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국가적 배경

아르메니아

28 명

해당 인물

미하일 타리엘로비치 로리스-멜리코프

Михаил Тариелович Лорис-Мелик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아르메니아 1824–1888 ○ 개혁안 폐기 후 은퇴

"마음의 독재"라 불린 아르메니아 출신의 개혁적 내무장관

1881년 3월 13일 아침, 알렉산드르 2세는 로리스-멜리코프의 개혁안에 서명하며 말했다: "나는 승인했다. 그러나 이것이 헌법을 향한 첫걸음임을 스스로 숨기지 않는다." 몇 시간 후 차르는 암살당했다.

아르메니아 귀족 출신으로 캅카스 전쟁과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병 장군이었으나, 그의 역사적 무게는 군사적 공적보다 정치 개혁에 있다. 1880년 겨울궁전 폭파 사건 이후 전제적 권한을 위임받아 '마음의 독재'로 불린 온건 노선을 펼쳤으며, 혁명 탄압과 동시에 검열 완화·지방 자치·선거 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추진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1881년 3월 13일 아침, 차르는 로리스-멜리코프의 선거 자문위원회 구상을 승인했으나,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 후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의 조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전제정치를 선언했다. 러시아 최초의 헌정 실험을 설계했으나 반동에 좌절된 그는 개혁과 전제의 분기점에서 상실된 개혁의 순간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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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7캅카스로 전속, 체첸·다게스탄 전투 참전
  • 1853–1856크림 전쟁 참전, 바얀두르·바슈카드클라르 전투
  • 1855카르스 지역 사령관
  • 1863–1875테레크주 총독 겸 테레크 카자크군 아타만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캅카스 전선 사령관, 아르다한·카르스 점령
  • 1879하리코프 임시 총독
  • 1880최고행정위원회 위원장
  • 1880–1881내무장관

보그단 미르자자노비치 크누냔츠

Богдан Мирзаджанович Кнунянц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아르메니아 1878–1911 ○ 옥사

제2차 대회의 이스크라 다수파, 감옥에서 스러진 캅카스 볼셰비키 선구자

1905년 3월 모스크바 법정에서 차르 체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연설을 했다. 유형지에서 탈출한 후에도 바쿠 지하로 돌아갔고, 결국 바일로프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출신의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897년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1901년 바쿠로 유배된 후 캅카스 사회민주주의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02년 스테판 샤우먄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을 공동 창립했고, 1903년 RSDLP 제2차 대회에서 이스크라 다수파로 서며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의 현장에 섰다.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종신 유형 후 탈출해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석했다. 바쿠 지하로 돌아와 활동하다 1910년 체포되어 바일로프 감옥에서 3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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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입학
  • 1897'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가입
  • 1901바쿠로 유배, RSDLP 바쿠·캅카스 연합위원회 위원
  • 1902스테판 샤우먄 등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공동 창립
  • 1903RSDLP 제2차 대회 바쿠 대의원 — 이스크라 다수파(볼셰비키)
  • 1904–1905모스크바에서 체포, 재판에서 반차르 연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 1905.12체포되어 종신 유형 선고
  • 1907유형지 탈출,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 및 헬싱포르스 RSDLP 제4차 협의회 참석
  • 1907–1910바쿠 지하 활동
  • 1910.09체포, 바일로프 감옥 수감

스테판 게오르기예비치 샤우먄

Степан Георгиевич Шаумя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아르메니아 1878–1918 ✕ 처형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캅카스의 레닌, 바쿠 코뮌의 지도자

바쿠 코뮌 붕괴 직전, 동료의 아내가 먼저 피하라 권하자 샤우먄은 답했다. "노동자들이 나에게 뭐라 하겠는가? 맨 먼저 도망치는 건 나에게 수치다."

아르메니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이자 캅카스 볼셰비키의 지도자. 티플리스 상인 집안 출신으로 리가 공대와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했고, 1899년 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했다. 「공산당 선언」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고 문학비평을 개척했으며, 1912년 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18년 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바쿠 코뮌'을 이끌었고, 민족문제를 두고 레닌과 편지 논쟁을 벌인 대표적 이론가였다. 1918년 9월 26인의 바쿠 인민위원들과 함께 총살당해 소비에트 순교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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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티플리스 실과학교 졸업, 리가 공과대학 입학
  • 1899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 1900–1902RSDLP 입당, 리가 공대 퇴학,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창립
  • 1902–1905베를린 대학 철학부, 「공산당 선언」 아르메니아어 번역, 제네바에서 레닌과 첫 만남
  • 1906–1914RSDLP 4차·5차 대회 대의원, 바쿠 지하신문 편집, 카프카스 연합위원회 지도
  •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 승인
  • 1917.03–1917.05바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초대 의장
  • 1917.11–1918.04바쿠 소비에트 집행위 의장, 레닌이 캅카스 특별 전권위원으로 임명
  • 1918.04–1918.07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외무위원 — 바쿠 코뮌 수립
  • 1918.09.2026인의 바쿠 인민위원과 함께 체포·총살

프로시 페르체비치 프로샨

Прош Перчевич Прошьян
좌익 반대파 소비에트 러시아 아르메니아 1883–1918 ○ 발진티푸스

소비에트 최초 연정의 좌파 에스에르 인민위원, 당의 '핵심 축'

'프로샨은 1918년 7월까지 소비에트 권력을 강화하는 데, 1918년 7월 이후 그것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 레닌, 〈프로샨 동지를 기리며〉, 1918년 12월

