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루지야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당과 국가를 장악한 지도자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30분, 주코프가 독일 침공을 알리러 크렘린에 왔다. 주코프의 회고에 따르면 스탈린은 창백한 얼굴로 빈 담배 파이프를 쥐고 있었다. 몰로토프가 독일의 선전포고를 전하자 그는 말없이 의자에 주저앉아 길게 침묵했다.
1878년 12월 18일(구력 12월 6일) 그루지야 고리에서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다. 청년기에 마르크스주의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들어가 『프라우다』를 편집했고, 강탈과 납치로 볼셰비키 자금을 조달하며 체포와 국내 유형을 거듭했다. 1917년 10월 혁명 뒤 정치국에 들어가 1922년 소련 성립을 함께 이끌었고, 같은 해 서기장에 올랐다. 이후 집단화와 급속한 공업화, 1932∼33년 기근과 대숙청, 제2차 세계대전의 승리를 거쳤다. 1953년 3월 5일 쿤체보 다차에서 사망했다. 일생 동안에는 1879년 출생으로도 여겨졌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22– 정치·당 지도 · 소련 · 당 최고 지도자
경력 연표
- 1902–17지하활동, 체포·유형을 거듭하다 1917년 프라우다로
- 1913논문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발표
- 1917–22민족인민위원, 내전기 차리친 전선
- 1922서기장 취임, 인사권 장악
- 1924강연집 《레닌주의의 기초》 출간
- 1928–33대전환, 집단화·5개년 계획
- 1936–38대숙청
- 1941–45국가방위위원회 의장·최고사령관
- 1945–53전후 재건과 냉전, 1953년 3월 사망
- 1952《소련 사회주의의 경제문제》 출간
소련 정치국
- 1917.10 봉기 정치국
- 정위원 1919.03–1953.03
1953.03 재임 중 사망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캅카스 조직가캅카스에서 파업과 전투대를 조직했고, 1905년 말 탐메르포르스 당협의회에서 레닌을 처음 만났다.
- 1917.02–072월 혁명프라우다 편집자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와 프라우다 편집에 참여했고, 4월 당협의회를 거치며 레닌의 노선으로 옮겨 갔다.
- 1917.10–1918.0110월 혁명민족 인민위원중앙위원으로 봉기 결의에 참여했고, 초대 민족 인민위원으로 민족들의 권리 선언 작업을 맡았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전선 정치위원차리친 방어와 남서전선에서 정치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이 시기 군사 지도부와 빚은 갈등은 이후 당내 대립의 씨앗이 되었다.
- 1919–19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남서전선군 정치위원 · 기병군 전용 명령 부서 거부남서전선군 정치위원으로 리보프 공략을 우선해 8월 제1기병군을 서부전선으로 넘기라는 총사령부 명령의 부서를 거부했고, 이 일은 투하쳅스키와의 오랜 반목의 뿌리가 되었다.
- 1922.12소련의 결성민족인민위원자치화안을 기초했고, 레닌의 비판 뒤 연방안을 수용해 제1차 대회에서 결성 보고를 맡았다.
- 1921–1928신경제정책(네프)당 서기장당 기구를 이끌며 부하린과 함께 네프 노선을 방어하다가, 1928년 곡물 위기에서 비상조치로 돌아섰다.
- 1924–1927제1차 국공합작과 북벌, 1927년의 파국합작 유지를 지시한 소련 지도자장제스를 「레몬처럼 짜낸다」고 했고 우한 붕괴 뒤 봉기 노선으로 급선회했다.
- 1923–1927레닌 사후 권력투쟁과 좌익 반대파유언이 겨냥한 서기장, 레닌의 의료 감독자1922년 4월 서기장 선출, 12월 18일 중앙위 결정으로 레닌 의료 감독 맡음. 12월 22일 크룹스카야에 대한 전화 폭언이 레닌의 '관계 단절' 서한과 유언 추신을 촉발했다.
