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제2공화국의 성개혁과 프랑코 체제의 반동 (1931~1941)
스페인 제2공화국은 어떻게 몇 해 사이에 여성 참정권과 이혼권, 그리고 카탈루냐의 낙태 합법화까지 이루었으며, 그 성개혁은 무엇을 끝내 다루지 못했는가? 「미래의 여성」으로 길러진 일데가르트 로드리게스는 왜 어머니의 손에 죽었고, 프랑코 체제는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되돌렸는가?
1931년 공화국 헌법은 남녀평등과 이혼권을 명문화했고, 의회는 캄포아모르와 켄트의 토론 끝에 여성 참정권을 의결했다. 1932년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이라는 이혼법이 생겼고, 같은 해 마라뇬을 의장, 열일곱 살의 일데가르트 로드리게스를 서기로 한 스페인 성개혁 연맹이 세워졌다. 일데가르트는 1933년 어머니에게 살해되었다. 1933년 공화국 의회는 「위험 상태」를 다스리는 부랑자·불량배법을 만들었다. 내전과 혁명 속에서 아나키스트 여성들은 「자유여성」을 세웠고, 카탈루냐 자치정부는 1936년 12월 마르티 이바녜스가 기초한 법령으로 낙태를 합법화했다.
1931년 헌법: 남녀평등, 여성 참정권, 이혼권
1931년 4월 수립된 스페인 제2공화국의 헌법은 남녀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을 처음으로 최고 규범에 새겼다. 제25조는 성별이 법적 특권의 근거가 될 수 없다고 했고, 제40조는 모든 시민이 성별과 상관없이 공직에 오를 수 있게 했으며, 제46조는 국가가 여성의 노동을 규율하고 모성을 보호할 의무를 정했다. 제헌의회에서 이 조항들을 밀어붙인 사람 가운데 하나가 급진당 의원 클라라 캄포아모르였다. 그는 성별에 따른 차별 금지, 혼인 안팎에서 태어난 자녀의 법적 평등, 이혼, 보통선거권을 요구했고, 여성 참정권만 빼고 모두 관철했다. 1 2
여성 참정권을 두고는 공화파 안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급진 공화파 정당들은 여성이 교회의 영향을 크게 받아 우파에 투표할 것이라며 반대했고, 급진사회당은 여성 참정권에 반대하는 의원 빅토리아 켄트를 캄포아모르와 맞세웠다. 1931년 10월 1일의 마지막 토론은 큰 사건이 되었고, 캄포아모르가 이긴 것으로 평가되었다. 여성 참정권을 담은 제36조는 161 대 121로 통과되었는데, 인달레시오 프리에토 같은 예외를 빼면 사회노동당 대부분과 우파의 상당수가 찬성했다. 훗날 성개혁 운동의 신동이 될 일데가르트 로드리게스도 켄트처럼 스페인 여성이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며 여성 참정권을 지지하지 않았다. 캄포아모르는 그해 11월 여성공화연합을 세웠고, 여성은 1933년 총선에서 처음 투표했다. 2 3
헌법은 이혼권도 처음으로 명문화했다. 그때까지 1889년 민법은 혼인이 배우자 한쪽의 죽음으로만 해소된다고 정해 두고 있었다. 제헌 과정에서 농민 소수파와 바스크·나바라 소수파의 가톨릭 우파는 혼인이 해소될 수 없는 성사라며 이혼 조항에 반대했지만, 제43조는 다음과 같이 확정되었다. 4
제43조. 가족은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 혼인은 남녀 양성의 권리 평등에 기초하며, 상호 합의에 의하여, 또는 정당한 사유를 들어 어느 한쪽 배우자가 청구하면 해소될 수 있다. 4
Artículo 43. La familia está bajo la salvaguardia especial del Estado. El matrimonio se funda en la igualdad de derechos para uno y otro sexo, y podrá disolverse por mutuo disenso o a petición de cualquiera de los cónyuges con alegación en este caso de justa causa. 4
1932년 이혼법과 민사혼
헌법 제43조를 구체화한 스페인 첫 이혼법은 법무장관 알바로 데 알보르노스가 의회에 냈다. 가톨릭교회와 가톨릭·보수 정당들의 반대에도 이혼법은 1932년 2월 25일 260 대 23으로 의결되어 3월 2일 공포되고 3월 11일 관보에 실렸다. 캄포아모르도 이 법을 만드는 데 깊이 관여했다. 이혼법은 부부 합의에 의한 이혼과 정당한 사유에 의한 한쪽의 청구를 함께 인정하고 남녀를 대등하게 다루어, 당시 유럽에서 가장 진보적인 법으로 꼽혔다. 공화국은 같은 시기 민사혼법도 만들어, 교회 혼인만이 효력을 갖던 질서를 바꾸었다. 5 4 2
관보에 다시 실린 1932년 3월 12일자 정정본에서 첫 조항들은 다음과 같다. 6
제1조. 민사 법원의 확정판결로 선고된 이혼은, 혼인이 어떤 형식으로 언제 이루어졌든 그 혼인을 해소한다.
