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1년 3월 13일 아침, 알렉산드르 2세는 로리스-멜리코프의 개혁안에 서명하며 말했다: "나는 승인했다. 그러나 이것이 헌법을 향한 첫걸음임을 스스로 숨기지 않는다." 몇 시간 후 차르는 암살당했다.
아르메니아 귀족 출신으로 캅카스 전쟁과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병 장군이었으나, 그의 역사적 무게는 군사적 공적보다 정치 개혁에 있다. 1880년 겨울궁전 폭파 사건 이후 전제적 권한을 위임받아 '마음의 독재'로 불린 온건 노선을 펼쳤으며, 혁명 탄압과 동시에 검열 완화·지방 자치·선거 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추진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1881년 3월 13일 아침, 차르는 로리스-멜리코프의 선거 자문위원회 구상을 승인했으나,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 후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의 조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전제정치를 선언했다. 러시아 최초의 헌정 실험을 설계했으나 반동에 좌절된 그는 개혁과 전제의 분기점에서 상실된 개혁의 순간을 상징한다.
1905년 3월 모스크바 법정에서 차르 체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연설을 했다. 유형지에서 탈출한 후에도 바쿠 지하로 돌아갔고, 결국 바일로프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출신의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897년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1901년 바쿠로 유배된 후 캅카스 사회민주주의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02년 스테판 샤우먄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을 공동 창립했고, 1903년 RSDLP 제2차 대회에서 이스크라 다수파로 서며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의 현장에 섰다.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종신 유형 후 탈출해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석했다. 바쿠 지하로 돌아와 활동하다 1910년 체포되어 바일로프 감옥에서 3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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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입학
1897'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가입
1901바쿠로 유배, RSDLP 바쿠·캅카스 연합위원회 위원
1902스테판 샤우먄 등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공동 창립
1903RSDLP 제2차 대회 바쿠 대의원 — 이스크라 다수파(볼셰비키)
1904–1905모스크바에서 체포, 재판에서 반차르 연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1905.12체포되어 종신 유형 선고
1907유형지 탈출,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 및 헬싱포르스 RSDLP 제4차 협의회 참석
바쿠 코뮌 붕괴 직전, 동료의 아내가 먼저 피하라 권하자 샤우먄은 답했다. "노동자들이 나에게 뭐라 하겠는가? 맨 먼저 도망치는 건 나에게 수치다."
아르메니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이자 캅카스 볼셰비키의 지도자. 티플리스 상인 집안 출신으로 리가 공대와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했고, 1899년 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했다. 「공산당 선언」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고 문학비평을 개척했으며, 1912년 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18년 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바쿠 코뮌'을 이끌었고, 민족문제를 두고 레닌과 편지 논쟁을 벌인 대표적 이론가였다. 1918년 9월 26인의 바쿠 인민위원들과 함께 총살당해 소비에트 순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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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티플리스 실과학교 졸업, 리가 공과대학 입학
1899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1900–1902RSDLP 입당, 리가 공대 퇴학,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창립
1902–1905베를린 대학 철학부, 「공산당 선언」 아르메니아어 번역, 제네바에서 레닌과 첫 만남
1906–1914RSDLP 4차·5차 대회 대의원, 바쿠 지하신문 편집, 카프카스 연합위원회 지도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 승인
1917.03–1917.05바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초대 의장
1917.11–1918.04바쿠 소비에트 집행위 의장, 레닌이 캅카스 특별 전권위원으로 임명
'프로샨은 1918년 7월까지 소비에트 권력을 강화하는 데, 1918년 7월 이후 그것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 레닌, 〈프로샨 동지를 기리며〉, 1918년 12월
좌파 사회혁명당의 핵심 지도자이자 소비에트 최초 연립정부의 우편전신인민위원으로, 레닌·트로츠키·스탈린과 함께 인민위원회 임시집행위원회 위원(1918년 2월)을 지냈다. 인민위원 재임(1917.12–1918.3) 중 우편전신 공무원들의 사보타주를 종식시키고 통신 업무를 정상화했으며, 최고군사회의 정치위원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을 겸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에 항의해 사임한 후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의 지도부로 활동했고, 지하 잠복 중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는 그를 '좌파 사회혁명당의 내적 건설자, 기본 동력, 핵심 축'이라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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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오데사 대학에서 에스에르당 입당, 학생 조직가로 활동
1905오데사 교도소 정치범 탈옥 기도로 체포, 6년 카토르가 선고
1910–1913유형지 탈출 후 체포되어 3년 추가 카토르가; 시베리아 유형 중 해외 탈출
19172월 혁명 후 귀국; 헬싱포르스에서 좌파 에스에르 지도자, 《사회주의-혁명가》 편집장;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선출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봉기 소식이 민스크에 닿자, 먀스니코프는 즉시 군사혁명위원회를 소집하고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민스크에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다.
