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혁명
1905년 혁명에서 노동자들은 어떻게 소비에트를 발명했고, 그 패배는 1917년에 무엇을 가르쳤는가?
피의 일요일 학살로 시작된 1905년 혁명은 대중 파업과 육해군 반란, 농민 봉기가 결합한 차르 전제에 대한 최초의 전국적 도전이었다.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선출되고 즉시 소환할 수 있는 대의원 평의회, 곧 소비에트를 발명했으며, 이 기구는 파업위원회에서 인민 권력의 기관으로 성장했다. 혁명은 1907년까지 진압됐으나, 1917년에 승리할 계급과 당을 단련시켰다.
쌓여가는 화약: 농민, 노동자, 그리고 전쟁
1905년 1월 수만 명이 차르에게 청원서를 들고 겨울궁전으로 행진하기까지, 제국은 이미 10년 넘게 축적된 압력 아래 신음하고 있었다. 그 압력은 농촌, 공장, 정치체제 — 세 곳에서 동시에 솟아올랐다.
농촌에서 1861년 농노해방은 자유를 주었으나 토지는 촌락공동체(오브쉬나)에 귀속되고, 농민은 정부에 '상환금'을 49년간 납부해야 했다. 그 사이 인구는 두 배로 늘었고 1인당 경작지는 절반으로 줄었다. 1891년 대기근으로 40만 명 이상이 죽었지만, 비시네그라츠키 재무장관은 수출을 포기하지 않았다 — 「먹지 못해도 수출한다」는 그 말은 정권의 농업정책을 요약했다. 1902년 봄, 하리코프현과 폴타바현에서 수만 명의 농민이 봉기해 지주 소유의 경제소 105곳을 불태우고 약탈했다. 836명이 징역형을 받았고, 80만 루블의 배상금이 부과됐다. 1901–1904년 농민 봉기는 직전 4년의 두 배를 넘었으며(577건 대 232건), 1903년까지 전국 농민의 체납 총액은 1억 1,800만 루블에 이르렀다.
공장에서는 비테 재무장관(1892–1903)의 강압적 공업화가 1890년대 연 8% 성장을 이끌었지만, 외국 자본에 의존한 이 붐은 1899년 유럽 금융시장 수축과 함께 끝났다. 1903년까지 이어진 불황 속에 공장은 문을 닫고 노동자들은 거리로 쏟아졌으며, 살아남은 이들은 임금 삭감과 노동 강화에 시달렸다. 1902년 로스토프나도누 철도 파업은 도시 총파업으로 번져 매일 1만 5천에서 2만 명이 혁명 연설을 들었다. 1903년 여름, 남부 러시아와 자카프카스 전역에서 22만 5천 명이 파업에 참여했고, 룩셈부르크는 이 광경을 「남부 러시아 전체가 5월, 6월, 7월 내내 불타올랐다」고 기록했다. 경찰국 주바토프는 친정부 합법노조로 노동자를 길들이려 했으나, 1903년 오데사 총파업으로 그 실험은 무너졌다. 그 잔해 위에 가폰 신부가 세운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공장노동자회'는 1904년 말까지 11개 지부 약 1만 명으로 성장해, 정부가 더 이상 통제할 수 없는 세력이 되어가고 있었다.
세 번째 압력은 정권 자체에서 분출됐다. 1902년 내무장관에 오른 플레베는 무자비한 진압으로 균열을 봉합하려 했다. 그가 한 말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개혁이 아니라 작은 승리의 전쟁이다」 — 은 정권의 논리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그러나 1904년 2월 일본의 뤼순항 기습으로 시작된 러일전쟁은 작은 승리가 아니라 연속된 재앙이었다. 1904년 7월, 플레베는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원 소조노프의 폭탄에 암살됐다. 후임 스뱌토폴크-미르스키는 '신뢰의 시대'를 약속하며 검열을 풀고 젬스트보(지방자치의회) 회합을 용인했다. 이 틈을 타 1904년 11월 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젬스트보 전국대회는 입헌제와 시민적 자유를 요구하는 결의를 채택했고, 이는 전국적 '연회 캠페인'으로 확산됐다. 니콜라이 2세는 미르스키의 개혁안에서 선출직 대표의 국무회의 참여라는 핵심 조항을 삭제해버렸다.
여기에 다민족 제국의 균열이 겹쳐졌다. 유대인, 폴란드인, 핀란드인에 대한 '러시아화' 정책과 법제화된 차별은 충성심 대신 적개심을 비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압력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1903년 RSDLP 제2차 당대회에서 갈라진 볼셰비키와 멘셰비키, 테러로 정권을 압박하는 사회혁명당, 젬스트보를 발판으로 입헌군주제를 밀어붙이는 자유주의자들이 각자 제국을 향해 다른 무기를 겨누고 있었다. 동쪽에서는 패전 소식이 잇따랐다. 모든 화약은 이미 쌓여 있었다 — 성냥 하나면 충분했다.
전쟁이 깨운 것, 총성이 부순 것
1904년 2월 8일 일본 구축함이 뤼순항(포트아르투르)의 러시아 태평양함대를 기습하면서 러일전쟁이 시작됐다. 니콜라이 2세와 측근들은 '작은 승리의 전쟁'이 민중의 애국심을 불러일으켜 혁명 기운을 잠재울 것이라 믿었다. 내무장관 뱌체슬라프 폰 플레베는 세르게이 비테에게 "혁명을 막으려면 작은 승리의 전쟁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였다.
전쟁은 러시아의 군사적 무능을 낱낱이 드러냈다. 1904년 봄 압록강 도하전(4월)과 요동반도 상륙 저지 실패(5월)로 시작된 육상 패배에 이어, 8월부터는 뤼순항이 일본군에 포위됐다. 시베리아횡단철도는 완공되지 않아 증원군과 보급품을 제때 실어 나르지 못했다. 1905년 1월 2일, 148일간의 포위 끝에 뤼순항 수비대 사령관 아나톨리 스테셀 장군이 참모들과 상의도 없이 항복했다. 러시아군 사상자는 약 6천 명, 포로는 2만 명이었다. '작은 승리'는커녕 제국은 개전 1년도 안 되어 태평양의 유일한 부동항을 잃었다.
전쟁의 경제적 파장은 더 깊었다. 정부는 군사비를 50퍼센트 늘렸으나 생산과 세입은 모두 감소했다. 실질임금은 1904년 한 해에만 20퍼센트 하락했고, 생필품 가격은 치솟았다. 노동자들의 불만은 파업으로 폭발했다. 1904년 하반기 파업 건수는 전년 대비 급증했고, 바쿠에서는 12월 총파업이 발발해 사상 첫 단체협약을 쟁취하기도 했다.
정치적 균열도 깊어졌다. 1904년 7월 28일 사회혁명당 전투조직의 예고르 사조노프가 페테르부르크 거리에서 플레베의 마차에 폭탄을 투척해 암살했다. 니콜라이 2세는 강경파를 다시 앉히려 했으나 전황 악화와 반대파의 압력에 밀려 온건한 표트르 스뱌토폴크-미르스키를 내무장관으로 임명했다. '젬스트보인'을 자처한 스뱌토폴크-미르스키는 검열을 완화하고 망명자들을 사면하며 이른바 '신뢰의 시대'를 열었다. 이 틈을 타 자유주의 해방동맹은 1904년 11월 페테르부르크에서 지방자치기구(젬스트보) 전국대회를 소집해 입법의회와 시민적 자유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고, 전국에서 '연회 캠페인'을 벌여 개헌 여론을 조직했다.
이러한 물밑의 균열이 지표로 솟구친 결정적 순간이 1905년 1월의 피의 일요일이었다. 발단은 작았다. 1904년 12월, 푸틸로프 공장에서 게오르기 가폰 신부가 이끄는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 공장노동자회' 소속 노동자 4명이 해고됐다. 공장 측은 다른 이유를 댔지만, 노동자들은 조합 활동에 대한 보복으로 받아들였다. 가폰이 중재를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1905년 1월 3일 푸틸로프 공장 1만 2천500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사흘 만에 페테르부르크 625개 사업장, 12만 5천 명이 동조 파업에 합류해 도시 전체가 멈춰 섰다.
가폰은 파업의 에너지를 청원운동으로 전환하기로 결심했다. 그가 작성한 청원서는 8시간 노동제, 노동조합 결사의 자유, 보통·평등·비밀선거에 의한 제헌의회 소집, 언론·출판·집회의 자유, 그리고 "전쟁을 민중의 의사에 따라 종결할 것"을 요구했다. 15만 명 가까운 노동자가 서명했다. 이 청원은 혁명적 선언이 아니었다. "군주시여, 우리는 폐하의 궁전 담장 앞에 모였습니다"라는 경어체의 호소문이었다. 노동자들은 성상과 차르 초상화를 들고 찬송가를 부르며 '인민의 아버지' 차르에게 직접 억울함을 호소하려 했다.