제2조. 부부 양쪽이 합의하여 청구하거나, 한쪽이 이 법에 정한 사유 가운데 하나로 청구하면 이혼할 수 있으며, 언제나 이 법의 규정을 따른다.
제3조. 이혼 사유는 다음과 같다. 1. 이를 주장하는 배우자가 동의하거나 조장하지 않은 간통. (…) 12. 자유로운 합의에 따라 3년 동안 실제로 따로 거주한 별거. 6
Artículo 1.° El divorcio decretado por sentencia firme por los Tribunales civiles disuelve el matrimonio, cualesquiera que hubieran sido la forma y la fecha de su celebración.
Artículo 2.° Habrá lugar al divorcio, cuando lo pidan ambos cónyuges de común acuerdo, o uno de ellos por alguna de las causas determinadas en esta Ley, siempre con sujeción a lo que en ella se dispone.
Artículo 3.° Son causas de divorcio: 1.ª El adulterio no consentido o no facilitado por el cónyuge que lo alegue. (…) 12.ª La separación de hecho y en distinto domicilio, libremente consentida durante tres años. 6
스페인의 성과학과 스페인 성개혁 연맹 (1932)
스페인에서 산아 제한과 성의 해방을 처음 내건 것은 아나키스트 노동운동의 신맬서스주의였다. 1900년 파리에서 카탈루냐 아나키스트 프란시스코 페레르 과르디아의 집에 폴 로뱅, 찰스 드라이스데일, 에마 골드만 등이 모여 「의식적이고 자유로운 모성」을 내건 인류 재생 연맹의 국제 연합을 세웠고, 1904년 바르셀로나에 그 스페인 지부가 생겼다. 신맬서스주의는 가난한 대가족의 비참을 덜고 여성을 해방하는 수단으로 피임을 퍼뜨리려 했고, 우생학과 깊이 얽혀 있었다. 7
공화국 시기 성개혁은 의학의 이름으로 제도권에 들어왔다. 1932년 세계 성개혁 연맹의 스페인 지부로 「과학적 기초 위의 스페인 성개혁 연맹」이 늦게나마 세워졌고, 내분비학자 그레고리오 마라뇬이 의장, 열일곱 살의 일데가르트 로드리게스가 서기를 맡았다. 그러나 스페인 지부는 각국 지부 가운데 사회적으로 가장 보수적이어서 동성애를 강령에 넣지 않은 몇 안 되는 곳이었고, 동성애는 내전 때까지 금기로 남았다. 8 9
연맹을 이끈 마라뇬은 가톨릭 가치와 성과학 사이에 선 인물이었다. 그는 1924년 「돈 후안의 생물학을 위한 노트」와 1926년 『성생활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에서 돈 후안주의를 남성다움의 원형으로 보는 신화를 깨뜨렸지만, 공화국 시기에는 인공 피임과 국가에 의한 어린이 성교육에 반대하며 성교육은 부모의 몫이라고 했다. 그는 국제 우생학 흐름에 호응해 1933년 제1회 스페인 우생학 대회에 참여했는데, 그의 우생학은 높은 영아 사망률에서 출발했고 결정은 교육을 거쳐 개인의 양심에 맡겼다. 사회노동당의 형법학자 루이스 히메네스 데 아수아는 1928년 『사랑할 자유와 죽을 권리』에서 우생학·안락사·내분비학을 다뤘고, 1931년 헌법 기초 위원회를 이끌었다. 10 11
일데가르트 로드리게스: 「미래의 여성」이라는 실험