돈 강변 나히체반 출신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906년 RSDLP에 입당, 바쿠에서 샤우먄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민스크에서 서부전선 볼셰비키를 이끌어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했다. 1919년 벨라루스 SSR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1921년부터 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제도적 토대를 닦았다. 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과 당 제1서기를 지내며 민족 공화국과 모스크바를 잇는 핵심 고리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아르메니아 문학에 관한 저작을 남겼다. 1925년 트빌리시 근처 항공기 화재로 사망, 트로츠키가 추도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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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RSDLP 가입,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로 유배 — 샤우먄과 교류
1911–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졸업(1911), 군 복무 후 변호사 조수로 볼셰비키 언론에 기고
1925년 베이징 외교단 단장이 된 카라한. 부르주아 예법을 조롱하던 볼셰비키였지만, 그가 은빛 육두마차를 타고 흰 장갑을 낀 연미복 차림으로 등장하자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흰 장갑을 우아하게 낄 줄 아는 볼셰비키."
아르메니아계 변호사 가문 출신으로, 1904년 15세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으며 처음에는 멘셰비키였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서기를 지낸 뒤 외무부인민위원이 되었다. 1919년 '카라한 선언'을 기초·발표하여 중국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모든 불평등조약과 특권 포기를 선언했고, 이는 소비에트 아시아 정책의 기초를 이룬 문서가 되었다. 주중 대사 시절 1924년 중소협정을 체결했으며, 1937년 대숙청 중 '친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사형당했다가 1956년 복권되었다.
스탈린이 이사코프를 평했다: "진짜 함대 제독, 이사코프 동지. 똑똑하군, 다리는 없지만 머리는 있지."
아르메니아계 소련 해군 지휘관으로, 1955년 소련 해군 최고 계급인 아드미랄 플로타 소비에츠코고 소유자에 오른 단 세 명 중 한 명이다. 해군 제1부인민위원과 주참모부장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작전 교리를 정립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발트·흑해함대와 육군 간 협동작전을 조정하고 레닌그라드 '생명의 길'을 구축했다. 1942년 투압세에서 독일 공습으로 중상을 입어 왼쪽 다리를 절단했으나 종전까지 복무했다. 전후 3권의 『해양 지도책』(스탈린상 1급)을 비롯해 해양학·해군사에 걸친 150여 편의 저작을 남겼고,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과 작가동맹 회원이 되었다.
1942년 11월 6일 오후, 붉은 광장 로브노예 메스토. 탈영병이 스탈린의 차로 오인해 미코얀의 정부 차량에 세 발을 쐈다. 그는 한 점 상처 없이 걸어나왔다.
