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신 배경

헝가리

61 명

알제리안도라앤티가 바부다오스트레일리아바하마바레인방글라데시바베이도스벨리즈베냉부탄볼리비아보츠와나브루나이부룬디캄보디아카메룬캐나다카보베르데중앙 아프리카 공화국차드콜롬비아코모로코스타리카키프로스덴마크지부티도미니카도미니카 공화국에콰도르이집트적도 기니에리트리아에스와티니에티오피아피지가봉감비아과테말라기니아이티온두라스아이슬란드이란이라크코트디부아르자메이카요르단케냐키리바시코소보쿠웨이트라오스레바논레소토라이베리아리비아리히텐슈타인룩셈부르크마다가스카르말라위말레이시아몰디브말리몰타마셜 제도모리타니모리셔스멕시코미크로네시아모나코몽골모로코미얀마나미비아나우루네팔뉴질랜드니제르나이지리아북마케도니아노르웨이오만파키스탄팔라우팔레스타인파나마파푸아뉴기니파라과이필리핀카타르콩고-브라자빌르완다세인트키츠 네비스세인트루시아세인트빈센트그레나딘사모아산마리노상투메 프린시페사우디아라비아세네갈세이셸시에라리온싱가포르솔로몬 제도소말리아남수단스리랑카수단수리남스웨덴시리아대만태국동티모르토고통가튀니지투발루우간다아랍에미리트우루과이바누아투바티칸 시국베네수엘라예멘잠비아짐바브웨러시아우크라이나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벨라루스카자흐스탄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스토니아폴란드핀란드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프랑스이탈리아영국미국중국네덜란드벨기에불가리아쿠바스페인루마니아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몬테네그로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스위스체코우즈베키스탄몰도바투르크메니스탄타지키스탄키르기스스탄일본인도튀르키예그리스아르헨티나칠레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대한민국베트남알바니아앙골라부르키나파소콩고민주공화국가나기니비사우인도네시아모잠비크페루트리니다드 토바고포르투갈브라질엘살바도르그레나다가이아나니카라과남아프리카 공화국탄자니아아일랜드슬로바키아마르티니크이스라엘아프가니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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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당 인물

프랑켈 레오

Frankel Leó

파리 코뮌의 노동·교환위원회 대표로 노동 법령을 추진하고, 뒤에 헝가리 노동자당을 세운 금세공인

1871년 5월 1일 공안위원회 창설에 찬성했으나, 15일에는 공안위원회를 비판하는 소수파 선언에 서명했다.

부다 근교 오부다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금세공인이 되었고, 독일을 거쳐 1867년 파리에 와 국제노동자협회 독일어권 지부에서 활동했다. 1870년 인터내셔널 재판에서 유죄를 받았다. 1871년 코뮌 의원으로 뽑힌 유일한 외국인으로 노동·교환위원회를 이끌며 제빵 야간 노동 금지와 버려진 작업장 법령을 추진했고, 공안위원회에 반대한 소수파에 섰다. 피의 주간에 부상을 입고 런던으로 탈출해 인터내셔널 총평의회 위원이 되었다. 1876년 헝가리로 돌아가 1880년 헝가리 전국노동자당을 세웠으며, 말년을 파리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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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0국제노동자협회 활동으로 체포·수감되었다가 제정 붕괴 뒤 석방되어 파리 연방평의회 활동을 재개했다.
  • 1871파리 코뮌 제13구 의원으로 선출되고 노동·교환 대표를 맡아 제빵공 야간노동 금지령과 버려진 작업장 조사·협동조합 운영안을 추진했다. 5월 1일 공안위원회 설치에 찬성했으나, 15일 소수파 선언에 서명했다.
  • 1871–1872피의 주간 바리케이드에서 두 차례 부상당하고 탈출한 뒤 런던으로 가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에 선출되었다.
  • 1878–1880헝가리 노동자당 창당대회에 참여했고, 1880년 헝가리 전국노동자당 창립에 관여했다.
  • 1889–18961889년 파리로 돌아왔고 1896년 폐렴으로 사망했다.

어포니 얼베르트

Apponyi Albert
헝가리 왕정·왕당파 헝가리 헝가리 1846–1933 ○ 자연사

1920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헝가리 대표단을 이끌고 국제연맹에서 트리아농 국경 수정을 호소한 귀족 정치인

빈에서 태어난 백작으로, 1877년 의회에 들어가 반세기 동안 활동한 웅변가였다. 1906~1910년 교육장관으로 비헝가리계 학교에 헝가리어 교육을 강제한 1907년의 「어포니법」을 만들었다. 1920년 1월 파리 강화회의에서 헝가리 대표단을 이끌어 1월 16일 연설했으나 조건은 바뀌지 않았고, 3월 섭정 선거에서 호르티에게 졌다. 이후 합스부르크 정통주의 야당 의원이자 국제연맹 대표로 트리아농 국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1933년 군축회의 참석차 머물던 제네바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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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7의회 진출
  • 1906–1910교육장관, 1907년 어포니법
  • 1920파리 강화 대표단장
  • 1920섭정 선거에서 호르티에게 패배
  • 1923–1933국제연맹 대표

호르티 미클로시

Horthy Miklós
헝가리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 1868–1957 ○ 망명지에서 사망

평의회 공화국 붕괴 뒤 반혁명 국민군을 이끌고 1944년까지 헝가리를 다스린 섭정

1920년 섭정이 된 호르티는 반유대주의 법률을 시행한 헝가리를 나치 독일과 동맹시켜 소련 침공에 가담시켰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유대인 43만 7천 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10월 휴전 시도 뒤 권좌에서 쫓겨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장교로 1918년 해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지자 반혁명 국민군을 이끌고 부다페스트에 들어갔고, 1920년 3월 의회가 그를 섭정으로 선출했다. 민족 보수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내건 통치 아래 공산당과 화살십자당을 금지하고 트리아농 조약의 영토 회복을 추구했다. 나치 독일과 손잡고 1941년 6월 소련 침공에 가담했으며, 1944년 3월 독일의 점령 뒤 43만 7천 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1944년 10월 소련과의 휴전을 발표했다가 독일군에게 퇴위를 강요당해 권력이 화살십자당으로 넘어갔다. 전후 포르투갈로 망명해 1957년 에스토릴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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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의회가 호르티를 헝가리 왕국의 섭정으로 선출했다.
  • 1940헝가리가 추축 동맹에 가입했다. 호르티 정권은 반유대주의 법률과 강제노동 제도를 운영했다.
  • 1941헝가리가 추축국의 소련 침공에 가담했고, 정부는 유대인 2만 명 이상을 점령지 갈리치아로 강제 이송했다.
  • 1944독일 점령 뒤 헝가리 당국은 5월부터 7월까지 유대인 약 43만 7천 명을 이송했다. 호르티는 7월 이송 중단을 명령하고 10월 소련과 휴전을 선언했으나 독일에 구금되고 퇴위를 강요당했다.

페이들 줄러

Peidl Gyula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73–1943 ○ 자연사

평의회 공화국 붕괴 뒤 엿새 동안 「노동조합 정부」를 이끈 인쇄공 출신 사회민주당 지도자

죄르 주 러버즈드의 정육점 집안에서 태어난 식자공으로, 인쇄노동자 조합과 소비협동조합을 이끌고 1909년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들어갔다. 1919년 베린케이 정부의 노동·복지장관을 지냈고, 공산당과의 합당과 프롤레타리아 독재 선포에 반대해 당직에서 물러났다. 1919년 8월 1일 평의회 정부가 사퇴하자 총리가 되어 평의회 공화국을 폐지하고 그 법령을 철회했지만, 8월 6일 루마니아군의 지원을 받은 프리드리히 이슈트반에게 쫓겨났다. 그 뒤 사회민주당 재건에 참여했고 1922~1931년 국회의원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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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18인쇄노동자 주간지 『티포그라피아』 편집
  • 1909사회민주당 지도부
  • 1919베린케이 정부 노동·복지장관
  • 1919「노동조합 정부」 총리
  • 1922–1931국회의원

베틀렌 이슈트반

Bethlen István
헝가리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 1874–1946 ○ 옥사

1921~1931년 총리로서 제한 선거와 국제연맹 차관으로 호르티 체제를 안정시킨 트란실바니아 귀족

트란실바니아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1년 자유주의자로 의회에 들어갔다. 1919년 세게드의 반혁명 세력에 합류했고, 1921년 4월 카를 왕의 첫 복귀 시도 뒤 총리가 되었다. 통일당을 세우고 1922년 선거법으로 농촌에 공개투표를 되살려 집권당의 승리를 굳혔으며, 사회민주당과 협정을 맺고 국제연맹 가입과 차관으로 경제를 안정시켰다. 1931년 대공황 속에 물러났고, 1941년 소련과의 전쟁에 반대했다.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1946년 모스크바의 감옥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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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자유주의자로 의회 진출
  • 1919세게드 반혁명 세력 합류
  • 1921–1931총리
  • 1921베틀렌–페이에르 협정
  • 1922통일당 창당 · 선거법 개정
  • 1924국제연맹 차관
  • 1945–1946소련에 체포, 모스크바에서 옥사

프로너이 팔

Prónay Pál
헝가리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 1874–1947/1948 ○ 수용소에서 사망

1919~1921년 헝가리 백색테러에서 가장 잔혹한 장교 부대를 이끈 반혁명 준군사 지휘관

노그라드주 롬하니의 오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직업 장교로, 1919년 세게드에서 호르티의 경호대를 맡고 첫 장교 부대를 만들었다. 그의 부대는 공산당원·사회민주당원·농민·유대인을 고문하고 살해해 헝가리 백색테러에서 가장 잔혹한 부대로 꼽힌다. 1921년 갈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지휘권을 잃었고 카를 왕의 두 번째 복귀 시도에 가담했으며, 부대는 1922년 1월 해산되었다. 1930년대에 파시스트 대중운동을 꾸미다 실패했고, 1944년 10월 다시 유대인을 사냥하는 부대를 꾸렸다. 1945년 소련군에 붙잡혀 수용소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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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호르티 경호대장, 첫 장교 부대 창설
  • 1919–1921헝가리 백색테러 부대 지휘
  • 1921갈취죄 유죄, 카를 왕 복귀 시도 가담
  • 1922부대 해산
  • 1932선동죄로 징역 6개월
  • 1945소련군에 체포

런들레르 예뇌

Landler Jenő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유대계) 1875–1928 ○ 심부전