스페인 성개혁 연맹의 서기 일데가르트 로드리게스는 어머니 아우로라 로드리게스 카르바예이라가 「미래 여성의 모범」으로 계획해 낳은 아이였다. 아우로라는 페롤의 부유한 자유주의자 집안에서 정규 교육 대신 아버지 서재의 공상적 사회주의 책을 읽으며 자랐다. 열여섯 살에 언니가 맡긴 사생아 조카 페피토 아리올라를 키워 음악 신동으로 만들었지만, 1899년 언니가 아이를 데려가 버렸다. 1914년 1월 아버지가 죽자 그는 페롤에서 자신의 생각을 구현하고 여성의 권리를 지킬 아이를 직접 낳아 길러 내기로 했다. 아이에게 결코 권리를 주장하지 못할 아버지로 레리다 출신의 군종 신부 알베르토 팔라스를 골라 「생리적 협력자」로 삼았고, 임신을 확인하자 마드리드로 옮겨 1914년 12월 9일 후아넬로 거리 3번지에서 딸을 낳았다. 임신 중에는 태아에 피가 고르게 돌도록 한 시간마다 자명종을 맞춰 잠든 자세를 바꾸었다. 12 13 3
일데가르트는 어머니의 엄격한 통제 아래 자랐다. 무신론자였던 어머니는 출생 등록에도 반대했지만 1915년 3월 23일 세례를 받게 하고 4월 29일에야 등록했다. 아이는 두 살에 글을 읽고 세 살에 첫 편지를 썼으며 네 살 전에 타자를 쳤고, 열 살에 독일어·프랑스어·영어를 하고 열한 살에 여성주의와 여성의 성에 관한 강연을 했다. 아버지인 신부는 아이가 네 살이 될 때까지 찾아왔으나 어머니가 그의 영향을 의심해 막았다. 1928년 6월 열세 살에 마드리드 대학 법학부에 들어간 일데가르트는 우등으로 학위를 받아 스페인 최연소 변호사가 되었고, 철학·문학과 의학을 함께 공부했다. 3 13
일데가르트는 열네 살에 어머니처럼 사회노동당과 노동총동맹에 들어가 사회주의 청년단 부의장을 지냈다. 당원들 사이에 지지가 넓었지만 지도부는 그를 경계했다. 1932년 일간지 《라 리베르타드》에 당이 반동적 후보와 손잡으려 한다고 비판하는 편지를 실었다가 당에서 쫓겨났고, 연방공화당으로 옮겨 「사회주의 벼슬아치들」을 공격했다. 그는 점차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며 아나키즘에 다가갔다. 열네 살부터 《엘 소시알리스타》, 《라 티에라》, 《에스투디오스》, 《오르토》 같은 신문·잡지에 글을 썼고, 리세움 여성 클럽과 마드리드 아테네오의 회원이었다. 13 3
일데가르트는 당대 스페인 성개혁 운동에서 가장 활발한 인물이었다. 피임, 성매매, 우생학에 관해 쓰며 성을 개인과 사회 해방의 핵심으로 보았고, 사랑과 생식을 법과 종교의 통제에서 떼어 내야 하며 학교에서 과학적 성교육을 하고 여성이 산아 제한 수단을 얻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의 저작을 옮기기도 한 해블록 엘리스는 그를 「붉은 처녀」라 불렀고, 그는 마그누스 히르슈펠트, 노먼 헤어, 요나탄 레운바크, 마거릿 생어와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1932년 스페인 성개혁 연맹이 세워질 때 반대 없이 서기로 뽑혔다. 『우생학의 문제』(1930), 『자식 수의 제한: 깨어 있는 프롤레타리아의 의무』(1930), 『청년의 성적 반항』(1931) 등 책 16권과 글 150편 넘게 남겼고, 『피임 예방법』(1931)은 마드리드에서만 첫 주에 8000부가 팔렸다. 그는 마드리드를 찾은 H. G. 웰스를 오래 안내했고, 어머니에게서 떼어 놓고 싶어 한 웰스는 그를 런던으로 데려가 비서로 삼겠다고 했으나 그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3 13
웰스의 제안과 딸의 독립 시도는 아우로라의 피해망상을 키웠다. 어머니는 딸을 여성의 처지를 위해 낳았지 「사회주의자와 코뮌주의자들의 일」을 하라고 낳은 것이 아니라고 불평했고, 딸이 떠나려 할 때마다 자살하겠다고 위협했다. 1933년 6월 9일 밤, 아우로라는 하녀를 개 산책에 내보낸 뒤 잠든 딸에게 네 발을 쏘았다. 세 발은 머리에, 한 발은 심장에 맞았다. 젊은 사회주의 작가 아벨 벨리야와의 연애설 같은 소문이 돌았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깊이 무너진 것이 가장 그럴듯한 이유로 여겨진다. 아우로라는 「조각가는 작품의 아주 작은 흠을 발견하면 그것을 부순다」고 말했다. 3 13