반세기 동안 소련의 먹고 사는 일을 관장한 실무의 거장. 식품공업인민위원으로서 1936년 두 달간 미국의 공장들을 시찰하고 돌아와 통조림·소시지·냉동식품 산업과 대량생산 아이스크림을 이식했고(「미코얀 커틀릿」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있다) 이후 수십 년간 대외무역과 소비재 공급을 맡았다. 정치에서는 1956년 헝가리 무력 개입에 거의 홀로 반대했고, 쿠바 위기 뒷수습으로 아바나에서 카스트로를 3주간 설득했다. 「일리치(레닌)에서 일리치(브레즈네프)까지」 최고 지도부를 통과하고 은퇴를 「허락받은」 드문 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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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30대외·국내상업인민위원, 30대의 최연소 인민위원
1934–38식품공업인민위원, 1936년 미국 시찰, 통조림·냉동식품·대량생산 아이스크림 도입
1938년 우랄마시 공장장 시절, 군사기술 2급 기술자 계급을 받았다. 전시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KV·IS 중전차와 SU 자주포의 동력계통을 책임졌고, 1945년 5월에는 쿠투조프 1급 훈장 — 대규모 부대 작전을 성공시킨 군사령관에게 주어지는 훈장을 산업 지휘관으로서 받았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산업 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전차·자주포·트랙터 생산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자동차·트랙터 공업을 연이어 관장했다. 우랄마시 공장장을 거쳐 중기계·중형기계 인민위원부에서 말리셰프, 반니코프 등과 함께 스탈린 시대 군수-산업 행정을 떠받친 실무형 관리자였다. 1955년 흐루쇼프에게 공개 비판받고 물러났으나, 이미 3개의 레닌 훈장과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급 산업 지휘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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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2그루지야 콤소몰 조직비서, 트빌리시 시위원회 책임비서
1922–1931바우만 모스크바 기계기계공학대학에서 수학하며 당 조직 업무 병행
1931–1937포돌스크 크레킹·전기기관차 공장 기술이사, 후에 공장장
1937–1939우랄마시 공장장, 군사기술 2급 계급 수여
1939–1941중기계공업 부인민위원, 제1부인민위원; 중형기계공업 제1부인민위원
1941–1946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 — 전차·자주포·트랙터 동력계통 생산 총괄
1946–1950자동차공업 장관, 자동차·트랙터공업 장관
1950–1955농업기계제조 차관·제1차관, 기계제조 장관, 자동차·트랙터·농업기계 장관; 1955년 퇴임
바쿠 탈출선이 격침되자 수영을 못하던 아르메나크를 건져낸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 그가 백위대 습격에 전사하자, 아르메나크는 그의 무기와 외투를 걸치고 부대를 포위망 밖으로 이끌었다 — 그리고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았다.
아르메니아 카라바흐 출신으로 15세에 바쿠 유전에서 노동하며 볼셰비키에 합류, 내전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활약하다 익사 직전 구해준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의 이름을 이어받았다.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를 우등 졸업한 뒤 공군 참모·군수 요직을 거쳐, 대조국전쟁기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서부전선 공군을 지휘하고 항공군 편제 개혁을 주도했다. 쿠르스크·드네프르 전투에서 항공작전을 조율하고 1944년 항공원수에 올랐으며, 테헤란·얄타 회담에 스탈린의 항공 군사고문으로 배석했다. 1945년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제12항공군을 지휘해 푸이 체포와 만주 금괴 확보를 성공시켰으나, 그해 12월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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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2바쿠 적위대 조직, 차리친 방어, 자캅카스 전선 기병대대장
1928–1936기병연대 참모장,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우등 졸업
1937–1941공군 작전과장·군수국장, 서부특별군관구 공군 참모장 → 서부전선 공군 사령관 (모스크바 방어전)
1942–1943붉은군대 공군 참모장 → 제1항공군 사령관, 항공군 편제 개혁 주도
1943–1944공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 쿠르스크·드네프르 항공작전 조율, 항공원수 (1944.8)
1943–1945테헤란·얄타 회담 항공 군사고문
1945제12항공군 사령관, 만주 작전 — 푸이 체포·금괴 확보
1945–19541945년 12월 체포, 1950년 4월 18일 처형, 1954년 8월 18일 복권, 1965년 계급·훈장 회복
“「가야네」 악보 약 700페이지를 피아노와 의자, 침대뿐인 차가운 페름의 호텔 방에서 반년 만에 써냈다. 「가야네」는 25년 동안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은 유일한 소비에트 주제 발레였다.”
아람 하차투랸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와 함께 소비에트 3대 작곡가로 꼽힌다. 트빌리시의 다민족 음악 문화 속에서 성장해 19세에 모스크바로 이주, 먀스콥스키에게 사사했다.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발레 「가야네」의 「칼춤」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전후 「스파르타쿠스」로 레닌상을 받았다. 1948년 형식주의자로 지목되었으나 곧 복권되었고, 1957년부터 사망까지 작곡가동맹 서기를 맡아 소비에트 음악계의 제도적 중심에 섰다. 아르메니아 민속 선율과 캅카스 리듬을 러시아 고전에 접목한 그의 양식은 소비에트 다민족 문화정책의 모범이었다.
1956년 흐루쇼프가 ITEP 해직자들의 체포를 막기로 한 후, 알리하노프는 당 회의에서 발언했던 네 사람에게 말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았다면 너희는 영웅이다. 몰랐다면 바보다.'