평의회 공화국의 내무 인민위원이자 붉은군대 지휘관을 지낸 노동 변호사 출신 공산주의자

겔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변호사로, 철도노동자 연맹의 법률고문으로서 1904년 전국 철도 파업 지도자들을 변호했다. 1908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점차 좌경화해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1919년 3월 감옥에서 쿤 벨러와 프롤레타리아 독재 도입에 합의했고, 평의회 공화국에서 내무·상업 인민위원을 지낸 뒤 붉은군대 제3군단장으로 북부 원정을 지휘했으며 7월에는 총사령관이 되었다. 붕괴 뒤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망명 공산주의 운동을 이끌었다. 1928년 칸에서 죽었고 유골은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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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철도 파업 지도자 변호
  • 1908사회민주당 입당
  • 1919내무·상업 인민위원
  • 1919붉은군대 제3군단장, 7월 총사령관
  • 1919–1928오스트리아 망명, 망명 공산주의 운동 지도

카로이 미하이

Károlyi Mihály
헝가리 자유주의·공화주의 헝가리 헝가리 1875–1955 ○ 자연사

과꽃 혁명으로 총리가 되고 헝가리 제1공화국 대통령을 지낸 자유주의 귀족

부유한 가톨릭 대귀족 가문 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 중 즉각 강화를 요구한 의회 반전파를 이끌었다. 1918년 10월 과꽃 혁명으로 총리가 되었고, 11월 16일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자 임시 국가원수를 겸했으며 1919년 1월 대통령으로 인정되었다. 토지개혁의 본보기로 자기 가문의 영지를 소작인들에게 내주었다. 1919년 3월 빅스 각서로 정부가 무너진 뒤 평의회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7월 망명했다. 1946년 귀국해 1947~1949년 주프랑스 대사를 지냈으나 러이크 재판에 항의해 사임했고, 1955년 프랑스 방스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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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독립당 하원의원
  • 1918헝가리 국민평의회 결성, 과꽃 혁명으로 총리
  • 1918–1919인민공화국 임시 국가원수·대통령
  • 1919–1946망명(프랑스·영국)
  • 1947–1949주프랑스 헝가리 대사

텔레키 팔

Teleki Pál
헝가리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 1879–1941 ✕ 자살

「붉은 지도」를 만든 지리학자로 두 차례 총리를 지내고 1941년 독일군 통과에 항의하듯 자살한 정치인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트란실바니아 귀족 가문 출신의 지리학자로, 대학 교수이자 학술원 회원, 헝가리 스카우트 연맹 수장이었다. 1918~1919년 1910년 인구조사에 바탕한 민족 분포도 「붉은 지도」를 만들었다. 1920년 외무장관으로 트리아농 조약 조인을 지켜보았고, 7월 총리가 되어 누메루스 클라우수스법 시기의 정부를 이끌다 1921년 4월 물러났다. 1939년 다시 총리가 되어 제2차 유대인법의 전문을 쓰고 제3차 유대인법을 준비했다. 1941년 4월 3일 독일군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통과가 확실해지자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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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붉은 지도」 작성
  • 1920외무장관, 트리아농 조약 조인
  • 1920–1921총리
  • 1938교육장관
  • 1939–1941총리
  • 1941자살

거르버이 샨도르

Garbai Sándor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79–1947 ○ 자연사

평의회 공화국 혁명통치평의회 의장을 지낸 건설노동자 출신 사회민주주의자

키슈쿤할러스의 개신교 집안에서 자라 벽돌공으로 일하며 노동운동에 들어섰고, 1901년 사회민주당에 입당해 건설노동자 조합과 노동자보험기금을 이끌었다. 1919년 3월 21일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합당을 지지했고, 혁명통치평의회 의장으로서 평의회 공화국의 법적 국가원수 겸 총리가 되었으나 실권은 쿤 벨러에게 있었다. 붕괴 뒤 페이들 정부의 교육장관을 지냈고, 루마니아군에 붙잡혔다가 클루지에서 탈출해 브라티슬라바, 빈, 파리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전후 귀국이 허락되지 않은 채 1947년 파리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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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사회민주당 입당
  • 1903건설노동자 전국연맹 의장
  • 1908노동자보험기금 의장
  • 1919혁명통치평의회 의장
  • 1919페이들 정부 교육장관
  • 1920–1947망명(브라티슬라바·빈·파리)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헝가리 1879–1964 ○ 자연사

1929년 대공황을 예측하고도 자본주의의 적응력을 인정했다는 이유로 연구소가 폐쇄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1920년대 말, 모두가 자본주의 안정화를 확신할 때 대공황을 예측했고, 모두가 자본주의 붕괴를 말할 때 그 종말을 예측하여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다.

헝가리 출신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로, 1927년부터 20년간 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ИМХМП)를 이끌며 코민테른 최고의 경제분석가로 활약했다. 1929년 대공황의 도래와 종료를 정통 노선에 역행하여 정확히 예측해 스탈린의 신임을 얻었으나, 전후에는 전시 국가개입으로 자본주의가 적응·안정화될 수 있다고 분석한 저작으로 1947년 연구소 폐쇄와 함께 맹렬한 공격을 받았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1963년 레닌상을 수상했고, 유언에 따라 사후 공개된 유고에서는 소련 관료제의 변질과 국제주의 포기를 날카롭게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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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헝가리 사회민주당 입당, 당 기관지 《넵서버》 경제부 편집
  • 1909부다페스트대학 철학박사 — 칸트의 이율배반론 연구
  • 1919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 재무인민위원 →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
  • 1920소련 망명,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코민테른 활동 시작
  • 1921–1927코민테른 통계정보연구소(베를린 '바르가 사무소') 소장
  • 1927–1947소련 과학아카데미 세계경제세계정치연구소(ИМХМП) 소장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63현대 자본주의 연구로 레닌상 수상

뵘 빌모시

Böhm Vilmos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유대계) 1880–1949 ○ 자연사

평의회 공화국의 국방 인민위원이자 붉은군대 총사령관을 지낸 사회민주당 지도자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기계공으로, 금속노동자 조합 서기를 거쳐 사회민주당 지도부에 들어갔다. 1919년 1월 베린케이 정부의 국방장관이 되었고, 공산당과의 합당 협상에 참여했다. 평의회 공화국에서 국방 인민위원과 붉은군대 총사령관을 지냈고, 7월 빈 주재 공사로 가서 사회민주당 지도부의 위임으로 협상국 사절단과 평의회 정부의 퇴진을 합의했다. 망명 뒤 빈, 체코슬로바키아, 스웨덴에서 살았고, 1946~1948년 스웨덴 주재 헝가리 공사를 지내다 사회민주당이 공산당에 통합되자 사임했다. 1949년 스톡홀름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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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노동조합 평의회 위원
  • 1919베린케이 정부 국방장관
  • 1919국방 인민위원, 붉은군대 총사령관
  • 1919빈 주재 공사
  • 1946–1948스웨덴 주재 헝가리 공사

페이에르 카로이

Peyer Károly
헝가리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헝가리 헝가리 1881–1956 ○ 심장마비

1921년 베틀렌–페이에르 협정으로 사회민주당의 합법 활동을 얻어 낸 헝가리 사회민주주의·노동조합 지도자

베스프렘주 바로실뢰드에서 태어난 기계공 출신으로 금속·광산 노동조합을 이끌었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광업 부문을 맡았고, 붕괴 뒤 페이들 정부의 내무장관과 후사르 정부의 노동·복지장관을 지냈다. 테러로 사회민주당이 선거를 거부하자 1920년 1월 사임하고 오스트리아로 피신했다. 1921년 귀국해 베틀렌 정부와 협정을 맺었고 1922~1944년 의원, 1927년부터 노동조합 평의회 서기장을 지냈다. 1944년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 전후 공산당과의 합당에 반대해 1947년 제명된 뒤 미국으로 망명했고 1956년 뉴욕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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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광산 노동조합 조직
  • 1919내무장관, 노동·복지장관
  • 1920–1921오스트리아 망명
  • 1921베틀렌–페이에르 협정
  • 1922–1944국회의원
  • 1944–1945마우트하우젠 수용소
  • 1947사회민주당에서 제명, 미국 망명

야니 구스타브

Jány Gusztáv
헝가리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 1883–1947 ✕ 처형

1943년 1월 돈강에서 무너진 헝가리 제2군의 사령관

하우칭거라는 성으로 태어나 루도비카 사관학교와 빈 군사대학을 나왔고, 제1차 세계대전 때 참모 장교로 복무했다. 1924년 비테즈 기사단에 들어가며 어머니의 성 야니를 택했고, 1931~1936년 루도비카 사관학교를 이끌었다. 1940년 3월 제2군 사령관이 되었고, 1942년 군을 이끌고 돈강으로 갔다. 1943년 1월 소련 공세 때 후퇴 금지 명령을 고수하다 군이 무너지자 병사들을 비겁하다고 비난하는 군령을 내렸다. 전후 스스로 귀국해 1947년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되었고, 1993년 대법원에서 무죄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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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루도비카 사관학교 졸업, 소위 임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모 장교
  • 1931–1936루도비카 사관학교 교장
  • 1940–1943제2군 사령관, 돈강 전투
  • 1947인민재판소 사형 선고, 처형

루카치 죄르지

Lukács György
서구 마르크스주의 이론가 헝가리 헝가리 1885–1971 ○ 폐암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역사와 계급의식』으로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철학의 방향을 바꾼 헝가리 사상가

“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진 지금, 루카치의 문제 제기는 오히려 마르크스주의의 유일한 생존 형식으로 보인다.” — 말년의 대담에서

『역사와 계급의식』(1923)으로 물화와 계급의식을 정식화하여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토대를 놓은 헝가리 철학자. 1919년 평의회 공화국과 1956년 너지 임레 정부에서 문화장관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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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1906부다페스트 대학 법학부 졸업, 콜로주바르 대학 법학 박사
  • 1909『드라마의 형식』으로 부다페스트 대학 철학 박사
  • 1912–1918하이델베르크에서 짐멜·베버·블로흐와 교류, 철학·미학 연구
  • 1918헝가리 공산당(KMP) 입당
  • 1919.3–8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문화교육 인민위원 대리 겸 적군 정치위원
  • 1919–1929빈 망명, KMP 지하활동 — 1928년 중앙위 총서기 선출 후 '우경화' 해임
  • 1923『역사와 계급의식』 출간 — 코민테른으로부터 수정주의 비판
  • 1929–1945모스크바 체류 —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문학비평』 활동
  • 1941NKVD 체포, 2개월 구금 — 디미트로프 개입으로 석방
  • 1942소련 과학아카데미에서 『젊은 헤겔』로 박사학위
  • 1945–1958부다페스트 대학 미학 교수, 국회의원
  • 1956.10–11너지 임레 정부 문화장관 — 혁명 진압 후 루마니아 억류
  • 1957–1967당 제명 — 1967년 복권. 『미학의 특수성』(1963) 집필

