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11–1921.10

자캅카스의 혁명과 전쟁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캅카스에서 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의 독립 공화국과 북캅카스의 산악민 정권은 어떻게 생겨났고, 왜 4년 만에 모두 소비에트 공화국이 되었나?

10월 혁명을 인정하지 않은 자캅카스는 1918년 오스만의 공세 속에 한 달짜리 연방을 거쳐 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세 공화국으로 갈라졌다. 볼셰비키의 바쿠 코뮌, 민족 간 학살, 오스만·독일·영국의 잇단 주둔, 데니킨의 백군, 북캅카스의 산악공화국과 이맘의 봉기가 뒤얽힌 끝에, 1920~1921년 붉은 군대와 케말의 터키가 이 지역을 나눠 정리했다.

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1917년: 페트로그라드와 다른 길

2월 혁명 뒤 러시아 임시정부는 1917년 3월 캅카스 총독을 대신할 기구로 국가두마 의원 바실리 하를라모프를 의장으로 하는 특별 자캅카스 위원회(오자콤)를 세웠다. 그러나 페트로그라드에서처럼 이곳에도 이중권력이 생겨, 오자콤은 트빌리시 소비에트를 비롯한 소비에트들 위에 권위를 세우지 못했다. 11월 7일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에서 권력을 잡았다는 소식이 이튿날 캅카스에 닿자 트빌리시 소비에트는 곧바로 반대를 선언했고, 그루지야 멘셰비키 노이 조르다니아는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이 불법이므로 캅카스는 그 지시를 따르지 말고 질서가 회복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11월 24일 트빌리시에서 열린 회의에는 각 정당과 지역 소비에트, 오자콤, 캅카스 전선 사령부 대표에 영국·프랑스 무관과 미국 영사까지 참석해 소비에트 러시아 인민위원회의(소브나르콤)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기로 했고, 소수였던 볼셰비키는 규탄 선언을 읽고 퇴장했다. 그 결과 11월 28일 오자콤을 대신하는 자캅카스 인민위원부가 세워졌다. 그루지야 멘셰비키가 내무·군사·농업 같은 핵심 부서를 맡고 무사바트·다슈나크·사회혁명당이 나머지를 나눈 연정으로, 의장 겸 외무 담당은 예브게니 게게치코리였다. 인민위원부는 스스로 전러시아 제헌의회가 소집될 때까지만 일하는 과도 기구라고 밝혔다. 군사력은 민족별로 조직된 아르메니아·그루지야·무슬림 민족회의에 기대야 했고, 자기가 만든 법을 집행할 힘도 거의 없었다. 1 2 3

12월 18일 캅카스 전선 총사령관 미하일 프르제발스키 장군이 인민위원부를 대신해 오스만 제3군과 에르진잔 휴전을 맺자, 지칠 대로 지친 러시아 병사들은 대거 전선을 떠나 귀향길에 올랐다. 인민위원부는 군대를 가능한 한 동원 해제하고 부대를 「민족화」하기로 결정해, 아르메니아 군단과 그루지야 군단, 간자 일대의 무슬림 군단이 이때 편성되기 시작했다. 반면 1918년 1월 초 트빌리시의 제2차 캅카스 지역 군대 대회에서 다수를 차지한 볼셰비키와 좌파 사회혁명당은 병사들이 무기를 지닌 채 고향으로 돌아가 적위대를 만들어야 한다고 결의했다. 게게치코리는 볼셰비키 편에 선 부대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트빌리시를 봉쇄하고 그루지야 부대로 트빌리시 병기고를 장악하게 했으며, 1월 19일 자캅카스 지역 소비에트 중앙 의장 조르다니아 명의의 전보는 각지 소비에트에 귀환 부대의 무기를 회수하라고 지시했다. 무기를 둘러싼 충돌은 철도역마다 벌어졌고, 가장 참혹한 것이 1월 22~25일 샴코르역 일대의 사건이었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 무장 집단의 공격으로 러시아 병사 약 2,000명이 죽고 수천 명이 다쳤으며, 대포 30여 문과 기관총 약 100정, 소총 1만 2천 정이 탈취되었다. 바쿠 소비에트는 이 사건을 인민위원부를 공격하는 근거로 삼았다. 역사가 V. M. 무하노프는 샴코르 사건이 자캅카스를 무정부 상태로 몰아넣어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의 충돌이 거의 날마다 벌어지게 했다고 본다. 3 4 5 6

1월 18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열린 전러시아 제헌의회가 볼셰비키에게 해산되자, 인민위원부 지도자들은 러시아와의 끈이 사실상 끊겼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1월 중순 오스만이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회담에 참여하라고 초청했을 때 러시아와 따로 움직이기를 꺼려 답하지 않았지만, 이제 자캅카스가 정당한 정부를 갖추고 오스만과 직접 협상할 수 있도록 독자적인 입법 기관을 만들기로 했다. 2월 23일 트빌리시에서 자캅카스 세임이 문을 열었다. 새 선거 없이 제헌의회 선거 결과를 쓰되 당선 기준을 3분의 1로 낮춰 작은 정당도 들어오게 했고, 의장은 니콜라이 치헤이제가 맡았다. 의석은 그루지야 멘셰비키 30~32석, 무사바트와 무소속 무슬림 30석, 다슈나크 27석이 셋으로 나눴고, 볼셰비키는 러시아와 자캅카스의 유일한 정부는 소브나르콤이라며 세임을 거부했다. 그 사이 오스만군은 2월 중순 휴전을 깨고 공세에 나서 에르진잔(2월 13일)과 트라브존(2월 24일)을 되찾았다. 첫 회기부터 세임은 갈라졌다. 다슈나크는 러시아 안의 자치와 서아르메니아의 자결을 주장했고, 아제르바이잔 측은 러시아와 무관하게 오스만과 강화하자고 했으며, 그루지야 측은 대체로 후자 편에 섰다. 독립 선언은 일단 미뤄졌고, 세임은 1914년 국경 회복과 동아나톨리아 민족의 자결을 목표로 오스만과 협상하기로 결의했다. 2 7 8 6

아제르바이잔영국튀르키예바쿠 코뮌

트빌리시가 소브나르콤을 거부하는 동안 석유 도시 바쿠는 반대 길을 걸었다. 1917년 10월 스테판 샤우먄이 이끄는 볼셰비키가 바쿠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를 장악했고, 11월 중순 소비에트는 스스로를 바쿠의 최고 권력으로 선포했다. 12월에는 소브나르콤이 샤우먄을 캅카스 임시 특별위원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안에서도 단독 과반이 아니었고, 바쿠 인구에서 가장 큰 집단인 무슬림의 대표성도 약했다. 3월 9일 해산된 캅카스 토착 기병사단의 지휘관 탈리신스키 장군이 체포되면서 무슬림 주민의 반감이 커졌다. 3월 30일 기선 에벨리나호의 무슬림 승무원이 봉기를 준비한다는 근거 없는 보고를 받은 소비에트가 이들을 무장 해제하려 하면서 시가전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4월 2일까지 이어진 3월 사태다. 소비에트는 샤우먄, 프로코피 자파리제, 나리만 나리마노프 등이 참여한 혁명 방위 위원회를 세워 도시에 계엄을 선포했고 무슬림 주거 지역을 포격했다. 처음 중립을 지키던 다슈나크 부대 3,000~4,000명이 소비에트 편에 서면서 싸움은 민족 학살의 성격을 띠었다. 샤우먄 자신도 다슈나크의 참여가 내전에 민족 학살의 성격을 더했지만 피할 수 없었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썼다. 사망자 수는 출처마다 크게 다르다. 독립 연구자들 사이에서는 샤우먄이 레닌에게 보낸 편지에도 나오는 무슬림 희생자 약 3,000명이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아제르바이잔 측은 1만 2천 명을 주장했고 다슈나크 지도자 카레킨 파스테르마지안은 아제르바이잔인 1만 명 이상과 아르메니아인 약 2,500명을 제시했다. 5 8 9

3월 사태 뒤 많은 무슬림 생존자가 간자로 피했고 무사바트는 바쿠 현에서 활동을 멈췄다. 4월 바쿠 소비에트는 볼셰비키와 좌파 사회혁명당만으로 바쿠 인민위원회의를 꾸렸다. 소비에트 역사학이 「바쿠 코뮌」이라 부른 이 정부의 출범일은 영어 출처가 4월 13일, 러시아어 출처가 4월 25일로 적는다. 샤우먄이 이끈 인민위원회의는 은행·선박 회사·어업과 석유 산업을 국유화하고 법원과 학교를 개편했으며, 5월 22일 지하자원 국유화 법령과 8시간 노동제를 내놓았다. 그러나 군대는 70%가 아르메니아인으로 다슈나크의 영향 아래 있었고, 북쪽에서는 나주무딘 고친스키의 부대가 페트롭스크를 장악해 북캅카스에서 들어오던 식량 길이 끊겼다. 5월 28일 독립을 선언한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은 오스만에 군사 지원을 청했고, 엔베르 파샤의 동생 누리 파샤가 간자에서 캅카스 이슬람 군대를 편성했다. 6월 6일 바쿠의 군사 인민위원 그리고리 코르가노프가 간자 공격을 명령했지만, 바쿠 붉은 군대는 6월 27일~7월 1일 괴이차이 전투에서 패해 물러났다. 영어 출처에 따르면 샤우먄이 모스크바에 요청한 병력과 북캅카스에서 모은 곡물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명령으로 차리친에 묶였다. 다슈나크·우파 사회혁명당·멘셰비키는 페르시아 북부의 영국군 지휘관 라이어널 던스터빌을 불러들이자고 주장했고, 7월 25일 소비에트 다수가 영국군 초청에 찬성하자 볼셰비키 인민위원들은 사임했다. 이튿날 무혈 정변으로 사회혁명당과 멘셰비키가 주도하는 센트로카스피 독재가 들어섰다. 5 8 10 9 11

