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1934

나치 집권과 수권법

선거로는 한 번도 과반을 얻지 못한 나치당이 어떻게 2년 남짓 만에 바이마르 공화국을 일당 독재로 바꿀 수 있었는가?

대공황으로 의회 다수가 무너지자 1930년부터 대통령 긴급명령에 기댄 대통령 내각이 이어졌고, 나치당은 선거와 돌격대의 거리 폭력으로 제1당이 되었다.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은 서로를 주적으로 삼아 갈라져 있었다. 1932년 프로이센 쿠데타로 공화국의 마지막 보루가 무너졌고, 히틀러를 길들일 수 있다고 믿은 보수 엘리트가 1933년 1월 30일 그를 총리로 앉혔다.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으로 기본권이 정지되고 공산당이 분쇄되었으며, 3월 23일 사회민주당만 반대한 수권법으로 정부는 의회 없이 법을 만들 권한을 얻었다. 노조와 정당이 해체되고, 1934년 「장검의 밤」과 힌덴부르크의 죽음으로 히틀러는 총통이 되었다.

독일대공황과 대통령 내각

1929년 10월 월스트리트 붕괴는 미국 차관에 기대어 겨우 회복하던 독일 경제를 다시 무너뜨렸다. 1차 세계대전 배상금 부담까지 겹쳐 실업이 치솟았고, 1932~1933년 정점에서 실업률은 30%, 실업자는 600만 명 가까이에 이르었다. 1932년 여름에는 조직 노동자의 40%가 일자리를 잃었거나 단축 노동을 하고 있었다. 위기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약점을 그대로 드러냈다. 그동안 정부를 이끌어 온 중도 정당들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고, 유권자는 양 극단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1 2

1928년 선거 뒤 사회민주당의 헤르만 뮐러가 이끌던 5당 대연정은 1930년 3월 27일 무너졌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은 중앙당의 하인리히 브뤼닝을 총리로 임명했다. 브뤼닝은 예산 균형과 수출 회복을 위해 긴축 신용과 임금·급여 삭감, 곧 디플레이션 정책을 택했다. 7월 의회가 예산안을 부결하자 그는 헌법 제48조의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이를 시행했다. 의회가 사회민주당·공산당·나치당과 국가인민당 일부의 표로 긴급명령을 236 대 222로 무효화하자, 힌덴부르크는 7월 18일 의회를 해산했다. 3 1

1930년 9월 14일 선거는 정치 지형을 바꾸었다. 사회민주당은 10석을 잃고도 577석 가운데 143석으로 제1당을 지켰지만, 나치당은 12석에서 107석으로 뛰어올랐고 독일 공산당도 23석을 늘려 제3당이 되었다. 브뤼닝 정부는 의회 다수를 잃었고, 대통령의 지지로 의회 대신 긴급명령에 기대어 통치하는 세 차례 「대통령 내각」의 첫 번째가 되었다. 사회민주당은 나치의 집권을 막는다는 이유로 브뤼닝을 묵인했지만, 그의 디플레이션 정책은 경제를 더 나쁘게 만들었고 그는 「기아 총리」라는 별명을 얻었다. 3 4 1

독일거리의 내전과 갈라진 노동운동

선거와 함께 거리의 폭력도 커졌다. 공산당의 적색전선투사동맹과 나치 돌격대가 맞붙는 시가전이 일상이 되었고, 1931년 말까지 돌격대 쪽 사망자는 47명, 적색전선 쪽은 약 80명에 이르렀다. 프로이센은 1931년 3월 갈색셔츠단 금지를 다시 시행했다. 그해 10월 11일에는 후겐베르크의 독일국가인민당과 나치당, 철모단 지도부, 범독일연맹 등이 바트하르츠부르크에 모여 브뤼닝 정부에 맞선 「국민적 반대파」 연합인 하르츠부르크 전선을 결성했다. 사회민주당은 12월 16일 자유노조 총연맹(ADGB)·국기단 흑적금과 함께 철의 전선을 만들어 거리에서 공화국을 지키겠다고 나섰다. 5 6 7