좌파 사회혁명당의 핵심 지도자이자 소비에트 최초 연립정부의 우편전신인민위원으로, 레닌·트로츠키·스탈린과 함께 인민위원회 임시집행위원회 위원(1918년 2월)을 지냈다. 인민위원 재임(1917.12–1918.3) 중 우편전신 공무원들의 사보타주를 종식시키고 통신 업무를 정상화했으며, 최고군사회의 정치위원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을 겸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에 항의해 사임한 후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의 지도부로 활동했고, 지하 잠복 중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는 그를 '좌파 사회혁명당의 내적 건설자, 기본 동력, 핵심 축'이라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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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오데사 대학에서 에스에르당 입당, 학생 조직가로 활동
  • 1905오데사 교도소 정치범 탈옥 기도로 체포, 6년 카토르가 선고
  • 1910–1913유형지 탈출 후 체포되어 3년 추가 카토르가; 시베리아 유형 중 해외 탈출
  • 19172월 혁명 후 귀국; 헬싱포르스에서 좌파 에스에르 지도자, 《사회주의-혁명가》 편집장;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선출
  • 1917.12우편전신인민위원 취임
  • 1918.2–3인민위원회 임시집행위원회 위원; 최고군사회의 정치위원
  • 1918.3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항의해 인민위원직 사임
  • 1918.7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지도부 참여; 진압 후 지하 잠복, 궐석 3년형 선고

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 표도로비치 (먀스니캰)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Мясников
정부 수반 소련 아르메니아 1886–1925 ✕ 추락사

벨라루스와 아르메니아에 소비에트 권력을 세운 레닌의 변방 건설자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봉기 소식이 민스크에 닿자, 먀스니코프는 즉시 군사혁명위원회를 소집하고 단 한 발의 총성도 없이 민스크에 소비에트 권력을 선포했다.

돈 강변 나히체반 출신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906년 RSDLP에 입당, 바쿠에서 샤우먄의 영향을 받았다. 1917년 민스크에서 서부전선 볼셰비키를 이끌어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했다. 1919년 벨라루스 SSR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1921년부터 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의 제도적 토대를 닦았다. 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과 당 제1서기를 지내며 민족 공화국과 모스크바를 잇는 핵심 고리였다.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론과 아르메니아 문학에 관한 저작을 남겼다. 1925년 트빌리시 근처 항공기 화재로 사망, 트로츠키가 추도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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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RSDLP 가입, 불법 문헌 소지로 바쿠로 유배 — 샤우먄과 교류
  • 1911–1914모스크바 대학 법학부 졸업(1911), 군 복무 후 변호사 조수로 볼셰비키 언론에 기고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복무, 병사들 사이에서 혁명 선전
  • 1917.9–1918.5서북지역 당위원회 의장, 민스크 군사혁명위 의장, 서부전선 총사령관
  • 1919.1–2벨라루스 SSR 초대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겸 군사인민위원
  • 1919–1920모스크바 당위원회 군사조직자·서기; 폴란드 전쟁 시 서부전선 정치국장
  • 1921–1922아르메니아 SSR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군사인민위원, 자카프카스 SFSR 부의장
  • 1922–1925자카프카스 연방평의회 의장, 자캅카스 당 제1서기 — 소련 중앙집행위 상임위원, 혁명군사평의회 위원, 당 중앙위 후보위원
  • 1925.3.22트빌리시 근처 항공기 화재로 사망 — 아타르베코프, 모길렙스키와 함께 순직

레프 미하일로비치 카라한

Лев Михайлович Карахан
외교 소련 아르메니아 1889–1937 ✕ 처형

중국에 대한 짜르 불평등조약을 폐기한 1919년 카라한 선언의 주역

1925년 베이징 외교단 단장이 된 카라한. 부르주아 예법을 조롱하던 볼셰비키였지만, 그가 은빛 육두마차를 타고 흰 장갑을 낀 연미복 차림으로 등장하자 타임지는 이렇게 평했다: "흰 장갑을 우아하게 낄 줄 아는 볼셰비키."

아르메니아계 변호사 가문 출신으로, 1904년 15세에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했으며 처음에는 멘셰비키였다.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서기를 지낸 뒤 외무부인민위원이 되었다. 1919년 '카라한 선언'을 기초·발표하여 중국에 대한 제정 러시아의 모든 불평등조약과 특권 포기를 선언했고, 이는 소비에트 아시아 정책의 기초를 이룬 문서가 되었다. 주중 대사 시절 1924년 중소협정을 체결했으며, 1937년 대숙청 중 '친파시스트 음모' 혐의로 사형당했다가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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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5세에 RSDLP 입당, 처음에는 멘셰비키
  • 1917.5귀국, 메즈라욘치(지역간파) 합류
  • 1917.8제6차 당대회: 메즈라욘치와 함께 볼셰비키 합류
  • 1917–1918브레스트-리토프스크 평화회담 소비에트 대표단 서기
  • 1918–1921외무부인민위원 (RSFSR)
  • 1921–1922주폴란드 RSFSR 전권대표
  • 1922–1923외무인민위원부 동방부장
  • 1923–1926주중 소비에트 전권대표 (1924년부터 대사)
  • 1925베이징 외교단 단장 (두아옌)
  • 1926–1934외무부인민위원 (USSR)
  • 1934–1937주터키 소비에트 전권대표

이반 스테파노비치 이사코프

Иван Степанович Исаков
군사 · 국방 소련 아르메니아 1894–1967 ○ 자연사

한쪽 다리를 잃고도 두 전쟁을 치른 소련 해군의 학자 제독

스탈린이 이사코프를 평했다: "진짜 함대 제독, 이사코프 동지. 똑똑하군, 다리는 없지만 머리는 있지."