굄뵈시 줄러

Gömbös Gyula
헝가리 파시스트·나치 헝가리 헝가리 1886–1936 ○ 암

국민군 조직을 주도하고 1932~1936년 총리로서 헝가리를 이탈리아·독일 쪽으로 이끈 우익 급진파 장교

톨너주 무르거에서 마을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나갔다. 1919년 세게드에서 준군사 단체 MOVE를 만들고 호르티의 국민군 조직을 주도했으며, 1921년 카를 왕의 복귀를 무력으로 막는 데 앞장섰다. 1929년 베틀렌 정부의 국방장관이 되었고 1932년 총리가 되었다. 무솔리니와 손잡고 1934년 로마 의정서에 서명했으며, 히틀러를 찾아간 첫 외국 정부 수반으로서 독일과 무역 협정을 맺었다. 1936년 뮌헨에서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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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MOVE 결성, 국민군 조직
  • 1921카를 왕 복귀 저지
  • 1929국방장관
  • 1932–1936총리
  • 1934로마 의정서 서명

칼러이 미클로시

Kállay Miklós
헝가리 보수주의·기독교민주주의 헝가리 헝가리 1887–1967 → 망명지에서 사망

독일의 유대인 이송 요구를 거부하며 서방 연합국과 비밀 휴전을 꾀한 전시 총리

서볼치 지방의 오랜 젠트리 가문 출신으로 주지사를 거쳐 1932~1935년 농업장관을 지냈고 베틀렌 계열의 보수파였다. 1941년 상원에서 제3차 유대인법에 반대표를 던졌다. 1942년 3월 호르티의 요청으로 총리가 되어 대소련 전쟁을 이어 가면서도 독일의 유대인 이송 요구를 거부하고 서방 연합국과 휴전을 협상했다. 1943년 9월 이스탄불 앞바다에서 비밀 예비 휴전이 맺어졌으나, 1944년 3월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하자 물러나 튀르키예 공사관에 숨었다. 1944년 10월 붙잡혀 다하우와 마우트하우젠에 갇혔다가 1945년 풀려났고, 1946년 망명해 뉴욕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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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29서볼치 주 주지사
  • 1929–1931상무부 차관
  • 1932–1935농업장관
  • 1942–1944총리, 연합국과 비밀 휴전 협상
  • 1944–1945튀르키예 공사관 피신, 다하우·마우트하우젠 수감
  • 1946–1967망명, 미국 정착

틸디 졸탄

Tildy Zoltán
농민주의·농민정당 헝가리 헝가리 1889–1961 ○ 봉기 진압 후 수감, 1959년 석방

소련 탱크 앞에서 중립을 선언한 목사 출신 대통령

1956년 11월 1일 기자회견에서 소련의 재침공 가능성을 묻자 "그런 비극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개혁교회 목사에서 독립소지주당 창립자·지도자로 헝가리 전후 민주화의 얼굴이 된 정치인. 1945년 총선 승리로 총리에 오르고 이듬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공산당의 살라미 전술로 1948년 사위의 조작된 반역 혐의를 빌미로 사임당하고 8년간 연금되었다. 1956년 10월 너지 임레의 혁명 정부에 합류해 11월 1일 바르샤바조약 탈퇴와 중립 선언에 동참했고, 봉기 진압 후 6년형을 받았다. 1989년 대법원이 형을 무효화하며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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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29개혁교회 목사, 교회 정기간행물 편집
  • 1936–44소지주당 국회의원, 전쟁 탈퇴 압박, 독일 점령 후 은신
  • 1945–46총리
  • 1946–48공화국 대통령, 강제 사임
  • 1948–56가택 연금
  • 1956.10–11너지 임레 혁명정부 국가장관
  • 1958–59/19896년형 선고, 1959년 사면, 1989년 복권

서무엘리 티보르

Szamuely Tibor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유대계) 1890–1919 ✕ 자살(이설 있음)

평의회 공화국의 군사 인민위원 대리로 적색 테러와 레닌 소년단을 이끈 공산주의자

니레지하저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언론인으로,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10월 혁명 뒤 모스크바에서 쿤 벨러와 함께 헝가리인 포로 공산주의자들을 조직했고, 1918년 12월 독일 스파르타쿠스단 창립에도 참여했다. 평의회 공화국에서 군사 인민위원 대리와 교육 인민위원을 지냈으며, 그의 무장대는 레닌 소년단으로 불렸다. 반혁명 혐의자를 재판 없이 처형한 적색 테러의 중심인물로, 5월 말에는 모스크바로 날아가 레닌을 만났다. 1919년 8월 2일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다 붙잡혀 죽었는데, 당국은 자살로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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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러시아군 포로
  • 1918모스크바에서 헝가리인 포로 공산주의 그룹 조직
  • 1918스파르타쿠스단 창립 참여
  • 1919헝가리 공산주의자당 중앙위원
  • 1919군사 인민위원 대리, 교육 인민위원

바르도시 라슬로

Bárdossy László
헝가리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 1890–1946 ✕ 처형

커셔 폭격을 구실로 소련에 선전포고하고 유대인 추방을 승인한 전시 총리

솜버테이 출신의 법률가이자 외교관으로, 1922년 외무부로 옮겨 언론국장 등을 지냈다. 1941년 1월 외무장관이 되었고, 4월 텔레키가 자살하자 총리를 겸했다. 트리아농으로 잃은 땅을 되찾으려 친독 노선을 걸어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참여했고, 6월 커셔 폭격 뒤 의회 동의 없이 소련과의 전쟁 상태를 선언했으며, 영국·미국과도 전쟁에 들어갔다. 「외국인」 유대인 추방과 제3차 유대인법을 밀어붙였고, 1942년 3월 호르티에 의해 물러났다. 전후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6년 1월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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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22문교부 관료
  • 1922–1941외무부 언론국장, 외교관
  • 1941외무장관
  • 1941–1942총리 겸 외무장관, 대소련 참전
  • 1945–1946인민재판소 사형 선고, 처형

임레디 벨러

Imrédy Béla
헝가리 파시스트·나치 헝가리 헝가리 1891–1946 ✕ 처형

외교를 독일 쪽으로 돌리고 제2차 유대인법을 낸 뒤 유대계 조상이 드러나 물러난 총리

부다페스트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재무부에서 일한 경제 전문가로, 1932년 굄뵈시 내각의 재무장관, 1935년 국립은행 총재가 되었다. 1938년 5월 총리가 되어 그해 가을부터 외교를 독일·이탈리아 쪽으로 돌렸고, 그의 재임 중 제1차 빈 중재로 남부 슬로바키아가 헝가리에 돌아왔다. 독재적 개편과 제2차 유대인법을 추진했으나 1939년 2월 정적들이 그의 유대계 조상을 밝혀내 사임했다. 1940년 친파시스트 정당 헝가리 쇄신당을 세웠고, 1944년 독일 점령 뒤 스토여이 내각의 장관을 지냈다. 1946년 인민재판소의 사형 선고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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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2헝가리 국립은행 이사
  • 1932–1935굄뵈시 내각 재무장관
  • 1935–1938헝가리 국립은행 총재
  • 1938–1939총리, 제2차 유대인법 제출
  • 1940–1944헝가리 쇄신당 창립·당수
  • 1944스토여이 내각 경제 담당 장관

라코시 마차시

Rákosi Mátyás
헝가리 공산주의자당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92–1971 ○ 사망

헝가리 스탈린화의 설계자, '살라미 전술'로 일당독재를 구축

1940년 10월 30일 석방되어 11월 6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라코시는 다음 날 붉은광장 열병식에서 레닌 묘단 위 스탈린 곁에 섰다.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1945–1948)과 노동자당(MDP) 서기장·제1서기(1948–1956)로 1948년부터 1956년까지 헝가리를 지배했다. 1925년 체포되어 1926년 8.5년형과 1935년 종신형을 받고 15년 넘게 복역한 뒤 1940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45년 귀국 뒤 '살라미 전술'로 민주 정당들을 해체하고 사회민주당을 강제 합병해 일당 지배를 세웠으며, 대량 투옥과 강제노동수용소, 러이크 재판의 책임을 졌다. 1953년 총리직을 너지 임레에게 넘긴 뒤에도 개혁을 방해하다 1956년 7월 18일 해임되었고, 1962년 제명 뒤 크라스노다르·토크마크·아르자마스를 거쳐 1971년 2월 5일 고리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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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통상 인민위원, 적위대·적군 지휘
  • 1921–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
  • 1925–1940호르티 정권 아래 투옥 (8.5년형 이후 종신형, 1940년 석방)
  • 1940–1945모스크바에서 헝가리 공산당 해외국 지도
  • 1945–1948헝가리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48–1956헝가리 노동인민당(MDP)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53년까지 서기장)
  • 1952–1953헝가리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56–1971소련 강제 망명 (키르기스스탄, 아르자마스, 고리키)

코르빈 오토

Korvin Ottó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유대계) 1894–1919 ✕ 처형

평의회 공화국 정치조사국장으로 정치경찰을 이끈 공산주의자

부유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갈릴레이 서클에서 활동했고, 은행원으로 일하며 1918년 반군국주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지하조직을 이끌었다. 헝가리 공산주의자당 창립에 참여해 중앙위원이 되었고, 1919년 3월 21일 옥중에서 두 당의 합당 문서를 타자로 쳤다. 평의회 공화국에서 상점 사회화를 맡은 뒤 내무 인민위원부 정치조사국장으로 반혁명 혐의자를 추적했다. 붕괴 뒤 루카치 죄르지와 함께 지하당 재건을 맡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 1919년 12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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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갈릴레이 서클·반군국주의 운동 참여
  • 1918헝가리 공산주의자당 창립, 중앙위원
  • 1919상점 사회화 담당
  • 1919내무 인민위원부 정치조사국장

너지 임레

Nagy Imre

13일의 총리

1958년 6월 비공개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사면을 거부하며 말했다. "유일한 위안은 언젠가 헝가리 민족과 국제 노동계급이 나에 대한 이 중대한 혐의를 벗겨 주리라는 확신이다."

