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러시아

시민권 193 · 민족·국가 1131 · 사건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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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권 인물 193전체보기

비사리온 그리고리예비치 벨린스키

Виссарион Григорьевич Белинский
작가·예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11–1848 ○ 폐결핵

러시아 급진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로 불린 문학 비평가

러시아가 구원을 찾을 곳은 신비주의도 금욕주의도 아니다. 계몽, 인도주의, 그리고 인간 존엄의 각성이다. — 고골에게 보낸 편지, 1847년

비사리온 벨린스키는 러시아 문학 비평의 창시자이자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급진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로 불린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텔레스코프』, 『조국의 수기』, 『동시대인』 등 주요 문예지를 무대로 활동하며 푸시킨·고골·레르몬토프·도스토옙스키의 재능을 세상에 알렸다. 헤겔 철학을 거쳐 사회주의로 나아간 그의 사상은 '문학은 사회를 위해 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집약되며, 이는 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를 거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먼 선구가 되었다. 1847년 고골에게 보낸 서한에서 농노제와 전제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이 편지는 차르 검열하에서 필사본으로 유통되며 페트라솁스키 서클과 후대 혁명가들에게 지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29–1832모스크바대학 문학부 수학, 반농노제 희곡으로 퇴학
  • 1834『텔레스코프』지에 『문학적 환상』 발표로 비평가 데뷔
  • 1838–1839『모스크바 관찰자』 비공식 편집자
  • 1839–1846『조국의 수기』 수석 비평가, 러시아 최고의 비평가로 부상
  • 1841헤겔주의 '현실과의 화해' 단계를 극복하고 스스로 사회주의자로 선언
  • 1846–1848네크라소프의 『동시대인』에서 비평 활동, 『1847년 러시아 문학 개관』 집필
  • 1847고골의 『친구와의 왕복서한선』을 규탄하는 공개서한 작성, 필사본으로 전국 유포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게르첸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Герцен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12–1870 ○ 폐렴

러시아 농민사회주의의 창시자, 《종》의 발행인

「우리는 해방하는 자와 함께, 그가 해방하는 한 함께 간다」 — 1858년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을 환영하며 《종》에 게재한 논설에서.

러시아의 작가·철학자이자 '러시아 사회주의'의 창시자. 농민 공동체(오브시나)에 기초해 자본주의를 우회하는 사회주의 이행론을 정립했다. 런던 망명 중 발행한 《종》(콜로콜)은 개혁기 여론을 움직였다.

상세 이력 보기
  • 1829–1833모스크바 대학 물리수학부 수학, 후보자 학위 취득
  • 1835–1842반정부 모임 혐의로 체포, 페름·뱟카·블라디미르·노브고로드 유형
  • 1842–1847모스크바에서 서구파 지식인으로 활동, 소설 《누구의 죄인가》 발표
  • 1847러시아를 영구히 떠나 유럽 망명
  • 1852런던 정착, 자유 러시아 인쇄소 설립
  • 1855–1868연감 《북극성》 발행, 푸시킨·레르몬토프의 금지시와 자유주의 논설 수록
  • 1857–1867주간지 《종》(콜로콜) 발행, 러시아 개혁 여론 주도
  • 1864–1870제네바에서 망명 출판 지속, 만년의 《과거와 사색》 집필 완성

니콜라이 플라토노비치 오가료프

Николай Платонович Огарё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13–1877 ○ 사망

게르첸과 함께 《종》을 편집한 러시아 유토피아 사회주의 이론가

「우리는 이 언덕 위에서, 목숨을 바쳐 우리가 선택한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 1827년 참새 언덕에서 열다섯 살의 오가료프와 게르첸이 러시아 해방을 위해 나눈 평생의 맹세.

러시아의 시인·철학자이자 혁명적 민주주의자. 1827년 참새 언덕에서 게르첸과 러시아 해방을 위한 평생의 맹세를 나누었으며, 런던 망명 중 《종》(콜로콜)과 《북극성》을 공동 발행하며 개혁기 러시아 여론을 움직였다. 농민 공동체에 기초한 '러시아 사회주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비밀 조직 '토지와 자유'의 창설에 참여했으며, 귀족기에서 라즈노친치기 혁명운동으로의 이행을 이론적으로 매개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29–1833모스크바 대학 물리수학부 및 윤리정치학부 수학
  • 1834–1839학생 서클 참여로 체포, 펜자 유형 및 주지사 사무실 근무
  • 1841–1846유럽 체류, 베를린 대학 수강, 첫 시 《Otechestvennye Zapiski》 발표
  • 1846–1856펜자 영지에서 벨로오무트 농민 1,800명 해방, 공동체 경영 실험, 첫 시집 출간
  • 1856–1867런던 망명, 게르첸과 자유 러시아 인쇄소·《종》·《북극성》 공동 운영
  • 1861–1863비밀결사 '토지와 자유' 공동 창설, 폴란드 봉기 지지
  • 1865–1877제네바 이주 후 런던 귀환, 바쿠닌 협력, 그리니치에서 사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акуни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14–1876 ○ 병사

