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카자흐스탄

시민권 1 · 민족·국가 6 · 사건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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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인물 1전체보기

누르술탄 아비슐리 나자르바예프

Нұрсұлтан Әбішұлы Назарбаев

연방을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카자흐스탄의 30년 통치자

1991년 12월 8일, 옐친 측이 벨로베즈 숲에서 전화로 합류를 권했지만 그는 비행기를 돌리지 않았다. 여드레 뒤, 그의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이 되었고, 소련의 공식 사망 선고문(알마아타 의정서)은 그의 수도에서 서명되었다.

제철소 용광로 노동자에서 출발해 카자흐스탄 총리와 당 제1서기를 거쳐 1990년 카자흐스탄 대통령이 된 인물로, 노보오가료보 협상에서 신연방조약의 가장 강력한 옹호자였다. 1991년 12월 벨로베즈 협정에 불참했고, 카자흐스탄은 소련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독립을 선언한 공화국이 되었다. 이후 30년 가까이 집권하며 핵무기 포기와 수도 이전, 다방면 실용 외교로 신생국의 기틀을 놓았지만, 권위주의 통치와 개인숭배, 세습적 부패의 비판도 함께 남겼다. 2019년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실권을 쥐다 2022년 1월 소요 사태로 완전히 퇴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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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1969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노동자 (용광로, 주조기, 배합원, 가스 담당 등). 1962년 공산당 입당. 1967년 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부설 고등기술학교 졸업.
  • 1969–1973테미르타우 시 당·콤소몰 기관에서 활동.
  • 1973–1978카라간다 금속 콤비나트 당위원회 서기 — 3만 명 규모 사업장의 사실상 2인자.
  • 1978–1979카라간다 주 당위원회 서기, 이후 제2서기.
  • 1979–1984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산업·운수·통신 담당).
  • 1984–1989카자흐 SSR 각료회의 의장 (총리). 44세에 소련 최연소 공화국 정부 수반.
  • 1989–1991카자흐스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1990년 카자흐 SSR 대통령 겸임. 1990–1991년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 1990–2019카자흐스탄 대통령 (1990년 4월 카자흐 SSR 대통령, 1991년 12월 독립 후 초대 대통령). 1991, 1999, 2005, 2011, 2015년 재선. 2019년 3월 사임.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6전체보기

라브르 게오르기예비치 코르닐로프

Лавр Георгиевич Корнил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카자흐스탄 1870–1918 ✕ 전사

「강한 손」을 자처한 장군

1914년 11월 야간 전투에서 코르닐로프가 직접 이끈 기습으로 오스트리아군 포로 1,200명과 함께 사로잡힌 라프트 장군: 「코르닐로프는 사람이 아니라 자연의 힘이오.」

카자크 병사의 아들로 태어나 총사령관까지 오른 입지전의 군인. 1917년 8월 소비에트를 부수러 수도로 군단을 보냈으나, 철도 노동자와 선동가들 앞에서 군대는 도착하기도 전에 녹았다. 내전 초기 백군 의용군을 이끌다 1918년 예카테리노다르 공격 중 포탄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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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6사단장, 오스트리아 포로가 되었다 탈출해 전국적 명성
  • 1917.3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황후의 연금을 집행
  • 1917.7총사령관 임명
  • 1917.8수도로 군단 이동, 실패, 비호프 수도원 연금
  • 1917.11–1918.4탈출, 백군 의용군 창설, 예카테리노다르에서 전사

무스타파 쇼카이

Мустафа Шокай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제국 카자흐 1890–1941 ○ 의문사

투르키스탄 독립을 꿈꾸고 코칸트 자치를 이끈 카자흐 민족주의자

“나는 투르키스탄 군단을 이끌라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으며, 더 이상의 협력도 거부한다. 내 결정의 모든 결과를 나는 알고 있다.” — 리벤트로프에게 보낸 편지, 1941년

무스타파 쇼카이는 러시아 제국 붕괴 후 중앙아시아 최초의 근대적 자치 정부인 코칸트(투르키스탄) 자치 정부를 이끈 카자흐 민족주의 정치 지도자였다. 페트로그라드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국가두마 무슬림 분과 서기로 활동하며 제정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식민 정책에 맞섰다. 1918년 볼셰비키가 코칸트를 무력으로 진압하자 프랑스로 망명하여 《야쉬 투르키스탄》 등 간행물로 투르키스탄 독립 사상을 국제적으로 전파했으며, 1941년 나치가 투르키스탄 군단 조직을 제안하자 포로수용소의 실태를 목격하고 이를 거부했다. 그 직후 베를린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았으나, 오늘날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에서 독립 선구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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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7러시아 국가두마 무슬림 분과 서기
  • 1917투르키스탄 민족평의회 의장
  • 1917투르키스탄 임시정부 위원
  • 1917–1918코칸트 자치 정부 외무장관, 후임 수반
  • 1918–1919알라쉬 오르다 정부 위원
  • 1921–1941망명 언론인·편집자, 《야쉬 투르키스탄》 편집장

투라르 리스쿨로비치 리스쿨로프

Турар Рыскулович Рыскулов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카자흐스탄 1894–1938 ✕ 처형

통합 투르키스탄을 주장한 카자흐인 볼셰비키 전략가, 민족 획정에 맞선 목소리

1923년 6월, 스탈린이 '범튀르크주의'라고 비난하자 리스쿨로프는 연단에서 반박했다: "몇 달 전만 해도 동지 스탈린이 술탄갈리예프를 혁명적 공산주의자라고 칭송하지 않았습니까. 지금 와서 말을 바꾸는 것은 정치적 편의입니다."

