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그루지야

시민권 3 · 민족·국가 38 · 사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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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인물 3전체보기

이라클리 게오르기예비치 체레텔리

ირაკლი წერეთელი
비소련 혁명가 그루지야 그루지야 1881–1959 ○ 자연사

1917년 혁명적 수호주의의 설계자, '그런 정당이 있습니다'의 상대역

1917년 6월 4일, 제1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체레텔리가 "권력을 우리 손에 달라고 말하는 정당은 러시아에 없다"고 선언하자, 자리에서 일어난 레닌이 "그런 정당이 있습니다!"라고 응수했다.

그루지야 출신 멘셰비키 지도자. 1917년 혁명적 수호주의를 주창하고 임시정부 내무장관을 지냈다. 레닌의 유명한 '그런 정당이 있습니다!' 반박으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으며, 10월혁명 후 그루지야 독립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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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02모스크바대 법학부 입학, 학생운동 지도자로 체포·시베리아 유형
  • 1903–1906RSDLP 입당, 멘셰비키파 합류. 주간지 『크발리』 주필. 베를린 수학 후 1906년 귀국
  • 1907제2두마 의원(쿠타이시 현), 사회민주당 원내대표. 두마 해산 후 5년 강제노동형, 시베리아 유형
  • 1915–1917.2시베리아 치머발트주의 주도, 『시베리아 잡지』 편집. 이르쿠츠크 혁명위원회 참여
  • 1917.3–9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혁명적 수호주의 노선 주도
  • 1917.5–8임시정부 체신장관(5~7월), 내무장관 겸임(7~8월)
  • 1918–1921그루지야 독립선언 서명, 제헌의회 의원, 파리 강화회의 대표
  • 1921–1959프랑스 망명, 제2인터내셔널 집행위원. 1940년 미국 이주, 1959년 뉴욕에서 사망

예두아르트 암브로시예비치 셰바르드나제

ედუარდ შევარდნაძე
외교 그루지야 그루지야 1928–2014 ○ 자연사

냉전을 끝낸 외무장관, 내전의 대통령으로

1990년 12월 20일, 셰바르드나제는 인민대표대회 연단에서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 나는 사임한다. 이것이 나의 항의다”라고 선언하고 외무장관직에서 물러났다. 8개월 뒤 8월 쿠데타가 그의 경고를 현실로 만들었다.

1958년 콤소몰 대회에서 고르바초프를 만난 이후 30년 넘게 그의 가장 가까운 동맹이었다. 1972년 그루지야 당 제1서기가 되어 3만 명을 체포할 정도로 부패와 그림자 경제를 뿌리 뽑으려 했고, 지역 실험장이던 아바샤 경제 개혁을 주도했다. 1985년 외무장관으로 발탁되어 군축·아프간 철군·독일 통일을 5년 만에 협상해냈고, 1990년 12월 「독재가 다가오고 있다」는 경고와 함께 전격 사임했다. 소련 붕괴 후 고향으로 돌아가 내전과 암살 기도 속에서도 10년 넘게 그루지야를 이끌었고, 2003년 장미혁명으로 평화롭게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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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72그루지야 내무장관
  • 1972–85그루지야 당 제1서기: 부패 단속과 실험적 개혁
  • 1985–90외무장관: 군축, 아프간 철군, 독일 통일 협상
  • 1990.12「독재가 오고 있다」 경고하며 사임
  • 1992–2003그루지야 국가수반, 대통령: 2003년 장미혁명으로 퇴진

즈비아드 콘스탄티노비치 감사후르디아

ზვიად კონსტანტინეს ძე გამსახურდია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조지아 그루지야 1939–1993 ✕ 의문의 총상 사망

반체제 인권운동가에서 그루지야의 첫 민선 대통령이 된 민족주의자

“나는 평생 반대파였고 정부와 싸워 왔다. 이제 내가 정부다.” 1990년 새로 선출된 최고회의 의장이 된 뒤 가진 인터뷰에서.