마드리드에서 열린 재판에서 아우로라는 카탈루냐 변호사 안토니오 비예나, 웰스, 엘리스가 딸을 스페인 밖으로 빼내 첩보 기관에 쓰려는 국제 음모의 하수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26년 8개월 10일의 징역을 선고받자 26년을 더 살게 되었다며 정신병원에 갇히지 않은 것을 기뻐했고, 딸을 죽인 것을 뉘우치지 않고 다시라도 그러겠다고 했다. 벤타스 여자 교도소를 거쳐 1935년 편집증과 조현병 진단을 받고 시엠포수엘로스 정신병원으로 옮겨졌으며, 1941년부터는 정신과 의사들과 말을 하지 않았다. 내전 중 국민파에 처형되었다는 믿음과 달리, 1977년 발견된 진료 기록은 그가 1955년 12월 28일 그곳에서 암으로 숨져 공동묘지에 묻혔음을 보여 주었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에두아르도 데 구스만의 『피의 새벽』(1972), 영화 〈나의 딸 일데가르트〉(1977)와 〈붉은 처녀〉(2024)로 거듭 그려졌다. 3 12 13
아나키즘과 성: 「자유여성」과 성매매 「해방소」
전국노동총연맹(CNT)은 처음부터 남녀평등을 내세웠지만, 많은 여성 활동가는 자신들의 역량과 투쟁을 펼칠 별도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1936년 4월 의사 암파로 포치 이 가스콘, 시인이자 노조 활동가 루시아 산체스 사오르닐, 변호사 메르세데스 코마포사다가 잡지 《자유여성》을 창간해 노동계급 여성의 해방을 내걸었고, 첫 호는 5월에 나왔다. 1937년 8월 20일 발렌시아에서 열린 첫 대회는 자유여성 연맹을 자주관리와 연방주의에 선 아나키스트 운동의 「넷째 팔」로 규정했고, 연맹은 1938년 10월 회원이 2만 명을 넘었다. 포치에게 그 목표는 노예 상태와 무지, 그리고 성적 굴종에서 여성을 해방하는 것이었다. 14 15
자유여성 연맹은 성매매에 단호히 맞섰다. 바르셀로나에서 연맹은 「일하는 여성의 집」을 세우고 성매매 여성을 사회로 되돌리는 「성매매 해방소」 운동을 시작했다. 그 목표는 성매매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경제적으로 독립시키고 깊은 사회적·도덕적 혁명을 이뤄 성매매를 뿌리 뽑는 것이었고, 회원들은 같은 계급의 남성 동지들이 사창가를 드나드는 것을 개탄했다. 아나키스트 의사 펠릭스 마르티 이바녜스도 카탈루냐 자치정부의 보건·사회 지원 국장으로서 성매매 여성을 위한 해방소, 청년을 위한 성 정보 센터, 성과학 연구소를 계획했다. 그의 혁명적 도덕주의는 1937년 『여성에게 보내는 세 가지 메시지』에서 전선의 민병대원을 유혹하는 여성들에게 「물러서라!」고 외친 대목에 잘 드러난다. 14 1 16
1936~1937년 혁명과 카탈루냐 낙태 합법화 법령
공화국 정부는 낙태를 범죄로 남겨 두었지만, 내전과 혁명 속의 카탈루냐 자치정부는 형법에서 벗어났다. 1936년 12월 25일 자치정부는 낙태를 합법화하는 「낙태의 우생학적 개혁」 법령을 의결해 1937년 1월 9일 관보에 실었다. 수석 장관 조셉 타라데야스, CNT 소속 보건·사회 지원 장관 페레 에레라, 노동총동맹 소속 법무 장관 라파엘 비디에야가 서명했고, 법령을 기초한 사람은 마르티 이바녜스였다. 이 법령으로 카탈루냐는 낙태 법제에서 유럽의 맨 앞에 섰다. 서문과 첫 조항들은 다음과 같다. 1 17
우생학적 개혁은 위생 분야에서 가장 큰 혁명적 성과 가운데 하나로서, 지금까지 모든 과학적 통제에서 멀리 떨어져 그늘에서 무능한 자들의 손으로 행해지던 일, 곧 낙태를 위생 법제에 넣는 데서 그 행동 계획을 시작한다. (…) 근본 목적은 강력한 감정적·우생학적·치료적 사유가 임신의 인공 중절을 요구할 때, 일하는 민중에게 출생을 조절하는 안전하고 위험 없는 방법을 마련해 주는 것이다.
