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점령하의 헝가리: 마르가레테 작전에서 부다페스트 포위까지
독일에 점령된 헝가리에서 어떻게 한 해 사이에 수십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고, 전쟁에서 빠져나가려던 호르티의 시도는 왜 화살십자당 집권과 수도의 파괴로 끝났는가?
1944년 3월 19일 독일군은 연합국과 휴전을 꾀하던 헝가리를 점령했다. 섭정 호르티는 자리를 지켰고 스토여이 되메 정부의 내무부와 헌병대가 아이히만 특별작전대와 함께 5~7월 약 43만 7,000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했다. 국제적 항의 속에 호르티는 7월 초 이송을 멈추고 8월 러커토시 정부를 세워 소련과 예비 휴전에 서명했지만, 10월 15일의 휴전 선언은 독일의 판처파우스트 작전과 살러시 페렌츠의 화살십자당 쿠데타로 무너졌다. 화살십자당은 부다페스트 유대인을 도나우강 강변에서 학살하고 국경으로 걸어서 보냈고, 중립국 외교관들은 보호 문서로 사람을 구했다. 1944년 12월 26일 포위된 부다페스트는 1945년 2월 13일 소련군에 함락되었다.
클레스하임에서 마르가레테 작전으로 (1944년 3월)
헝가리가 연합국과 강화를 꾀한다고 의심한 히틀러는 1944년 3월 헝가리 점령을 명령했다. 실제로 칼러이 미클로시 정부의 외교관 베레시 라슬로는 1943년 9월 서방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한다는 비밀 협정에 서명한 바 있었다. 호르티는 오스트리아의 클레스하임 성으로 불려 가 더 큰 복종을 요구받았고, 3월 18일까지 이어진 회담 끝에 솜버테이이 페렌츠 참모총장의 설득과 「나의 신임을 받는 새 헝가리 정부가 들어서면 독일군을 철수시키겠다」는 히틀러의 약속을 받고 의정서에 서명했다. 독일군은 호르티의 귀국 열차를 일부러 돌려 늦추었고, 그사이 3월 19일 독일군이 국경을 넘었다. 칼러이의 비상회의에 불려 온 장군들은 저항이 소용없다고 했고, 솜버테이이는 호르티가 돌아올 때까지 저항하지 말라는 전보를 보냈다. 1 2) 3
기습이었던 점령은 빠르고 거의 피를 흘리지 않고 끝났다. 국경 경비대의 산발적 발포와 비치케 철도 노동자들의 파업 정도가 저항의 전부였고, 작전을 지휘한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 원수는 「부다페스트는 조용하다」고 보고했다. 부다페스트 역에 도착한 호르티는 칼러이를 내보내고 독일에 전면 협력하는 정부를 세워야만 헝가리가 주권을 유지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왕실 회의에서 칼러이와 내무장관 케레스테시피셰르 페렌츠는 헝가리가 더는 독립국이 아니라고 말했고, 칼러이와 전 총리 베틀렌 이슈트반은 점령을 정당화하지 않도록 퇴위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더 나쁜 사람이 국가원수가 될 것을 걱정한 유대인 지도자들은 남아 달라고 청했고, 호르티는 「선장은 가라앉는 배를 떠날 수 없다」며 섭정 자리에 남았다. 이 결정은 지금도 역사가들 사이에서 논쟁거리다. 2)
독일은 임레디 벨러를 총리로 원했으나 호르티는 거부했다. 3월 22일 18시까지 독일이 받아들일 정부를 세우지 않으면 왕궁을 공격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받은 호르티는 그날 오후 베를린 주재 대사였던 스토여이 되메를 총리로 하는 정부에 동의했고, 스토여이는 23일 총리 겸 외무장관에 취임했다. 임레디 자신은 빠졌지만 그의 헝가리 쇄신당 사람들이 농업·재무·산업 장관을 맡았고, 케레스테시피셰르 대신 급진 반유대주의자 여로시 언도르가 국가경찰과 헌병대를 관장하는 내무장관이 되었다. 여로시 밑의 두 차관 엔드레 라슬로와 버키 라슬로는 헝가리 나치 정당 출신의 열렬한 반유대주의자였다. 독일이 「존중할 만한」 정부를 원했기 때문에 살러시 페렌츠의 화살십자당은 내각에서 빠졌다. 히틀러의 대리인으로는 친위대 여단지도자 에드문트 페젠마이어가 제국 전권대표로 부임했다. 2) 3 4 5 1
점령과 함께 대대적인 체포가 시작되었다. 3월 19일 아침 친위대가 아파트 문을 부수고 들어오자 야당 정치인 버이치질린스키 엔드레는 권총으로 맞서다 총상을 입고 끌려갔다. 케레스테시피셰르는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다하우 수용소로 보내졌고, 칼러이는 튀르키예 공사관으로 피신했으며 베틀렌은 장교로 변장해 트란실바니아로 몸을 숨겼다. 사회민주당 지도자 페이에르 카로이는 가족이 인질로 잡히자 자수했다. 4월 28일까지 독일은 헝가리에서 8,240명을 체포했는데, 그 가운데 다수는 칼러이 정부가 받아 준 탈출 연합군 포로와 1939년에 넘어온 폴란드 군인이었다. 3월 22일 의회가 열렸을 때 하원 의원 13명과 상원 의원 9명이 친위대에 체포되어 나오지 못했고, 스토여이는 의회를 무기한 휴회하고 법령으로 통치했다. 정부는 야당과 노동조합을 금지하고 언론을 검열했으며, 페젠마이어는 4월까지 주지사 41명 가운데 29명을 갈아치웠다. 2) 6
