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3월 혁명
1848년 3월 바덴과 베를린의 봉기로 시작된 독일 혁명은 어떻게 제후들에게 자유주의 내각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를 받아들이게 했으며, 왜 그 국민의회의 제국헌법은 프로이센 국왕의 거부와 1849년 라슈타트 함락으로 끝났고, 그 과정에서 공산주의자동맹과 노동자 결사들은 무엇을 시도하고 무엇을 배웠나?
흉작과 빈곤, 메테르니히 체제에 대한 불만이 쌓인 3월 전기 끝에, 1848년 2월 파리 혁명 소식이 바덴의 만하임 집회와 빈·베를린의 봉기를 불렀다. 3월 18일 베를린 바리케이드전 뒤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군대를 물리고 자유주의 3월 내각을 세웠고, 5월 18일 프랑크푸르트 파울 교회에서 최초의 전 독일 선출 의회인 국민의회가 열렸다. 국민의회는 기본권과 소독일 제국헌법을 만들었지만 군대도 징세권도 없었고, 말뫼 휴전 수용으로 민주파와 갈라섰다. 1848년 가을 빈 함락과 블룸 처형, 프로이센 국민의회 해산으로 반혁명이 힘을 되찾았고, 1849년 4월 프로이센 국왕이 황제 왕관을 거부하자 드레스덴·라인란트·팔츠·바덴의 제국헌법 운동이 일어났으나 7월 23일 라슈타트 함락으로 진압되었다. 그사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독일 공산당의 요구」와 「신라인 신문」으로, 고트샬크와 보른은 쾰른 노동자협회와 노동자 형제회로 노동자의 독자 조직을 시도했다.
3월 전기: 메테르니히 체제와 굶주린 1840년대
1815년 빈 회의는 해체된 신성 로마 제국 자리에 39개 국가의 느슨한 연합체인 독일 연방을 세웠고, 오스트리아가 그 의장국을 맡았다. 오스트리아 재상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가 이끈 복고 정책은 프랑스 혁명 이전의 귀족 지배를 되살리려 했다. 1817년 바르트부르크 축제에서 학생 단체(부르셴샤프트)가 민족 통일을 외치자, 1819년 극작가 코체부가 학생 카를 루트비히 잔트에게 살해된 것을 구실로 연방은 카를스바트 결의를 내려 언론 검열과 대학 감시를 강화했다.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 뒤 브라운슈바이크·쿠르헤센·작센·하노버에서 봉기가 일어나 일부 국가에 헌법이 생겼고, 1832년 함바흐 축제에서는 금지된 검정·빨강·금색 깃발이 내걸렸다. 1833년 4월 3일에는 학생 약 50명이 연방의회 소재지 프랑크푸르트의 경비대를 습격해 전국 봉기를 일으키려다 실패했다. 1 2 3
「3월 전기(포어메르츠)」라는 이름은 1848년 3월 혁명에 앞선 시기를 가리키며, 그 시작을 1815년으로 보는 쪽과 1830년 7월 혁명으로 보는 쪽이 갈린다. 국제적으로는 「메테르니히 시대」로 불리고, 문화사에서는 비더마이어 시대와 겹친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전례 없는 규모의 검열과 감시를 펴는 경찰국가였고 다른 독일 국가들에도 같은 정책을 압박했다. 1837년에는 하노버 헌법 폐지에 항의한 괴팅겐 대학 교수 7명이 해임되었다. 반면 1833년 3월 22일 결성된 독일 관세동맹은 국가들 사이의 교역을 쉽게 했고, 자유주의 민족주의자들은 이를 프로이센 중심의 소독일 통일로 가는 걸음으로 받아들였다. 하인리히 하이네, 게오르크 헤르베크, 게오르크 뷔히너 같은 작가는 검열을 피해 프랑스와 스위스로 망명했고, 뷔히너의 『헤센의 급사』는 「오두막에 평화를, 궁전에 전쟁을!」이라는 구호를 퍼뜨렸다. 2 1
산업혁명과 인구 증가는 농촌과 도시가 흡수할 수 없는 노동력을 낳았고, 수공업 몰락과 대량 실업 속에서 「빈곤 문제(파우퍼리즘)」가 시대의 낱말이 되었다. 1844년 6월 슐레지엔의 랑엔빌라우와 페터스발다우에서 직조공들이 굶주림 끝에 봉기했으나 며칠 만에 프로이센군에 진압되었다. 이 사건을 다룬 빌헬름 볼프의 글 「슐레지엔의 빈곤과 봉기」는 뒤에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의 희곡 『직조공들』의 바탕이 되었다. 1846년 흉작에 이어 1847년에는 거의 모든 독일 국가에서 기근과 식량 폭동이 일어났고, 베를린에서는 4월에 「감자 혁명」이 터졌다. 식료품값이 오르자 공산품, 특히 직물 수요가 무너져 가내 직물업이 더 빠르게 쇠퇴했다. 1 4
지역 차이도 컸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지배 아래 봉건 구조가 해체되었던 라인란트는 근처의 석탄과 라인강 수운을 끼고 19세기 독일 최대의 공업 지대가 되었고, 1848년 무렵 아헨·쾰른·뒤셀도르프는 고도로 공업화되어 있었다. 1814년 이후 이 지역을 차지한 프로이센은 라인란트 주민을 이방인처럼 다루며 봉건적 구조를 되살리려 했고, 그래서 이 지역의 혁명 정서에는 강한 반프로이센 감정이 섞였다. 다른 국가에서는 자유주의 소시민층이 봉기를 이끌었지만, 라인란트에서는 이미 1840년 무렵부터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지에 맞서 제 이해를 드러내고 있었다. 3

바덴에서 빈까지: 3월 요구와 3월 내각
혁명은 독일 국가 가운데 가장 자유주의적이라던 바덴 대공국에서 시작되었다. 1847년 9월 12일 오펜부르크 집회에서 프리드리히 헤커와 구스타프 슈트루베는 시민권·사회 보장·평등을 담은 「바덴 인민의 13개 요구」를 내놓았다. 파리 2월 혁명 소식이 닿자 1848년 2월 27일 만하임 인민 집회가 정부에 청원을 내며 이른바 「3월 요구」를 처음 정식화했다. 그 핵심은 「장교를 자유롭게 선출하는 인민 무장, 무조건적 언론 자유, 영국식 배심 재판, 독일 의회의 즉시 수립」 네 가지였다. 바덴 곳곳에서는 농민들이 귀족 저택을 불태우고 영주들을 위협했다. 1 5 3
물결은 몇 주 만에 연방 전체로 번졌다. 2월 29일 연방의회는 정치 위원회를 두었고, 3월 1일 카를스루에에서 시위대가 바덴 의회 건물을 점거했으며, 3월 3일 연방의회는 압력에 밀려 언론 자유를 허용했다. 3월 4일 뮌헨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3월 5일 하이델베르크에 모인 자유주의자 51명은 전국 의회를 준비할 예비의회를 부르기로 했다. 같은 날 헤센 대공국에서는 하인리히 폰 가게른이 정부 수반이 되었고, 3월 9일 뷔르템베르크 국왕은 야당 지도자 프리드리히 뢰머를 수반으로 하는 「3월 내각」을 세웠다. 뷔르템베르크·하노버·헤센다름슈타트처럼 군주가 빨리 물러선 곳에서는 배심 재판, 검열 폐지, 농민 해방이 약속되었으나 상당수는 약속에 그쳤다. 3월 19일 오펜부르크에는 2만 명이 모였다. 1 6 5
