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국가

동독

시민권 9 · 민족·국가 2 · 사건 6

역사 국가·지역의 영역은 현재 후계 국가 또는 행정구역을 합친 근사 표시이며, 당시의 정확한 국경선이 아닙니다.

시민권 인물 9전체보기

빌헬름 피크

Wilhelm Pieck
사회주의권 지도자 동독 독일 1876–1960 ○ 자연사

스파르타쿠스단에서 동독 국가원수까지, 독일 공산주의의 전 생애를 살아낸 유일한 생존 창립자

1919년 1월 15일 밤, 피크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어 에덴 호텔로 끌려갔다. 그는 동지들의 마지막 신문에 입회한 유일한 생존자가 되었다.

마부의 아들로 가구공을 거쳐 1895년 사민당에 입당, 룩셈부르크의 영향을 받아 좌파로 성장했다. 1차대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에 회부되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KPD 창립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와 함께 체포되었으나 유일하게 생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1921)과 상임위원(1931)을 거쳐, 나치 집권 후 모스크바에서 KPD 망명 지도부를 이끌며 코민테른 서기를 지냈다. 전후 귀국해 사민당과의 합당으로 SED를 창출했고, 1949년 동독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망까지 국가 원수직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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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5징집 후 반전 활동으로 군사법정 회부, 암스테르담 망명
  • 1918–1919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중앙위원
  • 1921코민테른(IC) 집행위원회 위원, 프로이센 란트타크 의원
  • 1928–1933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1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상임위원회 위원
  • 1934–1946KPD 의장 (망명 지도부)
  • 1935–1943코민테른 서기
  • 1943자유독일 국가위원회(NKFD) 공동 설립
  • 1946–1950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공동의장
  • 1949–1960독일민주공화국(GDR) 대통령

발터 울브리히트

Walter Ulbricht
사회주의권 지도자 동독 독일 1893–1973 ○ 자연사

동독을 건설하고 베를린 장벽을 세운 독일 공산주의 지도자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아무도 장벽을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공언했으나, 두 달 뒤인 8월 13일 그의 명령으로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다.

라이프치히 가구공 출신으로, 1912년 사민당에서 시작해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나치 집권 후 모스크바로 망명해 코민테른에서 활동했고, 1945년 소련과 함께 귀국해 1946년 사회주의통일당 창당을 주도했다. 1950년부터 당 제1서기로 동독을 통치하며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을 결단했고, 1963년 신경제체계로 동구권 최고 생활수준을 실현했다. 1971년 브레즈네프의 압력으로 실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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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독일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8스파르타쿠스단 및 독일공산당(KPD) 창립 참여
  • 1923–1933KPD 중앙위원, 라이히스타크 의원
  • 1933–1945모스크바 망명, 코민테른 KPD 대표
  • 1943자유 독일 국가위원회(NKFD) 결성 참여
  • 1950–1971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 중앙위 제1서기
  • 1960–1973독일민주공화국 국가평의회 의장
  • 1971브레즈네프의 압력으로 당직 사임

오토 그로테볼

Otto Grotewohl
정부 수반 동독 독일 1894–1964 ○ 자연사

분단 국가의 통합을 이끈 사회민주주의자

1946년 4월, 그는 빌헬름 피크와 함께 새로 창립된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오토 그로테볼은 바이마르기의 사회민주주의 정치가로, 나치 독재에 맞서 의회에서 반대표를 던지고 전후 소련 점령지의 독일 사회민주당을 이끌었다. 그는 처음에는 신중했지만 소련 점령 당국의 압력 속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1946년 독일 사회주의통일당의 공동 의장이 되었다. 이 통합은 동독 국가의 정치적 토대를 놓았지만, 사회민주당 내부의 자유로운 선택이 억압된 강제 통합이기도 했다. 1949년부터 동독 최초의 정부 수반을 맡은 그는 국가 건설과 소련의 영향력 사이에서 제한된 자율성을 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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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독일 사회민주당 입당
  • 1920–1926브라운슈바이크 주의회 의원
  • 1922–1924브라운슈바이크 법무·국민교육 장관
  • 1925–1933독일 국가의회 의원
  • 1945–1946소련 점령지 독일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의장
  • 1946–1950독일 사회주의통일당 공동 의장
  • 1949–1964독일민주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60–1964중병으로 사실상 정치 활동 중단
  • 1964동베를린에서 사망
비소련 혁명가 동독 독일 1907–2000 ○ 자연사