노란 별과 게토 (1944년 3–5월)
점령 당시 헝가리에는 76만~78만 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었고, 이는 유럽에 남은 가장 큰 유대인 공동체였다. 스토여이 정부는 수십 개의 반유대 법령으로 이들을 고립시키고 낙인찍고 빈곤하게 만들었다. 유대인은 자동차, 전화, 라디오, 자전거를 내놓아야 했고, 비유대인과 함께 영화나 연극을 보는 것이 금지되었으며 식량 배급이 줄었다. 3월 31일의 법령에 따라 4월 5일부터 6세 이상의 유대인은 옷 왼쪽 가슴에 가로세로 10cm의 노란 다윗의 별을 달아야 했다. 스토여이는 화살십자당을 합법화했고, 4월 5일 수좌대주교 세레디 유스티니안에게 가톨릭으로 개종한 유대인에게도 인종법을 적용하되 사제와 수도자만 예외로 하겠다고 통보했다. 7 4 1 3
친위대 중령 아돌프 아이히만은 이송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특별작전대를 이끌고 부다페스트에 와 마제스틱 호텔에 본부를 차렸다. 아이히만의 부대는 200명 남짓이었고, 이송 실무의 대부분은 헝가리 관리들이 맡았다. 아이히만은 3월 20일 유대인 지도층을 불러 유대인 평의회를 만들게 하고 「동방 이주」를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4월 4일 버키가 주재하고 아이히만 특별작전대 간부들, 엔드레, 헌병 중령 페렌치 라슬로가 참석한 회의는 유대인의 재산을 먼저 빼앗고 도시의 게토에 모은 뒤 독일로 이송하기로 정했다. 버키는 여로시에게 「헝가리 왕국 정부는 곧 나라에서 유대인을 일소할 것이다. 성별과 나이를 가리지 않고 지정된 수용소로 이송하라」고 썼다. 헝가리와 독일 당국은 전국을 여섯 개 작전 구역으로 나누어 구역마다 게토화와 이송을 차례로 진행했다. 1 2) 8 7
4월부터 지방 관리, 시장, 경찰, 헌병이 전국의 도시에 임시 게토를 세웠다. 게토는 유대인 거리나 공장, 창고, 벽돌 공장 같은 큰 건물에 마련되었고 이송이 쉽도록 대개 철도 가까이에 있었다. 작은 마을의 유대인은 큰 도시의 게토로 옮겨져 며칠에서 몇 주 동안 헝가리 당국의 감시 아래 갇혔고, 약탈과 고문이 뒤따랐다. 계획은 5월 중순부터 화물차 45량짜리 열차를 하루 네 편씩 보내 지방에서 매일 1만 2,000명을 이송하고, 7월 15일 무렵부터 부다페스트의 유대인을 이송하는 것이었다. 유대인 가족이 끌려가면 이웃들이 곧바로 집을 털었고, 중산층 유대인의 재산을 차지하려는 탐욕이 이송을 뒷받침했다. 7 1 2)
147개의 열차: 아우슈비츠 이송 (1944년 5–7월)
첫 이송 열차는 4월 29일 노동 능력이 있다고 판정된 1,800명을 싣고 부다페스트를 떠났다. 대량 이송은 5월 14~15일 시작되어, 대개 하루 서너 편의 열차가 커셔(코시체) 역을 지나 북쪽 국경으로 갔고 국경까지는 헝가리 정부가 책임졌다. 첫 열차들은 5월 16일 아우슈비츠에 닿았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따르면 5월 15일부터 7월 9일까지 약 43만 7,000명이 열차 147편으로 이송되었고 그 가운데 약 42만 명이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로 갔다. 그곳에서 약 10만 명이 강제노동에 뽑혔고 나머지 약 33만 명은 도착 즉시 가스실에서 살해되었다.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에서 가장 많은 사람이 죽은 시기였다. 1 7
헌병대의 페렌치 라슬로는 7월 9일까지 147편의 열차로 43만 4,351명이 이송되었다고 셌고, 페젠마이어는 43만 7,402명으로 보고했다. 페젠마이어는 6월 13일 외무부에 카르파티아와 트란실바니아에서 열차 92편으로 유대인 28만 9,357명을 실어 보냈다고 전보했고, 6월 15일에는 리벤트로프에게 약 34만 명이 제국에 넘겨졌다고 보고하며 이송이 끝나면 90만 명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아우슈비츠의 초대 소장 루돌프 회스는 5월 8일부터 7월 29일까지 수용소로 돌아와 헝가리 유대인의 학살을 감독했고, 독일인들은 이를 「회스 작전」이라 불렀다. 회스에 따르면 하인리히 힘러는 이송을 더 서두르기를 바랐다. 6월에는 약 1만 5,000명(영어 위키백과는 약 2만 1,000명)이 빈 근처 슈트라스호프로 돌려져 강제노동을 했고, 이들은 상대적으로 많이 살아남았다. 1 5 7