바이에른에서는 국왕 루트비히 1세가 무희 롤라 몬테스와의 관계로 권위를 잃은 가운데 1848년 2월 9일 보수파가 그녀를 몰아내라며 시위를 벌였고, 자유주의 학생들이 이를 헌정 개혁 요구로 바꾸어 놓았다. 루트비히 1세는 아들 막시밀리안 2세에게 양위했다. 양위 날짜는 영어 위키백과가 3월 16일, 독일어 위키백과의 연표가 3월 20일로 적어 엇갈린다. 루트비히는 「더는 통치할 수 없었고 권력을 내놓고 싶지도 않았다. 노예가 되지 않으려고 나는 물러난 군주가 되었다」고 한탄했다. 3 1
독일 연방 최강국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는 3월 13일 학생들이 헌법과 보통선거로 뽑는 제헌의회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섰고, 군대의 발포에 노동자들이 가세해 무장 봉기가 되었다. 그날 밤 메테르니히가 물러나 영국으로 달아났고, 황제 페르디난트 1세는 3월 14~15일 국민위병 설치, 「완전한 언론 자유」, 헌법 제정을 약속했다. 빈의 날짜 때문에 독일 전역의 봉기가 「3월 혁명」으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명도 있다. 빈과 헝가리의 혁명은 별도 사건에서 다룬다. 3 1
베를린의 3월 18일과 프로이센 3월 내각
베를린에서는 3월 6일부터 집회가 이어졌고 13일부터 군대가 시위대를 공격했다. 3월 18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연합 주의회 소집, 언론 자유, 연방 개혁을 약속하는 칙허장을 내렸고, 이를 듣기 위해 왕궁 앞 광장에 모인 군중에게 군의 총에서 두 발이 발사되었다. 의도였는지 오해였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군중은 바리케이드를 쌓았고, 약 2만 명의 군대와 시민 사이에 12~13시간 동안 시가전이 벌어졌다. 이튿날인 3월 19일 국왕은 군대를 베를린에서 철수시켰다. 1 7 3
사망자 수는 자료마다 다르다. 당국 집계는 303명(남성 288, 여성 11, 어린이 4)이고, 베를린 3월 혁명을 다룬 독일어 문헌은 민간인 사망 200명 이상, 부상·포로 600명 이상, 군 사망 50명 미만으로 적으면서 언론과 소문에는 「군인 시신」이 400~1,800구라는 숫자가 몇 주 동안 돌았다고 전한다. 영어 위키백과는 장다르멘마르크트에 안치된 희생자를 254명으로 적는다. 잡히거나 죽은 민간인 가운데 시민계급은 3%에 불과했고 85%가 도시 하층민이었으며, 베를린 취업자의 약 20%에 불과한 수공업 직인이 싸운 사람의 절반을 차지했다. 1 7 3
국왕은 3월 19일 왕궁 마당에 안치된 「3월 전사자」 앞에서 모자를 벗어야 했다. 3월 21일 그는 검정·빨강·금색 완장을 두르고 베를린 시내를 돌며 「프로이센은 이제 독일 속으로 녹아든다」고 약속했고, 이튿날 프리드리히스하인 묘지로 가는 장례 행렬에는 약 4만 명이 따랐다. 1846년 포즈난 봉기 모의로 모아비트 감옥에 갇혀 있던 폴란드인 90명도 풀려나 시민의 환호 속에 행진했다. 그러나 국왕은 이튿날 동생 빌헬름 왕자에게 몰래 편지를 썼고, 대포로 봉기를 진압하려 한 이 왕자는 「산탄 왕자」라는 별명을 얻어 한동안 영국으로 몸을 피해야 했다. 1 3 8
3월 29일 라인란트의 은행가 루돌프 캄프하우젠과 다비트 한제만이 이끄는 자유주의 「3월 내각」이 들어섰지만, 관료제와 군대는 거의 손대지 않은 채 남았고 내각의 목표도 군주제와 손잡은 「제한적 개혁」이었다. 4월 8일 선거법은 보통·평등·간접 선거를 정했고, 5월 22일 베를린에서 프로이센 국민의회가 열렸다. 이 의회는 프랑크푸르트보다 교수·변호사가 적은 대신 수공업자와 농민 46명, 대지주 27명이 들어간, 더 「민중에 가까운」 의회였다. 6월 14일 베를린 시민들이 무기고를 습격해 무장했고, 6월 20일 3월 내각은 물러났다. 7월에 나온 헌법안 「발데크 헌장」은 보수파와 국왕 모두에게 거부되었다. 1 9 3
예비의회에서 파울 교회로: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하이델베르크 모임의 초청으로 3월 31일부터 4월 3일까지 프랑크푸르트 파울 교회에서 프랑크푸르트 예비의회가 열렸다. 자유주의 다수파는 급진 민주파를 누르고 연방의회와 협력해 제헌 국민의회 선거를 치르기로 했고, 그때까지 50인 위원회를 두기로 했다. 헤커가 독일을 공화국으로 선포하자고 낸 동의안과 슈트루베가 내놓은 연방 공화국 강령은 모두 부결되었고, 소수파였던 두 사람은 4월 2일 항의의 뜻으로 퇴장했다. 10 3 11 12
예비의회는 인구 5만 명당 의원 1명, 모두 649석을 정했지만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체코인 다수 선거구가 선거를 거부해 585석이 되었다. 의석 교체가 잦아 1848년 5월부터 1849년 6월까지 활동한 의원 총수는 799명(퀴네)에서 830명(니퍼다이)까지 집계가 갈리며, 812명(지만)과 809명(얀젠)이 흔히 쓰인다. 국민의회는 5월 18일 파울 교회에서 개원했고 온건 자유주의자 하인리히 폰 가게른을 의장으로 뽑았다(독일어 위키백과는 선출일을 5월 19일, 득표를 397표 중 305표로 적는다). 고위 관리·판사·변호사·교수가 넘쳐 「교수 의회」라는 조롱을 들었지만, 실제로는 관리와 법률가가 각각 절반 가까이를 차지한 「관리·법률가 의회」였다. 노동자는 한 명도 없었다는 서술과, 노동계급 출신은 폴란드인 의원 한 명뿐이었다는 서술이 엇갈린다. 10 6 1 3
의원들은 모임 장소의 이름을 딴 원내 파벌로 갈렸다. 영어 위키백과는 우파 카페 밀라니(40), 우익 중도 카지노(120), 중도 란츠베르크(40), 좌익 중도 뷔르템베르거 호프(100), 좌파 도이처 호프(60), 극좌 도너스베르크(40)로 약 400명의 소속을 셈한다. 당대 말로 민주적 공화국을 요구한 좌파는 「전부파(간체)」, 세습 황제를 둔 입헌군주제를 바란 자유주의 중도는 「절반파(할베)」라 불렸다. 도이처 호프와 도너스베르크 등 좌파는 1848년 11월 21일 전국 조직 「중앙 3월 협회」를 만들었다. 3 1
6월 28일 국민의회는 450 대 100으로 「임시 중앙권력」을 만들고, 이튿날 오스트리아의 요한 대공을 436표로 제국 섭정에 뽑았다. 라이닝겐 후작이 「제국 내각」 수반이 되었고 6월 14일에는 제국 함대 창설도 의결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가가 새 정부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았고, 국민의회에는 세금을 걷을 권한도 자체 군대도 없었다. 결의를 집행할 수단이 없다는 이 약점은 곧 슐레스비히 문제와 빈의 진압에서 드러났다. 10 1 3


헤커 봉기·포즈난·슐레스비히: 1848년 봄과 여름의 전선
