도 위안에게 원수로 봉해졌다. 1917년 대총통 리위안훙과 총리 돤치루이의 대립을 중재하라는 부름을 받아 베이징에 들어와 국회 해산을 강요했고, 7월 1일 캉유웨이 등과 함께 푸이의 복위를 선포했다. 복벽은 돤치루이의 공화국 군에 밀려 12일 만에 무너졌고, 그는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피신한 뒤 정계를 떠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00의화단 사건 때 서태후 호위
  • 1911난징에서 혁명군과 교전
  • 1913제2혁명 진압, 난징 점령
  • 1917베이징 진입, 국회 해산 강요
  • 1917정사 복벽(7월 1~12일)

캉유웨이

康有為
독립 활동 왕정·왕당파 중국 중국 1858–1927 ○ 자연사

무술변법을 이끈 개혁 사상가, 공화국 수립 뒤에도 입헌군주제를 고집한 보황파

광둥 난하이의 학자 집안 출신으로, 공자를 제도 개혁가로 해석한 『공자개제고』 등으로 변법론을 펼쳤다. 1898년 젊은 광서제의 신임을 얻어 무술변법을 이끌었으나 서태후의 정변으로 개혁이 뒤집히자 해외로 망명했다. 망명 중 량치차오와 보황회를 세워 광서제의 복위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쑨원의 혁명파와 화교 사회에서 맞섰다. 신해혁명 뒤에도 공화제에 반대했고, 1917년 7월 장쉰의 복벽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자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사유재산과 가족이 사라진 이상 사회를 그린 『대동서』는 마오쩌둥 등 뒤 세대에게도 읽혔다. 1927년 칭다오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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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광서제에게 첫 상서
  • 1895베이징 회시 응시생들의 공거상서 주도
  • 1898무술변법 주도, 정변 뒤 망명
  • 1917장쉰의 복벽 가담

위안스카이

袁世凯

신해혁명의 성과를 가로채 황제가 되려 한 북양군벌의 총수

1911년 우창 봉기 뒤 기용되어 청 조정과 혁명파를 동시에 압박해 청 황제의 퇴위를 얻어내고 이듬해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다. 1915년 제정을 선포했으나 호국전쟁의 반발로 이듬해 3월 제정을 취소하고 6월에 사망했다.

청 말 북양신군을 키운 군인·관료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청 조정과 혁명파 사이에서 양쪽을 압박해 1912년 청 황제의 퇴위와 자신의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을 함께 얻어냈다. 이후 국회를 무력화하고 국민당을 해산했으며, 1915년 말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가 각 성의 반발로 이듬해 제정을 취소하고 곧 병사했다. 그의 죽음 뒤 북양군은 분열해 군벌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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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7직례총독 겸 북양대신
  • 1901–1907직례총독·북양대신
  • 1911–1912청 내각총리대신
  • 1912–1916중화민국 대총통
  • 1912청 황제 퇴위 후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
  • 1915.12–1916.03「중화제국」 황제 자칭

리위안훙

黎元洪

우창 봉기 때 반강제로 도독에 추대된 신군 장교, 두 차례 대총통

후베이 황피 출신으로 톈진 수사학당을 나와 청일전쟁에 참전했고, 뒤에 후베이 신군의 제21혼성협을 지휘했다. 1911년 10월 우창 봉기 때 지휘할 명망가가 필요했던 혁명파가 숨어 있던 그를 끌어내 후베이 군정부 도독으로 앉혔다. 1912년 난징 임시정부와 베이징 정부에서 부총통을 지냈고, 1913년 량치차오와 함께 진보당을 만들어 제2혁명 때 위안스카이 편에 섰다. 위안이 죽자 1916년 6월 대총통이 되어 임시약법과 국회를 되살렸으나 참전 문제로 돤치루이와 대립했고, 1917년 장쉰의 복벽 뒤 물러났다. 1922~1923년 다시 대총통을 지냈으나 차오쿤에게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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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청일전쟁 참전(순양함 침몰에서 생존)
  • 1911후베이 군정부 도독
  • 1912–1913중화민국 임시 부총통
  • 1913진보당 결성
  • 1916–1917중화민국 대총통
  • 1917장쉰의 복벽 뒤 사임
  • 1922–1923대총통 재임