부다페스트의 유대인 구조위원회는 나치 지도자들과 협상하고 뇌물을 써서 사람을 구하려 했다. 아이히만은 4월 말 위원회 측에 연합국 트럭 1만 대와 유대인 100만 명을 맞바꾸자는 「물자와 피」 제안을 했지만, 이 제안은 영국 정부가 막았다. 위원회의 커스트네르 레죄는 아이히만, 친위대 장교 쿠르트 베허와 따로 거래해 금, 다이아몬드, 현금을 몸값으로 치르고 유대인들을 태운 화물차 35량의 열차를 6월 30일 부다페스트에서 내보냈다. 열차는 베르겐벨젠 수용소로 돌려져 7월 9일 그곳에서 1,684명이 등록되었고, 살아남은 1,670명이 8월과 12월에 스위스에 닿았다. 커스트네르는 아우슈비츠의 학살을 4~5월에 알고도 공동체 전체에 경고하지 않았다는 비난을 받았다. 이스라엘에서 열린 재판에서 1955년 1심 판사는 그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고 했고, 그가 1957년 3월 암살된 뒤 대법원은 판결의 대부분을 뒤집었다. 7 1 9
아우슈비츠 보고서와 이송 중단 (1944년 6–7월)
1944년 4월 7~11일 아우슈비츠에서 탈출한 슬로바키아 출신 수감자 루돌프 브르바와 알프레트 베츨러는 가스실의 작동을 자세히 적은 보고서를 남겼다. 이 보고서는 4월 브라티슬라바의 유대인 구조 조직을 통해 퍼졌고, 5월 초에는 호르티의 아들과 며느리도 사본을 받았다. 부다페스트에서 스위스로 전해진 요약본은 커스트네르가 비밀로 해 달라고 했는데도 6월 공개되어, 스위스에서 대규모 시위와 약 400건의 신문 기사가 쏟아졌다. BBC는 6월 16일 보고서 내용을 방송했고 『뉴욕 타임스』는 20일 보도했다. 다른 탈출자들의 보고와 함께 「아우슈비츠 의정서」로 불리게 된 이 문서들은 11월 미국 전쟁난민위원회가 전문을 발표했다. 10 1 11
6월 15일 미국 폭격기가 부다페스트 상공에 유대인 이송에 가담한 자를 처벌하겠다는 전단을 뿌렸다. 보고서를 근거로 교황 비오 12세가 6월 25일,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이 26일, 스웨덴 국왕 구스타프 5세가 30일 호르티에게 이송 중단을 호소했고, 루스벨트는 군사적 보복을 경고했다. 윈스턴 처칠은 헝가리 유대인 박해가 「아마도 세계 역사상 가장 크고 끔찍한 범죄」라고 썼다. 헝가리 가톨릭교회의 수장 세레디는 봄에 인종을 이유로 한 유대인 공격과 이송을 비판하는 성명을 내고 개종자의 면제를 요구했지만, 국내 신자들에게 이송을 공개적으로 규탄하지는 않았다. 주교들의 압력으로 6월 29일 이송 중단을 요구하는 사목 서한을 썼으나, 학살 보고를 조사해 사실이면 이송을 멈추겠다는 스토여이의 약속을 받고 서한을 발표하지 않기로 했다. 1 11 12 3
호르티는 6월 초 스토여이에게 편지를 보내 유대인이 비인도적으로 다루어진다는 보고를 들었다며 엔드레와 버키를 내무부에서 물러나게 하라고 요구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6월 26일 왕실 회의에서 이송 중단을 제안했는데도 이송은 계속되었고, 7월 초 버키가 부다페스트 유대인을 이송하려고 헌병 수천 명을 수도로 불러들이려 하자 호르티는 쿠데타를 우려해 기갑부대로 이들을 막았다. 호르티는 7월 6일(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7일) 이송 중단을 명령했고, 부다페스트 주변 도시들의 이송은 9일에야 멈추었다. 이때 지방의 유대인 공동체는 거의 모두 사라진 뒤였다. 아이히만과 헝가리 협력자들은 7월 말과 8월에도 수용소에서 몇 차례 이송을 강행했다. 약 20만 명의 부다페스트 유대인은 6월 시장의 지정으로 약 1,950채의 「노란 별 집」에 모여 살아야 했다. 3 4 1 7
루마니아의 전향과 러커토시 정부의 휴전 시도 (1944년 8–10월)
1944년 8월 23일 루마니아 국왕 미하이 1세가 이온 안토네스쿠를 해임하고 연합국과 휴전한 뒤 독일과 헝가리에 선전포고했다. 독일은 주요 석유 공급원을 잃었고, 소련·루마니아군이 1940년 헝가리가 얻은 북부 트란실바니아로 밀고 들어왔다. 8월 25일 호르티, 베틀렌, 러커토시 게저 장군이 만나 스토여이를 내보내기로 했고, 호르티는 8월 29일 러커토시를 총리로 임명했다. 베틀렌은 눈에 띄지 않으면서도 충성스러운 보수파 장군인 러커토시가 휴전에 알맞다고 보았다. 러커토시는 엔드레를 입각시키라는 페젠마이어의 요구를 거절했고, 여로시와 엔드레, 버키도 여름과 가을 사이에 자리에서 밀려났다. 내무장관 대리 호르바트 벨러는 헌병대에 어떤 이송 시도도 무력으로 막으라고 명령했다. 13 14 15 8
