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론가

104 명

소속 인물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게르첸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Герцен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12–1870 ○ 폐렴

러시아 농민사회주의의 창시자, 《종》의 발행인

「우리는 해방하는 자와 함께, 그가 해방하는 한 함께 간다」 — 1858년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을 환영하며 《종》에 게재한 논설에서.

러시아의 작가·철학자이자 '러시아 사회주의'의 창시자. 농민 공동체(오브시나)에 기초해 자본주의를 우회하는 사회주의 이행론을 정립했다. 런던 망명 중 발행한 《종》(콜로콜)은 개혁기 여론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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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9–1833모스크바 대학 물리수학부 수학, 후보자 학위 취득
  • 1835–1842반정부 모임 혐의로 체포, 페름·뱟카·블라디미르·노브고로드 유형
  • 1842–1847모스크바에서 서구파 지식인으로 활동, 소설 《누구의 죄인가》 발표
  • 1847러시아를 영구히 떠나 유럽 망명
  • 1852런던 정착, 자유 러시아 인쇄소 설립
  • 1855–1868연감 《북극성》 발행, 푸시킨·레르몬토프의 금지시와 자유주의 논설 수록
  • 1857–1867주간지 《종》(콜로콜) 발행, 러시아 개혁 여론 주도
  • 1864–1870제네바에서 망명 출판 지속, 만년의 《과거와 사색》 집필 완성

니콜라이 플라토노비치 오가료프

Николай Платонович Огарё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13–1877 ○ 망명 중 사망

게르첸과 함께 《종》을 편집한 러시아 유토피아 사회주의 이론가

「우리는 이 언덕 위에서, 목숨을 바쳐 우리가 선택한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 1827년 참새 언덕에서 열다섯 살의 오가료프와 게르첸이 러시아 해방을 위해 나눈 평생의 맹세.

러시아의 시인·철학자이자 혁명적 민주주의자. 1827년 참새 언덕에서 게르첸과 러시아 해방을 위한 평생의 맹세를 나누었으며, 런던 망명 중 《종》(콜로콜)과 《북극성》을 공동 발행하며 개혁기 러시아 여론을 움직였다. 농민 공동체에 기초한 '러시아 사회주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비밀 조직 '토지와 자유'의 창설에 참여했으며, 귀족기에서 라즈노친치기 혁명운동으로의 이행을 이론적으로 매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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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9–1833모스크바 대학 물리수학부 및 윤리정치학부 수학
  • 1834–1839학생 서클 참여로 체포, 펜자 유형 및 주지사 사무실 근무
  • 1841–1846유럽 체류, 베를린 대학 수강, 첫 시 《Otechestvennye Zapiski》 발표
  • 1846–1856펜자 영지에서 벨로오무트 농민 1,800명 해방, 공동체 경영 실험, 첫 시집 출간
  • 1856–1867런던 망명, 게르첸과 자유 러시아 인쇄소·《종》·《북극성》 공동 운영
  • 1861–1863비밀결사 '토지와 자유' 공동 창설, 폴란드 봉기 지지
  • 1865–1877제네바 이주 후 런던 귀환, 바쿠닌 협력, 그리니치에서 사망
이론가 독일 독일 1818–1883 ○ 자연사

『자본론』의 저자, 제1인터내셔널을 이끈 사람

「각자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 『고타강령 비판』(1875)

트리어의 법률가 집안에서 태어나 『라인신문』 편집장으로 출발했다. 1845년 프로이센 국적을 버린 뒤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였고, 1849년부터는 런던 망명자였다. 엥겔스와 40년을 함께 일하며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을 썼고 제1인터내셔널을 이끌었다. 만년의 『고타강령 비판』(1875)은 독일 노동자 정당의 통합강령에 들어앉은 라살레주의를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로, 국가를 사회주의의 도구로 보는 발상에 대한 그의 마지막 답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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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2–1843『라인신문』 편집장 — 프로이센 검열로 폐간
  • 1844파리에서 엥겔스와 만나 평생의 공동작업을 시작
  • 1845프로이센 국적 포기 — 이후 죽을 때까지 무국적자
  • 1848『공산당 선언』 발표, 『신라인신문』 편집장
  • 1849–1883런던 망명 — 대영박물관 열람실에서 『자본론』을 쓰다
  • 1864–1872국제노동자협회 창립선언문 집필, 총평의회 지도
  • 1867『자본론』 제1권 출간
  • 1871『프랑스 내전』 — 파리 코뮌을 노동계급 정부의 형태로 옹호
  • 1875『고타강령 비판』 집필 — 브라케에게 보내 지도부에만 회람
  • 1883런던에서 사망,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

Friedrich Engels
이론가 독일 독일 1820–1895 ○ 자연사

마르크스의 공동저자이자 후원자, 『공상에서 과학으로』의 저자

「국가는 '폐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멸한다.」 —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

바르멘의 방적공장주 집안에서 태어나 맨체스터의 가업을 관리하며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1845)를 썼다. 1848년 혁명과 바덴 봉기를 거친 뒤 20년을 상사에 매여 런던의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했다. 뒤링을 반박한 『반뒤링론』(1878)에서 세 개 장을 뽑아 만든 소책자가 『공상에서 과학으로』(1880)이고, 이 책은 곧 열 개 언어로 번역되어 마르크스주의 입문서가 되었다. 마르크스 사후에는 『자본론』 2·3권을 편집했고, 1891년 15년간 묻혀 있던 『고타강령 비판』을 당 지도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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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2–1844맨체스터 에르멘 운트 엥겔스 상사 근무 — 『영국 노동계급의 상태』의 현장
  • 1844파리에서 마르크스와 만나 평생의 공동작업을 시작
  • 1848『공산당 선언』 공동 집필, 『신라인신문』 편집진
  • 1849바덴-팔츠 봉기에 부관으로 참전
  • 1850–1870맨체스터 상사로 복귀 — 20년간 마르크스 가족을 부양
  • 1878『반뒤링론』 출간 — 각주에서 비스마르크식 국유화를 '사이비 사회주의'라 부르다
  • 1880라파르그의 요청으로 세 개 장을 발췌해 『공상에서 과학으로』를 프랑스어로 발표
  • 1883–1894마르크스 사후 『자본론』 제2권과 제3권 편집
  • 1891『고타강령 비판』을 『신시대』에 발표 — 당의 반대를 서문으로 정면 돌파
  • 1895런던에서 사망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다닐렙스키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Данилевский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22–1885 ○ 심장마비로 사망

문화-역사적 유형론으로 러시아 문명의 독자성을 논증한 범슬라브주의 철학자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와 유럽』을 '모든 러시아인의 책상 위 필독서'라 불렀다.

러시아 문명주의 역사철학의 창시자. 주저 『러시아와 유럽』(1869)에서 세계사를 문화-역사적 유형의 순환으로 파악하고 슬라브 유형을 독자 문명으로 정립했다. 젊은 시절 페트라솁스키 서클에서 푸리에 사상을 연구하다 체포·구금되었으나 보수로 전향, 범슬라브주의를 체계화하여 포베도노스체프·카트코프와 함께 구체제 이데올로기 지형을 형성했다. 도스토옙스키가 '모든 러시아인의 필독서'라 칭했고 슈펭글러·토인비의 문명론을 선취한 이 저작은 러시아 보수사상사의 핵심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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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6–1843차르스코예 셀로 리체움 졸업
  • 1843–1849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자유청강; 페트라솁스키 서클에서 푸리에 사상 강의
  • 1849체포·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100일 구금 후 볼로그다 유배
  • 1852–1881어업·해양 원정 지휘(볼가·카스피·백해·아조프·북극해); 러시아 어업법 체계화; 콘스탄티노프 메달(1866)
  • 1869『러시아와 유럽』 출간 — 문화-역사적 유형론으로 국제적 명성
  • 1879–1885니키츠키 식물원장(1879–1880); 『다위니즘』(1885) 출간; 티플리스에서 사망

표트르 라브로비치 라브로프

Пётр Лаврович Лавро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23–1900 ○ 자연사

『역사적 편지』로 인텔리겐치아의 '민중에 대한 빚'을 선언한 나로드니키 철학의 기초적 이론가

『러시아 혁명 청년에게』(1874): "러시아 사회의 재건은 인민을 위해서뿐 아니라 인민을 통해서 달성되어야 한다. 대중은 아직 준비되지 않았으며, 우리 사상의 승리는 준비와 현 시점에서 가능한 것에 대한 이해를 요구한다."

러시아 나로드니키 운동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이론가. 포병장교이자 수학 교수로 출발하여 1860년대 혁명운동에 투신, 카라코조프 사건으로 유형된 볼로그다에서 『역사적 편지』(1868–69)를 집필했다. 이 저작은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개인'이 민중에 대한 지적 빚을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1870년대 '민중 속으로' 운동의 사상적 도화선이 되었다. 망명 후 제1인터내셔널에 가입하고 파리코뮌을 목격했으며, 제네바에서 『브페료트!』지를 발행하여 바쿠닌의 급진적 봉기론 및 트카초프의 음모적 전위당론과 논쟁하며 점진적 선전·교육 노선을 체계화했다. 후기에는 인민의지파와 협력하고 제2인터내셔널에서 활동했으며, '의식적 역사적 연대' 개념을 중심으로 한 사회학 이론을 정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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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7–1842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 수석 입학·졸업, 수학 재능으로 오스트로그라츠키의 최우수 제자로 꼽힘
  • 1844–1866미하일롭스크 포병아카데미 수학 교수 — 1858년 대령 진급, 『실천철학 제문제 연구』(1860) 출간
  • 1862–1866첫 번째 '토지와 자유' 참여, 체르니솁스키와 교류, 학생운동 지원 — 카라코조프 사건 후 체포
  • 1867–1870볼로그다 유형 — 가명 '미르토프'로 『역사적 편지』(1868–69) 집필, 로파틴 도움으로 파리 탈출
  • 1870–1872파리 망명 — 제1인터내셔널 가입, 파리코뮌 목격, 런던에서 마르크스·엥겔스와 회견
  • 1873–1877제네바·런던에서 『브페료트!』 잡지·신문 발행 — '라브리즘'(선전 중심 점진주의) 체계화, 바쿠닌·트카초프와 논쟁
  • 1883–1886인민의지파와 협력, 티호미로프와 『인민의지 회보』 공동 편집
  • 1889–1900제2인터내셔널에서 흐느착당 대표, 파리 사회주의 살롱 주재, 『사상사 주요 계기들』 저술 — 몽파르나스 묘지 안장

페르디난트 라살레

Ferdinand Lassalle
이론가 독일 독일 1825–1864 ✕ 결투 중 총상

독일 최초의 노동자 정당 ADAV의 창립자

「철과 같은, 잔혹한 법칙(das eiserne und grausame Gesetz)」 — 임금을 생존 수준에 묶어 둔다며 라살레가 임금철칙에 붙인 이름(1863)

브레슬라우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난 변호사이자 선동가. 1863년 5월 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를 세워 5년 임기의 회장이 되었고, 보통선거권으로 국가를 움직여 국가 보조 생산협동조합을 세우면 사회주의에 이른다고 주장했다. 같은 해 비스마르크와 비밀리에 만나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해 마르크스의 깊은 의심을 샀다. 1864년 결혼 문제로 벌인 결투에서 총상을 입고 사흘 뒤 제네바 근교에서 죽었다. 그가 남긴 강령은 11년 뒤 고타 통합강령의 뼈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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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8–1849라인란트에서 혁명 선동, 무력 저항 선동 혐의로 6개월 금고
  • 1862「노동자 강령」 강연 — 노동자 계급을 독자적 정치 세력으로 호명
  • 1863.5라이프치히에서 전독일노동자협회(ADAV) 창립, 5년 임기 회장 취임
  • 1863비스마르크와 비밀 회동·서신 — 노동자와 프로이센 왕정의 동맹을 타진
  • 1864.8제네바 근교 결투에서 총상, 사흘 뒤 사망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Wilhelm Liebknecht
이론가 독일 독일 1826–1900 ○ 자연사

아이제나흐파 창립자, 고타 통합강령의 기초자

「국가사회주의와 가장 앞장서 싸워 온 것이 우리 독일 사회주의자들이며, 국가사회주의가 실은 국가자본주의임을 누구보다 분명히 보인 사람이 나다.」 — '우리의 최근 대회'(1896)

기센에서 태어나 1848년 봉기에 가담했다가 스위스를 거쳐 런던으로 망명해 12년간 마르크스·엥겔스의 가까운 동지로 지냈다. 1869년 베벨과 함께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을 세웠고, 보불전쟁 전쟁공채에 반대하다 체포되어 1872년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요새금고형을 받았다. 1875년 고타 통합대회를 성사시킨 주역이자 통합강령의 기초자였으며, 마르크스가 조목조목 해부한 문서가 바로 그것이다. 1890년부터 죽을 때까지 당 기관지 『전진』을 편집했다.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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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8–1849바덴 봉기 참가, 패배 후 스위스로 망명
  • 1850–1862런던 망명 — 마르크스·엥겔스와 교유하며 공산주의자동맹에 가담
  • 1869베벨과 아이제나흐에서 사회민주노동자당(SDAP) 창립
  • 1870–1872전쟁공채 반대로 체포, 라이프치히 반역죄 재판에서 2년 요새금고형
  • 1875고타 통합대회 주도 — 통합강령을 기초해 라살레파와 합당
  • 1878–1890사회주의자탄압법 아래 제국의회 의원으로 당을 지키다
  • 1890–1900당 기관지 『전진(Vorwärts)』 편집장
  • 1900샤를로텐부르크에서 사망

니콜라이 가브릴로비치 체르니솁스키

Николай Гаврилович Чернышевский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28–1889 ○ 뇌출혈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써서 레닌 세대를 만든 혁명적 민주주의자

마르크스는 『자본론』 제2판 후기에서 체르니솁스키를 '위대한 러시아 학자이자 비평가'라고 불렀고, 엥겔스는 그와 도브롤류보프를 '사회주의적 레싱들'이라 칭했다.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가로, 『소브레멘니크』를 이끌며 유물론 미학과 농업사회주의를 정립했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독방에서 쓴 『무엇을 할 것인가?』(1863)는 두 세대 혁명가들의 지침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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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3『오체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 등에 첫 글 게재
  • 1855–1862『소브레멘니크』 실질적 편집장 — 혁명적 민주주의 기관지로 전환
  • 1855석사논문 『예술의 현실에 대한 미학적 관계』 — 유물론적 미학 선언
  • 1860『철학에서의 인류학적 원리』 — 포이어바흐적 유물론의 전개
  • 1862–1864체포·수감 —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독방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집필
  • 1864민사처형 후 7년 카토르가형, 평생 시베리아 유형 선고
  • 1864–1883카다야·알렉산드롭스키 자보트 카토르가, 빌류이스크 유형 — 『프롤로그』 집필
  • 1883–1889아스트라한 귀환 허가, 사라토프 이주 — 만년 저술

니콜라이 표도로비치 표도로프

Николай Фёдорович Фёдоро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29–1903 ○ 병사

죽은 자의 부활을 과학의 공동 과업으로 제시한 러시아 코스미즘의 창시자

톨스토이가 "나는 이 도서관에서 책 몇십 권만 남기고 다 버리겠소"라고 하자, 표도로프는 "나는 바보를 많이 봤지만 이런 바보는 처음이오"라고 응수했다.

러시아 코스미즘 창시자. 과학으로 죽음을 극복하고 모든 선조를 부활시키자는 '공동 과업'을 주창했다. 치올콥스키를 가르쳤고, 도스토옙스키·톨스토이에게 '모스크바의 소크라테스'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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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9–1851오데사 리슐리외 리체움 수학 — 숙부 사망으로 중퇴
  • 1854–1868리페츠크·보롭스크·보고로츠크·우글리치 등지의 군(郡) 학교에서 역사·지리 교사
  • 1869–1874체르트코프 도서관 보조 사서 — 치올콥스키와 만나 지도
  • 1874–1899루먄체프 박물관 사서 — 최초의 체계적 도서 목록 편성, 일요일 토론 클럽 운영
  • 1880s–1890s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솔로비요프와 교류하며 「공동 과업」 구상 전파
  • 1903모스크바 빈민 숙소에서 폐렴으로 사망, 제자들이 유고를 모아 『공동 과업의 철학』 출간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도브롤류보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Добролюбо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36–1861 ○ 결핵

25세 요절로 러시아 혁명 세대 전체의 스승이 된 문학비평가

엥겔스는 1884년에 이렇게 썼다: '나는 체르니솁스키와 도브롤류보프라는 두 사회주의적 레싱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러시아 혁명적 민주주의 비평가. 체르니솁스키와 『소브레멘니크』에서 문학비평을 사회변혁의 도구로 만들었다. 엥겔스가 '사회주의적 레싱'이라 부른 그는 25세 요절 후에도 혁명 세대의 스승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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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3페테르부르크 중앙교육학원 입학 — 지하 민주주의 서클 조직
  • 1854–1855부모 사망 후 급진적 반군주제·반농노제 시와 수기신문 『슬루히』 발행
  • 1856체르니솁스키·네크라소프와 만남 — 『상트페테르부르크 통보』에 첫 기사 게재
  • 1857–1861『소브레멘니크』 비평·서지부장 — 풍자란 「스비스토크」 주재
  • 1859「오블로모프주의란 무엇인가?」 — 곤차로프 소설을 사회비판의 도구로 전환
  • 1860「한 줄기 빛」·「진정한 날」 — 혁명적 민주주의 비평의 정점
  • 1860–1861결핵 치료차 유럽 체류 — 이탈리아 통일운동 취재, 귀국 후 사망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미하일롭스키

Никола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Михайловский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42–1904 ○ 자연사

나로드니키 지식인의 '사상의 지배자', 주관적 사회학과 영웅-군중론의 창시자

그는 '사실의 진리(правда-истина)'와 '정의의 진리(правда-справедливость)'를 구별하며 이렇게 썼다: '이론적 하늘의 진리가, 실천적 대지의 정의와 분리되는 것—나는 언제나 여기에 상처받았다.'

나로드니키 이론가이자 문예비평가. 사회학의 '주관적 방법'과 영웅-군중론을 정립하고, 자유롭게 선택된 이상이 역사를 바꾼다고 주장했다.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 평론으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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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2–56코스트로마 김나지움 수학
  • 1856–62페테르부르크 광산기술대학, 학생 소요로 퇴학
  • 1860잡지 《라스베트》에서 문필 활동 시작
  • 1868–84《오테체스트벤니예 자피스키》 필자, 네크라소프 사후 공동 편집인
  • 1879나로드나야 볼랴와 접촉, 기관지에 기고
  • 1882, 1891혁명적 연계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추방
  • 1892–1904《루스코예 보가츠트보》 공동 편집인 (코롤렌코와 함께)
  • 1890s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논쟁

표트르 니키티치 트카초프

Пётр Никитич Ткачё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44–1886 ○ 병사

혁명적 전위당 독재를 최초로 체계화한 러시아 자코뱅파 나로드니키 이론가

레닌의 비서 본치-브루예비치의 회고에 따르면, 레닌은 바쿠닌·라브로프·트카초프를 거론하며 "그들 중 우리 볼셰비키에게 가장 잘 맞은 것은 바로 트카초프였다"고 말했다.

러시아 자코뱅파 나로드니키 이론가. 바쿠닌·라브로프와 결별하고 비밀결사의 권력 장악과 혁명적 소수독재를 주창했다. 제네바에서 『나바트』를 발행했고, 전위당 개념은 레닌의 당 조직론에 결정적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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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1–1862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입학, 학생 소요 참여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 1862–1869『루스코예 슬로보』 · 『델로』 기고 — 급진 문학 비평, 경제 통계, 마르크스 소개
  • 1868–1869네차예프와 함께 페테르부르크 학생 소요의 급진 소수파 지도
  • 1869–1873체포·재판 — 1년 4개월형 후 시브초보 유형, 1873년 12월 해외 탈출
  • 1875–1881제네바에서 기관지 『나바트』(Набат) 발행 — 러시아 블랑키즘의 강령 완성
  • 1877K. M. 투르스키와 「인민해방협회」 창설 (러시아 내 활동은 미미)
  • 1882–1886정신 질환 발병 — 파리 정신병원 입원, 41세로 사망

니콜라이 예고로비치 주콥스키

Николай Егорович Жуковский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47–1921 ○ 병사

러시아 항공의 아버지, 유체역학의 수학적 토대를 세우고 TsAGI를 만든 과학자

당대 과학자들이 인간 비행을 비웃을 때, 주콥스키는 1891년 강연 「새의 비상에 관하여」에서 글라이더의 '죽음의 루프' 가능성을 수학으로 증명했고, 22년 후 네스테로프가 하늘에서 그 증명을 완성했다.