이슬람 군대의 선발대가 7월 30일 바쿠 외곽 고지에 이르자 던스터빌은 부대를 급파했지만, 영국군 본대는 8월 16일에야 바쿠에 닿았고 전투에 나선 병력은 1,000명 남짓이었다. 바쿠 방어의 주력은 옛 러시아군 장군 게오르기 도쿠차예프가 지휘하는 약 6,000명의 바쿠 군대였는데 대부분 아르메니아인이었다. 누리 파샤의 군대에는 오스만군 약 1만 4천 명에 아제르바이잔 군단과 북캅카스 의용병이 더해졌다. 8월 26일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고, 8월 말 비나가디 언덕과 디가가 함락되자 던스터빌은 9월 1일 센트로카스피 지도부에 철수 의사를 내비쳤다. 9월 14일 마지막 공세가 벌어졌고, 그날 밤 던스터포스와 바쿠 군대의 남은 병력은 배를 타고 엔젤리로 떠났다. 9월 15일 오스만-아제르바이잔군이 바쿠에 들어왔고, 아르메니아인 학살인 「9월 사태」가 뒤따랐다. 희생자 추정치는 1만~3만 명이다. 아르메니아 민족회의가 꾸린 조사 위원회는 8,988명을,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박물관은 29,063명을 제시한다. 원정에 동행한 독일 장교들은 누리 파샤에게 직접 항의했다. 9 12 13 11

코뮌이 무너진 뒤 샤우먄 등 볼셰비키 지도자들은 아스트라한으로 가려다 카스피 함대에 붙잡혀 바쿠 감옥에 갇혀 있었다. 바쿠가 함락되던 9월 14일 아나스타스 미코얀이 이끈 무리가 그들을 빼냈고, 일행은 투르크멘호를 타고 다시 아스트라한으로 향했다. 그러나 배는 크라스노보드스크로 갔다. 최근 연구는 선원들이 아스트라한에서 체포될까 두려워 그렇게 했다고 보지만, 소련 역사학은 배에 탄 영국 장교 두 사람이 항로를 바꾸게 했다고 서술했다. 크라스노보드스크에서 체포된 이들은 사회혁명당원 표도르 푼티코프가 이끄는 아슈하바드 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9월 20일 밤 트랜스카스피아 철도의 페레발역과 아흐차쿠이마역 사이에서 총살되었다. 이들이 「26인 바쿠 코미사르」다. 영국 책임 문제는 지금도 엇갈린다. 영국 연락 장교 레지널드 티그존스는 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으나 포로를 인질로 넘겨 달라는 상관 윌프리드 맬러슨의 제안을 전하지 않았다. 역사가 리처드 울먼은 위원회가 영국에 기대고 있었으니 티그존스가 마음만 먹었다면 처형을 막을 수 있었는데도 개입하지 않았다고 본다. 1926년 처형된 푼티코프는 책임을 티그존스에게 돌렸지만, 영국은 현지 관리들이 저지른 일이라며 관여를 부인했다. 이 사건은 이후 영국과 소비에트 정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함께 끌려간 미코얀이 어떻게 살아남았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10 5

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튀르키예한 달짜리 연방

3월 3일 소비에트 러시아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해 전쟁에서 빠져나왔다. 조약은 1877~78년 러시아-튀르크 전쟁 때 러시아가 얻은 카르스·아르다한·바투미를 오스만에 넘겨주었고, 역사가 리처드 호바니시안에 따르면 아르메니아 민족 부대를 해산할 의무도 비밀 부속서로 러시아에 지웠다. 회담에 끼지 못한 자캅카스는 조약을 인정하지 않고 해당 지역에서 물러나지 않겠다고 여러 나라 정부에 알렸다. 3월 14일 트라브존에서 아카키 치헨켈리가 이끄는 세임 대표단과 오스만 대표 라우프 베이의 강화 회의가 열렸다. 대표단에는 알렉산드르 하티샨도 있었다. 라우프는 첫 회의에서 대표단이 누구를 대표하느냐고 물었고, 오스만은 이들을 국가가 아닌 지역 주민들의 대표로 대했다. 그 사이 오스만군은 3월 12일 에르주룸을 되찾고 3월 말 1914년 국경을 넘었다. 오스만은 자캅카스가 먼저 독립을 선언해야 협상을 이어 가겠다고 했고, 4월 5일 치헨켈리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을 협상의 바탕으로 받아들이자고 세임에 촉구했다. 그러나 트빌리시의 분위기는 달랐다. 이라클리 체레텔리는 열띤 연설로 바투미 방어와 조약 거부를 호소했고, 세임은 동료 무슬림과 싸우기를 꺼린 아제르바이잔 의원들을 표결로 누르고 4월 14일 오스만과의 전쟁 상태를 선언했다. 체레텔리와 조르다니아는 표결이 끝나자마자 바투미 방어에 나섰다. 14 6 2 15 7

그러나 바투미는 바로 그 4월 14일 거의 저항 없이 오스만군에 넘어갔다. 수비 병력은 영어 출처가 약 3,000명, 러시아어 출처가 약 1만 4천 명과 대포 100문으로 적어 차이가 크다. 오스만군은 카르스도 포위했다. 군사적 열세가 분명해지자 그루지야 민족회의는 독립 선언만이 길이라고 판단했다. 4월 22일 세임은 다슈나크의 망설임과 사회혁명당의 반대 속에서 자캅카스를 「독립된 민주 연방 공화국」으로 선포했다. 게게치코리 정부는 물러났고 치헨켈리가 총리 겸 외무장관을 맡았다. 새 공화국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건을 받아들이겠다고 오스만 제3군 사령관 베히프 파샤에게 알렸고, 치헨켈리의 휴전 지시에 따라 4월 25일 아르메니아군은 카르스 요새를 내주고 물러났다. 영어 출처에 따르면 오스만은 이때 소총 1만 1천 정과 대포 67문 등을 손에 넣었다. 카르스 포기에 반발한 다슈나크는 한때 내각 참여를 거부했다. 오스만은 4월 28일 연방을 승인했지만 진격은 멈추지 않았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독일과 오스만은 4월 27일 자캅카스를 세력권으로 나누는 비밀 협정을 맺었다. 2 6 7

5월 11일 바투미에서 다시 열린 회의에서 오스만 대표 할릴 베이는 두 나라가 이미 전쟁을 치렀으니 브레스트 조약은 더는 기준이 아니라며, 카르스·바투미에 더해 아할칼라키·아할치헤·수르말루와 알렉산드로폴·예레반·에치미아진의 상당 부분을 요구하는 조약 초안을 내밀었다. 카르스-줄파 철도를 따라 사실상 아르메니아 전체를 가져가는 조건이었다. 오스만군은 5월 15일 알렉산드로폴을 점령했고 21일 다시 진격했다. 아르메니아군은 5월 21~29일 사르다라바트, 21~24일 바시아파란, 24~28일 카라킬리사에서 맞섰다. 예레반 서쪽 약 40km 사르다라바트에서 다니엘 베크-피루먄이 지휘한 반격은 7,500~10,000명으로 추산되는 오스만군을 밀어내 예레반으로 가는 길을 막았다. 그 사이 그루지야 지도자들은 독일에 보호를 구했다. 5월 26일 체레텔리가 세임에서 연방의 실패를 선언하자 세임은 「전쟁과 평화 문제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생겼다」며 자캅카스의 해체를 확인하고 권한을 내려놓았다. 같은 날 조르다니아가 그루지야 독립 선언문을 읽었다. 5월 28일에는 마메드 아민 라술자데가 이끄는 아제르바이잔 민족회의와 트빌리시의 아르메니아 민족회의가 각각 독립을 선언했다. 6월 4일 세 나라는 오스만과 바투미 조약을 맺었다. 아르메니아에는 동아르메니아의 9분의 1도 안 되는 땅만 남았고, 할양된 지역의 전쟁 전 주민 125만 명 가운데 다수가 아르메니아인이었다. 2 16 6 17 18

그루지야그루지야 민주공화국: 멘셰비키의 사회민주주의 국가

1918년 5월 26일 자캅카스 연방이 해체되던 날 그루지야 민족회의는 독립을 선언했고, 이틀 뒤 포티 조약으로 독일의 보호를 받아들였다. 러시아어 자료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크레스 폰 크레센슈타인이 지휘하는 약 3,000명의 독일 원정군이 크림에서 바다로 건너와 포티항에 상륙했고, 독일의 외교 압력으로 오스만군의 진격이 멈췄다. 첫 정부는 노이 라미슈빌리가 이끌었으나 1918년 여름부터 노이 조르다니아가 정부 수반을 맡았고, 예브게니 게게치코리가 외무장관 겸 부수반이 되었다. 독일이 패전한 뒤에는 영국군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1919년 2월 14일 그루지야 제헌의회 선거에서 사회민주당(멘셰비키)은 81.5%를 얻어 130석 가운데 109석을 차지했고, 3월 21일 조르다니아는 사회민주당 단독 정부를 꾸렸다. 의장에는 니콜라이 치헤이제가 선출되었지만 그는 파리 강화회의에 가 있어 첫 회의에 나오지 못했다. 독립선언은 민족·신앙·신분·성별과 관계없이 정치적 권리를 보장했고, 여성 참정권 아래 여성과 아홉 개 민족의 대표가 의회에 들어갔다. 제헌의회는 토지개혁, 사법·지방자치 개혁, 배심재판, 압하지야 등 소수민족 자치를 포함한 126개 법률을 채택했고 트빌리시에 첫 대학이 세워졌다. 이 때문에 이 나라는 「최초의 사회민주주의 국가」로 불리기도 한다. 무력의 중심은 1917년 9월 5일 노동자 수비대로 출발한 인민수비대였다. 이 부대는 국방부가 아니라 의회의 직접 통제를 받았고, 멘셰비키 활동가 발리코 주겔리가 줄곧 지휘했다. 반면 경제는 위기였다. 치아투라 망간 광산의 노동자는 1913년 3,500명에서 1919년 250명으로 줄었고, 도시는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19 20 21 22 23