- 1928–1937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대전환의 지도자집단화와 초고속 공업화 노선을 최종 결정하고 두 차례의 5개년 계획 전 과정을 지휘했다.
- 1932–1933홀로도모르와 집단화 기근소련 공산당 서기장, 강제 집단화와 곡물 공출의 최종 결정권자1929년 11월 「대전환의 해」로 네프를 폐기했으며, 1932~1933년 공출 할당량 유지와 국경 봉쇄를 직접 지시했다.
- 1934.01–071934년 2월 6일 파시스트 폭동노선 전환의 최종 결재자프랑스 지부가 먼저 움직인 뒤에야 노선 변경을 재가했다. 독일에 맞선 프랑스와의 동맹이라는 소련 외교의 필요가 그 재가에 얹혀 있었다.
- 1934–1938프랑스 인민전선과 1936년 총파업프랑스-소련 조약과 국방 승인 선언1935년 5월 「프랑스의 국방 노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승인한다」는 선언으로 프랑스공산당의 반군국주의 노선을 하루아침에 뒤집었다.
- 1936–1939스페인 내전개입을 결정한 소련 지도자1936년 9월 말 정치국의 무기 지원 결정을 주재했고, 공화국 정부에 혁명의 속도를 늦추라고 권고했다
- 1937–1938대숙청최고 결정권자대규모 탄압 정책과 NKVD 작전의 최종 정치적 권위를 행사했다.
- 1938–1941소련-일본 국경 전쟁과 중립조약소련 최고지도자1937년 류시코프를 극동으로 파견하기 전 15분간 직접 면담해 임무를 부여했다. 류시코프의 망명은 후일 예조프 해임의 주요 명분이 된 대형 정보 실패였다.
- 1939.11–1940.03겨울전쟁개전을 결정한 지도자핀란드가 요구를 거부하자 짧고 손쉬운 전쟁을 예상하고 침공을 승인했다. 예상이 빗나가자 지휘 방식과 책임자를 갈아치웠다.
- 1941–1945대조국전쟁최고사령관국가방위위원회 의장이자 최고사령관으로 전쟁 지도부 전체를 총괄했다.
- 1941–1944제2전선과 노르망디 상륙소련 지도자1941년 독일 침공 직전 소련의 외교·군사적 대응을 결정했고, 침공 뒤 서부 전선 개방을 요구했다.
- 1944.08–10바르샤바 봉기소련 지도자1939년 8월 독일과 비밀 의정서를 체결해 폴란드의 분할 조건을 정했다.
- 1945.02–08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두 회담 모두에 앉은 유일한 정상으로, 협상의 최대 수혜자였다.
- 1945.08소련의 대일 참전과 만주 작전얄타 밀약의 소련 측 서명자얄타회담에서 소련의 대일 참전 조건을 담은 비밀의정서에 서명했다. 독일 항복 2-3개월 후 참전, 남사할린·쿠릴열도·여순항 조차권을 확약했다.
- 1944–1949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소련 지도자1944년 처칠과 백분율 협정을 나누었고, 1946년 9월 불가리아 대표단에게 소비에트 형태를 거치지 않는 길을 말했으며, 1947년 코민포름 창설과 1948년 유고슬라비아 제명을 지시했다.
- 1944–1948폴란드: 루블린 위원회에서 통일노동자당까지소련 지도자1944년 루블린 위원회를 후원했고, 1945년 얄타에서 정부 재조직에 합의했으며, 1948년 3월 치란키에비치와 통합을 협의했다. 고무우카에 대한 비판은 코민포름의 유고슬라비아 제명 뒤 시작되었다.
- 1944–1948루마니아: 8월 23일에서 인민공화국까지소련 지도자1944년 10월 처칠과 루마니아를 90 대 10으로 적었고, 1945년 3월 비신스키를 통해 그로자 정부를 세운 뒤 북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 행정 복귀를 허가했다.
- 1944–1949불가리아: 조국전선에서 코스토프 재판까지소련 지도자1944년 9월 선전포고를 결정했고, 1946년 9월 불가리아 대표단에게 소비에트 형태를 거치지 않는 길을 말했으며, 1948년 2월 모스크바에서 디미트로프의 연방 외교를 질책했다.