러시아 항공학의 창시자이자 현대 유체역학의 아버지. 새의 비행을 수학적으로 분석하여 양력의 순환이론을 정립했고, 1902년 모스크바대에 러시아 최초의 풍동을 건설했다. 1904년 유럽 최초의 공기역학 연구소를 쿠치노에 세웠고, 1918년에는 TsAGI(중앙유체역학연구소)를 창설하여 소련 항공·우주 과학의 제도적 기반이 되었다. 제자 투폴레프, 스테치킨, 유리예프 등이 소련 항공 산업을 이끌었으며, 치올콥스키의 고립된 이론을 국가적 연구 역량으로 전환시킨 제도적 통로가 바로 주콥스키의 학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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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8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부 응용역학 전공 졸업
  • 1872제국모스크바기술학교 교수, 분석역학 담당, 1920년까지 재직
  • 1885모스크바대학 교수, 유체역학 및 응용역학 강의
  • 1902모스크바대학에 러시아 최초의 흡입식 풍동 건설 지휘
  • 1904쿠치노에 유럽 최초의 공기역학 연구소 설립, 소장 취임
  • 1908모스크바기술학교에 항공동호회 창설, 훗날 투폴레프, 스테치킨, 유리예프 배출
  • 1918TsAGI(중앙유체역학연구소) 창설, 초대 소장

이반 페트로비치 파블로프

Иван Петрович Павлов
이론가 소비에트 러시아 1849–1936 ○ 폐렴, 86세

조건반사를 발견하고 스탈린에게 '러시아인이라 불리는 것이 부끄럽다'고 쓴 노벨상 생리학자

동료가 거리의 총격 때문에 10분 지각했다고 설명하자, 파블로프가 외쳤다: '혁명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실험실에서 할 실험이 있는데!'

소화생리학 연구로 1904년 노벨상을 수상하고, 개 실험을 통해 조건반사(고전적 조건형성)를 발견하여 현대 행동심리학과 신경과학의 토대를 놓은 러시아·소비에트 생리학자. 레닌의 찬사와 소비에트 정부의 전폭적 지원을 받으면서도 공산당 체제를 공개적으로 비판했으며, 1927년 스탈린에게 지식인 탄압에 대해 '러시아인이라 불리는 것이 부끄럽다'고 썼고 1934년 키로프 암살 후에는 대숙청을 몰로토프에게 항의했다. 그의 고등신경활동에 관한 유물론적 생리학은 사후 소비에트 이데올로기적 정설로 교조화되어, 그 자신의 치열한 독립 정신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파블로프 학설' 국가 정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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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0–1875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자연과학 전공, 자연과학 후보 학위 취득
  • 1875–1879제국의과외과학원 수학, 금메달로 졸업
  • 1884–1886독일 라이프치히·브레슬라우에서 카를 루트비히·루돌프 하이덴하인 밑에서 연구
  • 1890–1895군사의학아카데미 약리학 교수
  • 1891–1936실험의학연구소 생리학부장
  • 1895–1925군사의학아카데미 생리학 교수
  • 1904소화생리학 연구로 노벨 생리의학상 수상 — 러시아 최초의 노벨상 수상자
  • 1925–1936소비에트 과학아카데미 생리학연구소 소장

이반 블라디미로비치 미추린

Ив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Мичурин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55–1935 ○ 자연사

자신의 이름이 라이선코에게 도용된 독학 육종학자

“우리는 자연의 은혜를 기다릴 수 없다. 자연으로부터 그것을 빼앗는 것이 우리의 과업이다.” — 미추린이 묘목장에서 수십 년간 반복한 이 유명한 문장은 후일 소비에트 체제의 자연 정복 수사로 왜곡되었다.

300종 넘는 과일 품종을 육종한 러시아 독학 원예학자. 교잡육종에 평생을 바쳤고 레닌의 지원으로 묘목장이 국립 연구소로 성장했다. 사후 리센코가 그의 이름을 도용해 '미추린 생물학'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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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55랴잔현 베르시나 영지에서 소귀족 가문의 7번째 자녀로 출생
  • 1872프론스크 군립학교 졸업. 랴잔 김나지움에서 '상관에 대한 무례'로 퇴학당함
  • 1875코즐로프에서 첫 임차지(약 500㎡)에 과일·장과류 600종 이상 수집, 교잡 실험 시작
  • 1888투르마소보 인근에 약 13ha의 토지 구입, 러시아 최초의 선종 묘목장 중 하나 설립
  • 1906첫 학술 논문 발표. 1912년 성 안나 훈장 3등급 수훈
  • 1918인민농업위원회, 미추린 묘목장을 국유화하고 그를 관리자로 임명. 레닌이 개인적 관심 표명
  • 1931레닌 훈장 및 노동적기훈장 수훈. 1934년 생물학 박사 학위, RSFSR 과학기술 공로 활동가 칭호
  • 1935소련 과학 아카데미 명예 회원, 전연방농업과학아카데미 정회원. 6월 7일 사망

레프 그리고리예비치 데이치

Лев Григорьевич Дейч
이론가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855–1941 ○ 사망

'노동 해방' 그룹을 조직하고 멘셰비즘의 기원에 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그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고 말했을 때 동료 유형수들의 반응은 이랬다: '내가 마호메트의 추종자라고 선언했더라도 그들은 이보다 더 놀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하여 '검은 재분할'을 거친 후 1883년 스위스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 등과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 해방' 그룹을 창립했다. 조직의 실무자로서 불법 출판물의 간행과 러시아 밀반입을 총괄했으며, 1884년 독일에서 체포되어 러시아에 인도된 후 13년간 카라 강제노동형을 복역했다. 1901년 탈출 후 《이스크라》 편집진에 합류하고 RSDLP 제2차 대회에서 멘셰비키로 서서 당 분열의 한 축을 형성했으며, 말년에는 회고록 《반세기》(За полвека)로 러시아 혁명운동사의 1차 사료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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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키예프 나로드니키 서클 가입
  • 1877치기린 음모 조직
  • 1879'검은 재분할' 당원
  • 1883제네바에서 '노동 해방' 그룹 공동 창립
  • 1901–1903《이스크라》 편집진
  • 1903RSDLP 제2차 대회 멘셰비키 대표
  • 1911–1916뉴욕에서 《스보보드노예 슬로보》 발행
  • 1917플레하노프와 《예딘스트보》 편집

콘스탄틴 예두아르도비치 치올콥스키

Константин Эдуардович Циолковский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57–1935 ○ 위암

귀먹은 시골 교사에서 우주비행학의 아버지로. 로켓 방정식 하나로 우주 시대를 연 독학자

「인류는 영원히 지구의 요람에 머물지 않을 것이다. 인류는 대기와 태양계의 한계를 넘어 정복할 것이다.」

로켓 추진의 기본 방정식을 정립한 우주비행학의 선구자. 1903년 다단계 로켓·궤도 정거장·우주 식민지 개념을 제시했고, 그의 이론은 코롤료프와 소비에트 우주 계획의 직접적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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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9민중학교 교사 자격 취득
  • 1880–1892보롭스크 시립학교 수학·기하 교사
  • 1892–1921칼루가 현립학교·여자교구학교 수학·물리 교사
  • 1903「반응 장치에 의한 세계 공간 탐구」 발표 — 로켓 방정식 기초 확립
  • 1920러시아 세계학 애호가 협회 회원, 소비에트 정부 개인연금 수여
  • 1924–1935우주비행학 이론 집중 연구 — 다단계 로켓·궤도정거장·우주 식민지 구상
  • 1932노동적기훈장 수훈, 75세 전국 경축

미하일 이바노비치 투간-바라놉스키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Туган-Барановский
이론가 러시아 제국 우크라이나 1865–1919 ○ 심장마비로 사망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윤리적 사회주의로: 공황주기론을 개척한 경제학자

1900년 4월 프스코프에서 열린 『이스크라』 창간 조직회의에서 그는 레닌, 마르토프, 스트루베와 함께 자리했으나, 정작 사회민주당 지하조직에는 끝내 가입하지 않았다.

'합법적 마르크스주의'의 대표적 경제학자로, 1894년 『현대 영국의 공업위기』에서 자본주의 공황의 내생적 주기이론을 제시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표트르 스트루베와 함께 나로드니키에 맞서 마르크스주의 경제사 분석을 전개하고 1900년 『이스크라』 창간 회의에 참여했으나, 이후 정통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 칸트 윤리학에 기초한 '윤리적 사회주의'로 전환, 협동조합 운동의 이론적 기초를 정립했다. 1917년 2월혁명 후 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재무장관과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창립 회원을 지냈으며, 그의 공황이론은 케인스 등 서구 거시경제학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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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하리코프 대학 졸업, 자연과학 후보학위 취득
  • 1894『현대 영국의 공업위기』 출간, 모스크바 대학 정치경제학 석사
  • 1895–1899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정치경제학 강사(사도첸트)
  • 1898『러시아 공장의 과거와 현재』 출간, 모스크바 대학 정치경제학 박사
  • 1900『이스크라』 창간 조직회의 참여 (프스코프)
  • 1901–1905폴타바 지역 젬스트보 활동, 『정치경제학 최근사 개요』 집필
  • 1906–1913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및 폴리테크니크 강사·교수
  • 1909–1917『협동조합 통보』(Вестник кооперации) 편집장
  • 1917.8–11우크라이나 중앙라다 재무장관(서기)
  • 1918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 창립 회원, 사회경제부문 책임자

페테리스 이바노비치 스투치카

Пётр Иванович Стучка
이론가 소련 라트비아 1865–1932 ○ 자연사

계급적 법 개념을 정식화한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법이론의 건설자

'법이란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고 이 계급의 조직된 힘, 즉 국가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체계, 즉 질서이다.' — 『법과 국가의 혁명적 역할』

라트비아 출신 법률가·혁명가. 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을 이끌었고, 10월 혁명 후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를 기초해 소비에트 사법의 토대를 놓았다. 1918~1920년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 1923년부터 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을 지냈다. 파슈카니스와 공산아카데미 법학부를 창설하고 최초의 『국가와 법 백과사전』을 편집했으며, 법을 '지배계급의 이익에 부합하고 국가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사회관계의 체계'로 정의한 계급적 법 개념은 초기 소비에트 법이론의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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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1888리가 김나지움 졸업,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부 졸업 — 변호사 개업
  • 1888–1897라이니스와 함께 라트비아 마르크스주의 '신조류' 운동 및 신문 『디에나스 라파』 주도
  • 1897–1903체포, 7개월 구금 후 뱟카현 5년 유형 — 풍자집 『작은 등에』 공동 집필
  • 1906RSDRP 입당, 라트비아 사회민주당 통합대회 주재 — RSDRP 지역조직으로 편입
  • 1917.10–11스몰니에서 라트비아 소총병 연락,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 조사위원장 — 법무인민위원으로 '법원 포고 제1호' 기초
  • 1918–1920RSFSR 법무인민위원·외무부인민위원, 라트비아 소비에트 정부 수반(1918.12–1920.1)
  • 1923–1932RSFSR 최고재판소 초대 소장, 코민테른 국제통제위원회 의장(1924), 『국가와 법 백과사전』 편집장(1925~1927), 소비에트법연구소 소장(1931)

니콜라이 야코블레비치 마르

Николай Яковлевич Марр
이론가 소비에트 그루지야 1865–1934 ○ 뇌졸중으로 사망

제국 학술원 출신으로 유일하게 공산당에 입당해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한 야페트 이론의 창시자

'언어학의 세계 규모적 정립' — 마르가 자신의 이론을 일컫던 표현이다. 그에게 모든 언어는 네 원시음에서 비롯되었으며, 언어는 계급적 상부구조였다.

그루지야 쿠타이시에서 태어난 마르는 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카프카스 언어·고고학으로 명성을 쌓아 1912년 제국 학술원 정회원이 되었다. 혁명 후 언어를 계급적 상부구조로 보며 모든 언어가 네 원시음(sal, ber, yon, rosh)에서 비롯되었다는 '야페트 이론'을 주창, 1930년 공산당 입당과 함께 학술원 부원장이 되어 사망 시까지 소비에트 언어학을 지배했다. 그의 유사과학적 이론은 1950년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언어학의 제문제」로 공식 폐기되었으며, 그 행로는 혁명기 과학과 권력의 길항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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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페테르부르크 대학 동양학부 졸업 및 강사
  • 1912제국 학술원 정회원
  • 1921야페트 연구소(후일 언어·사고 연구소) 설립
  • 1926–1930레닌그라드 공공도서관 관장
  • 1930공산당 입당 (제국 학술원 출신 최초·유일)
  • 1930–1934소련 학술원 부원장

알렉산드르 리보비치 파르부스

Александр Львович Парвус
이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67–1924 ○ 심장마비

영구혁명론을 공동 창안하고 레닌의 봉인열차 귀환을 주선한 '혁명의 상인'

1917년 12월, 레닌은 파르부스의 귀국 요청을 거부하며 답했다: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독일 사민당(SPD)의 저널리스트로, 1904~1905년 레프 트로츠키와 함께 '영구혁명론'을 공동 발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정부 자금으로 러시아 혁명 조직망을 구축했으며, 1917년 4월 레닌의 '봉인열차' 귀환을 주선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 집권 후 레닌은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며 그의 귀국을 거부했고, 파르부스는 독일에 남아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지도자들의 고문이 되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현실정치 사이에서 자신의 원칙을 상품화했다는 비판을 받는,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에서 가장 논란적인 인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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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바젤대 박사학위, 독일 사민당 입당
  • 1894–1897『디 노이에 차이트』 필진, '파르부스' 필명 채택
  • 1897–1898『젝지셰 아르바이터차이퉁』 편집장
  • 1900레닌·마르토프와 『이스크라』 창간 지원
  • 1904–1905트로츠키와 영구혁명론 공동 정식화
  • 1905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전략가, 「재무선언」 기초
  • 1915독일 외무부에 러시아 혁명 계획 제출, 코펜하겐 작전망 구축
  • 1917레닌의 '봉인열차' 귀환 주선

필리프 이에세예비치 마하라제

ფილიპე იესეს ძე მახარაძე
이론가 소련 그루지야 1868–1941 ○ 자연사

그루지야를 온건하게 소비에트화하려다 스탈린에게 쫓겨난 볼셰비키 원로

「그루지야에서 소비에트 권력의 수립은 외국 점령의 외양을 띠었다, 나라 안에는 혁명에 가담할 준비가 된 자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1921년 12월, 모스크바 중앙위원회 보고

그루지야 구리아 출신으로 트빌리시 신학교와 바르샤바 수의학연구소에서 수학했다. 1891년 사회민주주의에 합류해 멘셰비키 우세 지역에서 드문 볼셰비키 지도자로 활동했고, 1921년 2월 혁명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으나 반대파에 대한 온건 노선과 그루지야 주권 유지를 주장하다 7월 스탈린에게 해임되고 므디바니로 교체되었다. 이 사건은 1922년 '그루지야 사건'의 직접적 전사이며, 이후 고스플란·인민위원회·최고소비에트 의장을 거쳐 대숙청을 생존한 몇 안 되는 구볼셰비키 원로로 194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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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사회민주주의 운동에 합류
  • 1903캅카스 연합위원회 RSDLP 위원, 1905년 혁명 참여
  • 1907–1915자캅카스에서 볼셰비키 지하운동 지도
  • 1917『캅카스 노동자』 편집자, RSDLP(b) 캅카스 지역위원회 위원
  • 1918–1920멘셰비키 정부하 그루지야에서 지하활동
  • 1921.2–7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 온건 노선으로 스탈린에게 해임
  • 1922–1938그루지야 중앙집행위 의장, 인민위원회 의장, 자캅카스 고스플란 의장, 자캅카스 중앙집행위 의장
  • 1938–1941그루지야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소련 최고소비에트 부의장

미하일 오시포비치 게르셴존

Михаил Осипович Гершензон
이론가 소비에트 러시아 1869–1925 ○ 결핵으로 사망

《베히》를 기획하고 인텔리겐치아의 정신적 자각을 촉구한 러시아 문화사가

1909년 《베히》 서문에서, "우리는 총검과 감옥으로 우리를 민중의 분노로부터 지켜주는 바로 그 권력을 축복해야 한다"고 썼다.

러시아 문화사가이자 수필가로, 1909년 지식인의 혁명적 급진주의를 비판한 논쟁적 저작 《베히》(Vekhi)의 발기인이자 편집자였다. 그는 인텔리겐치아가 외적 사회 형태의 재편에 매몰되어 내적 정신의 자각을 외면했다고 보았으며, "우리를 민중의 분노로부터 지켜주는 총검과 감옥의 권력을 축복해야 한다"는 도발적 문장으로 거센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혁명 후에는 전러시아 작가연합 초대 의장과 나르콤프로스 문학부문을 지냈으며, 푸슈킨 연구(《푸슈킨의 지혜》, 1919)와 19세기 러시아 사상사 연구로 중요한 학문적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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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모스크바대학 역사·문헌학부 졸업
  • 1903–1905《나우치노예 슬로보》 문예 평론가
  • 1907–1909《크리티체스코예 오보즈레니예》 문예 편집장
  • 1909《베히》 발기·편집, 서문과 논고 기고
  • 1915–1919《루스키예 프로필레이》(전6권) 편집
  • 1918모스크바 작가연합 초대 의장
  • 1920–1921전러시아 작가연합 의장·나르콤프로스 문학부문 위원
  • 1922–1925국립예술학아카데미 문학부문장

예카테리나 드미트리예브나 쿠스코바

Екатерина Дмитриевна Кускова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인 1869–1958 → 추방 뒤 망명 중 사망

개혁적 사회주의와 반당주의를 오간 공론가

1921년 기근 속에서 그녀는 폼골의 구호 활동에 나섰고, 이듬해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되었다.

예카테리나 쿠스코바는 혁명적 인민주의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경제주의를 거쳐 자유주의적 개혁사회주의로 이동한 정치활동가·저술가였다. 1899년의 《크레도》는 노동운동의 경제투쟁과 민주적 개혁을 앞세우며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의 전략을 둘러싼 논쟁을 촉발했다. 1905년 이후 그녀는 해방동맹, 협동조합 운동, 여성 평등 운동과 여러 신문을 통해 정당 독점에 맞선 민주적 연합을 모색했고, 1917년에는 임시정부를 지지하면서도 코르닐로프 세력을 비판했다. 1921년 기근 때에는 세르게이 프로코포비치와 함께 폼골의 비볼셰비키 구호 활동을 조직했으나, 위원회가 해산된 뒤 체포·추방되어 망명지에서 글을 계속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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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0s–1893인민주의 지하모임 참여, 체포와 니즈니노브고로드 유형
  • 1895–1899세르게이 프로코포비치와 결혼, 해외 사회민주주의·경제주의 활동
  • 1903–1905해방동맹 창립 참여, 《우리의 삶》 편집
  • 1906–1914《제목 없음》 발행, 협동조합·여성 평등 운동
  • 1917《인민의 권력》 발행, 민주회의·임시공화국회의 대표
  • 1921전러시아 기근 구호 위원회 폼골의 비볼셰비키측 조직자
  • 1922–1958추방 뒤 베를린·프라하·제네바에서 망명 언론 활동

다비트 보리소비치 랴자노프

Давид Борисович Рязано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0–1938 ✕ 처형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의 창설자, 이견을 멈추지 않은 당내 독립적 마르크스주의자

「코바, 그만둬, 창피한 꼴 당하지 말게. 이론이 자네 분야가 아니란 건 모두 알고 있네.」 — 당 회의에서 스탈린에게 던진 말.