신생 공화국은 이웃 및 소수민족과 잇달아 충돌했다. 아르메니아인이 다수인 보르찰로(로리)와 아할칼라키를 두고 1918년 12월 7일 아르메니아와 전쟁이 벌어졌다. 아르메니아군은 트빌리시 48km 앞까지 진격했으나(약 10km라고 쓴 서술도 있다) 막바지 그루지야의 반격과 협상국의 압력 속에 12월 31일 자정 휴전했다. 영국 감독 아래 로리 중립지대가 생겼고, 결과는 양쪽 모두 승리를 주장한 무승부로 평가된다. 전쟁 중 그루지야의 아르메니아인은 대량 체포를 당했다. 러시아어 자료에 따르면 18~45세 아르메니아인 남성 전원이 전쟁포로로 선포되어 쿠타이시 근처 수용소에 갇혔다. 남오세티야에서는 토지 문제와 민족 갈등, 볼셰비키의 선동이 얽혔다. 1918년 3월 반란자들이 츠힌발리를 약탈했고, 1919년 10월에는 로키에서 소비에트 권력이 선포되었다. 1920년 5월 8일에는 블라디카프카스에서 넘어온 볼셰비키 부대의 지원 속에 로키에서 다시 소비에트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6월 8일에는 남오세티야 전역의 소비에트 권력이 선포되었다. 주겔리의 인민수비대는 6월 12일 츠힌발리를 되찾고 가혹한 진압에 나섰다. 여러 마을이 불탔고 약 5,000명이 죽었으며 2만 명의 오세티야인이 소비에트 러시아로 피란했다. 오세티야 측 자료는 사망자를 4,812~5,279명, 곧 지역 오세티야인의 6~8%로 집계하며 이를 「제노사이드」라 부른다. 그루지야 측은 수치가 과장되었고 진압이 반볼셰비키 작전이었다고 반박하며, 유럽연합 보고서도 제노사이드 주장을 근거 없다고 보았다. 압하지야에서는 1918년 4월 수후미를 장악한 볼셰비키 코뮌을 5월 17일 그루지야 수비대가 몰아냈고, 6월 8일 압하지야 인민평의회가 자치 단위로 그루지야에 합류했다. 그루지야군은 1918~1919년 소치 일대를 한동안 장악하기도 했다. 24 20 25 26 27 19

1920년 1월 소비에트 러시아가 남러시아 백군에 맞선 동맹을 제안하자 그루지야는 중립을 내세워 거절했다. 조르다니아는 「동방의 광신자들보다 서방의 제국주의자들을 택하겠다」고 말했다. 4월 제11군이 아제르바이잔을 소비에트화하자 세르고 오르조니키제는 그루지야 진격 허가를 모스크바에 요청했다. 그루지야 정부는 5월 1일 동원령을 내리고 트빌리시 사관학교장 기오르기 크비니타제를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5월 2~3일 밤 볼셰비키 약 25명이 정권 장악의 첫 단계로 이 사관학교를 습격했지만 크비니타제와 생도들에게 격퇴되었고, 주모자인 아르메니아인 볼셰비키 세 명은 군사재판 끝에 처형되었다. 오르조니키제의 독자 판단으로 보이는 붉은 군대의 국경 진입도 격퇴되었다. 폴란드와의 전쟁을 앞둔 레닌은 두 번째 전선을 피하기로 했다. 5월 7일 그리골 우라타제와 레프 카라한이 모스크바 조약에 서명했다. 러시아는 그루지야의 독립을 무조건 인정하고 내정 불간섭을 약속했다. 그루지야는 러시아에 적대적인 군대를 무장해제·억류하기로 했고, 비밀 부속서로 공산당의 자유로운 활동과 출판을 보장했다. 게게치코리는 이를 주권 침해로 보았으나 조르다니아는 국제적 승인을 우선했다. 석방된 볼셰비키는 그루지야 공산당을 세웠으나 내무장관 노이 라미슈빌리가 다시 체포했고, 소비에트 전권대표 세르게이 키로프는 게게치코리와 격한 각서를 주고받았다. 같은 해 8월 이라클리 체레텔리의 주선으로 카를 카우츠키가 그루지야를 찾았다. 러시아어 자료에 따르면 그는 1920년 가을 석 달을 머물렀다. 그는 1921년 『그루지야: 사회민주주의 농민 공화국』을 펴냈고, 레프 트로츠키는 이를 반박하는 글을 썼다. 아홉 달의 불안한 평화는 1921년 2월 붉은 군대의 침공으로 끝났다. 20 21 28 29 19 30 31

아르메니아아르메니아 공화국: 난민의 나라와 다슈나크 정부

트빌리시에 있던 아르메니아 민족회의는 1918년 5월 28일 독립을 선언하고, 다슈나크 지도자 호바네스 카자즈누니와 알렉산드르 하티샨을 예레반으로 보내 정부를 세우게 했다. 카자즈누니가 첫 총리가 되었고 하티샨은 외무장관으로 6월 4일 바투미 조약에 서명했다. 사르다라바트 등지에서 오스만군을 막아 낸 뒤였지만, 조약은 아르메니아를 예레반 주변 약 1만 1,000km²로 묶었다. 엔베르 파샤는 「결코 새 터키 제국의 이익에 영향을 줄 수 없는 작은 아르메니아 국가」에 동의했을 뿐이라고 말했다. 1918년 5~9월 오스만군 침공 동안 아르메니아인 5만~10만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산되며, 철수하는 오스만군은 가축과 농기구, 식량을 대거 가져갔다. 역사가 피루즈 카젬자데는 1918년 여름 아르메니아에 적어도 60만 명의 난민이 몰려 있었다고 썼다. 그해 겨울은 재앙이었다. 구호가 닿기 전 난민 15만~18만 명, 곧 인구의 20%가 굶주림과 추위로 죽었다. 1919년 중반까지 주민 약 20만 명이 숨졌고, 아르메니아 내무부 자료로는 1919년 여름까지 발진티푸스와 기근으로 19만 2,000명이 죽었다. 소련 측 추정은 30만 명에 이른다. 1919년 예레반에서만 1만 9,000명이 발진티푸스에 걸렸다. 미국은 1,100만 달러의 원조를 보냈다. 17 32 33

오스만 제국이 무드로스 휴전으로 물러나자 아르메니아는 영토를 넓혔다. 1918년 12월 로리를 둘러싸고 그루지야와 싸운 것도 이때였다. 카자즈누니 총리는 그루지야군이 「강제로 점령한 아르메니아 땅」에서 철수하지 않으면 필요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통보했고, 아르메니아 측은 이 전쟁을 아르메니아 땅의 해방으로 기억한다. 1919년 4월 10일 오스만이 후원한 서남캅카스 공화국이 아르메니아군과 영국군에 항복하자, 카르스 주가 아르메니아에 편입되어 영토는 4만 4,000km²를 넘었다. 1918년 4월 피란한 10만여 명 가운데 6만 명이 돌아왔다. 5월에는 나히체반 편입이 선포되었고, 5월 28일 독립 1주년에는 하티샨이 서아르메니아와의 통합을 선언하는 「통일 아르메니아 법」을 낭독했다. 하티샨은 1919년 5월부터 총리를 맡았다. 1919년 의회 선거는 다슈나크의 독점을 확인했고 볼셰비키는 선거를 거부했다. 그러나 7월부터 아제르바이잔과 터키 밀사가 부추긴 무슬림 봉기가 카르스와 나히체반에서 일어났다. 미국 구호요원들은 나히체반 일대에서 아르메니아인 1만 명이 죽고 45개 마을이 파괴되었다고 확인했고, 1919년 말 아르메니아는 나히체반 전역을 잃었다. 17 24 33

카라바흐와 잔게주르를 둘러싼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에서 아르메니아 쪽 주역은 정부 밖의 무장 지도자들이었다. 바투미 조약을 반역이라 부르며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은 안드라니크는 3,000~5,000명의 부대와 약 3만 명의 난민을 이끌고 1918년 9월까지 잔게주르를 장악했다. 역사가 도널드 블록섬은 그가 무슬림 마을을 파괴해 잔게주르를 아르메니아인만의 땅으로 만들려 했다고 보지만, 안트라니크 찰라비안은 그가 잔게주르 아르메니아인 6만 명의 몰살을 막았다고 주장한다. 12월 슈샤 40km 앞까지 다가갔던 그는 영국군 사령관 윌리엄 톰슨의 요청에 진격을 멈췄다. 역사가 크리스토퍼 워커는 카라바흐가 아제르바이잔 관할로 남은 것이 「영국 장교의 말을 믿은」 결과라고 평했다. 안드라니크는 1919년 4월 에치미아진에서 부대를 해산하고 아르메니아를 떠났다. 1919년 8월 22일 카라바흐 아르메니아인은 강화회의 결정 때까지 아제르바이잔의 자치 지역으로 남기로 합의했다. 11월 아제르바이잔의 잔게주르 공세는 격퇴되었고, 1920년 1월 아쿨리스 학살에 분노한 가레긴 은즈데의 유격대는 고리스 남동쪽의 9개 마을과 40개 촌락을 쓸어버렸다. 1920년 3월 아르메니아 공화국 요원들이 조직한 카라바흐 봉기는 실패했고, 슈샤의 아르메니아인 학살로 이어졌다(아래 아제르바이잔 절). 은즈데와 드로의 부대가 4월 카라바흐로 들어갔지만, 아제르바이잔이 소비에트화된 뒤인 5월 24일 철수하고 지역 볼셰비키에게 권력을 넘겼다. 아제르바이잔 외교관들은 1918년 이후 무슬림 마을 300곳이 파괴되었다고 주장했다. 17 34 35 36