아르메니아계 소련 해군 지휘관으로, 1955년 소련 해군 최고 계급인 아드미랄 플로타 소비에츠코고 소유자에 오른 단 세 명 중 한 명이다. 해군 제1부인민위원과 주참모부장을 지내며 소련 해군의 작전 교리를 정립했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발트·흑해함대와 육군 간 협동작전을 조정하고 레닌그라드 '생명의 길'을 구축했다. 1942년 투압세에서 독일 공습으로 중상을 입어 왼쪽 다리를 절단했으나 종전까지 복무했다. 전후 3권의 『해양 지도책』(스탈린상 1급)을 비롯해 해양학·해군사에 걸친 150여 편의 저작을 남겼고,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과 작가동맹 회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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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해군사관학교 졸업, 발트함대 구축함 이쟈슬라프에서 복무
  • 1918발트함대 빙상 항해 참가
  • 1922–1928흑해함대 작전부장 등 참모직 역임
  • 1937–1938발트함대 사령관
  • 1938–1939해군 부인민위원 겸 해군대학교장
  • 1939–1946해군 제1부인민위원
  • 1940–1942해군 주참모부장
  • 1942북캅카스 전선 부사령관, 투압세에서 중상으로 다리 절단
  • 1946–1947해군 주참모부장
  • 1947–1950해군 부총사령관
  • 1955아드미랄 플로타 소비에츠코고 소유자 진급
  • 1958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아나스타스 이바노비치 미코얀

Анастас Иванович Микоян
국가원수 소련 아르메니아 1895–1978 ○ 자연사

소련의 식탁을 만든 사람. 그리고 「일리치에서 일리치까지」의 협상가

1942년 11월 6일 오후, 붉은 광장 로브노예 메스토. 탈영병이 스탈린의 차로 오인해 미코얀의 정부 차량에 세 발을 쐈다. 그는 한 점 상처 없이 걸어나왔다.

반세기 동안 소련의 먹고 사는 일을 관장한 실무의 거장. 식품공업인민위원으로서 1936년 두 달간 미국의 공장들을 시찰하고 돌아와 통조림·소시지·냉동식품 산업과 대량생산 아이스크림을 이식했고(「미코얀 커틀릿」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도 있다) 이후 수십 년간 대외무역과 소비재 공급을 맡았다. 정치에서는 1956년 헝가리 무력 개입에 거의 홀로 반대했고, 쿠바 위기 뒷수습으로 아바나에서 카스트로를 3주간 설득했다. 「일리치(레닌)에서 일리치(브레즈네프)까지」 최고 지도부를 통과하고 은퇴를 「허락받은」 드문 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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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30대외·국내상업인민위원, 30대의 최연소 인민위원
  • 1934–38식품공업인민위원, 1936년 미국 시찰, 통조림·냉동식품·대량생산 아이스크림 도입
  • 1938–49대외무역인민위원, 전시 렌드리스 수령 총괄
  • 1953–64무역·소비재 담당 부총리, 흐루쇼프의 해빙 지원
  • 1956/1962헝가리 개입 반대, 아바나에서 카스트로 설득
  • 1964–65최고소비에트 간부회의 의장(명목상 국가원수), 이후 은퇴

이반 흐리스토포로비치 바그라먄

Иван Христофорович Баграмян
군사 · 국방 소련 아르메니아 1897–1982 ○ 자연사

비슬라브 최초의 전선군 사령관, 바그라티온에서 발트까지

1944년 여름, 부대가 발트해에 닿자 바그라먄은 스탈린에게 발트해 물 한 병을 보냈다. 독일군이 해안을 되찾는 사이 병이 크렘린에 도착하자 스탈린은 말했다. "돌려주시오. 바그라먄 동무가 직접 따라 부을 수 있게."

아제르바이잔 출신 아르메니아인으로 비슬라브인 최초 소련 전선군 사령관. 바그라티온 작전에서 습지 돌파로 독일 북부집단군을 쿠를란트에 고립시켰다. 소련원수, 두 번의 소련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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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7러시아 제국군 자원입대, 캅카스 전선 페르시아 원정, 소위
  • 1918–20아르메니아군에서 튀르크군과 교전, 중대장·기병대대장, 중위
  • 1920–34붉은군대 합류, 기병연대장, 고급기병학교·프룬제 아카데미 졸업
  • 1934–40키예프군관구 기병사단 참모장, 참모아카데미 졸업 후 교관
  • 1941–42남서전선 작전참모 — 키예프 방어, 로스토프 반격, 하리코프 공세
  • 1942–4316군·11근위군 사령관 — 지즈드라, 오룔 반격에서 독일 방어 돌파
  • 1943–451발트전선군 사령관 — 바그라티온, 메멜, 쾨니히스베르크 함락
  • 1945–55발트군관구 사령관, 소련원수, 국방차관
  • 1956–68참모아카데미 원장, 국방차관 겸 후방총국장

스테판 아코포비치 아코포프

Степан Акопович Акоп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아르메니아 1899–1958 ○ 자연사

전시 중형기계에서 자동차공업까지 이끈 아르메니아계 생산 관료

1938년 우랄마시 공장장 시절, 군사기술 2급 기술자 계급을 받았다. 전시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KV·IS 중전차와 SU 자주포의 동력계통을 책임졌고, 1945년 5월에는 쿠투조프 1급 훈장 — 대규모 부대 작전을 성공시킨 군사령관에게 주어지는 훈장을 산업 지휘관으로서 받았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산업 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으로서 전차·자주포·트랙터 생산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자동차·트랙터 공업을 연이어 관장했다. 우랄마시 공장장을 거쳐 중기계·중형기계 인민위원부에서 말리셰프, 반니코프 등과 함께 스탈린 시대 군수-산업 행정을 떠받친 실무형 관리자였다. 1955년 흐루쇼프에게 공개 비판받고 물러났으나, 이미 3개의 레닌 훈장과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은 전쟁영웅급 산업 지휘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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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2그루지야 콤소몰 조직비서, 트빌리시 시위원회 책임비서
  • 1922–1931바우만 모스크바 기계기계공학대학에서 수학하며 당 조직 업무 병행
  • 1931–1937포돌스크 크레킹·전기기관차 공장 기술이사, 후에 공장장
  • 1937–1939우랄마시 공장장, 군사기술 2급 계급 수여
  • 1939–1941중기계공업 부인민위원, 제1부인민위원; 중형기계공업 제1부인민위원
  • 1941–1946중형기계공업 인민위원 — 전차·자주포·트랙터 동력계통 생산 총괄
  • 1946–1950자동차공업 장관, 자동차·트랙터공업 장관
  • 1950–1955농업기계제조 차관·제1차관, 기계제조 장관, 자동차·트랙터·농업기계 장관; 1955년 퇴임

세르게이 알렉산드로비치 후댜코프

Серге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Худяков
군사 · 국방 소련 아르메니아 1902–1950 ✕ 처형 · 1954년 복권

스탈린의 항공 군사고문에서 숙청된 유일한 아르메니아인 항공원수

바쿠 탈출선이 격침되자 수영을 못하던 아르메나크를 건져낸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 그가 백위대 습격에 전사하자, 아르메나크는 그의 무기와 외투를 걸치고 부대를 포위망 밖으로 이끌었다 — 그리고 평생 그 이름으로 살았다.