오데사 출신의 유대계 러시아인 마르크스주의자로, 17세부터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ИМЭ)를 창설하여 세계 최고의 마르크스 문헌 컬렉션을 구축했고, 마르크스·엥겔스의 미발표 원고를 직접 발굴·편집하여 《독일 이데올로기》 제1장과 《자연변증법》을 최초로 출판했다. 소비에트 아카데미 정회원(1929)이자 당대 최고의 마르크스 학자였으나, 제헌의회 해산·브레스트 평화·당내 이견 탄압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독립적 성향 때문에 1931년 체포·추방되었고, 1938년 사라토프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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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89오데사에서 노동자 서클 조직, 초기 마르크스주의자로 활동; 첫 파리 체류, 플레하노프·라브로프와 교류
  • 1891–1899체포·18개월 구금 후 4년 강제노동형, 이후 키시뇨프 유형; 총 5년을 크레스티 교도소에서 복역
  • 1901–1905그룹 「보르바」 이끌며 RSDLP 제2차 대회 참가; 레닌의 당 중앙집권화·분파주의를 공개 비판
  • 1905–1907러시아로 귀국, 페테르부르크 최초 노동조합 조직; 제2두마 사민당 분파에서 활동
  • 1907–1917해외 망명; 독일 사민당 기록보관소 연구, 카우츠키의 학술비서; 마르크스·엥겔스 미출간 원고 다수 발굴·출판
  • 1917–1918귀국 후 메즈라욘카 합류, 볼셰비키와 통합; 제헌의회 의원 당선; 무장봉기·제헌의회 해산·언론탄압에 반대
  • 1918–1920브레스트 평화 반대로 일시 탈당 후 복당; 국가기록관리총국(글라바르히프) 국장, 과학총국장
  • 1921–1931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ИМЭ) 창설·소장; 《독일 이데올로기》 제1장(1924)·《자연변증법》(1925) 최초 출판
  • 1929소비에트 아카데미 정회원 선출(역사학, 27/30표); 적기노동훈장 수훈
  • 1931–1938멘셰비키 연계 혐의로 체포·제명·사라토프 유형; 1937년 재체포, 1938년 1월 21일 총살

표트르 아나니예비치 크라시코프

Пётр Ананьевич Красико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0–1939 ○ 병사

소련 최초의 검찰총장, 혁명적 합법성의 설계자

1922년 페트로그라드 재판에서 크라시코프는 정교회 메트로폴리탄 베니아민에게 사형을 구형하며 "혁명 앞에서 교회는 무릎 꿇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법정은 이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1892년 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의 '노동해방단'에 가입하고 1903년 제2차 당대회에서 레닌·플레하노프와 함께 뷰로 위원을 지낸 볼셰비키 혁명가로, 1924년 초대 소련 검찰총장에 취임해 소비에트 사법 체계의 제도적 기초를 세웠다. 반종교 저널 《혁명과 교회》를 창간하고 1918·1924·1936년 소비에트 헌법 제정에 참여했으며, 1938년 대숙청 와중에 해임된 뒤 이듬해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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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제네바 '노동해방단' 가입
  • 1903제2차 당대회 뷰로 위원 (레닌·플레하노프와 공동)
  • 1905페테르부르크 당위원회 선동부장
  •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조직 참여, 군사수사위원회 의장
  • 1918–1924법무부 인민위원
  • 1919–1924《혁명과 교회》 창간·편집장
  • 1924–1933초대 소련 검찰총장
  • 1933–1938소련 대법원 부원장

표트르 베른가르도비치 스트루베

Пётр Бернгардович Струве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0–1944 ○ 망명지 사망

마르크스주의에서 자유주의를 거쳐 반볼셰비키 보수로: 러시아 지식인의 궤적을 그린 사상가

바실리 슐긴이 회고한 장면: 「그러면 자신도 진압되어야 했나?」 묻자, 스트루베는 흰 수염을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 외쳤다 — 「그렇소! 나부터! 혁명가가 머리를 들면 — 탁! — 개머리판으로 두개골을!」

합법적 마르크스주의로 출발해 해방동맹 공동 창립과 『이정표』(1909) 참여를 거쳐 백군 이념가로 귀결된 사상가. RSDLP 첫 선언문(1898)을 썼고, 망명 중에도 반볼셰비키 저술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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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러시아 경제발전 비판』 출간, 합법적 마르크스주의 기수로 부상
  • 1898제1차 RSDLP 대회 선언문 기초
  • 1902–05『해방』지 편집, 해방동맹 공동 창립
  • 1905–15카데트 중앙위원, 『이정표』(1909) 참여
  • 1907제2국가두마 의원(페테르부르크)
  • 1917러시아과학원 정회원, 임시정부 외무부 경제국장
  • 1918–20백군 이념가, 데니킨·브란겔 정부 외교 담당
  • 1921–44망명 언론인·학자, 『르네상스』 등 편집

미하일 드미트리예비치 본치-브루예비치

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Бонч-Бруевич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0–1956 ○ 자연사

볼셰비키에 합류한 첫 제국군 장성으로 적군 창설을 지휘한 군사지도자

그는 훗날 회고했다. '나는 이성보다는 본능으로 볼셰비키에게 끌렸다. 러시아를 붕괴와 완전한 파멸에서 구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 그들에게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제국 육군 소장에서 볼셰비키로 전향한 최초의 고위 장교로, 최고군사위원회 군사지도자(1918)와 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장(1919)을 맡아 적군의 초기 조직을 지휘했다. 독일군 총공세에 레닌의 긴급 소환을 받고 페트로그라드로 달려가 나르바-프스코프 방어선을 설정했으며, 구 제국 장교들을 군사전문가로 대거 기용하는 제도를 주도했다. 전간기에는 소련 최초의 측지국을 창설했고, 스탈린 시기 두 차례 체포되었으나 살아남아 1944년 중장으로 진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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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1–1898콘스탄티노프 측량학교·모스크바 보병 사관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898–1913키예프 군관구 등 각 참모부 근무, 『전술교본』 개정과 응용전술 강의
  • 1914–1915제176 페레볼로첸스키 연대장으로 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제3군·북서전선 군수참모부장, 소장 진급
  • 1915–1916북부전선 참모장 대리, 황후의 반대로 경질
  • 1917.3–9프스코프 수비대장, 코르닐로프 반란 당시 북부전선 사령관 대리로 크라스노프 장군 체포
  • 1917.11–1918.8최고사령관 참모장 → 최고군사위원회 군사지도자, 독일군 차단 '차폐' 방어체계 구축
  • 1919.6–7혁명군사위원회 야전참모장
  • 1919–1944최고측지국 초대 국장(1919–23), 항공촬영국 조직(1925), 1931년 체포 후 석방, 사단지휘관(1937)·중장(1944) 진급

니콜라이 예브그라포비치 페도세예프

Николай Евграфович Федосеев
이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71–1898 ✕ 유형지에서 자살 (27세)

볼가 지역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한 러시아 혁명가

“페도세예프는 그를 아는 모든 이의 비상한 호감을 받았으며, 자신의 대의에 전적으로 헌신한 구시대 혁명가의 전형이었다” — 레닌, 1922년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 니콜라이 페도세예프는 1888년 카잔에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해 젊은 레닌과 고리키에게 마르크스주의를 소개한 인물이다. 수감 중에도 레닌과 이론 서신을 교환했으며, 농노제 붕괴의 경제적 원인을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분석한 저작과 프롤레타리아 정당 강령 초안을 집필했다. 나로드니키 이론가 미하일롭스키와의 논쟁은 초기 마르크스주의-나로드니키 논쟁의 장을 열었고, 그의 강령은 레닌이 '유일하게 올바른' 것이라고 평했지만, 1898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동료의 중상에 시달리다 27세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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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카잔에서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 1889.7불법 인쇄소 조직 혐의로 체포
  • 1890–1892카잔 및 상트페테르부르크 '크레스티' 감옥 수감
  • 1892.9모로조프 공장 파업에서 노동자 조직 — 다시 체포됨
  • 1893.11솔비체고츠크로 3년 유형
  • 1895.7동시베리아로 5년 유형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불가코프

Сергей Николаевич Булгако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71–1944 ○ 망명 중 사망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을 버리고 소피아론 신학을 세운 사제 철학자

네 살배기 아들 이반의 장례식에서 불가코프는 '하느님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깨달았다'고 기록했고, 이 신비체험을 정교회 귀환의 결정적 계기로 삼았다.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이자 경제학자로, 법적 마르크스주의자에서 출발해 관념론을 거쳐 사제 서품에 이르는 20세기 러시아 지성사의 대표적 전향 궤적을 그렸다. 1890년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저술로 명성을 얻었으나, 《자본주의와 농업》(1900)에서 마르크스 이론의 한계를 발견하고 칸트와 솔로비요프 철학을 경유해 교회로 복귀했다. 1909년 《이정표》에 기고한 「영웅주의와 금욕주의」에서 러시아 인텔리겐치아의 무신론적 혁명주의를 비판했고,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추방된 후 파리에서 성 세르기우스 정교신학원을 공동 설립하여 소피아론 신학 체계를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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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898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 정치경제학 강사
  • 1895–1900법적 마르크스주의 대표 저술가, 카우츠키·베벨·플레하노프와 교류
  • 1901–1906키예프 공대 교수, 키예프대학 사강사
  • 1903《마르크스주의에서 관념론으로》 출간
  • 1906–1918모스크바대학 사강사, 모스크바 상업대학 교수
  • 1907제2국가두마 의원 (오룔현, 무소속 기독교 사회주의자)
  • 1909《이정표》에 「영웅주의와 금욕주의」 기고
  • 1917–1918전러시아 공의회 위원, 최고교회평의회 위원, 사제 서품
  • 1922'철학자의 배'로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
  • 1925–1944파리 성 세르기우스 정교신학원 공동 설립자·교수

표도르 일리치 단

Фёдор Ильич Дан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1–1947 ○ 폐암으로 사망

레닌에 맞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견지한 멘셰비키의 이론적 기둥

1943년, 평생의 반볼셰비키 멘셰비키 지도자 단은 『볼셰비즘의 기원』에서 볼셰비즘이 '우리 시대의 핵심 사상인 사회주의의 담지자'로 역사에 의해 선택되었다고 썼다.

표도르 단은 혁명가·의사이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멘셰비키 분파의 창립 지도자이며 핵심 이론가였다. 1903년 제2차 당대회에서 마르토프 편에 서 레닌에 맞섰고, 1917년 2월 혁명 후 '혁명적 방어주의'의 주요 이데올로그로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을 지냈다. 1922년 망명 후 1923년 마르토프 사망부터 1940년까지 멘셰비키 해외대표단을 이끌며 볼셰비키 권위주의와 서구 사민주의 타협에 맞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견지했다. 『볼셰비즘의 기원』(1943)에서는 볼셰비즘이 사회주의의 역사적 담지자임을 인정하면서도 소비에트 체제의 정치적 자유화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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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896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활동, 체포 후 뱟카로 유형
  • 1901–1903베를린 망명, 이스크라 지원 그룹 참여; RSDLP 제2차 대회에서 마르토프 지지, 멘셰비키 공동 창립
  • 1905–1912멘셰비키 주요 신문 『나찰로』 편집진, RSDLP 제4·5차 대회; 『사회민주주의자의 목소리』 공동 편집
  • 1917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 '혁명적 방어주의' 이데올로그
  • 1919–1920제7·8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멘셰비키 대표로 연설; 적군 군의관 복무
  • 1922–1923체포·투옥 후 해외 추방; 사회주의 노동자 인터내셔널 창립 참여, 소비에트 시민권 박탈
  • 1923–1940멘셰비키 해외대표단 단장; 베를린·파리에서 망명 활동
  • 1941–1947뉴욕 망명, 잡지 『노비 푸티』 발행; 『볼셰비즘의 기원』(1943) 집필

세르게이 니콜라예비치 프로코포비치

Сергей Николаевич Прокопович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인 1871–1955 ○ 망명 중 자연사

시장과 국가 통제 사이를 분석한 경제학자

“소매상은 예전에도 투기했고 지금도 투기하지만, 예전에는 물가가 높지 않았고 지금은 높다.”

세르게이 프로코포비치는 통계와 정치경제를 바탕으로 러시아의 농업·노동·협동조합 문제를 연구한 경제학자였다. 그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에서 수정주의적 사회민주주의와 자유주의로 이동했지만, 국가가 시장을 조절해야 한다고 보며 노동과 농민의 생활 문제를 계속 다뤘다. 1917년 임시정부의 식량장관으로서 전시 동원, 운송 혼란, 농촌의 곡물 유보가 겹친 위기 속에서 고정가격과 국가 곡물독점의 한계를 마주했다. 이후 기근 구호 활동으로 체포·추방되었고, 망명지에서 소련 경제를 통계적으로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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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s해외 러시아 사회민주주의자 동맹 참여
  • 1899브뤼셀대학교 졸업 후 러시아 귀환
  • 1904–1905해방동맹 참여, 1905년 혁명기에 입헌민주당 중앙위원
  • 1906–1916경제 통계·농업·노동 연구와 협동조합 활동
  • 1917임시정부 통상·공업장관, 이어 식량장관
  • 1921전러시아 기근구호위원회 조직·지도
  • 1922–1955추방 뒤 베를린·프라하·스위스에서 경제 연구와 출판

유리 미하일로비치 스테클로프

Юрий Михайлович Стекло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3–1941 ✕ 옥사

이즈베스티야 첫 소비에트 편집장, 소비에트 헌법의 설계자

그의 이즈베스티야 사설은 '스테클랴슈키'(유리조각)라 불렸고, 레닌은 직접 쪽지를 보냈다: "스테클로프 동지! 당신 사설을 읽었소. 바로 이렇게 써야 하오, 더 많이!" 스테클로프는 이 쪽지를 액자에 넣어 편집실 벽에 걸었다.

오데사 출신의 볼셰비키 언론인이자 역사가. 1917년 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이즈베스티야》 편집장이 되어 1925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1918년 RSFSR 헌법과 1924년 소련 헌법의 공동 기초자였으며 VTsIK 상임간부회 위원을 지냈다. 고리키와 함께 《노바야 지즌》을 편집하고 월간 《노비 미르》 창간을 주도했다. 바쿠닌·체르니솁스키 평전을 비롯해 방대한 사회주의 사상사 저작을 남겼다. 1938년 체포되어 1941년 사라토프 감옥에서 사망,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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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1893오데사에서 노동자 서클 조직,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합류
  • 1894–1899체포되어 야쿠츠크주 중콜림스크로 10년 유형
  • 1901–1903《이스크라》 편집 참여, RSDLP 제2차 대회 후 볼셰비키 합류
  • 1905–1910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참가·체포, 두마 사회민주당 분파 자문
  • 1911롱쥐모 당학교 교사, 유럽 사회민주주의 언론에 기고
  • 1917–1925《이즈베스티야》 편집장, VTsIK 상임간부회 위원
  • 1918–19241918년 RSFSR 헌법과 1924년 소련 헌법 공동 기초
  • 1920–1930바쿠닌·체르니솁스키 평전 등 사회주의 사상사 저술
  • 1925월간 《노비 미르》 창간 주도
  • 1929–1938중앙집행위원회 산하 학술위원회 부위원장

니콜라이 알렉산드로비치 베르댜예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ердяе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4–1948 ○ 망명 중 사망

마르크스주의를 떠나 기독교 실존주의의 자유 철학을 정립한 러시아 사상가

체카의 펠릭스 제르진스키에게 한밤중 심문을 받으면서도 "볼셰비즘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따져 당당히 맞섰다. 제르진스키는 그를 석방했다 — "보라, '관점'을 가진 인간을."

마르크스주의에서 출발해 기독교 실존주의와 개인주의 철학을 정립한 러시아의 대표적 종교·정치 사상가다. 『이정표』(1909) 그룹의 주축으로서 혁명적 급진주의를 비판했고, 볼셰비키 집권 후 '자유 정신문화 아카데미'를 설립해 독립적인 철학 활동을 이어갔다.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소련에서 추방된 후 베를린과 파리에서 『러시아 이념』 『노예와 자유』 등 주요 저작을 집필했으며, 일곱 차례 노벨문학상 후보로 지명되었다. 신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비창조된 자유' 개념은 전체주의 비판과 실존주의적 정치신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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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학생 시위 참여로 체포·유배, 키예프대학 제적
  • 1901『사회철학에서의 주관주의와 개인주의』 출간, 관념론으로 전향
  • 1909『이정표』(Вехи) 공동 집필, 혁명적 지식인 비판
  • 1919–22자유 정신문화 아카데미 설립·주재
  • 1920모스크바대학 철학 교수
  • 1922'철학자의 배'로 소련 추방, 베를린 망명
  • 1925–40파리에서 잡지 『푸티』(Путь) 편집, 유럽 지성계와 교류
  • 1946『러시아 이념』 출간, 소련 시민권 획득

예브게니 빅토로비치 탈레

Евгений Викторович Тарле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4–1955 ○ 자연사

나폴레옹 전기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아카데미 사건의 유배에서 스탈린의 비호로 복귀한 역사가

1951년 가을, 반유대주의 캠페인이 한창이던 MГИМО 첫 강의에서 탈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유대인이며, 내 성은 탈레다."

키예프 출신 유대인 역사가. ≪대륙봉쇄≫(1913)로 국제적 명성을 얻고, '아카데미 사건' 유배 후 ≪나폴레옹≫(1936)이 스탈린의 주목을 받아 복권, 스탈린상 3회 수상. 소련 서양사학의 제1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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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키예프대학(성 블라디미르) 역사·문헌학부 졸업, 루치츠키 사사
  • 1900–1903루나차르스키 강연 모임에서 체포, 헤르손으로 유배; 사강사로 페테르부르크대학 강의 시작
  • 1909–1911≪프랑스혁명기 노동계급≫(2권)으로 박사학위 취득; 1913년 ≪대륙봉쇄≫ 출간
  • 1913–1918유리예프(타르투)대학 교수; 런던 국제역사학회의(1913)에서 논문 발표
  • 1918–1927페트로그라드 중앙기록부 지도부; 1921년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1927년 정회원
  • 1929–1932'아카데미 사건'으로 체포; 1931년 8월 알마아타 유배, 1932년 말 레닌그라드 귀환
  • 1936–1939≪나폴레옹≫(1936) 출간 — 스탈린의 주목으로 복권; ≪나폴레옹의 러시아 침공≫(1937), ≪탈레랑≫(1939) 출간
  • 1941–1945카잔대학 교수(1941–1943); ≪크림전쟁≫ 1·2권 출간(1941, 1943); 나치 전쟁범죄 조사 국가특별위원
  • 1942–1955스탈린상 1급 3회(1942, 1943, 1946); 소르본·오슬로·프라하·브르노·알제 명예박사; 영국학사원 통신회원(1944); 1955년 1월 사망, 노보데비치 안장

이반 가브릴로비치 알렉산드로프

Иван Гаврил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5–1936 ○ 자연사

전력망과 지역계획을 함께 설계한 기술관료

이반 알렉산드로프는 철도·교량 기술에서 출발해 수력공학과 경제지역화의 결합을 개척한 러시아·소련의 공학자였다. 그는 대규모 단일 댐이라는 구상으로 드네프르 수력발전소를 설계하고, 전력 생산을 산업 배치와 교통망의 문제로 함께 다루었다. GOELRO 작성에 참여한 그의 작업은 전기화를 기술 사업이 아니라 계획된 국민경제 재편의 틀로 놓았으며, 이후 5개년계획의 공간적 사고에도 흔적을 남겼다. 학술 연구와 국가 계획 사이에서 활동한 그는 1930년대 초 고스플란의 에너지 부문을 이끌었지만, 말년에는 다시 과학 연구와 교육에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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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모스크바 공병학교 졸업, 철도와 교량 설계에 종사
  • 1912중앙아시아 관개사업 연구와 설계 시작
  • 1920드네프르 대형 수력발전소 구상과 설계 착수
  • 1920–1921GOELRO 계획 작성에 참여, 경제지역화 작업을 공동 지휘
  • 1921–1932소련 고스플란 상임위원 및 에너지 부문 책임자
  • 1932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32–1936과학아카데미 교통 부문을 이끌며 연구와 교육에 전념

알렉산드르 안드레예비치 스베친

Александр Андреевич Свечин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8–1938 ✕ 처형

「러시아의 클라우제비츠」. 전략과 작전술의 이론가

1920년대 소련 군사 이론의 대논쟁에서 투하쳅스키는 스베친을 향해 이렇게 선언했다: "스베친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된 적도, 되려 한 적도 없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는 제국주의 간섭의 대행자다." 학문적 논쟁은 정치적 공격으로 변질되었고, 스베친은 끝내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다.

