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 『프랑스 내전』 (1891년 판)
인물카를 마르크스, 프리드리히 엥겔스, 나폴레옹 3세, 오토 폰 비스마르크, 아돌프 티에르, 쥘 파브르, 루이쥘 트로쉬, 조제프 비누아, 가스통 갈리페,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쥘 페리, 쥘 시몽 (프랑스 총리), 조르주 다르부아, 루이외젠 카베냐크, 니콜라 샹가르니에, 프랑수아 기조, 귀스타브 플루랑스,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에밀 외드, 펠릭스 피아, 빌헬름 1세, 알렉산드르 2세, 루이 필리프 1세, 조지 오저, 요한 게오르크 에카리우스, 앙리 톨랭, 레옹 강베타, 헤르만 융, 프리드리히 레스너, 로버트 애플가스, 벤저민 루크래프트, 오귀스트 세라이에, 게르만 로파틴, 존 헤일스, 카를 펜더, 토머스 모터스헤드, 에두아르 바양, 쥘 뒤포르, 에르네스트 피카르, 오귀스탱 푸이예케르티에, 장바티스트 밀리에르, 클로드 르콩트, 에밀빅토르 뒤발, 샤를 베슬레, 장마리 세세, 아돌프 르플로, 펠릭스 두에, 드니 아프르, 조제프마리 피에트리,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 자크 레오나르 클레망토마, 루이 도렐 드 팔라딘 용어제1인터내셔널,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방정부 (1870), 프랑스 제2제정, 보나파르티즘, 블랑키즘, 1851년 12월 2일 쿠데타, 6월 봉기 (1848), 알자스-로렌 병합 (1871), 프랑스 제2공화국, 공안위원회 (파리 코뮌) 사건파리 코뮌, 보불전쟁, 제1인터내셔널의 창립과 분열, 제2제정과 노동운동의 재기
1891년 판 서문 (프리드리히 엥겔스, 1891년 3월 18일)
국제 총평의회의 프랑스 내전에 관한 담화를 새로 펴내면서 서문을 붙여 달라는 요청은 내게 뜻밖이었다. 그래서 여기서는 가장 중요한 점들만 간단히 짚을 수밖에 없다.
나는 이 긴 글 앞에 독일-프랑스 전쟁에 관한 총평의회의 짧은 담화 두 편을 먼저 싣는다. 첫째는, 『내전』이 두 번째 담화를 가리키는데, 두 번째 담화 자체가 첫 번째 담화 없이는 다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는, 역시 마르크스가 쓴 이 두 담화가 『내전』 못지않게 저자의 놀라운 재능을 보여 주는 뛰어난 본보기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에서 처음 증명된 재능, 곧 거대한 역사적 사건들이 아직 우리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거나 이제 막 끝났을 때 그 성격과 의의와 필연적 귀결을 명료하게 파악하는 재능이다. 그리고 끝으로, 우리 독일에서는 오늘날까지도 마르크스가 예언한 그 사건들의 귀결로 고통받고 있기 때문이다.
첫 번째 담화가 말한 대로 되지 않았던가? 루이 보나파르트에 맞선 독일의 방어 전쟁이 프랑스 인민에 대한 정복 전쟁으로 변질된다면, 이른바 해방 전쟁 뒤에 독일에 닥쳤던 모든 불행이 더욱 격렬하게 되살아나리라고 했던 말 말이다. 우리는 비스마르크의 지배를 다시 20년 동안 겪지 않았던가? 선동가 박해 대신 예외법과 사회주의자 사냥이 있었고, 똑같은 경찰의 자의와 글자 그대로 똑같은 소름 끼치는 법 해석이 있지 않았던가?
그리고 알자스-로렌 병합이 “프랑스를 러시아의 품으로 억지로 밀어 넣을” 것이며, 이 병합 뒤 독일은 러시아의 공공연한 하수인이 되든지, 아니면 잠시 숨을 돌린 뒤 새 전쟁을, 그것도 “슬라브 인종과 로망스 인종의 연합에 맞선 인종 전쟁”을 준비해야 하리라는 예언도 글자 그대로 들어맞지 않았던가? 프랑스 지방들의 병합은 프랑스를 러시아의 품으로 몰아넣지 않았던가? 비스마르크는 꼬박 20년 동안 차르의 환심을 사려고 헛되이 아양을 떨지 않았던가? 작은 프로이센이 “유럽 제일의 강국”이 되기 전에 신성한 러시아의 발밑에 바치곤 하던 것보다 더 비굴한 봉사로 아양을 떨지 않았던가? 그리고 지금도 날마다 우리 머리 위에는 전쟁이라는 다모클레스의 칼이 매달려 있지 않은가? 첫날부터 문서로 맺은 군주들의 동맹이 모두 겨처럼 흩어질 전쟁, 그 결말이 절대로 불확실하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은 전쟁, 1,500만 또는 2,000만의 무장한 인간으로 유럽 전체를 황폐하게 할 인종 전쟁, 거대한 군사 국가들 가운데 가장 강한 나라조차 최종 결과를 전혀 가늠할 수 없어 두려워하기 때문에 아직 터지지 않았을 뿐인 그런 전쟁 말이다.
그러므로 1870년 국제 노동자 정책의 선견을 보여 주는, 반쯤 잊힌 이 빛나는 증거들을 독일 노동자들이 다시 읽을 수 있게 하는 것은 더욱더 의무다.
이 두 담화에 대해 한 말은 프랑스 내전에 관한 담화에도 들어맞는다. 5월 28일 마지막 코뮌 전사들이 벨빌 비탈에서 압도적인 적에게 쓰러졌고, 겨우 이틀 뒤인 30일에 마르크스는 총평의회에서 그 글을 낭독했다. 거기에는 파리 코뮌의 역사적 의의가 짧고 힘차면서도 매우 날카롭고 무엇보다 매우 참된 필치로 그려져 있어서, 이 주제에 관한 그 방대한 문헌 전체에서도 다시는 그에 이른 것이 없다.
1789년 이래 프랑스의 경제적·정치적 발전 덕분에 파리는 50년 전부터, 혁명이 터지면 반드시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 다시 말해 피로 승리를 산 프롤레타리아트가 승리 뒤에 자기 요구를 들고 나서지 않는 혁명은 그곳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이 요구들은 그때그때 파리 노동자의 발전 수준에 따라 다소 불분명했고 혼란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결국 모두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계급 대립을 없애자는 데로 귀결되었다. 그것을 어떻게 이룰지는 물론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요구 자체는, 아직 아무리 막연하게 표현되었다 해도, 기존 사회 질서에 대한 위험을 품고 있었다. 그 요구를 내건 노동자들은 아직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국가의 키를 잡은 부르주아에게는 노동자의 무장 해제가 첫째 계명이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이 싸워 얻은 혁명 뒤에는 언제나 새로운 싸움이 벌어졌고, 그 싸움은 노동자의 패배로 끝났다.
그 일이 처음 일어난 것은 1848년이었다. 의회 반대파의 자유주의 부르주아들은 자기 당파에 지배를 보장해 줄 선거 개혁을 관철하려고 개혁 연회를 열었다. 정부와 싸우면서 점점 더 인민에게 호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그들은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의 급진적·공화주의적 층에게 차츰 앞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 뒤에는 혁명적 노동자들이 서 있었고, 노동자들은 1830년 이래 부르주아는 물론 공화주의자들조차 짐작하지 못할 만큼 훨씬 더 많은 정치적 자립성을 갖추고 있었다. 정부와 반대파 사이에 위기가 닥친 순간 노동자들은 시가전을 시작했다. 루이 필리프는 사라졌고 선거 개혁도 그와 함께 사라졌으며, 그 자리에 공화국이, 그것도 승리한 노동자들 스스로 “사회적” 공화국이라 부른 공화국이 들어섰다. 그러나 이 사회적 공화국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무도, 노동자들 자신조차 분명히 알지 못했다. 그래도 그들은 이제 무기를 가졌고 국가 안의 한 세력이었다. 그래서 권력을 잡은 부르주아 공화주의자들은 발밑에 어느 정도 단단한 땅을 느끼자마자 노동자의 무장 해제를 첫 목표로 삼았다. 노동자들을 노골적인 약속 파기와 공공연한 조롱으로, 그리고 실업자들을 먼 지방으로 추방하려는 시도로 1848년 6월 봉기에 몰아넣음으로써 그 일이 이루어졌다. 정부는 압도적인 우세를 미리 마련해 두었다. 닷새 동안 영웅적으로 싸운 끝에 노동자들은 쓰러졌다. 그리고 이제 무방비한 포로들에 대한 학살이 뒤따랐는데, 로마 공화정의 몰락을 열었던 내전 시대 이래 이와 같은 것은 본 적이 없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고유한 이익과 요구를 지닌 별개의 계급으로서 감히 부르주아지에 맞서 나서자마자 부르주아지가 얼마나 미친 듯한 복수의 잔혹으로 치닫는지를 보여 준 첫 번째 일이었다. 그러나 1848년은 1871년 그들의 광란에 비하면 아직 어린애 장난이었다.
벌은 곧바로 따라왔다.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프랑스를 다스릴 수 없었다면, 부르주아지는 이미 더는 다스릴 수 없었다. 적어도 그 무렵에는 그랬다. 그때 부르주아지는 다수가 아직 군주제 성향이었고, 세 왕조파와 네 번째인 공화파로 갈라져 있었다. 그들의 내분 덕분에 모험가 루이 보나파르트는 군대, 경찰, 행정 기구라는 모든 권력의 거점을 손에 넣고, 1851년 12월 2일 부르주아지의 마지막 견고한 성채인 국민의회를 날려 버릴 수 있었다. 제2제정과 함께 정치적·금융적 모험가 패거리의 프랑스 착취가 시작되었지만, 동시에 대부르주아지의 작은 일부만이 독점적으로 지배하던 루이 필리프의 편협하고 소심한 체제 아래서는 결코 가능하지 않았던 산업 발전도 시작되었다. 루이 보나파르트는 부르주아인 자본가들을 노동자로부터 보호하고 또 노동자들을 자본가로부터 보호한다는 구실로 자본가들에게서 정치권력을 빼앗았다. 그러나 그 대신 그의 지배는 투기와 산업 활동을, 한마디로 부르주아지 전체의 번영과 치부를 지금껏 들어 보지 못한 규모로 북돋웠다. 물론 그보다 훨씬 큰 규모로 부패와 대규모 도둑질이 자라났는데, 그것들은 황실 주위에 몰려들어 이 치부에서 두둑한 몫을 떼어 갔다.
그러나 제2제정, 그것은 프랑스 국수주의에 대한 호소였고, 1814년에 잃은 제1제정의 국경, 적어도 제1공화정의 국경을 되찾자는 요구였다. 옛 왕정의 국경 안에, 아니 그보다 더 깎인 1815년의 국경 안에 머무는 프랑스 제국은 오래갈 수 없었다. 그래서 때때로 전쟁을 벌이고 국경을 넓힐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독일의 라인강 좌안만큼 프랑스 국수주의자들의 상상력을 홀린 국경 확장은 없었다. 그들에게는 라인강 가의 1제곱마일이 알프스나 다른 어디의 10제곱마일보다 값졌다. 제2제정이 있는 한, 라인강 좌안의 반환 요구는 한꺼번이든 조금씩이든 시간 문제일 뿐이었다. 그때는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함께 왔다. 비스마르크에게, 그리고 자기 자신의 지나치게 약은 우유부단한 정책 때문에 기대했던 “영토 보상”을 사기당한 보나파르트에게는 이제 전쟁 말고 남은 것이 없었다. 전쟁은 1870년에 터졌고, 그를 스당으로, 거기서 다시 빌헬름스회에로 날려 보냈다.
그 필연적 결과가 1870년 9월 4일의 파리 혁명이었다. 제정은 카드로 지은 집처럼 무너졌고 공화국이 다시 선포되었다. 그러나 적은 성문 앞에 있었다. 제정의 군대는 메스에 절망적으로 갇혀 있거나 독일에 포로로 잡혀 있었다. 이 궁지에서 인민은 옛 입법원의 파리 출신 의원들이 “국방정부”를 자처하고 나서는 것을 허락했다. 이것을 더 쉽게 받아들인 것은, 이제 방위를 위해 무기를 들 수 있는 파리 사람이 모두 국민방위군에 들어가 무장했으므로 노동자가 그 압도적 다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의 부르주아로만 이루어진 정부와 무장한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대립은 곧 터져 나왔다. 10월 31일 노동자 대대들이 시청을 습격해 정부 각료 일부를 사로잡았다. 배신과 정부의 노골적인 약속 파기, 몇몇 속물 대대의 개입이 그들을 다시 풀어 주었고, 외국 군대에 포위된 도시 안에서 내전의 불길이 일지 않게 하려고 사람들은 기존 정부를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마침내 1871년 1월 28일 굶주린 파리는 항복했다. 그러나 전쟁사에 일찍이 없던 영예를 지닌 항복이었다. 요새들은 넘겨지고 환상 성벽은 무장 해제되었으며, 정규군과 기동대의 무기는 인도되고 그들 자신은 전쟁 포로로 취급되었다. 그러나 국민방위군은 무기와 대포를 지닌 채 승자와 휴전 상태에 들어갔을 뿐이다. 그리고 승자들 자신도 파리에 개선 입성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은 파리의 작은 한 귀퉁이, 그나마 일부는 공원인 곳만 감히 점령했고, 그것도 며칠 동안뿐이었다! 그리고 그동안 131일 동안 파리를 에워싸고 있던 그들 자신이 무장한 파리 노동자들에게 에워싸여 있었다. 노동자들은 어떤 “프로이센 놈”도 외국 정복자에게 내준 구석의 좁은 경계를 넘지 못하도록 세심하게 지켰다. 제정의 모든 군대가 무기를 내려놓은 그 군대에게 파리 노동자들은 이만한 경외심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혁명의 화덕에 복수하러 왔던 프로이센 융커들은 바로 그 무장한 혁명 앞에 공손히 멈춰 서서 경례해야 했다!
전쟁 동안 파리 노동자들은 싸움을 힘차게 계속하라고 요구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제 파리 항복 뒤 강화가 이루어지자, 정부의 새 수반 티에르는 파리 노동자들이 손에 무기를 쥐고 있는 한 유산 계급, 곧 대토지 소유자와 자본가의 지배가 끊임없는 위험에 놓여 있음을 깨달아야 했다. 그의 첫 작업은 노동자들을 무장 해제하려는 시도였다. 3월 18일 그는 정규군 부대를 보내, 국민방위군의 소유로서 파리 포위 동안 만들어지고 공공 모금으로 값을 치른 대포를 빼앗으라고 명령했다. 시도는 실패했고, 파리는 한 사람처럼 일어나 저항 태세를 갖추었으며, 파리와 베르사유에 자리 잡은 프랑스 정부 사이의 전쟁이 선포되었다. 3월 26일 파리 코뮌이 선출되었고 28일 선포되었다. 그때까지 정부 일을 맡았던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는 그 전에 파리의 추악한 “풍기 경찰”의 폐지를 포고한 뒤 코뮌의 손에 권한을 넘기고 물러났다. 30일 코뮌은 징병제와 상비군을 폐지하고, 무기를 들 수 있는 모든 시민이 속해야 할 국민방위군을 유일한 무장력으로 선언했다. 또 1870년 10월부터 4월까지의 집세를 모두 면제하고 이미 낸 금액은 앞으로의 집세에서 셈하게 했으며, 시립 전당포의 저당물 매각을 모두 중지시켰다. 같은 날 코뮌에 선출된 외국인들이 그 직위를 인정받았다. “코뮌의 깃발은 세계 공화국의 깃발”이기 때문이다. — 4월 1일에는 코뮌 직원의, 따라서 코뮌 의원 자신의 최고 봉급도 6,000프랑(4,800마르크)을 넘을 수 없다고 결정했다. 다음 날 교회와 국가의 분리, 종교 목적의 모든 국가 지출 폐지, 모든 교회 재산의 국유화가 포고되었다. 그에 따라 4월 8일 학교에서 모든 종교적 상징·성화·교리·기도, 한마디로 “각 개인의 양심 영역에 속하는 모든 것”을 몰아내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차츰 시행되었다. — 5일, 베르사유군이 사로잡은 코뮌 전사들을 날마다 거듭 총살하는 데 맞서 인질 체포에 관한 포고가 내려졌으나 한 번도 시행되지 않았다. — 6일, 국민방위군 제137대대가 기요틴을 끌어내 인민의 우렁찬 환호 속에 공개적으로 불태웠다. — 12일 코뮌은, 1809년 전쟁 뒤 나폴레옹이 노획한 대포로 주조한 방돔 광장의 승리의 기둥을 국수주의와 민족 간 증오 선동의 상징으로 보고 넘어뜨리기로 결의했다. 이 결의는 5월 16일 실행되었다. — 4월 16일 코뮌은 공장주들이 멈춰 세운 공장의 통계 조사를 명령하고, 그동안 그곳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을 협동조합으로 묶어 이 공장들을 운영하게 할 계획과, 이 조합들을 하나의 큰 연합으로 조직할 계획을 마련하게 했다. — 20일 코뮌은 제빵공의 야간 노동을 폐지했고, 제2제정 이래 경찰이 임명한 자들, 곧 일급 노동 착취자들이 독점으로 운영해 온 직업소개소도 폐지해 그 업무를 파리 20개 구의 구청에 넘겼다. — 4월 30일 코뮌은 전당포 폐쇄를 명령했다. 전당포는 노동자에 대한 사적 착취이며, 노동자가 자기 노동 도구와 신용에 대해 갖는 권리와 모순된다는 이유였다. — 5월 5일 코뮌은 루이 16세 처형을 속죄하려고 세운 속죄 예배당을 헐기로 결의했다.
이렇게 3월 18일부터, 그때까지 외국의 침입에 맞선 싸움 때문에 뒤로 밀려 있던 파리 운동의 계급적 성격이 날카롭고 순수하게 드러났다. 코뮌에는 거의 노동자나 공인된 노동자 대표만 앉아 있었듯, 그 결정들도 단호하게 프롤레타리아적인 성격을 띠었다. 코뮌은 공화주의 부르주아지가 비겁해서 하지 않았을 뿐 노동계급의 자유로운 행동에는 꼭 필요한 토대가 되는 개혁, 이를테면 국가에 대해 종교는 순전한 사적인 일이라는 원칙의 실현을 포고하거나, 아니면 노동계급의 이익을 직접 위하는, 일부는 낡은 사회 질서를 깊숙이 베어 들어가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포위된 도시에서 기껏해야 실현의 첫걸음밖에 떼지 못했다. 그리고 5월 초부터는 갈수록 많이 모여드는 베르사유 정부의 대군과의 싸움이 모든 힘을 빨아들였다.
4월 7일 베르사유군은 파리 서부 전선 앞 뇌이에서 센강 도하점을 장악했다. 반면 11일 남부 전선에 대한 공격에서는 외드 장군에게 피투성이가 되어 격퇴되었다. 파리는 끊임없이 포격당했는데, 그것도 프로이센군이 같은 도시를 포격한 일을 신성 모독이라고 낙인찍었던 바로 그자들에게서였다. 바로 그자들이 이제 프로이센 정부에게, 스당과 메스에서 사로잡힌 프랑스 병사들을 파리를 되찾는 데 쓰게 서둘러 돌려보내 달라고 구걸했다. 이 부대들이 차츰 도착하면서 5월 초부터 베르사유군은 결정적인 우세를 얻었다. 그것은 이미 4월 23일, 코뮌이 파리 대주교와 인질로 파리에 잡혀 있던 다른 성직자 한 무리를, 코뮌에 두 번 선출되었으나 클레르보에 갇혀 있던 블랑키 단 한 사람과 맞바꾸자고 제안한 교섭을 티에르가 깨 버렸을 때 드러났다. 그리고 티에르의 달라진 말투에서 더욱 드러났다. 그때까지 시간을 끌며 두 얼굴을 하던 그가 이제 갑자기 뻔뻔하고 위협적이고 난폭해졌다. 남부 전선에서 베르사유군은 5월 3일 물랭사케 보루를, 9일 완전히 폐허가 되도록 포격당한 이시 요새를, 14일 방브 요새를 빼앗았다. 서부 전선에서는 성곽까지 뻗어 있던 수많은 마을과 건물을 차례로 점령하며 차츰 본성벽 자체에까지 다가왔다. 21일 그들은 배신과 그곳에 배치된 국민방위군의 태만 덕분에 시내로 뚫고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북쪽과 동쪽 요새들을 점령하고 있던 프로이센군은 휴전 협정으로 베르사유군에게 금지되어 있던 시 북쪽 지역을 지나 진격하도록 허락했다. 그 덕분에 베르사유군은 긴 전선에서 공격해 나올 수 있었는데, 파리 사람들은 그 전선이 휴전 협정으로 보호된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으므로 병력을 조금밖에 두지 않았다. 그 결과 파리의 서쪽 절반, 본래의 사치스러운 도시에서는 저항이 약했다. 저항은 침입한 군대가 동쪽 절반, 본래의 노동자 도시에 다가갈수록 더 맹렬하고 끈질겨졌다. 여드레 동안 싸운 끝에야 코뮌의 마지막 수호자들이 벨빌과 메닐몽탕 고지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이제, 한 주 내내 점점 더 거세게 날뛰던 무방비한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에 대한 살육이 절정에 이르렀다. 후장총으로는 더 이상 빨리 죽일 수 없었으므로 패자들은 수백 명씩 미트라예즈로 몰살당했다. 마지막 집단 학살이 벌어진 페르라셰즈 묘지의 “코뮌 전사의 벽”은 오늘날에도 서 있다. 프롤레타리아트가 감히 자기 권리를 위해 일어서자마자 지배 계급이 어떤 광란을 저지를 수 있는지에 대한, 말 없되 웅변하는 증거로서. 그다음에는, 모두를 도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나자 대량 체포가 이어졌고, 포로 대열에서 마구잡이로 골라낸 희생자들이 총살되었으며, 나머지는 큰 수용소로 끌려가 군사 법정에 넘겨지기를 기다렸다. 파리 북동쪽 절반을 에워싸고 있던 프로이센군은 도망자를 한 사람도 통과시키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병사들이 최고 사령부의 명령보다 인간애의 명령을 따를 때 장교들은 자주 눈감아 주었다. 특히 작센 군단은 매우 인도적으로 행동해, 코뮌 전사임이 분명한 많은 사람을 통과시켜 주었다는 명예를 누릴 만하다.
20년이 지난 오늘 1871년 파리 코뮌의 활동과 역사적 의의를 돌아보면, 『프랑스 내전』에서 제시한 서술에 몇 가지를 덧붙여야 함을 알게 될 것이다.