마르크스의 가장 위대한 라이벌: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의 창시자이자 제1인터내셔널 분열의 중심

1869년 바젤 대회에서 "가장 열정적인 혁명가도 절대 권력을 쥐면 1년 안에 차르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 『국가와 무정부』

트베리 귀족 출신,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의 창시자. 제1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와 대립하다 1872년 헤이그 대회에서 축출되었고, 『국가와 무정부』(1873)로 무국가 연방주의를 체계화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29–1835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 — 소위 임관 후 상관 모독으로 면직, 모스크바 스탄케비치 서클 합류
  • 1840–1842베를린 대학 — 헤겔 좌파 합류, 가명 쥘 엘리자르로 「독일에서의 반동」 발표
  • 1843–1847파리·브뤼셀 — 프루동·마르크스와 교류, 폴란드 독립 연설로 프랑스 추방
  • 1848–1849프라하 범슬라브 대회, 프라하·드레스덴 봉기 지도 — 작센·오스트리아 사형 선고, 종신형 감형
  • 1851–1861러시아 송환 — 페트로파블롭스크·슐리셀부르크 6년, 시베리아 유형 후 일본·미국 경유 탈출
  • 1861–1864런던 망명 — 게르첸 『콜로콜』 편집 참여, 폴란드 봉기(1863) 지원 원정 실패
  • 1864–1868이탈리아 —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 결성, 『혁명적 카테키즘』(1865–66) 집필, 국제형제단 창설
  • 1868–1872제1인터내셔널 가입, 국제사회주의민주동맹 조직 — 마르크스와 투쟁, 1872년 헤이그 대회 축출
  • 1872–1876루가노·로카르노 — 『국가와 무정부』(1873), 미완성 『신과 국가』 집필, 베른에서 병사

민족·국가적 배경 인물 1131전체보기

비사리온 그리고리예비치 벨린스키

Виссарион Григорьевич Белинский
작가·예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11–1848 ○ 폐결핵

러시아 급진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로 불린 문학 비평가

러시아가 구원을 찾을 곳은 신비주의도 금욕주의도 아니다. 계몽, 인도주의, 그리고 인간 존엄의 각성이다. — 고골에게 보낸 편지, 1847년

비사리온 벨린스키는 러시아 문학 비평의 창시자이자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급진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로 불린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텔레스코프』, 『조국의 수기』, 『동시대인』 등 주요 문예지를 무대로 활동하며 푸시킨·고골·레르몬토프·도스토옙스키의 재능을 세상에 알렸다. 헤겔 철학을 거쳐 사회주의로 나아간 그의 사상은 '문학은 사회를 위해 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집약되며, 이는 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를 거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먼 선구가 되었다. 1847년 고골에게 보낸 서한에서 농노제와 전제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이 편지는 차르 검열하에서 필사본으로 유통되며 페트라솁스키 서클과 후대 혁명가들에게 지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29–1832모스크바대학 문학부 수학, 반농노제 희곡으로 퇴학
  • 1834『텔레스코프』지에 『문학적 환상』 발표로 비평가 데뷔
  • 1838–1839『모스크바 관찰자』 비공식 편집자
  • 1839–1846『조국의 수기』 수석 비평가, 러시아 최고의 비평가로 부상
  • 1841헤겔주의 '현실과의 화해' 단계를 극복하고 스스로 사회주의자로 선언
  • 1846–1848네크라소프의 『동시대인』에서 비평 활동, 『1847년 러시아 문학 개관』 집필
  • 1847고골의 『친구와의 왕복서한선』을 규탄하는 공개서한 작성, 필사본으로 전국 유포

알렉산드르 이바노비치 게르첸

Александр Иванович Герцен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12–1870 ○ 폐렴

러시아 농민사회주의의 창시자, 《종》의 발행인

「우리는 해방하는 자와 함께, 그가 해방하는 한 함께 간다」 — 1858년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을 환영하며 《종》에 게재한 논설에서.