차르 장군 출신의 소련 최고 군사이론가. 『전략』(1927)에서 '작전술' 개념을 정립하고 미래 전쟁을 경제적 총력전으로 예견했으나, 그의 경고는 외면되었고 1938년 숙청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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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03미하일롭스크 포병학교 졸업, 니콜라옙스크 참모본부 아카데미 수료
  • 1904–05러일전쟁 참전: 제22동시베리아연대 중대장, 제16군단 참모
  • 1914–16제1차 세계대전: 제6핀란드소총연대장, 흑해해병사단장, 소장 진급
  • 1918볼셰비키 편입, 전러시아 주참모부장 역임
  • 1918–31참모본부 아카데미(후일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수, 전략 및 전쟁사 주임 지도관
  • 1926–27주저 『전략』 출간 — 작전술 개념 정립, 전략적 소모 이론 제시
  • 1931–32「봄」 사건으로 체포, 5년형 선고 후 1932년 석방
  • 1938/1956대숙청 중 체포되어 총살, 1956년 사후 복권

예멜리얀 미하일로비치 야로슬랍스키

Емельян Михайлович Ярославский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8–1943 ○ 위암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린 당의 수석 무신론자

흐루쇼프의 회고: "당내에서 야로슬랍스키를 '소비에트의 성직자'라 불렀다." 그가 내건 구호 — "종교에 대한 투쟁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야로슬랍스키는 소비에트 반종교 정책의 최고 이데올로그로, '전투적 무신론자동맹'(1925~1943) 의장으로서 조직적 무신론 운동을 총괄했다. 1898년 RSDLP에 입당,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무장봉기를 이끌었고 내전기에는 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을 지냈다. 1924년부터 10년간 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로 당내 숙청을 주도했으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위한 성서》 등 방대한 무신론 저작을 남겼다. 스탈린의 충실한 지지자이자 공식 당사 해석자였고, 1939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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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RSDLP 입당, 트란스바이칼 철도에서 사회민주주의 서클 조직
  • 1905–1907페테르부르크·모스크바 군사전투조직 지도, 제4·5차 당대회 대의원
  • 1907–19175년 카토르가형 후 야쿠티아 유형, 야쿠츠크 향토박물관장 역임
  • 1917.10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크렘린 초대 군사위원
  • 1918–1919모스크바 군관구 군사위원
  • 1921RKP(b) 중앙위원회 서기, 조직국 위원
  • 1924–1934중앙통제위원회 당규율위원회 서기
  • 1925–1943전투적 무신론자동맹 중앙평의회 의장, 반종교위원회 의장

블라디미르 빅토로비치 아도라츠키

Владимир Викторович Адоратский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78–1945 ○ 병사

IMEL 소장, 스탈린을 이론가로 공인한 첫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레닌은 내 순진함 때문에 나를 '아두라츠키'라고 놀렸다.」 — 가족 회고록

카잔 출신 볼셰비키 철학자. 1929년 스탈린을 '레닌주의의 이론가'로 찬양한 첫 인물로, 1931년 IMEL 소장이 되어 마르크스-엥겔스 저작집을 편찬, 공산권의 정전 독법을 수십 년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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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3카잔대학 수학과 입학 후 법학과 전환, 1900년 혁명운동 참여, 1903년 졸업 후 해외 망명
  • 1904–1908제네바에서 RSDLP 가입(1904), 귀국 후 체포·아스트라한 유형; 1905년 카잔에서 불법 볼셰비키 신문 『라보치』 발간
  • 1908–1918파리·런던·베를린 망명; 뮌헨에서 1차대전 민간인 포로로 억류, 레닌의 포로교환으로 귀국
  • 1920–1928중앙기록관리국 부국장, 모스크바대학 교수; 『마르크스주의 변증법』(1922) 등 첫 저작 출간
  • 1928–1931레닌 연구소 부소장; 1929년 『이즈베스티야』에 「이론가로서의 스탈린」 발표, 부하린 실각 후 『레닌 전집』 편집 인수
  • 1931–1939IMEL 소장; 마르크스·엥겔스 저작 러시아어판 15권·독일어판 8권 편집, 서한집 발간 준비
  • 1936–1939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소장 겸임; 마르크스-엥겔스 아카이브 매입 위원회 위원장
  • 1939–1945건강 악화로 소장직 사임, IMEL 책임편집자; 대조국전쟁 중 알마아타로 대피, 1945년 모스크바에서 사망

드미트리 미하일로비치 카르비셰프

Дмитрий Михайлович Карбыше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80–1945 ✕ 마우트하우젠에서 고문 살해

나치의 회유를 거부하고 마우트하우젠에서 순교한 소련 최고의 축성공학자

나치의 회유에 대한 카르비셰프의 답변: "신념은 이빨과 함께 빠지지 않는다. 나는 군인이며 내 의무에 충실하다."

러일전쟁, 제1차 세계대전, 내전을 거친 군사공학자로, 100여 편의 논문을 통해 소련 축성학을 정립하고 프룬제 아카데미와 참모본부 아카데미에서 적군 지휘관 세대를 가르쳤다. 브레스트 요새, 스탈린 라인, 만네르하임 선 돌파 등 주요 방어·공세 작전의 공학적 기반을 설계했다. 1941년 포로가 된 후 나치는 그를 '러시아 해방군' 총사령관으로 세우려 했으나 3년 반 동안 모든 회유를 거부하고 수용소 저항운동을 이끌었으며, 1945년 2월 마우트하우젠에서 영하 12도 얼음물 고문 끝에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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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05제1동시베리아 공병대대 전신중대장, 러일전쟁 참전, 5개 훈장
  • 1908–1911니콜라옙스크 군사공학아카데미 우등 졸업
  • 1911–1917브레스트 요새 건설, 1차대전 참전(브루실로프 공세), 중령
  • 1918–1920동부·남부전선 방어선 구축, 페레콥·촌가르 공세 공병지원
  • 1923–1934공병위원회 위원장, 프룬제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관, 스탈린 라인 설계
  • 1934–1941참모본부 아카데미 군사공학 주임·교수, 공병 중장(1940), 군사학 박사(1941)
  • 1941–1945포로, 나치 회유 거부, 마우트하우젠에서 순국

플라톤 미하일로비치 케르젠체프

Платон Михайлович Керженце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81–1940 ○ 심장마비

프롤레트쿨트 이론가이자 스탈린기 예술 검열의 설계자

1923년 7월 18일 《프라우다》 1면 기사 「시간이 비행기를 만든다」에서: "우리는 오늘 회의 시작을 기다리느라 7천 노동시간을 허비했다. 그 정도 노동력이면 비행기 한두 대는 만들 수 있었다. 우리는 또 '비행기 반 대分'을 더 기다린 뒤에야 회의가 시작됐다." 이 글이 계기가 되어 '시간' 동맹이 창립되었다.

1904년 입당. 프롤레트쿨트 이론가로 '시간' 동맹을 이끌며 노동과학(NOT)을 주도했다. 전연방 예술위원회 초대 의장(1936–38)으로 스탈린기 문화 통제를 구축했고, 《파리코뮌의 역사》를 집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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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볼셰비키 입당, 모스크바대학 퇴학, 타간카 감옥 수감
  • 1905–1912니즈니노브고로드·페테르부르크·키예프에서 지하활동과 볼셰비키 언론 기고
  • 1912–1917런던·파리·뉴욕 망명, 《프라우다》 특파원, 아일랜드 독립운동 취재
  • 1918–1920프롤레트쿨트 이론가·《이즈베스티야》 부편집장·로스타 책임자
  • 1921–1926주스웨덴 전권대표, 노동과학조직(NOT) 연구 주도, 주이탈리아 전권대표
  • 1928–1930볼셰비키 중앙위 선전부 부장·공산주의아카데미 문학예술언어연구소장
  • 1930–1936인민위원회비서국장·전연방 라디오위원회 의장
  • 1936–1938전연방 예술위원회 초대 의장 — 불가코프·메이예르홀트 탄압, 형식주의 미술 숙청
  • 1938–1940《소백과사전》 편집장·《파리코뮌의 역사》 집필

파벨 알렉산드로비치 플로렌스키

Паве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лоренский
이론가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882–1937 ✕ NKVD에 의해 처형

사제복을 입고 소비에트 전기화 계획에 참여한 러시아 정교회 신학자

동시대인들은 사제복을 입은 플로렌스키가 소비에트 정부 부서의 다른 지도자들과 나란히 일하는 모습을 놀라운 광경으로 기억했다.

파벨 플로렌스키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 신학자, 철학자, 수학자, 물리학자, 전기공학자로, 20세기 초 러시아 지성사에서 가장 독특한 인물 중 하나다. 대표작 『진리의 기둥과 터』(1914)는 정교회 신정론의 기념비적 저작으로, 합리적 분석을 넘어선 직관적 체험을 통해 신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혁명 후에는 트로츠키의 추천으로 GOELRO 전기화 계획에 참여했으며, 사제복을 벗지 않은 채 소비에트 과학자들 사이에서 일하는 이중적 삶을 살았다. 1922년 에세이 「역원근법」은 이콘의 공간 구성에 대한 선구적 분석으로 타르투 기호학파에 영향을 미쳤으며, 1937년 대숙청 시기 NKVD에 의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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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모스크바대학 수학과 졸업
  • 1908모스크바 신학아카데미 졸업, 『진리의 기둥과 터』 집필 완성
  • 1911사제 서품
  • 1911–1917『신학통보』 편집장
  • 1914『진리의 기둥과 터』 출판
  • 1921–1927GOELRO 전기화 계획 참여, 브후테마스 교수
  • 1922「역원근법」 발표, 『기하학에서의 허수』 출판
  • 1933체포, 10년 강제노동형 선고

알렉세이 카피토노비치 가스테프

Алексей Капитонович Гасте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82–1939 ✕ 처형

노동을 과학으로, 인간을 기계의 리듬으로: 50만 노동자를 훈련시킨 사회공학의 창시자

“사회 분야에서도 정밀한 측정, 공식, 도면, 통제 게이지, 사회적 노르말의 시대가 도래해야 한다. 우리는 정신생리학과 경제학의 완전한 수학화 문제를 제기해야 한다.” — 「우리의 과제」 (1921)

수즈달 출생. 1900년 RSDLP 입당, 1905년 코스트로마 소비에트 의장을 지낸 볼셰비키 혁명가. 프랑스 공장 노동 경험을 바탕으로 1920년 중앙노동연구소(CIT)를 창설, '사회공학'을 정립했다. CIT는 50만 명 이상 숙련 노동자를 배출했다. 1932~1936년 전연방표준화위원회 의장. 프롤레트쿨트 시인으로 『노동타격의 시』(1918)를 발표했다. 1938년 체포, 1939년 총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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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RSDLP 입당
  • 1905코스트로마 소비에트 의장
  • 1906RSDLP 제4차 대회 대의원
  • 1917–1918전러시아금속노동자동맹 중앙위 서기
  • 1920–1938중앙노동연구소(CIT) 창설·소장
  • 1931VKP(b) 재입당
  • 1932–1936전연방표준화위원회 의장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수하노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Сухано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82–1940 ✕ 처형

『혁명의 기록』 저자이자 자기 집에서 10월 봉기 결의를 맞이한 농업경제학자

"수하노프는 소부르주아지의 가장 훌륭한 대표자 중 한 명이다" — 레닌, 1917년 9월 1일

본명 니콜라이 기메르. 1917년 2월 혁명 직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창립 위원이 되었으며, 멘셰비키-국제주의자로서 전쟁과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사회주의 연합을 주장했다. 7권짜리 회고록 『혁명의 기록』은 1917년의 가장 생생한 1차 사료로 남아 있다. 1917년 10월 10일 볼셰비키 중앙위원회가 무장봉기를 결의한 역사적 회의가 그의 페트로그라드 아파트에서 열렸다. 1931년 멘셰비키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고 1940년 거짓 혐의로 총살,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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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05사회혁명당(SR) 입당; 1904년 체포, 타간카 감옥 수감; 1905년 10월 석방 후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 참가
  • 1911–1913아르한겔스크주로 3년 유형; 농업 통계 자료 정리
  • 1914–1917잡지 『소브레멘니크』『레토피시』 편집자; 반전 국제주의자;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창립 위원, 『이즈베스티야』 창간 주도
  • 1917–1918멘셰비키-국제주의자; 『노바야 지즈니』 편집자; VTsIK 2·3·4기 구성원; 1918년 6월 제명
  • 1919–19237권짜리 회고록 『혁명의 기록』(Записки о революции) 집필·출간
  • 1920–1929멘셰비키당 탈퇴; 대외무역 기관·농업경제연구소 근무; 공산주의 아카데미 회원; 1928년 강제 집단화 반대 연설
  • 1931멘셰비키 재판에서 10년형 선고; 베르흐네우랄스크 정치격리소 수감
  • 19406월 29일 시베리아 군관구 재판소 사형 선고, 옴스크 교도소에서 당일 총살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자고르스키

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Загорский
이론가 소비에트 러시아 러시아 1883–1919 ✕ 폭탄 테러로 순직

모스크바 당을 이끌고 초기 소비에트 외교를 개척한 혁명 조직가

폭탄이 떨어지자 그는 "진정하십시오, 별일 아닙니다. 곧 무슨 일인지 확인하겠습니다"라고 외치며 폭발물 쪽으로 달려갔다.

볼셰비키 조직가로, 소비에트 러시아 최초의 해외 외교 사절단인 독일 전권대표부 초대 서기를 지냈고, 1918년 7월부터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로 내전기 수도의 당을 이끌며 도시방어를 지휘했다. 1919년 9월 무정부주의자들의 폭탄 테러로 현장에서 순직했으며,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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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RSDLP(볼셰비키) 입당
  • 1902체포되어 시베리아 유형
  • 1904제네바로 탈출, 레닌과 접촉
  • 1905모스크바 12월 무장봉기 참가
  • 1918독일 주재 RSFSR 전권대표부 초대 서기
  • 1918–1919모스크바 시당위원회 서기
  • 1919제르진스키와 도시방어위원회 공동 지휘

이반 알렉산드로비치 일리인

Иван Александрович Ильин
이론가 러시아 제국 (1923년 박탈, 이후 무국적·스위스) 러시아 1883–1954 ○ 망명 중 자연사

10월 혁명을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백군 이민 사상으로 전향한 헤겔주의 법철학자

그는 『힘으로 악에 저항함』에서 "체포하고, 단죄하고, 사격할" 용기를 요구했고, 고리키는 이를 '복수의 복음'이라 불렀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헤겔 법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동시에 받고 교수가 된 러시아 법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다. 1905년 혁명기 급진적 입장에서 출발했으나 10월 혁명을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반볼셰비키 투쟁의 이론가로 전향,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추방되었다. 망명 중 『힘으로 악에 저항함』(1925)에서 무력 저항을 정당화했으며 파시즘을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건강한 현상'으로 옹호했다. 사후 저작은 솔제니친푸틴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민족주의·권위주의 담론의 핵심 원천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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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사립강사
  • 1918모스크바대학 법학 교수, 헤겔 연구로 석·박사 학위 취득
  • 1922'철학자의 배'로 소비에트에서 추방, 베를린 망명
  • 1923–1934베를린 러시아 학술연구소 교수
  • 1927–1930『루스키 콜로콜』(러시아의 종) 편집자·발행인
  • 1938나치 독일 떠나 스위스 정착, 라흐마니노프 재정 지원
  • 1948–1954사후 『우리의 과업』으로 묶인 정치 에세이 집필

이반 파블로비치 바르딘

Иван Павлович Бардин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83–1960 ○ 심장마비

쿠즈네츠크를 세운 소련 제철의 아버지

화학도였던 젊은 바르딘은 이젭스키 교수의 강의를 듣고 “나는 용광로 기술자가 될 것이다”라고 다짐했다. 30년 뒤 그 다짐은 유럽 최대 제철소가 되었다.

시골 재단사의 아들로 키예프 공대에서 야금을 전공하고 미국 공장 노동자로 제철을 배웠다. 용광로의 대가 미하일 쿠라코의 제자로 유좁카·예나키예보·마케옙카·드네프로제르진스크 제철소들을 재건했고, 1929–1937년 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 수석 엔지니어로 유럽 최대 용광로를 1,000일 만에 완성했다. 논문 한 편 없이 1932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 되었고 1942년부터 부원장을 지냈다. 전시에 우랄 과학력을 방위생산에 결집했고 전후 산소전로·연속주조를 주도했다. 무소속으로 체카의 손길을 피했으며 숙청된 동료의 자녀 11명을 입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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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키예프 공대 졸업, 유좁카 제철소 기술자
  • 1910–1911미국 기계·제철 공장 노동자
  • 1915–1923예나키예보 제철소 주임기사 → 수석 엔지니어
  • 1924–1925마케옙카 제철소 수석 엔지니어
  • 1925–1929카멘스코예 제철소 수석 엔지니어
  • 1929–1937쿠즈네츠크 제철 콤비나트(KMK) 수석 엔지니어
  • 1937–1939중공업인민위원부 철강총국 수석 엔지니어 → 기술위 의장
  • 1939소련 철강금속공업 부인민위원
  • 1939–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야금학연구소 소장
  • 1942–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44–1960중앙철강금속연구소(TSNIIchermet) 창립 소장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안토노프-사라톱스키

Владимир Павлович Антонов-Саратовский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84–1965 ○ 자연사

1902년 입당한 볼셰비키 법률가이자 소비에트 법제의 설계자

1917년 10월, 사라토프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시내 음악원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선포하고 적위대를 지휘했다.

1902년 RSDLP에 입당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법률가로, 1917년 사라토프 소비에트 의장으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주도했고 1920~1921년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을 지냈다. 1923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 산하 입법제안위원회 의장과 대법원 판사를 겸하며 소비에트 사법·입법 체계의 기초를 설계했고, 샤흐티 재판·멘셰비키 재판·산업당 재판에 판사로 참여했다. 회고록 『프롤레타리아 투쟁의 깃발 아래』(1925)와 『붉은 해』(1927)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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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RSDLP 입당
  • 1905모스크바 12월 무장봉기 참여
  • 1917사라토프 소비에트 의장, 혁명위원회 위원장
  • 1919RSFSR 내무인민위원부 부위원, 쿠르스크 현 집행위원장, 제13군 혁명재판소장
  • 1920–1921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마흐노 진압 담당, 제4군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 1921–1923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총장
  • 1923–1938소련 인민위원회 입법제안위원회 의장 겸 소련 대법원 판사
  • 1939–1952RSFSR 법무인민위원부·법무부에서 근무
이론가 독일 독일 1885–1977 ○ 노환

아직-아닌 것의 철학자: 『희망의 원리』로 인간 해방의 구체적 유토피아를 사유하다

“진정한 기원은 시작이 아니라 끝에 있다. 사회와 존재가 스스로를 뿌리에서 파악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 『희망의 원리』

『희망의 원리』(Das Prinzip Hoffnung)로 '아직-아닌 것'(Noch-Nicht)과 구체적 유토피아의 철학을 정립한 독일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카치·벤야민·아도르노·브레히트와 교류하며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한 축을 형성했다. 1948년 동독으로 귀환해 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와 국가상을 받았으나, 1956년 헝가리 봉기 후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여 강제 은퇴당했고 1961년 서독으로 망명했다. 그의 사상은 해방신학과 1968년 학생운동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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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08뮌헨·뷔르츠부르크에서 철학·물리학·음악 수학, 『리케르트 비판』으로 박사
  • 1912–1914하이델베르크에서 막스 베버·짐멜·루카치와 교류
  • 1918『유토피아의 정신』 출간 — 초기 주저
  • 1921『혁명의 신학자 토마스 뮌처』 출간
  • 1920s베를린에서 자유기고가로 활동, 브레히트·벤야민·아도르노와 교류
  • 1933–1938나치 집권 후 스위스·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 망명
  • 1935『이 시대의 유산』 출간 — 비동시성 개념으로 파시즘의 대중적 매력 분석
  • 1938–1947미국 망명 중 『희망의 원리』 3부작 집필
  • 1949–1957라이프치히 대학 철학 교수, 동독 국가상(1955), 독일 과학아카데미 회원
  • 1957헝가리 봉기 후 인본주의적 마르크스주의 교수로 강제 은퇴
  • 1961베를린 장벽 건설 후 서독 망명 — 튀빙겐 대학 객원교수
  • 1967독일 서적상 평화상 수상
  • 1968–1970s68운동과 해방신학에 영향, 루디 두치케와 교류

카를 코르슈

Karl Korsch
이론가 독일 독일 1886–1961 ○ 뇌질환 · 자연사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공동 창시자, 『마르크스주의와 철학』으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맞선 독일 철학자

