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10–1918.01

10월 혁명

10월 혁명은 어떻게 소비에트의 이름으로 권력을 장악했고, 첫 법령들로 무엇을 바꾸었는가?

1917년 가을 코르닐로프 반란이 좌절된 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가 다수파가 되었고, 트로츠키가 이끄는 군사혁명위원회가 수도 수비대의 충성을 확보했다. 11월 7일(구력 10월 25일)의 봉기는 페트로그라드에서 거의 유혈 없이 수도를 장악했으며, 같은 날 밤 개회한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권력 이양을 승인했다. 대회는 즉시 평화에 관한 법령토지에 관한 법령을 채택하고, 레닌을 수반으로 하는 인민위원회의(소브나르콤)를 구성했다.

두 개의 권력, 여덟 달의 붕괴: 1917년 9월까지 러시아는 어떻게 왔는가

1917년 2월, 빵을 요구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가두행진에서 시작된 봉기는 불과 8일 만에 로마노프 왕조 304년을 끝냈다. 수도 페트로그라드의 수비대가 시민에게 발포를 거부하고 반란 쪽으로 넘어갔고, 니콜라이 2세는 전선으로 가던 열차 안에서 퇴위 서류에 서명했다. 제정은 무너졌지만, 그 자리에는 처음부터 두 개의 권력이 동시에 들어섰다.

하나는 국가두마 의원들이 구성한 임시정부였다. 게오르기 리보프 공작을 수반으로 하는 이 정부는 제헌의회 소집까지 나라를 관리한다는 임무를 내걸고 언론·집회의 자유, 사형 폐지, 모든 종교·계급 차별 철폐를 선포했다. 그러나 정부는 단 한 번도 국민투표로 선출된 적이 없었고, 러시아가 묶여 있던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다른 하나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즉 노동자·병사 대표 평의회였다. 소비에트는 수비대의 충성, 철도와 전신에 대한 실질적 통제권, 그리고 무엇보다 거리의 민중이 믿는 유일한 권위를 쥐고 있었다. 3월 1일 소비에트가 발한 「명령 제1호」는 모든 부대에 병사위원회를 세우고 장교의 명령도 소비에트의 승인이 없으면 효력이 없다고 선언함으로써, 군대라는 물리력의 주인을 바꿔놓았다. 리보프 자신이 “정부는 권위 없는 권력이고, 소비에트는 권력 없는 권위”라고 요약한 이 체제가 바로 이중권력이었다.

두 권력 사이의 불안정한 공존은 전쟁을 둘러싼 4월 위기로 첫 균열을 드러냈다. 파벨 밀류코프 외무장관이 연합국에 “승리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는秘密각서를 보낸 사실이 폭로되자, 페트로그라드 거리는 무장한 노동자와 병사들의 시위로 뒤덮였다. 임시정부는 밀류코프와 구치코프 군사장관을 경질하고 멘셰비키·사회혁명당(SR) 출신 사회주의자들을 입각시켜 연립정부로 거듭났지만, 이번에는 전쟁을 이제 ‘혁명의 방어’라는 이름으로 계속하는 연립이 되었다.

4월 16일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은 페트로그라드의 핀란드역에 발을 디디자마자 「4월 테제」를 발표했다. “임시정부에 대한 어떤 지지도 없다”, “의회공화국이 아니라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즉각적인 강화”: 이 세 문장은 당시 소비에트를 장악하고 있던 멘셰비키와 SR 지도부에게는 미친 소리로 들렸다. 당원들조차 당혹스러워했지만, 레닌의 테제는 볼셰비키를 다른 모든 정당과 정치적으로 분리시키는 분수령이 되었다.

여름으로 접어들며 상황은 더 빠르게 악화되었다. 6월, 전쟁장관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승리가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논리로 감행한 대공세는 이틀 만에 돌파구를 만들었으나, 독일군의 반격 앞에 20만 명 가까운 사상자를 내고 참담하게 무너졌다. 부대 단위로 명령을 거부하고 후방으로 흩어지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경제도 붕괴하고 있었다. 전쟁 자금을 찍어낸 루블화는 1914년 대비 물가를 네 배로 올렸고, 농민들은 가치를 잃은 지폐 대신 곡식을 창고에 쌓아두었다. 1917년 한 해 동안 페트로그라드의 1인당 빵 배급량은 계속 낮아졌고, 공장은 연료 부족으로 문을 닫기 시작했다. 시골에서는 농민들이 지주 토지를 스스로 나누기 시작했고, 정부는 이를 막을 행정력도 의지도 없었다.

급기야 7월 초, 기관총연대를 비롯한 수비대 병사들과 크론시타트 수병들이 무장한 채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외치며 타브리다 궁으로 몰려드는 사태가 벌어졌다(7월 사태). 임시정부는 충성 부대를 동원해 시위를 진압했고, 이어 볼셰비키를 “독일의 앞잡이”로 몰아세우며 《프라우다》 인쇄소를 파괴하고 당 간부들을 체포했다. 레닌은 핀란드로 다시 도피했고, 트로츠키는 크레스티 감옥에 갇혔다. 케렌스키가 총리에 오르면서 임시정부는 공화국을 선포했지만, 7월 사태의 진압은 정부에게 일시적 숨통을, 볼셰비키에게는 순교자의 아우라를 동시에 안겼다.

결정적 전환은 8월 말(구력) 라브르 코르닐로프 총사령관이 일으킨 쿠데타 시도였다. 코르닐로프는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를 “독일의 앞잡이 소굴”로 간주하고, 크리모프 장군의 제3기병군단을 수도로 진격시켰다. 케렌스키는 이 순간 자신이 몇 주 전 탄압했던 바로 그 소비에트와 볼셰비키에게 도움을 청해야 했다. 소비에트가 조직한 ‘반혁명 저지 위원회’에는 감옥에서 막 풀려난 트로츠키도 참여했다. 철도 노동자들은 코르닐로프의 군용열차를 우회시키거나 분리했고, 볼셰비키 선동대원들은 진격 중인 부대에 들어가 “장군은 혁명을 죽이려 한다”고 설득했다. 부대는 페트로그라드에 닿기 전에 녹아내렸고, 크리모프는 자살했으며, 코르닐로프는 체포되었다.

코르닐로프 사건의 결과는 역설적이었다. 케렌스키는 노동자들에게 4만 정의 소총을 나누어주었고, 이 총들의 상당 부분은 그대로 볼셰비키 적위대의 무장으로 남았다. 볼셰비키 당원 수는 2월의 2만 4천 명에서 9월에는 20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1917년 9월 13일(구력 8월 31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마침내 볼셰비키가 제출한 권력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2월 이후 처음으로 소비에트의 다수파가 된 것이다. 이어 9월 25일에는 트로츠키가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같은 날 모스크바 소비에트도 볼셰비키 결의안을 채택했다. 10월 봉기의 무대는 이렇게 준비되었다.

코르닐로프의 선물: 소비에트가 볼셰비키의 것이 되기까지

1917년 8월 말,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이 기병군단을 페트로그라드로 진군시켰을 때, 볼셰비키는 아직 지하에 묻혀 있었다. 7월 봉기 이후 당은 '독일의 첩자'로 낙인찍혔고, 레닌은 핀란드에 은신 중이었으며, 트로츠키는 크레스티 감옥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코르닐로프 사건이 닷새 만에 무너지면서 모든 것이 뒤집혔다.

반란을 막을 실질적 힘은 소비에트밖에 없었다. 케렌스키 정부는 어쩔 수 없이 소비에트에 협조를 구했고, '반혁명 투쟁 위원회'가 조직되었다. 이 위원회의 유일한 가동 가능한 군사력은 볼셰비키 군사조직이었다. 정부는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들에게 4만 정의 소총을 나눠주었고, 그 상당 부분이 볼셰비키 적위대의 손에 들어갔다. 트로츠키를 비롯한 볼셰비키 수감자들은 소비에트의 요구로 풀려났다. 철도 노동자들은 코르닐로프의 군용열차를 교착시켰고, 선동가들은 카프카스 산악병들 사이로 들어가 '페트로그라드에는 반란군이 아니라 노동자 소비에트가 있다'고 설득했다. 크리모프 장군의 군단은 한 발의 총도 제대로 쏘지 못한 채 흩어졌고, 크리모프는 케렌스키와 면담한 직후 스스로 심장에 총을 쏘았다.