코뮌 의원들은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에서도 우세했던 다수파인 블랑키파와, 주로 프루동 사회주의 학파의 지지자들로 이루어진 국제노동자협회 회원들인 소수파로 갈라져 있었다. 블랑키파는 당시 대부분 혁명적·프롤레타리아적 본능에서만 사회주의자였다. 독일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알고 있던 바양을 통해 원칙을 더 분명하게 깨친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그러니 경제 면에서 오늘 우리의 견해로는 코뮌이 했어야 할 많은 일이 행해지지 않은 것도 이해가 간다. 물론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프랑스 은행의 문 앞에 공손히 멈춰 선 그 경건한 경외심이다. 그것은 심각한 정치적 실수이기도 했다. 코뮌의 손에 든 은행, 그것은 인질 1만 명보다 더 값진 것이었다. 그것은 코뮌과의 강화를 위해 프랑스 부르주아지 전체가 베르사유 정부를 압박하게 된다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더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블랑키파와 프루동파로 이루어진 코뮌이 한 옳은 일이 그렇게 많았다는 점이다. 코뮌의 경제적 포고들에 대해서는, 그 영예로운 면이든 불명예스러운 면이든 일차로 프루동파가 책임을 지고, 정치적 행동과 태만에 대해서는 블랑키파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 교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을 때 흔히 그렇듯, 역사의 아이러니는 이쪽이나 저쪽이나 자기 학파의 교리가 명한 것과 정반대로 행동하게 만들었다.
소농과 수공업 장인의 사회주의자 프루동은 결사를 적극적인 증오로 미워했다. 그는 결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결사는 좋은 것보다 나쁜 것을 더 많이 품고 있으며, 본성상 열매를 맺지 못하고 해롭기까지 한데, 노동자의 자유에 채운 족쇄이기 때문이다. 결사는 순전한 교조로서 비생산적이고 성가시며, 노동자의 자유와도 노동의 절약과도 충돌하고, 그 불리한 점이 이로운 점보다 빨리 늘어난다. 이에 비해 경쟁, 분업, 사적 소유는 경제적 힘이다. 프루동이 부르는 대로 하면 예외적인 경우, 곧 대공업과 철도 같은 대규모 경영체에서만 노동자의 결사가 제자리를 찾는다. (『혁명의 일반 이념』(Idée générale de la révolution), 제3연구 참조.)
그런데 1871년에는 수공예의 중심지인 파리에서조차 대공업이 이미 예외적인 경우라고 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코뮌의 단연 가장 중요한 포고는 대공업과 매뉴팩처까지 조직하라고 명했다. 그 조직은 각 공장 노동자의 결사에 바탕을 둘 뿐 아니라, 이 조합들을 모두 하나의 큰 연합으로 묶어야 했다. 한마디로, 마르크스가 『내전』에서 아주 옳게 말했듯이 결국 공산주의로, 곧 프루동 학설의 정반대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조직이었다. 그래서 코뮌은 프루동 사회주의 학파의 무덤이기도 했다. 이 학파는 오늘날 프랑스 노동자 사회에서 사라졌다. 지금 거기서는 가능파에서도 “마르크스파”에서 못지않게 마르크스의 이론이 다툼 없이 지배한다. 프루동파는 “급진” 부르주아지 가운데에만 아직 남아 있다.
블랑키파의 처지도 나을 것이 없었다. 음모의 학교에서 자라고 그에 걸맞은 엄격한 규율로 결속한 그들은, 비교적 적은 수의 단호하고 잘 조직된 사람들이 주어진 유리한 순간에 국가의 키를 잡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크고 가차 없는 에너지를 펼쳐 인민 대중을 혁명에 끌어들이고 앞장선 작은 무리 주위로 모을 때까지 그 키를 지킬 수 있다는 견해에서 출발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새 혁명 정부의 손에 모든 권력을 가장 엄격하게, 독재적으로 집중해야 했다. 그런데 다수가 바로 이 블랑키파로 이루어진 코뮌은 무엇을 했던가? 코뮌은 지방의 프랑스인들에게 보낸 모든 포고문에서, 파리와 함께 모든 프랑스 코뮌의 자유로운 연방을 이루자고, 처음으로 참으로 국민 자신이 만들어 낼 전국 조직을 이루자고 호소했다. 나폴레옹이 1798년에 만들어 낸 뒤 새 정부마다 반가운 도구로 넘겨받아 적들에게 써먹었던 기존 중앙집권 정부의 억압 권력, 곧 군대, 정치 경찰, 관료제, 바로 그 권력이 파리에서 이미 무너졌듯 어디에서나 무너져야 했다.
코뮌은 처음부터 이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동계급은 일단 지배권을 얻으면 낡은 국가 기계로 계속 꾸려 나갈 수 없다는 것, 이 노동계급은 막 쟁취한 자기 지배를 다시 잃지 않으려면 한편으로 지금까지 자신을 겨누어 쓰이던 낡은 억압 기구를 모두 없애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기 대의원과 관리들을 예외 없이 언제든 해임할 수 있다고 선언함으로써 그들에 맞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국가의 특징은 무엇이었던가? 사회는 공동의 이익을 돌보려고 처음에는 단순한 분업을 통해 고유한 기관들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국가 권력을 정점으로 하는 이 기관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특수 이익에 봉사하며 사회의 하인에서 사회의 주인으로 바뀌었다. 이를테면 이것은 세습 군주제에서뿐 아니라 민주 공화국에서도 똑같이 볼 수 있다. “정치가”가 북아메리카에서만큼 국민 가운데 따로 떨어진 강력한 집단을 이루는 곳은 없다. 그곳에서는 지배권이 번갈아 돌아가는 두 큰 정당이 저마다 다시, 정치를 사업으로 삼는 자들, 연방과 각 주 입법 기관의 의석을 노려 투기하거나 자기 당을 위한 선동으로 먹고살다가 당이 이기면 자리로 보상받는 자들에게 지배당한다. 미국인들이 30년 전부터 이 견딜 수 없게 된 멍에를 떨쳐 내려 애쓰지만, 그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패의 늪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든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바로 미국에서 우리는, 원래 사회의 단순한 도구로 정해졌던 국가 권력이 어떻게 사회에 대해 독립해 가는지를 가장 잘 볼 수 있다. 이곳에는 왕조도, 귀족도, 인디언을 감시하는 몇 명을 빼면 상비군도, 고정 임용이나 연금 수급권을 지닌 관료제도 없다. 그런데도 이곳에는 정치 투기꾼의 두 큰 패거리가 있어, 번갈아 국가 권력을 차지하고 가장 부패한 수단으로 가장 부패한 목적을 위해 착취한다. 그리고 국민은, 겉으로는 자기에게 봉사한다지만 실제로는 자기를 지배하고 약탈하는 이 두 정치가 카르텔 앞에서 무력하다.
지금까지의 모든 국가에서 피할 수 없었던 이 변화, 곧 국가와 국가 기관이 사회의 하인에서 사회의 주인으로 바뀌는 것에 맞서 코뮌은 확실한 두 수단을 썼다. 첫째, 코뮌은 행정·사법·교육의 모든 직위를 관계자들의 보통선거로 채웠고, 그것도 같은 관계자들이 언제든 소환할 수 있게 했다. 둘째, 코뮌은 높든 낮든 모든 직무에 다른 노동자가 받는 임금만을 지급했다. 코뮌이 지급한 최고 봉급은 6,000프랑이었다. 이로써 대의 기관에 보내는 대의원에 대한 명령적 위임이 없더라도 엽관과 출세주의에 확실한 빗장이 걸렸는데, 명령적 위임은 그것도 모자라 덧붙여졌다.
지금까지의 국가 권력을 이렇게 폭파하고 새롭고 참으로 민주적인 권력으로 바꾼 일은 『내전』 제3절에 자세히 그려져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 몇몇 특징을 다시 간단히 다룰 필요가 있었다. 바로 독일에서는 국가에 대한 미신이 철학에서 부르주아지의 일반 의식으로, 심지어 많은 노동자의 의식으로까지 옮겨 갔기 때문이다. 철학적 관념에 따르면 국가는 “이념의 실현”이며, 철학의 말로 옮겨 놓은 지상의 신의 나라, 영원한 진리와 정의가 실현되거나 실현되어야 할 영역이다. 그리고 거기서 국가와 국가에 관련된 모든 것에 대한 미신적 숭배가 나온다. 사람들은 어려서부터, 사회 전체에 공통된 업무와 이익은 지금까지 처리되어 온 방식, 곧 국가와 그 녹을 받는 관청을 통해서밖에 처리될 수 없다고 상상하는 데 익숙해져 있으므로 이 숭배는 더 쉽게 자리 잡는다. 그리고 세습 군주제에 대한 믿음에서 벗어나 민주 공화국에 맹세하면 벌써 엄청나게 대담한 걸음을 내디뎠다고 믿는다. 그러나 실제로 국가는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억압하는 기계일 뿐이며, 그것은 군주제에서 못지않게 민주 공화국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국가는 기껏해야 계급 지배를 위한 싸움에서 이긴 프롤레타리아트가 물려받는 해악이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코뮌과 마찬가지로 그 가장 나쁜 측면을 당장 될 수 있는 대로 잘라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새롭고 자유로운 사회 상태에서 자라난 세대가 국가라는 잡동사니 전부를 내던질 수 있게 될 때까지 그럴 것이다.
독일의 속물은 요즘 다시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말에 건전한 공포에 빠졌다. 좋다, 여러분, 이 독재가 어떤 모습인지 알고 싶은가? 파리 코뮌을 보라. 그것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런던, 파리 코뮌 20주년 기념일, 1891년 3월 18일
F. 엥겔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관한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첫 번째 담화 (1870년 7월 23일)
유럽과 미국의 국제노동자협회 회원들에게
1864년 11월 국제노동자협회 창립 선언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노동계급의 해방에 그들의 형제적 협력이 필요하다면, 범죄적 기도를 좇고 민족적 편견을 부추기며 해적질 같은 전쟁에서 인민의 피와 재물을 탕진하는 대외 정책 아래서 그들이 어떻게 그 위대한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인터내셔널이 지향하는 대외 정책을 이런 말로 규정했다. “사적 개인들의 관계를 다스려야 할 도덕과 정의의 단순한 법칙을 민족 간 교류의 최고 법칙으로 내세우라.”
프랑스의 계급 전쟁을 이용해 권력을 찬탈하고 국외에서 벌인 주기적 전쟁으로 그 권력을 영속시킨 루이 보나파르트가 처음부터 인터내셔널을 위험한 적으로 다룬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국민투표 전날 그는 파리, 리옹, 루앙, 마르세유, 브레스트 등 프랑스 전역에서 국제노동자협회 운영위원회 위원들을 일제히 검거하라고 명령했다. 인터내셔널이 그를 암살하려는 음모(complot)에 손을 댄 비밀결사라는 구실이었는데, 이 구실은 얼마 뒤 바로 그의 판사들 손으로 그 터무니없음이 낱낱이 드러났다.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들의 진짜 죄는 무엇이었는가? 그들은 국민투표에 찬성하는 것은 국내의 전제와 국외의 전쟁에 찬성하는 것이라고 프랑스 인민에게 공공연하고 힘차게 말했다. 실제로 프랑스의 모든 대도시, 모든 공업 중심지에서 노동계급이 한 사람처럼 일어나 국민투표를 거부한 것은 그들이 해낸 일이었다. 불행히도 농촌 지역의 무거운 무지가 저울을 기울였다. 유럽의 증권거래소, 내각, 지배계급, 언론은 국민투표를 프랑스 노동계급에 대한 프랑스 황제의 눈부신 승리로 축하했다. 그리고 그것은 한 개인이 아니라 여러 민족을 암살하는 신호였다.
1870년 7월의 전쟁 음모는 1851년 12월 쿠데타의 개정판에 지나지 않는다. 처음 보기에 이 일은 너무나 터무니없어서 프랑스는 그것이 정말 진심이라고 믿으려 하지 않았다. 오히려 프랑스는 내각의 전쟁 이야기를 단순한 주식 투기 술책이라고 비난한 의원의 말을 믿었다. 7월 15일 마침내 입법원에 공식적으로 전쟁이 통고되었을 때, 반대파 전체가 예비 전비 표결을 거부했다. 티에르조차 그것을 “가증스럽다”고 낙인찍었다. 파리의 모든 독립 신문이 그것을 규탄했고, 놀랍게도 지방 언론도 거의 만장일치로 합세했다.
그사이 인터내셔널의 파리 회원들은 다시 일에 나섰다. 그들은 7월 12일 『레베유』에 “모든 나라의 노동자에게” 보내는 선언을 실었는데, 우리는 거기서 다음 몇 대목을 인용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또다시 유럽의 균형과 민족의 명예를 구실로 정치적 야망이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프랑스, 독일, 에스파냐의 노동자들이여! 우리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전쟁을 규탄하는 외침을 올리자! … 패권이나 왕조 문제를 위한 전쟁은 노동자의 눈에 범죄적인 부조리일 수밖에 없다. 피의 세금을 스스로 면제받고 공공의 불행에서 새로운 투기의 원천을 찾는 자들의 호전적인 선언에 답하여, 평화와 노동과 자유를 원하는 우리는 항의한다! …… 독일의 형제들이여! 우리의 분열은 라인강 양쪽에서 전제의 완전한 승리를 낳을 뿐이다. ……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이여! 우리의 공동 노력이 당장 어떻게 되든, 국경을 모르는 우리 국제노동자협회 회원들은 끊어질 수 없는 연대의 증표로 프랑스 노동자들의 축원과 인사를 여러분에게 보낸다.”
파리 지부의 이 선언에 뒤이어 프랑스에서 비슷한 성명이 수없이 나왔는데, 여기서는 7월 22일 『라 마르세예즈』에 실린 뇌이쉬르센의 선언만 인용할 수 있다. “이 전쟁은 정당한가? 아니다! 이 전쟁은 국민적인가? 아니다! 그것은 순전히 왕조적이다. 인류의 이름으로,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프랑스의 참된 이익의 이름으로 우리는 전쟁에 반대하는 인터내셔널의 항의에 완전히, 그리고 힘차게 동참한다.”
이 항의들이 프랑스 노동 인민의 참된 정서를 표현했다는 것은 곧 기묘한 사건 하나로 드러났다. 12월 10일 패거리는 루이 보나파르트가 대통령이던 시절에 처음 조직되었는데, 이들이 노동자의 작업복으로 변장하고 파리 거리에 풀려나 전쟁열의 몸부림을 연기하자, 교외 구역의 진짜 노동자들이 압도적인 평화 시위로 공공연히 나섰다. 그러자 경찰청장 피에트리는, 진짜 파리 인민이 억눌렸던 애국심과 넘치는 전쟁 열의를 충분히 발산했다는 핑계로 모든 거리 정치를 당장 중지시키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했다.
루이 보나파르트의 프로이센과의 전쟁이 어떤 경과를 밟든, 제2제정의 조종은 이미 파리에서 울렸다. 그것은 시작할 때 그랬듯 패러디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루이 보나파르트가 18년 동안 복고된 제정이라는 흉포한 소극을 연출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유럽의 정부들과 지배계급들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독일 쪽에서 보면 이 전쟁은 방어 전쟁이다. 그러나 누가 독일을 스스로 방어해야 하는 처지로 몰아넣었는가? 누가 루이 보나파르트가 독일에 전쟁을 걸 수 있게 했는가? 프로이센이다! 국내의 인민적 반대를 짓밟고 독일을 호엔촐레른 왕조에 병합할 목적으로 바로 그 루이 보나파르트와 공모한 것은 비스마르크였다. 사도바 전투에서 이기지 않고 졌더라면, 프랑스 대대들이 프로이센의 동맹군으로서 독일을 휩쓸었을 것이다. 승리한 뒤 프로이센은 노예가 된 프랑스에 자유로운 독일을 맞세울 생각을 한순간이라도 했던가? 정반대였다. 프로이센은 자신의 낡은 체제가 지닌 토박이 아름다움을 모두 조심스럽게 간직하면서, 거기에 제2제정의 온갖 술수, 곧 그 실질적 전제와 가짜 민주주의, 정치적 속임수와 금융 협잡, 거창한 말과 저열한 눈속임을 덧붙였다. 그때까지 라인강 한쪽에서만 번성하던 보나파르트 체제가 이제 맞은편에도 모조품을 갖게 된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전쟁 말고 무엇이 나올 수 있었겠는가?
독일 노동계급이 지금의 전쟁이 엄격한 방어적 성격을 잃고 프랑스 인민에 대한 전쟁으로 변질되도록 내버려 둔다면, 승리든 패배든 똑같이 재앙이 될 것이다. 독립 전쟁 뒤에 독일에 닥쳤던 모든 비참이 더욱 쌓인 강도로 되살아날 것이다.
그러나 인터내셔널의 원칙은 독일 노동계급 사이에 너무 널리 퍼지고 너무 굳게 뿌리내려 있어서 그런 슬픈 결말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프랑스 노동자들의 목소리는 독일에서 메아리쳤다. 7월 16일 브라운슈바이크에서 열린 노동자 대중 집회는 파리 선언에 전적인 동의를 표하고, 프랑스에 대한 민족적 적대라는 생각을 물리쳤으며, 결의를 이런 말로 맺었다. “우리는 모든 전쟁의 적이며, 무엇보다 왕조 전쟁의 적이다. …… 깊은 슬픔과 비통 속에서 우리는 방어 전쟁을 피할 수 없는 해악으로서 견딜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독일 노동계급 전체에게, 평화와 전쟁을 결정할 권력을 인민 자신에게 되찾아 주고 인민을 자기 운명의 주인으로 만듦으로써 이토록 거대한 사회적 불행이 되풀이될 수 없게 하자고 호소한다.”
켐니츠에서는 작센 노동자 5만 명을 대표하는 대의원 회의가 다음과 같은 취지의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독일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특히 민주사회주의당을 이루는 노동자들의 이름으로, 우리는 지금의 전쟁이 오로지 왕조적인 전쟁이라고 선언한다. …… 우리는 프랑스 노동자들이 내민 형제의 손을 기꺼이 잡는다. …… 국제노동자협회의 표어 만국의 프롤레타리아여, 단결하라를 명심하여, 우리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가 우리의 벗이며 모든 나라의 전제 군주가 우리의 적임을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인터내셔널 베를린 지부도 파리 선언에 답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마음과 손을 다해 여러분의 항의에 동참한다. …… 우리는 엄숙히 약속한다. 나팔 소리도 대포의 굉음도, 승리도 패배도 모든 나라의 노동하는 자녀들의 단결을 위한 우리의 공동 과업에서 우리를 돌려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이 자멸적인 싸움의 배경에는 러시아의 어두운 형상이 어른거린다. 모스크바 정부가 막 전략 철도망을 완성하고 이미 프루트강 쪽으로 병력을 집결하던 바로 그때 이 전쟁의 신호가 울렸다는 것은 불길한 징조다. 독일인들이 보나파르트의 침략에 맞선 방어 전쟁에서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는 공감이 어떤 것이든, 프로이센 정부가 카자크의 도움을 청하거나 받아들이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들은 그 공감을 단번에 잃을 것이다. 첫 번째 나폴레옹에 맞선 독립 전쟁 뒤에 독일이 여러 세대 동안 차르의 발밑에 엎드려 있었다는 것을 그들은 기억해야 한다.
영국 노동계급은 프랑스와 독일의 노동 인민에게 우애의 손을 내민다. 그들은 닥쳐오는 끔찍한 전쟁이 어떤 방향으로 흐르든, 모든 나라 노동계급의 동맹이 마침내 전쟁을 죽이리라고 깊이 확신한다. 공식적인 프랑스와 독일이 형제를 죽이는 싸움으로 돌진하는 동안 프랑스와 독일의 노동자들은 서로 평화와 선의의 메시지를 보낸다는 바로 이 사실, 과거 역사에 유례없는 이 위대한 사실은 더 밝은 미래의 전망을 열어 준다. 그것은 경제적 비참과 정치적 착란에 빠진 낡은 사회와 달리 새로운 사회가 솟아나고 있음을 증명한다. 그 사회의 국제적 규칙은 평화일 것이다. 그 사회의 민족적 지배자는 어디서나 똑같이 노동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 새로운 사회의 선구자가 국제노동자협회다.
1870년 7월 23일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관한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의 두 번째 담화 (1870년 9월 9일)
7월 23일의 첫 번째 선언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했다.
“제2제정의 조종은 이미 파리에서 울렸다. 그것은 시작할 때 그랬듯 패러디로 끝날 것이다. 그러나 루이 나폴레옹이 18년 동안 복고된 제정이라는 흉포한 소극을 연출할 수 있게 해 준 것이 유럽의 정부들과 지배계급들이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처럼 우리는 전쟁 작전이 실제로 시작되기도 전에 보나파르트의 거품을 이미 지나간 일로 다루었다.
우리가 제2제정의 생명력을 잘못 보지 않았듯이, 독일의 전쟁이 “엄격한 방어적 성격을 잃고 프랑스 인민에 대한 전쟁으로 변질”되지 않을까 하던 우리의 우려도 틀리지 않았다. 방어 전쟁은 사실상 루이 보나파르트의 항복, 스당 항복, 파리의 공화국 선포로 끝났다. 그러나 이 사건들보다 훨씬 전, 제정군의 철저한 부패가 드러난 바로 그 순간에 프로이센 군부 도당은 정복을 결심했다. 그들의 길에는 성가신 장애물이 하나 놓여 있었다. 전쟁이 시작될 때 빌헬름 왕 자신이 낸 선언들이었다. 그는 북독일 의회 개원 연설에서 프랑스 인민이 아니라 프랑스 황제에게 전쟁을 거는 것이라고 엄숙히 선언했다. 8월 11일에는 프랑스 국민에게 선언을 발표해 이렇게 말했다. “나폴레옹 황제가 프랑스 인민과 평화롭게 살기를 바랐고 지금도 바라는 독일 국민을 육지와 바다에서 공격했으므로, 나는 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독일군의 지휘를 맡았으며, 군사적 사태로 말미암아 프랑스 국경을 넘게 되었다.” 그는 “침략을 물리치기 위해” 독일군의 지휘를 맡았을 뿐이라는 말로 전쟁의 방어적 성격을 주장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자신은 “군사적 사태로 말미암아” 프랑스 국경을 넘게 되었을 뿐이라고 덧붙였다. 방어 전쟁이라고 해서 물론 “군사적 사태”가 명하는 공세 작전을 배제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이 경건한 왕은 프랑스와 세계 앞에서 엄격한 방어 전쟁을 서약한 몸이었다. 어떻게 그를 그 엄숙한 서약에서 풀어 줄 것인가? 무대 연출가들은 그가 독일 국민의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마지못해 굴복하는 것처럼 보여 주어야 했다. 그들은 곧바로 자유주의적 독일 중간계급에게, 그 교수들과 자본가들과 시의원들과 글쟁이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시민적 자유를 위한 싸움에서 1846년부터 1870년까지 유례없는 우유부단과 무능과 비겁의 구경거리를 보여 온 그 중간계급은, 독일 애국주의의 포효하는 사자로서 유럽 무대를 활보하게 되자 물론 몹시 기뻐했다. 그것은 프로이센 정부의 비밀 계획을 바로 그 정부에게 강요하는 척함으로써 자신의 시민적 독립을 되찾았다. 그것은 루이 보나파르트의 무오류성에 대한 오랜, 거의 종교적인 믿음을 프랑스 공화국의 분할을 외치는 것으로 속죄하고 있다. 이 씩씩한 애국자들의 특별 변론을 잠시 들어 보자!