소련 핵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 명. 양전자 분광학 연구(1933~1940)와 코조다예프와 개발한 자기분광계는 소련 핵전자공학의 기초가 되었다. 원자폭탄 계획에서 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로 중수로 개발을 맡았다. 1945년 제3실험실(후일 ITEP)을 설립해 23년간 소장으로 재임하며, 소련 최초의 중수 연구용 원자로(1949)와 산업용 중수로(1951)를 직접 지휘했다. ITEP의 7 GeV 싱크로트론(1961)은 세계 최대의 70 GeV 세르푸호프 가속기(1967) 원형이 되었다. 평생 무당파였으며, 반세계주의 캠페인에서 연구원을 보호하고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으며, 1966년 스탈린 복권 반대 서한에 카피차·사하로프와 함께 참여했다.
스탈린이 물었다: "어떤 바보가 우리에게 비밀을 팔겠는가?" 그 바보는 영국 노동당 정부였다. 미코얀은 1946년 제트 엔진을 사러 런던으로 날아갔고, 롤스로이스 닌의 역설계가 곧 MiG-15의 심장이 되었다.
아르메니아 산골 마을 출신 선반공에서 소련 최대 전투기 설계국의 창립자로 거듭난 인물. 1939년 미하일 구레비치와 OKB-155(MiG)를 창설, MiG-15로 한국전쟁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MiG-21이라는 사상 최다 생산 초음속 전투기를 내놓았다. 정치국원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동생이지만,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과 여섯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받으며 스스로 기술관료의 정점에 올랐다. 그의 설계국 항공기들은 55개 세계 기록을 수립했다.
안드라니크 페트로샨츠는 소련 원자력 산업의 창립 세대를 대표하는 과학자·행정가로, 원자폭탄 개발을 관리한 제1총국에서 시작해 1962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 핵 프로그램의 민간 얼굴이자 평화적 이용의 국제적 대변인이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기자회견에서 '과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라고 발언한 인물로도 기록된다.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에 기폭장치를 손수 꽂은 핵물리학자, 제2핵무기연구소의 초대 과학책임자
1949년 8월 29일, 셸킨은 조립동에서 RDS-1을 수령하는 서류에 서명하고,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한 뒤 탑의 출입문을 봉인했다. 그가 '기폭' 버튼을 누른 마지막 사람이었다.
키릴 셸킨은 연소·폭발 물리학자로서 스핀 폭굉 이론을 정립했고,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서 결정적 실무를 맡은 인물이다.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에서 그가 직접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하고 탑의 출입문을 봉인한 뒤 기폭 버튼을 눌렀다. 이후 1955년 우랄 지역에 두 번째 핵무기 설계국인 첼랴빈스크-70(현 브니이테에프)의 초대 과학책임자 겸 수석설계자로 부임하여 소련 최초로 실전배치된 열핵무기를 개발했다. 쿠르차토프, 하리톤과 함께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1959년 연속된 심장발작으로 1960년 은퇴했다.
1984년 라이프치히 박람회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동독 측과 화학 플랜트 협상을 진행했다. 그의 유골은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바로 앞, 대략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그곳에 묻힌 인물이 되었다.
소련 화학공업의 최장수 책임자로서, 15년간 장관직을 수행하며 비료·고분자·석유화학을 축으로 한 전면적 화학화 계획을 지휘했다. 치르치크 전기화학 콤비나트의 현장 엔지니어로 출발해 질소비료·중수소 생산 기술로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받았고,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화학·석유·가스 산업 전반을 총괄했다. 아르메니아계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태어나 전연방 산업 관료로 성장했으며, 아르망드 해머와의 협력을 통해 서방 기술 도입 창구 역할도 수행했다.
「고르바초프도, 나도, 우리 모두 이중사고자였다. 머릿속에서 진실과 선전을 끊임없이 저울질해야 했다. 반체제냐 굴종이냐, 그게 선택지였다」
바쿠 출신 아르메니아계 정치학자·법학박사. 소련 정치학회를 창립해 17년간 이끌며 사회주의 민주주의 이론을 개척했고, 소비에트 사회 내 이익집단의 다원성을 인정한 초기 이론가 중 한 명이었다. 고르바초프 보좌관으로서 당 독점 폐지·경선 도입·대통령제 전환의 헌법개혁을 설계했으며, 퇴임 후 회고록 『자유의 대가』를 집필하고 SF 작가 '게오르기 샤흐'로도 활동했다.