그러나 나치에 맞서야 할 두 노동자 정당은 서로를 주적으로 보았다. 1928년 코민테른 제6차 대회는 자본주의의 「제3기」를 선언하고 사회민주주의를 공산주의자의 주적으로 규정했다. 스탈린은 일찍이 1924년 사회민주주의를 「파시즘의 온건한 날개」로 부르며 둘은 대립물이 아니라 「쌍둥이」라고 했다. 독일에서는 1929년 사회민주당이 지휘하던 베를린 경찰이 노동절 시위에 나선 공산당 노동자들에게 발포한 「피의 5월」과 적색전선투사동맹 금지가 이 「사회파시즘」론의 증거로 쓰였다. 사회민주당 쪽에서도 쿠르트 슈마허가 1930년 공산당을 「붉은 칠을 한 나치의 분신」이라 불렀고, 프로이센에서는 공산당이 나치와 함께 사회민주당 주 정부를 무너뜨리려는 주민 투표에 나섰다가 실패했다. 8

에른스트 텔만이 이끄는 공산당은 사회민주당을 「사회파시스트」로 규정했고, 그 결과 두 당의 반나치 공동전선은 불가능해졌다. 같은 공산주의 운동 안에서도 반론이 있었다. 레프 트로츠키는 1932년 3월 「파시즘이 권력을 잡으면 거대한 탱크처럼 너희의 두개골과 척추 위를 굴러갈 것」이라며 사회민주당 노동자들과의 투쟁적 통일만이 승리를 가져온다고 썼다. 다만 그가 말한 통일전선은 「따로 행진하고 함께 친다」는 전술적 공동 행동이었고, 사회민주당에 대한 비판을 거두자는 것은 아니었다. 역사가 시어도어 드레이퍼는 훗날 사회파시즘론과 그 실천을 1933년 1월 독일 파시즘이 승리한 주요 요인의 하나로 꼽았다. 9 8

나치가 합법 노선 뒤에 무엇을 준비하고 있는지 보여 준 사건도 있었다. 1931년 11월 25일 헤센 나치당을 떠난 빌헬름 셰퍼가 판사 출신 나치당원 베르너 베스트가 쓴 쿠데타 계획서를 프랑크푸르트 경찰에 넘겼다. 「복스하임 문서」라 불린 이 초안은 공산당 봉기를 가정해 돌격대가 국가 권력을 넘겨받고, 모든 정치적 반대파를 곧바로 세울 강제수용소에 「예방」 구금하며, 저항은 사형으로 다스린다고 적었다. 헤센 내무장관 빌헬름 로이슈너는 나치당을 대역죄로 기소하고 금지하려 했지만, 나치를 「길들이려」 한 그뢰너와 슐라이허의 노선 아래 베스트는 1932년 10월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받았다. 10

독일1932년: 대통령 선거에서 프로이센 쿠데타까지

1932년 대통령 선거는 공화국 정당들이 지지한 현직 힌덴부르크와 히틀러, 공산당의 텔만이 겨룬 삼파전이었다. 4월 10일 결선에서 힌덴부르크가 53.0%로 이겼고, 히틀러는 36.8%, 텔만은 10.2%를 얻었다. 사흘 뒤 브뤼닝 정부는 정치 폭력의 주범이라는 이유로 돌격대와 친위대를 금지했고, 거리의 폭력은 곧바로 크게 줄었다. 그러나 나치를 끌어들여 권위주의 정부를 세우려던 국방군 정치 장교 쿠르트 폰 슐라이허에게 이 금지는 걸림돌이었다. 그는 5월 8일 의회 해산과 금지 해제를 약속하고 히틀러에게서 새 정부를 지지하겠다는 약속을 받아 냈고, 스승인 빌헬름 그뢰너를 국방·내무장관에서 몰아냈다. 5 11

5월 30일 힌덴부르크는 브뤼닝을 해임했다. 의회가 아니라 대통령의 요구로 물러난 첫 바이마르 총리였다. 후임은 중앙당에서 이탈한 귀족 프란츠 폰 파펜이었고, 슐라이허가 직접 고른 그의 「남작 내각」은 의회에 기반이 거의 없었다. 파펜 정부는 6월 4일 의회를 해산하고 6월 중순 돌격대·친위대 금지를 풀었다. 한 달 사이 전국의 충돌로 99명이 죽고 1,125명이 다쳤다. 7월 17일 함부르크 근교의 노동자 거리 알토나에서는 7,000명의 돌격대가 「붉은 알토나」를 행진하다 공산당 지지자, 경찰과 충돌해 18명이 죽었다. 「알토나의 피의 일요일」이다. 11 4 2 12