붉은 군대가 바쿠에 들어간 직후 아르메니아 볼셰비키도 움직였다. 1920년 1월 비밀리에 아르메니아 공산당이 세워졌고, 5월 1일 예레반 등지에서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다. 5월 5일 하티샨 내각이 물러나고 하모 오한잔얀의 다슈나크 단독 내각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5월 10일 사르기스 무사옐랸이 지휘하는 장갑열차 「바르단 조라바르」가 반란에 가담했고, 혁명위원회는 알렉산드로폴에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를 선포하고 카르스와 사르카미시도 장악했다. 서아르메니아 출신 유격대장 세부흐 네르세샨의 부대가 13일 알렉산드로폴에 도착하자 반란자들은 이튿날 도시를 떠났다. 지도자들은 투옥되었고 일부는 이감 도중 살해되었다. 소비에트 정부는 6월 4일 공산주의자 박해가 계속되면 관계가 손상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훗날 소비에트 아르메니아는 이 봉기를 영웅적 투쟁으로 기렸지만, 비판자들은 「아르메니아의 볼셰비즘은 지식인들의 머릿속에만 있었다」고 평했다. 외교 무대에서는 희망과 좌절이 엇갈렸다. 미국 상원은 1920년 6월 1일 아르메니아 위임통치안을 52 대 23으로 부결했다. 그러나 8월 10일 아르메니아 대표가 서명한 세브르 조약은 아르메니아를 「자유로운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에르주룸·트라브존·반·비틀리스 주의 국경을 미국 대통령의 중재에 맡겼다. 우드로 윌슨 정부가 그은 「윌슨 아르메니아」 국경은 흑해 출구까지 포함했다. 같은 날 아르메니아는 소비에트 러시아와 잠정 경계에 합의해 카라바흐·잔게주르·나히체반을 러시아군 점령 아래 분쟁지로 남겼다. 세브르 조약은 끝내 비준되지 않았고, 그해 가을 터키 국민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37 17 33 38 39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

1918년 5월 26일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이 해체되자 자캅카스 의회(세임)의 무슬림 분파는 아제르바이잔 민족회의로 재편했고, 만장일치로 의장에 뽑힌 마메드 아민 라술자데가 이끄는 민족회의는 5월 28일 트빌리시에서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함께 발표된 민족 헌장은 아제르바이잔을 자캅카스 남부·동부를 영역으로 하는 주권 민주공화국으로 규정하고, 민족·종교·계급·직업·성별과 관계없이 모든 시민에게 시민적·정치적 권리를 보장한다고 약속했다. 바쿠가 볼셰비키의 손에 있었으므로 정부는 간자를 임시 수도로 삼았고, 첫 총리 파탈리 칸 호이스키가 내각을 이끌었다. 호이스키는 오스만 정부와의 동맹을 성사시켜 바쿠의 센트로카스피 독재 정권을 몰아내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평가되며, 바쿠는 1918년 9월 오스만 이슬람 군대와 아제르바이잔 부대가 입성한 뒤에야 공화국의 수도가 되었다. 집권당 무사바트(평등)는 1911년 비밀 결사로 출발해 범이슬람주의·범튀르크주의·사회주의 이념을 내걸었다가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정당으로 변모했고, 1913년 귀국해 입당한 라술자데가 곧 당을 이끌었다. 2월 혁명 뒤 합법화된 무사바트는 캅카스 무슬림의 선도 정당이 되었다. 공화국의 대외 노선은 오스만 지향기(1918년 5~10월), 서방 지향기(1918년 11월~1920년 1월), 다각적 협력 모색기(1920년 1~4월)로 나뉜다. 40 41 42 43

1918년 12월 의회가 문을 열면서 민족회의는 해산되었다(개원일은 출처에 따라 12월 5일 또는 7일). 동방 무슬림 세계 최초의 민주 의회로 꼽히는 이 의회의 의장 알리마르단 톱추바쇼프는 국가원수로 인정되어 1919년 파리 강화회의에 아제르바이잔 대표로 나갔다. 의석 수는 출처에 따라 96석 또는 120석으로 엇갈리지만, 38석의 무사바트가 무소속 일부와 함께 최대 분파를 이루었고, 아흐라르·이티하드·무슬림 사회민주당과 함께 아르메니아인(120석 중 21석)·러시아인·폴란드인·독일인·유대인 등 소수민족 대표도 의석을 얻었다. 다섯 차례 구성된 내각은 모두 무사바트와 다른 정당의 연립이었고, 처음 세 내각은 호이스키가, 나머지 두 내각은 나시브 유시프베일리가 이끌었으며, 보수 성향의 이티하드가 주된 야당이었다. 의회는 145차례 회의에서 270여 건의 법안을 다루어 230건을 채택했고, 1919년에는 여성에게 남성과 같은 참정권을 주어 무슬림이 다수인 나라 가운데 처음으로 여성 참정권을 실현했다. 1919년 9월 1일에는 바쿠 국립대학이 세워졌고 학생 100명이 국비로 해외에 유학했다. 공화국은 러시아 내전에서 붉은 군대와 백군 어느 쪽에도 서지 않는 중립을 표방했다. 파리에서 아제르바이잔 대표단을 만난 우드로 윌슨은 자캅카스 여러 민족의 연방을 권하며 아제르바이잔 문제는 러시아 문제 전체가 해결되기 전에는 풀 수 없다고 냉담하게 말했지만, 1920년 1월 12일 연합국 최고회의는 그루지야와 함께 아제르바이잔을 사실상(de facto) 승인했다. 40 43 41

카라바흐(나고르노카라바흐)를 놓고 아르메니아와 다투던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1919년 1월 15일 호스로프 베이 술타노프를 카라바흐 총독으로 임명했다. 슈샤에 소규모 부대를 두었던 영국은 이 임명을 받아들이되 최종 귀속은 강화회의가 정한다고 했고, 카라바흐 아르메니아인 대회는 2월과 4월 거듭 아제르바이잔의 권한을 거부했다. 1919년 6월 슈샤에서 두 공동체가 충돌하자 술타노프는 아르메니아인 구역을 봉쇄했고, 6월 중순에는 약 2,000명의 아제르바이잔 비정규 기병이 인근 아르메니아인 마을 하이발리켄드를 공격해 약 600명이 숨졌다. 8월 22일 합의로 카라바흐는 최종 지위가 정해질 때까지 잠정적으로 아제르바이잔 안에 두되 내부 자치를 누리기로 했으나, 아르메니아 측 서술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 당국은 곧 수비대를 늘리고 아르메니아인을 무장 해제했으며 경제 봉쇄를 가했다. 1920년 3월 22일 밤 아르메니아인 무장대가 아제르바이잔 수비대를 무장 해제하려던 봉기가 실패하자, 22일부터 26일까지 아제르바이잔 군대와 주민이 슈샤의 아르메니아인 구역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했다. 희생자 수는 출처와 정의에 따라 500명에서 3만 명까지 크게 엇갈린다. 리처드 호바니시안은 당시 아르메니아 정부 보고를 근거로 시내에서만 약 500명으로 보았고, 외르크 바베로프스키는 8,000명, 테사 호프만은 학살 당일과 그 뒤 며칠 동안 2만 명이 죽었다고 썼다. 5,000~6,000명이 탈출했고 4월 11일까지 카라바흐의 마을 30여 곳이 파괴되어 약 2만 5천 명이 집을 잃었다. 36 44

영국러시아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석유와 해협 사이에서: 영국과 백군

1918년 10월 30일 무드로스 휴전으로 오스만군이 자캅카스에서 물러나자 그 자리를 영국이 차지했다. 북페르시아 부대를 지휘하던 윌리엄 톰슨 장군은 11월 16일 반다르안잘리에서 무사바트 대표들을 만나 오스만군과 아제르바이잔군의 바쿠 철수, 아르메니아 부대의 바쿠 진입 저지, 영국 관할 아래의 지역 민병대 창설, 바쿠 유전의 석유를 영국에 공급하는 일, 자캅카스 철도 동쪽 종점의 확보를 목표로 밝혔다. 이튿날 톰슨은 영국 인도군 병사들과 니콜라이 바라토프의 러시아 부대를 이끌고 바쿠에 들어왔다(영국군 규모는 출처에 따라 약 2,000명에서 5,000명까지 다르다). 스스로 바쿠 군정 총독을 자처한 그는 계엄을 선포하고 아제르바이잔 국기를 내리게 했으며, 연합국은 러시아의 질서를 되살리기 전에는 돌아갈 수 없다고 연설해 바쿠 러시아인들의 환영을 받았다. 처음에 그는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묵시적으로 협력했다. 영국군은 11~12월 바쿠·트빌리시·바투미 같은 요충을 점령해 자캅카스 철도와 바쿠의 석유·등유 수송을 손에 넣었고, 바투미주에 주둔한 제27사단은 데니킨의 의용군에 물자를 보내는 보급 종점 구실도 했다. 영국은 1918년 12월에 벌어진 그루지야와 아르메니아의 국경 전쟁을 이듬해 1월 중재해 분쟁 지역 한가운데에 영국 총독이 관할하는 중립 지대를 두게 했고, 1919년 4월에는 카르스의 「남서캅카스 임시 국민정부」를 해산시키는 등 지역 분쟁의 조정자로 나섰다. 45 40 20 46 47

그러나 영국의 정책은 이중적이었다. 그루지야 역사가 A. 멘테샤시빌리는 영국이 한편으로 「단일 불가분의 러시아」의 회복과 볼셰비키 타도를 내건 데니킨군을 돕고, 다른 한편으로 영국의 힘을 빌려 주권을 굳히려는 현지 정부들의 기대를 부추기며 상황에 따라 「분할 통치」로 줄타기했다고 평가한다. 노이 조르다니아는 훗날 영국 사령부가 데니킨의 이익까지 대변하며, 데니킨에게 복종하면 볼셰비키를 이긴 뒤 자치를 주겠다고 제안했다고 회고했다. 가장 날카로운 충돌은 흑해 연안의 소치에서 벌어졌다. 1918년 7월 그루지야군은 붉은 군대를 밀어내고 소치를 거쳐 투압세까지 나아갔고, 9월 18일 소치 지역 회의가 그루지야와의 「임시」 통합을 선언하자 백군 지도부가 거세게 반발했다. 9월 25~26일 예카테리노다르에서 의용군과 예브게니 게게치코리 외무장관이 이끈 그루지야 대표단이 만났지만 회담은 결렬되었고, 1919년 2월 6일 백군은 가그라에서 그루지야군 지휘부를 사로잡으며 그루지야군을 브지브강 너머로 밀어냈다. 영국이 브지브강에 경계선을 긋자 그루지야군은 4월 반격에 나섰고, 영국은 다시 개입해 프소우강에 새 경계선을 설정했다. 5월 트빌리시 회담으로 분쟁은 사실상 끝났고, 프소우강은 오늘날 러시아–그루지야 국경이 되었다. 1919년 6월 16일 아제르바이잔과 그루지야는 국경을 위협하는 데니킨의 의용군에 맞서 방위 조약을 맺었다. 상황이 안정되었다고 본 영국은 1919년 8월 19일 바쿠에서 철수했다. 20 27 40