그루지야의 문학자이자 반체제 운동가로, 유명 작가 콘스탄틴 감사후르디아의 아들이며 1977년 메라브 코스타바와 함께 그루지야 헬싱키 그룹을 결성해 소련의 인권 탄압을 국제사회에 고발했고 수차례 투옥되었다. 1989년 4월 독립위원회 공동 지도자로서 트빌리시에서 수만 명의 평화 시위와 단식 투쟁을 조직했고, 소련군의 유혈 진압은 그루지야 독립 여론을 결정적으로 급진화시켰다. 1990년 원탁-자유그루지야 연합을 이끌어 최초의 다당제 선거에서 압승했고 1991년 5월 87% 득표로 그루지야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취임 7개월 만에 무장 쿠데타로 축출되어 체첸으로 망명했으며 1993년 12월 서부 그루지야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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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지하 청년 조직 '고르가슬리아니' 창립
  • 1963–1977트빌리시 국립대학 영문학 강사, 그루지야 과학아카데미 문학연구소 연구원
  • 1977–1979그루지야 헬싱키 그룹 공동 창립, 체포·수감 후 공개 '참회'로 감형
  • 1988–1990성 일리아 의인회 공동 의장, 독립위원회 공동 지도자
  • 1990–1991그루지야 공화국 최고회의 의장
  • 1991–1992그루지야 공화국 대통령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38전체보기

세르게이 율리예비치 비테

Сергей Юльевич Витте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그루지야 1849–1915 ○ 자연사

차르가 미워한 구원투수

1888년, 측근들 앞에서 "화물 기관차 두 대로 황실 열차를 끌면 위험하다"고 직언했다. 며칠 후 보르키 탈선 사고. 알렉산드르 3세는 그를 국철 책임자로 발탁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와 금본위제를 주도한 제국 근대화의 설계자. 1905년 일본과 강화를 맺고 10월 선언을 받아냈으나, 차르는 위기를 넘겨준 그를 평생 용서하지 않았다. 한직에서 회고록을 쓰다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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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903재무장관, 금본위제, 시베리아 횡단철도, 공업화 드라이브
  • 1905.9포츠머스에서 일본과의 강화 협상 타결
  • 1905.10초대 총리, 10월 선언 기초
  • 1906.4해임, 이후 국가평의회 한직

니콜라이 세묘노비치 치헤이제

Николай Семёнович Чхеидзе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그루지야 1864–1926 ✕ 자살

이중권력 시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혁명적 수호주의의 얼굴

「인민과의 직접적 소통을 잃자 그는 저항력을 상실했다. 거대한 떡갈나무도 폭풍에 뽑혀 자양분을 공급하던 흙에서 분리되면 시든다. 치헤이제도 그렇게 갔다」 — 이라클리 체레텔리, 1926년 장례식에서

그루지야 귀족 출신 멘셰비키. 『공산당 선언』을 그루지야어로 처음 옮겼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이중권력을 주재했으나 10월혁명에 반대했고, 그루지야 독립을 이끌며 파리 망명정부 수반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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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년대메사메다시 가입, 『공산당 선언』 그루지야어 초역
  • 1898–1907바투미 시의회 의원·시 병원 감독관, RSDLP 입당(1898), 멘셰비키(1903~)
  • 1907–173·4대 두마 의원(티플리스 현), 멘셰비키 원내대표
  • 1917.2–9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 VTsIK 의장(6월~)
  • 1918–21자캅카스 세임 의장, 그루지야 제헌의회 의장, 독립선언 서명
  • 1919파리 강화회의 그루지야 대표
  • 1921–26프랑스 망명, 그루지야 망명정부 수반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마르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Марр
이론가 소비에트 그루지야 1865–1934 ○ 뇌졸중

제국 학술원 출신으로 유일하게 공산당에 입당해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한 야페트 이론의 창시자

'언어학의 세계 규모적 정립' — 마르가 자신의 이론을 일컫던 표현이다. 그에게 모든 언어는 네 원시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언어는 계급적 상부구조였다.

