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 언덕 위에서, 목숨을 바쳐 우리가 선택한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 1827년 참새 언덕에서 열다섯 살의 오가료프와 게르첸이 러시아 해방을 위해 나눈 평생의 맹세.
러시아의 시인·철학자이자 혁명적 민주주의자. 1827년 참새 언덕에서 게르첸과 러시아 해방을 위한 평생의 맹세를 나누었으며, 런던 망명 중 《종》(콜로콜)과 《북극성》을 공동 발행하며 개혁기 러시아 여론을 움직였다. 농민 공동체에 기초한 '러시아 사회주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비밀 조직 '토지와 자유'의 창설에 참여했으며, 귀족기에서 라즈노친치기 혁명운동으로의 이행을 이론적으로 매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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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1833모스크바 대학 물리수학부 및 윤리정치학부 수학
1834–1839학생 서클 참여로 체포, 펜자 유형 및 주지사 사무실 근무
1841–1846유럽 체류, 베를린 대학 수강, 첫 시 《Otechestvennye Zapiski》 발표
1846–1856펜자 영지에서 벨로오무트 농민 1,800명 해방, 공동체 경영 실험, 첫 시집 출간
트리어의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라인신문』 편집장으로 출발했다. 1845년 프로이센 국적을 버린 뒤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였고, 1849년부터는 런던 망명자였다. 엥겔스와 40년을 함께 일하며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썼고 제1인터내셔널을 이끌었다. 만년의 『고타강령 비판』(1875)은 독일 노동자 정당의 통합강령에 들어앉은 라살레주의를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로, 국가를 사회주의의 도구로 보는 발상에 대한 그의 마지막 답변이다.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멸한다.」 —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
바르멘의 방적공장주 집안에서 태어나 맨체스터의 가업을 관리하며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1845)를 썼다. 1848년 혁명과 바덴 봉기를 거친 뒤 20년을 상사에 매여 런던의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했다. 뒤링을 반박한 『반뒤링론』(1878)에서 세 개 장을 뽑아 만든 소책자가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이고, 이 책은 곧 열 개 언어로 번역되어 마르크스주의 입문서가 되었다. 마르크스 사후에는 『자본론』 2·3권을 편집했고, 1891년 15년간 묻혀 있던 『고타강령 비판』을 당 지도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표했다.
러시아 문명주의 역사철학의 창시자. 주저 『러시아와 유럽』(1869)에서 세계사를 문화-역사적 유형의 순환으로 파악하고 슬라브 유형을 독자 문명으로 정립했다. 젊은 시절 페트라솁스키 서클에서 푸리에 사상을 연구하다 체포·구금되었으나 보수로 전향, 범슬라브주의를 체계화하여 포베도노스체프·카트코프와 함께 구체제 이데올로기 지형을 형성했다. 도스토옙스키가 '모든 러시아인의 필독서'라 칭했고 슈펭글러·토인비의 문명론을 선취한 이 저작은 러시아 보수사상사의 핵심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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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6–1843차르스코예 셀로 리체움 졸업
1843–1849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자유청강; 페트라솁스키 서클에서 푸리에 사상 강의
1849체포·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100일 구금 후 볼로그다 유배
1852–1881어업·해양 원정 지휘(볼가·카스피·백해·아조프·북극해); 러시아 어업법 체계화; 콘스탄티노프 메달(1866)
1869『러시아와 유럽』 출간 — 문화-역사적 유형론으로 국제적 명성
1879–1885니키츠키 식물원장(1879–1880); 『다위니즘』(1885) 출간; 티플리스에서 사망
『역사적 편지』로 인텔리겐치아의 '민중에 대한 빚'을 선언한 나로드니키 철학의 기초적 이론가
『러시아 혁명 청년에게』(1874): "러시아 사회의 재건은 인민을 위해서뿐 아니라 인민을 통해서 달성되어야 한다. 대중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며, 우리 사상의 승리는 준비와 현 시점에서 가능한 것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러시아 나로드니키 운동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 포병장교이자 수학 교수로 출발하여 1860년대 혁명운동에 투신, 카라코조프 사건으로 유형된 볼로그다에서 『역사적 편지』(1868–69)를 집필했다. 이 저작은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개인'이 민중에 대한 지적 빚을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1870년대 '민중 속으로' 운동의 사상적 도화선이 되었다. 망명 후 제1인터내셔널에 가입하고 파리코뮌을 목격했으며, 제네바에서 『브페료트!』지를 발행하여 바쿠닌의 급진적 봉기론 및 트카초프의 음모적 전위당론과 논쟁하며 점진적 선전·교육 노선을 체계화했다. 후기에는 인민의지파와 협력하고 제2인터내셔널에서 활동했으며, '의식적 역사적 연대' 개념을 중심으로 한 사회학 이론을 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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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7–1842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 수석 입학·졸업, 수학 재능으로 오스트로그라츠키의 최우수 제자로 꼽힘
1844–1866미하일롭스크 포병아카데미 수학 교수 — 1858년 대령 진급, 『실천철학 제문제 연구』(1860) 출간
1862–1866첫 번째 '토지와 자유' 참여, 체르니솁스키와 교류, 학생운동 지원 — 카라코조프 사건 후 체포
1867–1870볼로그다 유형 — 가명 '미르토프'로 『역사적 편지』(1868–69) 집필, 로파틴 도움으로 파리 탈출
1870–1872파리 망명 — 제1인터내셔널 가입, 파리코뮌 목격, 런던에서 마르크스·엥겔스와 회견
1873–1877제네바·런던에서 『브페료트!』 잡지·신문 발행 — '라브리즘'(선전 중심 점진주의) 체계화, 바쿠닌·트카초프와 논쟁
1883–1886인민의지파와 협력, 티호미로프와 『인민의지 회보』 공동 편집
1889–1900제2인터내셔널에서 흐느착당 대표, 파리 사회주의 살롱 주재, 『사상사 주요 계기들』 저술 — 몽파르나스 묘지 안장
「철과 같은, 잔혹한 법칙(das eiserne und grausame Gesetz)」 — 임금을 생존 수준에 묶어 둔다며 라살레가 임금철칙에 붙인 이름(1863)
브레슬라우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변호사이자 선동가. 1863년 5월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를 세워 5년 임기의 회장이 되었고, 보통선거권으로 국가를 움직여 국가 보조 생산협동조합을 세우면 사회주의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비스마르크와 비밀리에 만나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해 마르크스의 깊은 의심을 샀다. 1864년 결혼 문제로 벌인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사흘 뒤 제네바 근교에서 죽었다. 그가 남긴 강령은 11년 뒤 고타 통합강령의 뼈대가 되었다.
「국가사회주의와 가장 앞장서 싸워 온 것이 우리 독일 사회주의자들이며, 국가사회주의가 실은 국가자본주의임을 누구보다 분명히 보인 사람이 나다.」 — '우리의 최근 대회'(1896)
기센에서 태어나 1848년 봉기에 가담했다가 스위스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해 12년간 마르크스·엥겔스의 가까운 동지로 지냈다. 1869년 베벨과 함께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을 세웠고, 보불전쟁 전쟁공채에 반대하다 체포되어 1872년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요새금고형을 받았다. 1875년 고타 통합대회를 성사시킨 주역이자 통합강령의 기초자였으며, 마르크스가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1890년부터 죽을 때까지 당 기관지 『전진』을 편집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아버지다.
당대 과학자들이 인간 비행을 비웃을 때, 주콥스키는 1891년 강연 「새의 비상에 관하여」에서 글라이더의 '죽음의 루프' 가능성을 수학으로 증명했고, 22년 후 네스테로프가 하늘에서 그 증명을 완성했다.
러시아 항공학의 창시자이자 현대 유체역학의 아버지. 새의 비행을 수학적으로 분석하여 양력의 순환이론을 정립했고, 1902년 모스크바대에 러시아 최초의 풍동을 건설했다. 1904년 유럽 최초의 공기역학 연구소를 쿠치노에 세웠고, 1918년에는 TsAGI(중앙유체역학연구소)를 창설하여 소련 항공·우주 과학의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제자 투폴레프, 스테치킨, 유리예프 등이 소련 항공 산업을 이끌었으며, 치올콥스키의 고립된 이론을 국가적 연구 역량으로 전환시킨 제도적 통로가 바로 주콥스키의 학교였다.
동료가 거리의 총격 때문에 10분 지각했다고 설명하자, 파블로프가 외쳤다: '혁명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실험실에서 할 실험이 있는데!'
소화생리학 연구로 1904년 노벨상을 수상하고, 개 실험을 통해 조건반사(고전적 조건형성)를 발견하여 현대 행동심리학과 신경과학의 토대를 놓은 러시아·소비에트 생리학자. 레닌의 찬사와 소비에트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면서도 공산당 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1927년 스탈린에게 지식인 탄압에 대해 '러시아인이라 불리는 것이 부끄럽다'고 썼고 1934년 키로프 암살 후에는 대숙청을 몰로토프에게 항의했다. 그의 고등신경활동에 관한 유물론적 생리학은 사후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적 정설로 교조화되어, 그 자신의 치열한 독립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파블로프 학설' 국가 정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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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187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전공, 자연과학 후보 학위 취득
1875–1879제국의과외과학원 수학, 금메달로 졸업
1884–1886독일 라이프치히·브레슬라우에서 카를 루트비히·루돌프 하이덴하인 밑에서 연구
그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고 말했을 때 동료 유형수들의 반응은 이랬다: '내가 마호메트의 추종자라고 선언했더라도 그들은 이보다 더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하여 '검은 재분할'을 거친 후 1883년 스위스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 등과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 해방' 그룹을 창립했다. 조직의 실무자로서 불법 출판물의 간행과 러시아 밀반입을 총괄했으며, 1884년 독일에서 체포되어 러시아에 인도된 후 13년간 카라 강제노동형을 복역했다. 1901년 탈출 후 《이스크라》 편집진에 합류하고 RSDLP 제2차 대회에서 멘셰비키로 서서 당 분열의 한 축을 형성했으며, 말년에는 회고록 《반세기》(За полвека)로 러시아 혁명운동사의 1차 사료를 남겼다.