헝가리의 공산주의자.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 포로로 볼셰비키에 가담했고, 모스크바 망명기에 농업 문제 전문가가 되었다. 1945년 농업장관으로 토지개혁을 집행했으나 1948~49년 집단화 속도를 두고 라코시·게뢰와 맞섰다가 밀려났다. 1953년 7월 총리가 되어 '새 노선'으로 투자 축소, 개인 농가 보장, 억류수용소 폐쇄를 추진했으나 1955년 해임되었다. 1956년 혁명 때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중립을 선언했고, 1958년 비공개 재판 뒤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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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21러시아군 포로, 적군 가담, 볼셰비키 입당
  • 1930–44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농업 연구
  • 1945–46농업장관, 토지개혁 집행
  • 1953–55총리, 「새 노선」: 수용소 해산, 농민 부담 경감
  • 1955실각·출당
  • 1956.10–11봉기의 총리, 다당제·중립 선언
  • 1958/1989비밀 재판 후 처형, 1989년 영웅광장 재매장

셜러이 임레

Sallai Imre
헝가리 공산주의자당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97–1932 ✕ 처형

1932년 비어토르바지 폭파 사건 뒤의 즉결재판 제도 아래 처형된 헝가리 공산당 지도자

에르되퓔레에서 태어났고 1916년까지 홀렌데르라는 성을 썼다. 금융기관 사무원으로 일하며 제1차 세계대전 중 코르빈 오토와 반군국주의 운동을 조직하다 1918년 체포되었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내무 인민위원부 정치부의 코르빈 대리를 지냈다. 공화국이 무너지자 빈을 거쳐 모스크바로 망명해 국제적색구원회 일을 했고, 쿤 벨러의 제안으로 귀국해 불법 당 출판을 맡았다. 1932년 7월 체포되어 비어토르바지 폭파와 무관함에도 사형을 선고받고 7월 29일 퓌르시트 샨도르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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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반군국주의 운동으로 체포
  • 1919내무 인민위원부 정치부 부부장
  • 1919–1931빈·모스크바 망명, 국제적색구원회
  • 1931–1932귀국, 불법 당 출판 담당
  • 1932체포, 즉결재판 후 처형

살러시 페렌츠

Szálasi Ferenc
헝가리 파시스트·나치 헝가리 헝가리 1897–1946 ✕ 처형

화살십자당 지도자, 1944년 독일이 세운 「민족 지도자」

커셔(지금의 코시체)에서 군인의 아들로 태어나 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복무했고, 1925년 참모본부에 들어갔다. 1930년대 초 트리아농 이전 국경 회복을 내건 「헝가리주의」를 주창하며 정치에 뛰어들어 1935년 군을 떠났고, 1937년 헝가리 국가사회주의당을 세웠다. 1938년 투옥된 사이 화살십자당 지도자로 추대되었고, 당은 1939년 선거에서 의석 30석을 얻었다. 1944년 10월 독일이 호르티를 끌어내리자 국가 지도자가 되어 중단된 유대인 이송을 재개했고, 그의 민병대는 부다페스트에서 유대인 학살을 저질렀다. 1945년 5월 오스트리아에서 미군에 붙잡혀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46년 3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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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로 1차 세계대전 복무
  • 1925–35헝가리군 참모본부 장교
  • 1937헝가리 국가사회주의당 창당
  • 1938–40투옥 중 화살십자당 지도자로 추대, 1940년 사면
  • 1944–45「민족 지도자」, 국민통합정부 수반
  • 1946인민재판소에서 사형 선고, 처형

레버이 요제프

Révai József
헝가리 노동인민당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98–1959 ○ 심장병

라코시 시대 문화정책의 총감독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라코시의 권력 집중을 비판하고 헝가리 지도부 개편을 논의했다. 레버이는 초청받지 못했고, 그달 정치위원회에서도 제외됐다.

부다페스트의 유대계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헝가리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4~44년 소련에 살았고, 귀국 뒤 1945~50년 당 기관지 「서버드 네프」 편집장을 지냈다. 1948년부터 1953년까지 헝가리 문화생활 전반을 통제했고 1949년부터 문화장관을 겸했다. 1952년부터 라코시에게 밀려나 1953년 6월 크렘린 회담에 초청받지 못했고, 몰로토프는 그가 이념 분야의 「모든 것을 한 몸에」 쥐었다고 비꼬았다. 1953년 정치위원회에서 빠졌다가 1956년 잠시 복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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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반전 좌파 잡지 「테트」와 후속지 「마」 편집진에 합류했다.
  • 1918헝가리 공산당 창립 모임에 참여하고 당 기관지 「뵈뢰시 우이사그」 편집진에서 일했다.
  • 1930–19341930년 체포되어 1931년 3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 1934년 석방된 뒤 프라하를 거쳐 모스크바로 갔다.
  • 1944–19451944년 헝가리로 돌아와 당 중앙위원회 수립에 참여했고, 1945년 당 선전·언론부장이 됐다.
  • 1945–1950당 중앙 일간지 「서버드 네프」 편집장을 지냈다.
  • 1949–1953공교육부 장관을 지냈다.
  • 1953–1958대통령평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 19567월 당 중앙위원회에서 정치위원회에 복귀했으나, 10월 헝가리 혁명 때 소련으로 이송됐다.
  • 1957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임시집행위원회 고문으로 귀국해 당 중앙위원회에 선출됐고, 6월 당내 논쟁에서 패배한 뒤 다수파의 견해를 수용했다.

바실레 루카

Vasile Luca
루마니아 공산주의 루마니아 헝가리계 1898–1963 ○ 옥사

「모스크바파」의 재무장관, 1952년 화폐개혁을 빌미로 숙청되어 아이우드 감옥에서 죽은 세케이 헝가리인 공산주의자

195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까지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화폐개혁의 「과오」는 루카 한 사람의 책임으로 돌려졌다. 그를 변호하려 한 파우케르와 제오르제스쿠는 석 달 뒤 같은 자리에서 같은 길을 밟았다.

트란실바니아 세케이 지방의 헝가리인 가정에서 루커 라슬로로 태어나 철도 공장 노동자로 일했고, 1919년 헝가리 혁명 뒤 루마니아 노동운동에 들어가 1920년대 초 공산당에 가입했다. 여러 차례 투옥되었으며, 1940년 체르너우치 감옥에 있다가 소련군의 북부 부코비나 점령으로 풀려나 소련 시민이 되었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 최고회의 대의원으로 뽑혔다. 전쟁 중 모스크바에서 아나 파우케르와 함께 망명 루마니아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고, 1944년 귀국해 정치국원·중앙위 서기가 되었다. 1947년 11월부터 재무장관으로서 화폐 안정화와 국유화 재정을 맡았으나, 1952년 1월 화폐개혁의 실행 오류가 빌미가 되어 3월 초 전원회의에서 「우편향」으로 규탄되고 8월 체포되었다. 1954년 10월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63년 아이우드 감옥에서 죽었다. 1968년 차우셰스쿠 지도부의 당 전원회의가 그를 사후 복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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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루마니아 노동운동 참여
  • 1920년대–1940공산당 입당, 여러 차례 투옥
  • 1940체르너우치 감옥 석방, 소련 시민·우크라이나 최고회의 대의원
  • 1944귀국, 정치국원·중앙위 서기
  • 1947–1952재무장관
  • 1952「우편향」 규탄, 해임·체포
  • 1954사형 선고, 종신형 감형
  • 1963아이우드 감옥에서 사망
  • 1968사후 복권

도비 이슈트반

Dobi István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98–1968 ○ 자연사

소농당 출신의 명목상 국가원수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실권이 거의 없던 도비를 헝가리 대표단에 포함했다. 모스크바의 초청은 그의 국가원수직이나 소농당 경력에 대한 오해, 또는 국가 간 회담임을 드러내려는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

쇠니의 가난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년만 마치고 날품팔이로 일했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을 지지했고 농업노동자 운동에 참여했다. 소농당 좌파 지도자로 공산당과 손잡아 1948~52년 총리, 1952~67년 대통령평의회 의장으로 명목상 국가원수를 지냈다. 1953년 6월 크렘린 회담에 초청되었지만, 라이너는 소련 지도부가 그의 실권이나 농민 사이의 권위를 잘못 짐작한 탓이었을 것이라고 본다. 협동조합의 강제 해산을 두려워해 몰로토프의 해산 제안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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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1952헝가리 총리를 지냈다.
  • 1952–1967헝가리 인민공화국 대통령평의회 의장으로 국가원수를 지냈다.

게뢰 에르뇌

Gerő Ernő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898–1980 ○ 자연사

단 3개월 만에 혁명을 촉발한 마지막 스탈린주의 제1서기

1956년 10월 23일 밤 게뢰는 라디오 연설에서 학생 시위대를 향해 '우리 청년들에게 쇼비니즘의 독을 주입하려는 자들'이라고 규탄했고, 수 시간 내로 평화 시위는 혁명으로 바뀌었다.

헝가리 공산운동의 핵심 인물로, 1918년 창당과 함께 입당해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활동했다. 코민테른 요원과 NKVD 공작원으로 프랑스·스페인 등지에서 활동했으며, 스페인 내전에서는 '바르셀로나의 도살자'로 불리며 트로츠키주의자 숙청을 지휘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라코시의 오른팔로 헝가리 경제 스탈린화를 주도했고, 1956년 7월 라코시 후임 제1서기가 되었으나 개혁 요구를 거부했다. 10월 23일 저녁 시위대를 '파시스트'로 규정한 라디오 연설은 봉기를 혁명으로 폭발시켰고, 25일 사임 후 소련으로 도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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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헝가리 공산당 창당 가입, 평의회 공화국 청년공산주의자 활동
  • 1925–36코민테른·NKVD 공작원: 프랑스·벨기에·스칸디나비아 등지에서 활동
  • 1936–39스페인 내전: 카탈루냐 통일사회당(PSUC) 배후 지도, 트로츠키주의자(POUM) 숙청 지휘
  • 1940–44모스크바 망명: KPV 해외국 라코시와 공동 지도, 포로·적군 대상 선전
  • 1945–48최고국가평의회 위원, 통상·교통장관
  • 1948–53MDP 정치국원·부서기장, 재무장관: 중공업화·집단화로 경제 스탈린화 주도
  • 1953–56.07내무장관·부총리; 1956년 7월 MDP 제1서기
  • 1956–8010월 25일 사임, 소련 도피; 1960년 귀국, 1962년 출당, 은둔 중 사망

퓌르시트 샨도르

Fürst Sándor
헝가리 공산주의자당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유대계) 1903–1932 ✕ 처형

셜러이 임레와 함께 비어토르바지 사건을 구실로 한 즉결재판에서 처형된 헝가리 공산당 지도부 일원

룸에서 유대교 신자 부모 사이에 태어났다. 부다페스트의 고무 공장 사무원으로 일하며 사무직 노동자 조합에 속했고, 1926년 헝가리 공산당에 들어갔다. 1928년부터 거듭 체포되었다가 증거 부족으로 풀려났지만 직장을 잃었고, 1930년 당 지도부 일원이 되어 다시 체포되었다. 1932년 비어토르바지 폭파 사건 뒤 선포된 즉결재판 제도 아래 셜러이 임레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았다. 헝가리 적색구원회의 구명 운동과 요제프 어틸러 등의 항의에도 7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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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헝가리 공산당 입당
  • 1928–1930거듭 체포, 실직
  • 1930당 지도부 합류
  • 1932체포, 즉결재판 후 처형

너지 페렌츠

Nagy Ferenc

소련의 압박에 사임당한 소농 출신 초대 총리

스위스 국경에서 아들을 돌려받는 대가로, 자동차 보닛 위에서 사임서에 서명했다.

