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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

시민권 8 · 민족·국가 10 · 사건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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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인물 8전체보기

디미터르 니콜로프 블라고예프

Димитр Николов Благоев
비소련 혁명가 불가리아 불가리아 1856–1924 ○ 자연사

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을 조직한 불가리아 사회주의의 창시자

1891년 8월, 정치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블라고예프는 발칸 산맥 부즐루자 봉우리에 20여 명의 사회주의자들을 비밀리에 모아 불가리아 최초의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페테르부르크 대학 유학 중이던 1883년 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 불법신문 『라보치』를 발행했으며, 체포·추방 후 불가리아로 돌아와 1891년 부즐루자 대회에서 불가리아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1903년 개량주의 '광역파'와 결별하고 혁명적 '협소파(테스냐키)'를 이끌었으며, 25년간 이론지 『노보 브레메』를 편집하고 『자본론』을 불가리아어로 번역했다. 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고 발칸 연방을 주장했으며, 10월 혁명 후 볼셰비키 편에 서서 1919년 당을 불가리아 공산당으로 재편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레닌의 노농동맹론을 끝내 수용하지 않은 독자적 혁명가로, 불가리아 맑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세운 사상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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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1885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 결성, 『라보치』 발행
  • 1891부즐루자 대회에서 불가리아 사회민주당 창립
  • 1897–1923이론지 『노보 브레메』 편집장
  • 1903–1919협소파(테스냐키) 지도자
  • 1905『자본론』 제1권 불가리아어 번역
  • 1919–1923불가리아 공산당 초대 중앙위원회 의장

바실 페트로프 콜라로프

Васил Петров Коларов
코민테른 불가리아 불가리아 1877–1950 ○ 자연사

불가리아 공산주의의 공동 창건자, 코민테른에서 국가원수까지

1923년 9월 22일, 콜라로프는 디미트로프와 함께 반파시스트 무장봉기를 개시했다. 진압 후 잔여 대원을 이끌고 유고슬라비아로 탈출, 궐석 사형 선고와 함께 22년의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불가리아 공산당의 공동 창건자이자 코민테른 서기장(1922~24). 1923년 9월 봉기를 직접 지휘했으나 실패로 22년간 소련에 망명했고, 귀국 후 국가원수와 총리를 지내며 불가리아의 스탈린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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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불가리아 노동사회민주당 입당
  • 1904–1919플로브디프 테스냐키 조직 책임자
  • 1905–1923중앙위원회 위원
  • 1913–1923국민의회 의원
  • 1919–1923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22–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장
  • 19239월 반파시스트 봉기 공동 지도자
  • 1928–1939크레스틴테른(농민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 의장
  • 1931–1941국제농업연구소 소장 (모스크바)
  • 1946–1947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임시 국가원수
  • 1947–1949부총리 겸 외무장관
  • 1949–1950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총리

게오르기 미하일로프 디미트로프

Георги Михайлов Димитров
코민테른 불가리아 불가리아 1882–1949 ○ 자연사

라이프치히 재판의 피고에서 코민테른 서기장으로

나는 피고인 공산주의자로서, 내 정치적 명예와 혁명가로서의 명예, 그리고 내 공산주의 이상을 변호한다. 내 전 생애의 의미가 이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 있다.

인쇄공·노동운동가로 출발해 1923년 반정부 무장봉기를 이끌었고, 라이프치히 방화 재판에서 나치에 맞선 법정 변론으로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1935년 코민테른 서기장에 올라 반파시즘 인민전선 노선을 정식화했으며, 전후 불가리아 최초의 공산정부 수반이 되었다.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연방 구상을 추진했으나 스탈린-티토 결별로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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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43서기장

니콜라 디미트로프 페트코프

Никола Димитров Петков
비소련 혁명가 불가리아 불가리아인 1893–1947 ✕ 처형

공산당의 권력 독점에 맞서다 교수형에 처해진 농민동맹 지도자

미 국무부 특사 마크 에스리지가 페트코프를 「내가 아는 가장 용감한 사람」이라 불렀다.

불가리아 농민동맹(BZNS) 지도자로, 제1차 세계대전 뒤 프랑스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929년 귀국해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43년 조국전선을 공동 창설했으나 1945년 공산당의 권력 독점에 맞서 야당을 이끌었고, 1946년 대국민의회 선거에서 야당 연합 101석을 얻었다. 1947년 6월 의회에서 체포되어 8월 쿠데타 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평화조약 발효 여드레 뒤인 9월 23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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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귀국, 언론인으로 활동
  • 1938제24대 국회의원으로 선출(12월 선거 무효)
  • 1941농민동맹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 지도자
  • 1943조국전선 창설 참여
  • 1944조국전선 제1차 정부 무임소장관(1945년 8월까지)
  • 1945반공 연합야당 지도자
  • 1946제6대 대국민의회 의원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10전체보기