예비의회에서 밀려난 헤커와 슈트루베는 무장 봉기로 공화국을 세우려 했다. 4월 8일 헤커의 친구인 『콘스탄츠 호반 신문』 편집인이 카를스루에 역에서 체포되자, 두 사람은 4월 12일 보덴호 지방과 슈바르츠발트 주민에게 무기를 들고 도나우에싱겐에 모이라고 호소했다. 7만 명을 기대했으나 모인 것은 수천 명이었고, 독일어 위키백과는 헤커 대열을 약 1,200명으로 적는다. 프랑스에서 온 시인 게오르크 헤르베크의 「독일 민주 군단」과 합류해 카를스루에로 진군하려던 계획은 4월 20일 칸데른 근처 샤이데크 전투에서 끝났다. 정부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폰 가게른 장군이 전사했지만 헤커 부대는 패했고, 헤르베크 부대도 일주일 뒤 도센바흐에서 무너졌다. 헤커는 스위스로 피했다가 9월 미국으로 이주했다. 11 1 3
프로이센령 포즈난 대공국에서는 3월 20일 베를린 소식에 고무된 시위가 열려 폴란드 국민위원회가 꾸려졌고, 베를린에서 풀려난 루드비크 미에로스와프스키가 폴란드인 부대를 이끌었다. 혁명 초기 독일 민주파는 폴란드 독립에 호의적이었지만 분위기는 곧 민족주의로 돌아섰다. 국왕은 4월 14일과 26일 포즈난주의 상당 부분을 폴란드 「재편」에서 떼어 냈고, 미에로스와프스키는 4월 30일 미워스와프에서 프로이센군을 이겼으나 봉기는 5월 9일 진압되었다. 이 봉기는 폴란드인 다수 지역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선거에 넣어 독일 국민국가에 편입하려는 데 맞선 것이었고, 결과적으로 대공국은 보통의 포젠주로 격하되었다. 13 1 3
덴마크 왕이 동군연합으로 다스리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국에서는 3월 21~22일 코펜하겐에서 「3월 정부」가 들어서자, 3월 24일 킬에 독일 지향의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7,000명의 군대가 꾸려졌다. 덴마크 민족자유주의자는 슐레스비히를 포함한 국민국가를, 독일 민족자유주의자는 두 공국을 묶어 독일 연방에 넣기를 원했다. 연방의회의 위임을 받은 프로이센군은 프리드리히 폰 브랑겔 장군 아래 유틀란트까지 밀고 올라갔지만, 덴마크 해협을 강국이 쥐는 것을 꺼린 영국과 러시아의 압력에 프로이센은 8월 26일 말뫼에서 6개월 휴전에 서명했다. 휴전은 연방군 철수와 킬 임시정부 해산을 담았고, 프랑크푸르트의 임시 중앙권력은 협상에서 인정조차 받지 못했다. 14 1 10
말뫼 휴전은 국민의회의 무력함을 드러냈다. 9월 5일 의회는 달만의 주도로 휴전을 238 대 221로 거부했고 라이닝겐 내각이 물러났지만, 9월 16일 두 번째 표결에서 근소한 차이로 휴전을 받아들였다. 9월 18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바리케이드전이 벌어졌고 카지노파 의원 리히노프스키와 아우어스발트가 살해되었으며, 섭정은 마인츠 요새의 프로이센·오스트리아군을 불러 질서를 되찾았다. 9월 21일 슈트루베는 뢰라흐에서 독일 공화국을 선포했다가 붙잡혔다. 말뫼 수용은 자유주의자와 급진 민주파의 협력이 끊어진 늦어도 마지막 시점으로 꼽힌다. 민주파에게 자유주의자는 헤커의 말대로 「주권자인 인민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대신 「제후들과 협상하는」 배신자였고, 자유주의자에게 9월 봉기는 좌파가 무질서와 테러를 뜻한다는 증거였다. 10 1 12

반혁명의 가을: 빈 함락, 블룸 처형, 프로이센 국민의회 해산
1848년 6월 파리 6월 봉기가 진압되자 독일 국가들에서도 반혁명이 힘을 얻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6월 16일 빈디슈그레츠가 프라하 성령강림절 봉기를 진압했고, 헝가리와의 전쟁에 반대한 빈 시민들이 10월 6일 국방장관 라투어를 살해하며 「10월 봉기」를 일으켰다. 10월 23일 옐라치치와 빈디슈그레츠의 군대가 빈을 포위했고 일주일 만에 도시를 되찾았으며, 봉기 측 사망자는 약 2,000명이었다. 국민의회 좌파가 진상 조사차 보낸 로베르트 블룸은 빈에서 시가전에 가담했다가 11월 4일 체포되었고, 의원 면책특권을 내세웠으나 군사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1월 9일 총살되었다. 그의 죽음은 혁명의 순교로 노래되었고, 12월 2일 페르디난트 1세는 조카 프란츠 요제프에게 양위했다. 1 15 3
프로이센 국민의회는 10월 12일 헌법안에서 「신의 은총에 의한」이라는 문구를 지웠고 10월 31일 귀족 칭호와 특권을 폐지했다. 국왕은 반격에 나서 11월 1~2일 숙부뻘인 군인 브란덴부르크 백작을 총리로 앉혔고, 브랑겔 장군의 군대가 베를린을 되찾았다. 의회는 「안전을 위해」 브란덴부르크안데어하펠로 옮기라는 명령을 받았고, 11월 10일과 15일 군대가 베를린의 회의를 해산했다. 의회 대표단이 국왕을 알현했을 때 요한 야코비는 「진실을 듣지 않으려는 것이 왕들의 불행」이라고 말해 유명해졌다. 뒤셀도르프에서는 11월 14일 납세 거부가 선언되었고, 같은 달 페르디난트 라살은 무장 저항을 선동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16 1 9 17 18
12월 5일 국왕은 브란덴부르크로 옮긴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같은 날 헌법을 「흠정」으로 공포했다. 국왕은 모든 의결에 대한 거부권과 언제든 의회를 해산할 권리를 쥐었고, 내각은 의회가 아니라 국왕에게만 책임을 졌다. 이 헌법은 발데크 헌장의 자유주의 조항 일부를 담았지만 곧 손질되었고, 1849년 5월 말 도입되어 1850년 1월 31일 개정 헌법에 담긴 3계급 선거권은 납세액에 따라 표의 무게를 달리해 유권자의 80% 이상이 의석의 3분의 1만 차지하게 했다. 이 선거권은 1918년까지 프로이센에 남았다. 보수파 의원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848년 말 국왕의 비선 측근 집단에 합류했고 새 헌법 아래 첫 주의회에 들어갔다. 1 16 3

기본권, 제국헌법, 「진흙으로 구운 왕관」
국민의회는 1848년 12월 27일 「독일 인민의 기본권」을 의결했고, 이튿날 제국 법률 공보에 실린 이 법은 법 앞의 평등을 비롯한 기본권을 즉시 효력 있는 것으로 선언했다. 그러나 반혁명이 이긴 뒤 기본권은 1851년까지 거의 모든 국가에서 폐지되었고, 1851년 8월 23일 다시 세워진 연방의회는 「연방 반동 결의」로 국민의회의 제국 입법을 무효로 선언했다. 10 3 1
헌법 논쟁의 중심은 새 독일에 오스트리아의 독일어권을 넣을지였다. 오스트리아 독일어권을 합치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나머지와 헌법상 분리하자는 「대독일 해법」과, 오스트리아를 빼고 프로이센이 이끄는 「소독일 해법」이 맞섰다. 1848년 11월 프란츠 요제프가 프랑크푸르트의 황제 칭호를 받지 않겠다고 밝히고 오스트리아 정부가 제국 전체를 하나로 묶는 중앙집권 헌법을 내놓자 대독일의 희망은 꺾였다. 12월 오스트리아인 총리 슈메를링이 물러나자 가게른이 제국 내각 수반이 되어 오스트리아를 국가연합 조약으로만 묶는 「가게른 강령」을 내놓았고, 1849년 1월 11일 의회에서 다수를 얻었다. 3 16 19 6