9월 6일 붉은군대가 카르파티아의 독일·헝가리 전선을 뚫자 러커토시는 휴전을 서둘러야 한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내각의 친독 각료들이 곧바로 페젠마이어에게 알렸고, 24시간 안에 기갑사단 다섯 개를 보내 달라는 요구를 독일이 받아들이면서 결정은 늦어졌다. 러커토시는 뒤에 「이로써 우리는 휴전을 늦추었고, 동시에 독일의 주의를 우리의 준비로 끌어들였다」며 이를 최악의 실수라고 썼다. 9월 10일 왕실 회의에서 베틀렌은 전쟁은 졌으며 즉시 휴전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장군 대다수는 휴전이 공산 체제를 부른다며 반대했다. 호르티는 여전히 영미군의 점령을 바랐으나, 이탈리아로 보낸 너더이 이슈트반 장군은 연합국 셋 모두와 휴전하든지 아무와도 하지 말라는 답을 들고 왔다. 9월 22일 호르티는 소련과 휴전해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였고, 같은 날 붉은군대가 대평원에 들어섰다. 13
9월 28일 모스크바 주재 무관을 지낸 퍼러고 가보르 장군이 이끄는 3인 대표단이 모스크바로 떠났다. 10월 1일부터 열흘 동안 이어진 협상에서 소련 측은 무조건 항복,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 1937년 국경 뒤로의 철수, 붉은군대의 통과를 요구했고 북부 트란실바니아는 루마니아에 돌려준다고 했다. 마침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회담하던 처칠과 앤서니 이든도 소련의 조건을 지지했다. 호르티는 10월 9일 조건을 받아들였고, 11일 퍼러고와 소련 외무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예비 휴전에 서명했다. 같은 날 페젠마이어는 살러시를 만나 독일이 호르티를 몰아내기로 했으니 화살십자당은 쿠데타를 준비하라고 전했다. 13 16
10월 15일: 휴전 선언, 판처파우스트 작전, 화살십자당 집권
호르티가 소련과 비밀 협상을 한다는 것을 안 히틀러는 친위대 특공대장 오토 스코르체니를 헝가리로 보냈다. 10월 15일 아침 스코르체니의 부대는 티토의 밀사를 만나게 해 주겠다며 호르티의 아들을 도나우 항만청 사무실로 꾀어내 총격전 끝에 붙잡았고, 카펫에 말아 비행기로 빈에 보낸 뒤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 가두었다. 그날 오전 왕실 회의에서 호르티는 휴전을 요청했다고 밝혔고, 아들의 납치를 모른다고 잡아떼는 페젠마이어 앞에 현장에서 주운 독일 탄피를 내던졌다. 낮 1시 무렵 라디오는 독일이 전쟁에서 졌으며 「적들에게 휴전을 요청하고 적대 행위를 멈춘다」는 섭정의 선언을 세 번 방송했다. 이미 11일에 예비 휴전에 서명했다는 사실은 빠졌고, 러커토시의 요구로 「오늘부터 헝가리는 독일과 전쟁 상태에 있다」는 문장도 지워져 있었다. 17 16 13
참모본부는 휴전 명령을 부대에 내려보내지 않았고, 오후 3시 참모총장 뵈뢰시 야노시는 섭정의 말은 휴전 협상을 시작한다는 뜻일 뿐이니 싸움을 계속하라는 「해명」을 보냈다. 화살십자당은 독일의 도움으로 방송국을 장악해 살러시가 스스로를 「민족 지도자」라 부르며 무장한 국민에게 전쟁을 계속하라고 명령하는 성명을 내보냈고, 독일 전차가 다리와 우체국 등 수도의 요지를 차지했다. 스코르체니는 티거 전차 네 대를 앞세워 왕궁 언덕에 다가갔고, 호르티 곁에는 경비병 약 300명만 남았다. 16일 새벽 페젠마이어와 러커토시가 아들의 목숨을 보장하겠다며 12분 안에 항복하라고 하자, 호르티는 휴전 선언을 철회하고 살러시를 총리로 임명하는 퇴위 문서에 서명했다. 그는 뒤에 「나는 사임하지도 살러시를 총리로 임명하지도 않았다. 내 서명을 아들의 목숨과 맞바꾸었을 뿐이다」라고 썼다. 호르티는 독일 바일하임 근처의 성에 갇혔고 아들은 종전 때까지 수용소에 있었다. 13 16 17
섭정의 뜻을 따른 장교는 드물었다. 8월부터 제1군 사령관이던 미클로시 벨러 상급대장은 추축국 이탈을 지지했는데, 10월 16일 독일군 사령부로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자 체포를 의심해 부관과 부사관 둘을 데리고 전선을 넘어 소련군에 투항했다. 17일 아침 소련군 사령부가 있던 레스코에서 그는 라디오로 제1군 지휘관들에게 부대를 이끌고 넘어오라고 호소했지만, 이에 응한 사람은 연대장 한 명뿐이었고 그마저 독일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호르티를 도우려던 제2군 사령관 달노키 베레시 러요시는 독일군에 체포되었다. 소련 측과의 대항 정부 협상도 결실이 없었다. 미클로시는 12월 21일 데브레첸에서 열린 임시국민의회에서 임시국민정부의 총리로 뽑혔다. 18 16 13