소농 출신의 정치가로, 소련 점령 하 헝가리 제2공화국의 초대 총리(1946~47). 1930년 틸디 졸탄과 소농당을 세워 사무총장을 지내고 1945년 총선 57% 압승 뒤 국회의장을 거쳐 총리에 올라 펭괴 하이퍼인플레이션을 포린트 도입으로 극복했다. 그러나 라코시 공산당이 「살라미 전술」로 소농당 의원을 제거하자 스위스 휴가 중 아들을 인질로 잡혀 사임당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회고록 「철의 장막 뒤의 투쟁」(1948)은 동유럽 인민민주주의에 대한 서방 서술의 출발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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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45소농당 공동 창립·초대 사무총장, 반전·반나치 활동
  • 1944.04–10게슈타포 투옥, 석방 뒤 화살십자 정권 하 은신
  • 1945–46복구장관·국회의장·국민최고회의 위원
  • 1946–47제2공화국 초대 총리: 포린트 도입, 파리 평화조약 서명
  • 1947.06스위스에서 사임 강요, 미국 망명
  • 1947–70망명 정치, 국제농민연합 부회장·회장

버시 졸탄

Vas Zoltán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유대계) 1903–1983 ○ 자연사

라코시 시대 계획청장, 실각 뒤 너지 임레의 사람

1919년 16세에 헝가리 공산당에 들어가 평의회 공화국 적군에서 싸웠고, 호르티 시대 대부분을 감옥에서 보냈다. 1940년 라코시와 함께 석방되어 소련으로 갔다가 1944년 소련군 장교로 귀국했다. 1945년 부다페스트 시장, 경제최고평의회 사무총장(1945~1949), 국가계획청장(1949~1953)을 지내며 5개년 계획을 짰고 당 핵심 「모스크바파」로 꼽혔다. 1953년 2월 모든 직위를 잃은 뒤 너지 임레 노선에 붙어 각료회의 사무국장(1954~1955)을 맡았고, 1955년 1월 소련 간부회는 그를 너지와 함께 비판했다. 1956년 11월 너지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루마니아에 억류되었고, 이후 정치에서 밀려나 글을 쓰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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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헝가리 공산당 입당, 평의회 공화국 적군 복무
  • 1925–40코민테른 임무로 귀국했다 체포, 15년 가까이 복역
  • 1945부다페스트 시장
  • 1945–49경제최고평의회 사무총장
  • 1949–53국가계획청장, 노동인민당 정치국원(1951~)
  • 1954–55너지 정부 각료회의 사무국장
  • 1956–58유고슬라비아 대사관 피신, 루마니아 억류

퍼르커시 미하이

Farkas Mihály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04–1965 ○ 자연사

라코시 4인 지도부의 국방장관

1953년 헝가리 지도부 교체 과정에서 소련의 비판을 받고 새 정치위원회에서 밀려났으며, 1956년 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아 1961년까지 수감되었다.

아버커우이산토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20년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뒤 소련에 머물다 1944년 말 귀국해 1945년부터 헝가리 공산당 정치국·서기국원이 되었다. 1948~53년 국방장관으로 라코시·게뢰·레버이와 함께 「4인」 지도부를 이루었다. 1953년 6월 소련 지도부는 그를 모스크바에 부르지 않았고, 불가닌은 그가 스스로를 대단한 군사령관처럼 내세운다고 비판했다. 새 정치위원회에서 빠진 뒤 1956년 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1961년 석방되어 출판사 편집자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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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헝가리 공산당 중앙위원회·정치위원회·서기국원이 되었다.
  • 1948–1953헝가리 인민공화국 국방장관을 지냈다.
  • 1956당에서 제명되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 1961석방된 뒤 부다페스트에서 편집자·출판인으로 일했다.

쇤헤르츠 졸탄

Schönherz Zoltán
헝가리 공산주의자당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05–1942 ✕ 처형

독립위원회를 이끌어 반전 시위를 조직하다 1942년 처형된 공산당 지하 지도자

커셔(코시체)에서 태어나 프라하에서 공부하던 대학생 시절 노동운동에 들어갔다. 1938년 11월 제1차 빈 중재 뒤 지하로 들어가 헝가리에서 활동하며 공산당 연락원과 손잡았다. 1940년 12월부터 공산당의 반전 투쟁을 조직하고 독립위원회를 이끌어 1941년 10월 6일과 11월 1일의 시위를 열었다. 『네프서버』 1941년 성탄호를 준비했고, 1942년 2월 1일 지하 기관지 『서버드 네프』 창간호의 사설을 썼다. 1942년 7월 6일 체포되어 참모본부 특별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0월 9일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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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프라하 대학생, 노동운동 참여
  • 1938제1차 빈 중재 뒤 지하로 들어가 헝가리에서 활동
  • 1940–1942공산당 반전 투쟁 조직, 독립위원회 지도
  • 1942『서버드 네프』 창간호 사설 집필
  • 1942체포, 군 특별재판 사형 선고, 처형

로저 페렌츠

Rózsa Ferenc
헝가리 공산주의자당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06–1942 ✕ 구금 중 사망

지하 기관지 『서버드 네프』의 첫 편집인으로 1942년 체포되어 구금 중 숨진 공산주의자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카를스루에와 드레스덴에서 토목공학을 공부했고, 드레스덴 사회주의 학생연맹을 이끌며 나치의 위험을 경고하는 글을 썼다. 1931년 귀국해 형 리하르드의 권유로 지하 공산주의 운동에 들어갔고, 1935년 공산주의 청년동맹 간부가 되었다. 1938년부터 사회민주당과 노동조합 안의 공산당 조직을 만들었고, 1941년 6월 독소전쟁 뒤 지하로 들어가 「독립운동」을 이끌었다. 1942년 2월 『서버드 네프』 편집장이 되었다가 6월 1일 체포되었고, 2주 뒤 석연치 않은 상황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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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카를스루에·드레스덴 유학, 사회주의 학생연맹 지도
  • 1932헝가리 공산당 입당
  • 1935공산주의 청년동맹 지도부
  • 1938–1941사회민주당·노동조합 안 공산당 조직 구축
  • 1942『서버드 네프』 편집장, 체포 뒤 구금 중 사망

페테르 가보르

Péter Gábor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06–1993 ○ 자연사

헝가리 비밀경찰의 창설자이자 그 희생자

1945년 정치경찰 책임자가 된 가보르 페테르는 ÁVO·ÁVH를 이끌며 쇼 재판을 준비하고 진행했다. 1953년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1959년 사면으로 풀려났다.

우이페헤르토의 유대인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1931년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1945년 부다페스트 정치경찰 책임자가 되었고, 1945~52년 국가보안기관(ÁVO·ÁVH)의 수장으로 러이크 재판을 비롯한 숙청과 고문을 지휘했다. 1953년 초 라코시는 소련의 「반시온주의」 숙청을 본떠 그를 체포했다. 1953년 6월 베리야는 그의 사건을 재검토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는 1954년 군사법정에서 시온주의 간첩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1959년 개별 사면으로 풀려나 도서관 사서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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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 말노동운동에 참여하고 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 1931헝가리 공산당에 입당했다.
  • 1943공산주의 평화당 지도부에 참여했다.
  • 1945부다페스트 헝가리 국가경찰 정치보안부 책임자가 되었다.
  • 1945–1952ÁVO·ÁVH 비밀경찰 조직을 이끌며 쇼 재판 준비와 진행에 핵심 역할을 했다.
  • 1952직위에서 해임되고 헝가리 노동자당에서 제명되었다.
  • 19531월 3일 체포되었다.
  • 1954군사최고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 1957형기가 14년으로 감형되었다.
  • 1959개별 사면으로 석방되어 은퇴할 때까지 사서로 일했다.

코바치 벨러

Kovács Béla
헝가리 농민주의·농민정당 헝가리 헝가리 1908–1959 ○ 자연사

소련군에 끌려가 소농당 해체의 방아쇠가 된 사무총장

체포되며 남긴 말: "음모에 가담하지 않았고, 그 죄를 느끼지 않습니다. 그랬다면 평생의 일을 배반하는 것이었습니다."

