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이탈리아

시민권 15 · 민족·국가 15 · 사건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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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인물 15전체보기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Vittorio Emanuele III
외국 정치가 이탈리아 이탈리아인 1869–1947 → 사망

파시즘과 왕정의 책임 사이에 선 군주

1943년 7월 25일, 그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체포하게 한 뒤 바돌리오를 새 정부 수반으로 임명했다.

이탈리아 국왕으로서 자유주의 헌정의 쇠퇴, 파시스트 국가의 성립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그는 무솔리니의 권력 장악과 식민 전쟁, 인종법, 참전을 승인해 왕정의 책임을 키웠지만, 1943년 7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임명해 체제 전환의 헌정 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9월 휴전 뒤 로마를 떠난 그의 선택은 군과 국가를 혼란에 빠뜨렸고, 전후 왕정의 정당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1946년 퇴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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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이탈리아 육군 장교로 복무 시작
  • 1900이탈리아 국왕 즉위
  • 1915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국왕
  • 1922무솔리니에게 정부 구성을 위임
  • 1936에티오피아 황제 선포
  • 1940추축국 편으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 1943무솔리니 해임, 바돌리오 정부 임명
  • 1946퇴위하고 이집트로 망명

피에트로 바돌리오

Pietro Badoglio
반혁명 세력 이탈리아 이탈리아계 1871–1956 ○ 자연사

파시즘에 봉사하다 전환을 이끈 원수

1943년 9월 8일 휴전이 발표됐을 때, 바돌리오 정부는 로마를 떠나 연합군의 보호를 찾아 남쪽으로 향했다.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이탈리아 왕국의 군인이자 식민지 전쟁의 지휘관으로,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에서 제국의 폭력을 집행했다. 그는 무솔리니 체제의 핵심 군사 관료였지만, 1940년 그리스 전역의 실패 뒤 사임하고 왕실의 정권 교체에 참여했다. 1943년 무솔리니 축출 뒤 총리가 되어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체결했으나, 발표와 군 지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독일군의 무장해제와 이탈리아 국가의 붕괴를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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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이탈리아 왕립군 포병 장교로 임관
  • 1916제1차 세계대전에서 몬테 사보티노 점령을 지휘
  • 1925–1940이탈리아군 참모총장
  • 1929–1933리비아 총독, 저항 진압과 강제수용 정책을 지휘
  • 1935–1936에티오피아 침공군 사령관, 아디스아바바 점령
  • 1943–1944무솔리니 축출 뒤 이탈리아 왕국 총리, 연합국과 휴전 체결
  • 1944총리직 사임 후 정계에서 물러남

이반오에 보노미

Ivanoe Bonomi
외국 정치가 이탈리아 이탈리아인 1873–1951 ○ 자연사

파시즘과 왕정 사이에서 타협을 조직한 개혁 정치가

1943년 6월 그는 국왕에게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바돌리오를 임명하며 독일과의 동맹을 끊으라고 비밀리에 요구했다.

이반오에 보노미는 사회주의 개혁파에서 출발해 이탈리아 자유주의 의회정치의 핵심 인물로 이동한 정치가였다. 파시즘의 부상기에 충분히 단호하게 저항하지 못했고 무솔리니 정부를 지지한 전력이 있었지만, 1942년부터 반파시스트 세력을 다시 연결하며 정권 교체를 모색했다. 그는 1943년 국왕에게 무솔리니 해임과 피에트로 바돌리오 기용을 비밀리에 요구했고, 9월에는 6개 정당으로 구성된 민족해방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이후 왕정과 저항운동, 연합국 사이의 타협을 이끌며 전후 이탈리아의 제도적 이행을 관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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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이탈리아 사회주의 노동자당에 가입
  • 1909사회주의자로 하원의원에 당선
  • 1912이탈리아 개혁사회당 창당에 참여
  • 1916–1919보셀리·올란도 내각 공공사업장관
  • 1921–1922이탈리아 왕국 총리
  • 1942–1943지하 반파시스트 신문과 야권 연락망 조직
  • 1943–1944민족해방위원회 의장
  • 1944–1945해방기 이탈리아 정부 총리
  • 1948–1951공화국 초대 상원의장

비토리오 암브로시오

Vittorio Ambrosio
외국 정치가 이탈리아 이탈리아인 1879–1958 ○ 자연사

왕권 아래에서 추축동맹의 출구를 설계한 장군

“추축국은 포위된 고리 안에 있다. 빠져나와야 한다.”