파펜은 알토나 사건을 구실로 삼았다. 7월 20일 힌덴부르크의 긴급명령으로 1920년 이래 사회민주당·중앙당·민주당 연정이 다스려 온 독일 최대의 주 프로이센의 정부, 곧 사회민주당 오토 브라운의 내각이 해임되고, 파펜이 제국 판무관이 되었다. 같은 날 두 번째 명령은 프로이센의 집행권을 국방장관 슐라이허에게 넘기고 기본권을 제한했다. 「프로이센 쿠데타」다. 해임된 주 정부는 프로이센 경찰이나 국기단을 동원하는 저항을 거부했고, 대량 실업 속에서 총파업은 실현 가능하지 않다고 보았다. 사회민주당 의장 오토 벨스도 같은 판단이었다. 주 정부는 국사재판소에 제소하는 법적 길을 택했고, 괴벨스는 이튿날 일기에 「빨갱이들은 위대한 시간을 놓쳤다. 그 시간은 다시 오지 않는다」고 썼다. 13 14

국사재판소의 판결은 양쪽 모두에 일부씩 손을 들어 주었다. 대통령이 총리를 판무관으로 세워 프로이센 장관들의 권한을 일시로 넘겨받게 한 것은 합헌이지만, 해임된 주 정부가 제국의회와 제국참의원에서 프로이센을 대표할 권리까지 빼앗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국 정부는 판결을 무시했고, 판무관의 일이 끝난 뒤에도 정당한 정부에 권력을 돌려줄 뜻이 없었다. 법원은 이미 만들어진 사실 앞에 굴복해 헌법 위반을 사실상 용인했고, 법사학자 미하엘 슈톨라이스는 이 판결을 공화국 몰락의 헌정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로 꼽았다. 쿠데타로 허물어진 연방 구조는 이듬해 히틀러가 제국을 중앙집권화하는 길을 닦았다. 13

독일두 번의 선거와 1월 30일

7월 31일 선거에서 나치당은 37.3%, 608석 가운데 230석을 얻어 처음으로 제1당이 되었다. 바이마르 시대 한 정당의 최다 의석이었다. 나치당과 공산당을 합치면 과반이어서, 두 당 가운데 하나를 넣지 않고는 어떤 다수 연정도 만들 수 없었다. 헤르만 괴링이 의회 의장이 되었고, 히틀러는 총리직을 요구하며 파펜이 내민 부총리 자리를 거절했다. 8월에는 오버슐레지엔 포템파에서 공산당원을 살해한 돌격대원 다섯이 새 정치폭력법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히틀러는 이들을 공개적으로 감쌌고, 감형된 그들은 1933년 사면으로 풀려났다. 2 5

파펜 정부는 공산당이 낸 불신임안에 의원 84%가 찬성하자 다시 의회를 해산했다. 11월 6일 선거에서 나치당은 33.1%로 떨어져 196석이 되었다. 줄어든 의석은 자료에 따라 34석 또는 35석으로 적힌다. 사회민주당은 121석(20.4%), 공산당은 100석(16.9%)을 얻었고 공산당은 베를린에서 다시 최다 득표 정당이 되었다. 파펜이 의회 없는 통치를 밀어붙이자 슐라이허는 힌덴부르크를 설득해 그를 물러나게 하고 12월 3일 스스로 총리가 되었다. 슐라이허는 그레고어 슈트라서를 나치당에서 떼어 내고 노동조합까지 묶는 「횡단전선」으로 히틀러를 길들이려 했지만 실패했다. 15 5 11

쫓겨난 파펜은 복수를 꾀했다. 1933년 1월 4일 그는 쾰른의 은행가 쿠르트 폰 슈뢰더의 집에서 히틀러를 비밀리에 만났고, 앞서 11월에는 산업·금융·농업계 대표 22명이 힌덴부르크에게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라는 청원서를 보냈다. 의회 해산과 독재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슐라이허는 1월 28일 사임했다. 1월 30일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되었다. 나치 장관은 히틀러와 내무장관 빌헬름 프리크, 무임소 장관 겸 프로이센 내무장관 괴링 셋뿐이었고, 국가인민당 대표 알프레트 후겐베르크가 경제·농업장관을, 파펜이 부총리를 맡았다. 보수파는 히틀러를 「길들일」 수 있다고 믿었고, 사회민주당의 슈마허조차 그를 정부의 「장식품」으로 깎아내렸다. 그날 밤 돌격대와 친위대는 베를린에서 횃불 행진을 벌였다. 16 5 11 17