러시아의 작가·철학자이자 '러시아 사회주의'의 창시자. 농민 공동체(오브시나)에 기초해 자본주의를 우회하는 사회주의 이행론을 정립했다. 런던 망명 중 발행한 《종》(콜로콜)은 개혁기 여론을 움직였다.

상세 이력 보기
  • 1829–1833모스크바 대학 물리수학부 수학, 후보자 학위 취득
  • 1835–1842반정부 모임 혐의로 체포, 페름·뱟카·블라디미르·노브고로드 유형
  • 1842–1847모스크바에서 서구파 지식인으로 활동, 소설 《누구의 죄인가》 발표
  • 1847러시아를 영구히 떠나 유럽 망명
  • 1852런던 정착, 자유 러시아 인쇄소 설립
  • 1855–1868연감 《북극성》 발행, 푸시킨·레르몬토프의 금지시와 자유주의 논설 수록
  • 1857–1867주간지 《종》(콜로콜) 발행, 러시아 개혁 여론 주도
  • 1864–1870제네바에서 망명 출판 지속, 만년의 《과거와 사색》 집필 완성

니콜라이 플라토노비치 오가료프

Николай Платонович Огарёв
이론가 러시아 러시아 1813–1877 ○ 사망

게르첸과 함께 《종》을 편집한 러시아 유토피아 사회주의 이론가

「우리는 이 언덕 위에서, 목숨을 바쳐 우리가 선택한 싸움에서 결코 물러서지 않을 것을 맹세한다」 — 1827년 참새 언덕에서 열다섯 살의 오가료프와 게르첸이 러시아 해방을 위해 나눈 평생의 맹세.

러시아의 시인·철학자이자 혁명적 민주주의자. 1827년 참새 언덕에서 게르첸과 러시아 해방을 위한 평생의 맹세를 나누었으며, 런던 망명 중 《종》(콜로콜)과 《북극성》을 공동 발행하며 개혁기 러시아 여론을 움직였다. 농민 공동체에 기초한 '러시아 사회주의' 이론을 발전시키고 비밀 조직 '토지와 자유'의 창설에 참여했으며, 귀족기에서 라즈노친치기 혁명운동으로의 이행을 이론적으로 매개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29–1833모스크바 대학 물리수학부 및 윤리정치학부 수학
  • 1834–1839학생 서클 참여로 체포, 펜자 유형 및 주지사 사무실 근무
  • 1841–1846유럽 체류, 베를린 대학 수강, 첫 시 《Otechestvennye Zapiski》 발표
  • 1846–1856펜자 영지에서 벨로오무트 농민 1,800명 해방, 공동체 경영 실험, 첫 시집 출간
  • 1856–1867런던 망명, 게르첸과 자유 러시아 인쇄소·《종》·《북극성》 공동 운영
  • 1861–1863비밀결사 '토지와 자유' 공동 창설, 폴란드 봉기 지지
  • 1865–1877제네바 이주 후 런던 귀환, 바쿠닌 협력, 그리니치에서 사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바쿠닌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акунин
비소련 혁명가 러시아 러시아 1814–1876 ○ 병사

마르크스의 가장 위대한 라이벌: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의 창시자이자 제1인터내셔널 분열의 중심

1869년 바젤 대회에서 "가장 열정적인 혁명가도 절대 권력을 쥐면 1년 안에 차르보다 더 나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 『국가와 무정부』

트베리 귀족 출신, 집산주의적 아나키즘의 창시자. 제1인터내셔널에서 마르크스와 대립하다 1872년 헤이그 대회에서 축출되었고, 『국가와 무정부』(1873)로 무국가 연방주의를 체계화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29–1835페테르부르크 포병학교 — 소위 임관 후 상관 모독으로 면직, 모스크바 스탄케비치 서클 합류
  • 1840–1842베를린 대학 — 헤겔 좌파 합류, 가명 쥘 엘리자르로 「독일에서의 반동」 발표
  • 1843–1847파리·브뤼셀 — 프루동·마르크스와 교류, 폴란드 독립 연설로 프랑스 추방
  • 1848–1849프라하 범슬라브 대회, 프라하·드레스덴 봉기 지도 — 작센·오스트리아 사형 선고, 종신형 감형
  • 1851–1861러시아 송환 — 페트로파블롭스크·슐리셀부르크 6년, 시베리아 유형 후 일본·미국 경유 탈출
  • 1861–1864런던 망명 — 게르첸 『콜로콜』 편집 참여, 폴란드 봉기(1863) 지원 원정 실패
  • 1864–1868이탈리아 — 혁명적 사회주의 조직 결성, 『혁명적 카테키즘』(1865–66) 집필, 국제형제단 창설
  • 1868–1872제1인터내셔널 가입, 국제사회주의민주동맹 조직 — 마르크스와 투쟁, 1872년 헤이그 대회 축출
  • 1872–1876루가노·로카르노 — 『국가와 무정부』(1873), 미완성 『신과 국가』 집필, 베른에서 병사