제국헌법은 1849년 3월 말 통과되었다. 영어 위키백과는 3월 27일 오후 267 대 263이라는 근소한 표차를, 독일어 위키백과는 3월 28일 42표 차 다수를 적어 날짜와 표차가 엇갈린다. 세습 황제를 둔 입헌군주제는 가게른 쪽 세습황제파가 중도 좌파 하인리히 지몬과 맺은 3월 26일의 「지몬-가게른 협약」으로 겨우 다수를 얻었고, 그 대가로 좌파에게 양보가 돌아갔다. 3월 28일 의회는 프로이센 국왕을 「독일인의 황제」로 뽑았는데, 찬성 290표에 좌파·남독일·오스트리아 의원 248명이 기권했다. 헌법은 3월 28일 공포되었고 소독일 연방 국가, 제국 법원에 호소할 수 있는 기본권, 남성 평등선거로 뽑는 인민원과 각국 정부·의회가 절반씩 뽑는 국가원의 양원제, 그리고 법률을 미룰 수만 있는 황제의 정지적 거부권을 담았다. 10 1 6 20
4월 3일 의장 에두아르트 폰 짐존이 이끈 황제 대표단이 베를린에서 왕관을 바쳤지만,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제후들과 자유시의 동의 없이는 받을 수 없다며 얼버무렸고 4월 28일 최종 거부했다. 그는 사적인 편지에서 이 왕관을 「진흙과 잡초로 구운 가짜 테」라 불렀고, 「천 년 된 독일 민족의 왕관을 다시 내린다면 그것을 내릴 이는 나와 나 같은 이들」이라고 썼다. 29개 중소 국가가 헌법을 승인했지만 오스트리아·프로이센·바이에른·작센·하노버는 거부했다. 오스트리아에 이어 프로이센도 5월 14일 자국 의원을 불법적으로 소환했고, 남은 의원들은 5월 30일 슈투트가르트로 옮겨 「잔여 의회」로 6월 6일부터 모였으나 6월 18일 뷔르템베르크군에게 해산되었다. 해산 무렵 남은 의원은 99명이었다. 10 16 1 3
제국헌법 운동: 드레스덴·라인란트·팔츠
1849년 5월 민주파는 제후들이 거부한 제국헌법을 아래로부터 관철하려는 「제국헌법 운동」을 일으켰다. 작센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가 헌법을 거부하고 의회를 해산하자 5월 3일 드레스덴에서 봉기가 터져 몇 시간 만에 바리케이드 108개가 섰다. 국왕은 쾨니히슈타인 요새로 달아났고, 해산된 의회의 치르너·토트·호이브너가 임시정부를 세웠다. 러시아 혁명가 미하일 바쿠닌, 궁정 악장 리하르트 바그너, 건축가 고트프리트 젬퍼, 노동자 형제회의 슈테판 보른이 바리케이드에 섰다. 작센군 대부분은 홀슈타인에 가 있었고, 정부의 요청을 받은 프로이센군이 5월 9일 치열한 시가전 끝에 봉기를 진압했다. 21 1 3
드레스덴의 규모와 희생은 출처마다 크게 다르다. 독일어 위키백과의 3월 혁명 항목은 봉기자를 약 1만 2천 명으로, 영어 위키백과의 독일 혁명 항목은 바리케이드의 전투원을 약 2,500명으로, 드레스덴 봉기 항목은 최근 연구를 들어 봉기자 약 3,000명 대 작센·프로이센 정부군 5,000명으로 적는다. 사망자는 봉기 측 약 200명(1995년 추정)과 작센군 8명·프로이센군 23명이라는 집계가 있고,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항목은 250명 사망, 700명 포로로 적는다. 바쿠닌은 체포되어 사형 선고와 인도를 거듭 겪었고, 바그너와 젬퍼는 수배 끝에 취리히로 망명했다. 1 3 21 16 22
프로이센의 라인주와 베스트팔렌에서는 평시에 불법으로 여겨진 예비군(란트베어) 소집이 불씨가 되었다. 5월 9일 엘버펠트·뒤셀도르프·이저론·졸링겐에서 봉기가 일어났고, 엘버펠트에서는 노동자 1만 5천 명이 바리케이드를 쌓고 공안위원회를 세웠다. 졸링겐 노동자들은 그레프라트 무기고를, 트리어 일대의 노동자와 민주파는 5월 17~18일 프륌 무기고를 습격했다. 엥겔스는 탄약 두 상자를 들고 엘버펠트로 와 바리케이드 감독관을 맡았지만, 그의 「붉은」 존재를 두려워한 부르주아 중심의 공안위원회에게 쫓겨났다. 무장한 노동계급에 놀란 대부르주아지는 운동에서 떨어져 나가 지도자들을 「피에 굶주린 테러리스트」라 불렀다. 3 23
바이에른의 라인 팔츠에서는 5월 1일 카이저슬라우테른에 약 1만 2천 명이 모여 「정부가 반역하면 팔츠 시민이 법의 집행자가 된다」는 구호 아래 헌법 수호 위원회를 세웠다. 5월 17일 변호사 요제프 마르틴 라이하르트가 이끄는 임시정부가 들어서 바이에른에서 떨어져 나갈 준비를 했고, 5월 18일 바덴과 동맹을 맺었다. 팔츠 혁명군에는 수천 명의 바이에른 군인이 합류했고, 공산주의자동맹원 프리츠 아네케가 포병을, 아우구스트 빌리히가 팔츠 의용병 전체를 맡았다. 그러나 무기와 재정이 모자랐고, 6월 11일 프로이센군이 진입했다. 24 3
바덴 공화국과 라슈타트 함락
바덴에서는 5월 9일 연방 요새 라슈타트에서 병사 집회가 열려 정규군과 시민군이 우애를 다졌고, 5월 11일 수비대가 반란을 일으켰다. 5월 13일 오펜부르크 인민 집회는 제국헌법의 무조건 승인과 자유주의자 로렌츠 브렌타노의 새 정부를 요구하는 16개조 강령을 채택했고, 그날 밤 대공 레오폴트가 카를스루에를 떠나 달아났다. 6월 1일 브렌타노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바덴은 군대와 주민이 모두 헌법을 지지했고 무기고와 국고도 넉넉해 팔츠보다 사정이 훨씬 나았다. 1848년 9월 봉기로 8년형을 받았던 슈트루베도 풀려났다. 5 25 1 3
혁명군 지휘는 포즈난 봉기의 지도자 미에로스와프스키가 맡았고, 맞은편에는 「산탄 왕자」 빌헬름이 이끄는 프로이센군과 연방군이 섰다. 6월 21~22일 바크호이젤 전투에서 패한 혁명군은 포위를 피해 물러났다. 협상에 기대며 전면 인민 무장을 미루는 브렌타노에 맞서 슈트루베 쪽이 6월 말 그를 몰아냈지만 해체를 막지 못했고, 미에로스와프스키는 7월 1일 사령관직을 내놓았다. 빌리히의 의용군단에는 엥겔스가 부관으로 따랐다. 이 부대는 린탈 전투에서 프로이센군의 란다우 진격을 막으려다 실패했고, 6월 19일 팔츠에서 바덴으로 물러나는 혁명군의 마지막 부대였으며, 6월 28~30일 무르크강 전선에서 싸웠다.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슈트루베의 부관으로 활동했다. 1 5 12 26 23
7월 23일 3주의 포위 끝에 라슈타트 요새가 그뢰벤 장군의 프로이센군에 항복하면서 바덴 혁명과 독일 혁명은 끝났다. 7월 27일부터 10월 27일까지 만하임·라슈타트·프라이부르크의 군사 법정이 열렸다. 처형된 혁명가 수는 독일어 위키백과의 3월 혁명 항목이 23명, 영어 위키백과의 바덴 혁명 항목이 27명(라슈타트 요새 사령관 티데만 포함, 라슈타트에서만 사형 선고 19건)으로 적는다. 혁명 뒤 바덴 인구의 약 5%인 8만 명가량이 고향을 떠났다. 엥겔스는 7월 25일에야 스위스에 닿았고, 슈트루베·브렌타노·카를 슈르츠도 망명했다. 엥겔스는 뒤에 「프로이센·바이에른·헤센 군인 10만 명이 라슈타트 성벽 아래 마지막 전투로 모든 일을 끝냈다」고 썼다. 1 5 25 3 27
공산주의자동맹, 「독일 공산당의 요구」, 「신라인 신문」