“이런 교수들이 몇 명만 더 나와 이론을 뽑아내면 우리는 끝장이다.” — 1924년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지노비예프가 코르슈와 루카치를 겨냥해

루카치와 함께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기초를 놓은 독일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혁명적 실천가. 『마르크스주의와 철학』(1923)에서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유물사관을 적용해 헤겔 변증법의 혁명적 회복을 주장했고, 이는 코민테른의 맹렬한 비판을 불렀다. 1923년 튀링겐 노동자 정부의 법무장관, KPD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좌파 반대파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 학자로 활동하며 브레히트·벤야민·프랑크푸르트학파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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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0뮌헨·제네바·베를린에서 법학·철학 수학, 예나 대학 법학 박사
  • 1912–1914런던에서 법률 연구, 페이비언협회 가입
  • 1914–1918독일군 복무 — 무기 소지 거부, 두 차례 철십자 훈장 수여
  • 1917독립사회민주당(USPD) 입당, 군인평의회 대표
  • 1920USPD 좌파와 함께 KPD 합류, 예나 대학 강사
  • 1923.3『마르크스주의와 철학』 출간 — 코민테른의 격렬한 비판 대상이 됨
  • 1923.10–11튀링겐 노동자 정부 법무장관 — 제국군의 진압으로 27일 만에 붕괴
  • 1924–1928KPD 제국의회 의원, 코민테른 제5차 대회 참석
  • 1926.4KPD에서 축출 — 당내 좌파 반대파 '결연한 좌파(Entschiedene Linke)' 결성
  • 1933제국의회 방화 사건 당일 독일 탈출 — 덴마크·영국 경유
  • 1936–1961미국 망명 — 툴레인 대학,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연구, 브레히트에 마르크스주의 강의
  • 1938『카를 마르크스』 출간 —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에 깊은 영향
  • 1950「오늘날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열 가지 테제」— 정통 마르크스주의와의 결별 선언

프리드리히 아르투로비치 찬데르

Фридрих Артурович Цандер
이론가 소비에트 러시아 (발트 독일인) 1887–1933 ○ 발진티푸스 사망

화성을 꿈꾼 GIRD 공동 창립자, 소련 액체 로켓의 설계자

'전진, 화성으로!'라는 평생 구호를 남기고 1933년 3월 발진티푸스로 숨졌으며, 자신이 설계한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 GIRD-X가 6개월 후 발사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발트 독일인 가문 출신의 소비에트 로켓 공학자이자 우주 비행 이론가. 1931년 세르게이 코롤료프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반응 추진 연구 그룹(GIRD)을 공동 창립하고 제1여단장을 맡아 소련 최초의 액체 연료 로켓 GIRD-X를 설계했다. 우주 온실, 태양 돛, 날개형 로켓, 대기권 제동 등 선구적 개념들을 제안했으며, '전진, 화성으로!'라는 구호로 평생 행성 간 비행의 꿈을 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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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리가 공과대학 졸업
  • 1915–1919프르보드니크 고무공장 기술자, 모스크바
  • 1919–1926모토르 항공기 공장 기술자
  • 1926–1930중앙항공설계국 기술자
  • 1929–1932OR-1 제트 엔진 설계·시험
  • 1930–1931모스크바 항공대학 강사
  • 1931–1933GIRD 공동 창립, 제1여단장
  • 1933OR-2 액체 연료 엔진 설계·시험

야코프 길랴리예비치 에틴게르

Яков Гиляриевич Этингер
이론가 소비에트 유대계 러시아인 1887–1951 ✕ 고문 중 옥사

스탈린의 '의사 사건' 첫 희생자가 된 크렘린 심장병 전문의

수감 중 스물아홉 차례 심장 발작이 일었고, 그중 열 번은 류민의 사무실에서 심문 도중에 찾아왔다.

벨라루스 민스크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의학을 공부한 소비에트 심장병학자. 크렘린 진료국의 오랜 컨설턴트로 키로프, 오르조니키제, 디미트로프, 톨랴티 등 소련과 국제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치료했으며, 심전도 진단법의 선구자로 1950년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되었다. 1950년 11월 '의사 사건'의 첫 체포자가 되어 류민의 고문 속에 1951년 3월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사망했고, 류민은 그의 죽음을 아바쿠모프 탄핵의 지렛대로 이용해 사건을 전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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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베를린대학교 의학박사
  • 1914–1917제정 러시아군 야전병원 군의관
  • 1918–1920붉은군대 대형 군병원장
  • 1922–1932제1모스크바대학교 의학부 내과 조교·사강사
  • 1929–1950크렘린 진료국 컨설턴트
  • 1932–1949제2모스크바의학원 소아과대학 내과 주임
  • 1950–1951MGB에 체포되어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고문 중 사망

야코프 모이세예비치 피시만

Яков Моисеевич Фишман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87–1961 ○ 10년형 후 복권, 사망

좌파 사회혁명당 지도자에서 소련 화학전의 설계자가 된 혁명가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 피시만은 독일 대사 미르바흐 암살에 사용될 폭탄 두 개를 직접 제조해 동지들에게 건넸다.

에스에르 전투원이었던 피시만은 시베리아 유형에서 탈출해 이탈리아 나폴리대학에서 폭발물·독가스 화학을 전공했고, 1917년 귀국 후 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으로 1918년 미르바흐 암살의 폭탄을 직접 제조했다. 1920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후 1925년 적군 군사화학국(VOKhIMU) 초대 국장으로 임명되어 소련 화학·생물학 무기 프로그램의 기초를 설계했고, 1928년 보고서에서 세균전의 공세적 운용을 주장했다. 1937년 체포되어 10년형을 받았으나 NKVD 특별기술국에서 방독면 신형을 개발했고, 1955년 복권되어 기술병 소장 계급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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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사회혁명당 입당
  • 1905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대의원 · 오흐타 화약공장 전투대 지휘
  • 1917좌파 사회혁명당 중앙위원 · 10월 혁명 참가
  • 1918좌파 사회혁명당 전투대장 · 미르바흐 암살 폭탄 제조
  • 1921–1925적군 정보국 요원 · 이탈리아·독일 주재 무관
  • 1925–1937적군 군사화학국(VOKhIMU) 국장 · 화학방어연구소장
  • 1937–1947체포·10년형 · NKVD 특별기술국에서 방독면 개발
  • 1955복권 · 기술병 소장 계급 수여

안톤 세묘노비치 마카렌코

Антон Семёнович Макаренко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88–1939 ○ 심장마비

거리 아이들을 노동과 자치로 키운 교육자, 유네스코 4대 교육사상가

「인간에 대한 최대의 요구와 최대의 존중」 — 마카렌코의 교육 원칙

소비에트 교육학의 창건자. 내전 후 거리 아이들을 집단노동과 자치로 사회화하는 '마카렌코 시스템'을 확립했으며, 그 경험을 쓴 『교육시』는 세계 교육학의 고전이다. 1988년 유네스코 4대 교육사상가로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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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크레멘추크 사범과정 졸업, 크류코프 철도학교 교사
  • 1914–1917폴타바 사범대학 금메달 졸업
  • 1920–1928고리키 콜로니 설립·지도 (비행청소년 노동교육)
  • 1927–1935제르진스키 노동코뮌 지도 (자립 생산공동체)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회원
  • 1935–1936우크라이나 NKVD 노동콜로니 부서 차장보
  • 1937–1939모스크바 전업 작가·교육학 저술
  • 1939노동적기훈장 수훈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우스트랴로프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Устряло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국가볼셰비즘을 창시하고 볼셰비키의 국가주의적 전환을 예견한 망명 법학자

소련은 마치 무와 같다. 겉은 붉지만 속은 희다 — 『세대 교체』와 후속 저작에서 반복한 통찰.

페테르부르크 출신 법학자이자 카데트당원. 1913년 모스크바대학을 졸업한 후 내전기 콜차크 정부 언론국장으로 백군에 참여했다. 패배 후 하얼빈 망명길에 올라 『세대 교체』(1921)를 발표, 볼셰비키만이 러시아 국가를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스메노베호프스트보를 창시했다. 네프 시기 소련을 '겉은 붉고 속은 흰 무'라 평했고, 그의 사상은 1925년 제14차 당대회에서 스탈린과 지노비예프의 논쟁 대상이 되었다. 1935년 귀국해 모스크바교통공학원 교수로 일했고, 1937년 6월 체포되어 9월 14일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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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6모스크바대학 법학부 졸업(1급), 동 대학 사립강사; 카데트당 입당
  • 1917–1918페름대학 정교수, 법학부에서 국가법·법철학 강의
  • 1919–1920콜차크 정부 언론국장; 내전기 백군 이념전선 담당
  • 1920–1935하얼빈 망명, 법학부 교수 겸 КВЖД 고문; 『Окно』 창간, 『세대 교체』(1921)로 스메노베호프스트보 창시
  • 1925『혁명의 기치 아래』 출간; 제14차 당대회에서 스탈린·지노비예프의 공개 논쟁
  • 1925–1934КВЖД 교육부장(1925–28), 도서관장(1928–34); 중국학 서지 편찬
  • 1935–1937귀국, 모스크바교통공학원 교수; 1937년 6월 체포, 9월 14일 총살

발터 벤야민

Walter Benjamin
이론가 독일 독일 1892–1940 ✕ 망명 중 모르핀 과다복용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유령적 동반자, 기술복제시대 예술론으로 자본주의 문화를 해부한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

「역사철학 테제」에서 벤야민은 이렇게 썼다: "문명의 기록물 가운데 동시에 야만의 기록물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베를린의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발터 벤야민은 프랑크푸르트학파와 깊이 교차하면서도 어느 학파에도 포섭되지 않은 독보적인 마르크스주의 문화비평가였다. 유대 신비주의와 역사적 유물론을 독창적으로 결합한 그의 사유는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1935)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예술의 '아우라'를 붕괴시키는 메커니즘을 분석했고, 유작 「역사철학 테제」(1940)에서는 파울 클레의 그림에 빗대 '역사의 천사'라는 강렬한 알레고리로 진보서사를 근본적으로 문제 삼았다. 망명 중에도 《아케이드 프로젝트》로 19세기 파리의 자본주의 문화를 고고학적으로 발굴했고, 브레히트·아도르노·숄렘과의 긴장 어린 교류 속에서 기술·이미지·역사에 관한 가장 선구적인 마르크스주의적 통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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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베른대학교에서 「독일 낭만주의의 예술비평 개념」으로 박사학위 취득
  • 1925프랑크푸르트대학교 교수자격 논문 『독일 비극의 기원』 제출했으나 철회
  • 1928『일방통행로』와 『독일 비극의 기원』 출간
  • 1933나치 정권 성립 후 독일을 영구히 떠나 파리로 망명
  • 1935–1936「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집필 및 프랑스어판 발표
  • 1940「역사철학 테제」 집필, 피레네 국경 포트보우에서 자결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코로빈

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Коровин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92–1964 ○ 자연사

소비에트 국제법학의 창시자, '과도기 국제법' 개념을 정립한 이론가

국제법을 부르주아적 잔재로 부정하는 대신, 체제 간 '과도기적' 국제법을 정식화했다. 한스 켈젠은 이를 소비에트 법이론 내 '해결 불가능한 모순'이라고 평했다.

소비에트 국제법 이론의 창시자. 1924년 『과도기의 국제법』에서 체제 간 '과도기적 국제법' 개념을 정립했다. 우주법 선구자로도 평가되며, 스탈린 시대를 생존하여 소비에트 국제법학의 제도적 토대를 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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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졸업
  • 1918–1927러시아 적십자사 중앙위원회 서기 겸 외국부장
  • 1923모스크바 국립대학 교수
  • 1924『과도기의 국제법』 출간 — 소비에트 국제법 이론의 기초 확립
  • 1938법학박사 학위 취득
  • 1945–1946유엔 준비위원회 소련 대표단 전문가, 런던·파리 외무장관회의 자문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48–1952소련 과학아카데미 법학연구소 소장
  • 1957헤이그 상설중재재판소 위원
  • 1959과학아카데미 행성간 공간 법률문제 위원회 위원장
  • 1960–1964모스크바 국립대학 법학부 국제법 주임

겐리흐 흐리스토포로비치 에이헤

Генрих Христофорович Эйхе
이론가 소련 라트비아계 러시아 제국 주민 1893–1968 ○ 자연사 · 1954년 재활

콜차크의 후퇴를 끝까지 압박한 적군 지휘관

1919년 말, 에이헤의 제5군은 콜차크군의 후퇴를 토볼강에서 옴스크와 톰스크를 거쳐 크라스노야르스크까지 밀어붙였다.

겐리흐 에이헤는 라트비아계 노동자 가정 출신의 혁명가이자 적군 지휘관, 군사사 연구자였다. 그는 1919년 동부전선에서 제26소총사단을 이끌어 백군 후방을 찌르는 기동을 펼쳤고, 제5군 사령관으로 콜차크군의 후퇴를 토볼강에서 시베리아 내륙까지 추격했다. 이후 극동공화국의 군사적 통합을 맡았지만, 대숙청기의 허위 혐의로 수감되었다가 1954년 무죄로 재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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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제245보병연대 중대장, 참모대위
  • 1917제245보병연대 군사혁명위원회 의장
  • 1918–1919적군 동부전선 연대·여단 지휘관
  • 1919제26소총사단장
  • 1919–1920제5군 사령관
  • 1920–1921극동공화국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 1922벨로루시·페르가나 지역 소련군 지휘관
  • 1924–1936대외무역 인민위원부 관료
  • 1954–1968군사사 연구자, 내전사 저술가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바흐친

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Бахтин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95–1975 ○ 자연사

대화와 카니발의 철학자, 30년의 망각을 뚫고 귀환하다

“예술 속에서 내가 체험하고 이해한 모든 것에 나는 내 삶으로 응답해야 한다.” — 「예술과 책임」(1919)

1920년대 '바흐친 서클'을 이끈 문학이론가로, 대화주의·폴리포니·카니발화 개념을 통해 언어와 문학 서사에 대한 이해를 근본적으로 재구성했다. 30여 년의 망각 끝에 재발견되어 세계 인문학 전반을 재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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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4네벨·비테프스크에서 교사로 근무하며 '바흐친 서클' 형성, 「예술과 책임」 발표
  • 1924–1928레닌그라드에서 연구활동, 『도스토예프스키 창작의 문제들』(1929) 집필
  • 1929–1934OGPU 체포 → 솔로프키 5년형 → 쿠스타나이(카자흐스탄) 유배, 회계원으로 생계
  • 1936–1961사란스크 교육대학 교수, 1946년 라블레 논문으로 후보박사 학위 취득
  • 1963–1975재발견 — 『도스토예프스키 시학』 개정판(1963)·『라블레』(1965) 출간, 1967년 복권, 1970년 작가동맹 가입

레프 세묘노비치 비고츠키

Лев Семёнович Выготский
이론가 소련 벨라루스 1896–1934 ○ 결핵

문화역사심리학의 창시자, 근위발달영역 개념을 정립한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자

마지막 말: "나는 준비됐다" — 젊은 시절 햄릿 에세이에 쓴 구절: "결심이 아니라 준비 — 그것이 햄릿의 상태다."

사회문화적 상호작용으로 고등정신기능이 형성된다는 문화역사이론을 정립한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자다. 『사고와 언어』를 남기고 37세에 결핵으로 사망했으나, 세계 발달심리학과 교육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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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모스크바대학 법학부 및 샤냡스키대학 역사철학부 졸업
  • 1919–1924고멜에서 교사·연극 평론가·출판 편집자로 활동하며 심리학 연구 시작
  • 1924모스크바 실험심리학연구소 연구원, 루리야·레온티예프와 '비고츠키 서클' 형성
  • 1925–1926『예술심리학』으로 학위 취득, 결핵 악화로 장기 입원
  • 1927–1931결함학연구소 과학지도자, 제2모스크바대학·공산주의교육아카데미 교수
  • 1932–1934『사고와 언어』 집필, 근위발달영역 개념 제안, 하리코프에서 의학 공부
  • 1934전연방실험의학연구소 심리학 부문 초청받았으나 6월 11일 결핵으로 사망

보리스 이그나티예비치 아르바토프

Борис Игнатьевич Арватов
이론가 소련 리투아니아 1896–1940 ✕ 자살

아방가르드의 생쥐스트, 생산예술의 이론가

「예술 밖으로 뛰어내려야 비로소 예술을 이해할 수 있다」 — 나탄 알트만에 관한 책(1924)의 마지막 주석에서, 아르바토프는 형식 분석에서 사회적 사실로의 자신의 방법론적 도약을 이 한 문장으로 정식화했다.

프롤레트쿨트 이론가이자 ЛЕФ 공동 창립자. 예술을 산업과 융합하는 '생산예술'을 주창하며 구성주의 미학의 기초를 놓았다. 전시 뇌진탕 후유증으로 1920년대 말 창작을 중단했고 1940년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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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바르샤바에서 문학 활동 시작
  • 1917사회혁명당원, 툴라 현 위원회 부의장, 제1차 소비에트 대회 및 제헌의회 대의원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폴란드 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복무
  • 1920–1923프롤레트쿨트 이론가, ИНХУК 연구원, ЛЕФ 공동 창립과 잡지 활동
  • 1923–1926『예술과 계급』(1923), 『예술과 생산』(1926) 출간; 형식-사회학적 방법 정식화와 생산예술론 전개
  • 1927–1930『사회학적 시학』(1928), 『선동 및 생산 예술에 관하여』(1930) 출간; 뇌진탕 후유증 악화로 활동 위축
  • 1940오랜 투병 끝에 모스크바에서 자살

소피야 알렉산드로브나 야놉스카야

Софья Александровна Яновская
이론가 소비에트 러시아 1896–1966 ○ 당뇨병으로 사망

소련 수리논리학을 부활시킨 볼셰비키 수학자

백군이 그녀를 총살하려 했을 때, 그녀의 키가 너무 작아 총알이 높은 모자에만 맞았고, 그녀는 다리 밑 강물로 떨어져 갈대숲에 숨어 살아남았다.

볼셰비키 혁명가 출신의 소비에트 수학자이자 철학자로, 소련에서 수리논리학을 독자적 학문 분야로 부활시키고 제도화한 창시자다. 내전기 백군에게 체포되어 총살 직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며, 1933년 마르크스의 『수학 초고』를 발굴·출판하여 전 세계 마르크스주의 수학 연구의 초석을 놓았다. 1930년대에는 정통 마르크스-레닌주의자로서 '관념론적' 수학을 공격했으나, 이후 입장을 전환하여 스탈린 시대에 탄압받던 수리논리학을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되살려냈고, 1935년 비트겐슈타인의 소련 이주를 만류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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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오데사 볼셰비키 지하운동, 지하 적십자사 서기
  • 1919–1920제12군 정치국 신문 《적군》 편집보좌·정보부장
  • 1920–1923오데사 현당위원회 정보부 당원
  • 1923–1929적색교수양성소 수학·수강생, 이후 교원
  • 1931–1941모스크바 국립대학 교수; 1935년 물리수학 박사
  • 1943–1966모스크바 국립대학 수리논리학 세미나 조직·지도
  • 1944–1955모스크바 국립대학 수리과학사 학과장
  • 1959–1966모스크바 국립대학 수리논리학 학과 교수

안나 미하일로브나 판크라토바

Анна Михайловна Панкратова
이론가 소련 러시아 1897–1957 ○ 자연사

스탈린 사후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주도한 노동계급사 권위자: 소련 최초 여성 역사학 아카데미크

1953년 『역사의 제문제』 주필이 된 판크라토바는 스탈린의 『단기 강좌』 도식을 공개 토론에 부치며 역사학의 탈스탈린화를 추진했다. 1957년 3월 중앙위 결정은 그녀의 노선을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로 규탄하고 사실상 해임했다.

