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1년 8월 27일 프로이센 왕과 함께 필니츠 선언에 서명해, 다른 열강이 동참하면 프랑스 왕을 돕기 위해 함께 행동하겠다고 밝혔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다. 1765년부터 토스카나 대공으로 개혁 정치를 폈고, 1786년 그곳에서 사형과 고문을 폐지했다. 1790년 형 요제프 2세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함께, 다른 열강이 모두 함께할 때에만 프랑스에 개입하겠다는 조건부 선언을 냈다. 러시아와 영국이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형식적 선언이었다는 평가가 있지만, 선언은 프랑스 혁명 운동의 급진화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가 선전포고하기 직전인 1792년 3월 1일 빈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765–1790토스카나 대공(레오폴도 1세)으로 행정·재정 개혁을 추진했다.
1786토스카나에서 사형과 고문을 폐지했다.
1790형 요제프 2세가 죽자 오스트리아 대공이 되었고, 10월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로 대관했다.
17918월 필니츠에서 프로이센 왕과 만나 프랑스 개입 용의를 밝힌 선언에 공동 서명했다.
밀라노에서 물러났다가 쿠스토차와 노바라에서 이겨 롬바르디아-베네치아를 되찾은 오스트리아 원수
보헤미아의 체코계 귀족 군인 가문에서 태어나 1785년 오스트리아군에 들어갔다. 나폴레옹 전쟁에서 참모총장으로 군을 개편하고 라이프치히 전역을 계획했다. 1834년 이탈리아 주둔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1836년 원수가 되었다. 1848년 3월 여든한 살의 나이로 밀라노 5일에 밀려 사각 요새지대로 물러났으나, 증원군을 기다려 7월 쿠스토차에서 사르데냐군을 꺾었고 1849년 3월 노바라에서 전쟁을 끝냈으며 8월 베네치아를 되찾았다. 1848년부터 1857년까지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총독으로 공개 태형과 사형을 도입하는 가혹한 탄압을 폈다. 요한 슈트라우스 1세의 「라데츠키 행진곡」이 그의 쿠스토차 승리를 기렸다. 1858년 밀라노에서 죽었다.
빈 회의 뒤 「메테르니히 체제」로 혁명을 억누르다 1848년 3월 빈 봉기로 쫓겨난 오스트리아 국가재상
라인란트의 메테르니히 가문에서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나 스트라스부르와 마인츠에서 공부했다. 1809년 오스트리아 외무장관이 되었고, 빈 회의에서 오스트리아 대표단을 이끌어 나폴레옹 이후의 유럽 질서를 짰다. 1821년부터 1848년까지 국가재상을 지내며 「메테르니히 체제」로 러시아·프로이센과 손잡고 혁명과 민족 운동을 억눌렀고, 1819년 카를스바트 결의로 독일의 대학과 언론을 단속했으며, 국내에서는 검열과 첩자망을 썼다. 1848년 3월 13일 빈 봉기 때 루트비히 대공의 요구로 사임하고 런던으로 망명했다. 런던·브라이턴·브뤼셀을 거쳐 1851년 빈 궁정으로 돌아와 프란츠 요제프에게 조언했고, 1859년 86세로 죽었다.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뽑은 제국 섭정, 슈타이어마르크를 근대화한 합스부르크 대공
1782년 피렌체에서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트(뒤의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800년 열여덟 살에 오스트리아군을 맡았으나 호엔린덴에서 졌고, 1809년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했다. 메테르니히 정권에서 밀려난 뒤 슈타이어마르크에서 그라츠의 요아네움 박물관 등을 세우며 근대화를 이끌었고, 우체국장의 딸과 귀천상혼해 서민적 인물로 인기를 얻었다. 1848년 6월 황제가 빈을 떠나자 섭정이 되어 제국의회를 열었다. 6월 29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그를 「임시 중앙권력」의 제국 섭정으로 뽑았으나, 각국 군대의 지휘권을 얻지 못한 채 실권이 없었다. 1849년 12월 20일에야 사임을 허락받았다. 이후 슈타인츠 읍장을 지냈고 1859년 그라츠에서 죽었다.