그들은 알자스와 로렌의 인민이 독일의 포옹을 갈망한다고 감히 주장하지는 못한다. 정반대다. 그들의 프랑스 애국심을 벌하려고, 독립된 성채가 시가를 내려다보는 도시 스트라스부르가 엿새 동안 “독일” 작렬탄에 함부로, 악랄하게 포격당해 불길에 휩싸이고 무방비한 주민이 수없이 죽었다! 그러나 그 지방들의 땅은 옛날 한때 지난날의 독일 제국에 속했다. 그러므로 그 땅과 거기서 자라난 인간은 시효로 소멸하지 않는 독일의 재산으로서 몰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럽 지도를 골동품 수집가의 취향으로 다시 그려야 한다면,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가 자신의 프로이센 영토 때문에 폴란드 공화국의 봉신이었다는 것도 결코 잊지 말자.
그러나 더 영리한 애국자들은 프랑스의 침략에 대한 “물질적 보장”으로 알자스와 로렌의 독일어 사용 지역을 요구한다. 이 비열한 구실이 마음 약한 많은 사람을 현혹했으므로, 우리는 이것을 더 자세히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알자스의 전반적 지형이 라인강 맞은편 기슭과 비교해, 그리고 바젤과 게르머스하임 사이 거의 한가운데에 스트라스부르 같은 큰 요새 도시가 있다는 것이, 프랑스의 남독일 침공에는 매우 유리하고 남독일에서의 프랑스 침공에는 특별한 어려움을 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또 알자스와 독일어를 쓰는 로렌을 더하면 남독일이 보주산맥의 능선 전체와 그 북쪽 고개들을 지키는 요새들을 장악하게 되므로 훨씬 강한 국경을 갖게 된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메스까지 병합한다면 프랑스는 분명 당분간 독일에 대한 두 주요 작전 기지를 빼앗기겠지만, 그렇다고 낭시나 베르됭에 새 기지를 세우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독일은 코블렌츠, 마인츠, 게르머스하임, 라슈타트, 울름처럼 모두 프랑스에 대한 작전 기지이고 이번 전쟁에서도 넉넉히 써먹은 곳들을 가지고 있으면서, 무슨 공정함을 내세워 프랑스가 그쪽에 가진 단 두 개의 쓸 만한 요새인 스트라스부르와 메스를 시샘할 수 있는가? 게다가 스트라스부르가 남독일을 위협하는 것은 남독일이 북독일과 별개의 세력일 때뿐이다. 1792년부터 1795년까지 남독일은 그 방향에서 한 번도 침공당하지 않았다. 프로이센이 프랑스 혁명에 맞선 전쟁에 가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95년 프로이센이 단독 강화를 맺고 남독일을 제 앞가림하게 내버려 두자마자 스트라스부르를 기지로 한 남독일 침공이 시작되어 1809년까지 계속되었다. 사실 통일된 독일은 이번 전쟁에서 그랬듯 모든 병력을 자를루이와 란다우 사이에 집결하고 마인츠와 메스를 잇는 도로선에서 진격하거나 전투를 받아들임으로써, 언제든 스트라스부르와 알자스의 어떤 프랑스군도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독일군 주력이 그곳에 주둔해 있는 동안 스트라스부르에서 남독일로 진격하는 프랑스군은 측면을 우회당하고 연락선을 위협받을 것이다. 이번 전역이 무엇이든 증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독일에서 프랑스를 침공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 군사적 고려를 민족의 경계를 정하는 원칙으로 삼는 것은 완전한 부조리이자 시대착오가 아닌가? 이 규칙이 통한다면 오스트리아는 여전히 베네치아와 민초강 선을 가질 권리가 있을 것이고, 프랑스는 파리를 지키기 위해 라인강 선을 가질 권리가 있을 것이다. 파리는 베를린이 남서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노출된 것보다 분명히 더 북동쪽으로부터의 공격에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경계를 군사적 이해관계로 정한다면 요구에 끝이 없을 것이다. 모든 군사선은 필연적으로 결함이 있고, 바깥 영토를 조금 더 병합하면 개선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경계는 결코 최종적이고 공정하게 정해질 수 없다. 언제나 정복자가 피정복자에게 강요할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안에 새 전쟁의 씨앗을 품기 때문이다.
이것이 모든 역사의 교훈이다. 민족도 개인과 마찬가지다. 그들에게서 공격력을 빼앗으려면 방어 수단을 빼앗아야 한다. 목을 조르는 것만으로는 안 되고 죽여야 한다. 어떤 정복자가 한 민족의 힘줄을 끊으려고 “물질적 보장”을 받아 낸 적이 있다면, 그것은 틸지트 조약으로, 그리고 그 조약을 프로이센과 나머지 독일에 집행한 방식으로 그렇게 한 첫 번째 나폴레옹이었다. 그러나 몇 년 뒤 그의 거대한 권력은 독일 인민 앞에서 썩은 갈대처럼 쪼개졌다. 프로이센이 가장 터무니없는 꿈속에서라도 프랑스에 강요할 수 있거나 강요할 엄두를 낼 “물질적 보장”이, 첫 번째 나폴레옹이 프로이센 자신에게서 비틀어 빼앗았던 “물질적 보장”에 비하면 무엇이란 말인가? 결과는 그때 못지않게 참담할 것이다. 역사는 그 응보를 프랑스에서 빼앗은 제곱마일의 넓이가 아니라, 19세기 후반에 정복 정책을 되살린 범죄의 깊이로 잴 것이다!
그러나 게르만 애국주의의 대변자들은 말한다. 독일인을 프랑스인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가 원하는 것은 영광이 아니라 안전이라고. 독일인은 본질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민족이라고. 그들의 침착한 보호 아래서는 정복 자체가 미래 전쟁의 조건에서 영구 평화의 담보로 바뀐다고. 물론 18세기의 혁명을 총검으로 찌르겠다는 숭고한 목적으로 1792년 프랑스를 침공한 것은 독일인이 아니다. 이탈리아의 예속, 헝가리의 억압, 폴란드의 분할로 손을 더럽힌 것도 독일인이 아니다. 신체 건장한 남성 인구 전체를 두 부분으로, 곧 복무 중인 상비군과 휴가 중인 또 하나의 상비군으로 나누고, 둘 다 신권에 의한 통치자들에게 똑같이 맹목적 복종을 하게 하는 그들의 현재 군사 제도, 그런 군사 제도는 물론 평화 유지를 위한 “물질적 보장”이며 문명화 경향의 궁극 목표다! 독일에서도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기존 권력의 아첨꾼들은 거짓된 자화자찬의 향으로 민중의 정신을 독살한다.
메스와 스트라스부르의 프랑스 요새를 보고 분개하는 척하는 이 독일 애국자들은 바르샤바, 모들린, 이반고로드에 있는 모스크바 정부의 거대한 요새 체계에서는 아무 해악도 보지 못한다. 제정의 침공이라는 공포는 신이 나서 곱씹으면서, 전제 군주의 후견이라는 치욕에는 눈을 감는다.
1865년 루이 보나파르트와 비스마르크 사이에 약속이 오갔듯이, 1870년에는 고르차코프와 비스마르크 사이에 약속이 오갔다. 루이 보나파르트가 1866년 전쟁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함께 지치게 해 자신을 독일의 최고 중재자로 만들어 주리라고 우쭐해했듯이, 알렉산드르는 1870년 전쟁이 독일과 프랑스를 함께 지치게 해 자신을 서방 대륙의 최고 중재자로 만들어 주리라고 우쭐해했다. 제2제정이 북독일 연방을 자신의 존재와 양립할 수 없다고 생각했듯이, 전제 러시아는 프로이센이 이끄는 독일 제국 때문에 자신이 위태로워진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낡은 정치 체제의 법칙이다. 그 테두리 안에서는 한 나라의 이득이 다른 나라의 손실이다. 유럽에 대한 차르의 압도적 영향력은 독일에 대한 그의 전통적 장악에 뿌리를 두고 있다. 러시아 자체에서 화산 같은 사회적 힘들이 전제의 토대 자체를 뒤흔들려 하는 지금, 차르가 대외 위신의 그런 손실을 견딜 수 있겠는가? 이미 모스크바 신문들은 1866년 전쟁 뒤 보나파르트파 신문들이 하던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게르만 애국자들은 프랑스를 러시아의 품으로 밀어 넣으면 독일에 자유와 평화가 보장되리라고 정말 믿는가? 무력의 행운, 성공의 오만, 왕조의 음모가 독일을 프랑스 영토 약탈로 이끈다면, 독일에는 두 길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독일은 무슨 대가를 치르더라도 러시아 팽창의 공공연한 도구가 되거나, 아니면 잠깐 숨을 돌린 뒤 또 하나의 “방어” 전쟁을 다시 준비해야 한다. 그것도 요즘 새로 유행하는 “국지화된” 전쟁 따위가 아니라 인종 전쟁, 곧 슬라브 인종과 로망스 인종의 연합에 맞선 전쟁을.
독일 노동계급은 자기 힘으로 막을 수 없었던 이 전쟁을, 독일 독립을 위한 전쟁이자 프랑스와 유럽을 제2제정이라는 역병 같은 악몽에서 해방하는 전쟁으로서 단호하게 지지했다. 반쯤 굶주린 가족을 뒤에 남겨 두고 농촌 노동자들과 함께 영웅적 대군의 힘줄과 근육을 이룬 것은 독일 노동자들이었다. 국외의 전투에서 수가 크게 줄어든 그들은 국내에서 다시 비참으로 수가 크게 줄어들 것이다. 이번에는 그들이 나서서 “보장”을 요구하고 있다. 자신들의 엄청난 희생이 헛되지 않았고, 자신들이 자유를 쟁취했으며, 제정군에 대한 승리가 1815년처럼 독일 인민의 패배로 바뀌지 않으리라는 보장이다. 그리고 이 보장들 가운데 첫째로 그들은 프랑스를 위한 명예로운 강화와 프랑스 공화국의 승인을 요구한다.
독일 사회민주노동자당 중앙위원회는 9월 5일 이 보장들을 힘차게 주장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알자스와 로렌의 병합에 항의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독일 노동계급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음을 안다. 프랑스와 독일의 공동 이익을 위해, 평화와 자유를 위해, 동방의 야만에 맞선 서방 문명을 위해, 독일 노동자들은 알자스와 로렌의 병합을 잠자코 참지 않을 것이다. …… 우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공동의 국제적 대의를 위해 모든 나라의 동료 노동자들 곁에 충실히 설 것이다!”
불행히도 우리는 그들이 당장 성공하리라고 낙관할 수 없다. 프랑스 노동자들이 평화 속에서도 침략자를 막지 못했는데, 독일 노동자들이 무기의 굉음 한가운데서 승자를 막을 가능성이 더 크겠는가? 독일 노동자들의 선언은 루이 보나파르트를 보통 중죄인으로서 프랑스 공화국에 인도하라고 요구한다. 반대로 그들의 통치자들은 프랑스를 망치는 데 가장 알맞은 인물로서 그를 튈르리 궁에 복귀시키려고 이미 애쓰고 있다. 어찌 되든, 독일 노동계급이 독일 중간계급과 같은 말랑말랑한 재료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역사는 증명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 의무를 다할 것이다.
그들처럼 우리도 프랑스 공화국의 도래를 환영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나기를 바라는 염려를 품고 있다. 그 공화국은 왕좌를 뒤엎은 것이 아니라, 비어 버린 그 자리를 차지했을 뿐이다. 그것은 사회적 정복으로서가 아니라 국민적 방위 조치로서 선포되었다. 그것은 일부는 이름난 오를레앙파로, 일부는 중간계급 공화주의자들로 이루어진 임시정부의 손에 있으며, 그 가운데 몇몇에게는 1848년 6월 봉기가 지울 수 없는 낙인을 남겼다. 그 정부 구성원들 사이의 분업은 어색해 보인다. 오를레앙파는 군대와 경찰이라는 요새를 차지했고, 공화주의자를 자처하는 자들에게는 말하는 부서들이 돌아갔다. 그들의 첫 행동 몇 가지는 그들이 제정에게서 폐허뿐 아니라 노동계급에 대한 제정의 공포까지 물려받았음을 잘 보여 준다. 공화국의 이름으로 거친 말투로 결국 불가능할 일들을 약속하는 것은 ‘가능한’ 정부를 외칠 준비를 하려는 것이 아닌가? 공화국은 그 중간계급 청부업자들 가운데 몇몇에게, 오를레앙 왕조 복고로 건너가는 한낱 임시변통의 다리 노릇을 하도록 의도된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프랑스 노동계급은 극도로 어려운 상황에서 움직이고 있다. 적이 파리의 문을 거의 두드리고 있는 지금의 위기에서 새 정부를 뒤엎으려는 시도는 어떤 것이든 절망적인 어리석음이 될 것이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시민으로서 의무를 다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프랑스 농민들이 제1제정의 국민적 추억에 속아 넘어갔듯이 1792년의 국민적 추억에 휘둘려서는 안 된다. 그들이 할 일은 과거를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세우는 것이다. 그들은 침착하고 단호하게 공화주의적 자유가 주는 기회를 자기 계급의 조직 사업에 활용해야 한다. 그것은 프랑스의 재생과 우리의 공동 과제, 곧 노동의 해방을 위해 그들에게 새로운 헤라클레스의 힘을 줄 것이다. 그들의 힘과 지혜에 공화국의 운명이 달려 있다.
영국 노동자들은 이미 밖으로부터의 건전한 압력으로 프랑스 공화국 승인을 꺼리는 자기 정부의 태도를 극복하려는 조치를 취했다. 영국 정부의 지금의 꾸물거림은 아마 반자코뱅 전쟁과, 지난날 쿠데타를 승인할 때 보인 꼴사나운 서두름을 속죄하려는 것이리라. 영국 노동자들은 또한 정부가 모든 힘을 다해 프랑스의 분할에 반대하라고 요구한다. 영국 언론의 일부는 뻔뻔스럽게도 그 분할을 울부짖으며 요구한다. 그것은 20년 동안 루이 보나파르트를 유럽의 섭리로 신격화하고 노예주들의 반란을 미친 듯이 응원했던 바로 그 언론이다. 그때처럼 지금도 그것은 노예주를 위해 고된 일을 하고 있다.
각국의 국제노동자협회 지부들은 노동계급을 행동으로 일깨우라. 그들이 의무를 저버린다면, 그들이 수동적으로 머문다면, 지금의 이 엄청난 전쟁은 더욱 치명적인 국제적 반목의 전조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모든 나라에서 칼과 땅과 자본의 영주들이 노동자에게 거두는 새로운 승리로 이어질 것이다.
공화국 만세!
총평의회
로버트 애플가스, 마틴 J. 분, 프레더릭 브래드닉, 케이힐, 존 헤일스, 윌리엄 헤일스, 조지 해리스, 프리드리히 레스너, 로파틴, B. 루크래프트, 조지 밀너, 토머스 모터스헤드, 찰스 머리, 조지 오저, 제임스 파넬, 펜더, 륄, 조지프 셰퍼드, 코웰 스테프니, 슈톨, 슈미츠
통신서기
외젠 뒤퐁, 프랑스 담당
카를 마르크스, 독일·러시아 담당
A. 세라이에, 벨기에·네덜란드·에스파냐 담당
헤르만 융, 스위스 담당
조반니 보라, 이탈리아 담당
제비 모리스, 헝가리 담당
안톤 자비츠키, 폴란드 담당
제임스 코언, 덴마크 담당
J. G. 에카리우스, 미국 담당
윌리엄 타운센드, 의장
존 웨스턴, 재무
J. 게오르크 에카리우스, 총서기
사무소: 런던 W.C. 하이 홀본 256번지, 1870년 9월 9일
프랑스 내전 —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 담화 (1871년 5월 30일)
유럽과 미국의 모든 협회원들에게.
I
1870년 9월 4일 파리의 노동자들이 공화국을 선포하고 그것이 단 한 사람의 반대도 없이 거의 즉시 프랑스 전역에서 환호를 받았을 때, 티에르를 정치가로, 트로쉬를 장군으로 내세운 자리 사냥꾼 변호사 도당이 시청을 차지했다. 그 무렵 이들은 역사의 모든 위기마다 파리가 프랑스를 대표한다는 사명에 그토록 광신적인 믿음을 품고 있었기에, 프랑스의 통치자라는 찬탈한 칭호를 정당화하려면 이미 시효가 지난 파리 대표 위임장을 내미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다. 이자들이 등장하고 닷새 뒤에 낸 지난 전쟁에 관한 둘째 담화에서, 우리는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여러분에게 말했다. 그런데도 경악의 소용돌이 속에서, 노동계급의 진정한 지도자들은 아직 보나파르트의 감옥에 갇혀 있고 프로이센군은 이미 파리로 진군해 오던 터라, 파리는 오직 국민 방위라는 한 가지 목적에만 권력을 쓴다는 명시적 조건 아래 그들이 권력을 쥐는 것을 참았다. 그러나 파리를 지키려면 노동계급을 무장시키고, 그들을 실효 있는 군대로 조직하고, 전쟁 그 자체로 그 대오를 단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무장한 파리는 무장한 혁명이었다. 프로이센 침략자에 대한 파리의 승리는 프랑스 자본가와 그 국가 기생충들에 대한 프랑스 노동자의 승리가 되었을 것이다. 국민의 의무와 계급의 이익 사이의 이 갈등에서, 국방정부는 국가 배신 정부로 탈바꿈하는 데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그들이 맨 먼저 한 일은 티에르를 유럽의 모든 궁정에 순회 여행을 보내, 공화국을 왕 한 사람과 맞바꾸자고 제안하며 중재를 구걸하게 한 것이었다. 포위가 시작된 지 넉 달 뒤, 항복이라는 말을 처음 꺼낼 때가 왔다고 여겼을 때, 트로쉬는 쥘 파브르와 다른 동료 몇 사람이 보는 앞에서 모여 있는 파리 구청장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바로 9월 4일 저녁, 동료들이 내게 던진 첫 질문은 이것이었습니다. 파리가 조금이라도 승산을 가지고 프로이센군의 포위를 견딜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지요. 나는 망설이지 않고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여기 계신 동료 몇 분이 내 말이 사실이며 내가 그 의견을 줄곧 지켜 왔음을 보증해 주실 것입니다. 나는 바로 이런 말로, 지금 같은 상황에서 프로이센군의 포위를 버텨 보겠다는 파리의 시도는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영웅적인 어리석음이겠지만, 그것뿐이리라고 덧붙였지요. …… 사태는 [그 자신이 이끈 사태는] 나의 예견이 틀리지 않았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트로쉬의 이 깜찍한 연설은 그 자리에 있던 구청장 가운데 한 사람인 코르봉 씨가 나중에 공개했다.
이렇게 바로 공화국이 선포된 날 저녁에, 트로쉬의 「계획」이 파리의 항복이라는 것을 그의 동료들은 알고 있었다. 국민 방위가 티에르, 파브르 일당의 개인 통치를 위한 구실 이상의 것이었다면, 9월 4일의 벼락출세자들은 5일에 물러났을 것이다. 트로쉬의 「계획」을 파리 시민에게 털어놓고, 당장 항복하든지 아니면 자기 운명을 스스로 손에 쥐라고 호소했을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이 파렴치한 사기꾼들은 굶주림과 깨진 머리라는 처방으로 파리의 영웅적 어리석음을 고치기로 하고, 그동안에는 「파리 총독 트로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며 외무장관 쥘 파브르는 「우리 영토의 한 치도, 우리 요새의 돌 하나도 내주지 않을 것」이라고 떠벌리는 요란한 성명서로 파리를 속이기로 했다. 바로 그 쥘 파브르는 강베타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들이 「방어」하고 있던 상대는 프로이센 병사들이 아니라 파리의 노동자들이었다고 실토한다. 포위가 계속되는 내내, 트로쉬가 현명하게도 파리 군대의 지휘를 맡긴 보나파르트파 깡패들은 서로 주고받은 사신(私信)에서, 다 알고 하는 방어 흉내를 두고 음탕한 농담을 주고받았다(예컨대 파리 방위군 포병 총사령관이자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 훈장 수훈자 알퐁스 시몽 기오가 포병 사단장 쉬잔에게 보낸 편지를 보라. 이 편지들은 코뮌의 『주르날 오피시엘』에 실렸다). 사기의 가면은 1871년 1월 28일 마침내 벗겨졌다. 극도의 자기 비하라는 참된 영웅심을 발휘하여, 국방정부는 항복 문서에서 비스마르크의 포로들로 이루어진 프랑스 정부로 나섰다. 그것은 루이 보나파르트조차 스당에서 떠맡기를 꺼렸을 만큼 비천한 역할이었다. 3월 18일의 사건 뒤 베르사유로 허둥지둥 달아나면서, 항복파는 자기들의 배신을 보여 주는 문서 증거를 파리의 손에 남겨 두었다. 코뮌이 지방에 보내는 성명서에서 말하듯,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라면 「이자들은 파리를 피바다에 잠긴 폐허 더미로 만드는 일도 마다하지 않을 것」이었다.
국방정부의 주요 인물 가운데 몇몇은 이런 결말을 열렬히 바란 데에 저마다 아주 특별한 이유까지 있었다.
휴전이 맺어진 직후, 국민의회의 파리 대표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지금은 쥘 파브르의 명시적 명령으로 총살당한 밀리에르 씨는 일련의 진본 법률 문서를 공개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입증했다. 쥘 파브르는 알제에 사는 한 술주정뱅이의 아내와 내연 관계로 살면서 여러 해에 걸친 대담하기 짝이 없는 문서 위조로 간통에서 난 자식들의 이름으로 막대한 유산을 가로채 부자가 되었고, 적법한 상속인들이 제기한 소송에서는 오직 보나파르트파 법정의 묵인 덕분에 폭로를 면했다는 것이다. 이 건조한 법률 문서들은 아무리 큰 말발로도 떨쳐 버릴 수 없었으므로, 쥘 파브르는 평생 처음으로 입을 다물고 조용히 내전이 터지기를 기다렸다가, 그때 가서야 파리 시민을 가족과 종교와 질서와 재산에 맞서 완전히 반란을 일으킨 탈옥수 무리라고 미친 듯이 규탄했다. 바로 이 위조범은 9월 4일 뒤 권력을 잡자마자, 제정 아래에서도 「에탕다르」 사건이라는 추문으로 위조죄 판결을 받은 피크와 타유페르를 동정심에서 사회로 풀어 주었다. 그 가운데 한 사람인 타유페르가 코뮌 치하의 파리로 감히 돌아오자 곧바로 다시 감옥에 들어갔다. 그러자 쥘 파브르는 국민의회 연단에서 파리가 감옥의 죄수들을 모조리 풀어 주고 있다고 외쳤다!