이 나라를 출신 배경으로 둔 인물 151전체보기

장쉰

張勳
북양정부·군벌 왕정·왕당파 중국 중국 1854–1923 ○ 자연사

변발을 끝내 자르지 않은 청 충신 장군, 1917년 푸이를 복위시킨 「변발 장군」

장시 펑신 출신으로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서태후의 호위를 맡았고, 위안스카이 밑에서 북양군 장군이 되었다. 1911년 난징에서 청을 위해 혁명군과 싸웠으며, 공화국의 장군이 된 뒤에도 청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변발을 자르지 않았다. 1913년 제2혁명 때 국민당군에게서 난징을 빼앗고 부하들의 약탈을 내버려 두었는데도 위안에게 원수로 봉해졌다. 1917년 대총통 리위안훙과 총리 돤치루이의 대립을 중재하라는 부름을 받아 베이징에 들어와 국회 해산을 강요했고, 7월 1일 캉유웨이 등과 함께 푸이의 복위를 선포했다. 복벽은 돤치루이의 공화국 군에 밀려 12일 만에 무너졌고, 그는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피신한 뒤 정계를 떠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900의화단 사건 때 서태후 호위
  • 1911난징에서 혁명군과 교전
  • 1913제2혁명 진압, 난징 점령
  • 1917베이징 진입, 국회 해산 강요
  • 1917정사 복벽(7월 1~12일)

캉유웨이

康有為
독립 활동 왕정·왕당파 중국 중국 1858–1927 ○ 자연사

무술변법을 이끈 개혁 사상가, 공화국 수립 뒤에도 입헌군주제를 고집한 보황파

광둥 난하이의 학자 집안 출신으로, 공자를 제도 개혁가로 해석한 『공자개제고』 등으로 변법론을 펼쳤다. 1898년 젊은 광서제의 신임을 얻어 무술변법을 이끌었으나 서태후의 정변으로 개혁이 뒤집히자 해외로 망명했다. 망명 중 량치차오와 보황회를 세워 광서제의 복위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쑨원의 혁명파와 화교 사회에서 맞섰다. 신해혁명 뒤에도 공화제에 반대했고, 1917년 7월 장쉰의 복벽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자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사유재산과 가족이 사라진 이상 사회를 그린 『대동서』는 마오쩌둥 등 뒤 세대에게도 읽혔다. 1927년 칭다오에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8광서제에게 첫 상서
  • 1895베이징 회시 응시생들의 공거상서 주도
  • 1898무술변법 주도, 정변 뒤 망명
  • 1917장쉰의 복벽 가담

위안스카이

袁世凯

신해혁명의 성과를 가로채 황제가 되려 한 북양군벌의 총수

1911년 우창 봉기 뒤 기용되어 청 조정과 혁명파를 동시에 압박해 청 황제의 퇴위를 얻어내고 이듬해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다. 1915년 제정을 선포했으나 호국전쟁의 반발로 이듬해 3월 제정을 취소하고 6월에 사망했다.

청 말 북양신군을 키운 군인·관료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청 조정과 혁명파 사이에서 양쪽을 압박해 1912년 청 황제의 퇴위와 자신의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을 함께 얻어냈다. 이후 국회를 무력화하고 국민당을 해산했으며, 1915년 말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가 각 성의 반발로 이듬해 제정을 취소하고 곧 병사했다. 그의 죽음 뒤 북양군은 분열해 군벌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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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7직례총독 겸 북양대신
  • 1901–1907직례총독·북양대신
  • 1911–1912청 내각총리대신
  • 1912–1916중화민국 대총통
  • 1912청 황제 퇴위 후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
  • 1915.12–1916.03「중화제국」 황제 자칭

리위안훙

黎元洪

우창 봉기 때 반강제로 도독에 추대된 신군 장교, 두 차례 대총통

후베이 황피 출신으로 톈진 수사학당을 나와 청일전쟁에 참전했고, 뒤에 후베이 신군의 제21혼성협을 지휘했다. 1911년 10월 우창 봉기 때 지휘할 명망가가 필요했던 혁명파가 숨어 있던 그를 끌어내 후베이 군정부 도독으로 앉혔다. 1912년 난징 임시정부와 베이징 정부에서 부총통을 지냈고, 1913년 량치차오와 함께 진보당을 만들어 제2혁명 때 위안스카이 편에 섰다. 위안이 죽자 1916년 6월 대총통이 되어 임시약법과 국회를 되살렸으나 참전 문제로 돤치루이와 대립했고, 1917년 장쉰의 복벽 뒤 물러났다. 1922~1923년 다시 대총통을 지냈으나 차오쿤에게 밀려났다.

상세 이력 보기
  • 1894청일전쟁 참전(순양함 침몰에서 생존)
  • 1911후베이 군정부 도독
  • 1912–1913중화민국 임시 부총통
  • 1913진보당 결성
  • 1916–1917중화민국 대총통
  • 1917장쉰의 복벽 뒤 사임
  • 1922–1923대총통 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