10월 16일 살러시의 「국민단결정부」가 들어섰다. 의회는 3인 섭정회의를 세웠고, 살러시는 11월 초 왕궁에서 성 이슈트반 왕관 앞에 「민족 지도자」로 선서해 국가원수와 정부 수반을 겸했다. 하원 의원 370명 가운데 55명만 선서식에 나왔지만, 공무원과 장교단 대부분은 새 체제를 받아들였다. 장관 16명 가운데 절반이 화살십자당원이었다. 살러시는 독일에 내는 월 분담금을 2억 펭괴에서 3억 펭괴로 올렸고, 전 총리 칼러이를 독일에 넘겨 수용소에 가두게 했다. 정권은 계엄령과 군사재판으로 「위험 분자」를 처형했고, 가축과 기계, 원자재를 독일로 실어 보냈으며, 젊은이와 노인까지 징집해 붉은군대와의 가망 없는 싸움에 내보냈다. 페젠마이어조차 뒤에 살러시를 「으스대다가 굽실거리는 어릿광대」라고 평했다. 19 20
화살십자당 테러와 구조 활동 (1944년 10월–1945년 1월)
10월 20일 화살십자당 민병대가 강제노동을 위해 유대인을 잡아들이기 시작했고, 이튿날 정부는 유대인 남녀에게 강제노동 의무를 부과했다. 수만 명이 붙잡혀 처음에는 수도 주변에서 대전차호를 팠다. 11월 6일부터는 이들을 약 160km 서쪽 오스트리아 국경의 헤제시헐롬까지 걸어서 보냈는데, 많은 사람이 도중에 죽거나 총에 맞았다. 살아서 도착한 사람들은 「대여」라는 명목으로 독일에 넘겨졌다. 11~12월에 수만 명의 헝가리 유대인이 독일에 넘겨져 방어 진지를 파다가 수천 명이 죽었고, 많은 사람이 1945년 봄의 죽음의 행진에서 또 목숨을 잃었다. 영어 위키백과의 화살십자당 문서는 화살십자당 집권기에 8만 명이 헝가리에서 오스트리아의 수용소로 이송되었다고 적는다. 7 1 20
1944년 가을 부다페스트의 화살십자당원은 4,000명을 넘지 않았지만, 이들은 100만 명의 도시를 공포에 몰아넣었다. 이들은 거리에서 유대인을 잡아 도나우강 강변으로 끌고 가 신발을 벗기고 쏘아 시신이 강물에 떨어지게 했으며, 총알을 아끼려고 세 사람을 철사로 묶어 가운데 사람만 쏘기도 했다. 독일군 지휘관 카를 페퍼빌덴브루흐는 부하들에게 학살에 가담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페젠마이어는 화살십자당을 최대한 도우라는 지시를 받았다. 살러시는 중립국 외교관들의 눈을 의식해 살해를 더 조용히 하라고 했을 뿐이다. 희생자 수는 엇갈린다. 영어 위키백과는 1944년 11월~1945년 2월 도나우강 강변에서 1만~1만 5,000명이 총살되었다고 적고, 역사가 웅가리 크리스티안은 포위전 중 화살십자당의 대량 처형 희생자를 1만 5,000명으로 추산했으며, 화살십자당의 살해를 많게는 3만 8,000명까지 보는 추계도 있다. 2005년 강변에 세워진 「도나우 강변의 신발」이 이들을 기린다. 20 1 21 22
화살십자당 정권은 부다페스트에 게토 두 곳을 만들었다. 중립국 보호장을 가진 유대인은 우이리포트바로시의 「국제 게토」에 모였는데, 스위스가 7,800장, 스웨덴이 4,500장, 바티칸·포르투갈·스페인이 합쳐 3,300장의 보호장을 낼 수 있었다. 공식 거주자는 1만 5,600명이었지만 위조 서류를 가진 사람 등 수천 명이 더 몸을 숨겼다. 11월 29일의 정부 법령으로 도하니 거리 회당이 있는 옛 유대인 구역에 울타리를 친 큰 게토가 만들어졌고, 12월에 봉쇄된 이곳에 약 7만 명이 갇혔다. 음식 반입이 막히고 시신이 거리에 쌓였으며 장티푸스가 돌았다. 약 3,000명이 그 안에서 죽었고, 두 게토 모두 화살십자당원의 습격과 처형에 시달렸다. 살러시는 12월 국제적십자의 원조 제안을 게토에도 구호품이 간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1 7 23 19
중립국 외교관들은 보호 문서와 은신처로 사람을 구했다. 미국 전쟁난민위원회가 추천한 스웨덴 외교관 라울 발렌베리는 7월 9일 부다페스트에 와서, 소지자를 귀국을 기다리는 스웨덴 국민으로 보는 「보호 여권」을 발급하고 건물 32채를 빌려 스웨덴 치외법권 시설로 선포해 약 1만 명을 보호했다. 그가 구한 사람이 10만 명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역사가들은 과장으로 보며, 야드 바솀은 그가 보호 문서를 준 사람을 약 4,500명으로 추산한다. 스위스 부영사 카를 루츠는 8,000명분의 이민 허가를 가족 단위로 해석해 수만 장의 보호 편지를 내주었고, 76채의 「안전 가옥」을 스위스 공사관 부속 시설로 선포했다. 그 가운데 「유리 집」에만 약 3,000명이 피신했고, 페젠마이어는 11월 루츠를 암살하게 해 달라고 베를린에 요청했다. 스페인 총영사를 사칭한 이탈리아인 사업가 조르조 페를라스카는 5,218명을 구했다. 1945년 1월 큰 게토를 없애려던 계획이 저지된 공을 두고는 발렌베리 쪽 증언과 페를라스카의 증언이 엇갈린다. 11 7 24 25 23