아르메니아 카라바흐 출신으로 15세에 바쿠 유전에서 노동하며 볼셰비키에 합류, 내전에서 기병 지휘관으로 활약하다 익사 직전 구해준 전우 세르게이 후댜코프의 이름을 이어받았다.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를 우등 졸업한 뒤 공군 참모·군수 요직을 거쳐, 대조국전쟁기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서부전선 공군을 지휘하고 항공군 편제 개혁을 주도했다. 쿠르스크·드네프르 전투에서 항공작전을 조율하고 1944년 항공원수에 올랐으며, 테헤란·얄타 회담에 스탈린의 항공 군사고문으로 배석했다. 1945년 만주 전략공세작전에서 제12항공군을 지휘해 푸이 체포와 만주 금괴 확보를 성공시켰으나, 그해 12월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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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2바쿠 적위대 조직, 차리친 방어, 자캅카스 전선 기병대대장
  • 1928–1936기병연대 참모장, 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우등 졸업
  • 1937–1941공군 작전과장·군수국장, 서부특별군관구 공군 참모장 → 서부전선 공군 사령관 (모스크바 방어전)
  • 1942–1943붉은군대 공군 참모장 → 제1항공군 사령관, 항공군 편제 개혁 주도
  • 1943–1944공군 부사령관 겸 참모장, 쿠르스크·드네프르 항공작전 조율, 항공원수 (1944.8)
  • 1943–1945테헤란·얄타 회담 항공 군사고문
  • 1945제12항공군 사령관, 만주 작전 — 푸이 체포·금괴 확보
  • 1945–19541945년 12월 체포, 1950년 4월 18일 처형, 1954년 8월 18일 복권, 1965년 계급·훈장 회복

아람 일리치 하차투랸

Арам Ильич Хачатурян
문화 · 문학예술 통제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1903–1978 ○ 자연사

아르메니아 선율을 소비에트 교향악에 녹여낸 작곡가

“「가야네」 악보 약 700페이지를 피아노와 의자, 침대뿐인 차가운 페름의 호텔 방에서 반년 만에 써냈다. 「가야네」는 25년 동안 무대에서 내려오지 않은 유일한 소비에트 주제 발레였다.”

아람 하차투랸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와 함께 소비에트 3대 작곡가로 꼽힌다. 트빌리시의 다민족 음악 문화 속에서 성장해 19세에 모스크바로 이주, 먀스콥스키에게 사사했다. 피아노 협주곡, 바이올린 협주곡, 발레 「가야네」의 「칼춤」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전후 「스파르타쿠스」로 레닌상을 받았다. 1948년 형식주의자로 지목되었으나 곧 복권되었고, 1957년부터 사망까지 작곡가동맹 서기를 맡아 소비에트 음악계의 제도적 중심에 섰다. 아르메니아 민속 선율과 캅카스 리듬을 러시아 고전에 접목한 그의 양식은 소비에트 다민족 문화정책의 모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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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조직위 부의장
  • 1943전연방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44아르메니아 SSR 국가 작곡
  • 1950그네신 음악교육원 교수
  • 1951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 1954소비에트 인민예술가
  • 1957소비에트 작곡가동맹 서기
  • 1958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제5소집)

아브람 이사코비치 알리하노프

Абрам Исаакович Алиханов
이론가 소련 아르메니아 1904–1970 ○ 자연사

중수로에서 세계 최대 가속기까지: ITEP의 23년 지휘자

1956년 흐루쇼프가 ITEP 해직자들의 체포를 막기로 한 후, 알리하노프는 당 회의에서 발언했던 네 사람에게 말했다: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지 알았다면 너희는 영웅이다. 몰랐다면 바보다.'

소련 핵물리학의 창시자 중 한 명. 양전자 분광학 연구(1933~1940)와 코조다예프와 개발한 자기분광계는 소련 핵전자공학의 기초가 되었다. 원자폭탄 계획에서 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로 중수로 개발을 맡았다. 1945년 제3실험실(후일 ITEP)을 설립해 23년간 소장으로 재임하며, 소련 최초의 중수 연구용 원자로(1949)와 산업용 중수로(1951)를 직접 지휘했다. ITEP의 7 GeV 싱크로트론(1961)은 세계 최대의 70 GeV 세르푸호프 가속기(1967) 원형이 되었다. 평생 무당파였으며, 반세계주의 캠페인에서 연구원을 보호하고 '300인의 편지'에 서명했으며, 1966년 스탈린 복권 반대 서한에 카피차·사하로프와 함께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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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41레닌그라드 물리기술연구소(LFTI) 연구원
  • 1933–1941LFTI 양전자연구실장
  • 1945특별위원회 과학기술위원회 과학서기
  • 1945–1968제3실험실 / ITEP 소장
  • 1947–1951모스크바국립대 물리기술학부 물질구조학과장

아르툠 이바노비치 미코얀

Артём Иванович Микоян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아르메니아 1905–1970 ○ 뇌졸중 · 자연사

미그(MiG)의 아버지: '한순간'에 하늘을 지배한 전투기 설계자

스탈린이 물었다: "어떤 바보가 우리에게 비밀을 팔겠는가?" 그 바보는 영국 노동당 정부였다. 미코얀은 1946년 제트 엔진을 사러 런던으로 날아갔고, 롤스로이스 닌의 역설계가 곧 MiG-15의 심장이 되었다.