직접 연루된 역사 사건 12전체보기

1905–1907

1905년 혁명

피의 일요일 학살로 시작된 1905년 혁명은 대중 파업과 육해군 반란, 농민 봉기가 결합한 차르 전제에 대한 최초의 전국적 도전이었다.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선출되고 즉시 소환할 수 있는 대의원 평의회, 곧 소비에트를 발명했으며, 이 기구는 파업위원회에서 인민 권력의 기관으로 성장했다. 혁명은 1907년까지 진압됐으나, 1917년에 승리할 계급과 당을 단련시켰다.

1917.02–07

2월 혁명

1917년 2월 혁명은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방직 노동자들이 세계 여성의 날에 빵과 전쟁 종식을 요구하며 시작한 파업에서 출발했다. 파업은 며칠 만에 총파업으로 번졌고, 발포 명령을 받은 수비대 병사들이 노동자 편으로 돌아서면서 차르 체제는 무너졌다. 그 결과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이중권력이었다. 공식 권한은 임시정부가 가졌지만, 노동자와 병사의 실질적 충성은 소비에트에 있었다.

1917.10–1918.01

10월 혁명

1917년 가을 코르닐로프 반란이 좌절된 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가 다수파가 되었고, 트로츠키가 이끄는 군사혁명위원회가 수도 수비대의 충성을 확보했다. 11월 7일(구력 10월 25일)의 봉기는 페트로그라드에서 거의 유혈 없이 수도를 장악했으며, 같은 날 밤 개회한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권력 이양을 승인했다. 대회는 즉시 평화에 관한 법령과 토지에 관한 법령을 채택하고, 레닌을 수반으로 하는 인민위원회의(소브나르콤)를 구성했다.

1917.12–1918.11

브레스트 강화와 독일의 동방 점령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는 군대가 사라진 소비에트 러시아가 독일과 맺은 강요된 평화였다. 1917년 12월 시작된 협상에서 혁명전쟁, 「전쟁도 강화도 아니다」, 즉시 강화의 세 노선이 당을 갈랐고, 1918년 2월 독일의 공세 뒤 레닌은 사임을 내걸고 3월 3일의 조약 수용을 관철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발트·핀란드에 대한 권한과 인구의 3분의 1을 내주었고,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헤트만 정권을 세우고 핀란드 내전에 파병하며 발트에 자국 우산 아래의 공국들을 구상했다. 11월 독일의 패전으로 조약은 폐기되었지만, 정전협정 12조로 발트에 남은 독일군과 붉은 군대, 각국 민족정부, 백군이 마주한 공백은 이듬해 국경 지대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1917–1921

우크라이나 혁명과 전쟁

1917년 3월 키예프에 세워진 중앙라다는 연방 러시아 안의 자치에서 출발해 1918년 1월 독립을 선언했지만, 그 뒤 4년 동안 키예프의 주인은 열 번 넘게 바뀌었다. 소비에트군, 독일 점령군과 헤트만 스코로파츠키, 빈니첸코와 페틀류라의 디렉토리아, 데니킨의 백군, 폴란드군이 차례로 도시를 차지했고, 그 사이에서 흐리호리우와 마흐노의 농민군은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 전쟁을 벌였다. 1,500건 안팎의 포그롬으로 유대인 수만 명이 살해되었다. 1920년 바르샤바 협정과 1921년 리가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독립전쟁은 끝났고,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형식적 국가 지위와 볼셰비키 중앙의 실질적 통제라는 모순이 남았다.