브루텐츠와 국제부 전문가들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판단했다. 그 의견을 전달할 부서장 포노마료프는 중대한 12월 회의에서 아예 배제되었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정치가이자 이론가. 바쿠에서 정신과 의사로 출발해 역사학으로 전환, 1958년 '신식민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학위를 받았다. 1961년부터 중앙위 국제부에서 활동하며 '민족민주주의' 개념을 정립하는 특별작업반을 이끌었고, 제1부부장으로 승진해 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시기 소련의 제3세계 정책을 실무적으로 설계했다.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 당시 내부에서 반대 의견을 냈으며,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외교정책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회고록 『스타라야 광장에서의 30년』을 남겼다.
1988년 폴리트뷰로에서 보수파가 협동조합법에 격렬히 반대하자, 시타랸은 "이것은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구하는 법"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코시긴 개혁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소련 경제 개혁의 거의 모든 주요 장면에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참여한 교량형 인물이다. 1960년대 중반 코시긴 개혁 준비 위원회에서 상품-화폐 관계 도입을 설계했고, 1986~1989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경제 개혁의 핵심 규범들을 입안했다. 그가 주도한 1988년 협동조합법은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사적 기업 활동에 합법적 지위를 부여한 법률로, 보수파가 장악한 폴리트뷰로에서 직접 변론하여 관철시켰다.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대외경제 개방을 추진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를 창설하여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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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소련 재무부 산하 재무연구소(NIFI) 선임경제학자, 선임연구원
1966경제학 박사, 이후 교수 직함 획득 (1970)
1970–1974소련 재무부 재무연구소(NIFI) 소장
1974–1983소련 재무차관
1983–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부의장
1986–1989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제1부의장, 경제체제 개선 부처간위원회 제1부의장
1989–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1988년 7월 소련 최고회의 연단에서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해결책은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나는 대안을 보지 못한다."
1931년 스테파나케르트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인 당료로, 1988년 2월 24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되어 불과 4일 전 지역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 통합 결의를 통과시킨 직후의 폭발적 상황을 물려받았다. 임기 중 3월 당 플레넘을 주재해 모스크바에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 이관을 공식 요청했고, 7월에는 소련 최고회의 연단에서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고 선언했다. 모스크바는 1989년 1월 그를 해임하고 아르카디 볼스키의 특별관리위원회로 대체했으며, 해임 후 모스크바에서 은퇴 생활을 하다 2000년 사망했다.
자치주는 아르메니아 공화국과 가깝지만, 높은 산으로 분리되어 있다. (1977년 국제 저널 인터뷰에서)
아제르바이잔 샤마흐 태생의 아르메니아인 당료로, 1973년 헤이다르 알리예프에 의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 제1서기로 임명되어 1988년까지 재임했다. 카라바흐 외부 출신으로 알리예프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며,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의 민족적 요구를 억압하고 바쿠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77년 국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카라바흐가 '높은 산으로 아르메니아와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해 동족의 분노를 샀고, 1988년 2월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 통합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해임되었다. 1992년 바쿠에서 체포·투옥되었다가 1993년 알리예프의 사면으로 석방된 뒤 모스크바로 이주해 중학교 역사 교사로 일하다 1998년 사망했다.
아르메니아를 14년간 이끌며 현대화하고, 카라바흐에 동조해 실각한 후 복귀했으나 의회 총격으로 암살당하다
1975년 4월 23일, 데미르찬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의 조직자들을 공식 규탄하며 공화국의 이름으로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예레반 전기기술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을 거쳐 1974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취임하여 14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 중 메차모르 원자력발전소와 예레반 지하철을 비롯한 현대적 기반시설을 건설했고, 1975년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최초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공식 규탄했다. 1978년 공화국 헌법에 아르메니아어를 국어로 명기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1988년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에서 민중 시위에 동조한 이유로 모스크바에 의해 '건강상 사유'로 해임되었다. 소련 붕괴 후 1998년 대선에 출마해 결선에서 40%를 득표하고 1999년 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의회 총격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54–1966예레반 전기기술공장: 기술자·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
1959–1961CPSU 중앙위 고등당학교 수료
1966–1972예레반 시당위 서기 → 제1서기
1972–1974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서기
1974–1988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76–1988 아르메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의장 겸임)
당조직자가 돈다발을 두 팔로 끌어안고 떨리는 손으로 당원증에 적었다: '1989년 1월 급여, 300만 루블.' 평균 월급이 200루블이던 시절이었다.