동독 '공포의 대가': 32년간 슈타지를 장악한 국가보안 수장

“사형 찬반에 대한 그 모든 헛소리 — 전부 헛소리다, 동무들. 집행하라! 필요하다면 법정 판결 없이도.” — 1982년, 슈타지 간부들 앞에서

베를린 빈민가 출신의 공산주의 투사로, 1931년 경찰관 살해 후 소련으로 망명해 NKVD 훈련을 받았다. 스페인 내전 참전 뒤 1945년 귀환하여 동독 국가보안부 창설을 주도했고, 1957년 장관에 올라 32년간 9만 명 규모의 감시 기구를 이끌었다. 슈타지는 동독 사회 전반을 통제했고, 제3세계 무장투쟁 세력과 서유럽 극좌 조직 지원으로 냉전기 사회주의권 안보 협력망을 확장했다. 1989년 체제 붕괴로 물러났고 통일 후 1931년 살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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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KPD 입당
  • 1931뷜로플라츠 경관 살해 후 소련 망명
  • 1936–1939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참전 (대위)
  • 1945베를린 귀환, 리히텐베르크 경찰서장
  • 1950국가보안부 차관 겸 국무차관
  • 1957–1989국가보안부 장관 (슈타지 수장)
  • 1976SED 정치국 정위원
  • 1993경관 살해 유죄 판결, 6년형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2전체보기

게르하르트 쉬러

Gerhard Schürer
중앙계획 기관 동독 독일 1921–2010 ○ 사망

동독의 파산을 경고했으나 체제를 구하지는 못한 국가계획위원장

내가 정치국에서 호네커에게 이 정책을 경고했을 때 나는 '사보타주'로 일축됐다.

게르하르트 쉬러는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경제 관료였다. 그는 호네커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통일' 노선이 투자보다 소비에 치우쳐 국가를 파산으로 몰고 있다고 경고했으나, 정치국에서 '사보타주'라는 비난을 받으며 18년간 후보 위원에 머물렀다. 1989년 10월 30일 크렌츠의 요청으로 제출한 「동독 경제 상황 분석」에서 서방 부채 490억 발루타마르크와 임박한 지급불능을 폭로하며 국경 통제 완화를 대가로 한 서독 차관을 제안했고, 이 보고서는 체제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결정적 문건이 되었다. 통일 후 '신뢰 남용' 혐의로 18일간 구금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났으며, 회고록 『모험과 상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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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기계공 훈련
  • 1939–1945루프트바페 복무, 비행 교관
  • 1948SED 입당
  • 1955–1958모스크바 공산당 고등학교 수학
  • 1960–1962SED 중앙위 계획·재정·기술부장
  • 1962–1965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1965년 위원장 승진
  • 1965–1989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겸 각료회의 간부위원
  • 1973–1989SED 정치국 후보위원, 1989년 11월 정위원

하랄트 예거

Harald Jäger

국경 통제관에서 장벽 개방의 명령자로

“내 부하들에게 장벽을 열라고 명령했습니다.”

하랄트 예거는 동독 국가보안부에 복무한 국경 통제 장교로, 국가의 여행 통제와 정보활동을 집행했다. 1989년 11월 9일 그는 상관의 명확한 지시를 받지 못한 채 Bornholmer Straße에 몰린 군중과 폭력 위험에 직면했다. 그는 통제 체계의 일부였지만 그날 밤 장벽을 열어 수천 명의 동독 시민이 서베를린으로 건너게 했다. 이후 그는 동독 체제의 내부 모순과 장벽 붕괴의 자유를 함께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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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바우첸에서 출생
  • 1961독일 국경경찰 자원 입대
  • 1964–1989국가보안부 여권통제부대 복무
  • 1976–1981국가보안부 법률고등학교 수학, 법학사 취득
  • 1989Bornholmer Straße 국경통과소 부지휘관
  • 1989.11.09상관의 지시 없이 국경 통과소 장벽 개방 명령
  • 1990국가보안부 해체 과정에서 해임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6전체보기