정치적 대가는 즉시 따라왔다. 8월 31일(구력)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볼셰비키가 제출한 결의안을 279 대 115로 통과시켰다. 결의안은 부르주아 정당과의 연립 중단, 전국 토지의 농민위원회 이양, 노동자 통제, 즉각적 강화라는 볼셰비키 강령의 핵심을 담고 있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표차였다. 9월 5일에는 모스크바 소비에트도 동일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어 브랸스크, 사마라, 사라토프, 차리친, 민스크, 키예프, 타슈켄트 등 전국 소비에트가 차례로 볼셰비키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당원 수는 2월의 2만 4천 명에서 9월에는 20만 명을 넘어섰다.

기존 소비에트 지도부였던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SR)은 이 변화 앞에서 당혹해했다. 9월 14일부터 22일까지 그들이 소집한 전러시아 민주회의는 자신들의 퇴조를 가리기 위한 무대였다. 1,700여 명의 대의원 중 볼셰비키는 100여 명에 불과하도록 의석이 조작되었지만, 거리와 공장의 현실은 의석 배분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트로츠키는 이 회의를 두고 '볼셰비키가 진정으로 대표되어 있다면 이미 소비에트 정부가 수립되었을 것'이라고 평했다.

핀란드 헬싱키의 은신처에 있던 레닌은 민주회의가 개막하기도 전에 중앙위원회에 두 통의 편지를 보냈다. 9월 12~14일 작성된 「볼셰비키는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와 「마르크스주의와 봉기」가 그것이다. 첫 번째 편지에서 레닌은 단도직입적으로 썼다: '볼셰비키는 두 수도 소비에트에서 다수파를 획득했으며, 국가 권력을 자신의 손에 장악할 수 있고 또 장악해야 한다.' 반대 세력을 분쇄하고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로 즉각적 평화 제안, 토지의 농민 이양, 케렌스키가 짓밟은 민주적 자유의 회복을 들었다. 그의 판단에서 대다수 인민은 이미 볼셰비키 편이었다.

두 번째 편지 「마르크스주의와 봉기」는 더 치밀했다. 레닌은 봉기를 '하나의 예술'로 다루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의 명제를 끌어와, 7월과 9월의 객관적 조건을 하나하나 대조했다. 7월에는 (1) 양대 수도 소비에트에서 다수파가 아니었고, (2) 전국적 혁명적 고양이 없었으며, (3) 적과 우유부단한 동맹자들의 동요가 충분하지 않았다. 지금은 세 조건이 모두 충족되었다. '역사는 우리가 지금 권력을 잡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중앙위원회의 반응은 신중했다. 9월 15일 중앙위원회는 레닌의 편지들을 논의한 뒤, 열람을 제한하기 위해 사본을 한 부만 보존하기로 결의했다(찬성 6, 반대 4, 기권 6). 카메네프는 무장봉기 노선에 반대하는 결의안을 제출했으나 부결되었다. 당 지도부 내에서 봉기의 방향 자체는 수용되었지만, 시기와 방법을 둘러싼 긴장은 이미 이때부터 깔리기 시작했다. 10월 8일(구력 9월 25일) 트로츠키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면서 봉기를 실행할 기구의 수장이 정해졌고, 레닌의 편지는 더 이상 종이 위의 논증이 아니게 되었다.

비밀 결의, 누설된 봉기: 중앙위원회의 10 대 2와 군사혁명위원회의 탄생

1917년 9월 말, 레닌은 헬싱키에서 페트로그라드로 은밀히 돌아왔다. 7월 봉기 실패 이후 핀란드에 은신하고 있던 그에게 9월은 고통스러운 계절이었다. 소비에트는 이미 볼셰비키의 손에 들어왔고, 농민 반란은 전국으로 번지고 있었으며, 독일 해군에서는 수병 반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런데도 당 중앙위원회는 결의문만 반복할 뿐이었다. 10월 10일(구력), 레닌은 가발과 안경으로 변장한 채 페트로그라드 카르포프카 강변의 한 아파트로 들어갔다. 멘셰비키 니콜라이 수하노프의 아내가 볼셰비키였기에 가능한 장소였다. 이날 밤 열린 중앙위원회에는 레닌, 트로츠키, 스베르들로프, 스탈린, 제르진스키, 우리츠키, 콜론타이, 소콜니코프, 부브노프, 로모프, 카메네프, 지노비예프 등 12명이 참석했고, 스베르들로프가 의장을 맡았다.

레닌은 보고에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무장봉기는 불가피하며, 그 시기는 완전히 무르익었다." 그의 논거는 구체적이었다: 독일 해군 반란, 케렌스키 정부가 페트로그라드를 독일군에 넘기려 한다는 정황, 볼셰비키가 양대 수도 소비에트에서 다수파가 된 사실, 농민 봉기의 전국적 확산, 그리고 코르닐로프식 반혁명의 재기도가 명백하다는 점. 레닌이 특히 강조한 것은 '기술적 측면'이었다. 정치적 조건은 성숙했는데도 봉기의 체계적 준비를 "정치적 죄악처럼" 여기는 분위기가 당 내부에 퍼져 있다는 비판이었다.

밤샘 토론 끝에 표결은 10 대 2로 결론났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만이 반대했다. 두 사람은 볼셰비키의 영향력이 상승 중이며 제헌의회 선거에서 3분의 1 이상을 얻을 수 있다고 보았다. 성급한 봉기는 당의 운명뿐 아니라 러시아 혁명과 국제 혁명 전체를 도박에 걸치는 일이며,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적극적 지원을 기대할 단계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실패하면 7월의 재판(再版)이 아니라 혁명 자체의 패배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찬성한 10명 중에도 입장은 균질하지 않았다. 트로츠키는 봉기 자체에 반대하지 않았지만, 제2차 소비에트 대회 개막에 맞춰 실행하자고 주장했다. 대회가 먼저 권력 이양을 선언하게 한 뒤, 임시정부가 거부하면 방어의 형식으로 봉기할 수 있다는 논리였다. 중앙위원회는 봉기 실무 지도를 위해 정치국을 구성했다.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 소콜니코프, 부브노프로 이루어진 이 기구는 볼셰비키당 역사상 최초의 정치국이었다.

그러나 비밀은 오래가지 못했다.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현 정세에 관하여」라는 반대 의견서를 당 조직들에 회람했다. 10월 16일(구력) 열린 확대 간부회의에서 봉기 결의는 20 대 2로 재확인되었고(가운데 3명 기권), 카메네프는 중앙위원에서 사퇴했다. 그리고 결정적 사건이 터졌다: 10월 18일(구력), 막심 고리키의 신문 《노바야 지즌》에 카메네프의 짧은 기고가 실려, 중앙위원회에서 무장봉기가 논의되었으며 자신과 지노비예프가 반대했다는 사실이 공개된 것이다. 당의 최고 기밀이 신문 지면을 통해 임시정부 앞에 펼쳐졌다. 레닌은 격노하여 두 사람을 "파업파괴자"라 부르며 제명을 요구했지만, 중앙위원회는 지노비예프의 사직과 카메네프의 공개 활동 금지 선에서 마무리했다.

바로 이 무렵, 볼셰비키는 봉기를 합법적 소비에트 기구 안에 감출 수 있는 예상치 못한 기회를 얻었다. 10월 9일(구력)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서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이 제안한 것은 '혁명방어위원회'였다. 독일군이 리가와 발트 제도를 장악하며 수도에 접근하자, 노동자를 방어에 동원하자는 취지였다. 볼셰비키는 이 제안을 즉시 받아들였다. 트로츠키는 집행위 보고에서 "전국적 혁명 권력을 위한 직접적이고 공개적인 투쟁 만세!"라고 외쳤다. 이는 소비에트 언어로 번역된 '무장봉기 만세'였다.

10월 12일(구력),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군인부문회의는 군사혁명위원회(MRC)의 설치를 승인했다. 10월 16일 소비에트 본회의가 정식 비준했다. 외관은 조심스러웠다: 위원장에는 볼셰비키가 아닌 좌파 사회혁명당파벨 라지미르가 앉았다. 그러나 실무 사무국에는 포드보이스키, 안토노프-옵세옌코, 사돕스키 같은 볼셰비키 군사 전문가들이 포진했고, 진짜 지휘는 소비에트 의장 트로츠키가 했다. 규정상 MRC는 수비대, 발트 함대, 철도노조, 공장위원회, 노동조합, 적위대, 각 당 군사조직의 대표들을 망라했지만, 실제로 전체 회의는 거의 열리지 않았고 트로츠키의 사무국이 모든 결정을 내렸다. 스베르들로프도 중요 결정마다 개입했다.

