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아르메니아

시민권 0 · 민족·국가 30 · 사건 3

국경은 현재 세계를 기준으로 표시합니다.

시민권 인물 0전체보기

현재 이 분류에 등록된 인물이 없습니다.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30전체보기

미하일 타리엘로비치 로리스-멜리코프

Михаил Тариелович Лорис-Меликов
제정·백색진영 러시아 제국 아르메니아 1824–1888 ○ 개혁안 폐기 후 은퇴

"마음의 독재"라 불린 아르메니아 출신의 개혁적 내무장관

1881년 3월 13일 아침, 알렉산드르 2세는 로리스-멜리코프의 개혁안에 서명하며 말했다: "나는 승인했다. 그러나 이것이 헌법을 향한 첫걸음임을 스스로 숨기지 않는다." 몇 시간 후 차르는 암살당했다.

아르메니아 귀족 출신으로 캅카스 전쟁과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병 장군이었으나, 그의 역사적 무게는 군사적 공적보다 정치 개혁에 있다. 1880년 겨울궁전 폭파 사건 이후 전제적 권한을 위임받아 '마음의 독재'로 불린 온건 노선을 펼쳤으며, 혁명 탄압과 동시에 검열 완화·지방 자치·선거 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추진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1881년 3월 13일 아침, 차르는 로리스-멜리코프의 선거 자문위원회 구상을 승인했으나,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 후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의 조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전제정치를 선언했다. 러시아 최초의 헌정 실험을 설계했으나 반동에 좌절된 그는 개혁과 전제의 분기점에서 상실된 개혁의 순간을 상징한다.

상세 이력 보기
  • 1847캅카스로 전속, 체첸·다게스탄 전투 참전
  • 1853–1856크림 전쟁 참전, 바얀두르·바슈카드클라르 전투
  • 1855카르스 지역 사령관
  • 1863–1875테레크주 총독 겸 테레크 카자크군 아타만
  • 1877–1878러시아-튀르크 전쟁 캅카스 전선 사령관, 아르다한·카르스 점령
  • 1879하리코프 임시 총독
  • 1880최고행정위원회 위원장
  • 1880–1881내무장관

보그단 미르자자노비치 크누냔츠

Богдан Мирзаджанович Кнунянц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아르메니아 1878–1911 ○ 옥사

제2차 대회의 이스크라 다수파, 감옥에서 스러진 캅카스 볼셰비키 선구자

1905년 3월 모스크바 법정에서 차르 체제를 정면으로 고발하는 연설을 했다. 유형지에서 탈출한 후에도 바쿠 지하로 돌아갔고, 결국 바일로프 감옥에서 숨을 거두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출신의 아르메니아계 볼셰비키. 1897년 '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에 가입하고 1901년 바쿠로 유배된 후 캅카스 사회민주주의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1902년 스테판 샤우먄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을 공동 창립했고, 1903년 RSDLP 제2차 대회에서 이스크라 다수파로 서며 볼셰비키-멘셰비키 분열의 현장에 섰다.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종신 유형 후 탈출해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 참석했다. 바쿠 지하로 돌아와 활동하다 1910년 체포되어 바일로프 감옥에서 32세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6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입학
  • 1897'노동계급 해방 투쟁 동맹' 가입
  • 1901바쿠로 유배, RSDLP 바쿠·캅카스 연합위원회 위원
  • 1902스테판 샤우먄 등과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공동 창립
  • 1903RSDLP 제2차 대회 바쿠 대의원 — 이스크라 다수파(볼셰비키)
  • 1904–1905모스크바에서 체포, 재판에서 반차르 연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위원
  • 1905.12체포되어 종신 유형 선고
  • 1907유형지 탈출, 슈투트가르트 제2인터내셔널 대회 및 헬싱포르스 RSDLP 제4차 협의회 참석
  • 1907–1910바쿠 지하 활동
  • 1910.09체포, 바일로프 감옥 수감

스테판 게오르기예비치 샤우먄

Степан Георгиевич Шаумя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아르메니아 1878–1918 ✕ 처형

마르크스주의로 무장한 캅카스의 레닌, 바쿠 코뮌의 지도자

바쿠 코뮌 붕괴 직전, 동료의 아내가 먼저 피하라 권하자 샤우먄은 답했다. "노동자들이 나에게 뭐라 하겠는가? 맨 먼저 도망치는 건 나에게 수치다."