저항과 부다페스트 포위 (1944년 10월–1945년 2월)
루마니아의 전향 뒤 로디온 말리놉스키의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과 표도르 톨부힌의 제3우크라이나 전선군이 헝가리로 밀고 들어왔다. 10월 6~29일의 데브레첸 작전에서 양측은 「전쟁에서 가장 격렬한 전차전 가운데 하나」를 벌였고, 데브레첸은 10월 19~20일 소련 제27군과 함께 공격한 루마니아 사단들에 점령되었다. 10월 28일 스탈린은 말리놉스키에게 닷새 안에 부다페스트를 점령하라고 직접 명령했고, 29일 시작된 공세는 11월 7일 도심에서 약 20km 떨어진 동쪽 교외에 이르렀지만 도시를 빼앗지는 못했다. 12월에 베오그라드를 해방한 톨부힌의 군대가 도나우강 서쪽에서 올라오면서 남북 양쪽에서 수도를 에워싸는 공격이 가능해졌다. 그사이 12월 21일 데브레첸에서 임시국민의회가 열려 새 정부를 세웠다. 26 21 27 18
10월 11일 러커토시 정부의 요구로 풀려난 버이치질린스키는 11월 9일 부다페스트의 한 공장에서 다른 정당 지도자들과 「헝가리 민족봉기 해방위원회」를 결성하고 의장이 되었다. 위원회는 소련군과 협력해 독일군을 몰아내고 화살십자당 지배를 무너뜨리는 것을 목표로 내걸고 10일 성명을 냈으며, 퇴역 중장 키시 야노시가 군사 참모부를 이끌었다. 버이치질린스키는 공산당의 러이크 라슬로와 만나 소련의 도움을 구했고, 공산당이 유격전을 맡고 키시는 붉은군대가 다가오면 봉기할 무장 부대를 준비하기로 했다. 그러나 밀고로 11월 22일 회합 장소가 습격되어 지도부가 체포되었고, 버이치질린스키도 그날 밤 붙잡혔다. 화살십자당 정권의 특별재판소는 12월 6일 그와 장교 세 명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장교들은 12월 8일, 버이치질린스키는 12월 24일 쇼프론쾨히더 감옥에서 처형되었다. 6 28
12월 26일 소련군이 빈으로 가는 도로를 끊으면서 포위가 완성되었다. 살러시는 이미 12월 초 수도를 떠났다. 히틀러는 철수를 허락하지 않고 부다페스트를 끝까지 지킬 「요새」로 선포했으며, 무장친위대 제9산악군단장 카를 페퍼빌덴브루흐가 방어를 지휘했다. 포위망 안에는 독일군 약 3만 3,000명과 헝가리군 약 3만 7,000명(다른 집계는 약 7만 9,000명)과 함께 8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갇혔다. 12월 29일 항복을 권하러 온 소련 군사 사절 두 명이 숨졌는데, 경위는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독일군의 세 차례 구원 작전은 수도에서 20~25km 앞에서 멈추었다. 1월 17일 히틀러가 페스트 철수를 허락했고, 철수는 18일 아침에 끝났으며 독일군은 사슬다리를 비롯한 다리들을 폭파했다. 소련군은 국제 게토를 1월 16일, 큰 게토를 17~18일 해방했고, 부다페스트에서 약 11만 9,000명의 유대인이 살아남았다. 21 29 27 7 1
1월 17일 발렌베리는 간첩 혐의로 소련 방첩기관 스메르시에 붙잡혀 사라졌다. 소련은 1957년 그가 1947년 모스크바 루뱐카 감옥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밝혔지만, 사인과 날짜는 지금까지 다투어진다. 부다의 겔레르트 언덕이 2월 11일 함락되자, 페퍼빌덴브루흐는 히틀러의 금지를 어기고 그날 밤 독일·헝가리 병사 약 2만 8,000명과 민간인들을 이끌고 탈출을 시도했다. 소련군의 포격으로 수천 명이 죽었고, 5,000~1만 명이 부다페스트 북서쪽 숲에 이르렀지만 독일군 전선까지 닿은 병사는 600~700명뿐이었다. 페퍼빌덴브루흐는 붙잡혔고, 남은 수비대는 2월 13일 항복했다. 108일의 싸움에서 소련군의 사상자는 32만 82명이었고, 웅가리는 포위 중 민간인 약 3만 8,000명이 죽었다고 추산한다. 건물의 80% 이상이 부서지거나 손상되었고 도나우강의 다리는 모두 무너졌다. 11 21 30 31
결과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헝가리 통치하에 있던 약 82만 5,000명의 유대인 가운데 약 55만 명이 홀로코스트로 죽었다고 보며(역사가 랜돌프 브레이엄은 56만 4,000여 명으로 추산), 그 대부분인 약 50만 명이 독일 점령 뒤 한 해 사이에 살해되었다. 부다페스트는 폐허가 되었고, 데브레첸 임시정부와 소련군 점령 아래 전후 헝가리가 시작되었다.