1836년 파리의 독일인 망명 수공업 직인들이 「추방자 동맹」에서 갈라져 나와 의인동맹을 세웠다. 재단사 빌헬름 바이틀링이 대표적 지도자였고 카를 샤퍼, 요제프 몰 등이 이끌었다. 1839년 5월 12일 블랑키파 봉기에 가담했다가 프랑스에서 쫓겨난 동맹은 런던으로 옮겨 1840년 「독일 노동자 교육협회」를 세웠고 회원이 1,000명을 넘었다. 1847년 6월 의인동맹은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브뤼셀 공산주의 통신위원회와 합쳐 공산주의자동맹이 되었고, 표어를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로 바꾸었다. 같은 해 11~12월 런던 제2차 대회의 위임으로 쓴 「공산당 선언」은 1848년 2월에 나왔다. 전문가들은 동맹의 실제 회원을 200~300명으로 추산한다. 28 29 30
3월 혁명이 터지자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파리에서 1848년 3월 21~29일 「독일 공산당의 요구」 17개조를 써 전단으로 찍었고, 동맹 중앙위원회의 마르크스·샤퍼·H. 바우어·엥겔스·몰·W. 볼프가 서명했다. 제1조는 「독일 전체를 하나의 나눌 수 없는 공화국으로 선포한다」였다. 21세 이상 모든 독일인의 선거권, 의원 세비 지급, 보편적 인민 무장, 무상 재판, 농민을 짓누른 모든 봉건적 부담의 무상 폐지, 제후·봉건 영지와 광산의 국유화, 농지 저당권의 국유화, 사립 은행을 대신할 국립은행, 철도·운하·우편 등 교통의 국유화, 정교 분리, 상속 제한, 강력한 누진세와 소비세 폐지, 국립 작업장 설치, 무상 보통교육이 이어졌다. 전단은 이 조치들을 실현하는 것이 「독일 프롤레타리아, 소부르주아지, 농민」 모두의 이익이라고 맺었다. 31 32
4월 쾰른에 돌아온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동맹의 쾰른 회원들과 「신라인 신문: 민주주의 기관지」를 만들어 1848년 6월 1일 창간했다. 편집장 마르크스 아래 하인리히 뷔르거스, 에른스트 드롱케, 엥겔스, 게오르크 베르트, 페르디난트 볼프, 빌헬름 볼프가 편집진을 이루었고, 10월 12일에는 시인 페르디난트 프라일리그라트가 들어와 외신을 맡았다. 부제의 「민주주의」는 의회 민주주의가 아니라 진보적 소부르주아지·노동계급·농민의 혁명적 「민주 전선」을 뜻했다. 엥겔스가 회고한 신문의 강령은 「단일하고 나눌 수 없는 민주적 독일 공화국」과 「폴란드 재건을 포함한 러시아와의 전쟁」이었다. 신문은 군주제 반혁명과 타협하려는 자유주의 부르주아지를 조롱으로 공격했고, 1849년 4월 연재한 마르크스의 경제 논설은 뒤에 「임금노동과 자본」으로 묶였다. 30 33 23
발행 부수는 3,000~6,000부로 동맹 회원 수를 훨씬 넘었고, 역사가 타티야나 바실리예바는 이 신문이 혁명기 동맹 활동을 지휘한 「중심」이 되었다고 본다. 1848년 9월 25일부터 10월 4일까지 쾰른에 계엄이 선포되자 신문은 정간되었고, 엥겔스에게는 대역죄 체포 영장이, 빌헬름 볼프에게는 「음모」 혐의 수배령이 떨어졌다. 10월 중순 복간된 신문은 1849년 5월 정부의 압력으로 문을 닫을 때 정기 구독자가 6,000명이었다. 5월 16일 마르크스에게 24시간 안에 프로이센을 떠나라는 추방 명령이 내려졌고, 5월 19일 전부 붉은 잉크로 찍은 마지막 제301호가 나왔다. 마르크스는 「우리 차례가 오면 테러를 변명하지 않겠다」고 썼다. 30 34 23
쾰른 노동자협회와 노동자 형제회: 노동자 결사의 두 길
쾰른의 빈민 의사 안드레아스 고트샬크는 공산주의자동맹 쾰른 지부의 창립자 가운데 하나였다. 1848년 3월 3일 그는 시청 앞 대중 집회를 조직해 보통선거와 언론·집회 자유, 「노동의 보호」를 요구했다가 체포되었고, 베를린 혁명 뒤 풀려났다. 4월 13일 약 300명의 대표가 모인 창립 총회에서 그는 쾰른 노동자협회 회장으로 뽑혔고, 프로이센군 포병 장교 출신의 프리츠 아네케가 서기가 되었다. 협회는 경영 참여와 사회 보장, 노동 보호법을 요구하고 간접선거로 치러지는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선거를 거부했다. 회원 수는 협회 항목이 최대 7,000명, 고트샬크 항목이 몇 주 만에 8,000명 이상으로 적는다. 고트샬크는 동맹의 전략과 전술에 반대해 5월 초 동맹을 탈퇴했다. 35 36
고트샬크는 6월 프랑크푸르트 민주파 대회 뒤 마르크스·엥겔스의 「민주협회」와의 통합을 제안했지만 거절당했다. 7월 3일 즉시 민주 공화국을 세우자고 요구했다는 이유로 고트샬크와 아네케가 체포되자, 동맹원 요제프 몰이 회장, 카를 샤퍼가 부회장이 되어 협회를 마르크스파 노선으로 끌어갔다. 9월 소요 때 협회는 바리케이드를 쌓았고, 샤퍼가 투옥되고 몰이 런던으로 피하자 10월 22일 총회는 마르크스를 회장으로 뽑았다. 배심에서 무죄로 풀려난 고트샬크는 12월 프로이센 제2원 선거에 협회가 참여하는 데 반대했으나 마르크스와 다수는 찬성했다. 고트샬크는 마르크스를 「학식 높은 태양신」이라 부르며 「노동자의 비참과 가난한 이의 굶주림이 당신에게는 학문적·교조적 관심일 뿐」이라고 비난했다. 그는 1849년 9월 콜레라 환자를 돌보다 감염되어 죽었다. 36 35
베를린에서는 식자공 슈테판 보른이 다른 길을 걸었다. 파리에서 엥겔스를, 브뤼셀에서 마르크스를 만나 동맹을 위해 활동했던 그는 3월 혁명 뒤 베를린으로 돌아와 「노동자 중앙위원회」 위원장과 기관지 『인민』의 발행인이 되었고 인쇄공 파업 두 차례를 이끌었다. 1848년 8월 23일부터 9월 3일까지 베를린에서 열린 전국 노동자 대회가 노동자 형제회를 세웠고, 이 조직은 170개가 넘는 협회와 회원 1만 5천 명을 거느린 혁명기 최대의 노동자 단체가 되었다. 프로이센의 64개 협회 가운데 37개가 라인주에 있었다. 창립 대회는 「우리 노동자는 스스로를 도와야 한다」고 선언하면서도 반의회 노선이 아니라 헌정 질서 위에서 노동조합·협동조합·공제 조합과 노동자 교육을 키우려 했고, 최저임금과 노동시간을 정할 노사 위원회, 누진 소득세, 무상 교육을 국민의회에 청원했다. 37 38
보른은 실천 속에서 마르크스·엥겔스와 멀어져 「모든 공산주의 사상이 단번에 지워졌다. 그것은 현재가 요구하는 것과 아무 관련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형제회는 동맹과 회원이 겹쳤고 「공산당 선언」을 읽었으며 보른은 동맹은 강령, 형제회는 실천 조직을 맡자는 분업을 제안하기도 했지만, 형제회는 점차 사회개혁 노선으로 기울어 「사회민주주의자」라는 말을 즐겨 썼다. 마르크스는 이 온건한 연합이 노동자의 혁명 의지를 꺾을까 우려해 쾰른 노동자협회를 형제회에 가입시키지 않았다. 그래도 형제회는 제국헌법 운동에 적극 참여했고 보른은 드레스덴 바리케이드에서 싸웠다. 1850년 프로이센·작센·바이에른 정부는 형제회를 「공산주의의 온상」으로 보고 탄압했고, 1854년 노동자 결사의 전면 금지 때까지 버틴 이 조직의 지역 기반은 1860년대 라살의 전독일노동자협회로 이어졌다. 37 38 36
