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발을 끝내 자르지 않은 청 충신 장군, 1917년 푸이를 복위시킨 「변발 장군」
장시 펑신 출신으로 1900년 의화단 사건 때 서태후의 호위를 맡았고, 위안스카이 밑에서 북양군 장군이 되었다. 1911년 난징에서 청을 위해 혁명군과 싸웠으며, 공화국의 장군이 된 뒤에도 청에 대한 충성의 표시로 변발을 자르지 않았다. 1913년 제2혁명 때 국민당군에게서 난징을 빼앗고 부하들의 약탈을 내버려 두었는데도 위안에게 원수로 봉해졌다. 1917년 대총통 리위안훙과 총리 돤치루이의 대립을 중재하라는 부름을 받아 베이징에 들어와 국회 해산을 강요했고, 7월 1일 캉유웨이 등과 함께 푸이의 복위를 선포했다. 복벽은 돤치루이의 공화국 군에 밀려 12일 만에 무너졌고, 그는 네덜란드 공사관으로 피신한 뒤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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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의화단 사건 때 서태후 호위
- 1911난징에서 혁명군과 교전
- 1913제2혁명 진압, 난징 점령
- 1917베이징 진입, 국회 해산 강요
- 1917정사 복벽(7월 1~12일)
무술변법을 이끈 개혁 사상가, 공화국 수립 뒤에도 입헌군주제를 고집한 보황파
광둥 난하이의 학자 집안 출신으로, 공자를 제도 개혁가로 해석한 『공자개제고』 등으로 변법론을 펼쳤다. 1898년 젊은 광서제의 신임을 얻어 무술변법을 이끌었으나 서태후의 정변으로 개혁이 뒤집히자 해외로 망명했다. 망명 중 량치차오와 보황회를 세워 광서제의 복위와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며 쑨원의 혁명파와 화교 사회에서 맞섰다. 신해혁명 뒤에도 공화제에 반대했고, 1917년 7월 장쉰의 복벽에 가담했다가 실패하자 미국 공사관으로 피신했다. 사유재산과 가족이 사라진 이상 사회를 그린 『대동서』는 마오쩌둥 등 뒤 세대에게도 읽혔다. 1927년 칭다오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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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88광서제에게 첫 상서
- 1895베이징 회시 응시생들의 공거상서 주도
- 1898무술변법 주도, 정변 뒤 망명
- 1917장쉰의 복벽 가담
신해혁명의 성과를 가로채 황제가 되려 한 북양군벌의 총수
1911년 우창 봉기 뒤 기용되어 청 조정과 혁명파를 동시에 압박해 청 황제의 퇴위를 얻어내고 이듬해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다. 1915년 제정을 선포했으나 호국전쟁의 반발로 이듬해 3월 제정을 취소하고 6월에 사망했다.
청 말 북양신군을 키운 군인·관료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청 조정과 혁명파 사이에서 양쪽을 압박해 1912년 청 황제의 퇴위와 자신의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을 함께 얻어냈다. 이후 국회를 무력화하고 국민당을 해산했으며, 1915년 말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가 각 성의 반발로 이듬해 제정을 취소하고 곧 병사했다. 그의 죽음 뒤 북양군은 분열해 군벌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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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1–1907직례총독 겸 북양대신
- 1901–1907직례총독·북양대신
- 1911–1912청 내각총리대신
- 1912–1916중화민국 대총통
- 1912청 황제 퇴위 후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
- 1915.12–1916.03「중화제국」 황제 자칭
우창 봉기 때 반강제로 도독에 추대된 신군 장교, 두 차례 대총통
후베이 황피 출신으로 톈진 수사학당을 나와 청일전쟁에 참전했고, 뒤에 후베이 신군의 제21혼성협을 지휘했다. 1911년 10월 우창 봉기 때 지휘할 명망가가 필요했던 혁명파가 숨어 있던 그를 끌어내 후베이 군정부 도독으로 앉혔다. 1912년 난징 임시정부와 베이징 정부에서 부총통을 지냈고, 1913년 량치차오와 함께 진보당을 만들어 제2혁명 때 위안스카이 편에 섰다. 위안이 죽자 1916년 6월 대총통이 되어 임시약법과 국회를 되살렸으나 참전 문제로 돤치루이와 대립했고, 1917년 장쉰의 복벽 뒤 물러났다. 1922~1923년 다시 대총통을 지냈으나 차오쿤에게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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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4청일전쟁 참전(순양함 침몰에서 생존)
- 1911후베이 군정부 도독
- 1912–1913중화민국 임시 부총통
- 1913진보당 결성
- 1916–1917중화민국 대총통
- 1917장쉰의 복벽 뒤 사임
- 1922–1923대총통 재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