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실무가」로 보였던 사람
1941년 6월 22일 새벽, 주코프가 독일 침공을 알렸을 때 스탈린은 창백한 얼굴로 빈 파이프를 쥐고 있었다. 몰로토프가 선전포고를 전하자 그는 말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 길고 무거운 침묵.
1917년에는 조연이었고 1924년에는 위험해 보이지 않는 서기장이었다. 그 「실무」, 곧 인사권이 권력의 본체임을 라이벌들은 너무 늦게 알았다. 집단화와 공업화, 대숙청과 굴라크, 그리고 전쟁의 승리가 모두 한 장부에 적혀 있다. 1953년 뇌일혈로 쓰러졌을 때, 곁의 누구도 감히 먼저 의사를 부르지 못했다.
경력 연표
- 1902–17지하활동, 체포·유형을 거듭하다 1917년 프라우다로
- 1913논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발표
- 1917–22민족인민위원, 내전기 차리친 전선
- 1922서기장 취임, 인사권 장악
- 1924강연집 《레닌주의의 기초》 출간
- 1928–33대전환, 집단화·5개년 계획
- 1936–38대숙청
- 1941–45국가방위위원회 의장·최고사령관
- 1945–53전후 재건과 냉전, 1953년 3월 사망
- 1952《소련 사회주의의 경제문제》 출간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캅카스 조직가캅카스에서 파업과 전투대를 조직했고, 1905년 말 탐메르포르스 당협의회에서 레닌을 처음 만났다.
- 1917.02–072월 혁명프라우다 편집자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와 프라우다 편집에 참여했고, 4월 당협의회를 거치며 레닌의 노선으로 옮겨 갔다.
- 1917.10–1918.0110월 혁명민족 인민위원중앙위원으로 봉기 결의에 참여했고, 초대 민족 인민위원으로 민족들의 권리 선언 작업을 맡았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전선 정치위원차리친 방어와 남서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이 시기 군사 지도부와 빚은 갈등은 이후 당내 대립의 씨앗이 되었다.
- 1919–19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남서전선군 정치위원 · 기병군 전용 명령 부서 거부
- 1922.12소련의 결성민족인민위원자치화안을 기초했고, 레닌의 비판 뒤 연방안을 수용해 제1차 대회에서 결성 보고를 맡았다.
- 1921–1928신경제정책(네프)당 서기장당 기구를 이끌며 부하린과 함께 네프 노선을 방어하다가, 1928년 곡물 위기에서 비상조치로 돌아섰다.
- 1923–1927레닌 사후 권력투쟁과 좌익 반대파유언이 겨냥한 서기장, 레닌의 의료 감독자1922년 4월 서기장 선출, 12월 18일 중앙위 결정으로 레닌 의료 감독 맡음. 12월 22일 크룹스카야에 대한 전화 폭언이 레닌의 '관계 단절' 서한과 유언 추신을 촉발했다.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대전환의 지도자집단화와 초고속 공업화 노선을 최종 결정하고 두 차례의 5개년 계획 전 과정을 지휘했다.
- 1932–1933홀로도모르와 집단화 기근소련 공산당 서기장, 강제 집단화와 곡물 공출의 최종 결정권자1929년 11월 「대전환의 해」로 네프를 폐기했으며, 1932~1933년 공출 할당량 유지와 국경 봉쇄를 직접 지시했다.
- 1934.01–071934년 2월 6일 파시스트 폭동노선 전환의 최종 결재자프랑스 지부가 먼저 움직인 뒤에야 노선 변경을 재가했다. 독일에 맞선 프랑스와의 동맹이라는 소련 외교의 필요가 그 재가에 얹혀 있었다.
- 1934–1938프랑스 인민전선과 1936년 총파업프랑스-소련 조약과 국방 승인 선언1935년 5월 「프랑스의 국방 노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승인한다」는 선언으로 프랑스공산당의 반군국주의 노선을 하루아침에 뒤집었다.
- 1936–1939스페인 내전개입을 결정한 소련 지도자1936년 9월 말 정치국의 무기 지원 결정을 주재했고, 공화국 정부에 혁명의 속도를 늦추라고 권고했다
- 1937–1938대숙청최고 결정권자대규모 탄압 정책과 NKVD 작전의 최종 정치적 권위를 행사했다.