정부는 청원의 정치적 요구를 '무례한' 것으로 간주하고, 노동자들의 겨울궁전 접근 자체를 막기로 결정했다. 1월 8일 저녁, 스뱌토폴크-미르스키는 차르스코예 셀로의 니콜라이 2세에게 대책을 보고했고, 차르는 "신이여 도우소서!"라고 일기에 적었다. 군대 3만 1천 명이 시내 주요 진입로에 배치됐다. 니콜라이 2세는 수도에 머물라는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날 오후 차르스코예 셀로로 떠났다.
1905년 1월 22일(구력 1월 9일) 일요일, 새벽 어둠 속에서 노동자와 가족 수만 명이 도시 외곽 6곳에 집결해 겨울궁전을 향해 행진했다. 나르바 문 앞에서는 가폰이 직접 인솔한 행렬에 보병이 사격을 가했다. 다른 지점에서도 기병대가 군도를 휘둘렀고, 네프스키 대로에서는 프레오브라젠스키 근위연대가 산책 중인 시민들을 향해 네 차례 일제사격을 가했다. 정부 공식 집계는 사망 96명·부상 333명이었으나, 혁명 진영은 수천 명이 학살됐다고 주장했다. 현대 역사학자들의 중간 추정치는 사상자 약 1천 명이다.
피의 일요일의 진정한 폭발력은 사상자 숫자가 아니라 그것이 파괴한 믿음에 있었다. 러시아 민중은 수세기 동안 차르를 '인민의 아버지(차르-바튜슈카)'로 믿어 왔다: 모든 악은 사악한 관료들이 저지르는 것이고, 차르만이 진실과 정의의 원천이라는 신화였다. 그날 겨울궁전 앞에서 울린 총성은 그 신화를 영원히 무너뜨렸다. 살아남은 가폰은 그날 밤 이렇게 썼다: "우리에게 더 이상 차르는 없다. 오늘 피의 강이 차르와 러시아 민중을 갈라놓았다." 같은 말이 노동자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번졌다: "우리에게 더 이상 차르는 없다." 1월 한 달 동안 제국 전역에서 41만 4천 명이 파업에 참여했고, 혁명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면화에서 솟아난 권력, 바다에서 가라앉은 제국
1905년 5월, 러시아 제국의 두 얼굴이 동시에 드러났다. 섬유 도시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는 노동자들이 스스로 권력을 조직했고, 쓰시마 해협에서는 차르의 해군이 바다 밑으로 가라앉았다.
'러시아의 맨체스터'라 불리던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는 6만여 명의 노동자가 살았다. 12~14시간 노동에 월급은 9~14루블, 여성 노동자는 9~12루블에 불과했다. 작업장은 유독가스와 섭씨 60도에 달하는 열기로 가득했고, 결핵은 직업병이었다. 공장주들은 '무례한 언행', '교회 불참' 같은 항목으로 벌금을 매겼고, 노동자는 월급의 3분의 1에서 절반을 벌금으로 뜯겼다.
5월 12일(구력), 바쿨린 공장 노동자들이 일제히 일을 멈추면서 총파업이 시작됐다. 사흘 만에 7만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을 이끈 것은 미하일 프룬제(당시 20세), 표도르 아파나시예프('오체츠'), 세묜 발라쇼프('스트란니크')가 이끄는 볼셰비키 조직이었다. 이들은 파업 전부터 각 공장의 요구를 조율해 통일된 요구안을 준비했고, 경제적 요구(8시간 노동, 임금 인상, 벌금 폐지)와 정치적 요구(언론·집회·결사의 자유, 제헌의회 소집)를 결합시켰다.
공장주들은 '군중과는 협상할 수 없다'며 거부했지만, 노동자들이 공장별 대표를 선출해 오자 오히려 그것이 더 큰 무기가 되었다. 5월 15일(구력 5월 13일), 탈카 강변에 모인 3만여 명의 노동자 앞에서 500명당 1명의 비율로 선출된 151명의 대의원(여성 25명 포함, 평균 연령 23세)이 전도시 소비에트를 결성했다. 각 공장 대표들이 따로 교섭하라는 것이 공장주들의 계산이었지만, 대의원들은 오히려 단일한 전도시 기구로 뭉쳤다.
이바노보 소비에트는 파업 지도부에 머물지 않았다. 노동자 민병대를 조직해 도시 치안을 맡고 파업 파괴자를 막았으며, 식량위원회를 꾸려 파업 가족들에게 빵을 공급했다. 공장주들이 식료품점의 외상을 막자 소비에트는 공장 매점을 열게 했고, 주지사가 집회를 금지하자 탈카 강변에서 매일 수만 명이 모이는 집회를 계속했다.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의 회고에 따르면, 소비에트는 '탈카 강변의 사회주의 대학'이라 불릴 만큼 매일 마르크스주의 강연과 정치 교육이 진행되는 장소였다. 이곳에서 약 200명의 혁명 활동가가 훈련되어 같은 해 10월 전국적 투쟁의 간부로 성장했다.
6월 3일, 당국이 응답했다. 경찰이 술을 먹인 아스트라한 코사크 기병대가 탈카 강변 집회를 급습해 비무장 노동자들을 무차별 사격하고 구타했다. 이에 격분한 노동자들은 공장주들의 저택과 창고에 불을 질렀다. 시는 계엄령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파업은 72일간 지속됐고, 결국 공장주들은 노동시간을 평균 10.5시간으로 단축하고 임금을 10% 인상하며 임산부와 수유모에 대한 혜택을 약속하는 양보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7월 19일 소비에트는 마지막 회의를 열고 직장 복귀를 결정했다.
같은 5월, 제국의 다른 끝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시험이 진행 중이었다.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이끄는 러시아 제2태평양함대가 7개월간 18,000해리(33,000km)를 항해해 드디어 대한해협에 도달한 것이다. 발트함대의 주력 전함 11척을 포함한 38척의 함선이었다. 목표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육군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서양을 건너고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양을 지나는 동안 선체에는 따개비가 붙고 보일러는 낡았으며 선원들의 사기는 바닥을 쳤다. 5월 27일, 도고 헤이하치로가 이끄는 일본 연합함대가 쓰시마 해협에서 로제스트벤스키 함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틀간의 전투 끝에 러시아 전함 11척 전부를 포함해 21척이 격침되거나 나포됐다. 블라디보스토크에 도달한 것은 순양함 1척과 구축함 2척뿐이었다. 사망자 5,000여 명, 포로 6,000여 명. 일본 측은 중대형함 손실이 전무했고 전사자는 117명이었다.
쓰시마는 단순한 군사적 패배가 아니었다. 유럽 열강이 비유럽 국가에 당한 최초의 결정적 해전 패배였고, 그 상대가 바로 40년 전만 해도 봉건적 고립 상태였던 일본이라는 사실이 충격을 배가시켰다. 차르 정권은 전쟁 수행 능력은 물론 국가를 지킬 능력조차 상실했음을 전 세계에 증명한 셈이었다. 패전 소식은 오데사에서 세바스토폴까지 거리로 밀려나온 군중에게 불을 붙였고, 전함 포툠킨의 수병들이 한 달 뒤 반란을 일으킨 것도 바로 그 충격의 연장선 위에 있었다.
5월의 이 두 사건, 곧 면화 먼지 속에서 피어난 최초의 소비에트와 쓰시마 해협에 수장된 제국의 함대는 1905년 혁명의 본질을 압축한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통치할 수 있는 기관을 발명했고, 차르 정권은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조차 없다는 것이 드러났다. 10월 총파업과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를 향한 길은 바로 이 5월에 놓인 것이다.
반란에서 총파업으로: 제국의 신경을 끊다
1905년 6월 27일 전함 포툠킨에서 시작된 반란은, 흔히 알려진 것과 달리 썩은 고기 한 끼가 빚어낸 우발적 폭발이 아니었다. 흑해함대 내 비밀 사회민주주의 조직인 '젠트랄카'(Tsentralka)는 수개월 전부터 함대 전체의 동시봉기를 준비하고 있었고, 6월 초 세바스토폴 회합에서 가을까지 거병 시기를 잡아두었다. 그러나 포툠킨의 장교들이 구더기 낀 고기로 끓인 보르시치를 거부한 수병들에게 사격을 명령하려 하자, 선봉에 섰던 병참사 아파나시 마튜셴코와 그리고리 바쿨렌추크는 더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제2함장 길리아롭스키가 바쿨렌추크를 쏘아 죽이자 수병들은 장교 7명을 사살하고 함상위원회를 구성했으며, 붉은 기를 올리고 오데사로 향했다.