MRC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수비대 각 부대와 무기고, 전략 거점에 코미사르를 파견하는 것이었다. 10월 21일(구력), MRC 대표단이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 폴코프니코프 장군을 방문해 MRC의 승인 없이는 어떤 부대 이동 명령도 집행되지 않을 것임을 통보했다. 체코 역사가 미할 레이만은 이 장면을 두고 "어느 나라에서든 이것은 명백한 반란 행위로 간주될 것"이라고 평했다. 그러나 '수도 방어'라는 명분 덕분에 MRC는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했고, 임시정부는 선제 타격을 감행하지 못했다. 멘셰비키가 '이중권력'이라며 경고했던 바로 그 기구가, 이제 단일 권력을 향한 무기가 되어가고 있었다.

방어인가, 봉기인가: 케렌스키의 마지막 일격과 스몰니의 24시간

구력 10월 24일 새벽, 케렌스키는 마지막 주도권을 쥐려 했다. 정부군이 볼셰비키 기관지 「라보치 푸티」의 인쇄소를 급습해 활자를 해체하고 신문을 압수했으며, 곧 좌파 신문 「솔다트」까지 폐쇄 명령이 내려졌다. 동시에 정부는 스몰니 연구소의 전화선을 끊고 군사혁명위원회(MRC) 코미사르들의 체포를 지시했다. 7월 봉기 이후 정부가 보여준 가장 단호한 선제공격이었다.

그러나 이 한 방은 역효과를 냈다. MRC는 오전 9시 정부의 행동을 '반혁명 기도'로 규정하는 성명을 발표했고, 오전 10시 혁명군 병사들이 인쇄소를 재장악해 신문을 다시 찍어냈다. 트로츠키가 지휘하는 MRC의 대응은 처음부터 끝까지 '소비에트 대회를 지킨다'는 방어의 틀을 유지했다. 이 틀은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개막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MRC가 취한 모든 조치는 임박한 대회를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정당화되었다. 트로츠키는 훗날 이 방식을 두고 '형식은 방어, 본질은 공격'이라고 썼다.

오후 3시, 케렌스키는 7월 봉기 때 썼던 수법을 되풀이해 네바 강의 도개교를 올리라고 명령했다. 노동자 구역과 도심을 단절시키려는 조치였다. 하지만 리테이니 교에 도착한 사관생도들은 무장 노동자들과 맞닥뜨려 해산되었고, 니콜라옙스키 교는 잠시 올려졌으나 곧 적위대가 장악했다. 세 다리 중 둘은 저녁 무렵 MRC 쪽에 있었다. 오후 5시에는 중앙전신국이 MRC 병력에 접수되면서 정부의 통신은 사실상 두절되었다.

밤사이 스몰니는 무장 진지로 변했다. 군용 트럭과 오토바이가 쉴 새 없이 드나들었고, 각 구역에서 결의한 볼셰비키 당원들과 적위대가 속속 집결했다. 그리고 이 광경을 은신처에서 초조하게 지켜보던 레닌이 마침내 움직였다. 그는 가발을 쓰고 얼굴에 붕대를 감은 채, 중앙위원회의 외출 금지 명령을 어기고 스몰니로 향했다. 동지 포파노바에게 남긴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당신이 내가 가지 말라던 곳으로 갑니다. 안녕.' 레닌은 소비에트 대회가 열리기 전에 기정사실을 만들어야 한다고 거듭 주장해왔고, 이제 그 기정사실을 손수 쓰러 온 것이었다.

10월 25일(구력) 아침이 밝자 MRC 부대는 거의 무혈로 수도의 요충을 차례로 접수했다. 발트 함대에서 충성 맹세를 한 수병들이 네바 강으로 진입했고, 아브로라호의 혁명 승무원이 함선을 장악한 채 니콜라옙스키 교 아래로 이동해 마지막 정부 거점을 무력화했다. 전화국, 중앙은행, 바르샤바 역, 발전소가 차례로 MRC의 손에 떨어졌다. 오전 10시, 레닌은 이미 장악된 현실을 선언하는 짧은 포고문을 썼다: '임시정부는 타도되었다. … 인민들이 투쟁해온 대의, 즉각적 민주 강화의 제안, 지주 토지 소유의 철폐, 노동자 통제, 소비에트 정부의 수립이 보장되었다.' 이 「러시아 시민들에게」는 전신으로 전국에 발송되었고, 불과 몇 시간 뒤면 개회할 소비에트 대회는 완료된 권력 이양 앞에 서게 될 것이었다. 봉기인가 방어인가, 그 경계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겨울궁전과 스몰니, 같은 밤의 두 드라마: 궁전의 마지막 시간과 대회의 첫 투표

겨울궁전과 스몰니, 같은 밤의 두 드라마: 궁전의 마지막 시간과 대회의 첫 투표

11월 7일 오후, 임시정부 수반 케렌스키가 미 대사관에서 빌린 르노 승용차로 수도를 빠져나갔을 때 겨울궁전에 남은 것은 각료 15명과 축소되는 방어 병력뿐이었다. 방어 책임자로 임명된 카데트 출신의 니콜라이 키시킨은 군관구 사령관을 해임하고 바그라투니 장군을 앉혔지만, 그가 지휘할 실질적 병력은 거의 없었다.

궁전을 지키던 부대는 오후 내내 녹아내렸다. 미하일롭스키 포병학교 사관생도들이 포를 끌고 떠났고, 정부 편에 선 유일한 정규군 부대였던 카자크 기병대는 "이번에도 카자크의 피만 헛되이 흐를 것"이라며 막사를 떠났다. 오후 8시에는 200명의 카자크가 전원 철수했다. 남은 전력은 사관생도 2, 3개 중대, 여성돌격대대(제1페트로그라드 여성 '죽음' 대대) 소속 약 137명, 그리고 의족을 단 기병대장이 이끄는 성 게오르기 훈장 상이군인 40명이었다. 병력보다 더 근본적인 결핍은 식량과 지휘관이었다. 사관생도들은 점심도 먹지 못했고, 방어 병력 전체에 장교는 겨우 5명이었다.

군사혁명위원회(MRC) 측도 쉽게 진격하지 못했다. 오후 6시 15분, MRC는 작전 가능한 포병을 확보하지 못해 공격을 미뤘다. 저녁 9시 40분, 순양함 아브로라가 네바 강에서 공포탄 한 발을 발사했다. 이는 신호였을 뿐이었다. 아브로라의 6인치 함포는 위치상 겨울궁전을 겨냥할 수 없었다. 이어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에서 35발의 실탄이 발사되었으나 겨우 2발만이 궁전 지붕을 스쳤다. 18시 30분, MRC 대표 추드놉스키가 첫 항복 권고를 들고 궁전에 들어갔다가 사관생도에게 일시 체포되었고, 사관생도들의 보증으로 풀려났다. 그가 나갈 때 또 한 무리의 사관생도들이 그를 따라 궁전을 떠났다.

본격적인 진입은 밤 11시 이후였다. 궁전 정면은 방어선이 쳐져 있었으나 네바 강 쪽 후면 출입구는 열려 있었다. 선원과 적위대가 그 쪽으로 밀려들었고, 존 리드는 "군중이 마치 검은 강물처럼" 궁전 안으로 흘러들었다고 기록했다. 곳곳에서 약탈이 시작되었지만, "이것은 인민의 재산이다!"라는 외침과 함께 적위대 스스로 질서를 회복했다는 것이 리드의 목격담이다.

10월 26일 오전 2시 10분, 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가 말라히트 응접실에 있던 각료들 앞에 섰다. "임시정부의 이름으로, 나는 여러분이 체포되었음을 선언합니다." 누군가가 "우리는 오직 무력에 굴복했을 뿐"이라고 답했고, 각료들은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로 호송되었다. 트로이츠키 다리 근처에서 호송대를 에워싼 군중이 "목을 쳐서 네바 강에 던져라"고 외쳤으나 호위병들은 각료들을 무사히 목적지까지 데려갔다.

이 모든 일이 벌어지는 동안, 불과 수 킬로미터 떨어진 스몰니 연구소에서는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개회하고 있었다. 멘셰비키 표도르 단이 밤 10시 45분에 개회를 선언했을 때, 볼셰비키는 이미 수도를 장악한 상태였으나 겨울궁전은 아직 함락되지 않았다. 대회 구성은 649명의 대의원 중 볼셰비키 390명, 사회혁명당(SR) 160명, 멘셰비키 72명이었다.

개회 직후의 격론은 이 혁명 대회의 성격을 결정지었다. 율리 마르토프는 '즉각적인 충돌 중단과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 구성'을 제안했고, 볼셰비키 대표 루나차르스키는 이에 동의했다. 마르토프의 결의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그러나 곧이어 우파 SR과 멘셰비키 지도부가 연단에 올라 무장봉기를 '민주주의에 대한 음모'이자 '인민의 의사에 대한 찬탈'로 규탄하고 대회장을 박차고 나갔다. 트로츠키는 그들의 등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파산자들이며, 여러분의 역할은 끝났습니다. 여러분이 가야 할 곳,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가십시오."