- 1938–1941소련-일본 국경 전쟁과 중립조약소련 최고지도자1937년 류시코프를 극동으로 파견하기 전 15분간 직접 면담해 임무를 부여했다. 류시코프의 망명은 후일 예조프 해임의 주요 명분이 된 대형 정보 실패였다.
- 1939.11–1940.03겨울전쟁개전을 결정한 지도자핀란드가 요구를 거부하자 짧고 손쉬운 전쟁을 예상하고 침공을 승인했다. 예상이 빗나가자 지휘 방식과 책임자를 갈아치웠다.
- 1941–1945대조국전쟁최고사령관국가방위위원회 의장이자 최고사령관으로 전쟁 지도부 전체를 총괄했다.
- 1941–1944제2전선과 노르망디 상륙소련 지도자1941년 독일 침공 직전 소련의 외교·군사적 대응을 결정했고, 침공 뒤 서부 전선 개방을 요구했다.
- 1945.02–08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두 회담 모두에 앉은 유일한 정상으로, 협상의 최대 수혜자였다.
- 1945.08소련의 대일 참전과 만주 작전얄타 밀약의 소련 측 서명자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일 참전 조건을 담은 비밀의정서에 서명했다. 독일 항복 2-3개월 후 참전, 남사할린·쿠릴열도·여순항 조차권을 확약했다.
- 1947–1948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원조 거부 결정동유럽 국가들이 마셜 원조를 받는 것을 막고 진영 분리를 택했다.
- 1948–1955티토-스탈린 결별압박을 주도한 소련 지도자서한과 봉쇄로 굴복을 요구했으나 실패했다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최종 승인자전후 권력투쟁 속에서 레닌그라드 숙청을 최종적으로 승인했다.
- 1943–1949소련 원자폭탄 개발최우선 과제로 지정히로시마 직후 사업에 국가의 자원을 무제한 투입하도록 결정했다.
- 1952–1953의사들의 음모배후 지도말기의 반유대 캠페인과 음모 조작을 배후에서 이끌었다.
- 1950–1953한국전쟁개전을 승인한 지도자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 보고 승인했으나, 소련군의 직접 참전은 끝까지 배제했다.
- 1955바르샤바 조약 기구 창설소련 공산당 서기장, 1945–1953스탈린은 1949년 나토에 맞대응하지 않았다. 2차대전 이후 구축한 동유럽 양자조약 체계로 충분했고, 위성국이 동반자 지위를 주장할 틀을 신뢰하지 않았다.
- 1956.02제20차 당대회와 비밀연설비판의 대상대량 탄압과 전쟁 초기 실책의 책임자로 지목됐고, 1961년 레닌묘에서 옮겨졌다.
- 1961베를린 장벽 건설소련 지도자, 전후 독일 분할의 설계자스탈린은 얄타·포츠담 회의에서 독일 분할 점령을 확정하고 소련 지구에서 강제적 공산화와 배상금 추출을 지휘했다.
1929년 「대전환」 — 그가 세계를 바꾼 1년
1929년 11월, 스탈린은 『프라우다』에 「대전환의 해」라는 논설을 실었다. 제목은 과장이 아니었다. 바로 그해에 소련의 진로를 결정한 모든 결정이 내려졌다.
네프는 폐기되었다. 부하린의 '완만한 성장' 노선은 '우익 편향'으로 낙인찍혔다. 집단화가 전면적으로 개시되었고, 첫 5개년 계획의 목표치는 두 배로 상향 조정되었다. 스탈린은 「낙후된 자는 매를 맞는다」는 논리로 10년 안에 100년의 격차를 메우겠다고 선언했다.
1929년은 또한 스탈린이 50세가 되는 해였다: 권력의 절정에 선 그가 자신의 전기를 다시 쓰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이전까지 '당의 실무자'였던 그가 이제 혁명의 공동 창시자로 격상되고, 내전의 영웅담이 덧입혀졌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1933년까지 2,400만 개인농이 20만 콜호즈로 통합되었다. 곡물 공출은 기근을 불렀다. 공업 총생산은 급등했고 굴라크 인구도 폭발했다. '대전환'은 소련을 산업 강국으로 만들었지만, 그 대가는 수백만 목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