1900년 4월 프스코프에서 열린 『이스크라』 창간 조직회의에서 그는 레닌, 마르토프, 스트루베와 함께 자리했으나, 정작 사회민주당 지하조직에는 끝내 가입하지 않았다.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경제학자로, 1894년 『현대 영국의 공업위기』에서 자본주의 공황의 내생적 주기이론을 제시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표트르 스트루베와 함께 나로드니키에 맞서 마르크스주의 경제사 분석을 전개하고 1900년 『이스크라』 창간 회의에 참여했으나, 이후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 칸트 윤리학에 기초한 '윤리적 사회주의'로 전환, 협동조합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했다. 1917년 2월혁명 후 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재무장관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창립 회원을 지냈으며, 그의 공황이론은 케인스 등 서구 거시경제학에 영향을 미쳤다.
'법이란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고 이 계급의 조직된 힘, 즉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체계, 즉 질서이다.' — 『법과 국가의 혁명적 역할』
라트비아 출신 법률가·혁명가. 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을 이끌었고, 10월 혁명 후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를 기초해 소비에트 사법의 토대를 놓았다. 1918~1920년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 1923년부터 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 파슈카니스와 공산아카데미 법학부를 창설하고 최초의 『국가와 법 백과사전』을 편집했으며, 법을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고 국가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체계'로 정의한 계급적 법 개념은 초기 소비에트 법이론의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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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3–1888리가 김나지움 졸업,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 변호사 개업
1888–1897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 및 신문 『디에나스 라파』 주도
1897–1903체포, 7개월 구금 후 뱟카현 5년 유형 — 풍자집 『작은 등에』 공동 집필
1906RSDRP 입당, 라트비아 사회민주당 통합대회 주재 — RSDRP 지역조직으로 편입
제국 학술원 출신으로 유일하게 공산당에 입당해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한 야페트 이론의 창시자
'언어학의 세계 규모적 정립' — 마르가 자신의 이론을 일컫던 표현이다. 그에게 모든 언어는 네 원시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언어는 계급적 상부구조였다.
그루지야 쿠타이시에서 태어난 마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카프카스 언어·고고학으로 명성을 쌓아 1912년 제국 학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혁명 후 언어를 계급적 상부구조로 보며 모든 언어가 네 원시음(sal, ber, yon, rosh)에서 비롯되었다는 '야페트 이론'을 주창, 1930년 공산당 입당과 함께 학술원 부원장이 되어 사망 시까지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했다. 그의 유사과학적 이론은 1950년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문제」로 공식 폐기되었으며, 그 행로는 혁명기 과학과 권력의 길항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1917년 12월, 레닌은 파르부스의 귀국 요청을 거부하며 답했다: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독일 사민당(SPD)의 저널리스트로, 1904~1905년 레프 트로츠키와 함께 '영구혁명론'을 공동 발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정부 자금으로 러시아 혁명 조직망을 구축했으며, 1917년 4월 레닌의 '봉인열차' 귀환을 주선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 집권 후 레닌은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며 그의 귀국을 거부했고, 파르부스는 독일에 남아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지도자들의 고문이 되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현실정치 사이에서 자신의 원칙을 상품화했다는 비판을 받는,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에서 가장 논란적인 인물 중 하나다.
「그루지야에서 소비에트 권력의 수립은 외국 점령의 외양을 띠었다, 나라 안에는 혁명에 가담할 준비가 된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21년 12월, 모스크바 중앙위원회 보고
그루지야 구리아 출신으로 트빌리시 신학교와 바르샤바 수의학연구소에서 수학했다. 1891년 사회민주주의에 합류해 멘셰비키 우세 지역에서 드문 볼셰비키 지도자로 활동했고, 1921년 2월 혁명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반대파에 대한 온건 노선과 그루지야 주권 유지를 주장하다 7월 스탈린에게 해임되고 므디바니로 교체되었다. 이 사건은 1922년 '그루지야 사건'의 직접적 전사이며, 이후 고스플란·인민위원회·최고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대숙청을 생존한 몇 안 되는 구볼셰비키 원로로 1941년 사망했다.
1909년 《베히》 서문에서, "우리는 총검과 감옥으로 우리를 민중의 분노로부터 지켜주는 바로 그 권력을 축복해야 한다"고 썼다.
러시아 문화사가이자 수필가로, 1909년 지식인의 혁명적 급진주의를 비판한 논쟁적 저작 《베히》(Vekhi)의 발기인이자 편집자였다. 그는 인텔리겐치아가 외적 사회 형태의 재편에 매몰되어 내적 정신의 자각을 외면했다고 보았으며, "우리를 민중의 분노로부터 지켜주는 총검과 감옥의 권력을 축복해야 한다"는 도발적 문장으로 거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혁명 후에는 전러시아 작가연합 초대 의장과 나르콤프로스 문학부문을 지냈으며, 푸슈킨 연구(《푸슈킨의 지혜》, 1919)와 19세기 러시아 사상사 연구로 중요한 학문적 유산을 남겼다.
1921년 기근 속에서 그녀는 폼골의 구호 활동에 나섰고, 이듬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되었다.
예카테리나 쿠스코바는 혁명적 인민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경제주의를 거쳐 자유주의적 개혁사회주의로 이동한 정치활동가·저술가였다. 1899년의 《크레도》는 노동운동의 경제투쟁과 민주적 개혁을 앞세우며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전략을 둘러싼 논쟁을 촉발했다. 1905년 이후 그녀는 해방동맹, 협동조합 운동, 여성 평등 운동과 여러 신문을 통해 정당 독점에 맞선 민주적 연합을 모색했고, 1917년에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도 코르닐로프 세력을 비판했다. 1921년 기근 때에는 세르게이 프로코포비치와 함께 폼골의 비볼셰비키 구호 활동을 조직했으나, 위원회가 해산된 뒤 체포·추방되어 망명지에서 글을 계속 썼다.
「코바, 그만둬, 창피한 꼴 당하지 말게. 이론이 자네 분야가 아니란 건 모두 알고 있네.」 — 당 회의에서 스탈린에게 던진 말.
오데사 출신의 유대계 러시아인 마르크스주의자로, 17세부터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ИМЭ)를 창설하여 세계 최고의 마르크스 문헌 컬렉션을 구축했고, 마르크스·엥겔스의 미발표 원고를 직접 발굴·편집하여 《독일 이데올로기》 제1장과 《자연변증법》을 최초로 출판했다. 소비에트 아카데미 정회원(1929)이자 당대 최고의 마르크스 학자였으나, 제헌의회 해산·브레스트 평화·당내 이견 탄압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독립적 성향 때문에 1931년 체포·추방되었고, 1938년 사라토프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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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1889오데사에서 노동자 서클 조직,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 첫 파리 체류, 플레하노프·라브로프와 교류
1891–1899체포·18개월 구금 후 4년 강제노동형, 이후 키시뇨프 유형; 총 5년을 크레스티 교도소에서 복역
1901–1905그룹 「보르바」 이끌며 RSDLP 제2차 대회 참가; 레닌의 당 중앙집권화·분파주의를 공개 비판
1905–1907러시아로 귀국, 페테르부르크 최초 노동조합 조직; 제2두마 사민당 분파에서 활동
1907–1917해외 망명; 독일 사민당 기록보관소 연구, 카우츠키의 학술비서; 마르크스·엥겔스 미출간 원고 다수 발굴·출판
1917–1918귀국 후 메즈라욘카 합류, 볼셰비키와 통합; 제헌의회 의원 당선; 무장봉기·제헌의회 해산·언론탄압에 반대
1918–1920브레스트 평화 반대로 일시 탈당 후 복당; 국가기록관리총국(글라바르히프) 국장, 과학총국장
1921–1931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ИМЭ) 창설·소장; 《독일 이데올로기》 제1장(1924)·《자연변증법》(1925) 최초 출판
1929소비에트 아카데미 정회원 선출(역사학, 27/30표); 적기노동훈장 수훈
1931–1938멘셰비키 연계 혐의로 체포·제명·사라토프 유형; 1937년 재체포, 1938년 1월 21일 총살
1922년 페트로그라드 재판에서 크라시코프는 정교회 메트로폴리탄 베니아민에게 사형을 구형하며 "혁명 앞에서 교회는 무릎 꿇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법정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1892년 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단'에 가입하고 1903년 제2차 당대회에서 레닌·플레하노프와 함께 뷰로 위원을 지낸 볼셰비키 혁명가로, 1924년 초대 소련 검찰총장에 취임해 소비에트 사법 체계의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반종교 저널 《혁명과 교회》를 창간하고 1918·1924·1936년 소비에트 헌법 제정에 참여했으며, 1938년 대숙청 와중에 해임된 뒤 이듬해 병사했다.