퇴장은 볼셰비키에게 결정적 선물이었다. 마르토프가 제안했던 연립안은 퇴장한 의원들의 표 없이는 구성될 수 없었고, 결국 부결되었다. 마르토프 자신도 당내 다수파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멘셰비키-국제파와 SR 의원 약 70명이 퇴장하면서 대회의 세력 균형은 극적으로 바뀌었다. 남은 의석의 약 90%가 볼셰비키와 좌파 SR 연합의 손에 들어갔다.

새벽 5시 직전, 겨울궁전 함락 소식이 도착했다. 대회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호소문을 채택했고, 동이 트기 직전인 오전 6시에 첫 회기가 산회되었다. 같은 날 밤 속개된 둘째 회기에서 레닌은 4개월 만에 처음으로 공개석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대회는 평화 법령과 토지 법령을 채택했고,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의를 구성했다. 레닌이 연단에서 한 첫 마디는 이러했다: "우리는 이제 사회주의 질서를 건설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혁명의 첫 6주: 법령의 홍수와 다가오는 두 정통성의 충돌

권력을 잡은 뒤 첫 6주 동안 소브나르콤은 쉬지 않고 법령을 쏟아냈다. 11월 11일의 8시간 노동제 법령은 하루 최대 8시간, 주 48시간의 노동 기준을 세웠고 야간노동·잔업 규제를 명문화했다. 이는 2월 혁명 직후부터 노동자들이 공장마다 일방적으로 관철해온 요구를 법으로 추인한 것이었다. 실제로 총력전 아래 군수 생산 압박 때문에 많은 공장에서 노동자들은 "원칙은 8시간, 잔업은 초과근무"라는 타협을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 이틀 뒤인 11월 13일의 사회보험 법령은 임금노동자 전원과 도시빈민을 대상으로 질병·부상·장해·노령·출산·과부·고아·실업을 포괄하는 보험 체계를 선언했고, 비용 전액을 사용주가 부담하게 했다. 시행할 국가 재정이 전무한 상태에서 선포된 이 법령은 현실보다 선언에 가까웠지만, 볼셰비키가 말로만이 아니라 법으로 노동자 국가를 개시했음을 보여주는 증표였다.

11월 15일에는 「러시아 제 민족의 권리 선언」이 레닌과 스탈린의 서명으로 공포되어, 민족 평등과 자유로운 자결권(분리독립까지 포함한)을 명시했다. 11월 24일에는 신분·계급·관등을 폐지하고 모든 러시아인을 '러시아 공화국 시민'으로 단일화하는 법령이 나왔다. 11월 27일 노동자 통제 법령은 공장위원회에 경영 감독권을 부여했고, 12월 18일에는 교회의 결혼 관할을 폐지하고 시민혼을 도입했으며 배우자 일방의 청구만으로 이혼을 허용하는 두 개의 법령이 공포되었다. 이로써 러시아는 하루아침에 세계에서 가장 앞선 가족법을 가진 국가가 되었다. 알렉산드라 콜론타이가 사회복지 인민위원으로서 이 입법 작업을 주도했다.

그러나 이 홍수 같은 입법의 와중에, 11월 25일 실시된 제헌의회 선거는 전혀 다른 그림을 그렸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보통선거였던 이 선거에서 사회혁명당이 약 370석으로 최다 의석을 차지했고, 볼셰비키는 약 175석(전체의 4분의 1가량)에 그쳤다. 페트로그라드·모스크바 두 수도와 북부·서부 전선 군대에서는 볼셰비키가 다수였지만, 인구의 80%를 차지하는 농민은 압도적으로 사회혁명당을 찍었다.

여기에는 결정적인 사정이 하나 더 있었다. 선거 명부가 작성된 것은 10월 중순, 즉 사회혁명당이 우파와 좌파로 갈라지기 전이었다. 유권자들은 '사회혁명당'이라는 하나의 꼬리표에 투표했지만, 당선된 의원들의 상당수는 이미 볼셰비키와 연정을 구성한 좌파가 아니라 소비에트 권력에 적대적인 우파였다. 레닌은 이 모순을 즉시 포착해, 12월에 발표한 「제헌의회에 관한 테제」에서 "10월 혁명의 이해관계가 제헌의회의 형식적 권리보다 위에 선다"고 천명했다. 제2차 소비에트 대회의 결의로 권력을 부여받은 소비에트 정부와, 보통선거로 구성된 의회, 즉 두 개의 정통성은 이렇게 같은 지붕 아래 들어갈 수 없는 상태로 정면 충돌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체카의 탄생과 제헌의회의 마지막 하루: 두 정통성의 결전

12월의 소브나르콤 앞에는 두 개의 다른 위기가 동시에 밀려오고 있었다. 하나는 제헌의회라는 제도적 도전이었고, 다른 하나는 새 정부에 맞서는 사보타주와 행정 마비라는 일상적 위협이었다. 11월 말 옛 정부 부처의 고급 관리들은 대대적으로 출근을 거부했고, 은행과 철도 부문의 비협력은 소비에트 권력의 실질적 집행력을 갉아먹고 있었다.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가 그때까지 반혁명 대응을 맡고 있었으나, 이것은 봉기를 위해 만들어진 임시 기구였다. 12월 5일 군사혁명위원회는 스스로 해산을 선언했고, 그 기능은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의 관련 부서로 이관되었다.

바로 이틀 뒤인 12월 7일(구력), 소브나르콤은 제르진스키에게 새로운 기구의 설계를 맡겼다. 제르진스키가 소집한 첫 회의에는 페테르스, 크세노폰토프, 예브세예프, 트리포노프 등 10명이 모였다. 이 자리에서 결정된 체카의 임무는 '전러시아의 모든 반혁명 및 사보타주 활동과 그 시도를 근절하고, 반혁명분자와 사보타주범을 혁명재판소에 이송하며, 이에 대처할 조치를 개발하여 무자비하게 적용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에 체카가 가진 권한은 예비 조사에 국한되었고, 제재 수단도 재산 몰수·배급 카드 박탈·인민의 적 명단 공개 등이었다. 사법적 처벌은 혁명재판소의 몫이었다. 그러나 법무인민위원 시테인베르크와 내무인민위원 페트롭스키가 이끄는 두 인민위원부가 체카의 활동을 감독해야 한다는 조항이 이미 삽입되어 있었고, 이는 혁명 정부 안에서조차 이 기구의 통제 문제를 둘러싼 긴장이 처음부터 내장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체카가 사보타주라는 당면 위기에 대한 응급 처방이었다면, 제헌의회는 정통성 그 자체의 충돌이었다. 12월 12일 선거 결과가 들어오면서 볼셰비키 지도부는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사회혁명당이 57% 이상의 득표로 압도적 다수 의석을 차지했고, 볼셰비키는 약 4분의 1에 그쳤다. 문제는 투표용지였다. 선거 명부는 사회혁명당이 좌·우로 분열되기 전인 10월 중순에 작성된 것이어서, 유권자들은 친볼셰비키 좌파 사회혁명당과 반볼셰비키 우파 사이를 구분하지 못한 채 '에스에르'라는 하나의 기표란에 투표했다. 레닌은 이것이야말로 의회가 인민의 진짜 의사를 반영하지 못한다는 결정적 증거라고 보았다. 12월 26일 프라우다에 발표된 「제헌의회에 관한 테제」는 "소비에트 공화국은 통상적인 부르주아 공화국보다 더 높은 형태의 민주주의"이며, "이 혁명의 이익은 제헌의회의 형식적 권리 위에 선다"고 선언했다.

당 내부는 만장일치가 아니었다. 카메네프·리코프·밀류틴 등은 제헌의회에 대한 강경 노선에 반대했고, 12월 초만 해도 볼셰비키 제헌의회 의원단 내에서는 온건파가 다수였다. 그러나 12월 11일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레닌은 볼셰비키 의원단 간부진을 교체하며 주도권을 확보했다. 준비도 병행되었다. 11월 28일 소브나르콤은 입헌민주당을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고 지도부 체포를 명령했다. 12월 23일 페트로그라드에 계엄이 선포되었고, 타브리다 궁전 경비는 라트비아 소총병 제6툭쿰스 연대가 맡았다. 의회 개회 정족수는 400명으로 정해져 일정은 의도적으로 지연되었다.