디미터르 니콜로프 블라고예프

Димитр Николов Благоев
비소련 혁명가 불가리아 불가리아 1856–1924 ○ 자연사

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을 조직한 불가리아 사회주의의 창시자

1891년 8월, 정치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블라고예프는 발칸 산맥 부즐루자 봉우리에 20여 명의 사회주의자들을 비밀리에 모아 불가리아 최초의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페테르부르크 대학 유학 중이던 1883년 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 불법신문 『라보치』를 발행했으며, 체포·추방 후 불가리아로 돌아와 1891년 부즐루자 대회에서 불가리아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1903년 개량주의 '광역파'와 결별하고 혁명적 '협소파(테스냐키)'를 이끌었으며, 25년간 이론지 『노보 브레메』를 편집하고 『자본론』을 불가리아어로 번역했다. 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고 발칸 연방을 주장했으며, 10월 혁명 후 볼셰비키 편에 서서 1919년 당을 불가리아 공산당으로 재편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레닌의 노농동맹론을 끝내 수용하지 않은 독자적 혁명가로, 불가리아 맑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세운 사상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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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3–1885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 결성, 『라보치』 발행
  • 1891부즐루자 대회에서 불가리아 사회민주당 창립
  • 1897–1923이론지 『노보 브레메』 편집장
  • 1903–1919협소파(테스냐키) 지도자
  • 1905『자본론』 제1권 불가리아어 번역
  • 1919–1923불가리아 공산당 초대 중앙위원회 의장

크리스티안 게오르기예비치 라콥스키

Христиан Георгиевич Раковский
좌익 반대파 소련 불가리아 1873–1941 ✕ 처형

발칸 혁명가에서 우크라이나 수반으로: 반대파 이론가가 된 외교관

「우리의 불행은 책임 있는 자리를 맡았고, 권력이 우리 머리를 돌게 했다는 데 있다」 — 1938년 모스크바 재판 최후 진술

오스만 제국령 불가리아에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한 범유럽적 혁명가로, 발칸 사회민주주의 연맹을 창설했다. 1919년부터 1923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정부 수반으로서 국가 건설을 이끌었으며, 이후 영국·프랑스 주재 소비에트 대사로 활약했다. 좌익 반대파의 핵심 이론가로서 스탈린의 민족 정책을 비판했고, 1927년 당에서 제명되어 유배 생활을 겪었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에서 20년형을 선고받고 1941년 총살되었으며, 1988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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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6제네바·베를린·몽펠리에에서 의학 수학, 유럽 사회주의 운동 참여
  • 1910루마니아 사회민주당 재건 및 발칸 사회민주주의 연맹 창설 주도, 제1서기
  • 1919–1923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인민위원회의 의장 겸 외무·내무인민위원
  • 1919–1927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 1919–1920년 조직국 위원
  • 1923–1927소비에트 연방 주영·주프랑스 전권대표
  • 1927–1935좌익 반대파 지도자로 당 제명 및 유배 (아스트라한·사라토프·바르나울)
  • 1935–1937복당 후 보건인민위원부 학술연구소 관리국장
  • 1937–1941체포·수감, 제3차 모스크바 재판 20년형, 1941년 9월 11일 총살

바실 페트로프 콜라로프

Васил Петров Коларов
코민테른 불가리아 불가리아 1877–1950 ○ 자연사

불가리아 공산주의의 공동 창건자, 코민테른에서 국가원수까지

1923년 9월 22일, 콜라로프는 디미트로프와 함께 반파시스트 무장봉기를 개시했다. 진압 후 잔여 대원을 이끌고 유고슬라비아로 탈출, 궐석 사형 선고와 함께 22년의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불가리아 공산당의 공동 창건자이자 코민테른 서기장(1922~24). 1923년 9월 봉기를 직접 지휘했으나 실패로 22년간 소련에 망명했고, 귀국 후 국가원수와 총리를 지내며 불가리아의 스탈린화를 주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7불가리아 노동사회민주당 입당
  • 1904–1919플로브디프 테스냐키 조직 책임자
  • 1905–1923중앙위원회 위원
  • 1913–1923국민의회 의원
  • 1919–1923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22–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장
  • 19239월 반파시스트 봉기 공동 지도자
  • 1928–1939크레스틴테른(농민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 의장
  • 1931–1941국제농업연구소 소장 (모스크바)
  • 1946–1947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임시 국가원수
  • 1947–1949부총리 겸 외무장관
  • 1949–1950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총리

게오르기 미하일로프 디미트로프

Георги Михайлов Димитров
코민테른 불가리아 불가리아 1882–1949 ○ 자연사

라이프치히 재판의 피고에서 코민테른 서기장으로

나는 피고인 공산주의자로서, 내 정치적 명예와 혁명가로서의 명예, 그리고 내 공산주의 이상을 변호한다. 내 전 생애의 의미가 이 한마디 한마디에 담겨 있다.