그는 훗날 회고했다. '나는 이성보다는 본능으로 볼셰비키에게 끌렸다. 러시아를 붕괴와 완전한 파멸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그들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제국 육군 소장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최초의 고위 장교로, 최고군사위원회 군사지도자(1918)와 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장(1919)을 맡아 적군의 초기 조직을 지휘했다. 독일군 총공세에 레닌의 긴급 소환을 받고 페트로그라드로 달려가 나르바-프스코프 방어선을 설정했으며, 구 제국 장교들을 군사전문가로 대거 기용하는 제도를 주도했다. 전간기에는 소련 최초의 측지국을 창설했고, 스탈린 시기 두 차례 체포되었으나 살아남아 1944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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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1898콘스탄티노프 측량학교·모스크바 보병 사관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898–1913키예프 군관구 등 각 참모부 근무, 『전술교본』 개정과 응용전술 강의
1914–1915제176 페레볼로첸스키 연대장으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3군·북서전선 군수참모부장, 소장 진급
1915–1916북부전선 참모장 대리, 황후의 반대로 경질
1917.3–9프스코프 수비대장, 코르닐로프 반란 당시 북부전선 사령관 대리로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
1917.11–1918.8최고사령관 참모장 → 최고군사위원회 군사지도자, 독일군 차단 '차폐' 방어체계 구축
1919.6–7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장
1919–1944최고측지국 초대 국장(1919–23), 항공촬영국 조직(1925), 1931년 체포 후 석방, 사단지휘관(1937)·중장(1944) 진급
“페도세예프는 그를 아는 모든 이의 비상한 호감을 받았으며, 자신의 대의에 전적으로 헌신한 구시대 혁명가의 전형이었다” — 레닌, 1922년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 니콜라이 페도세예프는 1888년 카잔에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해 젊은 레닌과 고리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한 인물이다. 수감 중에도 레닌과 이론 서신을 교환했으며, 농노제 붕괴의 경제적 원인을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분석한 저작과 프롤레타리아 정당 강령 초안을 집필했다. 나로드니키 이론가 미하일롭스키와의 논쟁은 초기 마르크스주의-나로드니키 논쟁의 장을 열었고, 그의 강령은 레닌이 '유일하게 올바른' 것이라고 평했지만, 1898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동료의 중상에 시달리다 27세로 생을 마감했다.
네 살배기 아들 이반의 장례식에서 불가코프는 '하느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깨달았다'고 기록했고, 이 신비체험을 정교회 귀환의 결정적 계기로 삼았다.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이자 경제학자로, 법적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출발해 관념론을 거쳐 사제 서품에 이르는 20세기 러시아 지성사의 대표적 전향 궤적을 그렸다. 1890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저술로 명성을 얻었으나, 《자본주의와 농업》(1900)에서 마르크스 이론의 한계를 발견하고 칸트와 솔로비요프 철학을 경유해 교회로 복귀했다. 1909년 《이정표》에 기고한 「영웅주의와 금욕주의」에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무신론적 혁명주의를 비판했고,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추방된 후 파리에서 성 세르기우스 정교신학원을 공동 설립하여 소피아론 신학 체계를 완성했다.
1943년, 평생의 반볼셰비키 멘셰비키 지도자 단은 『볼셰비즘의 기원』에서 볼셰비즘이 '우리 시대의 핵심 사상인 사회주의의 담지자'로 역사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썼다.
표도르 단은 혁명가·의사이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멘셰비키 분파의 창립 지도자이며 핵심 이론가였다. 1903년 제2차 당대회에서 마르토프 편에 서 레닌에 맞섰고, 1917년 2월 혁명 후 '혁명적 방어주의'의 주요 이데올로그로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1922년 망명 후 1923년 마르토프 사망부터 1940년까지 멘셰비키 해외대표단을 이끌며 볼셰비키 권위주의와 서구 사민주의 타협에 맞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견지했다. 『볼셰비즘의 기원』(1943)에서는 볼셰비즘이 사회주의의 역사적 담지자임을 인정하면서도 소비에트 체제의 정치적 자유화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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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896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활동, 체포 후 뱟카로 유형
1901–1903베를린 망명, 이스크라 지원 그룹 참여; RSDLP 제2차 대회에서 마르토프 지지, 멘셰비키 공동 창립
1905–1912멘셰비키 주요 신문 『나찰로』 편집진, RSDLP 제4·5차 대회; 『사회민주주의자의 목소리』 공동 편집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 '혁명적 방어주의' 이데올로그
1919–1920제7·8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멘셰비키 대표로 연설; 적군 군의관 복무
1922–1923체포·투옥 후 해외 추방;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 창립 참여, 소비에트 시민권 박탈
1923–1940멘셰비키 해외대표단 단장; 베를린·파리에서 망명 활동
1941–1947뉴욕 망명, 잡지 『노비 푸티』 발행; 『볼셰비즘의 기원』(1943) 집필
“소매상은 예전에도 투기했고 지금도 투기하지만, 예전에는 물가가 높지 않았고 지금은 높다.”
세르게이 프로코포비치는 통계와 정치경제를 바탕으로 러시아의 농업·노동·협동조합 문제를 연구한 경제학자였다. 그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수정주의적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로 이동했지만, 국가가 시장을 조절해야 한다고 보며 노동과 농민의 생활 문제를 계속 다뤘다. 1917년 임시정부의 식량장관으로서 전시 동원, 운송 혼란, 농촌의 곡물 유보가 겹친 위기 속에서 고정가격과 국가 곡물독점의 한계를 마주했다. 이후 기근 구호 활동으로 체포·추방되었고, 망명지에서 소련 경제를 통계적으로 분석했다.
그의 이즈베스티야 사설은 '스테클랴슈키'(유리조각)라 불렸고, 레닌은 직접 쪽지를 보냈다: "스테클로프 동지! 당신 사설을 읽었소. 바로 이렇게 써야 하오, 더 많이!" 스테클로프는 이 쪽지를 액자에 넣어 편집실 벽에 걸었다.
오데사 출신의 볼셰비키 언론인이자 역사가.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이 되어 1925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918년 RSFSR 헌법과 1924년 소련 헌법의 공동 기초자였으며 VTsIK 상임간부회 위원을 지냈다. 고리키와 함께 《노바야 지즌》을 편집하고 월간 《노비 미르》 창간을 주도했다. 바쿠닌·체르니솁스키 평전을 비롯해 방대한 사회주의 사상사 저작을 남겼다. 1938년 체포되어 1941년 사라토프 감옥에서 사망, 1956년 복권되었다.
체카의 펠릭스 제르진스키에게 한밤중 심문을 받으면서도 "볼셰비즘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져 당당히 맞섰다. 제르진스키는 그를 석방했다 — "보라, '관점'을 가진 인간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해 기독교 실존주의와 개인주의 철학을 정립한 러시아의 대표적 종교·정치 사상가다. 『이정표』(1909) 그룹의 주축으로서 혁명적 급진주의를 비판했고, 볼셰비키 집권 후 '자유 정신문화 아카데미'를 설립해 독립적인 철학 활동을 이어갔다.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소련에서 추방된 후 베를린과 파리에서 『러시아 이념』 『노예와 자유』 등 주요 저작을 집필했으며, 일곱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신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비창조된 자유' 개념은 전체주의 비판과 실존주의적 정치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이반 알렉산드로프는 철도·교량 기술에서 출발해 수력공학과 경제지역화의 결합을 개척한 러시아·소련의 공학자였다. 그는 대규모 단일 댐이라는 구상으로 드네프르 수력발전소를 설계하고, 전력 생산을 산업 배치와 교통망의 문제로 함께 다루었다. GOELRO 작성에 참여한 그의 작업은 전기화를 기술 사업이 아니라 계획된 국민경제 재편의 틀로 놓았으며, 이후 5개년계획의 공간적 사고에도 흔적을 남겼다. 학술 연구와 국가 계획 사이에서 활동한 그는 1930년대 초 고스플란의 에너지 부문을 이끌었지만, 말년에는 다시 과학 연구와 교육에 집중했다.