아르메니아 산골 마을 출신 선반공에서 소련 최대 전투기 설계국의 창립자로 거듭난 인물. 1939년 미하일 구레비치와 OKB-155(MiG)를 창설, MiG-15로 한국전쟁의 제공권을 장악하고 MiG-21이라는 사상 최다 생산 초음속 전투기를 내놓았다. 정치국원 아나스타스 미코얀의 동생이지만, 두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과 여섯 차례 스탈린상, 레닌상을 받으며 스스로 기술관료의 정점에 올랐다. 그의 설계국 항공기들은 55개 세계 기록을 수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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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28로스토프·모스크바 «디나모» 공장 선반공
  • 1931–37주콥스키 공군사관학교 졸업, 경비행기 «옥탸브료노크» 설계
  • 1939–41OKB-155(MiG) 창설, MiG-1·MiG-3 전투기 개발
  • 1946–53영국서 롤스로이스 닌 도입 → MiG-15; 한국전쟁 제트공중전 주도
  • 1953–64MiG-17·MiG-19·MiG-21 — 초음속 전투기 시대로 이행
  • 1956–68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스탈린상 6회, 레닌상, 소련과학원 정회원
  • 1964–70MiG-23·MiG-25·MiG-27 — 가변익·고속요격기 세대 설계

안드라니크 멜코노비치 페트로샨츠

Андраник Мелконович Петросьянц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아르메니아 1906–2005 ○ 자연사

핵 프로그램의 민간 얼굴, 24년간 원자력 국가위원회 이끈 창립 세대

1986년 체르노빌 기자회견에서 '과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라고 말했다.

안드라니크 페트로샨츠는 소련 원자력 산업의 창립 세대를 대표하는 과학자·행정가로, 원자폭탄 개발을 관리한 제1총국에서 시작해 1962년부터 1986년까지 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 핵 프로그램의 민간 얼굴이자 평화적 이용의 국제적 대변인이었다. 1986년 체르노빌 참사 직후 기자회견에서 '과학은 희생을 요구합니다'라고 발언한 인물로도 기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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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1939우랄중공업기계(UZTM)에서 작업반장·기술부장·수석기사 대리 역임
  • 1939–1941중공업기계제조 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41–1943전차공업 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 1943–1945국방위원회(GKO) 전차산업 담당 부위원
  • 1947–1953소련 각료회의 제1총국 부국장 — 원자력 프로젝트
  • 1955–1962중형기계공업부 차관
  • 1962–1986국가원자력이용위원회 의장

키릴 이바노비치 셸킨

Кирилл Иванович Щёлкин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아르메니아계 1911–1968 ○ 자연사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에 기폭장치를 손수 꽂은 핵물리학자, 제2핵무기연구소의 초대 과학책임자

1949년 8월 29일, 셸킨은 조립동에서 RDS-1을 수령하는 서류에 서명하고,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한 뒤 탑의 출입문을 봉인했다. 그가 '기폭' 버튼을 누른 마지막 사람이었다.

키릴 셸킨은 연소·폭발 물리학자로서 스핀 폭굉 이론을 정립했고, 소련 원자폭탄 계획에서 결정적 실무를 맡은 인물이다.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에서 그가 직접 플루토늄 구체에 기폭장치를 삽입하고 탑의 출입문을 봉인한 뒤 기폭 버튼을 눌렀다. 이후 1955년 우랄 지역에 두 번째 핵무기 설계국인 첼랴빈스크-70(현 브니이테에프)의 초대 과학책임자 겸 수석설계자로 부임하여 소련 최초로 실전배치된 열핵무기를 개발했다. 쿠르차토프, 하리톤과 함께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으나 1959년 연속된 심장발작으로 1960년 은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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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41소련 과학아카데미 화학물리연구소 연구원(레닌그라드)
  • 1941–1942붉은 군대 자원입대, 모스크바 방어전 참전 (제7근위소총사단)
  • 1944–1947화학물리연구소 실험실장 (모스크바)
  • 1947–1952KB-11(아르자마스-16) 부수석설계자 겸 연구부문장
  • 1952–1955KB-11 수석설계자 제1대리 겸 과학지도자 제1대리
  • 1955–1960NII-1011(첼랴빈스크-70) 초대 과학지도자 겸 수석설계자
  • 1960–1968모스크바 물리기술연구소(MIPT) 연소학과장·교수

레오니트 아르카디예비치 코스탄도프

Леонид Аркадьевич Костанд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아르메니아계 1915–1984 ○ 심장마비

브레즈네프 시대 화학화 계획을 지휘한 최장수 화학공업 장관

1984년 라이프치히 박람회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동독 측과 화학 플랜트 협상을 진행했다. 그의 유골은 크렘린 벽 묘지에 안치되었는데, 이는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바로 앞, 대략 마지막에서 두 번째로 그곳에 묻힌 인물이 되었다.

소련 화학공업의 최장수 책임자로서, 15년간 장관직을 수행하며 비료·고분자·석유화학을 축으로 한 전면적 화학화 계획을 지휘했다. 치르치크 전기화학 콤비나트의 현장 엔지니어로 출발해 질소비료·중수소 생산 기술로 스탈린상과 레닌상을 받았고,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서 화학·석유·가스 산업 전반을 총괄했다. 아르메니아계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태어나 전연방 산업 관료로 성장했으며, 아르망드 해머와의 협력을 통해 서방 기술 도입 창구 역할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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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치르치크 전기화학 콤비나트 기사·직장장·주임기사·공장장
  • 1953소련 화학공업부 질소공업 총국장
  • 1958국가화학위원회 부위원장 → 1961년 제1부위원장
  • 1963국가화학·석유기계제조위원회 의장 — 소련 장관
  • 1965–1980소련 화학공업부 장관
  • 1971CPSU 중앙위원회 위원 (1966년부터 후보위원)
  • 1980–1984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게오르기 호스로예비치 샤흐나자로프