독일국회의사당 화재와 3월 선거

히틀러는 취임하자마자 의회를 해산하고 3월 5일 새 선거를 정했다. 2월 4일 힌덴부르크가 서명한 「독일 국민 보호를 위한 명령」은 당국이 집회를 금지하고 출판물을 압수해 야당의 선거운동을 막을 수 있게 했다. 프로이센에서는 내무장관 괴링이 친위대·돌격대·철모단 대원 5만 명을 보조 경찰로 동원해 투표를 「감시」하게 했다. 선거는 공산당과 좌파, 노동조합원, 사회민주당과 중앙당을 겨냥한 돌격대의 폭력 속에 치러졌다. 18 19

2월 27일 밤 9시가 조금 지나 국회의사당에 불이 났다. 경찰은 건물 안에서 네덜란드의 평의회 공산주의자 마리뉘스 판데르루버를 체포했다. 나치 지도부는 이를 공산당 봉기의 신호라고 선전했고, 이튿날 힌덴부르크는 헌법 제48조에 따른 「국민과 국가 보호를 위한 대통령령」, 곧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에 서명했다. 신체의 자유, 표현·언론·집회·결사의 자유, 우편과 전화의 비밀, 가택 수색과 재산 몰수에 대한 보호가 정지되었다. 임시 비상조치라던 이 법령은 1945년 나치 독일이 무너질 때까지 효력을 잃지 않았다. 20 18

나치가 장악한 경찰은 공산당 의원 전원을 포함해 공산당원을 대량 체포했다. 공산당 의원단장 에른스트 토르글러는 2월 28일 자수했고, 공산당은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으로 사실상 불법화된 뒤 3월 6일부터 완전히 금지되었다. 3월 5일 선거에서 나치당은 43.9%를 얻어 혼자서는 과반에 이르지 못했지만, 8%를 얻은 국가인민당과 합쳐 의석 52%의 다수를 확보했다. 공정한 선거라고 할 수 없는 조건이었는데도 독일 유권자의 과반은 끝내 나치당에 표를 주지 않았다. 20 21 19 22

판데르루버와 토르글러, 코민테른 서유럽 책임자였던 불가리아인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바실 타네프, 블라고이 포포프는 9월 21일부터 12월 23일까지 라이프치히 제국재판소에서 방화와 정부 전복 기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정권은 이 재판을 대대적으로 중계해 선전 무대로 삼으려 했지만 공산주의자 네 명은 무죄로 풀려났다. 망명 공산당의 빌리 뮌첸베르크는 런던에서 반대 재판을 조직하고 『국회의사당 화재와 히틀러 테러에 관한 갈색 책』을 펴내 나치 음모설을 퍼뜨렸다. 판데르루버는 단독 범행을 주장했지만 사형을 선고받고 1934년 1월 10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역사가들은 대체로 그가 불을 질렀다고 보며, 나치 음모설은 리처드 에번스가 음모론이라 부른다. 독일은 2008년 그를 사후 사면했다. 20 23

독일수권법

3월 21일 새 의회는 프로이센 왕국과 독일 제국의 상징인 포츠담의 수비대 교회에서 개원 국가 의식을 치렀다. 1871년 첫 제국의회가 열린 날짜를 고른 이 「포츠담의 날」에 힌덴부르크와 히틀러가 나눈 악수는 「옛 위엄과 새 힘의 결혼」을 상징했다. 히틀러가 이미 3월 7일 내각에서 밝힌 수권법은 정부가 4년 동안 의회의 동의 없이 헌법에서 벗어나는 법률까지 제정할 수 있게 하는 법이었다. 헌법 개정이므로 의원 3분의 2 이상 출석에 출석 의원 3분의 2 이상 찬성이 필요했다. 의장 괴링은 의사 규칙을 바꿔, 결석한 공산당 의원 81명을 정족수 계산에서 빼 버렸다. 24 22