1920년대 소련 군사 이론의 대논쟁에서 투하쳅스키는 스베친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스베친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적도, 되려 한 적도 없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는 제국주의 간섭의 대행자다." 학문적 논쟁은 정치적 공격으로 변질되었고, 스베친은 끝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차르 장군 출신의 소련 최고 군사이론가. 『전략』(1927)에서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미래 전쟁을 경제적 총력전으로 예견했으나, 그의 경고는 외면되었고 1938년 숙청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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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903미하일롭스크 포병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1904–05러일전쟁 참전: 제22동시베리아연대 중대장, 제16군단 참모
1914–16제1차 세계대전: 제6핀란드소총연대장, 흑해해병사단장, 소장 진급
1918볼셰비키 편입, 전러시아 주참모부장 역임
1918–31참모본부 아카데미(후일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전략 및 전쟁사 주임 지도관
흐루쇼프의 회고: "당내에서 야로슬랍스키를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렀다." 그가 내건 구호 — "종교에 대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야로슬랍스키는 소비에트 반종교 정책의 최고 이데올로그로, '전투적 무신론자동맹'(1925~1943) 의장으로서 조직적 무신론 운동을 총괄했다. 1898년 RSDLP에 입당,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무장봉기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을 지냈다. 1924년부터 10년간 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로 당내 숙청을 주도했으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성서》 등 방대한 무신론 저작을 남겼다.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이자 공식 당사 해석자였고, 1939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나치의 회유에 대한 카르비셰프의 답변: "신념은 이빨과 함께 빠지지 않는다. 나는 군인이며 내 의무에 충실하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내전을 거친 군사공학자로, 100여 편의 논문을 통해 소련 축성학을 정립하고 프룬제 아카데미와 참모본부 아카데미에서 적군 지휘관 세대를 가르쳤다. 브레스트 요새, 스탈린 라인, 만네르하임 선 돌파 등 주요 방어·공세 작전의 공학적 기반을 설계했다. 1941년 포로가 된 후 나치는 그를 '러시아 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세우려 했으나 3년 반 동안 모든 회유를 거부하고 수용소 저항운동을 이끌었으며, 1945년 2월 마우트하우젠에서 영하 12도 얼음물 고문 끝에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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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1905제1동시베리아 공병대대 전신중대장, 러일전쟁 참전, 5개 훈장
1908–1911니콜라옙스크 군사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1911–1917브레스트 요새 건설, 1차대전 참전(브루실로프 공세), 중령
1918–1920동부·남부전선 방어선 구축, 페레콥·촌가르 공세 공병지원
1923–1934공병위원회 위원장, 프룬제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관, 스탈린 라인 설계
1934–1941참모본부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수, 공병 중장(1940), 군사학 박사(1941)
1923년 7월 18일 《프라우다》 1면 기사 「시간이 비행기를 만든다」에서: "우리는 오늘 회의 시작을 기다리느라 7천 노동시간을 허비했다. 그 정도 노동력이면 비행기 한두 대는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또 '비행기 반 대分'을 더 기다린 뒤에야 회의가 시작됐다." 이 글이 계기가 되어 '시간' 동맹이 창립되었다.
1904년 입당. 프롤레트쿨트 이론가로 '시간' 동맹을 이끌며 노동과학(NOT)을 주도했다. 전연방 예술위원회 초대 의장(1936–38)으로 스탈린기 문화 통제를 구축했고, 《파리코뮌의 역사》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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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볼셰비키 입당, 모스크바대학 퇴학, 타간카 감옥 수감
1905–1912니즈니노브고로드·페테르부르크·키예프에서 지하활동과 볼셰비키 언론 기고
1912–1917런던·파리·뉴욕 망명, 《프라우다》 특파원, 아일랜드 독립운동 취재
1918–1920프롤레트쿨트 이론가·《이즈베스티야》 부편집장·로스타 책임자
1921–1926주스웨덴 전권대표, 노동과학조직(NOT) 연구 주도, 주이탈리아 전권대표
1928–1930볼셰비키 중앙위 선전부 부장·공산주의아카데미 문학예술언어연구소장
1930–1936인민위원회비서국장·전연방 라디오위원회 의장
1936–1938전연방 예술위원회 초대 의장 — 불가코프·메이예르홀트 탄압, 형식주의 미술 숙청
동시대인들은 사제복을 입은 플로렌스키가 소비에트 정부 부서의 다른 지도자들과 나란히 일하는 모습을 놀라운 광경으로 기억했다.
파벨 플로렌스키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 신학자,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전기공학자로, 20세기 초 러시아 지성사에서 가장 독특한 인물 중 하나다. 대표작 『진리의 기둥과 터』(1914)는 정교회 신정론의 기념비적 저작으로, 합리적 분석을 넘어선 직관적 체험을 통해 신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 후에는 트로츠키의 추천으로 GOELRO 전기화 계획에 참여했으며, 사제복을 벗지 않은 채 소비에트 과학자들 사이에서 일하는 이중적 삶을 살았다. 1922년 에세이 「역원근법」은 이콘의 공간 구성에 대한 선구적 분석으로 타르투 기호학파에 영향을 미쳤으며, 1937년 대숙청 시기 NKVD에 의해 처형되었다.
“사회 분야에서도 정밀한 측정, 공식, 도면, 통제 게이지, 사회적 노르말의 시대가 도래해야 한다. 우리는 정신생리학과 경제학의 완전한 수학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 「우리의 과제」 (1921)
수즈달 출생. 1900년 RSDLP 입당, 1905년 코스트로마 소비에트 의장을 지낸 볼셰비키 혁명가. 프랑스 공장 노동 경험을 바탕으로 1920년 중앙노동연구소(CIT)를 창설, '사회공학'을 정립했다. CIT는 50만 명 이상 숙련 노동자를 배출했다. 1932~1936년 전연방표준화위원회 의장. 프롤레트쿨트 시인으로 『노동타격의 시』(1918)를 발표했다. 1938년 체포, 1939년 총살.
"수하노프는 소부르주아지의 가장 훌륭한 대표자 중 한 명이다" — 레닌, 1917년 9월 1일
본명 니콜라이 기메르. 1917년 2월 혁명 직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창립 위원이 되었으며, 멘셰비키-국제주의자로서 전쟁과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연합을 주장했다. 7권짜리 회고록 『혁명의 기록』은 1917년의 가장 생생한 1차 사료로 남아 있다. 1917년 10월 10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무장봉기를 결의한 역사적 회의가 그의 페트로그라드 아파트에서 열렸다. 1931년 멘셰비키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1940년 거짓 혐의로 총살,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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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1905사회혁명당(SR) 입당; 1904년 체포, 타간카 감옥 수감; 1905년 10월 석방 후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 참가
1911–1913아르한겔스크주로 3년 유형; 농업 통계 자료 정리
1914–1917잡지 『소브레멘니크』『레토피시』 편집자; 반전 국제주의자;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창립 위원, 『이즈베스티야』 창간 주도
1917–1918멘셰비키-국제주의자; 『노바야 지즈니』 편집자; VTsIK 2·3·4기 구성원; 1918년 6월 제명
1919–19237권짜리 회고록 『혁명의 기록』(Записки о революции) 집필·출간
1920–1929멘셰비키당 탈퇴; 대외무역 기관·농업경제연구소 근무; 공산주의 아카데미 회원; 1928년 강제 집단화 반대 연설
폭탄이 떨어지자 그는 "진정하십시오, 별일 아닙니다. 곧 무슨 일인지 확인하겠습니다"라고 외치며 폭발물 쪽으로 달려갔다.
볼셰비키 조직가로, 소비에트 러시아 최초의 해외 외교 사절단인 독일 전권대표부 초대 서기를 지냈고, 1918년 7월부터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로 내전기 수도의 당을 이끌며 도시방어를 지휘했다. 1919년 9월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 테러로 현장에서 순직했으며,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힘으로 악에 저항함』에서 "체포하고, 단죄하고, 사격할" 용기를 요구했고, 고리키는 이를 '복수의 복음'이라 불렀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헤겔 법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동시에 받고 교수가 된 러시아 법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다. 1905년 혁명기 급진적 입장에서 출발했으나 10월 혁명을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반볼셰비키 투쟁의 이론가로 전향,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추방되었다. 망명 중 『힘으로 악에 저항함』(1925)에서 무력 저항을 정당화했으며 파시즘을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건강한 현상'으로 옹호했다. 사후 저작은 솔제니친과 푸틴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민족주의·권위주의 담론의 핵심 원천이 되었다.
화학도였던 젊은 바르딘은 이젭스키 교수의 강의를 듣고 “나는 용광로 기술자가 될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30년 뒤 그 다짐은 유럽 최대 제철소가 되었다.
시골 재단사의 아들로 키예프 공대에서 야금을 전공하고 미국 공장 노동자로 제철을 배웠다. 용광로의 대가 미하일 쿠라코의 제자로 유좁카·예나키예보·마케옙카·드네프로제르진스크 제철소들을 재건했고, 1929–1937년 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 수석 엔지니어로 유럽 최대 용광로를 1,000일 만에 완성했다. 논문 한 편 없이 1932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1942년부터 부원장을 지냈다. 전시에 우랄 과학력을 방위생산에 결집했고 전후 산소전로·연속주조를 주도했다. 무소속으로 체카의 손길을 피했으며 숙청된 동료의 자녀 11명을 입양했다.
1917년 10월, 사라토프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시내 음악원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선포하고 적위대를 지휘했다.
1902년 RSDLP에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법률가로, 1917년 사라토프 소비에트 의장으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주도했고 1920~1921년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을 지냈다. 1923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 산하 입법제안위원회 의장과 대법원 판사를 겸하며 소비에트 사법·입법 체계의 기초를 설계했고, 샤흐티 재판·멘셰비키 재판·산업당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회고록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깃발 아래』(1925)와 『붉은 해』(1927)를 남겼다.