1918–1922

내전과 열강의 개입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소비에트 공화국은 백군 장군들과 십여 개 열강의 개입군에 포위된 채 생존을 건 전쟁을 치렀다. 트로츠키가 조직한 붉은 군대는 500만 명 규모로 성장해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 브란겔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했고, 노동자와 농민 다수는 지주와 구체제의 복귀보다 소비에트 권력을 선택했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참혹했다. 전쟁과 기근, 전염병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양측 모두가 자행한 테러와 전시의 비상 통치는 이후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8.11–1920.10

발트 독립전쟁과 국경의 강화

1918년 11월 독일이 무너진 뒤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신생 정부는 붉은 군대, 러시아 백군, 독일 자유군단이라는 세 세력 사이에서 국가를 만들어야 했다. 영국 함대의 지원과 핀란드 의용군, 토지개혁으로 농민을 얻은 에스토니아는 1919년 초 붉은 군대를 밀어냈고, 자국 땅에서 출발한 유데니치의 북서군이 페트로그라드 앞에서 무너지자 이를 무장해제한 뒤 1920년 2월 타르투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첫 독립 승인 조약을 맺었다. 라트비아는 스투치카의 소비에트 정부, 폰 데어 골츠의 독일군과 니에드라의 친독 정부, 베르몬트-아발로프의 리가 공격을 차례로 이겨 냈고, 리투아니아는 리트벨을 물리쳤지만 폴란드에 빌뉴스를 잃었다. 1920년 한 해에 맺어진 타르투·모스크바·리가·타르투(핀란드) 조약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북서 국경을 그렸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분쟁은 남았다.

1921–1922

1921~1922년 대기근

1921~1922년 대기근은 제1차 세계대전·혁명·내전으로 황폐해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1921년 봄 극심한 가뭄이 덮치면서 시작되어 1922년까지 이어진 대규모 기아 참사다. 전시공산주의의 곡물 강제 징발로 농민의 파종 여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가뭄이 볼가·우랄·우크라이나·크림·바시키르·타타르·카자흐 등 35개 구베르니야를 강타했고, 철도 마비는 구호 물자 수송을 가로막았다. 총인구 약 9천만 명 중 최소 2천8백만 명이 굶주렸고 약 500만 명이 아사와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해외 원조를 받아들이고 교회 재산을 몰수했으며, 미국 구호청(ARA)이 2만1천여 개 급식소에서 매일 1천만 명 이상을 먹이며 가장 큰 구호를 제공했다. 이 경험은 전시공산주의 폐기와 신경제정책(NEP) 도입을 결정적으로 밀어붙였다.

1922.12

소련의 결성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야·자캅카스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대등한 자격으로 연방조약을 맺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했다. 공화국들을 러시아 연방에 편입하려던 자치화안은 레닌의 개입으로 폐기되었고, 탈퇴권을 명시한 대등한 공화국들의 연방이라는 원칙이 채택되었다. 뒤이은 코레니자치야(토착화) 정책은 민족 언어와 민족 간부를 국가가 체계적으로 육성한, 당대 세계에 전례가 없는 민족정책이었다.

1987–1991

경제 개혁 논쟁과 500일 계획

1987년 국영기업법과 1988년 협동조합법으로 시작된 경제 개혁은 계획도 시장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를 낳았다. 기업은 임금을 올릴 자유를 얻었지만 가격은 묶여 있었고, 돈은 늘고 물건은 줄면서 재정 적자와 상점의 빈 진열대가 함께 커졌다. 1989년 여름에는 쿠즈바스와 돈바스의 광부 수십만 명이 파업에 나서 비누 한 장까지 요구 목록에 올렸다. 1990년 여름 샤탈린과 야블린스키가 500일 만에 시장경제로 이행한다는 「500일 계획」을 내놓았고 옐친의 러시아공화국이 이를 지지했지만, 고르바초프는 리시코프 정부의 온건안과의 절충을 택했다.

1991

노보오가료보 협상과 신연방조약

1991년 3월 국민투표에서 연방 유지가 76%의 찬성을 얻자, 고르바초프는 이를 마지막 정치적 자본으로 삼았다. 4월 23일 그는 모스크바 교외 노보오가료보 별장에서 러시아의 옐친을 포함한 9개 공화국 정상과 「9+1 성명」을 발표하고, 소련을 주권 공화국들의 자발적 연방으로 재편하는 신연방조약 협상을 시작했다. 발트 3국과 그루지야 등 6개 공화국은 처음부터 불참했다. 여름 내내 세금 징수권과 연방·공화국 권한을 놓고 밀고 당긴 끝에 조약안이 만들어졌고, 서명일은 8월 20일로 잡혔다. 7월 말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의 심야 회동은 서명 뒤 크류치코프·파블로프 등 강경파를 교체하기로 합의했는데, 이 대화는 KGB의 도청으로 당사자들에게 그대로 새어 들어갔다.

1991

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

1991년 8월,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으려는 보수 강경파가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크류치코프·야조프·파블로프 등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옐친이 전차 위에 올라 저항하고 시민이 결집하면서 사흘 만에 무너졌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연방의 해체를 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