1920년 1월 12일 연합국 최고회의는 그루지야와 아제르바이잔, 뒤이어 아르메니아의 독립을 사실상 승인했다. 러시아어 출처는 연합국이 1919년 내내 데니킨의 승리를 기대하며 승인을 미루다가, 데니킨의 패배와 붉은 군대의 캅카스 접근이 알려진 뒤에야 이들을 소비에트 러시아와 동방 사이의 완충국으로 삼으려 했다고 서술한다. 승인의 한계는 뚜렷했다. 영국 외무차관 그린우드는 하원에서 이 결정이 각국의 국경 문제를 예단하지 않으며 대표 교환에도 변화가 없다고 답했고, 미국은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 아제르바이잔 측 서술은 연합국의 반볼셰비키 행동이 자캅카스에서는 현상 유지, 승인, 외교적 항의 같은 말의 수준을 크게 넘지 않았다고 평가한다. 그 사이 남러시아 군대는 무너지고 있었다. 1920년 1월 29일 쿠반 카자크 중심의 캅카스군이 해체되어 단명한 쿠반군으로 바뀌었고, 의용군의 남은 병력은 3월 26~27일 노보로시스크에서 크림으로 철수했으며, 쿠반군은 4월 18~20일 붉은 군대에 항복했다. 데니킨은 4월 초 모든 권한을 표트르 브란겔에게 넘겼다. 영국군은 1920년 7월 7일 바투미를 그루지야군에 넘기고 떠났는데, 이 철수는 소비에트 러시아가 그루지야의 독립을 인정하는 대신 그루지야가 러시아에 적대적인 군대를 들이지 않기로 한 1920년 모스크바 조약의 결과로도 설명된다. 40 20 48 47 46 19

러시아소련북캅카스: 소비에트 공화국, 산악공화국, 이맘의 에미르국

러시아 제국이 무너진 뒤 북캅카스에는 여러 정권이 겹쳐 들어섰다. 쿠반 카자크의 쿠반 라다는 1918년 1월 28일 쿠반 인민공화국을 선포하고 2월 16일 독립을 선언했다. 볼셰비키는 3월 1일 퍄티고르스크의 제2차 테레크 민족대회에서 테레크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는데,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과 달리 연립 정부였고 수도는 뒤에 블라디카프카스로 옮겨졌다. 테레크 당국이 카자크 토지를 몰수해 땅 없는 체첸인·인구시인에게 넘기기로 하자 7월 게오르기 비체라호프가 이끄는 카자크 봉기가 일어났다. 7월 블라디카프카스에 파견된 세르고 오르조니키제는 8월 카자크가 도시를 점령하자 산으로 피했다가, 소비에트 체제가 그들이 바라는 이슬람 질서와 비슷하다며 체첸인·인구시인을 설득했고, 인구시인의 도움으로 8월 중순 도시를 되찾았다. 1918년 말 그는 북캅카스 일대의 볼셰비키 기관을 사실상 모두 장악했다. 7월 7일에는 쿠반–흑해·스타브로폴·테레크 소비에트 공화국을 합친 북캅카스 소비에트 공화국이 예카테리노다르를 수도로 세워졌으나, 8월 16일 데니킨의 의용군이 예카테리노다르를 점령했고, 연말까지 영토 대부분을 잃은 공화국은 1919년 1월 11일 폐지되었다. 테레크 공화국도 1919년 초 의용군에 정복되었다. 백군 편에 섰던 쿠반 라다는 점차 데니킨과 멀어져 우크라이나, 이어 그루지야와의 연방을 모색했고, 파리 강화회의에 간 대표단은 1919년 4월 데니킨과의 결별을 선언했다. 데니킨은 1919년 11월 라다 건물을 포위해 의원 10명을 체포하고 대표단원 알렉세이 쿨라부호프를 반역죄로 공개 교수했다. 쿠반은 1920년 초 대부분 붉은 군대에 점령되었다. 49 50 51 52 53 54

산악민 자치 운동은 1917년 5월 블라디카프카스에서 결성된 북캅카스·다게스탄 산악민 연합에서 시작되었다. 체첸 출신 석유업자 타파 체르모예프가 중앙위원회 의장, 아바르인 학자 나주무딘 고친스키가 무프티를 맡은 이 연합은 1918년 초 볼셰비키에 밀려 테미르한슈라를 거쳐 트빌리시로 옮겨 갔고, 1918년 5월 11일 북캅카스 산악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선포 장소는 출처에 따라 바투미 강화회의 또는 이스탄불로 서술된다). 산악공화국은 오스만 원정군의 도움으로 테미르한슈라와 데르벤트를 차지했으나 오스만의 패전으로 원정군은 곧 물러났다. 뒤이어 우세한 외세가 된 영국은 처음에는 지지를 약속했지만 데니킨을 반볼셰비키 주력으로 보고 백군과 협력하라고 권했고, 데니킨은 산악공화국과의 어떤 협력도 거부했다. 백군은 카바르다와 북오세티야를 빠르게 점령했으나 체첸·인구시에서 거센 저항을 만나 초토화 전술을 썼고, 1919년 5월 페트롭스크와 데르벤트를 점령했다. 데니킨의 최후통첩에 테미르한슈라의 프셰마호 코체프 정부는 해산해 트빌리시로 망명했다. 성직자들의 노선은 갈렸다. 고친스키는 공산주의자를 더 큰 위협으로 보고 데니킨을 「덜한 악」으로 받아들였지만, 셰이크 우준 하지는 「돼지가 검든 희든 무슨 차이냐」며 양쪽을 다 거부했다. 1919년 5월 보틀리흐 회의에서 다게스탄·체첸의 이맘으로 추대된 우준 하지는 9월 19일 베데노를 근거지로 오스만 술탄의 보호를 받는 샤리아 군주국 북캅카스 에미르국을 선포했다(술탄의 칙서는 위조로 여겨진다). 에미르국은 니콜라이 기칼로가 이끈 붉은 군대 패잔병을 받아들여 함께 보즈드비젠스코예와 샬리에서 백군을 이겼고, 그루지야의 승인과 무기 지원을 받았다. 병력은 데니킨이 말한 4,000~5,000명부터 레닌에게 올라간 보고의 8,500명까지 다양하게 전해지지만, 체첸 역사가 마이르베크 바차가예프는 1,000명을 넘은 적이 없다고 본다. 52 55 56 57 58 59

1920년 2~3월 제11군이 들어와 무슬림 성직자들과 함께 데니킨군을 테레크와 다게스탄에서 몰아냈다. 3월 말 붉은 군대가 그로즈니를 차지하자 우준 하지는 도시를 넘기라고 요구했으나 거절당했고, 볼셰비키는 세속 권력을 내놓으면 이맘 칭호를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장티푸스를 앓던 우준 하지는 3월 30일 숨졌고 에미르국은 며칠 뒤 사라졌다. 4월 8일 결성된 러시아 공산당 캅카스국(카프비우로)은 오르조니키제를 의장, 1919년 아스트라한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유혈로 다잡았던 세르게이 키로프를 부의장으로 삼았다. 그러나 산악 지대에서 새 권력은 곧 반발에 부딪혔다. 행정의 부실과 남용, 식량 징발과 테러가 원인으로 꼽히는 다게스탄 봉기는 1920년 9월 그루지야에서 넘어온 산악민 부대로 시작되었다. 고친스키가 이끌고 샤밀의 손자 사이드 샤밀이 명목상 지도자로 추대된 봉기군은 약 600명에서 6,000명으로, 1921년 1월에는 많게는 9,700명으로 불어나 아바르·안디·구니브 관구를 거의 장악하고 훈자흐와 구니브의 붉은 군대 수비대를 포위했으며, 아리카니 협곡과 보틀리흐에서 붉은 군대 부대를 섬멸했다. 붉은 군대는 증원군과 포병·장갑차·항공기,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화학무기까지 동원해 1921년 1~3월 거점을 되찾았고, 2월 그루지야가 소비에트화되자 봉기군은 배후를 잃었다. 5월 마지막 거점 기다틀이 함락되며 봉기는 끝났다. 붉은 군대 지휘관 토도르스키에 따르면 붉은 군대 사망자는 5,000명이었고 산악민의 희생은 알려지지 않았으며, 약 100개 마을이 파괴되었다. 그 사이 1921년 1월 20일 소비에트 정부는 다게스탄을 뺀 북캅카스에 체첸·인구시·오세티야·카바르다 등 6개 관구, 인구 약 80만 명의 산악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을 세웠다. 이는 내전기 통합 구상의 유산을 받아들인 것으로 평가되지만, 1920년 테레크 카자크 3만 4,637명이 강제 이주된 뒤의 일이었고 공화국은 1924년까지 민족별 자치주로 해체되었다. 52 56 53 60 61 62 57 63

소련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그루지야튀르키예소비에트화, 1920–1921

북캅카스에서 백군을 몰아낸 제11군은 1920년 4월 아제르바이잔 국경에 이르렀다. 러시아어 문헌에 따르면 바쿠 작전은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지도부와 캅카스 전선 사령관 미하일 투하쳅스키, 혁명군사위원 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가 함께 짰다. 4월 27일 새벽 3시 장갑열차 「제3 인터내셔널」이 사무르강 다리의 국경을 넘었는데, 이는 바쿠의 공산주의자들이 정부에 최후통첩을 내기 12시간 전이었다. 같은 날 바쿠에서는 노동자 부대와 함대가 역·우편국·전신국을 장악했고, 국방장관 사마드 메흐만다로프는 의회에 무력 저항이 불가능하다고 보고했다. 의회는 그날 밤 아제르바이잔의 완전한 독립 유지, 붉은 군대의 바쿠 강제 진입 방지 등을 조건으로 내걸고 반대 1표로 권력 이양을 의결했고, 4월 28일 새벽 2시 해산했다. 나리만 나리마노프를 포함한 6인의 아제르바이잔 혁명위원회(아즈레브콤)가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하고 모스크바에 원조를 청하는 전보를 보냈으며, 같은 날 새벽 아나스타스 미코얀 등을 태운 장갑열차가 바쿠역에 들어왔다.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요청한 군사 지원을 노이 조르다니아의 그루지야 정부는 거절했고, 일부 터키 장교들은 붉은 군대에 저항하지 말라고 선전했다. 10~15일 사이에 나히체반(7월 말)을 뺀 전국에 소비에트 권력이 세워졌고, 5월 12일 제11군 부대가 슈샤에 들어갔다.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군을 지휘하던 드라스타마트 카나얀(드로)과 가레긴 은즈데는 5월 24일 철수에 합의했으나, 은즈데는 8월 붉은 군대의 잔게주르·카라바흐·나히체반 진입을 허용한 소련-아르메니아 합의 뒤에도 잔게주르 남부를 떠나라는 명령을 거부했다. 64 65 35 44