3분의 2를 채우려면 가톨릭 중앙당의 표가 필요했다. 히틀러는 사제인 중앙당 의장 루트비히 카스와 협상해 3월 22일 합의했다. 카스는 당의 존속, 가톨릭 시민의 자유와 학교, 당 소속 공무원의 신분 보장을 약속받는 대가로 찬성하기로 했다. 전 총리 브뤼닝은 부결을 원했지만 당의 결속을 위해 찬성표를 던지기로 했다. 3월 23일 화재 뒤 임시 의사당이 된 크롤 오페라하우스 안팎에는 돌격대원들이 늘어서 있었다. 카스는 약속받은 서면 보장을 받지 못한 채 찬성 연설을 했고, 그 문서는 끝내 오지 않았다. 22 4

반대 연설에 나선 것은 사회민주당의 오토 벨스 한 사람뿐이었다. 그는 위협 속에서 「바이마르 헌법은 사회주의 헌법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 담긴 법치국가와 평등, 사회 정의의 원칙을 지킨다. 이 역사적 시간에 우리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인간애와 정의, 자유와 사회주의의 원칙을 엄숙히 맹세한다. 어떤 수권법도 영원하고 파괴할 수 없는 사상을 없앨 권한을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결과는 찬성 444, 반대 94였다. 반대는 모두 사회민주당이었고, 사회민주당 의원 26명은 체포되었거나 숨어 있었다. 모두 출석했더라도 78.7%로 통과될 표결이었다. 그날 저녁 제국참의원이 토론 없이 만장일치로 동의했고 힌덴부르크가 서명했다. 22

독일강제적 동질화

수권법은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이 시작한 일을 마무리하며 히틀러 정부를 「합법적 독재」로 바꾸었다. 3월 22일 힘러는 뮌헨 북서쪽 다하우에 첫 강제수용소를 열어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반대파를 가두었다. 3월 31일 「주와 제국의 동질화에 관한 임시법」은 프로이센을 뺀 모든 주의 의회를 해산하고, 공산당 의석을 뺀 3월 5일 득표로 다시 구성하게 했다. 4월 7일 「직업 공무원 제도 재건법」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를 공직에서 몰아냈다. 이 일련의 조치를 나치는 「동질화」, 곧 사회 전체를 하나의 틀에 맞추는 일이라 불렀다. 22 25 21 26

주 정부들도 손쉽게 넘어갔다. 1933년 1월 30일 나치당이 이끄는 주는 17개 가운데 안할트·올덴부르크·메클렌부르크슈베린·튀링겐 넷뿐이었다. 3월 5일 선거 직후 중앙정부는 나머지 주를 손에 넣기 시작했다. 비나치 주 정부에 경찰을 나치에게 맡기라고 압박하고, 대도시에서 돌격대와 친위대가 위협 시위를 벌이고, 시청에 하켄크로이츠 깃발을 내걸고, 선출된 정부가 거의 저항 없이 항복하면 「질서 회복」을 내세워 제국 판무관을 앉히는 식이었다. 그 「불안」은 나치 조직 자신이 만든 것이었고, 2월 28일 법령이 내세운 「국가를 위협하는 공산주의자의 폭력」은 어디에도 없었다. 겉모양은 합법이었지만 주의 권한을 빼앗은 것은 명백한 헌법 위반이었다. 21

노동운동은 거의 저항 없이 무너졌다. 테오도어 라이파르트가 이끈 자유노조 총연맹은 1932년에도 약 350만 명을 대표했지만, 정권이 들어서자 정치적 「중립」을 선언했고 4월 28일 기독교·자유주의 노조와 함께 단일 국민 노동조직으로 통합하는 데 동의했다. 라이파르트는 정부가 노동절을 처음으로 공휴일인 「민족 노동의 날」로 삼는 것도 환영했다. 그러나 괴벨스는 이미 4월 17일 일기에 「5월 2일 노동조합 사무실을 점거한다」고 적어 두었다. 5월 1일의 대행진 이튿날 돌격대가 전국의 노조 사무실을 점거해 기금을 몰수하고 지도자들을 체포했고, 로베르트 라이가 그 자리에 세운 독일노동전선의 수장이 되었다. 5월 10일 베를린 오페라 광장에서는 「비독일적」 책 2만 5천 권 이상이 불탔다. 21 27 28