“진정한 기원은 시작이 아니라 끝에 있다. 사회와 존재가 스스로를 뿌리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 『희망의 원리』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로 '아직-아닌 것'(Noch-Nicht)과 구체적 유토피아의 철학을 정립한 독일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벤야민·아도르노·브레히트와 교류하며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한 축을 형성했다. 1948년 동독으로 귀환해 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와 국가상을 받았으나, 1956년 헝가리 봉기 후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여 강제 은퇴당했고 1961년 서독으로 망명했다. 그의 사상은 해방신학과 1968년 학생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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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08뮌헨·뷔르츠부르크에서 철학·물리학·음악 수학, 『리케르트 비판』으로 박사
1912–1914하이델베르크에서 막스 베버·짐멜·루카치와 교류
1918『유토피아의 정신』 출간 — 초기 주저
1921『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 출간
1920s베를린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브레히트·벤야민·아도르노와 교류
1933–1938나치 집권 후 스위스·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망명
1935『이 시대의 유산』 출간 — 비동시성 개념으로 파시즘의 대중적 매력 분석
1938–1947미국 망명 중 『희망의 원리』 3부작 집필
1949–1957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 동독 국가상(1955), 독일 과학아카데미 회원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공동 창시자, 『마르크스주의와 철학』으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맞선 독일 철학자
“이런 교수들이 몇 명만 더 나와 이론을 뽑아내면 우리는 끝장이다.” — 1924년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지노비예프가 코르슈와 루카치를 겨냥해
루카치와 함께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놓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혁명적 실천가. 『마르크스주의와 철학』(1923)에서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유물사관을 적용해 헤겔 변증법의 혁명적 회복을 주장했고, 이는 코민테른의 맹렬한 비판을 불렀다. 1923년 튀링겐 노동자 정부의 법무장관, KPD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좌파 반대파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학자로 활동하며 브레히트·벤야민·프랑크푸르트학파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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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1910뮌헨·제네바·베를린에서 법학·철학 수학, 예나 대학 법학 박사
1912–1914런던에서 법률 연구, 페이비언협회 가입
1914–1918독일군 복무 — 무기 소지 거부, 두 차례 철십자 훈장 수여
1917독립사회민주당(USPD) 입당, 군인평의회 대표
1920USPD 좌파와 함께 KPD 합류, 예나 대학 강사
1923.3『마르크스주의와 철학』 출간 — 코민테른의 격렬한 비판 대상이 됨
1923.10–11튀링겐 노동자 정부 법무장관 — 제국군의 진압으로 27일 만에 붕괴
1924–1928KPD 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제5차 대회 참석
1926.4KPD에서 축출 — 당내 좌파 반대파 '결연한 좌파(Entschiedene Linke)' 결성
1933제국의회 방화 사건 당일 독일 탈출 — 덴마크·영국 경유
1936–1961미국 망명 — 툴레인 대학,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연구, 브레히트에 마르크스주의 강의
'전진, 화성으로!'라는 평생 구호를 남기고 1933년 3월 발진티푸스로 숨졌으며, 자신이 설계한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 GIRD-X가 6개월 후 발사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발트 독일인 가문 출신의 소비에트 로켓 공학자이자 우주 비행 이론가. 1931년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반응 추진 연구 그룹(GIRD)을 공동 창립하고 제1여단장을 맡아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 GIRD-X를 설계했다. 우주 온실, 태양 돛, 날개형 로켓, 대기권 제동 등 선구적 개념들을 제안했으며, '전진, 화성으로!'라는 구호로 평생 행성 간 비행의 꿈을 추구했다.
수감 중 스물아홉 차례 심장 발작이 일었고, 그중 열 번은 류민의 사무실에서 심문 도중에 찾아왔다.
벨라루스 민스크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의학을 공부한 소비에트 심장병학자. 크렘린 진료국의 오랜 컨설턴트로 키로프, 오르조니키제, 디미트로프, 톨랴티 등 소련과 국제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치료했으며, 심전도 진단법의 선구자로 1950년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되었다. 1950년 11월 '의사 사건'의 첫 체포자가 되어 류민의 고문 속에 1951년 3월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사망했고, 류민은 그의 죽음을 아바쿠모프 탄핵의 지렛대로 이용해 사건을 전면화했다.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 피시만은 독일 대사 미르바흐 암살에 사용될 폭탄 두 개를 직접 제조해 동지들에게 건넸다.
에스에르 전투원이었던 피시만은 시베리아 유형에서 탈출해 이탈리아 나폴리대학에서 폭발물·독가스 화학을 전공했고, 1917년 귀국 후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으로 1918년 미르바흐 암살의 폭탄을 직접 제조했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후 1925년 적군 군사화학국(VOKhIMU) 초대 국장으로 임명되어 소련 화학·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의 기초를 설계했고, 1928년 보고서에서 세균전의 공세적 운용을 주장했다. 1937년 체포되어 10년형을 받았으나 NKVD 특별기술국에서 방독면 신형을 개발했고, 1955년 복권되어 기술병 소장 계급을 받았다.
소련은 마치 무와 같다. 겉은 붉지만 속은 희다 — 『세대 교체』와 후속 저작에서 반복한 통찰.
페테르부르크 출신 법학자이자 카데트당원. 1913년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한 후 내전기 콜차크 정부 언론국장으로 백군에 참여했다. 패배 후 하얼빈 망명길에 올라 『세대 교체』(1921)를 발표, 볼셰비키만이 러시아 국가를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스메노베호프스트보를 창시했다. 네프 시기 소련을 '겉은 붉고 속은 흰 무'라 평했고, 그의 사상은 1925년 제14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지노비예프의 논쟁 대상이 되었다. 1935년 귀국해 모스크바교통공학원 교수로 일했고, 1937년 6월 체포되어 9월 14일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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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1916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1급), 동 대학 사립강사; 카데트당 입당
1917–1918페름대학 정교수, 법학부에서 국가법·법철학 강의
1919–1920콜차크 정부 언론국장; 내전기 백군 이념전선 담당
1920–1935하얼빈 망명, 법학부 교수 겸 КВЖД 고문; 『Окно』 창간, 『세대 교체』(1921)로 스메노베호프스트보 창시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유령적 동반자, 기술복제시대 예술론으로 자본주의 문화를 해부한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
「역사철학 테제」에서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문명의 기록물 가운데 동시에 야만의 기록물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베를린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발터 벤야민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깊이 교차하면서도 어느 학파에도 포섭되지 않은 독보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였다. 유대 신비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을 독창적으로 결합한 그의 사유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예술의 '아우라'를 붕괴시키는 메커니즘을 분석했고, 유작 「역사철학 테제」(1940)에서는 파울 클레의 그림에 빗대 '역사의 천사'라는 강렬한 알레고리로 진보서사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 망명 중에도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19세기 파리의 자본주의 문화를 고고학적으로 발굴했고, 브레히트·아도르노·숄렘과의 긴장 어린 교류 속에서 기술·이미지·역사에 관한 가장 선구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통찰을 남겼다.
1919년 말, 에이헤의 제5군은 콜차크군의 후퇴를 토볼강에서 옴스크와 톰스크를 거쳐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밀어붙였다.
겐리흐 에이헤는 라트비아계 노동자 가정 출신의 혁명가이자 적군 지휘관, 군사사 연구자였다. 그는 1919년 동부전선에서 제26소총사단을 이끌어 백군 후방을 찌르는 기동을 펼쳤고, 제5군 사령관으로 콜차크군의 후퇴를 토볼강에서 시베리아 내륙까지 추격했다. 이후 극동공화국의 군사적 통합을 맡았지만, 대숙청기의 허위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1954년 무죄로 재활되었다.
백군이 그녀를 총살하려 했을 때, 그녀의 키가 너무 작아 총알이 높은 모자에만 맞았고, 그녀는 다리 밑 강물로 떨어져 갈대숲에 숨어 살아남았다.
볼셰비키 혁명가 출신의 소비에트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소련에서 수리논리학을 독자적 학문 분야로 부활시키고 제도화한 창시자다. 내전기 백군에게 체포되어 총살 직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며, 1933년 마르크스의 『수학 초고』를 발굴·출판하여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 수학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 1930년대에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관념론적' 수학을 공격했으나, 이후 입장을 전환하여 스탈린 시대에 탄압받던 수리논리학을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되살려냈고, 1935년 비트겐슈타인의 소련 이주를 만류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스탈린 사후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주도한 노동계급사 권위자: 소련 최초 여성 역사학 아카데미크
1953년 『역사의 제문제』 주필이 된 판크라토바는 스탈린의 『단기 강좌』 도식을 공개 토론에 부치며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추진했다. 1957년 3월 중앙위 결정은 그녀의 노선을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로 규탄하고 사실상 해임했다.
소비에트 노동계급사와 혁명운동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약 200편의 저작을 남겼다. 소련 역사학 분야 최초의 여성 정회원(아카데미크)이자, 카자흐스탄사의 첫 종합적 집필을 지도했다. 스탈린 사후 『역사의 제문제』 주필로서 「소련 공산당사 단기 강좌」의 도식적 서사를 재검토하고 탈스탈린화를 주도했으나, 1957년 중앙위로부터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실질적으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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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내전기 오데사 유격대 활동
1922–1925붉은 교수양성소 수학
1926–1939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 레닌 정치군사아카데미 · 모스크바 국립대 등에서 교편
'그것은 가장 진전된 위치에서 위대한 거부,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항의다' — 《일차원적 인간》(1964)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철학자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결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이론을 전개했다. 《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자본주의의 억압 구조를 분석하고 해방된 에로스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탐구했으며, 《일차원적 인간》(1964)에서는 기술적 풍요가 비판 의식을 잠식하는 현대 산업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로 규정하며 억압적 탈승화 개념을 제시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 전시 OSS에서 근무하고 브랜다이스대와 UC샌디에이고에서 가르치며 1960년대 학생 운동과 신좌파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위대한 거부'로 상징되는 그의 급진적 사유는 비판 이론과 해방 정치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스탈린이 헤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자, 성미 급한 라트비아인 철학자 스텐은 크렘린 사무실에서 제자의 양복 옷깃을 붙잡고 흔들며 가르쳤다. 수업 후 친구에게 남긴 말: '코바는 10년 안에 드레퓌스와 베일리스 재판을 무색하게 만들 짓을 할 거야.'