비토리오 암브로시오는 이탈리아 왕국의 기병 장교 출신 장군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이탈리아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1943년 이탈리아군 최고사령관이 된 그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의 패배 뒤 독일과의 동맹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왕과 군부를 중심으로 무솔리니의 실각과 연합국과의 휴전을 추진했다. 그의 선택은 파시즘을 넘어선 민주적 단절이라기보다 왕정과 군 지휘부가 국가의 전쟁 이탈을 관리하려 한 것이었으며, 9월 휴전은 독일군의 이탈리아 점령과 이탈리아군의 혼란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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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기병 장교로 임관
  • 1911–1913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참전
  • 1915–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카포레토 후퇴 엄호
  • 1941제2군 사령관, 유고슬라비아 침공 지휘
  • 1942육군 참모총장
  • 1943-02–1943-11군 최고참모총장, 무솔리니 실각과 연합국 휴전 추진
  • 1943-11육군 감찰총감으로 좌천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15전체보기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Vittorio Emanuele III
외국 정치가 이탈리아 이탈리아인 1869–1947 → 사망

파시즘과 왕정의 책임 사이에 선 군주

1943년 7월 25일, 그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체포하게 한 뒤 바돌리오를 새 정부 수반으로 임명했다.

이탈리아 국왕으로서 자유주의 헌정의 쇠퇴, 파시스트 국가의 성립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그는 무솔리니의 권력 장악과 식민 전쟁, 인종법, 참전을 승인해 왕정의 책임을 키웠지만, 1943년 7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임명해 체제 전환의 헌정 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9월 휴전 뒤 로마를 떠난 그의 선택은 군과 국가를 혼란에 빠뜨렸고, 전후 왕정의 정당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1946년 퇴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9이탈리아 육군 장교로 복무 시작
  • 1900이탈리아 국왕 즉위
  • 1915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국왕
  • 1922무솔리니에게 정부 구성을 위임
  • 1936에티오피아 황제 선포
  • 1940추축국 편으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 1943무솔리니 해임, 바돌리오 정부 임명
  • 1946퇴위하고 이집트로 망명

피에트로 바돌리오

Pietro Badoglio
반혁명 세력 이탈리아 이탈리아계 1871–1956 ○ 자연사

파시즘에 봉사하다 전환을 이끈 원수

1943년 9월 8일 휴전이 발표됐을 때, 바돌리오 정부는 로마를 떠나 연합군의 보호를 찾아 남쪽으로 향했다.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이탈리아 왕국의 군인이자 식민지 전쟁의 지휘관으로,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에서 제국의 폭력을 집행했다. 그는 무솔리니 체제의 핵심 군사 관료였지만, 1940년 그리스 전역의 실패 뒤 사임하고 왕실의 정권 교체에 참여했다. 1943년 무솔리니 축출 뒤 총리가 되어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체결했으나, 발표와 군 지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독일군의 무장해제와 이탈리아 국가의 붕괴를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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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이탈리아 왕립군 포병 장교로 임관
  • 1916제1차 세계대전에서 몬테 사보티노 점령을 지휘
  • 1925–1940이탈리아군 참모총장
  • 1929–1933리비아 총독, 저항 진압과 강제수용 정책을 지휘
  • 1935–1936에티오피아 침공군 사령관, 아디스아바바 점령
  • 1943–1944무솔리니 축출 뒤 이탈리아 왕국 총리, 연합국과 휴전 체결
  • 1944총리직 사임 후 정계에서 물러남

이반오에 보노미

Ivanoe Bonomi
외국 정치가 이탈리아 이탈리아인 1873–1951 ○ 자연사

파시즘과 왕정 사이에서 타협을 조직한 개혁 정치가

1943년 6월 그는 국왕에게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바돌리오를 임명하며 독일과의 동맹을 끊으라고 비밀리에 요구했다.

이반오에 보노미는 사회주의 개혁파에서 출발해 이탈리아 자유주의 의회정치의 핵심 인물로 이동한 정치가였다. 파시즘의 부상기에 충분히 단호하게 저항하지 못했고 무솔리니 정부를 지지한 전력이 있었지만, 1942년부터 반파시스트 세력을 다시 연결하며 정권 교체를 모색했다. 그는 1943년 국왕에게 무솔리니 해임과 피에트로 바돌리오 기용을 비밀리에 요구했고, 9월에는 6개 정당으로 구성된 민족해방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이후 왕정과 저항운동, 연합국 사이의 타협을 이끌며 전후 이탈리아의 제도적 이행을 관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3이탈리아 사회주의 노동자당에 가입
  • 1909사회주의자로 하원의원에 당선
  • 1912이탈리아 개혁사회당 창당에 참여
  • 1916–1919보셀리·올란도 내각 공공사업장관
  • 1921–1922이탈리아 왕국 총리
  • 1942–1943지하 반파시스트 신문과 야권 연락망 조직
  • 1943–1944민족해방위원회 의장
  • 1944–1945해방기 이탈리아 정부 총리
  • 1948–1951공화국 초대 상원의장

비토리오 암브로시오

Vittorio Ambrosio
외국 정치가 이탈리아 이탈리아인 1879–1958 ○ 자연사

왕권 아래에서 추축동맹의 출구를 설계한 장군

“추축국은 포위된 고리 안에 있다. 빠져나와야 한다.”