점령 초기 바쿠에서는 주민들이 「약탈 주간」이라 부른 며칠 동안의 약탈이 벌어졌고, 독일 역사가 외르크 바베로프스키는 볼셰비키가 점령자로 들어왔다고 썼다. 보고에 따르면 처음 이틀 동안 바일 감옥에서 300명이 처형되었으며, 5월 16일 바쿠에 도착한 나리마노프는 혁명위원회의 재가 없는 처형을 금지하자고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한편 1920년 4월부터 10월 말까지 아제르바이잔에서 러시아로 보낸 석유는 1억 4,500만 푸드에 이르렀고, 레닌은 4월 29일 바쿠 소식이 「우리 공업 전체를 되살릴 경제적 기반」을 뜻한다고 말했다. 옛 아제르바이잔군 장교들의 해임과 부대 해산에 대한 불만은 5월 26~31일의 간자 봉기로 터졌다. 약 2,000명의 병사로 시작한 봉기는 시민 의용병이 가세해 1만~1만 2,000명으로 불어났고, 성직자들은 볼셰비키 정부에 대한 성전을 호소했다. 5월 29일 붉은 군대의 공격이 실패하자 제11군은 보병 5개 연대, 기병 6개 연대, 대포 57문 등을 모아 31일 북쪽에서 총공세를 폈다. 제11군 작전부장의 보고조차 포격으로 도시의 절반이 파괴되었다고 적었고, 진압 뒤 장군 12명을 비롯한 장교와 군인 수백 명이 총살되었다. 이 봉기 뒤 남아 있던 아제르바이잔군 부대는 모두 해산되었고, 다른 지방의 봉기는 1924년까지 완전히 진압되지 않았다. 64 66

세브르 조약을 거부한 앙카라의 터키 대국민의회 정부는 1920년 4월 26일 무스타파 케말 명의로 레닌에게 「제국주의 정부들」에 맞선 공동 투쟁을 약속하며 금과 무기를 요청했고, 그해 소비에트 정부는 소총 6,000정과 탄약, 금괴를 보냈다. 6월 동부전선 사령관이 된 카즘 카라베키르는 9월 13일 새벽 올투 일대의 아르메니아군을 공격했고, 사르카미시를 거쳐 10월 30일 카르스를, 일주일 뒤 알렉산드로폴을 점령했다. 아르메니아는 11월 18일 휴전에 응했으며, 이 침공으로 학살된 아르메니아인은 약 6만 명에서 많게는 10만 명으로 추산된다. 그 사이 스탈린은 레닌의 지시로 오르조니키제에게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르메니아로 들어가 친볼셰비키 정부를 세우라고 명했다. 11월 28~29일 밤 아나톨리 게커의 제11군이 카라반사라이(지금의 이제반)로 넘어왔고, 아르메니아 혁명위원회가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12월 2일 아르메니아 정부는 소련 전권대표 보리스 레그란과 협정을 맺고 소비에트 정부에 권력을 넘겼는데, 협정은 다슈나크 당원을 처벌하지 않고 소비에트 러시아가 영토 안전을 보장한다고 약속했다. 바로 다음 날 새벽 알렉산드르 하티샨의 대표단은 카라베키르와 알렉산드로폴 조약에 서명해 옛 카르스주와 수르말루를 터키에 넘기고, 군대를 소총수 1,500명으로 줄이며, 세브르 조약을 무효로 선언했다. 서명 전날 정부가 이미 사임했으므로 이 조약은 무효로 간주되지만, 그 국경은 뒤의 카르스 조약의 틀이 되었다. 붉은 군대는 12월 4일 예레반에 들어갔고, 6일에는 체카가 뒤따랐다. 67 68 69 70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당국은 다슈나크 당원을 탄압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겼다. 약 1,000명의 장교가 체포되어 예레반에서 알라베르디까지 걸어서 끌려갔고, 1921년 2월에는 사르다라바트 전투의 지휘관 다니엘 베크-피루먄 등이 총살되었으며, 농민의 밀은 보상 없이 징발되었다. 다슈나크는 2월 13일 봉기를 일으켜 18일 예레반에 들어갔고, 마지막 총리 시몬 브라치안이 이끄는 조국구원위원회가 정부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수적으로 크게 앞선 붉은 군대가 3월 24일 대공세를 펴 4월 2일 예레반을 되찾았고, 봉기 세력과 피란민은 잔게주르로 물러났다. 그곳에서는 은즈데가 소련 정부의 잔게주르·카라바흐 아제르바이잔 편입 제안을 거부하고 1920년 12월 25일 시우니크의 자치를 선언해 두었다. 4월 26일 타테브 수도원에서 열린 대회는 산악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고, 6월 1일 국호를 아르메니아 공화국으로 바꿔 브라치안이 총리를 맡았다. 이 공화국은 시우니크를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에 남긴다는 소련 측 약속을 받고 1921년 7월 항복했으며, 은즈데와 지도자들은 페르시아로 넘어갔다. 볼셰비키 정부는 봉기의 원인을 검토해 주민을 더 관용적으로 대하기로 했고, 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를 아르메니아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임명했다. 카라바흐에 대해서는 1921년 7월 5일 러시아 공산당 캅카스국이 산악 지대를 아제르바이잔 관할에 두기로 결정했다. 71 72 35 44

1920년 5월 모스크바 조약으로 독립을 인정받은 그루지야의 처리를 두고 볼셰비키 지도부는 갈라져 있었다. 오르조니키제가 의장, 세르게이 키로프가 부의장인 캅카스국과 민족인민위원 스탈린은 즉각적인 군사 전복을 거듭 주장했고, 레프 트로츠키는 「때 이른 개입」에 반대하며 주민이 스스로 혁명을 일으킬 준비 기간을 두자고 했으며, 레닌은 처음에 무력 사용을 거부하고 극도의 신중함을 요구했다. 1921년 2월 11~12일 밤 오르조니키제의 부추김으로 아르메니아인이 많이 사는 로리 지구와 슐라베리에서 볼셰비키가 그루지야 초소를 공격했고, 필리프 마하라제가 이끄는 그루지야 혁명위원회가 모스크바에 원조를 청했다. 러시아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2월 14일 제11군의 트빌리시 점령을 조건부로 허용했는데, 이 결정은 카를 라데크가 반대했고 우랄에 있던 트로츠키에게는 알리지 않았다. 2월 16일 게커의 주력이 국경을 넘었고, 코조리 고지에서 일주일 동안 공방이 이어진 끝에 그루지야군 총사령관 기오르기 크비니타제가 철수를 명령해 2월 25일 붉은 군대가 트빌리시에 들어가 그루지야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 사이 카라베키르는 2월 23일 아르다한·아르트빈 철수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내고 국경 지대를 점령했고, 3월 8일 터키군은 그루지야 정부와의 구두 합의로 바투미 주변에 진주해 소련과 위기를 빚었다. 3월 2일 레닌은 멘셰비키와 「받아들일 만한 타협」을 찾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으나 멘셰비키는 연립 제안을 거부했다. 73 74 75

3월 16일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와 터키 대국민의회 정부는 우호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터키는 바투미와 사르프 이북 지역을 소비에트 그루지야에 넘기는 대신 카르스주를 얻었고, 나히체반은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보호 아래 자치 지역이 되었다. 같은 날 영국은 소비에트 정부와 통상협정을 맺어 옛 러시아 제국 영토에서 반소 활동을 삼가기로 사실상 약속했으므로, 그루지야 정부의 서방 개입 기대는 사라졌다. 터키군이 바투미에서 물러나지 않자 그루지야 정부는 3월 17일 쿠타이시에서 혁명위원회 측과 휴전했고, 18일 기오르기 마즈니아슈빌리 장군이 이끄는 그루지야군이 바투미에서 터키군과 시가전을 벌였다. 그 사이 멘셰비키 정부는 이탈리아 배를 타고 망명길에 올랐고, 19일 마즈니아슈빌리는 도시를 혁명위원회에 넘겼다. 바투미 사태로 중단되었던 협상은 9월 26일 카르스에서 재개되어, 10월 13일 터키와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의 세 소비에트 공화국이 러시아의 참여 아래 카르스 조약에 서명했다. 터키 측 서명자에는 카라베키르가 있었다. 조약은 모스크바 조약을 재확인해 아르다한·아르트빈·카르스와 수르말루를 터키에 주고, 바투미를 포함한 북부를 그루지야 안의 아자르 자치공화국으로 삼으며, 터키군을 알렉산드로폴 일대에서 철수시켰다. 이때 그어진 터키와 아르메니아·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의 국경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76 73 77 78

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평가: 민족혁명인가, 내전의 한 전선인가, 국제 분쟁인가