오데사는 이미 2주째 총파업 중이었다. 포툠킨이 6월 28일 밤 입항했을 때 항구는 노동자 시위와 화재, 코사크의 발포로 아수라장이었다. 수병들은 바쿨렌추크의 시신을 오데사 계단 기슭에 안치했고, '진실을 말했다는 이유로 살해당했다'는 쪽지를 가슴에 꽂았다. 수만 명이 운집한 장례식은 정치시위로 전화했다. 당국이 군중을 향해 야간 발포를 가하자 포툠킨은 시내 고위군사회의가 열리던 극장을 향해 6인치 포탄 두 발을 쏘아 응수했으나 빗나갔다. 마튜셴코의 함상위원회는 흑해함대의 나머지 함선들이 합류하기를 기다렸지만, 크리게르 제독이 이끄는 전대와 대치하는 동안 게오르기 포베도노세츠만이 잠시 합류했을 뿐 곧 좌초당했고, 다른 함선들은 발포 명령을 거부하거나 외면했다. 석탄과 식량이 바닥난 포툠킨은 루마니아 콘스탄차로 향했고, 7월 7일 루마니아 당국에 투항했다.
포툠킨은 고립된 채 끝났지만 그 충격은 엄청났다. 차르 전제가 군대의 충성을 더는 당연히 여길 수 없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니콜라이 2세는 훗날 이 반란이 10월 선언 결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포툠킨의 패배는 수병들의 혁명 의지를 꺾지 못했다. 같은 해 11월에는 순양함 오차코프를 중심으로 한 세바스토폴 봉기가 다시 불붙었다.
포툠킨의 붉은 기가 내려진 지 석 달 뒤, 혁명은 바다가 아닌 인쇄공장에서 다시 시작됐다. 9월 19일 모스크바의 시틴 인쇄소 식자공들이 '구두점을 포함해' 1,000자당 단가 인상과 노동시간 단축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트로츠키의 표현대로 '구두점에서 시작되어 전제정을 무너뜨린' 이 파업은, 이미 금지된 인쇄노동자 조합이 조직한 집회를 통해 9월 24일까지 50개 인쇄소로 퍼졌고, 며칠 뒤 모스크바 제빵 노동자와 담배·철도 작업장으로 번졌다.
여기서 결정적 전환을 가져온 것은 철도 노동자들이었다. 1905년 4월 모스크바에서 결성된 전러시아철도노동자동맹은 1906년 1월의 두마 소집에 맞춰 총파업을 계획하고 있었으나, 10월 초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한 노선들에서 이미 자발적 파업이 속출했다. 10월 7일 모스크바-카잔 철도가 멈춘 것을 시작으로, 10월 9일까지 모스크바를 기착지로 하는 거의 모든 노선이 마비됐다. 철도동맹 중앙국은 10월 9일 페테르부르크 대의원회의에서 '8시간 노동, 시민적 자유, 사면, 제헌의회'라는 정치 슬로건을 채택해 전 노선에 타전했고, 파업은 전신선을 타고 제국의 모든 구석으로 번져갔다.
철도 파업은 단순한 노동쟁의가 아니라 제국의 신경계를 절단하는 행위였다. 기관차를 세우고 증기를 빼냈으며, 발전소를 멈추고 전신선을 끊었다. 역과 역사를 어둠 속에 가둔 파업은 오직 자체 통신과 대의원 수송 열차만을 운행시켰다. 10월 11일에는 쿠를란트 총독이 철도 파업 참가에 3개월 구금형을 선포했지만, 다음 날 페테르부르크로 가는 모든 철도가 멎었다. 시베리아 횡단철도마저 이르쿠츠크에서 첼랴빈스크까지 차례로 마비됐고, 10월 17일경에는 75만 명에 달하는 전 철도 노동자 군단 전체가 파업에 참여했다.
철도가 멎자 도시들은 식량난과 금융 공황에 빠졌다. 상품과 육류 가격이 폭등하고, 증권거래소는 패닉에 휩싸였으며, 은행은 지방 송금 중단을 선언했다. 파업은 철도에서 그치지 않고 공장·상점·약국·법원·학교로 확산됐다. 10월 10일 모스크바·하리코프·레벨에서 정치 총파업이 선포된 이래, 날마다 수십 개 도시가 멈춰 섰다. 변호사들은 변론을 거부했고 배심원들은 법정에 출석하지 않았으며, 지식인 '동맹'들도 프롤레타리아트의 파업에 합류했다. 도시들은 암흑과 침묵 속에 놓였고, 제국의 행정·경제·통신은 일제히 붕괴했다. 그 어떤 중앙 사령부도 없이, 아래로부터 스스로 조직된 이 거대한 정지는 10월 17일 선언을 향한 피할 수 없는 길이었다.
종이 한 장의 자유, 그리고 진짜 권력의 탄생
1905년 10월 13일(구력), 상트페테르부르크 공과대학 건물에 모인 40명의 노동자 대표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시작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들은 단지 인쇄공 파업을 조정하기 위해 모였을 뿐이다. 그러나 열흘 뒤 이 기구는 562명의 대의원으로 불어나 147개 공장, 34개 작업장, 16개 노동조합을 대표했고, 20만 명의 노동자가 그 결정에 귀를 기울였다. 수도 노동자 절반이 소비에트 아래 결집한 것이다.
소비에트는 애초에 당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멘셰비키가 먼저 비당파 대의원 조직을 호소했고, 볼셰비키 현지 지도부는 처음에 소비에트를 당의 경쟁자로 의심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누가 허락하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대표 선출은 공장 바닥에서 시작됐고, 선출된 대의원은 언제든 소환할 수 있었다. 금속노동자 351명이 전체의 3분의 2 가까이를 차지하며 소비에트의 중추가 됐다. 집행위원회는 22명의 대의원과 9명의 정당 대표로 구성됐다: 볼셰비키 3인, 멘셰비키 3인, 사회혁명당 3인. 일상적 의장직에는 무소속 변호사 게오르기 흐루스탈료프-노사리가 선출됐으나, 실질적 주도권은 곧 멘셰비키 진영에 합류한 26세의 레프 트로츠키와 독일-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 알렉산드르 파르부스에게 넘어갔다. 트로츠키는 소비에트 기관지 『이즈베스티야』의 편집자이자 거의 모든 결의안의 기초자였고, 파르부스는 소비에트의 전략을 입안했다.
소비에트의 첫 시험은 자신을 낳은 총파업이었다. 10월 17일, 파업에 짓눌린 니콜라이 2세는 마침내 굴복했다. 그러나 그 굴복의 뒷이야기는 선언문의 고귀한 문구가 말해주지 않는다. 차르는 먼저 삼촌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대공에게 군사독재를 맡기려 했다. 대공은 권력을 받아들이기는커녕 총을 꺼내들며, 차르가 세르게이 비테의 개혁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이 자리에서 자살하겠다고 위협했다고 전해진다. 니콜라이 2세는 마지못해 「국가질서 개선에 관한 선언」, 곧 10월 선언에 서명했다. 그 내용은 인격의 불가침, 양심·언론·집회·결사의 자유, 참정권 확대, 그리고 두마의 승인 없는 법률 제정 금지였다.
그러나 같은 날, 내무차관 드미트리 트레포프는 경찰에 「총알을 아끼지 말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개혁과 총알은 같은 날, 같은 제국의 손에서 나왔다.
이틀 뒤인 10월 19일, 대학 발코니에 선 트로츠키는 수만 명의 군중 앞에서 선언문을 움켜쥐고 외쳤다. 「시민들이여! 우리가 지배층의 등을 벽에 붙여 놓았기에 그들은 우리에게 자유를 약속한다. 그런데 약속어음이 진짜 금과 같은가? 자유의 약속이 자유 그 자체인가?」 그는 이어서 종이를 구겼다. 「여기 차르의 선언문이 있다. 보라, 내 손에 구겨진 종잇조각에 불과하다. 오늘 그들이 내줬다면, 내일은 가져가 찢어버릴 것이다. 바로 지금 내가 이 종이 자유를 찢어버리듯이!」 군중은 「사면! 사면!」으로 화답했고, 트로츠키는 트레포프의 해임과 페테르부르크에서의 군대 철수를 요구했다.
소비에트는 10월 18일 결의로 공화국과 제헌의회를 요구하며, 「투쟁하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무기를 내려놓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동시에 소비에트는 검열을 무시하고 신문을 발행하도록 인쇄공들에게 지시함으로써 사실상의 언론 자유를 선포했다. 이는 의회도, 법률도 아닌, 오직 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으로 쟁취한 자유였다.