후일담: 동맹의 분열과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 (1850–1852)
런던에서 다시 모인 공산주의자동맹은 1850년 9월 15일 둘로 갈라졌다. 빌리히와 샤퍼는 곧 다가올 혁명에 집중하자고 했고,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국제 노동운동의 장기적 건설을 앞세웠다. 빌리히는 마르크스를 모욕하며 결투를 신청하기까지 했다. 1851년 5월 재단사 페터 노트중이 라이프치히 역에서 동맹의 「담화」 사본을 지닌 채 체포되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폭로되고 처벌받은 음모」라는 구경거리를 프로이센 국민에게 보여 주라고 지시했고, 경찰 간부 빌헬름 슈티버가 일부 날조한 증거를 모았다. 39 29 40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은 1852년 10월 4일부터 11월 12일까지 라인란트의 배심 법정에서 열렸다. 10월 23일 슈티버가 내놓은 「마르크스당 의사록」도 위조였고, 런던의 빌리히는 위조범을 영국 경찰에 넘겼다. 마르크스는 런던에서 위조를 입증하려 애썼다. 피고 11명 가운데 다니엘스 등 4명은 무죄였고, 뢰저·노트중·뷔르거스는 요새 금고 6년, 라이프·오토·베커는 5년, 레스너는 3년을 받았다. 프라일리그라트는 런던으로 피해 체포를 면했다. 판결 직후 공산주의자동맹은 스스로 해산했고, 엥겔스는 이 재판을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의 마지막 글로 다루었다. 39 26 41
평가
엥겔스는 1851년 8월 마르크스의 부탁을 받아 1851년 10월부터 1852년 10월까지 『뉴욕 데일리 트리뷴』에 독일 혁명에 관한 글 19편을 마르크스의 이름으로 실었다. 이 글들은 1896년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으로 묶였고, 실제 필자가 엥겔스라는 사실은 1913년에야 알려졌다. 첫 글에서 엥겔스는 반혁명의 승리를 몇몇 지도자의 「배신」으로 돌리는 설명을 물리치고, 그 원인을 「격동한 각 민족의 일반적 사회 상태와 생존 조건」에서 찾아야 한다고 썼다. 마지막 글은 산업·상업 자본가계급이 독일에서 어느 나라보다 심하게 패했고 「군주제든 공화제든 부르주아지의 지배인 정치적 자유주의는 독일에서 영원히 불가능하다」고 진단했으며, 소상인과 일부 농민의 이익을 대변한 민주파가 결정적 순간마다 비겁하게 흔들려 「모든 유럽 봉기의 진짜 투쟁 대중인 노동계급」의 신뢰를 잃었다고 비판했다. 1850년의 『독일 농민전쟁』에서 엥겔스는 1848~1849년의 실패를 16세기 농민전쟁과 같은 원인, 곧 너무 소심해 귀족에게 도전하지 못한 독일 부르주아지에게서 찾았다. 41 42 27 23
1850년 3월 마르크스가 쓴 「공산주의자동맹에 보내는 중앙위원회 담화」는 「연속혁명」이라는 표현에 전략적 의미를 처음 실은 글이다. 담화는 다음 혁명에서 소부르주아 민주파가 일시적으로 우세해질 것을 예상하면서, 그들이 몇몇 요구를 이룬 뒤 혁명을 빨리 끝내려 하는 데 맞서 「모든 유산 계급이 지배적 지위에서 쫓겨나고,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쟁취하고, 한 나라만이 아니라 세계의 모든 주요 나라에서 프롤레타리아의 결합이 충분히 나아갈 때까지 혁명을 연속적으로 만드는 것」이 노동자당의 이익이자 임무라고 했다. 핵심은 민주파와의 동맹 속에서도 노동자의 독자 조직과 요구를 지키라는 데 있었고, 부르주아 지배의 시기를 건너뛸 수 있다는 뒷날 트로츠키의 주장과는 다르다는 해석이 있다. 엥겔스는 1895년 서문에서 1848년의 그들이 경제 조건의 성숙을 잘못 보았다고 인정했고, 베른슈타인은 이를 의회주의 노선의 근거로 끌어 썼다. 43 44 45 23
패배는 대규모 망명을 낳았다. 수만 명이 프랑스·영국·스위스로 피했고, 배삯을 마련할 수 있는 이들은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로 건너가 「포티에이터스(1848년 사람들)」라 불렸다. 미국의 망명자들은 대체로 노예제와 토착주의에 반대해 링컨과 공화당을 지지했고 남북전쟁에서 북군에 섰다. 헤커는 일리노이 제24·제82 보병연대를 이끌다 챈슬러즈빌에서 중상을 입었고, 빌리히는 제32 인디애나 연대장을 거쳐 준장으로 미셔너리리지 공격을 이끌었으며, 슈트루베도 블렌커 아래 대위로 복무했다. 카를 슈르츠는 1877~1881년 미국 내무장관이 되었다. 마르크스는 「빌리히는 북아메리카 내전에서 자신이 몽상가 이상의 존재임을 보여 주었다」고 썼다. 독일에 남거나 1862년 사면 뒤 돌아온 급진 민주파 상당수는 1860년대의 노동운동과 사회민주주의에 합류했다. 1 46 11 40 12
「실패한 혁명」이라는 규정은 오늘날 논쟁거리다. 한스울리히 벨러는 초기 성공에 대한 과신과 농업 개혁으로 만족한 농촌의 이탈, 「마지못한 혁명가」였던 자유주의자, 수많은 근대화 과제의 동시 분출 등 여섯 요인이 혁명을 약하게 했다고 보면서도, 반동 정부가 농업 개혁을 되돌리지 못했고 배심 재판이 남았으며 오스트리아를 뺀 모든 독일 국가가 헌법을 갖게 된 점을 들어 「실패」라는 일면적 공식을 거부했다. 토마스 니퍼다이는 자유주의자가 사회혁명과 테러에 대한 두려움 속에서 혁명을 합법성으로 옮기려 했다고 변호했고, 마이크 래퍼포트는 국민 통일을 정치적 자유 위에 둔 자유주의자의 선택에서 위로부터의 비스마르크 제국으로 이어진 독일 특수 경로의 출발을 본다. 헬가 그레빙은 미하엘 슈튀르머를 따라 「실패한」 대신 「미완의」 혁명이라 부르자고 했다. 1848~1849년 농민 봉기는 국민 혁명보다 많은 사람을 움직여 독일 연방과 오스트리아·프로이센에서 농노제의 잔재를 끝냈다. 반면 혁명이 바랐던 국민 통일은 1871년 프로이센의 전쟁으로 위에서 이루어졌고, 사회주의 운동은 1848년에서 노동자의 독자 조직과 「신라인 신문」의 경험, 그리고 부르주아 민주파에 기대지 말라는 교훈을 물려받았다. 1 3
결과
독일 연방은 1850년 다시 세워졌고, 1851년까지 기본권은 거의 모든 국가에서 폐지되었으며, 프로이센은 1918년까지 이어진 3계급 선거권을 얻었다. 수만 명이 망명했고 바덴에서만 약 8만 명이 떠났으며, 그 가운데 헤커·빌리히·슈트루베 같은 이들은 미국 남북전쟁에서 북군으로 싸웠다. 반면 농민 해방과 공개 배심 재판, 오스트리아를 뺀 모든 독일 국가의 헌법은 반동 속에서도 남았다. 국민 통일은 1871년 프로이센의 전쟁으로 위에서 이루어졌고, 공산주의자동맹은 1852년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 뒤 해산했지만, 마르크스의 1850년 담화와 엥겔스의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은 부르주아 민주파에 기대지 않는 노동자 독자 노선과 연속혁명의 구상을 사회주의 운동에 남겼다.