라트비아 출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붉은교수양성소 1기 졸업 후 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을 개인교습하며 소비에트 철학 제도화의 중심에 섰다. 1928년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로 돌아선 뒤 1932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유배되었고, 잠시 복권되었으나 1937년 처형되었다.
소비에트 심리학자·철학자로, 레프 비고츠키·알렉산드르 루리야와 함께 문화역사적 심리학을 발전시켰으며 인간 의식이 외부 세계와의 능동적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고 보는 활동 이론의 창시자다. 1930년대 하리코프 학파를 이끌며 아동 발달·기억·의지 연구를 주도했고, 모스크바국립대 심리학부 초대 학장으로 소비에트 심리학 제도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주저 『활동·의식·인격』은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의 고전으로 국제적 영향을 끼쳤으며, 비고츠키 사후 그 이론을 독자적 방향으로 확장했다.
1956년 흐루쇼프가 ITEP 해직자들의 체포를 막기로 한 후, 알리하노프는 당 회의에서 발언했던 네 사람에게 말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았다면 너희는 영웅이다. 몰랐다면 바보다.'
소련 핵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 명. 양전자 분광학 연구(1933~1940)와 코조다예프와 개발한 자기분광계는 소련 핵전자공학의 기초가 되었다. 원자폭탄 계획에서 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로 중수로 개발을 맡았다. 1945년 제3실험실(후일 ITEP)을 설립해 23년간 소장으로 재임하며, 소련 최초의 중수 연구용 원자로(1949)와 산업용 중수로(1951)를 직접 지휘했다. ITEP의 7 GeV 싱크로트론(1961)은 세계 최대의 70 GeV 세르푸호프 가속기(1967) 원형이 되었다. 평생 무당파였으며, 반세계주의 캠페인에서 연구원을 보호하고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으며, 1966년 스탈린 복권 반대 서한에 카피차·사하로프와 함께 참여했다.
«인생에 운, 불운, 행복 중 무엇이 더 많았는지 가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극복해야 할 것이 무척 많았다는 것을.»
1934년 방사성 용액 속 푸른 빛을 목격한 한 실험물리학자가 입자물리학의 새 장을 열었다. 바빌로프의 지도 아래 체렌코프가 발견한 그 발광은 진공 속 광속보다 빠르게 매질을 통과하는 하전입자가 내는 '체렌코프 복사'로 밝혀졌고, 타므와 프랑크가 이론적으로 해명했다. 이 발견은 체렌코프 검출기라는 입자물리학의 표준 장비로 이어져 스푸트니크 3호에도 탑재되었으며, 1958년 세 사람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겼다. 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에서 평생을 바친 그는 고에너지물리학부를 창설해 이끌었고, 싱크로트론 건설과 광핵반응 연구에도 기여했다.
「소련에 대한 미국 정책의 주요 요소는 러시아의 팽창 경향에 대한 장기적이고 인내심 있으면서도 단호하고 경계하는 봉쇄여야 한다」, 1947년 X 논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역사가로, 1946년 모스크바에서 국무부에 보낸 '장전문'과 1947년 《포린 어페어스》에 발표한 X 논문에서 소련의 팽창을 장기적·인내심 있게 봉쇄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국무부 정책기획실 초대 실장으로서 마셜 플랜의 설계에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트루먼 독트린과 NATO로 이어지는 냉전 초기 미국 대외정책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신이 설계한 봉쇄가 군사적 대결로 변질되자 평생 비판자로 돌아섰고, 베트남 전쟁과 NATO 확장에 공개 반대하며 현실주의적 외교를 주장했다.
「우리 시대의 유행어와 달리 절대적 아름다움은 절대적 진리만큼이나 존재한다」 — 1927년 브후테인 학보
멜리토폴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브후테마스에서 아방가르드와 결별한 후 마르크스 미학의 체계적 재구성에 평생을 바쳤다. 1930년대 루카치와 함께 '저속사회학'을 논박하며 변증법적 유물론 예술론을 정립했고, 『마르크스·엥겔스 예술론』과 『레닌 예술론』이라는 기념비적 선집을 편찬했다. 전후에는 반세계주의 캠페인의 표적이 되었고, 1960년대 모더니즘 비판으로 논쟁의 중심에 섰으며, 말년에는 '존재인식론' 개념으로 독자적 철학을 전개했다.
바딤 트라페즈니코프는 전기공학자이자 자동화 과학자로, 소련의 생산기술과 관리체계를 함께 바꾸려 했다. 그는 자동화의 성과가 경직된 계획 지표 아래에서는 현장에 뿌리내리기 어렵다고 보았고, 1964년 《프라우다》에 기존의 지시적 경제 운영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개입은 자동화 연구를 기업 운영의 문제와 연결하며 코시긴 개혁의 사상적 분위기를 넓혔다.
1929년 가을 솔로프키. 체포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장작더미 속에 숨어 밤새 총성을 들었다. 날이 밝자 깨달았다. "내 대신 죽은 이를 위해 두 사람 몫을 살아야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문헌학자·문화사가. 1928년 반혁명 활동으로 솔로프키 수용소에서 4년간 복역했다. 석방 후 푸시킨관에서 고대루스 문학을 연구했으며, 『이고리 원정기』 연구와 『고대루스 문학 기념물』 총서 편찬을 주도했다. 1970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6년 소비에트 문화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평생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고 사하로프 제명에 반대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인민대표로 활동하며 '러시아의 양심'으로 불렸다.
"나는 여전히 믿는다!" — 1965년 버클리 반전 티치인에서 수천 명의 학생 앞에서 냉전과 베트남전을 고발하며
폴란드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하시드 경전의 신동이었다가 10대에 무신론자가 되었다. 1927년 폴란드 공산당 입당, '사회파시즘' 노선에 맞서 최초의 반스탈린 그룹을 조직해 1932년 제명되었다. 1939년 런던 망명 후 『스탈린: 정치적 전기』(1949)로 세계적 권위를 얻었고, 하버드대 트로츠키 아카이브로 3부작 『무장한 예언자』·『비무장한 예언자』·『추방된 예언자』를 완성해 정치 전기의 걸작을 남겼다. 1960년대 신좌파의 지적 스승이 되었고 1967년 로마에서 급서했다.
1944년 봄, 해방된 소련 영토의 공장·철도·주택을 목록화하고 복구 우선순위를 매기는 고스플란 특별부서가 신설되자, 코로보프가 그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소련 계획경제의 중추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한 경제관료로, 고스플란 내부에서 실무자에서 부의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해방지역 경제복구를 담당하는 고스플란 부서를 이끌었고, 전후에는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으로서 흐루쇼프 시기 경제개혁 논의에 참여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겸 소련 각료로 재임하며 코시긴의 1965년 경제개혁 준비 작업에 관여했다.
1977년 3월 3일, 그는 헌장 77 대변인으로 말하겠다며 불러낸 국가보안기관의 장시간 조사를 받았다.
얀 파토치카는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배운 체코 철학자로서 현상학과 역사철학을 발전시켰고, 유럽의 위기와 인간의 영혼 돌봄을 탐구했다. 공산당 가입을 거부한 뒤 여러 차례 대학 강단과 출판에서 배제되었지만, 연구와 가정 세미나를 이어 갔다. 1977년 그는 바츨라프 하벨, 이르지 하예크와 함께 헬싱키 최종의정서와 시민권 보장을 요구한 헌장 77의 첫 대변인이 되었다. 반복된 국가보안기관 조사 뒤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는 3월 13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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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1931프라하 카렐대학교에서 철학·슬라브어문학·로망스어문학을 공부하고 철학 박사학위를 받음
1933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현상학을 배움
1936–1939카렐대학교에서 강의 자격을 취득하고 철학 저널 《체코의 정신》 편집을 맡음
1945–1950전후 카렐대학교와 마사리크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으나 공산당 가입 거부 뒤 대학을 떠남
1964–1972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에서 일하고 1968년 카렐대학교 교수로 복귀했으나 1972년 퇴직당함
1973–1976가정 세미나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플라톤과 유럽》과 《역사철학의 이단적 에세이》를 발전시킴
비보 이슈트반은 법학과 정치이론을 바탕으로 헝가리 민주주의와 중동부 유럽의 국가 위기를 분석한 정치사상가였다. 그는 전후 민주적 재편을 위해 행정과 선거 제도 구축에 참여했지만,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학문적 자율성과 발언권을 잃었다.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공격하자 국회의사당에 남은 나지 임레 정부의 마지막 각료로서 「자유와 진실을 위하여」를 썼다. 이후 종신형을 선고받고 1963년 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말년에는 침묵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윤리와 책임을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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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1935세게드대학교에서 정치학·법학 학위 취득, 빈과 제네바에서 수학
1938–1945법무부 관료, 전시에는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한 문서를 발급
1945–1946내무부 행정국장, 전후 행정과 1945년 선거 준비를 담당
1946–1950세게드대학교 정치학 교수, 헝가리과학원 통신회원
1951–1957외트뵈시 로란드대학교 도서관 연구원
1956-11-03–1956-11-12나지 임레 제3차 정부 국무장관, 11월 4일 국회의사당에 남아 성명 작성
“과학이 무슨 상관이오!?” 제자에게서 부서에 무능한 동료를 왜 채용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크론로트는 화를 냈다. 잠시 침묵한 뒤 덧붙였다: “17일 동안 안치시킨이 우리 사단을 포위에서 빼냈소. 우리 부대의 정치위원이었는데, 지휘관은 전사했소.” — 모스크바 전투, 1941년 겨울
소련 정치경제학 '상품학파'를 이끌며 사회주의에서 가치법칙과 기업 자율성을 주장한 이론가. 1971–72년 학파가 분쇄·해임되었고, 말년에 소련 체제를 '사회과두제'로 분석한 원고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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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34모스크바대학 철학과 졸업, 이삭 루빈의 제자로 자처
1934–1940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모스크바주계획위, 중앙통계청 근무
1940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연구원
1941–1945의용군 입대(1941.7.6.), 모스크바 전투 참전, 동프로이센까지 진격, 소령으로 종전
1945–1971경제연구소 정치경제학 부문장, '상품학파' 형성 및 1960년대 경제개혁 논쟁 주도
“나는 러시아인이지만, 평생 타타르인들을 비방으로부터 지켜왔다” — 카잔의 구밀료프 흉상 받침대에 새겨진 문구.