제정의 내무장관이 되려고 헛되이 애쓴 끝에 스스로 공화국의 재무장관에 오른, 국방정부의 만담꾼 에르네스트 피카르는 아르튀르 피카르라는 자의 형이다. 아르튀르 피카르는 협잡꾼으로 파리 증권거래소에서 쫓겨났고(1867년 7월 13일자 경찰청 보고서를 보라), 팔레스트로 거리 5번지 소시에테 제네랄 지점의 지점장으로 있을 때 30만 프랑을 훔친 일로 스스로 자백해 유죄 판결을 받았다(1868년 12월 11일자 경찰청 보고서를 보라). 에르네스트 피카르는 이 아르튀르 피카르를 자기 신문 『렐렉퇴르 리브르』의 편집인으로 앉혔다. 보통의 주식 투기꾼들이 이 재무부 기관지의 관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동안, 아르튀르는 재무부와 증권거래소를 바쁘게 오가며 프랑스군의 참패를 돈으로 바꾸었다. 이 훌륭한 형제의 금융 서신은 모두 코뮌의 손에 들어갔다.
9월 4일 전에는 무일푼 변호사였던 쥘 페리는 포위 기간 파리 시장으로 있으면서 기근을 이용해 한밑천을 챙겼다. 그가 자기의 부정한 행정을 해명해야 하는 날은 곧 그가 유죄 판결을 받는 날이 될 것이다.
그러니 이자들이 가출옥 증서를 찾을 수 있는 곳은 파리의 폐허뿐이었다. 그들이야말로 비스마르크가 바라던 바로 그런 자들이었다. 카드를 조금 뒤섞어서, 그때까지 정부를 뒤에서 조종하던 티에르가 이제 그 우두머리로 나서고, 가출옥 죄수들이 그의 장관이 되었다.
그 괴물 같은 난쟁이 티에르는 거의 반세기 동안 프랑스 부르주아지를 매혹해 왔다. 그가 바로 그들 자신의 계급적 부패를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는 지성이기 때문이다. 그는 정치가가 되기 전에 이미 역사가로서 거짓말 솜씨를 증명했다. 그의 공적 생애의 연대기는 프랑스의 불행의 기록이다. 1830년 전에는 공화파와 한패였던 그는, 자기 후원자 라피트를 배신하고 루이 필리프 치하에서 관직에 슬쩍 들어앉았으며, 성직자를 겨냥한 폭동을 부추겨 왕의 환심을 샀다. 그 폭동 때 생제르맹로세루아 성당과 대주교 관저가 약탈당했다. 또 그는 베리 공작부인을 감시하는 장관 겸 첩자이자 감옥의 산파 노릇을 해서 왕의 환심을 샀다. 트랑스노냉 거리의 공화파 학살과 그 뒤에 나온 언론과 결사권을 겨냥한 악명 높은 9월법은 그가 한 일이다. 1840년 3월 내각 수반으로 다시 나타난 그는 파리를 요새화하는 계획으로 프랑스를 놀라게 했다. 이 계획을 파리의 자유를 노리는 불길한 음모라고 규탄한 공화파에게 그는 하원 연단에서 이렇게 대답했다.
「무엇이라고요! 무슨 요새 공사가 자유를 위태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요! 무엇보다 먼저, 여러분은 어떤 정부가 언젠가 수도를 포격해서 자기를 지키려 할 수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있을 수 있는 모든 정부를 중상하는 것입니다. …… 그런 정부는 승리한 뒤에 승리하기 전보다 백 배는 더 불가능해질 것입니다.」 사실 그 요새들을 미리 프로이센에 넘겨준 정부가 아니고서는, 어떤 정부도 요새에서 파리를 포격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봄바 왕이 1848년 1월 팔레르모에서 솜씨를 부렸을 때, 이미 오래전에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티에르는 하원에서 다시 일어섰다. 「여러분, 팔레르모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실 것입니다. 큰 도시 하나가 마흔여덟 시간 동안 포격을 당했다는 소식에 여러분 모두가 공포로 몸을 떨고 계십니다[의회식 의미에서]. 누가 포격했습니까? 전쟁의 권리를 행사하는 외적이었습니까? 아닙니다, 여러분, 바로 그 도시의 정부였습니다. 왜였습니까? 그 불행한 도시가 자기 권리를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권리를 요구한 대가로 마흔여덟 시간의 포격을 받은 것입니다. …… 유럽의 여론에 호소하게 해 주십시오. 어쩌면 유럽에서 가장 큰 연단일 이곳에서 일어나 그런 행위에 대한 분노의 말 몇 마디를[정말로 말을] 울려 퍼지게 하는 것은 인류에 봉사하는 일입니다. …… 나라에 공을 세운[티에르 씨는 한 번도 세운 적이 없는] 섭정 에스파르테로가 바르셀로나의 봉기를 진압하려고 그 도시를 포격하려 했을 때, 세계 곳곳에서 분노의 함성이 일제히 터져 나왔습니다.」
열여덟 달 뒤, 티에르 씨는 프랑스군의 로마 포격을 가장 맹렬하게 옹호한 자들 가운데 하나였다. 결국 봄바 왕의 잘못은 포격을 마흔여덟 시간으로 한정했다는 데에만 있었던 모양이다.
2월 혁명 며칠 전, 기조가 그에게 내린 관직과 녹봉에서의 오랜 유배에 안달하던 티에르는 다가오는 민중 봉기의 냄새를 맡고는 「미라보무슈(파리 미라보)」라는 별명을 그에게 안겨 준 그 가짜 영웅조로 하원에서 선언했다. 「나는 프랑스에서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혁명당에 속합니다. 나는 혁명의 정부가 온건한 사람들 손에 머물기를 바랍니다. …… 그러나 그 정부가 열렬한 사람들, 심지어 급진파의 손에 떨어진다 해도 나는 그 때문에 내 대의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언제나 혁명당에 속할 것입니다.」 2월 혁명이 일어났다. 이 작은 사내가 꿈꾸었듯이 기조 내각을 티에르 내각으로 바꾸는 대신, 혁명은 루이 필리프를 공화국으로 갈아 치웠다. 민중이 승리한 첫날 그는 조심스레 숨어 버렸다. 노동자들의 경멸이 그를 그들의 증오로부터 가려 주고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그래도 전설적인 용기를 지닌 그는 6월 학살이 자기 같은 부류가 활약할 무대를 깨끗이 치워 줄 때까지 계속 공적 무대를 피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질서당」과 그 의회 공화국의 지도적 두뇌가 되었다. 그것은 지배계급의 모든 경쟁 분파가 민중을 짓밟으려고 함께 음모를 꾸미고, 저마다 자기 왕정을 복고하려고 서로를 상대로 음모를 꾸민 익명의 공위기(空位期)였다. 그때도 지금처럼 티에르는 공화파가 공화국을 굳히는 데 유일한 장애물이라고 규탄했다. 그때도 지금처럼 그는 사형집행인이 돈 카를로스에게 한 말을 공화국에 했다. 「너를 죽이겠다. 그러나 너를 위해서다.」 지금도 그때처럼 그는 승리한 다음 날 외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L’Empire est fait — 제국이 완성되었다고. 필요한 자유에 관한 위선적인 설교와, 자기를 속여 넘기고 의회주의를 걷어차 버린 루이 보나파르트에 대한 개인적 원한에도 불구하고 — 그리고 의회주의의 인위적인 공기 밖에서는 자기가 시들어 무(無)가 되어 버린다는 것을 이 작은 사내는 알고 있다 — 그는 프랑스군의 로마 점령에서 프로이센과의 전쟁에 이르기까지 제2제정의 온갖 파렴치한 짓에 손을 댔다. 그는 독일 통일을 맹렬히 공격하여 이 전쟁을 부추겼는데, 그것은 독일 통일이 프로이센 전제의 외투여서가 아니라 독일의 분열에 대해 프랑스가 가진 기득권을 침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그 역사적 구두닦이가 된 나폴레옹 1세의 칼을 난쟁이 같은 팔로 유럽의 면전에서 휘두르기를 좋아했지만, 그의 외교 정책은 1841년 런던 협약에서 1871년 파리 항복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비스마르크의 특별 허가를 얻어 스당과 메스의 포로들을 파리에 덤벼들게 하는 지금의 내전에 이르기까지, 언제나 프랑스의 철저한 굴욕으로 끝났다. 재주가 많고 목적이 변덕스러운데도, 이 사내는 평생 가장 화석화된 판에 박힌 관행에 묶여 있었다. 현대 사회의 더 깊은 저류가 그에게 영원히 감춰져 있었던 것은 말할 나위도 없지만, 활력이 모조리 혀로 달아나 버린 그의 두뇌는 그 표면에서 일어나는 가장 뻔한 변화조차 질색했다. 그래서 그는 프랑스의 낡은 보호무역 제도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을 신성 모독이라고 끝없이 규탄했다. 루이 필리프의 장관이었을 때는 철도를 터무니없는 망상이라고 비난했고, 루이 보나파르트 치하에서 야당에 있을 때는 썩어 빠진 프랑스 군제를 개혁하려는 모든 시도를 모독이라고 낙인찍었다. 그 긴 정치 경력에서 그는 실제로 쓸모 있는 조치를 단 한 번도 — 가장 작은 것조차 — 저지른 적이 없다. 티에르가 일관된 것은 오직 부에 대한 탐욕과 부를 생산하는 사람들에 대한 증오에서뿐이었다. 루이 필리프 치하 첫 내각에 욥처럼 가난한 몸으로 들어간 그는 백만장자가 되어 나왔다. 같은 왕 아래의 마지막 내각(1840년 3월 1일의 내각)으로 그는 하원에서 공금 횡령이라는 공공연한 조롱을 받았는데, 그는 눈물로 대답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눈물은 쥘 파브르나 다른 어느 악어 못지않게 그가 넉넉히 거래하는 상품이다. 보르도에서 임박한 재정 파탄에서 프랑스를 구하려고 그가 취한 첫 조치는 자기에게 해마다 300만 프랑을 내려 주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가 1869년 파리의 유권자들에게 전망을 열어 보인 「절약하는 공화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말이었다. 1830년 하원에서 그와 동료였고 자신이 자본가이면서도 파리 코뮌의 헌신적인 의원인 베슬레 씨는 최근 공개 벽보에서 티에르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본에 의한 노동의 노예화는 언제나 당신 정책의 주춧돌이었소. 그리고 노동의 공화국이 시청에 들어선 것을 본 바로 그날부터, 당신은 프랑스를 향해 ‘저것들은 범죄자다!’라고 외치기를 한 번도 그친 적이 없소.」 자잘한 국가 협잡의 명수, 위증과 반역의 거장, 의회 당파 싸움의 온갖 시시한 술책과 교활한 꾀와 비열한 배신에 능한 장인, 관직에서 밀려나 있을 때는 혁명을 부채질하고 국가의 키를 잡았을 때는 그 혁명을 피로 질식시키기를 서슴지 않는 자, 사상 대신 계급적 편견을, 심장 대신 허영을 지닌 자, 공적 생활이 혐오스러운 만큼 사생활도 파렴치한 자 — 그는 지금 프랑스의 술라 역을 맡고 있는 이때에도 자기 행위의 끔찍함을 과시의 우스꽝스러움으로 돋보이게 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
파리의 항복은 파리뿐 아니라 프랑스 전체를 프로이센에 넘겨줌으로써, 트로쉬 자신의 말대로 9월 4일의 찬탈자들이 바로 그날 시작한 적과의 오랜 반역 음모를 마무리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그들이 이제 프로이센의 도움을 받아 공화국과 파리를 상대로 벌이게 될 내전을 열었다. 함정은 항복 조건 자체에 놓여 있었다. 그때 국토의 3분의 1 이상이 적의 손에 있었고, 수도는 지방과 단절되었으며, 모든 통신이 마비되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의 참된 대표를 뽑는다는 것은 준비할 시간을 넉넉히 주지 않는 한 불가능했다. 이를 내다보고 항복 문서는 여드레 안에 국민의회를 선출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그래서 프랑스의 여러 지방에서는 선거가 있다는 소식이 바로 그 전날에야 도착했다. 게다가 이 의회는 항복 문서의 명시적 조항에 따라 오로지 강화냐 전쟁이냐를 결정하고, 경우에 따라 강화 조약을 맺는 목적으로만 선출되게 되어 있었다. 주민들은 휴전 조건 때문에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해졌으며, 비스마르크가 강요하는 강화를 승인하는 데에는 프랑스에서 가장 나쁜 자들이 가장 알맞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런 예방책으로도 만족하지 않은 티에르는 휴전의 비밀이 파리에 알려지기도 전에 지방으로 선거 유세 여행을 떠나, 정통왕조파를 다시 살려 냈다. 정통왕조파는 오를레앙파와 함께, 그때는 불가능하던 보나파르트파의 자리를 대신 차지해야 했다. 그는 그들이 두렵지 않았다. 현대 프랑스의 정부로서는 불가능하고 따라서 경쟁자로서는 하찮은 이 당파, 티에르 자신의 말로(하원, 1833년 1월 5일) 「그 활동이 언제나 외국의 침략, 내전, 무정부라는 세 가지 수단에 국한되어 온」 당파보다 반혁명의 도구로서 더 적격인 당파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들은 오래 기다려 온 과거 회귀의 천년왕국이 왔다고 정말로 믿었다. 외국 침략의 발굽이 프랑스를 짓밟고 있었고, 제국은 무너지고 보나파르트는 포로가 되었으며, 그리고 그들 자신이 거기 있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틀림없이 거꾸로 굴러 1816년의 「샹브르 앵트루바블(다시 찾을 수 없는 의회)」에서 멈춘 것이었다. 1848년에서 1851년까지 공화국의 의회들에서 그들은 교양 있고 훈련된 의회 투사들을 대표로 내세웠다. 이번에 몰려 들어온 것은 그 당의 졸개들, 프랑스의 모든 푸르소냐크들이었다.
이 「농촌 귀족들」의 의회가 보르도에 모이자마자 티에르는 그들에게, 의회 토론이라는 예우조차 없이 강화 예비조약을 즉시 승인해야 한다고 분명히 말했다. 그것만이 프로이센이 그들에게 공화국과 그 아성인 파리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하도록 허락할 유일한 조건이라는 것이었다. 사실 반혁명에는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제2제정은 국가 부채를 두 배 넘게 늘렸고, 모든 대도시를 무거운 시 부채에 빠뜨렸다. 전쟁은 부채를 무섭게 부풀리고 국민의 자원을 무자비하게 황폐하게 했다. 파탄을 마무리하려는 듯 프로이센의 샤일록이 차용증서를 들고 버티고 있었다. 프랑스 땅에 있는 자기 병사 50만 명의 주둔비, 50억 프랑의 배상금, 그리고 미불 할부금에 대한 연 5퍼센트의 이자였다. 누가 이 청구서를 치를 것인가? 부의 전유자들이 자기들 스스로 일으킨 전쟁의 비용을 부의 생산자들의 어깨에 떠넘기기를 바랄 수 있는 길은 오직 공화국을 폭력으로 무너뜨리는 것뿐이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엄청난 파탄은 토지와 자본을 대표하는 이 애국자들을 부추겨, 바로 침략자의 눈앞에서 그 비호 아래 대외 전쟁에 내전을 — 노예주들의 반란을 — 접붙이게 했다.
이 음모의 앞길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하나 있었다. 파리였다. 파리를 무장해제하는 것이 성공의 첫째 조건이었다. 그래서 티에르는 파리에 무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파리는 격분했다. 「농촌 귀족」 의회의 광란에 가까운 반공화국 시위에, 공화국의 법적 지위를 두고 티에르 자신이 늘어놓은 얼버무림에, 파리에서 머리를 자르고 수도의 지위를 빼앗겠다는 위협에, 오를레앙파 대사 임명에, 파리의 상공업을 파멸로 몰아넣은 만기 상업 어음과 집세에 관한 뒤포르의 법률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출판물 한 부마다 2상팀씩 매긴 푸이예케르티에의 세금에, 블랑키와 플루랑스에 대한 사형 선고에, 공화파 신문들의 정간에, 국민의회의 베르사유 이전에, 팔리카오가 선포했다가 9월 4일로 효력을 잃은 계엄령의 재선포에, 12월 쿠데타파 비누아를 파리 총독으로, 제정의 헌병 발랑탱을 경찰청장으로, 예수회 장군 오렐 드 팔라딘을 국민방위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에.
이제 우리는 티에르 씨와 그의 졸개인 국민 방위의 사나이들에게 질문 하나를 던져야 하겠다. 알려진 대로 티에르는 재무장관 푸이예케르티에 씨를 통해 20억 프랑의 차관을 들여왔다. 그렇다면 다음은 사실인가 아닌가.
1. 이 거래는 수억 프랑의 사례금이 티에르, 쥘 파브르, 에르네스트 피카르, 푸이예케르티에, 쥘 시몽의 개인적 이익으로 돌아가도록 꾸며졌는가? 그리고 —
2. 파리의 「평정」이 끝난 뒤에야 돈을 치르기로 되어 있었는가?
아무튼 이 일에는 무언가 아주 다급한 사정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티에르와 쥘 파브르는 보르도 의회 다수파의 이름으로 프로이센군이 파리를 즉시 점령해 달라고 뻔뻔스럽게 간청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은 비스마르크의 속셈이 아니었다. 그는 독일로 돌아가서 감탄하는 프랑크푸르트의 속물들에게 비웃듯이, 그리고 공공연히 그렇게 말했다.
II
무장한 파리는 반혁명 음모의 앞길에 놓인 유일하고 진지한 장애물이었다. 그러므로 파리는 무장해제되어야 했다. 이 점에서 보르도 의회는 진심 그 자체였다. 의회의 농촌 귀족들이 내지르는 고함으로도 충분히 들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티에르가 파리를 12월 쿠데타파 비누아, 보나파르트파 헌병 발랑탱, 예수회 장군 오렐 드 팔라딘이라는 삼두정치의 자비로운 처분에 넘긴 일만으로도 의심이 비집고 들어갈 마지막 핑계마저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음모자들은 파리 무장해제의 참된 목적을 모욕적으로 드러내 보이면서도, 가장 뻔뻔하고 가장 노골적인 거짓말을 구실로 파리에 무기를 내려놓으라고 요구했다. 티에르는 파리 국민방위군의 대포가 국가 소유이니 국가에 돌려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사실은 이러했다. 비스마르크의 포로들이 프랑스의 항복에 서명하면서도 파리를 위협할 목적으로 대규모 친위대를 남겨 두기로 한 바로 그 항복의 날부터, 파리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국민방위군은 스스로를 재조직하고, 옛 보나파르트파 부대의 일부 잔당을 빼고는 대원 전체가 뽑은 중앙위원회에 최고 지휘권을 맡겼다. 프로이센군이 파리에 들어오기 전날, 중앙위원회는 항복파가 프로이센군이 점령하기로 된 바로 그 구역 안팎에 배신적으로 버려 둔 대포와 기관총을 몽마르트르, 벨빌, 라빌레트로 옮기는 조치를 취했다. 그 대포들은 국민방위군의 모금으로 마련된 것이었다. 그 대포들은 국민방위군의 사유재산으로서 1월 28일의 항복 문서에서 공식 인정되었고, 바로 그 자격으로 정부 소유 무기를 정복자의 손에 넘기는 일반적 인도에서 빠졌다. 그런데 티에르는 파리를 상대로 전쟁을 시작할 아주 얄팍한 구실조차 갖고 있지 않았으므로, 국민방위군의 대포가 국가 소유라는 새빨간 거짓말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대포를 빼앗는 것은 분명 파리 전체의 무장해제, 따라서 9월 4일 혁명의 무장해제를 위한 예비 단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혁명은 프랑스의 법적 지위가 되어 있었다. 그 혁명의 산물인 공화국은 항복 문서의 조항에서 정복자에게 인정받았다. 항복 뒤에는 모든 외국 열강이 공화국을 승인했고, 국민의회도 공화국의 이름으로 소집되었다. 9월 4일 파리 노동자 혁명은 보르도에 자리 잡은 국민의회와 그 집행부가 가진 유일한 법적 명분이었다. 그것이 없다면 국민의회는 곧바로 입법원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을 것이다. 입법원은 1869년 프로이센이 아니라 프랑스의 지배 아래 보통선거로 뽑혔고, 혁명의 팔에 강제로 해산당한 기관이다. 티에르와 그의 가출옥 죄수들은 카옌으로 가는 항해를 면하려면 루이 보나파르트가 서명한 통행 증명서를 얻으려고 항복해야 했을 것이다. 프로이센과 강화 조건을 정할 위임권을 가진 국민의회는 그 혁명의 한 삽화에 지나지 않았다. 그 혁명의 참된 화신은 여전히 무장한 파리였다. 파리가 혁명을 일으켰고, 혁명을 위해 굶주림의 공포가 따르는 다섯 달의 포위를 견뎠으며, 트로쉬의 계획에도 불구하고 오랜 저항을 지방에서 벌어진 끈질긴 방어전의 토대로 삼았다. 이제 파리는 보르도의 반란 노예주들의 모욕적인 명령에 따라 무기를 내려놓고 자기의 9월 4일 혁명이 루이 보나파르트에게서 그 왕당파 경쟁자들에게로 권력을 옮긴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인정하든가, 아니면 프랑스를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투사로 나서든가 해야 했다. 제2제정을 낳았고 그 보살핌 아래 철저히 썩어 문드러진 정치적·사회적 조건을 혁명으로 뒤엎지 않고는, 프랑스를 파멸에서 구하는 일도 프랑스를 되살리는 일도 불가능했다. 다섯 달의 기근으로 수척해진 파리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자기 요새에서 프로이센의 대포가 내려다보고 있는데도, 파리는 프랑스 음모자들에 맞서 저항하는 모든 위험을 무릅쓰기로 영웅적으로 결의했다. 그래도 중앙위원회는 파리를 몰아넣으려는 내전을 혐오했으므로, 의회의 도발과 집행부의 찬탈과 파리 안팎으로 위협적으로 집결하는 군대에도 불구하고 순전히 방어적인 태도를 고집스럽게 지켰다.
티에르는 비누아에게 순경 무리와 전열 보병 몇 개 연대를 이끌고 몽마르트르로 야간 원정을 떠나 국민방위군의 대포를 기습 탈취하게 함으로써 내전을 열었다. 이 시도가 국민방위군의 저항과 전열 보병이 민중과 친교하는 바람에 어떻게 무너졌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오렐 드 팔라딘은 미리 승전 공보를 인쇄해 두었고, 티에르는 쿠데타 조치를 알리는 벽보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이제 이것들은 국민방위군이 무기를 그대로 지니게 하겠다는 관대한 결심을 알리는 티에르의 호소문으로 바뀌어야 했다. 그는 국민방위군이 이 무기를 들고 정부 편에 모여 반란자들에 맞서리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국민방위군 30만 명 가운데, 꼬마 티에르의 편에 모여 자기 자신에 맞서라는 이 부름에 응한 것은 고작 300명이었다. 3월 18일의 영광스러운 노동자 혁명이 파리를 아무런 이견 없이 장악했다. 중앙위원회가 그 임시정부였다. 유럽은 한순간, 최근에 벌어진 국가와 전쟁의 그 요란한 공연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니면 아득히 지나간 과거의 꿈이었는지 의심하는 듯했다.