소련 역사학은 자캅카스의 소비에트화를 「내전과 외국 간섭」의 일부로 보았다. 초기에는 그루지야 원정을 「혁명 전쟁」이라 불렀으나 이 말이 「침략」과 구별하기 어려워지자, 뒤의 공식 서술은 현지 노동자·농민이 봉기해 붉은 군대의 도움을 청했다는 설명으로 바꾸었다. 소련 저자들은 러시아 부대의 역할을 협상국과 터키의 간섭에 맞선 자캅카스 근로인민의 「형제적·국제주의적 원조」로 규정했고, 1967년 소련 책자는 아르메니아의 1920년 11월을 다슈나크 통치를 끝낸 근로인민의 봉기로 묘사했다. 아제르바이잔에서 1920년 4월은 「4월 혁명」으로 기념되다가 1937~1938년 탄압기 이후 그 말이 문서에서 사라졌다. 반면 피루즈 카젬자데는 제11군이 공식 요청 전에 들어온 점을 들어 무사바트 정부의 몰락을 「되살아난 러시아의 힘」의 결과로 보았고, 바베로프스키 등은 이를 「침공」으로 서술한다. 망명 정치인과 독립 이후의 국가 기관도 같은 결론을 내렸다. 1989년 그루지야 최고소비에트 위원회는 1921년의 사건을 「군사 간섭이자 점령」으로 판정했고, 1991년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회복 헌법 법률은 1920년 4월을 「점령」으로 규정했으며, 그루지야는 2010년부터 2월 25일을 「소비에트 점령의 날」로 기념한다. 다만 평가가 한 방향만은 아니다. 타데우시 시비엥토호프스키는 무사바트의 몰락을 대중의 「공동체적 의식」과 무관심에서 찾았고, 아르메니아에 대해서는 소련의 개입만이 아르메니아인 학살의 완결을 막았다고 보는 역사가들도 있다. 73 64 70 67

국제사의 관점에서 자캅카스의 소비에트화는 러시아 내전의 마지막 전선이자 소비에트 러시아와 케말의 터키가 협상국의 질서를 함께 무너뜨린 과정이었다. 케말은 1920년 2월 카라베키르에게 영국의 「캅카스 장벽」을 뒤에서 허물라고 지시했고, 8월 대국민의회에서 붉은 군대의 아제르바이잔 점령을 「우리의 목표이자 영향력」이라 불렀다. 아제르바이잔의 역사가 R. 무스타파자데는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 몰락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바로 이 터키-소련 접근을 꼽는다. 스탈린은 1920년 11월 캅카스의 의미가 원료와 연료뿐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 러시아와 터키 사이의 전략적 위치에 있다며, 캅카스를 누가 지배하느냐를 혁명과 협상국의 대결로 설명했다. 그러나 두 동맹국의 이해는 아르메니아와 바투미에서 부딪혔고, 그 결과 볼셰비키는 아니와 쿨프를 아르메니아에 남기려던 시도에서 물러서며 카르스 조약에서 큰 영토를 양보했다. 영국은 철수했고, 망명한 그루지야 지도부가 1921년 3월 27일 이스탄불에서 세계 사회주의 정당들에 보낸 호소에도 국제 사회는 대체로 침묵했다. 다슈나크는 지금도 카르스 조약을 모스크바의 통제 아래 맺어진 국제법 위반이라며 거부한다. 64 77 73

레닌은 1920년 3월 바쿠 진공을 앞두고 오르조니키제에게 바쿠는 「극히 중요하다」면서도 그루지야에 대해서는 더 신중하게 행동하라고 권했다. 1921년 그루지야 점령 뒤에도 그는 친볼셰비키 봉기가 주장된 만큼의 대중적 지지를 얻지 못했음을 알고 그루지야 지식인·농민과의 화해 정책을 지지했고, 마하라제 같은 온건파는 멘셰비키에 대한 관용과 점진적 토지개혁, 그루지야의 주권 존중을 주장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1921년 7월 트빌리시 노동자 집회에서 야유를 받은 뒤 마하라제를 해임하고 폴리카르프 므디바니를 앉혔으며, 그루지야 체카도 라브렌티 베리야 등으로 교체했다. 오르조니키제가 1921년 말 추진한 세 공화국의 연합은 1922년 3월 12일 자캅카스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 연맹으로, 12월 13일 하나의 연방 공화국인 자캅카스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바뀌었다. 그루지야를 독자 공화국으로 연방에 들이려던 므디바니와 마하라제는 「민족 편향」으로 몰렸고, 오르조니키제가 므디바니파 인사를 때린 사건을 계기로 레닌은 1922년 12월 말 스탈린과 오르조니키제에게 대러시아 민족주의의 책임이 있다고 보게 되었다. 이 「그루지야 사건」의 패배 뒤 강화된 탄압은 1924년 8월 그루지야 봉기와 수천 명이 죽은 보복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1922년 12월 30일 자캅카스 연방은 러시아·우크라이나·벨라루스와 함께 소련의 결성에 참여한 네 창설 공화국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64 75 78 79

결과

1920년 4월 아제르바이잔, 12월 아르메니아, 1921년 2월 그루지야가 붉은 군대에 의해 소비에트화되었고, 북캅카스에서는 1921년 5월 다게스탄 봉기가 진압되었다. 1921년 3월 모스크바 조약과 10월 카르스 조약은 카르스·아르다한을 터키에, 바투미를 그루지야에 두는 오늘날의 국경을 정했다. 세 공화국은 1922년 자캅카스 연방으로 묶여 소련 결성에 참여했다.

연표와 지도

트빌리시 소치 블라디카프카스 테미르한슈라 바투미 알렉산드로폴 간자 카르스 바쿠 예레반 슈샤 10 소치 25 블라디카프카스 13 페트롭스크 14 베데노 21 훈자흐 20 츠힌발리 6 포티 27 트빌리시 1 트빌리시 11 트빌리시 17 트빌리시 28 바투미 9 사다흘로 3 샴코르 24 알렉산드로폴 18 알렉산드로폴 19 간자 12 카르스 22 카르스 30 카르스 7 바쿠 16 바쿠 4 바쿠 8 바쿠 23 예레반 26 예레반 5 사르다라바트 15 슈샤 2 에르진잔 29 타테브
  1. 11917.11.28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자캅카스 인민위원부 수립

    트빌리시에서 그루지야 멘셰비키·무사바트·다슈나크 등이 오자콤을 대신하는 정부를 세우고 소브나르콤을 인정하지 않았다. 의장은 예브게니 게게치코리였다.

  2. 21917.12.18러시아튀르키예
    에르진잔 휴전

    캅카스 전선의 러시아군과 오스만 제3군이 휴전했다. 러시아 병사들이 대거 귀향길에 오르며 전선이 무너졌다.

  3. 31918.01.22–01.25아제르바이잔러시아
    샴코르 사건

    샴코르역 일대에서 아제르바이잔 무장 집단이 귀환하는 러시아 병사들의 열차를 습격했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약 2,000명이 죽었다.

  4. 41918.03.30–04.02아제르바이잔
    바쿠 3월 사태

    바쿠 소비에트와 다슈나크 부대가 무사바트 세력과 싸우는 과정에서 무슬림 주민이 대거 학살되었다. 사망자 추정치는 약 3,000명에서 1만 2천 명까지 엇갈린다.

  5. 1918.04.22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자캅카스 민주연방공화국 선포

    바투미를 잃은 뒤 세임이 오스만의 요구에 따라 독립 연방 공화국을 선포했다. 사흘 뒤 카르스가 오스만에 넘어갔다.

  6. 51918.05.21–05.29아르메니아튀르키예
    사르다라바트 전투

    예레반 서쪽에서 아르메니아군이 오스만군의 진격을 막았다. 바시아파란·카라킬리사에서도 같은 시기에 싸움이 벌어졌다.

  7. 1918.05.26–05.28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연방 해체와 세 나라의 독립

    5월 26일 세임이 해산하고 그루지야가 독립을 선언했으며, 28일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가 뒤따랐다. 6월 4일 세 나라는 오스만과 바투미 조약을 맺었다.

  8. 61918.05.28그루지야독일
    포티 조약 — 독일의 보호

    독립 이틀 뒤 그루지야는 독일의 보호를 받아들였고, 약 3,000명의 독일군이 포티항에 상륙해 오스만군의 진격을 막았다.

  9. 1918.09.15아제르바이잔튀르키예영국
    바쿠 함락과 9월 사태

    던스터포스가 철수한 뒤 오스만-아제르바이잔군이 바쿠에 들어왔고 아르메니아인 1만~3만 명이 학살되었다.

  10. 1918.09.20아제르바이잔영국
    26인 바쿠 코미사르 처형

    크라스노보드스크에서 체포된 바쿠 코뮌 지도자 26명이 아슈하바드 위원회의 결정으로 트랜스카스피아 철도변에서 총살되었다.

  11. 71918.11.17영국아제르바이잔
    톰슨의 영국군, 바쿠 진주

    오스만군이 물러난 바쿠에 윌리엄 톰슨 장군이 영국 인도군과 러시아 부대를 이끌고 들어와 군정 총독을 자처하고 계엄을 선포했다.

  12. 81918.12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 의회 개원

    민족회의를 대신한 의회가 열렸다. 무사바트가 최대 분파였고 아르메니아인·러시아인 등 소수민족 대표도 의석을 얻었으며, 의회는 1919년 여성 참정권을 도입했다.

  13. 91918.12.07–12.31그루지야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그루지야 전쟁

    로리와 아할칼라키를 두고 두 공화국이 싸웠다. 아르메니아군이 트빌리시 가까이 진격한 뒤 영국의 중재로 휴전하고 로리 중립지대가 생겼다.

  14. 101919.02.06러시아그루지야영국
    백군, 소치 분쟁에서 그루지야군 격퇴

    데니킨의 군대가 가그라에서 그루지야군 지휘부를 사로잡고 그루지야군을 브지브강 너머로 밀어냈다. 영국의 개입으로 뒤에 프소우강이 경계가 되었다.

  15. 111919.02.14그루지야
    그루지야 제헌의회 선거

    사회민주당(멘셰비키)이 81.5%를 얻어 130석 가운데 109석을 차지했다. 3월 21일 노이 조르다니아가 단독 정부를 꾸렸다.

  16. 121919.04.10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의 카르스 편입

    서남캅카스 공화국이 아르메니아군과 영국군에 항복하고 카르스 주가 아르메니아에 편입되었다. 5월에는 나히체반 편입도 선포되었다.

  17. 131919.05러시아
    의용군, 다게스탄 점령

    백군이 페트롭스크와 데르벤트를 점령하고, 데니킨의 최후통첩에 북캅카스 산악공화국 정부가 해산해 트빌리시로 망명했다.

  18. 141919.09.19러시아
    북캅카스 에미르국 선포

    우준 하지가 베데노를 근거지로 오스만 술탄의 보호를 받는 샤리아 군주국을 선포하고 데니킨군과 싸웠다.