카자흐인 볼셰비키 혁명가로 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의 핵심 지도자였다. 중앙아시아 투르크어권 민족들이 하나의 역사적 공동체라고 주장하며 스탈린의 민족 획정에 맞섰고, 1923년 제4차 민족공화국 간부회의에서 '범튀르크주의'라는 비난을 공개 반박했다. RSFSR 인민위원회의 부의장(1926~1937)으로 투르크시브 철도와 카라간다 중공업 단지를 추진했으며, 1932~1933년 카자흐 대기근 때 스탈린에게 직서해 골로쇼킨의 강제집산화가 낳은 참상을 알리고 식량 원조를 이끌어냈다.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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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4메르케 러시아-카자흐 기숙학교 → 피슈페크 농업학교 졸업
  • 1916–1917중앙아시아 민족해방봉기 참가, 체포; 타슈켄트 사범학교 수학; 메르케에서 카자흐 청년 혁명조직 '부하라' 창설
  • 1919투르키스탄 공산당 무슬림국(Мусбюро) 의장
  • 1920.1–8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1920.9바쿠 동방민족대회 대표; '동방행동평의회' 간부 선출
  • 1921–1922RSFSR 민족인민위원부(Наркомнац) 전권대표(아제르바이잔) → 부위원
  • 1922–1924투르키스탄 자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통합 투르키스탄론 주창, 1923년 스탈린과 공개 논쟁
  • 1924–1925코민테른 전권대표로 몽골 인민공화국 파견
  • 1926–1937RSFSR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투르크시브 철도·카라간다 산업화 주도, 1932–1933년 카자흐 기근 구호 개입

주마바이 샤야흐메토비치 샤야흐메토프

Жумабай Шаяхметович Шаяхметов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카자흐스탄 1902–1966 ↓ 실각 1954

카자흐 SSR 출신 민족소비에트 의장

1946년 여름 투시노 항공 퍼레이드에서 스탈린이 참석자들에게 "동지들, 이것이 주마바이 샤야흐메토프 — 카자흐스탄 최초의 민족 서기다"라고 소개하며 그를 "동방의 독수리"라 불렀다.

카자흐 당 지도부에서 올라와 민족소비에트 의장을 맡았다. 스탈린 말기와 흐루쇼프 초의 공화국 대표제 라인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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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카자흐 공화국 NKVD와 당 행정에서 성장
  • 1946–1954카자흐 공산당 제1서기, 스탈린 말기 공화국 지도자
  • 1950–1954민족소비에트 의장, 카자흐 대표로 공식 연방 라인에 진입
  • 1954처녀지 개간과 흐루쇼프 노선 속에서 실각
  • 1966중앙권력 복귀 없이 사망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4전체보기

1932–1933

홀로도모르와 집단화 기근

홀로도모르는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인위적 기근으로, 약 390만 명이 아사한 재앙이다. 직접적 원인은 스탈린 지도부가 강제 집단화와 가속화된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우크라이나에 설정한 감당할 수 없는 곡물 공출 할당량이었다. 1931년 수확량이 급감했음에도 공출 목표는 오히려 유지되었고, 1932년 가을부터는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 같은 크렘린 특사들이 직접 파견되어 곡물을 샅샅이 수탈했다. 공출에 실패한 마을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경제 봉쇄를 당했고, 1933년 1월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우크라이나와 쿠반의 국경을 봉쇄해 굶주린 농민들이 식량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했다. 기근은 소련 전체 곡창지대를 덮쳤지만 우크라이나에서 희생이 가장 컸으며, 소비에트 당국은 1987년 말까지 기근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1988–1991

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

1988년 숨가이트 포그롬에서 1991년 빌뉴스 유혈사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은 페레스트로이카 아래에서 소련의 민족질서와 중앙권력이 함께 무너져 가는 과정이다. 네 사건의 성격은 같지 않다. 숨가이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를 계기로 터진 반아르메니아 포그롬이자 국가의 치안 실패였고, 1989년 트빌리시는 비무장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군사적 진압이었으며, 1990년 바쿠는 민족폭력과 중앙권력 붕괴가 겹친 자리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군사개입이었고, 1991년 빌뉴스는 독립을 선언한 연방공화국의 주권기관에 대한 강제력 행사였다. 그러나 하나의 공통된 위기를 보여 준다. 중앙정부는 민족 간 폭력으로부터 주민을 지키지 못하면서도, 공화국의 정치적 이탈에는 반복해서 군사력을 썼다.

1991

노보오가료보 협상과 신연방조약

1991년 3월 국민투표에서 연방 유지가 76%의 찬성을 얻자, 고르바초프는 이를 마지막 정치적 자본으로 삼았다. 4월 23일 그는 모스크바 교외 노보오가료보 별장에서 러시아의 옐친을 포함한 9개 공화국 정상과 「9+1 성명」을 발표하고, 소련을 주권 공화국들의 자발적 연방으로 재편하는 신연방조약 협상을 시작했다. 발트 3국과 그루지야 등 6개 공화국은 처음부터 불참했다. 여름 내내 세금 징수권과 연방·공화국 권한을 놓고 밀고 당긴 끝에 조약안이 만들어졌고, 서명일은 8월 20일로 잡혔다. 7월 말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의 심야 회동은 서명 뒤 크류치코프·파블로프 등 강경파를 교체하기로 합의했는데, 이 대화는 KGB의 도청으로 당사자들에게 그대로 새어 들어갔다.

1991

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

1991년 8월,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으려는 보수 강경파가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크류치코프·야조프·파블로프 등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옐친이 전차 위에 올라 저항하고 시민이 결집하면서 사흘 만에 무너졌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연방의 해체를 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