3월 18일부터 베르사유군이 파리에 들어올 때까지, 프롤레타리아 혁명은 「상류층」의 혁명들, 그리고 그보다 더 그들의 반혁명들에 넘쳐 나는 폭력 행위로부터 너무나 깨끗했기에, 그 적들이 떠들어 댈 거리라고는 르콩트 장군과 클레망 토마 장군의 처형, 그리고 방돔 광장 사건밖에 남지 않았다.
몽마르트르 야간 기습에 가담한 보나파르트파 장교 가운데 하나인 르콩트 장군은 제81 전열 보병 연대에 피갈 광장의 비무장 군중을 향해 네 번이나 발포를 명령했고, 병사들이 거부하자 사납게 욕을 퍼부었다. 그의 부하들은 여자와 아이들을 쏘는 대신 그를 쏘았다. 노동계급의 적들에게 훈련받으며 병사들이 몸에 익힌 뿌리 깊은 습성이, 이 병사들이 편을 바꾼 바로 그 순간에 바뀔 리 없음은 물론이다. 같은 자들이 클레망 토마를 처형했다.
「장군」 클레망 토마는 불만을 품은 전직 병참 하사관으로, 루이 필리프 치하 말기에 공화파 신문 『르 나시오날』 사무실에 들어가 그 호전적인 신문의 법적 책임을 지는 허수아비(gérant responsable, 책임 발행인)와 결투 대리 깡패 노릇을 겸했다. 2월 혁명 뒤 『나시오날』 사람들이 권력을 잡자 그들은 6월 학살 전야에 이 늙은 병참 하사관을 장군으로 둔갑시켰다. 그는 쥘 파브르와 마찬가지로 그 학살을 꾸민 불길한 음모자 가운데 하나였고, 가장 비열한 학살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그 뒤 그와 그의 장군직은 오랫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1870년 11월 1일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 전날, 시청에서 붙잡힌 국방정부는 블랑키, 플루랑스, 그리고 노동계급의 다른 대표들에게, 찬탈한 권력을 파리가 자유롭게 뽑을 코뮌의 손에 넘기고 물러나겠다고 엄숙히 서약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을 지키는 대신, 보나파르트의 코르시카인들을 대신하게 된 트로쉬의 브르타뉴인들을 파리에 풀어놓았다. 오직 타미지에 장군만이 그런 배신으로 자기 이름을 더럽히기를 거부하고 국민방위군 총사령관직을 내놓았고, 그 자리에서 클레망 토마가 다시 한 번 장군이 되었다. 지휘권을 쥐고 있는 내내 그는 프로이센군이 아니라 파리 국민방위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그는 국민방위군 전체의 무장을 가로막고, 부르주아 대대를 노동자 대대와 맞붙게 하고, 트로쉬의 「계획」에 적대적인 장교들을 솎아 냈으며, 그 영웅심으로 지금 가장 완고한 적들마저 놀라게 한 바로 그 프롤레타리아 대대들을 비겁하다는 낙인을 찍어 해산시켰다. 클레망 토마는 파리 노동계급의 사적인 원수로서 누리던 6월의 지위를 되찾았다는 것을 무척 자랑스러워했다. 3월 18일 바로 며칠 전, 그는 육군장관 르플로에게 「파리 카나유(천민)의 라 핀 플뢰르[정수]를 끝장낼」 자기 나름의 계획을 내놓았다. 비누아가 패주한 뒤, 그는 굳이 아마추어 첩자 자격으로 현장에 나타나야만 했다. 중앙위원회와 파리 노동자들에게 클레망 토마와 르콩트의 살해에 책임이 있다면, 그것은 웨일스 공비가 런던에 입성하던 날 압사한 사람들의 운명에 공비가 책임이 있는 정도일 것이다.
방돔 광장의 비무장 시민 학살은 티에르 씨와 농촌 귀족들이 의회에서는 끈질기게 모른 체하면서, 그 선전을 오로지 유럽 언론의 하인 방에 맡겨 둔 하나의 신화다. 「질서의 사나이들」, 곧 파리의 반동가들은 3월 18일의 승리에 벌벌 떨었다. 그들에게 그것은 마침내 민중의 응징이 다가온다는 신호였다. 1848년 6월부터 1871년 1월 22일까지 그들의 손에 죽어 간 희생자들의 망령이 그들의 눈앞에 떠올랐다. 그들이 받은 벌은 그 공포뿐이었다. 순경들조차 무장해제당하고 갇히기는커녕 — 마땅히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 베르사유로 무사히 물러날 수 있도록 파리의 성문이 활짝 열렸다. 질서의 사나이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다시 모여 파리 한복판의 거점 여럿을 조용히 차지하는 것까지 허락받았다. 중앙위원회의 이 관용 — 무장한 노동자들의 이 너그러움 — 은 「질서당」의 습성과 너무나 이상하게 어긋났기에, 질서당은 이것을 스스로 약하다는 것을 아는 데서 나온 증상일 뿐이라고 잘못 해석했다. 그래서 비누아가 대포와 기관총으로 해내지 못한 일을 비무장 시위라는 외투를 쓰고 해 보겠다는 어리석은 계획이 나왔다. 3월 22일, 사치스러운 구역에서 멋쟁이 깡패 무리가 떠들썩하게 출발했다. 그 대열에는 프티 크레베(멋쟁이 한량)들이 빠짐없이 끼어 있었고, 선두에는 헤케런, 코에틀로공, 앙리 드 펜 따위 제정의 악명 높은 측근들이 섰다. 평화 시위라는 비겁한 구실 아래, 자객의 무기를 몰래 품은 이 무리는 행진 대형을 갖추고, 지나가며 마주친 국민방위군 순찰대와 보초들을 두들겨 패고 무장해제했다. 그리고 라페 거리를 빠져나오면서 「중앙위원회를 타도하라! 살인자들을 타도하라! 국민의회 만세!」를 외치며, 거기 늘어선 방어선을 뚫고 기습으로 방돔 광장의 국민방위군 본부를 차지하려 했다. 그들의 권총 사격에 대응하여 정식 소마시옹(해산 경고, 영국의 소요 단속법 낭독에 해당하는 프랑스의 절차)이 이루어졌고, 그것이 효과가 없자 국민방위군 장군이 발포를 명령했다. 한 차례의 일제 사격에 어리석은 멋쟁이들은 혼비백산 흩어졌다. 그들은 자기들의 「점잖음」을 내보이기만 해도 여호수아의 나팔이 여리고 성벽에 미친 것과 같은 효과가 파리 혁명에 미치리라고 기대했던 것이다. 달아난 자들이 남긴 것은 죽은 국민방위군 두 명과 중상을 입은 아홉 명(그 가운데 중앙위원회 위원 한 명)이었고, 그들이 공을 세운 현장에는 권총, 단검, 지팡이 칼이 어지럽게 흩어져 그들의 「평화」 시위가 「비무장」이었음을 증언했다. 1849년 6월 13일 국민방위군이 로마에 대한 프랑스군의 범죄적 공격에 항의하여 정말로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을 때, 당시 질서당의 장군이던 샹가르니에는 이 비무장한 사람들에게 사방에서 군대를 풀어 쏘고 베고 말발굽으로 짓밟게 했다는 이유로 국민의회, 특히 티에르 씨에게서 사회의 구원자라는 환호를 받았다. 그때 파리에는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뒤포르는 새 탄압법들을 서둘러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새로운 체포, 새로운 추방 — 새로운 공포 정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하층 계급은 이런 일을 다르게 처리한다. 1871년의 중앙위원회는 「평화 시위」의 영웅들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 얼마나 내버려 두었던지, 바로 이틀 뒤 그들은 세세 제독 아래 모여 그 무장 시위를 벌일 수 있었고, 그 시위는 베르사유로의 유명한 줄행랑으로 막을 내렸다. 티에르가 몽마르트르에 대한 강도 같은 기습으로 연 내전을 계속하기를 꺼린 나머지, 중앙위원회는 이번에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그때 전혀 무력하던 베르사유로 곧바로 진격해 티에르와 그의 농촌 귀족들의 음모에 종지부를 찍지 않은 것이다. 그러기는커녕 질서당은 3월 26일 코뮌 선거일에 또다시 투표함에서 제 힘을 시험해 볼 수 있었다. 그날 그들은 파리의 구청에서 너무도 관대한 정복자들과 부드러운 화해의 말을 주고받으면서, 속으로는 때가 되면 그들을 몰살하겠다는 엄숙한 맹세를 중얼거렸다.
이제 메달의 뒷면을 보라. 티에르는 4월 초에 파리를 상대로 둘째 전역을 열었다. 베르사유로 끌려온 첫 파리 포로들은 끔찍한 만행을 당했다. 에르네스트 피카르는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어슬렁거리며 그들을 조롱했고, 티에르 부인과 파브르 부인은 그들의 귀부인(?)들 한가운데서 발코니에 서서 베르사유 폭도의 만행에 박수를 보냈다. 사로잡힌 전열 보병 병사들은 냉혹하게 학살당했다. 우리의 용감한 벗, 주물공 뒤발 장군은 아무런 재판 절차 없이 총살당했다. 제2제정의 주연에서 부끄러움 없는 노출로 악명 높던 아내 덕에 먹고사는 갈리페는, 자기 엽기병들이 기습해 무장해제한 국민방위군 소부대를 그 중대장, 중위와 함께 죽이라고 명령했다고 포고문에서 뽐냈다. 도망병 비누아는 연맹군 대열에서 사로잡힌 전열 보병 병사를 모두 총살하라는 일반 명령을 내린 공으로 티에르에게서 레지옹 도뇌르 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헌병 데마레는 1870년 10월 31일 국방정부 요인들의 목숨을 구해 준 고결하고 기사다운 플루랑스를 배신적으로 백정처럼 난도질한 공으로 훈장을 받았다. 티에르는 국민의회에서 그 살해의 「고무적인 세부 사항」을 의기양양하게 늘어놓았다. 티무르 역을 맡도록 허락받은 의회판 엄지 동자 톰처럼 우쭐한 허영심에 들뜬 그는, 자기의 왜소함에 반기를 든 자들에게 문명화된 전쟁의 모든 권리를, 야전 병원의 중립권까지 부정했다. 볼테르가 내다본 대로, 한동안 호랑이 같은 본능을 마음껏 풀어놓도록 허락받은 원숭이보다 더 끔찍한 것은 없다. (부록 주석 I 참조.)
코뮌이 4월 7일 보복을 명령하는 법령을 내려 「베르사유 강도떼의 식인종 같은 만행으로부터 파리를 지키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갚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선언한 뒤에도, 티에르는 포로들에 대한 야만적 처우를 멈추지 않았고, 게다가 공보에서 이렇게 그들을 모욕했다. 「타락한 민주주의의 이토록 타락한 얼굴들이 정직한 사람들의 비통한 눈길 앞에 나타난 적은 일찍이 없었다」 — 티에르 자신과 그의 가출옥 장관들처럼 정직한 사람들 말이다. 그래도 포로 총살은 한동안 중단되었다. 그러나 티에르와 그의 12월 쿠데타파 장군들이, 코뮌의 보복 법령이 공허한 위협에 지나지 않으며 국민방위군으로 변장하고 파리에서 붙잡힌 헌병 첩자들조차, 소이탄을 지닌 채 붙잡힌 순경들조차 목숨을 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포로의 대량 총살이 다시 시작되어 끝까지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국민방위군이 피신한 집들은 헌병들에게 포위되어 석유를 흠뻑 뒤집어쓰고(이 전쟁에서 석유가 등장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불에 탔으며, 까맣게 탄 시체들은 나중에 테른의 언론 구급대가 꺼내 왔다. 4월 25일 벨에핀에서 기마 엽기병 부대에 항복한 국민방위군 네 명은 그 뒤 중대장 — 갈리페의 훌륭한 부하 — 에게 하나씩 차례로 총살당했다. 네 희생자 가운데 죽은 줄 알고 버려진 셰페르는 파리의 전초선까지 기어 돌아와 코뮌 위원회 앞에서 이 사실을 증언했다. 톨랭이 이 위원회의 보고를 근거로 육군장관에게 질의하자, 농촌 귀족들은 고함으로 그의 목소리를 묻어 버리고 르플로에게 답변을 금했다. 그들의 「영광스러운」 군대의 행적을 입에 올리는 것은 군대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이었다. 물랭사케에서 잠든 채 기습당한 연맹군을 총검으로 찔러 죽인 일과 클라마르의 대량 총살을 알리는 티에르 공보의 경박한 어조는, 그다지 예민하지 않은 런던 『타임스』의 신경마저 건드렸다. 그러나 파리의 포격자들과 외국 침략의 비호를 받는 노예주 반란의 선동자들이 저지른 서막에 지나지 않는 만행들을 오늘 낱낱이 늘어놓으려 드는 것은 우스운 일이 될 것이다. 이 모든 참상 한가운데서, 티에르는 자기의 난쟁이 같은 어깨를 짓누르는 무서운 책임에 대해 의회에서 늘어놓던 한탄은 잊어버린 채 공보에서 l’Assemblée siège paisiblement(의회는 평온하게 회의를 계속하고 있다)고 자랑하며, 때로는 12월 쿠데타파 장군들과, 때로는 독일 군주들과 끊임없이 연회를 벌임으로써 자기의 소화가 조금도, 르콩트와 클레망 토마의 망령에 의해서조차 방해받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
III
3월 18일 새벽, 파리는 「코뮌 만세!」라는 우렛소리와 함께 일어섰다. 부르주아의 머리를 그토록 애태우는 스핑크스, 코뮌이란 무엇인가?
중앙위원회는 3월 18일의 성명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리의 프롤레타리아는 지배계급의 실패와 배신 한가운데서, 공무의 지휘를 자기 손에 쥠으로써 사태를 구할 때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들은 정부 권력을 장악하여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되는 것이 자기들의 절대적 의무이자 절대적 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이미 만들어져 있는 국가기구를 그대로 장악해 제 목적에 쓸 수는 없다.
상비군, 경찰, 관료, 성직자, 사법부라는 — 체계적이고 위계적인 분업의 설계에 따라 만들어진 기관들이라는 — 어디에나 있는 기관들을 거느린 중앙집권적 국가권력은 절대왕정 시대에 비롯되었고, 봉건제에 맞선 투쟁에서 갓 태어난 중간계급 사회에 강력한 무기 노릇을 했다. 그러나 그 발전은 온갖 중세의 쓰레기, 영주권, 지방 특권, 도시와 길드의 독점, 지방 헌장에 가로막혀 있었다.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거대한 빗자루는 지나간 시대의 이 모든 유물을 쓸어 냄으로써, 제1제정 아래 세워진 근대 국가 건물이라는 상부구조에 대한 마지막 장애물까지 사회적 토양에서 한꺼번에 치워 버렸다. 제1제정 자체는 근대 프랑스에 맞선 낡은 반(半)봉건 유럽의 대불 동맹 전쟁이 낳은 자식이었다. 그 뒤의 체제들에서 정부는 의회의 통제 — 곧 유산계급의 직접적 통제 — 아래 놓이면서 막대한 국가 부채와 가혹한 조세의 온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관직과 녹봉과 연줄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유혹 때문에 지배계급의 경쟁 분파들과 모험가들이 다투는 뼈다귀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 정치적 성격까지 사회의 경제적 변화와 함께 바뀌었다. 근대 공업의 진보가 자본과 노동 사이의 계급 적대를 발전시키고 넓히고 격화시키는 것과 같은 속도로, 국가권력은 노동에 대한 자본의 국민적 권력, 사회적 노예화를 위해 조직된 공권력, 계급 전제의 기관이라는 성격을 점점 더 띠었다. 계급투쟁의 진전된 국면을 표시하는 혁명이 일어날 때마다, 국가권력의 순전히 억압적인 성격은 점점 더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1830년 혁명은 정부를 지주에게서 자본가에게로 옮김으로써, 노동자의 더 먼 적대자에게서 더 직접적인 적대자에게로 정부를 옮겼다. 2월 혁명의 이름으로 국가권력을 잡은 부르주아 공화파는 그 권력을 6월 학살에 썼다. 「사회」 공화국이란 노동계급의 사회적 예속을 보장하는 공화국을 뜻한다는 것을 노동계급에게 납득시키고, 부르주아와 지주 계급의 왕당파 대다수에게는 정부의 근심거리와 녹봉을 부르주아 「공화파」에게 안심하고 맡겨도 된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6월의 단 한 번의 영웅적 위업 뒤에, 부르주아 공화파는 앞줄에서 「질서당」의 뒷줄로 물러나야 했다. 질서당은 전유 계급의 모든 경쟁 분파와 당파가 이제 공공연히 선언된 생산 계급과의 적대 속에서 결성한 연합이었다. 그들의 합자 정부에 알맞은 형태는 루이 보나파르트를 대통령으로 하는 의회 공화국이었다. 그들의 체제는 공공연한 계급 테러와 「비천한 군중」에 대한 의도적인 모욕의 체제였다. 티에르 씨가 말한 대로 의회 공화국이 「그들[지배계급의 여러 분파]을 가장 덜 갈라놓았다」면, 그것은 그 계급과 그 얇은 대열 밖에 있는 사회 전체 사이에 심연을 열어 놓았다. 이전 체제들에서 그들 자신의 분열이 그래도 국가권력을 견제하던 제약은 그들의 단결로 없어졌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의 봉기가 위협해 오자 그들은 이제 국가권력을 노동에 맞선 자본의 국민적 전쟁 기관으로 무자비하게, 보란 듯이 사용했다. 그러나 생산 대중을 상대로 끊임없는 십자군 전쟁을 벌이면서 그들은 집행부에 끊임없이 더 큰 탄압 권력을 줄 수밖에 없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자기들의 의회 아성인 국민의회로부터 집행부에 맞서 자기를 지킬 모든 수단을 하나씩 빼앗을 수밖에 없었다. 루이 보나파르트라는 인물로 나타난 집행부가 그들을 쫓아냈다. 「질서당」 공화국이 자연스럽게 낳은 자식이 제2제정이었다.
쿠데타를 출생증명서로, 보통선거를 승인장으로, 칼을 왕홀로 삼은 제정은 농민, 곧 자본과 노동의 투쟁에 직접 얽혀 있지 않은 생산자 대중에 기반한다고 공언했다. 제정은 의회주의를, 그리고 그와 함께 유산계급에 대한 정부의 노골적인 굴종을 깨뜨림으로써 노동계급을 구한다고 공언했다. 유산계급에게는 노동계급에 대한 그들의 경제적 우위를 지켜 줌으로써 그들을 구한다고 공언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두를 위해 국민적 영광이라는 망상을 되살려 모든 계급을 통합한다고 공언했다. 실제로 제정은 부르주아지가 이미 국민을 통치할 능력을 잃었고 노동계급은 아직 그 능력을 얻지 못한 시기에 가능한 유일한 정부 형태였다. 제정은 사회의 구원자로 온 세계의 갈채를 받았다. 그 지배 아래 부르주아 사회는 정치적 근심에서 풀려나 스스로도 예상하지 못한 발전을 이루었다. 그 공업과 상업은 거대한 규모로 팽창했다. 금융 사기는 세계주의적 주연을 벌였다. 대중의 비참은 화려하고 겉만 번지르르하며 타락한 사치의 파렴치한 과시로 더욱 도드라졌다. 겉으로는 사회 위로 높이 솟아오른 듯 보이던 국가권력은 동시에 그 자체가 그 사회의 가장 큰 추문이자 그 모든 부패의 온상이었다. 국가권력 자신의 썩음과, 그것이 구한 사회의 썩음은 프로이센의 총검에 의해 폭로되었다. 프로이센 자신도 그 체제의 최고 소재지를 파리에서 베를린으로 옮기려고 안달하고 있었다. 제정주의는 갓 태어난 중간계급 사회가 봉건제로부터 자기를 해방하는 수단으로 다듬기 시작했고, 다 자란 부르주아 사회가 마침내 자본에 의한 노동의 노예화 수단으로 바꾸어 놓은 그 국가권력의 가장 매춘부적인 형태이자 동시에 최후의 형태다.
제정의 정반대가 코뮌이었다. 파리 프롤레타리아가 2월 혁명을 열며 외친 「사회 공화국」이라는 함성은, 계급 지배의 군주제적 형태뿐 아니라 계급 지배 그 자체를 대신할 공화국에 대한 막연한 열망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코뮌은 그 공화국의 적극적인 형태였다.
옛 정부 권력의 중심지이자 동시에 프랑스 노동계급의 사회적 아성인 파리는, 제정이 물려준 그 옛 정부 권력을 복원하고 영속시키려는 티에르와 농촌 귀족들의 시도에 맞서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파리가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은 포위 덕분에 군대를 없애고 그 자리에 대부분 노동자로 이루어진 국민방위군을 두었기 때문이다. 이제 이 사실을 하나의 제도로 바꾸어야 했다. 그래서 코뮌의 첫 법령은 상비군을 폐지하고 그 대신 무장한 인민을 두는 것이었다.
코뮌은 시의 여러 구에서 보통선거로 뽑힌 시의원들로 이루어졌으며, 그들은 책임을 지고 언제든 짧은 임기로 소환될 수 있었다. 그 의원의 다수는 당연히 노동자이거나 노동계급의 공인된 대표였다. 코뮌은 의회식 기관이 아니라 집행과 입법을 동시에 맡는 일하는 기관이어야 했다. 경찰은 중앙정부의 앞잡이로 남는 대신 곧바로 정치적 속성을 빼앗기고, 책임을 지며 언제든 소환될 수 있는 코뮌의 일꾼이 되었다. 행정의 다른 모든 부문의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코뮌 의원부터 아래로, 공무는 노동자 임금을 받고 수행해야 했다. 국가 고관들의 기득권과 교제비는 고관들 자신과 함께 사라졌다. 공직은 중앙정부의 도구들의 사유재산이기를 그쳤다. 시 행정뿐 아니라 그때까지 국가가 행사하던 모든 발의권이 코뮌의 손에 맡겨졌다.
옛 정부의 물리력 요소인 상비군과 경찰을 일단 없앤 코뮌은, 소유 단체로서의 모든 교회를 국가에서 분리하고 그 재산을 몰수함으로써 정신적 억압의 힘, 곧 「사제 권력」을 깨뜨리려 애썼다. 사제들은 사생활의 은둔처로 돌려보내져, 그들의 선배인 사도들을 본받아 신자들의 헌금으로 살게 되었다. 모든 교육 기관은 인민에게 무상으로 열렸고, 동시에 교회와 국가의 모든 간섭에서 벗어났다. 이리하여 교육이 모두에게 열렸을 뿐 아니라, 과학 그 자체가 계급적 편견과 정부의 힘이 채워 놓은 족쇄에서 풀려났다.