1월 18일(구력 1월 5일) 오후 4시, 마침내 타브리다 궁전에 제헌의회가 개회했다. 의장 선거에서 우파 사회혁명당의 체르노프가 244표, 좌파 사회혁명당의 스피리도노바가 153표를 얻었다. 스베르들로프는 VTsIK 의장 자격으로 개회를 선언하며 「근로·피착취 인민의 권리 선언」의 채택을 요구했다. 이 문서는 소비에트 권력과 평화·토지·노동자 통제 법령을 승인함으로써 의회가 스스로 소비에트에 종속됨을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의회는 237 대 136으로 이를 거부했다. 볼셰비키와 좌파 사회혁명당 의원들은 곧바로 퇴장했다.

남은 우파 사회혁명당 의원들은 밤새 토의를 이어갔다. 체르노프는 사회혁명당이 임시정부 시절 하지 못했던 토지 개혁 법안과 연방 민주 공화국 선포, 협상국에 대한 민주적 평화 제안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새벽 4시 40분, 경호 책임자이자 아나키스트 수병인 젤레즈냐코프가 "경호대가 피곤하니 회의를 끝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말로 의회를 중단시켰다. 이튿날 의원들은 타브리다 궁전의 문이 잠긴 것을 발견했다. 1월 19일 VTsIK는 제헌의회 해산 법령을 가결했고, 곧이어 열린 제3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이를 추인했다.

대중의 반응은 놀라울 만큼 조용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제헌의회 지지 시위가 있었으나, 조직자들의 기대보다 규모가 작았고 주로 중산층 학생·공무원·전문직이 참여했다. 역사가 올랜도 파이지스가 지적했듯, 농민 대중에게 제헌의회는 '도시에 있는 먼 존재'였고 자신들의 정치 조직과는 다른 것이었다. 혁명은 이로써 의회제와 소비에트제 사이의 선택을 강제했고, 그 선택은 이미 11월 7일의 밤에 이루어져 있었다.

정착된 것, 열린 채 남은 것: 100년의 역사 논쟁

10월 혁명이 무엇을 확정했고 무엇을 확정하지 않았는지는 1917년 11월 이후 줄곧 역사학자들 사이에서 가장 치열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세 가지 커다란 질문이 그 중심에 있다.

첫째, 혁명 자체의 성격 문제다. 소비에트 공식 사학은 10월을 '위대한 사회주의 10월 혁명'이라 부르며 자본주의에서 사회주의로의 세계사적 이행이 필연적으로 개시된 사건으로 서술했다. 반면 냉전기 서방의 '전통주의' 학파, 그중에서도 리처드 파이프스는 10월을 '대중적 지지 없이 수행된 고전적 현대 쿠데타'로 규정했다. 파이프스의 주장은 볼셰비키가 소비에트라는 민주적 외피를 이용해 권력을 장악한 뒤, 곧바로 그것을 일당 독재로 대체했다는 것이다. 이에 맞서 1970년대부터 등장한 '수정주의' 역사가들, 대표적으로 알렉산더 라비노비치는 소비에트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1917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 노동자와 병사들 사이에서 실제로 광범한 대중적 지지를 획득했으며, 당 자체도 레닌의 의지에 일방적으로 복종하는 폐쇄적 조직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정당이었다고 반박했다. 라비노비치의 연구는 볼셰비키가 대중의 요구, 곧 평화와 토지와 빵에 가장 일관되게 응답한 정당이었기에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는 결론을 뒷받침했다. 오를란도 파이지스는 『민중의 비극』(1996)에서 이 두 흐름을 종합하려 했으나, 1917년 자체가 우연의 연쇄였다고 보면서도 '10월 봉기에서 적색 테러와 내전으로 이어지는 선은 역사적 필연의 선'이라고 쓰는 절충적 입장을 취했다.

둘째, 그렇다면 혁명이 실제로 무엇을 달성했는가. 적어도 1917년 11월부터 1918년 1월까지의 시기에 관해서는 학파를 가리지 않고 어느 정도 합의가 존재한다. 평화 법령은 즉각적인 강화 교섭의 길을 열었고 비밀외교의 폐지를 선언했으며, 토지 법령은 지주 소유지를 무상으로 농민에게 넘겼다. 8시간 노동제, 노동자 통제, 민족 자결 선언, 시민혼과 이혼의 자유를 포함한 여성 권리 입법은 당시 어느 국가보다 앞선 사회 입법이었다. 이 조치들이 내전과 관료화 속에서 얼마나 변질되었는지는 별개의 문제이며, 바로 그 지점이 세 번째 질문이다.

셋째, 10월 혁명이 낳은 국가가 필연적으로 스탈린주의로 귀결될 운명이었는가. 전통주의 학파는 레닌의 일당 독재와 체카의 설립, 제헌의회의 해산이 이미 그 경로를 확정했다고 보았다. 수정주의자들은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 쉴라 피츠패트릭은 2017년 『런던 리뷰 오브 북스』기고문에서 내전, 봉쇄, 국제 혁명의 실패라는 구체적 조건들이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잠식해 갔으며, 그 결과는 볼셰비키의 이데올로기보다 전시 동원 체제가 제도화된 데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관점에서 보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와 함께 탄생한 국가가 결국 소비에트를 공허한 외피로 만든 것은 내전과 고립이라는 역사적 비극이지, 10월 혁명 자체의 필연적 귀결이 아니었다.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된 뒤 10월 혁명의 정당성 문제는 낡은 냉전 논쟁 이상으로 복잡해졌다. 혁명 100주년인 2017년을 전후해 출간된 여러 연구들은 한결같이 '역사적 필연'이라는 낡은 틀을 거부하고 우연과 다중적 가능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 합의의 밑바닥에는 10월 혁명이 '역사의 종착역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이었다는, 에릭 홉스봄의 '짧은 20세기' 테제가 무겁게 깔려 있다.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역사가들이 동의하는 것은 단 하나다. 1917년 11월 7일, 평범한 사람들이 세상의 질서를 뒤집을 수 있다는 가능성이 현실이 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어떻게 현실이 되고 어떻게 실패했는지를 이해하는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결과

새 정부의 첫 조치들은 즉각적인 강화 교섭, 지주 토지의 무상 분배, 8시간 노동제, 노동자 통제, 민족 자결 선언, 시민혼과 이혼을 포함한 여성 권리 입법 등 당시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사회 입법이었다. 1918년 1월 제헌의회가 소비에트 권력의 강령을 거부하자 해산되었고, 소비에트 대회가 국가 권력의 유일한 원천으로 확립되었다. 이는 의회제와 소비에트제라는 두 정통성의 충돌이었으며, 이후 내전과 소비에트 국가 건설의 출발점이 되었다.

연표

  1. 1917.09.13
    소비에트의 볼셰비키화

    코르닐로프 반란을 저지하는 과정에서 노동자 무장과 볼셰비키의 영향력이 급성장했다. 9월 13일(구력 8월 31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곧이어 모스크바 소비에트가 볼셰비키의 권력 결의안을 채택했고, 10월 8일 트로츠키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2. 1917.09.25–27
    레닌의 봉기 촉구 서한

    핀란드에 은신 중이던 레닌이 「볼셰비키는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와 「마르크스주의와 봉기」를 중앙위원회에 보내, 두 수도의 소비에트 다수파를 근거로 무장봉기를 의사일정에 올릴 것을 촉구했다.

  3. 1917.10.23
    중앙위원회, 무장봉기를 결의하다

    비밀리에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레닌이 참석한 중앙위원회가 10 대 2로 무장봉기를 당면 과제로 결의했다. 반대한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는 이후 당 외부 신문에 반대 의견을 밝혀 계획의 존재가 공공연해졌다.

  4. 1917.10.25
    군사혁명위원회 창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수도 방위를 명분으로 군사혁명위원회(MRC)를 설치했다. MRC는 수비대 각 부대에 코미사르를 파견했고, 11월 초에는 수비대 대부분이 MRC가 승인하지 않은 명령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5. 1917.11.06
    봉기 전야: 정부의 선제 조치

    케렌스키 정부가 볼셰비키 신문사를 폐쇄하고 다리를 차단하려 하자, MRC는 이를 반혁명 기도로 규정하고 인쇄소를 다시 열었으며 다리, 역, 전신국 등 요충을 차례로 확보했다. 봉기는 소비에트 대회를 지킨다는 방어의 형식으로 시작되었다.

  6. 1917.11.07
    수도 장악과 「러시아 시민들에게」

    아침까지 MRC 부대가 사실상 무저항 속에 수도의 요충을 장악했고, 레닌은 「러시아 시민들에게」 포고로 임시정부의 타도를 선언했다. 케렌스키는 전선의 병력을 구하러 수도를 떠났다. 페트로그라드의 권력 이양은 거의 유혈 없이 이루어졌다.