소농 출신의 농민 정치가로, 소학교 네 학년만 마친 뒤 1933년 소농당에 입당해 1945년 사무총장으로 전후 최대 정당을 이끌었다. 틸디·너지 정부의 농업장관으로 지주제 해체와 토지개혁을 밀었고, 공산당의 살라미 전술에 맞서 당의 독립을 지켰다. 1947년 2월 국회가 면책특권 박탈을 거부하자 소련군이 조작된 간첩 혐의로 그를 체포해 굴라크로 끌고 갔고, 이 납치는 너지 페렌츠 총리의 사임과 소농당 해체의 방아쇠가 되었다. 1955년 귀환해 1956년 너지 임레 혁명정부의 농업장관으로 복귀했고, 진압 뒤 카다르 체제에 협력하다 195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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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44소농당 입당, 버러녀 조직가·반나치 저항
  • 1944–45내무부 정치 차관(데브레첸 임시정부)
  • 1945–46농업장관
  • 1945.08–47소농당 사무총장
  • 1947–55소련군 체포, 굴라크 20년형, 1953년 모스크바 수감
  • 1955–56헝가리 이송, 1956.4 석방
  • 1956.10–11너지 임레 혁명정부 농업장관·국가장관
  • 1957–59카다르 체제 협력, 1958 국회의원

러이크 라슬로

Rajk László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09–1949 ✕ 처형

내무장관으로 비밀경찰 ÁVH를 창설했으나 라코시의 첫 희생양이 된 공산주의자

재판에서 검사의 사형 구형에 답하며: 「검사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법원의 판결을 미리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1949년 9월)

헝가리 공산당 정치인으로, 내무장관(1946~48) 시절 국가보안기관(ÁVH)을 창설하고 초기 숙청을 주도하며 라코시 체제 구축의 핵심 인물이었다.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으로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중 지하 저항운동을 조직했다. 라코시가 자신의 인기를 위협으로 간주하자 외무장관으로 좌천되었다가 1949년 티토주의자라는 조작된 혐의로 체포·처형되어 동유럽 최초의 대규모 스탈린식 쇼재판 희생자가 되었다. 1956년 10월 6일 10만 인파가 모인 복권 장례는 3주 후 헝가리 혁명의 전주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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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불법 헝가리 공산당(KMP) 및 공산청년동맹(KIMSZ) 입당
  • 1935건설노동자 파업 주도, 체포·추방
  • 1937–39국제여단 헝가리 대대 정치위원·당서기로 스페인 내전 참전, 에브로 전투에서 중상
  • 1941–44헝가리 귀환 후 지하 저항운동, 당 중앙위원회 서기, 헝가리 전선 공동 지도
  • 1946.03–1948.08내무장관 — ÁVH(국가보안국) 창설, 초기 쇼재판·숙청 지휘
  • 1948.08–1949.05외무장관
  • 1949.09–10티토주의 간첩 혐의 쇼재판, 사형 선고 및 집행
  • 1956복권 및 10월 6일 국장 재매장, 10만 인파 운집 → 헝가리 혁명의 도화선

비보 이슈트반

Bibó István
헝가리 헝가리인 1911–1979 ○ 옥사

민주주의와 국가의 위기를 분석한 정치사상가

소련군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자 그는 남아 타자기로 「자유와 진실을 위하여」를 썼다.

비보 이슈트반은 법학과 정치이론을 바탕으로 헝가리 민주주의와 중동부 유럽의 국가 위기를 분석한 정치사상가였다. 그는 전후 민주적 재편을 위해 행정과 선거 제도 구축에 참여했지만,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학문적 자율성과 발언권을 잃었다.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공격하자 국회의사당에 남은 너지 임레 정부의 마지막 각료로서 「자유와 진실을 위하여」를 썼다. 이후 종신형을 선고받고 1963년 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말년에는 침묵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윤리와 책임을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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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5세게드대학교에서 정치학·법학 학위 취득, 빈과 제네바에서 수학
  • 1938–1945법무부 관료, 전시에는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한 문서를 발급
  • 1945–1946내무부 행정국장, 전후 행정과 1945년 선거 준비를 담당
  • 1946–1950세게드대학교 정치학 교수, 헝가리과학원 통신회원
  • 1951–1957외트뵈시 로란드대학교 도서관 연구원
  • 1956-11-03–1956-11-12너지 임레 제3차 정부 국무장관, 11월 4일 국회의사당에 남아 성명 작성
  • 1957–1963정치 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복역 후 사면으로 석방
  • 1963–1971중앙통계청 도서관 연구원

비더 페렌츠

Vida Ferenc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계 1911–1990 ○ 자연사

정치재판을 집행한 공산주의 법관

그는 1989년에도 너지 임레를 유죄라고 주장하며 판결을 뉘우치지 않았다.

비더 페렌츠는 불법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가 투옥된 뒤 전후 헝가리의 사법·당 관료로 올라선 공산주의 법률가였다. 그는 1956년 혁명 뒤 국가가 조직한 보복 재판에서 가장 많은 사형을 선고한 법관 가운데 한 명이었다. 1958년 너지 임레 재판에서 대법원 인민법정회의를 주재하며 피고인의 발언과 변호 측 증거 신청을 거듬없이 제한했고, 너지 임레와 기메시 미클로시, 말레테르 팔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그는 1989년에도 판결의 불법성을 인정하거나 뉘우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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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세게드 법학원 졸업, 팔레스타인 공산당 창립에 참여
  • 1935–1942헝가리 불법 공산주의 운동 참여, 변호사 수습
  • 1942–1945쇤헤르츠 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독일로 강제 이송
  • 1945–1949헝가리 공산당 지구위원회 서기, 내무부 고문
  • 1951–1953법무부 근무
  • 1953–1972대법원 법관, 인민법정회의 주재 및 법원 평의회 부의장
  • 1958너지 임레 재판 주심 법관, 사형 판결 선고

카다르 야노시

Kádár János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12–1989 ○ 자연사(병사, 사인 미확정)

구야시 코뮤니즘의 설계자, 1956년 진압의 책임자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1961년)

피우메에서 하녀의 사생아로 태어나 이탈리아식으로 체르마니크로 등록되었고, 1927년 타자기 정비공 견습을 시작해 1929년 직인이 되었다. 1931년 불법 공산청년동맹과 당에 입당해 지하활동과 투옥을 겪었다. 1948~50년 내무장관으로서 러이크 라슬로 숙청에 관여했고,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954년 석방되었다. 1956년 10월 25일 서기장이 되어 11월 1일 소련 측으로 넘어가 진압을 수용하고 너지 임레의 처형을 승인했으며, 수백 명 처형과 수만 명 투옥이 뒤따랐다. 1961년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 편이다'를 제창해 대사면과 개혁을 추진했고, 1988년 사임하고 1989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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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불법 헝가리 공산당(KPV) 및 공산청년동맹 입당, 지하활동
  • 1933–34체포되어 2년간 투옥, 중형교도소에서 라코시와 마주침
  • 1942–44KPV 중앙위원·서기, 반파시스트 '헝가리 전선' 창설 주도
  • 1948–50내무장관 — 러이크 라슬로 체포 관여, 이후 당 조직부장으로 좌천
  • 1951–54'티토주의자'로 체포, 무기징역 → 1954년 7월 석방
  • 1956.10–11너지 내각 장관 → 소련과 협상, 새 정부 수립
  • 1956–88MSZMP 서기장 ― 32년간 헝가리 실질적 국가원수
  • 1956–58, 61–65총리 겸임 — 경제개혁·대사면, '구야시 코뮤니즘' 확립

키라이 벨러

Király Béla
헝가리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인 1912–2009 ○ 자연사

1956년의 장군이자 논쟁적 증언자

“나는 5년의 투옥에서 뼈와 가죽만 남은 채 나왔다.”

키라이 벨러는 헝가리 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사회주의 국가 건설을 거쳐 1956년 혁명에 참여했다. 전후 체제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감형·석방된 그는 국민위병을 지휘하며 소련군에 맞선 헝가리 무장세력의 최고위 군인이 되었다. 망명 뒤 미국에서 역사를 연구하고 가르쳤으며, 티토·스탈린 결렬을 다룬 회고와 저술에서 소련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계획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후 공개된 소련권 자료를 바탕으로 한 연구는 그 주장을 반박하거나 수정하며, 그의 증언을 1956년의 경험과 기억 정치 속에서 다시 검토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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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루도비카 사관학교 졸업, 육군 소위
  • 1942–1945헝가리군 참모장교, 동부전선 복무
  • 1949–1951헝가리 인민군 보병사령관, 소장
  • 1951–1956정치재판으로 수감, 사형에서 종신형으로 감형
  • 1956국민위병 총사령관, 부다페스트 군사령관
  • 1957–1966미국 망명, 컬럼비아대학교에서 역사학 박사 취득
  • 1964–1982브루클린 칼리지 군사사 교수
  • 1990헝가리 국회의원

도나트 페렌츠

Donáth Ferenc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인 1913–1986 ○ 사후 복권, 1989년

혁명과 개혁을 잇고 독재의 상처를 짊어진 정치가

1956년 11월 4일, 너지 임레와 함께 소련의 공격을 규탄하는 성명을 작성한 뒤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도나트 페렌츠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과 농업정책에 참여한 정치가이자 농업경제 연구자였다. 전후 토지개혁과 집단화 추진에 관여했지만, 1951년 숙청 재판으로 투옥된 뒤 복권되어 당 노선과 국가 폭력의 긴장을 직접 겪었다. 1956년 너지 임레를 지지하며 혁명을 해석하고 소련의 군사 개입을 비판한 그는 너지 임레 재판에서 12년형을 선고받았으나 1960년 석방되었다. 이후 농업경제를 연구하고 1980년대 민주 야당의 대화를 조직했으며, 1989년 법적으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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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헝가리 공산당 입당, 지하 활동
  • 1937–19393월 전선 조직 참여, 국민농민당 창립 참여
  • 1945–1948국가토지정착위원회 부위원장, 농업부 정치차관
  • 1948–1951헝가리 노동인민당 중앙위원회 사무국·농촌부문 지도
  • 1951–1954숙청 재판으로 15년형, 1954년 복권·석방
  • 1956너지 임레 주변 개혁파,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임시집행위원
  • 1958–1960너지 임레 재판에서 12년형, 1960년 특별사면 석방
  • 1976–1985협동조합 연구자, 민주 야당 연대와 모노르 회의 조직
  • 1989너지 임레 재판 판결 무효화로 사후 복권

로숀치 게저

Losonczy Géza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인 1917–1957 ○ 옥사

개혁 공산주의 언론인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이 공격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

로숀치 게저는 헝가리 공산주의 운동에서 출발해 당국의 억압과 교조주의를 비판한 언론인이자 정치가였다. 그는 너지 임레의 개혁파와 함께 다당제와 민중운동의 문제를 둘러싼 격변에 개입했고, 1956년 혁명 정부에서 국가장관으로 활동했다. 소련의 개입 뒤 체포되어 재판을 기다리며 단식하다가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너지 임레 집단에 대한 국가 탄압의 일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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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36학생 잡지 「토바브」 편집
  • 1939–1941헝가리 공산당 가입 및 네프서바 기자
  • 1945–1949「서버드 네프」 국내정치부장
  • 1949–1951레버이 요제프 문화교육부 차관급 보좌관
  • 1951–1954정치 재판으로 수감
  • 1954–1956「머저르 넴제트」 기자, 페퇴피 서클 조직자
  • 1956-10–1956-11너지 임레 제2·제3 정부 국가장관
  • 1957너지 임레 재판 피고 예정, 수감 중 단식 사망

기메시 미클로시

Gimes Miklós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헝가리 헝가리 1917–1958 ✕ 처형