사법 공무원들은 그 거짓 독립성을 빼앗겨야 했다. 그 독립성은 차례로 충성을 맹세했다가 깨뜨려 온 역대 모든 정부에 대한 그들의 비굴한 굴종을 가리는 구실만 했을 뿐이다. 다른 공무원들과 마찬가지로 치안판사와 판사도 선거로 뽑히고, 책임을 지며, 소환될 수 있어야 했다.
파리 코뮌은 물론 프랑스의 모든 큰 산업 중심지에 본보기가 되어야 했다. 코뮌 체제가 파리와 제2의 중심지들에 일단 세워지면, 지방에서도 낡은 중앙집권 정부는 생산자들의 자치에 자리를 내주어야 했을 것이다. 코뮌이 발전시킬 시간을 갖지 못한 전국 조직의 대강에서, 코뮌은 가장 작은 시골 마을까지도 코뮌이 그 정치 형태가 되어야 하며 농촌 지역에서는 상비군을 복무 기간이 아주 짧은 국민 민병대로 대체해야 한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각 군(郡)의 농촌 코뮌들은 군청 소재지의 대의원 회의로 공동 업무를 처리하고, 이 군 회의는 다시 파리의 전국 대표단에 대의원을 보내야 했다. 대의원은 누구든 언제나 소환될 수 있고 선거인의 mandat impératif(명령적 위임, 정식 훈령)에 매여 있어야 했다. 그래도 중앙정부에 남을 몇 가지 안 되지만 중요한 기능은, 일부러 잘못 전해진 것처럼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 코뮌의, 따라서 엄격히 책임을 지는 일꾼들이 수행해야 했다. 국민의 통일은 깨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코뮌 체제에 의해 조직되어야 했고, 그 통일의 화신이라고 자처하면서 국민 자신으로부터 독립하고 그 위에 서려 한 국가권력 — 국민에 기생하는 혹에 지나지 않던 국가권력 — 을 파괴함으로써 현실이 되어야 했다. 옛 정부 권력의 순전히 억압적인 기관들은 잘라 내야 하지만, 그 정당한 기능들은 사회 그 자체 위에 군림하는 우월성을 찬탈한 권위로부터 빼앗아 사회의 책임 있는 일꾼들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지배계급의 어느 성원이 의회에서 인민을 잘못 대표할지를 3년이나 6년에 한 번씩 결정하는 대신, 보통선거는 코뮌으로 조직된 인민에게 봉사해야 했다. 개인의 선택권이 다른 모든 고용주에게 자기 사업에 쓸 노동자와 관리자를 찾는 데 봉사하듯이. 그리고 회사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실제 사업의 문제에서는 대개 적임자를 적소에 앉힐 줄 알고, 한 번 실수하면 재빨리 바로잡을 줄 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반면에 보통선거를 위계적 서임으로 대체하는 것만큼 코뮌의 정신과 거리가 먼 것은 없었다.
완전히 새로운 역사적 창조물은 그것과 어느 정도 닮았을지 모르는 더 오래된, 심지어 사멸한 사회생활 형태의 짝으로 오해받는 것이 대개 그 운명이다. 그리하여 근대 국가권력을 깨뜨리는 이 새로운 코뮌은 처음에는 바로 그 국가권력에 앞섰고 나중에는 그 하부 토대가 된 중세 코뮌들의 재현으로 오해받았다. — 코뮌 체제는 큰 국민들의 통일 — 처음에는 정치적 강제로 이루어졌다 해도 이제는 사회적 생산의 강력한 요인이 된 그 통일 — 을 몽테스키외와 지롱드파가 꿈꾼 작은 국가들의 연방으로 쪼개려는 시도로 오해받았다. — 국가권력에 대한 코뮌의 적대는 과도한 중앙집권에 맞선 오랜 투쟁의 과장된 형태로 오해받았다. 특수한 역사적 사정 때문에 프랑스에서처럼 부르주아 정부 형태가 고전적으로 발전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영국에서처럼 도시에서는 부패한 교구회, 이권을 챙기는 시의원, 사나운 구빈법 감독관으로, 주(州)에서는 사실상 세습인 치안판사로 거대한 중앙 국가 기관을 보완하는 일이 허용되었을 수도 있다. 코뮌 체제는 사회를 먹고 살며 사회의 자유로운 운동을 가로막는 국가라는 기생충이 그때까지 빨아들인 모든 힘을 사회라는 몸에 돌려주었을 것이다. 이 한 가지 행위만으로도 그것은 프랑스의 재생을 시작했을 것이다. — 프랑스 지방의 중간계급은 코뮌에서, 그들의 신분이 루이 필리프 치하에서 농촌에 대해 누리다가 루이 나폴레옹 치하에서 농촌이 도시를 지배한다는 허울에 밀려난 그 지배권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보았다. 실제로 코뮌 체제는 농촌의 생산자들을 그들 군의 중심 도시의 지적 지도 아래 두고, 거기서 노동자들이라는 그들의 이익의 자연스러운 수탁자를 그들에게 보장해 주었을 것이다. — 코뮌의 존재 그 자체는 당연히 지방 자치의 자유를 포함했지만, 그것은 이제 대체되어 버린 국가권력에 대한 견제로서가 아니었다. 피와 쇠의 음모에 몰두하지 않을 때면 자기의 지적 수준에 꼭 맞는 옛 직업, 곧 『클라데라다치』(베를린판 『펀치』)의 기고가 일로 언제나 돌아가기를 좋아하는 비스마르크의 머리에서나, 오직 그런 머리에서나, 파리 코뮌이 1791년 프랑스 옛 시 조직의 희화(戲畫), 곧 도시 정부를 프로이센 국가의 경찰 기계 속 부차적인 톱니바퀴로 격하하는 프로이센 도시 조례를 열망한다고 여길 생각이 떠오를 수 있었다. — 코뮌은 가장 큰 두 지출원인 상비군과 국가 관료제를 없앰으로써, 부르주아 혁명들의 구호이던 값싼 정부를 현실로 만들었다. 코뮌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군주제의 부재를 전제했다. 군주제는 적어도 유럽에서는 계급 지배의 정상적인 짐이자 없어서는 안 될 외투다. 코뮌은 공화국에 참으로 민주적인 제도의 토대를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값싼 정부도, 「참된 공화국」도 코뮌의 궁극 목표가 아니었다. 그것들은 그저 코뮌에 따라붙는 것들이었다.
코뮌이 받은 해석의 다양함, 그리고 코뮌을 제게 유리하게 해석한 이해관계의 다양함은, 이전의 모든 정부 형태가 철저히 억압적이었던 데 비해 코뮌이 철저히 확장적인 정치 형태였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 참된 비밀은 이것이었다. 코뮌은 본질적으로 노동계급의 정부, 전유 계급에 맞선 생산 계급의 투쟁의 산물이었으며, 노동의 경제적 해방을 이룩할 수 있는, 마침내 발견된 정치 형태였다.
이 마지막 조건이 없었다면 코뮌 체제는 불가능한 것, 하나의 기만이었을 것이다. 생산자의 정치적 지배는 그의 사회적 노예 상태의 영속과 함께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코뮌은 계급의 존재, 따라서 계급 지배의 존재가 기대고 있는 경제적 토대를 뿌리째 뽑아내는 지렛대 구실을 해야 했다. 노동이 해방되면 모든 사람이 노동자가 되고, 생산적 노동은 한 계급의 속성이기를 그친다.
이상한 일이다. 지난 60년 동안 노동의 해방에 관한 그 모든 호언장담과 그 방대한 문헌에도 불구하고, 어디서든 노동자들이 의지를 가지고 이 문제를 제 손에 쥐자마자, 자본과 임금 노예제라는 두 극을 지닌 현재 사회(지주는 이제 자본가의 익명 동업자에 지나지 않는다)의 대변자들이 내뱉는 온갖 변호의 문구가 곧바로 일어선다. 마치 자본주의 사회가 아직 가장 순수한 처녀의 순결 상태에 있어서, 그 적대는 아직 발전하지 않았고 그 환상은 아직 깨지지 않았으며 그 매춘부 같은 현실은 아직 폭로되지 않았다는 듯이. 그들은 외친다. 코뮌은 모든 문명의 기초인 소유를 폐지하려 한다고! 그렇다, 여러분, 코뮌은 다수의 노동을 소수의 부로 만드는 그 계급 소유를 폐지하려 했다. 코뮌은 수탈자를 수탈하려 했다. 코뮌은 생산수단, 곧 지금은 주로 노동을 노예화하고 착취하는 수단인 토지와 자본을 자유롭고 연합한 노동의 순전한 도구로 바꾸어 개인 소유를 진실로 만들고자 했다. — 그러나 이것은 공산주의, 「불가능한」 공산주의다! 아니, 현 체제를 계속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아볼 만큼 영리한 지배계급 성원들은 — 그리고 그런 이들은 많다 — 협동조합적 생산의 끈질기고 떠들썩한 사도가 되었다. 협동조합적 생산이 허울과 덫으로 남지 않으려면, 자본주의 체제를 대신하려면, 협동조합들의 연합이 공동 계획에 따라 국민적 생산을 조절하여 그것을 자기 통제 아래 두고, 자본주의적 생산의 숙명인 끊임없는 무정부 상태와 주기적 경련을 끝내려 한다면 — 여러분, 그것이 공산주의, 「가능한」 공산주의 말고 달리 무엇이겠는가?
노동계급은 코뮌에 기적을 기대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par décret du peuple(인민의 포고로) 도입할 기성의 유토피아가 없다. 그들은 자기 해방을, 그리고 그와 함께 현재 사회가 자기의 경제적 작용으로 거스를 수 없이 향해 가는 그 더 높은 형태를 이룩하려면, 오랜 투쟁을 거쳐야 하고 환경과 인간을 바꾸어 가는 일련의 역사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들에게는 실현해야 할 이상이 없다. 다만 무너져 가는 낡은 부르주아 사회 자체가 품고 있는 새 사회의 요소들을 풀어놓으면 될 뿐이다. 자기의 역사적 사명을 충분히 의식하고 그에 걸맞게 행동하겠다는 영웅적 결의를 지닌 노동계급은, 펜과 잉크병을 든 신사의 하인 나리들의 상스러운 욕설에도, 무지한 상투어와 종파적 괴벽을 과학적 무오류성이라는 신탁의 어조로 쏟아 내는 선의의 부르주아 공론가들의 교훈적 후원에도 미소를 지을 수 있다.
파리 코뮌이 혁명의 관리를 제 손에 쥐었을 때, 평범한 노동자들이 처음으로 감히 그들의 「타고난 윗사람들」의 통치 특권을 침범하여, 유례없이 어려운 상황 아래서 자기 일을 겸손하고 성실하고 유능하게 해냈을 때 — 그것도 가장 높은 것조차, 높으신 과학적 권위에 따르면 어느 수도 학무위원회 사무장에게 필요한 최저액의 5분의 1에 겨우 미치는 봉급을 받으며 해냈을 때 — 낡은 세계는 노동의 공화국의 상징인 붉은 깃발이 시청 위에 나부끼는 것을 보고 분노의 경련으로 몸부림쳤다.
그런데 이것은 노동계급이 사회적 발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급으로 공공연히 인정받은 첫 혁명이었다. 부유한 자본가들만 빼고 파리 중간계급의 대다수 — 상점 주인, 상인, 무역상 — 조차 그렇게 인정했다. 코뮌은 중간계급 자신들 사이에서 끝없이 되풀이되는 분쟁의 원인 — 채무자와 채권자의 셈 — 을 현명하게 해결해 그들을 구해 주었다. 중간계급의 바로 그 부분은 1848년 6월 노동자 봉기를 진압하는 데 거든 뒤, 당시의 제헌의회에 의해 거리낌 없이 곧장 채권자들에게 제물로 바쳐졌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이제 노동계급 주위에 모여든 유일한 동기는 아니었다. 그들은 선택지가 하나뿐이라고 느꼈다. 코뮌이냐, 아니면 — 어떤 이름으로 다시 나타나든 — 제정이냐. 제정은 공공의 부를 황폐하게 하고, 대규모 금융 사기를 조장하고, 인위적으로 가속된 자본 집중과 그에 따르는 그들 자신의 대열의 수탈을 떠받침으로써 그들을 경제적으로 파멸시켰다. 제정은 그들을 정치적으로 억눌렀고, 그 주연으로 그들을 도덕적으로 분개하게 했으며, 그들의 자녀 교육을 frères Ignorantins(무지 수도회 수사들)에게 넘겨줌으로써 그들의 볼테르주의를 모욕했고, 남긴 폐허에 상응하는 것이라고는 제정의 소멸 하나뿐인 전쟁으로 그들을 거꾸로 내몰아 프랑스인으로서의 그들의 국민 감정을 들끓게 했다. 사실 보나파르트파와 자본가 상층 보엠이 파리를 빠져나간 뒤, 중간계급의 참된 질서당은 「공화 연맹」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 코뮌의 깃발 아래 들어와 티에르의 고의적인 곡해에 맞서 코뮌을 옹호했다. 중간계급의 이 큰 무리의 감사가 지금의 혹독한 시련을 견딜지는 시간이 보여 줄 것이다.
코뮌이 농민들에게 「코뮌의 승리가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라고 말한 것은 전적으로 옳았다. 베르사유에서 지어내 영광스러운 유럽의 삼류 기자들이 메아리처럼 되풀이한 모든 거짓말 가운데 가장 엄청난 것 하나는 농촌 귀족들이 프랑스 농민을 대표한다는 것이었다. 1815년 뒤 10억 프랑의 배상금을 물어 주어야 했던 그 사람들을 프랑스 농민이 얼마나 사랑하겠는가를 생각만 해 보라! 프랑스 농민의 눈에는 대지주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그가 1789년에 쟁취한 것에 대한 침해다. 1848년 부르주아는 농민의 작은 땅에 1프랑당 45상팀의 추가 세금을 지웠다. 그러나 그때는 혁명의 이름으로 그렇게 했다. 그런데 이제 부르주아는 프로이센에 물어야 할 50억 프랑 배상금의 주된 짐을 농민의 어깨에 떠넘기려고 혁명에 맞선 내전을 부추겼다. 반면에 코뮌은 첫 포고 가운데 하나에서 전쟁을 일으킨 참된 장본인들이 그 비용을 치르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코뮌은 농민을 피의 세금에서 구해 주었을 것이고, 값싼 정부를 주었을 것이며, 지금 그의 피를 빠는 공증인, 변호사, 집달리 같은 사법 흡혈귀들을 농민 자신이 뽑고 농민 자신에게 책임을 지는, 봉급을 받는 코뮌 일꾼으로 바꾸었을 것이다. 코뮌은 농민을 garde champêtre(농촌 경비원)와 헌병과 지사의 횡포에서 풀어 주었을 것이고, 사제가 퍼뜨리는 우매 대신 학교 교사가 주는 깨우침을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프랑스 농민은 무엇보다도 셈이 밝은 사람이다. 그는 사제의 봉급이 징세관에게 뜯기는 대신 오로지 교구민의 종교적 본능에서 우러나는 자발적 행동에만 달려 있어야 한다는 것을 지극히 합리적이라고 여길 것이다. 코뮌의 지배 — 오직 코뮌의 지배만 — 가 프랑스 농민에게 내놓은 당장의 큰 혜택은 이런 것이었다. 그러므로 코뮌만이 농민에게 유리하게 풀 수 있었고 동시에 풀지 않을 수 없었던, 더 복잡하지만 사활이 걸린 문제들을 여기서 길게 늘어놓을 필요는 전혀 없다. 곧 농민의 작은 땅 위에 악몽처럼 내리누르는 저당 부채, 그 땅 위에서 날마다 늘어 가는 prolétariat foncier(농촌 프롤레타리아), 그리고 근대 농업의 발전 자체와 자본주의적 농업 경영의 경쟁 때문에 점점 더 빠른 속도로 강요되는 그 땅으로부터의 농민의 수탈이 그것이다.
프랑스 농민은 루이 보나파르트를 공화국 대통령으로 뽑았다. 그러나 제정을 만든 것은 질서당이었다. 프랑스 농민이 정말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는 1849년과 1850년에 보여 주기 시작했다. 정부의 지사에 맞서 자기 면장을, 정부의 사제에 맞서 자기 학교 교사를, 정부의 헌병에 맞서 자기 자신을 내세움으로써. 1850년 1월과 2월에 질서당이 만든 법률은 모두 농민을 겨냥한 공공연한 탄압 조치였다. 농민이 보나파르트파였던 것은, 그에게 온갖 혜택을 준 대혁명이 그의 눈에는 나폴레옹으로 의인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제2제정 아래서 빠르게 무너져 가던(그리고 그 본성상 농촌 귀족들에게 적대적인) 이 망상, 과거의 이 편견이 농민의 살아 있는 이익과 절박한 요구에 호소하는 코뮌 앞에서 어떻게 버틸 수 있었겠는가?
농촌 귀족들은 — 이것이 사실 그들의 가장 큰 걱정이었는데 — 코뮌의 파리가 석 달만 지방과 자유롭게 교류하면 농민들의 전면적인 봉기가 일어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우역(牛疫)이 퍼지는 것을 막으려는 듯 파리 둘레에 경찰 봉쇄를 치려고 안달했다.
이처럼 코뮌이 프랑스 사회의 모든 건강한 요소의 참된 대표, 따라서 참으로 국민적인 정부였다면, 그것은 동시에 노동자의 정부로서, 노동 해방의 대담한 투사로서 철저히 국제적이었다. 두 프랑스 지방을 독일에 병합한 프로이센군이 보는 앞에서, 코뮌은 온 세계의 노동하는 인민을 프랑스에 병합했다.
제2제정은 세계주의적 협잡의 축제였다. 온 나라의 난봉꾼들이 그 부름에 따라 그 주연과 프랑스 인민의 약탈에 한몫 끼려고 몰려들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티에르의 오른팔은 더러운 왈라키아인 가네스코이고, 왼팔은 러시아 첩자 마르코프스키다. 코뮌은 모든 외국인에게 불멸의 대의를 위해 죽는 영예를 허락했다. 자기들의 배신으로 진 대외 전쟁과, 외국 침략자와의 음모로 부추긴 내전 사이에서, 부르주아지는 프랑스에 있는 독일인들을 경찰력으로 사냥하게 함으로써 자기들의 애국심을 과시할 시간을 냈다. 코뮌은 독일인 노동자 한 사람을 노동부 장관으로 삼았다. 티에르와 부르주아지와 제2제정은 요란한 동정의 공언으로 폴란드를 줄곧 속이면서, 실제로는 폴란드를 러시아에 팔아넘기고 러시아의 더러운 일을 대신해 주었다. 코뮌은 폴란드의 영웅적인 아들들을 파리 방위군의 선두에 세워 그들을 기렸다. 그리고 자기가 열고 있다고 의식한 역사의 새 시대를 뚜렷이 표시하기 위해, 한쪽에서는 정복자 프로이센군이, 다른 쪽에서는 보나파르트파 장군들이 이끄는 보나파르트파 군대가 보는 앞에서, 코뮌은 군사적 영광의 거대한 상징인 방돔 원주를 쓰러뜨렸다.
코뮌의 가장 큰 사회적 조치는 코뮌 자신이 일하며 존재했다는 것이었다. 코뮌의 개별 조치들은 인민에 의한 인민의 정부가 나아가는 방향을 보여 줄 수 있을 뿐이었다. 제빵 직인의 야간 노동 폐지, 그리고 갖가지 구실로 노동자들에게 벌금을 물려 임금을 깎는 고용주들의 관행 — 고용주가 입법자와 재판관과 집행관의 역할을 한 몸에 겸하고, 덤으로 돈까지 가로채는 수법 — 을 처벌 규정을 두어 금지한 것이 그런 조치였다. 이런 종류의 또 하나의 조치는, 해당 자본가가 달아났든 일부러 조업을 멈추었든 가리지 않고, 문을 닫은 모든 작업장과 공장을 보상을 유보한 채 노동자 조합에 넘겨준 것이었다.
현명함과 절제가 돋보인 코뮌의 재정 조치들은 포위된 도시의 사정에 걸맞은 것일 수밖에 없었다. 거대 금융 회사와 청부업자들이 오스만의 비호 아래 파리시를 상대로 저지른 엄청난 강탈을 생각하면, 코뮌은 루이 나폴레옹이 오를레앙 가문을 상대로 가졌던 것보다 비할 데 없이 나은 명분으로 그들의 재산을 몰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 다 재산의 상당 부분을 교회 약탈에서 얻은 호엔촐레른 가문과 영국 과두 지배자들은 물론, 코뮌이 세속화로 겨우 8천 프랑을 거두어들였다는 데 크게 충격을 받았다.
베르사유 정부는 기운과 힘을 조금 되찾자마자 코뮌을 상대로 가장 폭력적인 수단을 썼다. 프랑스 전역에서 자유로운 의견 표명을 억눌러 큰 도시들의 대의원 회의까지 금지했다. 베르사유와 프랑스의 나머지 지역을 제2제정의 감시를 훨씬 능가하는 첩보망 아래 두었다. 헌병 종교재판관들을 시켜 파리에서 인쇄된 모든 신문을 불태우고, 파리를 오가는 모든 편지를 검열했다. 국민의회에서는 파리를 위해 한마디 하려는 가장 소심한 시도조차 1816년의 「샹브르 앵트루바블」에서도 볼 수 없던 방식으로 고함에 묻혀 버렸다. 밖으로는 베르사유의 야만적인 전쟁이, 파리 안으로는 매수와 음모의 시도가 벌어지는 마당에 — 코뮌이 깊은 평화의 시기처럼 자유주의의 온갖 예의와 체면을 지키는 척했다면 자기가 받은 신탁을 부끄럽게 배반한 것이 아니겠는가? 코뮌 정부가 티에르 씨의 정부와 같은 부류였다면, 베르사유에서 코뮌 신문을 탄압할 까닭이 없었던 것처럼 파리에서 질서당 신문을 탄압할 까닭도 없었을 것이다.
농촌 귀족들이 교회로 돌아가는 것만이 프랑스를 구할 유일한 길이라고 선언하던 바로 그때, 신앙 없는 코뮌이 픽퓌스 수녀원과 생로랑 성당의 기이한 비밀을 파헤쳐 낸 것은 그들에게 정말로 약 오르는 일이었다. 티에르 씨가 전투에서 지고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빌헬름스회에서 궐련을 마는 솜씨를 기려 보나파르트파 장군들에게 대십자 훈장을 소나기처럼 퍼붓는 동안, 코뮌은 자기 장군들이 임무를 게을리한다는 의심이 들면 언제든 해임하고 체포했다. 이것은 티에르 씨에 대한 풍자였다. 가명으로 숨어 들어와 리옹에서 단순 파산으로 엿새 동안 감옥살이를 한 의원 하나를 코뮌이 쫓아내고 체포한 것은, 당시 여전히 프랑스의 외무장관으로서 여전히 프랑스를 비스마르크에게 팔아넘기고 여전히 그 모범적인 벨기에 정부에 명령을 내리던 위조범 쥘 파브르에게 일부러 던진 모욕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실로 코뮌은 낡은 형의 모든 정부에 변함없이 따라붙는 속성인 무오류성을 내세우지 않았다. 코뮌은 자기가 한 일과 한 말을 공개했고, 자기의 모든 결점을 대중에게 알렸다.