제1조. 이 목적을 위한 특별 부서를 둔 카탈루냐 자치정부 소속 병원·의원·보건 기관에서 시행하는 인공 임신중절을 허가한다.
제2조. 치료적·우생학적·윤리적 사유를 낙태 시행의 정당한 이유로 본다.
제3조. 치료적이지도 우생학적이지도 않은 낙태 청구는 오로지 본인의 청구에 따라 시행하며, 그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 누구도 나중에 시술 결과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
제4조. 치료적 사유가 없는 한 임신 3개월이 지난 경우에는 중절을 하지 않는다. 18
La reforma eugènica, que representa una de les majors conquistes revolucionàries en sanitat, comença el seu pla d'acció mitjançant la incorporació a la legislació sanitària d'un fet fins avui efectuat lluny de tot control científic, a l'ombra i per persones incompetents i que des d'aquest moment adquireix categoria biològica i social, com és l'avortament. (…) La finalitat primordial que es persegueix és la de facilitar al poble treballador una manera segura i exempta de perill de regular la natalitat, quan existeixin causes poderoses, sentimentals, eugèniques o terapèutiques que exigeixen la interrupció artificial de l'embaràs.
Art. 1. Queda autoritzada la interrupció artificial de l'embaràs, efectuada en els Hospitals, Clíniques i Institucions Sanitàries dependents de la Generalitat de Catalunya, en els quals estigui organitzat el servei especial per a tal finalitat.
Art. 2. Es consideraran motius justificats per a la pràctica de l'avortament les raons d'ordre terapèutic, eugènic o ètic.
Art. 3. Els casos de sol·licitud d'avortament no terapèutic ni eugènic s'efectuaran exclusivament a petició de la interessada sense que ningú dels seus familiars o propers puguin presentar després reclamació respecte al resultat de la intervenció.
Art. 4. No s'efectuarà la interrupció de l'embaràs en els casos que ultrapassin dels tres mesos d'aquell, a no ésser que existeixi justificació terapèutica. 18