소비에트 노동계급사와 혁명운동사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약 200편의 저작을 남겼다. 소련 역사학 분야 최초의 여성 정회원(아카데미크)이자, 카자흐스탄사의 첫 종합적 집필을 지도했다. 스탈린 사후 『역사의 제문제』 주필로서 「소련 공산당사 단기 강좌」의 도식적 서사를 재검토하고 탈스탈린화를 주도했으나, 1957년 중앙위로부터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객관주의'라는 비판을 받고 실질적으로 해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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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내전기 오데사 유격대 활동
  • 1922–1925붉은 교수양성소 수학
  • 1926–1939스베르들로프 공산대학 · 레닌 정치군사아카데미 · 모스크바 국립대 등에서 교편
  • 1939소련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연구원
  • 1942–1949『카자흐 SSR사』(1949) 집필 지도 — 소련 최초의 공화국 통사
  • 1952제19차 당대회에서 CPSU 중앙위원으로 선출
  • 1953–1957잡지 『역사의 제문제』(Вопросы истории) 주필
  • 1955–1957소련 역사가 전국위원회 의장
이론가 미국 독일 1898–1979 ○ 뇌졸중으로 사망

프랑크푸르트학파 철학자이자 1960년대 신좌파의 대표적 이론가

'그것은 가장 진전된 위치에서 위대한 거부, 즉 존재하는 것에 대한 항의다' — 《일차원적 인간》(1964)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프랑크푸르트학파의 핵심 철학자로,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트 정신분석을 결합하여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비판 이론을 전개했다. 《에로스와 문명》(1955)에서 자본주의의 억압 구조를 분석하고 해방된 에로스의 유토피아적 가능성을 탐구했으며, 《일차원적 인간》(1964)에서는 기술적 풍요가 비판 의식을 잠식하는 현대 산업사회를 '일차원적 사회'로 규정하며 억압적 탈승화 개념을 제시했다. 독일계 유대인으로 나치를 피해 미국에 망명, 전시 OSS에서 근무하고 브랜다이스대와 UC샌디에이고에서 가르치며 1960년대 학생 운동과 신좌파의 사상적 지주가 되었다. '위대한 거부'로 상징되는 그의 급진적 사유는 비판 이론과 해방 정치에 깊은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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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제네바 사회연구소(프랑크푸르트학파) 합류
  • 1934–1942컬럼비아대학교 사회연구소 연구원, 뉴욕
  • 1942–1951OSS 및 국무부 분석관, 중앙유럽과장
  • 1954–1965브랜다이스대학교 정치이론 교수
  • 1965–1970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철학 교수

얀 에르네스토비치 스텐

Ян Эрнестович Стэн
이론가 소비에트 라트비아 1899–1937 ✕ 처형

스탈린의 철학 교사에서 우익 반대파로 전락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스탈린이 헤겔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하자, 성미 급한 라트비아인 철학자 스텐은 크렘린 사무실에서 제자의 양복 옷깃을 붙잡고 흔들며 가르쳤다. 수업 후 친구에게 남긴 말: '코바는 10년 안에 드레퓌스와 베일리스 재판을 무색하게 만들 짓을 할 거야.'

라트비아 출신 마르크스주의 철학자로, 붉은교수양성소 1기 졸업 후 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을 개인교습하며 소비에트 철학 제도화의 중심에 섰다. 1928년 부하린의 우익 반대파로 돌아선 뒤 1932년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유배되었고, 잠시 복권되었으나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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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라트비아에서 RSDLP 입당
  • 1921–1924붉은교수양성소 철학과 1기 수학
  • 1925–1928스탈린에게 헤겔 변증법 개인교습
  • 1927–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선전부 부장
  • 1928–1930마르크스-엥겔스 연구소 부소장
  • 1932당 제명, '마르크스-레닌주의자 동맹' 사건으로 체포·유배
  • 1934–1936석방,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
  • 1937재체포되어 사형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 차긴

Бори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Чагин
이론가 소련 러시아인 1899–1987 ○ 노환으로 사망

숙청당한 동료들 사이에서 홀로 살아남은 소련 마르크스주의 철학사 연구의 대부

1930년대 레닌그라드 철학연구소에서 차긴을 제외한 모든 연구원이 체포되었고, 대다수는 총살되었다.

레닌그라드 철학연구소 동료들이 스탈린 숙청으로 전원 처형될 때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이후 게오르기 플레하노프 연구의 최고 권위자로 그의 철학 저작 선집 편집을 주도했고, 이 공로로 플레하노프상을 수상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 선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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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1남북전쟁 및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 참전, RKP(b) 입당
  • 1922–1931교편 생활 시작, 붉은교수양성소 철학과 졸업
  • 1930s붉은군대 교육기관·레닌그라드 공산아카데미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 강의
  • 1940–1941레닌그라드대학 철학학부 학장
  • 1946철학박사 학위 취득
  • 1956–1967레닌그라드대학 철학사 교수주임
  • 1960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63–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레닌그라드 철학부문 선임연구원·주임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레온티예프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Леонтьев
이론가 소비에트 러시아인 1903–1979 ○ 자연사

활동 이론의 창시자이자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의 제도적 기초를 놓은 학자

인간은 인격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격으로 되어 간다.

소비에트 심리학자·철학자로, 레프 비고츠키·알렉산드르 루리야와 함께 문화역사적 심리학을 발전시켰으며 인간 의식이 외부 세계와의 능동적 상호작용으로 형성된다고 보는 활동 이론의 창시자다. 1930년대 하리코프 학파를 이끌며 아동 발달·기억·의지 연구를 주도했고, 모스크바국립대 심리학부 초대 학장으로 소비에트 심리학 제도화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주저 『활동·의식·인격』은 마르크스주의 심리학의 고전으로 국제적 영향을 끼쳤으며, 비고츠키 사후 그 이론을 독자적 방향으로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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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모스크바국립대 졸업, 심리학연구소 연구원
  • 1924–1930비고츠키·루리야와 공동 연구
  • 1931–1934하리코프 심리학파 지도
  • 1934–1941모스크바 복귀, 심리학연구소 연구 지속
  • 1941–1966모스크바국립대 교수, 철학부 심리학과장
  • 1950–1957RSFSR 교육과학아카데미 심리학부 학술서기
  • 1959–1961RSFSR 교육과학아카데미 부원장
  • 1966–1979모스크바국립대 심리학부 초대 학장

아브람 이사코비치 알리하노프

Абрам Исаакович Алиханов
이론가 소련 아르메니아 1904–1970 ○ 자연사

중수로에서 세계 최대 가속기까지: ITEP의 23년 지휘자

1956년 흐루쇼프가 ITEP 해직자들의 체포를 막기로 한 후, 알리하노프는 당 회의에서 발언했던 네 사람에게 말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았다면 너희는 영웅이다. 몰랐다면 바보다.'

소련 핵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 명. 양전자 분광학 연구(1933~1940)와 코조다예프와 개발한 자기분광계는 소련 핵전자공학의 기초가 되었다. 원자폭탄 계획에서 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로 중수로 개발을 맡았다. 1945년 제3실험실(후일 ITEP)을 설립해 23년간 소장으로 재임하며, 소련 최초의 중수 연구용 원자로(1949)와 산업용 중수로(1951)를 직접 지휘했다. ITEP의 7 GeV 싱크로트론(1961)은 세계 최대의 70 GeV 세르푸호프 가속기(1967) 원형이 되었다. 평생 무당파였으며, 반세계주의 캠페인에서 연구원을 보호하고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으며, 1966년 스탈린 복권 반대 서한에 카피차·사하로프와 함께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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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41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연구원
  • 1933–1941LFTI 양전자연구실장
  • 1945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
  • 1945–1968제3실험실 / ITEP 소장
  • 1947–1951모스크바국립대 물리기술학부 물질구조학과장

파벨 알렉세예비치 체렌코프

Павел Алексеевич Черенко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04–1990 ○ 자연사

체렌코프 효과를 발견한 소련의 노벨 물리학자

«인생에 운, 불운, 행복 중 무엇이 더 많았는지 가리기는 어렵다…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히 안다. 극복해야 할 것이 무척 많았다는 것을.»

1934년 방사성 용액 속 푸른 빛을 목격한 한 실험물리학자가 입자물리학의 새 장을 열었다. 바빌로프의 지도 아래 체렌코프가 발견한 그 발광은 진공 속 광속보다 빠르게 매질을 통과하는 하전입자가 내는 '체렌코프 복사'로 밝혀졌고, 타므와 프랑크가 이론적으로 해명했다. 이 발견은 체렌코프 검출기라는 입자물리학의 표준 장비로 이어져 스푸트니크 3호에도 탑재되었으며, 1958년 세 사람에게 노벨 물리학상을 안겼다. 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에서 평생을 바친 그는 고에너지물리학부를 창설해 이끌었고, 싱크로트론 건설과 광핵반응 연구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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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보로네시 국립대 물리수학부 졸업
  • 1930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 연구원
  • 1934체렌코프 복사 발견
  • 1940물리수학 박사학위 취득
  • 1946스탈린상 1급 수상, CPSU 입당
  • 1948모스크바 동력공학연구소(MEI) 교수
  • 1951스탈린상 2급 수상, MIFI 교수
  • 1958노벨 물리학상(타므, 프랑크와 공동 수상)
  • 1959FIAN 광중간자과정 연구실장
  • 1964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70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원사)
  • 1977소비에트 국가상 수상
  • 1984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 수여

조지 F. 케넌

George F. Kennan
이론가 미국 미국 1904–2005 ○ 노환으로 사망

1946년 장전문과 X 논문으로 봉쇄 정책을 설계한 미국 외교관·역사가

「소련에 대한 미국 정책의 주요 요소는 러시아의 팽창 경향에 대한 장기적이고 인내심 있으면서도 단호하고 경계하는 봉쇄여야 한다」, 1947년 X 논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역사가로, 1946년 모스크바에서 국무부에 보낸 '장전문'과 1947년 《포린 어페어스》에 발표한 X 논문에서 소련의 팽창을 장기적·인내심 있게 봉쇄해야 한다는 전략을 제시했다. 국무부 정책기획실 초대 실장으로서 마셜 플랜의 설계에 핵심적 역할을 했으며, 이후 트루먼 독트린과 NATO로 이어지는 냉전 초기 미국 대외정책의 지적 토대를 마련했다. 그러나 자신이 설계한 봉쇄가 군사적 대결로 변질되자 평생 비판자로 돌아섰고, 베트남 전쟁과 NATO 확장에 공개 반대하며 현실주의적 외교를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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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국무부 외교관으로 임용
  • 1933–1936주소 미국대사관 3등서기관
  • 1944–1946주소 미국대사관 공사참사관, '장전문' 송신
  • 1947–1949국무부 정책기획실 초대 실장, 마셜 플랜 설계, X 논문 발표
  • 1952주소 대사, 페르소나 논 그라타 선언
  • 1956–2005프린스턴 고등연구소 교수, 외교사 저술
  • 1961–1963주유고슬라비아 대사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리프시츠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Лифшиц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05–1983 ○ 자연사

절대적 진리와 미를 옹호한 마르크스주의 미학의 건설자

「우리 시대의 유행어와 달리 절대적 아름다움은 절대적 진리만큼이나 존재한다」 — 1927년 브후테인 학보

멜리토폴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브후테마스에서 아방가르드와 결별한 후 마르크스 미학의 체계적 재구성에 평생을 바쳤다. 1930년대 루카치와 함께 '저속사회학'을 논박하며 변증법적 유물론 예술론을 정립했고, 『마르크스·엥겔스 예술론』과 『레닌 예술론』이라는 기념비적 선집을 편찬했다. 전후에는 반세계주의 캠페인의 표적이 되었고, 1960년대 모더니즘 비판으로 논쟁의 중심에 섰으며, 말년에는 '존재인식론' 개념으로 독자적 철학을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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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25브후테마스 회화 수학, 아방가르드와 결별하고 리얼리즘·마르크스주의로 전향
  • 1925–29브후테마스 변증법적 유물론 강사; '바그라먄 사건'으로 축출
  • 1930–33IMEL 선임연구원; 루카치와 공동 작업 시작
  • 1933–38『마르크스·엥겔스 예술론』(1933/37), 『레닌 예술론』(1938) 편찬; 저속사회학 논박
  • 1938–41트레티야코프 미술관 학술부부장, IFLI 예술론 학과장
  • 1941–46핀스크 소함대 복무, 부상·포로 탈출; 해군 문예교관, 적성훈장 수훈
  • 1954–68『샤기냔의 일기』(1954)로 재등장; 『왜 나는 모더니스트가 아닌가』(1964), 『추함의 위기』(1968)
  • 1973–83철학박사(1973), 예술아카데미 정회원(1975); 일리옌코프와 '이상적인 것' 논쟁

바딤 알렉산드로비치 트라페즈니코프

Вадим Александрович Трапезнико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05–1994 ○ 자연사

자동화와 경제 개혁을 잇댄 학자

바딤 트라페즈니코프는 전기공학자이자 자동화 과학자로, 소련의 생산기술과 관리체계를 함께 바꾸려 했다. 그는 자동화의 성과가 경직된 계획 지표 아래에서는 현장에 뿌리내리기 어렵다고 보았고, 1964년 《프라우다》에 기존의 지시적 경제 운영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 이 개입은 자동화 연구를 기업 운영의 문제와 연결하며 코시긴 개혁의 사상적 분위기를 넓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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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3전러시아 전기기술연구소 연구자
  • 1933–1938오르그에네르고 자동화 공방 수석기사
  • 1938–1941면방직 중앙연구소 자동화 연구실장
  • 1941–1951자동화·원격제어연구소 연구자 및 연구실장
  • 1951–1987자동화·원격제어연구소 소장
  • 1960–1990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모스크바대학교 제어 일반문제 학과 책임자
  • 1965–1978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위원장

드미트리 세르게예비치 리하초프

Дмитрий Сергеевич Лихачё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906–1999 ○ 자연사

솔로프키를 살아남은 고대루스 문학의 세계적 권위자, 후기 소련의 도덕적 양심

1929년 가을 솔로프키. 체포대가 온다는 말을 듣고 장작더미 속에 숨어 밤새 총성을 들었다. 날이 밝자 깨달았다. "내 대신 죽은 이를 위해 두 사람 몫을 살아야 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 문헌학자·문화사가. 1928년 반혁명 활동으로 솔로프키 수용소에서 4년간 복역했다. 석방 후 푸시킨관에서 고대루스 문학을 연구했으며, 『이고리 원정기』 연구와 『고대루스 문학 기념물』 총서 편찬을 주도했다. 1970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86년 소비에트 문화재단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평생 공산당에 입당하지 않았고 사하로프 제명에 반대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기에는 인민대표로 활동하며 '러시아의 양심'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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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2반혁명 활동 혐의 체포, 솔로프키 수용소 및 벨발트라그 복역
  • 1938소련 과학아카데미 러시아문학연구소(푸시킨관) 연구원
  • 1947문헌학 박사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70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86–1993소비에트(러시아) 문화재단 이사장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아이작 도이처

Isaac Deutscher
이론가 폴란드 폴란드 1907–1967 ○ 자연사

트로츠키 3부작을 쓴 마르크스주의 역사가, '비유대인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남기다

"나는 여전히 믿는다!" — 1965년 버클리 반전 티치인에서 수천 명의 학생 앞에서 냉전과 베트남전을 고발하며

폴란드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하시드 경전의 신동이었다가 10대에 무신론자가 되었다. 1927년 폴란드 공산당 입당, '사회파시즘' 노선에 맞서 최초의 반스탈린 그룹을 조직해 1932년 제명되었다. 1939년 런던 망명 후 『스탈린: 정치적 전기』(1949)로 세계적 권위를 얻었고, 하버드대 트로츠키 아카이브로 3부작 『무장한 예언자』·『비무장한 예언자』·『추방된 예언자』를 완성해 정치 전기의 걸작을 남겼다. 1960년대 신좌파의 지적 스승이 되었고 1967년 로마에서 급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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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폴란드 공산당(KPP) 입당 — 지하출판 편집자
  • 1931소련 방문 — 모스크바대·민스크대 교수직 제안을 거절하고 귀국
  • 1932KPP 내 최초 반스탈린 그룹 공동창설 — '사회파시즘' 노선 반대로 제명
  • 1939런던 망명 — 『이코노미스트』 소련·군사 담당 기자로 활동
  • 1946–1947저술 전념을 위해 언론계 은퇴
  • 1949『스탈린: 정치적 전기』 출간 — 세계적 소련 권위자로 부상
  • 1954–1963트로츠키 3부작 완성: 『무장한 예언자』(1954)·『비무장한 예언자』(1959)·『추방된 예언자』(1963)
  • 1965버클리 반전 티치인 연설 — 신좌파의 지적 스승으로 부상
  • 1966–1967케임브리지대 G. M. 트리벌리언 강연 — 『미완의 혁명』으로 사후 출간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코로보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Коробо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07–1967 ○ 자연사

고스플란에서 30년 가까이 일하며 전후 복구와 코시긴 개혁 준비에 참여한 계획경제 관료

1944년 봄, 해방된 소련 영토의 공장·철도·주택을 목록화하고 복구 우선순위를 매기는 고스플란 특별부서가 신설되자, 코로보프가 그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소련 계획경제의 중추에서 30년 가까이 근무한 경제관료로, 고스플란 내부에서 실무자에서 부의장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해방지역 경제복구를 담당하는 고스플란 부서를 이끌었고, 전후에는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으로서 흐루쇼프 시기 경제개혁 논의에 참여했다. 1963년부터 1965년까지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겸 소련 각료로 재임하며 코시긴의 1965년 경제개혁 준비 작업에 관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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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51고스플란에서 그룹장, 부서차장, 부서장, 국장 역임
  • 1951–1953고스플란 부의장, 소련 각료회의 의장 보좌관
  • 1953–1958소련 각료회의 사무국장
  • 1958–1960소련 재무부 차관
  • 1960–1963국가경제위원회 부의장, 고스플란 종합계획부장
  • 1963–1965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겸 소련 각료

얀 파토치카

Jan Patočka
이론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07–1977 ○ 국가보안기관 조사 뒤 자연사

진실의 책임을 시민적 행동으로 옮긴 현상학자

1977년 3월 3일, 그는 헌장 77 대변인으로 말하겠다며 불러낸 국가보안기관의 장시간 조사를 받았다.

얀 파토치카는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배운 체코 철학자로서 현상학과 역사철학을 발전시켰고, 유럽의 위기와 인간의 영혼 돌봄을 탐구했다. 공산당 가입을 거부한 뒤 여러 차례 대학 강단과 출판에서 배제되었지만, 연구와 가정 세미나를 이어 갔다. 1977년 그는 바츨라프 하벨, 이르지 하예크와 함께 헬싱키 최종의정서와 시민권 보장을 요구한 헌장 77의 첫 대변인이 되었다. 반복된 국가보안기관 조사 뒤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는 3월 13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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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31프라하 카렐대학교에서 철학·슬라브어문학·로망스어문학을 공부하고 철학 박사학위를 받음
  • 1933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현상학을 배움
  • 1936–1939카렐대학교에서 강의 자격을 취득하고 철학 저널 《체코의 정신》 편집을 맡음
  • 1945–1950전후 카렐대학교와 마사리크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으나 공산당 가입 거부 뒤 대학을 떠남
  • 1964–1972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에서 일하고 1968년 카렐대학교 교수로 복귀했으나 1972년 퇴직당함
  • 1973–1976가정 세미나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플라톤과 유럽》과 《역사철학의 이단적 에세이》를 발전시킴
  • 1977바츨라프 하벨·이르지 하예크와 함께 헌장 77의 첫 대변인으로 활동

이슈트반 비보

Bibó István
이론가 헝가리 헝가리인 1911–1979 ○ 옥사 후 1963년 사면

민주주의와 국가의 위기를 분석한 정치사상가

소련군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하자 그는 남아 타자기로 「자유와 진실을 위하여」를 썼다.