모든 혁명에는 그 참된 주역들 곁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끼어든다. 그 가운데 어떤 이들은 지난 혁명들의 생존자이자 신봉자로, 지금의 운동을 꿰뚫어 보지는 못하지만 널리 알려진 정직함과 용기로, 또는 순전히 전통의 힘으로 민중에 대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다른 이들은 해마다 그때그때의 정부를 겨냥한 똑같은 판에 박힌 열변을 되풀이한 덕에 일류 혁명가라는 평판을 슬그머니 얻은 한낱 떠버리들이다. 3월 18일 뒤에도 그런 사람들이 나타났고, 어떤 경우에는 두드러진 역할을 해냈다. 힘이 미치는 한 그들은 노동계급의 실제 행동을 가로막았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이전의 모든 혁명이 온전히 발전하는 것을 가로막아 온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들은 피할 수 없는 악이다. 시간이 지나면 떨쳐 낼 수 있다. 그러나 코뮌에게는 그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코뮌이 파리에 가져온 변화는 실로 놀라웠다! 제2제정의 매춘부 같은 파리는 흔적도 남지 않았다. 파리는 더 이상 영국 지주, 아일랜드 부재지주, 미국의 옛 노예주와 벼락부자, 러시아의 옛 농노주, 왈라키아 보야르들의 집합소가 아니었다. 시체 공시소에는 더 이상 시체가 없었고, 밤도둑도 없었으며, 강도도 거의 없었다. 사실 1848년 2월 이래 처음으로 파리의 거리는 안전했다. 그것도 어떤 종류의 경찰도 없이. 코뮌의 한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제 살인, 절도, 폭행 소식을 듣지 않습니다. 정말이지 경찰이 그 보수적인 친구들을 모두 베르사유로 끌고 간 것 같습니다.」 코코트(창부)들은 그들의 보호자 — 가족과 종교와, 무엇보다도 재산의 사나이들로서 줄행랑친 자들 — 의 냄새를 다시 찾아 따라갔다. 그들 대신 파리의 참된 여성들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고대의 여성들처럼 영웅적이고 고결하며 헌신적인 여성들이. 일하고, 생각하고, 싸우고, 피 흘리는 파리 — 새 사회를 품어 기르느라 성문 앞의 식인종들조차 거의 잊은 채 — 자기의 역사적 발의에 대한 열광으로 빛나는 파리!
파리의 이 새 세계에 맞서, 베르사유의 낡은 세계를 보라. 국민의 시체를 먹으려고 안달하는, 사멸한 모든 체제의 식시귀(食屍鬼)들, 정통왕조파와 오를레앙파의 그 의회 — 의회에 자리를 지킴으로써 노예주들의 반란을 승인하고, 자기들의 의회 공화국의 유지를 그 우두머리인 늙은 협잡꾼의 허영심에 맡기며, 소름 끼치는 회의를 쥐 드 폼에서 열어 1789년을 희화하는, 대홍수 이전의 공화파라는 꼬리를 단 그 의회를. 바로 거기 이 의회가, 프랑스의 죽은 모든 것의 대표가, 오로지 루이 보나파르트의 장군들의 칼에 떠받쳐 살아 있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파리는 온통 진실이고 베르사유는 온통 거짓이었다. 그리고 그 거짓은 티에르의 입을 통해 쏟아져 나왔다.
티에르는 센에우아즈의 구청장 대표단에게 말한다. 「내가 한 번도 어긴 적 없는 내 말을 믿어도 됩니다!」 그는 의회 자체에게는 그것이 「프랑스가 일찍이 가져 본 가장 자유롭게 선출된 가장 자유주의적인 의회」라고 말한다. 그는 잡동사니 병사들에게는 그들이 「세계의 경탄의 대상이며 프랑스가 일찍이 가져 본 가장 훌륭한 군대」라고 말한다. 그는 지방에는 자기의 파리 포격이 꾸며 낸 이야기라고 말한다. 「대포 몇 발이 발사되었다면, 그것은 베르사유군이 한 짓이 아니라, 감히 얼굴을 내밀지도 못하면서 싸우는 척하려는 몇몇 반도들이 한 짓입니다.」 그는 다시 지방에 「베르사유의 포병은 파리를 포격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포탄을 쏘고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파리 대주교에게 베르사유군의 짓이라는 처형과 보복(!)은 모두 헛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파리에는 자기가 오로지 「파리를 억누르는 끔찍한 폭군들로부터 파리를 해방하기를」 바랄 뿐이며, 사실 코뮌의 파리는 「한 줌의 범죄자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티에르 씨의 파리는 「비천한 군중」의 진짜 파리가 아니라 하나의 유령 파리, 프랑필뢰르(줄행랑 의용대)의 파리, 남녀 불문한 대로(大路)의 파리였다. 부유하고, 자본가이고, 금빛으로 번쩍이며, 놀고먹는 파리, 지금은 하인과 협잡꾼과 문단의 보엠과 코코트를 거느리고 베르사유, 생드니, 뤼에유, 생제르맹에 몰려 있는 파리였다. 그들은 내전을 그저 유쾌한 여흥으로 여기며, 망원경으로 벌어지는 전투를 구경하고, 대포 소리를 세며, 자기 명예와 자기 창부들의 명예를 걸고 이 공연이 포르트생마르탱 극장에서 하던 것보다 훨씬 잘 꾸며졌다고 맹세했다. 쓰러진 사람들은 정말로 죽었고, 부상자들의 비명은 진짜 비명이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그토록 역사적이었다.
코블렌츠의 망명 귀족들이 칼론 씨의 프랑스였던 것처럼, 이것이 티에르 씨의 파리다.
IV
프로이센군에게 파리를 점령하게 하여 파리를 짓누르려 한 노예주 음모의 첫 시도는 비스마르크의 거절로 좌절되었다. 둘째 시도, 곧 3월 18일의 시도는 군대의 패주와 정부의 베르사유 도주로 끝났다. 정부는 행정 전체에 해체하고 자기 뒤를 따라오라고 명령했다. 파리와 강화 협상을 하는 시늉을 하면서 티에르는 파리를 상대로 한 전쟁을 준비할 시간을 벌었다. 그러나 군대를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전열 연대의 잔존 병력은 수가 적었고 믿을 수도 없었다. 국민방위군과 의용병으로 베르사유를 도우라는 지방에 대한 그의 다급한 호소는 단호한 거절을 받았다. 오직 브르타뉴만이 한 줌의 슈앙을 보냈는데, 그들은 흰 깃발 아래 싸우면서 저마다 가슴에 흰 천으로 만든 예수의 심장을 달고 「Vive le Roi!(국왕 만세!)」를 외쳤다. 그래서 티에르는 수병, 해병, 교황 주아브병, 발랑탱의 헌병, 피에트리의 순경과 밀정으로 이루어진 잡동사니 무리를 부랴부랴 끌어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 군대는 비스마르크가 내전을 계속 굴러가게 하고 베르사유 정부를 프로이센에 비참하게 종속시켜 두기에 꼭 알맞은 수만큼씩 나누어 풀어 준 제정군 포로들이 없었다면 우스꽝스러울 만큼 쓸모없었을 것이다. 전쟁 중에도 베르사유 경찰은 베르사유군을 감시해야 했고, 헌병들은 위험한 곳마다 몸소 나서서 군대를 끌고 가야 했다. 함락된 요새들은 점령된 것이 아니라 매수된 것이었다. 연맹군의 영웅적 용기는 티에르에게 파리의 저항이 자기의 전략적 재능과 자기 휘하의 총검으로는 꺾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깨닫게 했다.
그동안 지방과의 관계는 점점 더 어려워졌다. 티에르와 그의 농촌 귀족들을 기쁘게 할 지지 성명은 단 한 통도 들어오지 않았다. 사정은 정반대였다. 공화국의 명확한 승인, 코뮌의 자유의 인정, 위임 기한이 끝난 국민의회의 해산을 바탕으로 파리와 화해하라고, 결코 공손하다고는 할 수 없는 어조로 요구하는 대표단과 성명서가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왔다. 그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티에르의 법무장관 뒤포르는 4월 23일 검사들에게 보낸 회람에서 「화해의 외침」을 범죄로 다루라고 명령할 정도였다! 그러나 자기 전역(戰役)이 내보이는 절망적인 전망을 생각해, 티에르는 전술을 바꾸기로 하고 자기가 국민의회에 강요한 새 시 조직법에 따라 4월 30일 전국에서 시의회 선거를 치르라고 명령했다. 지사들의 책동과 경찰의 위협이 있으니, 지방의 판정으로 국민의회에 그것이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도덕적 힘을 불어넣고, 마침내 파리 정복에 필요한 물리력을 지방에서 얻어 내리라고 그는 자신만만했다.
자기 공보에서 찬양한 파리 상대의 강도 전쟁, 그리고 프랑스 전역에 공포 정치를 세우려는 장관들의 시도에, 티에르는 처음부터 화해라는 작은 막간극을 곁들이고 싶어 했다. 그 막간극은 한 가지 이상의 목적에 봉사해야 했다. 그것은 지방을 속이고, 파리의 중간계급 분자를 꾀어내고, 무엇보다 국민의회 안의 공화파를 자처하는 자들에게 파리에 대한 자기들의 배신을 티에르에 대한 믿음 뒤에 감출 기회를 주어야 했다. 아직 군대가 없던 3월 21일, 그는 의회에서 선언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파리에 군대를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3월 27일 그는 다시 일어섰다. 「나는 공화국을 기정사실로 발견했으며, 그것을 지키기로 굳게 결심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공화국의 이름으로 리옹과 마르세유의 혁명을 진압했고, 베르사유에서는 농촌 귀족들의 고함이 공화국이라는 이름이 입에 오르는 것조차 묻어 버렸다. 이 공을 세운 뒤 그는 「기정사실」을 가정의 사실로 누그러뜨렸다. 그가 조심스럽게 보르도에서 멀리 떼어 놓았던 오를레앙 공들은 이제 법을 노골적으로 어기며 드뢰에서 책동하도록 허락받았다. 파리와 지방에서 온 대표들과 끝없이 가진 면담에서 티에르가 내민 양보는 때와 상황에 따라 어조와 빛깔을 끊임없이 바꾸었지만, 실제로는 보복을 「르콩트와 클레망 토마의 살해에 연루된 한 줌의 범죄자」로 한정하겠다는 앞으로의 약속 이상으로 나아간 적이 없었다. 그것도 파리와 프랑스가 티에르 씨 자신을 가능한 공화국 가운데 최선의 공화국으로 무조건 받아들인다는 — 그가 1830년에 루이 필리프를 두고 그랬듯이 — 뻔히 알 만한 전제 아래서였다. 그는 이런 양보마저 의회에서 장관들을 시켜 붙인 공식 해설로 미심쩍게 만드는 데 신경을 썼을 뿐 아니라, 자기의 뒤포르를 움직였다. 이 늙은 오를레앙파 법률가 뒤포르는 지금 1871년 티에르 아래서처럼, 1839년 루이 필리프 아래서도, 1849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대통령 시절에도 언제나 계엄령의 사법관이었다. 관직에서 밀려나 있을 때 그는 파리 자본가들의 변론을 맡아 재산을 모았고, 자기가 만든 법률을 반대하는 변론으로 정치적 자본을 쌓았다. 이제 그는 파리가 함락된 뒤 프랑스에 남은 공화주의적 자유의 마지막 찌꺼기까지 뿌리 뽑게 될 일련의 탄압법을 국민의회에서 서둘러 통과시켰을 뿐 아니라, 그에게는 너무 느린 군법회의 절차를 줄이고 새로 고안한 가혹한 유형법을 만들어 파리의 운명을 예고했다. 1848년 혁명은 정치범에 대한 사형을 폐지하고 그것을 유형으로 대체했다. 루이 보나파르트도 적어도 이론상으로는 단두대 체제를 되살릴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므로 파리 사람들이 반란자가 아니라 살인자라고 넌지시 비칠 만큼 대담하지도 못했던 농촌 귀족 의회는 파리에 대한 장래의 복수를 뒤포르의 새 유형법에 한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사정에서 티에르 자신도 자기 화해 희극을 계속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희극이 그가 의도한 대로 농촌 귀족들의 분노에 찬 비명을 끌어내지 않았다면 말이다. 되새김질하는 머리를 지닌 농촌 귀족들은 이 연극도, 그 연극이 필요로 하는 위선과 얼버무림과 시간 끌기도 이해하지 못했다.
4월 30일 시의회 선거를 앞두고, 티에르는 4월 27일 자기의 큰 화해 장면 가운데 하나를 연출했다. 감상적인 미사여구를 쏟아 내면서 그는 의회 연단에서 외쳤다. 「공화국에 대한 음모는 우리로 하여금 프랑스인의 피를 흘리게 하는 파리의 음모 말고는 없습니다. 나는 이 말을 거듭거듭 되풀이합니다. 저 불경한 무기가 그것을 든 손에서 떨어지게 하십시오. 그러면 소수의 범죄자만을 제외하는 평화의 행위로 징벌은 곧바로 멈출 것입니다.」 농촌 귀족들이 거세게 가로막자 그는 대답했다. 「여러분, 제발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틀렸습니까? 범죄자가 한 줌뿐이라는 진실을 내가 말할 수 있었다는 것이 정말로 유감스럽습니까? 클레망 토마와 르콩트 장군의 피를 흘릴 수 있었던 자들이 드문 예외라는 것은 우리의 불행 한가운데서 다행한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프랑스는 티에르가 스스로 의회의 세이렌의 노래라고 우쭐해한 것에 귀를 막았다. 프랑스에 아직 남아 있는 3만 5천 개 코뮌에서 뽑힌 시의원 70만 명 가운데, 정통왕조파·오를레앙파·보나파르트파를 다 합쳐도 8천 명을 얻지 못했다. 그 뒤에 이어진 보궐선거는 더 단호하게 적대적이었다. 이리하여 국민의회는 몹시 필요하던 물리력을 지방에서 얻기는커녕, 도덕적 힘에 대한 마지막 주장, 곧 나라의 보통선거를 표현한다는 주장마저 잃었다. 패배를 마무리하듯, 프랑스 모든 도시에서 새로 뽑힌 시의회들은 베르사유의 찬탈 의회에 보르도에서 대항 의회를 열겠다고 공공연히 위협했다.
그러자 비스마르크에게 오래 기다려 온 결정적 행동의 순간이 마침내 왔다. 그는 티에르에게 강화의 최종 타결을 위해 프랑크푸르트로 전권 대표를 보내라고 단호히 명령했다. 주인의 부름에 비굴하게 복종한 티에르는 믿음직한 쥘 파브르를 서둘러 보내고 푸이예케르티에를 딸려 보냈다. 「저명한」 루앙의 면방적업자 푸이예케르티에는 제2제정의 열렬한, 아니 비굴하기까지 한 지지자로서, 자기 가게의 이익을 해치는 영국과의 통상조약 말고는 제정에서 흠을 찾아낸 적이 없었다. 보르도에서 티에르의 재무장관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그 「사악한」 조약을 규탄하고 곧 폐기될 것이라고 넌지시 비쳤으며, 심지어 국제조약이 앞을 가로막지 않는다며 알자스에 대해 옛 보호 관세를 즉시 시행하려는 뻔뻔한 시도까지 했다. 비록 비스마르크를 셈에 넣지 않은 탓에 헛된 일이 되었지만. 반혁명을 루앙의 임금을 깎는 수단으로, 프랑스 지방의 할양을 프랑스에서 자기 상품값을 올리는 수단으로 여긴 이 사내야말로, 쥘 파브르의 마지막이자 최고의 반역을 거들 짝으로 티에르에게 뽑히도록 예정된 바로 그 사람이 아니었겠는가?
이 절묘한 전권 대표 한 쌍이 프랑크푸르트에 도착하자, 깡패 비스마르크는 곧바로 그들에게 고압적인 양자택일을 들이댔다. 제정을 복원하든가, 내 강화 조건을 무조건 받아들이든가! 그 조건에는 전쟁 배상금의 지급 간격을 줄이는 것, 그리고 비스마르크가 프랑스의 사정에 만족할 때까지 프로이센군이 파리의 요새들을 계속 점령하는 것이 들어 있었다. 이로써 프로이센은 프랑스 국내 정치의 최고 중재자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 대가로 그는 파리를 몰살하도록 사로잡힌 보나파르트파 군대를 풀어 주고, 빌헬름 황제의 군대로 그들을 직접 돕겠다고 제의했다. 그는 배상금 첫 할부금의 지급을 파리의 「평정」에 걸어 둠으로써 자기의 성의를 보장했다. 그런 미끼를 티에르와 그의 전권 대표들이 덥석 문 것은 물론이다. 그들은 5월 10일 강화 조약에 서명했고, 18일 베르사유 의회의 비준을 받았다.
강화 체결과 보나파르트파 포로들의 도착 사이의 기간에, 티에르는 자기의 화해 희극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필요를 더욱 절실히 느꼈다. 그의 공화파 도구들이 파리 학살의 준비에 눈을 감을 구실을 몹시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5월 8일까지도 그는 중간계급 화해파의 대표단에게 대답했다. 「반도들이 항복하기로 마음먹기만 하면, 클레망 토마 장군과 르콩트 장군의 살인자들을 빼고는 모든 사람에게 일주일 동안 파리의 성문을 활짝 열어 줄 것입니다.」
며칠 뒤 이 약속을 두고 농촌 귀족들에게 거센 질문 공세를 받자, 그는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런 의미심장한 암시를 주는 것은 잊지 않았다. 「분명히 말하지만 여러분 가운데 성급한 사람들이, 너무 서두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드레만 더 기다려야 합니다. 그 여드레가 지나면 더 이상 위험은 없을 것이며, 그때 과업은 그들의 용기와 역량에 걸맞을 것입니다.」 마크마옹이 곧 파리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그에게 장담할 수 있게 되자마자, 티에르는 의회에서 「법을 손에 들고 파리에 들어가, 병사들의 목숨을 희생시키고 공공 기념물을 파괴한 비열한 자들에게 완전한 속죄를 요구하겠다」고 선언했다. 결정의 순간이 다가오자 그는 의회에는 「나는 무자비할 것입니다!」라고, 파리에는 파멸이 정해졌다고, 그리고 그의 보나파르트파 강도떼에게는 파리에 마음껏 복수해도 좋다는 국가의 허가를 받았다고 말했다. 마침내 배신이 5월 21일 두에 장군에게 파리의 성문을 열어 주자, 티에르는 22일 농촌 귀족들에게 그들이 그토록 고집스럽게 이해하지 못하던 자기 화해 희극의 「목표」를 밝혔다. 「며칠 전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우리의 목표에 다가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나는 여러분에게 그 목표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리러 왔습니다. 질서와 정의와 문명의 승리가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정말 그랬다. 부르주아 질서의 문명과 정의는 그 질서의 노예와 고역꾼들이 주인에 맞서 일어설 때마다 그 섬뜩한 빛을 드러낸다. 그때 이 문명과 정의는 가면을 벗은 야만과 무법의 복수로 나타난다. 전유자와 생산자 사이의 계급투쟁에서 새로운 위기가 닥칠 때마다 이 사실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1848년 6월 부르주아의 만행조차 1871년의 형언할 수 없는 파렴치 앞에서는 빛을 잃는다. 베르사유군이 들어온 뒤 여드레 동안 파리의 주민들 — 남자, 여자, 아이들 — 이 싸운 자기희생적인 영웅심이 그들의 대의의 위대함을 비추는 만큼, 군대의 지옥 같은 소행은 그들이 돈 받고 지키는 그 문명의 타고난 정신을 비춘다. 참으로 영광스러운 문명이다. 전투가 끝난 뒤 자기가 만든 시체 더미를 어떻게 치울 것인가가 그 큰 문제라니!
티에르와 그의 피에 굶주린 사냥개들의 소행에 견줄 만한 것을 찾으려면 우리는 술라와 로마의 두 삼두정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똑같은 냉혹한 대량 학살, 학살에서 나이와 성별을 가리지 않는 똑같은 태도, 똑같은 포로 고문 제도, 똑같은 추방자 명부 — 그러나 이번에는 한 계급 전체의 명부 — , 숨은 지도자를 한 사람도 놓치지 않으려는 똑같은 사나운 추적, 정적과 사적인 원수에 대한 똑같은 밀고, 싸움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의 도살에 대한 똑같은 무관심. 차이가 있다면 오직 이것뿐이다. 로마인들에게는 추방자들을 한꺼번에 처치할 기관총이 없었고, 그들은 「법을 손에」 들고 있지도 않았으며, 입으로 「문명」을 외치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참상 뒤에, 부르주아 언론 자신이 그린 그 부르주아 문명의 다른, 한결 더 끔찍한 얼굴을 보라!
런던의 한 토리당 신문 파리 통신원은 이렇게 쓴다. 「멀리서는 아직 이따금 총소리가 울리고, 페르라셰즈 묘지의 묘비들 사이에서는 돌보는 이 없는 부상자들이 죽어 가고 — 공포에 질린 반도 6천 명이 지하 묘지의 미로에서 절망의 고통 속에 헤매고, 거리에서는 불쌍한 자들이 기관총으로 수십 명씩 사살되려고 끌려가는데 — 카페마다 압생트와 당구와 도미노를 즐기는 무리로 가득하고, 매춘부들이 대로를 어슬렁거리며, 유행하는 음식점의 카비네 파르티퀼리에(별실)에서 흘러나오는 흥청거리는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뜨리는 것을 보니 역겹다.」 에두아르 에르베 씨는 코뮌이 정간시킨 베르사유파 신문 『주르날 드 파리』에 이렇게 쓴다. 「어제 파리 시민(!)이 만족을 드러낸 방식은 경박한 정도를 넘어섰다. 시간이 갈수록 더 나빠지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파리는 지금 축제일 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가 Parisiens de la décadence(퇴폐기의 파리 사람들)라고 불리지 않으려면 이런 일은 끝나야 한다.」 그리고 그는 타키투스의 한 구절을 인용한다. 「그러나 그 끔찍한 싸움의 이튿날, 싸움이 완전히 끝나기도 전에, 로마는 — 타락하고 부패한 로마는 — 제 몸을 망치고 제 영혼을 더럽히던 쾌락의 수렁에서 다시 뒹굴기 시작했다. — alibi prælia et vulnera, alibi balnea popinæque —(한쪽에서는 전투와 부상, 다른 쪽에서는 목욕탕과 음식점).」 에르베 씨는 다만 그가 말하는 「파리 시민」이 티에르 씨의 파리의 주민일 뿐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을 잊었다. 베르사유, 생드니, 뤼에유, 생제르맹에서 떼 지어 돌아오는 프랑필뢰르들 — 「몰락기」의 바로 그 파리 말이다.