법령은 치료적·우생학적·윤리적 사유를 인정하고 그 밖의 경우에도 여성 본인의 청구로 임신 3개월 안의 중절을 허용해, 사실상 첫 12주 동안의 자유로운 낙태를 열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모성의 집, 산트파우 병원, 클리닉 병원, 카르데날 병원에서 시술이 허가되었다. 법령의 언어가 보여 주듯 공화국의 성개혁은 「인종의 이익」을 말하는 우생학의 말투를 그대로 썼다. 공화국 전체로는 CNT 소속 페데리카 몬세니가 1936년 11월부터 1937년 5월 중순까지 라르고 카바예로 정부의 보건장관을 지냈고, 일부 자료는 이때 공화국 지역에서도 낙태가 비범죄화되었다고 적지만, 마르티 이바녜스의 전기는 몬세니가 이를 나라 전체로 넓히려 했으나 공화국 정부의 반대로 끝내 통과시키지 못했다고 전한다. 암파로 포치는 몬세니의 보건부에서 사회 지원 국장을 맡아 낡은 고아원을 대신할 「아동의 집」 사업을 이끌었다. 18 1 17 19 16 15
1933년 부랑자·불량배법: 공화국의 「위험 상태」 처분
공화국의 성개혁에는 그늘도 있었다. 1933년 8월 4일 공화국 의회는 부랑자·유랑민·포주처럼 반사회적이라 여겨진 사람들을 다루는 부랑자·불량배법, 속칭 「라 간둘라」를 모든 정파의 합의로 통과시켰다. 이 법은 범죄를 처벌하는 대신 범죄를 저지르기 전의 「위험 상태」에 보안 처분을 내리는 법이었고, 사회노동당원 형법학자 루이스 히메네스 데 아수아가 마리아노 루이스푸네스와 함께 초안을 썼다. 범죄 이전의 위험성을 연구해 온 아수아는 우파의 동의를 얻으려 덧붙인 수정들이 법을 「더 가혹하고, 덜 유연하며, 더 결의론적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 것으로 만들었다고 불평했다. 20
법의 시행 규칙과 집행은 이를 완전히 비틀었다. 「부랑자·불량배 교화소」라는 수용소가 생겼고, 법은 공화국 시기에도 프랑코 체제에서도 범죄를 저지를지 모른다는 가난한 사람들을 누르는 데 쓰였다. 공화국의 법은 동성애를 대상으로 삼지 않았고 동성애는 금기로 남아 있었지만, 프랑코 정권은 1954년 7월 15일 이 법을 고쳐 동성애자를 처분 대상에 넣고 푸에르테벤투라의 테피아 농업 형무소 같은 시설에 가두었다. 1970년 사회적 위험·재활법이 이를 대신했고, 동성애에 대한 처벌 조항은 1978년 개정으로 1979년에야 사라졌다. 20 21
1938~1941년 프랑코 체제의 반동: 이혼 폐지, 여성부, 「여성 보호」, 「붉은 유전자」
프랑코 측은 내전 중에 이미 공화국의 성개혁을 되돌리기 시작했다. 1938년 3월 2일 부르고스에서 프랑코가 주재한 각료 회의는 1932년 이혼법에 따른 별거·이혼 소송의 진행을 모두 멈추게 했고, 전쟁에 이긴 뒤 1939년 9월 23일 법으로 이혼법을 명시적으로 폐지했다. 그 제안 이유는 「새 스페인 국가는 처음부터 세속 법제의 폐지를 선언해 우리 법에 전통적 의미, 곧 가톨릭적 의미를 되돌려 주었다」고 하면서, 민사혼법을 이미 폐지했으니 이혼법도 정지 상태로 둘 수 없다고 했다. 경과 규정은 이미 이혼한 사람들에게도 소급해 적용되었다. 카탈루냐의 낙태 법령도 가톨릭교회의 지지를 받은 프랑코 정권이 폐지하고 낙태를 다시 범죄로 만들었다. 4 5 19 17
여성의 자리는 팔랑헤 여성부가 정했다. 1934년 마드리드에서 세워진 여성부는 팔랑헤 창립자 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의 누이 필라르 프리모 데 리베라가 해산 때까지 이끌었고, 이사벨 여왕과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를 본보기로 삼았다. 필라르는 여성부가 지도자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며 그것이 「삶에서 언제나 여성의 역할인, 남성에 대한 복종」이라고 했다. 1939년 12월 28일 법령은 남성의 병역을 본뜬 여성의 「사회 봉사」를 여성부에 독점적으로 맡겼고, 1941년까지 28만 2224명의 여성이 이를 마쳤다. 22