아르메니아 마르크스주의의 선구자이자 캅카스 볼셰비키의 지도자. 티플리스 상인 집안 출신으로 리가 공대와 베를린 대학에서 수학했고, 1899년 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을 조직했다. 「공산당 선언」을 아르메니아어로 번역하고 문학비평을 개척했으며, 1912년 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로 선출되었다. 1918년 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바쿠 코뮌'을 이끌었고, 민족문제를 두고 레닌과 편지 논쟁을 벌인 대표적 이론가였다. 1918년 9월 26인의 바쿠 인민위원들과 함께 총살당해 소비에트 순교자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8티플리스 실과학교 졸업, 리가 공과대학 입학
  • 1899아르메니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 1900–1902RSDLP 입당, 리가 공대 퇴학, 아르메니아 사회민주주의자 연맹 창립
  • 1902–1905베를린 대학 철학부, 「공산당 선언」 아르메니아어 번역, 제네바에서 레닌과 첫 만남
  • 1906–1914RSDLP 4차·5차 대회 대의원, 바쿠 지하신문 편집, 카프카스 연합위원회 지도
  • 1912프라하 협의회에서 볼셰비키 중앙위원 후보 승인
  • 1917.03–1917.05바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초대 의장
  • 1917.11–1918.04바쿠 소비에트 집행위 의장, 레닌이 캅카스 특별 전권위원으로 임명
  • 1918.04–1918.07바쿠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외무위원 — 바쿠 코뮌 수립
  • 1918.09.2026인의 바쿠 인민위원과 함께 체포·총살

프로시 페르체비치 프로샨

Прош Перчевич Прошьян
좌익 반대파 소비에트 러시아 아르메니아 1883–1918 ○ 발진티푸스

소비에트 최초 연정의 좌파 에스에르 인민위원, 당의 '핵심 축'

'프로샨은 1918년 7월까지 소비에트 권력을 강화하는 데, 1918년 7월 이후 그것을 약화시키는 데 기여한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했다.' — 레닌, 〈프로샨 동지를 기리며〉, 1918년 12월

좌파 사회혁명당의 핵심 지도자이자 소비에트 최초 연립정부의 우편전신인민위원으로, 레닌·트로츠키·스탈린과 함께 인민위원회 임시집행위원회 위원(1918년 2월)을 지냈다. 인민위원 재임(1917.12–1918.3) 중 우편전신 공무원들의 사보타주를 종식시키고 통신 업무를 정상화했으며, 최고군사회의 정치위원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을 겸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체결에 항의해 사임한 후 1918년 7월 좌파 사회혁명당 봉기의 지도부로 활동했고, 지하 잠복 중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는 그를 '좌파 사회혁명당의 내적 건설자, 기본 동력, 핵심 축'이라 평가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3오데사 대학에서 에스에르당 입당, 학생 조직가로 활동
  • 1905오데사 교도소 정치범 탈옥 기도로 체포, 6년 카토르가 선고
  • 1910–1913유형지 탈출 후 체포되어 3년 추가 카토르가; 시베리아 유형 중 해외 탈출
  • 19172월 혁명 후 귀국; 헬싱포르스에서 좌파 에스에르 지도자, 《사회주의-혁명가》 편집장;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에서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위원 선출
  • 1917.12우편전신인민위원 취임
  • 1918.2–3인민위원회 임시집행위원회 위원; 최고군사회의 정치위원
  • 1918.3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항의해 인민위원직 사임
  • 1918.7좌파 사회혁명당 봉기 지도부 참여; 진압 후 지하 잠복, 궐석 3년형 선고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3전체보기

1922.12

소련의 결성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야·자캅카스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대등한 자격으로 연방조약을 맺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했다. 공화국들을 러시아 연방에 편입하려던 자치화안은 레닌의 개입으로 폐기되었고, 탈퇴권을 명시한 대등한 공화국들의 연방이라는 원칙이 채택되었다. 뒤이은 코레니자치야(토착화) 정책은 민족 언어와 민족 간부를 국가가 체계적으로 육성한, 당대 세계에 전례가 없는 민족정책이었다.

1988–1991

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

1988년 숨가이트 포그롬에서 1991년 빌뉴스 유혈사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은 페레스트로이카 아래에서 소련의 민족질서와 중앙권력이 함께 무너져 가는 과정이다. 네 사건의 성격은 같지 않다. 숨가이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를 계기로 터진 반아르메니아 포그롬이자 국가의 치안 실패였고, 1989년 트빌리시는 비무장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군사적 진압이었으며, 1990년 바쿠는 민족폭력과 중앙권력 붕괴가 겹친 자리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군사개입이었고, 1991년 빌뉴스는 독립을 선언한 연방공화국의 주권기관에 대한 강제력 행사였다. 그러나 하나의 공통된 위기를 보여 준다. 중앙정부는 민족 간 폭력으로부터 주민을 지키지 못하면서도, 공화국의 정치적 이탈에는 반복해서 군사력을 썼다.

1991

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

1991년 8월,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으려는 보수 강경파가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크류치코프·야조프·파블로프 등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옐친이 전차 위에 올라 저항하고 시민이 결집하면서 사흘 만에 무너졌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연방의 해체를 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