너지 임레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진 개혁파 언론인

《머저르 서버처그》 창간호에서 '오직 이 길로만 우리는 독립되고 자유로우며 민주적인 헝가리를 세울 수 있다'고 썼다.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유대계 헝가리 언론인으로, 불법 공산주의 운동에 뛰어들어 종전 후 당 기관지 《사바드 네프》의 기자가 되었고, 초기에는 라코시 체제에 충실한 논객이었다. 슬란스키 재판과 모스크바 의사 사건을 목격하며 신념이 흔들렸고, 1955년 러이크 라슬로의 복권을 요구했다가 당에서 제명되었다. 1956년 혁명 당시 너지 임레 측근 중 가장 급진적인 인물로 《머저르 서버처그》를 창간·편집했으며, 소련군 개입 후에도 카다르 정권을 거부하고 지하 신문과 민주독립운동을 이끌다 체포되어 너지, 말레테르와 함께 사형당했다. 1989년 복권되어 같은 날 엄숙히 재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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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불법 공산주의 운동 가담, 노동봉사대 소집
  • 1944노동봉사대 탈주,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합류
  • 1945–1954《사바드 네프》 기자
  • 1954취리히·빈·파리 특파원
  • 1955러이크 복권 요구로 MDP 제명, 코르비나 출판사 번역가
  • 1956 summerMDP 재입당, 너지 임레 측근
  • Oct–Nov 1956《머저르 서버처그》 창간·편집
  • Nov–Dec 1956민주독립운동 결성, 지하신문 발행, 12월 5일 체포

말레테르 팔

Maléter Pál

협상과 무장 저항 사이에 선 군인

“가야 합니다. 목숨을 잃더라도 나라가 제 도움을 요구합니다.”

말레테르 팔은 제2차 세계대전의 포로이자 반나치 투쟁을 거친 헝가리 장교로, 전후 공산당에 가입했다. 1956년 혁명에서 그는 킬리안 병영에 파견된 뒤 저항 세력과 휴전하고 병영 방어에 합류했으며, 군인과 시민 무장세력 사이의 조정에 관여했다. 너지 임레 정부의 국방장관이 된 그는 소련군과 철수 협상을 시도하다 체포되었고, 1958년 너지와 함께 처형되었다. 1989년 그는 복권되어 혁명의 순교자로 재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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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군 입대
  • 1940루도비카 사관학교 생도
  • 1944–1945소련군 포로, 반독일 유격대원
  • 1945임시정부 경비대대 지휘관, 헝가리 공산당 입당
  • 1956.10대령, 킬리안 병영 방어 지휘
  • 1956.11너지 임레 정부 국방장관, 소장
  • 1956.11.3퇴역 협상 대표, 퇴켈에서 체포
  • 1958처형
  • 1989복권, 추서 및 재매장
  • 1956.10.23라디오 방송국 건물에 파견된 기갑부대 지휘
  • 1956.10.25킬리안 병영 구원을 위해 전차부대 지휘
  • 1956.10.29–31무장세력과 휴전·협상, 국민위병 조직 논의 참여

실라지 요제프

Szilágyi József

법정 침묵으로 사건이 분리되어 너지보다 두 달 먼저 교수형에 처해진 혁명가

1958년 4월 법정 최후 진술: "10월이 다른 아무것도 보여주지 못했다 해도, 헝가리 민중은 사회주의라는 옷을 입은 폭정도 용납하지 않으며 자유와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데브레첸 출신의 공산주의 법률가로, 1949년 러이크 라슬로 재판의 근거를 의심했다가 모든 당직에서 해임된 후 너지 임레의 개혁파에 합류했다. 1956년 혁명기에는 너지의 개인 비서 겸 총리 비서실장으로 활동했으며, 11월 4일 소련군 진압 후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피신했다가 루마니아로 끌려갔다. 1년 넘게 취조에 협력하지 않고 단식 투쟁을 벌여 너지 재판에서 분리 심리되었고, 1958년 4월 24일 너지보다 두 달 먼저 교수형에 처해졌다. 1989년 6월 16일 영웅광장에서 너지·말레테르 등과 함께 재매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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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39불법 공산당 입당, 데브레첸대학 법학박사
  • 1940–44체포되어 3년형 선고, 1944년 석방 후 지하 활동
  • 1945–46데브레첸 경찰서장, 국가경찰본부 조직
  • 1947–49당 중앙 군사·치안부서장, 중앙통제위원
  • 1949러이크 재판 의문 제기로 해임
  • 1953–56너지 개혁파 합류, 1956년 초 출당
  • 1956.10–11너지 개인 비서 겸 총리 비서실장
  • 1958분리 재판 후 사형, 4월 24일 교수형

너지 벌라주

Nagy Balázs
볼셰비키에 대한 좌파 비판 헝가리 헝가리인 1920–2003 ○ 자연사

노동자평의회를 기록한 망명 역사가

너지가 기록한 10월 31일 결의문에서 노동자평의회는 첫 조항으로 '공장은 노동자의 재산이다'라고 선언했다.

너지 벌라주는 헝가리의 혁명적 사회주의자이자 망명 저술가로, 1956년 혁명에서 노동자평의회가 국가기구와 당 관료제 바깥에서 독자적인 정치·경제 조직을 세운 과정을 기록했다. 그는 11월 4일 이후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의 결성과 파업, 정부와의 협상을 다룬 당사자 기록을 남겼으며, 이 연구는 1961년 브뤼셀에서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다. 그의 저술은 노동계급의 자기조직이 혁명의 패배 속에서도 대안적 정치 형태로 작동한 방식과 그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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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부다페스트 노동자평의회 운동 참여
  • 1956.11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 형성과 저항 기록
  • 1961브뤼셀에서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의 형성」 프랑스어판 출판
  • 1964「International Socialism」에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 기록 게재
  • 2003사망

헤게뒤시 언드라시

Hegedüs András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인 1922–1999 ○ 자연사

혁명의 문턱에서 책임을 짊어진 젊은 총리

그는 훗날 총리직 수락을 두고 “나쁜 결정이었다”고 회고했다.

헤게뒤시 언드라시는 헝가리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사회학자로, 라코시 체제의 충실한 간부에서 체제 비판적 연구자로 이동했다. 라코시와 게뢰의 후원으로 총리가 되었지만, 1956년 혁명 때 소련군 개입 요청서에 서명하며 마비된 지도부의 정치적 책임을 떠안았다. 모스크바로 피신했다가 귀국한 뒤 사회학 연구를 이끌었고,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에 항의한 뒤 당에서 축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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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불법 헝가리 공산당 가입
  • 1945–1947MADISZ 전국 서기
  • 1951–1953농업 관련 장관
  • 1953–1955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55–1956헝가리 각료회의 의장
  • 1956혁명 중 소련군 개입 요청서 서명
  • 1963–1968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사회학 연구그룹 창립·소장
  • 1973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제명

코파치 샨도르

Kopácsi Sándor

국가의 명령과 민중을 향한 총부리 사이에서 멈춘 경찰 수장

1956년 10월 23일, 그는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코파치 샨도르는 금속 노동자와 반나치 저항 활동가 출신의 헝가리 경찰 지휘관으로, 국가기구 안에서 개혁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부다페스트 경찰청장으로서 1956년 10월 23일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하라는 명령을 거부했고, 봉기 세력과 협력하며 국가근위대 부사령관이 되었다. 그는 체포되어 너지 임레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63년 사면으로 석방되었고, 훗날 회고록으로 혁명의 내부 경험을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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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모칸 반나치 저항운동 참가
  • 1945헝가리 공산당 입당, 경찰관이 됨
  • 1949내무부 수용소 업무 담당 국장
  • 1952–1956부다페스트 경찰청장
  • 1956국가근위대 부사령관
  • 1958너지 임레 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 1963사면으로 석방
  • 1975–2001캐나다 망명과 회고록 집필

녜르시 레죄

Nyers Rezső

사회주의 체제의 시장개혁을 밀어붙인 당 지도자

1989년 모스크바 협상에서 그는 당의 목표를 “민주적 사회주의, 자치, 의회 민주주의, 경제 민주주의”라고 제시했다.

녜르시 레죄는 헝가리의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권 개혁 정치가로, 계획경제를 사회적 통제와 경제적 효율성의 결합으로 바꾸려 했다. 그는 1968년 신경제메커니즘을 이끈 뒤 정통파의 반발로 영향력을 잃었지만, 개혁의 성과와 한계를 함께 안고 1989년 정치 전환의 중심으로 돌아왔다. 1989년 6월 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의장으로 선출되어 집단 지도체제를 이끌었고, 10월 창당된 헝가리 사회당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 그의 경력은 사회주의를 민주화하고 시장기제를 도입하려 한 시도가 당의 해체와 다당제 전환으로 이어진 역사적 긴장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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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헝가리 사회민주당 입당
  • 1956식품산업부 장관
  • 1960–1962재무부 장관
  • 1968신경제메커니즘 개혁 설계
  • 1974–1981헝가리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고문
  • 1987–1988국회 개혁위원회 위원장, 국무상
  • 1989헝가리 사회주의 노동자당 의장, 헝가리 사회당 초대 의장

그로스 카로이

Grósz Károly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30–1996 ○ 신장암

개혁과 보수 사이에서 동요한 공산당 말기의 과도기적 서기장

「그렇지 않으면 무정부, 혼돈, 그리고 — 환상은 버려야 한다 — 백색 테러가 만연할 것이다」(1988.11.29)

미슈콜츠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4세에 입당한 후 선전선동 부문을 거쳐 당 기구를 차근차근 올라, 1988년 5월 카다르의 후임으로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서기장에 올랐다. '모델 변경'(modellváltás)을 내세우며 공산주의 틀 안에서의 점진적 개혁을 주장했으나, 1988년 11월 '백색 테러'를 경고한 연설은 그가 체제 전환의 속도를 전혀 읽지 못했음을 드러냈다. 이듬해 네메트 미클로시 등 급진 개혁파에 밀려났고, 당이 사회당으로 재편된 후 강경파를 이끌었으나 1990년 총선에서 의석을 얻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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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헝가리 공산당 입당 (14세)
  • 1954–56Borsod-Abaúj-Zemplén 주당위 선전선동부장
  • 1974–79MSZMP 중앙위 선전선동부장
  • 1984–87부다페스트 당위원회 제1서기
  • 1985–89MSZMP 정치국 위원
  • 1987.6–1988.11헝가리 인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총리)
  • 1988.5–1989.10MSZMP 서기장, 카다르 후임
  • 1989.12–1990재창당된 MSZMP 대행 의장, 총선 낙선