  7. 1917.11.07–08
    겨울궁전의 밤

    순양함 아브로라의 공포탄을 신호로 한 압박 끝에 자정 무렵 겨울궁전이 점령되었고, 안토노프-옵세옌코가 임시정부 각료들을 체포했다. 후대의 전설과 달리 대규모 돌격전은 없었으며 사상자는 극소수였다.

  8. 1917.11.07–09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봉기의 밤에 개회한 대회에서 볼셰비키와 좌파 사회혁명당이 다수를 차지했다. 멘셰비키와 우파 사회혁명당 대의원들은 봉기에 항의하며 퇴장했고, 마르토프의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안은 부결되었다. 대회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선포하며 권력 이양을 승인했다.

  9. 1917.11.08
    평화 법령, 토지 법령, 소브나르콤

    대회는 무병합·무배상의 즉각 강화와 비밀외교 폐지를 요구하는 평화 법령, 지주 토지를 무상 몰수해 농민에게 넘기는 토지 법령을 채택했다. 토지 법령은 농민 스스로 작성한 사회혁명당 계열의 위임장을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다. 이어 레닌을 의장으로 하는 인민위원회의(소브나르콤)가 구성되었다.

  10. 1917.11.10–15
    첫 반격의 격퇴와 모스크바

    케렌스키가 크라스노프의 카자크 부대와 함께 시도한 반격은 풀코보 고지에서 격퇴되었고, 수도의 사관생도 반란도 진압되었다. 모스크바에서는 페트로그라드와 달리 시가전이 벌어져 더 많은 희생 끝에 11월 15일 소비에트 측이 크렘린을 장악했다.

  11. 1917.11–12
    초기 사회 입법

    11월 11일 8시간 노동제 법령, 11월 15일 민족들의 평등과 자결을 선언한 「러시아 제 민족의 권리 선언」, 11월 27일 노동자 통제 법령이 잇따랐다. 12월에는 시민혼과 이혼의 자유를 도입한 법령들이 공포되어, 당시 세계 기준으로 가장 앞선 여성 권리 입법이 시작되었다.

  12. 1917.11.25
    제헌의회 선거

    소브나르콤은 임시정부가 예정한 제헌의회 선거를 그대로 실시했다. 사회혁명당이 최다 의석을 얻었고 볼셰비키는 약 4분의 1의 표를 얻었으나, 두 수도와 북부·서부 전선의 군대에서는 다수파였다. 소비에트와 의회라는 두 정통성이 정면으로 마주 서게 되었다.

  13. 1917.12.20
    체카의 창설

    사보타주와 반혁명에 대처한다는 목적으로 제르진스키를 의장으로 하는 전러시아 비상위원회(체카)가 설치되었다. 처음에는 소규모 조사 기구였으나, 내전이 격화되면서 훨씬 큰 권한을 가진 기관으로 성장하게 된다.

  14. 1918.01.18–19
    제헌의회의 하루와 해산

    1월 18일 개회한 제헌의회는 소비에트 권력과 첫 법령들을 승인하라는 「근로·피착취 인민의 권리 선언」 채택을 거부했다. 볼셰비키와 좌파 사회혁명당 대의원이 퇴장한 뒤 의회는 이튿날 새벽 해산되었고, 곧이어 제3차 소비에트 대회가 해산을 추인하며 소비에트를 국가 권력의 유일한 원천으로 선언했다.

관련 인물 111명

지도부7

봉기의 설계자·정부 수반블라디미르 레닌1870–1924

은신처에서 봉기를 촉구하는 서한으로 당을 움직였고, 대회에서 평화·토지 법령을 보고했으며 소브나르콤 의장이 되었다.

소비에트 의장·봉기 지휘레프 트로츠키1879–1940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군사혁명위원회를 통해 봉기의 실무를 지휘했고, 초대 외무 인민위원이 되었다.

당 조직 총괄야코프 스베르들로프1885–1919

중앙위원회 서기로 봉기 준비를 조율했고, 11월 21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 의장이 되었다.

군사혁명당중앙 위원·제헌의회 선거위원모이세이 우리츠키1873–1918

5인 군사혁명당중앙의 일원으로 무장봉기를 지휘했고, 제헌의회 소집을 위한 선거관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봉기 지휘관·초대 통상산업 인민위원빅토르 노긴1878–1924

최초의 볼셰비키 모스크바 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를 지휘해 모스크바 봉기를 성공으로 이끌었고,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초대 통상산업 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1월 4일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요구하며 사퇴했으나 3주 후 복귀했다.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아돌프 이오페1883–1927

10월 24-25일 봉기의 실무 지휘를 맡은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의장으로서 수도의 주요 시설 장악을 지휘했다.

정치국원·군사혁명당중심 위원·VRK 야전참모장안드레이 부브노프1884–1938

1917년 10월 16일 중앙위원회가 봉기 지도를 위해 선출한 정치국 7인 중 한 명이었고, 5인 군사혁명당중심의 일원이었으며,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야전참모장으로서 철도역과 기차역 장악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참여80

겨울궁전 작전 지휘관블라디미르 안토노프-옵세옌코1883–1938

MRC 서기로서 겨울궁전 점령 작전을 지휘하고 임시정부 각료들의 체포를 집행했다.

MRC 실무 지도부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1880–1948

군사혁명위원회의 핵심 실무자로 봉기의 군사 작전을 조직했다.

MRC 위원니콜라이 크릴렌코1885–1938

MRC 지도부의 일원으로 봉기에 참여했고, 곧 최고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봉기 참가·체카 창설펠릭스 제르진스키1877–1926

봉기에서 우편·전신 장악을 맡았고, 12월 창설된 체카의 초대 의장이 되었다.

민족 인민위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

중앙위원으로 봉기 결의에 참여했고, 초대 민족 인민위원으로 민족들의 권리 선언 작업을 맡았다.

사회복지 인민위원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2–1952

사회복지 인민위원으로 세계에서 가장 이른 여성 각료 가운데 한 명이 되었고, 시민혼·이혼·모성 보호 입법을 추진했다.

교육 인민위원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1875–1933

초대 교육 인민위원으로 문화·교육 정책을 맡아 새 정부의 계몽 사업을 시작했다.

노동 인민위원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1885–1937

초대 노동 인민위원으로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한 초기 노동 입법을 담당했다.

내무 인민위원알렉세이 리코프1881–1938

초대 내무 인민위원이 되었으나, 곧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요구하며 잠시 사임했다.

신중파 지도자레프 카메네프1883–1936

봉기 계획에 반대했으나 대회에서 초대 VTsIK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연립정부 협상을 이끌었다.

신중파 지도자그리고리 지노비예프1883–1936

카메네프와 함께 봉기 계획에 공개적으로 반대했으나, 혁명 뒤 당 지도부에 남았다.

모스크바 봉기 지도부예멜리얀 야로슬랍스키1878–1943

모스크바 당 센터와 군사혁명위원회의 일원으로 무장봉기를 지휘했고, 크렘린의 초대 군사위원이 되었다.

메즈라욘카 출신의 비판적 참여자다비트 랴자노프1870–1938

페트로그라드 노동조합 조직을 이끌었고 로마니아 전선 대표로 제헌의회 의원에 당선됐으나, 무장봉기 계획·제헌의회 해산·언론 탄압에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다당제 정부를 주장했다.

인민위원회의 사무국장 · 소비에트 행정기구의 설계자블라디미르 본치-브루예비치1873–1955

초대 인민위원회 사무국장(우프라블랴유쉬치 델라미)으로서 신생 정부의 행정 기구 전체를 설계·운영했고, 1918년 3월 수도를 모스크바로 이전하는 실무를 집행했으며, 「적색 테러에 관하여」 법령에 부서했다.

법무인민위원 · 법원 포고 제1호의 공동 기초자페테리스 스투치카1865–1932

10월 24일부터 스몰니에서 라트비아 소총병과 연락을 유지했고,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조사위원장을 맡았으며, 초대 법무인민위원으로서 옛 사법 제도를 폐지하는 '법원 포고 제1호'를 공동 기초했다.

첸트로발트 의장·초대 해군인민위원파벨 디벤코1889–1938

첸트로발트 의장으로서 헬싱포르스와 크론슈타트에서 수천 명의 무장 수병을 페트로그라드로 투입해 봉기의 무력적 우위를 확보했고, 크라스노프 장군을 체포했으며 제헌의회 해산을 지휘했다.