1791년 8월 27일 프로이센 왕과 함께 필니츠 선언에 서명해, 다른 열강이 동참하면 프랑스 왕을 돕기 위해 함께 행동하겠다고 밝혔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다. 1765년부터 토스카나 대공으로 개혁 정치를 폈고, 1786년 그곳에서 사형과 고문을 폐지했다. 1790년 형 요제프 2세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함께, 다른 열강이 모두 함께할 때에만 프랑스에 개입하겠다는 조건부 선언을 냈다. 러시아와 영국이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형식적 선언이었다는 평가가 있지만, 선언은 프랑스 혁명 운동의 급진화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가 선전포고하기 직전인 1792년 3월 1일 빈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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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5–1790토스카나 대공(레오폴도 1세)으로 행정·재정 개혁을 추진했다.
1786토스카나에서 사형과 고문을 폐지했다.
1790형 요제프 2세가 죽자 오스트리아 대공이 되었고, 10월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로 대관했다.
17918월 필니츠에서 프로이센 왕과 만나 프랑스 개입 용의를 밝힌 선언에 공동 서명했다.
1848년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뽑은 제국 섭정, 슈타이어마르크를 근대화한 합스부르크 대공
1782년 피렌체에서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트(뒤의 황제 레오폴트 2세)의 아들로 태어났다. 1800년 열여덟 살에 오스트리아군을 맡았으나 호엔린덴에서 졌고, 1809년 이탈리아 전선을 지휘했다. 메테르니히 정권에서 밀려난 뒤 슈타이어마르크에서 그라츠의 요아네움 박물관 등을 세우며 근대화를 이끌었고, 우체국장의 딸과 귀천상혼해 서민적 인물로 인기를 얻었다. 1848년 6월 황제가 빈을 떠나자 섭정이 되어 제국의회를 열었다. 6월 29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가 그를 「임시 중앙권력」의 제국 섭정으로 뽑았으나, 각국 군대의 지휘권을 얻지 못한 채 실권이 없었다. 1849년 12월 20일에야 사임을 허락받았다. 이후 슈타인츠 읍장을 지냈고 1859년 그라츠에서 죽었다.
1848년 프라하와 빈의 봉기를 포격으로 진압하고 부더페슈트를 점령했다가 해임된 오스트리아 원수
오스트리아·보헤미아 귀족 가문 출신으로 1787년 브뤼셀에서 태어나 1804년 합스부르크 제국군에 들어가 나폴레옹과의 모든 전쟁에 참여했다. 1840년 프라하 군사령관이 되었고, 1848년 6월 프라하 봉기 첫날 아내가 유탄에 맞아 죽은 뒤 구시가지를 포격해 봉기를 진압하고 보헤미아에 계엄령을 내렸다. 10월에는 옐라치치와 함께 빈을 포격해 10월 봉기를 진압했다. 헝가리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1849년 1월 부더와 페슈트를 점령했으나 추격이 느려 헝가리군이 다시 일어설 틈을 주었고, 4월 이서세그에서 괴르게이에게 진 뒤 해임되었다. 「신의 은총을 듣지 않겠다면 대포의 은총을 듣게 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간질로 섭정 회의에 정사를 맡겼다가 1848년 12월 조카 프란츠 요제프에게 양위한 오스트리아 황제
1793년 신성 로마 황제 프란츠 2세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겹사촌 사이인 부모에게서 뇌수종과 간질, 언어 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1835년 아버지를 이어 오스트리아 황제이자 헝가리 왕(페르디난트 5세)이 되었으나 하루 스무 번까지 발작을 일으켜, 루트비히 대공·콜로브라트·메테르니히의 섭정 회의가 정부를 이끌었다. 1835년부터 1848년 7월까지 독일 연방 의장도 맡았다. 1848년 혁명이 휩쓴 뒤 펠릭스 추 슈바르첸베르크의 설득으로 그해 12월 2일 조카 프란츠 요제프에게 양위했고, 프라하성에서 여생을 보내다 1875년 죽었다. 「선량제」라는 별명으로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