새롭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해 자기를 희생한 투사들에 대한 그 모든 피 묻은 승리 속에서, 노동의 노예화에 기반한 그 극악한 문명은 희생자들의 신음을 중상의 아우성으로 묻어 버리고, 그 아우성은 온 세계에 메아리친다. 코뮌의 평온한 노동자 파리는 「질서」의 사냥개들에 의해 갑자기 아수라장으로 바뀐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변화는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의 머리에 무엇을 증명하는가? 아니, 코뮌이 문명에 맞서 음모를 꾸몄다는 것을! 파리 인민은 역사에 알려진 어떤 전투에서도 볼 수 없던 수로 코뮌을 위해 열광적으로 죽어 간다. 그것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아니, 코뮌이 인민 자신의 정부가 아니라 한 줌 범죄자들의 찬탈이었다는 것을! 파리의 여성들은 바리케이드에서, 처형장에서 기꺼이 목숨을 내놓는다. 이것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아니, 코뮌의 악마가 그들을 메가이라와 헤카테로 바꾸어 놓았다는 것을! 두 달 동안 아무 도전도 받지 않고 지배하는 동안 보인 코뮌의 절제는 오직 그 방어의 영웅심에만 견줄 수 있다. 그것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아니, 코뮌이 몇 달 동안 절제와 인도주의의 가면 아래 그 악마적 본능의 피에 굶주림을 조심스럽게 감추었다가 단말마의 순간에 풀어놓았다는 것을!
노동자의 파리는 영웅적인 자기 번제(燔祭)의 행위 속에서 건물과 기념물을 그 불길에 휩쓸리게 했다. 프롤레타리아의 살아 있는 몸을 갈가리 찢는 마당에, 그 지배자들은 자기 거처의 건물이 멀쩡한 채로 의기양양하게 돌아오리라고 더는 기대해서는 안 된다. 베르사유 정부는 「방화다!」라고 외치고, 가장 외딴 마을에 이르기까지 모든 하수인들에게 이 신호를 속삭여 어디서든 직업적 방화의 혐의로 적들을 사냥하게 한다. 전투 뒤의 대량 학살은 흡족하게 바라보는 온 세계의 부르주아지가 벽돌과 회반죽의 훼손에는 공포로 몸을 떤다!
정부가 자국 해군에 「죽이고, 불태우고, 파괴하라」는 국가의 허가를 내줄 때, 그것은 방화의 허가인가? 영국군이 워싱턴의 의사당과 중국 황제의 여름 궁전에 멋대로 불을 질렀을 때, 그것은 방화였는가? 프로이센군이 군사적 이유가 아니라 순전한 복수심에서 석유의 도움으로 샤토됭 같은 도시들과 수많은 마을을 불태웠을 때, 그것은 방화였는가? 티에르가 사람이 사는 집에만 불을 지르려 한다는 구실로 여섯 주 동안 파리를 포격했을 때, 그것은 방화였는가? — 전쟁에서 불은 어느 무기 못지않게 정당한 무기다. 적이 차지한 건물은 불을 지르려고 포격한다. 수비자들이 물러나야 할 때는 공격자가 그 건물을 이용하지 못하게 스스로 불을 지른다. 불타 버리는 것은 언제나 세계의 모든 정규군이 벌이는 전투의 최전선에 놓인 모든 건물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그런데 노예가 된 자들이 노예로 만든 자들에 맞서 벌이는 전쟁, 역사상 유일하게 정당한 전쟁에서는 이것이 결코 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코뮌은 불을 엄격히 방어 수단으로만 썼다. 코뮌은 오스만이 일부러 포격에 알맞도록 뚫어 놓은 길고 곧은 대로를 베르사유군에게 막으려고 불을 썼다. 베르사유군이 진격하면서 포탄을 쓴 것과 똑같이, 코뮌은 퇴각을 엄호하려고 불을 썼다. 그 포탄은 적어도 코뮌의 불만큼 많은 건물을 파괴했다. 어느 건물이 방어하는 쪽에 의해, 어느 건물이 공격하는 쪽에 의해 불탔는지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그리고 방어하는 쪽은 베르사유군이 이미 포로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기 시작한 뒤에야 비로소 불에 의지했다. — 게다가 코뮌은 훨씬 전에, 극단으로 몰리면 파리의 폐허 밑에 스스로를 묻고 파리를 제2의 모스크바로 만들겠다고 공개적으로 충분히 예고해 두었다. 국방정부가 — 다만 자기 반역을 가리는 외투로서 —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던 것처럼. 이 목적을 위해 트로쉬는 그들에게 석유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코뮌은 적들이 파리 인민의 목숨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지만 자기들 소유의 파리 건물들은 몹시 아낀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티에르는 복수에 가차 없으리라고 그들에게 예고해 두었다. 한쪽에서 자기 군대를 준비하고 다른 쪽에서 프로이센군이 덫을 닫자마자, 그는 선언했다. 「나는 무자비할 것이다! 속죄는 완전할 것이며 정의는 엄격할 것이다!」 파리 노동자들의 행위가 반달리즘이었다면, 그것은 절망 속의 방어의 반달리즘이지 승리의 반달리즘이 아니었다. 그리스도교도들이 이교 고대의 참으로 값을 매길 수 없는 예술 보물에 저지른 것 같은 승리의 반달리즘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반달리즘조차 역사가는 새로 일어나는 사회와 무너져 가는 낡은 사회 사이의 거인적 투쟁에 피할 수 없이 따르는, 비교적 사소한 부수물로 정당화해 왔다. 그것은 구경꾼의 파리를 만들려고 역사적 파리를 허물어 버린 오스만의 반달리즘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파리 대주교를 비롯한 인질 64명을 코뮌이 처형한 일은! 부르주아지와 그 군대는 1848년 6월, 전쟁 관행에서 오래전에 사라진 한 관습을 되살렸다. 무방비의 포로들을 총살하는 관습이다. 이 잔인한 관습은 그 뒤 유럽과 인도에서 모든 민중 봉기의 진압자들이 크든 작든 엄격히 지켜 왔다. 그것이 진정한 「문명의 진보」라는 것을 이렇게 증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프로이센군은 프랑스에서 인질을 잡는 관행을 되살렸다. 남의 행위에 대해 자기 목숨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죄 없는 사람들을. 우리가 본 대로 티에르가 충돌 초기부터 코뮌의 포로를 총살하는 인도적인 관행을 강행하자, 코뮌은 포로들의 목숨을 지키려고 인질을 잡는 프로이센의 관행에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베르사유 측이 끊임없이 포로를 총살함으로써 인질들의 목숨은 이미 거듭거듭 박탈된 셈이었다. 마크마옹의 근위병들이 파리 입성을 축하한 그 학살 뒤에 어떻게 그들을 더 살려 둘 수 있었겠는가? 부르주아 정부들의 파렴치한 흉포함에 대한 마지막 견제 — 인질 잡기 — 마저 한낱 허울로 만들어야 했단 말인가? 다르부아 대주교의 진짜 살인자는 티에르다. 코뮌은 대주교를, 그리고 덤으로 수많은 사제들까지, 당시 티에르의 손에 있던 블랑키 한 사람과 맞바꾸자고 거듭거듭 제안했다. 티에르는 완강히 거절했다. 블랑키를 내주면 코뮌에 두뇌를 주는 셈이고, 대주교는 시체의 모습으로 있을 때 자기 목적에 가장 잘 봉사하리라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티에르는 카베냐크의 선례를 따랐다. 1848년 6월 카베냐크와 그의 질서의 사나이들은 반도들을 아프르 대주교의 암살자라고 낙인찍으며 얼마나 공포의 비명을 질렀던가! 그들은 대주교가 질서의 병사들에게 총을 맞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현장에 있던 대주교의 총대리 자크메 씨가 직후에 그 취지의 증언을 그들에게 건넸던 것이다.
질서당이 피의 주연을 벌일 때마다 희생자들에 맞서 빠짐없이 일으키는 이 모든 중상의 합창이 증명하는 것은 오직, 오늘날의 부르주아가 자기를 옛 남작의 정당한 후계자로 여긴다는 것뿐이다. 옛 남작은 자기 손에 든 무기는 평민에 맞서 무엇이든 정당하다고 생각했지만, 평민의 손에 든 무기는 어떤 것이든 그 자체로 범죄였다.
외국 침략자의 비호 아래 벌인 내전으로 혁명을 깨뜨리려는 지배계급의 음모 — 우리가 바로 9월 4일부터 마크마옹의 근위병들이 생클루 문으로 들어올 때까지 추적해 온 음모 — 는 파리의 학살로 절정에 이르렀다. 비스마르크는 파리의 폐허를 바라보며 흐뭇해한다. 그는 그 폐허에서, 그가 아직 1849년 프로이센 샹브르 앵트루바블의 한낱 농촌 귀족이던 시절에 기도하던 대도시 전면 파괴의 첫 할부금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그는 파리 프롤레타리아의 시체를 바라보며 흐뭇해한다. 그에게 이것은 혁명의 절멸일 뿐 아니라, 이제 실제로, 그것도 프랑스 정부 자신에 의해 목이 잘린 프랑스의 소멸이다. 성공한 모든 정치가에게 특유한 얕은 생각으로 그는 이 엄청난 역사적 사건의 표면만 본다. 정복자가 피정복 정부의 헌병 노릇뿐 아니라 고용된 자객 노릇까지 함으로써 자기 승리에 영관을 씌우는 광경을 역사가 일찍이 보여 준 적이 있었던가? 프로이센과 파리 코뮌 사이에는 아무런 전쟁도 없었다. 오히려 코뮌은 강화 예비조약을 받아들였고, 프로이센은 중립을 선언했다. 그러므로 프로이센은 교전국이 아니었다. 프로이센은 자객 노릇을 했다. 아무런 위험도 무릅쓰지 않았으니 비겁한 자객이고, 파리가 함락되면 5억 프랑의 피 묻은 돈을 받기로 미리 약정했으니 고용된 자객이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전쟁의 참된 성격이 드러났다. 신앙 없고 방탕한 프랑스를 경건하고 도덕적인 독일이 징벌하도록 섭리가 정한 전쟁이라는! 그리고 낡은 세계의 법률가들이 이해하는 바로 보아도 유례없는 이 국제법 위반은, 「문명화된」 유럽 정부들로 하여금 페테르부르크 내각의 한낱 도구인 범죄적인 프로이센 정부를 국제 사회의 무법자로 선언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파리 둘레의 이중 포위망을 빠져나가는 몇 안 되는 희생자들을 베르사유의 사형집행인에게 넘겨주어야 하지 않을까 궁리하게 할 뿐이다!
근대의 가장 거대한 전쟁이 끝난 뒤 정복한 군대와 정복당한 군대가 프롤레타리아의 공동 학살을 위해 친교를 맺어야 한다는 것 — 이 유례없는 사건이 가리키는 것은 비스마르크가 생각하듯 솟아오르는 새 사회의 최종적 진압이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의 붕괴다. 낡은 사회가 아직 할 수 있는 최고의 영웅적 노력은 민족 전쟁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제 한낱 정부의 사기극, 계급투쟁을 미루려는 것이고 그 계급투쟁이 내전으로 터져 나오자마자 내던져질 사기극임이 증명되었다. 계급 지배는 더 이상 국민의 제복으로 자기를 가장할 수 없다. 각국 정부는 프롤레타리아에 맞서서는 하나다!
1871년 성령강림절 뒤로, 프랑스 노동자들과 그들의 생산물을 전유하는 자들 사이에는 평화도 휴전도 있을 수 없다. 용병들의 쇠주먹이 한동안 두 계급을 공동의 억압 아래 묶어 둘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싸움은 점점 더 커지는 규모로 거듭거듭 터져 나올 수밖에 없으며, 결국 누가 승리할지 — 전유하는 소수인지, 아니면 거대한 노동하는 다수인지 — 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고 프랑스 노동계급은 근대 프롤레타리아의 전위일 뿐이다.
유럽 정부들이 이처럼 파리 앞에서 계급 지배의 국제적 성격을 증언하는 동안, 그들은 국제노동자협회 — 자본의 세계주의적 음모에 맞선 노동의 국제적 대항 조직 — 를 이 모든 재앙의 원천이라고 헐뜯는다. 티에르는 협회가 노동의 해방자를 자처하는 노동의 전제자라고 규탄했다. 피카르는 프랑스의 인터내셔널 회원들과 외국 회원들 사이의 모든 연락을 끊으라고 명령했다. 1835년 티에르의 공범으로 이제 미라가 된 조베르 백작은 협회를 뿌리 뽑는 것이 모든 문명국 정부의 큰 문제라고 선언한다. 농촌 귀족들은 협회에 맞서 으르렁거리고, 유럽 언론 전체가 그 합창에 끼어든다. 우리 협회와 전혀 무관한 한 존경할 만한 프랑스 저술가는 이렇게 말한다. 「국민방위군 중앙위원회 위원들, 그리고 코뮌 의원의 대부분은 국제노동자협회에서 가장 활동적이고 총명하며 정력적인 사람들이다. …… 철저히 정직하고 성실하며, 총명하고 헌신적이며, 순수하고, 좋은 의미에서 광신적인 사람들이다.」 경찰 물이 든 부르주아의 머리는 당연히 국제노동자협회를 비밀 음모 단체처럼 움직이며, 그 중앙 기관이 이따금 여러 나라에서 폭발을 명령하는 것으로 상상한다. 사실 우리 협회는 문명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가장 앞선 노동자들 사이의 국제적 유대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서든, 어떤 모습으로든, 어떤 조건 아래서든 계급투쟁이 조금이라도 단단한 형태를 띠면, 우리 협회의 회원들이 그 맨 앞에 서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협회가 자라나는 토양은 근대 사회 그 자체다. 협회는 아무리 많은 학살로도 짓밟아 없앨 수 없다. 협회를 짓밟아 없애려면 정부들은 노동에 대한 자본의 전제 — 그들 자신의 기생적 존재의 조건 — 를 짓밟아 없애야 할 것이다.
코뮌과 함께한 노동자의 파리는 새 사회의 영광스러운 선구자로 영원히 기려질 것이다. 그 순교자들은 노동계급의 위대한 가슴 속에 모셔져 있다. 그 학살자들을 역사는 이미 영원한 치욕의 기둥에 못 박아 놓았으며, 그들의 사제들이 아무리 기도해도 그들을 거기서 구해 내지 못할 것이다.
총평의회.
M. T. 분, 프레드 브래드닉, G. H. 버터리, 케이힐, 윌리엄 헤일스, 콜프, 프리드리히 레스너, 조지 밀너, 토머스 모터스헤드, 찰스 머리, 펜더, 로치, 륄, 새들러, 코웰 스테프니, 앨프리드 테일러, 윌리엄 타운센드.
통신 서기.
외젠 뒤퐁, 프랑스 담당
카를 마르크스, 독일·네덜란드 담당
프리드리히 엥겔스, 벨기에·에스파냐 담당
헤르만 융, 스위스 담당
P. 조바키니, 이탈리아 담당
제비 모리스, 헝가리 담당
안톤 자비츠키, 폴란드 담당
제임스 코언, 덴마크 담당
J. G. 에카리우스, 미국 담당
의장 헤르만 융
회계 존 웨스턴, 재정 서기 조지 해리스
총서기 존 헤일스
사무소 — 런던 W.C. 하이홀본 256번지, 1871년 5월 30일.
부록 주석
I
「포로 대열은 위리크 거리에서 멈추어, 차도를 바라보는 보도 위에 네댓 줄로 늘어섰다. 갈리페 후작 장군과 그의 참모들은 말에서 내려 대열 왼쪽부터 검열을 시작했다. 장군은 천천히 걸어 내려가며 대열을 훑어보다가 여기저기서 걸음을 멈추고, 어떤 사람의 어깨를 두드리거나 뒷줄에 있는 사람에게 나오라고 손짓했다. 대개는 더 이상 말 한마디 없이, 그렇게 골라낸 사람이 길 한가운데로 끌려 나갔고, 거기에 곧 작은 별도 대열이 이루어졌다. …… 착오가 일어날 여지가 상당히 많았던 것은 분명하다. 말을 탄 장교 하나가 갈리페 장군에게 어떤 특별한 죄를 지었다며 남자 하나와 여자 하나를 가리켰다. 여자는 대열에서 뛰쳐나와 무릎을 꿇고 두 팔을 내뻗으며 격정적인 말로 자기의 결백을 호소했다. 장군은 말이 끊기기를 기다렸다가, 더없이 무감각한 얼굴과 흔들림 없는 태도로 말했다. ‘부인, 나는 파리의 극장이란 극장은 다 가 보았소. 당신의 연기는 내게 아무 효과도 없을 것이오(ce n’est pas la peine de jouer la comédie).’ …… 그날은 이웃보다 눈에 띄게 키가 크거나, 더럽거나, 깨끗하거나, 늙었거나, 못생긴 것이 좋은 일이 아니었다. 특히 한 사람은 코가 부러져 있었던 탓에 이 세상의 괴로움에서 서둘러 풀려나게 된 것 같다는 인상을 내게 주었다. …… 이렇게 해서 백 명이 넘게 골라지자 총살 분대가 배정되었고, 대열은 그들을 남겨 둔 채 다시 행진을 시작했다. 몇 분 뒤 우리 뒤에서 산발적인 총성이 시작되어 15분 넘게 이어졌다. 즉결로 유죄 판결을 받은 이 불쌍한 사람들의 처형이었다.」 — 『데일리 뉴스』 파리 통신원, 6월 8일. — 이 갈리페, 「제2제정의 주연에서 부끄러움 없는 노출로 악명 높던 아내 덕에 먹고사는 자」는 전쟁 중에 프랑스의 「피스톨 기수」라는 이름으로 통했다.
「신중한 신문이며 선정적인 데 기울지 않는 『르 탕』은 총살이 제대로 되지 않아 숨이 끊어지기 전에 묻힌 사람들의 끔찍한 이야기를 전한다. 많은 사람이 생자크라부슈리 성당 둘레의 광장에 묻혔는데, 그 가운데 일부는 아주 얕게 묻혔다. 낮에는 번잡한 거리의 소음 때문에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밤의 정적 속에서 근처 집의 주민들은 멀리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잠을 깼고, 아침에는 꽉 쥔 손 하나가 흙 밖으로 삐져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결과 발굴이 명령되었다. …… 많은 부상자가 산 채로 묻혔다는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보증할 수 있는 사례가 하나 있다. 지난달 24일 브뤼넬이 방돔 광장의 한 집 안마당에서 정부(情婦)와 함께 총살되었을 때, 시체들은 27일 오후까지 거기 놓여 있었다. 매장반이 시체를 치우러 왔을 때 그들은 여자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 구급소로 옮겼다. 그녀는 총알 네 발을 맞았지만 지금은 위험을 벗어났다.」 — 『이브닝 스탠더드』 파리 통신원, 6월 8일.
II
6월 13일 『타임스』에 다음 편지가 실렸다.
「『타임스』 편집인 귀하.
「1871년 6월 6일 쥘 파브르 씨는 모든 유럽 열강에 회람을 보내 국제노동자협회를 몰아내라고 촉구했습니다. 그 문서의 성격을 밝히는 데는 몇 마디면 충분할 것입니다.
「우리 규약의 서문에는 인터내셔널이 ‘1864년 9월 28일 런던 롱에이커의 세인트마틴스 홀에서 열린 공개 집회에서’ 창립되었다고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쥘 파브르는 자기 나름의 목적으로 협회의 기원을 1862년 이전으로 끌어올립니다.
「우리의 원칙을 설명한다면서 그는 ‘그들(인터내셔널)의 1869년 3월 25일자 전단’을 인용한다고 공언합니다. 그런데 그가 인용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터내셔널이 아닌 어떤 단체의 전단입니다. 이런 술책은 그가 아직 비교적 젊은 변호사이던 시절, 카베에게 명예훼손으로 고소당한 『나시오날』 신문을 변호해야 했을 때 이미 썼던 것입니다. 그때 그는 카베의 소책자에서 발췌문을 읽는 척하면서 실은 자기가 끼워 넣은 문장을 읽었습니다. 이 속임수는 공판 도중에 들통났고, 카베의 관용이 없었다면 쥘 파브르는 파리 변호사회에서 제명되는 벌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가 인터내셔널의 문서라고 인용한 모든 문서 가운데 인터내셔널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컨대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1869년 7월 런던에서 구성된 총평의회는 동맹이 무신론을 표방한다고 말한다.’ 총평의회는 그런 문서를 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총평의회는 쥘 파브르가 인용한 제네바의 ‘동맹’ — 사회민주주의동맹(L’Alliance de la Démocratie Socialiste) — 의 원래 규약을 무효로 하는 문서를 냈습니다.
「일부는 제정도 겨냥한다고 자처하는 그 회람 전체에 걸쳐, 쥘 파브르는 인터내셔널에 맞서 제정의 검사들이 꾸며 낸 경찰의 날조만을 되풀이합니다. 그 날조는 그 제정의 법정에서조차 비참하게 무너진 것입니다.
「알려진 대로 인터내셔널 총평의회는 지난 전쟁에 관한 두 담화(지난해 7월과 9월)에서 프랑스를 겨냥한 프로이센의 정복 계획을 규탄했습니다. 그 뒤 쥘 파브르의 개인 비서 라이틀링거 씨는 총평의회 위원 몇 사람에게 국방정부를 지지하고 비스마르크에 반대하는 시위를 총평의회가 조직해 달라고 — 물론 헛되이 — 요청했습니다. 그들은 공화국은 입에 올리지 말아 달라는 특별한 부탁까지 받았습니다. 쥘 파브르가 런던에 오리라 예상하고 시위를 준비하는 일은 — 분명 더없이 좋은 뜻에서였겠지만 — 총평의회의 뜻을 거슬러 이루어졌습니다. 총평의회는 9월 9일의 담화에서 쥘 파브르와 그 동료들에 대해 파리 노동자들에게 분명히 경고했던 것입니다.
「이번에는 인터내셔널이 쥘 파브르에 관한 회람을 유럽의 모든 내각에 보내, 고(故) 밀리에르 씨가 파리에서 공개한 문서들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한다면, 쥘 파브르는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귀하의 충실한 종,
「존 헤일스,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 서기.
「W.C. 하이홀본 256번지, 6월 12일.」
「국제 협회와 그 목적」이라는 기사에서, 그 경건한 밀고자 런던 『스펙테이터』(6월 24일)는 다른 비슷한 속임수와 함께, 위의 「동맹」 문서를 쥘 파브르보다 더 자세히 인터내셔널의 작품으로 인용한다. 그것도 『타임스』에 반박문이 실린 지 열하루 뒤에. 우리는 이에 놀라지 않는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모든 예수회원 가운데 가장 나쁜 것은 프로테스탄트 예수회원이라고 말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