그러나 소비에트는 냉철함도 잃지 않았다. 10월 21일, 파업이 지방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하자 트로츠키는 파업 중단을 소비에트에 제안했다. 10월 총파업은 10월 21일 정오, 수십만 노동자가 단일한 명령에 따라 일제히 작업장으로 복귀하면서 끝났다. 소비에트가 보여준 것은 단순한 조직 능력이 아니었다. 그것은 스스로 공격하고 스스로 물러설 줄 아는 하나의 권력이었다. 불과 열흘 만에, 파업위원회는 제국의 수도에서 정부에 대항하는 또 하나의 정부로 행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혁명의 '총연습': 권력이 되려 했던 50일
11월 초 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레닌은 소비에트를 둘러싼 논쟁에 곧바로 뛰어들었다. 볼셰비키 간부 보그단 크누냔츠(라딘)가 합법 일간지 『노바야 지즌』에 「소비에트인가 당인가」라는 글을 발표한 것이 발단이었다. 크누냔츠뿐 아니라 많은 볼셰비키는 소비에트가 사회민주주의 강령을 정식으로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 않으면 당의 경쟁자가 될 위험이 있다는 논리였다. 스톡홀름에서 출발하기 직전 레닌이 쓴 「우리의 임무와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는 이 논리를 뒤집었다. 소비에트는 하나의 정파에 종속될 기관이 아니라 "임시혁명정부의 맹아"이며, 망설임 없이 스스로를 전러시아 임시혁명정부로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발상은 당시 대다수 볼셰비키에게조차 급진적이었지만, 레닌은 소비에트가 비당파 노동자와 사회혁명당 계열까지 포괄하기 때문에 오히려 혁명의 정치적 중심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레닌이 귀국했을 때,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는 이미 파업위원회를 넘어선 지 오래였다. 10월 말부터 11월 중순까지 소비에트는 세 가지 전선에서 싸우고 있었다. 첫째는 8시간 노동제 투쟁: 노동자들이 자체적으로 공장을 점거하고 8시간 뒤 작업장을 걸어나오는 방식으로 제도를 밀어붙였으나, 사용자들은 일제히 직장폐쇄로 맞서 11월 12일 소비에트는 후퇴를 결정해야 했다. 트로츠키는 이 퇴각의 변론에서 유명한 말을 남겼다: "우리는 8시간 노동을 쟁취하지 못했을지 모르나, 8시간 노동의 깃발을 위해 싸울 대중을 쟁취했다." 둘째는 크론시타트 수병 재판 반대와 폴란드 계엄령 항의를 위한 11월 총파업: 11월 1일 소비에트의 파업 호소로 수도의 거의 모든 공장이 멈춰섰고, 비테 백작이 소비에트에 직접 전보로 "형제 노동자들이여" 하고 호소해야 할 정도로 압박했으나, 지방의 파업이 잦아들면서 11월 7일 파업을 종료해야 했다. 셋째는 언론의 자유: 소비에트는 검열을 거부하는 신문만 발행하도록 인쇄공들을 조직해 사실상 검열을 무력화했다.
11월 26일(구력) 정부는 소비에트 의장 게오르기 흐루스탈료프-노사르를 체포했다. 정파가 없는 노동자 변호사로 세 파벌의 타협 인물이었던 그가 사라지자, 소비에트는 새로운 집행위를 선출했고 트로츠키가 실질적인 의장이 되었다. 그러나 정세는 이미 기울고 있었다. 개별 군부대 봉기는 진압되었고 검열은 되살아났으며, 소비에트는 무장봉기 준비 결의를 통과시켰지만 실제 준비는 빈약했다. 그때 알렉산드르 파르부스가 기초하고 12월 2일 소비에트와 농민동맹, 사회주의 정당들의 공동 명의로 발표된 것이 「재무선언」이었다. 국민에게 세금 납부 거부, 예금 인출, 모든 지불에서 금화만 수취할 것을 호소한 이 선언은 단 한 달 만에 저축은행에서 9400만 루블을 빠져나가게 했지만, 비테 정부에 소비에트를 일망타진할 구실을 제공했다.
12월 3일(구력) 저녁,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자유경제학회 건물에서 회의 중이었다. 의제는 정부의 새로운 탄압 조치들: 각 지방에 계엄 선포권 부여, 사회주의 정당 금지 계획 등이었다. 갑자기 건물이 군대에 포위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경찰 장교가 체포 명령을 낭독하러 들어왔으나 트로츠키가 나무라자 물러났고, 소비에트는 계속 회의를 진행했다. 잠시 후 경찰이 밀고 들어와 대의원 약 260명 전원이 체포되었다. 무장 저항을 포기한 결정은 논란을 남겼다: 사회혁명당원들은 즉시 장관 암살로 응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소비에트의 진짜 응답은 모스크바에서 터져나왔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체포 소식은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총파업 호소로 이어졌고, 이는 12월 무장봉기로 전화했다. 트로츠키는 이듬해 재판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민의 대중봉기는 탄압으로 진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역사의 산물이며, 역사가 완성될 때까지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바리케이드 위에서 배운 것: 모스크바에서 두마까지
1905년 12월 7일, 모스크바 소비에트가 호소한 총파업은 사흘 만에 무장봉기로 전화했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지도부가 12월 3일 체포된 직후, 모스크바 볼셰비키는 남은 유일한 길이 무장 행동이라고 판단했다. 12월 9일 저녁, 피들레르 기술학교에 집결한 전투대원 약 150명이 정부군의 포격을 받으면서 봉기는 돌이킬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2발의 포탄이 쏟아진 뒤 118명이 체포되고 3명이 사망했다.
이후 엿새 동안 모스크바 거리는 바리케이드로 뒤덮였다. 노동자들은 전차를 뒤엎고, 전신주를 뽑아 가로막았으며, 건물 사이로 이동하며 사격하는 유격전을 펼쳤다. 모스크바 총독 표도르 두바소프는 수비대 1만 5천 명 중 믿을 수 있는 병력이 5천에 불과하다고 토로했다. 프레스냐 구역은 사실상의 노동자 자치구역이 됐다. 니콜라이 시미트의 가구공장은 무기고·병원·인쇄소·영안실을 겸한 봉기의 본부로 기능했다. 그러나 봉기의 핵심적 실패는 니콜라옙스카야 철도역을 확보하지 못한 데 있었다. 그 철로를 타고 12월 15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세묘놉스키 근위연대 2천 명이 도착했다. 게오르기 민 대령은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무자비하게 행동하라. 체포는 없다.」 12월 17일, 포병대가 프레스냐를 포격하기 시작했다. 시미트 공장과 프로호로프 방직공장이 불탔고, 주민들은 지하실에 몸을 숨겼다. 이튿날 아침 프레스냐 전투대 사령관 지노비 리트빈-세도이는 마지막 호소문을 남겼다: 「우리는 투쟁을 끝낸다. 우리는 이 세상에 홀로다.」
희생은 엄청났다. 두바소프 자신의 보고서에 따르면 민간인 사망자만 393명이었고, 그중 여성 48명, 아동 27명이었다. 실제 사망자는 천 명을 넘었다는 추정이 일반적이다. 민 대령의 부대는 봉기 진압 후에도 모스크바-카잔 철도를 따라 노동자 정착촌을 샅샅이 뒤지며 약식 처형을 이어갔다. 이른바 「리만 징벌대」로 불리는 이 작전에서 150명 이상이 재판 없이 총살됐다.
봉기가 끝나자 사회민주노동당 내부에서는 날카로운 논쟁이 벌어졌다. 망명지에 있던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무기를 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평했다. 레닌은 1906년 8월 「모스크바 봉기의 교훈」에서 정면으로 반박했다. 무장투쟁 자체가 잘못이 아니라, 투쟁 방식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은 군중으로 포병에 맞서지 말아야 했고, 3~4명 단위의 기동대와 수류탄을 갖춘 유격전으로 전환했어야 했다. 「봉기는 예술이며, 이 예술의 제1법칙은 대담하고 결정적인 공세」라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명제를 레닌은 다시 끌어냈다. 무엇보다도 그는 정부가 흔들리는 병력들을 돈과 술과 거짓말로 묶어두는 데 성공한 반면, 혁명가들은 그 병사들을 물리적으로 쟁취하는 싸움에서 뒤처졌다고 지적했다.
정부 쪽도 봉기에서 계산을 뽑아냈다. 1906년 3월, 니콜라이 2세는 제1차 국가두마 선거를 강행했다. 선거법은 간접·불평등 선거였고, 볼셰비키와 사회혁명당은 보이콧으로 맞섰다. 그 결과 1906년 4월 27일(구력) 개원한 두마는 입헌민주당(카데트)이 주도하는 자유주의 다수로 채워졌다. 그러나 두마 개원 직전에 공포된 「기본법」 제87조는 차르가 두마 폐회 중에도 긴급입법으로 통치할 수 있도록 규정했고, 전제 대권은 사실상 온존됐다. 대의제의 허울과 전제의 실체 사이에서 첫 두마는 토지문제를 둘러싸고 정부와 충돌한 지 두 달여 만에 해산됐다. 모스크바의 바리케이드가 무너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레닌의 표현을 빌리자면, 인민을 대표하는 듯 보이지만 전제를 대체할 수는 없는 종이 기관이었다.
올가미와 선거법: 반혁명이 스스로에게 준 20년
1907년 봄까지 제국의 감옥은 혁명가들로 넘쳐났고, 정권은 더 이상 사법 절차를 감당할 수 없었다. 1906년 8월 12일, 사회혁명당 최대주의자들이 스톨리핀의 관사를 폭파해 27명이 죽고 총리의 아들과 딸이 중상을 입자, 정부는 8월 19일 '야전군법회의에 관한 규정'을 공포했다. 이는 전시에만 존재하던 제도를 평시 82개 현으로 확대한 것으로, 계엄 또는 비상경계 상태가 선포된 지역에서 민간인을 군사재판에 회부할 수 있게 했다. 법원은 수비대장이 임명한 장교 5명으로 구성됐고, 예심도, 검사도, 변호인도, 증인 심문도 없었다. 기소장 대신 경찰의 체포 명령서가 놓였고, 판결은 48시간 안에, 집행은 24시간 안에 이뤄졌다. 사형수는 군인일 경우 총살, 민간인일 경우 교수형이 원칙이었으나, 교수 집행인이 부족해 민간인도 총살되는 일이 흔했다.