비토리오 암브로시오는 이탈리아 왕국의 기병 장교 출신 장군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이탈리아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1943년 이탈리아군 최고사령관이 된 그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의 패배 뒤 독일과의 동맹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왕과 군부를 중심으로 무솔리니의 실각과 연합국과의 휴전을 추진했다. 그의 선택은 파시즘을 넘어선 민주적 단절이라기보다 왕정과 군 지휘부가 국가의 전쟁 이탈을 관리하려 한 것이었으며, 9월 휴전은 독일군의 이탈리아 점령과 이탈리아군의 혼란을 막지 못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8기병 장교로 임관
  • 1911–1913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참전
  • 1915–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카포레토 후퇴 엄호
  • 1941제2군 사령관, 유고슬라비아 침공 지휘
  • 1942육군 참모총장
  • 1943-02–1943-11군 최고참모총장, 무솔리니 실각과 연합국 휴전 추진
  • 1943-11육군 감찰총감으로 좌천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9전체보기

1936–1939

스페인 내전

1936년 7월 군부의 반란은 정부가 아니라 노동조합의 무장으로 저지됐고, 그 자리에서 카탈루냐와 아라곤의 공장과 토지가 노동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혁명이 함께 일어났다.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한 불개입 협정이 합법 정부의 무기 구입을 막는 사이 독일과 이탈리아는 반란군을 무장시켰고, 공화국에 무기를 판 나라는 사실상 소련과 멕시코뿐이었다. 소련의 개입은 공화국을 버티게 했지만 「먼저 전쟁에서 이겨야 혁명도 있다」는 노선과 「혁명을 멈추면 싸울 이유도 사라진다」는 노선의 충돌을 함께 키웠고,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그 대립이 시가전으로 터졌다.

1940–1944

프랑스 침공과 비시 정부

이 사건은 1940년 5월 10일부터 1944년 해방까지 독일의 프랑스 정복과 제3공화국의 붕괴, 비시의 통치를 가리킨다. 프랑스군은 마지노선 방어와 벨기에 진입을 결합했지만, 독일군은 아르덴을 뚫어 뫼즈강을 건넌 뒤 해협으로 진격했다. 독일군은 6월 14일 파리를 점령했고, 됭케르크 철수에도 프랑스의 조직적 저항은 무너졌다. 필리프 페탱은 6월 17일 휴전을 요청했고 6월 22일 협정으로 북부와 대서양 연안은 독일 점령지, 남부는 비시의 통치 아래 놓였다. 7월 10일 국민의회가 페탱에게 전권을 부여했고, 비시는 독일과 협력하며 반유대 법령, 경찰 검거, 경제 수탈과 노동 동원을 시행했다. 1942년 11월 남부까지 점령된 뒤 1944년 해방으로 체제는 붕괴했다.

1940.07–1941.05

영국 본토 항공전

영국 본토 항공전은 1940년 7월부터 1941년 5월까지 독일 공군과 영국 공군이 영국 해협과 영국 본토의 제공권을 두고 벌인 항공전이다. 프랑스와 저지대 국가들의 패배 뒤 독일은 영국을 협상으로 굴복시키거나 침공하려 했고, 이를 위해 영국 전투기지휘부를 무너뜨리고 해협의 제해권을 뒷받침할 제공권을 얻으려 했다. 7월에는 해협 선박과 항구를 공격했고, 8월에는 비행장과 레이더망을 겨냥했으며, 9월 7일부터 런던과 도시들에 대한 대규모 폭격으로 전환했다. 영국은 레이더, 관측대, 지휘통제망, 허리케인과 스핏파이어를 결합해 독일의 주간 공습을 막았고, 독일은 1940년 9월 침공을 무기한 미루었다. 야간 폭격은 1941년 5월까지 이어졌지만 영국을 전쟁에서 이탈시키지는 못했다.

1941–1945

대조국전쟁

1941년 6월 나치 독일의 기습 침공으로 시작된 대조국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상전이었다. 소련은 개전 첫 해의 파국적 손실을 딛고 공업 기반을 통째로 동쪽으로 옮겨 재무장했으며,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에서 전세를 뒤집고 1945년 베를린까지 진격해 나치 독일을 무너뜨렸다. 독일 국방군 지상 전투력의 약 80%가 동부전선에서 소모되었고, 파시즘 격파의 압도적 부담을 짊어진 것은 다민족 소비에트 인민이었다.