그루지야 쿠타이시에서 태어난 마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카프카스 언어·고고학으로 명성을 쌓아 1912년 제국 학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혁명 후 언어를 계급적 상부구조로 보며 모든 언어가 네 원시음(sal, ber, yon, rosh)에서 비롯되었다는 '야페트 이론'을 주창, 1930년 공산당 입당과 함께 학술원 부원장이 되어 사망 시까지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했다. 그의 유사과학적 이론은 1950년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문제」로 공식 폐기되었으며, 그 행로는 혁명기 과학과 권력의 길항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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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페테르부르크 대학 동양학부 졸업 및 강사
  • 1912제국 학술원 정회원
  • 1921야페트 연구소(후일 언어·사고 연구소) 설립
  • 1926–1930레닌그라드 공공도서관 관장
  • 1930공산당 입당 (제국 학술원 출신 최초·유일)
  • 1930–1934소련 학술원 부원장

필리프 이에세예비치 마하라제

ფილიპე იესეს ძე მახარაძე
이론가 소련 그루지야 1868–1941 ○ 자연사

그루지야를 온건하게 소비에트화하려다 스탈린에게 쫓겨난 볼셰비키 원로

「그루지야에서 소비에트 권력의 수립은 외국 점령의 외양을 띠었다, 나라 안에는 혁명에 가담할 준비가 된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21년 12월, 모스크바 중앙위원회 보고

그루지야 구리아 출신으로 트빌리시 신학교와 바르샤바 수의학연구소에서 수학했다. 1891년 사회민주주의에 합류해 멘셰비키 우세 지역에서 드문 볼셰비키 지도자로 활동했고, 1921년 2월 혁명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반대파에 대한 온건 노선과 그루지야 주권 유지를 주장하다 7월 스탈린에게 해임되고 므디바니로 교체되었다. 이 사건은 1922년 '그루지야 사건'의 직접적 전사이며, 이후 고스플란·인민위원회·최고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대숙청을 생존한 몇 안 되는 구볼셰비키 원로로 194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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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사회민주주의 운동에 합류
  • 1903캅카스 연합위원회 RSDLP 위원, 1905년 혁명 참여
  • 1907–1915자캅카스에서 볼셰비키 지하운동 지도
  • 1917『캅카스 노동자』 편집자, RSDLP(b) 캅카스 지역위원회 위원
  • 1918–1920멘셰비키 정부하 그루지야에서 지하활동
  • 1921.2–7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 온건 노선으로 스탈린에게 해임
  • 1922–1938그루지야 중앙집행위 의장, 인민위원회 의장, 자캅카스 고스플란 의장, 자캅카스 중앙집행위 의장
  • 1938–1941그루지야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소련 최고소비에트 부의장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3전체보기

1922.12

소련의 결성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야·자캅카스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대등한 자격으로 연방조약을 맺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했다. 공화국들을 러시아 연방에 편입하려던 자치화안은 레닌의 개입으로 폐기되었고, 탈퇴권을 명시한 대등한 공화국들의 연방이라는 원칙이 채택되었다. 뒤이은 코레니자치야(토착화) 정책은 민족 언어와 민족 간부를 국가가 체계적으로 육성한, 당대 세계에 전례가 없는 민족정책이었다.

1988–1991

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

1988년 숨가이트 포그롬에서 1991년 빌뉴스 유혈사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은 페레스트로이카 아래에서 소련의 민족질서와 중앙권력이 함께 무너져 가는 과정이다. 네 사건의 성격은 같지 않다. 숨가이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를 계기로 터진 반아르메니아 포그롬이자 국가의 치안 실패였고, 1989년 트빌리시는 비무장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군사적 진압이었으며, 1990년 바쿠는 민족폭력과 중앙권력 붕괴가 겹친 자리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군사개입이었고, 1991년 빌뉴스는 독립을 선언한 연방공화국의 주권기관에 대한 강제력 행사였다. 그러나 하나의 공통된 위기를 보여 준다. 중앙정부는 민족 간 폭력으로부터 주민을 지키지 못하면서도, 공화국의 정치적 이탈에는 반복해서 군사력을 썼다.

1991

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

1991년 8월,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으려는 보수 강경파가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크류치코프·야조프·파블로프 등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옐친이 전차 위에 올라 저항하고 시민이 결집하면서 사흘 만에 무너졌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연방의 해체를 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