소련 최초의 합법적 백만장자로, 협동조합 '테흐니카'의 창업자이다. 1989년 1월 자신에게 300만 루블의 월급을 지급하고 부하의 당비 9만 루블 납부가 「브즐랴트」에 방영되면서 전국적 스캔들을 일으켰고, 이는 협동조합법이 두 차례 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인민대표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으며, 러시아 초기 자본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선진 기술을 빠르게 따라잡으며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창조적 파괴가 부재했기 때문에 1970년대에 이르러 힘이 빠지고 있었다.'
이스탄불의 아르메니아계 가정에서 태어나 MIT 경제학 교수가 된 다론 아제모을루는, 국가 간 번영 격차의 제도적 기원을 규명한 공로로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도경제학의 대표적 학자다. 로빈슨과 함께 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2012)에서 소련 계획경제 아래 가격은 실물 가치와 유리되어 혁신을 평가할 수 없고, 상여금이 총임금기금에 연동되어 기업이 자동화를 기피하게 되므로 코시긴 개혁은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그의 연구는 포용적 제도 없이 지속적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다는 통찰로 발전경제학과 정치경제학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소련이 민족을 파괴했다는 냉전 통념을 뒤집고, 소비에트 정책이 오히려 민족을 만들었다고 주장한 역사학자
초등학교 6학년 때 소련이 파시즘을 물리치고 전쟁 이후 샌프란시스코 크기의 도시들을 건설했다는 발표를 했더니 선생님은 얼굴이 하얘졌다. 그날부터 졸업할 때까지 나는 '수니 동무'로 불렸다.
아르메니아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소련 민족 문제 연구의 패러다임을 전환한 인물이다. 1993년 저서 『과거의 복수』에서 소비에트 체제가 민족들을 탄압하고 러시아화했다는 기존의 냉전적 통념을 뒤집고, 소련의 민족 정책이 오히려 영토·언어·관료제를 통해 민족 정체성을 제도화하고 구축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연방을 파괴할 민족들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이 '과거의 복수' 테제는 소련 해체 이후 소비에트 민족 연구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되었다. 코카서스 3국 각각에 대한 연구로도 저명하며, 2020년 출간된 스탈린 전기로 도이처 기념상을 수상했다.
1953년 8월, 중앙위원회 간부 데도프는 흐루쇼프에게 보낸 진정서에서 그리고랸의 동료들이 그와 베리야의 '가까운 관계'를 지적했다고 보고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아르메니아인 마을에서 태어난 그리고랸은 군대 신문 편집자에서 시작해 모스크바 당 기관의 출판·선전 책임자로 올라섰다. 1949년 미하일 수슬로프의 후임으로 대외정책위원회(국제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1953년까지 소련 공산당과 전 세계 공산당 간 관계를 총괄했다. 그의 재임기는 코민포름 창설 이후 유고슬라비아와의 결별이 심화되고 중국 혁명이 승리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기와 겹친다. 1952년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 이후 측근으로 지목되어 중앙위원회에서 제외되고 외교부로 전출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20–1924아제르바이잔 당 중앙위원회 출판부장, 군대 신문 편집
1924–1927모스크바 하모브니키 구당위 출판부장, 모스크바 시당위 출판부장
1927–1933트빌리시에서 「라보차야 프라우다」, 「프롤레타르」, 「나 루베제 보스토카」 편집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비에트 사회 전체의 혁명적 쇄신이다. 성장의 가속은 민주화와 글라스노스트에서 분리될 수 없다. (1988)
트빌리시 태생의 아르메니아계 수리경제학자. 노보시비르스크 IEiOPP 소장(1966–1984)으로 시베리아 개발과 BAM의 경제 토대를 설계하고 『EKO』를 창간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 고문이 되어 기업 자율성 확대, 시장 요소 도입, 대외경제 개방이라는 개혁 청사진을 제시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서기(1986–1989)로 활동하며 소비에트 계획경제 안에서 최대한의 변화를 모색했고, 소련 해체 후 국민경제아카데미 총장(1989–2002)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