연표와 지도
- 11844-06슐레지엔 직조공 봉기
랑엔빌라우와 페터스발다우의 직조공들이 굶주림 끝에 봉기했으나 며칠 만에 프로이센군에 진압되었다. 빌헬름 볼프가 이를 기록했다.
- 21847-09-12오펜부르크 집회의 13개 요구
헤커와 슈트루베가 시민권·사회 보장·평등을 담은 「바덴 인민의 13개 요구」를 내놓았다.
- 31848-02-27만하임 인민 집회
파리 2월 혁명 소식 속에 인민 무장, 언론 자유, 배심 재판, 독일 의회를 요구하는 「3월 요구」가 처음 정식화되었다.
- 41848-03-13빈 봉기와 메테르니히 사임
학생과 노동자의 봉기 속에 재상 메테르니히가 물러나 영국으로 달아났다.
- 51848-03-18베를린 바리케이드전
왕궁 광장에서 발사된 두 발을 계기로 12~13시간의 시가전이 벌어졌다. 당국은 사망자를 303명으로 집계했다.
- 61848-03-21국왕의 검정·빨강·금색 행진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혁명의 삼색 완장을 두르고 「프로이센은 독일 속으로 녹아든다」고 약속했다.
- 71848-03-24킬 임시정부 수립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의 독일계 주민이 덴마크에 맞서 임시정부와 7,000명의 군대를 세웠다.
- 81848-03-31프랑크푸르트 예비의회
파울 교회에서 예비의회가 열려 국민의회 선거를 정했다. 헤커의 공화국 동의안은 부결되었다.
- 91848-04-13쾰른 노동자협회 창립
약 300명의 대표가 안드레아스 고트샬크를 회장으로 뽑았다.
- 101848-04-20샤이데크 전투
헤커 봉기가 칸데른 근처에서 정부군에 패했다. 정부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폰 가게른이 전사했다.
- 111848-05-09포즈난 봉기 진압
미에로스와프스키가 이끈 폴란드인 봉기가 프로이센군에 진압되었다.
- 121848-05-18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개원
최초의 전 독일 선출 의회가 파울 교회에서 열려 하인리히 폰 가게른을 의장으로 뽑았다.
- 131848-06-01「신라인 신문」 창간
마르크스가 편집장을 맡은 「민주주의 기관지」가 쾰른에서 나왔다.
- 141848-06-29요한 대공 섭정 선출
국민의회가 임시 중앙권력을 세우고 오스트리아의 요한 대공을 436표로 제국 섭정에 뽑았다.
- 1848-08-26말뫼 휴전
영국과 러시아의 압력 속에 프로이센이 덴마크와 6개월 휴전에 서명했다.
- 151848-09-03노동자 형제회 창립
베를린 전국 노동자 대회가 슈테판 보른의 주도로 노동자 형제회를 세웠다.
- 161848-09-18프랑크푸르트 9월 봉기
말뫼 휴전 수용에 맞선 바리케이드전에서 의원 리히노프스키와 아우어스발트가 살해되었고, 프로이센·오스트리아군이 진압했다.
- 171848-09-21슈트루베의 뢰라흐 봉기
슈트루베가 독일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붙잡혔다.
- 181848-11-09로베르트 블룸 처형
빈 10월 봉기에 가담한 국민의회 의원 블룸이 면책특권을 무시당한 채 총살되었다.
- 191848-12-05프로이센 국민의회 해산과 흠정 헌법
국왕이 브란덴부르크로 옮긴 국민의회를 해산하고 헌법을 흠정했다.
- 201848-12-27「독일 인민의 기본권」 의결
국민의회가 법 앞의 평등 등 기본권을 즉시 효력 있는 법으로 의결했다.
- 211849-03-28제국헌법 공포와 황제 선출
국민의회가 소독일 세습 황제제 헌법을 공포하고 프로이센 국왕을 황제로 뽑았다(찬성 290, 기권 248).
- 221849-04-28황제 왕관 최종 거부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4월 3일 얼버무린 데 이어 왕관을 최종 거부했다.
- 231849-05-03드레스덴 5월 봉기
국왕의 헌법 거부에 맞선 봉기에 바쿠닌·바그너·보른이 가담했고 5월 9일 프로이센군이 진압했다.
- 241849-05-09엘버펠트 봉기
란트베어 소집에 맞서 노동자 1만 5천 명이 바리케이드를 쌓았다. 엥겔스가 바리케이드 감독관을 맡았다.
- 251849-05-11라슈타트 수비대 반란
연방 요새의 바덴 수비대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틀 뒤 대공 레오폴트가 달아났다.
- 261849-05-19「신라인 신문」 붉은 마지막 호
마르크스 추방 명령 뒤 전부 붉은 잉크로 찍은 제301호로 신문이 끝났다.
- 271849-06-01바덴 임시정부
로렌츠 브렌타노를 수반으로 하는 임시정부가 들어섰다.
- 281849-06-18슈투트가르트 잔여 의회 해산
남은 의원 99명의 잔여 의회를 뷔르템베르크군이 해산했다.
- 291849-06-21바크호이젤 전투
미에로스와프스키의 바덴 혁명군이 프로이센군에 패해 물러났다.
- 301849-07-23라슈타트 항복
3주 포위 끝에 요새가 항복하며 독일 혁명이 끝났다. 군사 법정이 23~27명을 처형했다.
- 1850-03중앙위원회 담화
마르크스가 공산주의자동맹에 「혁명을 연속적으로 만들라」는 담화를 보냈다.
- 311852-11-12쾰른 공산주의자 재판 판결
피고 11명 가운데 7명이 3~6년형을 받았고 공산주의자동맹은 해산했다.
관련 인물 42명
민주파·공화파와 노동자 결사27명
지도부8
「독일 공산당의 요구」를 엥겔스와 함께 썼고 쾰른에서 「신라인 신문」을 이끌었으며 1848년 10월 쾰른 노동자협회 회장이 되었다. 1849년 5월 추방되었고 1850년 동맹 중앙위원회 담화를 썼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좌파 지도자로베르트 블룸1807–1848예비의회 부의장이었고 말뫼 휴전에 반대했다. 빈 10월 봉기에 가담했다가 1848년 11월 9일 총살되었다.
헤커 봉기의 지도자프리드리히 헤커1811–1881예비의회에서 공화국 선포안을 냈다가 부결되자 1848년 4월 무장 봉기를 일으켜 샤이데크에서 패했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바덴 급진 민주파 지도자구스타프 슈트루베1805–1870헤커와 함께 4월 봉기를 이끌었고 9월 뢰라흐에서 공화국을 선포했다. 1849년 바덴 혁명 정부에 참여했다가 브렌타노를 몰아냈다.
노동자 형제회 창립자슈테판 보른1824–1898베를린 노동자 중앙위원회를 이끌고 1848년 9월 노동자 형제회를 세웠으며, 1849년 드레스덴 바리케이드에서 싸웠다.
쾰른 노동자협회 창립 회장안드레아스 고트샬크1815–18491848년 4월 협회를 세워 이끌었고 프랑크푸르트 선거 거부와 노동 보호를 내걸었다. 7월 체포된 뒤 협회를 넘겨받은 마르크스와 대립했다.