비보 이슈트반은 법학과 정치이론을 바탕으로 헝가리 민주주의와 중동부 유럽의 국가 위기를 분석한 정치사상가였다. 그는 전후 민주적 재편을 위해 행정과 선거 제도 구축에 참여했지만,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는 학문적 자율성과 발언권을 잃었다. 1956년 11월 4일 소련군이 부다페스트를 공격하자 국회의사당에 남은 나지 임레 정부의 마지막 각료로서 「자유와 진실을 위하여」를 썼다. 이후 종신형을 선고받고 1963년 사면으로 석방되었으며, 말년에는 침묵 속에서도 민주주의의 윤리와 책임을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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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5세게드대학교에서 정치학·법학 학위 취득, 빈과 제네바에서 수학
  • 1938–1945법무부 관료, 전시에는 박해받는 사람들을 위한 문서를 발급
  • 1945–1946내무부 행정국장, 전후 행정과 1945년 선거 준비를 담당
  • 1946–1950세게드대학교 정치학 교수, 헝가리과학원 통신회원
  • 1951–1957외트뵈시 로란드대학교 도서관 연구원
  • 1956-11-03–1956-11-12나지 임레 제3차 정부 국무장관, 11월 4일 국회의사당에 남아 성명 작성
  • 1957–1963정치 재판에서 종신형 선고, 복역 후 사면으로 석방
  • 1963–1971중앙통계청 도서관 연구원

야코프 아브라모비치 크론로트

Яков Абрамович Кронрод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12–1984 ○ 자연사

소련 정치경제학 '상품학파'의 지도자, 가치법칙과 경제민주주의를 주장한 이론가

“과학이 무슨 상관이오!?” 제자에게서 부서에 무능한 동료를 왜 채용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크론로트는 화를 냈다. 잠시 침묵한 뒤 덧붙였다: “17일 동안 안치시킨이 우리 사단을 포위에서 빼냈소. 우리 부대의 정치위원이었는데, 지휘관은 전사했소.” — 모스크바 전투, 1941년 겨울

소련 정치경제학 '상품학파'를 이끌며 사회주의에서 가치법칙과 기업 자율성을 주장한 이론가. 1971–72년 학파가 분쇄·해임되었고, 말년에 소련 체제를 '사회과두제'로 분석한 원고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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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4모스크바대학 철학과 졸업, 이삭 루빈의 제자로 자처
  • 1934–1940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모스크바주계획위, 중앙통계청 근무
  • 1940소련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연구원
  • 1941–1945의용군 입대(1941.7.6.), 모스크바 전투 참전, 동프로이센까지 진격, 소령으로 종전
  • 1945–1971경제연구소 정치경제학 부문장, '상품학파' 형성 및 1960년대 경제개혁 논쟁 주도
  • 1955경제학 박사학위 취득
  • 1966주저 『사회주의 정치경제학의 법칙들: 방법론과 이론』 출간
  • 1971–1972당의 비판으로 학파 분쇄, 부문장 해임, 출판 금지

레프 니콜라예비치 구밀료프

Лев Николаевич Гумилё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12–1992 ○ 사망

민족발생론과 파시오나르노스트 이론으로 유라시아주의를 재창조한 역사학자

“나는 러시아인이지만, 평생 타타르인들을 비방으로부터 지켜왔다” — 카잔의 구밀료프 흉상 받침대에 새겨진 문구.

소련의 역사학자·민족학자·고고학자로, 민족 집단의 발생과 쇠퇴를 우주적 에너지 '파시오나르노스트'로 설명하는 민족발생론을 제창했다. 시인 니콜라이 구밀료프안나 아흐마토바의 아들로, 1938년부터 1956년까지 세 차례 체포되어 14년간 수용소에서 복역했으며 베를린 전투에 참전했다. 그의 저작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폭발적 인기를 얻어 중앙아시아와 타타르스탄에서 민족 정체성 담론의 기초가 되었고, 카자흐스탄에는 그의 이름을 딴 구밀료프 유라시아 국립대학교가 설립되었다. 학계에서는 유사과학이라는 비판도 받았으나, 소련 해체 이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정치 엘리트의 유라시아주의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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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레닌그라드 대학교 역사학부 입학
  • 1938–1943노릴스크 수용소 복역 (1차 수감)
  • 1944–1945붉은 군대 복무, 베를린 전투 참전
  • 1948역사학 후보학위 취득
  • 1949–1956카자흐스탄·알타이·시베리아 수용소 복역 (2차 수감)
  • 1956–1962에르미타주 박물관 연구원
  • 1961역사학 박사학위 취득
  • 1962–1987레닌그라드 대학교 지리학부 연구원

이사이 이스라일레비치 구레비치

Исай Израилевич Гуревич
이론가 소련 러시아계 1912–1992 ○ 자연사

원자로 설계를 가능하게 한 핵이론가

이사이 구레비치는 소련의 이론물리학자로, 핵분열과 중성자 물리를 연구했다. 1943년 실험 자원이 부족한 전시 상황에서 이사크 포메란추크와 함께 연구하여, 흑연 감속재 속 우라늄을 격자 형태로 배치하는 불균질 조립체 이론을 세웠다. 이 계산은 우라늄의 공명 흡수를 줄이는 설계 원리를 제시했고, 쿠르차토프 연구진이 F-1 원자로를 건설하는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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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출생
  • 1930년대이론물리 연구 시작
  • 1943실험실 제2호에서 포메란추크와 불균질 우라늄-흑연 조립체 이론 연구
  • 1946F-1 원자로 가동으로 이론의 실험적 구현
  • 1950년대–1980년대소련의 이론물리학자로 연구 지속
  • 1992사망

샤를 베텔하임

Charles Bettelheim
이론가 프랑스 프랑스 1913–2006 ○ 자연사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을 정립한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생산자가 자신의 실존 조건을 통제하려면 전적으로 새로운 사회관계가 발전되어야 한다' — 『경제계산과 소유형태』(1971)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CEMI를 설립해 소련 계획경제 연구를 개척했고, 나세르·네루·벤 벨라 정부의 경제 고문을 지냈다. 1963년 쿠바 '대논쟁'에서 체 게바라의 중앙집중화 노선에 맞서 분권적 시장요소를 옹호했으며, 마오쩌둥 사상에 경도되어 알튀세르와 함께 '경제주의'를 비판했다. 『소련에서의 계급투쟁』(1974-1982)에서 소련을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했고, 1972년 르몽드는 그를 '자본주의 세계에서 가장 눈에 띄는 마르크스주의자'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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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공산청년동맹 가입 후 프랑스 공산당 입당
  • 1936모스크바 5개월 체류, 대숙청 목격, PCF 제명
  • 1944–1948노동부 관료, EPHE 연구주임
  • 1950s이집트·인도·알제리 정부 경제 고문, 유엔 전문가로 인도 제2차 5개년 계획 참여
  • 1958EHESS 산하 CEMI 설립
  • 1963쿠바 '대논쟁'에서 체 게바라의 중앙집중화 노선에 반대
  • 1966–1977프랑스-중국 우호협회 회장
  • 1974–1982『소련에서의 계급투쟁』 전3권 출간, 소련 국가자본주의론 전개

보리스 빅토로비치 라우셴바흐

Борис Викторович Раушенбах
이론가 소련 독일계 1915–2001 ○ 자연사

수용소에서 보스토크까지: 우주비행 제어의 개척자

내 인생에서 상관은 코롤료프켈디시 단 두 사람뿐이었다. 두 사람 모두 고결한 분들이었다. 그게 중요하다.

소련 우주개발의 기초를 닦은 물리학자이자 로켓 공학자. 코롤료프의 OKB-1에서 우주선 방향제어 및 유도체계를 설계하여 루나 3호의 달 뒷면 촬영(1959)과 가가린의 보스토크 1호 비행(1961)을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했다. 볼가 독일인 가계 출신으로 1942년 민족 기준으로 강제수용되었으나 수용 중에도 계산을 계속했고, 켈디시의 도움으로 복귀하여 우주 프로그램의 핵심 설계자가 되었다. 후기에는 회화의 원근법에 대한 수학적 연구와 정교회 신학으로 전환하여 독창적인 학제적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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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레닌그라드 민간항공대학 수학 및 글라이더 연구
  • 1937–1941RNII (로켓연구소) 엔지니어 — 코롤료프 휘하 유도탄 비행제어
  • 1942–1946타길라그 강제수용소 수감 — 볼호비티노프 설계국에 계산 제공
  • 1946–1948니즈니타길 특별정착 — 켈디시 산하 계산국 근무
  • 1948–1954NII-1 연구원 — 켈디시 지도하 진동 연소 이론 연구
  • 1955–1959OKB-1 — 코롤료프 지도하 우주선 방향제어 선구적 연구
  • 1960–1973OKB-1 부서장 — 루나·보스토크·화성·금성·소유즈 유도체계 총괄
  • 1959–1978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FTI) 교수 및 이론역학 주임
  • 1978–2001과학아카데미 우주개척자 유산위원회 위원장 · 예술이론·신학 연구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프로호로프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Прохоров
이론가 소비에트 러시아인 1916–2002 ○ 사망 · 자연사

노벨상 수상 레이저 공동 발명가이자 소련 대백과사전의 얼굴

프로호로프는 연구실 방향을 마이크로파에서 레이저로 전환하기로 결심했을 때, 직접 옛 장비를 부수었다. 연구원 절반이 분노하며 떠났지만, 남은 팀은 노벨상을 받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난 소비에트 물리학자로, 니콜라이 바소프와 메이저-레이저 원리를 공동 창안해 1964년 바소프 및 찰스 타운스와 노벨 물리학상을 공동 수상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붉은 군대 보병으로 복무하며 두 차례 부상을 입었고, 전후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에서 개방형 공진기와 기체역학 레이저를 개척했다. 일반물리학연구소장(1982–1998)으로서 광섬유·레이저 핵융합·우주 통신 연구를 총괄했으며, 30년 이상 《소비에트 대백과사전》 편집장을 지내며 소련의 대표적 지식 총서를 이끌었다.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다섯 차례 레닌 훈장을 받았고 조레스 알표로프를 비롯한 한 세대의 물리학자를 길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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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레닌그라드 국립대 물리학과 우등 졸업;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입소
  • 1941–1944붉은 군대 보병 복무, 두 차례 부상
  • 1954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 진동연구실장
  • 1959레닌상 수상; 모스크바 국립대 교수
  • 1964바소프·타운스와 노벨 물리학상 공동 수상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믹)
  • 1969–2001《소비에트 대백과사전》 편집장
  • 1982–1998소련/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일반물리학연구소장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테레빌로프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Теребилов
이론가 소련, 이후 러시아 러시아인 1916–2004 ○ 자연사

사라졌던 법무부를 되살려 소비에트 법전 편찬을 지휘한 법률가

“정의를 뜻하는 라틴어 유스티티아(justitia) — 그것이 곧 공정함이다.” 그는 이 원칙을 평생의 지침으로 삼았다.

소련 법무부가 1956년 폐지된 후 14년 만에 부활했을 때, 그 재건을 맡은 인물이 바로 테레빌로프였다. 1970년부터 1984년까지 법무장관으로 재임하며 40만 건이 넘는 현행 법령을 검토해 50권짜리 《소련 현행법 집성》과 11권짜리 《소련 법전》 편찬 작업을 총괄했고, 1979년 《소련 변호사법》 제정을 주도해 변호사 제도의 법적 지위를 처음으로 정립했다. 이후 1984년 소련 대법원장에 취임해 사법의 독립성을 강화하고 무고한 탄압 희생자들의 재심에 힘썼으나, '목화 스캔들' 수사 과정에서 제기된 뇌물 의혹으로 1989년 사임했다. 말년에는 모스크바대학에서 형사절차의 도덕적 기초를 강의하며 법조인 양성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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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레닌그라드주 파르골로보 지구 검사
  • 1941노동자 분견대 정치위원 (레닌그라드 방어전 참전)
  • 1945레닌그라드 프리모르스키 지구 검사
  • 1949전연방 범죄수사연구소 선임연구원
  • 1957소련 검찰총장 수석보좌관·수사국 부국장
  • 1962소련 대법원 부원장
  • 1970소련 법무장관
  • 1984소련 대법원장
  • 1989모스크바국립대학교 법학부 도첸트

비탈리 라자레비치 긴즈부르크

Виталий Лазаревич Гинзбург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16–2009 ○ 심부전

수소폭탄의 '제2의 아이디어'에서 노벨상까지, 한 세기를 가로지른 이론물리학자

나는 수소폭탄 덕분에 살아남은 아주 드문—아마도 유일무이한—사람이다.

소련 이론물리학의 거장으로, 1948년부터 1952년까지 이고리 쿠르차토프가 이끄는 수소폭탄 개발 프로젝트에 이고리 탐의 이론팀 일원으로 참여해 중수소화리튬-6(LiD)을 열핵연료로 사용하는 '제2의 아이디어'를 제안했으며, 이는 1953년 소련 최초의 열핵무기 실험 성공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1950년 레프 란다우와 함께 초전도 현상을 설명하는 긴즈부르크-란다우 이론을 정립했고, 이 공로로 2003년 노벨 물리학상을 수상했다. 1971년부터 1988년까지 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 이론물리학부장을 지냈으며, 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1966)으로서 소련 물리학의 제도적 중심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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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물리학 후보박사 학위 취득
  • 1942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 취득, FIAN 이론부 연구원
  • 1945–1961고리키 국립대학 방사물리학부 학과장
  • 1948–1952소련 수소폭탄 개발 참여 — 중수소화리튬-6 아이디어 제안
  • 1953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 196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 1968–2009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FTI) 물리·천체물리 문제 학과장
  • 1971–1988레베데프 물리연구소(FIAN) 이론물리학부장
  • 1989–1991소련 과학아카데미 대표 인민대의원
  • 1998–2009«우스페히 피지체스키흐 나우크» 편집장

토니 클리프

Tony Cliff
이론가 영국 폴란드 1917–2000 ○ 자연사

소련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고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을 세운 트로츠키주의 이론가

1950년, 한 줌의 지지자와 함께 《소셜리스트 리뷰》를 내면서 클리프 그룹이 내건 구호: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국제 사회주의를.」 냉전의 두 진영을 모두 거부하겠다는 선언이자, 이후 반세기 동안 이 조류를 규정한 문장이었다.

본명 이가엘 글룩슈타인. 팔레스타인의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 가정에서 태어나 십대에 시온주의 좌파를 떠나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었고, 반전 활동으로 영국 위임통치 당국에 1년간 수감된 뒤 1947년 영국으로 건너갔다. 1948년 「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성격」에서 소련을 「타락한 노동자국가」가 아니라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며 제4인터내셔널의 정통과 갈라섰고, 이 분석 위에 서방과 소련의 군비 지출이 전후 호황을 떠받쳤다는 「상시 군비경제」론과, 부르주아지도 노동계급도 아닌 지식인·군부가 혁명을 대행한다는 「빗나간 연속혁명」론을 얹었다. 1950년 《소셜리스트 리뷰》 그룹에서 출발한 그의 조직은 국제사회주의자들(IS)을 거쳐 1977년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이 되었다. 『로자 룩셈부르크』와 네 권짜리 『레닌』, 네 권짜리 『트로츠키』를 남겼고, 영국 시민권을 끝내 얻지 못해 평생 무국적자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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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오스만령 팔레스타인 지크론야코브에서 폴란드계 유대인 이민 가정의 이가엘 글룩슈타인으로 출생
  • 1931–1933마파이 청년조직을 거쳐 포알레 시온으로, 시온주의 좌파 안에서 정치를 시작
  • 1930년대 후반트로츠키주의·반시온주의로 전향, 팔레스타인의 소규모 트로츠키주의 그룹에서 활동
  • 1939영국 위임통치 당국에 체포되어 아크레 감옥에서 12개월 복역
  • 1945남아프리카 출신 사회주의자 하니 로젠버그와 결혼
  • 1947영국으로 이주했으나 체류 허가를 얻지 못해 아일랜드로 밀려나 더블린에서 활동
  • 1948「스탈린주의 러시아의 성격」 발표, 소련을 관료적 국가자본주의로 규정
  • 1950《소셜리스트 리뷰》 그룹 창립: 「워싱턴도 모스크바도 아닌」
  • 1952영국 재입국 허가를 받아 런던에 정착
  • 1959『로자 룩셈부르크』 출간, 토니 클리프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
  • 1962–1963그룹을 국제사회주의자들(IS)로 개편, 「빗나간 연속혁명」론 정식화
  • 1977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창당
  • 1975–1993네 권짜리 『레닌』과 네 권짜리 『트로츠키』 집필
  • 2000.04.09런던에서 심장 수술 뒤 사망, 무국적자로 생을 마침
이론가 프랑스 프랑스 1918–1990 ○ 정신병원에서 사망

마르크스에게서 새 대륙을 발견한 사상가: 구조적 마르크스주의의 창시자

“이데올로기는 길에서 경찰이 ‘이봐 거기!’ 하고 부르면, 몸을 돌리는 바로 그 순간에 개인을 주체로 호명한다.” —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마르크스의 저작에 '인식론적 절단'이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ISA)와 중층결정 개념을 통해 구조적 마르크스주의를 창시했다. ENS 철학 교수로서 데리다·푸코·부르디외·바디우 등 프랑스 지성계 한 세대를 가르쳤다. 스탈린주의의 이론적 공백을 메우려 했으나, 공산당과의 긴장과 정신질환 속에서도 전후 마르크스주의를 철학의 중심으로 밀어올렸다. 1980년 정신적 발작 속에서 아내를 살해한 비극은 그의 사상적 유산을 오래도록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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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ENS 입학, 가스통 바슐라르 지도
  • 1948ENS 철학 조교 임명
  • 1948프랑스공산당(PCF) 입당
  • 1954ENS 문학부 서기 — 학교 운영 담당
  • 1965『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 출간 — 구조적 마르크스주의 정립
  • 196868년 5월 당시 우울증으로 병원 입원 — "알튀세르는 무슨 소용인가?"
  • 1970「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 발표
  • 1976PCF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포기에 공개 반대
  • 1980정신적 발작 중 아내 엘렌 리트만 교살 — 재판 불능 판정
  • 1990정신병원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이노젬체프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Иноземцев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21–1982 ○ 자연사

브레즈네프 데탕트의 지적 설계자

「전쟁은 살아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지난 6년의 군대 생활에서 겪은 모든 것은 흥미롭고 창조적이며 아름다운 삶을 위한 밑거름이 되어야 한다」 — 전후 출간된 『전선 일기』에서.

소련의 국제관계학자이자 역사가. 1966년부터 1982년 사망할 때까지 소련 최고의 외교정책 싱크탱크인 세계경제국제관계연구소(IMEMO) 소장을 지냈다. 그의 연구소는 소련의 군축 협상 입장을 뒷받침하는 비밀 분석, 서방 경제에 대한 예측, 그리고 '선진사회주의' 외교정책의 이론적 토대를 생산했다. 1981년부터 CPSU 중앙위원회 정위원으로서 데탕트 시기 소련 외교정책의 실질적 방향을 결정하는 데 직접 관여했으며, 서방과의 건설적 관계의 필요성을 당 지도부에 일관되게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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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2–1957『꼬무니스트』 국제부 컨설턴트
  • 1957–1959IMEMO 국제관계 부문장
  • 1959–1961IMEMO 부소장
  • 1961–1966『쁘라우다』 부주필
  • 1966–1982IMEMO 소장
  • 1971–1981CPSU 중앙위 후보위원
  • 1981–1982CPSU 중앙위원
  • 1975–1982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위원
이론가 미국 폴란드 1923–2018 ○ 노환으로 사망

10월 혁명을 '쿠데타'로 규정한 냉전기 러시아사의 대표적 보수 해석자

1917년 10월에 일어난 것은 대중의 지지 없는 고전적 현대 쿠데타였다... 거짓 구호 아래 현대 국가의 신경 중추를 은밀히 장악한 것이었다.

폴란드 태생의 미국 역사가로, 소련학 '전체주의 학파'의 지적 설계자였다. 그의 2권짜리 대작은 10월 혁명이 대중 봉기가 아니라 권력에 굶주린 소수 지식인들의 쿠데타였으며 볼셰비키 통치는 처음부터 억압적이고 권위주의적이었다고 주장했다. 팀B(1976) 책임자와 레이건 행정부 NSC 소련·동유럽 국장(1981~82)을 지내며 자신의 학문을 대소 강경 정책으로 옮겼고, 이는 훗날 소련 붕괴를 앞당긴 요인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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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1996하버드 대학교 러시아사 교수
  • 1968–1973하버드 러시아연구소 소장
  • 1976CIA 팀B 책임자, 소련 전략역량 경쟁분석
  • 1981–1982레이건 NSC 소련·동유럽 담당 국장
  • 1990『러시아 혁명』 출간
  • 1994『볼셰비키 치하의 러시아』 출간
  • 1997『러시아 혁명의 세 가지 의문』 출간

라도반 리흐타

Radovan Richta
이론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24–1983 ○ 지병으로 사망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말을 만든 체코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말년에 리흐타는 예측 연구팀을 만들려 했으며, 자신의 말로는 "우리를 정치적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회를 공식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과학기술혁명' 개념을 정립하고 60인의 공동연구를 이끌어 『갈림길에 선 문명』(1966)을 출간했다. 이 저작은 중앙집권적 계획은 과학기술 시대에 낡은 방식이라 주장하며 프라하의 봄 행동강령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그가 만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1968년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이후 리흐타는 후사크의 '정상화'에 순응하여 철학·사회학 연구소장으로 동료 학자들의 숙청을 주도했고, 1977년에는 헌장 77과 얀 파토치카를 공격하는 언론 캠페인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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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게슈타포 체포, 판크라츠·테레진 수감
  • 1945–1953카렐대학교 철학부·자연과학부 수학, PhDr. 취득
  • 1949–1954『트보르바』 부편집장, 『루데 프라보』 편집위원
  • 1954–1966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 1966–1968과학기술혁명 학제간 연구팀장, 『갈림길에 선 문명』 출간
  • 1967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69–1982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사회학 연구소장
  • 1972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조레스 알렉산드로비치 메드베데프

Жоре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едведев
이론가 소련 그루지야 1925–2018 ○ 런던에서 자연사

스탈린의 유대인 추방 계획을 기록 부재로 반박한 반체제 생물학자

1970년 정신병원 석방 후: "어떤 정직하고 원칙 있는 학자도 그러한 근거로 정신병원 무기한 수용이라는 탄압이 가능하다면 자신의 안전을 확신할 수 없다."