8개월간 이 법정들은 1,102건의 사형을 선고했고, 그중 683건이 집행됐다. 이는 1825년부터 1905년까지 80년간 제국 전체에서 집행된 정치범 사형 건수를 단숨에 넘어서는 숫자였다. 여기에 일반 군사법원과 민사법원의 사형까지 포함하면, 1906~1909년 사이 정치범 약 3,000명이 처형됐다. 1907년 11월 17일, 두마 연단에 선 입헌민주당 의원 표도르 로디체프는 교수대를 '스톨리핀의 넥타이'라 불렀다. 격분한 스톨리핀은 결투를 신청했고 로디체프는 사과했지만, 그 말은 이미 러시아 전역에 퍼진 뒤였다.
그러나 교수형만으로는 혁명을 끝낼 수 없었다. 핵심은 두마였다. 1907년 2월 소집된 제2차 두마는 제1차보다 더 급진적이었다: 518석 중 사회민주당 65석, 사회혁명당 37석, 트루도비키 104석, 카데트 98석이 포진했고, 정부 편은 10월당 20석과 우파 54석에 불과했다. 토지 문제를 두고 두마는 사유지 몰수를 고집했고, 정부는 이미 1906년 11월 9일 칙령으로 농민의 사유지 이탈을 허용하는 개혁을 시작한 터였다. 두마는 정부 예산을 거부했고, 좌파 의원들은 연단에서 혁명을 공개적으로 선동했다. 스톨리핀은 이렇게 적었다: '이 사람들은 말이 아니라 행동을 원한다.'
내무차관 세르게이 크리자놉스키는 1907년 5월까지 새로운 선거법의 세 가지 초안을 준비했다. 세 번째 안은 제외됐고, 첫째 안은 유대인 전용 큐리아를 신설하는 방안이었다. 채택된 둘째 안, 곧 크리자놉스키 자신이 '뻔뻔한 안(베스스티지)'이라 부른 바로 그 안은 농민과 노동자에게서 의석 할당제를 철폐하고, 그 대의원 선출권을 지주와 부유층이 다수인 현 선거인단 총회에 넘겼다. 말하자면 노동자의 대표를 지주가 골라주는 구조였다. 1907년 6월 1일, 스톨리핀은 사회민주당 두마 의원 55명이 군대 내 반란 음모에 가담했다고 발표하고 면책특권 박탈을 요구했다. 훗날 이 '음모'가 경찰의 도발로 조작된 정황이 드러났지만, 당시 두마는 독자 조사 위원회를 꾸렸고, 정부는 그 결론을 기다리지 않았다. 6월 3일 새벽, 니콜라이 2세는 두마 해산과 함께 기본법 87조를 정면으로 위반하며 새 선거법을 칙령으로 공포했다.
새 선거법은 선거인의 무게를 근본적으로 뒤집었다. 지주 큐리아에서는 선거인 1명당 유권자 230명, 제1도시 큐리아(대부르주아지)는 1,000명, 제2도시 큐리아는 15,000명, 농민은 60,000명, 노동자는 125,000명이 필요했다. 지주와 대부르주아지가 전체 선거인의 3분의 2를 차지했고, 노동자와 농민은 4분의 1에 그쳤다. 중앙아시아, 야쿠티아, 칼미크 초원은 아예 대표권을 박탈당했고, 폴란드와 캅카스의 의석은 대폭 축소됐다. 이듬해 가을 실시된 선거에서 제3차 두마는 전혀 다른 의회가 됐다: 사회혁명당과 트루도비키는 선거 자체를 거부했고, 사회민주당은 65석에서 19석으로, 트루도비키는 104석에서 10석으로, 카데트는 98석에서 53석으로 줄었다. 대신 10월당이 20석에서 148석으로, 우파가 54석에서 118석으로 뛰었다.
러시아 역사학계는 6월 3일을 1905년 혁명의 종결일로 본다. 스톨리핀은 자신에게 20년의 평화가 주어진다면 러시아를 알아볼 수 없게 바꾸겠다고 말했다. 1911년 9월 키예프 오페라 극장에서 암살자의 총에 쓰러질 때까지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5년이었다.
무엇이 남고 무엇이 남지 않았는가: 한 세기의 논쟁
1905년 혁명이 정착시킨 것과 정착시키지 못한 것을 가르는 선은 한 세기가 지나도 역사가들 사이에서 완전히 합의된 적이 없다. 그러나 그 윤곽은 분명해졌다. 혁명이 남긴 제도적 유산은 적지 않았다. 두마는 입법권을 가진 의회로 존속했고, 1906년 4월에 공포된 기본법은 차르의 대권을 유지하면서도 법률 제정에 두마의 동의를 요구했다. 검열은 법적으로 폐지됐고, 노동조합과 정당은, 비록 계속된 탄압 속에서도, 합법적 공간을 획득했다. 농민의 상환금은 1905년 11월에 폐지됐고, 1906년 3월의 임시법은 노동자 집회와 경제 파업에 제한적 합법성을 부여했다. 이 모든 것은 총파업이라는 대중의 무기가 강제한 양보였으며, 「리샤르 파이프스의 표현대로 '리볼버의 총구를 겨눈 채' 주어진 개혁이었다」고 역사가 올레크 부드니츠키는 지적한다.
그러나 혁명이 내건 근본 요구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 남았다. 농민의 토지 기아는 스톨리핀의 개혁, 공동체에서 개별 농장으로의 분리, 으로도 근본적으로 완화되지 못했고, 1917년까지 농촌의 화약고는 그대로였다. 노동시간 단축은 일부 공장에서 사실상 관철됐지만 법제화되지 않았고, 제국 소수민족의 평등권은 선언에 그친 채 실질적Russification은 계속됐다. 무엇보다 전제는 스스로를 '개헌'했을 뿐 폐지된 적이 없었다: 차르는 여전히 두마를 해산할 권리, 전시 계엄 선포권, 외교·군사에 대한 배타적 통제권을 쥐고 있었다. 1907년 6월 3일 스톨리핀이 기본법을 위반하며 선거법을 일방 개정해 노동자·농민·소수민족의 대표성을 무력화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역사학의 논쟁은 크게 세 갈래로 정리된다. 첫째, 레닌이 1920년에 정식화한 「총연습」 테제다: 1905년의 패배 자체가 1917년 승리의 필수적 준비였으며, 12월 봉기의 군사적 교훈과 소비에트라는 권력 형태의 발견이 없었다면 10월 혁명은 불가능했다는 주장이다. 이 틀에서 1905년은 그 자체의 다양한 가능성을 지닌 사건이 아니라 1917년이라는 도착점에서 소급해 의미가 부여되는 전사(前史)가 된다. 둘째, 아브라함 아셔로 대표되는 자유주의적 해석은 1905년을 「열린 국면」으로 본다: 전제는 결정적으로 약화됐고, 의회와 정당, 노조와 언론의 공간이 열렸으며,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외부 충격이 없었다면 러시아는 점진적 입헌군주제로 이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아셔는 이렇게 묻는다: 「이미 당시에 사고력 있는 사람들이 합의가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역사가가 혁명의 실패가 예정돼 있었다고 말할 근거가 어디 있는가?」
셋째, 냉전기 서구 사회사의 물결은 한편으로 레닌의 틀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했다: 혁명의 중심을 노동자 계급과 '아래로부터의 역사'에 두면서 1905년의 '패배'를 강조하고 10월 선언의 양보를 사소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 말이다. 그러나 이 관점은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급격히 재편됐다. 안드레아스 카펠러의 연구 이래 역사가들은 제국 소수민족, 폴란드인, 발트인, 핀란드인, 캅카스 민족들, 이 혁명에서 수행한 역할에 주목하기 시작했고, 1905년을 전국적 사건이 아니라 다수의 국지적 혁명이 동시에 폭발한 복합적 현상으로 보는 시각이 힘을 얻고 있다. 존 키프는 급진적으로, 「1905년 러시아 혁명 같은 사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너무나 편리한 용어라 포기할 수 없을 뿐」이라고까지 말한다.
결국 합의되는 것은 이것이다: 1905년은 실패한 봉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러시아의 정치 지형을 돌이킬 수 없이 바꾸었고, 그 변화의 일부는 반동기를 뚫고 살아남았다. 그러나 동시에 1905년은 성공한 혁명도 아니었다. 그것이 해결하지 못한 농업·민족·권력의 문제들은 12년 후 더 큰 폭발의 뇌관이 됐다. 1905년은 러시아가 갈 수 있었으나 가지 않은 길들과, 가지 않을 수 없었던 길이 교차한 지점이다.