「타락한」 여성은 가두어 다시 가르쳤다. 1941년 11월 6일 법령은 1902년 인신매매 퇴치를 위해 세워졌던 기관을 여성보호위원회로 되살렸고, 프랑코의 아내 카르멘 폴로가 명예 의장을 맡았다. 같은 법령은 상습적인 비밀 성매매 여성을 「교화」하는 「타락한 여성 구제회」도 만들었다. 위원회의 목적은 여성, 특히 젊은 여성의 도덕적 존엄을 지키고 가톨릭 가르침에 따라 교육하는 것이라 했고, 16~21세의 「타락했거나 타락할 위험이 있는」 여성들, 곧 반항하는 소녀, 정신질환을 앓는 소녀, 레즈비언 같은 국가가톨릭적 여성상의 이탈자들이 경찰의 단속이나 가족의 고발로 수도회 시설에 갇혔다. 위원회는 1985년에야 없어졌다. 23
정권의 정신의학은 공화국의 성과 정치를 병으로 몰았다. 육군 정신의학 책임자 안토니오 바예호나헤라는 1937년 『히스파니아의 우생학과 인종의 재생』에서 「선택된 자들을 늘리고 약한 자들을 사라지게 하는」 적극적 우생학을 외쳤는데, 그에게 약한 자는 「본질적으로 악하고 정신적으로 열등한」 빨갱이들이었다. 1938년 그는 마르크스주의로 이끄는 결함, 곧 「붉은 유전자」를 찾는다며 산페드로데카르데냐에 갇힌 국제여단 포로들과 말라가 여자 교도소의 공화파 여성 수감자 50명을 연구했는데, 그 가운데 30명은 처형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성 연구는 혁명적 여성의 범죄성을 여성 정신의 동물적 본성과, 정치 상황이 「잠재된 성적 욕구」를 채우게 할 때 풀려나는 「뚜렷한 가학성」으로 설명했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자의 자녀를 부모에게서 떼어 놓아야 한다고까지 주장했다. 24


평가: 짧았던 성개혁과 그 한계, 그리고 긴 반동
스페인 공화국의 성개혁은 소련과 독일보다 늦게 왔고 가장 짧게 끝났다. 소련이 1936년 6월 낙태를 다시 금지하고 1934년 남색죄를 되살렸으며, 독일 성개혁 운동이 1933~1935년 민족사회주의 정권 아래 무너진 뒤에, 카탈루냐는 1936년 12월에야 낙태를 합법화했다. 그리고 그 개혁도 1939년 프랑코의 승리와 함께 사라졌다. 같은 세계 성개혁 연맹에 속했던 세 나라의 운동이 1930년대 중반에서 말 사이에 모두 뒤집힌 셈이다. 1 8
개혁에는 처음부터 한계가 있었다. 스페인 성개혁 연맹은 가장 보수적인 지부로서 동성애를 다루지 않았고, 동성애는 공화국 내내 금기였다. 공화국 좌파가 만든 부랑자·불량배법은 뒤에 프랑코 정권이 동성애자를 가두는 도구가 되었다. 우생학의 언어는 좌우를 가리지 않았다. 일데가르트의 『우생학의 문제』, 「인종의 이익」을 말한 카탈루냐 법령, 마라뇬의 우생학 대회 참여가 한쪽에 있었다면, 다른 한쪽에는 빨갱이를 열등한 종자로 몬 바예호나헤라의 「히스파니아 우생학」이 있었다. 8 20 13 18 10 24
반동은 길었다. 이혼은 1981년에야 다시 인정되었고, 낙태는 1985년 세 가지 사유로, 2010년 기한제로 비범죄화되었다. 팔랑헤 여성부는 1977년, 여성보호위원회는 1985년에 없어졌다. 동성애자에 대한 처분은 1978년 사회적 위험법 개정으로 끝났지만, 공공 추문죄는 1989년까지 남았다. 그사이 일데가르트의 이름은 공화국의 꿈과 그 비극을 함께 상징하게 되었다. 4 17 22 23 21
결과
프랑코 체제는 1938년 이혼 소송을 멈추고 1939년 이혼법과 민사혼법을 폐지해 법에 「가톨릭적 의미」를 되돌렸으며, 카탈루냐의 낙태 법령도 없앴다. 팔랑헤 여성부는 1939년부터 여성의 「사회 봉사」를 맡아 남성에 대한 복종을 가르쳤고, 1941년 되살아난 여성보호위원회는 「타락한」 젊은 여성들을 수도회 시설에 가두었다. 바예호나헤라는 공화파 포로에게서 「붉은 유전자」를 찾았고, 1954년 정권은 부랑자·불량배법을 고쳐 동성애자를 가두었다. 이혼은 1981년, 낙태는 1985년에야 다시 인정되었다.
연표와 지도
- 11904신맬서스주의 스페인 지부
인류 재생 연맹 국제 연합의 스페인 지부가 바르셀로나에 세워졌다.
- 21914.12.09일데가르트 출생
아우로라 로드리게스가 「미래 여성의 모범」으로 계획한 딸 일데가르트가 마드리드에서 태어났다.