연표와 지도
- 11944.03.18클레스하임 회담
호르티가 독일군 진주를 받아들이는 의정서에 서명했다.
- 1944.03.19마르가레테 작전
독일군이 거의 저항 없이 헝가리를 점령했다.
- 1944.03.23스토여이 정부
베를린 주재 대사 스토여이가 총리가 되었고 여로시·엔드레·버키가 내무부를 맡았다.
- 1944.04.05노란 별
6세 이상의 유대인에게 노란 다윗의 별 착용이 의무화되었다.
- 21944.05.15대량 이송 시작
7월 9일까지 약 43만 7,000명이 열차 147편으로 이송되었다.
- 1944.06.25국제적 호소
교황 비오 12세, 루스벨트(26일), 구스타프 5세(30일)가 이송 중단을 호소했다.
- 1944.06.30커스트네르 열차 출발
몸값을 치른 유대인 1,600여 명이 부다페스트를 떠나 뒤에 스위스에 닿았다.
- 1944.07.06이송 중단 명령
호르티가 이송 중단을 명령했고 이송은 9일 멈추었다.
- 1944.07.09발렌베리 도착
스웨덴 공사관에 부임해 보호 여권을 발급하기 시작했다.
- 1944.08.23루마니아의 전향
루마니아가 연합국과 휴전하고 독일과 헝가리에 선전포고했다.
- 1944.08.29러커토시 정부
호르티가 스토여이를 해임하고 휴전을 준비할 러커토시를 앉혔다.
- 31944.10.06데브레첸 작전
29일까지 이어진 전차전 끝에 데브레첸이 소련·루마니아군에 넘어갔다.
- 41944.10.11모스크바 예비 휴전
퍼러고와 몰로토프가 서명했다.
- 51944.10.15휴전 선언과 판처파우스트 작전
호르티의 아들이 납치되고 화살십자당이 방송국을 장악했다.
- 1944.10.16살러시 정부
호르티가 강압 속에 퇴위하고 살러시를 총리로 임명하는 문서에 서명했다.
- 61944.10.17미클로시 벨러의 호소
소련군에 넘어간 제1군 사령관이 부대의 투항을 호소했다.
- 71944.11.06헤제시헐롬 도보 이송
부다페스트 유대인이 오스트리아 국경까지 걸어서 끌려가 독일에 넘겨졌다.
- 1944.11.09민족봉기 해방위원회
버이치질린스키를 의장으로 지하 저항 조직이 결성되었다.
- 1944.11.29부다페스트 게토
법령으로 옛 유대인 구역에 큰 게토가 만들어졌다.
- 81944.12.24버이치질린스키 처형
해방위원회 의장이 화살십자당 재판 끝에 처형되었다.
- 1944.12.26부다페스트 포위
빈으로 가는 도로가 끊겨 포위가 완성되었다.
- 1945.01.18페스트 함락
수비대가 부다로 물러나며 다리를 폭파했고 게토들이 해방되었다.
- 1945.02.13부다 함락
11일 밤의 탈출 시도가 실패한 뒤 남은 수비대가 항복했다.
관련 인물 37명
지도부4
점령 뒤에도 섭정 자리를 지켰고, 7월 초 유대인 이송을 멈추었으며, 10월 15일 휴전을 선언했다가 아들이 납치되자 살러시에게 권력을 넘기는 문서에 서명했다.
총리(1944.3–8)스토여이 되메1883–1946독일의 요구로 총리가 되어 화살십자당을 합법화하고 유대인 이송에 협력했으며, 세레디의 사목 서한 발표를 막았다.