- 1944–1949헝가리: 소농당의 승리에서 러이크 재판까지소련 지도자1945년 헝가리에 연립정부와 선거를 허용했고, 1947년 코바치 체포와 너지 페렌츠 사임 요구, 1949년 러이크 재판 준비를 승인했다.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코시체 강령에서 2월 사건까지소련 지도자마셜 플랜 참여를 막고 고트발트에게 권력 장악을 지시했다.
- 1947–1948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원조 거부 결정동유럽 국가들이 마셜 원조를 받는 것을 막고 진영 분리를 택했다.
- 1948–1955티토-스탈린 결별압박을 주도한 소련 지도자서한과 봉쇄로 굴복을 요구했으나 실패했다
- 1945–1949국공내전1945년 국민정부와 조약, 신중한 조언장제스를 승인하고 마오에게 협상을 권했으며 만주에서는 공산당을 도왔다.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최종 승인자전후 권력투쟁 속에서 레닌그라드 숙청을 최종적으로 승인했다.
- 1943–1949소련 원자폭탄 개발최우선 과제로 지정히로시마 직후 사업에 국가의 자원을 무제한 투입하도록 결정했다.
- 1952–1953의사들의 음모배후 지도말기의 반유대 캠페인과 음모 조작을 배후에서 이끌었다.
- 1950–1953한국전쟁개전을 승인한 지도자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 보고 승인했으나, 소련군의 직접 참전은 끝까지 배제했다.
- 1949–1956신민주주의에서 사회주의 개조로1950년 조약의 소련 측 당사자마오를 두 달간 기다리게 한 뒤 동맹과 차관에 동의했다.
- 1955바르샤바 조약 기구 창설소련 공산당 서기장, 1945–1953스탈린은 1949년 NATO에 맞대응하지 않았다. 2차대전 이후 구축한 동유럽 양자조약 체계로 충분했고, 위성국이 동반자 지위를 주장할 틀을 신뢰하지 않았다.
- 1956.02제20차 당대회와 비밀연설비판의 대상대량 탄압과 전쟁 초기 실책의 책임자로 지목됐고, 1961년 레닌묘에서 옮겨졌다.
- 1961베를린 장벽 건설소련 지도자, 전후 독일 분할의 설계자스탈린은 얄타·포츠담 회의에서 독일 분할 점령을 확정하고 소련 지구에서 강제적 공산화와 배상금 추출을 지휘했다.
1929년 「대전환」 — 그가 세계를 바꾼 1년
1929년 11월, 스탈린은 『프라우다』에 「대전환의 해」라는 논설을 실었다. 제목은 과장이 아니었다. 바로 그해에 소련의 진로를 결정한 모든 결정이 내려졌다.
네프는 폐기되었다. 부하린의 '완만한 성장' 노선은 '우익 편향'으로 낙인찍혔다. 집단화가 전면적으로 개시되었고, 첫 5개년 계획의 목표치는 두 배로 상향 조정되었다. 스탈린은 「낙후된 자는 매를 맞는다」는 논리로 10년 안에 100년의 격차를 메우겠다고 선언했다.
1929년은 또한 스탈린이 50세가 되는 해였다: 권력의 절정에 선 그가 자신의 전기를 다시 쓰기 시작한 해이기도 하다. 이전까지 '당의 실무자'였던 그가 이제 혁명의 공동 창시자로 격상되고, 내전의 영웅담이 덧입혀졌다.
그 결과는 엄청났다. 1933년까지 2,400만 개인농이 20만 콜호즈로 통합되었다. 곡물 공출은 기근을 불렀다. 공업 총생산은 급등했고 굴라크 인구도 폭발했다. '대전환'은 소련을 산업 강국으로 만들었지만, 그 대가는 수백만 목숨이었다.