독일 민주 군단 지휘자게오르크 헤르베크1817–1875파리에서 온 독일 민주 군단을 이끌고 헤커 봉기에 합류하려 했으나 1848년 4월 27일 도센바흐에서 뷔르템베르크군에 무너졌다
바덴 혁명 임시정부 수반로렌츠 브렌타노1813–18911849년 5월 13일 오펜부르크 인민 집회가 그를 새 정부의 수반으로 요구했고 6월 1일 임시정부를 이끌었으나, 협상에 기대며 인민 무장을 미루다 6월 말 슈트루베파에 밀려나 망명했다
참여18
신문의 군사·외교 논평을 맡았고, 1849년 엘버펠트에서 바리케이드 감독관을 지낸 뒤 빌리히 의용군단의 부관으로 싸웠다. 『독일에서의 혁명과 반혁명』을 썼다.
팔츠 의용군단장아우구스트 빌리히1810–18781848년 샤이데크에서 싸웠고 1849년 엥겔스를 부관으로 둔 의용군단으로 린탈과 무르크강에서 프로이센군과 싸웠다. 1850년 동맹 좌파를 이끌었다.
「신라인 신문」 편집진, 국민의회 의원빌헬름 볼프1809–1864「독일 공산당의 요구」에 서명했고 신문의 「제국에서」 난을 맡았으며, 1849년 5~6월 도너스베르크파 의원으로 잔여 의회에 앉았다.
혁명 시인, 「신라인 신문」 편집진페르디난트 프라일리그라트1810–1876「죽은 자가 산 자에게」로 기소되었다가 무죄를 받았고 1848년 10월 신문의 외신을 맡았다. 「블룸」 등의 시를 실었다.
프로이센 국민의회·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좌파 의원요한 야코비1805–18771848년 11월 국왕에게 「진실을 듣지 않으려는 것이 왕들의 불행」이라고 말해 유명해졌다.
라인란트 민주파페르디난트 라살레1825–18641848년 쾰른에서 마르크스·엥겔스와 만났고, 11월 프로이센 국민의회 해산에 맞서 무장 저항을 선동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헤르베크 군단원, 슈트루베의 부관빌헬름 리프크네히트1826–19001848년 헤르베크의 독일 민주 군단에 들어갔고 9월 슈트루베의 봉기에 가담했으며 1849년 바덴 혁명에서 슈트루베의 부관으로 활동했다.
드레스덴 5월 봉기 참가자미하일 바쿠닌1814–18761849년 드레스덴 봉기의 바리케이드에 섰고, 작센 정부는 그를 주모자로 몰았다. 체포되어 사형 선고와 인도를 거듭 겪었다.
쾰른 노동자협회 부회장, 공산주의자동맹 지도부카를 샤퍼1812–1870의인동맹을 이끌었고 「독일 공산당의 요구」에 서명했다. 고트샬크 체포 뒤 몰과 함께 쾰른 노동자협회를 마르크스파 노선으로 이끌었고 「신라인 신문」 일을 도왔다. 9월 소요 뒤 투옥되었고, 1849년 나사우에서 반역죄 재판을 받았다. 1850년 빌리히와 함께 동맹 좌파를 이루었다.
쾰른 노동자협회 회장, 바덴 혁명군 전사자요제프 몰1813–1849의인동맹 지도자로 「독일 공산당의 요구」에 서명했다. 1848년 7월 고트샬크가 체포되자 쾰른 노동자협회 회장이 되었고, 9월 소요 뒤 런던으로 피했다가 몰래 돌아와 1849년 바덴·팔츠 봉기에서 싸우다 6월 28일 무르크강에서 전사했다.
의인동맹의 이론가빌헬름 바이틀링1808–1871의인동맹의 대표적 지도자였으나 1846년 마르크스와 갈라섰다. 1848년 미국에서 돌아와 베를린에서 「원선거인」을 냈지만 역할은 작았고 1849년 말 미국으로 돌아갔다.
팔츠·바덴 혁명군 장교, 1848년 망명자카를 슈르츠1829–19061848년 킨켈과 「본 신문」을 냈고, 1849년 제국헌법 운동 때 팔츠·바덴 혁명군 포병 지휘관 아네케의 부관으로 싸웠다. 라슈타트 함락 때 빠져나가 망명했고, 1850년 킨켈을 슈판다우 감옥에서 탈옥시켰다. 미국에서 상원의원과 내무장관(1877~1881)이 되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의원, 베스트엔트할 분파 지도자하인리히 지몬 (프랑크푸르트 의원)1805–18601849년 3월 26일 「지몬-가게른 협약」으로 세습 황제안에 다수를 만들어 주고 좌파의 양보를 얻었으며, 6월 슈투트가르트 잔부 의회의 섭정부에 들어갔다
쾰른 노동자협회 서기, 팔츠 혁명군 포병 지휘관프리츠 아네케1818–18721848년 4월 쾰른 노동자협회 서기가 되었다가 7월 3일 고트샬크와 함께 체포되었고, 1849년 팔츠 혁명군의 포병을 조직했다
드레스덴 궁정 악장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1849년 5월 드레스덴 봉기에서 바쿠닌·젬퍼·보른과 함께 바리케이드에 섰고, 수배된 뒤 취리히로 망명했다
건축가, 드레스덴 시민 경비대원고트프리트 젬퍼1803–18791849년 5월 드레스덴 봉기에서 바리케이드를 쌓았고, 수배된 뒤 취리히로 망명했다
「신라인 신문」 문예란 편집자게오르크 베르트1822–1856영국·벨기에 기사와 문예란을 맡아 귀족 풍자 『슈나프한스키 기사의 삶과 행적』을 연재했고, 그 때문에 1850년 옥고를 치렀다
「신라인 신문」 편집자페르디난트 볼프1812–1905「붉은 볼프」라 불렸고, 프랑스와 2월 혁명의 여파를 맡아 170편 넘는 글을 썼다
자유주의 입헌파 (프랑크푸르트 다수파·3월 내각)5명
지도부3
자유주의 다수파를 이끌어 요한 대공을 섭정으로 세웠고, 오스트리아를 뺀 「가게른 강령」으로 제국헌법 통과를 이끌었다.
프로이센 3월 내각 총리루돌프 캄프하우젠1803–18901848년 3월 29일 한제만과 함께 자유주의 「3월 내각」을 꾸렸으나 관료제와 군대를 거의 건드리지 않은 채 군주와의 동맹 아래 제한된 개혁만 꾀했고, 6월 20일 사임을 청했다
제국 섭정요한 대공1782–18591848년 6월 29일 국민의회가 436표로 임시 중앙권력의 제국 섭정에 뽑았으나 각국 군대를 지휘하지 못했고, 1849년 12월 20일 물러났다
군주·제후 정부와 군대9명
집행 · 지휘5
베를린 봉기를 대포로 진압하려다 「산탄 왕자」라 불려 영국으로 피했고, 1849년 바덴 봉기를 진압한 프로이센군을 지휘했다.
빈 진압군 사령관알프레트 빈디슈그레츠1787–18621848년 6월 프라하를 진압했고 10월 옐라치치와 함께 빈을 되찾았다. 빈이 그에게 항복한 뒤 블룸이 체포되어 군사 법정에서 처형되었다.
프로이센군 장군프리드리히 폰 브랑겔 (프로이센 원수)1784–18771848년 연방의 위임을 받은 프로이센군을 이끌고 유틀란트까지 진군했고, 11월에는 그의 군대가 베를린을 되찾았다
프로이센 총리프리드리히 빌헬름 폰 브란덴부르크1792–18501848년 11월 1~2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그를 총리로 앉혀 반격에 나섰고, 국민의회를 브란덴부르크로 옮긴 뒤 12월 5일 해산했다
프로이센 경찰관빌헬름 슈티버1818–18821851~1852년 쾰른 공산주의자 재판의 증거를 모으며 일부를 조작했고, 그가 내놓은 「마르크스당 의사록」도 위조로 드러났다
참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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