소련의 역사학자·민족학자·고고학자로, 민족 집단의 발생과 쇠퇴를 우주적 에너지 '파시오나르노스트'로 설명하는 민족발생론을 제창했다. 시인 니콜라이 구밀료프와 안나 아흐마토바의 아들로, 1938년부터 1956년까지 세 차례 체포되어 14년간 수용소에서 복역했으며 베를린 전투에 참전했다. 그의 저작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폭발적 인기를 얻어 중앙아시아와 타타르스탄에서 민족 정체성 담론의 기초가 되었고, 카자흐스탄에는 그의 이름을 딴 구밀료프 유라시아 국립대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계에서는 유사과학이라는 비판도 받았으나,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정치 엘리트의 유라시아주의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이사이 구레비치는 소련의 이론물리학자로, 핵분열과 중성자 물리를 연구했다. 1943년 실험 자원이 부족한 전시 상황에서 이사크 포메란추크와 함께 연구하여, 흑연 감속재 속 우라늄을 격자 형태로 배치하는 불균질 조립체 이론을 세웠다. 이 계산은 우라늄의 공명 흡수를 줄이는 설계 원리를 제시했고, 쿠르차토프 연구진이 F-1 원자로를 건설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생산자가 자신의 실존 조건을 통제하려면 전적으로 새로운 사회관계가 발전되어야 한다' — 『경제계산과 소유형태』(1971)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CEMI를 설립해 소련 계획경제 연구를 개척했고, 나세르·네루·벤 벨라 정부의 경제 고문을 지냈다. 1963년 쿠바 '대논쟁'에서 체 게바라의 중앙집중화 노선에 맞서 분권적 시장요소를 옹호했으며, 마오쩌둥 사상에 경도되어 알튀세르와 함께 '경제주의'를 비판했다. 『소련에서의 계급투쟁』(1974-1982)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했고, 1972년 르몽드는 그를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마르크스주의자'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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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공산청년동맹 가입 후 프랑스 공산당 입당
1936모스크바 5개월 체류, 대숙청 목격, PCF 제명
1944–1948노동부 관료, EPHE 연구주임
1950s이집트·인도·알제리 정부 경제 고문, 유엔 전문가로 인도 제2차 5개년 계획 참여
내 인생에서 상관은 코롤료프와 켈디시 단 두 사람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고결한 분들이었다. 그게 중요하다.
소련 우주개발의 기초를 닦은 물리학자이자 로켓 공학자. 코롤료프의 OKB-1에서 우주선 방향제어 및 유도체계를 설계하여 루나 3호의 달 뒷면 촬영(1959)과 가가린의 보스토크 1호 비행(1961)을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했다. 볼가 독일인 가계 출신으로 1942년 민족 기준으로 강제수용되었으나 수용 중에도 계산을 계속했고, 켈디시의 도움으로 복귀하여 우주 프로그램의 핵심 설계자가 되었다. 후기에는 회화의 원근법에 대한 수학적 연구와 정교회 신학으로 전환하여 독창적인 학제적 업적을 남겼다.
프로호로프는 연구실 방향을 마이크로파에서 레이저로 전환하기로 결심했을 때, 직접 옛 장비를 부수었다. 연구원 절반이 분노하며 떠났지만, 남은 팀은 노벨상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물리학자로, 니콜라이 바소프와 메이저-레이저 원리를 공동 창안해 1964년 바소프 및 찰스 타운스와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붉은 군대 보병으로 복무하며 두 차례 부상을 입었고, 전후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에서 개방형 공진기와 기체역학 레이저를 개척했다. 일반물리학연구소장(1982–1998)으로서 광섬유·레이저 핵융합·우주 통신 연구를 총괄했으며, 30년 이상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의 대표적 지식 총서를 이끌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다섯 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고 조레스 알표로프를 비롯한 한 세대의 물리학자를 길러냈다.
“정의를 뜻하는 라틴어 유스티티아(justitia) — 그것이 곧 공정함이다.” 그는 이 원칙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았다.
소련 법무부가 1956년 폐지된 후 14년 만에 부활했을 때, 그 재건을 맡은 인물이 바로 테레빌로프였다. 1970년부터 1984년까지 법무장관으로 재임하며 40만 건이 넘는 현행 법령을 검토해 50권짜리 《소련 현행법 집성》과 11권짜리 《소련 법전》 편찬 작업을 총괄했고, 1979년 《소련 변호사법》 제정을 주도해 변호사 제도의 법적 지위를 처음으로 정립했다. 이후 1984년 소련 대법원장에 취임해 사법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무고한 탄압 희생자들의 재심에 힘썼으나, '목화 스캔들' 수사 과정에서 제기된 뇌물 의혹으로 1989년 사임했다. 말년에는 모스크바대학에서 형사절차의 도덕적 기초를 강의하며 법조인 양성에 헌신했다.
소련 이론물리학의 거장으로,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이고리 쿠르차토프가 이끄는 수소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이고리 탐의 이론팀 일원으로 참여해 중수소화리튬-6(LiD)을 열핵연료로 사용하는 '제2의 아이디어'를 제안했으며, 이는 1953년 소련 최초의 열핵무기 실험 성공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50년 레프 란다우와 함께 초전도 현상을 설명하는 긴즈부르크-란다우 이론을 정립했고, 이 공로로 20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71년부터 1988년까지 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 이론물리학부장을 지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66)으로서 소련 물리학의 제도적 중심을 이끌었다.
1950년, 한 줌의 지지자와 함께 《소셜리스트 리뷰》를 내면서 클리프 그룹이 내건 구호: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 사회주의를.」 냉전의 두 진영을 모두 거부하겠다는 선언이자, 이후 반세기 동안 이 조류를 규정한 문장이었다.
본명 이가엘 글룩슈타인. 팔레스타인의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십대에 시온주의 좌파를 떠나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었고, 반전 활동으로 영국 위임통치 당국에 1년간 수감된 뒤 1947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1948년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성격」에서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며 제4인터내셔널의 정통과 갈라섰고, 이 분석 위에 서방과 소련의 군비 지출이 전후 호황을 떠받쳤다는 「상시 군비경제」론과, 부르주아지도 노동계급도 아닌 지식인·군부가 혁명을 대행한다는 「빗나간 연속혁명」론을 얹었다. 1950년 《소셜리스트 리뷰》 그룹에서 출발한 그의 조직은 국제사회주의자들(IS)을 거쳐 1977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네 권짜리 『레닌』, 네 권짜리 『트로츠키』를 남겼고, 영국 시민권을 끝내 얻지 못해 평생 무국적자로 살았다.
상세 이력 보기
1917오스만령 팔레스타인 지크론야코브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 가정의 이가엘 글룩슈타인으로 출생
1931–1933마파이 청년조직을 거쳐 포알레 시온으로, 시온주의 좌파 안에서 정치를 시작
1930년대 후반트로츠키주의·반시온주의로 전향, 팔레스타인의 소규모 트로츠키주의 그룹에서 활동
“이데올로기는 길에서 경찰이 ‘이봐 거기!’ 하고 부르면, 몸을 돌리는 바로 그 순간에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마르크스의 저작에 '인식론적 절단'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SA)와 중층결정 개념을 통해 구조적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했다. ENS 철학 교수로서 데리다·푸코·부르디외·바디우 등 프랑스 지성계 한 세대를 가르쳤다. 스탈린주의의 이론적 공백을 메우려 했으나, 공산당과의 긴장과 정신질환 속에서도 전후 마르크스주의를 철학의 중심으로 밀어올렸다. 1980년 정신적 발작 속에서 아내를 살해한 비극은 그의 사상적 유산을 오래도록 덮었다.