1944–1949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1944년 여름부터 붉은군대가 진주한 폴란드·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와 소련 점령지구 독일, 그리고 자력으로 해방을 이룬 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알바니아에서는 공산당이 참여하는 연립정부가 세워졌다. 각국은 토지개혁과 기간산업 국유화를 거쳤고, 1945~46년의 선거는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처럼 결과가 갈린 곳도, 폴란드와 루마니아처럼 공식 집계와 후대에 공개된 기록이 어긋나는 곳도 있었다. 1947년에 연립의 다른 정당들이 해체·분열·재판을 거쳐 밀려났고, 1946~48년에 각국 사회민주당이 공산당과 통합되었다. 같은 시기 「인민민주주의」는 소비에트와 다른 「새로운 길」로 설명되다가 1948년 12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한 형태」로 재정의되었다. 1949년까지 각국은 헌법과 단일 명부 선거로 새 체제를 확정했고, 당 안에서는 재판과 숙청이 시작되었다.

1955

바르샤바 조약 기구 창설

바르샤바 조약 기구(공식 명칭: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는 1955년 5월 14일 소련과 동유럽 7개 사회주의 국가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서명한 집단방위동맹이다. 직접적 방아쇠는 서독의 재무장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확정한 1954년 10월 파리 협정이었다. 소련은 1954년 11월 모스크바 회의에서 동맹의 실무 준비에 착수했고, 서독이 나토에 정식 가입한 지 나흘 뒤인 5월 14일 조약을 서명했다. 조약 전문은 서독의 재무장이 평화적 국가들의 안전보장에 위협이 된다고 명시했으며, 제4조는 유럽에서 회원국에 대한 무력공격 시 모든 수단을 동원한 즉각 지원을 규정했다. 이반 코네프 원수가 통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정치협의위원회가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조약은 실질보다는 외관이 앞선 동맹이었다. 소련은 이미 양자조약과 주둔군을 통해 동유럽을 장악하고 있었고,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 새 기구를 나토와 맞교환할 수 있는 유럽 집단안보체제 협상의 지렛대로 구상했다.

1961

베를린 장벽 건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8월 13일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을 둘러싸며 쌓은 156km의 경계 요새 시설이다. 1949년부터 1961년까지 350만 명의 동독 시민이 서독으로 탈출했으며, 그중 상당수가 베를린의 개방된 구역 경계를 통해 빠져나갔다. 숙련 노동자와 지식인의 대규모 유출로 동독 경제가 붕괴 직전에 이르자, 발터 울브리히트 동독 지도자는 니키타 흐루쇼프를 설득하여 경계 봉쇄를 승인받았다. 1961년 8월 3~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조약 회의에서 공식 합의가 이루어졌고, 8월 12일 밤부터 13일 새벽 사이 약 2만 5천 명의 동독 군경 병력이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철조망으로 차단했다. 서방 3국은 베를린의 4개국 공동관리 지위를 직접 침해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사적 대응을 피했고,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장벽은 전쟁보다 훨씬 낫다"고 결론지었다. 콘크리트 장벽은 이후 28년간 냉전의 상징이 되었고, 최소 140명이 장벽을 넘다 사망했다.

1968

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두브체크가 이끈 개혁운동이다. 검열 완화, 표현과 이동의 자유 확대, 경제 개혁을 내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소련은 이를 진영 이탈로 규정하고, 1968년 8월 바르샤바조약 5개국 군대를 동원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다.

1985–1989

신사고 외교와 냉전의 종식

고르바초프는 핵전쟁에는 승자가 없으며 안보는 상대를 위협해서가 아니라 상대와 함께 얻는 것이라는 「신사고」를 내걸고 소련 외교를 다시 짰다. 28년간 외무장관이던 그로미코가 물러나고 셰바르드나제가 그 자리에 앉았다.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을 거쳐 1987년 중거리핵전력조약(INF)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이 통째로 폐기되었고, 1988년 12월 유엔 연설에서 고르바초프는 일방 감군 50만과 「선택의 자유」를 선언했다. 1989년 2월에는 아프가니스탄 철군이 끝났다.

1989

1989년 동유럽 혁명

1989년, 동유럽 전역에서 공산당 일당 체제가 잇따라 무너졌다. 헝가리는 국경을 열었고, 폴란드는 원탁회의로 자유선거에 이르렀으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루마니아에서는 차우셰스쿠가 처형됐다. 결정적 차이는 고르바초프가 1956년·1968년과 달리 무력 개입을 포기한 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