소련의 생물학자이자 반체제 역사가. 트빌리시에서 태어나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에서 생물학을 전공하고 노화의 분자생물학적 기전을 연구했다. 1962년 리센코의 유사과학을 폭로한 사미즈다트 원고 「생물학과 개인숭배」를 집필했고, 이는 1969년 《리센코의 흥망》으로 미국에서 출간되며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다. 1970년 강제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다가 사하로프·솔제니친 등의 항의로 석방되었고, 1973년 런던 체류 중 소련 시민권을 박탈당했으며, 말년의 저작 《스탈린과 유대인 문제》(2003)에서는 의사들의 음모 사건이 유대인 추방 계획으로 이어지려 했다는 통설을 기록 부재로 반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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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트빌리시(티플리스) 출생, 프랑스 사회주의자 장 조레스의 이름을 따서 명명
  • 1943붉은 군대 징집, 타만 반도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제대
  • 1950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졸업, 식물생리학 후보학위 취득
  • 1962사미즈다트 「생물학과 개인숭배」로 티미랴제프 아카데미에서 해고
  • 1963–1969오브닌스크 의학방사선연구소 분자방사선생물학 연구실장
  • 1970강제 정신병원 수용, 국내외 학자·작가들의 항의로 3주 만에 석방
  • 1973런던 국립의학연구소 초청 연구 중 소련 시민권 박탈, 영국 망명
  • 1990–1992소련 시민권 회복, 체르노빌 출입금지구역 방사선생물학 조사 참여

로이 알렉산드로비치 메드베데프

Ро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Медведев
이론가 소련 그루지야 1925–2026 ○ 자연사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심판한 역사가

《역사의 심판대에》 서문에서: "나는 젊은 시절의 신념과 이상을 결코 배반한 적이 없다. 그것이 아버지의 영향이며, 사회주의에 대한 나의 생각은 물론 변했지만, 깊은 확신 없이는 이 책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소련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공산주의자 출판인. 1960년대부터 반체제 운동에 참여하며 사미즈다트 저널 《정치일기》를 편집했고, 20년 가까이 집필한 대작 《역사의 심판대에》에서 스탈린주의의 기원과 결과를 방대한 사료로 분석했다. 이 책으로 1969년 제명되었으나 사회주의적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고, 1989년 복당 후 인민대표·최고회의 의원·중앙위원을 지냈다. 평생 35권 이상의 저작을 남기며 사회주의 내부에서의 자기비판적 역사학을 개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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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트빌리시(티플리스) 출생, 인도 공산주의자 M. N. 로이의 이름을 따서 명명
  • 1946–1951레닌그라드대 철학부 우등 졸업, 콤소몰 서기 활동
  • 1958교육학 후보학위 취득 (모스크바 국립사범대)
  • 1960s사미즈다트 저널 《정치일기》 편집, 반체제 운동 참여
  • 1969《역사의 심판대에》 집필로 공산당 제명
  • 1970사하로프·투르친과 브레즈네프 지도부에 개방서한 발표
  • 1989–1991소련 인민대표·최고회의 의원, 복당 후 중앙위원
  • 1991–2002러시아연방 노동자사회당 공동의장

카렐 코시크

Karel Kosík
이론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26–2003 ○ 자연사

프라하의 봄을 성찰한 비독단적 마르크스주의자

그는 프라하의 봄이 1968년 후사크 체제에 이어 1989년 이후에도 다시 매장되었다고 비판했다.

카렐 코시크는 마르크스주의를 인간의 실천과 구체적 역사성의 철학으로 재구성한 체코 철학자였다. 대표작 《구체성의 변증법》(1963)은 마르크스와 하이데거 현상학을 대화시키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장한 지식인이었고, 정상화 시기에는 공산당에서 제명되어 침묵과 저항을 견뎠다. 1989년 이후에는 개혁의 기억이 후사크 체제와 신자유주의 질서에 의해 차례로 매장되었다고 비판하며 사건의 유산을 둘러싼 논쟁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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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4좌파 지하 저항조직 프르제드보이 참여, 불법 잡지 편집
  • 1944–1945게슈타포에 체포되어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 수감
  • 1953–1968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 1963《구체성의 변증법》 출간
  • 1968–1969프라하 카렐대학교 철학 교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70–1989공산당 제명 뒤 대학에서 배제된 반체제 지식인
  • 1990–1992카렐대학교 철학 강의
  • 1992–2003체코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에서 연구와 집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부를라츠키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Бурлацкий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27–2014 ○ 자연사

흐루쇼프 개혁의 설계자, 소련 정치학의 선구자

「나는 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철제 담장에 올라 팔을 벌리고 날아올랐다. 떨어져 팔이 빠졌다. 그것이 내 인생의 상징이 되었다」 — 권력에 맞서기를 회고하며

소련에서 정치학을 독립 학문으로 정립한 이론가. 1961년 당 강령에 '전인민국가' 테제를 삽입했으며, 해빙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개혁 노선을 이은 개혁적 지식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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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7타슈켄트 법학대학 졸업
  • 1951법학 후보학위 (소련 과학아카데미 법학연구소)
  • 1952–1960과학아카데미 상임간부회 과학비서 → 잡지 『콤무니스트』 국제부
  • 1960–1964CPSU 중앙위 컨설턴트 그룹 책임자 (안드로포프 휘하); 1961년 당 강령·도덕 규범 공동 집필
  • 1964철학 박사학위: 논문 「국가와 공산주의」
  • 1965–1967『프라우다』 정치평론가 (주필급, 독자적 발언권)
  • 1967–1977검열 반대 기사로 해임, 10년간 출판 금지·7년간 해외여행 금지
  • 1969–1971소련 과학아카데미 사회학연구소 부소장
  • 1971–1989CPSU 중앙위 사회과학연구소 철학 주임
  • 1982–1991『문학신문』 정치평론가 → 주필 (1990–1991)
  • 1989–1991소련 평화기금 대표 인민대의원, 최고회의 국제문제위원

메라브 콘스탄티노비치 마마르다슈빌리

Мераб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Мамардашвили
이론가 소련 그루지야 1930–1990 ○ 심장마비

의식을 소리내어 말한 철학자

「영웅적 의식은, 우리가 정확히 사유하지 않을 때 악마가 우리를 가지고 논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정확히 사유하라.」

소비에트 그루지야의 철학자. 마르크스에서 칸트·프루스트로 나아가며 의식과 자유를 비도그마적으로 탐구했다. 모스크바 논리학 서클을 공동 창립했고, 강의로 철학했으며 작업 대부분이 녹음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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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4모스크바 국립대 철학과 수학, 졸업
  • 1954–1957모스크바 국립대 철학과 대학원
  • 1958–1961『보프로시 필로소피』 편집자문위원, 철학 후보학위 취득
  • 1961–1966『평화와 사회주의의 제 문제』 비평·서지부장 (프라하)
  • 1966–1974국제노동운동연구소 부문장, 『보프로시 필로소피』 부편집장
  • 1968–1980모스크바 국립대·VGIK·심리학연구소 강의; 철학박사(1970), 교수(1972)
  • 1980–1990그루지야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주임연구원, 트빌리시 국립대 강의

알렉산드르 예브게니예비치 보빈

Александр Евгеньевич Бовин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30–2004 ○ 자연사

브레즈네프의 외교 연설문 작성자, 데탕트의 문장을 쓴 언론인

한 파티에서 누군가 물었다. '브레즈네프의 최근 연설 읽어보셨나요?' 보빈이 답했다. '읽다뇨? 제가 썼는데요.' 다음 날 그는 『이즈베스티야』로 전보되었다.

브레즈네프 시대 소련 외교 수사의 핵심 설계자로, 1963년부터 1972년까지 CPSU 중앙위 국제부 컨설턴트 그룹을 이끌며 데탕트·평화공존·군축 담론의 문장을 직접 썼다. 그가 만든 '경제는 절약해야 한다' 같은 문구들은 브레즈네프의 공식 어록이 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에 회의적 입장을 견지해 당 기구에서 『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로 옮겨갔고, 이후 20년간 TV '국제 파노라마'의 얼굴로 소련에서 가장 신뢰받는 국제문제 해설자가 되었다. 1991년 소련 최초의 이스라엘 대사로 임명되어 일주일 뒤 러시아 연방 대사로 이어지는 독특한 외교 경력을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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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1956하디젠스크시 인민판사 (소련 최연소 판사)
  • 1959–1963잡지 『콤무니스트』 철학부 과학 컨설턴트
  • 1963–1972CPSU 중앙위 국제부 컨설턴트 그룹 책임자 · 브레즈네프 연설문 작성
  • 1968체코슬로바키아 체르나 협상에 소련 대표단 자문으로 참여
  • 1970–1982브레즈네프 서기장 연설문 작성 (비공식 외부직으로 지속)
  • 1972–1991『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 · TV '국제 파노라마' 진행자
  • 1981–1986CPSU 중앙감사위원회 위원
  • 1991.12소련 이스라엘 대사 (1주일 후 러시아 대사로 전환)
  • 1991–1997러시아 연방 이스라엘 대사
  • 1997–2000『이즈베스티야』 정치평론가 복귀 · TV·라디오 진행

니나 알렉산드로브나 안드레예바

Ни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Андреева
이론가 소련 러시아인 1938–2020 ○ 노환으로 사망

「나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다」로 페레스트로이카를 정면 공격한 레닌그라드의 화학 강사

“우리 언론은 지금 스탈린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 역사를 먹칠하고 있다.”

레닌그라드 출신의 화학자이자 공산당원으로, 1988년 3월 『소비에츠카야 로시야』에 「나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다」를 발표해 페레스트로이카를 정면으로 비판하고 스탈린을 옹호했다. 이 글은 당 중앙위원회 서기 예고르 리가초프의 지원 아래 작성되어 '반페레스트로이카 세력의 선언'으로 불렸으며,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정치 개혁을 가속화하게 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1991년 이후 전연방 볼셰비키 공산당(VKPB)을 창당해 총서기를 지내며 소련 체제의 복원을 주장했으나, 러시아 정치 무대에서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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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1레닌그라드 공과대학 졸업, 화학공학자
  • 1966CPSU 입당
  • 1972–1988레닌그라드 공과대학 물리화학과 조교수·선임강사
  • 1979–1981CPSU에서 제명되었다가 당통제위원회 심사로 복권
  • 1988.3『소비에츠카야 로시야』에 「나는 원칙을 양보할 수 없다」 발표
  • 1989전연방협회 '옌딘스트보(통일)' 창립, 조정위원회 의장
  • 1991–2020전연방 볼셰비키 공산당(VKPB) 창당, 중앙위 총서기
  • 2020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

빅토르 이만토비치 알크스니스

Виктор Имантович Алкснис
이론가 소련 → 러시아 라트비아계 1950–2025 ○ 뇌졸중으로 사망

의회 표결을 헌정 쿠데타로 몰고 간 소유즈파의 지도자

1991년 6월 17일, 회의의 마지막 연사로 나선 알크스니스는 신연방조약이 위헌이며 파블로프 내각을 지지해야 한다고 의원들에게 호소했다. '내각은 소련을 위해, 이 국가의 보존을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계 소련 공군 대령으로, 소련 인민대표대회에서 가장 노골적인 강경파였다. 소유즈파 공동의장으로서 계엄령을 요구하고 고르바초프의 퇴진을 촉구했으며, 1991년 6월 17일에는 파블로프 총리의 비상권한 결의안을 즉각 표결에 부치자고 밀어붙여 '헌정 쿠데타 기도'라는 비판을 받았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하원의원을 두 차례 지냈고, 1993년 옐친에 맞서 의회를 방어하다 진압경찰에 구타당했으며, 끝까지 타협 없는 소비에트 애국자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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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3–1992소련 공군 복무 (발트 군관구 공군본부 선임공병감독관)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리가 제294선거구)
  • 1990–1991라트비아 SSR 최고회의 의원
  • 1990–1991소유즈파 공동의장
  • 2000–2007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제3·4기)
  • 2013–2015모스크바주 투치코보 도시정착지 장

니콜라이 세르게예비치 시모노프

Николай Сергеевич Симоно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959– ○ 생존

소련 군산복합체의 기록자, 펜으로 VPK를 해부한 역사가

그는 이렇게 썼다: "소련 VPK의 역사는 전쟁과 전쟁 준비의 연속이었고, 바로 그것이 소련 경제 전체의 역사이기도 하다."

소련 군산복합체(VPK)의 형성과 작동을 처음 체계적으로 밝혀낸 러시아의 역사가·경제사가. 1996년 출간된 『1920~1950년대 소련의 군산복합체』는 이 분야의 기본 문헌이며, 케임브리지 대학의 존 바버, 마크 해리슨과의 공동 연구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키로프 농촌 출신으로 교사로 일하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1988년 CPSU 중앙위 산하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에서 연구를 시작했다. 소련 붕괴 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에서 연구를 이어갔으며, 대통령 행정실 자문과 스베르방크 금융 실무를 거치며 학문과 현실 사이를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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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키로프주에서 출생
  • 1981키로프 국립사범대학 역사·영어 전공 졸업
  • 1988모스크바 국립대학 역사학 박사 취득
  • 1988–1991CPSU 중앙위 산하 마르크스-레닌주의 연구소 선임연구원
  • 1991–1997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러시아사 연구소 선임연구원
  • 1999대통령 행정아카데미서 역사학 국가박사(Dr. hab.) 취득
  • 1998–2000연방평의회 예산위 자문, 대통령 행정실 내부정책총국 고문
  • 2001–2010스베르방크 부국장 등 금융 분야 근무
  • 2011–2017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러시아사 연구소 선임연구원

레오니트 모이세예비치 삽소비치

Леонид Моисеевич Сабсович
이론가 소련 러시아 ?–1938 ✕ 처형

스탈린 가속 공업화의 청사진을 쓴 경제학자, '사회주의 도시' 우르바니스트의 기수

1929년 3월 고스플란 총회에서 삽소비치는 이렇게 선언했다: '사회주의적 생활방식은 자본주의적 생활방식보다 더 경제적이고 값싸야 하며, 따라서 승리해야 한다.'

소비에트 경제학자·우르바니스트. 1929년 『15년 후의 소련』으로 스탈린 가속 공업화의 청사진을 제시했고, 도시·농촌을 집단적 사회주의 도시로 대체하자고 주장했다. 1930년 실명 비판 후 숙청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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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브세스베하(ВСНХ) 계획경제국 철야금속부장
  • 1928.11『상공신문』에 「10월 혁명 이후 25-30년 뒤」 발표 — 최초의 일반계획 가설
  • 1929.03『15년 후의 소련』 출간 — V차 고스플란 대회와 동시 발행, 3판까지 증쇄
  • 1929.03V차 고스플란 대회에서 브세스베하 대표로 최적(가속) 5개년계획 옹호
  • 1929.07『계획경제』에 「도시의 문제」 발표 — 우르바니스트-디스우르바니스트 논쟁 촉발
  • 1929–1930『미래의 도시』(1929), 『10년 후의 소련』(1930), 『사회주의 도시들』(1930) 연속 출간
  • 1930.05.16전연방공산당 중앙위 결정에서 '반환상적 도약 시도'로 실명 비판 — 이후 소멸
  • 1938숙청으로 사망 (정확한 날짜·장소 불명)

아르테미 미하일로비치 칼리놉스키

Артемий Михайлович Калиновский
이론가 미국 러시아 1979?–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기나긴 작별'로 분석한 냉전사 학자

소련·러시아 외교정책과 중앙아시아를 연구하는 역사가. 2011년 『기나긴 작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를 출간하여, 소련의 철수 결정이 전장보다 국내 정치에 의해 형성된 '기나긴 작별'이었음을 기록 자료와 구술로 입증했다. 조지워싱턴대에서 학사, 런던정경대(LSE)에서 박사를 받은 뒤 암스테르담대에서 10년간 강의했고, 현재 템플대 교수로 재직하며 『사회주의 발전의 실험실』(2018)로 데이비스상과 휴잇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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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조지워싱턴대학교 학사
  • 2009런던정경대(LSE) 국제사 박사
  • ~2010–2020암스테르담대학교 동유럽학 전임강사
  • 2011『기나긴 작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철수』 출간 (하버드대 출판부)
  • 2018『사회주의 발전의 실험실』 출간 (코넬대 출판부), 데이비스상·휴잇상 수상
  • ~2020–템플대학교 러시아·소비에트·포스트소비에트학 교수

알렉산드르 빅토로비치 넴초프

Александр Викентьевич Немцов
이론가 소련 러시아인 1933–

반알코올 캠페인으로 100만 명이 살았다고 추계한 러시아 알코올 역학의 권위자

"반알코올 캠페인은 100만 명 이상의 생명을 구했다." 넴초프가 25년 연구 끝에 내린 결론이다.

모스크바 의대를 졸업하고 정신과 의사로 출발해 모스크바 정신의학연구소에서 평생을 연구한 알코올 역학의 개척자다. 1985년 반알코올 캠페인을 계기로 실제 알코올 소비량과 그로 인한 사망 규모를 추계하는 방법론을 개발했으며, 캠페인이 약 100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는 추정치를 제시해 국제적 논의의 기준점을 만들었다. 고르바초프 시기와 소련 붕괴 이후의 알코올 관련 초과 사망을 추적하며 알코올 정책과 공중보건의 관계를 실증한 그의 연구는 러시아 인구위기의 핵심적 설명틀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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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모스크바에서 출생
  • 1977의학박사 학위 취득
  • 1982알코올 중독 문제 연구 시작, 1985년부터 역학 조사
  • 1987실제 알코올 소비량 추계 방법론 개발
  • 1990알코올 관련 사망률 추계 방법론 개발
  • 1996모스크바 정신의학연구소 정보학·체계연구부장
  • 2011『러시아 알코올 현대사』 영문판 출간 (쇠데르턴 대학)

프랜시스 요시히로 후쿠야마

Francis Yoshihiro Fukuyama
이론가 미국 미국계 일본인 1952– ○ 현역 학자

1989년의 승리를 자유민주주의의 종착점으로 읽은 학자

그는 1989년 이렇게 썼다: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단지 냉전의 종식이 아니라 역사의 종말일 수 있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국제정치 연구자로, 국가·제도·정치 질서의 형성을 비교해 왔다. 1989년 논문 「역사의 종말?」은 냉전 종식과 자유민주주의의 세계적 확산을 인류의 이념적 진화가 도달한 지점으로 해석하며 1989년의 의미를 둘러싼 가장 유명한 논쟁의 한 축을 만들었다. 1992년 저서 『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에서 이 주장을 확장했지만, 이후에는 국가 역량과 법치, 책임성을 강조하며 초기 명제의 단순한 낙관론을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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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4코넬대학교 고전학 학사
  • 1979–1981하버드대학교 정치학 박사 과정 및 박사학위
  • 1979–1989랜드연구소 정치학 부서 연구원
  • 1981–1982미 국무부 정책기획참모
  • 1989「역사의 종말?」 발표, 『내셔널 인터레스트』
  • 1992『역사의 종말과 최후의 인간』 출간
  • 2001–2010존스홉킨스대학교 국제정치경제 교수
  • 2010–현재스탠퍼드대학교 프리먼 스폴리 국제학연구소 선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