인쇄공·노동운동가로 출발해 1923년 반정부 무장봉기를 이끌었고, 라이프치히 방화 재판에서 나치에 맞선 법정 변론으로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1935년 코민테른 서기장에 올라 반파시즘 인민전선 노선을 정식화했으며, 전후 불가리아 최초의 공산정부 수반이 되었다. 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 연방 구상을 추진했으나 스탈린-티토 결별로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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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43서기장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6전체보기

1917.12–1918.11

브레스트 강화와 독일의 동방 점령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는 군대가 사라진 소비에트 러시아가 독일과 맺은 강요된 평화였다. 1917년 12월 시작된 협상에서 혁명전쟁, 「전쟁도 강화도 아니다」, 즉시 강화의 세 노선이 당을 갈랐고, 1918년 2월 독일의 공세 뒤 레닌은 사임을 내걸고 3월 3일의 조약 수용을 관철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발트·핀란드에 대한 권한과 인구의 3분의 1을 내주었고,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헤트만 정권을 세우고 핀란드 내전에 파병하며 발트에 자국 우산 아래의 공국들을 구상했다. 11월 독일의 패전으로 조약은 폐기되었지만, 정전협정 12조로 발트에 남은 독일군과 붉은 군대, 각국 민족정부, 백군이 마주한 공백은 이듬해 국경 지대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1944–1949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1944년 여름부터 붉은군대가 진주한 폴란드·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와 소련 점령지구 독일, 그리고 자력으로 해방을 이룬 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알바니아에서는 공산당이 참여하는 연립정부가 세워졌다. 각국은 토지개혁과 기간산업 국유화를 거쳤고, 1945~46년의 선거는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처럼 결과가 갈린 곳도, 폴란드와 루마니아처럼 공식 집계와 후대에 공개된 기록이 어긋나는 곳도 있었다. 1947년에 연립의 다른 정당들이 해체·분열·재판을 거쳐 밀려났고, 1946~48년에 각국 사회민주당이 공산당과 통합되었다. 같은 시기 「인민민주주의」는 소비에트와 다른 「새로운 길」로 설명되다가 1948년 12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형태」로 재정의되었다. 1949년까지 각국은 헌법과 단일 명부 선거로 새 체제를 확정했고, 당 안에서는 재판과 숙청이 시작되었다.

1944–1949

불가리아: 조국전선에서 코스토프 재판까지

1944년 9월 5일 소련이 불가리아에 선전포고하고 8일 국경을 넘자, 9일 새벽 공산당·농민동맹·즈베노·사회민주당의 조국전선이 소피아에서 정권을 잡았다. 인민재판소는 1945년 2월 1일 섭정과 장관들을 처형했고, 불가리아군은 붉은군대와 함께 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에서 싸웠다. 농민동맹은 1945년 페트코프의 야당과 조국전선 잔류파로 갈라졌고, 1946년 국민투표로 왕정이 폐지된 뒤 10월 대국민의회 선거에서 공산당이 과반, 야당이 28%를 얻었다. 1947년 페트코프가 국회에서 체포되어 9월 처형되었고, 12월 디미트로프 헌법과 국유화법이 통과되었다. 1948년 사회민주당이 공산당에 합쳐졌으며, 디미트로프는 12월 제5차 당대회에서 인민민주주의를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형태로 규정했다. 1949년 디미트로프가 죽고 부총리 코스토프가 재판을 받아 처형되었다.

1955

바르샤바 조약 기구 창설

바르샤바 조약 기구(공식 명칭: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는 1955년 5월 14일 소련과 동유럽 7개 사회주의 국가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서명한 집단방위동맹이다. 직접적 방아쇠는 서독의 재무장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확정한 1954년 10월 파리 협정이었다. 소련은 1954년 11월 모스크바 회의에서 동맹의 실무 준비에 착수했고, 서독이 나토에 정식 가입한 지 나흘 뒤인 5월 14일 조약을 서명했다. 조약 전문은 서독의 재무장이 평화적 국가들의 안전보장에 위협이 된다고 명시했으며, 제4조는 유럽에서 회원국에 대한 무력공격 시 모든 수단을 동원한 즉각 지원을 규정했다. 이반 코네프 원수가 통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정치협의위원회가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조약은 실질보다는 외관이 앞선 동맹이었다. 소련은 이미 양자조약과 주둔군을 통해 동유럽을 장악하고 있었고,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 새 기구를 나토와 맞교환할 수 있는 유럽 집단안보체제 협상의 지렛대로 구상했다.

1968

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두브체크가 이끈 개혁운동이다. 검열 완화, 표현과 이동의 자유 확대, 경제 개혁을 내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소련은 이를 진영 이탈로 규정하고, 1968년 8월 바르샤바조약 5개국 군대를 동원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다.

1989

1989년 동유럽 혁명

1989년, 동유럽 전역에서 공산당 일당 체제가 잇따라 무너졌다. 헝가리는 국경을 열었고, 폴란드는 원탁회의로 자유선거에 이르렀으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루마니아에서는 차우셰스쿠가 처형됐다. 결정적 차이는 고르바초프가 1956년·1968년과 달리 무력 개입을 포기한 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