결과
혁명은 스톨리핀의 1907년 6월 친위쿠데타로 막을 내렸고, 뒤이은 반동기에 수천 명이 처형되거나 유형에 처해졌다. 그러나 전제가 양보 없이는 통치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입증됐고, 소비에트라는 형태와 무장봉기의 경험은 노동자운동의 기억 속에 보존됐다. 레닌은 1905년을 1917년의 「총연습」이라 불렀다: 그것 없이 10월의 승리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연표
- 1904.02러일전쟁 발발
일본의 뤼순항(포트아르투르) 기습으로 러일전쟁이 시작됐다. 잇단 패전과 전시 경제난은 차르 전제에 대한 불만을 전국적으로 응축시켰다.
- 1905.01.22피의 일요일
구력 1월 9일, 가폰 신부가 이끄는 노동자와 그 가족 수만 명이 청원서를 들고 겨울궁전으로 평화 행진을 벌였으나 군대가 발포해 수백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인민의 아버지 차르」라는 신화는 그날의 총성과 함께 무너졌다.
- 1905.05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총파업과 최초의 소비에트
섬유 도시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7만여 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들어가 전권대표 소비에트를 세웠다. 프룬제 등 볼셰비키가 활동한 이 기구는 최초의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로 꼽힌다.
- 1905.05.27–28쓰시마 해전
발트 함대가 쓰시마 해협에서 궤멸하면서 전쟁 수행 능력과 정권의 권위가 함께 무너졌다. 패전은 혁명운동에 결정적 추진력을 주었다.
- 1905.06.27전함 포템킨의 반란
흑해함대 전함 포템킨의 수병들이 썩은 고기 배급과 장교들의 학대에 맞서 봉기해 붉은 기를 올렸다. 봉기는 고립된 채 끝났으나, 군대조차 전제의 확실한 도구가 아님을 보여 주었다.
- 1905.1010월 전국 정치 총파업
모스크바 인쇄공들의 파업이 철도 노동자들을 거쳐 제국 전체로 번지며 나라를 멈춰 세우는 정치 총파업이 됐다. 어떤 중앙의 명령도 없이 아래로부터 확산된 이 파업은 대중 자기조직의 위력을 입증했다.
- 1905.10.26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결성
구력 10월 13일, 파업 노동자 대표들이 상트페테르부르크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결성했다. 공장에서 선출되고 즉시 소환 가능한 대의원들로 이루어진 이 기구는 파업 지도부에서 사실상의 대항권력으로 성장했으며, 트로츠키가 지도적 역할을 맡았다.
- 1905.10.3010월 선언
구력 10월 17일, 총파업에 몰린 니콜라이 2세는 비테의 권고에 따라 시민적 자유와 입법 두마를 약속하는 선언에 서명했다. 자유주의자들은 이 양보에 만족해 이탈했으나,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은 그것을 혁명을 무장해제시키기 위한 종잇조각으로 보았다.
- 1905.11.21레닌의 귀국
레닌이 망명을 끝내고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그는 소비에트를 당의 경쟁자가 아니라 봉기의 기관이자 새로운 혁명 권력의 맹아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 1905.12.16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체포
구력 12월 3일, 정부가 트로츠키를 비롯한 소비에트 대의원 수백 명을 체포했다. 수도의 소비에트는 진압됐으나, 그 응답으로 모스크바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다. 트로츠키는 이듬해 재판에서 법정을 연단으로 바꾸어 봉기의 권리를 변론했다.
- 1905.12.20–31모스크바 12월 무장봉기
모스크바 소비에트의 총파업 호소가 무장봉기로 전화했다. 노동자 전투대는 프레스냐 구역의 바리케이드를 지켰으나 세묘놉스키 근위연대의 포격으로 진압됐고, 천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레닌은 이 봉기에서 다음 혁명이 배워야 할 군사적 교훈을 끌어냈다.
- 1906.05.10제1차 국가두마 개원
구력 4월 27일, 제1차 국가두마가 개원했으나 직전에 공포된 기본법은 차르의 전제 대권을 온존시켰다. 두마는 토지문제를 둘러싼 충돌 끝에 두 달여 만에 해산됐다.
- 1906.08스톨리핀의 야전군법회의
총리 스톨리핀은 야전군법회의를 도입해 약식 재판과 교수형으로 혁명운동을 진압했다. 수천 명이 처형되거나 유형에 처해졌고, 교수대의 올가미는 「스톨리핀의 넥타이」라 불렸다.
- 1907.06.166월 3일 체제: 스톨리핀의 친위쿠데타
구력 6월 3일, 스톨리핀은 제2차 두마를 해산하고 기본법을 어기며 선거법을 개정해 노동자와 농민의 대표권을 대폭 축소했다. 이 친위쿠데타로 혁명은 막을 내렸으나, 소비에트의 경험은 1917년에 되살아나게 된다.
관련 인물 120명
주도 · 집행4
야전군법회의의 약식 처형과 1907년 6월의 친위쿠데타로 혁명을 종결시킨 총리였다.
제2대 총리이반 고레미킨1839–19171906년 4월 비테의 후임으로 총리가 되어 제1두마의 개혁 요구를 거부했고, 7월 두마를 해산한 후 스톨리핀에게 자리를 넘겼다.
1907년 '뻔뻔한' 선거법을 설계한 법률가세르게이 크리자놉스키1862–1935크리자놉스키는 1907년 선거법의 세 가지 초안을 작성했으며, 지주들이 노동자와 농민 선거인단으로부터 대의원을 선택하도록 한 최종안을 스스로 '뻔뻔한 것'이라고 불렀다.
진압과 개혁을 동시에 명령한 책임자드미트리 트레포프1855–1906상트페테르부르크 총독으로서 군대에 '총알을 아끼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면서도 10월 선언의 개혁 약속을 추진한 인물이다.
지도부32
망명지에서 무장봉기를 주장하다 11월에 귀국해 소비에트를 새 혁명 권력의 맹아로 파악했으며, 훗날 1905년을 1917년의 「총연습」이라 불렀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의장레프 트로츠키1879–194026세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지도적 인물로 떠올라 총파업을 이끌었고, 체포된 뒤 재판에서 봉기의 권리를 변론했다.
이바노보 파업 지도자미하일 프룬제1885–1925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총파업을 이끌며 최초의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건설에 참여했고, 12월에는 모스크바 봉기의 바리케이드에서 싸웠다.
코스트로마 소비에트 의장·전투대 지휘자알렉세이 가스테프1882–19391905년 코스트로마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고 전투대를 이끌었으며, 이듬해 RSDLP 제4차 대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치타 무장봉기 지도자이반 바부시킨1873–19061905년 이르쿠츠크·치타 RSDDP 위원으로 《자바이칼스키 라보치》를 편집했고, 쿠르나톱스키·코스튜시코-발류자니치와 함께 치타 무장봉기를 지도했다. 1906년 1월 노동자 무기 호송 중 멜레르-자코멜스키 징벌대에 체포되어 현장 즉결재판으로 총살당했다.
크라스노야르스크 무장봉기 지휘자보리스 슈먀츠키1886–19381905년 혁명 당시 크라스노야르스크 철도 작업장에 바리케이드를 친 약 800명 규모의 볼셰비키 전투대를 지휘했으며, 여기에는 펠처학교 여학생들로 구성된 적십자 의무대도 포함되었다. 봉기 진압 후 사형 선고를 받았으나 1906년 1월 탈출하여 '일리야 실린'이라는 가명으로 지하 활동을 이어갔다.
볼셰비키 전투조직 지도자미하일 트릴리세르1883–19401905~1906년 카잔·페테르부르크·핀란드에서 볼셰비키 전투·군사조직을 조직했고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베아보르크 봉기(1906년)의 주요 조직자였으며 핀란드 군사조직의 지도자로서 탐메르포르스 군사·전투조직 회의에서 연설했다. 1906년 말 비보르크에서 체포된 병사·수병 약 100명의 탈출을 지휘했다.
키이우 혁명 집회 지도자·철도파업위원회 의장알렉산드르 슐리흐테르1868–19401905년 10월 키이우에서 수천 명의 혁명 집회를 이끌었고, 시두마 발코니 연설에서 무장봉기를 호소해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았다. 남서철도 파업위원회 의장을 맡았고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1·2차 전러시아 철도노동자 대회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총파업 조직가안드레이 부브노프1884–19381905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총파업을 조직했고, 모스크바에서 12월 무장봉기에 참여했다. RSDRP 제4차·제5차 대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하리코프 12월 무장봉기 지도자표도르 세르게예프 (아르툠 동지)1883–1921하리코프에서 1905년 12월 무장봉기를 지도했고, 봉기 진압 후 체포되어 감옥에서 탈출했다. 1906년 RSDRP 제4차 대회 대의원.