1936∼38년 대숙청
1934년 12월 세르게이 키로프가 레오니트 니콜라예프에게 암살된 사건은 대숙청의 기점으로 여겨진다. 자백의 진위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으나 키로프의 죽음이 스탈린이 숙청을 결심한 기폭제였다는 데에는 대체로 합의가 있다. 스탈린은 1936년 8월, 1937년 1월, 1938년 3월 세 차례 모스크바 공개 재판을 열어 옛 당 지도부를 겨눴다. 이들은 파시스트·자본주의 열강과 결탁해 스탈린을 암살하고 소련을 분열시키려 했다는 혐의를 받았으나 역사가들은 근거를 찾지 못했고, 고문과 심리 압박으로 얻은 자백이 유죄로 이어졌다. 1937년 듀이 위원회는 재판을 날조로 규정했고, 트로츠키는 궐석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탄압은 초법적 대량 기구로 수행되었다. 1937년 7월 2일 스탈린은 지역 당·엔카베데 지도부에 체포·처형·수용 대상 수를 산정하라는 극비 지령을 내렸고, 7월 30일 엔카베데 제00447호 명령은 옛 쿨라크와 '반소련 요소'를 삼인 재판정의 초법적 처형이나 수용소행 대상으로 지정했다. 제정 관료와 백군 장교, 농민 반란 참가자, 성직자, 선거권 박탈자, 비볼셰비키 정당 출신도 대상이었다. 밀고나 이미 체포된 사람과의 면식만으로 임의 체포가 이루어졌고 기술자·농민·철도 노동자도 사보타주 혐의로 휩쓸렸다. 할당량을 채우려 시장과 역에서 사람을 끌어모아 자백을 강요했고, 피고인 없이 판결하는 삼인 재판정은 반나절에 수백 건을 처리했다. 최대 단일 작전인 1937∼38년 '쿨라크 작전'은 체포 669,929건, 처형 376,202건을 냈고, 폴란드인 대상 작전은 체포 143,810건, 처형 111,091건을 기록했다.
적군과 해군도 숙청되어 원수 5명 중 3명, 군단장급 15명 중 13명, 해군 제독 9명 중 8명, 군단 사령관 57명 중 50명, 사단장 186명 중 154명이 제거되었다. 한때 장교의 25∼50%가 숙청되었다는 견해가 퍼졌으나 실제 비율은 3.7∼7.7%로 추정되고 1939년까지 숙청 장교의 약 30%가 복무로 복귀했다. 적군 숙청이 독일이 위조한 문서에 근거했다는 주장은 사실로 뒷받침되지 않는다.
책임은 스탈린 개인에게만 환원되지 않는다. 작전들은 당의 총노선에 따라 그가 이끄는 정치국의 직접 명령으로 수행되었고 사형 집행 여부는 그가 결정했다. 그는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를 살려주겠다는 정치국의 약속을 깨고 처형했으며 그 가족들도 총살했다.
공식 통계는 1937∼38년 처형 681,692건과 굴라크 사망 약 11만 6천 건을 기록한다. 대숙청 전체 사망자는 70만∼120만 명으로 추정된다. 처형은 주로 야간에 감옥과 엔카베데 지하실, 외딴 숲에서 총으로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1938년 스탈린은 대량 처형을 비판하며 입장을 바꾸었다. 예조프는 1938년 여름 수장직에서 해임되어 처형되었고 베리야가 뒤를 이었다. 1938년 11월 17일 인민위원회와 중앙위원회의 공동 결정과 베리야가 서명한 엔카베데 명령은 대부분의 탄압 명령을 취소하고 사형 집행을 중단시켰다. 1956년 2월 25일 흐루쇼프의 '비밀 연설'은 숙청을 스탈린의 '권력 남용'으로 규정하며 제17차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후보위원 139명 중 98명(70%)이 체포되어 총살되었다고 밝혔다. 복권은 1954년 시작되어 투하쳅스키 등은 1957년에, 부하린 등은 1988년에야 복권되었고 트로츠키는 끝내 복권되지 않았다.