Георгий Хосроевич Шахназаров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소련 아르메니아 1924–2001 ○ 자연사

소련 정치학의 창시자, 페레스트로이카 정치개혁의 두뇌

고르바초프도, 나도, 우리 모두 이중사고자였다. 머릿속에서 진실과 선전을 끊임없이 저울질해야 했다. 반체제냐 굴종이냐, 그게 선택지였다」

바쿠 출신 아르메니아계 정치학자·법학박사. 소련 정치학회를 창립해 17년간 이끌며 사회주의 민주주의 이론을 개척했고, 소비에트 사회 내 이익집단의 다원성을 인정한 초기 이론가 중 한 명이었다. 고르바초프 보좌관으로서 당 독점 폐지·경선 도입·대통령제 전환의 헌법개혁을 설계했으며, 퇴임 후 회고록 『자유의 대가』를 집필하고 SF 작가 '게오르기 샤흐'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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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포병대 화기소대장·포대정찰반장, 쾨니히스베르크·세바스토폴·민스크 해방전 참전
  • 1949–1952아제르바이잔 국립대 법학부 졸업, 소련 과학아카데미 법학연구소 대학원
  • 1952–1960정치출판사(Politizdat) 편집자
  • 1960–1964『정치자습』·『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근무
  • 1964–1988중앙위 사회주의국가부 자문관 → 부부장 → 제1부부장 (동독·폴란드·체코·쿠바 담당)
  • 1969법학박사: 논문 「사회주의 민주주의: 문제와 전망」
  • 1973–1990소련 정치학회 회장, 국제정치학회(IPSA) 부회장
  • 1987소련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연방최고회의 대의원
  • 1988–1991고르바초프 보좌관 → 소련 대통령 고문: 정치개혁·헌법개정 설계
  • 1990–1991인민대의원, 최고회의 헌법입법소위원회 위원장
  • 1992–2001고르바초프 재단 글로벌문제센터 소장

카렌 네르세소비치 브루텐츠

Карен Нерсесович Брутенц
이념 · 선전 소련 아르메니아 1924–2017 ○ 자연사

브레즈네프 시대 제3세계 정책을 설계한 국제부 이론가

브루텐츠와 국제부 전문가들은 1979년 아프가니스탄 파병이 '어리석은 짓'이라고 판단했다. 그 의견을 전달할 부서장 포노마료프는 중대한 12월 회의에서 아예 배제되었다.

아르메니아계 소비에트 정치가이자 이론가. 바쿠에서 정신과 의사로 출발해 역사학으로 전환, 1958년 '신식민주의 이데올로기 비판'으로 학위를 받았다. 1961년부터 중앙위 국제부에서 활동하며 '민족민주주의' 개념을 정립하는 특별작업반을 이끌었고, 제1부부장으로 승진해 브레즈네프-고르바초프 시기 소련의 제3세계 정책을 실무적으로 설계했다. 아프가니스탄 파병 결정 당시 내부에서 반대 의견을 냈으며,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외교정책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회고록 『스타라야 광장에서의 30년』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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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6–1948바쿠 정신병원 의사
  • 1950–1954바쿠 시당 위원회 강사
  • 1954–1958사회과학아카데미 대학원생, 1958년 학위 취득
  • 1961–1969『평화와 사회주의의 제문제』(프라하) 민족해방운동부장
  • 1961–1976중앙위 국제부 책임직, 제3세계 정책 기획
  • 1976–1986중앙위 국제부 제1부부장
  • 1986–1990중앙위 후보위원
  • 1997–2017러시아 외교정책협회 부회장

스테판 아라마이소비치 시타랸

Степан Арамаисович Ситарян
중앙계획 기관 소련 아르메니아 1930–2009 ○ 자연사

협동조합법을 폴리트뷰로에서 밀어붙인 소련 최고위 아르메니아 경제학자

1988년 폴리트뷰로에서 보수파가 협동조합법에 격렬히 반대하자, 시타랸은 "이것은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구하는 법"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코시긴 개혁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소련 경제 개혁의 거의 모든 주요 장면에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참여한 교량형 인물이다. 1960년대 중반 코시긴 개혁 준비 위원회에서 상품-화폐 관계 도입을 설계했고, 1986~1989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경제 개혁의 핵심 규범들을 입안했다. 그가 주도한 1988년 협동조합법은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사적 기업 활동에 합법적 지위를 부여한 법률로, 보수파가 장악한 폴리트뷰로에서 직접 변론하여 관철시켰다.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대외경제 개방을 추진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를 창설하여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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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소련 재무부 산하 재무연구소(NIFI) 선임경제학자, 선임연구원
  • 1966경제학 박사, 이후 교수 직함 획득 (1970)
  • 1970–1974소련 재무부 재무연구소(NIFI) 소장
  • 1974–1983소련 재무차관
  • 1983–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부의장
  • 1986–1989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제1부의장, 경제체제 개선 부처간위원회 제1부의장
  • 1989–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2–2009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후에 센터) 소장

겐리흐 안드레예비치 포고샨

Հենրիկ Անդրեյի Պողոսյան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아르메니아인 1931–2000 ○ 1989년 해임 · 자연사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르메니아 쪽으로 기울게 한 최후의 당 제1서기

1988년 7월 소련 최고회의 연단에서 "현재 상황에서 최선의 해결책은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하는 것이다. 나는 대안을 보지 못한다."