예카테리노슬라프 소비에트 서기·볼셰비키 두마 의원그리고리 페트롭스키1878–19581905년 예카테리노슬라프(현 드니프로) 노동자대표 소비에트의 서기로 선출되어 파업과 시위를 조직했고, 이후 두마 의원으로 선출되어 합법적·비합법적 투쟁을 결합했다.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이반 테오도로비치1875–19371905년 10월 볼셰비키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총파업과 소비에트 조직화를 지도했으며, 당 중앙기관지 「노바야 지즌」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RSDLP 중앙위 전투기술단(BTG) 책임자레오니트 크라신1870–1926중앙위원회 산하 전투기술단(BTG)을 이끌며 전러시아적 규모로 무기 조달, 폭탄 제조, 전투대 훈련을 조직했다. 합법적 신분(기술자·사업가)을 위장으로 삼아 당의 군사·재정 활동을 지휘했다.
소르모보 공장 파업 조직가니콜라이 세마슈코1874–1949니즈니노브고로드의 소르모보 공장에서 1905년 총파업을 조직하고 노동자 전투대를 이끌었으며, 체포·유형을 겪었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파업·소비에트 지도자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1880–19481905년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총파업과 노동자대표 소비에트 조직을 지도했으며, 프룬제와 함께 최초의 소비에트 건설에 참여했다. 이후 볼셰비키 군사조직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모스크바 당위원회 서기·12월 봉기 지도부로잘리야 제믈랴치카1876–19471905년 모스크바 볼셰비키 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어 12월 무장봉기의 지도부에서 활동했으며, 전투대 조직과 노동자 동원을 담당했다.
예카테리노슬라프 당위원회 위원·서기세라피마 고프네르1880–19661905년 혁명기 예카테리노슬라프(현 드니프로) 볼셰비키 위원회의 서기로 활동하며 파업·시위·전투대 조직을 지도했다. RSDRP 제4차 대회 대의원으로도 선출되었다.
페테르부르크 볼셰비키 위원회 서기세르게이 구세프1874–19331905년 혁명기 볼셰비키 페테르부르크 위원회 서기로 선출되어 수도에서의 당 활동과 총파업·소비에트 조직화를 지휘했으며, 이후 오데사와 모스크바에서도 혁명 활동을 지속했다.
레벨(탈린) 소비에트 조직자미하일 톰스키1880–1936에스토니아 레벨(현 탈린)에서 1905년 노동자대표 소비에트를 조직하고 총파업을 이끌었으며, 혁명 후 체포·유배되었다.
라트비아 게릴라 분대 지휘관얀 베르진1889–1938라트비아에서 1905~1907년 '숲의 형제들'로 불린 게릴라 분대를 지휘하며 차르 군경과 교전했고, 발트 지역 무장투쟁의 핵심 조직자였다.
볼셰비키 '제2인자'·중앙위원회 대표알렉산드르 보그다노프1873–19281905년 RSDRP 제3차 대회에서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서 중앙위원회 대표로 활동했다. 당시 당내에서 '위대한 비지에르'라 불릴 정도로 레닌 다음 가는 실질적 지도자였으며, 12월 2일 소비에트에서 체포되었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집행위원·선동부장표트르 크라시코프1870–193910월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집행위원으로 선출되고 당위원회 선동부장을 맡았으며, 12월 소비에트 회의 중 체포되어 크레스티 감옥에 수감되었다.
PPS 좌파 지도자펠릭스 콘1864–1941수병 봉기 조직드미트리 마누일스키1883–1959사회혁명당 지도 · 두마 의원빅토르 체르노프1873–1952레벨 소비에트 의장니콜라이 얀손1882–19381905년 11월 레벨(탈린) 노동자대표소비에트 의장으로 선출되어 혁명기 투쟁을 이끌었으며, 그해 1월 '피의 일요일'을 현장에서 목격했다.
소비에트 전략가·「재무선언」 기초자알렉산드르 파르부스1867–1924트로츠키와 함께 소비에트의 사실상 지도자였고, 『루스카야 가제타』를 공동 편집하며 전략을 입안했다. 12월에 「재무선언」을 기초했다.
포툠킨 반란을 지휘한 병참장아파나시 마튜셴코1879–1907아파나시 마튜셴코는 바쿨린추크 사망 후 포툠킨호 반란을 지휘하고 함상 위원회 의장을 맡았으며, 루마니아 망명을 교섭했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초대 의장게오르기 흐루스탈료프-노사리1877–19191905년 10월 14일 무소속 노동 변호사로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상징적 수장으로 선출되었다.
1905년 모스크바 12월 봉기 진압을 지휘한 총독표도르 두바소프1845–1912모스크바 총독으로서 12월 봉기 진압을 지휘했으며, 바리케이드를 포격하기로 결정했고, 1만 5천 명 수비대 중 믿을 수 있는 병력이 5천 명뿐이라고 솔직히 인정했다.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볼셰비키 지도자, 첫 소비에트 공동 조직자세묜 발라쇼프1874–1925당명 '스트란니크'로 활동하며 미하일 프룬제와 함께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에서 첫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와 총파업을 지도했다.
프레냐 전투부대 지휘관지노비 리트빈-세도이1879–1947마지막 성명을 발표하며 봉기 서사를 마감했다.
참여73
1905년 귀국해 소비에트와 멘셰비키 언론에서 활동했으며, 혁명의 전술과 전망을 놓고 볼셰비키와 논쟁했다.
국제 혁명가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1905년 12월 바르샤바로 잠입해 혁명에 뛰어들었다가 이듬해 체포됐고, 이 경험에서 「대중파업」을 썼다.
선동가알렉산드라 콜론타이1872–1952피의 일요일 행진의 현장에 있었고, 이후 파업 지원과 여성 노동자 조직화에 뛰어들었다.
지하조직 서기나데즈다 크룹스카야1869–1939당 중앙위원회의 서기로 귀국해 지하 연락망과 통신을 운영했다.
캅카스 조직가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캅카스에서 파업과 전투대를 조직했고, 1905년 말 탐메르포르스 당협의회에서 레닌을 처음 만났다.
선전가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1875–19331905년 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와 합법 볼셰비키 일간지 「노바야 지즌」에서 혁명의 선전을 맡았다.
청원 행진 주도자게오르기 가폰1870–1906겨울궁전 청원 행진을 조직한 사제로, 학살 뒤 혁명과 경찰 사이를 오가다 경찰과의 연계가 드러나 1906년 살해됐다.
볼셰비키 군사조직가예멜리얀 야로슬랍스키1878–1943야로슬라블과 모스크바에서 노동자 조직과 당의 군사·전투 활동을 맡았고, 탐메르포르스 당협의회에 참가했다.
모스크바 볼셰비키 조직자이자 혁명의 첫 순교자니콜라이 바우만1873–19051905년 10월 총파업 중 모스크바에서 노동자들을 시위에 참여시키려다 군주주의자의 공격을 받아 사망했다. 10월 20일 그의 장례식은 10만 명 이상이 참가한 거대한 정치 시위로 전환되었으며, 볼셰비키 전투대가 무장 시위를 벌이며 다가올 봉기의 예행연습이 되었다.
멘셰비키 이론가파벨 악셀로트1850–19281905년 혁명기 멘셰비키의 대중정당 노선을 대표한 이론가였다.
사회혁명당 청년마리야 스피리도노바1884–19411906년 억압적 관리를 처단한 사회혁명당의 젊은 혁명가였다.
우파 볼셰비키 조직가알렉산드르 추루파1870–1928우파에서 쿠구셰프 공작 영지 관리인으로 위장 취업해 1905년 파업과 지하인쇄소를 조직했으며, 이스크라 요원으로 활동했다.
1905년 볼셰비키 입당 및 제4차 당대회 대의원아르카디 로젠골츠1889–19381905년 혁명기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이듬해 스톡홀름에서 열린 RSDRP 제4차(통합) 대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모스크바 볼셰비키 선동가이네사 아르만트1874–19201905년 혁명기 모스크바에서 볼셰비키 당원으로 활동하며 노동자 선동과 조직화에 참여했고, 수차례 체포·유형을 겪었다.
모스크바 12월 무장봉기 참여자드미트리 쿠르스키1874–19321905년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에 바리케이드 전투원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볼셰비키 당의 군사·전투 조직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전투대(boevaya druzhina) 대원가브릴 먀스니코프1889–19451905~1906년 페름과 모토빌리하에서 볼셰비키 무장투쟁반(보예바야 드루지나) 대원으로 활동하며 차르 경찰과 전투를 벌였다.
사라토프 멘셰비키 조직원이반 마이스키1884–1975사라토프에서 1905년 혁명에 참여했고, 혁명 참여로 체포되어 토볼스크로 유배되었다. 당시 멘셰비키 파에 속해 있었다.
무기 밀반입·전투대 조직가카모1882–19221905년 혁명기 트빌리시와 캅카스 각지에서 볼셰비키 전투대를 조직하고 무기 밀반입을 담당했으며, 여러 차례 무장 강탈(엑스) 작전에 참여했다.
볼셰비키 청년 선동가레오니트 세레브랴코프1888–19371905년 혁명기 17세의 나이로 볼셰비키에 입당해 루간스크와 도네츠크 분지에서 노동자 선동과 파업 조직에 참여했다.