정당들도 차례로 사라졌다. 정부는 사회민주당의 재산을 몰수하고 6월 22일 당을 금지했다. 벨스는 자르로, 이어 프라하로 망명해 망명 지도부(소파데)를 세웠고, 슈마허는 7월에 체포되어 10년을 수용소에서 보냈다. 동맹이던 국가인민당도 6월 27일 해산했고 후겐베르크는 내각에서 물러났다. 국가당(28일), 바이에른 인민당과 인민당(7월 4일), 중앙당(7월 5일)이 뒤따라 스스로 해산했다. 7월 14일 「신당 결성 금지법」으로 나치당은 독일의 유일한 합법 정당이 되었다. 히틀러가 선거 때 약속한 대로 「이 서른 개의 정당을 독일에서 쓸어 낸」 것이다. 21 14 29 17 22

독일「장검의 밤」과 총통 국가

집권 뒤 가장 큰 위협은 나치 운동 안에 있었다. 300만 명이 넘는 돌격대를 이끄는 에른스트 룀은 부를 재분배하는 「제2의 혁명」을 외쳤고, 돌격대가 10만 명의 직업 군대인 국방군을 흡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군들은 이를 군대의 파멸로 여겼고, 군 통수권은 여전히 힌덴부르크에게 있었다. 1934년 6월 17일 부총리 파펜은 마르부르크 대학 연설에서 「제2의 혁명」의 위협을 경고하며 보수파의 요구를 대변했다.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6월 29일 국방군이 히틀러 뒤에 서 있다는 글을 당 기관지에 실었다. 30 31

6월 30일 새벽 히틀러는 친위대와 경찰을 이끌고 바트비스제의 호텔을 덮쳐 룀과 돌격대 지도부를 직접 체포했다. 브레슬라우 돌격대장 에트문트 하이네스는 그 자리에서 총살되었다. 베를린으로 돌아간 괴벨스가 암호 「콜리브리」를 괴링에게 전하자 처형대가 움직였다. 제프 디트리히의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뮌헨 슈타델하임 교도소 마당에서 돌격대 장성들을 쏘았고, 7월 1일 다하우 수용소장 테오도어 아이케와 부관 미하엘 리페르트는 룀에게 자결하라며 권총을 건넸다가, 「나를 죽이려면 아돌프가 직접 하게 하라」며 거부하자 감방에서 그를 사살했다. 친위대와 친위대 정보부(SD), 하인리히 힘러와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이끈 게슈타포가 살해 대부분을 맡았다. 전 총리 쿠르트 폰 슐라이허와 그의 아내, 그레고어 슈트라서, 1923년 맥주홀 폭동을 진압한 구스타프 리터 폰 카르, 파펜의 측근 에드가 융과 헤르베르트 폰 보제, 가톨릭 행동의 에리히 클라우제너도 살해되었다. 30 11

사망자는 최소 85명이고, 700~1,000명에 이른다는 추산도 있다. 1,000명 넘게 체포되었다. 법원과 내각은 재판 없는 살해를 사후에 정당화했고, 히틀러는 7월 13일 의회 연설에서 자신을 「독일 민족의 최고 재판관」이라 불렀다. 8월 2일 힌덴부르크가 죽자, 하루 전 내각이 통과시킨 「국가원수에 관한 법」에 따라 대통령직과 총리직이 합쳐졌다. 블롬베르크와 발터 폰 라이헤나우의 주도로 군인들은 헌법이 아니라 히틀러 개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8월 19일 국민투표에서 공식 집계로 90%에 조금 못 미치는 찬성이 나왔지만, 베를린에서는 18.5%가, 옛 공산당 근거지 베딩에서는 20% 가까이가 반대했다. 30 32 33 34

독일평가

나치는 1933년을 「권력 장악」이라 부르며 혁명으로 꾸몄지만, 히틀러 자신은 기존 헌법의 틀 안에서 권력이 넘어왔다는 뜻의 「권력 인수」라는 말을 즐겨 썼다. 나치는 무력 쿠데타로 정권을 잡지 않았다. 대통령 긴급명령으로 의회를 비켜 간 대통령 내각들, 프로이센 쿠데타, 히틀러를 길들일 수 있다고 믿은 보수 엘리트의 계산이 길을 열었다. 앨런 불럭은 가장 무거운 책임이 히틀러를 연정 파트너로 삼은 독일 우파에 있다고 보았다. 브뤼닝이 「공화국의 마지막 보루」였는지 「공화국의 장의사」였는지도 지금까지 논쟁거리다. 5 4