1931년 스테파나케르트에서 태어난 아르메니아인 당료로, 1988년 2월 24일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에 임명되어 불과 4일 전 지역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 통합 결의를 통과시킨 직후의 폭발적 상황을 물려받았다. 임기 중 3월 당 플레넘을 주재해 모스크바에 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 이관을 공식 요청했고, 7월에는 소련 최고회의 연단에서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에서 분리하는 것 외에 대안이 없다고 선언했다. 모스크바는 1989년 1월 그를 해임하고 아르카디 볼스키의 특별관리위원회로 대체했으며, 해임 후 모스크바에서 은퇴 생활을 하다 2000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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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7–1988.02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집행위원회 부의장·농공위원장
  • 1988.02–1989.01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89소련 인민대의원 (스테파나케르트 선거구)
  • 1989–2000모스크바에서 은퇴 생활

보리스 사르키소비치 케보르코프

Բորիս Սարգսի Կևորկով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아르메니아인 1932–1998 ○ 자연사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바쿠의 통제를 집행한 아르메니아계 당료

자치주는 아르메니아 공화국과 가깝지만, 높은 산으로 분리되어 있다. (1977년 국제 저널 인터뷰에서)

아제르바이잔 샤마흐 태생의 아르메니아인 당료로, 1973년 헤이다르 알리예프에 의해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 제1서기로 임명되어 1988년까지 재임했다. 카라바흐 외부 출신으로 알리예프에게 전적으로 충성하며, 지역 아르메니아인들의 민족적 요구를 억압하고 바쿠의 통제력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1977년 국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카라바흐가 '높은 산으로 아르메니아와 분리되어 있다'고 주장해 동족의 분노를 샀고, 1988년 2월 소비에트가 아르메니아 통합 결의안을 통과시키자 해임되었다. 1992년 바쿠에서 체포·투옥되었다가 1993년 알리예프의 사면으로 석방된 뒤 모스크바로 이주해 중학교 역사 교사로 일하다 199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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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바쿠 시 콤소몰 강사·선전부 차장
  • 1954–1961바쿠 제르진스키·나리마노프 구 콤소몰 제1서기
  • 1961–1970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조직·당기관부 책임조직원·감찰관
  • 1970–1973바쿠 키로프 구 당위원회 제1서기
  • 1973–1988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당위원회 제1서기
  • 1974–1989소련 최고회의 민족회의 대의원 (9~11기)
  • 1988당에서 제명
  • 1993–1998모스크바 중학교 역사 교사

카렌 세로보비치 데미르찬

Карен Серобович Демирчян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아르메니아 1932–1999 ✕ 의회 총격으로 암살

아르메니아를 14년간 이끌며 현대화하고, 카라바흐에 동조해 실각한 후 복귀했으나 의회 총격으로 암살당하다

1975년 4월 23일, 데미르찬은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처음으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의 조직자들을 공식 규탄하며 공화국의 이름으로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예레반 전기기술공장에서 기술자로 출발해 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을 거쳐 1974년 아르메니아 공산당 제1서기로 취임하여 14년간 공화국을 이끌었다. 재임 중 메차모르 원자력발전소와 예레반 지하철을 비롯한 현대적 기반시설을 건설했고, 1975년 소비에트 아르메니아 지도부로서는 최초로 아르메니아인 집단학살을 공식 규탄했다. 1978년 공화국 헌법에 아르메니아어를 국어로 명기하는 성과를 이끌어냈다. 1988년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에서 민중 시위에 동조한 이유로 모스크바에 의해 '건강상 사유'로 해임되었다. 소련 붕괴 후 1998년 대선에 출마해 결선에서 40%를 득표하고 1999년 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의회 총격 사건으로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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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66예레반 전기기술공장: 기술자·당비서·주임기사·공장장
  • 1959–1961CPSU 중앙위 고등당학교 수료
  • 1966–1972예레반 시당위 서기 → 제1서기
  • 1972–1974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74–1988아르메니아 공산당 중앙위 제1서기 (1976–1988 아르메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의장 겸임)
  • 1976–1989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1–1999아름엘렉트로마시나(하이엘렉트로메케나) 전기기기 공장 총지배인
  • 1998–1999아르메니아 인민당 창당·의장
  • 1999아르메니아 국민의회 의장 (6월–10월)

아르툠 미하일로비치 타라소프

Артём Михайлович Тарасов
경제 운영 소련 아르메니아 1950–2017 ○ 심장질환으로 사망

당비 9만 루블로 협동조합법을 두 번 바꾸게 한 소련 최초의 합법 백만장자

당조직자가 돈다발을 두 팔로 끌어안고 떨리는 손으로 당원증에 적었다: '1989년 1월 급여, 300만 루블.' 평균 월급이 200루블이던 시절이었다.

소련 최초의 합법적 백만장자로, 협동조합 '테흐니카'의 창업자이다. 1989년 1월 자신에게 300만 루블의 월급을 지급하고 부하의 당비 9만 루블 납부가 「브즐랴트」에 방영되면서 전국적 스캔들을 일으켰고, 이는 협동조합법이 두 차례 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인민대표와 국가두마 의원을 지냈으며, 러시아 초기 자본주의의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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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2모스크바 광산대학 졸업
  • 1984–1986모스카프스트로이프로옉트 수석 엔지니어
  • 1987협동조합 '테흐니카' 설립
  • 1989소련 최초의 합법적 백만장자; 소련 통합협동조합연합 부회장
  • 1990–1991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인민대표
  • 1994–1996러시아 국가두마 의원 (제1소집)
  • 2003–2017혁신연구소(Институт Инноваций) 이사회 의장

다론 아제모을루

Daron Acemoğlu
연구자 미국 아르메니아계 1967–

코시긴 개혁의 구조적 실패를 제도로 설명한 노벨상 경제학자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서: '소비에트 러시아는 선진 기술을 빠르게 따라잡으며 급속한 성장을 이루었지만, 창조적 파괴가 부재했기 때문에 1970년대에 이르러 힘이 빠지고 있었다.'