「전쟁은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지난 6년의 군대 생활에서 겪은 모든 것은 흥미롭고 창조적이며 아름다운 삶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 전후 출간된 『전선 일기』에서.
소련의 국제관계학자이자 역사가. 1966년부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 최고의 외교정책 싱크탱크인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을 지냈다. 그의 연구소는 소련의 군축 협상 입장을 뒷받침하는 비밀 분석, 서방 경제에 대한 예측, 그리고 '선진사회주의' 외교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생산했다. 1981년부터 CPSU 중앙위원회 정위원으로서 데탕트 시기 소련 외교정책의 실질적 방향을 결정하는 데 직접 관여했으며, 서방과의 건설적 관계의 필요성을 당 지도부에 일관되게 주장했다.
1917년 10월에 일어난 것은 대중의 지지 없는 고전적 현대 쿠데타였다... 거짓 구호 아래 현대 국가의 신경 중추를 은밀히 장악한 것이었다.
폴란드 태생의 미국 역사가로, 소련학 '전체주의 학파'의 지적 설계자였다. 그의 2권짜리 대작은 10월 혁명이 대중 봉기가 아니라 권력에 굶주린 소수 지식인들의 쿠데타였으며 볼셰비키 통치는 처음부터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팀B(1976) 책임자와 레이건 행정부 NSC 소련·동유럽 국장(1981~82)을 지내며 자신의 학문을 대소 강경 정책으로 옮겼고, 이는 훗날 소련 붕괴를 앞당긴 요인으로 평가된다.
말년에 리흐타는 예측 연구팀을 만들려 했으며, 자신의 말로는 "우리를 정치적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회를 공식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과학기술혁명' 개념을 정립하고 60인의 공동연구를 이끌어 『갈림길에 선 문명』(1966)을 출간했다. 이 저작은 중앙집권적 계획은 과학기술 시대에 낡은 방식이라 주장하며 프라하의 봄 행동강령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그가 만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1968년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이후 리흐타는 후사크의 '정상화'에 순응하여 철학·사회학 연구소장으로 동료 학자들의 숙청을 주도했고, 1977년에는 헌장 77과 얀 파토치카를 공격하는 언론 캠페인에 가담했다.
1970년 정신병원 석방 후: "어떤 정직하고 원칙 있는 학자도 그러한 근거로 정신병원 무기한 수용이라는 탄압이 가능하다면 자신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다."
소련의 생물학자이자 반체제 역사가. 트빌리시에서 태어나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노화의 분자생물학적 기전을 연구했다. 1962년 리센코의 유사과학을 폭로한 사미즈다트 원고 「생물학과 개인숭배」를 집필했고, 이는 1969년 《리센코의 흥망》으로 미국에서 출간되며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다. 1970년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사하로프·솔제니친 등의 항의로 석방되었고, 1973년 런던 체류 중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며, 말년의 저작 《스탈린과 유대인 문제》(2003)에서는 의사들의 음모 사건이 유대인 추방 계획으로 이어지려 했다는 통설을 기록 부재로 반박했다.
《역사의 심판대에》 서문에서: "나는 젊은 시절의 신념과 이상을 결코 배반한 적이 없다. 그것이 아버지의 영향이며, 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생각은 물론 변했지만, 깊은 확신 없이는 이 책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소련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공산주의자 출판인. 1960년대부터 반체제 운동에 참여하며 사미즈다트 저널 《정치일기》를 편집했고, 20년 가까이 집필한 대작 《역사의 심판대에》에서 스탈린주의의 기원과 결과를 방대한 사료로 분석했다. 이 책으로 1969년 제명되었으나 사회주의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고, 1989년 복당 후 인민대표·최고회의 의원·중앙위원을 지냈다. 평생 35권 이상의 저작을 남기며 사회주의 내부에서의 자기비판적 역사학을 개척했다.
그는 프라하의 봄이 1968년 후사크 체제에 이어 1989년 이후에도 다시 매장되었다고 비판했다.
카렐 코시크는 마르크스주의를 인간의 실천과 구체적 역사성의 철학으로 재구성한 체코 철학자였다. 대표작 《구체성의 변증법》(1963)은 마르크스와 하이데거 현상학을 대화시키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장한 지식인이었고, 정상화 시기에는 공산당에서 제명되어 침묵과 저항을 견뎠다. 1989년 이후에는 개혁의 기억이 후사크 체제와 신자유주의 질서에 의해 차례로 매장되었다고 비판하며 사건의 유산을 둘러싼 논쟁을 열었다.
한 파티에서 누군가 물었다. '브레즈네프의 최근 연설 읽어보셨나요?' 보빈이 답했다. '읽다뇨? 제가 썼는데요.' 다음 날 그는 『이즈베스티야』로 전보되었다.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외교 수사의 핵심 설계자로, 1963년부터 1972년까지 CPSU 중앙위 국제부 컨설턴트 그룹을 이끌며 데탕트·평화공존·군축 담론의 문장을 직접 썼다. 그가 만든 '경제는 절약해야 한다' 같은 문구들은 브레즈네프의 공식 어록이 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에 회의적 입장을 견지해 당 기구에서 『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로 옮겨갔고, 이후 20년간 TV '국제 파노라마'의 얼굴로 소련에서 가장 신뢰받는 국제문제 해설자가 되었다. 1991년 소련 최초의 이스라엘 대사로 임명되어 일주일 뒤 러시아 연방 대사로 이어지는 독특한 외교 경력을 마무리했다.
“우리 언론은 지금 스탈린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역사를 먹칠하고 있다.”
레닌그라드 출신의 화학자이자 공산당원으로, 1988년 3월 『소비에츠카야 로시야』에 「나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다」를 발표해 페레스트로이카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스탈린을 옹호했다. 이 글은 당 중앙위원회 서기 예고르 리가초프의 지원 아래 작성되어 '반페레스트로이카 세력의 선언'으로 불렸으며,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정치 개혁을 가속화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91년 이후 전연방 볼셰비키 공산당(VKPB)을 창당해 총서기를 지내며 소련 체제의 복원을 주장했으나, 러시아 정치 무대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1991년 6월 17일, 회의의 마지막 연사로 나선 알크스니스는 신연방조약이 위헌이며 파블로프 내각을 지지해야 한다고 의원들에게 호소했다. '내각은 소련을 위해, 이 국가의 보존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계 소련 공군 대령으로,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가장 노골적인 강경파였다. 소유즈파 공동의장으로서 계엄령을 요구하고 고르바초프의 퇴진을 촉구했으며, 1991년 6월 17일에는 파블로프 총리의 비상권한 결의안을 즉각 표결에 부치자고 밀어붙여 '헌정 쿠데타 기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하원의원을 두 차례 지냈고, 1993년 옐친에 맞서 의회를 방어하다 진압경찰에 구타당했으며, 끝까지 타협 없는 소비에트 애국자로 살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소련 VPK의 역사는 전쟁과 전쟁 준비의 연속이었고, 바로 그것이 소련 경제 전체의 역사이기도 하다."
소련 군산복합체(VPK)의 형성과 작동을 처음 체계적으로 밝혀낸 러시아의 역사가·경제사가. 1996년 출간된 『1920~1950년대 소련의 군산복합체』는 이 분야의 기본 문헌이며, 케임브리지 대학의 존 바버, 마크 해리슨과의 공동 연구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키로프 농촌 출신으로 교사로 일하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1988년 CPSU 중앙위 산하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에서 연구를 이어갔으며, 대통령 행정실 자문과 스베르방크 금융 실무를 거치며 학문과 현실 사이를 오갔다.
소련·러시아 외교정책과 중앙아시아를 연구하는 역사가. 2011년 『기나긴 작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출간하여, 소련의 철수 결정이 전장보다 국내 정치에 의해 형성된 '기나긴 작별'이었음을 기록 자료와 구술로 입증했다. 조지워싱턴대에서 학사, 런던정경대(LSE)에서 박사를 받은 뒤 암스테르담대에서 10년간 강의했고, 현재 템플대 교수로 재직하며 『사회주의 발전의 실험실』(2018)로 데이비스상과 휴잇상을 수상했다.
"반알코올 캠페인은 1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구했다." 넴초프가 25년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이다.
모스크바 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과 의사로 출발해 모스크바 정신의학연구소에서 평생을 연구한 알코올 역학의 개척자다.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을 계기로 실제 알코올 소비량과 그로 인한 사망 규모를 추계하는 방법론을 개발했으며, 캠페인이 약 100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는 추정치를 제시해 국제적 논의의 기준점을 만들었다. 고르바초프 시기와 소련 붕괴 이후의 알코올 관련 초과 사망을 추적하며 알코올 정책과 공중보건의 관계를 실증한 그의 연구는 러시아 인구위기의 핵심적 설명틀로 자리 잡았다.
그는 1989년 이렇게 썼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단지 냉전의 종식이 아니라 역사의 종말일 수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국제정치 연구자로, 국가·제도·정치 질서의 형성을 비교해 왔다. 1989년 논문 「역사의 종말?」은 냉전 종식과 자유민주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인류의 이념적 진화가 도달한 지점으로 해석하며 1989년의 의미를 둘러싼 가장 유명한 논쟁의 한 축을 만들었다. 1992년 저서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에서 이 주장을 확장했지만, 이후에는 국가 역량과 법치, 책임성을 강조하며 초기 명제의 단순한 낙관론을 수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