사회주의 운동에게 1933년은 노동계급 분열의 대가를 보여 준 패배였다. 코민테른의 사회파시즘론은 공산당이 나치보다 사회민주당을 먼저 공격하게 만들었고, 사회민주당 지도부는 프로이센 쿠데타 앞에서도 합법성에 매달려 저항을 포기했다. 히틀러 취임 직후 텔만이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의 공동 총파업을 제안했지만 사회민주당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당의 지도자들은 함께 수용소로 끌려갔고, 텔만은 11년 독방 끝에 1944년 부헨발트에서 총살되었다. 코민테른은 1935년 제7차 대회에서 디미트로프의 보고로 사회파시즘론을 버리고 인민전선으로 돌아섰다. 수권법 표결에 앞선 벨스의 반대 연설은 바이마르 공화국의 끝을 알린 장면으로 기억된다. 8 13 9 14

2008년의 통계 분석은 바이마르의 투표 행태가 다른 시대와 지역의 민주 선거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보았다. 실업자와 실업 위험에 놓인 이들은 공산당과 때로 사회민주당에 몰렸고, 실업 위험은 없지만 공황에 타격을 입은 자영 상인·전문직·가사 노동자 같은 근로 빈곤층, 특히 개신교 지역의 이들이 나치당을 찍었다. 국회의사당 화재의 진상을 둘러싼 논쟁은 계속되지만, 나치가 화재를 즉시 독재의 법적 근거로 이용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수권법으로 손에 넣은 권력은 재무장과 침략 전쟁으로 이어졌고, 그 전쟁은 결국 독일 인구의 10분의 1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5 18 22

결과

1934년 8월까지 독일은 나치당만 합법인 일당 국가가 되었다. 의회는 거수기가 되었고, 노동조합은 독일노동전선으로 대체되었으며, 공산주의자와 사회민주주의자 수만 명이 감옥과 강제수용소로 끌려가거나 망명했다. 군은 히틀러 개인에게 충성을 맹세했고,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은 1945년까지 공포 정치의 법적 토대로 남았다. 코민테른은 이 패배 뒤 사회파시즘론을 버리고 1935년 인민전선으로 돌아섰다. 수권법으로 얻은 권력은 재무장과 침략 전쟁, 홀로코스트로 이어졌다.

연표와 지도

베를린 알토나 포츠담 바트하르츠부르크 라이프치히 쾰른 마르부르크 다하우 뮌헨 바트비스제 3 알토나 1 베를린 국회의사당 4 베를린 국회의사당 6 베를린 국회의사당 7 베를린 국회의사당 10 베를린 국회의사당 11 베를린 오페라 광장 8 포츠담 2 바트하르츠부르크 12 라이프치히 5 쾰른 13 마르부르크 9 다하우 14 바트비스제
  1. 11930.03.27독일
    대연정 붕괴

    사회민주당 헤르만 뮐러의 5당 대연정이 무너지고, 힌덴부르크가 중앙당의 하인리히 브뤼닝을 총리로 임명했다.

  2. 1930.07.18독일
    긴급명령과 의회 해산

    의회가 브뤼닝의 예산 긴급명령을 236 대 222로 무효화하자 힌덴부르크가 의회를 해산했다.

  3. 1930.09.14독일
    나치당의 약진

    총선에서 나치당이 12석에서 107석으로 늘어 제2당이 되고, 공산당이 제3당이 되었다.

  4. 21931.10.11독일
    하르츠부르크 전선

    국가인민당·나치당·철모단 등이 바트하르츠부르크에서 브뤼닝 정부에 맞선 「국민적 반대파」 연합을 결성했다.

  5. 1931.12.16독일
    철의 전선 결성

    사회민주당이 자유노조 총연맹, 국기단 흑적금과 함께 공화국 수호 조직 철의 전선을 만들었다.

  6. 1932.04.10독일
    대통령 결선

    힌덴부르크가 53.0%로 재선되었고 히틀러는 36.8%, 텔만은 10.2%를 얻었다.