총리(1944.8–10)러커토시 게저1890–1967이송 재개를 막고 소련과의 휴전을 준비했으나, 10월 16일 호르티에게 항복과 퇴위를 받아들이게 했다.
화살십자당 지도자, 「민족 지도자」살러시 페렌츠1897–1946판처파우스트 작전 뒤 「국민단결정부」를 세워 유대인 강제노동과 도보 이송을 재개했고, 12월 초 수도를 떠났다.
집행 · 지휘7
헝가리 정부에 유대인 이송을 압박하고 이송 인원을 베를린에 보고했으며, 10월 호르티를 구금하고 살러시의 집권을 도왔다.
친위대 특별작전대 지휘관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부다페스트에 본부를 두고 유대인 평의회를 세우게 했으며 헝가리 관리들과 함께 지방 유대인의 아우슈비츠 이송을 조직했다.
내무장관(1944.3–8)여로시 언도르1896–1946국가경찰과 헌병대를 관장하며 차관 엔드레·버키와 함께 이송을 지휘했다.
내무부 차관엔드레 라슬로1895–1946게토화와 이송의 전권을 받아 아이히만을 도왔고, 호르티가 6월 초 해임을 요구했다.
내무부 차관버키 라슬로1898–19464월 4일 게토화와 이송 방침을 정한 회의를 주재했고, 7월 초 헌병대를 수도에 들여 부다페스트 유대인을 이송하려다 저지되었다.
독일군 원수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1881–1954마르가레테 작전을 지휘하고 점령이 계획대로 진행된다고 보고했다.
친위대 특공대장오토 스코르체니1908–197510월 15일 호르티의 아들을 납치하고 전차를 앞세워 왕궁 언덕으로 진격했다.
참여15
헝가리 점령을 명령하고 클레스하임에서 호르티의 동의를 받아 냈으며, 부다페스트를 끝까지 지킬 「요새」로 선포했다.
친위대 전국지도자하인리히 힘러1900–1945회스에 따르면 헝가리 유대인의 이송을 더 서두르기를 바랐다.
독일 외무장관요아힘 폰 리벤트로프1893–1946클레스하임에서 호르티를 히틀러에게 다시 불러들였고, 페젠마이어에게서 이송 인원 보고를 받았다.
참모총장솜버테이이 페렌츠1887–1946클레스하임에서 호르티에게 의정서 서명을 권했고 독일군에 저항하지 말라고 명령했으나, 점령 뒤 해임되었다.
전 총리, 보수파 원로베틀렌 이슈트반1874–1946호르티에게 퇴위를 권한 뒤 몸을 숨겼고, 러커토시를 총리로 추천하고 즉시 휴전을 주장했다.
헝가리 쇄신당 지도자임레디 벨러1891–1946독일이 총리로 원했으나 호르티가 거부했고, 그의 당 사람들이 스토여이 내각에 들어갔다.
수좌대주교세레디 유스티니안1884–1945개종 유대인의 면제를 요구하고 이송을 비판했으나, 6월 말 스토여이의 약속을 받고 사목 서한을 발표하지 않았다.
부다페스트 유대인 구조위원회 위원커스트네르 레죄1906–1957아이히만·베허와 협상해 1,600여 명을 태운 열차를 스위스로 내보냈고, 전후 이스라엘에서 협력 논란에 휘말렸다.
미국 대통령프랭클린 D. 루스벨트1882–19456월 26일 호르티에게 이송 중단을 요구하며 군사적 보복을 경고했다.
루마니아 국왕미하이 1세1921–20178월 23일 안토네스쿠를 해임하고 독일과 헝가리에 선전포고했다.
소련 외무인민위원뱌체슬라프 몰로토프1890–198610월 11일 퍼러고와 예비 휴전에 서명했다.
소련 지도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10월 28일 말리놉스키에게 닷새 안에 부다페스트를 점령하라고 명령했다.
부다페스트 방어 사령관카를 페퍼빌덴브루흐1888–1971항복 권고를 거부하고 포위전을 지휘했으며, 2월 11일 탈출을 이끌다 소련군에 붙잡혔다.
스웨덴 특사라울 발렌베리1912–?보호 여권과 스웨덴 보호 건물로 부다페스트 유대인을 구했고, 1945년 1월 17일 스메르시에 붙잡혀 사라졌다.
스위스 부영사카를 루츠1895–1975보호 편지 수만 장과 76채의 안전 가옥으로 유대인을 보호했다.
반대 · 저항5
3월 19일 체포에 총으로 맞섰고, 풀려난 뒤 해방위원회를 이끌다 12월 24일 처형되었다.
공산당 지하 지도자러이크 라슬로1909–1949버이치질린스키와 만나 공산당이 유격전을 맡기로 합의했다.
제1군 사령관미클로시 벨러1890–194810월 16일 소련군에 투항해 부대의 투항을 호소했고, 12월 데브레첸 임시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제2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로디온 말리놉스키1898–1967데브레첸 작전과 부다페스트 공세를 지휘했다.
제3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표도르 톨부힌1894–1949베오그라드 해방 뒤 도나우강 서쪽에서 부다페스트 포위에 가담했다.
대상 · 피해4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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