- 31931.10.01여성 참정권 의결
제헌의회가 캄포아모르와 켄트의 토론 끝에 여성 참정권을 담은 제36조를 161 대 121로 통과시켰다.
- 41932.03.02이혼법 공포
2월 25일 260 대 23으로 의결된 스페인 첫 이혼법이 공포되었다.
- 51932스페인 성개혁 연맹
세계 성개혁 연맹의 스페인 지부가 마라뇬을 의장, 일데가르트를 서기로 세워졌다.
- 61933.06.09일데가르트 살해
어머니 아우로라가 잠든 일데가르트를 총으로 쏘아 죽였다.
- 71933.08.04부랑자·불량배법
공화국 의회가 범죄 이전의 「위험 상태」를 다스리는 보안 처분법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 81934팔랑헤 여성부 창설
필라르 프리모 데 리베라가 이끄는 팔랑헤의 여성 조직이 마드리드에서 세워졌다.
- 91935아우로라 정신병원 이송
26년 형을 받은 아우로라가 편집증 진단을 받고 시엠포수엘로스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
- 101936.04「자유여성」 창립
포치, 산체스 사오르닐, 코마포사다가 아나키스트 여성 조직과 같은 이름의 잡지를 세웠다.
- 111936.12.25카탈루냐 낙태 합법화 법령
카탈루냐 자치정부가 마르티 이바녜스가 기초한 「낙태의 우생학적 개혁」 법령을 의결했다.
- 121937.08.20「자유여성」 첫 대회
발렌시아 대회가 자유여성 연맹을 아나키스트 운동의 「넷째 팔」로 규정했다.
- 131938.03.02이혼 소송 정지
부르고스의 프랑코 정부가 이혼법에 따른 모든 별거·이혼 소송을 멈추게 했다.
- 141938「붉은 유전자」 연구
바예호나헤라가 국제여단 포로와 말라가의 공화파 여성 수감자들을 연구했다.
- 151939.09.23이혼법 폐지
프랑코 정권이 세속 법제를 없애고 법에 「가톨릭적 의미」를 되돌린다며 이혼법을 폐지했다.
- 161939.12.28여성 사회 봉사
법령이 여성의 의무 「사회 봉사」를 팔랑헤 여성부에 맡겼다.
- 171941.11.06여성보호위원회
「타락한」 젊은 여성을 수도회 시설에 가두는 여성보호위원회가 되살아났다.
관련 인물 18명
지도부5
1931년 제헌의회에서 남녀평등 조항과 여성 참정권을 관철했고 1932년 이혼법 제정에 깊이 관여했다.
스페인 성개혁 연맹 의장그레고리오 마라뇬1887–1960내분비학자로 연맹을 이끌었으나 인공 피임과 국가의 어린이 성교육에 반대했고 1933년 우생학 대회에 참여했다.
「자유여성」 공동 창립자, 보건부 사회 지원 국장암파로 포치 이 가스콘1902–1968여성을 성적 굴종에서 해방하려 「자유여성」을 세웠고, 몬세니의 보건부에서 「아동의 집」 사업을 이끌었다.
「자유여성」 공동 창립자루시아 산체스 사오르닐1895–1970시인이자 노조 활동가로 「자유여성」을 함께 세워 이끌었다.
「자유여성」 공동 창립자메르세데스 코마포사다1901–1994변호사로 「자유여성」을 함께 세웠다.
집행 · 지휘3
참여2
반대 · 저항2
목격 · 기록6
일데가르트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를 「붉은 처녀」라 불렀고, 아우로라는 재판에서 그를 음모의 하수인으로 지목했다.
세계 성개혁 연맹 창립자마그누스 히르슈펠트1868–1935일데가르트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스페인 성개혁 연맹은 그의 세계 연맹의 지부였다.
세계 성개혁 연맹 지도자노먼 헤어1892–1952일데가르트와 편지를 주고받은 유럽 성개혁 운동의 인물이었다.
아나키스트에마 골드만1869–19401900년 파리의 페레르 과르디아 집에서 열린 신맬서스주의 국제 연합 창립 모임에 참석했다.
공화국 총리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1869–1946몬세니가 보건장관을 지낸 정부를 이끌었다.
팔랑헤 창립자호세 안토니오 프리모 데 리베라1903–1936누이 필라르가 팔랑헤 여성부를 이끌었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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