초대 농업인민위원 · 사퇴한 연립정부파블라디미르 밀류틴1884–1937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이자 제2차 소비에트 대회 볼셰비키 분파 지도부의 일원으로서 초대 농업인민위원이 되었으나, 단일 정당 내각 결정에 항의하여 11월 4일 중앙위원회와 소브나르콤에서 사퇴했다가 열흘 뒤 번복했다.

초대 식량인민위원이반 테오도로비치1875–1937

10월 26일(11월 9일) 소브나르콤 초대 식량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요구하며 11월 4일(17일) 중앙위원회와 소브나르콤에서 사퇴 성명에 서명했으나, 12월까지 직무를 계속 수행했다.

수석 선동원·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간부회원V. 볼로다르스키 (모이세이 골드시테인)1891–1918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간부회와 VTsIK 간부회 위원으로서 봉기에 참여했고, 이후 출판·선전·선동 인민위원이 되어 신문 검열과 『크라스나야 가제타』 창간을 주도했다.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군사위원게오르기 블라고느라보프1896–1938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에 의해 요새 위원으로 임명되어 10월 25일 요새 포대로 겨울궁전을 포격했고, 트루베츠코이 능보에 임시정부 각료들을 구금할 감방을 준비했다.

MRC 위원·철도역 점거 책임자블라디미르 넵스키 (페오도시 크리보보코프)1876–1937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붙노프와 함께 수도의 철도역들을 장악하는 작전을 지휘했다.

초대 법무인민위원 · 첫 소브나르콤의 일원게오르기 로모프 (오포코프)1888–1937

10월 24-25일 스몰니에서 봉기 지도에 참여했고,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초대 법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되어 첫 인민위원회의(소브나르콤)의 일원이 되었다. 11월 3일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정부를 요구하며 사퇴 성명에 서명했다.

모스크바 볼셰비키 위원·6차 대회 공동의장·자모스크보레츠키 VRK 위원미하일 올민스키1863–1933

모스크바 볼셰비키 위원회 위원, 제6차 당대회 공동의장, 자모스크보레츠키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 투쟁에 적극 참여했으며, 탐보프 및 모스크바 선거구에서 제헌의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페트로그라드 MRC 위원·제2차 소비에트 대회 대표야코프 페테르스1886–1938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무장봉기를 위한 부대 준비를 맡았고,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대표 및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혁명 직후 체카 창설에 합류했다.

모스크바 봉기 의료 지원 조직자니콜라이 세마슈코1874–1949

모스크바에서 무장봉기 준비에 참여했고, 부상자들을 위한 의료 지원을 조직했으며, 봉기 후 모스크바소비에트 의료위생부장이 되었다.

오르샤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조직한 교사-볼셰비키판텔레이몬 레페신스키1868–1944

오르샤 실업학교 수학 교사로 재직하며 10월 혁명 직전 1,500명의 노동자·병사 집회에서 소비에트 권력 투쟁을 호소했고, 혁명 후 군사혁명위원회를 통해 오르샤와 주변 16개 향에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하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당 서기국 실무자옐레나 스타소바1873–1966

봉기 전후 당 서기국의 실무를 관리한 조직가였다.

모스크바 봉기 조직가로잘리야 제믈랴치카1876–1947

지하 암호명 데몬으로 불린 조직가로 모스크바 봉기를 이끌었다.

초대 재무인민위원·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이반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1870–1928

10월 27일(11월 9일) 소브나르콤의 초대 재무인민위원으로 임명되었고,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모스크바 봉기에 참여했다. 재무인민위원직은 이론가임을 이유로 공식 취임하지 않았다.

10월 혁명 참여 및 제2차 소비에트 대회 대의원안드레이 안드레예프1895–1971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아벨 예누키제1877–1937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필리프 골로쇼킨1876–1941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이오시프 운쉴리흐트1879–1938

초대 소비에트 정부 법무인민위원이사크 시테인베르크1888–1957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스타니스와프 코시오르1889–1939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및 10월 봉기 참여마르틴 라치스1888–1938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및 봉기 지휘미하일 라셰비치1884–1928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사무국장세르게이 구세프1874–1933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표트르 스미도비치1874–1935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및 무장봉기 지도니콜라이 무랄로프1877–1937

모스크바 무장봉기 연락 담당미하일 톰스키1880–1936

10월 혁명기 포병총국 정치위원블라스 추바리1891–1939

크론시타트 볼셰비키 위원장, 케렌스키-크라스노프 저지 혼성부대 정치위원세묜 로샬1896–1917

10월 혁명 당일 크레스티 감옥에서 풀려나 즉시 수병·병사 혼성부대 정치위원으로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격 저지 전선에 투입되었고, 최고총사령부(스타프카) 점령 작전에 참여했다.

제6차 당대회 대의원·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위원아르비트 펠셰1899–1983

아르한겔스크 당 조직 대표로 제6차 대회에 참석했고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위원으로서 봉기 준비와 수행에 적극 가담했다.

레닌이 임명한 캅카스 특별 전권위원스테판 샤우먄1878–1918

1917년 12월 레닌으로부터 캅카스 특별 전권위원으로 임명되어 바쿠와 캅카스 전역에서 소비에트 권력 수립을 주도했다. 10월에는 캅카스 볼셰비키 조직 제1차 대회를 주재했다.

모스크바 당 5인 지도부 · 군사혁명위원회 위원미하일 블라디미르스키1874–1951

모스크바에서 무장봉기를 지휘한 '당 5인방(파르티나야 퍄툐르카)'의 일원이자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의 모스크바 측을 이끌었다.

겨울궁전 습격에 참가한 적위대원마트베이 자하로프1898–1972

1917년 10월 25일(구력), 지멘스·할스케 공장 적위대 분견대 소속으로 겨울궁전 습격에 참가했고, 풀코보 전투에서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반혁명 봉기 진압에도 참여했다.

발트함대 수병·경호대장아나톨리 젤레즈냐코프1895–1919

해군혁명위원회 위원으로 겨울궁전을 습격했고, 타브리다궁전 경호대장으로서 "경호대는 피곤하다" 한마디로 제헌의회를 해산시켰다.

10월 봉기 참가알렉세이 스테츠키1896–1938

민스크 군사혁명위 의장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 (먀스니캰)1886–1925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알렉산드르 슐리흐테르1868–1940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아르카디 로젠골츠1889–1938

첸트로시비리 의장보리스 슈먀츠키1886–1938

오데사 군사혁명위원회 위원드미트리 쿠르스키1874–1932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에프라임 스클랸스키1892–1925

적위대 조직그리고리 예브도키모프1884–1936

툴라 군사혁명위원회 의장그리고리 카민스키1895–1938

10월혁명 참여클라브디야 니콜라예바1893–1944

10월 혁명 참여파벨 레베데프-폴랸스키1881–1948

하리코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모이세이 루히모비치1889–1938

군사혁명위원회 위원미콜라 스크리프니크1872–1933

겨울궁전 습격 참여니콜라이 밀류틴1889–1942

10월 혁명 참여니콜라이 우글라노프1886–1937

모스크바 적위대 지휘오시프 퍄트니츠키1882–1938

10월 혁명 참가파벨 쿠로치킨1900–1989

로스토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세르게이 시르초프1893–1937

중앙전신국 인민위원스타니스와프 페스트콥스키1882–1937

군사혁명위원회 위원바실리 시미트1886–1938

겨울궁전 습격 지휘비탈리 프리마코프1897–1937

10월 봉기 참가블라디미르 폴론스키1893–1937

군사혁명위원회 위원블라디미르 스미르노프1887–1937

키이우 무장봉기 지도볼로디미르 자톤스키1888–1938

사라토프 소비에트 의장·봉기 지휘관블라디미르 안토노프-사라톱스키1884–1965

사라토프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으로서 10월 무장봉기를 지휘하고 혁명위원회를 이끌며 도시에서 소비에트 권력을 수립했다.

페트로그라드 방어 사령관미하일 무라비요프1880–1918

10월 27일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28일 페트로그라드 방어 책임자, 29일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케렌스키-크라스노프 군대에 맞서 수도를 방어했다.

RSDLP(b) 중앙위원회국 위원·『프라우다』 편집서기안나 옐리자로바-울리야노바1864–1935

중앙위원회국 위원이자 『프라우다』 편집서기로서 봉기의 조직적 기반을 준비했고, 기관지 『트카치』를 편집했다.

좌파 사회혁명당 지도자·제헌의회 의장 후보마리야 스피리도노바1884–1941

제헌의회에서 볼셰비키 분파의 지지로 의장 후보에 올랐으나 체르노프에게 153 대 244로 패했다. 의회 해산 후 볼셰비키와 결별했다.