  19. 1920.01.12영국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
    연합국, 그루지야·아제르바이잔 사실상 승인

    연합국 최고회의가 두 공화국(뒤이어 아르메니아)을 사실상 승인했지만, 국경 문제는 예단하지 않는다고 못박았다.

  20. 151920.03.22–26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슈샤 학살

    아르메니아인 봉기가 실패한 뒤 아제르바이잔 군대와 주민이 슈샤의 아르메니아인 구역을 불태우고 주민을 학살했다. 희생자 추정은 500명에서 3만 명까지 엇갈린다.

  21. 161920.04.27–28아제르바이잔소련
    제11군의 바쿠 진입

    장갑열차가 국경을 넘은 날 밤 아제르바이잔 의회가 권력 이양을 의결했고, 혁명위원회가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22. 171920.05.03–05.07그루지야러시아
    트빌리시 쿠데타 시도와 모스크바 조약

    볼셰비키의 트빌리시 사관학교 습격이 격퇴되었다. 5월 7일 소비에트 러시아는 그루지야 독립을 인정했고, 그루지야는 비밀 부속서로 공산당을 합법화했다.

  23. 181920.05.10–05.14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 5월 봉기

    볼셰비키가 세운 혁명위원회가 알렉산드로폴에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를 선포했으나 정부군이 나흘 만에 진압했다.

  24. 191920.05.26–31아제르바이잔
    간자 봉기

    옛 아제르바이잔군 장교들이 일으킨 봉기가 1만 명 이상으로 커졌으나 제11군의 포격과 총공세로 진압되었다.

  25. 201920.06.08–06.12그루지야
    남오세티야 봉기 진압

    혁명위원회가 남오세티야 전역의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으나 인민수비대가 6월 12일 츠힌발리를 되찾았다. 약 5,000명이 죽고 2만 명이 피란했다.

  26. 1920.08.10아르메니아튀르키예
    세브르 조약

    아르메니아는 「자유로운 독립국」으로 인정받고 서아르메니아 국경은 미국 대통령의 중재에 맡겨졌지만, 조약은 비준되지 않았다.

  27. 211920.09–1921.05소련
    다게스탄 봉기

    고친스키가 이끈 산악민 봉기가 다게스탄 고지대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그루지야의 소비에트화 뒤 붉은 군대에 진압되었다. 붉은 군대는 5,000명을 잃었다.

  28. 221920.09.13–11.18튀르키예아르메니아
    터키의 아르메니아 침공

    카라베키르의 동부전선군이 10월 30일 카르스, 11월 초 알렉산드로폴을 점령했고 아르메니아는 11월 18일 휴전에 응했다.

  29. 231920.11.29–12.04아르메니아소련
    아르메니아 소비에트화

    제11군이 이제반 방면으로 들어오고, 12월 2일 정부가 권력을 넘긴 뒤 4일 붉은 군대가 예레반에 입성했다.

  30. 241920.12.03아르메니아튀르키예
    알렉산드로폴 조약

    하티샨의 대표단이 카르스주와 수르말루를 터키에 넘기는 조약에 서명했으나, 전날 정부가 사임해 무효로 간주된다.

  31. 251921.01.20소련
    산악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수립

    소비에트 정부가 다게스탄을 뺀 북캅카스에 6개 관구, 약 80만 명의 산악 자치공화국을 세웠다.

  32. 261921.02.13–04.02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 2월 봉기

    다슈나크가 예레반을 되찾아 42일 동안 다스렸으나 붉은 군대의 공세로 잔게주르로 물러났다.

  33. 271921.02.16–25그루지야소련
    그루지야 침공과 트빌리시 함락

    로리 봉기를 구실로 국경을 넘은 제11군이 코조리 고지 전투 끝에 트빌리시에 들어가 그루지야 소비에트 공화국을 선포했다.

  34. 1921.03.16소련튀르키예
    모스크바 조약

    소비에트 러시아와 앙카라 정부가 우호 조약을 맺어 카르스주를 터키에, 바투미를 그루지야에 두고 나히체반을 아제르바이잔 보호하의 자치 지역으로 정했다.

  35. 281921.03.18–19그루지야튀르키예
    바투미 전투와 그루지야 정부 망명

    그루지야군이 터키군과 시가전을 벌이는 사이 멘셰비키 정부가 배로 망명했고, 도시는 혁명위원회에 넘어갔다.

  36. 291921.04–07아르메니아
    산악 아르메니아 공화국

    타테브 대회가 독립을 선포한 은즈데의 공화국은 시우니크를 아르메니아에 남긴다는 약속을 받고 7월 항복했다.

  37. 301921.10.13튀르키예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그루지야
    카르스 조약

    터키와 세 소비에트 공화국이 서명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국경을 확정했다.

관련 인물 30명

소비에트 세력15명

지도부7

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스테판 샤우먄1878–1918

바쿠 소비에트를 이끌어 3월 사태 뒤 바쿠 코뮌을 세웠고, 1918년 9월 20일 처형되었다.

바쿠 혁명 방위 위원회 위원나리만 나리마노프1870–1925

3월 사태 때 소비에트 측 혁명 방위 위원회에 참여했다. 아즈레브콤과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이끌며 무분별한 처형과 징발을 제한하려 했다.

소브나르콤 위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

영어 출처에 따르면 바쿠로 갈 병력과 곡물을 차리친에 묶어 두었다. 그루지야의 무력 전복을 거듭 주장했고, 1921년 7월 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지도부를 교체했다.

캅카스 붉은 군대 정치위원그리고리 오르조니키제1886–1937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화 뒤 그루지야 진격 허가를 요청했고, 1920년 5월 붉은 군대의 국경 진입을 독자적으로 이끈 것으로 보인다. 1918년 인구시인의 도움으로 블라디카프카스를 되찾았고 1920년 4월 캅카스국 의장이 되었다.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그루지야 진공을 지휘하고 로리 봉기를 부추겨 그루지야 침공을 이끌어 냈다.

소비에트 러시아 인민위원회의 의장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

폴란드 전쟁 중 두 번째 전선을 피하려 그루지야 침공을 미루고 모스크바 조약 협상에 동의했다. 그루지야에 대한 신중함을 권하다가 1921년 2월 14일 침공에 동의했고, 이후 화해 정책을 지지했다.

아르메니아 인민위원회 의장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 (먀스니캰)1886–1925

2월 봉기 진압 뒤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정부의 수반에 임명되었다.

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필리프 마하라제1868–1941

슐라베리에서 혁명위원회를 이끌고 모스크바에 원조를 청했으나 1921년 7월 온건하다는 이유로 해임되었다.

참여7

바쿠 볼셰비키아나스타스 미코얀1895–1978

바쿠 함락 때 갇혀 있던 코미사르들을 빼냈고, 크라스노보드스크에서 함께 붙잡혔으나 처형을 피했다. 1920년 4월 28일 장갑열차를 타고 바쿠에 들어왔다.

모스크바 조약 러시아 측 서명자레프 카라한1889–1937

1920년 5월 7일 러시아를 대표해 그루지야 독립을 인정하는 모스크바 조약에 서명했다.

그루지야 주재 소비에트 전권대표세르게이 키로프1886–1934

모스크바 조약 뒤 트빌리시에 부임해 그루지야 공산당원 재체포에 항의했다. 1919년 아스트라한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다잡았고, 1920년 캅카스국 부의장으로서 다게스탄 봉기 진압 동원에도 참여했다. 오르조니키제와 함께 캅카스국을 이끌었고 1921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가 되었다.

군사인민위원레프 트로츠키1879–1940

그루지야에 대한 「때 이른 개입」에 반대했으나 뒤에 소책자로 침공을 옹호했다.

캅카스 전선 사령관미하일 투하쳅스키1893–1937

러시아어 문헌에 따르면 바쿠 작전 계획을 함께 세웠다.

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1921)폴리카르프 므디바니1877–1937

마하라제 후임이 되었으나 자캅카스 연방 편입에 반대해 「그루지야 사건」의 중심이 되었다.

외무인민위원게오르기 치체린1872–1936

터키군의 바투미 진주에 항의 각서를 냈다.

자캅카스 민족 정부들7명

지도부5

자캅카스 세임 의장니콜라이 치헤이제1864–1926

1918년 2월 소집된 세임의 의장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항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오스만에 답했다.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파리 강화회의 대표단을 이끌며 그루지야의 승인을 구했다.

자캅카스 인민위원부 의장예브게니 게게치코리1881–1954

인민위원부를 이끌며 볼셰비키 편에 선 귀환 부대가 트빌리시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았고, 1918년 4월 연방 선포와 함께 물러났다. 모스크바 조약의 억류 조항을 주권 침해로 보았고, 공산당원 재체포를 두고 키로프와 각서를 주고받았다. 1918년 9월 예카테리노다르에서 의용군과 소치 귀속 문제를 협상했으나 결렬되었다.

그루지야 멘셰비키 지도자노이 조르다니아1868–1953

10월 혁명을 불법으로 규정해 자캅카스의 독자 노선을 주장했고, 1918년 5월 26일 그루지야 독립 선언문을 읽었다. 멘셰비키 정부를 이끌며 토지개혁과 소수민족 자치를 추진했고, 국제적 승인을 위해 1920년 모스크바 조약을 받아들였다. 영국 사령부가 데니킨의 이익까지 대변하며 그루지야에 데니킨 복종을 요구했다고 회고했다. 1920년 4월 아제르바이잔의 지원 요청을 거절했고 1921년 3월 바투미에서 망명했다.

아르메니아 외무장관·총리알렉산드르 하티샨1874–1945

트라브존 강화 회의 대표단에 참여했고, 외무장관으로 바투미 조약에 서명했다. 총리로서 「통일 아르메니아 법」을 낭독했고 5월 봉기 와중에 내각과 함께 사임했다. 정부가 사임한 다음 날 새벽 알렉산드로폴 조약에 서명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회의 의장마메드 아민 라술자데1884–1955

1918년 5월 28일 아제르바이잔 민주공화국을 선포한 민족회의를 이끌었고 바투미 조약에 서명했다. 1920년 4월 권력 이양 조건에 반대했으나 다수 의견을 따랐고, 스탈린의 개입으로 처형을 면했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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