이스탄불의 아르메니아계 가정에서 태어나 MIT 경제학 교수가 된 다론 아제모을루는, 국가 간 번영 격차의 제도적 기원을 규명한 공로로 2024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제도경제학의 대표적 학자다. 로빈슨과 함께 쓴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2012)에서 소련 계획경제 아래 가격은 실물 가치와 유리되어 혁신을 평가할 수 없고, 상여금이 총임금기금에 연동되어 기업이 자동화를 기피하게 되므로 코시긴 개혁은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분석했다. 그의 연구는 포용적 제도 없이 지속적 경제성장은 불가능하다는 통찰로 발전경제학과 정치경제학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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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9요크대학교 경제학 학사
  • 1992LSE 경제학 박사
  • 1993–MIT 경제학 교수 (2000년 정교수)
  • 2010–MIT 킬리언 석좌교수
  • 2019–MIT 인스티튜트 프로페서
  • 2012『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출간
  • 2024노벨 경제학상 수상

로널드 그리고르 수니

Ronald Grigor Suny
연구자 미국 아르메니아계 1940–

소련이 민족을 파괴했다는 냉전 통념을 뒤집고, 소비에트 정책이 오히려 민족을 만들었다고 주장한 역사학자

초등학교 6학년 때 소련이 파시즘을 물리치고 전쟁 이후 샌프란시스코 크기의 도시들을 건설했다는 발표를 했더니 선생님은 얼굴이 하얘졌다. 그날부터 졸업할 때까지 나는 '수니 동무'로 불렸다.

아르메니아계 미국인 역사학자로, 소련 민족 문제 연구의 패러다임을 전환한 인물이다. 1993년 저서 『과거의 복수』에서 소비에트 체제가 민족들을 탄압하고 러시아화했다는 기존의 냉전적 통념을 뒤집고, 소련의 민족 정책이 오히려 영토·언어·관료제를 통해 민족 정체성을 제도화하고 구축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연방을 파괴할 민족들을 만들어냈다고 주장했다. 이 '과거의 복수' 테제는 소련 해체 이후 소비에트 민족 연구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되었다. 코카서스 3국 각각에 대한 연구로도 저명하며, 2020년 출간된 스탈린 전기로 도이처 기념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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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8–1981오벌린 칼리지 역사학 조교수·부교수·정교수
  • 1981–1995미시간 대학교 알렉스 마누키언 근대 아르메니아사 석좌교수
  • 1995–2005시카고 대학교 정치학·역사학 교수
  • 2005미국 슬라브학 진흥협회(AAASS) 회장
  • 2005–2015미시간 대학교 찰스 틸리 사회·정치사 석좌교수
  • 2015–2022미시간 대학교 윌리엄 H. 수얼 주니어 석좌교수
  • 1993『과거의 복수』 출간: 소련 민족 연구의 패러다임 전환
  • 2021『스탈린: 혁명으로 가는 길』로 도이처 기념상 수상

바간 그리고리예비치 그리고랸

Ваган Григорьевич Григорьян
이념 · 선전 소련 아르메니아 1901/1902–1983 ○ 1983년 자연사

스탈린 말기 국제공산운동을 관리한 아르메니아 출신 당 간부

1953년 8월, 중앙위원회 간부 데도프는 흐루쇼프에게 보낸 진정서에서 그리고랸의 동료들이 그와 베리야의 '가까운 관계'를 지적했다고 보고했다.

아제르바이잔의 아르메니아인 마을에서 태어난 그리고랸은 군대 신문 편집자에서 시작해 모스크바 당 기관의 출판·선전 책임자로 올라섰다. 1949년 미하일 수슬로프의 후임으로 대외정책위원회(국제부) 위원장에 임명되어 1953년까지 소련 공산당과 전 세계 공산당 간 관계를 총괄했다. 그의 재임기는 코민포름 창설 이후 유고슬라비아와의 결별이 심화되고 중국 혁명이 승리했으며 한국전쟁이 발발한 시기와 겹친다. 1952년 제19차 당대회에서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선출되었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 이후 측근으로 지목되어 중앙위원회에서 제외되고 외교부로 전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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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1924아제르바이잔 당 중앙위원회 출판부장, 군대 신문 편집
  • 1924–1927모스크바 하모브니키 구당위 출판부장, 모스크바 시당위 출판부장
  • 1927–1933트빌리시에서 「라보차야 프라우다」, 「프롤레타르」, 「나 루베제 보스토카」 편집
  • 1933–1946트빌리시 「자랴 보스토카」 편집장
  • 1946–1947중앙위원회 선전선동국 중앙신문부장
  • 1947–1949코민포름 기관지 「항구적 평화와 인민민주주의를 위하여」 부편집장
  • 1949–1953중앙위원회 대외정책위원회 위원장 (국제부장)
  • 1952–1954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 1953소련 외교부 콜레기야 위원 및 국장, 아자리야自治공화국 중앙위원회 전권대표

아벨 게제비치 아간베갼

Абел Гезевич Аганбегян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 고문이자 페레스트로이카의 시장개혁 설계사

페레스트로이카는 소비에트 사회 전체의 혁명적 쇄신이다. 성장의 가속은 민주화와 글라스노스트에서 분리될 수 없다. (1988)

트빌리시 태생의 아르메니아계 수리경제학자. 노보시비르스크 IEiOPP 소장(1966–1984)으로 시베리아 개발과 BAM의 경제 토대를 설계하고 『EKO』를 창간했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수석 경제 고문이 되어 기업 자율성 확대, 시장 요소 도입, 대외경제 개방이라는 개혁 청사진을 제시했다. 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서기(1986–1989)로 활동하며 소비에트 계획경제 안에서 최대한의 변화를 모색했고, 소련 해체 후 국민경제아카데미 총장(1989–2002)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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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61노동·임금 국가위원회에서 경제학자로 근무
  • 1961–1966노보시비르스크 IEiOPP 섹터장, 33세에 소장
  • 1966–1984IEiOPP 소장, BAM 과학위원회 의장, 『EKO』 창간·편집장
  • 1974과학아카데미 정회원 (1964년 통신회원)
  • 1985–1989고르바초프 경제 고문, 생산력연구위원회 의장
  • 1986–1989과학아카데미 경제분과 아카데미크-서기, 상임위원
  • 1989–2002소련·러시아 정부 산하 국민경제아카데미 총장
  • 2002–현재국민경제아카데미 경제이론·정책 학과장, 저술 활동 지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