겨울궁전 방어의 사실상 지휘관표트르 팔친스키1875–1929

10월 25-26일 밤, 키슈킨의 대리인이자 겨울궁전 방어의 사실상 지휘관으로서 추드놉스키의 체포를 명령하고 안토노프-옵세옌코를 접견했으며, 장관들의 항복 결정을 생도들에게 전달했다.

명목상의 군사혁명위원회 의장파벨 라지미르1891–1920

좌파 사회혁명당원으로서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의 형식적 의장을 맡아, 볼셰비키 주도의 봉기에 비볼셰비키 외관을 제공했다.

겨울궁전에 두 번 진입한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그리고리 추드놉스키1890–1918

10월 혁명 당시 겨울궁전 포위에서 군사혁명위원회 인민위원으로 협상자로 궁전에 두 차례 진입했으며, 그가 내부에 머물면서 방어군이 무혈로 해산되는 주요 계기가 되었다.

4월 각서로 임시정부 첫 위기를 촉발한 외무장관파벨 밀류코프1859–1943

입헌민주당 지도자로서 임시정부 외무장관에 취임했으나, 전쟁 목표를 재확인한 4월 각서로 대규모 시위를 유발했다. 이 사건은 임시정부의 첫 위기였으며 혁명으로 가는 분기점이었다.

반대 · 저항12

임시정부 수반알렉산드르 케렌스키1881–1970

봉기 당일 수도를 떠나 크라스노프 부대와 함께 반격을 시도했으나 풀코보에서 패배한 뒤 망명길에 올랐다.

멘셰비키 국제파 지도자율리 마르토프1873–1923

제2차 소비에트 대회에서 전 사회주의 정당 연립을 제안했으나 부결되자 퇴장했다.

멘셰비키 방어파 지도자알렉산드르 포트레소프1869–1934

10월 혁명을 '민주주의의 살해'이자 '바보들의 사회주의'로 규정하며 단호히 거부했다. 이후 반볼셰비키 지하조직 '러시아 부흥 연합'에 가담했고, 1919년 체카에 체포되었다.

제헌의회 의장 · 민주적 대안의 상징빅토르 체르노프1873–1952

사회혁명당의 수석 이론가이자 1918년 1월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의회는 토지 사회화법을 통과시켰으나 볼셰비키에 의해 하루 만에 강제 해산되었고, 체르노프는 이후 반볼셰비키 투쟁에 나섰다.

제2인터내셔널의 수석 이론가 · 국제적 비판자카를 카우츠키1854–1938

1918년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출간해 볼셰비키의 일당 독재와 테러를 정통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비판했고, 이에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로 반박했다. 이 논쟁은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 사회민주주의와 레닌주의의 분기점이 되었다.

아나코공산주의 이론가 · 볼셰비키 독재를 비판하다표트르 크로폿킨1842–1921

1917년 6월 페트로그라드로 귀국하여 케렌스키의 입각 제안을 거부했다. 10월 혁명 후 처음에는 평화·토지 법령을 긍정했으나, 곧 볼셰비키의 일당 독재와 적색 테러를 공개 비판했다. 레닌을 두 차례 면담해 관료제와 내전을 초래한 노선을 비난했고, 「프라우다」에 게재된 서한에서 '이것이야말로 혁명의 매장'이라 경고했다.

반볼셰비키 언론인블라디미르 부르체프1862–1942

10월 25일 아침 반볼셰비키 신문 《나셰 옵셰예 델로》를 발행했고, 같은 날 밤 트로츠키의 명령으로 체포되어 소비에트 정권의 첫 정치범이 되었다.

반볼셰비키 법철학자이반 일리인1883–1954

모스크바대학 법철학 교수로서 10월 혁명을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반볼셰비키 투쟁의 이론가로 전향했으며, 혁명 후 세 차례 체포되어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추방되었다.

케렌스키-크라스노프 봉기의 지휘관표트르 크라스노프1869–1947

11월 혁명 직후 케렌스키의 명으로 700명의 카자크를 이끌고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했으나 풀코보 고지에서 패배하고 체포되었다.

제2차 소비에트 대회 개회자표도르 단1871–1947

멘셰비키 지도자로 10월 25일 밤 제2차 소비에트 대회의 첫 회기를 개회했으나, 봉기를 규탄하는 당의 성명을 남기고 퇴장했다.

임시정부 상공장관알렉산드르 코노발로프1875–1949

겨울궁전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각료 중 한 명. 존 리드는 각료회의 테이블에 남은 코노발로프의 친필 메모 초안을 발견하고 가져갔다.

페트로그라드의 마지막 치안 전권자니콜라이 키시킨1864–1930

1917년 10월 25일 오후 특별 전권자로 임명되어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을 해임하고 바그라투니 장군을 임명했으며, 겨울궁전 방어를 조직하려 했으나 안토노프-옵세옌코에게 체포되었다.

목격 · 증언10

비판적 목격자알렉세이 고리키1868–1936

「노바야 지즌」 지면의 「때 이른 생각들」 연재에서 봉기와 새 정부의 초기 조치들을 비판적으로 기록했다.

혁명의 영화적 기록자 · 〈10월〉(1927) 감독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1898–1948

10월 혁명 10주년을 기념해 정부의 위촉으로 〈10월〉을 연출했다. 페트로그라드에서 실제 혁명 현장을 재현하며 지적 몽타주로 차리즘·종교·권력 같은 추상 개념을 영화 언어로 표현했고, 영화 사상 처음으로 레닌을 배우를 통해 스크린에 구현했다.

미국 저널리스트이자 목격자 · 『세계를 뒤흔든 10일』의 저자존 리드1887–1920

볼셰비키 정부의 외무인민위원부에서 활동하며 영문 자료 번역과 독일군 전선 배포 문서 작업을 도왔다. 제헌의회 해산 당일(1918년 1월 19일)에 레닌을 처음 만났으며, 이후 출간한 현장 기록은 레닌으로부터 "전 세계 노동자에게 추천한다"는 서문을 받았다.

페루에서 목격한 마르크스주의자 ·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준거점으로 분석호세 카를로스 마리아테기1894–1930

이탈리아 체류 중 10월 혁명 소식을 접했고, 이후 『아마우타』와 『7개 에세이』에서 러시아 혁명을 '모사가 아닌 영웅적 창조'의 모범이자 라틴아메리카 혁명의 방법론적 준거로 분석했다. "평화, 토지, 빵"이라는 구호가 안데스의 현실에서 어떻게 재창조되어야 하는지 탐구했다.

10월 혁명의 소식에 이끌려 공산주의로 전향, 이후 소비에트 러시아로 향했다.가타야마 센1859–1933

미국에서 혁명 소식을 접했으며, 1918년 멕시코를 경유해 소비에트 러시아에 도착했다.

중국 최초의 10월 혁명 옹호자 · 「볼셰비즘의 승리」(1918)의 저자리다자오1889–1927

베이징대학 도서관장으로서 1918년 7월부터 10월 혁명을 공개 지지한 첫 중국 지식인이었다. 같은 해 11월 「볼셰비즘의 승리」를 발표하여 혁명이 자본주의·제국주의 시대를 종식시키는 세계사적 전환이라고 선언했고, 베이징대학에 첫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를 조직했다.

미국 사회주의의 대변자유진 V. 뎁스1855–1926

1918년 4월 「러시아 혁명의 영혼」을 발표해 볼셰비키의 권력 장악을 환영했고, 1919년에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나는 볼셰비키다"라고 선언했다.

혁명 사학사 분석 틀을 마련한 역사학자쉴라 피츠패트릭1941–

그녀는 2017년 「What's Left?」 에세이에서 10월 혁명 사학사의 세 학파를 해석하는 틀을 제시했으며, 1991년 이후 혁명이 ‘역사적 막다른 길’이라는 합의를 분석했다.

10월 혁명을 쿠데타로 본 역사가리처드 파이프스1923–2018

그는 10월 혁명이 대중의 지지 없는 고전적 현대 쿠데타라고 주장했으며, 그 논점이 사학사 논의의 기준점이 되었다.

수정주의 역사가알렉산더 라비노비치1934–2026

1976년 저서에서 소련 기록을 바탕으로 볼셰비키가 대중적 지지를 받았으며 당이 상대적으로 개방적이고 민주적이었다고 주장해 파이프스의 쿠데타 테제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관련 용어

출처: 자료 1자료 2자료 3자료 4Leon Trotsky,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1930), https://www.marxists.org/archive/trotsky/1930/hrr/Alexander Rabinowitch, The Bolsheviks Come to Power: The Revolution of 1917 in Petrograd (1976)Rex A. Wade, The Russian Revolution, 1917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Stephen Kotkin, Stalin: Paradoxes of Power, 1878–192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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