호른 줄러

Horn Gyula

1989년 철의 장막을 절단한 헝가리 외무장관이자 개혁 총리

1989년 6월 27일, 호른과 오스트리아 외무장관 알로이스 모크는 헝가리-오스트리아 국경에서 볼트커터로 철조망을 함께 끊으며 '철의 장막'에 첫 구멍을 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개혁파 외교관료에서 민주화 이후 총리까지 역임한 정치가로, 1989년 외무장관으로서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철조망을 알로이스 모크와 함께 절단하며 '철의 장막' 붕괴의 상징적 순간을 연출했다. 동독 난민들의 서독 탈출을 위한 헝가리 국경 개방을 주도하여 독일 통일의 물꼬를 텄고, 이는 1989년 동유럽 혁명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었다. 1994년 총선에서 헝가리 사회당을 압승으로 이끌어 총리가 되었고, 보크로시 긴축 개혁으로 시장경제 전환의 틀을 다졌다. 그의 정치 인생은 1956년 혁명 진압 부대 복무라는 깊은 그림자와 1989년 국경 개방의 역사적 공로 사이에서, 20세기 헝가리 좌파의 모순을 온몸으로 체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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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9재무부 근무
  • 1959–1969외무부 외교관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주재)
  • 1969–1983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 중앙위 국제부 근무, 1983년 국제부장
  • 1985–1989외무부 차관(국무장관)
  • 1989–1990외무장관: 철의 장막 개방, 소련군 철수 협정 체결
  • 1990–1994헝가리 사회당 대표, 국회 외교위원장
  • 1994–1998헝가리 총리: 보크로시 긴축 개혁 단행

포즈거이 임레

Pozsgay Imre
헝가리 공산주의 헝가리 헝가리 1933–2016 ○ 사망

1956년을 '민중봉기'라 부르고 자기 당의 정통을 무너뜨린 개혁 정치국원

서베를린에서 동독의 '반파시스트 방어벽'은 '치욕'이라며 철거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자당(MSZMP) 정치국원이자 개혁파의 이념적 후견자였다. 1989년 1월 28일 라디오에서 1956년 혁명을 '민중봉기'라 규정해 당의 정통성을 스스로 무너뜨렸고, 5월 서베를린에서는 베를린 장벽을 '치욕'이라 부르며 동독 체제를 비판했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와 함께 범유럽 피크닉을 후원해 철의 장막에 첫 균열을 냈고, 이후 헝가리 사회당 부의장을 거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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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헝가리 노동인민당 입당
  • 1957–1969바치-키슈쿤주 당위 선전선동부장·서기
  • 1976–1980문화부 장관
  • 1980–1982교육부 장관
  • 1982–1988애국인민전선 사무총장
  • 1988–1989MSZMP 정치국원 겸 국가장관
  • 1989.011956년 혁명을 '민중봉기'로 규정
  • 1990헝가리 사회당 부의장·대통령 후보; 낙선

예센스키 게저

Jeszenszky Géza
헝가리 헝가리 헝가리인 1941–

1956년의 기억을 외교로 옮긴 역사가

열다섯 살에 무장하지 않은 채 1956년 혁명에 참여했다.

예센스키 게저는 1956년 혁명을 경험한 역사학자이자 헝가리의 체제전환기 외교를 이끈 정치가다. 그는 혁명 뒤 처형된 사람을 약 350명으로 추산해 진압의 규모를 기억하는 데 기여했다. 학자로서 국제관계사와 헝가리의 대외 이미지를 연구했고, 민주 헝가리 포럼 창립 세대로서 서방과의 새로운 관계를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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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부다페스트에서 출생
  • 1961–1966외트뵈시 로란드 대학교에서 역사·영어 전공
  • 1976–2011부다페스트 경제대학교 및 코르비누스 대학교 국제관계사 교수
  • 1987–1988라키텔레크 회의 참가 및 헝가리 민주 포럼 창립
  • 1990–1994헝가리 외무장관
  • 1998–2002주미 헝가리 대사
  • 2011–2014주노르웨이·아이슬란드 헝가리 대사

네메트 미클로시

Németh Miklós

국경 개방으로 1989년의 문을 연 헝가리 개혁 총리

헝가리 국경 개방은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지는 동유럽 연쇄를 가속했다.

헝가리 사회주의노동당의 경제정책가로 성장해 1988년 말 헝가리 인민공화국의 마지막 총리가 되었다. 개혁파 지도부의 일원으로 경제·정치 전환을 추진했고, 1989년 동독 주민의 오스트리아 국경 통과를 허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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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1990헝가리 인민공화국 마지막 총리
  • 1989동독 주민의 오스트리아 국경 통과 허용
  • 1989–1990다당제 전환기 정부 운영

퇴케시 라슬로

Tőkés László

강제 퇴거 시도가 루마니아 혁명을 촉발한 헝가리계 목사

군중은 저항의 원래 이유를 잊고, 일반적 의미에서 체제 자체에 반대하기 시작했다.

클루지 출신의 헝가리계 개혁교회 목사로, 차우셰스쿠 정권의 조직적 마을 파괴 계획(체계화)을 공개 비판하고 헝가리 TV와의 비밀 인터뷰에서 인권 유린을 고발하며 세큐리타테의 표적이 되었다. 1989년 12월 16일 티미쇼아라에서 당국의 강제 퇴거 집행을 막으려 모인 신도들의 저지로 시작된 시위는 곧 반체제 봉기로 확산되어 루마니아 혁명의 직접적 발단이 되었다. 혁명 후 오라데아의 개혁교회 주교로 선출되어 교회 재건과 헝가리어 교육에 힘썼으며, 2007년부터 2019년까지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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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클루지 개신교 신학대학 졸업, 개혁교회 목사 안수
  • 1981–1982지하 저널 『엘렌폰토크』 기고, 세큐리타테의 첫 박해
  • 1986티미쇼아라 개혁교회 보좌목사 부임
  • 1988–1989체계화 정책 공개 비판, 헝가리 TV와 비밀 인터뷰로 세큐리타테 표적
  • 1989.12.16강제 퇴거 저지 시위가 루마니아 혁명으로 확산
  • 1990오라데아 키라이하게멜레크 개혁교구 주교 선출
  • 2007–2019유럽의회 의원 (2010–2012 부의장)

베케시 처버

Békés Csaba
헝가리 헝가리인 1957–

1956년을 냉전 국제정치 속에서 해석한 역사가

그의 연구에서 1956년 혁명은 냉전을 끝낸 돌파구가 아니라 냉전의 교착을 굳힌 세계정치의 사건이었다.

베케시 처버는 헝가리 현대사와 냉전 국제정치를 연구한 역사가로, 1956년 혁명을 국내 사건에 가두지 않고 세계정치의 교차점에서 분석했다. 그의 연구는 혁명이 냉전의 균형을 무너뜨렸다기보다 그 교착을 굳히는 국제적 조건과 선택을 추적한다. 그는 문서 편찬과 다중 기록보관소 연구를 통해 헝가리의 경험을 동유럽 사회주의권과 세계 냉전사의 연결 속에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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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1983세게드 요제프 아틸라 대학교에서 역사·영어 전공
  • 1993『1956년 헝가리 혁명이 소비에트 공산주의 체제 붕괴에서 차지한 자리』 편집
  • 1996『1956년 헝가리 혁명과 세계정치』 출간
  • 1998–부다페스트 냉전사 연구센터 창립 이사
  • 2002『1956년 헝가리 혁명: 문서로 보는 역사』 공동 편집
  • 2014헝가리 과학아카데미 박사 학위 취득
  • 2022『헝가리의 냉전』 출간
  • 2022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아카데미상 수상

오르반 빅토르

Orbán Viktor

1989년 반공청년 지도자에서 '비자유민주주의' 창시자로

우리가 충분히 단호하다면, 집권당이 자유선거에 복종하도록 강제할 수 있다. 56년의 정신을 놓지 않는다면, 러시아 군대의 철수 협상을 즉시 시작할 정부를 선출할 수 있다.

오르반 빅토르는 1989년 너지 임레 재매장식에서 소련군 철수와 자유선거를 요구한 연설로 전국적 명성을 얻은 반공청년 지도자였다. 1998년 총선 승리로 헝가리 최연소 총리가 되어 NATO 가입을 이끌었고, 2010년 재집권 후 개헌·사법·언론을 장악하며 스스로 '비자유민주주의'라 부르는 체제를 구축했다. 2014년 바일레 투슈나드 연설에서 자유민주주의와의 결별을 공개 선언했으며, 2020년 헝가리 역사상 최장기 총리가 되었다. 반공 저항으로 출발한 그의 정치 여정은 21세기 권위주의 포퓰리즘의 대표적 모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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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8Fidesz (Fiatal Demokraták Szövetsége) 공동 창립
  • 1989너지 임레 재매장식 연설; 반대파 원탁회의 Fidesz 대표
  • 1990국회의원, Fidesz 원내대표 (1993까지)
  • 1993–2000, 2003–Fidesz 당수
  • 1998–2002헝가리 총리, NATO 가입 주도
  • 2010–2026총리, 개헌 및 '비자유민주주의' 체제 구축

리테르 라슬로

Ritter László
헝가리 헝가리인 1977–

냉전 군사사의 기록보관소 연구자

리테르는 기록보관소 자료를 들어, 헝가리군이 남부 방어선을 쌓은 것은 티토 침공이 아니라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들어오는 서방의 공격을 막기 위함이었다고 반박했다.

리테르 라슬로는 헝가리의 현대사 연구자로, 정보기관·국가안보와 헝가리-유고슬라비아 관계를 주로 연구했다. 그는 티토-스탈린 분열 뒤 소련이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할 계획을 세웠다는 키라이 벨러의 회고를 헝가리와 국제 기록보관소 자료로 재검토했다. 그의 연구는 당시 헝가리군의 남부 방어와 전면전 대비를 침공 준비와 구별하며, 스탈린의 군사적 의도를 둘러싼 사료적 불확실성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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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외트뵈시 로란드대학교 역사학 전공 졸업
  • 2001중앙유럽대학교 중부유럽사 석사
  • 2001–2010헝가리과학원 역사연구소 연구 보조원
  • 2005유고슬라비아 군사계획 관련 사료 발표, 세르비아 현대사연구소
  • 2007국제정보사학회 연례회의에서 티토 유고슬라비아 비밀전쟁 발표
  • 2008「War on Tito’s Yugoslavia?」 출간 및 바르샤바 학술회의 발표
  • 2010헝가리과학원 역사연구소 박사과정 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