  7. 1932.04.13독일
    돌격대·친위대 금지

    브뤼닝 정부가 정치 폭력의 주범으로 돌격대와 친위대를 금지했다.

  8. 1932.05.30독일
    브뤼닝 해임

    힌덴부르크가 브뤼닝을 해임하고 프란츠 폰 파펜의 「남작 내각」을 세웠다.

  9. 31932.07.17독일
    알토나의 피의 일요일

    돌격대 7,000명의 행진이 공산당 지지자·경찰과 충돌해 18명이 죽었다.

  10. 41932.07.20독일
    프로이센 쿠데타

    대통령령으로 사회민주당이 이끄는 프로이센 정부가 해임되고 파펜이 제국 판무관이 되었다.

  11. 1932.07.31독일
    나치당 제1당

    나치당이 37.3%, 230석으로 처음 제1당이 되었다.

  12. 1932.11.06독일
    11월 총선

    나치당이 196석으로 줄고 공산당이 100석을 얻었다.

  13. 1932.12.03독일
    슐라이허 총리

    쿠르트 폰 슐라이허가 파펜을 밀어내고 총리가 되었다.

  14. 51933.01.04독일
    쾰른 회동

    파펜과 히틀러가 은행가 쿠르트 폰 슈뢰더의 집에서 비밀리에 만나 슐라이허에 맞선 공동 전략을 논의했다.

  15. 61933.01.30독일
    히틀러 총리 임명

    힌덴부르크가 히틀러를 나치당·국가인민당 연립 정부의 총리로 임명했다. 그날 밤 횃불 행진이 베를린을 메웠다.

  16. 71933.02.27독일
    국회의사당 화재

    국회의사당이 불타고 현장에서 마리뉘스 판데르루버가 체포되었다.

  17. 1933.02.28독일
    국회의사당 화재 법령

    헌법 제48조에 따른 대통령령이 기본권을 정지시켰다. 공산당 의원 전원이 체포되었다.

  18. 1933.03.05독일
    3월 총선

    폭력 속에 치러진 선거에서 나치당이 43.9%를 얻고 국가인민당과 함께 과반을 확보했다.

  19. 81933.03.21독일
    포츠담의 날

    새 의회의 개원 의식에서 힌덴부르크와 히틀러가 악수했다.

  20. 91933.03.22독일
    다하우 수용소

    힘러가 정치적 반대파를 가둘 다하우 강제수용소를 열었다.

  21. 101933.03.23독일
    수권법 가결

    크롤 오페라하우스에서 찬성 444, 반대 94로 가결되었다. 반대는 모두 사회민주당이었다.

  22. 1933.05.02독일
    노동조합 점거

    돌격대가 전국의 노조 사무실을 점거하고 기금을 몰수했으며 지도자들을 체포했다.

  23. 111933.05.10독일
    분서

    베를린 오페라 광장에서 「비독일적」 책 2만 5천 권 이상이 불탔다.

  24. 1933.06.22독일
    사회민주당 금지

    정부가 사회민주당의 재산을 몰수하고 당을 금지했다.

  25. 1933.07.14독일
    일당 국가

    「신당 결성 금지법」으로 나치당이 유일한 합법 정당이 되었다.

  26. 121933.12.23독일
    라이프치히 판결

    디미트로프 등 공산주의자 네 명은 무죄, 판데르루버는 사형이 선고되었다.

  27. 1934.01.10독일
    판데르루버 처형

    판데르루버가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28. 131934.06.17독일
    마르부르크 연설

    부총리 파펜이 마르부르크 대학에서 「제2의 혁명」의 위협을 경고했다.

  29. 141934.06.30독일
    「장검의 밤」

    히틀러가 바트비스제에서 룀을 체포했고, 7월 2일까지 돌격대 지도부와 슐라이허·슈트라서 등 최소 85명이 살해되었다.

  30. 1934.08.02독일
    힌덴부르크 사망

    대통령직과 총리직이 합쳐지고 군이 히틀러 개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31. 1934.08.19독일
    국민투표

    대통령·총리직 통합이 공식 집계로 90%에 조금 못 미치는 찬성을 얻었다.

관련 인물 29명

나치 운동 (나치당·돌격대·친위대)13명

대통령과 보수 엘리트 (대통령 내각·국방군·독일국가인민당)6명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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