리가 볼셰비키 조직가·제4차 당대회 대의원미하일 보로딘1884–19511905~1907년 라트비아 리가에서 볼셰비키 조직을 이끌며 파업과 무장투쟁을 조직했고, 1906년 스톡홀름 제4차 당대회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모스크바 12월 무장봉기 참여자미하일 포크롭스키1868–1932모스크바에서 1905년 12월 무장봉기에 바리케이트 전투원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볼셰비키 전투조직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모스크바 무장봉기 바리케이드 전투원니콜라이 무랄로프1877–19371905년 12월 모스크바 무장봉기에서 프레스냐 지구 바리케이드에서 싸웠으며, 이후에도 볼셰비키 군사·전투 활동에 계속 참여했다.
오데사 볼셰비키 조직원오시프 퍄트니츠키1882–19381905년 혁명기 오데사에서 볼셰비키 조직원으로 활동하며 파업과 시위에 참여했고, 혁명 후에도 지하 활동을 지속했다.
모스크바 볼셰비키 조직원표트르 스미도비치1874–19351898년부터 당원으로 활동한 올드볼셰비키. 1905년 혁명기 모스크바에서 노동자 선동과 파업 조직에 참여했으며, 세 혁명(1905, 2월, 10월)을 모두 관통한 지하 활동가였다.
리가 지하 볼셰비키 조직원얀 루주타크1887–19381905~1909년 라트비아 리가와 빈다바(벤츠필스)에서 볼셰비키 지하 조직원으로 활동하며 노동자 선동과 파업에 참여했다.
볼셰비키 언론인·무기 조달책바츨라프 보롭스키1871–19231905~1906년 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합법·불법 언론 활동에 종사했으며, 발트 해를 통한 무기 구매와 밀반입 작전에도 참여했다.
볼셰비키 지하 조직 건설자블라디미르 넵스키 (페오도시 크리보보코프)1876–19371905년 혁명기 로스토프나도누와 남러시아 각지에서 볼셰비키 지하 조직을 건설하고 노동자 선동·파업을 조직했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참가자·언론인유리 스테클로프1873–1941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에 참여했으며, 합법·불법 사회민주주의 언론에서 혁명을 선전하는 기사와 팸플릿을 발표했다.
볼셰비키 지하 활동가예브게니 자먀틴1884–19371905년 혁명기 볼셰비키 지하 조직원으로 활동했으며, 이후 1917년까지 일관되게 당의 불법 활동에 참여했다.
카잔 볼셰비키 위원·불법신문 『라보치』 발행인블라디미르 아도라츠키1878–19451905년 여름 카잔 볼셰비키 위원회 위원(총 10명)이 되어 불법 기관지 『라보치』(1905년 7월 3일 창간)의 발행을 책임졌다. 같은 해 12월 체포되어 아스트라한 주로 유형되었다.
SDKPiL 바르샤바 중앙위 지도자레오 요기헤스1867–19191905년 봄 바르샤바로 들어가 SDKPiL 중앙위원회를 설립하고 지하 활동을 지휘했으며, 이듬해 체포되어 8년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가 탈옥했다.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집행위원알렉산드르 세레브롭스키1884–1938멘셰비키 신문 편집인알렉산드르 포트레소프1869–1934세르게이 대공 암살 지휘보리스 사빈코프1879–1925볼셰비키 입당 · 공장 노동다닐 술리모프1890–1937멘셰비키 신문 편집인표도르 단1871–1947무장 강도단 지도자그리고리 코톱스키1881–1925볼셰비키 입당인노켄티 스투코프1887–1936세르게이 대공 암살 실행이반 칼랴예프1877–1905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혁명 참여이반 코롯코프1885–1949혁명 활동이반 크세노폰토프1884–1926혁명운동 시작이반 톱스투하1889–1935멘셰비키 청년활동가레프 크리츠만1890–1938제1차 러시아 혁명 참가리디야 포티예바1881–19751905년 혁명 참가솔로몬 로조프스키1878–1952라트비아 사민당 입당마르틴 라치스1888–1938볼셰비키 입당 · 노동자 운동미하일 카가노비치1888–1941모스크바 봉기 무기 공급미하일 케드로프1878–1941볼셰비키 신문 편집 참여미하일 올민스키1863–193310월당 공동 창립미하일 로댠코1859–1924모스크바 소비에트 대의원 · 무장봉기 참여미하일 블라디미르스키1874–1951훔메트 가입나리만 나리마노프1870–1925지하인쇄소 혁명활동니콜라이 글레보프-아빌로프1887–1937사회혁명당원 활동니콜라이 콘드라티예프1892–1938모스크바 무장봉기 참가니콜라이 수하노프1882–1940카데트당 창당파벨 밀류코프1859–1943지하 혁명활동플라톤 케르젠체프1881–1940이바노보 파업 참가파벨 포스티셰프1887–1939볼셰비키 합류표트르 보그다노프1882–1938볼셰비키 입당표트르 코가노비치1887–1938라트비아 사민당 입당로베르트 에이헤1890–1940볼셰비키 활동그리고리 소콜니코프1888–1939노동자 조직티모페이 사프로노프1887–1937분트 가입V. 볼로다르스키 (모이세이 골드시테인)1891–1918볼셰비키 입당 · 철도 정비공바실리 시미트1886–1938멘셰비키 활동볼로디미르 자톤스키1888–1938볼셰비키 입당야코프 유롭스키1878–1938세르게이 대공 암살 조직예브노 아제프1869–1918소비에트 SR 분파 지도자니콜라이 압크센티예프1878–1943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에서 사회혁명당(SR) 3인 대표단을 이끌었으며, 3개 정파(볼셰비키·멘셰비키·SR)의 협력 체제에서 SR 측을 대표했다.
개혁을 시도한 내무장관표트르 스뱌토폴크-미르스키1857–1914플레베 암살 이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신뢰의 시대’를 열었으며, 1904년 11월 젬스트보 대회가 헌법을 요구하도록 허용했으나, 이 개혁의 흐름은 곧 피의 일요일로 무너졌다.
프레스냐 봉기의 재정 및 군수 후원자니콜라이 시미트1883–1907니콜라이 시미트는 프레스냐 봉기에 자금을 대고 무장시켰으며, 자신의 공장을 무기고·병원·영안실로 전환했다. 그는 1905년 12월 17일 체포되었고, 그의 공장은 세묘놉스키 연대의 포격을 받았다.
제2태평양함대 사령관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1848–1909발트함대를 이끌고 쓰시마 해전에 참전했으나 일본 해군에 참패했다.
창립일의 초대 의장보구스와프 즈보로프스키생몰년 미상피터스부르크 소비에트 창립일에 의장으로 기록되었고, 다음 날 크루스탈료프노사르로 교체되었다.
반대 · 저항4
발포와 계엄으로 혁명에 맞섰고, 총파업에 몰려 서명한 10월 선언의 양보를 반동기에 하나씩 되물렸다.
초대 총리세르게이 비테1849–191510월 선언을 기초해 자유주의자들을 정권 편으로 돌려세움으로써 혁명 진영을 분열시켰다.
성무원 검사장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1827–1907일체의 입헌적 양보에 반대해 온 전제정치의 수호자였으나, 총파업이 강요한 10월 선언 직후 25년 만에 성무원 검사장직에서 물러났다.
‘스톨리핀의 넥타이’라는 말로 교수대를 고발한 두마 의원표도르 로디체프1854–19331907년 11월 17일 두마 연설에서 교수대를 ‘스톨리핀의 넥타이’라고 부르며 억압을 고발했고, 이에 스톨리핀이 결투를 신청했으며 이 표현은 이후 탄압의 상징이 되었다.
대상 · 피해2
목격 · 증언5
피의 일요일 전야의 대표단에 참여하고 학살을 규탄하는 호소문을 써 체포됐으며, 혁명운동의 자금을 모았다.
망명지의 원로 이론가게오르기 플레하노프1856–1918망명지에서 모스크바 봉기를 두고 「무기를 들지 말았어야 했다」고 평해, 봉기의 교훈을 강조한 레닌의 반박을 불렀다.
혁명의 원로베라 자술리치1849–1919나로드니키에서 마르크스주의로 건너간 원로로 1905년을 지켜봤다.
사면으로 석방된 정치범니콜라이 모로조프1854–19461905년 10월 사면으로 슐리셀부르크 요새에서 25년 만에 석방되었다.
도덕적 증언자레프 톨스토이1828–19101906년 논문 「시대의 종말」에서 1905년 혁명을 폭력이 아닌 도덕적 재생의 시작으로 해석했고, 스톨리핀의 처형을 규탄한 「나는 침묵할 수 없다」(1908)로 국제적 반향을 일으켰다.
관련 용어
출처: 자료 1자료 2자료 3Abraham Ascher, The Revolution of 1905, 2 vols., Stanford University Press, 1988–1992Teodor Shanin, Russia, 1905–07: Revolution as a Moment of Truth, Yale University Press, 1986Solomon M. Schwarz, The Russian Revolution of 1905: The Workers’ Movement and the Formation of Bolshevism and Menshevism,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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