1942–1943

스탈린그라드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1942년 7월 17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소련의 스탈린그라드와 돈강 하류 및 볼가강 주변에서 벌어진 독일·추축국과 소련의 대규모 전투다. 독일은 블라우 작전으로 남부의 석유와 교통로를 장악하려 했고, 히틀러가 스탈린그라드 점령을 별도 목표로 밀어붙이면서 공세가 분산됐다. 독일 제6군과 제4기갑군은 8월 말 도시에 도달해 폐허가 된 시가지를 공격했지만, 바실리 추이코프의 제62군은 볼가강을 건너오는 증원과 근접전으로 버텼다. 소련군은 11월 19일부터 천왕성 작전을 개시해 루마니아군이 지키던 독일군 측면을 북쪽과 남쪽에서 돌파하고 11월 23일 칼라치 부근에서 연결했다. 포위된 독일군은 구출과 공중 보급에 실패한 뒤 1943년 1월부터 항복했고, 2월 2일 전투가 끝났다.

1943–1945

이탈리아 전선과 무솔리니의 몰락

이탈리아 전선은 1943년 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으로 시작되어 1945년 5월 독일군의 이탈리아 항복으로 끝난 제2차 세계대전의 지중해 전역이다. 북아프리카 패배와 본토 폭격 뒤 파시스트 체제 내부와 국왕은 전쟁 지속이 정권과 국가를 파괴한다고 판단했지만, 연합군은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떼어내고 독일군을 남쪽에 묶어 두려 했다. 시칠리아 점령 뒤 대파시스트 평의회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축출했고, 피에트로 바돌리오 정부는 9월 3일 카시빌레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9월 8일 공개되자 독일군은 중북부를 점령하고 무솔리니를 구출해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세웠다. 연합군은 살레르노와 타란토에 상륙했지만 아펜니노산맥과 구스타프선, 안치오, 몬테카시노에서 막혔고, 1944년 6월 로마를 점령한 뒤에도 고딕선에서 소모전을 치렀다. 1945년 4월 최종 공세와 파르티잔 총봉기가 북부를 무너뜨렸고, 무솔리니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독일군 집단군 C는 5월 2일 항복했다.

1941–1945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전쟁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전쟁은 1941년 4월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고 분할한 뒤 1945년까지 벌어진 공산당 주도 무장투쟁이다. 독일의 소련 침공 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점령군과 협력 정권에 맞선 전국 봉기를 조직했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끈 파르티잔은 왕당파 체트니크와 경쟁하면서 게릴라 부대에서 정규군으로 성장했다. 추축국의 대공세, 특히 네레트바와 수테스카에서 살아남은 파르티잔은 1943년 연합국의 지원과 승인을 얻었고, 1944년 소련군과 함께 베오그라드를 해방했다. 1945년 3월 군대는 유고슬라비아군으로 개편되었고, 파르티잔의 승리는 왕정을 대신하는 사회주의 연방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1941–1945

그리스 저항과 12월 사건

그리스 저항과 12월 사건은 1941년 추축국 점령에서 시작되어 1945년 바르키자 협정으로 이어진 저항과 권력투쟁이다. 독일·이탈리아·불가리아의 점령, 기근과 협력정권에 맞서 공산당이 주도한 민족해방전선(EAM)과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이 농촌과 도시에서 가장 큰 조직으로 성장했다. 1944년 10월 독일군이 철수할 때 EAM은 전국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영국은 왕정과 비EAM 정부를 지키려 했고 소련도 그리스의 영국 영향권을 사실상 인정했다. 12월 1일 로널드 스코비가 저항군 무장해제를 명령하자 EAM 장관들이 사임했고, 12월 3일 아테네 시위에서 경찰이 발포하면서 영국군과 정부군, ELAS 사이의 37일 전투가 시작되었다. 영국의 증원과 화력 앞에 EAM은 후퇴했고, 1945년 2월 12일 바르키자 협정에서 ELAS 해산과 무장해제를 받아들였다.

1947–1948

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

1947년 미국이 유럽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을 내놓자, 소련은 그것을 미국 자본에 유럽을 종속시키려는 시도로 규정했다. 몰로토프는 파리 회담에서 협상을 결렬시켰고, 스탈린은 동유럽 국가들이 원조를 받는 것을 막았다. 즈다노프의 「두 진영」 선언과 코민포름 창설로 세계는 냉전의 두 블록으로 굳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